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태준의 마음 읽기] 봄의 세계

    문태준 시인. 봄의 계절이다. 연둣빛 세력이 왕성하다. 안도현 시인은 한 문장에서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오늘은 연두하고 오래 눈을 맞추자”라고 이 계절의 신선한 생명력을 노래했다.   고향 집에 계시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씨감자를 사러 시장에 가려던 참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식구들은 텃밭 일을 하시는 것조차 염려하지만, 땅을 놀릴 수 없으니 올해만 더 짓겠다며 또 텃밭 일을 시작하신다. 그래서 고향 집 집터에 딸린 작은 밭에는 어머니의 감자가 열리고, 고추가 붉게 익고, 부추와 대파가 푸르게 서고, 속이 찬 배추가 자랄 것이다. 이정록 시인이 시 ‘삽’에서 ‘농부는/ 삽을 뒤춤에 챙기고/ 물의 수평을 잡고/ 고랑과 이랑의 춤사위를 가늠한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어머니는 새봄에도 농부의 일을 위해 앙상한 두 팔을 걷어붙이신다.     ■  「 씨감자 심는다는 어머니의 봄 봄은 연둣빛과 꽃의 대향연   소생 못 하는 것에 애상도 커 」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어머니는 내일 동네에 부역이 있어서 나가보려고 한다고도 하셨다. 봄맞이 청소를 하는데, 어머니는 새참으로 내놓을 국수를 삶는 일을 돕겠다고 하셨다. 내 고향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손을 모아서 하는 공동 부역이 가끔 있다. 마을에 논의할 일이 있을 때는 회의를 열어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일일이 묻기도 한다. 물론 전원생활을 배경으로 한 연속극에서 보았던 그 확성기도 있어서 이장님의 육성으로 하는 안내 방송을 들을 수도 있다.   심지어 내 어렸을 적에는 이장님 댁에 유선전화가 한 대 있어서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그것을 알리려고 확성기 안내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밭일을 하다가도 그 방송을 듣고 전화를 받으러 가던 일이 있었다. 이제는 꽤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튼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근황을 통해 고향 마을의 봄 풍경을 눈에 선하게 그릴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제주 애월읍 장전리에는 수령이 많은 왕벚꽃나무들이 있다. 벌써 꽃망울이 맺혀 내일모레면 피기 시작할 것 같다. 마을에서는 이번 주말에 왕벚꽃축제를 연다고 한다. 비록 나는 이주해 온 사람이지만, 마을에서 하는 일들에 점차 손을 보태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장전리 마을에도 확성기 안내 방송 소리가 내 집 앞마당까지 들려오곤 한다. 요즘은 휴대전화나 여럿이 정보를 나누는 메신저 채팅방을 많이 이용해서 마을 공동체에서 하는 확성기 방송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이러한 알림의 방식이 더 정감이 있기도 하다.   봄은 돌아와 꽃은 여기저기서 핀다. 꽃이 진 그 자리에 다시 움이 트고 꽃은 핀다. 물기를 꼭 쥐어짜 놓은 것 같은 마른 꽃과 줄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새로운 싹이 올라온다. 그 싹도 머잖아 꽃봉오리를 지닐 것이다. 생명 세계의 순환을 다시 느끼게 된다. 나는 이러한 감흥을 졸시 ‘꽃과 식탁’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게 꽃은 생몰연도가 없네/ 옛 봄에서 새봄으로 이어질 뿐// 꽃아/ 너와 살자// 우리의 가난이 마주 앉은 이 저녁의 낡은 식탁 위/ 꽃은 신(神)의 영원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네.’   봄이 되어 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듯이 우리가 비록 지금 가난하고 어려운 때를 살더라도 우리의 삶에도 꽃의 시절이 곧 도래할 것임을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봄의 세계가 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봄의 연둣빛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활착(活着)하는 것은 아닐 테다. 봄의 낮과 밤에 애상(哀傷)이 눈뜨기도 한다. 최근에 나는 서안나 시인의 ‘애월 1’이라는 시를 읽고 감정이 북받치어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넓은 집에/ 혼자 남은 어머니와/ 늙은 딸이/ 찬밥에 물을 말아/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정원 잔디밭에/ 잡풀이 귀신처럼/ 달려와 자라고// 어머니는/ 오래된 집처럼/ 천천히/ 눈과 귀가 멀어간다// 어디선가/ 야생 곰취 냄새가 난다/ 안방 낡은/ 화장대 위에// 폐가 아픈/ 나무 원앙// 피가 돌아/ 교교교교 운다.’   서안나 시인은 “시는 익숙한 세계에 낯선 목소리의 진동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시는 봄날의 다른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늙은 어머니와 딸이 사는 집은 크고 크지만 적막 또한 크다. 아버지의 부재는 이 집을 더 텅 빈 듯이 만든다. 시인은 입맛이 돌지 않아 물에 찬밥을 말아먹고, 정원의 잔디밭을 가만히 바라본다. 풀이 올라오고 있다. 정원의 잔디밭에도 봄이 온 것이다. 그러나 고운 봄빛이라고 하더라도 무너지고 쇠하고 잃은 것을 다 채워주지는 못한다.   오래된 의자 하나를 봄 햇살이 잘 드는 곳에 놓아두었다. 더러는 이곳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화단의 꽃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더 그리운 것들도 생각날 것이다. 그리하여 봄밤이 한없이 아득하고 깊고 깊다는 것을 또 느끼게 될 것이다.   문태준 시인 

    2023.03.22 00:40

  • [삶의 향기] 좋은 사람, 최고의 사람, 필요한 사람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어느 쪽입니까? 선생님은 좋은 의사입니까? 최고의 의사입니까?” 2017년 대한민국 콘텐트 대상을 받은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젊은 의사 강동주(유연석)가 다분히 낭만적인(?) 의사 부용주(한석규)에게 묻는 말이다. 이 질문 속의 ‘좋은 의사’와 ‘최고의 의사’는 무엇이 다를까.   드라마의 맥락을 보면 이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글로 옮겨보니 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최고’를 ‘좋다’의 최상급 표현으로 보면 이 질문은 단순히 ‘능력치’를 묻는 게 된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을 한 것은 아닐 터, 생각을 명확히 정리해 보려 ‘좋다’와 ‘최고’의 의미에서 교집합을 제거해 본다. ‘좋다’에는 ‘원만하거나 선하다’라는 인격적 측면이, ‘최고’에는 글자 그대로 ‘으뜸’이라는 위상이 남는다.     ■  「 멀고도 험한 ‘좋은 사람’ 되는 길 ‘최고’라는 위상은 진인사대천명   타인의 필요에 응하는 삶의 가치 」    삶의 향기 사진 좀 꼬인 마음으로 들어보면 ‘사람 좋다’는 말에 은근히 내포된 ‘무능함’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질문을 길게 풀어보면 이렇게 된다. “어느 쪽입니까? 당신은 진심으로 환자를 위하는 (하지만 무능한) 의사입니까? 탁월한 의술을 지닌 (하지만 개인적 성취를 추구하는) 의사입니까?” 이 질문은 마음 씀씀이와 능력을 배타적 관계로 보는 커다란 오류를 지니고 있으므로 사실 대답할 가치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훌륭한 사람의 필요충분조건이라 한다면 드라마 속 낭만닥터는 좋은 의사도 최고의 의사도 아닌 ‘훌륭한 의사’이다.   그런데 정작 그는 이 멍청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여기 누워 있는 환자에게 물어보면 어떤 의사를 원한다고 할 것 같나? 최고의 의사? 아니, ‘필요한 의사’이다. 그래서 나는 이 환자에게 필요한 의사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좋은 의사이자 최고의 의사인 훌륭한 의사가 아니라 필요한 의사?   ‘훌륭한’이라는 형용사의 수식을 받는 주체가 의사임에 반하여 ‘필요한’의 주체는 환자이다. 다시 말해 ‘환자가 필요로 하는 의사’, 즉 의사라는 하나의 주체에 대한 관점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의 입장에서 자신을 규정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점에서 그의 대답은 ‘소명(召命) 의식’에 맞닿아 있다.   소명의 원뜻은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명령’이지만, 임금 없는 세상에서 소명은 ‘신의 부르심’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독일인은 직업을 부름을 받은(天職·Beruf) 것이라 하고 재능(才能)은 대가 없이 ‘받은 것(Begabung)’이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 영향권에 놓인 나라 대부분은 그것을 ‘주인이 맞긴 큰돈(달란트· Talent)’이라고 부른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타고난 성정은 그 길을 벗어나라고 부추기고, 애써 그 길을 걷다가 작은 손해라도 생기면 그때마다 발걸음을 돌리기 일쑤이다. 경쟁에서 이기기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고 최선을 다하고도 질 때가 많다. ‘땀(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지만, 그것은 용기를 북돋기 위한 수사일 뿐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이 말의 기원이라 추측되는 사자성어 ‘무한불성(無汗不成)’은 상당히 냉정하게 말한다. ‘땀 흘리지 않고는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없다.’ 그 의미를 뒤집어 보면 땀과 노력은 성취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이 된다. 작은 성취조차도 그러하니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극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일일 뿐 우리 같은 필부필부(匹夫匹婦)에게는 로또 당첨만큼이나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도,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을 갖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니…. 이쯤 되니 다 내려놓고 비현실적인 희망 고문에서 벗어나자는 게 아니다. 낭만닥터 김사부가 멋지게 한마디 하지 않았나. “이 환자에게 필요한 의사가 되려고 노력 중”이라고….   삶의 가치를 ‘최고’, 즉 자기 능력을 통해 정점에 도달하는 것에 둔 젊은 제자에게 그것을 타인의 필요에 헌신하는 것에서 찾으라는 가르침이 이상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생각하기에 따라 그 무엇보다 고귀한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필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盡人事) 그것으로 족할 뿐 성취 여부를 결정하는 하늘의 명을 기다릴(待天命) 필요도 없다.   정지원 시인은 안치환의 입을 빌려 외로움과 슬픔을 사랑으로 이겨내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노래했지만, 타인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땀과 시간을 기꺼이 쏟아붓는 이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지 않을까.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2023.03.21 01:01

  • [삶의 향기] 봄 숲길 속으로 들어가 보라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검붉은 동백꽃이 봄 숲길에 송이째 툭툭 떨어졌다. 제주의 머체왓 숲길이다. 머체왓은 돌밭이라는 제주도의 방언이다. 화산이 늦게까지 폭발하여 만들어진 곳이다. 긴 세월이 흘러 돌밭에 흙이 쌓이고 나무들이 자랐다. 나무의 뿌리들은 땅속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길 표면에 핏줄처럼 드러나 있다. 이 길을 20여 명의 수행자와 함께 말없이 느리게 걸었다. 한 발 한 발 발바닥의 느낌에 집중하며 걷는 나를 온전히 바라보았다.   일주일이 훌쩍 지나 마애삼존불이 있는 서산의 가야산 옛 절터 이야기 길을 걷는다. 생강나무 꽃은 노랗게 피었고, 진달래는 곧 터질 듯 봉우리들 속에 한두 송이 분홍빛으로 피었다. 높다란 산등성이 길은 두 사람이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며 걸을 수 있게 잘 다듬어져 있다.   또 다른 수행자들과 마음을 챙기며 걷는다. 탁한 기운들은 밖으로 내보내고 신선한 봄기운이 가득 담긴 공기를 몸속 깊숙이 받아들인다. 마음을 다해서 숨 쉬고, 마음을 다해서 걷는다. 봄 숲을 온전하게 느끼며 걷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  「 제주 돌밭, 서산 옛길 따라 걷기 잡다한 생각 한순간에 사라져 마음공부 하면서 걷는 게 최고 」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지금쯤이면 동백꽃이 나무와 땅에 지천으로 피고 지고, 진달래꽃이 바위 틈새마다 분홍빛으로 피어 바다를 향해 뽐내고 있을 해남의 달마고도가 생각난다. 숲길을 만들 때 중장비 없이 사람의 손으로만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했었다. 나무도 바위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손길을 최소화하는 것이 사람의 욕심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한 가지 남는 아쉬움은 걷는 사람들에게 마음수행법을 전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중국 회양 선사가 스승 혜능 선사를 찾아와 인사를 드렸다. “어디에서 왔는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때 회양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8년 만에 깨달음을 얻고 다시 찾아가 “가령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서산 대사가 쓴 『선가귀감』이라는 책의 첫 머리에 나온 이야기이다. 이 책에는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의 거울과 같은 책’이라며, 생애 동안 한글로 네 번이나 번역한 법정 스님의 마음도 담겨 있다.   눈으로 제 눈을 볼 수는 없다. 눈의 존재를 확인하려면 눈을 크게 뜨고 휘둘러보면 된다.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은 마음을 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을 볼 수는 없다. 마음을 확인하려면 손가락을 들고 튕겨보면 된다. 보는 것, 듣는 것, 튕기는 것, 생각하는 것이 모두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은 챙겨야 한다. 마음 챙기는 방법으로는 지금 이 순간 마음 다해서 숨 쉬고, 마음 다해서 걷는 것이다. 번뇌가 들어올 틈이 없이 지속하는 것이 삼매이다. 제자 회양이 어쩔 줄 몰라 쩔쩔맨 속 의문과 8년 동안 지속한 수행이 마음공부 방법의 핵심이다.   사람의 능력은 대단하다. 뇌파 분석을 하는 과학자들은 일반적인 사람이 하루에 4만7000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한다. 옛 어른들의 오만가지 생각을 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한순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생각과 감각기관과 나라는 생각이 상호 결합하여 다양한 번뇌와 감정이 교차한다. 한순간 수많은 생각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보면 대단하지만 어지러이 일어나는 생각으로 순식간에 마음을 놓치고 만다. 마음을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챙기는 공부가 필요하다.   주로 앉아서 생활하고 움직임이 적은 현대인의 생활환경에 맞추어 국토 곳곳에 걷는 길이 만들어졌다. 하루 만보 걷기를 권장하는 갖가지 상품광고도 나와 있다. ‘나는 살아있기에 걷는다. 걸으며 사색한다. 걸으며 적립도 한다. 걷기 앱으로 체크를 한다’ ‘건강은 첫걸음부터, 꾸준히 걷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다이어트에 도움 돼요! 만보기 기능으로 걷기만 해도 드리는 보상캐시와 함께 성취감을 느껴보세요!’ 등등. 만보 걷기로 하루 100원씩 받는 앱도 있고, 적금하고 하루 만보씩 걸으면 이자가 올라가는 앱도 있다. 건강을 위해 걷는 것만으로 부족해 갖가지 유혹을 미끼로 붙인 것이다. 그러나 귀중한 발걸음을 더 값있게 만들려면 마음공부를 하면서 걷는 방법으로 향상하는 것이 최선이다.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은 아무도 먼저 가지 않은 길/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은 아무도 먼저 걷지 않은 길/ 저마다 길이 없는 곳에 태어나/ 동천 햇살 따라 서천 노을 따라/ 길 하나 만들고 돌아간다.’   고규태 시인이 쓰고, 범능 스님이 작곡한 ‘길’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또 하나의 길을 안성 비봉산 자락에 상좌 도원과 만드는 중이다. 낮은 산등성이 옛사람들의 길을 찾아 두껍게 쌓인 낙엽을 걷어내니 맨흙이 드러났다. 겨우내 얼어있던 땅이 녹으면서 흙이 부풀려져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맨발로 걸어도 좋겠다. 스스로 숨 쉬고, 스스로 걷고, 진실하게 살 일이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2023.03.14 00:54

  • [삶의 향기] 운동회 날 우린 청군·백군이었다

    최명원 성균관대 독문과 교수 초등학생 작은 몸집으로는 거대하게만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봄·가을이면 운동회가 열렸다. 지금도 추석 즈음 지방 국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마을 어귀 곳곳에 걸려있는 ‘○○학교 동창 운동회’가 열린다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어쩐지 정겨워지는 순간이다.   어린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는 청군·백군으로 팀을 갈라 서로 무리를 지어 박 터뜨리기, 줄다리기, 이어달리기 등의 결전을 펼쳤다. 당시는 붉은 색이 금기시되던 때라서 빨간색은 곧 공산당 빨갱이 색이었고, 죽은 사람의 이름에 쓰는 색이라 아예 몸서리치며 물리치는 색이었다. 청군의 대항마는 백군이었지, 홍군은 아니었다.     ■  「 일상에서 배어나는 붉은색 사랑 곱디고운 색동저고리 단청 문화 무슨색을 좋아한다 말할까요 」    운동회 날 우리에게 빨간색이 친근했던 것은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빨간 내의를 선물한다는 것이 전부였던 것 같던 그런 붉은색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계기가 된 것은 아마도 2002년 한·일 월드컵 응원전에 열성을 다하던 ‘붉은 악마’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시청 앞을 가득 메운 우리 응원단 ‘붉은 악마’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우리가 손사래로 금기시하던 온갖 요소를 모두 갖추었으니 말이다. 색도 붉은데, 게다가 악마들이라니.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붉은색 사랑이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펼쳐진다. 급기야 빨간색이 한 정당을 대표하는 색으로 등장하면서 지금의 여당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당의 상징색이 되었다. 정당이 색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독일에서 익히 봐왔던 터다. 오랜 전통의 독일 정당은 독일 국기의 삼색(三色)인 검정·빨강·노랑을 보수·진보·자유의 상징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성향을 표방한다. 새롭게 환경보호를 구호로 내건 한 정당은 녹색을 아예 정당명으로 만들었다. 미국도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진보 민주와 보수 공화의 당성을 대표하는 선거전을 치르면서 온 나라를 물들였다. 우리 정당들도 간판을 바꿔 달 때마다 각 정당의 상징색을 함께 고민하게 된다. 일관성도 없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탈이지만.   빨간 치마와 파란 바지 형상의 이미지로 만든 남녀의 구분에서처럼, 어떤 색들은 특정한 것을 상징하도록 연결되어 있다. 과거를 회상할 때는 회색이나 빛바랜 갈색을 덧입히고, 미래는 장밋빛이라는 수식어를 대동시킨다. 자유(파랑), 평화(하양), 박애(빨강)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삼색기를 비롯하여 유럽의 많은 국가는 자국이 표방하는 이미지를 국기 색에 담고 있다. 그렇게 색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름의 특정한 의미를 지닌 상징성으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   집안 살림이나 국가 경제를 언급할 때면 흑자와 적자라는 말을 쓴다. 검은 글씨 흑자(黑字)는 이윤을 내는 의미고, 붉은 글씨 적자(赤字)는 손실로 읽힌다. 하지만 주식시장에서 빨간색 글씨는 불붙어 활활 타오르는 긍정의 의미가 얹혀졌고, 파란색이 오히려 얼어붙은 장의 의미가 되어 낯빛도 파랗게 질리는 색이 되었다. 같은 돈인데도 주식장에서 붉은 글씨는 호황의 상승세를 의미하니, 빨간색도 나름인지라 주식장과 손익계산에서 그 의미가 이토록 달라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종이는 하얗고 글씨는 까맣다’라는 지극히 단조롭던 우리의 삶에 1980년 컬러 TV의 출현과 함께 흑백의 시대는 가고 단청무늬 화려한 오색 문화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 전통문화에서 빨간색은 낯선 터부의 색이 아니다. 청실홍실에도 담겨있고 태극 문양에도 담겨있다. 올해 다시 열렸던 정월 대보름 전통 놀이마당 고싸움에서는 청군과 홍군이 맞수로 흥을 돋우었고, 색동저고리 고운 색감이 삶에 배어들어 일상을 물들이고 있다.   다양한 색상의 변화는 자동차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승용차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당시 차량의 색은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도로를 가득 메우는 자동차들이 다양한 색감으로 개성을 드러낸다. 장례 운구를 상징하던 검은 줄 흰색 버스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흰색은 오히려 다수의 사람이 선호하는 색이 되어 거리를 질주한다. 검은색은 이제 장례를 비롯하여 권위와 품위를 상징하는 의전 모두를 아우른다.   때로는 사람의 성격도 색깔로 판단하려 한다. 어떤 색을 좋아하면 어떤 기질이 있다는 둥.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무슨 심리 테스트를 받는 것 같아 함부로 말하기 꺼려진다. 어느새 파릇파릇 물오르고 꽃내음 가득한 봄기운이 차오른다. ‘노릇노릇’ ‘노리끼리’ ‘노르스름’에서처럼 우리말이 담아내는 색상의 인지는 다른 어떤 언어에서보다 섬세하고 풍부하다. 여기에 굳이 좋고 나쁜 의미까지 엮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최명원 성균관대 독문과 교수

    2023.03.07 00:27

  • [마음 읽기] 시작의 고통은 기회가 된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무려 2년 넘게 절밥 얻어먹으러 오던 길고양이가 꽤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다. 저도 양심은 있는지 설날 아침에 와서 몇 번 야옹거리고는, 주는 밥 먹고 눈 마주치며 내 말 몇 마디 들어주고 사라졌다. 그 뒤 여태 보지 못했으니 그게 마지막 인사였을까. 흔하디흔한 우리식 표현으로 ‘인연이 다했나 보다.’   요즘엔 인연이 다했나 싶은 것들이 종종 눈에 띈다. 낡아서 해진 옷을 보다가도 문득 사라진 세월을 느낀다. 오랫동안 해오던 익숙한 일도 고정관념, 열등감, 우월감, 콤플렉스에 떠밀려 살아온 삶을 자꾸만 돌아보게 하고, 익숙한 일도 이젠 그만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  「 절밥 30여년에 깨달은 고통의 뜻 지난 실수·상처도 힘이 되는 법 새롭게 시작하는 3월을 맞기를… 」    라디오 프로그램을 10년쯤 진행했다. 처음엔 매일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TV를 겸하며 주말에만 방송했다. 며칠 후면 만으로 꽉 찬 10년이다. 공자님 말씀에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라 하였던가. ‘비록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 것이 군자다.’ 물론 나야 군자는 못되지만, 나이 먹을수록 남이 알아주는 것보다 스스로 충실한가에 주로 잣대를 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처럼 별난 인기도 없었고, 방송을 뛰어나게 잘하지도 못해서, 시작한 이래로 서툴렀던 기간 동안 어지간히 고달팠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말 그대로 물 없는 ‘고통바다’라는 뜻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나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대개는 경험은 미천한데 선택의 순간은 너무도 빨리 찾아와 사람을 당혹하게 한다. 오죽하면 감내하며 살아가야 할 세상, ‘감인토(堪忍土)’라는 의미로 ‘사바세계(娑婆世界)’라 칭하였을까.   사람은 생겨날 때부터 고통의 세계에 머문다. 어머니의 따뜻한 자궁 속을 행복의 근원지로 알고 있지만, 뱃속에서 점점 커질수록 어머니의 장기(臟器)에 눌려 어머니도 아기도 힘들다. 그러다 태어나면 본래 어머니의 부드럽고 따뜻한 양수 속에 있던지라, 제아무리 고운 수건으로 감싸도 가시밭길처럼 온몸이 아프다. 그래서 그리 큰 소리로 울어댔나 보다. 충만한 사랑으로 모두 축복해주지만, 사실 아기가 맨 처음 접하는 세상은 그저 춥고 아플 뿐이다.   자라나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어떤가. 낯선 친구들과 잘 노는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의 경우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친구도 별로 없었다. 당연히 학교에 가기 싫었고, 세상 모든 일이 하찮게 느껴졌으며, 몸도 아프고 악다구니 받칠 일도 많아 결국 세속을 등지고 출가의 길을 택했다.   낙엽이 흩날리던 어느 늦가을에 머리를 깎았다. 어찌나 머리가 시리던지 온몸이 와들와들 추웠다. 그런 와중에도 어른들은 모자를 못 쓰게 했다. 머리 깎고 모자 써버릇하면 일생 모자를 못 벗는다나. 그러잖아도 머릿속이 ‘배’속처럼 희다고 ‘백골’이라던 나의 민머리는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 머리만 깎으면 모든 게 해결되고 행복하다기에 출가했는데, 웬걸 이제 막 시작하는 출가자의 고통은 처음부터 이를 악물게 하였다.   절밥 먹은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비로소 알았다. 시작의 고통이 클수록 인생의 밑거름이 충분해진다는 것을, 크게 넘어진 고통은 훗날 위기를 버틸 힘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3월이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의 문이 열릴 테고, 적응하기엔 너무나 큰 고통이 자신을 먼저 맞이할지도 모른다. 새 학교에서, 생애 첫 직장에서 경쟁과 희생을 강요받을 수도 있다.   설령 그런 상황에 놓일지라도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조금만 시간을 내어 내면을 바라보자. 진정한 깨달음은 늘 시간의 다리를 붙잡고 절뚝거리며 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상처투성이가 된 다음에야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교토(京都)에 가면 ‘뒤돌아보는 아미타불(みかえり阿弥陀)’이 있다. 수만 번 자신의 명호를 애타게 부르던 불제자를 위해, 아미타불이 높은 단에서 내려와 함께 걸었다는 유래를 가진 불상이다. 말하자면 ‘미카에리 아미타(뒤돌아보는 아미타불)’ 불상에는 중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가여운 중생을 뒤돌아본다는 메시지가 분명히 담겨있다. 그 앞에서 가슴이 뭉클해져 오래도록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나의 아픔과 후회까지도 돌아봐 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제 시작하는 3월엔 하루도 소홀히 보내지 말자. 솔직하되 불평불만은 조금만 넣어두자. 누구라도 처음엔 다 실수할 수 있는 거니까. 자신을 믿고 살다 보면,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결말이 기다려줄 것이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2023.03.01 00:47

  • [삶의 향기] 이것도 인연인데…

    황주리 화가 어린 시절,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세상을 향해 한 발 내딛는 게 겁이 났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대할 때마다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타고난 길치였던 내가 등사실에 가서 시험지를 가져오라는 선생님의 심부름을 받고 한참을 헤매다 맨손으로 교실로 돌아갔을 때, “왜 그냥 왔니?” 하시던 선생님의 의아한 눈길에 그냥 죽고 싶었던 마음, 그런 마음의 기억이 요즘 꿈에서 되풀이되는 것이다.   교실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학교 건물에서 어디가 우리 교실인지 몰라 헤매는 꿈,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어르신이 된 요즘에 어린 시절의 그 두근거림이 되살아나는 건 왜일까. 급변하는 세상을 향해 내딛는 두려운 발걸음을 다시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인터넷에서 오늘의 운세를 즐겨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운수대통의 하루라고 점괘가 나온 바로 그 날 아침 내게 대참사가 일어났다. 잠결에 누군가 내 이름의 통장을 만들어 고가의 명품을 샀다는 둥, 다른 날 같으면 수상하고도 남을 메시지를 운수대통이라는 점괘에 안심하고 눌러버린 것이다.     ■  「 악몽과 같은 보이스 피싱의 기억 시리아 난민수용소의 휑한 풍경 튀르키예도 악몽서 깨어나기를… 」    그 뒤부터 일어난 일은 영혼을 탈탈 털리는 어이없는 프로세스였다. 손도 없고 발도 없는 유령의 목소리에 포위되어 가상의 시공간에서 진행된,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지던 보이스 피싱의 기억은 현실이 아닌 꿈속 같았다. 요즘 유행한다는 그 수법의 보이스 피싱 경고방송을 텔레비전에서 보지 못한 나는 세상일에 어리숙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신출귀몰한 거짓말 게임에 말려들었다. 생각할 겨를 없이 계속 전화를 하며 지령을 내리는 모르는 목소리는 드디어 친숙한 목소리가 된다. 익명의 목소리에 끌려다니는, 숨막히는 첩보전을 능가하는 그렇게 집중된 시간을 나는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때의 나는 나였을까. 그냥 홀리는 거다. 사기를 당하는지도 모르고 범인의 목소리에 끌려다닌 그 악몽의 기억은 겪어본 사람만 이해하는 순간이다. 친한 후배에게 털어놓으니 그녀가 말해줬다. “언니 그 보이스 피싱범도 알고 보면 ‘오징어 게임’처럼 타인에게 사기를 쳐야 살아남는 사람들일지도 몰라.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어리숙한 피해자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포식자는 꼭 잡아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인생이 꿈이라는 건 이 나이쯤엔 다 아는 유일한 진실이다. 운이 좋은 사람은 대체로 좋은 꿈을 꾸다 갈 것이며, 운이 나쁜 사람은 긴 악몽을 꾸다 가는 사람이리라. 꿈속의 가짜 검사는 말한다. “이것도 인연인데, 이 나쁜 놈들을 일망타진해서 선생님께 조금도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넷 검색에 똑같은 이름까지 있는 가짜 검사에게 심지어 나는 고마움까지 느낀다. 옛날 사람들이 여우에게 홀리듯 우리는 모르는 목소리에 홀려 홀라당 돈을 뺏긴다. “초록색 잠바를 입고 계시군요.” 그는 나를 계속 보고 있다. 폰 카메라로 내 일거수일투족이 다 실시간 중개되고 있다. 전화가 뚫려 경찰서로 금감원으로 검찰청으로 전화한다 해도 다 그가 받는다. 문득 옛날 영화 ‘트루먼 쇼’가 떠오른다.   그 악몽의 순간이 끝나고 오랫동안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며칠 전에 본 이슬람 극단주의 여성 지도자를 그린 다큐 필름이 생각난다. 전 세계의 여성들을 전사로 끌어들이는 SNS 표어가 떠오른다. ‘우울한 여성이여. 알라에 귀의하라. 오직 알라만이 행복을 준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이슬람 소녀들이 그 소리에 속아 시리아로 건너가 성노예로 살았다. 열세 번이나 계속 다른 남자에게 팔려가거나 경매에서 팔려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끔찍한 악몽의 풍경이 시리아 난민 수용소의 황막한 풍경에 겹쳐졌다. 이 또한 보이스 피싱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니 세 시간 동안의 악몽을 꾼 것만도 다행이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은 것도, 일제 강점기 시절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은 것도, 납북되지 않은 것도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한동안 가짜 검사의 “이것도 인연인데” 그 말이 자꾸 맴돌면서 헛웃음이 났다. 하긴 악연도 인연이지, 하고 생각하니 살면서 악연을 만난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동안 얼마나 선한 인연들이 많았는지 일깨워주려고 이런 악연이 찾아온 건지도 모른다고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상실의 경험 없이는 느낄 수 없다는 행복의 감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되돌아왔다. 튀르키예로 보내는 대형 택배상자 안에 질 좋은 패딩 잠바와 따뜻한 옷가지들을 정성껏 싸서 넣었다. 정말 이것도 인연인데, 내 패딩 잠바를 입고 있을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녀의 몸도 마음도 조금쯤 따뜻해져, 곧 그 모든 나쁜 꿈에서 깨어나길.   황주리 화가

    2023.02.28 00:57

  • [마음 읽기] 해빙과 신춘

    문태준 시인 봄이 멀지 않은 듯하다. 우수가 막 지났다. 눈이 비가 되어 내리고, 남아 있던 눈과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어 흐르는 때가 되었다. 풀과 나무에도 싹이 틀 때가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제주에는 대지에 푸릇한 기운이 점차 돈다. 아직은 바람에 차가운 기운이 있지만, 낮에 햇볕이 들면 잠깐씩 포근한 느낌이 든다. 몸에 도톰한 것을 껴입지 않아도 바깥은 따스하고 편안하다. 눈보라가 혹독하게 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변화의 징조가 있다.   마당가에 한동안 얼어있던 수도꼭지에서는 맑은 물이 쏟아진다. 산에 들어서면 골짜기에는 아주 작은 물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에서 듣더라도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만들어내는 물소리는 봄의 소리 같다. 나는 졸시 ‘삼월’에서 ‘얼음덩어리는 물이 되어가네/ 아주아주 얇아지네// 잔물결에서 하모니카 소리가 나네’라며 이즈음부터 듣게 되는 물소리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 적이 있다. 해빙(解氷)한 물은 마치 하모니카 소리처럼 줄줄이 오목하고 볼록하게 모양과 소리를 이루며 흘러 아래로 간다.     ■  「 얼음이 물이 되어 흐르는 때 맞아 조용하고 포근하고 탄력적인 봄 우리 내면도 부드럽게 변했으면 」    동네의 밭에서도 일 나온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밭에 거름을 내는 집도 있고, 제주에는 풀이 일찍 돋아 벌써 풀을 한 차례 뽑는 집도 있다. 나도 작은 밭의 두렁을 깎고, 밭에 골을 타서 무엇이든 심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화단에 나 있는 풀을 매기도 했는데, 풀을 매다 보니 화단 곳곳에 작년에 심은 튤립의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구근을 심으면 그 구근에는 틀림없이 움이 트고, 또 그 구근을 한날에 심었다면 움이 트는 시기 또한 틀림없이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어떤 일에든 내가 원인을 만들면 그로 인한 결과도 제때에 내가 받게 된다는 것을 한 번 더 깨달았다.   얼마 전에는 옆집 할머니께서 냉이를 캤다며 갖다 주셔서 나도 내 집 텃밭에서 자란 봄동 몇 포기를 전해 드렸다. 한 움큼의 봄 향기를 주고받았다. 저녁에 냉이를 넣고 된장국을 끓여내니 식탁에 이른 봄의 냄새가 가득했다. 양지바른 언덕에 쪼그려 앉아 호미로 냉이를 캤을 할머니를 떠올리니 고마운 생각이 짙어졌다.   집 주변 밭에는 벌써 유채꽃이 피었다. 노란 유채꽃 무더기는 마음을 화사하게 했다. ‘유채꽃’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은 중국의 시인 텐허 생각도 났다. 텐허는 ‘들판을 메운 청아한 유채꽃이여/ 나는 그 한복판에 서서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한다’라고 썼다. 물결치는 유채꽃밭을 한 번의 큰 호흡으로 다 품을 수는 없겠지만, 신선한 생명의 곱고 밝은 생명력을 마음에 한가득 채우고 싶은 의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텐허의 시편들을 다시 읽어보니 그의 작품들에는 봄에 관한 멋진 시구가 참 많았다. 봄을 맞아 나무 심기를 하며 ‘회색 솜옷을 입은 노인들’께 ‘지나가는 봄바람을 국자로 한 번 또 한 번 떠먹여 주리라’라고 적었고, 삼월이 오면 ‘남쪽으로 난 경사지에/ 보리밭이 차츰 드러난다’라며 봄의 서정을 읊기도 했다. 봄볕이 잘 드는 남쪽 보리밭은 채광이 더 좋을 테니 시간이 지나면서 보리가 먼저 푸르스름한 빛깔을 띨 것이다. 복숭아 농사를 짓는 마을에서는 봄이 되면 복숭아꽃이 만발하되 ‘자그마한 복숭아꽃은 태어나자마자 웃음을 배운다’라며 개화의 기쁨 자체를 노래했다. 신춘(新春)의 흥취를 아주 감각적으로 드러낸 시구들이었다.   봄의 도래와 그 징후를 정밀한 문장으로 쓴 작가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그는 개간되지 않은 숲과 초지야말로 우리 삶의 강장제라면서 이런 곳들이 없다면 우리 삶에 활기 또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봄 마중을 하게 되는 이즈음의 시간을 “폭풍 치는 겨울날에서 조용하고 포근한 날씨로의 변화, 또 어둡고 굼뜨던 시간에서 밝고 탄력적인 시간으로의 변화”를 만물이 선언하는 때라고 했다.   농가에서는 한 해 농사를 위한 준비를 하고, 그리하여 씨앗을 고르는 때이다. 반면에 논과 밭, 숲과 초지는 겨울로부터 빠져나와 부드러운 변화를 보이는 때이다. 소로는 “겨울의 독기와 더부룩한 기분”을 씻어내는 때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때를 사는 우리도 계절의 변화, 자연의 변화를 보고 겪으면서 마음의 변화를 함께 생각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내 마음의 씨앗에 대해 생각하고, 내 마음의 산뜻한 움틈에 대해 생각하고, 내 마음의 볕 바른 곳을 생각하고, 차고 딱딱한 얼음이 내 마음에서 해빙하는 것을 느끼고, 내 마음이 물처럼 흘러가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도 좋을 것이다. 지금 자연은 새봄을 맞이하고 있다.   문태준 시인

    2023.02.22 00:47

  • [삶의 향기] 지구가 웃어야 아이들이 웃는다

    고진하 시인·목사 야생초를 뜯어 요리해 식탁을 차린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생계가 어려워서 야생초를 뜯어 먹느냐? 그 거칠고 맛없는 들풀을 어떻게 요리해 먹느냐? 땡볕에 나가 풀 뜯는 게 힘들지 않느냐? 지구를 축내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이냐? 이런 다양한 반응을 들으면 나는 야생초를 낯설어하는 이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려 애쓴다.   우리 가족이 야생초 요리를 식탁에 올리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 귀촌한 후부터였다. 그렇게 야생초에 애착을 갖게 된 까닭은 단지 생계가 어려워서도 아니고, 또 야생초 요리가 풍부한 영양과 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정말 궁핍한 시절이 오면 야생초가 인류의 미래 식량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을 이야기할 때 그 앞자리엔 항상 먹거리 문제가 돋을새김 되지 않던가.     ■  「 15년째 밥상에 올린 야생초 요리 미래세대의 식량이 될 수도 있어 성경에서 찾아 읽는 생태학 지혜  」    ‘지속가능’이란 말이 요즘처럼 많이 회자한 때도 없었다. 그 어휘는 우리의 삶이 지속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강한 부정의 느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사실. 인터넷이 발달해 세계의 날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처럼 급격한 기후변화로 일어나는 지구촌의 기후재앙을 우리는 매일 같이 목도한다. 지구촌을 무섭게 강타하는 혹한과 혹서의 소식은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지구 종말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게 한다.   이런 엄청난 위기 앞에서 요즘 나는 인류가 으뜸의 가르침으로 여겨온 종교 경전 속에서 생태적 삶의 지혜를 궁구하고 있다. 먼저 나는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하는 일에 애면글면해 온 고대 유대인들의 역사와 삶의 지혜를 들여다보고 있다. 오래된 지혜에는 지구 어머니의 자비의 DNA가 묻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왜 유대인은 지속가능한 삶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까. 무엇보다도 그들이 터 잡고 사는 땅이 황무지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쓴 여행기를 보면, 경치가 황량한 나라로는 팔레스티나가 으뜸이라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척박하기 그지없는 황량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친화적인 많은 규칙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에 보면 생태적인 규칙이 많이 등장한다. 이런 규칙을 보고 난 이들 중엔 참 이상하다고 투덜거리는 이도 있으리라. “아니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형편이라면서 무슨 생태적 규칙이람?”   나는 유대인이 만든 수많은 규칙 중에 먹거리에 대한 규칙에 먼저 눈길이 갔다. “육지에 사는 짐승 가운데...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이 있다… 발굽은 갈라져 있으나 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돼지를 먹어서는 안 된다.”(레위기 11: 1~8) 부정한 동물이니 먹지 말라는 것. 그러나 부정하다는 위생적 이유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유대 땅은 자원이 무척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까지 다 먹어치우는 엄청난 식욕을 가진 잡식성의 돼지는 지속가능한 삶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금지 규칙이 생긴 건 아닐까.   물에 사는 동물 가운데도 먹지 말라고 한 동물이 있다. “물에서 우글거리며 사는 것 가운데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너희에게 더러운 것이다… 그 고기를 먹지 마라.”(레위기 11: 10~11)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무엇일까. 개구리가 아닌가! 유대 땅에서 개구리를 먹어서는 안 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성서 속의 생태학』이란 책을 쓴 독일의 생태학자 휘터만은 그 이유를 방글라데시에서 찾았다. 방글라데시는 1970년대 말부터 개구리를 대량으로 잡아 그 넓적다리를 프랑스에 수출했다. 이 때문에 돈은 벌었지만 나라에 말라리아가 창궐했다. 원래 이 지역엔 말라리아가 없었는데, 모기의 천적인 개구리 씨를 말려버림으로써 무서운 재앙을 겪게 되었던 것.   사실 고대 유대는 말라리아 때문에 무척 고통받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개구리를 먹지 말라는 생태적인 규칙을 만들었다는 것. 이런 규칙을 만들어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했던 유대인의 삶의 지혜를 오늘 우리도 곱씹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 지속가능한 삶을 저해하는 심각한 요인이 훨씬 더 많으니까.   자본 만능의 세상이라지만, 우리 후손이 살아가야 할 터전인 지구의 안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생태계 파괴로 신음하는 지구를 웃게 하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지구가 웃어야 나무들이 웃고, 물고기들이 웃고, 새들이 웃고, 아이들이 웃고, 인류가 웃을 수 있으니까!   고진하 시인·목사

    2023.02.21 01:04

  • [삶의 향기] 인간과 인공지능, 무엇이 중요한가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개인별 차이야 있겠지만, 인공지능(AI)이라는 단어가 널리 회자한 것은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2001) 이후이지 싶다. 그보다 1년 앞서 개봉한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의 가사도우미 로봇 앤드루(로빈 윌리엄스)가 제조상의 오류로 감정을 지니게 되었다는 설정과 달리 21세기형 피노키오 ‘데이비드’(할리 조엘 오즈먼드)는 처음부터 감정을 지니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또 다른 영화 ‘I-로봇’(2004)에 명시된 ‘로봇 3원칙’은 이렇다. 첫째, 인간을 다치게 하거나 다치도록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첫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이 두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 원칙을 나름 깊이 통찰한 인공지능 ‘비키’는 ‘인간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인간’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그에 따라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 반면, 인류가 떠나버린 황폐한 지구에 남겨진 ‘월-E’(2008)는 본연의 일(청소)을 하루도 거르지 않을 만큼 성실할 뿐만 아니라 음악과 영화를 즐기고 바퀴벌레를 반려 곤충(?) 삼을 만큼 풍부한 정서를 지닌 꼬마 로봇이다.     ■  「 ‘무어의 법칙’ 폐기한 반도체업계 많은 것을 이룬 삶이 훌륭하다면 적더라도 고유한 삶은 아름다워 」    이렇게 먼 미래의 일이라고, 비현실적 상상에 불과하다고, 인공지능이 수행한 결과물이 아직은 신통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을 잠시 뒤로하고 요즘 ‘핫’하다는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openai.com)와 마주했다. 한글 대화는 내용도 속도도 영 시원치 않다니 서툴지만 영문으로.   “트리스탄 화음과 반감 7화음을 비교 설명해 주세요.” 불과 몇 초 만에 답변을 내놓지만, 자세히 읽어 보니 오류투성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수정해 주었더니 미안하고 고맙단다. 대화 내용을 학습하고 이후 답변에 반영할 것인지 물었더니 단호히 아니란다. 틀린 것은 인정하되 수정은 하지 않는다? 이건 또 무슨 경우? 특정 주제에 대한 논문 목차와 한 학기 분량의 강의계획서를 작성하라고 하니 이것 또한 깔끔하게 뚝딱 써 내려 간다. 그런데 이런…, 소제목 아래의 세부 내용이 한결같다. ○○에 대해 ‘논의하라’ ‘설명하라’ ‘분석하라’.   학술적 자료가 풍부한 질문은 어떨까? ‘주피터 교향곡 4악장의 음악적 위대함’을 물었더니 다소 추상적이지만 제법 괜찮은 대답을 내놓는다. ‘통일성에 기반한 복잡성, 주제의 전개, 대위적 수월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한다. “네가 언급한 내용의 출처를 밝혀주렴.” “죄송합니다, 저는 제가 학습한 것을 말씀드릴 뿐 그 출처를 밝히는 기능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학술논문은커녕 리포트 대필 도구로도 부족하다. “혹시 관련 시청각 자료를 제시해 줄 수 있을까?” “저는 문자 기반 서비스이므로 문자 이외의 자료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내친김에 우리말로 시를 짓고 그것을 노랫말 삼아 노래를 지을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호기롭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잠시 후 비문투성이 문장에 아연실색할 화음 진행을 제시한다. 음악에 특화된 인공지능이 아니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언론에 오르내리는 찬사는 정말 호들갑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웹검색 엔진 서비스와 너의 차이점은?” “웹검색 엔진과 저 같은 언어기반 모델은 각기 자신만의 강점과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포괄적 정보를 제공하는 데 함께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정보를 나열하는데 그치는 것과 그 정보를 언어로 정리하여 제시하는 것, 그것이 그 둘의 본질적 차이점인가 보다. 지금의 수준이 어떻든,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취득하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험과 생산의 총량을 삶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100년 전의 두 배가 아니라 어림잡아 몇십 배의 삶을 산다. 물리적 시간(수명)의 증가가 의술 덕이라면 삶의 양적 증대는 교통수단을 비롯한 기술적 진보, 무엇보다도 ‘무어(G Moore)의 법칙’(집적회로 상의 트랜지스터 수가 2년에 2배씩 증가)에 힘입은 정보 취득과 처리의 용이성에 크게 기인한다. 그런데 그 법칙이 최근 폐기되었단다. 발열이라는 현실적 난제도 있었지만, ‘고도화’에서 ‘특화’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였기 때문이란다.   반도체 산업이 그리했듯이 우리 또한 유한한 삶에 최대한 많은 것을 이루고 담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에서 벗어나도 좋을 때가 온 것은 아닐까? 80년 남짓한 시간을 집적회로 삼아 앎과 경험과 소유를 최대한 많이 쌓은 삶이 훌륭하다면 그 시간을 무엇에 어떻게 쓸지 정하고 그에 필요한 것을 가지런히 놓은 삶은 아름답지 않을까?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2023.02.15 00:52

  • [마음 읽기] 시간을 잘 쓰는 사람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단편들』을 통해 철학과 신앙의 관계를 탐구하는 원고를 투고받았다. 책엔 키르케고르의 분신 격인 요하네스 클리마쿠스가 등장해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을 치밀하게 읽음으로써 철학과 신앙의 관계를 새롭게 논증해나간다. 판권을 확보해 미뤄뒀던 철학-종교 문제를 파고들고 싶었지만 편집자로서 준비가 너무 안 돼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단순히 텍스트 편집만이 아니라 평소 사고방식과 삶의 우선순위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가를 찾아봬 경외의 마음을 보인 뒤 원고를 반려하고 싶었지만 여느 때처럼 e메일로 의사를 전했다. 이 같은 행동의 간소화는 생활에 미학이 들어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   나는 지난해 작가 J에게 e메일로 원고 청탁을 했는데, 그는 차마 메일로는 거절 못 해 전화를 걸어와 30분간 해명했다. 직장인이라 바쁠 게 분명하지만 거절 상대(출판사)에 대한 애정을 내비치면서 어떤 프로젝트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오래 설명했다. 그 프로젝트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것이고 한시바삐 서둘러야 하는 일이라 수긍됐다. 무엇보다 거절의 부담을 안고 직접 전화한 것, 대화의 빗장을 완전히 지르지 않고 여지를 둔 것, 거절하는 데 반 시간이나 쓴 것이 인상적이었다.     ■  「 소설가 김훈, 출판교정가 황치영… 없는 시간 쪼개 상대와 긴밀 대화 시간을 돈으로 세는 우리 돌아봐 」    우리는 시간, 열정, 에너지가 한정돼 귀히 여기는 사람과 사물에는 시간을 들이지만, 그 외의 일은 시간 빼앗긴다며 무심함과 폄하의 감정으로 대한다. “편집자들은 원고 투고자가 출판사에 직접 찾아오는 걸 꺼린다면서요?” 한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 대부분 e메일로 받길 바란다.   왜일까? 첫째, 투고의 상당수는 반려되는데, 면전에서 거절할 자신이 없다. 글쓴이와 편집자는 책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를 때가 많은데, 그건 설득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둘째, 당장 해야 할 편집과 기획을 미루고 불명확한 일에 시간을 쏟기 쉽지 않다. 전적으로 근현대 노동자가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교정 쪽수를 분배해두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계를 은연중 드러낼 위험이 있다. 게바우어와 불프의 말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낼 시간이 없다면 이로써 거부나 위계의 사회적 관계가 표현되는 셈”이다.   그러니 현대인의 심미성은 시간을 쓰는 방식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일본에 사는 시각예술가 향숙은 심미적인 사람이다. 그는 주변인들을 정성껏 시간 들여 대한다. 한국에 올 때 파주나 더 먼 지방까지 기꺼이 친구를 만나러 가고, 내가 교토로 여행을 가면 도쿄에서 내려와 시간을 함께 보낸다. 몇 해 전 작가 기시미 이치로가 내한했을 때는 그림 작업을 잠시 미룬 채 통역과 수행을 도왔다.   출판교정가 황치영의 시간 쓰기도 예술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현대자동차 출신에 박정희 시대를 거쳐온 그는 몸에 근면과 근대적 시간 규율이 배어 있지만, 타인에게 그런 시간 계산의 방식을 드러낸 적은 결코 없다. 그는 원고를 독파하며, 후배 편집자와 해당 작가를 위해 근거 자료들을 출력해 풀칠하고 오류를 도표화해 수기 노트로 건네주고, 젊은 편집자가 잘 모르는 한국사와 중국사 연대기를 입체적 서사로 짜 들려주는데, 이 모든 일은 직접 찾아와 얼굴을 맞대고 해준다. 이처럼 우리가 “그저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돈보다는 시간을 쓰는 데서 좋은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 시간은 상처를 주지 않고, 상대가 평가받는다는 느낌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출판계에도 방송가처럼 한 시간 단위로 자기 시간에 값을 매기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들에게 추천사를 부탁할 때는 직접 통화하기가 어렵고, 비서나 조교에게 한 건에 200만원 하는 식으로 미리 책정된 값을 전해 듣는다. 수락의 우선순위는 원고 내용보다 지불하는 액수에 있다. 편집자로서 나는 이런 방식을 이해 못 하는 편은 아니다. 몇몇 사람에게 몰리는 일의 양은 압도적이고, 의뢰되는 글들은 잘 쓰인 것이 대다수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상대를 대하는 데 1분도 허락하지 않는 신체는 차갑게 느껴지고 그 시간은 컨베이어벨트 위의 시간과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   소설가 김훈은 왕성한 독서가로 인문서, 고전을 많이 읽는다. 유명한 그는 시간이 없을 게 분명한데, 그런 시간을 이질적으로 쓴다. 독자로서 응원의 말을 전하기 위해 도서전 부스에 찾아오고, 전화로 독후감을 읊는다. 때로 마치 연극적 수행처럼, 그는 갑자기 배우가 돼 편집자 한 명을 관객으로 삼고는 독후감을 육성으로 전하는데, 그때 기존의 시공간은 무너지고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극 공연장에 와 있는 것만 같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2023.02.08 00:36

  • [삶의 향기] 평화롭게 걷고 산처럼 앉아라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정월 초하룻날부터 네 명의 제자들, 선원 대중들과 올바른 마음수행을 위해 숨 쉬고, 걷고, 앉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며 행복한 일주일을 보냈다.   “몸과 마음으로 들숨과 날숨을 감지해야 합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는 오로지 호흡에 집중합니다. 마음을 다해 호흡할 때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통찰력이 생겨납니다.”   “걸을 때는 발바닥에 의식을 집중하세요. 마음이 머리에만 머물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지면이 닿는 발바닥까지 끌어내리세요. 숨을 들이쉬면서 두세 걸음, 숨을 내쉬면서 서너 걸음을 내디뎌 보세요. 발걸음마다 ‘바로 지금 여기가 도착한 지점이고, 목적지이며, 지금 여기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시간이며 장소이다’라고 되뇌 보세요. 평화의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  「 같은 길 가는 절집 스승과 제자 숨 쉬고 걷는 것도 훌륭한 수행 몸과 맘 하나 될 때 통찰력 생겨 」    설 즈음에 공부하러 떠났던 제자들이 돌아왔다.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한 상좌 둘, 송광사를 졸업한 상좌 하나, 동국대 재학 중인 상좌 하나 등 모두 넷이다. 모처럼 모였으니 일주일 동안 거룩한 수행을 하자는 제안에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하루 네 번의 참선과 걷기 수행이다.   밤에는 틱낫한의 『행복한 교사가 세상을 바꾼다』와 반야심경을 주제로 대화하듯 공부했다. 처음에는 스님들만 시작하였는데, 마지막 날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함께했다. 새해 벽두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준 시간이었다.   절집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법(진리)으로 맺은 인연이다. 최초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석가모니와 다섯 제자에서 시작되었다. 대각을 이룬 석가모니는 함께 고행했던 다섯 도반을 찾아 600리 길을 11일 동안 걸어갔다. 나무 아래에 둥글게 앉아 깨달은 내용을 설명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한 제자는 첫 법문을 듣자마자 깨달았고, 두 제자는 3일 만에, 나머지 둘은 21일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제자를 가르치는 친절한 방법이 선문(禪門)에 와서는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고스란히 계승되었는데, 다름 아닌 천칠백 공안(公案)이다.   어떤 스님이 지문 스님에게 물었다.   “연꽃이 물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연꽃이니라.”   “물 위에 나온 뒤에는 어떠합니까?”   “연잎마저 나왔군!”(『벽암록』  21칙)   30년 전, 백양사의 방장 서옹 스님은 선사들이 제자를 가르치는 천칠백 공안 중에 100가지 이야기를 주제로 엮은 『벽암록』을 팔십 노구에도 10년 동안 한결같이 5일에 한 번씩 강설하셨다. 한 명씩 방장실로 불러 점검하셨다. “공부한 것이 있으면 내어보아라!” “막힌 것 있으면 물어라!” 지금도 그 당당한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고 서슬 퍼런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노사의 할(喝)은 제자를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대자비심 그 자체였다. 그때를 생각하며 나 자신에게 “제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일생을 마음공부하기 위해서 삭발하고, 먹물 옷을 입고, 오로지 수행의 길을 걷기에는 오늘날의 첨단문명이 너무나 화려하고 유혹적이다. 무한 경쟁사회에서 원초적인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수행의 길을 선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깨달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단단한 가르침을 전해야 하고, 제자는 스승의 깨달음을 온전히 빼앗아 가겠다는 결기가 필요하다.   “앉을 땐 말하기를 멈추고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합니다. 우리를 지금 이 순간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시시각각 일어나는 온갖 생각입니다. 달아나는 마음이 육체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앉는 것입니다. 태풍이 닥쳤을 때의 한라산처럼 묵직하게 앉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생각, 감정, 감각, 주변에서 나는 소리 등 모든 요소를 평등하게 잠재우는 것입니다. 그러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집중해보세요.”   숨 쉬고, 걷고, 앉고, 먹고, 말하는 일상에서 몸과 마음이 온전히 깨어있을 때, 기적이 일어나고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계묘년 새해, 지은 복이 많다면 누구나 자신을 깨달음으로 이끌어줄 참스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어쩌다 어른이 되었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산다. 스승의 덕목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은, 수행에 전념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 ‘시간이 없다’는 자각은 수행자에게 지남(指南)과 같다. 원효 스님이 ‘발심수행장’에서 “급하지 아니한가(莫速急乎)?”를 외친 이유이기도 하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2023.02.07 00:59

  • [마음 읽기] 2월은 홀로 있기 좋은 달이라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스산한 느낌이 들어 문을 열어보니, 기척도 없이 눈이 내린다. 세상의 모든 악업과 인간의 죄업을 다 덮어버리듯 근엄하고도 부드럽게 온다. 그러나 바람까지 불어 맞고 걷기엔 별로인 눈발이다. 눈을 보고 있노라니 며칠 전 보고 온 붉은 동백이 눈가에 선하게 비쳤다. 어디쯤에선 매화 소식도 화사하게 들리던데,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매화향이 그리워지는 아침이다.   예전에는 지척에 매화가 있어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쫓아가 향기를 품어 돌아왔는데, 서울에선 그러질 못했다. 고작해야 꽃시장에서 사 온 나뭇가지를 백자항아리에 꽂아두고 완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고요히 앉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은은하게 다가와 나를 깨워 벗이 되어주었다. 그리 아쉬운 듯 감상해도 파리한 승려에게 있어 매화는 늘 고매하고 우아하여 각별한 정서를 안겨준다. 출가승의 고독 따위야 아무렴 어떠랴 싶게….     ■  「 매화와 다향이 어우러지는 시간 시인 천양희가 권한 2월의 고요 내면의 힘 응축시킬 ‘나만의 길’ 」    오늘 내 곁에 매화는 없으나 홀로이 어울리는 차라도 한잔해야겠다. 하늘빛 도는 여릿한 다관을 꺼냈다. 녹차에 매화 한 송이 띄었더라면 멋지게 어울렸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물을 따랐다.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라 하였던가. 차 한 모금 머금자 입안에 향이 차오른다. 얼른 법당으로 건너가 향도 하나 피워 올렸다. 은은한 녹차 향 끝에 스미는 침향이라, 그야말로 향미(香味)가 잔치를 한다.   알다시피 스님들은 매화를 유독 좋아한다. 승속을 떠나 매화향기를 싫어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이름 있는 고찰에 오래된 매화 한 그루 정도 다 있는 걸 보면, 저 윗대 스님들도 꽤나 좋아하신 모양이다. 통도사 홍매나 선암사 백매가 그러하듯, 오래된 법당 곁의 묵은 매화는 오랜 세월 함께한 출가승의 벗인 게다.   옛 선사의 이름에도 꽃이 피었다. 황매(黃梅) 선사도 있고, 청매(靑梅) 선사도 있으니 말이다. 황매 선사는 혜능대사의 스승으로 유명하고, 청매 선사는 서산대사를 시봉한 승병장으로 알려진 분이다. 특히 청매 선사가 남긴 ‘십무익송(十無益頌)’은 후학들에게 큰 가르침으로 남아있어, 그분의 의로운 향기가 더 진하게 전해진다. 내용은 이러하다.   “마음을 돌이켜 살피지 않으면 경(經)을 보아도 이익이 없고, 성품이 공(空)한 것을 모르면 좌선을 하여도 이익이 없으며, 원인을 가벼이 여기고 결과만 중히 여겨 도(道)를 구하여도 이익이 없느니라. 아만을 꺾지 않으면 법(法)을 배워도 이익이 없고, 바른 법을 알지 못하면 고행을 하여도 이익이 없으며, 마음에 진실한 덕이 없으면 교묘한 말을 잘해도 이익이 없느니라. 남의 스승이 될 만한 덕이 없으면 제자를 모아도 이익이 없고, 안으로 실덕(實德)이 없는 이는 밖으로 위의를 가장해도 이익이 없느니라. 인생을 괴각으로 지내면 대중(大衆)에 살아도 이익이 없으며, 교만(驕慢)이 뱃속에 차 있으면 계를 지켜도 이익이 없느니라.”   가르침이 어찌나 성성한지, 이 글을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예, 스님”하고 대답하게 된다. 서릿발 같은 기개가 글 속에 살아있음이다.   그나저나 눈 덮인 동백과 매화가 한겨울의 동기인 줄로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한다. 동백은 가장 늦게 피는 꽃이요, 매화는 가장 처음 피는 꽃이란다. 마지막에 피는 꽃과 처음 피는 꽃이 함께 한다니 실로 묘한 어울림이 아닌가. 사람도 꽃처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데, 더러는 그 관계가 불편하고 무겁다. 어쩌면 이맘때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바쁜 연초에 명절까지 지났으니, 이젠 좀 고요함 속에 파묻히고 싶은 때이다. 그렇기에 2월은 홀로 있기 좋은 달이다.   얼마 전 선물 받은 천양희 시집에 ‘2월은 홀로 걷는 달’이라는 시가 있었다. 책을 건네주던 맘씨 좋은 스님은 “눈도 안 좋으니 두꺼운 책 보지 말고, 잠깐 읽고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집을 보세요”라고 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받아든 시집 속에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미아리를 미아처럼 걸었다’로 시작하는 시가 있었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걸었다’는 시가 퍽 쓸쓸했다.   그러나 시의 풍경을 떠올리며 걷다 보니 처음엔 무겁다가 점점 가벼워지고, 이내 굳건해짐을 느꼈다. 생을 돌아보며 걷다 보면 사색은 더욱 깊어지고, 가파른 길도 숨 고르며 견딜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응축되겠지. 그런 힘을 지니려면 홀로 있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눈서리에도 당당한 저 매화처럼 동백처럼 무소의 뿔처럼. 적어도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있느니, 혼자 있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2023.02.01 00:57

  • [삶의 향기]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요?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영화 ‘기생충’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화제작이었다. 정점을 찍은 것은 아시아인에게는 그토록 어렵다는 오스카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영화의 한 획을 그었던 역사적 순간이다. 그런 화려한 조명 속에서 우리는 또 한 인물에 눈길을 주게 된다. 수상 당시 봉준호 감독의 동시통역을 맡았던 최성재(Sharon Choi)씨의 활약상이다. 그는 후에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동시통역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열정이 담긴 치열한 노력과 통역을 위한 자기관리의 기록에 대해서다.   통역과 번역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른 영역이다. 특히 동시통역은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고 순간순간을 긴장하며 혼신을 힘을 기울여야 하는 그야말로 피 말리는 작업이다. 더구나 ‘새로 쓰기’ ‘고쳐 쓰기’를 할 수 없는, 한순간의 순발력에 모든 것을 거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한 초집중의 환경에서 가장 부드럽고 맛깔스럽게 그리고 완벽에 가깝게 통역을 해내는 동시통역사의 능력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특히 외국 정상과의 만남에서 그림자처럼 밀착 수행하는 동시통역사의 활약은 AI도 함부로 대체하지 못하는 ‘넘사벽’ 영역이다.     ■  「 옳은 번역과 좋은 번역 사이 동시통역은 매우 특별한 능력 제2의 창작이라는 번역의 고통 」    외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번역이라는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동시통역은 특별한 자격을 갖춘, 또 다른 능력의 영역이지만, 외국어 교육은 모국어와의 관계에서 번역 과정이 반드시 개입된다. 그런데 간혹 두 언어 사이에서 번역하기 난감한 어휘를 마주할 때가 종종 있다. 한국어로 번역이 잘 안 되는 외국어도 있고, 외국어로 잘 옮겨지지 않는 한국어 표현도 있다. 그런 어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왜 이런 표현들이 생겨났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독일어에 ‘Schadenfreude(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 어떤 해(Schaden)를 입게 된 것을 기뻐하게(Freude) 되는 상황을 의미하는 말이다. 딱히 우리말 한 단어로 옮기자니 막연해지는데, 어떤 이가 불쑥 “그거 ‘고소하다’네요”라며 한마디 툭 던진다. 제법 괜찮은 제안이다. 사돈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남이 잘못되는 것을 보면서 은근히 기뻐하는 때가 바로 ‘고소한’ 순간인가.   반대로 한국어에서 한마디 외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어휘 가운데 하나로 ‘눈치’가 있다. 우리는 이 어휘를 ‘~가 빠르다’ 혹은 ‘~를 채다’ 등의 용법으로 쓴다. 눈치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데 ‘없거나’ ‘제법인’ 녀석이다. 콜린스 온라인 사전에서는 이 한국인의 ‘눈치’를 성공의 비결이라고 토를 달고 있는데, 번역이 어려운 만큼 ‘Nunchi’라는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다.   번역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관용어를 다룰 때다. 관용어를 어휘 대 어휘로 번역하면 그 뜻을 제대로 옮길 수 없다. 그만큼 관용어는 한 언어의 문화적 산물이며, 때로는 어원을 찾아서 그 뜻을 이해하기도 한다. 관용어뿐만 아니라 토박이 사투리나 출발어와 목표어 사이에서 대등하게 존재하지 않는 표현이 번역의 난제들이다.   언어학에서 이론으로 다루는 많은 의제가 있지만, 나는 유독 ‘번역이론’에는 반기를 든다. 다양한 번역 대상물을 앞에 놓고 번역과정과 그 결과물에 대해서 어느 한 이론으로 정립하여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옳은 번역과 좋은 번역에는 두 가지 선택 사양이 있다. 원문에 충실할 것인지, 가독성을 위해 내용 전달에 충실할 것인지. 학술서처럼 전문용어가 많이 사용되는 전문서적에서는 되도록 원문에 충실할 것을, 문학작품이나 내용 중심의 저술은 원문의 어휘들보다 내용 전달에 용이하도록 풀어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꽤 설득력을 갖는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 ‘e북’의 출현과 함께 ‘종이책의 종언’을 고한지도 꽤 되었지만, 종이책의 출판과 판매는 아직도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최근에는 세계 각국에서 최첨단 도서관을 지어, 수려하고 독특한 외관이나 기능 면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사례들이 소개된다. 예전에는 종이책의 수장고였던 도서관이, 지금은 (학술)정보관으로서 인터넷 매체에 따른 다양한 정보 활용의 기능도 수행한다.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접하게 되는 책 가운데 역서가 차지하는 비중 또한 여전히 상당하다.   손에 집어 든 역서를 보면서 과연 원문은 어떻게 쓰여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남의 말과 생각을 옮기면서 무엇에 충실해야 할까. 저자는 과연 이러한 번역의도에 동의하고 있을까. 제2의 창작이라는 번역의 고통에서 무엇이 옳은 혹은 좋은 번역인지 때로는 원문 한 줄을 앞에 두고 고민이 깊어진다.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2023.01.31 00:59

  • [마음 읽기] 설날과 고향

    문태준 시인 설 명절 연휴 마지막 날인 어제 제주에는 거센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쳤다. 산지에 많은 눈이 쌓이고 종일 한파가 이어졌다. 배편과 항공편이 모두 끊겼다. 한랭 기단과 강풍과 대설 속에 있었다. 설을 쇠러 육지에 나갔다 그나마 하루 일찍 제주로 다시 돌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돌아와서 육지 고향에서 보낸 사흘을 생각하니 두고 온 고향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살얼음이 끼고 서리가 하얗게 내린 빈 들판이 자꾸 떠올랐다. 고향집도 어제는 한파와 강풍 속에 있었을 것이다.   작년 늦봄엔가 집 주변에 있는 작은 밭을 일구면서 쓴 ‘흙 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라는 졸시가 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농사를 짓지 않고 묵혀 있던, 집터에 딸린 밭을 일구던 때의 생각을 쓴 시였다. 돌이 많은 밭이었지만, 풀이 돋고 지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된 탓에 흙 속에는 많은 지렁이가 살고 있었다. 그 지렁이들을 땅 밑에 묻어 살던 곳으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느닷없게도 고향 생각이 난 적이 있었다. 시의 전문은 이러하다.     ■  「 명절 쇠러 찾아간 내 살던 고향집 잔칫날에 묵고 가던 고모 생각나 마음속 고향의 세계 더 넓혔으면 」    ‘오래 묵은 이곳에서는 흙을 들출 때마다 지렁이가 나왔다 문 열고 나오듯이 나와 굼틀거렸다 나는 돌 아래 살던 지렁이는 돌 아래로 돌려보냈다 모란꽃 아래 살던 지렁이는 모란꽃 아래에 묻어주었다 감나무 아래 살던 지렁이는 감나무 뿌리 쪽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호우가 쏟아지고 내가 돌려보냈던 지렁이들이 다시 흙 위로 나왔을 때에도 이런 곳 저런 곳에, 살던 곳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두고 온 내 고향이 눈에 선했다 집터와 화단의 채송화, 우물, 저녁 부엌과 둥근 상, 초와 성냥, 산등성이와 소쩍새가 흙 속에 있었다 어질고 마음씨 고운 고모들도 흙 속에 살고 있었다 솟아오르려는 빛이 잠겨 있는 수돗물처럼 괴어 있었다 흙 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있었다.’   살던 고향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들이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나는 1970년대 후반에 산 밑에 자리를 잡은 집터와 밝은 색감이 있던 화단, 당시에 마흔 살쯤 되셨을 아버지께서 아주 여러 날에 걸쳐 혼자 팠던 우물터, 밥 짓느라 매캐한 연기가 피어나던 부엌,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던 식구들, 마을을 빙 둘러싸던 산의 등줄기, 그리고 고모들 생각이 났다. 물론 훨씬 더 많은 존재와 애틋한 이야기들이 고향이라는 흙 속에 살고 있지만.   설날에 뵈었더니 아버지께서는 집안에 잔치가 있으면 시골 고향집으로 친척들이 일찌감치 찾아와서 여러 날을 자고 가던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 화령에 살던 고모가 오셔서 주무시고 가셨던 그 기억은 내게도 꽤 생생했다. 언젠가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화령 고모네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길은 멀고 먼 길이었다. 시외버스를 두어 번 갈아탔고, 징검돌이 띄엄띄엄 놓여 있는 개울을 건너가며 한참을 걸었다. 목화밭에 목화송이들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화령 고모는 보자기에 뭔가를 잔뜩 싸서 우리집까지 그렇게 먼 길을 오신 것이었다. 잔칫날을 하루 이틀 앞두고 오셔선 잔칫날이 하루 이틀 지난 후에 다시 화령으로 가셨다. 고모는 아버지와 밤에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시곤 다시 새벽에 일어나 또 이런저런 얘기를 낮은 목소리로 나누셨다. 고모와 아버지는 나이 터울이 꽤 있어서 아버지는 늘 고모에게 깍듯하셨다. 자애롭고 선한 고모였다.   시골 고향집에서 잠을 잘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만 아버지께서는 잠을 자고 있는 내 방에 새벽이면 한 차례 들렀다 가신다. 방에 들러서 이불을 내 발끝까지 덮어주곤 나가신다. 방바닥도 뜨끈뜨끈한지 손바닥으로 쓸어보곤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러한 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설날 새벽에도 중년이 된 아들의 몸에 이불을 끌어 덮어놓곤 조용히 나가셨다.   설날이면 마을에서 하던 합동 세배는 올해에도 치르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어르신들께 세배를 올리고, 덕담을 듣고, 술과 명절 음식을 함께 나눴었다. 코로나가 끝나면 마을의 이 오랜 전통은 다시 이어질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만 늙는 것이 아니라 고향도 늙는다는 생각이다. 고향집 집터에 붙어있는 산에 새 둥지가 있는 것을 보았다. 참나무 꼭대기에 지어 놓은 둥지였다. 바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그 둥지를 올려보는 동안에는 새를 볼 수 없었다. 빈집 같았다. 고향집 같았다. 어제 제주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동안 그 새의 둥지가 자꾸 눈에 보였다. 고향이 외롭지 않게 해야겠다는, 고향이 더 큰 세계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태준 시인

    2023.01.25 00:45

  • [마음 읽기] 다시 읽는 ‘난쏘공’

    장강명 소설가 아내가 운영하는 독서모임에서 지난해 말 주제 도서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선정했다. 그래서 책을 두 번째로 읽는데, 도대체 몇 년 만에 다시 읽는 건가 싶어 계산해 보니 28년 만이었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1994년에 읽었으니까. 당시에도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었는데 사실 그때는 초판이 나온 지 16년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다.   책을 다시 읽으며 이게 이런 작품이었나 하고 놀랐다. 기억이 썩 생생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느낌이었다’ 하는 흐릿한 감상을 품고 있었는데 다시 집어 든 책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분명 그사이 텍스트 밖에서 ‘난쏘공 신화’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텍스트 대신 그 신화의 흐릿한 메아리가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던 걸까. 다시 접한 난쏘공은 28년 전보다 더 섬뜩하고 더 아름답고 더 슬프고 더 심오하게 다가왔다.   ‘난쏘공’이 한때 받았던 비판 중에는 이분법적이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작품에서 난쟁이-거인, 철거민-투기꾼, 노동자-사용자의 선명한 대비가 보인다.     ■  「 “이분법적이다” 예전 비판 낯설어 난쟁이-거인 등 시대가 이분법적 세상은 정말 70년대 그대로인가 」    하지만 ‘사람들은 집단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같은 문장도 있다. 주민들이 철거반원을 구타해서 앞니를 부러뜨리는 장면에서 나온다. 투기꾼을 처단한 앉은뱅이에게 꼽추는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자네의 마음야.”라고 말한다. 그런 문장들을 나는 전에 부주의하게 넘겼거나, 아니면 읽은 뒤에 금세 잊었다. 신애, 윤호처럼 중간에서 괴로워하는 인물들도.   1980년대에 이 소설이 받았던 비판 중에는 부당하다 못해 이제는 어이없게 들리는 것도 있다. “노동운동을 감상적 온정주의의 대상으로 만들어 혁명적 전망을 차단한다”는 말마저 있었던 모양이다. 출처는 정확히 모르겠고 민중문학 진영의 평론가가 그런 발언을 했다고 2000년대 기사들에 인용된 것만 보았다. 그 평론가는 문학이 혁명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나 보다.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환경이 한심하도록 이분법적이었다.   독서모임을 마치고 얼마 뒤 조세희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곳곳에 추모의 글이 올라왔는데 ‘우리는 여전히 난쟁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직도 세상은 그대로다’라는 식의 내용이 많았다. 인터넷에서 이 책의 독후감을 검색하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 관성적인 독법에는 반발심이 일었다. 치열한 작품에 대한 안이한 독서 아닐까. 세 번째로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어떤 층위에서는 우리가 여전히 난쟁이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값싼 기계 취급을 받았어, 인간이.” 같은 문장에는 2023년 현재도 펄펄 끓는 힘이 있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같은 문장은 어떤가. 나는 2020년대 수도권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광역버스, 혹은 부동산 문제에 대한 감상이 딱 이러하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라는 대사에 동의하느냐.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정말 세상이 그대로일까? 난쟁이는 신애의 집에 수도꼭지를 달아주면서 “임시로 이렇게라도 사십쇼. 물이 잘 나올 세상이 언젠가는 올 걸요”라고 말한다. 동네 아이들은 배가 고파 흙을 주워 먹고 난쟁이의 막내딸 영희는 그 아이들을 보며 생쌀을 먹는다. 난쟁이 옆집에 사는 명희는 좋아하는 남자에게 “배가 고파”라고 웃으며 말한다. 명희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사이다, 포도, 라면, 빵, 사과, 계란, 고기, 쌀밥, 김”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인 대부분은 집에 수돗물이 잘 나올지보다는 어떻게 체중을 감량할지를 걱정한다. 누가 뭐래도 이것은 발전이다.   책이 발간된 1970년대와 지금 가장 다른 것은 난쟁이의 세계가 아니라 그 반대편 같다. 전에는 선명하게 보였던 거인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흐릿하다. 간접 고용, 플랫폼 노동 현장에서는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 걸까. 자영업자를 착취하는 사람은 고객인가, 그 자신인가, 경쟁 점포인가, 인터넷 쇼핑몰인가.   몇백 미터 떨어진 대형마트 영업을 규제하면 그 가게가 잘 되는 게 정말 맞나. 서울 강남 주상복합건물 전망 좋은 층에 사는 그 사람, 혹은 반도체나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 많이 하는 그 대기업이 거인인가? 그런데 왜들 ‘잘 사는 집에서 자란 아이들이 심성이 곱다’고 말하고 대기업 직원이 되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 걸까. 거인은 구조 속에 숨은 듯한데, 사회의 문제의식은 안이한 이분법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장강명 소설가

    2023.01.18 00:27

  • [삶의 향기] 예수의 유머 감각

    고진하 목사 날씨가 폭폭 찌는 어느 여름날, 길가에 죽은 개 한 마리가 널브러져 있었는데, 왕파리떼가 썩은 개의 사체에 왕왕거리며 달라붙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더럽다고 침을 뱉거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지나갔다.   그때, 수염이 텁수룩하고 눈에 유난히 광채가 나는 한 사람이 한참 동안 개의 사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더니, 다른 이들과는 달리 씩 웃으며 말했다. “고놈! 이빨 하나는 희구나.” 이렇게 말한 이가 바로 예수였다고 아랍 민담은 전해주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웃음부터 팡 터뜨리는 것이 정상.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한 나도 그랬으니까. 적어도 이 민담 속에 나오는 예수의 언설에는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는 해학이 깃들어 있지 않은가.     ■  「 아랍 민담에 나타난 예수의 해학 복음서 곳곳에도 낙천적인 모습 율법의 사슬 깨뜨린 사랑의 기쁨 」    예수를 따른다면서도 매사에 너무 경건하고 심각하고 진지하고 엄숙한 그리스도인은 어쩌면 이런 예수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예수가 껄껄껄 웃었다든지 유머 감각이 풍부했던 분이라고 말하면 신의 아들의 명예를 깎는 일이라 여기는 오래된 고정관념에 붙잡힌 이들이 많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메시아의 위엄을 한몸에 지닌 예수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기쁜 일이 있을 때면 마땅히 미소 짓고 웃는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아닐는지. (헨리 코미어, 『예수님의 해학』 참조)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가 제자나 민중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아주 쉽고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고 해학적인 언어로 말씀하시는 것에 놀라곤 한다. 어디에도 수사학을 배웠다는 기록이 없지만, 예수의 수사 능력은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는 이런 예수의 유머와 해학을 복음서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의 언어가 낙천적이고 해학적이지 않았다면 수많은 무리를 곁에 불러 모을 수도, 그들과 하느님 나라를 두고 으밀아밀 깊은 소통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유머와 해학의 감각을 지니려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공기처럼 가볍고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의 삶이 탐진치(貪瞋癡)에 찌들어 한없이 무거우면 결코 가볍고 자유로운 유머와 해학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머와 해학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예수의 면모는 그가 마성의 힘인 ‘중력의 영’(니체)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고통받는 인생들을 초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자신이 걸머진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마태 11장 28~30)웠기 때문이었으리.   요즘 들어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의 해학적인 어법에 주목하게 된 것은, 우리가 넘어야 할 파고(波高)가 그 어느 때보다 거칠고 높기 때문이다. 세계 도처에서 전해져오는 기후변화로 인한 전 지구적 재앙과 종말의 기운은 우리 일상 속까지 스멀스멀 파고들어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이런 불길한 미래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는 이들도 주변엔 많다.   예수가 살던 시대 역시 식민세력과 지배자들의 수탈이 만연한 때였기에 예수는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온몸으로 함께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언어와 시선은 비관적이지 않고 낙관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죽은 해학을 구사하는 이들과는 달리 예수의 해학에는 사랑과 희망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안식일 문제로 시비를 거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혁명적 선언을 통해 사람들의 목을 옥죄는 율법의 사슬에서 해방의 기쁨과 희망을 선사했다.   영생을 놓고 나누는 해학의 백미 하나 더. 한 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를 찾아와 영생을 구했으나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고 돌아가자, 예수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울 것”이라고 일갈하셨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다니! 이런 얼토당토않은 농(弄)을 하신 예수의 눈에 빛나는 해학의 불꽃을 보고 제자들은 모두 깔깔대고 웃었으리라.   모름지기 예수는 삶의 어려운 질문이나 숱한 난경(難境) 앞에서도 뛰어난 해학의 감각을 발휘하는 촌철살인의 지혜를 보여주었다. 오늘 우리 앞에도 삶의 난관이 은산철벽처럼 첩첩하다.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가 예수를 여전히 스승의 한 분으로 여긴다면 해학의 은총과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하리.   고진하 목사

    2023.01.17 00:41

  • [마음 읽기] 타인의 미래에 끼어드는 사람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힘’에 대해 고찰하는 글이다. 힘은 삶에서 늘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특히 전쟁과 관련될 때는 타인의 미래를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즉 나의 힘은 적군의 미래를 ‘죽음 그 자체’로 만들어버린다. 그 앞에서 군인들은 다른 여지를 상상할 도리가 없다.   평범한 우리도 종종 타인에게 힘을 발휘한다. 그 힘이 부드러우면 세상은 꽃과 열매를 피워내지만, 상대를 두려움에 꼼짝 못 하도록 붙드는 힘도 있다. 얼마 전 지인 A는 내게 “당신은 얼마 안 있어 갱년기를 겪을 것”이고 그러면 삶의 전환점을 맞을 텐데, “영적 세계로 건너오지 않으면 전 재산을 잃고, 죽음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달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흔히 영성은 인간 이성보다 더 상위이자 궁극의 범주로 여겨진다. 이 점은 쉽게 수긍되는바 이성은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령 『근본개념들』에서 하이데거가 인간 너머의 존재를 끊임없이 파고드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상대방 미래를 투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A의 말은 결국 궤도에 오르지 못한 채 소멸한다. 꿈은 우리의 현실보다 강력한데, 겁주는 미래는 우리 꿈과는 관련 없기 때문이다.     ■  「 자신의 경험만 내세우는 교만함 어른들의 한마디 정말 도움될까 천천히 기다리는 마음이 중요해 」    며칠 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한 강사의 말 역시 타인의 미래에 전적으로 개입하는 유였다. 그는 자신에게 청년 실업을 해소할 묘법이 있다고 했다. “싹 다 공장으로 보내면 돼요.” 그의 칼 같은 언어는 타인의 미래를 산업혁명기의 빵과 교환되는 공장 속으로 되돌려놓아 더 나은 앞날을 그리던 청년들은 취업의 사다리에 매달린 채 떨어야 했다. 그는 청소년을 위한 대책도 내놓았다. 10대들이 공부 때문에 힘들어하고 자살률도 높으니 “학원을 다 끊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했다.   청중을 휘어잡는 그의 무기는 획일성, (다른 의미에서) 사다리 걷어차기, 먹고사니즘이었다. 그가 제시한 미래의 답안은 모두 과거 회귀적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형편 탓에 혹은 가부장적 사고로 자신을 교육하지 않았던 부모에게 딸들은 얼마나 한탄했던가. 부모에게 순종해 농사로 평생을 산 대구 우록리의 몇몇 할머니는 자신들이 낟알 하나 더 거두는 확실성의 세계에 갇혀 세월을 흘려보낸 것을 원망했다.   타인의 미래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은 많다. 부모, 형제자매, 친척, 선생, 종교인……. 그들이 한마디 하고 싶다면 단언하지 말고, 상대의 사고를 너무 침범하지 않으며, 자기 경험을 과신하지 않고, 상대를 꿰뚫어본다는 식의 태도를 지양했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타인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는 듯한 충격을 주거나 감정의 혼란, 고통을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꿈을 향해 전력질주하기보다는 아이를 업고 달래는 여성이나 굽은 노인의 모습, 창밖 풀들을 음미하며 천천히 지나오길 바랄 것이다.   그런데 보통 조언의 바탕으로 삼는 어른들의 경험은 얼마나 믿을 만할까. 마사 누스바움은 『교만의 요새』에서 개인적인 서사와 다양한 세부 사항이 언제나 적절한 건 아님을 지적했다. 각자가 겪는 경험의 서사는 폭이 좁을뿐더러 담론을 위해서는 추상화·개념화·이론화가 필요하다. 이에 누스바움은 성폭행·성추행을 당한 여성/남성들의 경험과 감정을 넘어 전문적인 논의 속에서 법의 공평성을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도덕관념이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철학자는 경험이 “주관성의 비대함을 의미”하게 될까 봐 이를 경계했다. 경험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스승이지만, 때론 그것을 길에서 스쳐 가는 나무 정도로만 여겨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적 묘사로 사회를 풍경처럼 묘사한 캐슬린 스튜어트의 『투명한 힘』은 새로운 인식 도구를 제공한다. “어떤 사건이 펼쳐지기를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이 이 책의 기조이며, 저자는 ‘가치판단적 비평으로 성급하게 뛰어드는 일’을 되도록 늦춘다. 거기서 삶들은 새로운 번지수를 찾아 자리를 잡는다. 저자는 책 속에서 자신을 ‘여자’라는 보통명사로 부르는데, 즉 자기 정체성을 누그러뜨려 세상의 가능성을 응시하고 그것의 미래를 터주려는 의도에서다.   사실 훌륭한 작가들은 부드럽고 열린 미래를 곳곳에 뿌려놓는다, 그것도 기다리는 방식으로. 엘렌 식수는 아직 다 읽지 않고 방에 꽂아만 둔 책도 ‘나름의 읽기’라고 말한다. 책은 시간을 주고 기다리며 우리로부터 달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식수는 “안다고 믿는 우리, 계산하는 우리, 일종의 ‘수학 교수들’인 우리”보다는 천천히 기다리는 책의 선의에 전적으로 기댈 것을 권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계의 확장을 목격할 것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2023.01.11 00:46

  • [삶의 향기] 영화 ‘꿈을 파는 사람’과 ‘밀양’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용서를 통해 가장 큰 득을 보는 건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용서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루한 차림새를 한 거리의 현자(賢者)가 소매치기 소년의 어깨를 감싸 쥔 채 피해자에게 호소한다. 브라질 영화 ‘꿈을 파는 사람’ (Vendedor de Sonhos, 2016) 중 한 장면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귀부인은 손주뻘 되는 그 소년에게 지폐 한 장을 쥐여주며 나지막이 속삭인다. “잘 살렴!” 너무 진부한가? 저명한 심리학자이기도 한 원작자 아우구스토 쿠리는 현대판 예수 링콜른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쉼 없이 고귀한 메시지를 던진다. 문제는 그 어느 것도 새로울 게 없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에 떠도는 이 영화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모르는 것을 깨우치는 것 못지않게, 알면서 행하지 않는(못하는) 그 무엇을 일깨우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고.     ■  「 용서할 때 가장 득을 보는 사람은? 용서는 내가 아닌 대상을 위한 것 용서할 때 얻는 평안과 행복은 덤 」    “용서하는 사람이 가장 크게 득 본다”라는 자막을 보는 순간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밀양(密陽)’.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무려 8개의 여우주연상을 전도연에게 안긴 작품(2007)이다. 어린 아들 준이를 유괴범에게 잃은 신애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대로 들꽃 한 줌을 들고 그 ‘원수’를 찾아간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 살인마가 너무도 평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에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게 하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냐”는 물음에 “네,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라고 답한다. 마땅히 해야 할 ‘사죄’는 전혀 없이 자신이 가해자임을 잊은 듯 피해자에게 ‘위로’의 말까지 떠벌인다. “하나님한테 회개하고 용서받으니 내 마음이 이렇게 편합니다. 요새는 기도로 눈 뜨고 기도로 눈 감습니다. 준이 어머니를 위해서도 항상 기도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리할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야 할 이 장면에서 감동한다면 기독교인? 아니다. 죄송하지만, 용서와 화해를 관념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감동은 불가능하지 싶다.   “어떻게 용서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이 벌써 용서받았대요, 하나님한테.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해요?” 용서의 주체가 누구인지 생각해볼 대목이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피해자의 동의 없이 가해자를 용서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정당한 항의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놓여있다. 그녀가 진심으로 그를 용서하려 했더라면 그 비합리적인 ‘신의 사랑’에 동의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덧붙여 그의 딸이 자기 머리를 손질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미장원을 뛰쳐나오는 행동은, 그녀가 용서하려 애쓴 것이 ‘원수’(용서의 대상)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음을 드러낸다.   이 두 편의 영화를 연결 지어 보며 용서에 대한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문다. 용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진정한 용서는 무엇인가? ‘꿈을 파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이 가장 큰 득을 본다고 했지만, ‘밀양’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신에게 용서받은 사람’이 누리는 평안을 고발한다. 피해자를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둔 채 가해자를 용서한 신의 부당함을 탓한다. 그런데…. 그건 오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고 했다. 피해자의 아픔을 외면하고 가해자를 ‘멋대로(?)’ 용서하지는 않겠다, 즉 “너희가 서로 사죄하고 용서할 때 비로소 나 또한 너희를 용서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밀양’의 신애가 어렵사리 용서의 길을 나섰던 것도, 그녀의 원수가 누리는 ‘용서받은 자의 평안’도 다 허위다. 내게 죄지은 자, 즉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용서는 진실하지 못하기에 가식이고,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 없이 신으로부터 용서받는다는 것은 공허한 자기기만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과와 용서는 내가 아니라 그 대상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는 내 안의 평안과 행복은 덤일 뿐이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2023.01.10 00:59

  • [마음 읽기] 새해에 새로 만나는 나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아직 캄캄한 새벽, 법당문을 열고 내다보니 온 세상이 하얗다. 동지가 지났으나 여전히 길고 긴 밤, 그사이 만들어진 풍경인 게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 첫 문장이 떠올랐다. 문장을 읊조리니, 지난 세월 내가 본 설국 풍경이 꼬리를 물고 숨을 내쉴 때마다 허공 중에 하얗게 퍼져나갔다. 아-아. 그러나 1월 동장군엔 장사 없다. 빡빡 깎은 민머리가 시리어 망념도 운치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얼른 법당문을 닫고 돌아서야 했다.   눈이 침침해서 등을 더 환하게 밝혔다. 최근에 밤낮으로 문 닫고 용맹정진하듯 책을 읽었더니 시야가 흐려져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다. 안경을 바꿔 껴보아도 더 이상 글자가 선명하지 않게 되어서야 책을 덮었다. 아차 싶다가는 어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어려서부터 눈이 안 좋은지라 한쪽 눈이라도 죽는 날까지 멀지 않게 해달라고 관세음께 빌어보았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눈먼 아이처럼.   ‘무릎을 굽히고 두 손 모아 천수관음께 빌어 사뢰나이다. 천 손에 천 눈 하나를 덜기를. 두 눈이 먼 내라 하나쯤 은밀히 고치어 아아 나에게 끼쳐주신다면, 놓아주시고 베푼 자비 뿌리 되오리다.’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중) 긴 한숨에 어깨까지 내려갔다.     ■  「 계묘년 한 해 어떻게 살 것인가 희망에 기대어 계획해본 2023년 토끼처럼 가볍고 힘찬 걸음 기대 」    새해가 되고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해를 가리키는 이름도 숫자도 바뀌었다. 초연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자니 그러기엔 세월이 너무 빠르다. 이미 올린 기도 때문에 새해에 올릴 소원 찬스 하나까지 놓친 기분이다. 대체 왜 이렇게 시간은 잘 가는 것일까. 나이 먹는 게 아쉬운 것일까, 아니면 쳇바퀴 돌듯 살아서일까.   심원의마(心猿意馬)란 말이 어울리듯, 짧은 시간 안에 마음은 원숭이같이 산만하고, 생각은 말처럼 날뛰었다. 차가운 방석 위에 망연히 앉아 답도 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생각하다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오래전 새해를 맞은 도연명은 ‘새해가 열리고 닷새가 지났으니, 내 생도 장차 쉴 곳으로 돌아가리라(開歲後五日, 吾生行歸休)’ 하였다지. 모르긴 해도 세상에는 그처럼 쉴 곳을 향해 떠나고픈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도 그렇다.   『데미안』 첫 장에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려는 것. 난 그것을 살아보려 했을 뿐이다. 그게 왜 그리 힘들었을까?’라고 나온다. 지난해 힘들었다면 더 와 닿는 문장일 것이다. 간절히 원하는 삶을 살려 해도 인생은 녹록지 않은 법이니.   설령 그렇다 해도 새해가 되었으니 ‘희망’을 이야기하자. 그럴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지난 연말 ‘끝’이라는 이름으로 구분 지었으니, 이젠 ‘시작’을 강조할 때다. 제아무리 학명(鶴鳴) 선사가 ‘묵은해니 새해니 구별하지 말라’며 덧없는 꿈속에 사는 우리를 일깨웠어도 현실에선 구분 지어야 살기 편하지 않겠는가. 옛날 부처님이 본 해나 오늘 내가 본 해가 하나의 태양일지라도, 새해의 태양은 더 힘차게 솟아올랐으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우리말에도 1월을 ‘해오름 달’이라 일컫는다. 그 또한 ‘새해 아침에 힘 있게 오르는 달’이라는 의미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날들이어도 새 마음 내어 새날을 만들어보자. 사람의 성향이 호랑이 같든, 토끼 같든, 거북이 같든,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한 해지만, 새로이 설계하고 실행에 옮긴 이와 흐지부지 대충 넘긴 이에게 결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들어도 올해는 희망과 욕망을 버무려 알찬 한 해로 살아내시길 권한다.   기우고 기운 누더기 두 벌 세상에 남기고 가신 성철 스님이나 무소유를 강조하신 법정 스님을 생각한다면, 내가 말하는 희망은 한낱 욕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둘러보면 세상 모든 일에는 욕망이 섞여 있다. 물처럼 바람처럼 살고 싶은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고, 일도 잘하고 싶고, 욕망에도 초연하고 싶고…. 이렇게 멋진 ‘희망’에도 인간의 욕망이 듬뿍 담겨있다. 생각해보면 인간과 욕망은 천둥과 번개만큼이나 잘 어울린다.   기왕에 그렇다면 희망에 기대어 목표를 명확히 세우고 새해를 시작하면 어떨까. 토끼가 뒷발을 힘주어 차고 나가 껑충껑충 뛰어가듯, 1년을 잘 계획하고 준비하여 폴짝 뛰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끝으로 “그대가 나를 만나 날마다 하는 일이 무엇인가?” 묻는 석두 선사에게 방(龐)거사가 바친 게송 일부를 남긴다.   ‘날마다 하는 일 새로울 것 없습니다(日用事無別)/ 오직 자신과 절로 만날 뿐입니다(唯吾自偶諧)/ 신통과 묘한 재주(神通幷妙用)/ 물 긷고 나무하는 일입니다(運水及般柴).’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2023.01.04 00:25

  • [삶의 향기] 미소가 최고의 수행이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학 교수 새해 인사차 절 집안 가까이 사는 사형 스님을 찾아갔다. 인사동의 한 찻집 주인이 보내온 ‘노군미(老君眉)’라는 차를 선물로 챙겼다. 늙은 임금의 눈썹 같은 맛이 나는 차라는 이름이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노승에게 딱 어울리는 선물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사형 스님이 선의 지혜가 물씬 깃든 ‘눈썹 법문’을 들려준다.   “얼굴에 눈썹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얼굴에서 눈썹은 아무 역할을 못 하지만 없으면 꼴이 우습지. 모름지기 스님들은 눈썹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네.”   수행자의 마음은 평등심과 평정심으로 늘 그 자리에서 본분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눈썹은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 치켜올리면 화난 것이고, 아래로 내려가면 너그럽게 웃는 것이다. 눈 주위에는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네 개의 근육신경이 있다고 한다. 눈썹과 눈 주위의 근육은 불수근(不隨筋)이라고 하는데, 심장처럼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근육이다. 이 근육은 희로애락에 따라 움직인다. 성질이 나면 눈꼬리가 올라가고 기분이 좋으면 아래로 쳐진다. 그러고 보면 하회탈이야말로 멋진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눈꼬리와 입을 연결하여 함께 움직이게 한 것은 기발하기까지 하다.     ■  「 스님의 역할은 마치 눈썹 같은 것 서로 마음 통하는 염화미소의 힘 이웃에게 웃는 얼굴이 바로 보시 」    오늘날 명상 기법에도 미소가 적용된다. 미소 짓기나 상상기법으로 입과 눈꼬리를 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나도 참선 자세를 설명할 때 미소를 지으라고 권한다. 가벼운 미소도 이렇게 좋은 데, 좋고 나쁨의 분별을 떠나 저절로 표현되는 염화미소의 경지는 어떻겠는가!   초탈한 미소를 짓는 노승은 삼광사에 주석 중인 현명 스님이다. 삼광사는 한라산 중턱에 깃들어 있으면서 한라산을 편안한 모습으로 볼 수 있는 절이다. 오래도록 김장 김치며 된장·간장을 담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이웃에게 봉사하는 절로 유명하다. 천막교회는 익숙하지만 천막법당은 생소할 것이다. 천막법당으로 시작한 삼광사는 이제 전각 여러 채를 갖춘 절이 되었다.   “제주도에 살려면 신뢰를 얻어야 하네. 역사 속에서 제주는 왜구의 끝없는 침노가 있었고, 육지에서 온 조선 관리들의 수탈에 이어, 해방 이후에는 무자비한 4·3 학살의 상처가 드리워져 있다네. 예전에는 부처님오신날 등불도 대낮에 켰지.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지. 육지 사람들을 신뢰하기까지는 오랜 노력이 필요한 이유일세. 그런데 일단 그 믿음이 깊어지면 무한신뢰를 보내준다네.”   지난해 봄, 해남을 떠나 제주살이를 시작한 어설픈 사제에게 조언을 아낌없이 하시더니, 이번에는 새해 덕담으로 눈썹 법문을 들려주신다.   우리 세시풍습에도 눈썹에 얽힌 교훈이 있다.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하여 함께 모여 밤을 지새우며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그것이다. 『동국세시기』에 “섣달 그믐날 밤 인가에서는 방·마루·다락·곳간·문간·뒷간에 모두 등잔을 켜놓는다. 흰 사기 접시 하나에다 실을 여러 겹 꼬아 심지를 만들고 기름을 부어 외양간, 변소까지 불을 켜놓아 마치 대낮 같다. 그리고 밤새도록 자지 않는데 이를 수세(守歲)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암자에 미소굴이라 현판을 내걸고 사셨던 통도사 극락암 경봉 스님은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말 없는 묵묵함에도 법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장사 잘하는 상인은 수백 명이 있더라도 서로 통하기 때문에 눈썹만 끔적해도 알고, 손만 들어도 거기에 통하는 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서로 마주 보는데 눈썹 말이 건넌다. 묵묵히 있다가 눈으로써 미소 짓는다. 서로 웃지 않고 입만 벙긋 웃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미소이다”라고 하셨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12쌍의 신경근육과 3차신경절인 안면신경이 모두 얼굴에 집중되어 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심전심의 염화미소가 최고의 경지인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미소를 나누며 얼굴을 맞대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 그뿐인가. 친구와 한 공간에 있어도 휴대폰 문자대화가 편하고, 어른에게도 문자인사가 일상이 되었다. 이심전심은 고사하고 얼굴의 표정조차 없어지니 뇌는 점점 퇴화할 수밖에 없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좋지만, 새해에는 가까운 인연들과 자주 마주 보고, 자주 미소 짓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자신에게는 뇌를 발달시켜 지혜로워지는 공덕이 되고, 이웃에게는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큰 보시, 즉 화안시(和顔施)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베풂을 새해 벽두에만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옛 도인들은 묵은해, 새해를 나눠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미소가 최고의 수행인 이유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학 교수

    2023.01.03 00:33

  • [마음 읽기] 눈사람의 시간

    문태준 시인 지난주 제주에도 많은 눈이 내렸다. 육지에 일을 보러 나가려고 했으나 비행기편과 배편이 모두 끊겨 나갈 수가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꼬박 사흘을 집에서 살았다. 눈보라와 습설(濕雪)의 사흘이었다. 밭에 숲에 골목에 돌담에 인심(人心)에 눈이 쌓였다. 감귤나무와 동백나무와 대나무와 측백나무의 푸른 잎사귀에도 흰 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내 책상 위 한쪽에는 강정효 사진작가가 찍은 제주의 겨울 풍경 사진이 하나 놓여 있는데, 그 사진 속 설경을 내 집 주변에서 고스란히 만났다.   제주 출신의 강정효 작가는 『세한제주(歲寒濟州)』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펴내면서 이렇게 썼다. “제주의 겨울을 담아낸다면 무엇보다도 눈과 어우러진 돌담이 들어가야 제격이다. 제주의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바람결에 옆으로 날아와 돌담에 쌓이기 때문이다. 하얀 눈과 검은 돌담, 그 너머의 푸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 폭의 수묵화다.”     ■  「 거세게 눈보라 치던 폭설의 사흘 야생 생명의 위태로운 발자국 봐 고립의 때에 찾아온 공허감 느껴 」    아닌 게 아니라 눈보라가 치는 날 돌의 검은 빛과 눈의 흰 빛을 보았고, 측백나무처럼 잎이 지지 않는 나무들의 푸른 빛을 함께 보았다. 거센 바람에 밀리며 휘몰아쳐 가는, 헝클어진 눈보라의 시간이었다.   앞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고, 큰길을 향해 나 있는 올레의 눈을 밀쳤다. 눈을 치우다 말고 그새 뭉툭해진 비를 들고 서서 뒤돌아보면 비로 쓸어낸 길이 다시 흰 눈에 두텁게 덮여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직 쓸지 않은 눈 위에 나 있는 발자국을 보았다. 들개와 꿩과 고라니의 발자국이었다. 한파와 폭설 속에서 살아가는 야생의 생명이 낸 발자국이었다.   ‘혹한이 와서 오늘은 큰 산도 앓는 소리를 냅니다/ 털모자를 쓰고 눈 덮인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피난하듯 내려오는 고라니 한 마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고라니의 순정한 눈빛과 내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추운 한 생명이 추운 한 생명을/ 서로 가만히 고요한 쪽으로 놓아주었습니다.’   이 시는 작년 겨울에 쓴 졸시 ‘눈길’인데, 이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추운 생명들이 피난하듯 마을 가까이 내려와 낸 발자국이었다.   뒷마당으로 오가는 길을 내고 땅속에 묻어둔 김칫독 위에 눈사람을 하나 세워 놓았다. 눈사람은 눈이 오는 내내 있다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녹으면 함께 사라질 것이고, 그러면 그때에는 폭설이 다 지나가서 나는 일상을 회복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눈을 치우다 숨을 돌리는 때에 짧게 어떤 공허감 같은 것이 찾아왔다. 분주하게만 살다가, 바깥으로만 나돌다가 문득 갖게 된 이 고립의 시간에 허기 같은 것이 찾아왔다. 이상야릇한 느낌이었다.   허충순 시인이 쓴 시 가운데 ‘고요한 한낮’이 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화분에 꽃이 마르고/ 의자의 다리 하나는 기울고/ 자유도 뜻이 없다// 아직/ 내 귀는 듣고/ 내 입은 말한다.’ 이 시는 부재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듯하다. 사랑하던 사람이 지금 여기에 없다. 화분에는 꽃이 말랐다. 의자는 그것을 지탱하는 것의 일부를 잃었다. ‘자유도 뜻이 없다’라는 시구에는 큰 상실감이 배어있다. 사랑한 사랑이 없으니 내게 자유가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뜻으로 이해된다.   ‘맞은편’이라는 시에서도 ‘김이 나는 환한 쌀밥을 보며/ 생각한다// 오지 않는 사람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다 있다// 하나 비어 있는 자리에/ 저녁 햇살이 내리면// 밥을 먹는다는 것이/ 미안하다// 비어 있는 자리는 언제나/ 내 맞은편에 있다’라고 시인은 썼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듯해도 맞은편이 비어 있으니 그 부재를 견디기 어렵고, 시인의 마음은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끝없이 애틋할 뿐이다.   나도 폭설이 지나갈 때 부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먼 곳과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감정의 생겨남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요했지만 허전했다. 마치 어렸을 적에 이처럼 많은 눈이 내려 세상의 일을 잘 모르던 소년의 마음에도 쓸쓸하고 외롭고 슬픈 느낌이 깃들었던 저녁처럼.   내가 사는 동네에는 큰 피해가 없이 폭설이 지나갔지만, 곳곳에서 피해를 보았다는 소식이 들려와 마음이 아프다. 마당에는 잔설이 녹아 없고, 김칫독 위에 세워두었던 눈사람도 사라졌다. 폭설의 시간이, 눈사람의 시간이 지나갔다. 폭설로 보낸 사흘의 시간이 잔금이 많이 생긴, 흰빛의 백자발을 본 것 같다. 이런 폭설은 처음 겪었지만, 눈 위에 찍혀있던 추운 생명들의 발자국과 내게 문득 찾아 왔던 어떤 그리움과 슬픔의 감정은 잊지 못할 것 같다.   문태준 시인

    2022.12.28 00:41

  • [삶의 향기] 그걸 꼭 다 말로 해야 알아듣니?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수업 중에 한 학생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한국어와 같은 고맥락(high contextual) 언어와 독일어와 같은 저맥락(low contextual) 언어의 차이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고맥락과 저맥락 언어를 개념적으로 나누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두 언어를 들여다보니, 말하는 가운데 드러내어 표현되지 않은 맥락을 함께 고려하는 언어와 맥락보다는 문장 안에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차이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1980년대 배웠던 담화지향(discourse oriented) 언어와 문장지향(sentence oriented) 언어로 차이를 두어 설명했다. 꽤나 전문적으로 들리는 용어지만, 펼쳐놓고 보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  「 ‘주어’ 없어도 이해되는 우리말 귀가 아닌 마음으로 헤아려야 무뚝뚝한 속내에 담긴 다정함 」    이렇듯 우리나라 사람과 독일 사람의 언어습관에서 흥미로운 비교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예”가 “예”가 아니고 “아니오”가 “아니오”가 아니라는 말을 곧잘 한다. 상대방이 뱉어낸 말 그대로가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고 행간 속에 감추어진 의중을 함께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 독일 사람들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문장에서 모두 드러낸다. 그러니 심중을 헤아려 행간에 숨은 의도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고맥락 언어에서는 이처럼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맥락 속에 녹아있는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천재인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상에서 우리는 ‘아’로 말해도 ‘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심성을 가져야 한다. 왜 심성인지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헤아려 듣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자주 듣게 되는 ‘주어 없음’은 한국어의 고맥락 특성을 잘 말해준다. 우리나라 말에서는 ‘사랑해’에서 보듯이 주어나 목적어가 곧잘 생략된다. 그러나 이런 생략도 아무 때나 마구잡이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조건은 말하는 맥락 속에서 언제든 그 생략된 성분을 다시 찾아낼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 아무거나 함부로 생략하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나라 말에서는 주어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쓰임새다.   한 예로 우리나라 법원의 판결 선고는 보통 “○○에 대한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로 시작해서 “주문, 피고인 ○○을 징역 ○년에 처한다”로 맺음을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경우 그 판결 주체가 명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누가 (본 법원 혹은 법관) 이러한 판결을 내리는지. 그래서 이러한 판결문의 주체가 되는 주어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주어 없음’은 주어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나라 법정의 선고는 ‘주어 없음’으로 그 효력에 의문이 생길지도 모른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 소위 말하는 디지털 네이티브, 디지털 원주민이라는 (M)Z세대에도 고맥락 언어라는 말이 통할까. 그들이 디지털 기기를 통해서 흡입하는 모든 정보 단위들은 맥락적 배경에 대한 이해나 사고를 요구하지 않는다. 더구나 한번 새겨듣고 마음으로 헤아려야 하는 이중, 삼중의 이해 구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듣고 보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문명을 비판하는 많은 지식인은 디지털 문명 안에서 사람들이 너무나 표면적으로 생활하게 된다고 탄식한다. 니컬러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바다에서 이를 처리하는 속성은 바다의 그 깊은 심연을 모르는 채 오로지 서핑하듯 표면만을 훑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글을 대하는 태도는 ‘읽는’다라기보다 ‘본’다는 것에 더 가깝다.   예전 아버지들은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먼 무뚝뚝한 존재로 군림하셨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겉으로 잘 표현을 못 하셔서 평생 ‘사랑한다’ 같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 본 적 없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겉은 저러셔도 속은 그러신 분이 아니야”라며 그 쑥스러움에 담긴 속내에 뭉클해진다.   거대하게만 보이는 아버지의 등과 어깨가 그 인생을 감싸고 있는 맥락을 함께 이해한다면, 어쩐지 굽고 쓸쓸해 보이는 무게감과 다 내비치지 못하는 다정함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던 모습은 아니었을까. 어느 시인이 말한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처럼 쓸쓸하고 버거워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멋쩍은 어색함에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 두셨던 다정한 한마디를 자식 된 내가 들려드리고 싶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2022.12.27 00:37

  • [마음 읽기] 보수의 품격

    장강명 소설가 보수와 진보는 왜 그렇게 다른 세상을 사는 것만 같을까. 한 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갈라지는 것은 필연일까. 그런 갈등은 사회 발전에 어느 정도나 필요할까. 무엇보다 보수와 진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랜 의문이었다.   어떤 진화심리학자들은 보수와 진보라는 성향이 오랜 세월을 거쳐 우리 유전자에 새겨졌다는 가설을 제안한다. 외부인을 경계하지 않는 부족은 기습 공격으로 멸족할 위험이 있다. 외부와 교류하지 않는 부족은 고립되어 멸망한다. 사회에 낯선 자를 경계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려는 성향이 적당히 섞여 있는 게 진화적으로 유리했다는 얘기다.   사람이 도덕 판단의 기준을 몇 종류나 가졌는지에 따라 정치 성향이 좌우된다는 도덕심리학 이론도 있다. 그에 따르면 진보주의자는 어떤 일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지, 그리고 공정한지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는 거기에 더해 공동체에 대한 헌신, 질서에 대한 존중, 고귀함을 향한 노력 같은 요소도 고려하는 것 같단다.     ■  「 잘못 인정할 때 품격도 드러나 고립의 길 택한 듯한 정부·여당 공동체를 향한 헌신 보고 싶어 」    내게는 현대 심리학자들보다 20세기 정치이론가 러셀 커크의 말이 더 다가온다. 커크는 진보의 가치를 인정하는 보수주의자였다. 다만 커크에 의하면 보수주의자는 보다 신중하다. 사회가 복잡한 유기체임을 이해하고, 인간의 지혜가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모든 걸 걸지 않고 전통을 존중한다.   변화의 시대에 인기 없는 태도겠다. 그래도 불확실한 접근법보다 오랜 가치, 극적인 돌파구보다 흔들림 없는 원칙, 순간의 감흥보다 일관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지닌 이에게 품격이 깃들 수는 있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품격은 그가 가치·원칙·일관성을 위해 이익·자존심·감정을 억누를 때, 다시 말해 책임을 피하지 않으며 잘못을 인정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서론이 길었다. 본론이 뭐냐 하면, 보수를 자처하는 지금 정부 여당에서 품격을 보지 못하겠다는 얘기다. 대통령실은 MBC와 드잡이를 하다가 MBC와 수준이 똑같아졌다. 전당대회를 불과 두 달여 앞두고 경선 룰을 바꾸려는 여당의 모습에서 어떤 원칙과 일관성을 보기는 한다. 계파 이익이 우선이라는 거. 나는 정부 여당이 품격만 잃고 있는 게 아니라, 고립되어 가는 중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비상경제민생회의나 국정과제점검회의 같은 대통령 주재 회의를 TV로 생중계하는 모습이 특히 민망하다. ‘쇼다’ ‘아니다’ 하는 정치권 설전이 무색한 게, 애초에 정치 지도자가 여는 ‘국민과의 대화’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두 쇼 아닌가. 그런 행사를 왜 자꾸 여는 걸까. 무슨 극적인 돌파구를 기대하는 걸까. 요즘 TV 보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나저나 대통령은 친한 의원들과 계속 텔레그램으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을까.   서울 한복판에서 참사가 벌어지자 대통령은 국가안전시스템점검회의를 열고 경찰을 호되게 나무랐다. 이때는 생중계는 아니었지만, 1만자 분량이나 되는 대통령의 발언을 대통령실에서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당연하게도 그 의도가 훤히 보여 효과는 반감되었다. 내부 질책을 공개하는 일이 품격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대통령은 그 회의에서 “책임은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하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져라’라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나는 경찰이 잘못했다면 경찰청이 소속된 행정안전부나 행안부 장관을 임명한 대통령은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장관이 대통령 측근이면 괜찮은 건가. 그 부처 이름에는 안전이라는 단어가 왜 들어 있는 건가. 야당 대표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 아무래도 다 상관없어지는 걸까.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있잖아. 그걸 조치를 안 해요?” “현장에 나가 있었잖아요.” 국가안전의 ‘시스템’을 점검하는 회의에서 대통령은 ‘현장’을 여러 번 탓했다. 어쩌면 정말 현장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그날 그 시각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인명 사고가 벌어질 때마다 대통령이 뭘 했느냐고 따지는 것도 이상한 풍경이다.   그렇다면 현장이 잘 돌아가게, 현장에 있는 이들이 힘을 갖게 사회 시스템을 뜯어고치자. 대통령과 장관의 권한을 줄이자는 얘기다. 다음 총선이나 지방선거에 맞춰 분권형 개헌을 추진하자. 필요하다면 대통령 임기를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대통령실과 내각에 율사 출신이 많으니 개헌 추진에 가장 적합한 정부 아닐까 한다. 지금 무엇이 진정으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고 고귀한 일일까.   장강명 소설가

    2022.12.21 00:25

  • [삶의 향기] “나, 잘 보내도라”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우리 어머니는 나 말고 차녀 덕수 아우도 교무가 되도록 일천정성을 들여 두 딸 모두를 교무로 만들고 대단히 만족해하셨다.   방학 때마다 어머니 곁으로 오던 딸들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각기 소임에 따라 교당 교무가 된 뒤로는 좀처럼 딸들을 만날 수가 없게 되자 어머니는 아예 고향의 기와집과 농토를 모두 처분하고 원불교 총부가 있는 익산으로 이사하셨다. 그리고 작은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총부에 오는 딸들을 기다리셨다. 어머니에게는 두 딸이 큰 손님이었다. 딸들이 올 때는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아랫목에 방석까지 깔아 놓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솜씨껏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딸들이 맛있게 먹는 것으로 큰 재미를 삼으셨다.   나의 첫 소임지는 사직교당이었다. 30대 초반, 개척교당에서 애쓴다고 여기셨던 어머니는 갑자기 “호강하려고 교무 되었느냐? 고생 끝에 낙이 있다. 모든 것을 잘 참고 견뎌내라” 하셨다. 그리고 “공금이 무서운 것이다. 절대로 공금을 함부로 쓰지 마라, 먹고 싶은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가 준 이 돈으로 써라” 하시며 돈이 든 봉투를 주셨다.     ■  「 두 딸 모두 성직자로 키운 어머니 죽음 앞두고 당부하신 그 한마디 오늘 해가 져도 내일 또 떠오른다 」    5월 스승의 날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매번 예쁜 빛깔의 속바지를 지으시고, 두 딸에게 ‘사직교당 스승에게’ ‘화곡교당 스승에게’라고 써서 하서를 보내주셨다. “스승의 날을 맞아 축하한다. 일체대중을 다 제도하고 이 어미까지도 제도해주기 축수한다”라고 적으셨다. 내 나이 60이 되자 어머니는 갑자기 1000만원의 큰돈을 내밀으셨다. “너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어서 엄마가 오래전부터 준비한 너의 회갑돈이다” 하셨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 완강하게 거부하며 그 돈을 절대로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돈으로 어머니 택시나 타고 다니세요”라고 했다. 내가 너무 완강함을 보시고 그 돈을 도로 챙기셨다. 그러다가 내가 캄보디아 지뢰를 제거하느라 동분서주 애쓸 때 어머니께서 “네가 생명을 살리려고 애쓰니 이 돈을 거기에 보태라” 하셨을 때는 “어머니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한평생 우리 자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행여 공든 탑이 무너질세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종사님 성탑을 찾아 기도정성을 바치셨다.   어머니가 자력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요양원으로 가시게 되었다. 잘 계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병환이 나시어 혼수상태에 빠지셨다가 5일 만에야 깨어나셨다. 깨어나신 어머니는 딴 세상에서 오신 분 같았다. 맨 먼저 하신 말씀은 “나 잘 보내도라”였다. 스스로 열반의 시기가 가까워져 오고 있는 것을 예감하신 듯 했다.   나는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께 마음을 가다듬고 “어머니, ‘저 해가 오늘 비록 서천에 진다 할지라도 내일 다시 동천에 솟아오르는 것과 같이 비록 이 생에 죽어간다 할지라도 죽을 때에 떠나는 영식이 다시 이 세상에 새 몸을 받아 나타나게 되나니라’고 한 대종경 천도품 말씀을 믿고 계시죠?” 하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머니가 20대에 원불교를 믿기 시작해서 60년보다 더 긴 세월 동안 법회 때마다 법설을 들으신 것은 어머니의 정신적 양식이었다. 어머니는 교당의 설법시간에 들은 대로 어떤 경우에도 죄 받을 일은 짓지 않고 복 받을 일만 가려가며 한평생을 열심히 살아오셨다. 어머니의 다음 생은 그야말로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젊은 날 할머니로부터 무서운 시집살이를 하셨지만 “내가 잘못 짓고 나와서 그러지, 너희 할머니도 남한테는 참 잘하셨다”라고 말씀하셨다. 인과의 이치를 믿으셨기 때문에 금생에 모든 것을 풀고 내생에는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 위해 할머니에게도 잘하려고 애쓴다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독특한 대화법을 생각해냈다. 어머니와 눈을 맞추면서 “우리 엄마 까꿍” 하면 어머니도 나를 바라보며 “우리 딸 까꿍” 하셨다. 어머니는 ‘까꿍’을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자주 까꿍을 했다.   “우리 엄마 까꿍.”   “우리 딸 까꿍.”   어머니와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하고 다정한 대화였다. 나는 어머니 침대 곁에 앉아서 어머니 손을 잡고 책을 읽었다. 젊은 날 일을 많이 하셨을 때의 어머니 손은 거칠었는데, 이제 어머니의 손바닥은 흰떡 절편같이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어머니의 내면세계는 원불교 교법정신으로 저신저골(低身低骨)이 되셨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지만, 마치 엄동설한이 지나면 새봄이 오듯이 노쇠한 그 몸은 죽어간다 하여도, 가면 다시 오는 거래(去來)의 이치가 있는 줄도 확연히 믿고 계셨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 공포가 없고 편안하게 순리로 받아들이며 열반하셨다.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2022.12.20 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