• 노무현 따르겠다더니… 반대로만 가는 이재명 [서승욱 논설위원이 간다]

    서승욱 논설위원   봉하마을서 돌아본 진영·지역대결    그곳엔 봄기운이 완연했다. 주말인 지난 11일 자동차로 다섯 시간을 달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주차 공간이 꽉 찰 정도로 방문객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잠든 묘역에도, 마지막 순간에 올랐던 봉화산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퇴임 후 마지막 순간까지 생활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집'을 문화해설사와 함께 돌아보려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손녀를 태우고 논길을 누볐던 고인의 자전거, 919권의 애독서가 서가를 채운 서재 겸 집무 공간, 손자의 그림 낙서가 벽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랑채를 둘러보며 생전의 그를 떠올렸다. '깨어있는 시민 문화체험전시관'이란 이름이 붙은 노무현기념관에선 한 장면 한 장면이 드라마처럼 파란만장했던 인생·정치 역정과 마주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2월 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을 방문,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계승하겠다는 이재명  정부가 내놓은 징용 해법을 둘러싼 국민 여론이 극단으로 갈리고, 정치권의 갈등이 폭발하는 국면에서 봉하마을을 찾은 건 여야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떠올라서다. 검찰의 칼날이 자신을 조여 오는 결정적 순간마다 이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새해 첫날부터 봉하마을을 찾았고, 같은 달 10일 성남 FC 후원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첫 출석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내란 세력들로부터 내란음모죄라는 없는 죄를 뒤집어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논두렁 시계 등의 모략으로 고통을 당했다. 이분들이 당한 일이 사법 리스크였느냐. 그것은 사법 리스크가 아니라 검찰 리스크였고 검찰 쿠데타였다"고 주장했다. (※기자의 봉하마을 방문 뒤 불거진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 회고록 논란엔 "검사왕국이 되자 부정한 정치검사가 낯부끄러운 줄 모르고 고개를 내민다"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2월엔 노 전 대통령 묘역을 부여잡고 흐느끼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꿈은 노무현의 꿈이었고, 문재인의 꿈이고, 저 이재명의 영원한 꿈"이라며 노 전 대통령의 계승자임을 호소했다.   지난 11일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생활했던 집 곳곳을 둘러보고 있다. 서승욱 논설위원 지역구도 개혁안 제시한 노무현    과연 이재명의 정치 궤적은 그의 말처럼 노무현의 정치 궤적과 닿아있는가, 이재명은 노무현의 무엇을 계승하겠다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기자의 봉하행을 재촉했다.    "그때 노무현 청와대에 출입했다면서 그것을 왜 기억 못 하냐. 취재를 대충했구먼. 대통령에 취임한 뒤 가장 먼저 무엇을 하러 했느냐. 한 달 뒤 국회 연설에서 무슨 주장을 했는지 찾아보라."  봉하마을 방문 나흘 전 사석에서 만난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노무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서 이런 핀잔을 들었다. 과거 기사를 찾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노 전 대통령은 취임 한 달여 만인 2003년 4월 2일 첫 국회 연설에서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정치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하지 않도록 선거법을 개정해 달라"며 "이런 제안이 현실화되면 (2004년) 17대 총선의 과반수 정당이나 정치연합에 '내각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했다. '중대선거구제+권역별 비례대표제' 또는 '소선거구제+권역별 비례대표 확대'가 그의 복안이었다.     위기를 대하는 판이한 방식      지역주의 극복은 그의 정치 인생을 관통한 키워드이자 필생의 어젠다였다. '바보 노무현'이란 명예로운 별명도, 돌풍이 태풍으로 번지면서 이뤄낸 대선 승리도 험지 부산에서의 3번을 포함한 모두 4번의 낙선이 만든 역설이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이 압권이었다. 1998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던 정치 1번지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또 부산으로 내려갔고, 또 떨어졌다.   훗날 그는 이 '무모한 도전'에 대해 "떨어지더라도 정치적으로 실패할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는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회고록『성공과 좌절』), "(지역주의 극복은)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다. 자기 희생과 헌신을 통해 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했다"(자서전 『운명이다』)고 회고했다.   반면 이 대표는 다른 길을 걸었다. 지난해 그는 대선 패배 뒤 불과 두 달여 만에 낙선 가능성이 작은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서 당선했다. 지역구의 원래 주인은 대선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송영길이었다. 그래서 "국회에 들어와 사법 리스크 방탄복을 입으려는 것"이란 꼬리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선거에 안 나가든지, 나간다고 해도 (본인이 시장을 했던) 분당에 나가서 떨어졌다면 감동과 울림이 있었을 것"(유인태 전 총장)이란 비판이 대표적이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그의 인천 출마는 9개월 뒤 체포동의안 부결로 이어졌다. “정치적 실패가 인간적 실패는 아니다”라던 노 전 대통령과 반대로 이 대표는 인간적으로 비판받는 처지가 됐다.     “작은 기득권에 집착하지 말아야"  위기 대응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노 전 대통령은 지지율 하락을 면치 못했다. 결국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압박하는 당내 비판세력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리고 본인에게 유리할 게 없었던 여론조사 방식의 단일화도 받아들였다. 그 결단이 지지층 결집과 ‘노풍’ 재점화의 기폭제가 됐다.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그는 "민주당 후보라는 작은 기득권에 집착하는 것은 떳떳한 선택이 아니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20여 년 뒤 사법 리스크에 내몰린 이 대표는 당 대표 퇴진론과 마주하고 있다. 조기 퇴진론을 극구 부인하더니, 최근에야 '연말께 질서 있는 퇴진론'을 친이재명 진영이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총선 불과 4개월 전에 그만두겠다면 도대체 당이 그 전까지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하느냐. 조기 퇴진론을 무마하기 위한 꼼수"라는 반발이 거세다.   노무현식 '내던지는 정치'와 이재명식 '지키는 정치'의 대비가 강렬하다. 선거제 개편과 대연정 구상 등 지역주의 극복과 통합에 정열을 쏟았던 노 전 대통령, 통합형 정치 개혁과는 반대로 '개딸' 팬덤과 극단적 진영주의 등 '국민 분열'로 생존을 모색하는 이 대표의 모습이 대조적이란 지적도 있다.      지난 11일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생활했던 집 곳곳을 둘러보고 있다. 서승욱 논설위원 한·미 FTA 체결, 이라크 파병    이런 차이는 정책 결정에도 투영된다. 노 전 대통령은 진보주의적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하지만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체결이나 이라크 파병, 제주 해군 기지 건설, 징용 피해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상 결정 등 진보 진영에서 반대했던 어젠다도 필요하다면 결단했다.   "정치에 참여하는 진보주의 사람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이 '정책은 과학적 검증을 통해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허하게 교조적인 이론에 매몰돼 흘러간 노래만 계속 부르면 안 된다. 일부 고달프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선동해 끌고 갈 수 있겠지만, 책임 있는 정답은 아니다"(『성공과 좌절』에서 한·미 FTA 반대론에 대해)는 신념이었다. 양곡관리법과 노란봉투법 등 자기 진영이 열광하는 법안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이 대표가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노 전 대통령은 숨을 거두기 한 달 전 검찰 수사와 관련된 솔직한 심정을 참모들에게 토로했다. 봉하마을에서 열린 '사람 사는 세상' 홈페이지 개편 회의였다. "내가 피의자로서의 권리를 이야기하면 (홈페이지) 회원들은 정치적 대결 구도에서의 투쟁으로 생각하고 나를 보호하려 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에 맞지 않는다. 나는 이미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여러 사람들까지 우습게 만드는 셈이 된다." 검찰 수사에 대한 인간적 고뇌를 토로하며 이 문제가 진영 간 투쟁의 맥락에서만 해석되는 걸 경계했다.    "진보든, 보수든 신뢰가 중요"    회고록 『성공과 좌절』엔 정치인을 평가하는 노 전 대통령 나름의 기준이 제시돼 있다. "정치에서 정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핵심 요소는 정체성이다. 그 사람이 진보주의냐, 보수주의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원칙을 아는 정치인이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냐다. 진보냐 보수냐 이전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보도 있고, 보수도 있는 것이다."   검찰 수사에 대한 태도, 정치인으로서의 기본에 관한 이야기가 이 대표의 가슴 복판에 박히는 돌직구 같다.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2023.03.20 00:47

  • "모든 책임 내가 진다"는 윤 대통령…'윤증의 탕평' 품을까 [서승욱 논설위원이 간다]

    서승욱 논설위원  논산 명재고택에서 바라본 윤 대통령 리더십    "바로 옆 노성향교엔 담장이 있는데 이 집엔 담장이 없지 않느냐.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된 뒤 집권당인 노론의 감시가 심했다. 명재 선생은 기왕에 감시하려면 아예 대놓고 보라고, 자유롭게 보라고 담장을 헐었다고 한다."   지난 1일 오전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명재고택. 조선의 유학자 명재(明齋) 윤증(1629~1714)의 생전인 1709년, 그의 제자와 아들·손자들이 파평 윤씨 집성촌인 이곳에 지은 집이다. 탁 트인 신작로 옆에 자리 잡은 이 고택에 담장이 없는 이유를 이재철 문화관광해설사는 관람객들에 이렇게 설명했다. 쌀쌀한 날씨의 평일이었지만 자신을 파평 윤씨로 소개한 여성을 비롯해 몇 명의 관람객이 고택을 찾았다.    윤증 고택에는 왜 담장이 없을까   윤증은 숙종 때 '회니시비(懷尼是非)'로 불리는 갈등을 계기로 과거 스승으로 모셨던 노론의 영수(領袖) 우암 송시열과 갈라섰다. 당시 주류 세력이던 서인의 분열, 분당이었다. 윤증이 이끄는 소론은 집권 노론과 비교할 때 개혁적 소장파 색채가 강했다. 윤증과 명재고택은 파평 윤씨 35대손인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재조명을 받았다. 당대 최고의 거물 송시열에 맞섰던 윤증은 윤 대통령의 10대조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다.     작가 천준은 윤 대통령 인물탐구서인 『별의 순간은 오는가』에서 "윤증은 싸워야 할 사람과는 확실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가치관과 철학을 뒤흔드는 상대와는 과감하게 정면으로 치고받았다"며 "마찬가지로 윤석열도 국정원 여론조작 수사나 조국 수사 등을 통해 힘센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윤증은 마당발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다양한 유형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당시엔 '유학 내 이단'이던 양명학을 공부하는 사람들과도 교류했다"며 "친구들을 두루 사귀기 좋아하는 윤석열의 성품에도 꽤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윤증이 "우리를 감시하려면 마음대로 하시라"며 담장을 부쉈다는 설명을 들으니 두 사람의 기질엔 뭔가 닮은 점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시절인 2021년 12월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이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에서 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년 총선까지 어떤 리더십 보일까   최근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 중·후반대에서 오르내린다. 40%대로 화끈하게 치고 올라가진 못하지만, 이준석 사태와 각종 시행착오로 고전했던 어둠의 시기는 벗어났다는 평가가 여권에서 나온다. 정권의 중간평가가 될 총선의 성적표는 앞으로 14개월 동안 윤 대통령의 리더십을 국민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도 달려있다.     여권 내부엔 "학습능력이 뛰어난 만큼 초반의 시행착오를 극복하며 완만하지만 꾸준한 상승 곡선을 그릴 것"(대통령실 핵심 관계자)이란 기대감이 있다. 초반 실수를 딛고 정치 적응기를 거치며 리더십이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책을 보다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관련된 책을 다 찾아서 보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진도가 나갈 수가 있겠어요? 그건 고시공부가 아니라 학문 연구를 하는 거죠." 서울 법대 동기가 전한 윤 대통령의 고시생 시절 공부법이다. (김연우  『구수한 윤석열』 중에서)     10대조 종조부인 윤증의 경우 평생 관직을 맡은 적이 없다. 85세로 별세할 때까지 우의정을 포함해 10번 넘게 수많은 관직에 제수됐지만,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윤 대통령은 관직으로 가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9번을 도전했다. 그의 서울 법대 동기는 윤 대통령이 고시에 번번이 떨어진 이유를 사법시험 준비 와중에도 많은 책을 읽고 토론을 즐겼던 '신림동 신선'의 공부법과 기질에서 찾았다.   화물연대 파업, 달라진 대응   속도는 늦을지 몰라도 확실하게 배워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빌드 업' 방식의 심화학습법이 대통령으로서의 국정 운영에 긍정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여권에선 주장한다. 이런 '두 번 실수는 없다'는 사례로 윤 대통령 주변에선 화물연대 파업과 폭우 대응을 꼽는다.   화물연대 파업은 윤석열 정부에서 두 번 있었다. 지난해 6월 첫 파업 땐 정부가 화물연대에 끌려다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전운임 지속 추진과 품목 확대 적극 논의" 등의 어정쩡한 합의에 당내에서도 "너무 쉽게 타협한 듯해 실망했다"(이언주 전 의원)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11월 말~12월 초 파업 때는 달랐다. 업무복귀 명령 발동으로 "불법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고, 화물연대는 결국 빈손으로 백기 투항을 했다.     수해 때도 비슷했다. 지난해 8월 강남 폭우 때는 사저에 머물면서 '폰트롤 타워' 논란까지 일었다. 하지만 9월 초 태풍 힌남노 때는 참모들과 용산 대통령실에 24시간 철야 대기하며 상황을 진두지휘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한 명재고택.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 선생의 집이다. 서승욱 논설위원 노동·교육·연금개혁 의지 강해   윤 대통령의 용산 집무실 책상 위엔 지난해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명패가 놓여 있다.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란 영어 문구가 새겨진 나무 명패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재임 1945~1953)이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올려뒀다는 명패를 본떠 만들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나무 명패를 볼 때마다 대통령직에 대한 소명과 책임감을 가다듬는다고 참모들에게 윤 대통령이 자주 이야기한다"고 했다.     노동·교육·연금 개혁 등 3대 개혁에 대해 "인기가 없어도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갑론을박 가운데 한·미·일 결속 강화를 밀어붙이는 등 논란이 큰 이슈라도 자기 책임 하에 결정하고 책임도 자신이 지겠다는 생각이라고 참모들은 설명한다. 이동관 대외협력특별보좌관은 "명재 윤증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로지 국가 지도자가 어떤 마음을 다짐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며 "사사로움과 작은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대의명분을 중시한 윤증 선생의 철학이 DNA에 각인돼있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반면 야당의 평가는 박하다. “왕조시대도 아닌데 대통령이 만기친람하고 있다. 여당은 용산 눈치만 보며 국회는 매번 재가를 받듯 만들고 있다"(박홍근 원내대표)라고 비판한다. 본인이 강하게 칼자루를 쥐고 일사불란함을 강조하는 듯한 리더십의 부작용에 대한 언급이다.       야당과 비판 세력이 대통령의 리더십을 공격하는 또 다른 포인트는 검찰 출신을 과도하게 등용한다는 인사 편중과 탕평의 부재, 또 국민 통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점이다.  통합과 탕평으로의 반전이 없는 한 윤 대통령 리더십이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는 게 야당의 시각이다.      윤증 “반대편 인재도 등용해야”     그런데 윤증의 정치적 주장 중 노론과 가장 대조적이었던 특징이 바로 탕평과 화해, 인재의 고른 등용이었다. 그는 당시 서인과 대립했던 남인과의 원한 관계 해소, 반대 당 사람의 등용을 주장하며 남인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했던 노론과 대립했다. 붕당 정치가 극에 달하고 집권 세력이 뒤집히는 정변(환국)이 잦았던 시기였지만 그는 남인과의 공생, 유능한 인재의 고른 등용을 강조했다. 『명재 윤증의 학문연원과 가학』(충남대 유학연구소 편)에 수록된 이애희의 논문 '윤증의 유학과 우계 성혼'은 "임금이 현자를 알아보고, 세상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하는 일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란 윤증의 생각을 전했다.       대선 후보 시절 윤 대통령을 만난 안동 유림들은 "사색당파 시절 특히 영남 남인에 대한 탄압이 있었을 때 명재 선생이 이를 저지해 몇몇 선비의 문중이 살아남았다"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 첫 지방 행보로 안동을 찾아 탕평과 통합, 협치를 다짐했다.   작은 이해관계보다 대의명분과 소명을 앞에 둔다는 대통령의 리더십은 윤증의 '탕평과 협치'정신을 품고 진화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과 가까운 참모는 "단순히 어느 지역 사람 몇 사람을 등용하는 기계적 차원의 균형, 탕평, 협치가 아니라 더 큰 차원의 통 큰 탕평, 통 큰 통합의 모습을 윤 대통령이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2023.02.07 01:04

  • MB "사면 고맙다" 말 안했지만 윤 대통령 위해 기도했다 [서승욱 논설위원이 간다]

    서승욱 논설위원 수사지휘하고 사면한 윤 대통령,MB와의 기막힌 인연   이명박(MB) 정부와 청와대를 옮겨 놓은 듯했다. 사면·복권된 MB가 서울대병원을 퇴원한 지난달 30일 오후 1시 56분 논현동 자택 앞 풍경이다. 300여명의 인파로 폭 5m 좁은 비탈길이 가득 찼다. 친 MB계 좌장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의 모자 쓴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와 윤증현(기획재정부)·김성환(외교통상부)·맹형규(행정안전부) 전 장관, 류우익·임태희·하금렬 전 비서실장과 김두우ㆍ홍상표ㆍ최금락 전 청와대 홍보수석, 현역 의원 중엔 권성동·조해진·윤한홍·박정하 의원 등 MB계 핵심들이 모였다. 과거 MB 청와대를 실질적으로 움직였던 실세 비서관·행정관도 수두룩했다.   지난달 30일 신년 특별사면으로 논현동 자택에 돌아온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MB "일부러 어깨에 힘 줬다"   "내가 어깨 꾸부정하게 다 죽은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떻겠나. 여러분들 내 앞에선 '혈색이 좋다'고 말하겠지만 속으론 '다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그래서 일부러 더 어깨에 힘을 팍 주고 꼿꼿하게 서려 했다." 이날 자택에서 만난 옛 동지들에게 MB가 했다는 말이다. 그는 2018년 구속된 뒤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구치소 생활도 떠올렸다. "18종류의 약을 처방받았는데 다 소용없더라. 그래서 나중엔 먹는 척하고 다 버렸다. 밤에 사람들 얼굴이 많이 떠올랐다. 내가 교회 장로 아니냐.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기도할 때 용서까지는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까지는 안되더라”라고 말해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현장에 있었던 인사는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없는 말을 지어냈거나, 자신의 잘못을 MB에게 덮어씌운 이들을 향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MB는 이날 자신을 사면한 윤석열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윤 대통령은 "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길 바란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역할을 해주시라"고 했다. MB는 "정부가 성공하도록 열심히 기도하겠다"고 답했다. 윤 대통령과 MB는 수사를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장과 피의자의 관계였다. 수사 중간발표는 윤 대통령의 오른팔인 한동훈 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현 법무부 장관)이 했다. MB 입장에선 자신을 잡아넣은 검사가 대통령이 됐고, 그 대통령에 의해 사면·복권되는 기막힌 운명을 겪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의"밝힌 박근혜와는 달랐다   MB가 구속(2018년 3월)되기 전인 2017년 말이었다. 주일 특파원 부임을 앞뒀던 필자는 출국 인사를 위해 삼성동 사무실로 그를 찾아갔다. 그때 이런 대화가 오갔다.  ▶필자="대통령님, 윤석열 중앙지검쪽에선 구속까지는 안 갈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MB= "하하, 그걸 누가 알겠어? 윤석열 마음속에라도 들어갔다 왔다는 얘기야?"   MB는 당시 필자의 전언에 아주 냉소적이었다. 어떤 우여곡절을 거칠지 모르지만, 검찰이 결국은 자신을 구속하리라는 느낌이었을까.    둘 사이엔 앙금이 아주 없을 수 없다. 앞서 사면을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교하면 MB의 반응은 분명 차이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 말인 2021년 12월 전격적으로 특별사면·복권됐다. 사면이 발표된 날 박 전 대통령은 대변인격인 유영하 변호사를 통해 “많은 심려를 끼쳐드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며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사면을 결정해 주신 문 대통령과 정부 당국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고 했다. 반면 MB는 국민에 대한 송구함은 밝혔지만 사면에 대한 입장·소회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엔 "지금 더 할 말은 없고, 앞으로 더 할 기회가 있겠죠"라고 말을 아꼈다. 대국민 메시지에서도, 윤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사면해 줘 고맙다'는 취지의 확실한 언급은 없었다. 복잡미묘한 감정선이 읽힌다.   윤 대통령과 정책·인적 네트워크 겹쳐   앞서 문재인 정부 말에도, 윤석열 정부로의 권력 교체기에도 MB 사면설이 돌았지만 무산됐다. 그래서 MB 측에선 지난해 8·15 특사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다. 그러나 경제인 위주의 특사 명단에 MB의 이름은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 윤 대통령 측 핵심 인사가 "사면하면 국정 지지율이 더 떨어진다"고 반대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래서 일부 MB 참모들은 사면에 반대했다는 윤 대통령 주변 인사들에 격분했다. 하지만 MB와 김윤옥 여사의 반응은 달랐다고 한다. "나라가 잘되는 게 중요하다. 정권이 또 반대쪽으로 넘어가면 되겠는가. 윤 대통령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자"며 말해 참모들이 놀랐다는 것이다. 밤 9시로 시간을 정해 MB 부부와 참모들이 동시에 윤 대통령과 나라의 성공을 기원하는 '중보기도(仲保祈禱)'를 하기도 했다. 중보기도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하는 기도다.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된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논현동 자택에 도착해 대국민 메시지 발표하던 도중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연합뉴스]   서로 반목하기엔 윤 대통령과 MB 사이엔 공통분모가 많다. 특히 현 정부가 MB 정권 시즌2로 불릴 정도로 인적 네트워크가 겹친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요직은 MB 사람들이 꿰차고 있다. 김대기 비서실장은 MB 정부에서 통계청장으로 발탁된 뒤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청와대 경제수석-정책실장으로 승승장구했다. '왕수석' 이관섭 국정기획수석은 MB 청와대 비서실장실 선임행정관 이후 산자부 핵심 보직을 거쳤다. 김은혜 홍보수석은 MB 청와대 대변인,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은 2007년 MB 대선 캠프 출신이다.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은 MB의 외교 과외선생이었고, 한오섭 국정상황실장은 MB 청와대 정무비서관실의 중추였다. 국민의힘 내 '윤핵관'들도 마찬가지다. 권성동 의원은 MB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했고, 서울시 공무원 출신의 윤한홍 의원은 MB가 청와대 인사비서관실에 발탁됐다. 장제원 의원도 원래 친MB계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2007년 '이명박 대통령당선인 대변인' 출신이고, 박정하 수석대변인은 MB 청와대 춘추관장·대변인을 지냈다.   자원외교·에너지 분야서 역할 가능성   정책 방향도 유사한 만큼 MB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관측이 있다. 복잡미묘했던 과거 역정과 악연을 뛰어넘어 윤 대통령을 도울 공간이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미 김대기 비서실장은 지난달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했을 때 윤 대통령 친서와 함께 MB의 서신을 함께 전달했다. 수감 중인 전직 대통령의 서신을 외교에 활용하는 건 이례적이다. 기업인 시절부터 대통령 재임 시까지 UAE 등 중동에 깊은 인맥을 키워온 MB였으니 가능한 일이다. MB는 2015년 출간한 저서 『대통령의 시간 2008-2013』에 "우리나라와 사회로부터 배운 것, 얻은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썼다. 향후 행보에 대해 MB의 핵심 측근은 "정치적 행보는 하지 않겠지만, 자원외교나 원전 등 에너지 분야에서 역할이 필요하다면 마다치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측근은 "모든 짐을 다 털어 냈으니,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시라고 했다"고 전했다.   ■ MB의 옆을 지킨 사람들 「 서울대병원에 머물러온 이명박 전 대통령(MB)의 옆을 지킨 이는 부인 김윤옥 여사다. 사면·복권되기 4개월쯤 전부터 병실에서 MB와 함께 생활했다. 밤에도 서울 논현동 자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호자용 소형 침대에서 지냈다. MB의 측근은 "항상 성경책을 옆에 두고 두 분이 기도하셨다"고 했다. TV도 함께 보곤 했는데 MB는 "채널 선택권이 보호자에게 있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김 여사가 계속 병원에 머물렀기 때문에 친구들이나 소망교회 동료 신자들이 병원 휴게실에서 함께 기도하는 일이 잦았다. 김 여사 외엔 장다사로 전 MB 청와대 총무기획관과 이진영·김윤경 전 행정관이 있다. 이들 세 명은 MB 퇴임 뒤 '전직 대통령비서관'이란 별정직 공무원 신분이었다. 징역형으로 MB에 대한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된 뒤 면직됐지만, 끝까지 MB 곁을 지켰다. 장 전 기획관은 윤 대통령 취임식에 김 여사, MB의 장남 시형 씨와 함께 초청받았다. 청와대 부속실에서 일했던 이·김 전 행정관은 MB가 재임 시절 “어느 참모도 대신할 수 없는 두 여성 능력자”라고 치켜세우며 신임했다. 」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2023.01.04 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