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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그래, 지옥은 내가 가겠다”
오는 26일 서거 113주년을 맞는 안중근 의사와 최근 타계한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그 둘은 동아시아가 평화롭게 어울리는 세상을 호소했다. 지난 13일 뒤늦게 부고 소식이 들려온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요즘 말로 ‘학폭’의 희생자였다. 가해자는 교장선생님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극성일 때 초등생인 오에는 날이면 날마다 교장의 매질을 견뎌야 했다. 그때 소년은 결심했다. 언젠가는 그런 어린이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 「 일본의 사죄 말한 오에 겐자부로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와 통해 한·일의 미래, 멀지만 가야 할 길 」 소년은 왜 매를 맞았을까. 지금 돌아보면 터무니없다. 당시 학교에선 매일 조례(朝禮)가 열렸는데, 교장선생님은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천황 폐하께서 죽으라고 명령하시면 어떻게 하겠는가”를 물었다. 대답은 하나였다. “죽겠습니다. 할복해서 죽겠습니다.” 소년 오에는 머뭇거렸다. 작은 시골에 사는 그를 천황이 알고 계실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가 주저하는 사이 격노한 선생님은 매를 들었다. 2006년 5월 고려대를 방문한 오에가 ‘나의 문학과 지난 60년’ 강연에서 공개한 일화다. 초등생에게도 충성과 희생을 강요한 일본 군국주의의 한 단면이다. 개인을 삭제하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반추하게 된다. 일본인도 이랬는데 하물며 식민지 한국인의 처지는 어땠을까. “일본은 아무리 사죄해도 충분하지 못할 만큼의 막대한 범죄를 한국에 저질렀다”고 비판해 온 오에의 진심을 알 것 같다. 노벨문학상 작가 오에의 17년 전 강연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역시 태평양전쟁 때였다. 어머니가 『허클베리핀의 모험』 헌책을 사주셨는데, 작가가 미국인 마크 트웨인이었다. 미국과 교전 중이라 미국 책을 읽으면 매 맞기 십상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꾀를 냈다. 마크 트웨인은 독일인이고 필명만 기억하기 쉽게 미국식으로 바꿨다고 대답하라고 했다. 실제로 오에는 교장선생님에게 붙들려갔는데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했더니 “옳지, 잘 알고 있구나”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일본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동맹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절의 얘기처럼 들린다. 오에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에서 일생의 화두를 얻었다. ‘그래, 지옥은 내가 가겠다(All right, then, I’ll go to hell)’다. 소설에서 ‘불량소년’ 헉이 도망친 흑인 노예 짐을 밀고하지 않고 차라리 지옥이나 가겠다고 결단하는 대목이다. 기존의 비틀린 도덕과 법률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으로, 오에는 이 말을 자신의 문학과 사회활동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오에가 2004년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9조의 모임’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이런 맥락에 닿아 있다. 동아시아의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한·중·일 3국의 화해를 모색하려고 했다. 물론 그는 일본의 진정한 사과부터 요구했다. 노년까지도 반전 시위에 나서며 일본의 우경화를 염려했다. 비록 일본 사회의 물줄기를 돌리지 못했지만 인간과 역사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9조의 모임’의 목적은 크게 보면 한·중·일의 공존을 희구한 안중근 의사와도 연결된다. 일본 정치학자 야마무로 신이치는 일본의 전후 반전사상을 안중근과 연동시켰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서 일본국 헌법 9조로 이어지는 사상 수맥을 발견했을 때 몸이 떨려오는 체험을 했다”고 했다. 오는 26일은 안 의사 서거 113돌. 오에와 안 의사의 교집합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로 한·일 관계 정상화에 시동이 걸렸다. 정치·경제·안보협력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다. 반면에 후폭풍이 거세다. 굴욕외교 논란도 있다. 특히 일본은 과거사에 관한 한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마음의 교류까지는 갈 길이 멀다. “모든 걸 책임지겠다”는 윤 대통령이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결기로 앞길을 뚫어낼지 주목한다. 윤 대통령은 미래를 약속했다. 하지만 현재가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다. 이참에 안 의사 저술 원본이나 유해 자료 발굴 협조를 일본에 요청하면 어떨까. 마침 보훈처도 보훈부로 승격을 앞두고 있다. 신간 『유해 사료, 안중근을 찾아서』(김월배 편저)를 보면서 든 단상이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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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소주 체질’ 한국인
소줏값 인상 여부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서울의 한 마트에 진열된 여러 종류의 소주. [연합뉴스] 밥상에 놓인 소주병에 시선이 멈췄다. 병목 라벨에 찍힌 숫자 30이 선명하다. 알코올 도수 30도를 뜻한다. 1970년 산화한 노동운동가 전태일을 다룬 애니메이션 ‘태일이’(2021)의 한 장면이다. 미싱사였던 태일이 아버지의 상차림 풍경이다. 그는 김치와 풋고추를 안주 삼은 소주 한잔에 하루의 시름을 달랬다. ■ 「 “소주 값 인상 자제해야” 관치 논란 소설가 이청준이 말한 별난 ‘주법’ “소주 먹되 남들에겐 비싼 술 줘야” 」 노동자 출신의 시인 박노해는 ‘노동의 새벽’에서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고 했다. 그가 부은 소주는 몇 도일까. 1984년 첫 시집이 나왔으니 25도였을 것이다. 73년 업계 1위였던 진로는 30도 소주를 중단하고 25도 제품만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 주정 원료 수입이 억제되자 알코올 함량을 낮췄다. ‘소주=25도’ 공식은 20년 정도 유지됐다. 91년 희석식 소주 도주 제한이 완화되면서 23도, 21도, 20도 소주가 잇따라 나왔다. 요즘 흔히 마시는 소주는 16도 후반대다. 이달 초 충남 지역 소주업체는 14.9도 제품까지 출시했다. “캬~~” 탄성과 함께 즐기는 ‘소주=독주’는 이제 옛말인 듯싶다. 세상이 그만큼 순하게 바뀐 걸까. 글쎄올시다. 지난해 합계 출산율이 0.78명으로 추락할 만큼 시대는 악다구니로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요즘 소주가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업체들이 원가 상승을 이유로 값을 올리려 하자 정부가 실태조사 카드를 꺼내들었다. 음식점 소주 값 6000원 우려가 커지자 당국이 즉각 반응했다. 관치 논란에도 업체들은 일단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터질 휴화산 상태다. 정부가 억누른다고 물가가 “예”하며 잠잠해지진 않을 터다. 왜 소주는 늘 시끄러울까. ‘소주=서민’ 등식 때문이다. 소주는 한국의 분단·산업화·민주화 궤적과 함께해 왔다. 소주가 ‘한국인의 술’로 자리매김을 시작한 것은 6·25 이후다. 북한 피란민이 내려오면서 소주 문화도 함께 월남했다. 1935년 『조선주조사』에 따르면 남한 지역은 막걸리 소비 비중이 80%대였던 반면, 북한 지역은 반대로 소주가 90%에 이르렀다. 물론 그때는 희석식이 아닌 증류주 시대였다. 2021년 말 개봉한 애니메이션 '태일이'에 묘사된 전태일 아버지의 밥상 모습. [화면 캡처] 소주 대중화에 가속페달이 붙은 것은 1960년대부터다. 박정희 정부가 64년 12월 증류주 생산을 전면 금지하면서다. 쌀 부족에 따른 식량난 타개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전국 각지의 증류주 공장이 속속 문을 닫게 됐고, 대기업 독과점 중심의 희석주 세상이 열렸다. 이후 값싼 희석주는 60~70년대 저임금에 기반한 산업화 사회를 떠받쳤다. 메타버스·인공지능으로 달려가는 요즘이라지만 2021년 성인 1인당 평균 53병을 마셨다 하니 한국인의 소주 체질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권력자들이 소주 값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서편제’ 작가 이청준의 단편 ‘소주 체질’(1988)에 꽤 독특한 인물이 나온다. “나는 소주면 그만”이라며 늘 소주만 즐기지만 남들에게는 비싼 양주를 선물하는 갈곡(葛谷)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좋은 술을 보내서 혼자 마시게 해줘 봐. 제놈이 사람이라면 남이 준 술을 마시면서 심사가 사나워질 까닭이 있겠어? 부질없는 주사보다 그 술하고 조용히 속 이야기나 나누게 되기 십상이지. 제물에 고맙고 즐거워지는 거구.” 갈곡의 주법은 명징하다. 원망과 보복, 음모와 책략이 아닌 감사와 겸손, 대화와 여유의 소주를 얘기한다. 정치·통치의 지향점과 다를 바가 없다. 틈만 나면 반대 진영에, 또 유권자에게 “소주 한잔해야 하는데”를 입버릇처럼 내뱉는 정치인과 품격이 다르다. 일례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퇴근길 남대문시장에서 시민들과 소주 한잔하겠다는 공약을 지키지 못했고, 호주가로 소문난 윤석열 대통령이 야당 인사들을 초대해 소주상을 차렸다는 소식도 들은 적이 없다. 소주 값 자제 요청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즐겁게 소주 잔을 기울일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술자리의 객설일 뿐일까.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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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진짜 연포탕을 먹고 싶다
산낙지를 맑고 깨끗하게 끓어내는 요즘 연포탕.(왼쪽) 해장에 제격이다. 오른쪽은 두부를 닭고기 국물에 끓여 먹는 조선시대 연포탕. 다산 정약용 집안에 내려오는 음식을7대 종부 이유정씨가 재연했다. [중앙포토] 봄이다. 어제는 봄비 내리고 새싹 튼다는 우수(雨水)였다. 봄의 길목 입춘(立春·4일)을 지나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驚蟄·3월 6일)도 지척이다. 산도 들도 바다도 바빠지는 때다. ‘뻘밭의 산삼’ 낙지도 새 생명을 낳으러 개펄로 나올 것이다. ■ 「 여야 모두 상실한 연대·포용·탕평 병든 소 살리는 낙지의 부드러움 “맛은 혀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 」 강화도 시인 함민복은 낙지에게서 겸손함을 본다. ‘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지/ 집들이 구멍이네/ (…) / 딱딱한 모시조개 구멍 옆 게 구멍 낙지 구멍/ (…) / 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제 몸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지은 놈 하나 없네.’(‘뻘밭’) 병든 소도 벌떡 일으킨다는 낙지의 힘은 부드러움에서 나오는 모양이다. 그 낙지가 요즘 뉴스에 오르내린다.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서 ‘연포탕’이 등장하면서다. 김기현 후보가 ‘연포탕'(연대·포용·탕평)을 캐치프레이즈로 들고 나오면서 연포탕을 잘 끓였느니, 못 끓였느니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김 후보는 산낙지가 꿈틀거리는 연포탕을 기자들에게 내놓기도 했다. 말랑말랑한 음식 하면 두부가 빠질 수 없다. 영양소가 풍부하고 소화도 잘된다. 하지만 조심하시라. ‘두부 먹다 이 빠진다’는 속담처럼 매사 성급하게 달려들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낙지와 두부도 결코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다. 연포탕도 그렇다. 낙지와 두부라는 두 재료가 교묘하게 얽혀 있다. 낙지탕과 두부탕이라는 별개의 음식이 세력 다툼을 하다가 이제 ‘연포탕=낙지탕’ 공식이 굳어지게 됐다. 연포탕은 원래 두부탕이었다. 한자 연포(軟泡)가 두부를 가리킨다. 지금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연포탕을 찾으면 ‘두부와 닭고기 따위를 넣어 맑게 끓인 국’이라고 나온다. 조선시대 두부는 귀한 식재료였다. 주로 사찰에서 만들어 공급했다. 기름에 지진 두부를 꼬치에 꿰어 닭, 혹은 소고기 국물에 끓여 먹는 연포탕은 양반들이 연회에서 즐긴 고급 음식이었다. 이른바 연포회가 유행했고, 그 폐해가 커지자 영조는 금지령까지 내렸다. 낙지탕은 왜 연포탕이 됐을까. 음식문화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설명이 흥미롭다. 한국의 장터를 순례한 그에 따르면 현재 연포탕의 뿌리는 목포·영암 등 남녘 바닷가에서 먹던 낙지탕이다. 1960~70년대 ‘서울로~ 서울로~’ 행렬과 함께 냉장유통 기술이 발전하면서 낙지탕의 북진이 진행됐다. 시원하고 칼칼한 맛을 주당들이 반겼고, 80년대 후반 이후 외식의 한 가지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주 교수는 연포는 ‘뽀글뽀글 거품’에서 비롯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렇듯 연포탕 하나에도 한국의 도시화·산업화 과정이 담겨 있다. 광부들의 목구멍에 낀 탄가루를 씻어냈던 삼겹살이 축산업 발전, 도로망 확충 등과 함께 ‘국민음식’ 반열에 오른 것과 비슷한 행로를 밟은 셈이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는 시구처럼 ‘연포탕 함부로 말하지 마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산낙지 값이 싸졌다지만 연포탕은 아직 서민이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지 않은가. 예부터 음식은 정치였다. 국민의 배를 든든하게 채우는 게 곧 정치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또 연대·포용·탕평, 소위 연포탕 정치는 동서고금을 꿰는 통치 원리였다. 여야와 진영,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한데 현실은 정반대다. 구호와 실제가 어긋날수록, 그 틈새가 벌어질수록 정치에 대한 체념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봄은 왔건만 정치판은 아직 혹한기다. 윤심(尹心)의 실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의도의 혈투, 용산의 암투 속에서 연대·포용·탕평이란 명분은 연출·포장·탕진의 잡탕으로 전락한 꼴이다. 천길 벼랑 끝에 선 야당 대표는 말할 것도 없다. 요리가 취미요 장기라는 윤 대통령은 올봄 어떤 상을 차려낼까. 집권당의 ‘치프 셰프(명예대표)’에 오를 것인가, 아니면 국민의 ‘대령숙수(待令熟手)’가 될 것인가. 요리의 최고 경지는 무엇일까. “맛이란 혀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간디)이라고 했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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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고려 금동불상은 영원하다
지난 1일 대전고등법원에서 일본 사찰의 소유권을 인정한 금동관음보살좌상(왼쪽)과 경기도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둘이 어딘 듯 닮아 보인다.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사진 문화재청] 가로 56㎝, 세로 45.5㎝, 높이 50.5㎝, 무게 38.6㎏의 불상 한 점이 있다. 고려 말 금동관음보살좌상이다. 전문가들은 고려시대 불상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온화하고 넓적한 얼굴, 가슴에 두른 목걸이, 머리 위의 보관(寶冠), 무릎을 덮은 영락(瓔珞·구슬) 장식 등 넉넉하고 개방적인 고려의 향기를 담고 있다. 이 불상이 요즘 뜨겁다. 아니 지난 10여 년 계속 달아올랐다. 소유권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대립해 왔다. 그간 두 차례 소송이 있었는데 1심에선 한국의 손을, 2심에선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판결까지 아직 상당 시간이 남아 있지만 양국의 자존심, 외교력과 국제법까지 걸친 사안이라 논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 「 일본에 건너간 불상 훔쳐와 논란 소유권 놓고 1, 2심 판결 뒤집혀 절도과 환수 사이, 자존심 지켜야 」 가장 큰 문제는 이 불상이 한국인이 일본에서 훔쳐 온 문화재라는 데 있다. 2012년 10월 한국인 넷이 쓰시마 관음사에 소장된 불상을 절취해 부산으로 밀반입하려다 적발됐다. 한마디로 장물에 해당한다. 이후 양상이 복잡해졌다. 충남 서산 부석사 측이 원래 소유권을 주장하며 2016년 우리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951년 일본 사찰 측이 불상 복장(腹藏) 유물에서 발견한 ‘1330년 고려 서주(서산) 부석사에서 이 불상을 조성했다’는 결연문을 근거로 들었다. 왜구가 약탈해 갔다고 주장했고, 1심 재판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지난 1일 2심의 판단은 달랐다. 700년 전 고려 부석사와 현재 부석사를 같은 사찰로 볼 수 없고, 왜구가 훔쳐 간 정황은 있지만 관음사가 양국 민법과 국제법 기준인 20년 이상 점유해 왔다는 점을 들어 일본 측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2심에 대한 반응도 대비된다. 한국 조계종은 “약탈 문화재에 대한 면죄부를 준, (문화재 반환의) 가장 나쁜 선례를 제공한 몰역사적 판결”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반면에 일본 언론은 “한·일 관계 개선의 흐름을 뒷받침” “양국 관계 개선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는 피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한데 모두 ‘팩트’에 어긋난다. 우리로선 못내 아쉽지만 왜구가 불상을 앗아갔다는 사료를 아직 찾지 못했다. 일본 언론의 해석도 제 논에 물대기일 뿐이다. 고려 불상과 강제징용 사이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 2심 재판부도 “민사소송은 소유권 귀속을 판단할 뿐이다. 한국 정부는 국제법 이념·협약 등을 고려해 불상 반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적시했다. 특히 일본의 반응이 군색하다. 2015년 군함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최근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재추진 결정 과정에서 지워버린 조선인 강제노역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 상황이 아닌가. 또 신년 외교연설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10년째 되뇌고 있다. 이번 판결이 “‘반일 무죄’ 기조에 변화가 생겼다”(요미우리)는 평가는 되레 사태를 왜곡할 뿐이다. 우리도 더욱 의연할 필요가 있다. 문화재 환수는 복잡하고 미묘한 이슈다. 이번 불상은 ‘훔쳐 간(추정) 물건을 다시 훔쳐 온 물건’이라는 미증유의 일이라 치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문화재 환수에선 불법·부당 반출을 입증하는 자료 확보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절대 감정으로 풀어갈 사안이 아니다. 약탈 사실을 먼저 입증하고, 국제법 절차에 따라 소유권을 돌려받는 게 문화국가의 품격이요, 글로벌 스탠더드다. 향후 대법원 판결을 예단할 순 없다. 다만 “원래 우리 것”이란 목마른 논리만 앞세우면 명분과 실리를 다 잃을 수 있다. 설혹 불상을 일본에 되넘겨준다 해도 고려 불상이 일본 불상으로 둔갑할 순 없다. 마음 상할 판결, 일희일비할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학문적 고증과 외교적 대응, 국제적 공감이란 숙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게 바로 K컬처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현세에서는 재액을 없애 복을 받고 후세에서는 함께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랍니다’라는 불상 발원문을 반추해 본다. 불법(佛法)과 불법(不法)은 전혀 다르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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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토끼는 숨 쉬고 싶다
2023년 계묘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 곳곳에 '토끼' 작품 10점이 새로 전시됐다. 문자도 병풍에 포함된 달나라 토끼 그림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모두 토끼 때문이었다. 지난해 성탄절 타계한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에 나오는 ‘꼽추’와 ‘앉은뱅이’가 그랬다. 도망친 서커스단 사장을 찾아 나선 날 “오늘 죽어 살면서 내일 생각은 왜 했을까”라는 꼽추의 질문에 앉은뱅이가 대답했다. “목돈이 필요했으니까. 토끼새끼들을 넣어 기를 토끼집이 필요했지.” 조 작가의 사후 다시 집어 든 『난쏘공』에서 토끼는 오직 이 대목에만 등장한다. 그래도 계묘년 벽두에 마주친 소설 속 토끼는 각별했다. 『난쏘공』의 중심인물 ‘난장이’가 갖은 모멸과 고통, 즉 지독한 가난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토끼새끼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감상에도 젖었다. ■ 「 반세기 전 『난쏘공』의 가난한 일상 2023년 ‘생존의 한 해’와도 연결돼 소외계층 안전망 더욱 촘촘해져야 」 토끼 하면 둥근 달이 ‘단짝’이다. 새해 축하 그림 메시지가 그랬다. 그중 전각가 진공재의 소품이 눈에 띄었다. 토끼 두 마리가 방아를 찧는 예의 그 장면인데, 거기에 달린 문구가 웅숭깊다. ‘언덕 위 풀꽃 뜯을 때는 각각/ 달나라 방아 찧을 때는 함께’다. 손에 손잡고 가는 새해에 대한 바람이리라. 1978년 6월 출간된 `문학과지성사` 의 초판본 (왼쪽)과 2000년 7월 장정을 바꿔 나온 `이상과힘`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앙포토] 『난쏘공』의 난장이도 달나라를 소망했다. 그의 꿈은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보는 것이었다. 그에게 달은 사랑의 땅.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이 기계로 전락한 곳이 아닌 ‘모두에게 할 일이 있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물론 그 꿈은 이뤄질 수 없었다. 지난 4일자, 중앙일보 등 주요 일간지는 약속이라도 한 듯 1면에 달에서 본 지구 사진을 실었다. 한국 최초의 달 탐사 궤도선 다누리가 촬영한 지구와 달 표면 풍경이다. “마침내 우리도 달에 간다”는 기대에 뿌듯했지만 달나라 근무를 꿈꾸었던 난장이도 떠올랐다. 물론 다누리호 사진에는 토끼가 없다. 하지만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는’ 난장이의 소망은 여전히 애달프다. 『난쏘공』은 1970년대 얘기다. 고도성장기의 그늘을 보듬었다. 노사문제·빈부차별에 분노하되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지금껏 321쇄, 148만여 부가 팔린 ‘문학적 사건’으로 꼽히는 이유다. 게다가 소설 속 노조는 회사 편을 드는 ‘어용’에 가깝지만 2023년 민노총 등 오늘의 거대 노조단체는 기득권과 개혁 대상 1순위로 언급되니 격세지감도 느낀다. 그런데도 부의 양극화는 수그러들 줄 모르니 이 또한 대단한 모순이다. 다시 토끼 얘기다. 예전 ‘귀여운’ 토끼가 이제 ‘무서운’ 토끼로 돌아왔다. 지난해 영국 부커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이른바 K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다. 상대방을 짓누르고 연줄과 금력으로 일어선 기업인 집안이 토끼의 저주를 받아 처참하게 붕괴하는 공포 판타지다. 연약한 토끼의 역습이랄까. 약육강식, 뒤틀린 세상에 대한 비판이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신년음악회 풍경이 흥미로웠다. 국악·성악·가요·뮤지컬 등 정상급 음악인이 출동한 이날, 윤석열 대통령 부부 옆에 소설가 정보라가 함께했다. 지난해 한국문학을 빛낸 작가로 초청받았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자유와 경쟁’을 내건 윤 대통령과 ‘차별과 약자’를 파고든 작가의 동석이 기자에겐 꽤 낯설어 보였다. 대립 속 긴장과 비슷했다. 이날 음악회에는 장애인 예술가, 한부모 가족, 소년가장 등 소외계층이 다수 초청됐다. 통합의 메시지다. 다만 보여주기 이벤트로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더욱 중요한 건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짜는 일이다. 반세기 전 난장이 가족을 옭아맨 ‘강자들의 법’은 여전히 막강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올 우리 사회의 화두는 생존, 가난한 토끼들의 추락이 더는 없으면 한다. “옛날 잠수함엔 토끼를 태웠답니다. 토끼의 호흡이 정상에서 벗어날 때부터 여섯 시간을 최후의 시간으로 삼았지요. 그 후엔 모두 질식하여 죽게 되는 거요.”(박범신 ‘토끼와 잠수함)’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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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한 끼도 부담스러운 청춘
지난 9월 2학기 개강을 맞아 친목을 다지고 있는 송원장학회 학생들. [사진 송원장학재단 밴드] “학식이라도 마음 편히 먹고 싶다”는 앳된 청년의 호소에 가슴이 아렸다. 지난 17일 한 장학회의 2023학년도 장학생 선발 면접장에서다. 그 청년의 스펙은 모자람이 없었다. 외국어고를 나와 올해 서울대에 합격했다. 등록금도 전액 국가장학금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대학이 배를 채워주진 않았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고, 근로장학금도 받았지만 생활비는 항상 쪼들렸다. 더욱이 집안에 기댈 형편이 아니었다. 부친의 사업 실패에 코로나 펜데믹이 겹치면서 빚이 4억여원으로 불어났다. 다섯 가족 모두 신용불량자가 됐다. ■ 「 ‘부의 대물림’으로 변한 대학교육 이 시대 장학금이 더 절실한 이유 청년세대에 ‘양극화 짐’ 덜어줘야 」 청년은 “종일 굶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무거워진 마음에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단다. 그래도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믿는다고 했다.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해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다졌다. 이날 면접에는 총 27명이 참여했다. 그들의 처지는 대체로 비슷했다. 가난한 환경, 뜨거운 학구열, 사회에 이바지하는 삶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2007년 금융위기, 그리고 최근 팬데믹 사태까지 지난 시간 이곳에 몰아닥친 한파가 청년세대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날개 없이 추락한 부모 세대의 초상도 엿보였다. 앞서 말한 장학회는 1983년 출발한 송원장학회다. 중화학 소재를 주로 만드는 태경그룹 김영환(1933~2014) 회장이 학창 시절 허기를 달래며 공부했던 경험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게 설립했다. “사업 목적이 장학재단 설립”이라고 믿은 그가 제시한 장학생 선발 기준은 오직 한 가지. 가정 형편이 곤란하고 학업 지원이 절실한 학생이다. 이 원칙은 지난 40년간 굳건하게 유지됐다. 한 학기에 500만원, 1년에 1000만원을 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지원한다. 장학회 출신 이사진이 새 장학생을 선발하는 것도 특기사항이다. 이번에 뽑힌 40기(23명) 직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총 849명에 129억7050만원이 지급됐다. 송원장학회는 새해 설립 40주년을 맞는다. 2013년 3월 30주년 행사에 참석한 설립자 김영환(가운데, 작고) 회장과 장학생들. [중앙포토] 그간 장학금 성격도 많이 달라졌다. 처음엔 등록금 지원으로 출발했으나 2012년 국가장학금 도입 이후 생활비 보조 측면이 강해졌다. 요즘 대학생들은 소득분위 8구간까지 국가로부터 등록금 일부를 지원받는데, 송원장학금의 경우 국가장학금과 중복 수령할 수 있다. 사실상 생활비 지원이다. 이는 대학 신입생 구성비 변화와도 연관이 깊다. 교육이 더는 계층 이동 사다리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부모 소득이 대학 진학을 좌우하는 시대이지 않은가. 실제로 2020년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신입생 중 고소득층(소득분위 9, 10구간) 비율은 55%로, 세 대학을 뺀 전국 대학 평균(25.6%)의 두 배가 넘었다. 서울대의 경우 그 비율이 62.9%에 이르렀다. ‘부=교육의 대물림’ 고착화 현상이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1학년생을 주로 뽑는 송원장학생의 경우 절대다수가 소득분위 1순위 아래다. 김해련 장학회 이사장은 “아직도 외부 장학금이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이 주변에 많은데, 가난한 학생일수록 캠퍼스에서 느끼는 소외와 좌절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이게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10년 넘게 장학생 선발에 참여해 왔다. 해마다 세밑을 실감하는 행사인데, 늘 면접자보다 피면접자가 되는 느낌이다. 젊은이들에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을 남겨준 것이 미안하고, 그들의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에 한 수 배운다. 그래도 송원장학생은 운이 좋은 편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또 연 1000만원의 디딤돌에 올라섰다. 최소한 ‘완전히 붕괴됐어요’에선 벗어났다. 사실 대학은 둘째치고 하루하루가 고달픈 청춘이 부지기수일 터다. 어제는 성탄절,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온 예수의 뜻을 기억한다. 각자도생의 시대, 양극화 틈새를 좁혀야 할 기성세대의 책무를 되새긴다. 가난이 복리로 붙는 새해가 되지 않기를….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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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옹기집 막내아들의 꿈
201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를 맞아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 사진전. [뉴스1] 1969년 5월 21일 명동성당 사제관에 캐딜락 하나가 나타났다. 그해 3월 말 47세에 세계 최연소 추기경에 오른 김수환(1922~2009) 추기경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과 가톨릭 신자 몇몇이 추기경의 품위를 생각해 성의를 모았다고 한다. ■ 「 김수환 추기경 탄생 100주년 행사 서로 무거운 짐 져주는 세상 소망 윤 정부 ‘약자와의 동행’ 이뤄낼까 」 며칠 뒤 승용차에 동승한 수녀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추기경님, 고급 차를 타고 다니시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안 들리고 고약한 냄새도 안 나겠네요.” 그 순간 김 추기경은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그날 저녁 무릎을 꿇고 ‘귀족’ 모습을 한 자신을 통렬히 반성했다. 그리고 바로 캐딜락을 돌려보냈다. 지난 3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에서 열린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영성 연구’ 심포지엄에서 들은 에피소드다. 2022년 김 추기경 탄생 100년을 맞아 진행된 일련의 행사를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물론 김 추기경이 이후 승용차 없이 지낸 건 아니다. 서울대교구장 사임(1998년) 전까지 운전면허증을 따겠다고 벼르고 별러온 그였지만 결국 공약(空約)에 그치고 말았다. 김 추기경의 회고록에서 재미난 대목과 마주쳤다.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추기경은 “30년 가까이 내 발이 돼준 운전기사 김형태(요한) 형제. 성실하고 운전 잘하고 마음씨가 곱다”고 대답했다. 일생을 낮은 사람들과 함께하려 했던 김 추기경의 인간미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 추기경은 옹기장수 집안 출신이다. 회고록 1장도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시작한다. 그는 5남 3녀의 막내였다. 아버지는 옹기를 팔아 가족을 살폈고, 어머니도 옹기·포목 행상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김 추기경은 ‘옹기’ 두 글자를 혼자 마음에 간직한 호(號)로 삼기도 했다. 생전에 “옹기 특유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되살려준다”고 말했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왼쪽) 포스터와 드라마의 원작이 된 웹소설. [사진 JTBC, 네이버 시리즈 캡처] 김 추기경은 천생 낙관적이었나 보다. 셋방살이를 전전한 빈한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다른 집 애들은 점심을 먹는데 나는 왜 굶어야 하는가”를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시청률 20%에 다가서며 인기몰이 중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살풍경과 대비된다. 쌀통마저 텅텅 빈 집안의 한 젊은이가 국내 굴지의 대기업 막냇손자로 환생해 처절한 복수를 펼쳐 나가는 판타지 드라마가 되레 더욱 현실적이다. “신부가 된 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는 김 추기경은 또 다른 삶을 동경한 적이 없었을까. 누구나 한 번쯤 품는 ‘2회차 인생’ 말이다. 김 추기경의 대답이 역시 그답다. “결혼해서 처자식과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봤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골 오두막집,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코흘리개 시절 꿈은 읍내에 점포를 차려 돈을 버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사하지 않기를 잘했다. 나 같은 사람은 허구한 날 사기를 당해 알거지 되기 십상이다.” 앞서 언급한 심포지엄의 타이틀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였다. 신약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따왔다. 이 땅의 민주화와 인간화라는 큰 짐을 짊어져 온 김 추기경의 생애를 압축한 것 같다. 여기서 알맹이는 ‘서로’다. 공존·공생·협력·소통이다. 김 추기경 또한 홀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을 터다. 이날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영성과 한국사회의 변화’를 발표한 한승훈 건국대 교수의 말이다. “김 추기경을 ‘한국 민주화의 정신적 지주’ ‘한국 사회의 큰 어른’으로 단순히 기억하면 안 된다. 그가 설계했던 민주주의 사회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빈부·세대 격차, 불신·분열의 사회에 대한 처방전으로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역설해 온 김 추기경의 참뜻을 새기자는 제안이다. 코로나19로 사회 양극화가 더 깊어진 지금, ‘약자와의 동행’을 거듭 약속한 윤석열 정부의 실천 방안을 주목한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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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의상 대사는 오늘을 반길까
해인사 '법계도'(왼쪽) 문양과 이를 작품에 원용한 나전칠화 '일어나 비추어라' 부분. 그곳에 역시 작품은 없었다. 지난 24일 찾아간 서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지하 3층 전시장 한쪽 벽이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2019년 6월 개관부터 전시돼 왔던 나전칠화 ‘일어나 비추어라’가 새로운 단장을 위하여 잠시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대신 그 앞에는 옻칠장 손대현, 나전장 강정조, 소목장 김의용의 작품이 놓여 있었다. ‘일어나 비추어라’는 가로 9.6m, 세로 3m의 대작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해 만들었다. 김경자 화백이 밑그림을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장인 셋이 협력했다. 민화풍 바탕에 십장생과 피에타·천지창조, 순교자들의 처형 장면 등을 새겼다. 한국 천주교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표현했다고 한다. 총 석 점이 제작됐으며, 그중 한 점은 바티칸 교황청 우르바노대에, 나머지 한 점은 여주 옹천박물관에 기증됐다. ■ 「 화엄사상 압축한 해인사 ‘법계도’ “천주교 작품에 변용” 조계종 발끈 차이·공생 존중하는 게 종교의 뜻 」 서소문박물관의 ‘일어나 비추어라’는 왜 자취를 감췄을까. 또 왜 멀쩡한 작품을 다시금 단장해야 하는 걸까. 다종교 사회의 모범으로 꼽혀 온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파열음이 들려오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예술과 종교의 충돌마저 우려된다. 한국 천주교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형상화한 '일어나 비추어라'. [사진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논란은 지난달 합천 해인사가 서소문박물관에 ‘일어나 비추어라’의 철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면서 불거졌다. 해인사는 해당 작품이 ‘법계도(法界圖)’를 변용하면서 불교 가치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조계종 전국교구 본사의 입장문 발표, 조계종 중앙종회의 서소문박물관 항의 방문 등이 이어졌다. 불교계가 지목한 곳은 작품의 오른쪽 중앙, 이른바 미래 파트다. ‘법계도’ 문양의 묵주알에 십자가를 단 부분이다. 조계종은 ‘법계도’ 도용(盜用)까지 언급했다. 불교계가 특정 예술품을 놓고, 그것도 전시 3년이 넘은 공예품에 대해 상대 종교에 거세게 항의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법계도’는 신라 의상대사가 '화엄경' 내용을 210자 게송(偈頌)으로 요약한 도안이다. ‘법(法)’자로 시작해 ‘불(佛)’자로 끝나는 54각의 미로형 네모꼴 안에 불교의 깨우침을 집약했다. 해인사를 넘어 한국 문화의 자산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를 예술품에 원용한 것이 조계종 주장대로 표절·도용에, 또 ‘법계도’에 십자가를 연결한 것이 ‘불교 폄훼’에 해당하는지는 의문이다. 예술에 그만한 자유도 없다는 것일까. 원작의 인용과 재해석은 예술의 기본 영역 중 하나다. 더욱이 ‘풀 한 포기, 모래 한 알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계가 무수(無數)·무량(無量)·무변(無邊)하다’는 게 '화엄경'의 가르침 아닌가. 서소문박물관 측은 일단 해인사 측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종교 간 화합 차원에서라고 설명했다. 지난 14일 작품을 철수하고, 작품도 일부 수정할 예정이다. 논란의 ‘법계도’ 부분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예수가 사망·부활한 나이인 ‘33’ 이미지를 새길 계획이다. 반면에 창작자에게는 대단한 결례가 될 수 있다. 예술이 종교보다 앞서는 건 아니지만 종교가 예술을 앞서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봄 서소문박물관에선 뜻깊은 전시가 열렸다. ‘공(空)’을 주제로 한 현대불교미술전이다. 전남 구례 화엄사 초대형 괘불(掛佛·국보)도 2년간 보존 수리를 마치고 서울 나들이를 했다. 종교 간 대화의 아름다운 전례를 남겼다. 코로나19의 아픔을 달래고 ‘좋은 것은 함께한다’는 공존의 가치를 일깨웠다. 그런데 1년 반 만의 갑작스러운 반전(反轉)이란? 손바닥 뒤집기도 아닌데 말이다. 조계종은 작품 철거에 이어 천주교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여주 주어사, 광주 천진암 등 천주교 성지화 작업을 들며 ‘종교 역사왜곡 공정’이라 비판하고 있다. 두 종교의 대립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념·세력 다툼은 현실 정치판에서 물릴 만큼 겪었다. 차별·적대를 넘어선 차이·공생을 존중하는 게 불교의 ‘불이(不二)’이자 천주교의 ‘사랑’이지 않은가. 두 종교의 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나.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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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봉황은 좁쌀을 먹지 않는다
19세기 문자도 가운데 ‘청렴할 염(廉)’자를 형상화한 봉황 그림.예부터 봉황은 검소한 삶을 상징했다. '봉비천인 기불탁속(鳳飛千忍 飢不啄粟, 봉은 천 길을 날아 굶주려도 좁쌀을 먹지 않는다)' 문구가 보인다. '길 인(仞)'을 '참을 인(忍)'으로 바꿔 썼다. [사진 현대화랑] 윤석열 대통령이 동남아 순방길에 오른 지난 11일, 서울공항 대통령 전용기 출입문에 찍힌 봉황 두 마리가 선명했다. ‘새 중의 새’ 봉황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상징이다. 1967년 제정한 ‘대통령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표장’ 공고에 따라 봉황은 대통령의 표상이 됐다. 용산 대통령실은 이달부터 새 로고를 쓰고 있다. 봉황 두 마리가 대통령실 건물을 감싼 형상이다. 일각에선 봉황이 왕조시대 유산이기에 ‘용도 폐기’를 주장하지만, 이는 전통문화에 대한 몰이해에 가깝다. 오늘날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을 왕으로 여기는 이가 있을까. 국민의 대표에 대한 예우일 뿐이다. ■ 「 이 시대 봉황은 대통령 아닌 국민 통치자의 책무는 사회 갈등 조정 국민 마음 죽으면 앞날도 어두워 」 봉황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조선시대 군주의 등가물이었던 봉황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백성 속으로 내려왔다. 민화(民畵) 속 봉황이 특히 그랬다. 특히 문자도(文字圖)에서 봉황은 ‘청렴할 염(廉)’자와 함께 등장한다. 청빈한 성군, 어진 정치에 대한 바람이다. ‘봉황은 굶주려도 좁쌀을 쪼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경제력이 높아진 백성들의 자신감도 반영됐다. 21세기 민주사회에서 진짜 봉황은 국민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처럼 국민을 떠난 대통령은 존재할 수 없다. 대통령실도 새 봉황 로고에 대해 “국민의 뜻을 받들고, 국민을 위해 헌신하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민은 집단명사다. 통치자가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을 수없이 앞세워도 국민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각자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이해 조정 능력이 필수불가결인 이유다. 이번 순방길에 대통령실이 MBC 취재진의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조치는 이런 면에서 천 리를 날아간다는 ‘봉황의 뜻’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닌, 헌신하는 대통령이라면 설혹 정권에 달갑지 않은 보도도 수용하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대통령 전용기는 대통령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 아닌가. 그러잖아도 두 진영으로 동강 난 나라를 더욱 '웃기게' 만든 꼴이다. 대통령실 주장대로 ‘가짜 뉴스’가 걸린다면 관련법에 따라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 과거 정부에서도 유사 사례가 있었다는 일부 여권의 항변은 “네가 먼저 잘못했는데 우리가 무슨 문제”라는 식의 좁쌀 같은 마음만 드러낼 뿐이다. 윤 대통령이 순방을 떠나기 전날 밤, 이태원 참사 현장을 찾았다. 늦게나마 2주일 전 생명을 잃은 숱한 청춘들의 평화를 기원했다. 맘껏 날아보지 못하고 날개가 꺾인 ‘젊은 봉황’을 기리는 국화와 촛불, 음식과 추도문이 이태원역 1번 출구 근처를 뒤덮었다. ‘깃털 하나의 무게도 느끼지 말고 천사의 날개 달고 자유로우세요’라는 추념 문구에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졌다. 언제까지 슬픔에만 잠길 수 없다. 국가애도기간이 끝나고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이 진행 중이다. 경찰·구청·소방서 등 일선 기관들의 허술한 대응과 시스템 부재가 확인되고 있다. 한데 행정안전 최고책임자들의 거취는 여전히 논란이다. ‘메아 쿨파(Mea Culpa·나의 죄)’를, 즉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미룰수록 희생자와 유족, 나아가 국민의 상처만 더 커지지 않을까 싶다. 예부터 ‘마음이 죽는 것만큼 큰 슬픔은 없다(哀莫大於心死)’고 했다. 전윤호 시인의 신작 시집 『밤은 깊고 바다로 가는 길은』에 실린 ‘서울에서 20년'이 섬뜩하다. ‘마주 보면 어색한 건/ 서로 무덤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눈 속에 관이 안치된 현실이 있지요/ (…) / 입구가 막힌 뒤에도/ 나무뿌리 무성한 팔로 서로를 안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반쯤 죽었어요.’ 코로나19의 그늘을 낚아챈 구절이건만 엊그제 참극이 떠오른다. 모든 건 서로 엮인 법. 젊은이들의 영혼이 중음신(中陰身)으로 떠도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익 외교 못지않게 윤 대통령이 매조질 일이다. 이 시대 봉황을 날게 하라. 그들이 두 번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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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대한민국 치욕의 날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밤새 떨고 떨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탄식과 비탄의 굴레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끝내 분노가 터졌다. 정말 저 아수라장이 실제인가. 두 눈과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소망도 품어봤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한 시민이 지난 30일 참사 현장 인근인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해밀튼호텔 앞에 놓인 조화 앞에 술을 따르고 있다. 김성룡 기자 어젯밤 자정 무렵 남산 인근에 사는 지인의 갑작스러운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핼러윈 행사 중 압사 사고, 심정지 50여 명. 우리 집 앞으로 구급차 달려가는 소리가 30분째 들림.’ 설마 했다. 한밤에 장난은 아닐 테고…. ■ 「 이태원서 발생한 초현실적 참사 경제·문화강국의 부끄러운 민낯 기성세대는 통절한 참회록 써야 」 바로 TV를 켰다. 긴급 뉴스가 쏟아졌다. 지인이 전해준 소식 그대로였다. 서울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극을 목격했다. 이태원 좁은 골목에 널브러진 젊은이들, 심폐소생술에 매달린 소방대원들, 그 주변에서 절규하는 시민들 등등, 한마디로 무간지옥이었다.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도 둘러봤다.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TV 화면보다 더 고통스러운 현실과 마주쳤다. 더는 SNS를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만 깊어졌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 TV 속보를 지켜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감이 깊어졌다. 용산소방서장의 브리핑이 거듭될수록 실낱같던 희망도 사라졌다. “대체 핼러윈이 뭐길래”라는 욕지기마저 터졌다. 건물이 무너진 것도, 불이 난 것도, 테러가 터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서울 한복판에서 어떻게 150여 명의 막대한 사망자가 발생했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어떤 재난영화에서도 느끼지 못한 공포와 전율이었다. 모멸감만 쌓였다. 2022년 10월29~30일. 우리는 이날을 치욕의 날로 기록해야 한다. 세계 10대 경제강국, 지구촌을 움직인 K컬처의 이면을 똑똑히 확인했다. 그 밑바닥이 얼마나 부실하고, 불안한지를 목도했다. ‘위험사회’ 대한민국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부조리극도 이만한 부조리극이 없다. 기자 개인적으론 와우아파트 붕괴(1970), 성수대교 붕괴(1994), 삼풍백화점 붕괴(1995), 세월호 침몰(2014)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다. 같은 인재임에도 이번 참사는 오직 사람의, 사람에 의한,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가난한 시절에 종종 일어났던 귀성객 압사 사고가 바로 기억났지만, 그때와 비할 수 없이 부강한 2022년의 악몽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이번 비극의 원인은 다각적·중층적이다. 핼러윈을 코앞에 둔 주말, 그것도 코로나19 압박에서 벗어나 3년 만에 열린 행사라는 점에서 그간 억눌렸던 청춘의 폭발이 직접적인 배경이다. 10만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하고도 안전장치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행정적 책임도 막중하다. 가장 크게는 생때같은 젊은이를 보호하지 못한 기성세대의 직무유기를 들 수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불안과 혼돈의 사회를 물려준 어른들의 무책임에 고개를 들 수 없다. 한 해의 수확을 축하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는 핼러윈이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파티로 변질한 데는, 특히 2000년대 이후 젊은이의 해방구처럼 급속히 소비된 데는 분명 기성세대가 부추긴 한탕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어른들이 참회록을 쓸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 시스템을 넘겨주지 못한 과오를 반성해야 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는 윤동주의 고백처럼 말이다. 윤석열 정부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초대형 참사가 특정 정부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그 수습과 대책 마련에서 이번 정부의 능력이 판가름날 것이다. 찢기고 찢긴 국민의 상처를 어떻게 봉합할 것인지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 경제도 안보도 결국 민심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정부는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삼가 고인과 유족의 평화를 기원한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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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안중근은 지금 어디에…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있는 안 의상 동상과 혈서 태극기.[중앙포토] 김월배 하얼빈이공대 외국인 교수는 최근 부산 용호동 백운포 산기슭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에 다녀왔다. 안중근 의사의 누이동생인 안성녀씨가 잠든 곳이다. 성녀씨 또한 오빠와 마찬가지로 온갖 신산(辛酸)을 겪어야 했다. 하얼빈·만주를 전전하다 광복 후 오륙도가 내다보이는 산기슭에 움막을 짓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2016년 광복절에 부산시 남구에서 성녀씨 묘소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 비석 뒤에 이렇게 새겼다. ‘독립군 군복을 만들다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고문을 당했던 루시아여. 한국전쟁의 피난 중에 영도에서 영면하셨다. 이제 편히 안식을 누리소서.’ ■ 국가 위기 때마다 불러내는 영웅김월배 교수의 ‘유해 찾기’ 18년지금 ‘친일과 종북’ 싸울 때인가 「 」 오는 26일은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3주년이 되는 날. 무덤 속의 성녀씨는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까. 아마도 오빠의 귀환을 소망하고 있지 않을까. 그나마 자신은 이 땅에서 숨을 거뒀지만 112년 전 중국 뤼순(旅順)감옥 공동묘지에 묻힌 오빠는 지금도 이역만리에서 헤매고 있지 않은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라는 유언을 지키지 못한 회한에 피눈물을 떨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 의사 집안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또 다른 거울이다. 모두 16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특히 안타까운 건 안 의사를 포함해 부모·아내·동생 등 가족 대부분의 유해가 유실됐다는 점이다. 오직 성녀씨만 고국 땅에 묻혔다. 혹자는 지금 찾아서 무슨 영광이 있겠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조국 독립에 일생을 바친 이들의 뼈 한 조각조차 없는 오늘이 누추한 건 분명하다. 부산 용호동 산기슭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씨의 묘소. [사진 김월배] 김월배 교수는 ‘안중근의, 안중근에 의한, 안중근을 위한’ 시간을 살아왔다. 2005년부터 18년 동안 안중근 유해 찾기에 전념해 왔다. 안중근을 찾아 하얼빈·뤼순부터 일본까지 훑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뤼순감옥에서 대외업무도 맡으며 안 의사의 흔적과 직접 만나려 했다. “안 의사 유해 발굴은 후손의 도리, 대한민국 국민의 무한책임이다”는 믿음에서다. 김 교수가 그간의 작업을 모은 백서를 마무리 중이다. 연내 출간될 『유해 사료, 안중근을 찾아서』다. 안 의사 활동 현장을 답사하고, 뤼순감옥 박물관 직원과 향토 사학자를 조사하고, 중국·일본·러시아에서 수집한 자료 100여 건을 정리했다. 안 의사가 묻힌 곳을 아직 특정할 순 없지만 앞으로 언젠가 꼭 찾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사명감에서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안 의사를 소환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분들을 찾지 않는다면 누가 국가를 위해 희생할까요, 안 의사는 과거보다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훗날 안 의사 유해 발굴이 더욱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 교수 말처럼 2022년 위기의 한국은 안 의사를 계속 불러내고 있다. 정치권에선 툭하면 안중근을 꺼내 들고, 문화판에서도 조명이 끊이지 않는다, 김훈의 베스트셀러 『하얼빈』 에 이어 뮤지컬 ‘영웅’과 동명의 뮤지컬 영화도 연말에 찾아온다. 현재진행형 안중근의 면모다. ‘대장부’ 안중근은 평화사상가였다. 한·중·일의 공존을 꿈꿨다. 일본을 ‘독부(獨夫·하늘과 백성을 버린 폭군)’라 꾸짖으면서도 외교에선 ‘한덩어리애국당’을 이뤘다고 인정했다. 북한이란 변수가 추가된 오늘날 우리는 100년 전보다 훨씬 더 위태롭다. 모든 화(禍)의 불씨는 내부 다툼과 분열이다. ‘친일과 종북’이란 썩은 지푸라기에 간당간당 매달린, 외눈박이·뒷눈박이로 맞서는 요즘 국정감사 행태는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고사 ‘방휼지세(蚌鷸之勢)’를 인용한다. 조개(방)와 도요새(휼)가 싸우다 모두 어부에게 잡혔다는 내용이다. 서세동점 당시 일본을 비판한 대목이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 안성맞춤한 말이다. 무덤 속 안 의사의 당부가 들려온다. “친절한 바깥사람이 다투는 형제만 못하다”고 했다. 싸우려면 제대로 싸워야 한다. 어제가 아닌 내일을 향해….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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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를 위한 변명
지난해 개천절 당일 인천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에서 열린 ‘제4354주년 개천대제 봉행’ 모습. 비속어 다툼에 휩싸인 정치권에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을 말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일까. [사진 강화군] 개천절 아침이다. 4355년 전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린 날이다. 이육사 시인은 ‘어디 닭 우는 소리가 들렸으랴.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고 목놓았지만 2022년 오늘엔 개와 고양이, 개와 원숭이가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뜻, 즉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고(홍익인간·弘益人間) 이치대로 나라를 다스리라는(재세이화·在世理化) 가르침이 가을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 같다. ■ 「 가을 정국 빨아들인 비속어 논란 먼저 멈추는 쪽이 이기지 않을까 우리 ‘××들’ 입에 밥부터 넣어야 」 지리산 시인 이원규가 지난주 페이스북에 최승자 시인의 ‘개 같은 가을이 왔다’를 인용했다. 최 시인은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이라고 했다. 독설의 수위가 높다. 청명한 가을을 개와 매독에 비유했다. 얼마나 절망이 깊었을까 싶다. 이 시인은 한술 거든다. “말로만 국민, 국민 하면서도 사실은 ‘이 ××들’ ‘저 ××들’이다. 야당 국회의원이 ’이 ××들‘이면 그보다 못한 우리 백성들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지금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 비속어 ‘××’ 논란이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다. 4일 시작하는 윤석열 정부 첫 국정감사에서도 여야는 격돌을 예고하고 있다. ‘××’의 대상이 미국(바이든)인지, 국회(야당)인지 사생결단도 불사할 태세다.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꼴이다. 한 번 기세가 밀리면 좀체 회복하기 어려운 게 정치라지만 그래도 정도 나름이다. 국민과 협치를 입에 달고 사는 여의도의 자기 배 채우기만 드러날 뿐이다. ‘××’ 시비를 보며 2013년 가을이 기억났다. 9년 전 황병승 시인이 미당문학상을 받았는데, 미당 서정주의 고향인 전북 고창 질마재에서 수상작 ‘내일은 프로’가 낭송됐다. 제법 긴 산문시 중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지요/ “나쁜 ×× 같으니라고!”/ 나쁜 ××는 나뿐인 ××, 나밖에 모르는 ××, 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낭송자가 ‘나쁜 ××’에 힘주어 말하는 대목에서 먹먹한 슬픔이 묻어났다. 시 속 화자가 ‘나쁜 ××’가 된 사연이 우스꽝스럽다. 남자가 사흘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여자는 침울하기만 하다. ‘서로를 철사로 꽁꽁 묶고’ ‘서로에게 석고를 들이부으며’ 약속한 사이건만 남자는 여자의 작은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한 것이다. 왜? 남자는 여자가 좋아하는 살구를 한 번도 사다준 적이 없고, 살구 대신 복숭아를 사왔기 때문이다. 여자가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데도 말이다. 여자는 결국 집을 나가버린다. “어째서,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살구가 당신의 마음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을까”라고 한탄하면서…. ‘나뿐’만 챙기다가 ‘나쁜’ 남자가 된 연유가 꽤 상징적이다. 지금 국회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민생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북한 미사일은 연일 하늘을 가르는데 ‘××’의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너 죽고 나 죽자’로 싸우는 모습이 상상 초월 ‘울트라 부조리극’ 자체다. 오지도 않을 해결사 ‘고도’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윤 대통령과 여당의 처신이 못내 아쉽지만 “때는 기회다”며 긁어 부스럼을 만든 야당도 볼썽사납긴 도긴개긴이다. 그사이 애먼 국민만 가리산, 지리산 하다가 길을 잃게 됐다. 영화 ‘친구’의 유명한 대사처럼 그만하면 많이 묵었다. ‘××’ 다툼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 이제 먼저 칼을 거두는 쪽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때로는 지는 게 이길 수도 있지 않은가. 싸움을 더 끌수록 “(국회의원) 심장 옆에 심통이란 게 있어, 그 뒤에 욕심통이 있는데”(영화 ‘정직한 후보2’)만 각인시킬 뿐이다. 같은 ‘××’에도 맛있는 ‘××’가 있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게 ‘××’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라 했다. 단군 이래 가장 힘들다는 우리 ‘××들’을 살피기에도 하루하루가 화급한 요즘이다. 복숭아 대신 살구를 달라.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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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고구려·발해를 지우겠다고…
고구려와 발해 부분을 삭제한 중국국가박물관의 연표(왼쪽). 중국은 한국이 수정을 요구하자 연표가 있던 전시장 벽면을 지워버렸다. [중앙포토,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중국에서 『중국고고학백년사』가 출간됐다. 제목 그대로다. 중국 고고학 100년의 주요 성과와 전망을 담았다. 고고학자 276명이 50여 개 연구 주제를 선정해 총 4권, 12책으로 펴냈다. “유물사관에 입각한 첫 번째 학술적 정리로, 중국만의 독자적인 고고학 체계를 구축하는 데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한국 고대사 관련 내용, 즉 중국 동북지역을 1권 첫머리에 배치했다. 파격적인 구성이다. 지금껏 중국 문명의 발상지로 꼽혀 온 황하유역이 뒤로 밀렸다. 기존엔 통상 황하→장강→화남→북방지역 순으로 서술했다. 그만큼 중국 당국이 동북지역을 중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 「 중국박물관 연표 삭제가 남긴 것 ‘정치’ 앞세운 중국고고학 100년 한·중 학술교류는 멈추지 말아야 」 2권에서도 동북지역을 청동기시대와 동주(東周) 시기로 나눠 서술했다.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이 중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당 서적을 검토한 동북아역사재단은 “고조선 관련 내용을 생략하고, 부여 같은 토착세력에 대한 서술이 없다는 점에서 중국이 이 지역 고유의 역사발전을 축소하려는 의도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중국 현대고고학의 출발점을 1921년으로 못 박은 것도 특기사항이다. 1921년은 중국공산당이 창당한 해다. 정치적 입김이 느껴진다. 종전까진 고대 상나라 수도인 은허(殷墟) 유적을 발굴한 1928년으로 이해했었다. 더욱이 고고학 개시기(1921~48년), 초보 발전기(1949~78년), 쾌속 발전기(1979~2000년)라는 시대 구분도 다분히 정치적이다. 1949년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했고, 1978년 12월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이 천명됐다. ‘중국만의 독자적인 고고학 체계’가 ‘고고학=통치학=체제 홍보’라는 등식으로 연결되는 모양새다. 지난해 말 열린 『중국고고학백년사』 출간 기념회 모습. [사진 바이두] 중국 고고학의 최근 동향은 중앙일보에 ‘문화재전쟁’을 연재 중인 경희대 강인욱 교수가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중국의 고고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자”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지난 5월 메시지를 주목하며 “지구촌 패권을 넘보는 중국이 고고학과 문화재를 전면에 내세우는 배경에는 21세기 중국의 큰 그림이 숨어 있다”(6월 17일자 24면)고 말했다. 고고학이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중국국가박물관이 한·중 수교 30년을 맞아 주최한 ‘한·중·일 청동기 전시’에서 우리가 제공한 연표에서 고구려와 발해를 삭제해 물의를 빚었다. 전시품 회수까지 언급하는 등 외교 당국까지 나서 연표 수정을 요구한 한국 측의 강한 항의에 중국 측이 전시장 연표를 아예 페인트로 지워버리며 사건이 일단락됐지만 그 파장은 두고두고 남을 것 같다. 중국 측의 연표 수정이나 사과가 아닌 삭제라는 미봉책에 그쳤다는 비판도 비판이지만 향후 비슷한 논란이 언제든 재연될 수 있는 까닭에서다. 일단 급한 불은 잡았지만 불씨는 여전히 살아남은 꼴이다. 이번 논란은 고구려·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깎아내린 동북공정의 연장선에 있다. 동북공정은 2007년 5년간 프로젝트로 종료됐지만 그 후폭풍이 박물관 전시와 출판물로 계속 확산하는 중이다. 역사의 압축파일인 연표가 가장 상징적인 사례다. 중국은 국가·당 차원에서 연표를 관리하고 있다. 중국 지방박물관에선 이미 고구려와 발해의 연표를 볼 수 없는 실정이다. 특히 이번엔 중국의 최고 국가박물관 측이 ‘악마의 편집’을 했다는 점에서 충격이 컸다. 중국의 고구려 지우기가 더욱 교묘해진 셈이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지난 7월 중국국가박물관 개관 110주년 축하 편지에서 “올바른 정치적 방향”을 당부했다. 그 실체는 과연 뭘까. “문명 간 교류와 상호학습”도 잊지 않았다. 연표 파동이 상호학습의 전기가 될 수 있을까. 우리도, 중국도 할 일이 많고 갈 길도 멀다. “이번엔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했다. 향후 학술교류가 멈출 수도 있다. 동북지역 답사길이 아예 막히는 건 아닌지”(강인욱 교수)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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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서울대 정문 ‘지식인 의자’
서울대 정문 앞에 새로 마련된 '지식인 의자'. 정문 주변에 널찍한 광장도 조성됐다. 아래는 정문 밑으로 차가 다니던 예전 모습. [중앙포토, 연합뉴스] 서울대에 명물 하나가 생겼다. 등받이가 달린 높이 1.1m의 화강암 의자다. 지난달 23일 선보인 일명 ‘지식인 의자’다. 누구든, 언제든 와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의자 뒤로는 높이 17m의 거대 철문이 있다. 흔히 ‘샤’로 불리는 서울대 정문이다. 국립 서울대의 초성 ‘ㄱ, ㅅ, ㄷ’을 본떠 만들었다. 1978년 철근 42.3톤을 들여 만든 조형물이다. 모양 자체가 위압적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이가 선망하는 서울대라지만 ‘지식의 산실’치곤 꽤 권위적이다. 포용과 인정보다 배타와 차별의 이미지에 가깝다.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시대에 낙담한 청춘들은 ‘계집, 술, 담배’라는 퇴영적 단어로 치환하곤 했다. ■ 「 ‘차 대신 사람' 광장 만들며 설치 ‘여기 앉는 모든 사람 존중’ 뜻해 낡은 패권정치는 자리 비워줘야 」 그런데 의자 하나를 놓고 보니 분위기가 훨씬 넉넉해졌다. 보다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울대 정문 입구가 이번에 180도 달라졌다. 우선 정문 아래 4차로 도로가 널찍한 광장으로 바뀌었다. 자동차 대신 사람이 마침내 주인이 됐다. 기존 차도를 관악산 계곡 쪽으로 몰고, 정문 주위로 3500㎡ 크기의 광장을 조성했다. 월계관에 책과 펜·횃불을 놓은 서울대 문장(紋章)도 광장 바닥에 새겨 넣었다. 특히 광장 사방으로 퍼져 나간 월계수 잎이 눈에 띈다. 의자 밑에도 잎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뜻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학문과 지식, 젊음과 패기가 360도 뻗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서울대 교훈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 세상을 밝히기를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 이후 서울대가 이제야 제 얼굴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다. 서울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탄생한 셈이다. 지난달 29일 서울대 후기 졸업식이 열렸다. 코로나19로 중단됐던 대면 졸업식이 3년 만에 재개됐다. 이날 정문 앞 의자가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는 졸업생들이 줄을 이었다. 소위 인증샷의 명소가 됐다. 졸업식 사흘 전에 찾아간 현장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미리 졸업사진을 찍으려는 학생들로 붐볐다. 기념사진을 전문으로 찍어 온 출장 사진가의 목소리도 들렸다. “정말 좋아졌지요. 예전엔 정문 밑으로 차가 다녀 교통사고도 자주 났어요. 자~ 이리로 오세요.” ‘샤광장’ 디자인은 서울대 건축과 서현 교수가 맡았다. 건축학과 82학번 출신인 그는 “그간 자동차에 포위되고, 또 방치됐던 공간을 서울대의 새 얼굴로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주목한 대목은 역시 돌의자다. “서울대생만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여기 앉은 모든 사람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권력과 성공이 아닌 지식과 나눔을 실천하는 서울대가 됐으면 합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는 두 얼굴을 지녀 왔다. 각 분야 리더를 키우는 인재의 요람인가 하면 자신만의 이익을 좇는 그들만의 리그 측면도 있었다.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윤석열 정부의 초기 인선도 ‘서오남(서울대 50대 남자)’이란 부정적 뉘앙스가 부각됐다. 한마디로 ‘끼리끼리’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다. 한국 사회의 갖은 자원이 투입되는 서울대의 책임감을 일깨우기도 한다. ‘서울대 의자’의 상징성이 도드라진다. 물론 의자 하나가 세상을 바꾸진 못한다. 하지만 좋은 디자인, 훌륭한 공간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변하게 한다. 지난달 29일 졸업식 축사를 한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의 당부를 인용한다. “병원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혐오와 경쟁과 분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기를….” 서울대로 대표되는 사회 지도층이 두고두고 새길 말이다. 바닥 모를 자리싸움에 빠진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겠어요.’(조병화의 ‘의자’) 여의도여, 용산이여, 이제 그 낡은 의자 좀 치워 주세요~.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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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법정 스님의 봉은사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115년 만의 수마가 국토를 휩쓸었다. 국가 재난대응시스템에 조종이 울렸다. 서울 ‘강남 스타일’도 잠겨버렸다. 피해 규모를 따지면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최악의 사례로 꼽힌다. 이재민 수십만 명, 사망자 640여 명이 발생했다. 강남(당시는 경기도 광주군)도 초토화됐다. 한국 불교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인 서울 강남 봉은사 입구 풍경. 불법의 상징인 연꽃이 가득 놓여 있다. [중앙포토] 한데 대재난도 불심을 꺾진 못했다. 97년 전, 봉은사 주지 청호 스님의 헌신이 빛났다. 스님은 사찰 재산을 털어 목선 두 척을 사서 수몰 위기의 지역민 700여 명을 살려냈다.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보리심이다. 스님을 기리는 공덕비가 봉은사에 세워졌다. ■ 「 서울 강남 밝혀온 유서 깊은 도량 스님들의 노조원 폭행 사건 논란 대화와 소통으로 원만히 풀어야 」 봉은사는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거쳐 간 곳으로도 이름났다. 스님은 1960년대 말부터 수년간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며 불경 번역에 참여했다. 당시 봉은사의 앞날을 걱정하는 글을 불교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다. 강남 개발이 불붙던 1970년에 쓴 ‘침묵은 범죄다’다. ‘봉은사가 팔린다’는 부제가 달린 이 칼럼에서 법정은 봉은사를 ‘서산·사명 같은 걸승의 요람이자 불교 중흥의 도량’이라고 썼다. 조계종 일각에서 봉은사 임야와 대지 일부를 팔아 불교회관을 짓자는 주장이 일었는데, 법정은 종단의 졸속 추진을 우려하며 “봉은사같이 유서 깊은 도량을 보존·활용하지 못하면 되겠는가”라고 일갈했다. 봉은사는 예나 지금이나 강남 불교의 핵심 도량이다. 1970년 당시 봉은사 땅 33만㎡(옛 한전 부지)가 정부에 반강제 매각됐다는 연유로 현재 반환 소송이 진행 중이다. 지난 18일엔 1950년대 공무원의 서류 조작으로 잃어버린 땅에 대한 배상금 417억원 지급 판결도 나왔다. 봉은사의 역사·종교·경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 봉은사가 지금 뜨거운 논란에 휩싸여 있다. 지난 14일 봉은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박정규 전 조계종 노조 기획홍보부장이 스님들로부터 폭행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불교의 명예와 내부 위계질서를 문란케 했다는 이유로 올 2월 말 해고된 박씨는 이후 원상복직과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조계사·봉은사에서 벌여 왔다. 지난 5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 해고를 인정받았으나 현재 조계종 측이 재심을 신청한 상태다. 사건의 실체는 법정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박씨가 스님 셋을 폭행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조계종 노조도 총무원 호법부에 진상조사와 관련자 징계를 요구하는 고소장을 냈다. 물리력을 행사한 봉은사 스님이 지난 16일 개인 차원의 참회문을 냈지만 종단 측의 공식 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봉은사는 조계종 총무원의 직영사찰이다. 지난 주말 봉은사를 찾았다. 빌딩 숲에 둘러싸인 봉은사는 강남의 허파 같았다. 숨막히는 대도시의 오아시스와 비슷했다. 경내 이곳저곳엔 각종 기도와 법회, 불사(佛事)를 알리는 안내문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종식을 기원하는 현수막도 보였다. 현실의 고뇌와 함께 호흡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봉은사의 트레이드 마크는 판전(板殿)이다. 부처님 말씀을 새긴 경판 3500점이 봉안돼 있으며, 특히 추사 김정희가 타계 사흘 전에 쓴 큼지막한 편액이 걸작으로 꼽힌다. 어린애의 자유로움과 대가의 단단함이 어울리는 두 글자가 부처의 넉넉한 미소와 용맹한 수행을 닮았다. 세상의 폭력을 부정하고 만물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다. 법정 스님의 ‘침묵은 범죄다’를 다시 읽어 본다. ‘승가정신은 폭력이나 독선적인 수단에 의지하지 않는다’ ‘의견이 서로 다를 때는 공정한 판단을 내걸 수 있는 중지에 묻는다’ ‘배타적인 태도를 지양, 공존의 윤리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덕이다’고 했다. 52년 전의 죽비가 지금 더 따끔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대한민국의 얼굴, 글로벌 타운 강남의 맑은 심장’(봉은사 홈페이지)인 봉은사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 대화와 소통을 통한 원만한 사건 해결을 기대한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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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이순신의 칼, 안중근의 총
충무공 이순신 종가에서 전해져내려온 장검 한 쌍(보물)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권총. [사진 문화재청, 전쟁기념관] 광화문광장이 다시 열렸다. 광장 면적이 두 배로 넓어졌다. 지난 토요일 현장을 찾았다. 광장의 얼굴인 이순신 장군부터 만났다. 광장 바닥, 동상 좌우로 작은 승전비가 설치됐다. 왼쪽에 23개, 오른쪽에 12개 총 25개다. 왼쪽은 충무공의 23전 23승을, 오른쪽은 충무공이 치른 주요 전투를 가리킨다. ■ 「 영화 ‘한산’, 소설 『하얼빈』의 물음 시대의 물길 돌려놓은 두 대장부 지금 집권층은 어디로 가고 있나 」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에 따르면 충무공이 참여한 해전은 총 45회, 40승5무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불멸의 기록이다. 왼쪽 비석에 충무공의 기개를 압축한 어록이 새겨 있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1598년 노량해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1597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후) 등등. 요즘 혼돈의 통치권을 꾸짖는 듯한 말도 눈에 띈다. ‘관직을 뽑는 지위에 있는 동안에는 같은 문중이라 만날 수 없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이 쓴 최초의 이순신 전기인 『이충무공행록』에 관련 대목이 나온다. 이순신은 성격상 아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능력을 알아주는 이가 드물었다. 어릴 적 친구 유성룡이 당시 이조판서 율곡 이이를 찾아가 부탁해 보라고 권유했다. 이순신과 이이는 덕수 이씨 같은 문중이었다. 하지만 충무공은 앞의 말 그대로 처신했다. 충무공은 부당한 인사 압력도 참지 못했다. 훈련원 봉사(정8품) 시절, 그의 상사가 친분 있는 사람을 높은 자리에 임명하려 하자 충무공은 바로 ‘노(No)’라고 답했다. “마땅히 승진해야 할 사람이 (불이익을 받게 돼) 공정하지 않다”고 항변했다. 원칙과 대의에 철두철미했던 충무공의 한 단편이다. 요즘 관객 4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한산’에 재연된 충무공의 밑바탕엔 이 같은 엄격한 자기 및 주변 관리가 깔려 있다. 영화에서 충무공은 전쟁은 ‘나라와 나라’가 아닌 ‘의(義)와 불의’ 의 싸움이란 비현실적인 말을 한다. 김한민 감독의 순진한 유추일 뿐이지만, 민생을 절멸시킨 ‘불의의 전쟁’에 통곡하는 충무공의 면모로 볼 때 마냥 허튼소리만은 아니다. 실제로 충무공은 『난중일기』에서 “원통하고 분하다” “아프고 답답하다” “괴롭고 어지럽다” 등을 수시로 쏟아낸다. 전황에 어두운 임금과 동료 장수, 사람을 짐승처럼 살상하는 왜군, 전투보다 전공(戰功)에 매달리는 명나라 장수 등 그가 느끼는 슬픔은 깊고도 넓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 명량분수대에서 아이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뉴스1] 소설가 김훈의 밀리언셀러 『칼의 노래』(2001) 곳곳에는 이순신의 비애가 스며 있다. 작가는 특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지도층을 충무공의 입을 빌려 성토한다. “그들은 헛것을 좇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것은 사실의 바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충무공에게 칼은 시대의 고통을 베는 말이었다.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칼이 권세와 이윤을 도모하는 칼이었다면 충무공의 칼은 백성과 도의를 살리는 칼이었다. 김훈의 문제의식은 청년 안중근의 고뇌와 결단을 다룬 신작 『하얼빈』에도 이어진다. 비유컨대 ‘총의 노래’쯤 된다. 똑같은 동양 평화를 외쳐도 이토 히로부미의 총이 일본의 침략을 합리화한 총이었다면 안중근의 총은 한·중·일의 공생을 희구한 총이었다. 안중근이 거사 직후 생명을 끊지 않고 법정에 나선 것도 일제의 야욕을 만방에 알리려는 당당한 선택이었다. 이순신과 안중근, 400년 전과 100년 전의 두 대장부가 묻고 있다. 우리는 현재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김훈 작가는 “지금이 더 위태롭다. 출구가 안 보인다”고 했다. 일촉즉발의 미·중 충돌이 대표적이다. 핵무장한 북한, 소통단절의 일본도 난제 중 난제다. 내부 총질이 점입가경인 여권은 또 어떤가. 1주일 후면 8·15 77주년이다. 위기의 대통령이 겹겹의 파고를 헤쳐갈 방책을 낼 수 있을까. “배운 자들이 구사하는 지배적 언어는 헛되고 또 헛되었지만”이라는 소설 속 안중근의 말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우리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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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무지갯빛 ‘우영우’는 있을까
자폐 스펙트럼을 다루며 우영우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일러스트=김지윤] 1953년 노벨문학상을 탄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언어의 달인이다. 최근 그의 명언과 잇따라 마주쳤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와 『뉴로 트라이브(NeuroTribes)』에서다. 두 책에서 인용한 처칠의 말은 ‘자연이 긋는 선은 항상 주변으로 번진다’였다. 원문이 궁금해 구글을 검색했다. ‘Nature never draws a line without smudging it’이다. 흔적·얼룩이 번진다는 뜻의 ‘스머지(smudge)’가 핵심이다. 이 앞의 문장도 함께 읽어야 맥락이 잡힌다. ‘세상은, 자연은, 인간은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가장자리는 칼로 자른 듯 날카롭지 않고, 항상 해어져 있다.’ 부대끼며 사는 게 순리라는 권고이리라. 뜬금없이 처칠을 꺼낸 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때문이다. 한번 본 건 절대 잊지 않는 ‘포토 메모리’를 지닌 우영우와 그를 응원하는 주변 인물들이 경제난과 역병에 꺼져가는 시청자들 마음에 다시 사랑의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다. 자기소개에서 “특이사항 자폐 스펙트럼”을 당당히 밝히는 우영우는 예전에 보지 못한 별똥별 같은 캐릭터다. ■ 「 자폐 스펙트럼 드라마가 남긴 것 판타지극과 실제 현실 크게 달라 문화도 정치도 서로 섞이며 성장 」 요즘 상찬이 쏟아지는 ‘우영우’에서 ‘스펙트럼’이란 단어가 확 들어왔다. 자폐와 스펙트럼이 한 단어처럼 통용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소셜미디어에 오른 감상평에도 비슷한 반응이 많다. 자폐증은 너무나 다양하고, 몇 가지 유형으로 제한할 수 없기에 스펙트럼을 붙여야 한다고 한다. 자폐 스펙트럼은 수많은 자폐아 부모의 고통과 헌신 끝에 생겨났다. 학문적 공인을 받은 것도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영국 정신의학자 로나 윙이 1970년대 후반 착안했고, 80년대 후반에야 인정받기 시작했다. 역시 자폐아 딸을 둔 윙이 수많은 자폐증 어린이의 면담 카드를 일일이 검토하고, 또 부모·교사들과 직접 만나며 종전의 자폐 기준이 무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존 잣대를 벗어난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윙은 처칠의 말에서 영감을 얻어 스펙트럼을 제안했다. 자폐증은 독일 출신의 레오 카노가 처음 정립했다. 당대 최고의 정신과 의사 카노는 1940년대부터 ‘정서적 접촉에 대한 장애’를 하나의 독립된 증후군으로 명명했다. 그전에는 백치·정신박약아·광인 등으로 낙인찍힌 ‘불량인간’들이었다. 윙의 스펙트럼은 카노의 증후군을 확장한 개념이다.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자연의 빛깔을 함의한다. 드라마 ‘우영우’ 뒤에는 이런 시대적 진화가 깔려 있다. 다만 우영우는 극히 판타지적인 캐릭터다. 자폐 스펙트럼에서 가장 두뇌가 뛰어난,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가장 따뜻한 이웃을 둔 경우다. 드라마와 현실은 판이하기 때문이다. 소통 불능의 자녀들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부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집 안에 갇힌 아이·성인들이 지금도 대다수다. 한국에서 더는 버틸 수 없어 이민 가는 이도 많다. 우영우에 가려진, 거인 청년 ‘김정훈’(펭수를 좋아하는 드라마 3회 등장인물)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이유다. 자폐증이 가장 빈번하게 비유되는 분야는 정치다. ‘자폐증에 갇힌 여의도’ ‘자폐적 증상의 ○○당’ 식이다. 원인 제공자는 둘째 치고 그것이 얼마나 무례하고 폭력적인 표현인지를 ‘우영우’를 보면서 반성한다. 자폐는 없고 자폐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선천적 조건을 포괄하는 ‘신경다양성’도 사용되고 있다. 진화와 혼돈은 함께 온다. 앞의 두 책을 번역한 강병철(소아과 전문의)은 “선천적 요인을 들어 자폐 치료를 거부하는 것마저 다양성으로 인정해야 할지 논란이지만, 폭력과 저주로 얼룩진 자폐의 역사가 차이와 이해라는 ‘인간적인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우영우’의 선구자는 영화 ‘레인맨'(1988)이다. 그 후예는 어떤 모습일까. 복잡한 일상과 보다 다양하게 섞이지 않을까. 세상은 그렇게 ‘번지며’ 커간다. 정치의 열쇠도 거기에 있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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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지난 8일 귀국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가 아들을 껴안고 있다. [뉴스1] 줄탁동기(啐啄同機)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면 새끼와 어미닭이 서로 안팎에서 쪼아야 한다는 불교 화두다. ‘수학계 노벨상’ 필즈상을 한국 학자로는 처음 받은 허준이(39) 프린스턴대 교수도 병아리 시절이 있었다. 서울대 물리학도였던 그는 2008년 모교 초빙교수로 온 일본 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廣中平祐)를 만나며 수학의 매력을 알게 됐다. ■ 「 ‘필즈상’ 허준이와 히로나카 교수 “수학의 기본은 상대방 입장 되기” 우리 정치는 국민을 뭘로 보는가 」 하늘에서 떨어진 듯 엄청난 주목을 받은 허 교수는 반면에 너무나 침착했다. 수상 인터뷰는 ‘도인과의 대화’처럼 들렸다. 마흔도 안 된 젊은 학자가 맞나 싶었다. “주위 사람들 모두 배울 점이 있다” “친구들과 선생님이 롤 모델” “집안일 하고 청소하며 매일 똑같은 일상” 등,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는 선승(禪僧)마저 연상됐다. 허 교수의 평정심은 ‘어미닭’ 히로나카 교수를 닮았다. 1970년 역시 39세의 늦은 나이에 필즈상(40세 이하로 수상 제한)을 탄 히로나카는 이를 소심(素心)이라 했다. 소심은 ‘본디 지닌 마음’. ‘수학의 달인’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상태다. “상대방과 일체가 돼서 생각하면 상상도 못 했던 문제의 원인을 발견한다. 수학도 그렇다. ‘문제’가 ‘자기’인지, ‘자기’가 ‘문제’인지 모를 정도로 서로 융합된 상태에 이르러서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학문의 즐거움』)고 했다. 허준이 교수에게 수학의 무한한 즐거움을 안내한 히노나카 헤이스케 교수. [중앙포토] 사실 수학은 일상인과 거리가 멀다. 사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애면글면 문제집을 붙들고 살았던 학창 시절이 후회막급일 정도다. 한데 히로나카는 여유롭다. “인간의 두뇌는 과거에 습득한 것을 극히 일부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고생해서 배우는가. 지혜를 얻기 위해서다.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사람과 달리 최소한 마음의 준비는 돼 있지 않은가. 배우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잊어버려라. 다시 많이 배우면 된다.” 히로나카의 말 속엔 젊은 허준이가 들어 있다. “무명의 사람에게 더 많이 배웠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스승” “인생은 직선이 아니다. 우여곡절의 되풀이”라고 했다. 각각 시인(허준이)과 피아니스트(히로나카)를 꿈꾸다 수학자가 된 여정도 엇비슷하다. 달관의 히로나카가 『학문의 즐거움』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실정치를 언급한 대목이 있다. 사실·논리를 추구하는 수학과 달리 추정·억측에 의존하는 정치를 경계하며 1970년대 미국 최대의 정치 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을 인용한다. “닉슨 대통령은 사임 위기에서도 ‘내가 무엇을 했단 말이냐’라며 울면서 주저앉았다. 사실 그대로 공표하고 적절한 책임을 졌더라면 사임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의 권위에 안주한 희망적 관측이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게 만들었다.” 여야 없이 사실 확인은 뒷전이고, 변명·궤변만 앞세우는 작금의 우리 정치판이 바로 겹친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정치 토양은 예전 그대로, 아니 뒷걸음친 것 같은 요즘이다. “상대편 잘못이 더 크다”며 상호 비방은 물론 내부 총질까지 마다치 않는 ‘죄수의 딜레마’에 갇힌 꼴이다. 올봄 개봉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있다. 문제 풀기에 급급한 한국 수학교육의 안팎을 다뤘다. 이런 박토에서 자라난 허 교수 또한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아닐까 싶다. “답이 없는 문제를 풀고, 그게 맞는지 확인·증명하는 게 수학자다. 수학도 부대껴야 사랑하게 된다”는 영화 속 주인공이 허 교수를 닮아서다. 그렇다면 이제 ‘이상한 나라의 정치가’도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초·중학교 때 한 반에 40~50명씩 있는 친구들과 알아가는 과정이 저를 성장시킨 자양분이 됐다”는 허 교수를 믿어 본다. 정치인만큼 많은 친구(국민)를 둔 직업도 없지 않은가. 국민을 핑계로 시시각각 시기하는 ‘용심’이 아닌 진정 국민의 아픈 곳을 헤아리는 ‘소심’을 기다린다. 그게 안 되면 국민은 언제든 ‘헤어질 결심’을 한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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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90세 소년병의 마지막 소원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소년병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매진해온 박태승씨. 올해 아흔이다.[중앙포토] 벌써 49년째다. 올해 아흔 살 노인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속죄의식을 치른다.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병사들을 위해 불경을 봉독하고, 나무아미타불을 1만 번 염불한다. 그의 심장엔 1950년 11월이 불도장처럼 찍혀 있다. 6·25 당시 평북 박천까지 올라갔던 그는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경북 청도 출신의 15세가량 소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적군의 유탄에 쓰러진 소년이 더는 가망이 없을 것으로 여기고 그에게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했었다. 두려움에 빠진 그는 소년의 간청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도 탈출해 살아야만 했다. 만 17세 때였다. ■ 6·25 때 전장 나간 소년병 3만명그들에 반세기 바쳐온 박태승씨국가는 영영 그들을 잊을 것인가 「 」 그는 평생 죄의식을 지울 수 없었다. 1974년부터 저세상의 소년병을 위해 예불을 드려 왔다. 처음에는 집에서 시작했다가 13년 전쯤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작은 법당을 차렸다. ‘심우원(尋牛苑)’이다. ‘소를 찾아서’라는 뜻으로, 불교 구도 과정을 상징한다. 그는 1998년부터 매해 6월 호국영령을 기리는 합동위령제를 열어 왔다. 올해도 지난 21일 심우원에서 거행했다. 심우원에는 소년병 위패 3241위, 풍기·영주 전투 전사자 위패 244위, 그리고 한국전쟁 전사자 위패 3만7635위가 봉안돼 있다. 그는 여태껏 국방부·현충원을 수십 회 방문하며 정부가 누락한 소년병 870명과 6·25 전사자 3만7635위를 대전현충원에 모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난 21일 경북 풍기 심우원에서 열린 6·25 영령 합동추모제에서 박태승씨가 추모사를 읽고 있다. [사진 노치환] 그가 21일 눈물과 통한의 추모사를 6·25 영령들에게 바쳤다. 포항 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소년병의 일기장을 인용했는데, 그 사연이 가슴을 후볐다.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고향의 옹달샘, 이가 시리도록 찬물을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그는 이 글이 생각나면 “잠자리에서도 두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집니다”고 탄식했다. 그는 박태승씨다. 군번 0350115. 1950년 8월 입대해 4년6개월간 복무했다. “나를 따라 군대에 가지 않겠느냐”는 육군본부 수색대원의 권유로 들어간 군 생활이 그의 운명을 180도 돌려놓았다. 바로 소년병의 비애다. 사실 소년병은 20여 년 전까지 까맣게 잊힌 존재였다. 국방전사에도 관련 기록이 없었다. 18세 미만은 징집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식 군번을 받고 참전했으나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비운의 병사들’이다. 2011년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에서 낸 『6·25전쟁 소년병 연구』에 따르면 한국전에 참전한 17세 이하 소년병은 2만9603명, 전사자는 2573명에 달했다. 박씨는 지난 반세기 동안 소년병 명예회복에 진력해 왔다. 하지만 국가는 아직도 응답이 없다. 2000년대 이후 관련 법안이 몇 차례 거론됐지만 구체적 결실이 없는 상태다. 그도 이제 지칠 만큼 지쳤다. 남은 소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소년병의 공적을 인정하는 번듯한 현충시설을 마련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직 모시지 못한 6·25 전사자의 위패를 현충원에 봉안하는 것이다. 가족·후손이 없어 국가에 위패 하나 신청하지 못한 영령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충정에서다. 박씨는 “이제 아흔입니다. 얼마나 더 살겠어요.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현충일에도 꽃 한 송이 받지 못하는 그들을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맞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다행히 올해 지역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주시민 217명이 모여 그의 뜻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지난 25일 6·25 7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나라에 헌신하신 분들을 제대로 대우하는 나라를 만들겠다”(윤석열 대통령), “참전 유공자를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을 하겠다”(한덕수 총리)고 했다. 1년 365일 중 하루의 다짐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내년 6·25엔 91세 소년병의 웃음을 볼 수 있을까.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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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한국인이 처음 그린 미국 풍경화
서화가 강진희(1851~1919)의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한국인이 그린 첫 미국 풍경화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 [사진 예화랑] ■ 강진희의 1888년작 ‘화차분별도’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수행·통역자주·실리외교의 중요성 일깨워 「 」 보면 볼수록 묘한 그림이다. 서울 강남 예화랑에서 전시 중인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다. 화차는 석탄을 태워 달리는 기차. 가로 34㎝, 세로 28㎝ 화폭에 철교를 달리는 기차가 등장한다. 철로도 두 개, 기차도 두 대다. 그림 하단에는 서양풍 5층 건물과 나무 많은 언덕이 보인다. 한국인 화가가 최초로 그린 미국 풍경화로, 이번에 처음 일반 공개됐다. 화가는 청운 강진희(1851~1919). 1888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수행·통역원으로 따라간 미국에서 본 풍경을 담았다. 갓 쓰고 도포 입은 그에게 드넓은 강물을 가로지르는 철교는 대단한 구경거리였을 터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 철도인 경인선은 그로부터 11년 뒤인 1899년 개통했다. ‘화차분별도’는 무엇을 그린 것일까. 강진희가 기록을 남기지 않아 명확한 정설은 없다. 다만 박정양의 『미행일기(美行日記)』 에 워싱턴공사관 일행이 1888년 4월 1일 기차를 타고 볼티모어 당일 여행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차가 너무 빨리 달려서 한쪽 눈을 돌리면 이미 지나가 버리고 잘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의문이다. 당시 미국엔 대형 철교 두 개가 나란히 놓인 게 없었다. 세계 첫 철제 교각인 뉴욕 브루클린 다리는 1883년 개통됐고, 그것과 쌍둥이 다리로 불리는 맨해튼 다리는 1909년 완공됐다. 박정양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게 1887년 12월 28일이고, 다시 미대륙 횡단열차를 타고 워싱턴에 내린 게 1888년 1월 11일이니 샌프란시스코 명물 금문교(1937년 개통)일 가능성도 전혀 없다. ‘화차분별도’는 실경산수가 아닌 작가가 여기저기서 본 장면을 조합한 것이란 결론에 이른다. ‘분별도(分別圖)’란 명칭도 미스터리다. 뭘 구별하고 가른다는 뜻일까. 전기작가 이충렬과 역사학자 노관범과 함께 머리를 맞댔으나 마땅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분별도 이름이 붙은 그림을 본 적이 없다”(노관범), “조광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게 물어도 전혀 알 수 없다고 하더라”(이충렬). 강진희의 ‘잔교송별도(棧橋送別圖)’.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헤어지는 장면을 그렸다.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사진 예화랑] 전시장에 있는 강진희의 다른 작품 ‘잔교송별도(棧橋送別圖)’에서 실마리를 찾아봤다. 강진희가 조선에 예정보다 일찍 소환된 박정양과 부둣가에서 헤어지는 모습이다. “분별 또한 송별처럼 자기보다 먼저 기차를 타고 조선에 돌아가는 박정양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닐까요”(이충렬), “그럼 뜻이 통하네요. 여행을 잘했다면 굳이 분별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을 것 같아요.”(노관범) 물론 위의 대화는 추정이다. 그럼에도 박정양이 조선에 소환된 이유가 쓰라리다. 박정양이 미국에서 펼친 독립적 외교활동에 불만을 느낀 청나라가 ‘영약삼단(另約三端)’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귀국을 요구했다. 영약삼단은 세 가지 별도 약정이란 뜻으로, 당시 청나라는 박정양의 미국 파견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조선의 자주국 표방 금지와 중국의 속국임을 알려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심지어 한국 공사와 중국 대신의 상하관계를 강요할 정도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6년 만에 공사를 보내며 자주 국가 면모를 갖추려는 조선을 방해하려 했다. 134년 전의 두 그림이 미·중 격돌의 오늘을 비추는 거울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화차분별도’는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간송미술관에서도 전시된 적이 없다. 『간송 전형필』을 낸 이충렬 작가는 “간송이 이 그림을 구입한 경위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간송은 왜 이 작품을 사들였을까. 언젠가 빛을 보게 될 것으로 판단했을까. 추측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간송 덕분에 한국 근대외교사의 한 고리를 찾았다는 사실. 그 고리를 이어가며 현재의 위기를 타고 넘는 건 우리들의 몫이다. 더욱이 지금은 미국 대통령이 BTS를 백악관에 초청하는 시대, 134년 전 기차가 무색할 뿐이다. 오늘 현충일을 맞아 국가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생각한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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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140번째 태극기 생일
140년 전인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사용된 태극기 도안. 당시 미국 측 대표였던 슈펠트 제독이 직접 그려 미국 해군 측에 전달했다. 대한민국 상징인 태극기가 탄생한 날이다. 아쉽게도 아직 태극기 창안자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가로 6.1㎝, 세로 3.8㎝. 명함보다도 작다. 한국 최초의 태극기 도안이다. 손으로 직접 쓴 ‘Corea Ensign(깃발)’도 보인다. 도안자는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 그가 남긴 ‘슈펠트 문서’ 중 일부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7년 겨울 학회 참석차 미국에 갔다가 미 의회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아냈다. 지난 13일 이 교수의 특강 ‘슈펠트 태극기, 어떻게 찾았나’가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이 교수는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정말 뜻밖이었어요, 깜짝 놀랐죠.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하 조미조약) 때 사용된 태극기 도안이 아닙니까. 당시 슈펠트는 미국 측 대표였어요.” ■ 1882년 조미조약 때 만든 태극기자주·독립국가에 대한 염원 상징 눈앞의 난국 헤쳐가는 지혜 담아 「 」 슈펠트의 태극기 도안은 요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미 해군이 49개국 국기를 소개한 『해양국가의 깃발』(1882.7)과 함께다. 조미조약을 맺은 지 불과 두 달 만에 태극기를 실을 만큼 조선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슈펠트 도안은 1882년 5월 22일 태극기의 탄생을 공식화했다. 태극기의 생일이라 부를 만하다. 조미조약 미국 측 대표가 직접 보고 그린 것을 미 해군에 보냈기 때문이다. 그해 9월 일본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가 선상에서 처음 태극기를 그렸다는 기존 학설을 뒤집었다. 22일 어제는 140번째 맞는 태극기의 생일. 조미조약(한·미 수교) 140돌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대로 조미조약은 조선이 서구와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는 출발점이 됐다. 그날 태어난 태극기도 역사적 현장을 지켜봤다. 태극기는 19세기 후반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역학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조약을 중재한 중국(청나라)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점을 명문화하려 했다. 미국과 함께 조선을 공동 보호하는 국가로서, 러시아와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다. 미국 측 대표 슈펠트는 중국의 여러 차례 요청을 거부했다. 그가 조선을 각별히 아껴서가 아니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 확장 정책에 몰두했다. 해양제국 건설, 이른바 시장 확대를 노렸다.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이 돼야 조선이란 시장에서 기회 균등의 원칙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조선의 사정도 급박했다. 중국·일본·러시아의 포박에서 벗어날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다. 과거 중국과의 책봉-조공 관계를 청산하고 완전 독립국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게 됐다.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이 즉각 개입하고, 조선도 수출입 상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관세 자주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영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열강과 잇따라 체결한 조약의 모델이 됐다. 하지만 아직 태극기 창안자는 불분명하다. 명확한 자료가 없어서다. 고종 임금과 조약 당시 역관(譯官)으로 참여한 이응준이 주로 거론된다.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인 실록도 도움이 안 된다. 『고종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27~35년 일본 학자들 중심으로 편찬돼 누락·왜곡된 측면이 많다. 더욱이 태극기 관련 기록은 고종이 대신들의 요청에 제작을 윤허했다는 단 한 줄만 나온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초상이다. 어제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굳건한 한·미 동맹에 대한 공감대를 넓혔다. 한·미·일 3국의 연대도 가시화했다. 향후 중국의 반발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평행이론을 믿지 않지만 140년 전 조미조약 때의 혼돈이 떠오른다. 당시 조선의 안위와 함께하겠다던 미국은 이후 약속을 어기며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역시 자강만이 살길이다. 게다가 지금은 북한이란 돌발 변수도 있다. 한국은 이제 구한말 나약한 나라가 아니다. 한층 유연하고 당당한 자세가 요청된다. 하늘과 땅, 물과 불 4괘가 어울리며 역동과 통합을 동시에 구현한 태극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본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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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윤석열 대통령의 거울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수집품 기증 1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 나온 업경대(앞). 생전에 지은 모든 잘잘못이 거울에 비친다고 한다. 뒤에 보이는 조각은 사찰에서 큰북을 올렸던 법고대다. [중앙포토] 투박하면서도 성기지 않다. 무서우면서도 정감이 간다. 눈을 부릅뜨고 송곳니를 드러냈지만 백수의 왕자 사자의 얼굴엔 설핏 웃음기도 맴돈다. 사자 등판엔 큼지막한 조형물이 얹혀 있다. 활짝 핀 연꽃 위에 불꽃이 이글거리고, 그 복판은 동그랗게 파여 있다. 거울이 있던 자리다. 업경대(業鏡臺)다. 전시품에 짧은 설명이 달려 있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 왜 이것에 끌렸을까. 어제(8일) 부처님 오신 날 직전에 마주친 감흥에 내일(10일)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기대, 혹은 걱정이 겹친 까닭이 아닐까 싶다. 지난해 기증된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컬렉션 2만3000여 점 가운데 알짜 355점을 뽑은 ‘어느 수집가의 초대’ 특별전(8월 2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다. ■ 이건희 기증품전에 나온 업경대선행과 죄업은 저승까지 이어져문 정부 과오도 나침반 삼아야 「 」 이번 전시는 진수성찬이다. 국보 13점, 보물 20점에 정선·김홍도·정약용·박수근·이중섭·김환기는 물론 인상파 화가 모네까지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한데 어울렸다. 이런 명품에 비하면 업경대는 초라하다. 색깔도 벗겨지고, 작품의 눈인 거울도 사라졌다. 제작자도, 출처도 모른다. 전체 형태로 볼 때 17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유산에서 불상·불화·불탑이 주전 선수라면 업경대는 후보 선수에 가깝다. 그럼에도 사찰 예식에선 빠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업경대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허물을 살폈다. 사후 세계에 대한 가이드 역할도 했다. 염라대왕의 지물(持物)로, 생전의 선행과 죄업이 거울에 낱낱이 나타나 극락과 지옥행이 결정됐다고 한다. 거울은 반성·성찰의 상징이다. 시인 이상은 ‘거울’에서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원문은 띄어쓰기 없음)라고 했으며,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고 했다. 윤석열 당선인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내일은 대통령 자격으로 국민과 처음 만나는 날인 만큼 단장에도 꽤 신경을 쓰지 않을까 싶다. 대선후보와 당선인 시절의 힘겨웠던 장면 장면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한데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역대 여느 대통령에 비할 수 없는 악조건에서 출발하는 그의 앞에는 지금 ‘파란 녹이 낀 (시대의) 구리거울’이 놓여 있다. 정치는 극한대치요, 경제는 첩첩산중이고, 국제정세는 일촉즉발이다. 더욱이 내각조차 제대로 꾸리지 못한 채 개문발차하는 형국이다. 검찰·관료 출신 중용이라는 좁은 인선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이른바 사면초가다. 과연 그가 이런 ‘파란 녹’을 걷어내며 ‘공정과 상식’이란 화두를 실천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통치에 쾌도난마는 없다.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 특히 반대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대통령의 업보다. 시인 이상이 실마리를 던져준다. 오른손잡이인 그는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라고 했다. 반면에 현실의 대통령은 얼마든지 왼손잡이와 손잡을 수 있다. 그게 거울이 주는 깨우침이다. 오죽하면 끝까지 상대를 탓하며 무력하게 물러나는 문재인 대통령조차 “우리 정부가 부족했던 점을 거울삼아서 더욱 잘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라 했을까. 문 대통령의 진의와 관계없이 새 대통령이 나침반으로 삼을 만하다. 박물관 업경대 바로 곁에는 19세기 법고대(法鼓臺)도 놓여 있다. 불법을 전하는 사찰 법고(큰북)를 떠받친 목조각이다. 민생이란 막중한 짐을 지고 있는 통치자의 책무마저 연상된다. 용산시대를 열어가야 할 윤 대통령, 새 집무실 바로 옆 중앙박물관을 한번 둘러보시라. 고난의 역사를 증언해 온 예술품, 나아가 민초의 숨소리가 들릴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악업(惡業)과 결별하는 선연(善緣)을 찾을지도 모른다. 이제 승리의 어퍼컷을 접어야 할 시간이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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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저주토끼’의 희망
소설집 '저주토끼'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오른쪽) 작가와 번역가 안톤 허.[연합뉴스] “백년지대계가 자막에 달려 있다. 나는 진지하다.” 지난해 10월 학술저널 ‘대학: 담론과 쟁점’에 실린 ‘팬데믹 시대의 자막’의 마지막 문장이다. 백년지대계는 물론 교육이다. 그런데 대학교육이 자막에 달려 있다고? 할리우드 진입 장벽을 허문 ‘기생충’의 영어 자막쯤 된다는 걸까. ■ 영국 부커상 후보에 오른 정보라차별과 소외의 세상 환상적 묘사“조금씩이라도 함께 나아갑시다” 「 」 사연은 이렇다.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필자는 2020년 1학기에 죽을 고생을 했다. 팬데믹으로 ‘비대면 화상수업’을 처음 하면서 강의 자료를 만들었는데, 엄청난 시간을 들여 대본도 작성했다. 대본 쓰고, 녹음·편집하고 동영상을 만들었다.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장애 학생, 한국말에 서툰 러시아·고려인 학생을 위해서였다. 반응은 좋았다. 하지만 그는 그로기가 됐다. 매번 새벽 3~4시까지 준비해야 했다. “뇌일혈로 죽을 것 같은” 정도였다. 결국 2학기부터 대본 작업을 중단했다.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해 주는 프로그램 같은 기술 지원이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무료 프로그램을 써보긴 했지만 러시아 단어를 모두 틀리게 전환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년이 흐른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그는 “누가 쓸 만한 음성-텍스트 변환 프로그램을 교육부 차원에서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며 글을 맺었다. 학생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는 건 대학의 책무이지 않은가. 그는 올해 2월 강단에서 내려왔다. 투병 중인 남편을 돌봐야 하는 개인 사정도 있었지만 학내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는 대학 시스템에 대한 실망도 컸다. 그와 통화를 했다. “한 학과, 한 학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학 전체가 교육할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학교에 대안이 있었더라면 따라 했을 겁니다. 하지만 모두 걱정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어요. 벌써 2년이 흘렀습니다. 해결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 아닌가요.” 그는 정보라 작가다. 최근 단편집 『저주토끼』로 세계 3대 문학상이라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한창 주목을 받고 있다. 정 작가는 미국에서 동유럽 지역학과 슬라브 문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딴 학자 출신이다. 강의와 창작, 두 마리 토끼를 쫓던 그는 앞으론 창작과 번역에 집중할 계획이다. 정 작가는 SF소설을 쓴다. 호러와 판타지를 넘나들며 욕망이란 무한열차에 올라탄 이 시대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구멍 뚫린 대학 현장을 꼬집은 앞의 글처럼 타인을 무시하고, 차별하고, 억누르고, 잡아먹으려는 현대인의 볼썽사나운 행태를 때로는 공포스럽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펼쳐 보인다. 최근 한국문학의 또 다른 성장판으로 떠오른 SF소설의 약진이다. 2017년 나온 『저주토끼』와 지난해 출간된 『그녀를 만나다』를 읽었다. 작가는 가난·여성·장애·소수자·외계인·전염병·로봇 등을 소재로 차별과 소외를 주로 얘기한다. 처음엔 황당무계해 보이지만 갈수록 “그래, 그럴 수 있지” 공감하게 된다. 초현실적인 상상이 지극히 현실적인 경고로 다가온다. 예컨대 변기 속에서 흉측한 머리가 튀어나오는 ‘머리’는 지금껏 우리가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린 것들의 대반격에 가깝고, ‘그녀를 만나다’는 평균수명 120세 시대를 배경으로 지난해 3월 타계한 성소수자 변희수 하사를 기억한다. 작가의 고백처럼 소설들은 쓸쓸하고 외롭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아주 조금씩이라고 함께 나아가자.” 그에게 물었다. “엉망진창 현실정치도 한번 다뤄보시라.” 대답이 명쾌하다. “전혀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럼에도 ‘머리’가 머리에 맴돈다. 평소 소통 불능에 헤매면서도 위성정당·검수완박 같은 공동 이해 앞에선 담합하는 정치권은 우리가 지금껏 먹고 버린 배설물, 우리가 키운 괴물이 아닐까 싶다. 그 괴물은 언제까지 살아남을까. 소설 ‘영생불사연구소’가 섬뜩하다. 1912년 ‘나라는 망해도 우리만은 영생불사’를 내걸고 발족한 수상한 연구소는 지금도 활동 중이다.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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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시시각각] 우토로, 기적의 또 다른 이름
일본 교토 우토로마을에서 30일 개관하는 평화기념관(오른쪽 건물). 기념관 앞마당에 조선인 임시숙소 함바가 재현된다. 사진 왼쪽 아파트는 2018년 완공된 시영주택이다. 현재 시영주택 2호(가운데)가 건설 중이다. [사진 지구촌동포연대] 2018년 4월 22일 일본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에서 마을잔치가 열렸다. 일명 야키니쿠 잔치였다. 사람들은 화로에 양념 고기를 구워 먹으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이날은 우토로 시영주택 입주식이 진행된 날. 참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지난 회한을 달랬다. 4년 뒤인 오는 30일, 우토로에 또 다른 잔치가 열린다. 우토로 평화기념관 개관식이다. 80여 년 우토로 역사에 새 이정표를 찍는 행사다. ‘우토로 2기’의 선언쯤 된다. 기념관의 한자도 기념(記念)이 아니라 기념(祈念)을 썼다. 기억하는 마음보다 기도하는 마음, 평화를 기원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돌려 생각하면 그만큼 평화롭지 못했다는 의미다. ■ 차별과 화해, 교토의 한국인 마을80년 아픔 담은 평화기념관 개관 최악 한·일관계에 이정표 되기를 「 」 우토로? 귀에 달라붙는 이름이다. 차별과 멸시의 재일 한국인을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교토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이 모여 만든 마을이다. 한국과 일본, 그 경계에서 하루하루 위태롭게 버텨온 이들의 아픔이 켜켜이 쌓인 곳이다. 우토로가 이제 평화를 얘기한다. 과거보다 미래를 바라보자고 한다. 지난 80여 년의 갈등과 대립이 쉽사리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희구하는 마음에서다. 평화기념관이 역사의 화해를 향한 새 출발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토로 기념관은 단출하다. 연면적 450㎡, 지상 3층 규모다. 전시장·공연장·수장고 등을 갖췄다. 특히 기념관 앞에 복원한 함바(飯場) 한 채가 눈에 띈다. 함바는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임시숙소였다. 1940년대 초반 1300여 조선인 노동자 가족들은 3평 남짓한 좁다란 방에서 지내야만 했다. 일본이 패전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올 형편이 안 됐던 사람들은 그곳에 남아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갔다. 일본 당국도 조선인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1988년 3월에야 상수도가 처음 설치될 정도였다. 주민들은 우물물에 기대 살았다. 공중위생도 형편없었다. 우토로 문제가 본격화한 건 1980년대 후반부터다. 1989년 일본 부동산회사가 주민들을 상대로 퇴거 통보와 함께 소송을 내고,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강제퇴거 확정판결을 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반세기 터전을 한순간에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우토로 주민을 지키려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국제사회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후 양국 시민사회와 정부의 지원으로 주거환경 개선, 시영아파트 건설, 평화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게 됐다. 반목과 불화의 한일 관계에서 기적 같은 일이다. 우토로 기념관은 다양한 개관 행사를 준비했다. 일제강점기 동원 기록, 주민 생활용품, 강제퇴거에 맞선 투쟁·소송 문건, 주민 인터뷰 영상 등이 공개된다. 차별의 과거를 기억하며 공존의 미래를 기약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앞날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우토로 또한 독도·역사교과서·강제징용 갈등 등 최악의 한일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념관 건립을 도운 최상구 지구촌 동포연대 사무국장은 “기념관이 일본 내 혐한 세력의 타깃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방화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혐오는 역사의 실체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두려움이 아닌가. 기념관이 그간의 오해를 풀어가는 디딤돌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토로는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도 묵중하다. 한일 두 나라를 넘어 차별과 평화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촉구한다. 라경수 가쿠슈인 여대 교수는 “국제사회가 주목한 것도 단순한 반일을 넘어 우토로에 내재한 보편성”이라고 평가했다. “시민은 자국의 국경선 앞에서 사고를 정지하면 안 된다. 자기 자신에 있는 벽, 인종주의라는 벽, 여성차별 등 일상적 차별의 벽을 하나씩 무너뜨려서 우리 자손들에게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를 남기는 것이 평화를 위해서 싸우는 의미다.”(1990년 ‘국제평화회의 in 우토로’) 박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