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따르겠다더니… 반대로만 가는 이재명 [서승욱 논설위원이 간다]

    서승욱 논설위원   봉하마을서 돌아본 진영·지역대결    그곳엔 봄기운이 완연했다. 주말인 지난 11일 자동차로 다섯 시간을 달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주차 공간이 꽉 찰 정도로 방문객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잠든 묘역에도, 마지막 순간에 올랐던 봉화산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퇴임 후 마지막 순간까지 생활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집'을 문화해설사와 함께 돌아보려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손녀를 태우고 논길을 누볐던 고인의 자전거, 919권의 애독서가 서가를 채운 서재 겸 집무 공간, 손자의 그림 낙서가 벽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랑채를 둘러보며 생전의 그를 떠올렸다. '깨어있는 시민 문화체험전시관'이란 이름이 붙은 노무현기념관에선 한 장면 한 장면이 드라마처럼 파란만장했던 인생·정치 역정과 마주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2월 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을 방문,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계승하겠다는 이재명  정부가 내놓은 징용 해법을 둘러싼 국민 여론이 극단으로 갈리고, 정치권의 갈등이 폭발하는 국면에서 봉하마을을 찾은 건 여야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떠올라서다. 검찰의 칼날이 자신을 조여 오는 결정적 순간마다 이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새해 첫날부터 봉하마을을 찾았고, 같은 달 10일 성남 FC 후원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첫 출석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내란 세력들로부터 내란음모죄라는 없는 죄를 뒤집어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논두렁 시계 등의 모략으로 고통을 당했다. 이분들이 당한 일이 사법 리스크였느냐. 그것은 사법 리스크가 아니라 검찰 리스크였고 검찰 쿠데타였다"고 주장했다. (※기자의 봉하마을 방문 뒤 불거진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 회고록 논란엔 "검사왕국이 되자 부정한 정치검사가 낯부끄러운 줄 모르고 고개를 내민다"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2월엔 노 전 대통령 묘역을 부여잡고 흐느끼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꿈은 노무현의 꿈이었고, 문재인의 꿈이고, 저 이재명의 영원한 꿈"이라며 노 전 대통령의 계승자임을 호소했다.   지난 11일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생활했던 집 곳곳을 둘러보고 있다. 서승욱 논설위원 지역구도 개혁안 제시한 노무현    과연 이재명의 정치 궤적은 그의 말처럼 노무현의 정치 궤적과 닿아있는가, 이재명은 노무현의 무엇을 계승하겠다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기자의 봉하행을 재촉했다.    "그때 노무현 청와대에 출입했다면서 그것을 왜 기억 못 하냐. 취재를 대충했구먼. 대통령에 취임한 뒤 가장 먼저 무엇을 하러 했느냐. 한 달 뒤 국회 연설에서 무슨 주장을 했는지 찾아보라."  봉하마을 방문 나흘 전 사석에서 만난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노무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서 이런 핀잔을 들었다. 과거 기사를 찾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노 전 대통령은 취임 한 달여 만인 2003년 4월 2일 첫 국회 연설에서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정치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하지 않도록 선거법을 개정해 달라"며 "이런 제안이 현실화되면 (2004년) 17대 총선의 과반수 정당이나 정치연합에 '내각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했다. '중대선거구제+권역별 비례대표제' 또는 '소선거구제+권역별 비례대표 확대'가 그의 복안이었다.     위기를 대하는 판이한 방식      지역주의 극복은 그의 정치 인생을 관통한 키워드이자 필생의 어젠다였다. '바보 노무현'이란 명예로운 별명도, 돌풍이 태풍으로 번지면서 이뤄낸 대선 승리도 험지 부산에서의 3번을 포함한 모두 4번의 낙선이 만든 역설이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이 압권이었다. 1998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던 정치 1번지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또 부산으로 내려갔고, 또 떨어졌다.   훗날 그는 이 '무모한 도전'에 대해 "떨어지더라도 정치적으로 실패할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는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회고록『성공과 좌절』), "(지역주의 극복은)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다. 자기 희생과 헌신을 통해 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했다"(자서전 『운명이다』)고 회고했다.   반면 이 대표는 다른 길을 걸었다. 지난해 그는 대선 패배 뒤 불과 두 달여 만에 낙선 가능성이 작은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서 당선했다. 지역구의 원래 주인은 대선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송영길이었다. 그래서 "국회에 들어와 사법 리스크 방탄복을 입으려는 것"이란 꼬리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선거에 안 나가든지, 나간다고 해도 (본인이 시장을 했던) 분당에 나가서 떨어졌다면 감동과 울림이 있었을 것"(유인태 전 총장)이란 비판이 대표적이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그의 인천 출마는 9개월 뒤 체포동의안 부결로 이어졌다. “정치적 실패가 인간적 실패는 아니다”라던 노 전 대통령과 반대로 이 대표는 인간적으로 비판받는 처지가 됐다.     “작은 기득권에 집착하지 말아야"  위기 대응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노 전 대통령은 지지율 하락을 면치 못했다. 결국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압박하는 당내 비판세력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리고 본인에게 유리할 게 없었던 여론조사 방식의 단일화도 받아들였다. 그 결단이 지지층 결집과 ‘노풍’ 재점화의 기폭제가 됐다.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그는 "민주당 후보라는 작은 기득권에 집착하는 것은 떳떳한 선택이 아니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20여 년 뒤 사법 리스크에 내몰린 이 대표는 당 대표 퇴진론과 마주하고 있다. 조기 퇴진론을 극구 부인하더니, 최근에야 '연말께 질서 있는 퇴진론'을 친이재명 진영이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총선 불과 4개월 전에 그만두겠다면 도대체 당이 그 전까지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하느냐. 조기 퇴진론을 무마하기 위한 꼼수"라는 반발이 거세다.   노무현식 '내던지는 정치'와 이재명식 '지키는 정치'의 대비가 강렬하다. 선거제 개편과 대연정 구상 등 지역주의 극복과 통합에 정열을 쏟았던 노 전 대통령, 통합형 정치 개혁과는 반대로 '개딸' 팬덤과 극단적 진영주의 등 '국민 분열'로 생존을 모색하는 이 대표의 모습이 대조적이란 지적도 있다.      지난 11일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생활했던 집 곳곳을 둘러보고 있다. 서승욱 논설위원 한·미 FTA 체결, 이라크 파병    이런 차이는 정책 결정에도 투영된다. 노 전 대통령은 진보주의적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하지만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체결이나 이라크 파병, 제주 해군 기지 건설, 징용 피해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상 결정 등 진보 진영에서 반대했던 어젠다도 필요하다면 결단했다.   "정치에 참여하는 진보주의 사람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이 '정책은 과학적 검증을 통해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허하게 교조적인 이론에 매몰돼 흘러간 노래만 계속 부르면 안 된다. 일부 고달프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선동해 끌고 갈 수 있겠지만, 책임 있는 정답은 아니다"(『성공과 좌절』에서 한·미 FTA 반대론에 대해)는 신념이었다. 양곡관리법과 노란봉투법 등 자기 진영이 열광하는 법안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이 대표가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노 전 대통령은 숨을 거두기 한 달 전 검찰 수사와 관련된 솔직한 심정을 참모들에게 토로했다. 봉하마을에서 열린 '사람 사는 세상' 홈페이지 개편 회의였다. "내가 피의자로서의 권리를 이야기하면 (홈페이지) 회원들은 정치적 대결 구도에서의 투쟁으로 생각하고 나를 보호하려 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에 맞지 않는다. 나는 이미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여러 사람들까지 우습게 만드는 셈이 된다." 검찰 수사에 대한 인간적 고뇌를 토로하며 이 문제가 진영 간 투쟁의 맥락에서만 해석되는 걸 경계했다.    "진보든, 보수든 신뢰가 중요"    회고록 『성공과 좌절』엔 정치인을 평가하는 노 전 대통령 나름의 기준이 제시돼 있다. "정치에서 정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핵심 요소는 정체성이다. 그 사람이 진보주의냐, 보수주의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원칙을 아는 정치인이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냐다. 진보냐 보수냐 이전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보도 있고, 보수도 있는 것이다."   검찰 수사에 대한 태도, 정치인으로서의 기본에 관한 이야기가 이 대표의 가슴 복판에 박히는 돌직구 같다.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2023.03.20 00:47

  •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은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니라 시작”

     ━  강제징용 해법 갈등, 어떻게 풀어야 하나   서경호 논설위원 # 11일 오후 서울 시청 광장 동편. 원내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정의기억연대·민주노총·민변·전국민중행동 등 610개 단체로 구성됐다는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과 함께 ‘강제동원 굴욕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2차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경찰 추산 7000여 명이 참석했다. 지구당 깃발이나 파란색 풍선을 든 민주당 참석자가 많았고, 요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건설노조 조직원도 눈에 많이 띄었다. ‘한미연합군사연습 중단하라’ 등의 플래카드도 보였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굴욕외교 심판’이라 적힌 손팻말을 들고 연단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 대표는 연단에 올라 “굴욕적인 강제동원 배상안이 이대로 강행된다면 다음은 바로 한·일 군수지원협정 체결이, 그 뒤에는 한·미·일 군사동맹이 기다리고 있다”며 “연합훈련을 핑계로 자위대의 군홧발이 다시 한반도를 더럽히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의 군사·외교적 자율권이 제약된 상황에서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나”는 발언도 있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이다.   이날 연단에 오른 이들의 단골 비판 메뉴가 ‘대통령 40년 지기’ 석동현 민주평통 사무처장의 “지금까지 식민지배에 대해 배상하라고 악쓰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발언이었다. 눈치 없는 발언 하나가 집회에서 먹잇감이 됐다.     ■  「 전문가들 “불가피한 차선책” 한국의 결단, 일본도 손 잡아야     대통령이 피해자 더 보듬었으면   ‘한·미·일 협력’보단 미래 강조를   한·일, 망언 안 나오게 관리하고 힘들어도 국회서 특별법 제정을 」    11일 오후 서울 시청 광장 동편에서 열린 ‘강제동원 굴욕해법 무효 촉구 2차 범국민대회’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동상 너머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 강제징용 해법을 고민하는 토론회가 13일 두 곳에서 열렸다. 정의당 강은미 의원과 민주당 김홍걸 의원,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이 주관한 국회 토론회는 정부 해법에 매우 비판적인 분위기였다. 주말 집회의 연장선 같았다. 김홍걸 의원은 “최소한의 사과조차 하지 않고 ‘과거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겠다’고 말하는 일본 정부인데, ‘과거 내각’이 어떤 내각일 줄 알고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언급하는지, 윤석열 정부가 한심하다”고 말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한 2011년 12월 미쓰비시중공업이 작성한 합의문 수정안을 토론회에서 공개했다. 당시 수정안에는 미쓰비시중공업이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강제동원·강제연행’ 문구가 없었다. 합의는 결렬됐다. 윤석열 정부의 해법이 12년 전 미쓰비시중공업이 제시한 수정안보다도 한참 후퇴했다는 거다.   반면 같은 날 현대일본학회가 프레스센터에서 주최한 토론회는 정부의 해법이 차선책이고 고육책이긴 하지만 미래를 위한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토론회에는 중도·보수 성향의 합리적인 일본 전문가들이 여럿 참여했다. 이들의 분석을 논점별로 정리했다.   ①정부 대책, 부족하지만 가야 할 길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일본 문제는 가만히 있으면서 비판만 하는 게 가장 편하다”며 “하지만 그래선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고 말했다. 장제국 동서대 총장(현대일본학회 회장)도 “(과거사 문제는)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않거나 여론에 단순 편승하면 쉽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일본에는 한일관계에서 원칙론을 양보하면 일본 전후(戰後) 처리 정책이 붕괴된다는 위기감이 있다. 심지어 일본 자민당은 ‘사죄는 더 이상 없다’는 기조를 아베의 공적으로 생각한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본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원칙을 강경하게 고수하는 한, 피해자들이 원하는 해법은 달성하기 어렵다”며 “정부가 할 수 있는 차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했다.   ②‘이재명 정부’였다면 달랐을까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1일 집회뿐 아니라 13일 민주당 대일굴욕외교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도 “일본은 하나도 양보하는 것이 없고, 우리 정부만 일방적으로 양보해 국민이 굴욕적인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며 정부에 날 선 비판을 날렸다.   하지만 이재명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우리도 대위변제를 대안으로 검토했다”며 “다만,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의 취지는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전범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가해자에게 일단 클레임을 걸어두는 차원에서다. 구상권을 행사할 생각이 없다고 언급한 지금 외교부와는 입장이 다르지만 3자 변제라는 구도는 비슷하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센터장은 “죽창가를 외쳤던 문재인 정부도 임기 말에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다”며 “여야가 바뀌었어도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③공은 일본에 넘어갔다   한국이 국내 여론의 비판을 감수하며 애써 내민 손을 일본이 맞잡아야 한다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는 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보이며 성의 있게 호응해야 한다”며 “어려운 시기일수록 결단과 실행을 통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의 자세”라고 지적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어정쩡한 말로는 부족하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2015년 전후 70년 담화에서 1931년 이후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면서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 표현은 하지 않았다. 외려 후대에 사죄를 계속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 아베의 입장까지 계승한다는 건가.   최희식 국민대 교수는 “일본의 호응 조치가 강제동원 해법 성공과 지속가능성의 열쇠”라며 “이번 해법이 실패하면 한일관계에 괴멸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기태 통일연구원 평화연구실장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인용해 “일본인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는다”며 한국의 결단에 부응하는 일본의 후속조치를 기대했다.   ④정부, 피해자 보듬는 노력 더 해야   진창수 세종연구소 센터장은 “조속한 시일 내에 윤석열 대통령이 피해자들을 만나 이들의 마음을 사는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내 불만이 커지면 한일관계 개선은 사상누각이다. 조윤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도 “대통령이 피해자들에게 직접 설명하고 ‘여러분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 전범기업에 당했고 국가는 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대통령이 사과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피해자가 만족할 대책을 내지 못한 데 대해 대통령이 미안함을 토로하고 국내 여론을 어루만지는 노력을 좀 더 했으면 어땠을까.   ⑤제발 그 입 좀 다물라   ‘강제 동원’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는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의 발언이 피해자 감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민주평통 사무처장의 어록과 함께 11일 집회에서 자주 도마 위에 올랐다. 최희식 국민대 교수는 “한일 양국 모두 역사문제에서 부적절한 언행이나 망언이 나오지 않도록 자기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교과서 검증,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등 민감 이슈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미래세대에 안정적 한일관계 물려줘야   풀어야 할 문제가 너무 많다. 3자 변제를 거부하는 피해자에 법원에 공탁을 할 수 있느냐를 두고 벌써 논란이다.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일제 강제징용 생존 피해자 3명 전원은 13일 정부의 ‘제3자 변제’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법원이 공탁의 효력을 인정해도 결국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크다.   여야 대치 탓에 쉽지 않지만 국회가 합의하는 특별법으로 일제 강점기 피해자 대책을 만드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최희식 국민대 교수는 “강제동원 해법을 한·미·일 협력과 연계하는 논법은 진보의 외교전략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돼 야당의 전면적 반대를 유발한다”며 “강제동원 해법의 미래지향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담론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괜히 큰 싸움 만들 필요는 없다. 미래세대에게 안정적인 한일관계를 물려줄 의무가 기성세대에게 있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이번 대책은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며 “이제까지 ‘최종적, 완전해결’을 선언했던 모든 정책은 다 실패했다”고 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대일 정책을 ‘프로세스’로 보자는 조언이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가 최근 중앙SUNDAY 인터뷰에서 “징용해법은 완결형이 아니고 진행형”이라고 한 맥락과 일치한다. 내일 한일 정상회담만 있는 게 아니라 5월 히로시마 G7 회의 등 외교 무대가 줄줄이 이어진다. 한국의 결단으로 협상력이 커졌다. 성과를 내야 가시밭길을 가야 하는 징용 해법의 지속가능성도 보장된다. 윤 대통령이 말한 국익과 미래도 거기에 달려있다. 서경호 논설위원

    2023.03.15 00:51

  • "북핵 해결 기회 두 번 놓쳐...미사일·잠수함 대대적 확충을"[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장세정 논설위원 북한의 핵 위협과 잦은 미사일 도발에 둔감해져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3월 12일은 북한이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갑자기 선언한 지 꼭 30년 되는 날이다. 북한은 1985년 NPT에 가입했으나 1993년 탈퇴 선언 이후 미국과의 협상 도중에 탈퇴 효력을 중지하더니 결국 2003년 2차 핵위기 때 다시 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의 NPT 탈퇴 선언으로 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된 1993년부터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2017년 11월까지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은 모두 6명이었다. 각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라고 취임선서를 했다. 하지만 누구도 북핵을 막지 못했다.[중앙포토, 연합뉴스, 대통령기록관]  이후 북한은 6자회담과 북·미 대화에 나올 때도 뒤에서 몰래 핵 무장을 가속해 2017년 6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거쳐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북한은 3대 세습 체제에서 끝내 핵을 보유했고, 한국은 비핵화에 철저하게 실패해 핵 위협 앞에 국가안보가 위협받는 처지다.   이용준(67) 한미협회 상근부회장은 외교관 경력 38년 중 대부분을 북한 핵 문제와 씨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북핵과 '악연'이 깊다. 외무고시 13회로 1979년 외교부에 들어간 이래로 청와대 남북 핵 협상 담당관, 주미 대사관 북핵 담당관, 경수로 협상 대표, 외교부 북핵외교기획단장, 6자회담 차석 대표, 북핵 담당 대사, 외교부 차관보, 말레이시아 및 이탈리아 대사 등을 역임했다. 북핵의 '알파와 오메가'가 궁금했다. 이용준 한미협회 상근부회장이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북핵 30년의 막전막후를 들려주고 있다. '북핵 담당 대사' 등을 역임한 그는 38년 외교관 경력 대부분을 북핵 문제와 씨름했다. 『북핵 30년의 허상과 진실 』『북한핵, 새로운 게임의 법칙 』『대한민국의 위험한 선택 』등을 출간했다. 김경록 기자   1990년대 초에 강력 대응했어야  -NPT 탈퇴 선언 이후 30년 만에 북핵 위협에 노출됐다.  "외교관으로서 가장 오랜 시간을 투자한 북핵 문제 해결에 실패해 면목이 없다. 북한이 궁지에 몰렸던 1990년대 초에 강력히 대응해 핵 개발을 종식했어야 했는데 안타깝다. 때로는 한·미 간 이견 때문에, 때로는 국내정치적으로 발목이 잡혀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일부 정권은 남북관계 진전 의지가 너무도 강해 경제 지원으로 북한의 환심을 사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북핵 문제를 한국이 아닌 미국의 문제인 양 여겼다. 그런 분위기에서 강력한 북핵 대응은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이제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인가.  "다른 나라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핵무기를 실제로 보유하면 엄연한 핵보유국이다. 북한은 핵무기 수십 개를 보유한 핵보유국이고, 지난 30년에 걸친 국제사회의 저지 노력은 완전히 실패했다. 불법적 핵보유국이 되면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을 뿐이다." -협상을 통한 북핵 해결은 이제 불가능한가.  "외교적 협상을 통한 비핵화 노력은 2019년 미·북 하노이 정상회담으로 막을 내렸고, 협상을 통한 비핵화가 더는 가능하지 않다. 2017년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북한은 핵능력의 부분적 감축과 제재조치 전면해제를 교환하는 방식의 핵군축 협상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적 핵군축은 북한의 핵무장을 공인하고 영구화하는 최악의 협상 방식이다. 핵군축은 쌍방이 핵을 갖고 있을 때 의미가 있을 뿐이다. 북한 핵무기가 50개든 5개이든 북핵 위협엔 아무 차이가 없고 추후 추가생산을 막을 방법도 없다."  2월 8일 북한군 건군절 75주년 열병식에 등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연합뉴스]   1994년과 2003년, 두 번의 기회  -기회가 있었을 텐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가장 좋은 기회는 두 번 있었다. 첫째는 1993년 초 북한의 NPT 탈퇴 이후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까지 1년간이었다. 둘째는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활동으로 제네바 합의가 파기된 2002년 말부터 2003년까지 1년간이었다. 하지만 끝없는 외교협상에만 집착하다 기회를 놓쳤다.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당시 김영삼 정부가 북한의 전쟁불사 협박에 굴복해 미국의 유엔제재 추진과 군사적 압박 움직임을 막았고, 2002~2003년 제2차 북핵 위기 당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대북한 압박이나 응징보다 미국의 강력한 대응을 견제하는 데 중점을 뒀다. 당시에 강력한 대북 제재를 취했다면 결과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2017년 6차 핵실험과 ICBM 도발 직후도 기회 아니었나.  "1994년과 2003년에는 북한이 아직 핵무기를 몰래 개발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강력한 경제적·군사적 압박으로 중단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차례 미·북 정상회담이 개최된 2018~2019년은 핵실험이 6차례나 실시되고 일부 핵무기가 실전배치된 단계여서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이미 핵무장한 북한을 비핵화하는 것은 북한의 핵무장을 막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당시 중국과 러시아도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에 동참했으나, 비핵화 압박에 협조하기보다는 강경했던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한 군사행동을 막고 외교적 숨통을 터주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며 북·미 정상회담을 중재했다.  "문 정부가 북한의 입장을 잘못 해석한 것인지 자신의 희망사항을 미국에 전달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표명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북한은 김정일 시대 이래 비핵화가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문재인 정부 시절 그 입장이 바뀐 것도 아니다. 핵협상 타결에 가장 근접했던 1994년 제네바합의 때도 북한은 단지 영변 핵시설 폐기에만 동의했을 뿐 이미 추출된 핵무기용 핵물질 폐기는 거부했다." 2000년 6월 14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정상간 합의문에 서명하기에 앞서 두손을 맞잡아 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7년 10월 4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아 들어 올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8년 9월 20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천지에서 두 손을 맞잡아 들어 오리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이스라엘의 확고한 의지 참고해야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동안 대통령들은 뭐했나.  "북핵 문제에 대한 방침이 정권 성향에 따라 크게 달랐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정상회담을 다섯 차례 했다. 정상선언 때마다 보여주기식으로 원칙적·절충적 비핵화 문구를 넣었지만, 구체적 논의도 실질적 해법도 없었다. 북핵 해결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도래할 때마다 불운하게도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핵을 한국의 문제가 아닌 미국의 문제로 간주하고 남북관계에만 연연하는 좌파 정부들이었다. 김영삼 정부도 집권 초기 이인모 북송, 대북 식량지원 확대 등 진보적 대북정책에 매몰돼 귀중한 기회를 놓쳤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때는 북핵 문제가 사실상 동면 상태였다."  -'북한 대변인'처럼 북핵을 두둔하는 세력이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시리아 등 적대국의 핵 무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지하려는 확고한 결의가 있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일관된 공감대가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정치권 일각이 남북관계 진전에 과도하게 집착하니 그와 상충하는 북핵 문제는 뒷방 신세가 되기 일쑤였다. 안보 정책과 북핵 대책이 대북 유화정책의 볼모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항공모함보다 잠수함이 효과적  -가장 현실성 있는 대책은.  "전술핵 재배치, 나토식 핵 공유, 자체 핵무장 등 다양한 핵 억지력 보유 방안이 제기되지만 당장 실현 가능한 묘안이 없다. 북한 정권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핵을 가진 북한과 핵이 없는 한국의 대치 상태가 장기간 지속할 것이다. 이런 현실을 토대로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 북핵에 대비한 가장 현실적 조치는 초보 단계인 한국형 미사일 방어망을 미국·일본·이스라엘 수준으로 대폭 강화하는 것이다. 북한의 어떤 미사일 공격도 차단할 수 있는 방어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다. '사드 3불' 족쇄를 풀고 사드를 추가 배치해야 한다. 이스라엘식 아이언돔도 속히 설치해야 한다.  -비대칭 전력으로 미사일 1만발, 잠수함 확충 주장도 나온다.  "북한을 압도할 만한 수준의 재래식 군사력 확충은 실질적 억지력이 될 수 있다. 북한도 한국의 재래식 군사력을 우려해 소형 전술핵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군의 공격용 미사일과 방어용 미사일 숫자(현재 1000~2000기 추정)를 4~5배 대폭 증강하면 북한도 중국도 한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만들 예산이 있으면 재래식 잠수함(현재 약 20척 추정)을 더 만들자. 이지스함 추가 건조와 해상 미사일방어망 구축도 시급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일 해군 특수전전단을 방문해 총을 겨누고 있다. 윤 대통령은 해군사관학교 졸업 및 임관식에 참석해 "무엇보다 강한 국방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방의 선의에 기대는 '가짜 평화'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 안보를 지키는 '진정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부속〉 6·25전쟁 때 싹튼 핵 야망…북한의 핵무장 70년 '도박' 북한 정권이 핵무장 야망을 꾸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핵 공격 위협에 떨었던 김일성 주석은 조선과학원 산하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1956년 '조·소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소련의 물자와 기술을 지원받는다. 1964년 중국의 핵실험 성공 직후 핵기술 지원 요청이 거부당한 김일성은 1972년 비밀 핵 개발을 지시했다. 1983~1991년 무기급 플루토늄 추출을 위해 고폭실험을 70여 차례 진행했다.  북한의 핵 문제가 최초로 국제사회에 공개돼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프랑스 상업위성이 영변 핵시설 사진을 공개한 1989년 9월이었다. 미국의 막후 압력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992년 1월 북한과 '핵안전협정'을 체결하고 그해 5월 핵 사찰을 실시했다.  그에 앞서 1991년 12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화해·불가침·교류협력 등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이듬해 2월 19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효됐지만, 북한의 NPT 탈퇴로 의미가 퇴색했다. 주한 미군의 전술핵은 철수했지만, 북한은 속속 핵무장의 길로 치달았다. 길게는 1952년부터 약 70년, 짧게 잡아도 NPT 탈퇴 선언 이후 30년 만에 북한은 핵보유국을 자처하고, 한국은 핵 위협 앞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안은주 인턴기자가 인터뷰 정리에 참여했습니다. 관련기사 "입양은 부담 아닌 축복…文 '입양 취소' 발언에 깜짝 놀랐다"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조용한 침공' 간첩 활개치는데 막을 '방패'는 곳곳 구멍[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단독]"세월호 원인, 6대 2였는데…정치 입김에 3대3 됐다"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30년 좌파' 전향 선언 "조국 발언에 경악, 그건 파시스트 언어"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김정일 유서' 입수한 탈북 박사…왜 文정부서 간첩몰이 당했나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2023.03.13 01:00

  •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챗GPT가 가져올 '문송'없는 세상…이과 천재들의 승자독식 사라지나

    안혜리 논설위원 #지난해 10월. 네이버의 AI 전문가(개발자)와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먹던 중 깜짝 놀랐다. 그가 휴대전화를 열어 '악당'이라는 키워드를 담은 한국어 한 문장을 적어 넣었는데 불과 10여 초 만에 1500자 분량의 칼럼 하나가 뚝딱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설립된 국내 신생 스타트업 뤼튼 테크놀로지가 네이버의 한글 기반 초거대 인공지능(AI) 하이퍼클로바를 탑재해 그때 막 세상에 내놓은 텍스트 생성 AI 서비스 '뤼튼(wrtn)'을 대면한 순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 생성 AI의 위력에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충격은 잠시. 인간 솜씨를 빼닮은 매끈한 문장력에도 불구하고 최신 지식의 부재에다 얕은 깊이 등 한계 역시 명확해 안도하며 뤼튼을 잠시 잊고 살았다.   뤼튼이 지난 2021년부터 매주 진행해오고 있는 생성 AI 세미나 모습. 모든 팀원이 금요일에 모여 간식을 먹으며 해외 AI 기술과 비즈니스 인사이트를 공유한다. [사진 뤼튼] 관련기사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절박한 네이버가 몸을 낮췄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2022년 12월. 미국 인공지능 회사 오픈 AI가 자사의 초거대 AI인 GPT-3.5를 탑재한 '챗(Chat) GPT'를 세상에 내놨다. 출시 두 달 만에 전 세계에서 사용자가 1억 명을 넘어설 만큼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국내서도 마찬가지였다. IT업계 종사자나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층뿐 아니라 50~60대 중·노년층까지 챗GPT 놀이에 푹 빠졌다. '프롬프트 지니'처럼 한국어 질문을 곧바로 영어로 바꿔주는 무료 확장 기능을 챗GPT 안에 굳이 설치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한국어로 질문하고 답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컸다. 물론 한국어가 주력 언어가 아니다 보니 영어로 물을 때보다 훨씬 느리고 덜 만족스러운 답변이 나오기는 하지만 한국의 일반 사용자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  다윗과 골리앗 모두 이기는 챗GPT 세상   이쯤에서 자연스레 뤼튼 생각이 다시 났다. 올 초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3에서 혁신상을 받은 데서도 알 수 있듯 뤼튼은 서비스 업그레이드를 지속해왔다. 하지만 미국의 비슷한 스타트업들이 1000억원대의 막대한 투자를 받을 때 45억원을 투자받아 이제 막 매출을 올리기 시작한 직원 27 명의 작디작은 스타트업이 어떻게 챗GPT보다 앞서 이토록 빠르게 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GPT-3를 탑재해 지난해 이미 수조원대 기업가치(15억 달러)를 지닌 유니콘 기업에 등극한 미국의 텍스트 기반 생성 AI 스타트업 재스퍼(Jasper) 등 쟁쟁한 경쟁자에 맞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GPT-3.5의 응용프로그램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 사용료가 최근 2년 새 30분의 1 수준으로 드라마틱하게 떨어지면서 이를 응용하는 스타트업의 경쟁은 훨씬 치열해졌고 앞으로 더 거세질 게 분명한 상황이니 말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두 번째 궁금증부터 먼저 풀어보자면, 최근 만난 뤼튼 이세영(27) 대표는 자신만만했다. 뭘 모르는 20대의 치기가 아니라 숫자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실제로 챗GPT 출시 이후 뤼튼은 오히려 사용자가 가파르게 늘어 현재 12만에 달한다. 생성 단어 수는 20억개를 넘어섰다. 다음 달엔 일본에서 일본어 서비스까지 출시한다. 비영어권에선 챗GPT 등보다 더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다.   뤼튼 이세영 대표[사진 뤼튼] 이 대표는 "기술적 해자(장벽)가 거의 없어진 데다 마치 과거 문자 메시지처럼 비용도 곧 0에 수렴할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스퍼의 셰인 올릭(Shane Orlick) 대표가 최근 한 콘퍼런스에서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서도 승자가 한 명이 아니며 모두가 승자일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인터넷·모바일 혁명 때처럼 기술 우위로 발 빠르게 시장을 먼저 점유한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던 때와 달리 생성 AI 세상에선 사용자가 쓰기 편하도록 특화된 서비스를 내놓는 누구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이라면 뤼튼이 하듯이 영어 기반의 챗GPT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한국어 실력(하이퍼클로바)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가령 광고 카피든 엘리베이터 피치용 문구든 긴 블로그 글이든 영어 기반 서비스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쓰기 편한 템플릿을 사용자에게 빠르고 값싸게 제공하면 한국에선 누구도 범접 못 할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  주목받는 문과적 언어 소통 능력   그런 서비스는 물론 하이퍼클로바 같은 한국어 기반 초거대 AI가 있어야 가능하지만 단순히 이걸 활용한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프롬프트(명령어)를 어떤 식으로 결합해서 서비스(템플릿) 안에 제대로 구현하느냐가 핵심인데, 이 지점에서 굳이 구분하자면 이과적 기술 역량을 넘는 문과적 언어적 소통 능력이 중요하다.    하정우 네이버 AI랩 소장은 최근 생성 AI 관련 강연에서 "프롬프트라는 건 과거 개발자가 했듯 어려운 컴퓨터 언어(코딩)를 쓰는 게 아니라 결국 자연어를 구사하는 것이기에 답변을 잘 끌어낼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이 더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뤼튼이 국내에서 하이퍼클로바를 활용한 첫 텍스트 기반 생성 AI 스타트업이 될 수 있었던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대표는 다른 많은 IT 관련 스타트업 CEO들과 달리 개발자 출신은 아니다. 학부 시절 텍스트 마이닝을 공무하긴 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하고 고등학교 때 사회과학 서적에 탐닉하던 문과 출신이다. 게다가 대학 때까지 청소년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글쓰기 교육을 진행해오면서 인간의 창의력을 확장해주는 글쓰기에 대한 이해가 쌓였기에 남들보다 먼저 이런 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었다.   뤼튼 이세영 대표가 고교 시절 '도전 골든벨' 최후의 1인에 올라 받은 상금 300만원으로 지난 2014년 처음 개최한 한국청소년학술대회는 3년만에 참가 인원이 30명에서 아시아 13개국 3만명으로 늘었다. 사진은 2018년 제10회 사진. 이때 경험이 창업의 계기가 됐다. [사진 뤼튼] 요즘 뜨는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직종 역시 '엔지니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개발(코딩) 능력과는 거리가 먼 기획자나 마케터 등 인간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생성 AI가 인간 특유의 창의성을 침범하기보다 오히려 창의성을 확장한다. 어쩌면 우리는 생성 AI라는 초 혁신적 기술 덕분에 역설적으로 인문학적 강점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문송'(문과라서 죄송)하지 않는 시대를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관련기사 내 카톡엔 챗GPT가 들어있다안혜리 논설위원

    2023.03.08 00:44

  • [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75년 만에 찾은 아버지 유골 … “이젠 4·3 싸움 끝낼 때”

    이상언 논설위원 지난 3·1절 아침 제주에 보슬비가 내렸다. 철조망 너머로 활주로가 보이는 제주국제공항 외곽에 강술생씨(77)와 함께 섰다. 1946년 개띠 해에 태어나 ‘술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는 비를 맞으며 담장 안을 바라봤다. 전날 술생씨는 제주 4·3평화공원 봉안관에 부친 강창근씨 유해를 안치했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던 아버지는 공항 아래에 내내 묻혀 있었다. 두 살 때 집을 나간 부친이 75년 만에 그렇게 돌아왔다.   강술생씨가 지난 1일 제주공항 북동쪽 땅을 바라보는 모습. 바로 앞 부지가 정뜨락 비행장이 있던 곳이고, 그곳에서 1948년에 실종된 강씨 부친의 시신이 발굴됐다. 이상언 기자 강창근씨는 1948년 여름 어느 날 집수리에 쓸 재료를 구하러 제주 월평리 집에서 읍내로 향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해가 져도 집에 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 제주항 근처 주정 공장에 감금돼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른바 ‘좌익 활동’과는 거리가 먼, 밭에서 농사짓고 틈틈이 목공 일하던 사람이라 가족들은 곧 풀려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몇 달 뒤 아예 소식이 끊겼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스무 살에 생과부가 된 어머니로부터 술생씨가 자라면서 들은 4·3의 비극이다.   ━  "수백 번 다닌 공항에 아버지가…"   술생씨는 부친이 어디엔가에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다. 주정 공장 수용소에서 탈출해 육지로 건너갔거나 일본으로 밀항해 숨어지내다가 가족에서 연락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10여 년 전 세상을 뜬 모친의 평생 희망이기도 했다.   지난해 봄 술생씨는 피를 뽑았다. 4·3 관련 행방불명인 가족에게서 채혈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4·3평화재단에 연락했다. “정뜨락 비행장(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군용 공항. 그 부지가 제주공항에 편입)에서 나온 유골의 연고자를 찾는 유전자 검사를 한다는 뉴스를 봤다. 혹시 몰라서 해 보긴 했는데 아버지가 거기에 묻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술생씨 말이다.   지난달 14일 술생씨는 아버지 유해가 확인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뜨락 비행장 터에서 발굴된 유해 중에 술생씨와 유전자가 일치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는 “유골이라도 찾을 수 있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 더 일찍 찾아 나섰다면 진작 찾을 수도 있었다는 후회로 지난 2주 동안 마음이 복잡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강술생씨(가운데)가 다른 두 유족과 함께 4·3으로 희생된 부친의 유해를 인도받았다. 제주4·3평화재단 술생씨 부친의 유골은 15년 전인 2008년에 수습됐다. 4·3평화재단은 2007∼2009년과 2018년에 정뜨락 비행장 부지에서 유해 발굴을 했다. 4·3과 관련해 경찰서와 주정 공장에 감금돼 있던 사람들이 비행장 터에서 총격과 매장으로 학살됐다는 증언에 따라 한 작업이었다. 지금까지 유해 387구가 그곳에서 나왔다. 그중 약 139구는 가족 유전자 대조를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나머지는 당시 일가족이 모두 숨져 채혈을 할 가족이 남아 있지 않거나, 유족이 살아있지만 아직 채혈하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강창근씨 유골이 나온 제주공항 내의 정뜨락 비행장 터는 술생씨의 현 거주지에서 직선으로 약 3.5㎞ 거리에 있다. 술생씨는 “평생을 공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았고, 육지에 가느라 평생 수백 번 공항에 갔다. 아버지가 그 아래에 있는 것도 모르고…”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된 강씨 부친 강창근씨 표석. 이상언 기자  ━  제주공항 아래에 묻힌 사람들   술생씨는 두 가지 바람이 있다. 하나는 자신처럼 다른 사람도 부모의 유해라도 찾는 것이다. 그는 “이제 추석과 설에 자식들과 갈 곳이 생겼다”고 말했다. 4·3평화재단은 관계자 증언 등을 근거로 정뜨락 비행장 터 외에도 조천읍·남원읍·도두동 등에서 발굴 작업을 벌여왔다.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 다수의 시신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곳은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김창범 4·3희생자유족회장은 “활주로의 일부를 들어내고 그 아래를 확인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제주도에 새 공항이 생기고 지금의 공항을 정비하는 일이 진행된다면 유해 찾기 작업이 꼭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4·3 희생자 유해 찾기는 제주 밖의 육지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1948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4·3 관련으로 수천 명의 제주도민이 육지 교도소로 보내졌다(제주도에는 수형 시설이 없었다). 그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많지 않다. 전쟁 초기에 북한군의 점령이 임박했을 때 전국 교도소에서 4·3 관련자 2000명 이상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성홍 4·3행방불명인유족협회장은 “육지 형무소에 갔다가 다시 오지 못한 사람이 2530명이다. 대전 형무소에만 300명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내 아버지도 그곳에 있었다. 재소자들이 6·25 발발 직후에 무더기로 총살됐다는 미군 기록이 있고, 대전 형무소 인근 골령골이라는 곳에서 1400여 구의 시신이 나왔다. 4·3평화재단이 발굴된 유골과 제주 유족의 유전자를 대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좀 더 빨리 진행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  보수·진보 갈등 이제 사라지길…     술생씨의 두 가지 희망 중 다른 하나는 “4·3을 놓고 벌이는 싸움 끝내기”다. 술생씨의 친조부, 외조부도 4·3으로 목숨을 잃었다. 유족회 간부를 비롯해 제주에서 만난 4·3 관계자들은 정치권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었다. “4·3사건이 북한의 김일성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는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의 지난달 발언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제주시 거리에 ‘태영호를 제명하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 사건에서 제주도 출신 피해 학생이 “제주서 온 빨갱이”라는 놀림을 당했다는 보도가 민심을 더 자극했다. 제주항 인근의 옛 주정 공장 터에 건립되고 있는 4·3역사관 마당에 세워진 조형물. 바다로 끌려가 수장된 희생자들을 형상화했다. 이 역사관은 이달 13일에 개관한다. 이상언 기자 유족회는 윤석열 대통령의 4·3 추념식 참석을 바라고 있다. 김창범 유족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추념식에 꼭 참석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노무현·문재인 대통령과 달리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은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당선인 신분으로 추념식에 참석해 제주도민의 환영을 받았다. 윤 대통령이 4·3을 둘러싼 보수·진보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치유와 화해의 길을 확고히 하는 지도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유족들의 뜻”이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는 ‘제주 4·3 완전 해결’이 들어있다. 정부 관계자는 2일 “대통령의 4·3 추념식 참석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4·3 김일성 지시설은 이미 정부·국회서도 폐기" 「 태영호 의원의 4·3 관련 발언 문제에 대해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에게 물었다. 양 실장은 약 30년간 4·3 연구를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태 의원은 “제주4·3사건 김일성 지시설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고 “명백히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주장한다.   “학계에선 30여 년 전에 폐기된 주장이다.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4·3 진상규명 과정에서도 논증되었고, 2003년에 발표된 정부의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도 남로당 중앙 조직 또는 북한 정권 지령설에 근거가 없다고 적시했다. 1999년에 ‘4·3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공식적으로 폐기된 왜곡된 주장을 국회의원이 언급하는 것은 유족과 국회를 모독하는 행위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봉기를 계획하고 부추긴 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남로당 중앙 조직 또는 김일성 세력과 제주도당이 연계돼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 가능한데. “남로당 제주도당이 봉기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로당 중앙위, 북한 정권과의 연계는 없었다. 1948년 4월 당시 북한 정권과 남로당 중앙 조직은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참여한 남북 협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미군정의 압박으로 세력이 약화해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4·3 발생 원인에 대한 정부 공식 입장은.   “4·3 특별법은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정의한다. 시작 시점을 봉기가 일어난 1948년 4월 3일이 아니라, 1947년 3월 1일로 규정한 것은 발발 원인과 연관이 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1947년 3·1절 기념식 직후 일어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지만, 사과는커녕 강경 진압으로 일관한 미군정과 경찰의 대응, 그리고 1948년 제주도민 3명 고문치사 사건 등을 4·3 발발의 주요한 원인으로 규정한다.”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 이상언 논설위원

    2023.03.06 00:48

  • “가정폭력 못 견뎌 나왔는데 부모 때문에 지원 못 받아” [김성탁 논설위원이 간다]

     ━  사각지대에 놓인 ‘탈 가정 청년'   김성탁 논설위원 “엉망진창이에요. 늘 생활고에 시달리고 가족에게 괴롭힘당하는 악몽을 꿔 정신과 치료를 받습니다. 우울장애와 공황장애라는데,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고통을 겪고 있어요.”  조모(27)씨는 2년 전 집을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부모의 정서적·육체적 학대를 견디다 못해서였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려다 집으로 가 짐을 싸고 무작정 떠나왔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탈출하고 싶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울타리를 떠나니 당장 머물 곳과 식비 마련이 어려웠다. 조씨는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지금 선택이 나름 만족스럽다”고 했다.   탈 가정 청년이 지난해 10월 진행된 치유 프로그램에서 과거 자신이 상처받았던 상황에 대해 상대방에게 독백하고 있다. [282북스]  36살 A씨는 8년 전 집을 벗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라며 옷이나 행동까지 많은 것을 제한했습니다. 키가 훨씬 큰 남동생에게 양손을 잡혀 침대 위로 밀쳐진 뒤로 집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졌어요. 방문을 잠그고 아무것도 못 할 때 친구가 여성 쉼터를 알려주더군요.”   쉼터를 나와야 했을 때 A씨는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이후 여기저기 생활비 대출을 받아 지내고 있다. 무력감에 빠지기 일쑤다. “행정 관청이나 경찰로부터 가족 관련 서류가 갑자기 날아오고, 병원에서 내 개인정보를 동의 없이 엄마에게 알려줘 난감한 적이 있습니다. 2년 전쯤 아빠에게 ‘네가 맞을 만하니 맞았겠지’라는 문자를 받고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집 벗어나면 야생에 노출된 상태”    한국 사회에선 그동안 ‘탈(脫) 가정 청소년’을 지원하는 작업이 진행돼 왔다. 과거 ‘가출 청소년’으로 불리다 부정적 인식을 없애기 위해 ‘가정 밖 청소년’이란 용어가 쓰인다. 국내 청소년 기본법상 9~24세가 청소년이다. 가정이 없거나 가정으로부터 이탈된, 또는 가정 내 보호자가 적절한 양육 능력이 없는 경우가 해당한다.    가정 밖 청소년은 아동 양육시설이나 위탁 가정에서 생활하거나 청소년복지시설에 들어가기도 한다. 법무부가 위탁·운영하는 청소년자립생활관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체계에 들어가지 않고 적당하지 않은 주거 환경에 노출된 경우도 있지만, 청소년 지원책은 어느 정도 작동 중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하지만 최근에는 만 19세부터 30대 중반에 해당하는 청년층에서도 스스로 가정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우리 사회 소수 그룹의 안정을 돕기 위해 사회적 처방 프로그램을 만드는 예비사회적기업 ‘282북스’가 지난해 탈 가정 청년들을 만나 처한 현실과 어려움 등을 파악했다. 탈 가정 청년 60명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집을 떠난 이유로는 ‘정서적 학대’가 91.2%(중복 응답)로 가장 많았다. 신체적 학대인 가정폭력(59.6%)이 다음이었다. 이어 부모의 방임(36.8%), 성 정체성 아우팅(7%) 등의 순이었다.    282북스 강미선 대표는 “가정폭력을 처음 당했다고 바로 집을 나오지는 않는다”며 “주변에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 무기력한 상태를 지속하다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고 집을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살아야겠다고 집을 막상 벗어나면 그야말로 야생에 노출된다”며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육체적 어려움을 겪은 이들은 집을 나와서도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  「 정서적 학대, 신체 폭력, 부모 방임 등으로 집 나온 청년들 늘어 '가정 밖 청소년'에 비해 청년들은 ‘자립 가능' 이유로 지원 빈약 부모가 주소 알 수 있어 거주 불안…알바에 지치고 우울증 시달려 30세 미만 결혼해야 단독가구, 부모 소득에 걸려 기초수급 어려워 」   ━   "원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나와"     기본적으로 청년층에 대해선 자립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직접 소득에 도움을 주는 사회적 지원책이 많지 않다. 탈 가정 청년에 대해선 아직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실정이다. 대부분 가정과의 절연은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알아서 생활해야 하는데, 구조적으로 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존재한다.    가정폭력 등으로 집을 나온 청년들은 대부분 주소를 본인 명의로 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국내 제도상 부모가 자녀의 주민등록등본을 열람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가 주소지로 자녀를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분리를 택했는데 부모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셈이다. 주소지 분리가 어렵다 보니 기본적인 복지나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혼자 독립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등록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현행 제도상 30세 이상은 단독 세대주가 될 수 있지만, 30세 미만의 경우 결혼을 해야 세대 분리가 가능하다. 청년 혼자라면 단독 가구여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이 가능하다. 30세 미만이 단독가구로 분리되려면 계속 중위소득 40% 이상의 수익이 있어야 하는데, 탈 가정 청년들에겐 꿈 같은 얘기다. 세대주가 되지 못한 경우 독립 가정으로 집계되지 않아 전 국민에 지급된 1차 재난지원금 대상에서도 빠졌다.      ━   '가족 소득' 지원 기준 달리 적용해야       특히 국내 청년 정책은 보호나 돌봄 자체가 아니라 역량을 강화해 자립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둔다. 특히 원 가족의 소득을 기준으로 청년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어서 탈 가정 청년 지원에 공백이 생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탈 가정 상태인 박모씨는 “갑작스럽게 집을 나오면 모아둔 돈은 보증금으로 나가고 여윳돈이 아예 없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등 일을 과도하게 많이 하게 된다”며 “대학 학비를 못 내 중단하는 경우는 흔하다”고 전했다. 탈 가정 청년들 사이에선 “LH 주거 지원이나 청년 전세임대를 알아봤는데 가족관계증명서상으로 부모와 엮여 있다 보니 소득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라거나 “수입이 없어 동사무소를 찾았더니 신청에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는 반응이 흔하다.    2020년 탈 가정 청년 실태조사를 실시한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은 보고서에서 “중산층 이상 가정의 청년들까지 지원하면 세 부담 역진성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가구소득이 수혜자 선정 기준으로 쓰인다”면서도 “가구소득이라는 유일한 선별기준이 탈 가정 청년과 같은 정책의 사각지대를 낳는 배경이 되는 만큼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탈 가정 청년들을 관찰해온 이들은 최근에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애착으로 인해 가정 내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집에서 나온 지 1년 정도 된 K(29)씨는 “부모의 가스라이팅, 정서적·성적 학대가 있다면 가족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피해자와 가해자로 봐줬으면 좋겠다”며 “가족이라는 가해자로 인해 주눅이 들고 학교에서 왕따 피해를 봐도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 "18세 이상의 '자립준비청년' 범주 넓혀야" 「 ━ ‘282북스’ 강미선 대표 인터뷰   예비사회적기업 282북스 강미선 대표. 김성탁 기자   "청년들이 처한 여건이 다양해 탈 가정 청년만 대상으로 별도 지원책을 도입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고아원이나 가정보육원 등에 있다 보호 종료로 18세에 나오는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지원책이 막 생겨나고 있는데 그 범주를 넓혀 탈 가정 청년을 지원했으면 합니다."   282북스 강미선 대표(사진)는 지난해 탈 가정 청년들을 면담하고 콜로키엄을 진행하며 실상을 파악했다. 지난 26일 서울 양평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우선 다양한 궤도로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을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정 밖 청소년보다 청년들은 집을 나오면 기댈 곳이 없다는데. "청소년은 가정폭력 등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밖으로 나오면 센터 등 갈 곳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청년은 '그냥 따로 사는 것 아닌가'라고들 생각한다. 청년 여성이라면 가정폭력센터 등 몇몇 갈 곳이 있지만, 청년 남성은 이용할 시설 자체가 별로 없다. 그래서 노숙자 쉼터를 찾아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학대나 폭력을 경험해 심리적으로 닫혀 있는 상태여서 낯선 곳에 적응이 힘들다. 대다수가 어떤 도움이 있는지 자체를 모르고, 기댈 곳 자체가 없다."   -부모가 찾아올까 봐 주소지를 친구 자취방 등으로 둔다는데. "부모가 가해자인 만큼 등본 열람을 못 하게 신청할 수 있는데,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행정처분 서류와 진단서 등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절차를 잘 안내하고 서류 발급을 간소화해주면 좋겠다. 일정 조건에 해당하는 청년은 30세 미만이면서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단독 가구가 될 수 있도록 해 단절의 목적을 살리면서 기초생활보호나 주택 지원 등에서 부모 소득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 김성탁 논설위원

    2023.03.01 00:42

  • [윤석만 논설위원이 간다] 불법 낙태약 36만원이면 택배 거래, 가짜약도 판쳐

     ━  국회 방치로 무법지대 놓인 낙태   윤석만 논설위원 헌법재판소의 위헌·헌법불합치 결정 뒤에도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법률이 41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일부 법률은 개선 시한이 한참 지났는데도 기약 없이 방치되고 있다.   27일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현재까지 개정되지 않은 위헌 법률은 22건, 헌법불합치 결정 법률은 19건이다(1월 기준) . 이중 개정 시한이 지난 법률만 3건이다. 위헌은 결정 직후 법률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것이고, 헌법불합치는 즉각적인 위헌 결정으로 생기는 법적 공백의 혼란을 막기 위해 개정 시한을 두는 것을 뜻한다.   가장 논란인 것은 형법 269, 270조 낙태 조항이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헌법불합치 결정과 함께 2020년 12월 31일까지 보완 입법을 주문했다. 그러나 개정 시한이 2년 2개월이 지났지만 계속 방치되고 있다. 줄곧 감소 추세에 있던 낙태는 2019년부터 다시 늘기 시작해 2년 새 38% 증가했다.   무법지대에 놓인 낙태를 어느 시기, 어떤 방식으로 허용할지 법에 규정하지 않아 위험한 일들이 많다. 음성적인 미성년자의 임신중지는 물론 불법 약물 유통까지 판치고 있어 사회적 혼란과 비용이 점점 커지고 있다. 국회의 직무유기가 부른 낙태의 현실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  「 헌법불합치 결정 후 4년째 무법 계속 줄다 위헌 2년새 38% 증가 “이념갈등 커, 표 떨어질까 외면” 입법공백 법률 41건 국회 방치 」  SNS로 불법 낙태약 주문   기자가 구매자로 가장해 대화를 나눈 한 낙태약 판매업자는 “한국에선 이 약이 유통될 수 없다”고 밝혔다. [사진 카카오톡 캡처] 인터넷 검색창에선 낙태약 판매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구매를 원하면 1대 1 채팅으로 상담한 뒤 돈을 입금하고 택배로 받는 식이다. 여러 판매업자와의 대화 시도 끝에 구매자로 가장한 뒤에야 한 업자와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경구 낙태약 전문 판매업자로 자신을 소개한 A씨는 “한국에서는 약이 (불법이라) 유통될 수 없다”고 말했다. A씨의 이야기다.   약이 위험하진 않나. “약은 정품이라 괜찮다. 경구약이기 때문에 수술보다 훨씬 간편하고 안전하다. 미프진이라는 약인데,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로 구성돼 있다. 7주차까지는 36만원이고, 8주차부터는 45만원이다. 가격이 다른 건 주차가 높아질수록 약의 용량이 커지기 때문이다.”   거래는 어떻게 하나. “오후 4시 전까지 입금하면 내일 택배로 보낸다. 지역에 따라 2~3일 정도 후 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정식으로 약을 수입하고 싶어도 통관에서 막히기 때문에 약국 유통은 할 수 없다. 수백 명이 찾는 약이다. 원치 않는 임신이라 안타깝긴 해도 (낙태약 덕분에) 다행 아닌가.”   기자가 구매자로 가장해 대화를 나눈 한 낙태약 판매업자는“한국에선 이 약이 유통될 수 없다”고 밝혔다. [사진 카카오톡 캡처] 약 구매 의사를 재차 묻는 A씨에게 기자임을 밝혔더니 그대로 채팅창을 나가버렸다. 박한슬 약사는 “의사의 처방 없이 불법 유통되는 약물은 위험도가 높다”며 “정품인지 알 수 없고, 정품이라 해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불법 낙태약 복용은 안 된다”고 했다.   해외 승인 낙태약 국내선 불법   인터넷에선 불법 낙태약 판매 글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사진 네이버 블로그 캡처] 인터넷 약국을 가장한 불법 판매 사이트도 있다. OOO약국은 수십 개의 복용 후기를 올려놓고 구매를 유도한다. 홍보 페이지에선 스스로 전문 약사라 소개하며 영상을 통해 미프진을 설명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승인된 제품임을 강조하고, 안전한 고객관리와 비밀보장을 내세우고 있다.   마치 자선단체인 듯 보이는 해외 사이트도 있다. 국내에선 사이트 접속이 불가능해 우회 프로그램을 깔아야 한다. 이들은 “98%의 확률로 임신을 중지하며 수백만 명의 여성이 안전하게 이 약을 썼다”고 홍보하고 있다. 영문 사이트지만 한국어로 설정을 바꾸면 쉽게 약을 구할 수 있다.   물론 미프진 자체는 여러 국가에서 승인된 약품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낙태 관련 법규가 없어 정식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미국과 유럽에서 몰래 들여온 약이나 불법으로 밀수해온 가짜 약이 판친다. 정품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가짜 약은 임신부의 건강까지 해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6월 인천본부세관은 중국산 낙태약을 미국산으로 속여 판매해온 일당 6명을 적발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유통 중인 ‘미비사동편’ ‘미색전렬순편’ 5만7000여정을 밀수해 팔았다. 9정 1세트를 9만 원대에 구매해 미국산으로 포장지만 바꿔 36만 원에 판매했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국내 낙태약 소비량이 연간 100만정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낙태는 한국에서 이미 자유방임 상태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낙태약을) 합법화한다 해도 여성들이 기록을 남기기 꺼리는데 의사의 복용지도를 받겠느냐”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청한 서울의 한 약사는 “미프진 수요가 많아 불법 유통이 점점 커지고 교묘해지는 느낌”이라며 “신고도 해봤지만 해외 사이트가 대부분이어서 (보건당국도) 행정처분 권한이 없다고 하더라”고 털어놨다. 그는 특히 “국회는 물론 정부조차 낙태와 불법 낙태약 유통을 방치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직무유기 국회 똑바로 해야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1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임신중지 여성의 46.9%는 인터넷을 통해 관련 정보를 얻었다. 의료인을 통해 상담하는 경우(40.3%)보다 많다. 평균 낙태 연령도 2018년 28.4세에서 27세로 낮아졌다(만 15~44세 대상 조사). 이중 미혼자가 절반이 넘고 7.7%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   국회의 직무유기가 길어지면서 낙태와 불법 약물 유통은 더욱 노골적이 돼간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회의 방치로 산모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충돌하는 무법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낙태법 입안과 관련한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헌법재판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낙태죄는 필요하지만, 임신 몇 주차까지 낙태를 허용할지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산모의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사이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을 국회가 고민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지금 상황에선 출산 직전인 38주차에 낙태해도 불법이 아니다.”   국회는 왜 손 놓고 있나. “표가 안 되기 때문이다. 낙태 문제는 보수·진보가 갈리는 극명한 이슈다. 종교계에선 근본적으로 낙태를 반대하고, 여성계에선 산모의 뜻을 우선한다. 첨예한 갈등 탓에 정치권이 나서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회가 아니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입법 사항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얼마 전 10대들이 자주 찾는 룸카페에서 성행위가 만연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청소년 낙태 문제도 심각하다. 국회가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국민적 합의를 모아야 한다. 여성의 인격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여야가 싸움만 하지 말고 진짜 할 일을 해야 한다.”   법무부는 헌법재판소의 주문에 따라 2020년 11월 낙태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개정안에는 임신 14주까지는 임신부의 결정에 맡기고, 이후 24주까지는 성범죄·질환 등의 사유가 있을 때 조건부로 허용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이 법안은 국회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 입법 미비로 국민투표도 못 해…집시법은 개정시한 12년 지나 「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10, 23조는 헌법불합치 결정 후 개정시한(2010년 6월)이 한참 지났지만 아직 무법 상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집회금지 시간이 광범위하다는 뜻이었지 야간 집회를 전면 허용하라는 취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입법 미비로 사실상 24시간 집회가 허용되고 있다. 일선 현장에선 ‘사생활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제한할 수 있다’(8조)는 다른 조항을 끌어들여 대응하고 있다.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한 ‘검수완박’ 국민투표가 무산된 배경도 입법 미비 탓이 크다. 당시 중앙선관위는 “국민투표법 14조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실시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14조는 재외국민이 국민투표를 하려면 주민등록이 있거나 국내 거소가 신고돼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헌법재판소는 “거소 신고 없이도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며 2015년 12월까지 법 개정을 요구했지만 아직 무법 상태다.   음주운전이나 2회 이상 음주측정 거부자를 가중 처벌하는 ‘윤창호법(도로교통법)’,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를 비공개하도록 한 국회법 조항 등도 위헌 후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피의자 구속 기간을 최대 50일까지 연장케 한 국가보안법 19조는 1992년 위헌으로 결정됐지만 현재까지 방치되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헌법재판관은 “국회가 단독 법안을 밀어붙이며 입법권을 행사할 때는 언제고, 꼭 필요한 법 개정은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 윤석만 논설위원

    2023.02.28 00:51

  • [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가결 불가피” “부결과 대표직 맞교환” 줄다리기 한창

     ━  이재명 체포동의안 D-5, 빨라지는 비명계 움직임   강찬호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 표결(27일)이 임박하며 비명(비이재명)계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이에 맞서 이 대표와 친명계는 체포동의안 부결을 밀어붙이며 ‘당권 수호’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재명 사법리스크’를 둘러싸고 가속화하는 양측의 공방전을 들여다본다.   이낙연, 체포동의 입장 밝힐까   지난해 6월 이래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22일(한국시간) 방문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조지 워싱턴대에서 남북관계를 주제로 강연한다. 방미 이래 첫 공개강연인 데다 한국 특파원단도 참석할 예정이라 관심이 쏠린다. 강연 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이 나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워싱턴에서 지내면서 특파원들과 자주 만나고, 서울발 뉴스를 매일 접하며 상황을 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 전 대표도 이런 질문을 예상해 ‘답변 수위’를 저울질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 “이번엔 부결” 의견 우세한 가운데 “가결 찬성 30명 육박”설도 상당해 이재명-비명계 회동서 ‘딜’ 가능성 친명, 6월 귀국 이낙연 견제에 총력  」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 끝)이 지난 16일 이낙연계 싱크탱크 ‘연대와공생(연공)’이 여의도 한 식당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적극 투쟁해 표 얻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이 자리엔 최운열 전 민주당 의원과 남평오 연공 운영위원장 등 이낙연계 인사 수십 명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이 대표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16일, 이 전 대표의 싱크탱크 ‘연대와 공생’이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강연회를 연 것도 눈길을 끌었다. 주최측은 “한 달 전부터 기획된 행사”라고 했고, 이낙연계 현역 의원들도 전원 불참해 친명계 자극을 피하려 했으나 김 전 위원장이 “민주당과 이재명의 동일시는 옳지 않다. 사법리스크는 개인 문제”라며 이 대표를 비판하면서 주목도는 되레 커졌다.   강연 사실이 전날 중앙일보 보도로 알려지자 이낙연계 의원들은 워싱턴에 있는 이 전 대표에게 전화해 “불필요한 오해는 차단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으며, 이 전 대표도 행사 당일 주최 측에 문자를 보내 상황을 묻는 등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주최 측 소식통은 “친명계 6~7명이 행사 뒤 전화를 걸어왔길래 ‘김종인 위원장이 당과 이재명은 분리돼야 한다고 얘기했다’고 전하니 ‘잘 알았다’고 반응하더라”며 “행사에 취재진이 몰리고 참석자도 50명이 넘는 등 이낙연의 존재감이 확인됐다. 앞으로도 금태섭 전 의원 등 중도 인사를 초청해 한 달에 한 번씩은 행사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전 대표는 그동안 애틀랜타·시애틀 등 미 전역을 돌며 강연과 간담회를 했으며, 한국의 외교·안보를 주제로 책을 저술 중인데 제목과 윤곽은 4~5월께 나올 것이라고 한다. 그는 비자가 만료되는 6월 초 귀국이 예정돼 있었으나, 독일 등을 들러 복지 모델을 시찰하고 귀국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며, 이 경우 귀국 시점은 6월 말로 예상된다고 측근들이 전했다.   체포동의안 ‘가결·부결’ 공방   이재명 이 대표 체포동의안에 대해 비명계도 “부결이 우세하다”고 전망한다. 가결되려면 민주당(169석)에서 이탈표가 최소 28표 나와야 하는데, 무리하게 가결을 시도했다가 당을 분열시켰다는 책임론에 휩싸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란 지적이다. 그러나 이낙연계 중진 의원은 “가결에 내심 찬성하는 의원이 30명은 된다. 또 일단은 부결시키더라도 대북 송금 등의 혐의로 두 번째 체포동의안이 상정되면 가결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고 했다.   비명계의 또 다른 중진 의원은 “첫 번째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면 친명계 힘이 커져 차후를 도모할 수 없으니 이번에 가결해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하다”며 “이 대표와 금주 만나 ‘비명계가 부결에 동의해줄 테니 부결 결과를 명분으로 대표직을 사퇴하라’는 제안을 할 생각도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이낙연계 중진 의원은 “이 대표의 체포나 구속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이 대표가 기소되면 형사공판을 받게 돼 매번 법정에 출석해야 하고 공판 내용이 샅샅이 중계돼 큰 내상을 입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대표 퇴진론은 갈수록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재명 대표도 비명계 이탈을 막기 위해 설훈(5선)·이원욱·전해철(3선), 기동민·김종민(재선) 의원 등을 1대1로 만난 데 이어 이번 주엔 이상민·홍영표 등 비명계 중진 의원들을 만날 예정이다. 민주당 소식통은 “이 대표와 40분간 식사를 겸해 만난 한 의원에 따르면 이 대표는 ‘난 죄 없고 결백하다. 똘똘 뭉쳐 일하자’면서 ‘내년 총선 공천은 시스템으로 이뤄지니 불이익이 없을 것’이란 취지로 얘기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체포동의안 부결해 달라고 대놓고 얘기 한 것은 아니지만 말 뜻이 뻔한 것 아니냐. ‘부결시켜 주면 공천 불이익 없다’고 회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신의 당권 유지를 전제로 한 얘기라 듣는 비명계 의원 입장에선 불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다른 비명계 의원은 “8월이 마지노선일 것이다. 이 대표가 그때까지 당권을 내려놓지 않으면 분당의 기로에 설 수 있다. 또 하락 추세인 지지율이 20% 밑으로 떨어지면  총선에서 수도권은 전멸하고, 호남도 흔들리게 돼 당내에 이 대표 퇴진론이 급물살을 탈 것”이라고 했다.   이재명의 ‘당권방어’ 열쇠 3개   이에 맞선 이 대표 측의 ‘당권 방어’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민주당은 지난달 31일, 윤리심판원장에 친명계로 분류되는 위철환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내정했다. 윤리심판원장은 당직자가 기소됐을 때 당직 유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 키를 쥐고 있다. 또 내년 총선 공천을 앞두고 현역 의원 평가를 맡는 선출직 공직자평가위원회 위원장에 송기도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를 임명했다. 송 교수는 2021년 이재명 대권 후보 지지모임인 ‘전북정책포럼’ 상임대표를 맡은 친명계 인사다.   비명계 중진 의원은 “언론이 주목을 안 하는데, 두 사람 자리는 이 대표의 당권과 공천권 방어에 큰 역할을 하는 자리”라며 “이를 두고 의원총회에서 비명계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유야무야 넘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친명 강경 초선 모임 ‘처럼회’ 소속 양이원영 의원과 이재명 캠프 대변인 출신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이낙연계 양기대(광명을)·윤영찬(성남중원) 의원의 지역구를 공략하는 등 이낙연계를 치기 위한 ‘자객공천’ 움직임도 거세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 대표는 이처럼 공천권 과시와 함께 호남의 지지층이 이탈하거나 이낙연에게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박지원 카드’를 적극 활용 중”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올초 정청래 의원 등 친명 측근의 반발을 무릅쓰고 박지원 전 국정원장을 복당시켜줬다.   비명계 중진 의원은 “그 뒤 박 전 원장의 발언을 보면 ‘이낙연이 DJ(김대중)냐. 미국 간 것부터 잘못됐다’는 등 이낙연 비난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개딸’ 등 강성 지지층의 팬덤 정치도 이 대표의 당권 방어에 중요한 수단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개딸들이 디시인사이드 등 디지털 공간에서 ‘이낙연이 대장동 의혹을 제기한 탓에 이재명이 대선에서 졌다’ ‘이낙연이 미국으로 도망갔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도 실은 친한 사이가 아니다’며 이낙연 책임론과 악마화 논리를 유포하고 있다”고 했다. ‘개딸’을 자처하는 20대 중후반 여성 3명은 최근 이낙연계 핵심 설훈 의원의 국회 사무실을 찾아가 “왜 이재명에게 반대하냐”고 항의했다가 설 의원의 논리적 설명에 설득돼 돌아갈 땐 설 의원 지지층이 됐다는 전언도 나왔다.   이낙연계 “대선 패배는 이재명 탓”   이낙연계 중진 의원은 “이재명 성남시장의 전횡으로 엄청난 손해를 본 대장동 원주민들이 2021년 7월 이낙연 캠프에 어른 한 팔 두께의 문건을 들고 와 읍소했다. 그 뒤 8월 말 언론이 ‘대장동 게이트’라며 이 문제를 폭로했기에 이후 후보 간 토론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뿐”이라며 “국민이 호소하는 고통과 의혹을 정치인이 눈감는다면 정치할 이유가 뭐냐. 대선에서 이재명이 진 건 이재명 탓”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정치인도 이낙연 아닌 이재명”이라며 “2018년 이재명이 경기지사로 당선된 뒤 문재인 대통령은 2~3주에 한 번씩 그를 국무회의에 참석시켰는데, 이 지사가 발언할 때마다 눈을 감았다고 한다. 다른 지자체장이 얘기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한 것과 대조됐다. 2017년 대선 경선 때 겨룬 앙금 등으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증거다”고 말했다. 강찬호 논설위원

    2023.02.22 00:48

  • “10년 넘게 추적하는 간첩 수사, 국정원 손 떼면 끝장”[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간첩 잡던 전 국정원 직원들 격정 토로〉   강주안 논설위원 지난 15일 오후 5시쯤 국립대전현충원에 들어서 왼편으로 올라가니 소방공무원묘역이 나온다. 대구·남양주·창원 등지에서 순직했다는 글씨 가운데 특이한 내용이 눈에 띈다. ‘1996년 10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순직’. 소방교·소방장 같은 소방 공무원 직위가 새겨진 주변 묘비들과 달리 ‘이사관’이라고 씌어있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다 집 앞에서 독침 등으로 살해당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 해외파트 요원 최덕근 영사의 묘소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전 국가안전기획부 요원 최덕근 영사의 묘비.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침 등에 살해된 그는 소방관들 사이에 잠들어 있다. 강주안 기자 임무 중 순직 '이름 없는 별' 19개 추모석 국정원엔 ‘이름 없는 별’ 조형물이 있다. 임무 수행 중 숨진 요원을 기리는 추모석이다. 2021년에도 별이 추가돼 모두 19개다. 이 중 하나가 최 영사다. 유일하게 신원이 공개된 최 영사는 나머지 18명의 동료와 함께 영면하지 못한다. 경찰·군인 등은 같은 묘역에 안장하지만, 국정원의 별은 누구인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 모든 내용이 기밀이다.   국정원 대공 수사 간부 출신으로 최 영사 추모를 주도해온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은 “소방관 사이에 자리한 최 영사 묘비를 볼 때마다 북한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위험한지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 간첩 수사에 평생을 바친 전직 대공수사 요원들은 요즘 근심이 많다. 올해 말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폐지되기 때문이다. 2020년 더불어민주당의 국정원법 강행처리로 국정원은 내년부터 간첩 수사를 못 하게 된다. 관련 기능은 경찰로 이관한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등의 여파다. 윤봉한 국가안보통일연구원 원장은 “경찰은 지금도 간첩을 얼마든 수사할 권한이 있다”며 “대공수사권을 이관하는 게 아니라 그냥 국정원 수사권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조 필수 해외 수사는 국정원 특기" 국민 입장에선 국정원이든 경찰이든 간첩만 잡으면 된다. 그런데 전문가 사이에선 “간첩을 못 잡게 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대공 수사를 오래 한 검찰·경찰 출신도 같은 얘기를 한다. 국정원의 간첩 수사 과정은 ‘이름 없는 별’ 만큼이나 베일에 가려졌다. 간첩을 잡으면 공작망을 이용해 다른 간첩도 추적하기 때문에 극도의 보안이 몸에 뱄다. 이 분야에서 20년 이상 활동한 전직 요원들을 찾아내 증언을 들었다. 이들은 “수사 과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국정원 수사권 폐지가 곧 간첩 수사 포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전직 요원 A씨는 친북 국가에 들어가 북한 정보기관 간부를 대상으로 벌였던 아찔한 수사를 잊지 못한다. 북측 요원이 즐비한 상황에서 현지 폭력배(갱)의 보호를 받으며 북한 간부를 모처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위태로운 담판을 거쳐 정보를 확보했다. 이를 단서로 남한에서 암약한 간첩들을 검거했다. 북한 공작원과 남한 간첩의 해외 활동을 좇는 과정에서 해당국 수사 기관에 체포되기도 한다. 전직 요원 B씨는 “정보 당국 간 피 말리는 협상이 벌어지며 제3국의 도움을 받는 등 해외 정보 역량을 총동원하게 된다”고 밝혔다. 신언 전 파키스탄 대사는 “해외 파트 공조가 필수이기 때문에 국정원이 아니면 간첩 수사는 힘들다”고 설명한다.   단서 포착부터 판결까지 10년 소요 간첩 한 명을 잡으려 10년 이상 추적하는 일이 다반사다. 전직 수사관 C씨는 간첩 신문 도중 해외에서 암약하는 북한 공작원의 정체를 파악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분명 해당국의 국민으로 돼 있는 인물인데 북한 공작원이라며 이름까지 적시하더군요.” 즉각 해외 파트와 공조가 시작됐다. 다각도로 추적해 북한 사람이라는 단서를 잡아내는 데만 몇 년 걸렸다. 그가 남한 내 간첩으로부터 보고를 받는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과정에 수년이 소요됐다. 남한 간첩의 신원을 확인한 이후에도 수사는 계속된다. 결정적인 물증이 없으면, 재판에서 무죄가 나올 수 있다. 극비의 수사 기법을 통해 그가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는 장면을 잡았다. 첫 단서를 포착한 때부터 간첩죄 유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10년 넘게 걸렸다. 한번 발령을 받으면 대공수사국에 뼈를 묻는 국정원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수사다. 공안통인 전직 검찰 간부는 “간첩을 잡으려면 10년 이상 사명감으로 지속해야 하는데, 경찰은 승진하면 인사이동을 통해 편한 보직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며 “국정원 수사권 폐지는 간첩 수사를 안 하겠다는 거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평생 한 분야에 집중하며 축적한 전문성은 간첩 설득에 긴요하다. 남파 간첩 ‘은하수’를 신문했던 D씨는 “조사 도중 요덕수용소 주변 약도를 그리길래 ‘여기 방앗간이 있지 않으냐’고 지적하자 놀라며 태도가 변하더라”고 회상했다.   "20년은 근무해야 제대로 수사 가능" 간첩은 수사가 가장 힘든 상대로 꼽힌다. 황흥익 단국대 겸임교수는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기에 죄책감이 없고 사상무장이 철저한 간첩을 신문하려면 국정원의 전문적인 기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A씨는 “요즘 간첩은 수사 요원을 법적으로 역공하는 기법도 엄청나다”며 “20년 정도는 대공 업무를 해야 간첩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간첩의 주도면밀함은 수사관들을 아찔한 순간으로 몬다. 1997년 부부 간첩 사건 당시 체포된 강연정이 독약 앰풀(1회용 용기)로 자살했다. 28살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도 놀랍지만, 철저한 몸수색에도 발견되지 않도록 앰풀을 숨긴 기법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C씨는 안가의 한 방에서 숙식해온 간첩이 며칠 뒤 “함께 죽으려 했는데 너무 인간적으로 대해줘 마음이 바뀌었다”며 어디선가 면도날을 꺼내 머리가 쭈뼛했던 기억이 있다. 무수한 성공과 실패 경험이 국정원 요원을 단련시킨다. 한 전직 경찰 대공수사 간부의 견해다. “오래전엔 경찰이 대공수사를 가장 잘했다. 그런데 국정원이 대공수사를 강화하고 해외 공작이 중요해지면서 국정원이 주도하게 됐다. 경찰은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박종철 고문치사’가 벌어진 뒤 수사 역량이 위축됐다. 과거로 돌아가겠다면 조직과 인력을 대폭 늘리고 최소 5년은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그래도 해외 수사는 국정원이 맡아야 한다. 올해 말 국정원 수사권을 폐지하면 간첩은 이제 못 잡는다고 보면 된다.”   경찰 "대공 수사 기관은 원래 우리" 지난 10일 오후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이 간첩 수사가 진행됐던 남산 옛 안기부 제5별관을 설명하고 있다. 강주안 기자 경찰에선 자신감을 표한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지난 6일 “1945년 이후로 경찰은 대공 수사의 본래적이고 1차적인 수사기관”이라며 “경찰의 대공수사 역량이 높아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작업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국정원 출신인 민주당 김병기 의원은 “개정 국정원법상 국정원은 수사권만 사라졌지 정보 수집이나 조사 권한은 보유한다”며 경찰과 정보 공유만 잘하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10일 오후 장석광 사무총장과 함께 남산에 있는 옛 중앙정보부 자리를 돌아봤다. 정치인·언론인이 끌려왔다는 설명이 붙은 ‘제6별관’이 보인다. 터널을 지나자 나타난 중부공원여가센터 건물이 간첩 수사를 하던 ‘제5별관’이다. 장 총장이 일하던 2층엔 ‘민생사법경찰단’이 들어왔다. 간첩 조사실이 있던 지하는 구내식당이 됐다. 그는 안기부가 1995년 내곡동으로 이전한 뒤 처음으로 건물에 들어와 봤다고 했다. “박원순 시장 시절 주변을 단장했다기에 아내와 와봤는데 온통 부정적 얘기들만 여기저기 써놓아 상심이 컸다”고 한다. 그는 “대공수사 요원들은 간첩 잡기에만 전념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 파트에서 주로 근무한 국정원 간부는 “입사 초기 일이 힘들다고 선배에게 하소연하면 ‘우리보다 몇 배 힘든 대공수사 쪽을 생각하라’며 달래주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 전 정찰총국 간부 “국정원 수사권 폐지 북한서 좋아할 것”   몇 년 전 탈북한 전 북한 정찰총국 간부는 지난 14일 기자와 통화에서 “북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국정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북한) 요원들에게 ‘국정원 놈들을 절대로 믿지 말고 100% 경계하라’고 교육한다”고 소개했다. 인터넷 시대에 북한이 간첩을 보낼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엔 “남한은 여러 번 정권이 교체됐지만, 북한은 80년 동안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대남 전략을 계속 강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정원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다면 북에선 아주 좋아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강주안의 직격인터뷰] “일의 중간 단계선 AI 막강하지만 시작과 끝은 사람 몫” 대리운전 지옥 만든 만취청년 '아침 콜'…쥔 돈은 1만6천원 뿐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조폭ㆍ외국 자본도 군침 흘린다, 쓰레기에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강주안 논설위원

    2023.02.21 01:05

  • "입양은 부담 아닌 축복…文 '입양 취소' 발언에 깜짝 놀랐다"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장세정 논설위원 버려진 한국 아이들을 위해 국내외 입양 홍보 활동을 활발하게 해온 미국인 남녀가 있다. 한국 땅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아 절망했지만, 극적으로 미국 가정에 입양돼 꿈을 키우고 경제적으로 자립했다. 지금은 행복한 가정을 일군 성공한 미국인들이다.  미국에 입양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자신들처럼 버려진 한국 아이들의 국내외 입양을 위해 뛰고 있는 줄리 듀발(황순영) LBTO 대표와 스티브 모리슨(최석천) MPAK 대표. 두 사람이 이소연 선한마음연합 대표와 지난 1일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이소연 대표는 감사원장을 역임한 남편 최재형 의원과 함께 두 아들을 입양한 경험이 있다. (사진 왼쪽부터) 전민규 기자  1956년 강원도 묵호에서 '최석천'으로 태어나 미국에 입양된 스티브 모리슨(67) 한국입양홍보회(MPAK) 대표, 1963년 부산에서 '황순영'으로 태어나 미국인이 된 줄리 듀발(60) LBTO(Love beyond the orphanage) 대표다. 두 사람은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이자 선진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에서 지금도 매일 버려지는 아이들을 살리겠다며 몇 년째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달 28일, 18세가 되면 보육원(옛 고아원)을 떠나는 자립준비 청년(옛 '보호 종료 아동')을 위한 박람회 'Move on'을 12개 비영리 단체와 공동으로 열었다. 8세 때의 최석천.  스티브 모리슨(최석천) 대표는 다섯살 때 가정이 해체되면서 강원도의 한 보육원에 들어갔고, 불편한 다리를 수술해 준다는 말을 듣고 상경해 일산 홀트아동복지회 주선으로 수술을 받았다. 미국인 홀트 부부가 세운 이 복지회는 6·25전쟁으로 생긴 고아 10만여명 중 수만 명을 거두었다. 그는 1970년 14세 때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생물학자로 일하던 존 모리슨 부부에게 입양됐다. 양부모는 1남 2녀를 낳고도 모리슨을 포함한 한국인 2명을 입양했다. 새 가정의 도움으로 중·고교를 다니고 퍼듀대학에서 항공우주공학과를 졸업했다. 전공을 살려 1979년부터 42년간 항공우주 관련 기업에서 일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1982년부터 30년간 미국홀트아동복지회 이사로 활동했다. 1995년부터는 미국에서 입양 홍보 활동을 하다가 1999년 MPAK를 설립했다. 입양을 통해 기회를 얻고 인생을 바꾼 모리슨은 세 딸을 키우면서 한국 남아를 각각 2000년과 2011년 입양했다. 큰딸과 두 입양아의 나이가 모두 25세여서 '1997년생 세쌍둥이'를 둔 셈이다.  스티브 모리슨(한국명 최석천)대표 가족의 행복한 모습. [사진 스티브 모리슨]  -재산·지위 등 입양에 조건이 있나. "내 경험에 비춰보면 입양은 한마디로 영아원·보육원·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일반 아이들처럼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랄 기회, 사회에서 교육받고 성장하고 성공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입양이다. 아이를 중심에 두고 아이의 잠재력을 먼저 봐줬으면 좋겠다."  -중산층과 사회지도층이 나서야 할까.  "사회지도층이 솔선해 입양하면 좋겠지만, 사회적 지위나 재산은 상관없다. 입양은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고 마음이 더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기에 국내 입양과 함께 해외 입양이 아직은 필요하다."  -저출산이 심각한데 낙태도 많고 아이들은 계속 버려진다. "미국에서는 부부가 이혼하면 서로 아이를 키우겠다고 싸우는데, 유교 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은 서로 안 키우겠다며 너무 쉽게 보육원에 맡긴다. 미국처럼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책임을 지도록 법적 의무를 강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재혼하면서 전 남편이나 전 부인의 아이를 못 받겠다는 발상은 미국 문화에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키우면서 입양을 후회한 적이 있나. "혹시 내가 잘못 데려왔나 생각한 적은 있다. 그러나 돌려보내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위탁 가정의 경우 며칠이나 몇 개월 키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경우가 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잘 키우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했고, 어떤 이유든 절대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020년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 문제가 됐고, 반려견 파양 논란도 있었다.   "문 대통령이 '입양을 취소하거나 애가 안 맞으면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한 발언은 수많은 입양 가족을 놀라게 했다. 입양에 대해 선입견도 많고 무지하니까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아이를 바꾼다는 발상은 부모의 입장인데, 엄마·아빠와 가정이 필요한 아이 입장에서 봐야 한다. 반려동물에 대해선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을 입양했다면 끝까지 제 자식처럼 키워야 한다."  -입양 정책 중에 개선할 것은. "2012년에 도입한 '입양특례법'처럼 섣부른 정책이 역효과를 내는 사례가 적지 않다. 법원 심사로 입양 가정을 걸러내는 것은 맞지만, 미혼모의 출생 신고를 의무화한 조치 때문에 신고를 기피하는 미혼모들이 아이들을 더 많이 낙태하고 화장실과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니 출산율이 올라갈 수 없다. 미혼모에게 선택권을 주는 미국처럼 한국도 미혼모가 무명·익명으로 남을 수 있게 법을 수정해야 한다."  6세 무렵의 황순영.  줄리 듀발(황순영) 대표는 부산의 한 보육원에서 지내다 16세에 퇴소했다. 여러 집을 전전하며 가사도우미로 일했고 판매점에서 일하다 성적 학대를 당했다. 일산 홀트아동복지회를 찾아갔더니 자원봉사자로 받아줘 틈틈이 영어를 공부하며 자립을 준비했다. 198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미국홀트아동복지회에서 일하던 중 오리건주에 사는 진 메이베리 부부의 딸이 됐다. 그 부부는 친생자녀 3명 외에 미국 남아 1명과 한국 여아 3명을 입양한 상태였다.  듀발 대표는 "새로운 가족을 얻으면서 내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비로소 자신감과 안정감을 얻었고 꿈을 꿀 수 있었다"고 말한다. 대학 졸업 뒤 변호사 남편을 만나 1992년 결혼했고 20대 딸 둘을 뒀다. 자신처럼 버려진 아이들이 보육원이 아니라 국내든 해외든 입양을 통해 가정에서 자라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2016년 비영리 단체 LBTO를 설립했다. 줄리 듀발(한국명 황순영) 대표 가족의 단란한 모습. [사진 줄리 듀발]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편견과 차별이 심했고, 무엇보다 존중받지 못해 힘들었다. 기회가 목말랐다. 가정을 가질 기회, 사랑받을 기회, 교육받을 기회가 중요했다."   -LBTO를 만들어 한국 고아 돕기에 나선 이유는. "나에게 기회를 준 데 대해 늘 감사하면서 뭔가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입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고 싶었다. 보육원을 나가는 자립준비 청년에게 필요한 정보와 네트워크를 제공해야 하는데, 정부 프로그램이 너무 부족해 나서게 됐다. 설과 추석에 만남 행사를 열고 장학금도 지급한다."  -정부에 호소하고 싶은 것은. "시설에서 나오는 아이들에게 정부가 최근 자립지원금을 올려줬다. 돈도 좋지만, 자립에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립준비 청년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박람회도 정부가 주도해 정기적으로 열기 바란다."   -윤석열 대통령 등 한국사회 지도층에게 전할 말은. "한국은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가정이 유달리 많다고 들었다. 유기견 입양도 좋지만, 버려지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더 기울이고 먼저 챙겼으면 좋겠다. 지도층이 솔선수범해 아이들에게 시설보다 가정이 더 필요하다는 점을 널리 알려주면 좋겠다. 입양은 부담이 아니라 축복이다." [기고 이소연 '선한마음연합' 대표] 선한마음연합 이소연 대표와 남편 최재형 의원(전 감사원장)은 두 아들을 입양해 키웠다. 전민규 기자 "유엔협약대로 모든 아동은 '가정에서 자랄 권리' 누려야" 보육원을 나오는 자립준비 청년(매년 약 2000명)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 최근 커졌다. 자선 단체와 유명 연예인 등 각계 인사들이 나서서 아동 양육시설과 자립준비 청년을 위해 돈과 재능을 기부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매월 40만원의 자립수당을 5년간 지급하고, LH를 통한 주거 지원 등 자립에 필요한 다양한 맞춤 대책을 추진 중이다. 바람직하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자립준비 청년 관련 사회적 지표를 보면 여전히 암울하다. 보육원을 떠난 청년 4명 중 1명은 곧바로 연락이 끊기고 자립 지원체계의 사각지대로 숨어든다. 대학진학률이 70%를 훌쩍 넘는 이 시대에 자립준비 청년의 대학 진학률은 겨우 15%에 그친다. 자주 발생하는 자립준비 청년의 비극적인 자살을 막아야 한다.  태어나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베이비박스 유기 아동은 곧바로 위탁가정이나 입양가정으로 보호 조치하는 것이 일관된 정부 정책이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지금까지 60%가 넘는 유기 아동은 정당한 보호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 보육시설로 보내졌다. 유엔아동권리협약과 헤이그협약 등은 친권자를 떠나 보육시설로 보내진 아동에게는 가정형 보호가 최우선의 이익임을 명시하고 있다. ‘모든 아동은 가정에서 자랄 권리가 있다’는 아동보호 원칙은 모든 인류 문명권에서 동의하고 약속한 가치다.    미국·유럽 등 복지 선진국에서 보호 아동은 가정 보호 원칙에 따라 위탁·입양 가정에서 자란다. 한국처럼 한 번 들어가면 평균 10년을 살아야 하는 장기·집단 보육시설은 없다. 사람은 모두 존중받으며 살 권리가 있다. 이제라도 정부가 자립준비 청년에게 다양하고 종합적인 지원 대책을 제공해야 한다.     관련기사 '조용한 침공' 간첩 활개치는데 막을 '방패'는 곳곳 구멍[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단독]"세월호 원인, 6대 2였는데…정치 입김에 3대3 됐다"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30년 좌파' 전향 선언 "조국 발언에 경악, 그건 파시스트 언어"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김정일 유서' 입수한 탈북 박사…왜 文정부서 간첩몰이 당했나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30년전처럼 중국은 지금 한국이 절실하다" 김하중이 찌른 정곡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전시 자료조차 北-南순이었다...文정권이 왜곡한 '충격의 역사박물관'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이시은 인턴기자가 인터뷰 정리에 참여했습니다.

    2023.02.14 00:46

  •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난방비 포퓰리즘 비판은 진보·보수 아닌 상식의 문제

     ━  ‘난방비 폭탄’ 불만 파고드는 거리 시위   서경호 논설위원 지난 4일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의 ‘윤석열 정권 민생파탄 검찰독재 규탄대회’.   검찰 수사를 받는 당 대표를 지키겠다며 ‘이재명과 나는 동지다’라고 인쇄된 파란 색 풍선을 흔드는 지지자들이 많았다. ‘검사 독재’ 비판과 함께 난방비 폭탄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민주당에서 준비한 여러 가지 손팻말 중에 이재명 대표가 골라 손에 든 것도 ‘윤석열 정권 난방비 폭탄 못살겠다!’였다. 이날 민주당 집회 직후, 진보단체가 모인 ‘촛불행동’이 주최한 ‘윤석열 퇴진, 김건희 특검 25차 촛불대행진’이 같은 장소에서 이어졌다. 시공간이 겹치다보니 참석자도 뒤섞였다.   거리에선 에너지요금 인상 반대 주장도   4일 서울 남대문과 시청역 사이 대로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의 장외 집회. 이재명 당 대표가 의원들 사이에 앉아 ‘난방비 폭탄 못살겠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뉴스1] 현장에서 ‘노동자연대’라는 신문이 호외를 나눠주고 있었다. 신문 1면의 ‘전기·가스 요금 인상 반대한다’는 큰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어떤 신문인지 홈페이지에 가봤더니, 마르크스주의로 세계를 분석하고, 주류 언론이 대변하지 않는 노동자와 차별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소개했다.   대체 어쩌자는 건지, 궁금해서 신문을 펼쳐봤다. 주장인즉슨, 전기·가스·수도·대중교통 같은 필수 공공서비스는 정부가 지원해야 하고 세금으로 공기업 적자를 메우라는 거였다. 재원은 윤석열 정부의 부자 감세를 줄여서 기업과 부유층에게 더 걷으면 된다는 건데, 부자기업에 매기는 세금(법인세)도 결국 주주와 임직원들이 부담하게 된다는 걸 무시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부자기업이지만 지난해 3월 기준으로 개인 주주가 547만 명에 달한다. ‘노동자연대’를 읽는 노동자 중에도 얼마든지 삼성전자 주주가 있을 수 있다.   민감한 난방비 이슈라는 먹잇감을 진보단체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민주노총은 지난 1일 집회에서 난방비 등 공공요금 인상 반대와 횡재세 도입을 주장했다. 진보당은 ‘어이없다 내 난방비 모이자 서울역!’이라는 플래카드를 시내 곳곳에 내걸고 이번 주말 시위를 예고했다.     ■  「 난방비 불만 부추기는 진보단체 여야 정치권 수조원대 추경 거론   밀린 숙제 늦게 하다 생긴 성장통 “요금정상화, 힘들어도 가야 할 길”   중산층까지 지원하는 건 포퓰리즘 에너지 다소비 생활부터 바꿔야 」    지난 정부의 과도한 요금 억제   4일 서울 남대문 집회 현장에서 호외로 뿌려진 ‘노동자연대’ 신문. 난방비 이슈는 복잡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에서 억지로 억눌렀던 전기·가스 요금으로 공기업 부담이 임계치를 넘어섰다. 국내외 가격차를 감안할 때 요금 현실화는 불가피하다. 밀린 숙제를 뒤늦게 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성장통 같은 거다.   난방비 고지서를 받고 뒷목 잡는 이들이 많다. 단독주택에 사는 한 지인은 지난달 2인 가족 난방비가 50만원이 나왔다며 울상이다. 정부가 서둘러 취약층에 난방비를 지원하는 1, 2차 대책을 내놓은 건 당연했다. 윤석열 정부는 시장경제를 강조하면서 약자를 보듬는 ‘따뜻한 동행’을 함께 내걸었다. 난방비 대란 속에 취약계층의 어려움을 살피는 건 마땅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난방비 대책에 중산층까지 포함할지 정부가 고민하고 있어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중산층과 서민의 난방비 부담을 경감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중산층 지원은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다. 국민 대다수에게 가격 보조를 하게 되면 가스나 전기 요금을 현실화해 수요를 줄이고 에너지 절약을 유도한다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 기조와 어긋나고 수요관리를 통해 기후변화에 대응하자는 방향과도 맞지 않는다. ‘타깃을 정해 일시적으로만 지원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조언을 새겨들어야 한다.(기타 고피나스 IMF 수석 부총재)   중산층까지 지원하려면 추경 불가피   지난 1일 서울 시내에서 열린 민주노총 시위에서도 난방비 폭탄이 화두였다. [뉴스1] 정치권에선 이미 ‘난방비 포퓰리즘’이 넘실댄다. 더불어민주당은 80%의 국민에게 가구당 최대 40만원을 현금으로 주자는 안을 냈다. 여기에만 7조원 넘는 재원이 필요하니 30조원 추경을 하자는 거다. 일부 여당 의원도 나섰다. 조경태 국민의힘 의원은 모든 가구에 3개월간 10만원씩 지급하는 6조원대 추경안을 제안했다.   중산층까지 난방비를 지원하려면 대략 10가구 중 여섯 가구에 돈을 줘야 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통계청이 주로 쓰는 기준으로 중산층 비중(처분가능소득 중위소득 50∼150%)은 2021년 61.1%였다. 난방비 1, 2차 대책보다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해 추경이 불가피하다.   추경은 여전히 5%대인 고물가에 부담이 되고 1000조원대인 국가채무를 더 늘린다.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와도 맞지 않는다. 지난 정부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나 국민 대부분에 나눠준 국민지원금에 비판적인 게 지금 정부 아니던가. 한덕수 총리는 7일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현재 재정 사정으로는 취약층 지원에 집중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도 난방비 추경에 반대하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대통령 발언의 무게를 경제관료가 어느 정도까지 감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정부는 전기·가스요금을 단계적으로 현실화해 2026년까지 한전 누적 적자와 가스공사의 미수금을 해소한다는 정상화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난방비 폭탄’에 정부가 여론 눈치를 볼 것 같아 걱정이다. 익명을 원한 전직 산업자원부 장관은 “에너지 정책은 장기 이슈여서 이념이나 정쟁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며 “단기 이슈에 흔들리지 않도록 전문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금 정상화는 힘들어도 꾸준히 가야 할 방향”이라며 “지금처럼 우리 기업과 가계가 에너지를 많이 쓰면서 탄소 중립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강조했다.   유럽처럼 가스료 8배 오른 것도 아닌데   전문가 얘기도 비슷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창의융합대학장은 “유럽처럼 가스요금이 8배 뛰었다면 재난수준이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지난해 38% 올랐을 뿐”이라며 “재난수준이라면 중산층까지 지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취약층 지원이 맞다”고 말했다. 취약층 지원은 정부 대책에 나오는 지난해의 두 배에서 세 배 정도로 늘릴 필요는 있다고 했다. 겨울을 나기 위해 12~2월 석 달간의 지원은 필요해서다. 유 교수는 “지금의 에너지난은 2025년까지 이어질 것인 만큼 내복 입고 난방온도 낮추는 등 에너지 다소비의 생활 패턴을 바꿔야 한다”며 “중산층까지 지원금을 확대하면 ‘지금처럼 마구 써도 되는구나’하고 착각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는 ‘에너지 고물가 시대, 기본은 절약이다’ 등 난방비 포퓰리즘을 지적하는 사설을 써왔다. 한겨레도 ‘중산층까지 난방비 지원, 에너지 정책 꼬이게 만든다’는 사설을 썼다. 다른 언론도 비슷하다. 난방비 포퓰리즘 비판은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가 난방비 이슈를 어떻게 처리할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 한전은 적자, 가스공사는 미수금 왜? 회계처리 차이일 뿐 「 증권가에선 한국전력이 지난해 31조원의 영업적자를, 한국가스공사는 2조원에 육박하는 영업흑자를 낼 것으로 추산한다. 에너지 기업이 요즘 힘들다는데 왜 가스공사는 흑자일까. 비밀은 가스공사의 미수금 계정에 있다. 가스공사 미수금은 지난해 말 9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전과 가스공사는 원유나 천연가스를 도입해 전기와 도시가스를 판매한다. 원가보다 싸게 팔면 적자를 보는 구조다. 김종갑 전 한전 사장이 재직 때인 2018년 “두부값이 콩값보다 싸다”며 전기요금 현실화를 주장한 것도 같은 이유다.   한전이 전기를 원가보다 싸게 팔아 손해를 보면 당해 연도 적자로 기록한다. 반면 가스공사는 원가보다 싼 매출액만큼을 나중에 받을 돈(미수금)으로 회계처리한다. 한전은 적자로 인식하지만 가스공사는 자산으로 쳐주는 셈이다. 실제로 미수금이 쌓여도 결국은 해결됐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서민 생활 안정과 물가 관리를 위해 정부가 공공요금을 동결했다. 가스공사 미수금이 2012년 말 5조5000억원까지 쌓였다. 하지만 2013년부터 원가를 반영하기 시작해(원료비 연동제 복귀) 2017년 누적미수금을 다 회수했다.   다시 미수금이 9조원까지 쌓인 건 문재인 정부 탓이다. 2018년 유가와 환율이 오르자 원료비 연동제를 유보했다. 도입단가가 오르는 데도 민수용 도시가스 가격을 2020년 7월부터 2022년 3월까지 20개월간 동결했다.   정부가 가스공사에만 미수금 계정을 쓰도록 허용한 건 일종의 특혜다. 그렇게 된 사연이 있었다. “전기요금은 중앙정부가 결정하지만 도시가스 요금은 지자체가 결정한다. 선거철이면 지자체장들이 요금 동결을 공약으로 내걸곤 한다. 그래서 도매가격을 못 올려 적자를 보면 경영평가 등에 불리해지고 해외 구매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국제회계기준에는 맞지 않지만 정부가 가스공사에 미수금이라는 외상값 계정을 허락한 것이다. 뉴욕 증시에 상장된 한전은 국제회계기준을 지켜야 해서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   어차피 나중에 해결된다고 미수금을 가벼이 볼 일은 아니다. 쌓이는 이자만큼 국민 부담은 더 커진다. 회계상 흑자기업이라고 정부의 2차 난방비 대책을 가스공사 부담으로 넘긴 건 고육책이겠으나 정공법은 못 된다. 」 서경호 논설위원

    2023.02.08 00:41

  • "모든 책임 내가 진다"는 윤 대통령…'윤증의 탕평' 품을까 [서승욱 논설위원이 간다]

    서승욱 논설위원  논산 명재고택에서 바라본 윤 대통령 리더십    "바로 옆 노성향교엔 담장이 있는데 이 집엔 담장이 없지 않느냐.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된 뒤 집권당인 노론의 감시가 심했다. 명재 선생은 기왕에 감시하려면 아예 대놓고 보라고, 자유롭게 보라고 담장을 헐었다고 한다."   지난 1일 오전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명재고택. 조선의 유학자 명재(明齋) 윤증(1629~1714)의 생전인 1709년, 그의 제자와 아들·손자들이 파평 윤씨 집성촌인 이곳에 지은 집이다. 탁 트인 신작로 옆에 자리 잡은 이 고택에 담장이 없는 이유를 이재철 문화관광해설사는 관람객들에 이렇게 설명했다. 쌀쌀한 날씨의 평일이었지만 자신을 파평 윤씨로 소개한 여성을 비롯해 몇 명의 관람객이 고택을 찾았다.    윤증 고택에는 왜 담장이 없을까   윤증은 숙종 때 '회니시비(懷尼是非)'로 불리는 갈등을 계기로 과거 스승으로 모셨던 노론의 영수(領袖) 우암 송시열과 갈라섰다. 당시 주류 세력이던 서인의 분열, 분당이었다. 윤증이 이끄는 소론은 집권 노론과 비교할 때 개혁적 소장파 색채가 강했다. 윤증과 명재고택은 파평 윤씨 35대손인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재조명을 받았다. 당대 최고의 거물 송시열에 맞섰던 윤증은 윤 대통령의 10대조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다.     작가 천준은 윤 대통령 인물탐구서인 『별의 순간은 오는가』에서 "윤증은 싸워야 할 사람과는 확실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가치관과 철학을 뒤흔드는 상대와는 과감하게 정면으로 치고받았다"며 "마찬가지로 윤석열도 국정원 여론조작 수사나 조국 수사 등을 통해 힘센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윤증은 마당발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다양한 유형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당시엔 '유학 내 이단'이던 양명학을 공부하는 사람들과도 교류했다"며 "친구들을 두루 사귀기 좋아하는 윤석열의 성품에도 꽤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했다. 윤증이 "우리를 감시하려면 마음대로 하시라"며 담장을 부쉈다는 설명을 들으니 두 사람의 기질엔 뭔가 닮은 점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시절인 2021년 12월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이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에서 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년 총선까지 어떤 리더십 보일까   최근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 중·후반대에서 오르내린다. 40%대로 화끈하게 치고 올라가진 못하지만, 이준석 사태와 각종 시행착오로 고전했던 어둠의 시기는 벗어났다는 평가가 여권에서 나온다. 정권의 중간평가가 될 총선의 성적표는 앞으로 14개월 동안 윤 대통령의 리더십을 국민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도 달려있다.     여권 내부엔 "학습능력이 뛰어난 만큼 초반의 시행착오를 극복하며 완만하지만 꾸준한 상승 곡선을 그릴 것"(대통령실 핵심 관계자)이란 기대감이 있다. 초반 실수를 딛고 정치 적응기를 거치며 리더십이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책을 보다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관련된 책을 다 찾아서 보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진도가 나갈 수가 있겠어요? 그건 고시공부가 아니라 학문 연구를 하는 거죠." 서울 법대 동기가 전한 윤 대통령의 고시생 시절 공부법이다. (김연우  『구수한 윤석열』 중에서)     10대조 종조부인 윤증의 경우 평생 관직을 맡은 적이 없다. 85세로 별세할 때까지 우의정을 포함해 10번 넘게 수많은 관직에 제수됐지만,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윤 대통령은 관직으로 가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9번을 도전했다. 그의 서울 법대 동기는 윤 대통령이 고시에 번번이 떨어진 이유를 사법시험 준비 와중에도 많은 책을 읽고 토론을 즐겼던 '신림동 신선'의 공부법과 기질에서 찾았다.   화물연대 파업, 달라진 대응   속도는 늦을지 몰라도 확실하게 배워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빌드 업' 방식의 심화학습법이 대통령으로서의 국정 운영에 긍정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여권에선 주장한다. 이런 '두 번 실수는 없다'는 사례로 윤 대통령 주변에선 화물연대 파업과 폭우 대응을 꼽는다.   화물연대 파업은 윤석열 정부에서 두 번 있었다. 지난해 6월 첫 파업 땐 정부가 화물연대에 끌려다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전운임 지속 추진과 품목 확대 적극 논의" 등의 어정쩡한 합의에 당내에서도 "너무 쉽게 타협한 듯해 실망했다"(이언주 전 의원)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11월 말~12월 초 파업 때는 달랐다. 업무복귀 명령 발동으로 "불법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고, 화물연대는 결국 빈손으로 백기 투항을 했다.     수해 때도 비슷했다. 지난해 8월 강남 폭우 때는 사저에 머물면서 '폰트롤 타워' 논란까지 일었다. 하지만 9월 초 태풍 힌남노 때는 참모들과 용산 대통령실에 24시간 철야 대기하며 상황을 진두지휘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한 명재고택.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 선생의 집이다. 서승욱 논설위원 노동·교육·연금개혁 의지 강해   윤 대통령의 용산 집무실 책상 위엔 지난해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명패가 놓여 있다.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란 영어 문구가 새겨진 나무 명패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재임 1945~1953)이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올려뒀다는 명패를 본떠 만들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나무 명패를 볼 때마다 대통령직에 대한 소명과 책임감을 가다듬는다고 참모들에게 윤 대통령이 자주 이야기한다"고 했다.     노동·교육·연금 개혁 등 3대 개혁에 대해 "인기가 없어도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갑론을박 가운데 한·미·일 결속 강화를 밀어붙이는 등 논란이 큰 이슈라도 자기 책임 하에 결정하고 책임도 자신이 지겠다는 생각이라고 참모들은 설명한다. 이동관 대외협력특별보좌관은 "명재 윤증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로지 국가 지도자가 어떤 마음을 다짐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며 "사사로움과 작은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대의명분을 중시한 윤증 선생의 철학이 DNA에 각인돼있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반면 야당의 평가는 박하다. “왕조시대도 아닌데 대통령이 만기친람하고 있다. 여당은 용산 눈치만 보며 국회는 매번 재가를 받듯 만들고 있다"(박홍근 원내대표)라고 비판한다. 본인이 강하게 칼자루를 쥐고 일사불란함을 강조하는 듯한 리더십의 부작용에 대한 언급이다.       야당과 비판 세력이 대통령의 리더십을 공격하는 또 다른 포인트는 검찰 출신을 과도하게 등용한다는 인사 편중과 탕평의 부재, 또 국민 통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점이다.  통합과 탕평으로의 반전이 없는 한 윤 대통령 리더십이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는 게 야당의 시각이다.      윤증 “반대편 인재도 등용해야”     그런데 윤증의 정치적 주장 중 노론과 가장 대조적이었던 특징이 바로 탕평과 화해, 인재의 고른 등용이었다. 그는 당시 서인과 대립했던 남인과의 원한 관계 해소, 반대 당 사람의 등용을 주장하며 남인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했던 노론과 대립했다. 붕당 정치가 극에 달하고 집권 세력이 뒤집히는 정변(환국)이 잦았던 시기였지만 그는 남인과의 공생, 유능한 인재의 고른 등용을 강조했다. 『명재 윤증의 학문연원과 가학』(충남대 유학연구소 편)에 수록된 이애희의 논문 '윤증의 유학과 우계 성혼'은 "임금이 현자를 알아보고, 세상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하는 일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란 윤증의 생각을 전했다.       대선 후보 시절 윤 대통령을 만난 안동 유림들은 "사색당파 시절 특히 영남 남인에 대한 탄압이 있었을 때 명재 선생이 이를 저지해 몇몇 선비의 문중이 살아남았다"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 첫 지방 행보로 안동을 찾아 탕평과 통합, 협치를 다짐했다.   작은 이해관계보다 대의명분과 소명을 앞에 둔다는 대통령의 리더십은 윤증의 '탕평과 협치'정신을 품고 진화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과 가까운 참모는 "단순히 어느 지역 사람 몇 사람을 등용하는 기계적 차원의 균형, 탕평, 협치가 아니라 더 큰 차원의 통 큰 탕평, 통 큰 통합의 모습을 윤 대통령이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2023.02.07 01:04

  • [김원배 논설위원이 간다]성큼 다가온 농업 자동화....환경·생육 데이터 확충해야

     ━  '스마트팜' 어디까지 왔나'   김원배 논설위원 커다란 비닐하우스 내부로 들어가니 일렬로 늘어선 좁은 탁자 같은 것이 보였다. 작물을 수경 재배하는 베드다. 안에는 방울토마토가 재배되고 있었다. 토마토 주변의 조그만 호스로 양분이 공급된다. 베드 안에는 코코넛 열매 껍질 가루로 채워져 있었다. 흙보다 가볍고 수분을 간직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충남 동천안농협 스마트농업지원센터의 비닐온실에서 방울토마토가 재배되고 있다. [사진 동천안농협]  지난달 26일 눈이 많이 내렸기 때문에 상부엔 스크린이 나와 있었다. 이런 작업을 스마트폰에서 제어할 수 있다. 작물 생산을 위해서는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   스마트폰으로 창문 개폐도 가능    이곳은 농협중앙회와 동천안농협이 지난해 1월 개설한 스마트농업지원센터다. 시설 규모는 4000㎡(약 1200평)으로 농협이 조성한 첫 번째 센터다. 농민들이 직접 시설 투자를 하지 않고 스마트팜 영농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지난해 10여가구가 교육을 받았고 최근 3가구가 스마트팜을 통한 영농을 시작했다. 고령화가 심각한 농촌에선 스마트팜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김기용 동천안농협 영농지도지원담당 상무는 “스마트팜을 채용하면 노동력이 70% 정도 절감되고 환경이 일정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수확 횟수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온도와 습도, 채광을 유지하고 양분을 주는 작업이 자동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자동화만으로 ‘스마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스마트팜의 핵심은 바로 데이터 활용에 있다. 옆 편 사무실로 들어가니 대형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23개 센서를 통해 들어오는 온도와 습도, 이산화탄소량, ph농도 등 온실 내부 상태가 표시돼 있었다.    1단계 스마트팜이 온도와 습도 등 환경 정보를 파악한다면 2단계에선 센서를 통해 잎의 크기나 성장 수준 같은 생육 정보를 활용한다. 김기용 상무는 “환경 정보는 자동으로 수집하지만 생육 정보는 수동으로 입력을 한다. 스마트팜 단계로 보면 1.5단계 수준”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동화 단계가 높으면 그만큼 투자비가 늘어난다”며 “지금은 보급형 모델이 적절하다”라고 말했다.      ━   330㎡ 설치하려면 5000만원 들어    통계청의 '2021년 농림어업조사'에 따르면 전체 농가 103만1000가구 중 비닐하우스 등 시설을 설치한 곳은 14만6000가구였다. 이중 자동화된 스마트팜으로 분류될 수 있는 곳은 3만5100가구(3.4%)다.      편리하지만 확산이 어려운 것은 시설 투자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기존 시설하우스를 개량하면 3.3㎡당 30만~50만원이 들고 신축하면 80만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330㎡(약 100평)짜리 스마트팜을 설치하려면 5000만원 정도가 든다는 얘기다. 유리온실을 지으면 비용은 더 많이 들어간다. 농민들이 이 비용을 전부 투자해서 시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천안시와 동천안농협에서 대상자를 선정해 설치비를 지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2년 전 천안으로 귀농해 사과대추 농사를 시작한 염수정씨는 지난해 이 센터에서 이론과 실습 교육을 받고 지난해 말 스마트팜을 신축했다. 염씨는 "전에는 비가 오면 문들 닫으러 가야 했는데 지금은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문을 여닫을 수 있으니 일손이 절감됐다"고 말했다. 그는 "전에는 날씨나 병충해에 따라 1년 잘하고 다음에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데이터가 축적되면 꾸준한 생산량을 기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민간 스마트팜 데이터 확보에 어려움     2020년 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원예·축산 스마트팜의 60% 이상이 데이터 저장은 하고 있지만 주로 개별 농장의 관리 차원에서 활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별 스마트팜에서 나오는 자료를 대규모로 수집해 빅데이터로 가공해야 가치가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수확량을 늘릴 수 있는 환경이나 생육 조건을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양종열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농정원) 스마트농업실장은 “농업 선진국이라는 네덜란드는 농가 간 생산 격차가 크지 않다”며 “환경·생육 데이터를 확보해 분석하면 초보 농가도 적정 수준으로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농정원은 스마트팜코리아 홈페이지를 통해 1200여개 스마트팜에서 얻은 자료를 제공한다. 우수 농가와 자신의 농가 데이터를 비교해 보는 기능도 있다. 데이터 확보는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한 곳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성과가 뛰어난 민간 농가의 데이터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노하우가 집약된 만큼 제공하길 꺼리기 때문이다.   서대석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농업 생산뿐 아니라 유통과 소비 단계를 아우르는 전 주기적 데이터를 수집·분석·활용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서 연구위원은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민간 중심의 농업 컨설팅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며 “정부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인프라를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   호환성 확대 위해 표준화 필요    표준을 정하는 것도 과제다. 국내엔 여러 스마트팜 시공업체들이 있다. 농업인 입장에선 어떤 곳이 자신에 맞는지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또 업체마다 따로 만들게 되면 호환성 문제가 생긴다. 기본적인 표준을 정하면 부품을 교체하거나 수리를 할 때도 편리하다. 정부 기관에서 스마트팜 기기와 수집 데이터 규격의 표준화를 진행하고 있지만 이를 계속 늘려가야 한다.      교육도 중요하다. 농협중앙회는 동천안농협에 이어 서울 영동농협과 함께 지난해 11월 도시형 스마트팜을 만들었다. 이곳은 귀농·귀촌 교육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다. 경기 양평농협과 함께 짓고 있는 3호 센터엔 한화와 협력해 태양광 설비를 넣는다. 농협중앙회는 내년까지 16개 시도에 지원센터를 만들고 이곳과 농가에서 나오는 스마트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한다는 계획이다.    염수정씨는 “스마트팜 설치 후 편해지긴 했지만 농사라는 게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전에는 농사의 절반은 하늘이 짓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스마트팜 농사는 지식이 절반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IT기기나 기계를 잘 아는 게 큰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시설업체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땅 사고 집사는 게 귀농의 준비는 아닌 것 같다. 스마트팜에 관심이 있다면 교육을 받는 게 먼저”라고 조언했다.      ━   전국 혁신밸리 4곳서 청년농 육성    정부가 청년농 육성을 위해 대규모로 조성한 스마트팜 혁신밸리도 있다. 경북 상주, 전북 김제, 경남 밀양, 전남 고흥 등 4곳에 조성됐다. 지난해 10월 윤석열 대통령이 방문한 상주 혁신밸리는 실습농장과 실증온실, 임대온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임대온실은 규모가 9만7500㎡(약 3만평)에 달한다. 기존 농업인이나 청년농에게 시설을 빌려주고 있다. 실증온실에선 스마트팜 업체들이 기자재를 실험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10월 정부는 2027년까지 매년 청년농 5000여명을 신규 육성하고 시설원예·축사의 30%를 스마트화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또 2027년까지 주요 곡물 재배의 자동화(노지 스마트팜)를 목표로, 무인·자동화 시범 단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농촌진흥청이 개발하고 있는 수확로봇이 토마토를 따고 있다. [사진 농촌진흥청]  윤원습 농림축산식품부 농식품혁신정책관은 “청년농이 혁신밸리에서 20개월 교육을 받고 3년간 스마트팜을 임차해 직접 농사를 짓고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을 모아 창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며 “혁신 밸리를 거점으로 스마트팜을 확산하고 기존 농업인 대상으로도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 UAE 수출도 추진...규모의 경제 달성이 숙제 「 전 세계 스마트팜 시장은 지난해 161억 달러(19조80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국내 시장 규모는 3000억원(2021년) 수준이다. 한국의 스마트농업 기술은 최고 기술국인 유럽연합(EU) 대비 70% 정도로 평가된다.     세계적으로 환경 데이터에 생육 데이터까지 활용하는 2세대 스마트팜의 상용화를 위한 기술 개발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3세대는 2세대에 로봇 기술이 추가된다. 농촌진흥청 등에선 3세대 스마트팜에서 활용되는 선도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수확예측 로봇의 경우 작물의 색깔을 인식해 수확량을 예상한다. 과채류 수확 로봇도 개발 중이다. 스마트팜 자동화 기술을 개발하는 중소기업도 여럿이다.      수출에 나선 곳도 있다. 중동 지역에서 관심이 많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했을 때 국내 스마트농업 기업 8개사가 현지 기업과 양해각서 3건을 체결했다. 딸기 수직농장(고층 건물을 농경지로 활용) 6곳을 짓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농촌진흥청장을 지낸 박현출 한국스마트팜산업협회장은 “스마트팜이 성공하려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하는데 농업인들 사이의 대규모 자본 투자에 부정적 인식이 많다. 모두 윈윈하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기대 컸던 글로벌 테마파크... 강원도의 효자냐 계륵이냐[김원배 논설위원이 간다] 김원배 논설위원 onebye@joongang.co.kr

    2023.02.01 00:58

  • [문병주 논설위원이 간다] 폐플라스틱서 짜낸 기름… 에너지·기후 두 마리 토끼 잡기

     ━  속도 내는 플라스틱 쓰레기 재활용    문병주 논설위원 역대급 한파가 엄습했다. 혹한에 따른 ‘역대급 전력 사용’과 가정에 전달된 ‘역대급 난방비’ 고지서는 국민의 냉가슴을 때렸다. 미국 CNN과 영국 BBC 등은 이번 한파가 기후변화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극단적 기후 변화가 뉴노멀(New Normalㆍ새로운 표준)이라고 입을 모은다. 더욱 자주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 때문에 국가 간 탄소 배출 저감을 위한 규제를 중심으로 기업들의 친환경 전략과 활동이 힘을 받고 있다.     ━  “폐플라스틱 80%가 기름으로”      지난 18일 공항철도 청라국제도시역 근처에 위치한 자원순환업체 에코크리에이션 뉴에코원 공장에 들어서자 겨울철 고구마를 굽는 드럼통 모양의 거대한 반응로가 눈에 들어왔다. 방화유리 구조물을 통해 보니 내부가 활활 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폐플라스틱과 폐비닐을 이용해 기름(열분해유)을 생산한다. 한 번에 최대 10t을 넣고 4시간 이상 섭씨 400도 넘게 가열하면 기체가 발생하는데, 촉매탑을 거치면서 액체로 응축돼 기름으로 변한다.     이 회사 신동호 대표는 “폐플라스틱과 폐비닐 10t을 가열하면 최대 8000ℓ의 열분해유를 얻을 수 있다”며 “약 80%까지 기름으로 재탄생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 반응로에 연결된 파이프 끝부분에서 투명한 액체들이 모이고 있었다. 신 대표는 “최초 가열할 때 액화석유가스(LPG)를 사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플라스틱이 분해되며 발생하는 가스를 연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대기오염 문제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신동호 에코크리에이션 뉴에코원 공장 대표가 폐플라스틱을 열분해하는 반응로 앞에서 열분해유 생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인천=문병주 기자   플라스틱은 생산 과정에서 유독 가스를 발생하고, 분해가 잘 안 되는 특성 때문에 환경오염 주범으로 지목된다. 2019년 기준 플라스틱 생산 및 폐기로 인해 연간 9억t의 온실가스(500㎿ 석탄화력발전소 189개에서 배출되는 양)가 배출됐고, 2050년에는 약 30억t의 온실가스가 생겨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육지에서 버려져 바다로 흘러간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바람과 조류의 영향을 받아 한곳에 모여 만든 한반도 7배 이상 크기의 쓰레기섬, 일명 ‘플라스틱 아일랜드’가 발견되기도 했다.    ━  재활용 기술로 환경오염 해결      이 주범을 견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생산량과 소비량을 줄이는 일이다. 하지만 생활용품과 포장재와 같은 플라스틱 활용도가 커지면서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유엔환경계획(UNEP) 등에 따르면 글로벌 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지난 1950년 200만t 수준에서 2020년 4억6000만t으로 늘어났다. 2050년에는 연간 10억t이 배출될 전망이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생산과 소비를 줄일 수 없다면 이를 다시 활용하면 된다. 미국 국립과학공학의학원(NASEM)에 따르면 한국의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량은 1인당 연간 88㎏으로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위다. 통계청은 2020년 기준 1인당 플라스틱 폐기물 배출량이 99.51㎏이라고 집계했다. 이 중 재활용률을 55.8%다. 여기에는 폐플라스틱을 단순 재사용하거나 이를 활용해 의류ㆍ신발과 같은 재활용 제품들을 만드는 물리적 재활용과 뉴에코원처럼 완전히 화학적으로 분해해 원료화하는 화학적 재활용이 있다. 사업성도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앤드마켓에 따르면 전 세계 플라스틱 재활용 산업 시장은 2021년 455억 달러(약 56조원)에서 2026년 650억 달러(약 80조원)까지 커질 전망이다.       ■  「 연간 9억t 넘는 온실가스 나와 바다에선 거대 ‘쓰레기섬’ 형성 재활용률은 50% 수준에 그쳐   3년 뒤엔 세계시장 80조원 규모 중소-대기업 상생모델로도 뽑혀 환경오염 줄이는 자원순환 주목  」  폐플라스틱에서 원사를 뽑아 섬유로 재활용하는 방법이 대표적 물리적 재활용이다. 2008년 효성이 플라스틱병에서 뽑은 원사로 만든 친환경 폴리에스터 리젠을 선보였는데, 이를 이용해 신발ㆍ의류는 물론 자동차 내장재를 만든다. 효성에 따르면 리젠 1t당 30년산 소나무 약 279그루를 심거나 일회용 플라스틱컵 약 3만5000개를 줄이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화학적 재활용 기술을 발전시켜야 플라스틱 오염과 이로 인한 기후변화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정부와 기업들은 판단한다. SK이노베이션이 한국기후변화연구원(KRIC)과 공동개발한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열분해 정제유를 석유정제제품 원료로 사용하는 방법론’에 따르면 폐플라스틱 1t을 열분해유로 사용할 경우 폐플라스틱을 소각하는 것보다 2t 이상의 이산화탄소가 줄어든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더불어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기름을 생산해낼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2020년 폐플라스틱에서 추출한 열분해유는 2020년 70만t에서 2030년엔 330만t 규모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환경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11개 국내 중소기업이 총 4100t의 열분해유를 생산한 것으로 집계됐다. 폐플라스틱 1만t 정도가 활용됐다.      ━  국내외 대기업들 사업 뛰어들어      중소기업 위주로 진행되던 열분해유 사업에 대기업들도 가세하면서 이 시장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중소기업들이 1차적으로 생산해 낸 플라스틱 열분해유에 대기업이 연구기술을 통해 활용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SK이노베이션 환경과학기술원의 경우 열분해유 후처리를 통한 고품질의 열분해 정제유를 생산하는 기술을 연구 중이다. 이종혁 SK지오센트릭 그린사업개발담당은 “현재 중소기업들이 생산하는 열분해유는 화력발전소 원료나 난방유, 농기계류에 활용되고 있다”며 “불순물 저감 등 후처리 기술을 고도화하면 석유 화학공정에 바로 투입 가능한 정도의 품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동호 에코크리에이션 뉴에코원 공장 대표가 폐플라스틱을 열분해해 생산되는 기름(열분해유)이 모이는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인천=문병주 기자   SK지오센트릭은 2025년까지 울산 21만5000㎡(약 6만5000평) 부지에 1조7000억원을 들여 3대 화학적 재활용 기술을 한데 모은 폐플라스틱 재활용 클러스터를 구축한다. 에코원과 같은 중소기업 협력 등 방법을 통해 1차 생산된 열분해유를 본격적으로 석유화학의 원료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해외 대기업들도 열분해유를 활용하는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독일의 바스프(BASF)는 지난 2019년 콴타퓨얼(Quantafuel)과 파트너쉽을 통해 최소 4년간 열분해유 및 정제된 탄화수소 선매권을 가지며 열분해유 활용을 본격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사빅(SABIC)과 일본의 에바라(Ebara-Ube), 캐나다의 에너켐(Enerkem)은 열분해유 정제를 거친 납사(나프타) 생산을 목표로 열분해시설을 가동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폐플라스틱의 열분해 비중을 2021년 0.1%에서 2030년까지 10%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애초 플라스틱 재활용사업은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동반성장위원회에서 ‘역할분담’으로 결론 났다. 각종 사업 영역에서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다툼이 치열한 가운데 보기 드물게 합의점을 찾은 사례다. 기술개발과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사업을 대기업이 주관하되 폐플라스틱 분류, 물리적 재활용 및 1차 열분해유를 생산하는 중소기업과 협력한다는 내용이다.     대기업 중에는 롯데케미칼ㆍ삼양패키징ㆍ제이에코사이클ㆍLG화학ㆍSK에코플랜트ㆍSK지오센트릭이 참여했다. 신동호 대표는 “대기업이 정제 기술을 더 발전시킨다면 플라스틱 선별이나 1차 열분해유를 생산하는 중소기업 역시 이익을 더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기름을 뽑아 쓸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 남는 찌꺼기를 플라스틱 제품 원료로 재활용하는 것까지 가능해지면 환경오염이 거의 없는 자원순환 모델이 될 것”이라며 “자금력이 필요한 기술이라 대기업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 #태평양 플라스틱 섬, 한국의 16배 크기# 「 미국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사이에 있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있다. 태평양의 조류와 바람의 영향을 받아 육상에서 버려진 바다 쓰레기가 한곳에 모였다. 199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하와이까지 가는 요트 대회에 참가한 찰스 무어가 횡단 중 발견했는데, 이후 ‘태평양 거대 쓰레기장(Great Pacific Garbage Patch, GPGP)’으로 불린다. 2018년 기준 넓이가 160만㎢로 남한의 16배에 이르렀으며 쓰레기양은 8만t에 달했다. 현재도 그 크기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미국 해양대기관리처(NOAA)에 따르면 이 섬의 90% 이상이 플라스틱 제품이다.     2017년 광고 제작자인 마이클 휴와 달 데반스 드 알레인다가 유엔에 이 태평양 쓰레기섬을 국가로 인정해달라고 신청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환경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갖자는 취지로 나라 이름을 ‘쓰레기섬(The Trash Isle)’, 화폐 단위는 쓰레기 잔해를 의미하는 데브리(debris)라 하고 여권과 국기도 디자인했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이 섬의 1호 국민이다. 현재 약 20만 명이 국민 신청을 하면서 쓰레기섬 국가 청원에 동참하고 있다. 지구의 대양에는 GPGP를 포함해 5개의 거대한 쓰레기섬이 존재한다.   」  쓰레기섬 지폐. [DAL&MIKE 홈페이지]   문병주 논설위원

    2023.01.31 01:04

  • 일본은 "엄마처럼 살고 싶다" 한국은 "엄마처럼 안 살겠다" [김성탁 논설위원이 간다]

     ━  한·일 비교 일본 사회학자의 진단    ━  "젊은 여성 '압축적 고학력화'…사회·직장 문화는 그대로"     김성탁 논설위원 최근 저출산 정책이 화제로 떠올랐다. 나경원 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신혼부부 전세·주택구입자금 저리대출에 더해 출산과 연계해 원금을 탕감하는 방안을 언급한 것이 계기였다. 헝가리의 대책을 거론한 이후 나 전 부위원장은 해임됐고, 그의 국민의힘 당대표 출마 논란으로 번졌다. 정작 한국 경제를 나락으로 빠뜨릴 요인으로 꼽히는 저출산 문제는 조명받지 못했다.    2021년 국내 합계출산율(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자녀 수)은 0.8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다. 일본은 2005년 1.26명에서 소폭 올라 1.3명대를 유지하고 있다. 출산율 꼴찌였던 일본보다 한국의 출산율 감소가 가파른 이유는 무엇일까. 사사노 미사에 일본 이바라키대 현대사회학과 교수는 일본 대학 졸업 후 서울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 15년 동안 살며 양국 상황을 비교했다. 지난해 서울대 일본연구소에서 ‘한국과 일본의 저출산 원인은 어떻게 다른가’를 주제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22일 본지와 화상인터뷰를 하고 있는 사사노 미사에 일본 이바라키대 교수    일본의 출산율이 서서히 하락한 반면 한국은 급락했다. 출생아 수에서 한국과 일본은 1980년에서 2000년 사이 25%정도 감소했다. 양국이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0년부터 2020년 사이 한국은 57.2%나 준 데 비해 일본의 감소폭은 29.5%로 상대적으로 적었다. 사사노 교수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에 비해 저출산 예산을 훨씬 많이 투입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  「 엄마 비해 딸 세대 대학 교육 급증…일본보다 더 급격한 변화 '자녀 어렸을 때 엄마가 돌봐야' 질문에 미·영보다 반대 많아 '자녀 꼭 필요 없어' '결혼하지 않는 게 좋다'  반응도 많아져 "남녀 육아 분담, 직장 내 젠더 평등 정착 없이는 회복 어려워" 」   사사노 교수는 젊은 여성의 ‘압축적 고학력화’와 관계가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에서 여성이 대학 이상 교육을 받은 비율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에서 큰 차이가 난다. 2020년 기준 국내 55~64세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은 비율은 18% 수준인데, 25~34세 여성은 77% 정도다. 한국 남성들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간 대학 교육 차이가 30% 포인트 정도인 반면 여성들은 60% 가까이나 된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딸 세대의 고학력화가 이뤄진 것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사사노 교수는 “한국 젊은 여성의 가치관 변화를 파악해야 출산율 급감 등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 내각부에서 5년마다 한국과 일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 7개국 13~29세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비교 조사한 자료를 분석했다.     ━  7개국 젊은이 가치관 조사했더니    이에 따르면 한국의 젊은 여성 세대는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다. 2018년 조사에서 ‘남자가 돈을 벌고 여자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국 젊은 여성은 90%를 웃도는 반대 의견을 밝혔다. 남녀 평등 지향적이라고 알려진 서구 국가보다도 단연 높다. ‘자녀가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자녀를 돌봐야 한다’는 항목에 대해서도 미국과 영국의 젊은 여성은 절반 정도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한국 젊은 여성은 조사 대상 국가 중 가장 높은 반대 의견을 보였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결혼에 대한 가치 비교에서도 한국 여성의 차별화가 확인됐다. ‘결혼해야 한다’는 응답은 한국 여성이 가장 적었는데, 더 특이한 점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응답을 한국 젊은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골랐다. 사사노 교수는 “자녀 가치 항목에선 더 큰 변화가 포착됐는데, 젊은 한국 여성 사이에서 자녀가 꼭 필요하지 않다는 집단이 늘어난 반면 일본 젊은 여성 사이에서는 자녀 선호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전했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하느냐는 질문에서 다른 나라의 경우 가족을 선택하는 비율이 높았지만 한국에선 가족보다는 일과 사회, 나 자신 등을 고른 비율이 이전 조사 대비 크게 상승했다.    ━   경제위기 때 남녀 모두 일자리 불안     사사노 교수는 그 원인으로 경제 위기 이후 노동 시장의 변화를 꼽았다. 한국은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불안정해진 데 반해 일본은 상대적으로 여성의 일자리가 더 불안해졌다. 일본 경제단체가 남성 정규직 근로자를 보호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 시장에서 남녀가 모두 불안해지다보니 젠더 간 경쟁이 심화했다는 분석이다.    여성의 고학력화에 따라 한국은 남녀 대학 진학률에서 차이가 없어졌지만, 일본은 여전히 아들의 대학 진학률이 딸에 비해 월등히 높다. 사사노 교수는 “한국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 할당제 등을 도입한 데에서 보듯 여성의 전문직 진출이나 여성 정책 수립 등이 활발하다”며 “한국 여성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혁명적 변화가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급격한 변화는 특정 여성 세대에서만 일어났을 뿐 나머지 기성 세대나 사회 및 직장 시스템은 뒤따라오지 못해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런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한국 젊은 여성들이 결혼이나 출산을 미룬다는 것이다. 저출산 관련 예산을 많이 투입하더라도 남녀 육아 분담이나 직장 내 젠더 평등적 문화 등이 서둘러 변하지 않으면 출산율 높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   "결혼·출산? 경력부터 쌓은 뒤 고려"    실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이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마친 김모(26)씨는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지만 괜찮은 사람을 만나면 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아니다”고 말문을 열었다. 출산에 대해서도 그는 “아이가 있는 여성은 ‘시간을 뺏기겠구나’라고 직장에서 생각하지 않느냐”며 “동등하게 양육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하는데, 빨리 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이를 키우려면 적당한 집을 마련해야 하고, 사교육비도 많이 드는 등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며 “취직도 못했는데 어떻게 애를 낳나 싶어 여성들의 결혼 연령이 높아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대학 재학 중인 김모(22)씨도 “결혼할 생각이 있더라도 경력부터 쌓은 뒤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며 “출산에서도 돌보는 문화나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남성보다 여성의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가정에서 엄마가 고생한 것을 본 딸들은 결혼과 출산에 적극적이지 않은 경우가 있다”며 “출산 후 문제 없이 복귀할 수 있는 직장 문화도 정착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사사노 교수는 “탈물질주의가 진행되면서 출산율이 낮아졌던 서구와 달리 한국은 물질주의가 계속되는 와중에 출산 기피가 일어나는 현상을 보인다”며 “SNS 등의 영향으로 자신을 위한 소비 경향이 나타나는 것도 출산율 저하의 배경”이라고 진단했다.   ■ "딸 전문직 권하고 며느리 남편 내조 기대, 한국 사회 여전히 보수적" 「 사사노 교수(사진)는 지난 22일 본지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일본 젊은 여성들은 ‘엄마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반면 한국 젊은 여성들은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제 위기 이후 한국에서 남녀 일자리가 모두 불안해진 것이 저출산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는데 일본과 무엇이 달랐나.   “일본에선 남성 정규직 보호하느라 비정규직 여성이 많아졌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아버지가 돈을 벌고 어머니는 살림하는 형태다. 지금도 맞벌이가 많지만, 여성 일자리는 파트타임이 많다. 가정 경제에서 모자란 부분을 보강하는 정도로 일하는 것을 딸 세대도 받아들이는 경향이다.”   -일본 젊은 여성들의 출산 의사가 최근 증가했다는데.   “자녀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출산을 통해 가정 내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젊은 여성이 대학을 많이 가고 커리어를 쌓는 건 긍정적인 것 아닌가.   “일본 여성계도 한국을 주목한다. 그런데 한국은 일부 여성에서만 변화가 빨랐고 기존 사회 제도나 다른 세대의 생각 등이 여전히 보수적이다. 엄마 세대가 딸에게 전문직으로 가라면서도 며느리에겐 시댁에 와 음식 장만하라고 하고 남편에 대한 내조를 기대한다.”   -집값 폭등 등 경제적 여건도 원인 아닌가.   “싱가포르는 주택을 국가가 주는 데도 출산율이 낮다. 유교 문화권인 홍콩, 대만도 출산율이 낮은 것을 보면 경제적 요인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이 단기간에 출산율 회복이 가능할까.   “어려우니 이민을 받아 함께 사는 사회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또 굳이 대기업을 가지 않고 아파트에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도 해봤으면 좋겠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 김성탁 논설위원

    2023.01.25 00:48

  • [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만 나이 의무화…여야가 모처럼 합의한 ‘여의도의 기적’

     ━  60년 버틴 ‘세는 나이’ 사라질까    강찬호 논설위원 “나는 분명히 60세요! 내 원서 안 받아주면 소송 걸겠소!” 2019년 벽두 평택시 송탄출장소에서 근무하던 공무원 A씨는 곤혹에 빠졌다. 그의 회고다. “당시 평택시는 노면 청소용 살수 차량 운행을 돕는 기간제 근로자 채용 공고를 냈다. ‘공고일 기준 60세 이상’이 대상이었다. 그런데 응모자 한 분이 1959년 8월생이었다. 공고일이 2019년 2월 14일이라 59세에 해당해 ‘자격 미달’이라 통보하니 그는 ‘다들 날 60세라고 한다. 직장도 정년(60세) 퇴직했다’며 열 번 넘게 항의 전화를 걸어왔다. 그때마다 시청 소속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 한 시간 넘게 통화하며 설득했지만 마이동풍이더라. 이를 보고받은 정장선 시장이 대책을 지시해 행정안전부에 만 나이 사용을 공식 건의했다. 경로당 등 현장에 가면 실감하는데, 시민들이 만 나이 계산을 어려워하신다.”   기초연금 지급 기준 시비 많아   정장선 평택시장의 말이다. “기초연금 지급 기준이 65세인데 63~64세인 분들이 신청하러 왔다 허탕 치고, 12월 출산이 기피되는 등 나이 혼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많이 목격했다. 또 평택의 미군 기지 관계자들을 만나면 ‘한국 나이로 몇 살’이라고 하더라. 나이에 이런 사족을 붙여야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그래서 지난해 2월 23일 중앙정부에 ‘만 나이 일원화’를 공식 건의하고 보도자료도 냈다.”     ■  「 북한도 안 쓰는 ‘세는 나이’ 혼용 버스비·감기약 용량 등 곳곳 혼란 재한 외국인 “나이? 00년생이 답” 민주 이장섭·정장선 ‘만 나이’앞장 」    지난해 1월 윤석열 대선 후보가 유튜브에 공개한 만 나이 통일 공약 홍보 쇼츠. [유튜브 캡처] 대한민국에서 법령상 나이는 민법에 따라 만 나이 계산이 원칙이다. 하지만 일상에선 출생일부터 한 살로 치고, 해마다 한 살씩 더 하는 ‘세는 나이’를 써 혼선이 끊이지 않았다. 또 북한조차 만 나이를 쓰는 마당에 한국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는 나이를 쓰니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에 공감한 윤석열 대통령은 만 나이 사용을 대선 공약으로 내놨고, 그가 집권함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12월 27일 민법과 행정 기본법을 개정해 “나이는 만 나이로 계산하고 연수로 표시한다”고 명시, 오는 6월 28일 시행에 들어간다.   만 나이 의무화는 야당이 더 적극적인 점도 눈에 띈다. 지방자치단체로는 처음 만 나이 일원화를 정부에 건의한 평택시 정장선 시장은 더불어민주당 3선 의원 출신이다. 또 이장섭 의원(초선·청주 서원) 등 민주당 의원 13명은 2021년 6월 ▶연령의 ‘만 나이’ 일원화 ▶정부와 지자체의 공문서 만 나이 표기 의무화와 대국민 홍보 실시 등을 규정한 ‘연령 계산 및 표시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장섭 의원은 “병역만 해도 만 나이, 연 나이, 세는 나이 등 기준이 3가지나 있더라. 이런 중구난방식 나이 혼용에 따른 행정 혼란을 없애고, 코로나로 고통받은 국민의 나이를 줄여주는 효과로 정서적 위로를 주는 법안을 구상했다”며 “지역구 유권자들도 ‘좋다’는 반응이 대세여서 법안을 대표 발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 법안이 채택된 것은 아니지만, 현 정부가 민법 등의 개정을 통해 만 나이 사용을 의무화했으니 잘 됐다”고 평가했다.   일상 여기저기에서 ‘나이 전쟁’   법제처가 공개한 만 나이 의무화 홍보 포스터. 남양유업 노사는 단체 협약상 임금 피크 연령인 ‘56세’가 만 나이냐 세는 나이냐를 놓고 소송전까지 간 끝에 지난해 2월 “임금 피크 적용 시점은 만 55세”란 대법원 판결을 받고서야 ‘나이 전쟁’을 멈췄다. 법제처 관계자는 “나이로 인한 혼선은 그 외에도 많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12세 미만은 20㎖로 섭취를 제한한 어린이 감기약의 경우 만 11세 아이를 12세로 여겨 용량을 초과해 먹이는 경우가 있다. 25세 이상 가족에게 혜택을 주는 자동차 보험도 마찬가지다. 세는 나이로 25세인 24세가 사고를 냈는데 보험사는 적용을 거부해 다툼이 발생했다. 또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상 6세 미만 동반 아동은 무료인 버스나 선박의 경우 만 5세인 자녀를 6세로 여기고 요금을 냈다가 뒤늦게 환불을 요구하는 부모들이 꽤 있다. 이 때문에 경기도 버스 조합 홈페이지엔 ‘6세 미만은 만 6세 미만을 말합니다. (연령 관련해) 기사님들과 실랑이하지 마시고 요금 낸 뒤 버스 회사에 환불을 요청하세요’란 안내문이 올라 있을 정도다.”   재한 외국인들도 불편이 상당했다. JTBC ‘비정상회담’ 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더만(독일인)은 “나이 얘기할 때마다 독일식 나이에 한살 더해야 해 헷갈렸다”며 “이젠 만 나이로 통일된다니 나 같은 외국인에겐 편해지겠다”고 했다. 한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도 “한국 언론을 인용해 기사 쓸 때 나이가 나오면 만 나이인지 세는 나이인지 알 수 없어 아예 나이를 빼버린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칠순 고령이라 사면 됐다’처럼 나이를 꼭 넣어야 하는 기사를 인용할 땐 인터넷 인물 정보에 들어가 생년월일을 보고 만 나이를 직접 계산해 쓴다. 그 뒤 한국 언론에 나온 박 전 대통령 나이를 보면 한 살 더 많이 표기돼있더라. 이 때문에 한국인에게 나이 물을 땐 ‘몇 살’ 대신 ‘몇 년생’ 인지 묻고, 한국인이 내게 나이를 물어도 ‘몇 년생’이라 답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게 편하다. 올해부터는 만 나이로 통일된다지만 난 한국인을 인터뷰할 때 계속 몇 년생이냐고 물을 것이다. 몇살이냐 물으면 고령자들은 세는 나이로 답할 것으로 보여서다.”   “젊어진다” 여성·청년, 만 나이 환영   법제처가 지난해 9월 국민 639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81.6%(5216명)가 만 나이 사용에 찬성했다. 특히 20대(67.8%)와 30대(65.7%)의 찬성률이 51.7%~55.9%에 그친 40~60대를 크게 앞섰다. 또 여성(67.4%)의 찬성률이 남성(53.9%)보다 높았다. 법제처 관계자는 “나이에 민감한 여성과 청년이 만 나이가 주는 체감 나이 하향과 서열 문화 타파 효과를 긍정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대한민국이 젊어집니다’란 구호로 만 나이 사용 홍보에 들어갔는데 맘카페 등의 댓글 반응이 폭발적”이라 했다.   포털 네이버도 20대에게 따로 뉴스를 제공하는 ‘마이 뉴스’ 서비스의 나이 기준(30세 미만)을 지난해 12월 29일부터 세는 나이에서 만 나이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29세임에도 세는 나이로 30세여서 뉴스가 제공되지 않았던 이들이 ‘마이 뉴스’를 볼 수 있게 됐다. 세는 나이와 만 나이를 섞어 써온 언론 사이트의 인물정보도 만 나이로 통일되고 있다.   1962년 도입 만 나이, 이젠 정착할까   일본도 원래는 세는 나이를 썼다. 그러나 1945년 2차 대전 패전 직후 식량난에 시달리면서 배급제가 실시되자 문제가 생겼다. 똑같은 ‘1살’이라도 1개월령 아기와 11개월령 아기에 같은 양의 식량을 주는 건 안 된다는 논란이 불붙은 것이다. 노인 식량 배급도 연말생이 연초생보다 1년 가까이 우선권을 갖게 되며 시비가 불거졌다. 결국 “만 나이만이 답”이란 인식 아래 ‘나이 세는 방법에 관한 특별법’이 1949년 공포돼 1950년 시행됐다.   한국도 1961년 만 나이의 공식사용을 선언했었다. 그해 12월 송요찬 내각 수반은 “세는 나이는 12월 31일생이 태어난 지 하루 만에 2살이 되어 버리는 모순이 존재한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후 1962년 정부는 만 나이를  민법상 공식 적용하고 사용해왔지만, 그 뒤로도 60년간 세는 나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달라질 수 있을까.   이완규 법제처장은 “이제는 만 나이가 정착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박정희 정부 때 이중과세를 추방한다며 구정 대신 신정만 지내게 했지만 실패했다. 국민이 차례를 음력으로 지내는 관행 때문에 그런 거다. 그러나 만 나이는 국민에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게 아닌 데다, 민주당도 초당적으로 합의하는 사안이니 정착될 것으로 확신한다. 다만 민주당이 내놓은 특별법 대신 민법과 행정기본법 개정을 택한 건 국민이 자주 접하는 기본법에 만 나이 의무화를 못 박는 게 효과가 더 클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강찬호 논설위원

    2023.01.18 00:32

  • '조용한 침공' 간첩 활개치는데 막을 '방패'는 곳곳 구멍[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장세정 논설위원 대한민국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것은 핵·미사일 등 북한의 전략무기뿐만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상공을 휘젓고 다닌 북한의 무인기는 눈에 보이는 비대칭 군사 위협이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국가안보를 야금야금 좀 먹는 세력도 있다.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가릴 것 없이 활개 치는 간첩들이다. 2021년 6월 당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새 원훈석 제막식을 마치고 개정된 국정원법을 새긴 동판을 증정하고 있다. 문 정부 때 '과거사 TF'가 국정원 메인서버를 열어 파문을 일으켰다.[청와대]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국가정보원은 1961년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 창설 당시 김종필 부장이 만든 원훈(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을 다시 쓰기로 결정했다.[중앙포토]  은밀한 간첩 활동은 몰라보게 진화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요즘 간첩은 더욱 은근하게 약점을 파고든다. 호주 찰스 스터트대학 클라이브 해밀턴 교수가 2021년 6월 한국에 번역 출간한 『중국의 조용한 침공(Silent Invasion)』이란 책 제목이 단적으로 표현한 대로다. 윤 정부 들어 다시 불거진 간첩 사건  존재를 포착하기 어려울 정도로 간첩의 '창'은 예리해졌지만, 이를 방어할 '방패'는 무디고 구멍이 많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댓글 수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사이버안보는 거의 범죄시 됐고, 간첩 잡는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는 사실상 중단됐다. 지난 5년간 간첩 수사는 '충북동지회 사건'이 거의 유일할 정도다.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정원의 간첩 수사가 다시 부분적으로 재개되면서 여기저기서 암약하던 간첩들의 꼬리가 속속 잡히고 있다. 제주 한길회, 창원 민중자주통일전위, 전주 전북민중행동의 이름이 나오더니 급기야 민주당 출신 무소속 윤미향 국회의원의 보좌관까지 등장했다. 공안 당국에 따르면 이들은 대부분 "정권의 간첩 조작"이라고 반박하거나 묵비권을 행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15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이 확정된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지지세력은 그를 양심수라며 석방을 촉구했다.[연합뉴스] 2021년 12월 24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복역 중이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을 보수 진영의 반대에도 가석방해 논란이 됐다.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하며 환호하는 이 전 의원.[뉴시스]  북한의 남파 간첩이나 자생적인 종북 주사파의 간첩 행위만 문제가 아니다. 최근엔 외국인 간첩의 '조용한 침공'과 '영향력 공작'이 국가안보와 국익을 흔들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예컨대 스페인에 본부를 둔 비영리 인권단체 '세이프가드 디펜더스'의 지난해 12월 폭로 내용이 충격적이다. 이 단체는 “중국이 ‘해외 110 복무 중심’이라는 이름의 비밀 경찰서를 한국과 일본 등 최소 53개국에 102곳 이상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 잠실의 중국 음식점 동방명주(東方明珠) 등에 대해 공안 당국이 빈 협약과 실정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고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 되면서 산업 스파이도 기승을 부린다. BTS와 ‘오징어 게임’ 등 한류 열풍으로 한국이 매력 국가로 주목받자 각국의 주한 대사관에도 한국 근무를 희망하는 인재가 몰려들고 있다. 이는 동시에 한국을 노리는 글로벌 스파이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의 첨단 기술과 각종 정보를 노릴 뿐 아니라, 한국의 여론을 자기 나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심지어 왜곡하려는 동기와 의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손쉽고 좋은 먹잇감이 된 한국의 국익을 지켜내기 위한 수단들, 즉 방패는 얼마나 튼튼할까.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방첩(防諜) 대책은 튼실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사각지대가 너무 많다. 시대 변화 못 따라가는 ‘형법 98조’  가장 큰 문제는 1953년 제정 이후 70년간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형법 98조'다. 98조1항은 '적국을 위하여 간첩 행위를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 같은 명시적 '적국'으로 제한하다 보니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일본 등 외국 또는 외국 단체를 위한 스파이 행위를 처벌하기 어렵다. 실제로 2015년 중국에 기밀을 유출한 해군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했다. 스페인 인권단체가 폭로한 중국 정부의 '해외 비밀 경찰서'란 의혹을 받고 있는 서울 송파구 잠실의 중식당 동방명주 왕하이쥔 대표가 지난 12월 29일 반박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공안 당국이 수사중이다.[뉴스1]  반면 권위주의 국가인 중국은 반간첩법에 '외국기구·조직'을 명시했고, 러시아 형법에도 '외국과 외국 단체 및 그 단체 대표자'로 규정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의 경우 연방법에 '적국'이 아니라 '외국정부나 다른 외국의 적'으로, 프랑스 형법엔 외국 정부·단체·요원 등으로, 독일 형법에는 '타국'으로 간첩죄 대상을 명시했다.   석재왕 건국대 안보재난관리학과 교수(국가정보포럼 대표)는 "중국은 물론 미국 등 우방들도 한국 기업의 반도체·인공지능(AI)·배터리 등 첨단기술을 노린다"며 "상황이 이런데도 방첩 법제화 수준이 낮아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국정원에서 26년간 활동한 석 교수는 "진보 정부가 북한을 화해의 대상으로 간주하면 '적국'이 아니므로 간첩들이 마음대로 휘젓고 다녀도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간첩과 협력한 내국인만 처벌받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다"며 "적국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국가나 외국인·외국단체에 의한 간첩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형법상 간첩죄 구성 요건을 '적국' 대신 '외국'으로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인이 국익에 어긋나게 외국을 돕는 정보 활동을 하더라도 현행법에는 처벌 근거가 미비한 것도 문제다. 홍종현 경상국립대 법학과 교수는 "우호적인 국가라도 한국에서 자국에 유리하도록 한국 여론을 왜곡하거나 심지어 선거에서 유리한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여론을 조작하는 '영향력 공작' 활동을 하더라도 현행법에는 처벌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며 "미국·호주·싱가포르처럼 한국도 '외국 대리인 등록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호주·영국 등의 적극적 대처  예컨대 미국의 경우 1938년 영국이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고, 독일이 미국의 중립을 유도하기 위해 선전 활동을 전개하자 대응 방안으로 '외국 대리인 등록법'(FARA)을 제정했다. 외국 정부와 단체를 위해 활동하는 대리인의 사전 신고와 활동 사항 보고를 의무화했다. 이 법은 1946년 연방의회 의안 통과나 부결에 영향을 주기 위해 의원들과 접촉하는 행위에 관한 '연방 로비활동 규제법'(FRLA)보다 먼저 생겼다. 중국 공자학원은 2004년 한국 서울에 처음 문을 열었다. 2007년 4월 ‘공자학원 총부’를 설립해 전 세계 공자학원을 관리하고 있다. 미국은 공자학원이 중국의 문화 침투 거점이라며 경계하고 있다.[중국 바이두 캡처]  호주는 2018년 호주 내정에 간섭할 경우 처벌이 가능한 '외국 영향 투명화법'을, 싱가포르는 2021년 '외국 개입 방지법'을 제정해 중국이 해외에 설치한 공자(孔子)학원 운영 지침까지 마련했다. '외국 대리인 등록법'을 제정하면 한국에 모종의 영향력을 끼치려는 공작 행위를 사전에 모니터링할 수 있고, 사후에 적발되면 처벌할 수 있다. 내정 간섭을 차단해 국가 주권을 지킬 수 있는 대책인 셈이다.  외국 스파이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은밀한 정보 활동을 하면서 기밀 자료를 유출해도 차단할 방법이 지금은 마땅하지 않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합법적인 휴대전화 감청이 가능하지만, 전기통신사업자들의 휴대전화 감청 설비 구비를 의무화한 법 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없다. 미국은 1994년 만든 통신감청지원법에 따라 정부 또는 통신사가 감청 설비 비용을 부담하고 영국·독일·호주도 유사하다. 한국 정부가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전쟁 상황이 아니라도 국익을 잠식하는 간첩 범죄는 철저히 막아야 한다. 첨단 ICT 시대에 간첩 활동은 국내외 구분이 없고,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국익을 지켜낼 튼튼한 방첩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는 간첩 안 잡겠다는 뜻...재검토해야"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장석광 전 국가정보대학원 교수 대공수사는 국가의 존립이나 자유민주체제를 다루는 중대한 사안이다. 대공수사권을 밥그릇 싸움이나 조직 이기주의로 봐선 안 된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20년 11월 민주당은 거대 의석을 무기로 국가정보원법 개정안을 단독 강행 처리해 2024년 1월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넘겼다. 박지원 당시 국정원장 주도로 쐐기 박듯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경찰의 대공수사 역량 강화 조치는 없었다. 오히려 인력을 줄였고 활동비를 삭감했다. 비전문가들이 지휘부를 장악했고 진짜 전문가들은 대공 분야를 떠났다. 경찰에 대공수사를 전담시킨 것은 문 정부가 대공수사를 아예 못하게 하려는 의도란 해석이 나올 정도였다.  우리 국민이 잘 알듯이 북한 간첩 수사는 국정원이 가장 잘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5년간의 바보짓’이라 했는데,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 폐지야말로 ‘국가안보의 탈원전’ 같은 중대 실책이다.      국가안보 관련 업무는 단일기관에서 단독으로 수행하는 것보다 독립된 여러 기관이 촘촘하게 중첩해 수행하는 것이 좋다. 반복‧중첩 장치가 없으면 오류 발생 우려가 크다. 그동안 국정원‧검찰‧경찰이 중첩적으로 해오던 대공수사를 내년부터 경찰이 혼자 맡는다.  경찰은 2021년 충북동지회 사건 수사를 국정원과 함께했다. 제주 간첩단 사건과 윤미향 의원의 전 보좌관 간첩 사건도 국정원과 함께하고 있다. 합동수사라고는 해도 누가 주도하고 누가 따라가는지 하늘도 알고 땅도 안다. 경찰은 내년부터 과연 단독으로 대공수사를 할 자신이 있나.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는 재검토해야 마땅하다. 관련기사 [단독]"세월호 원인, 6대 2였는데…정치 입김에 3대3 됐다"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30년 좌파' 전향 선언 "조국 발언에 경악, 그건 파시스트 언어"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김정일 유서' 입수한 탈북 박사…왜 文정부서 간첩몰이 당했나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30년전처럼 중국은 지금 한국이 절실하다" 김하중이 찌른 정곡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전시 자료조차 北-南순이었다...文정권이 왜곡한 '충격의 역사박물관'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2023.01.17 00:48

  • 대리운전 지옥 만든 만취청년 '아침 콜'…쥔 돈은 1만6천원 뿐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코로나19 여파로 위기 몰린 대리운전 업계〉 직접 대리운전 해보니 위기 실감 강주안 논설위원   지난 3일 오후 10시 15분쯤, 서울 마포에서 구로구까지 가는 대리운전 콜이 앱에 떴다. 요금 1만 5000원. 휴대폰을 재빠르게 터치해 콜을 잡는 데 성공했다. 고객 위치 등 상세 정보가 뜬다. 배운 대로 손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대리기사입니다. 구로 가시죠?” “예 맞아요.”   대리운전을 배우고 첫 손님을 모시게 됐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중소 대리운전 업체들이 카카오모빌리티에 이은 티맵모빌리티의 대리운전 사업 진출로 긴장하는 상황. 대리기사들 역시 불황까지 겹쳐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이들의 얘기를 실감하기 위해 한 업체에 요청해 기사로 등록하고 직접 대리운전에 나섰다. 대리기사용 앱을 깔고 보험에 가입한 뒤 길로 나갔다. 몇번이나 손님을 놓친 끝에 겨우 콜을 하나 잡은 것이다. 호출 장소인 뒷골목 술집 앞에 가니 한 남성이 손을 흔든다. “구로 가는 손님이신가요?” “예.” 운전을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던 고객이 “기사님 계좌번호 불러주세요”라고 한다. 잠시 당황했다. 대리비를 인터넷 뱅킹으로 송금한단다. 계좌번호를 알려줬다.   “강주안 기사님?” “예 맞습니다.” “만 오천원 송금했습니다.” 대리기사의 개인정보는 노출된다. 대리기사 앱에 고객 전화번호는 가상으로 뜬다. 그러나 기사는 실명과 번호가 노출되는 것은 물론 계좌번호도 알려줘야 한다.    첫 운행을 무사히 마치고 시내로 나오는 콜을 기다리는데 올라오지 않는다. 버스정류장에 막차라는 글씨가 뜬다. 결국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환승해 돌아왔다. 두 시간 정도 휴대전화를 쳐다보고 운전해 손에 쥔 돈이 1만 5000원. 수수료 20%(3000원)를 대리운전 회사에서 가져갔다. 거기에 보험료로 1224원이 나갔다. 대중교통비까지 제하면 1만원도 못 벌었다. 오전 2시 넘도록 손님을 기다렸지만, 경기도 먼 지역 외엔 콜을 잡을 수가 없다. 포기하고 잤다. 지난 5일 오전 1시 30분쯤 대리기사들을 서울 서초구 등지로 태워주는 무료 셔틀이 합정역 부근에서 대기 중이다.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 이창수 이사장 등이 운행한다. 강주안 기자 아침에 일어나 다시 앱을 켰다. 오전 8시 30분쯤 콜이 떴다. 서울 홍익대 부근에서 은평구로 가는 손님이다. 2만 5000원. 재빨리 터치하고 전화를 걸었다. 술에 많이 취한 목소리다. "만취했다면 콜 잡은 걸 취소해도 된다"는 대리기사의 조언이 떠올랐지만, 날도 밝은데 별일 있으랴 싶어 고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홍대 앞 유흥가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가 보인다. 20대로 보이는 청년이 손을 흔든다.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차엔 담배 연기가 가득하다. 더 황당한 건 뒷자리에 한 청년이 누워 코를 골며 잔다. 운행을 취소하고 싶지만, 절차가 부담되고 500m를 달려온 고생이 아깝다. 목적지를 내비에 입력하고 출발했는데 “도중에 ○○앞에 한 번 내려주세요”라고 한다. 당황스럽다. 경유지에 차를 세우는데 대리를 부른 청년이 안전벨트를 푼다.     “선생님이 내리시나요?” “예.” “그러면 저분은 어떻게 해요.” “대리 부를 때 찍은 주소로 가면 깰 거예요.” “저렇게 정신이 없는데 깬다고요? 그리고 대리비는 누가 내시나요.” “깰 거예요. 대리비는 저 친구가 줄 겁니다.” 그러곤 차에서 내린다. 차를 큰 길가에 세워두고 따라갈 수도 없다. 인사불성인 젊은이를 태우고 앱에 찍힌 주소를 향해 운전했다. 아파트 앞에 도착했으나 목적지엔 동 호수도 안 적혀 있다. 차를 세우고 흔들어 깨웠다.   “고객님,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좀 더 세게 흔들면서 목소리를 높여 “몇동 몇호에 사시나요”라고 물었다. “아파트, 아파트”라고만 말하며 눈도 안 뜬다. 대리운전 회사에서 해준 조언은 “만취해서 집을 못 찾고 대리비를 안 주면 파출소를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경찰 얘기를 꺼내면 대개 해결된다는 조언이다. 실천해봤다. “고객님, 이러시면 파출소 갈까요? 경찰서 갈까요?” 그래도 계속 잔다. 경찰의 위력을 이용해 깨우려는 작전은 실패했다. 계속 시간을 보낼 수 없어 차를 몰고 아파트 출입구에 들어섰다. 차단봉이 올라간다. 아파트 주민이라는 얘기다.   차를 세워두고 관리사무소로 갔다. 차량번호를 알려주면서 사정을 얘기했다. 직원이 주민 명단을 뒤지더니 전화를 한다. “○○○○ 차주시죠? 대리기사분이 가족을 태워왔는데 안 일어난다고 합니다. 대리비 2만 5000원도 준비해 주세요.” 너무 고마웠다. 차로 돌아가 “곧 부모님이 나오신다”고 말하자 바로 정신을 차린다. 키가 훤칠하고 연예인처럼 잘 생겼다. 이런 청년이 방황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한 중년 남성이 차로 다가왔다. 화난 얼굴로 묻는다. “얼마라고요?” “2만 5000원입니다.” 1만 원짜리 두 장과 1000원짜리 다섯 장을 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파트를 나섰다. 콜이 없어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왔다. 2시간 넘게 일하고 번 돈은 2만원이 안 된다. 5000원을 수수료로 제한다. 보험료에 버스비를 빼니 1만 6000원 남짓이다. 대리기사는 손님을 잘못 만나면 극한직업이 된다.   ◇막막한 중소 대리운전 업계=대리운전 회사는 카카오와 티맵이 잇따라 대리운전에 진출하면서 타격이 심하다고 말한다. 한국대리운전총연합회 장유진 협회장은 "영세 업체들이 서로 도와가며 개발한 서비스를 대기업이 빼앗는다"고 주장한다. 카카오나 티맵 측은 대리운전은 아직도 유선 콜이 훨씬 많아 대기업 피해가 작다고 주장한다. 현장 얘기는 다르다. 한 콜센터 직원은 "카카오 대리운전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지난번 카카오 장애 때 콜이 엄청 늘더라"고 말했다.   거기에 유선 업체들이 쓰는 앱 회사를 두 회사가 인수했다. 카카오가 2위인 콜마너를 확보한 이후 티맵이 1위 로지를 인수하면서 중소업체 사이에 우려가 커진다. 중재에 나선 동반성장위원회는 지난해 5월 대리운전업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했다. 대기업의 신규 진입과 확장을 자제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소업체들은 "대기업이 계속 현금 프로모션을 남발한다"고 항의한다. 카카오측은 "우리는 권고를 준수하며 중소업체들은 티맵을 문제 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티맵측은 "프로모션은 권고안에 허용된 범위 안에서만 했다"고 해명했다.  ━  중소 업체들 "대기업이 다 뺏어"      ━  카카오ㆍ티맵 진출에 위기감 고조   소상공인연합회 차남수 정책홍보본부장은 "신규 하이테크 기업과 기존 아날로그 업체가 공존과 공생이라는 키워드로 상생 발전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카카오모빌리티 관계자는 "소규모 대리운전사업자의 수익구조 개선이나 보험문제 해결, 사업자들에 대한 프로그램 제공 등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티맵모빌리티 측은 "중소업체들이 요청한 공용콜센터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리기사에 온정, 그러나…=지난 5일 오전 2시쯤 서울 서초구에 있는 대리기사 쉼터를 들어가니 10여명이 안마의자에 눕거나 휴대전화를 보며 쉰다. 마스크도 나눠 준다. 쉼터와 무료 이동 서비스가 는다.  지난 5일 오전 2시쯤 이창수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 이사장이 합정역에서 출발한 대리기사용 무료 셔틀을 운전하고 서울 서초구 대리기사 쉼터 앞에 도착했다. 쉼터 안에는 10여명의 대리 기사가 안마의자 등에서 쉬고 있다. 강주안 기자 그러나 대리기사들에게 절실한 건 수입이다. 이날 무료 셔틀에서 만난 12년 경력의 대리기사는 코로나19 여파에 계절적 요인까지 겹쳐 힘들다고 했다. 매년 1~3월이 보릿고개라고 한다. "올해는 술을 줄이겠다"는 새해 결심이 잠시 실천되면서 손님이 주는 데다, 새 학기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비용이 들면서 모임이 적어진다는 것이다.  ━  "앱ㆍ보험료 중복" 대리기사 불만   실제로 일해보니 기사의 고충이 실감 난다. 대리기사는 넘쳐나고 콜을 잡긴 어렵다. 20% 수수료가 나가고 보험료를 뗀다. 지난 1일엔 앱 사용료 1만 5000원이 빠져나갔다. 전업 대리기사는 각종 명목으로 훨씬 많은 지출을 한다. 같은 회사의 앱도 여러 개로 나뉘어 있어 각각 수수료를 받는다. 콜을 하나라도 더 잡으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앱을 여러 개 깔아야 한다. 그는 "한 회사가 앱을 여러 개 깔게 해놓곤 각각 돈을 받는다"며 "보험 역시 여기저기 중복으로 내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라고 말한다. 그는 "정부가 제발 보험만이라도 통합해서 하나만 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반성장위 관계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문제를 다루는 게 우리 업무지만 대리기사를 위한 정책도 고민한다"며 "여러 개 앱에 수수료를 내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강주안 논설위원

    2023.01.10 00:57

  • MB "사면 고맙다" 말 안했지만 윤 대통령 위해 기도했다 [서승욱 논설위원이 간다]

    서승욱 논설위원 수사지휘하고 사면한 윤 대통령,MB와의 기막힌 인연   이명박(MB) 정부와 청와대를 옮겨 놓은 듯했다. 사면·복권된 MB가 서울대병원을 퇴원한 지난달 30일 오후 1시 56분 논현동 자택 앞 풍경이다. 300여명의 인파로 폭 5m 좁은 비탈길이 가득 찼다. 친 MB계 좌장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의 모자 쓴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와 윤증현(기획재정부)·김성환(외교통상부)·맹형규(행정안전부) 전 장관, 류우익·임태희·하금렬 전 비서실장과 김두우ㆍ홍상표ㆍ최금락 전 청와대 홍보수석, 현역 의원 중엔 권성동·조해진·윤한홍·박정하 의원 등 MB계 핵심들이 모였다. 과거 MB 청와대를 실질적으로 움직였던 실세 비서관·행정관도 수두룩했다.   지난달 30일 신년 특별사면으로 논현동 자택에 돌아온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MB "일부러 어깨에 힘 줬다"   "내가 어깨 꾸부정하게 다 죽은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떻겠나. 여러분들 내 앞에선 '혈색이 좋다'고 말하겠지만 속으론 '다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그래서 일부러 더 어깨에 힘을 팍 주고 꼿꼿하게 서려 했다." 이날 자택에서 만난 옛 동지들에게 MB가 했다는 말이다. 그는 2018년 구속된 뒤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구치소 생활도 떠올렸다. "18종류의 약을 처방받았는데 다 소용없더라. 그래서 나중엔 먹는 척하고 다 버렸다. 밤에 사람들 얼굴이 많이 떠올랐다. 내가 교회 장로 아니냐.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기도할 때 용서까지는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까지는 안되더라”라고 말해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현장에 있었던 인사는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없는 말을 지어냈거나, 자신의 잘못을 MB에게 덮어씌운 이들을 향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MB는 이날 자신을 사면한 윤석열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윤 대통령은 "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길 바란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역할을 해주시라"고 했다. MB는 "정부가 성공하도록 열심히 기도하겠다"고 답했다. 윤 대통령과 MB는 수사를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장과 피의자의 관계였다. 수사 중간발표는 윤 대통령의 오른팔인 한동훈 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현 법무부 장관)이 했다. MB 입장에선 자신을 잡아넣은 검사가 대통령이 됐고, 그 대통령에 의해 사면·복권되는 기막힌 운명을 겪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의"밝힌 박근혜와는 달랐다   MB가 구속(2018년 3월)되기 전인 2017년 말이었다. 주일 특파원 부임을 앞뒀던 필자는 출국 인사를 위해 삼성동 사무실로 그를 찾아갔다. 그때 이런 대화가 오갔다.  ▶필자="대통령님, 윤석열 중앙지검쪽에선 구속까지는 안 갈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MB= "하하, 그걸 누가 알겠어? 윤석열 마음속에라도 들어갔다 왔다는 얘기야?"   MB는 당시 필자의 전언에 아주 냉소적이었다. 어떤 우여곡절을 거칠지 모르지만, 검찰이 결국은 자신을 구속하리라는 느낌이었을까.    둘 사이엔 앙금이 아주 없을 수 없다. 앞서 사면을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교하면 MB의 반응은 분명 차이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 말인 2021년 12월 전격적으로 특별사면·복권됐다. 사면이 발표된 날 박 전 대통령은 대변인격인 유영하 변호사를 통해 “많은 심려를 끼쳐드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며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사면을 결정해 주신 문 대통령과 정부 당국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고 했다. 반면 MB는 국민에 대한 송구함은 밝혔지만 사면에 대한 입장·소회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엔 "지금 더 할 말은 없고, 앞으로 더 할 기회가 있겠죠"라고 말을 아꼈다. 대국민 메시지에서도, 윤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사면해 줘 고맙다'는 취지의 확실한 언급은 없었다. 복잡미묘한 감정선이 읽힌다.   윤 대통령과 정책·인적 네트워크 겹쳐   앞서 문재인 정부 말에도, 윤석열 정부로의 권력 교체기에도 MB 사면설이 돌았지만 무산됐다. 그래서 MB 측에선 지난해 8·15 특사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다. 그러나 경제인 위주의 특사 명단에 MB의 이름은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 윤 대통령 측 핵심 인사가 "사면하면 국정 지지율이 더 떨어진다"고 반대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래서 일부 MB 참모들은 사면에 반대했다는 윤 대통령 주변 인사들에 격분했다. 하지만 MB와 김윤옥 여사의 반응은 달랐다고 한다. "나라가 잘되는 게 중요하다. 정권이 또 반대쪽으로 넘어가면 되겠는가. 윤 대통령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자"며 말해 참모들이 놀랐다는 것이다. 밤 9시로 시간을 정해 MB 부부와 참모들이 동시에 윤 대통령과 나라의 성공을 기원하는 '중보기도(仲保祈禱)'를 하기도 했다. 중보기도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하는 기도다.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된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논현동 자택에 도착해 대국민 메시지 발표하던 도중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연합뉴스]   서로 반목하기엔 윤 대통령과 MB 사이엔 공통분모가 많다. 특히 현 정부가 MB 정권 시즌2로 불릴 정도로 인적 네트워크가 겹친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요직은 MB 사람들이 꿰차고 있다. 김대기 비서실장은 MB 정부에서 통계청장으로 발탁된 뒤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청와대 경제수석-정책실장으로 승승장구했다. '왕수석' 이관섭 국정기획수석은 MB 청와대 비서실장실 선임행정관 이후 산자부 핵심 보직을 거쳤다. 김은혜 홍보수석은 MB 청와대 대변인, 강승규 시민사회수석은 2007년 MB 대선 캠프 출신이다.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은 MB의 외교 과외선생이었고, 한오섭 국정상황실장은 MB 청와대 정무비서관실의 중추였다. 국민의힘 내 '윤핵관'들도 마찬가지다. 권성동 의원은 MB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했고, 서울시 공무원 출신의 윤한홍 의원은 MB가 청와대 인사비서관실에 발탁됐다. 장제원 의원도 원래 친MB계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2007년 '이명박 대통령당선인 대변인' 출신이고, 박정하 수석대변인은 MB 청와대 춘추관장·대변인을 지냈다.   자원외교·에너지 분야서 역할 가능성   정책 방향도 유사한 만큼 MB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관측이 있다. 복잡미묘했던 과거 역정과 악연을 뛰어넘어 윤 대통령을 도울 공간이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미 김대기 비서실장은 지난달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했을 때 윤 대통령 친서와 함께 MB의 서신을 함께 전달했다. 수감 중인 전직 대통령의 서신을 외교에 활용하는 건 이례적이다. 기업인 시절부터 대통령 재임 시까지 UAE 등 중동에 깊은 인맥을 키워온 MB였으니 가능한 일이다. MB는 2015년 출간한 저서 『대통령의 시간 2008-2013』에 "우리나라와 사회로부터 배운 것, 얻은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썼다. 향후 행보에 대해 MB의 핵심 측근은 "정치적 행보는 하지 않겠지만, 자원외교나 원전 등 에너지 분야에서 역할이 필요하다면 마다치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측근은 "모든 짐을 다 털어 냈으니,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시라고 했다"고 전했다.   ■ MB의 옆을 지킨 사람들 「 서울대병원에 머물러온 이명박 전 대통령(MB)의 옆을 지킨 이는 부인 김윤옥 여사다. 사면·복권되기 4개월쯤 전부터 병실에서 MB와 함께 생활했다. 밤에도 서울 논현동 자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호자용 소형 침대에서 지냈다. MB의 측근은 "항상 성경책을 옆에 두고 두 분이 기도하셨다"고 했다. TV도 함께 보곤 했는데 MB는 "채널 선택권이 보호자에게 있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김 여사가 계속 병원에 머물렀기 때문에 친구들이나 소망교회 동료 신자들이 병원 휴게실에서 함께 기도하는 일이 잦았다. 김 여사 외엔 장다사로 전 MB 청와대 총무기획관과 이진영·김윤경 전 행정관이 있다. 이들 세 명은 MB 퇴임 뒤 '전직 대통령비서관'이란 별정직 공무원 신분이었다. 징역형으로 MB에 대한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된 뒤 면직됐지만, 끝까지 MB 곁을 지켰다. 장 전 기획관은 윤 대통령 취임식에 김 여사, MB의 장남 시형 씨와 함께 초청받았다. 청와대 부속실에서 일했던 이·김 전 행정관은 MB가 재임 시절 “어느 참모도 대신할 수 없는 두 여성 능력자”라고 치켜세우며 신임했다. 」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2023.01.04 00:42

  •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큰 정부’는 ‘냄비 여론’과 불평불만을 먹고 자란다

     ━  『규제 vs 시장』 신간 낸 최병선 전 규제개혁위원장   서경호 논설위원 연말연시를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코우즈와 규제에 대한 묵직한 책을 뒤적이며 보냈다. 최병선(70)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의 신간 『규제 vs 시장』이다. ‘시장을 알아야 규제가 보인다’는 부제가 붙은 책은 500쪽이 넘는다. 시종일관 “시장에 대한 악의적 프레임”에 날선 비판을 날린다.   최 교수는 행시 18회로 전라북도 도청과 상공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유학을 떠나 미국 하버드대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규제학회 창립을 주도해 초대 회장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2009년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을 맡았다.   책의 시작이 특이하다. 레너드 리드의 ‘나, 연필’이라는 짧은 글을 번역해 소개했다. 주인공 연필의 시점에서 연필 생산에 지구촌 수십만 명의 지식과 노하우가 ‘자발적으로’ 어떻게 연결되고 이용되는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이 글 1976년판 후기에서 “나는 이제껏 이렇게 간명하고 설득력 있게, 효과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말하는 ‘분산된 지식과 정보의 전달수단’인 가격 시스템의 역할과 의미를 잘 묘사해준 문헌은 본 바가 없다”고 극찬했다.     ■  「 평소엔 공무원 비효율 비판하다가 사고만 나면 ‘정부는 뭐하냐’ 질타   규제, 국민이 부담할 ‘숨겨진 세금’ 한국 규제비용 GDP 15%는 될 것   정부 ‘정치적으로 편해’ 규제 선호 규제 획일성과 경직성이 실패 불러 」    자애롭고 유능한 정부는 없다   최병선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전 규제개혁위원장)가 2일 서울 강남구 자곡동 자택에서 포즈를 취했다. 2018년 정년퇴임하고 4년간 『규제 vs 시장』을 썼다. 최 교수는 “필생의 저작”이라고 자평했다. 김현동 기자 최 교수는 시장은 불완전하지만 그렇다고 시장 실패가 정부 개입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자애롭고 유능한 정부’라는 가정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정부는 만능 해결사가 아니다. “평소엔 정부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무사안일, 비효율을 탓하다가, 사건·사고만 나면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질타하는 이중적 사고는 이제 멈춰야만 한다”고 했다. ‘큰 정부’는 이런 불평불만·한탄·탄식을 먹고 자라며, 냄비처럼 들끓는 언론 보도와 여론은 ‘큰 정부’의 산모요, 보모(保母)라고 꼬집었다.   규제는 ‘숨겨진 세금’이다. 규제를 이행하는 데는 비용이 들고 결국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 정부는 돈이나 말로 일한다. 돈은 세금이다. 말은 권위가 실려 있고 법적 강제력이 담보된 규제를 가리킨다. 정부는 세금보다 규제를 선호한다. “정치적으로 쉽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규제비용이 잘 드러나지 않아 반발이 적고, 국민도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효과가 있다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국회의 복잡한 예산과정을 거치기보다 민간 위에 군림하면서 목에 힘(?)도 줄 수 있는 규제가 관료들에게 더 매력적”이라는 이유도 있다. 규제는 세금보다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 면에서 매우 열등하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그래서 선진국은 세금이 많고 규제가 적은 편이며 후진국은 그 반대라고 했다. 최 교수 얘기를 좀 더 들어봤다.   규제로 인한 국민경제 비용이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10%라고 했다. 2020년 미국 GDP가 20조 달러니, 미국 국민이 해마다 2조 달러(2400조원)의 규제 비용을 부담한다. 한국은 어느 정도인가. “그런 수치가 한국에선 계산된 적 없다. 다만, 우리나라는 규제가 많고 규제의 불합리성이 미국보다 높다는 점에서 GDP의 15%선은 되지 않겠나. 그냥 추정이다. 2020년 GDP로 계산하면 규제비용이 연간 300조원이다. 2020년 국민 1인당 조세 부담액이 1019만원인데, 규제비용으로 국민 1인당 588만원을 부담하는 셈이다.”   규제영향 분석을 강조했는데. “우리나라도 1998년 도입했지만 여전히 형식에 그치고 있다. 난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금전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사항이 많아서다. 하지만 규제 합리화와 품질 제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경제학자 90%는 개입주의자   최 교수의 『규제 vs 시장』. 표지사진 위는 코우즈, 아래는 하이에크. 후생경제학에서도 시장원리에 맞는 정부 개입을 얘기한다. 너무 비판적인 것 아닌가. “세상을 보는 눈은 배워서 생기지 않는다. 경제학자의 90%는 정부 개입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시장을 알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김영삼 정부 시절, 교통부(현 국토교통부) 항공정책심의위원회에서 새 방식으로 항공노선 배분을 했던 경험을 책에 썼던데 흥미롭다. “시장 유인을 활용하는 배분 방식을 제안해 채택됐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에 각각 1000개와 600개의 칩(chip)을 주고 각사가 선호하는 노선에 우선적으로 칩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노선 배분 문제가 단칼에 해결됐다. 양사가 진실로 원하는 속마음, 즉 선호가 자명하게 드러났다. 안타깝게도 정권이 바뀌자마자 노선 배분 방식이 예전으로 돌아갔다.”   왜 그랬을까. “글쎄. 관료 입장에선 항공사들이 굽실대고 아양 떠는 예전 관행이 좋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이명박 정부에서 규제개혁위원장을 했다.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나. “행정학자이고 공무원 생활도 5~6년 해서 공직사회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안 돌아갔다. 필요한 인력과 예산을 더 달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안 통했다. 그래도 악성 규제가 생기는 걸 많이 막았다. 그런데 그런 건 신문에 안 나고, 정부가 규제를 만들 때만 뉴스가 됐다. 2년 더 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동반성장 얘기 나오면서 더 이상 규제개혁은 어렵겠다고 판단해 그만 뒀다.”   “정부 의도 선해 보일 때 가장 경계해야”   규제 유형을 재분류해서 정리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기존 분류는 중소기업 등 경제 약자와 소비자를 보호하는 경제규제와 환경·노동 등의 사회규제가 있다. 경제규제는 대체로 시장원리에 반하지만 정치적 지지가 강하고, 사회규제는 국민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계속 강화되는 추세다. 경제규제는 폐지나 완화가 답이고, 사회규제는 합리화 대상이라는 게 교과서적 처방이지만 잘 작동하진 않는다.   저자는 투입요소기준 규제와 성과기준 규제, 경제유인 규제와 시장기반 규제 등으로 규제 유형을 재분류했다. 투입요소기준 규제는 기술기준이나 설계기준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가장 널리 사용된다. 다른 규제방식에 비해 규제기관의 집행비용은 낮지만 피규제자의 순응 비용은 불필요하게 높다. 규제기준의 획일성 탓에 규제 회피 행위가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반면, ‘우수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GMP)’ 같은 성과기준 규제, 쓰레기 종량제 같은 경제유인 규제, 배출권 거래제 같은 시장기반 규제방식이 시장 친화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규제 실패의 이유로는 과도한 규제 목표와 집행자원의 제약, 규제의 획일성과 경직성을 꼽았다.   저자는 미국 대법관 브랜다이스의 “정부의 의도와 목적이 선해 보일 때가 바로 우리가 가장 경계심을 갖고 자유를 수호해야 할 때”라는 인용문으로 책을 맺었다. 책을 관통하는 시장주의가 불편할 수도 있겠다. 특히 “시장경쟁을 통해 나타난 결과의 공평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대단히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하이에크의 주장엔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을 알아야 규제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원칙에는 동의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시장에 개입할 때는 나무를 잘 알고 다듬는 법에 정통한 정원사처럼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정부도 그래야 한다.     ■ 가격은 신성하다…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은 존중돼야 「 최병선 교수는 『규제 vs 시장』에서 자유주의 사상가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1899~1992)와 법경제학의 선구자 로널드 코우즈(1910~2013)를 비중 있게 소개한다. 둘 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정부와 규제의 속성을 꿰뚫고 있는 이들의 눈으로 시장을 다시 봐야 한다는 취지다.   하이에크는 시장 덕분에 인간은 ‘널리 분산된 지식의 활용’을 할 수 있었고 위대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고 본다. 시장은 설계자가 따로 없는 자생적 질서다. “수많은 사람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다. 시장의 모든 것은 가격에 축약된다. 고도의 정보가 담긴 가격은 신호(signal)이자 유인(incentive)이다. 가격은 원가도 아니고, 노력에 대한 보상(rewards)도 아니다. 최 교수는 “가격은 복잡한 세상에서 오로지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이 꽤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 상황을 단순화해 주는 수단”이라고 썼다. 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절해선 안 되고,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은 존중돼야 한다. 그래서 ‘가격은 신성하다’고 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시장 경쟁은 ‘발견 절차’다. 경쟁해야 누가 최선인지 가려낼 수 있다. 경쟁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고 새 지식이 된다.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완전경쟁시장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완전경쟁이 아니어도 시장은 작동한다. 사람이 합리적이어야 경쟁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경쟁이 시장 참여자를 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코우즈는 거래비용 패러다임의 창시자이자 재산권 이론으로 유명하다. 한 번도 정식 경제학 교육을 받지 않았고 덕분에 주류경제학과 전혀 다른 새 영역을 개척했다. 논문 ‘기업의 본질’에서 거래비용 때문에 기업 안에서는 가격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논파했다. 기업 조직을 만들면 고용계약 등 생산에 필요한 계약의 숫자를 대폭 줄일 수 있고 거래비용도 그만큼 준다. 유명한 ‘코우즈 정리(定理)’를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시장 실패라고 정부 개입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시장 행위자들의 자율에 맡기면 재산권 거래와 협상을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코우즈는 시장의 자율조정 기능을 강조하는 신제도경제학의 태두다. 시장은 중장기적으로 시장의 불완전성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후생경제학의 원조인 아서 피구에 대해선 시장의 불완전성을 핑계 삼아 정부의 간섭과 규제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했다고 비판했다. 」 서경호 논설위원

    2023.01.03 00:37

  • 기대 컸던 글로벌 테마파크... 강원도의 효자냐 계륵이냐[김원배 논설위원이 간다]

     ━  춘천 레고랜드의 미래는     김원배 논설위원 지난 19일 오전 춘천대교를 건너 중도로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색깔의 각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5월 5일 개장한 레고랜드코리아리조트다. 진입로 한편에는 ‘역사 유적을 지키자’는 현수막과 시위용 천막도 보였다. 평일에다 영하의 날씨 때문인지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놀이기구도 일부만 운영됐다.      이곳은 세계 10번째 레고랜드로 춘천시 중도동 28만㎡(약 8만4900평) 부지에 건설됐다. 2011년 9월 투자합의각서가 체결된 이후 10여년 만에 완공됐다. 한국에 들어선 첫 번째 글로벌 테마파크지만, 지난 10월 채권시장에서 자금 경색이 나타났을 때 빠짐없이 언급됐다. 지난 19일 오후 춘천시 레고랜드 정문 모습. 앞에 보이는 건물이 레고랜드 호텔이다. 김원배 기자  사실 문제가 된 것은 레고랜드가 아니라 중도를 개발하는 강원중도개발공사(GJC)다. 최대 주주는 강원도로 44.02%의 지분을 갖고 있다. 22.54%를 보유한 2대 주주는 영국의 멀린엔터테인먼트로, 전 세계 레고랜드를 운영하는 곳이다. 덴마크 유명 완구업체인 레고사와는 별도 회사지만, 두 곳 모두 레고 창업자 가문의 지주회사인 키르크비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중도는 레고랜드와 관련 시설을 제외하면 허허벌판이다. GJC는 강원도 소유의 중도 땅을 넘겨받아 부지로 조성하고 이를 되팔아 수익을 낸다. GJC는 지난 7월 강원도에 총괄재정수지를 보고했는데 412억원 적자였다고 한다. 땅 매각 대금을 모두 합해도 각종 비용에 못 미친다는 내용이다.      레고랜드를 지나 섬 아래쪽으로 가면 비닐하우스를 볼 수 있는데, 이곳엔 공사 현장에서 출토된 청동기 시대 유물이 임시 보관돼 있다. 2014년 7월 문화재청 발표에 따르면 고인돌 101기와 집터 917기 등 청동기 시대 유적 1400여기가 나왔다. 이를 보존할 유적공원과 박물관을 짓는 것도 GJC의 몫이다.     레고랜드 부지에서 나온 청동기 유물을 임시 보관하는 중도섬 내 비닐하우스. 지난 10월 촬영된 것이다. 박진호 기자  ━   강원도 출자한 중도개발공사 부실    유적이 나오면서 공사가 지연됐고 금융비용 등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강원도가 파악한 것에 따르면 GJC의 예상 손실 규모는 412억원이 아니라 700억원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사업 자금은 GJC가 특수목적회사(SPC)를 세워 발행한 2050억원 규모의 자산담보부 기업어음(ABCP)을 발행해 조달했다. 최문순 전 강원도지사 시절 이 CP에 강원도가 지급보증을 섰는데 강원도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아 논란이 됐다. 박기영 도의원(국민의힘)은 ”지방재정법상 의회 동의가 필요한데도 이를 거치지 않았다”며 “전임 집행부가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그만둘 기회를 놓쳤다”라고 비판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지난 7월 김진태 지사가 취임한 후 강원도는 GJC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온 게 기업회생 카드였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 채무조정을 통해 강원도의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기존 토지매각 계약도 재검토해 수익을 개선하고 아예 GJC 지분을 매각하는 것도 고려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안 그래도 취약하던 채권시장에 지자체 보증도 의미가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고 자금 경색이 나타났다. 강원도는 보증채무를 이행하겠다고 말했지만, 시장에선 이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   빚 줄이려 회생 추진, 채권시장 혼란    정재웅 도의원(더불어민주당)은 “김 지사 인수위가 모든 문제를 GJC 탓으로 돌리며 감정적 접근을 했다”며 “회생 신청을 해 강원도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접근했다”고 지적했다. 강원도는 자체 예산 등으로 2050억원을 마련해 보증 채무를 갚았다. 기업 회생도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전임 최문순 지사 시절 임명된 GJC 대표이사를 교체했다.      그렇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동부건설과 하도급업체는 지난 8월 말 레고랜드 테마파크 기반공사를 마무리하고 9월 27일 준공검사까지 마쳤지만 아직 GJC로부터 공사대금 136억원을 받지 못했다. 10월 25일엔 공사 관련 업체와 근로자들이 강원도청 앞에 모여 공사대금 지급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GJC는 현재 이를 갚을 능력이 없다. 윤인재 강원도 산업국장은 “보증 채무는 강원도가 갚았지만 공사비를 강원도가 대신 낼 수는 없다”며 “GJC가 토지 매매 중도금을 빨리 받아서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논란 끝에 개장한 레고랜드는 강원도 경제에 어떤 도움을 줬을까. 강원도는 지난 4월 보도자료에서 레고랜드 개장에 따라 연간 200만 명의 가족 단위 관광객이 찾을 것이라고 밝혔다.    레고랜드코리아는 정확한 입장객 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강원도는 개장 후 내년 5월까지 입장객 수를 90만 명 수준으로 예상한다. 애초 수치의 절반 수준이다. 저출산도 위험 요인이다. 레고랜드가 대상으로 하는 2~12세 인구는 올해 448만 명이다. 통계청의 장래인구 추계를 보면 2030년엔 294만 명으로 감소한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레고랜드는 내년 1월 1일부터 3월 23일까지 휴장한다. 다만 레고랜드 호텔은 정상 운영된다. 놀이 시설이 3개월가량 문을 닫으면 고용 효과도 떨어진다. 레고랜드 자체는 운영되더라도 강원도엔 기대했던 효과가 나오지 않는 ‘계륵’ 신세가 될 수 있다. 나철성 강원평화경제연구소장은 “레고랜드 유치를 위해 직간접적으로 7000억원 이상이 들어갔고 보증채무를 갚는 데도 2050억원을 썼지만 연간 관람객은 80만 명 정도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   면밀한 분석 없이 사업 추진하면 큰 부담    김병헌 한국관광진흥학회장(전 한국관광대 교수)은 “레고랜드를 유치하기 위해 경제적 효과를 과다 추정하고 멀린사의 요구도 너무 많이 수용했다"며 “정치적 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면 지자체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다만 강원도 입장에선 레고랜드가 완공된 이상 이를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레고랜드가 아닌 중도 전체가 매력적인 관광지가 되려면 추가 투자와 인프라 개선이 필요하다. 중도와 춘천시 도심 쪽은 춘천대교를 통해 연결됐지만 반대편인 춘천시 서면을 잇는 다리가 필요하다. 주변 부지도 어떻게 매각되느냐도 변수다. 개별 분양하면 난개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워터파크나 대형 쇼핑시설, 콘도 유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국내 경기가 좋지 않고 개발 자금을 조달하기도 쉽지 않다.      박기영·정재웅 도의원 모두 “남은 부지를 효과적으로 매각하고 멀린사의 추가 투자를 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나철성 소장은 “땅을 비싸게만 팔려고 하면 난개발이 될 수 있다”며 “강원도민의 관점에서 중도의 가치를 높이는 개발이 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윤인재 국장은 “이름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부지에 관심을 보이는 큰 기업이 있다”며 “서면을 잇는 다리가 건설되면 지가가 오르는 부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계약 놓고도 논란...레고랜드 측 "추가 투자할 것" 「 2018년 12월 강원도와 멀린사가 맺은 총괄계약을 놓고도 논란이 적지 않다. 비밀유지 조항에 따라 자세한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다. 지역 시민단체에선 이를 ‘노예계약’이라고 비판한다.    레고랜드 부지는 외국인투자촉진법에 따라 50년 무상으로 임대하고 50년 연장할 수 있다. 멀린사가 테마파크를 짓되, 800억원 상당의 시설은 GJC에 매각한 뒤 다시 빌려 쓰는 구조다. GJC는 임대료로 평균 3%를 받는데 연간 매출이 400억원을 밑돌면 한 푼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    GJC는 이미 800억원을 지급했지만 아직 시설도 넘겨받지 않았다. 이를 받으면 재산세 등 각종 세금으로 유지 비용이 더 들어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배임 소지가 있다고 보는 주장도 나온다. 경찰에 고발장도 접수됐다.    레고랜드코리아의 2021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5년 이내에 사업을 그만두면 GJC가 매입한 테마파크 시설을 멀린 측에 되팔 수 있지만 5년이 지나면 이 조건도 사라진다. 레고랜드코리아 측은 총괄계약에 대해서는 비밀유지 조항을 이유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최근 논란에 대해선 이런 답변을 했다.    겨울 휴장은 왜 하는가. 미국 뉴욕, 영국 등 한국과 비슷한 기후를 가진 지역의 레고랜드는 겨울에 휴장한다. 자금 시장 논란과는 관계없다.    직원들의 고용 문제는. 겨울 휴장으로 인한 계약 중도 해지나 해고 등은 전혀 없다.   주변 여유 부지가 있다는데. 내년부터 매해 추가 투자를 시작할 것이다.    멀린사가 부산 씨라이프아쿠아리움에 이어 코엑스아쿠아리움도 인수했다. 연계 상품도 고려 중이다. 한국 사업 확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 김원배 논설위원

    2022.12.28 00:50

  • “택배노조에 무너진 남편, 사과 한 번 제대로 못 받았다” [문병주 논설위원이 간다]

    문병주 논설위원 그의 얼굴엔 눈물과 분노가 교차했다. 지난 16일 경기도 김포 운양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박모(41)씨는 수차례 말을 잇지 못하고 감정을 억눌렀다. 지난해 8월 말 택배노조를 중심으로 한 운송기사들의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이모(당시 40세) 대리점주의 아내다. 현재 남편이 운영하던 대리점을 반납하고 택배 물량을 지역에서 모아서 터미널로 보내는 집화점을 운영하고 있다.      ━  3남매 위해 지게차 운전하는 택배대리점주 아내    박씨는 전업주부였지만 남편이 사망한 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오후 1시쯤부터 자정 무렵까지 하루 10시간 넘게 일한다. 택배 물건을 대형 트럭에 실어야 해서 지게차 운전도 배웠다. 안 해보던 육체노동인지라 밤이면 근육통에 시달린다. 다행히 친정 근처로 이사해 친정에서 애들을 돌봐 준다고 한다. 이씨는 중3, 중1, 그리고 7살짜리 3남매를 키우고 있다. 택배노조의 괴롭힘을 호소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경기도 김포 택배대리점주의 아내 박모씨가 지난 15일 밤 집하장에서 지게차로 택배 물건들을 대형 트럭에 싣고 있다. [사진 박씨 가족] 1년이 훌쩍 지났지만 당시의 상처는 고스란히 짊어진 채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그는 또 다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남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생겨나고 있어서다. 박씨는 대리점에서 일하면서 남편을 괴롭히던 이들을 고소했다. 경찰은 20여 명에 대한 수사를 진행해 적극적으로 가담한 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에서 기각됐다.     ■  「 노조 태업·괴롭힘에 고통 깊어져 지난해 8월 끝내 극단적인 선택 “법정에서도 사과 제대로 안 해” 」  최근에는 이들 4명 외 기소된 다른 2명에 대한 1심 선고가 있었는데, 모두 집행유예였다. 한 재판부는 “허위 사실로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그로 인해 피해자의 자살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발생했다”며 “범행 경위나 결과에 비췄을 때 피고인의 죄책이 무거우며 유족들로부터 용서받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피고인이 피해자 생전에 사과했고 피해자도 이해한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 점 등을 고려했다”고 했다. 박씨는 “남편이 받은 건 사과다운 사과가 아니었다. 이후에도 괴롭힘은 여전했다"고 회상했다.       ━  “노조원들 방해에 하루하루가 지옥”    박씨에 따르면 남편 이씨는 과거 대한통운(현 CJ 대한통운)에서 택배 배송기사로 일하다 2008년 대리점을 차렸다. 택배노조가 생기면서 배송 수수료율을 9%에서 9.5%로 올려달라는 노조원들의 요구가 있는데, 이 과정에서 배송기사들의 괴롭힘이 있었다. 대리점 택배기사는 17명이었는데 이 중 12명은 지난해 5월 노동조합 ‘김포지회’를 만들어 태업에 들어갔다.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 대화방에는 이씨에 대한 욕설은 물론 대리점을 자신들이 접수하자는 내용이 돌았다. 이씨는 유서에 “처음 경험해 본 노조원들의 불법 태업과 쟁의권도 없는 그들의 쟁의활동보다 더한 업무방해에 비노조원들과 버티는 하루하루는 지옥과 같았다”고 적었다. 그는 유서에 조합원 12명 이름과 함께 “너희들로 인해 버티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 한 사람이 있었단 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고 썼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박씨는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법원이 너무 관대한 처벌을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적극적으로 가담한 4명에 대한 선고가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법정에 출석해 강력한 처벌을 요청할 것”이라면서 “집행유예 판결이 난 이들도 끝까지 합당한 죗값을 받길 원한다”고 했다. 또 “당사자들이 미안하다는 문자 몇 개 보냈다. 진정 사과하고 싶다면 재판정에서 만나고 할 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들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마지 못해 문자를 보낸 것 같다”고 토로했다.   위로가 되는 건 남편의 동료 대리점주들이다. 김포 지역의 다른 택배 대리점 사장들은 숨진 이씨 이름을 딴 장학금을 만들어 매달 5만~10만원을 택배기사 자녀들에게 주고 있다. 장학회에 참여하고 있는 석원희 대리점주는 “이 사태의 진실은 갑(대리점주)과 을(택배기사)의 관계가 아닌 일방적 괴롭힘이었음을 제대로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노조원 앞세워 ‘갑질 아파트’ 만들어    박씨가 처한 현실의 배경엔 택배노조가 있다. 개인사업자 신분인 택배기사에게 노동조합 설립을 허가한 건 문재인 정부 시절이다. 부당한 업무 환경에서 일한다고 주장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택배노조는 2018년 1월 15일 설립된 공공운수연맹 산하 조직이 됐다. 택배기사들이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가야 한다는 주장 말고도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해 왔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4∼5월 진행된 서울 강동구 G아파트 택배 배달 거부 시위다. 아파트에서 아이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애초 지상공원 아파트였다는 점을 근거로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금지하자 택배노조가 반발하며 시위를 진행했다. 보통 택배 차량의 높이는 2.5m이고 G아파트 지하주차장 층고가 2.3m로 이 지하주차장엔 택배 차량이 출입할 수 없음에도 아파트 주민들이 차량의 지상 출입을 막았다고 항의했다.   지난해 4월 15일 오후 서울 강동구 G아파트 단지 앞에 택배 노조원들이 쌓아놓은 택배들이 놓여 있다.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아파트에서 금지하자 이에 항의하며 택배 배달을 집 앞까지 하지 않고 시위를 이어갔다. 뉴시스   진경호 택배노조위원장 등 노조 지휘부가 앞장서 이 아파트를 ‘갑질 아파트’로 인식되게 만들었다. 입주자대표협의회는 “이미 2019년부터 단계적으로 4차례에 걸쳐 통행 제한을 통보했고 이 계획에 따라 차량 개조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다. G아파트 관리소장은 “현재는 모두 지하주차장에 들어올 수 있는 저상 택배차량들로 교체됐다”며 “택배기사들과 주민들 대립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CJ대한통운에 문의한 결과 택배노조가 시위하던 당시에도 이미 차량 개조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이 회사의 경우 6대 중 3대가 개조를 마친 상태였다. G아파트 주민 김모(52)씨는 “당연히 주민들이 예고했던 내용이고, 개선 중이었는데 왜 갑질 아파트란 오명을 썼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는 “자영업자인 택배기사의 입장에서는 300만원 정도 하는 차량 개조 비용을 택배사 본사에서 지원해주길 원했던 것 같다”고 했다.     ━  전체 택배기사 8.5%로 65일 파업    택배노조의 시위는 CJ대한통운 본사 점거 농성으로 극에 달했다. 과로사 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 이행을 촉구하며 지난해 12월 28일부터 올해 3월 2일까지 65일 동안 파업을 벌였다. 핵심은 택배비 인상분을 더 분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CJ대한통운은 직접 계약 당사자인 대리점들과 협의하라며 협상을 거부했고, 노조는 2월 10일 CJ대한통운 본사를 기습 점거해 19일간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진입을 막던 직원들이 다쳤다.       ■  「 CJ대한통운 본사 점거 77명 송치 사측, 가담자들에 20억원 손배소 노란봉투법 “노조원에 소송 불가”  」  업계에 따르면 당시 파업에 동참한 택배기사는 2만여 명 중 8.5%인 1700여 명이었다. CJ대한통운은 업무방해, 시설물 파손 등 100억원에 달하는 손해를 입었다며 노조와 노조원 88명에 대해 2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CJ대한통운 측은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를 봤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지나갈 수는 없다”며 소송을 취하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경찰 역시 최근 이들 88명 중 77명을 재물손괴, 업무방해, 건조물 침입 등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지난 2월 10일 CJ대한통운 본사 점거를 위해 진입하는 택배노조원들. 연합뉴스   하지만 향후 비슷한 일이 발생해도 불법 행위에 가담한 노조원들에 대한 손해배상 요구가 어려워질 수 있다. 현재 야당이 진행하고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조와 3조의 개정 문제다. 소위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이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CJ대한통운은 택배노조와 각종 협상에 직접 나서야 한다. 470억여원의 손실(회사 추정)을 본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의 파업 역시 대우조선해양이 직접 해결해야 한다. 본사나 작업장 점거 사태가 발생해도 노조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면 노조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된다.     ■ ☞노란봉투법, 무엇이길래 「 2009년 5~8월 직원 2646명을 정리해고하는 사측의 경영정상화 방침에 반발해 쌍용차 노동자들이 경기 평택공장에서 77일 동안 점거 파업을 벌였다. 이와 관련한 소송에서 2014년 법원이 파업 참여자들에게 47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한 시민이 언론사에 4만7000원이 담긴 노란봉투를 보냈다. 이후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노조의 쟁의권을 강화하는 법안을 포괄해 노란봉투법이라 부르고 있다. 19대, 20대 국회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모두 폐기됐고, 이번 21대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계류돼 있다.   핵심 중 하나는 근로자와 사용자의 범위를 현재보다 확대하는 내용이다. 근로자는 ‘임금·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에서 ‘노무 제공자’로, 사용자는 ‘사업주, 사업의 경영담당자 또는 그 사업의 근로자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사업주를 위하여 행동하는 자’에서 ‘근로조건에 사실상의 영향력, 또는 지배력 있는 사람’으로 확대된다.     노동쟁의의 면책 범위도 넓어진다. 폭력이나 파괴로 인한 게 아니라면 불법 파업이라 하더라도 노조 또는 노조원 개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된다. 폭력이나 파괴 행위가 있더라도 그것이 노조의 결정에 따른 경우 노조원 개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    문병주 논설위원

    2022.12.27 00:48

  • 의원 빼가며 싸워도, 도서관 4층서 만났다…지금 여야가 할 일 [김성탁 논설위원이 간다]

     ━  "신뢰 쌓인 여야 인사끼리 협상 채널 가동해야" 과거 협상 주역들의 조언   김성탁 논설위원 국회가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두고 2014년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 최악의 대립을 노출하고 있다. 20일에도 여야는 서로를 비난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이 반대하는 행정안전부 경찰국과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 예산과 관련해 “과거 민정수석실에서 근거 없이 하다 폐단을 낳아 정부조직 안에서 하려는 건데 발목을 잡느냐”고 말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용산 아바타’로 전락한 여당과 도돌이표 협상을 해봤자 대통령 거부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고 맞받았다.   1999년 3월 15일 국민회의 정균환, 한나라당 신경식 사무총장(오른쪽)이 국회 귀빈식당에서 악수하고 있다.[중앙포토]  대선에서 이긴 윤석열 정부가 첫 예산안 처리에 애로를 겪는 것은 국회가 '여소야대'이기 때문이다. 현행 헌법 체제에서 실시된 9차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보면 여소야대(5차례)가 여대야소(4차례)보다 많았다. 2020년 치러진 21대 총선에서 여당이던 민주당 계열이 180석을 얻는 대승을 거뒀는데, 대선 패배로 여야가 바뀌었으니 여소야대가 더 잦은 셈이다.   ■  「 역대 총선 여소야대가 더 많아…여대 만들려 3당 합당, 의원 빼오기까지 DJ정부 때 야 사무총장 신경식 "실업 아픔 나눴던 한화갑과 막후 협상" "대통령, 국회 문제 당에 일임 필요…정무장관 부활해 야당 가교 맡길 만" 88년 4당 합의 김원기 전 의장 "어려움 해결 위한 진실한 성의가 열쇠" 」     ‘분점 정부’로도 불리는 여소야대는 강력한 권한을 지닌 대통령과 행정부를 다수당인 야당이 견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여야 간 대립이 격화하면 국정 운영이나 정책 시행이 교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역대 정권은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바꾸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에선 3당 합당이 이뤄졌고,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선 야권 의원 빼 오기나 의원 꿔주기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여대를 달성했다.    ━   임기 내내 '여대' 이명박 대통령 뿐    역대 정부에서 임기 5년 내내 여소야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유일하다. 박근혜 정부도 여당이 다수당이었지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 야대로 바뀌었고 탄핵으로 이어졌다. 제1야당인 민주당 의석만 169석에 달하고 여당인 국민의힘 의석이 115석에 불과한 지금의 국회 구조는 역대 여소야대 중에서도 가장 야당의 영향력이 강한 상태다. 이런 교착 상태를 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여야 대립이 극심했을 당시 협상을 통해 조율에 성공했던 주역들에게 협상의 노하우를 들어봤다.     신경식 전 헌정회장은 1997년 역대 최초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진 김대중(DJ) 정부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을 맡았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자유민주연합 김종필 간 DJP 연합으로 DJ가 집권했을 당시 국회 의석은 한나라당 163석, 국민회의 79석, 자민련 43석이었다. 여소야대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임명안이 거야의 반대로 무산됐다. 편법으로 ‘국무총리 서리’ 임명을 강행한 DJ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빼 와 여소야대를 허물었다. 당연히 야당의 반발이 극심했다.    신 전 회장은 지난 19일 본지 인터뷰에서 “당시 DJ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인 시기여서 야당으로서도 강력한 당 총재(대표)가 필요했는데 이회창 총재가 당선됐다”며 “당시 국회 문제를 놓고 여당과 협상을 벌이면서 총재가 지킬 것과 양보할 선을 어느 정도 정한 후 막후 협상 채널이 가동됐다”고 소개했다. 야당 사무총장으로서 그는 소통 통로를 열기 위해 국민회의 한화갑 사무총장과 국회 도서관 4층 조용한 방에서 만났다고 한다.    “여야 협상에 나서는 사람은 상대방과 이미 쌓인 인간관계가 있는 게 중요합니다. 한화갑과 나는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시절 모두 실업자였어요. 미래가 불안해 점 보는 집에 갔는데, 거기서 딱 만난 거예요. 도서관 협상장에서 ‘우리가 국회의원이 돼 이렇게 만날 거라고 꿈이라도 꿔 봤냐’면서 서로 어깨를 두드려줬죠.”    ━   원내대표는 당 입장 대변하니 강한 주장     국회 협상은 통상 원내대표가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신 전 회장은 “원내대표는 당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니 대외적으로 강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며 “조금만 양보를 해도 당내에서 비난하는 얘기가 나올 수 있고, 양 원내대표단 사이의 협상 내용이 비밀로 지켜지기 어려운 경우도 잦기 때문에 별도의 협상 채널을 가동하는 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사무총장 간 회동에서 그는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의 청와대 회동과 국회 문제 해결 등을 놓고 한 사무총장과 접점을 찾았다. 신 전 회장은 “예산안을 두고 교착이 발생한 지금도 여야 양쪽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막후 협상을 하는 게 필요하다”며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중에서 유화적인 인물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여당 입장에서는 정무장관을 부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신한국당 시절 정무제1장관을 맡았던 그는 “과거엔 정무장관이 대통령실과 야당과의 가교 역할을 했다”며 “정부 입장을 야당에 설명하고, 야당 입장도 대통령에게 잘 알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현 대통령실에 정무수석이 있지만 공무원이고 대통령 비서라는 타이틀 때문에 아무래도 야당이 부담스러워한다”고 덧붙였다.    ━   타결 후 대통령, 여야 초청해 만나길     민주당은 최근 예산안 협상이 난항을 보이는 데 대해 여당이 대통령의 의중만 신경 쓰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신 전 회장은 “국회 문제는 대통령이 국회에 일임할 필요가 있다”며 “정무 수석을 통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는 받되, 대통령이 협상과 관련해 직접적 언급은 피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신 전 회장은 “예산안 협상 등이 끝난 뒤 여야 협상 대표와 여야 상임위원장 등을 대통령실로 초청해 만찬 등을 하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1989년 8월 당시 4당 원내총무(현 원내대표)가 63빌딩에서 만나 국정감사를 포함한 정기국회 일정에 잠정 합의했다. 왼쪽부터 김용채 공화당, 김원기 평민당, 김윤환(작고) 민정당, 이기택 민주당 원내총무. [중앙포토]    노태우 정부 때인 1988년 13대 총선 결과도 여소야대였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125석에 불과했고 평민당, 통일민주당, 공화당 등 야당이 다수인 4당 체제였다. 그런데도 당시 13대 국회는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특위 구성, 5공 비리 청문회, 국정감사제 부활, 헌법재판소 설치 등 쟁점 법안을 4당 원내총무 간 합의로 통과시켰다. 당시 협상의 주역들이 고 김윤환 민정당, 김원기 평민당, 이기택 민주당, 김용채 공화당 원내대표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여야 간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묘수가 딱히 있는 게 아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결국 여야에서 정치를 책임진 사람들이 난제를 풀기 위한 진실된 성의를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시대적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엄중했다"며 "4당 원내총무 등이 날을 새며 토론하고 큰 소리도 냈지만, 서로서로 어려운 고비를 풀어내려는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 전 의장은 “대통령이나 당 대표 등이 협상에 나선 이들을 전적으로 믿고 맡기며 뒷받침해주는 환경이 있었기 때문에 합의가 가능했었다”며 “각 정당을 대표해 협상에 나선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역사적인 고비에서 소임을 다 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 "대결 정치 풀려면 선거구제 개편 필요"  「 여소야대는 대통령제인 미국에서도 흔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기 건강보험법 개정 문제를 놓고 여당인 민주당과 야당인 공화당이 충돌하면서 연방 정부가 폐쇄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 멕시코와의 국경 장벽 건설 문제로 여야가 대립하면서 연방 정부 폐쇄가 발생했다. 하지만 미국 정당에 보스 문화가 없고, 위계질서도 약해 의원들의 자유투표 경향이 국내보다 강하다.   국내에선 거대 야당이 국무위원 해임안을 밀어붙이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양상이 보인다. 이에 따라 한 표라도 이기면 제왕적 권력을 쥐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 구성에 따라 극한 대립을 반복하는 국내 정치를 개선하기 위해 제도적 해법 모색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양당제에서 다당제로 바꾸자는 움직임인데, 한 선거구에서 한 명만 뽑는 소선거구제는 지역주의나 양당 체제를 심화시킨다.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이용호 국민의힘 의원을 비롯한 원내 5당 소속 의원들이 중대선거구제와 권역별 비례대표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정당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장단과 가진 만찬에서 김진표 국회의장은 “선거법·정당법 같은 헌정 제도를 변화된 시대와 정치 상황에 맞게 고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도 대선 과정에서 중대선거구제 선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              김성탁 논설위원

    2022.12.21 00:29

  • [윤석만 논설위원이 간다] 불행한 대한민국, ‘카·페·인’ 우울증에 빠진 청년들

     ━  10~20대 정신건강 위험수위   윤석만 논설위원 “조현병 환자들이 입원하는 정신과 폐쇄병동이 자해 청소년들로 가득해요.” 신의진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의 이야기다. 신 교수는 “2019~2021년 연세대 상담센터장을 하면서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많이 봤다”며 “청년들의 정신건강이 매우 위태롭다”고 지적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대 우울증 환자는 지난해 17만 7166명으로 2017년(7만 8016명)보다 127.1% 급증했다. 불안장애 환자도 같은 기간 5만 9080명에서 11만 351명으로 86.8% 늘었다.     ■  「 유아부터 경쟁 치열 20대 ‘번아웃’ 청년 불안장애 4년 새 86% 급증 SNS 많이 쓸수록 우울감도 높아 “지나친 비교가 불행의 큰 원인” 」    우울증·불안장애 환자가 많아지면 자살률도 높아진다. 국내 자살률은 2011년 정점을 찍고 꾸준히 감소 추세인데, 10~20대만 반대로 늘고 있다. 2017~2021년 10대 자살률은 4.7명(10만 명당)에서 7.1명, 20대는 16.4명에서 23.5명으로 급증했다. 특히 20대는 전체 사망 원인의 56.8%가 자살일 만큼 문제가 심각하다.   ‘청춘의 그림자’는 비단 정신질환이나 극단 선택을 시도하는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청년층 전반에서 삶의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부정적 정서가 팽배해 있다. 서울연구원의 시민행복도 조사 결과를 보면 청년들의 건강·사회생활 등 5개 부문의 행복지수 모두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구체적으로 2017~2020년 건강은 7.7→7.2, 친구관계는 7.3→6.7, 사회생활은 7.3→6.4로 떨어졌다. 변미리 서울연구원 도시모니터링센터장은 “최근 몇 년 새 20대의 행복도가 급격히 낮아졌다”고 말했다. 청춘의 아픔은 커지고, 행복은 작아진 이유는 뭘까.   ‘갖고 싶은 것 vs 가진 것’ 이스털린의 역설   행복경제학의 창시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갖고 싶은 것과 실제 갖고 있는 것의 차이가 행복”이라고 했다(『지적행복론』). 행복의 3가지 요소는 ①물질적 부와 ②건강 ③가족을 포함한 사회관계다. 건강·사회관계는 행복과 정비례한다. 하지만 부는 일정 수준에 이르면 행복을 높여주지 않는다. 바로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역설의 이유는 “가진 게 많을수록 갖고 싶은 것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물욕은 끝이 없어 준거 기준이 계속 높아지지만, 물질의 소유를 통해 얻는 한계효용은 계속 낮아진다. 오히려 타인의 상황에 자신을 대입하는 사회적 비교가 더해지면 불행을 느끼기 쉽다.   최근 확산하는 ‘카페인 우울증’이 대표적이다. 이는 “카카오스토리·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에서 타인의 행복을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네이버 시사상식사전)을 말한다. 실제로 미국 피츠버그대 연구(19~32세 1800명 조사)에 따르면 SNS 접속 빈도 상위 25%는 하위 25%에 비해 우울증 발병 위험이 2.7배 높다.   직장인 최모(여·28)씨는 “SNS에서 명품 가방으로 도배된 사진들을 보면 초라함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정수현(여·24)씨는 연령이 낮을수록 이런 경향이 심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인플루언서를 닮고 싶은 10~20대가 많은데 남는 건 실망뿐”이라며 “SNS의 화려함을 평균으로 착각해 자신을 과소평가한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SNS에 중독   ‘카페인 우울증’이 10~20대에서 심한 이유는 SNS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2020 인터넷 백서』에 따르면 10대가 주 평균 29.2회를 이용해 부모 세대인 50대(17.9회)보다 월등히 많다. SNS를 매일 쓴다고 답한 비율은 10대(81.5%), 20대(74.9%), 30대(69%), 40대(62.5%), 50대(61.3%), 60대(44.1%) 순이다.(서울연구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SNS를 처음 접한 시기도 중요하다. 신의진 교수는 “기성세대는 아날로그로 세상을 배운 뒤 성인이 돼 디지털을 접했지만 10~20대는 유년기부터 디지털을 경험한다”며 “자아 확립과 인격 성숙이 덜 된 상태에서 디지털 의존이 심해지면 정서조절능력과 회복탄력성이 약해진다”고 설명했다.   전보다 치열한 청소년기 경쟁 환경도 비교 스트레스를 높인다. 특히 학교생활과 내신 성적을 중시하는 수시 제도의 영향이 크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학력고사나 수능은 경쟁자가 전국의 또래들이지만 수시는 내 옆의 같은 반 친구들”이라며 “수시 비율이 2000년 3.4%에서 2020년 77.7%로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중·고교의 내신 경쟁이 너무 살벌해 친구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제대로 못 배우면 성인이 돼서도 경계 성향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대학에서도 취업 경쟁을 벌여야 하니 개선될 기회가 적다”고 강조했다.   치열한 경쟁 탓에 청년들이 일찌감치 ‘번아웃(burnout·지친 상태)’ 되기도 한다. 김병규 넷마블 경영기획담당(COO)은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입시와 취업 경쟁에 ‘올인’한 나머지 정작 회사에 들어온 뒤 오히려 열정이 꺾이는 경우도 있다”며 “10년 이상 치열하게 고생했으니 이제는 쉬엄쉬엄하고 싶다는 마음”이라고 했다.   행복하려면 사회적 비교 줄여야   청년들의 행복감을 높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구교준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물질적 성장에 초점을 맞췄던 국가발전전략을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목표를 수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실효성 있는 복지정책과 균등한 기회제공으로 계층이동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어릴 적부터 줄 세워 타인과 비교를 강요하는 교육 방식도 바꿀 필요가 있다. 한국교육학회장을 지낸 김성열 경남대 명예교수는 “입시에선 비교 평가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교육 전반에선 다양한 잣대로 학생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동기 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개인의 억압기제로 작용하는 집단주의 문화도 개선해야 한다. 최은수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규범이 명확하고 어길시 강한 처벌이 내려지는 ‘타이트 컬처(tight culture)’ 사회를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집단주의 문화일수록 사회적 비교가 많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구교준 교수는 “핀란드는 가장 개인주의적인 나라지만 공동체 문화가 강하고 ‘타이트 컬처’인 한국은 반대”라며 “개인의 자율성이 존중받는 사회일수록 행복도가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유엔이 발표한 2022 세계 행복지수 1위 국가는 핀란드이며, 덴마크(2위)·아이슬란드(3위) 등 북유럽 국가들이 최상위에 포진해 있다.   스스로는 자신의 내면을 가꾸고 단단해져야 한다. 자기 가치관을 똑바로 세우면 타인과의 비교에 휘둘리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자신의 주체적 결정에 따라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하다. 그 선택이 꼭 옳아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스스로 결정해 움직이는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기 때문이다(『자유론』).       ■ 1인당 GDP 520배 늘었지만 행복도는 여전히 낮아 「 리처드 이스털린 경제학에서 효용(utility)은 재화를 소비해 얻는 만족도를 뜻한다. 관찰 가능한 데이터를 사용해 소비자 행동을 설명하는 현시선호이론은 ‘결정효용(decision utility)’을 중시한다. “경제학은 선택의 학문”이라는 빌프레드 파레토의 말처럼 사람들은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대안이 여럿이면 예상 만족도가 가장 높은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리처드 이스털린(사진)은 ‘결정효용’이 실제 만족도인 ‘경험효용(experienced utility)’과 다르다고 한다. 같은 일을 하는 A, B 두 회사의 월급이 각각 320만원, 330만원일 때 겉으로 보이는 ‘결정효용’은 B회사가 크다. 그런데 다른 동기들의 월급이 A, B회사 각각 300만원, 350만원이면 실제 ‘경험 효용’은 어디가 클까. 인간은 상대적 비교를 통해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A회사의 만족감이 더 높다는 게 이스털린의 생각이다.   한국의 1인당 GDP는 1953년 67달러에서 2021년 3만4870달러로 520배 늘었지만 행복은 그만큼 커지지 않았다. 한국의 ‘세계행복지수’(유엔)는 처음 조사가 시작된 2012년 56위에서 2022년 59위로 오히려 떨어졌다. 상대적 비교를 통해 끊임없이 타인과 경쟁하며 열등감을 느끼는 정도가 심하기 때문이다. 반면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대부분 사회적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적다. 」 윤석만 논설위원

    2022.12.20 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