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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고고학 연구에도 정치적 의도 있나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최근 내가 회장을 맡은 토론토 고고학회에서 인류학자 폴래트 스티브스를 초청해 북아메리카 대륙의 고고학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강의를 들었다. 오랫동안 학자들은 ‘클로비스’라고 지칭하는 정착민들이 1만2000∼1만3000년 전에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넘어왔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특징적인 화살촉(사진)이 1930년대 처음으로 미국 뉴멕시코 주의 클로비스에서 발견돼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그 클로비스 이론의 기반이 차츰 흔들리고 있다. 클로비스 문화 이전의 유적지들이 잇따라 발견되면서다. 이런 와중에 가장 파격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인류학자가 바로 스티브스다. 그는 현재 발견된 클로비스 이전 유적지가 몇천 개나 되지만 기존 학계의 비판이 두려워 널리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북미 초창기 거주민의 역사는 무려 십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클로비스 화살촉 물론 그의 주장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다. 크리 메티스(Cree-Metis) 종족의 캐나다 원주민 출신인 스티브스는 ‘퍼스트 네이션’(캐나다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지칭하는 용어) 사람들이 아시아에서 근래에 온 정착민이 아닌, 훨씬 더 오래된 토착민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클로비스 가설은 “토착민들의 기나긴 역사를 조직적으로 지워버리는 식민주의의 왜곡”이며 자신의 사명은 토착 원주민들의 역사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과학적인 증거로 전개되는 고고학 연구가 그렇게 왜곡될 수 있겠느냔 생각이 들지만, 오늘날의 학문 연구 중에 정치적인 이슈와 관계없이 객관성을 유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만약 현재까지 일제강점기가 지속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한반도의 고고학과 역사를 모두 일본 학자들이나 친일 학자들이 연구해 그 내러티브가 결정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정말로 우리는 이 역사를 객관적으로 믿을 수 있을까. 이것이 현재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현실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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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캐나다와 미국, 같은 듯 다른 나라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2013년 토론토대 교수로 임용돼 캐나다로 이주했다. 처음엔 다른 나라에 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강의하면서 미국의 예를 그대로 들며 농담을 던져도 학생들은 부담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캐나다 생활을 하다 보니 근본적으로 미국과 다른 나라라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큰 차이점은 두 나라의 의료보험 체계다. 나는 임신 초기부터 출산까지 최첨단 시설의 병원을 드나들며 단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출산 후 사흘간 병원에서 회복하면서 4인실을 독방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하루 200달러씩 낸 게 전부였다. 미국이었다면 하루에 2000달러도 모자랐을 것이다. 아메리카 편지 캐나다는 보편적 헬스케어를 채택하고 있어 모든 국민이 필수 건강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 이에 반해 미국에선 대다수가 개인적으로 의료보험을 구입해야 한다. 가격이 한 달 500∼800달러 정도로 만만찮아 대략 3000만명이 의료보험 없이 살고 있다. 보험이 있어도 본인 부담금이 상당하다. 응급실만 가도 1000∼2000달러씩 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출산 휴가 시스템도 캐나다가 월등히 좋다. 캐나다에서는 배우자도 1년 출산휴가를 받는 일이 흔하지만, 미국에서는 배우자 출산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지 않다. 나도 학교에서 맡은 일이 많아 6개월 출산 휴가 신청을 고려했으나, 오히려 학교 측에서 임시 디렉터 구하는 일은 문제없다며 1년 휴가를 권했다. 보편 복지 측면에서 한국도 캐나다와 비슷하다. 그런데 최근 의료비 개인 부담금을 올리고, 각종 검사 비용의 보험 혜택을 없애려 한다는 뉴스가 들린다. 보험 재정 안정을 위해서라지만 조심스럽게 접근할 일이다. 미국에 사는 20여년 동안 병원에 못 가 병을 키운 사례를 무수히 많이 봤다. 어깨탈골이 됐을 때 병원비가 무서워 6개월이나 셀프 치료를 하다 결국 큰 수술을 받게 된 친구도 있었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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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아테네의 성 파업, 한국의 출산 파업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참혹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었던 기원전 411년, 아테네 남정네들이 아크로폴리스 문턱에서 주춤주춤하고 있다. 아테네 여인들이 ‘섹스 파업’을 하고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삼는 남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 도시국가 여인들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성(性) 파업을 한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시대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반전(反戰)의 이념을 코믹하게 전달한 희극 ‘리시스트라테’ 중 한 장면이다. 출산율 지난해 연말 7개월 된 딸을 데리고 귀국했을 때 신기한 체험을 했다. 어딜 가나 “어머나 아기다! 아유 귀여워!” 감탄을 연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아기 보는 거 참 오랜만”이란 말도 들었다. 그리고 몇 주 후 “사우스 코리아의 여성들이 아기 낳기 파업하다”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기사를 읽었다. 2500년 전 아테네에서 일어난 섹스 파업이 오늘날 한국에서 현실화한 것일까. 아테네의 파업은 가상이지만, 한국의 파업은 현실이다. 아테네 여성의 파업은 반전이라는 목표가 있었지만, 한국 여성의 파업은 목표가 뭘까. 원인 분석으로 사회적 환경이나 복지 문제를 운운하지만, 아기 낳기에 관한 복지가 한국처럼 잘돼있는 곳도 드물다. 이번에 귀국했을 때 공공장소에 설치된 수유실들을 보고 놀랐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수준의 시설은 보지 못했다. 출산율이 떨어지는 현상은 모든 선진국이 겪는 트렌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국가소멸 사태가 우려될 만큼 그 정도가 파격적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젊은이들이 불확정성의 미래로 자기 존재를 송두리째 던지는 실존적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문명 전환의 첨단에 서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구과잉으로 시달리는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