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아이] 78세 트럼프의 팟캐스트 활용법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지난주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군 대선에서 압승을 거머쥔 도널드 트럼프는 명실상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광활한 미 대륙을 돌면서 유권자들을 향해 특유의 스타일로 지지를 호소하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고 외쳤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분초를 아껴 쓸 선거운동 막바지에 트럼프는 상당 시간을 팟캐스트 출연에 할애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생소해져 버린 팟캐스트 방송에 6월부터 총 14번, 그것도 선거가 임박한 10월에만 8번이나 출연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대선 승리에 적중한 전략이었다.   트럼프가 지난달 출연한 3시간 분량 유명 팟캐스트 장면. 선거운동 기간 중 가장 긴 인터뷰 였다. [사진 유튜브 캡처] 투표를 11일 앞둔 10월 25일. 트럼프는 유세현장을 잠시 떠나 팟캐스트 ‘조 로건 익스피리언스(The Joe Rogan Experience)’에 출연하기 위해 텍사스 주 오스틴으로 날아갔다. 3시간 분량으로 녹화된 그 날 인터뷰는 유튜브에서 순식간에 3800만 번 넘게 재생됐다. 지난 10년 동안의 팟캐스트 최다 시청기록을 경신한 수치였다. 3000만 명 넘는 유튜브 및 스포티파이 구독자 수를 자랑하는 진행자조차 놀란 기록이었다.   편집 없이 이어진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진행자 로건과 대화하며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자신이 불복한 2020년 대선, 관세 및 이민자 문제, 이종격투기, 테슬라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 UFO 등 여러 다양한 주제를 편안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끌어 나갔다. 물론 비속어도 섞어가며 말이다. 해당 팟캐스트의 주 청취자인 젊은 남성 유권자들과 공감대를 이루는 대목이었다. 특히 로건의 전문 분야인 이종격투기 주제를 다룰 때는 평소의 트럼프와는 달리 진행자의 말을 경청하며 로건의 업적을 치하하기도 했다. 트럼프로서는 보기 드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다.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자신이 팟캐스트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는데 18살인 막내 아들 배런이 출연을 설득했다고 소개했다. 아들 말을 잘 듣는 자상한 아버지상까지 내세운 셈인데 이번 선거 과정에서 트럼프가 만난 유명 인플루언서들과의 소통 모습도 같은 배경에서 이루어졌다는 후문이다.   물론 기존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이 자신의 발언을 팩트 체크하고 오류를 지적하는 불편한 상황을 회피하려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우호적인 팟캐스트에 집중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또 하나의 쟁점이었던 ‘고령’ 78세 보수 공화당 후보가 ‘열린’ 자세를 보여준 데는 트럼프 특유의 대중 심리를 간파하는 능력과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대한 이해 및 감각이 작동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2024.11.12 00:28

  • [글로벌 아이] ‘둥왕’의 귀환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다시 ‘둥왕(懂王)’이 돌아오는가”한 중국 경제매체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 소식을 전하며 뽑은 제목이다. 둥왕은 ‘이해’와 ‘왕’을 합친 단어로 ‘뭐든 다 알고 있는 왕’이라는 뜻이다. 말버릇처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말해온 트럼프를 표현하는 중국 누리꾼들의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트)’이다. 최대 포털 바이두(百度) 백과사전에 인터넷 유행어로 등재될 만큼 널리 쓰인다.   ‘둥왕의 귀환’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은 상당히 뜨겁다. 중국 최대 소셜미디어 웨이보(微博)에선 7일 오전 기준 ‘#미국대선’이라는 해시태그의 최근 24시간 누적 조회 수가 18억 건에 달했다. 댓글도 40억 건이 넘었다. 이름을 음역한 ‘트터리(特不靠譜, 트럼프+엉터리)’ ‘트통령(特大統領, 트럼프+대통령)’에, 본인 의도와는 다른 말실수와 행동으로 중국을 돕는다는 ‘촨젠궈(川建國) 동지’ 등 모두 트럼프에 대한 중국인의 애증과 맞닿아 있다.   중국 SNS에 올라온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중국식 복장을 합성한 사진. [웨이보 캡처] 중국 당국 반응은 이와는 크게 대조적이다. 외교부는 6일 밤늦게 홈페이지에 “미국 인민의 선택을 존중한다”며 “트럼프 선생의 대통령 당선에 축하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의 서면 입장문을 올렸다. 앞서 같은 날 오후 정례 브리핑에서는 미국 대선과 트럼프에 관한 질문에 원론적인 답변만 반복했다. 관영 매체들은 일단 미 대선에 대한 논평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트럼프 당선이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계산 먼저 해보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그러면서도 물밑에선 발 빠르게 움직였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트럼프의 승리 선언 당일 전화를 걸어 축하 인사를 건넨 것이다. 2016년 대선 당시엔 트럼프에 통화 대신 축하 전문을 보내고 2020년 대선 땐 2주 넘게 지나 바이든에 축하를 보냈던 것과 확연히 다른 모양새다. 통화 사실은 중국 측이 아닌 미 CNN의 당국자 인용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관영 매체들은 한참 뒤 시 주석이 축전을 보냈다는 소식만 전했다.   ‘트럼프 2기’를 맞이하는 중국의 속내는 복잡하다. 이미 “중국에 60%의 관세를 물리겠다”고 공언해온 트럼프다. 트럼프가 내걸 대 중국 제재 수위에 촉각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대규모 경제 부양책을 준비 중인 중국으로선 부담이다. 당장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가 세부 내용을 결정해 8일 발표한다. 트럼프를 향한 시 주석의 축전에 담긴 ‘협력하면 모두에 이롭고(合則兩利) 싸우면 모두가 다친다(鬪則俱傷)’는 글귀가 눈에 띈다. 돌아온 ‘둥왕’의 답변은 무엇이 될까.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2024.11.08 00:14

  • [글로벌 아이] 여성 정규직화 막는 ‘103만엔·130만엔의 벽’

    정원석 도쿄 특파원 일본의 슈퍼마켓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은 시급 1200엔(1만800원) 정도로 하루 4~5시간만 일한다. 대체로 주부들이 주 3~4일 일하고 월 6만~9만 엔을 받는다. 이 정도만 일하는 이유는 부양가족 소득공제 때문이다.   부양가족인 배우자의 연소득이 103만 엔(930만원)을 넘길 경우 소득 신고를 해야 해 부양가족 공제를 받을 수 없게 되고 130만 엔(1175만원)마저 넘어가면 건강보험도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시간과 일수를 늘려 일을 더 했다간 공제 혜택이 줄면서 오히려 실수령액이 줄어들 수 있는 구조이다.   일본에선 이를 ‘103만 엔의 벽’ ‘130만 엔의 벽’이라고 표현한다. 학생이나 전업주부 등이 일을 더 해서 소득을 늘리고 싶어도 실제론 허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영희 디자이너 이번 일본 중의원 선거 과정에 가장 ‘빅히트’를 낸 정당은 국민민주당이었다. 일본 유권자들은 가계 소득에 대한 적극적 정책이 없었던 자민당보다는 소득 공제 기준을 178만 엔으로 높이겠다고 나서면서 소비세와 유류세 인하까지 내건 국민민주당에 관심을 보였다. 가계 소득을 늘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데 치중한 결과 중의원 7명에 불과했던 군소정당은 28명까지 몸집을 4배로 불렸다. 자민당과 공명당 연립 여당의 중의원 과반까지 무너진 지금 일본 정치계의 ‘캐스팅보트’로 자리매김했고, 지금은 자민당을 향해 자신들의 정책을 받아들여야만 지원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상황이다.   김영희 디자이너 공제액이 상향된다면, 파트 타임 등 비정규직은 일을 더 하고도 부양 가족으로 남을 수 있게 되고, 정규직은 연소득과 무관하게 기초 공제액이 높아지면서 실질소득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제자리 걸음인 일본인들 입장에선 반길 만한 제도이다.   하지만, 논의 과정을 지켜보면 부양 공제 대상으로서 전업 주부인 여성이 가사와 육아를 돌보며 왜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지는 담론에서 빠져 있는 듯 하다.   ‘103만엔·130만엔의 벽’에 대한 재고가 처음은 아니다. 2022년 기시다 전 총리 때는 아예 폐지도 검토했다. 1961년 전업주부에 대한 처우 개선을 위해 도입된 제도가 반세기가 넘도록 유지되면서 오히려 여성을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있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일본은 지난 2022년 기준 6077만 명의 취업자 중 34.7%인 2111만 명이 비정규직인데, 이 중 68.5%인 1446만8000명이 여성이었다. 공제액 상향은 미봉책이다. 그런데도 국민 관심이 고조된 것은 그만큼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하다는 방증이다.     정원석 도쿄 특파원

    2024.11.05 00:28

  • [신경진의 차이나는 차이나] 중국의 ‘원전 굴기’…“건설 기간 단축, 저리 융자로 세계 진출”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지난 23일 중국 동남부 연안의 푸젠(福建)성 푸칭(福清) 원자력발전소 5호기 주제어실(MCR). 정면에 설치된 8개 스크린에 각종 숫자가 번쩍였다. 10년 안팎 경력의 당직자가 24시간 원자로 노심과 증기 터빈실 현황을 알리는 수치를 긴장하며 주시했다.   리쭝린(李宗霖) 푸칭 원전 수석 관리자는 “이곳이 중국이 독자 브랜드로 개발한 3세대 가압수형 원자로 화룽(華龍) 1호(HPR1000)의 두뇌”라며 “원자로의 모든 상황을 감시·제어하는 총괄 통제시설”이라고 소개했다.     ■  「 중국 원전 68.7개월만에 짓기도 막대한 투자·원전 생태계 강점 원전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 “한·미동맹 원자력 협력 활용을” 」    지난달 23일 한국 언론 최초로 중국 3세대 가압수형 원전인 화룽1호 현장을 찾았다. 사진 앞 원자로가 화룽1호를 채택한 푸칭 6호기다. 신경진 기자 “현재 화룽1호는 중국과 해외에서 총 6기가 가동 중이고 27기가 건설 중인 세계에서 숫자가 가장 많은 3세대 원전 기술입니다.” 왕추린(王秋林) 화룽국제 대표 겸 당 서기는 전날 베이징에서 가진 외신기자 사전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량·대규모 건설로 규모의 경제를 자랑하는 원전이라는 취지다. 화룽국제는 지난 2016년 화룽1호 해외 수출을 위해 국유기업인 중국핵공업그룹(CNNC)과 중국광핵그룹(CGN)이 공동 출자해 만든 기업이다.   23일 푸칭 시내에서 버스로 50여분이 걸리는 푸칭 원전에 도착했다. 한국 언론 최초로 방문한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해안가에 일렬로 세워진 회색 돔 형태의 콘크리트 건축물 6개다. 푸칭 원전 1~6호기로, 1~4호기는 2.5세대 중국형 경수로 모델 CPR-1000을 채용했다. 이와 달리 화룽1호를 처음으로 채택한 5·6호기는 돔을 둘러싼 콘크리트 벨트가 이전 모델보다 2배 이상 두꺼워 보였다.   본부 로비에는 중국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60주년을 기념하는 포스터와 “강한 원전으로 조국에 보답하고 혁신으로 공헌하자(強核報國 創新奉獻)”는 원전보국 구호가 걸려 있었다.   ‘친원전 드라마’로 반핵 정서 계도 장언위(張恩瑜) 공청단 서기는 “화룽1호는 중국제조 2025의 핵심 프로젝트”라며 “지난해 3월 CC-TV 1채널의 황금시간대에 방영됐던 ‘쉬니완자덩훠(許你萬家燈火, 네가 온 가정에 등을 밝히길)’ 드라마의 배경”이라고 소개했다. 이 드라마는 지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여파로 생겨난 원전 반대 바람을 뚫고 중국산 3세대 원전을 건설하는 과정을 그렸다. 중국 내 반핵(反核) 정서를 계도하려는 당국의 의중이 반영됐다.   신재민 기자 푸칭 화룽1호의 가장 큰 특징은 건설 속도다. 지난 2015년 5월에 착공해 2021년 1월 가동까지 68.7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푸칭 원전 관계자는 미국·유럽·러시아를 포함한 3세대 1호 원자로 중 건설 기간이 가장 짧다고 했다. 설계수명 60년인 화룽1호는 프랑스 M310 모델의 원자로 연료봉 157개보다 20개 많은 177개 노심을 채택했다. 리쭝린 수석은 “푸칭 5·6호기는 세계원자력운영자협회(WANO) 안전 규정에서 종합지수 만점을 달성했다”고 자랑했다.   이틀 뒤에는 푸칭에서 남쪽으로 400여㎞ 떨어진 곳에 건설 중인 장저우(漳州) 원전을 찾았다. 지난 15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방문한 둥산다오(東山島)와 마주한 해안을 깎아 화룽1호 원자로 4기를 동시에 건설하고 있었다.   신재민 기자 리빈(李彬) 장저우 원전 대변인은 “지난 9월 27일 4호기에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했고, 10월 12일 1호기에 연료봉 투입이 시작돼 연말 가동을 앞두고 있다”고 소개했다. 부지 선정 당시 어민 등 지역 주민의 반대 여부를 묻자 리 대변인은 “경제·교육·취업 등 지원 패키지로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보다 원전 후발 주자였던 중국은 세계 수준의 ‘원전굴기’(崛起·우뚝 섬)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원전굴기 배경에는 정부의 막대한 투자와 내수에 기반한 거대 규모의 원전 생태계가 있다”며 “특히 소형모듈원전(SMR), 고온가스로(HTGR) 등 거의 모든 종류의 4세대 원자로 노형마다 각각 한국의 전체 원전 연구비에 해당하는 금액을 투입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56기 가동 중…2060년까지 네 배로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는 438기, 건설 중인 원자로는 67기다. 중국에선 56기가 가동 중이며, 31기를 짓고 있다. 현재 중국 원전이 전체 전력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가 되지 않는다. 중국원자력협회(CNEA)에 따르면 중국은 원전의 전력 생산 비중을 오는 2035년 10%, 2060년엔 18%까지 올려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할 계획이다.   신재민 기자 이는 서해안과 마주한 중국 원전 56기가 네 배 가까이 늘어난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중국 원전의 안정성은 한국에도 초미의 관심사다. 정 교수는 “2009년 이어도에 설치한 방사능 계측기와 국제기구를 통한 모니터링이 더욱 중요해졌다”라고 말했다.   세계시장에서 중국산 C원전은 ‘온타임 온버짓(On time On budget·정해진 예산으로 적기 시공)’을 내세운 한국형 K원전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 C원전의 해외 진출은 한창이다. 화룽1호는 파키스탄에 2기가 이미 가동 중이다. 아르헨티나로의 수출도 확정됐다.   C원전의 수출 무기는 장기 저리(低利) 금융 공세다. 정 교수는 “원전건설 비용의 저리 융자를 금지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규제를 받지 않는 중국은 파키스탄과 아르헨티나에 총공사비 82~85%를 장기 저리로 융자해 계약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다만 체코원전 수주 경쟁에서는 사전 안보와 안전 심사에서 탈락했다.   글로벌 원전 경쟁 구도에서 한국은 중국의 추격을 어떻게 뿌리칠 수 있을까. 조은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 카드를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조 연구위원은 “중국의 원전굴기는 높은 가성비를 앞세워 주권을 강조하는 느슨한 형태의 중국식 기술표준과 핵질서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으로, 이는 단순한 경제적 어젠다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며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한 한·미동맹이 강조한 원자력 분야 협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미 간 상호 호혜적인 원자력 협력을 활용하면 중국의 세계 시장 독점과 원전 운영의 불안정성, 중국식 기술 표준과 규범 전파에 따른 핵확산금지조약(NPT) 질서의 불안 요인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11.04 00:26

  • [글로벌 아이] 북·중·러 애증의 삼각관계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문화대혁명 기간 북한은 화교학교를 폐쇄하고 전체 화교 1만 명을 추방했다. 중·북은 서로 대사를 4년간 소환했다. 베이징의 홍위병은 김일성을 ‘수정주의 앞잡이(走狗)’라고 욕하는 대자보를 걸었다. 북한 관리는 중원왕조의 한반도 침략 역사를 끊임없이 선전했다.”   올해 6월 20일 왕밍위안(王明遠) 베이징시 개혁·발전연구회 연구원이 SNS에 올린 과거의 북·중 일화다.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상호 군사원조 조항을 담은 양자 조약을 체결한 다음 날이었다.   1949년 신생 북한과 옛 소련의 친선 문화활동 행사를 알리는 선전 포스터. [웨이신 캡처] “역사적으로 러시아(소련)가 북한에 접근할 때마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에 충격을 줬다. 러시아가 동방에서 미국 진영과 경쟁에 집중할 때마다 한반도 정세가 긴장되고 심지어 동북아에 새로운 군비 경쟁 혹은 충돌을 야기했다. 그래서 중국은 러시아와 북한 모두와 좋은 친구이지만 러·북 양자 관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처럼 왕 연구원은 러시아의 동진을 보는 중국의 불편한 심리를 숨기지 않았다. 검열 당국도 방관하며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이어 홍콩 중문대학의 유명 학술저널 『이십일세기』는 8월호에 ‘동북아 안보구조’를 다뤘다. 선즈화(沈志華) 화둥사범대 종신교수는 북·중·러 애증의 삼각관계를 “취약한 연맹”으로 표현했다. 중국 개혁개방 직후 북한의 불만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소련 군함의 북한 입항을 허용하고, 소련 항공기에 영공을 열어줌으로써 사실상 중국 안보에 위협을 가했다”고 회고했다.   선 교수는 결론에서 “중·소·북 3국의 내부 관계는 전면적인 화해를 이루기 어렵고 비록 공동의 적을 상대해도 각자 원하는 바가 다르고, 누가 우두머리가 되느냐 문제가 있었다”라며 “만일 중국이 러·북 동맹에 참여한다면 중국이 일관되게 견지해 온 주변의 안정과 평화적 발전을 도모한다는 목표 및 전략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했다. 러·북과 거리 두기를 촉구한 것이다.   이제 북한의 우크라이나 참전으로 북·중·러 삼국지에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13세기 칭기스칸과 우구데이의 몽골군 이후 8세기 만에 아시아 군대의 유럽 등장이다. 유럽인들은 당시를 떠올리지 않을까.   중국에는 당장 북·중 친선의 해 베이징 폐막식이 숙제다. 수교 75주년 기념일(10월 6일)은 지났다. 11월 미국 대선과 다자외교 시즌 이후로 예상된다.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위원장과 김덕훈 총리가 북 대표단 단장 물망에 오른다. 중국의 대북 영향력과 외교 실력이 시험대에 섰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11.01 00:15

  • [글로벌 아이] 매력과 권력

    정강현 워싱턴 특파원 기자 생활의 상당 기간을 정치부에서 취재하고 보도했다. 그런 이력에도 최근의 미국 대선은 이해하기 힘든 지점이 많다.   이를테면 TV토론에서 압승하고도 해리스는 트럼프를 따돌리지 못했다. 게다가 트럼프는 공공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포르노 배우와 얽힌 뒷거래를 비롯해 온갖 비도덕적 추문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거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그런 트럼프의 지지세는 꺾이기는커녕 일부 경합주에선 해리스를 앞지르는 결과도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10일(현지 시간) TV토론 시작 전 악수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왼쪽)과 해리스 부통령. [AFP=연합뉴스] 최근 애리조나와 조지아, 위스콘신주의 바닥 민심을 직접 취재하면서 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배경을 넌지시 짚어볼 수 있게 됐다. 바로 트럼프가 끝없이 빚어내는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미국 영문학자 조너선 갓셜은 저서 ‘스토리텔링 애니멀’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우리를 만지작거리고 주물럭거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마음을 빚어낸다.” 나는 여러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재집권이 아른거리는 현 상황을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이야기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해보려 했다.   그 어떤 가치적 판단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트럼프는 해리스에 비해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트럼프와 해리스, 두 후보의 무수한 연설과 인터뷰, 토론 등을 종합해 내린 결론이다. 장르로 따지자면 트럼프는 픽션, 해리스는 논픽션 쪽이다.   말하자면 트럼프는 지지자들이 듣기 원하는 이야기를 허구를 동원해서라도 지어낸다. 트럼프는 자신을 악인과 맞선 영웅으로 서사화하면서 대선 캠페인을 드라마처럼 끌고 가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악인(불법 이민자)이 등장하고 갈등(일자리와 치안 위기)이 벌어지고, 이를 해결하는 영웅(트럼프)이 기본 구조를 이루는 식인데, 듣는 이를 현실과 무관한 판타지로 데려가는 효과를 낸다.   반면 해리스는 현실에 기반한 사실을 서술하는 논픽션 강연자 유형이다. 그는 판타지를 지어내는 대신 현실(트럼프의 민주주의 위협)을 자세히 설파하는데, 이는 도덕적으로 온당할지 몰라도 잘 짜인 이야기에 열광하는 ‘호모 픽투스’ 관점에선 그리 매력적인 설득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이야기는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 매력에 관여하는 요소다. 권력이 타인의 복종을 강제하는 힘이라면, 매력은 옳든 그르든 타인이 스스로 다가오게끔 하는 힘이다. 이번 미국 대선은 그 매력의 경중에 따라 초박빙 승부가 결정될지도 모른다. 권력이 매력을 강제할 순 없지만, 매력은 종종 권력 창출의 중요한 발판이다.     정강현 워싱턴 특파원

    2024.10.29 00:36

  • [글로벌 아이] 매듭이 필요한 순간

    김현예 도쿄 특파원 생쪽에 국화, 장구, 매화, 병아리에 파리, 잠자리까지. 부끄럽게도 다양한 이름이 붙은 우리 매듭 종류가 무려 38가지나 있다는 사실을 안 건 김혜순 매듭장(국가무형문화재)을 만나고 나서였다. 55년간 매듭짓는 일을 해온 그의 나이는 올해 80세. 지난 23일 일본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위해 도쿄를 찾은 그를 만났다. 김 매듭장은 실 이야기부터 꺼냈다.   먼저 여러 가닥의 실을 짜 매듭의 원형 같은 끈목을 만든다. 이 끈이 만들어진 뒤에서야 매듭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기본형으로 불리는 38가지 매듭을 수직으로 엮어가며 작품을 만드는데, 우리 매듭의 특징인 술을 다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렇기에 지난한 시간, 실과 끈을 마주하는 끈기와 절제, 그리고 사람에 대한 마음까지 담아야 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단다. “예컨대 결혼식에 쓰이는 매듭이라면 두 사람을 연결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그런 마음을 담아요. 가정의 융성과 화평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매듭을 마주해야 제대로 된 매듭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3년을 공부해야 기본을 알고, 10년을 해야 매듭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매듭에 노리개나 허리띠, 갓끈, 부채 고리에 다는 선추(扇錘) 같은 장신구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김 매듭장은 천에 자수를 놓고 매듭으로 한폭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무대 장치에 도전하며 전통 매듭의 영역을 넓히는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김혜순 매듭장이 지난 23일 일본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매듭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매듭은 인생”이라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집도 ‘짓고’, 밥도 ‘짓고’, 매듭도 ‘짓는다’고 우리 선조들이 말한 데엔 까닭이 있다는 거다. “매듭은 끈의 굵기, 색이 다 다르니 하나하나 과정이 소중해요. 재능도 필요하지만, 끊임없이 궁리하고 인내심을 갖고 노력해야 해요. 한 번 지은 매듭은 되돌릴 수도 없어요. 인생도 그렇잖아요? 어떤 일이 있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반백 년 한길을 걸어온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웃 나라 일본서까지 한국서 벌어지고 있는 ‘대통령 아내’ 논란이 화제다. 명품 가방을 받고, 주가조작 사건에 휘말리고, 공천개입 논란까지 일으킨 ‘그 여사’ 얘기다. 최근 일본의 한 지인과 일본 새 총리 등장과 함께 내년으로 다가온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 어찌 될 것 같냐는 이야기를 나누다 “그것보다 아내 일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 같냐”는 질문에 일순 대화가 멈췄다. 부끄러움은 왜 국민의 몫이어야 하나. 정말, 매듭이 필요한 순간이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2024.10.25 00:22

  • [글로벌 아이] 주미대사가 ‘미국법 위반’ 자인한 이유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지난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주미대사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조현동 대사는 “현지 채용 직원들의 급여가 DC의 최저임금보다 낮아 구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인력 충원의 어려움을 호소한 말이다.   그런데 조 대사는 해당 발언을 하면서 “이 내용은 현안보고엔 빠져있다”고 했다. 그의 말은 사실 ‘대한민국 정부가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실토에 가까운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워싱턴DC 주미대사관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조현동 대사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법으로 정한 DC의 최저시급은 7월부터 17.5달러가 됐다. 1년 52주, 주 40시간 근무한다는 전제로 단순 계산한 최저연봉은 3만6400달러다. 이를 12달로 나눈 월급은 3033달러가 넘어야 한다. 대사관 현지 인력의 초급인 ‘3000달러 전후’보다 높다. ‘불법 구인’을 해야 하는 대사관엔 구멍이 뚫리고 있다. 당장 영사관 민원 창구 6개 중 1개가 폐쇄됐고, 남은 5개도 정년이 도래한 직원 2명을 설득해 간신히 운영하고 있다.   현지 변호사에게 자문했더니, 항소법원의 판결문을 제시했다. 주미 캐나다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현지 채용자가 다친 뒤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미국법에 따른 보상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1심 법원은 ‘외국 주권 면책법(FSIA)에 따라 미국법에 따를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지만, 항소법원은 이를 기각하고 ‘고용 관계에선 대사관도 미국법이 적용된다’고 결정했다. 변호사는 “판례가 있기 때문에 부당 노동 행위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면 한국 정부가 책임을 지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문제는 또 있다. 익명을 원한 외교관은 “대사관에선 민감한 정보가 다뤄진다”며 “예산 때문에 고급 인력을 뽑지 못하면 자칫 보안에 치명적인 인사가 의도적으로 유입하는 것을 막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토로했다. 실제 기자는 북한과도 동시 수교한 국가에 부임한 외교관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는 차량 이동 내내 “말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비용 때문에 채용한 현지인 운전기사를 믿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현지 채용과 관련한 비용 문제는 외교부 공관장 회의 때마다 제기돼 왔다. 그러나 매번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올해 국감에서도 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임금과 물가 등을 무시한 채 “해외 업무를 하는 공기업의 미국 채용자 중엔 1억 연봉자가 많은데 인도에서 채용한 직원의 연봉은 876만원에 불과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고물가 지역에서 채용한 직원의 임금을 깎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2024.10.22 00:26

  • [글로벌 아이] 뒤끝이 나쁘다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베이징 시내에서 100㎞ 정도 떨어진 허베이성 랑팡시에서 한 대형 아파트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취재를 마친 뒤 국도를 타고 복귀하던 길이었다. 허허벌판 위로 15층짜리 아파트 9개 동이 우뚝 솟아있었다. 맨 꼭대기엔 머리카락처럼 제멋대로 휘어진 철근들이 보였다. 회색빛 뼈대만 있는 건물은 하늘에 더 가까이 닿지 못한 채 성장을 멈췄다. 40만㎡ 규모로 조성된 단지엔 잡초만 무성했다. 개방형 정문 자리에 대신 설치된 철문은 굳게 걸어 잠겼다. 자물쇠 위엔 누렇게 녹이 내려앉았다. 한참이나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듯 했다.   중국 허베이성 랑팡시 한 대형 아파트단지가 미완공 상태로 장기간 방치되고 있다. 이도성 기자 이른바 ‘란웨이러우(爛尾樓·짓다 만 아파트)’다. ‘뒤끝이 나쁘다’는 란웨이에 건물을 뜻하는 러우를 더한 단어다. 이곳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엔 또 다른 란웨이러우가 있었다. 고급 빌라가 될 예정이던 3층짜리 건물엔 건축자재만 가득했다. 사방을 둘러싼 가림막 앞으론 건축 쓰레기가 작은 동산을 이뤘다. 인근 주민은 “이 주변엔 ‘란웨이러우’가 여러 곳 있다”며 “벌써 몇 년째 똑같은 상태로 방치돼 있다”고 말했다.   40년간 차근차근 쌓여온 중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은 2021년 꺼지기 시작했다. 중국 최대 부동산 개발회사 헝다가 채무불이행 상태가 되면서다. 중국 성장의 견인차는 바퀴가 고장 난 채 가뜩이나 동력을 잃은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현재 베이징 같은 1선 도시 곳곳에서도 짓다 만 고층 빌딩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경제 중심지에서 멀어질수록 더 많은 ‘란웨이러우’가 흉물로 남아있다. 월스트리스저널에 따르면 중국 전체 빈 주택은 9000만 채 이상이다.   경제성장률 목표 ‘5% 안팎’을 달성해야 하는 중국 당국은 연이어 부양책을 꺼내 들었다. 올해 3분기 국내총생산(GDP) 발표를 하루 앞둔 17일엔 부동산 대책도 내놨다. 부동산 부문은 건설 등 인접 산업과 함께 중국 GDP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침체한 부동산 시장을 살리기 위해 우량 부동산 대출 공급을 연말까지 4조 위안(약 766조원)으로 늘리고 빈민촌 등 노후 주택 100만 호를 개조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지난달 말 대규모 경기 부양책 발표 뒤 최대 명절인 국경절 연휴를 거치면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주택 매수가 증가하는 등 부동산 시장이 꿈틀거리고 있다. 부동산이 살아나면 웅크린 중국 경제에도 날개를 달아줄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눈앞으로 ‘란웨이러우’ 옆 주민의 표정이 스친다. 그는 “모두 외지인의 것”이라며 “(아파트 완공이) 나랑 무슨 상관인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2024.10.18 00:57

  • [글로벌 아이] 100년 만에 발견된 에베레스트의 유해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지난 주말, 세계 산악계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인 에베레스트 최초 등반 논란을 풀 실마리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24년 6월 8일 지구 최고봉인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하다 실종된 영국 탐험가 앤드루 어바인의 가죽 등산화와 그의 이름 ‘A. C. Irvine’이 박음질 된 울 양말이 발견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양말 속에서는 어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도 있었다. 정확히 실종 100년 만의 일이다. 유해는 유명 등반가이면서 영화감독 겸 사진작가인 지미 친(Jimmy Chin)이 이끄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에베레스트 북면 아래 롱북빙하에서 지난 9월 발견해 조사를 거쳐 언론에 공개됐다.   지난 주말 공개된 100년 전 에베레스트를 최초 등반하다 실종된 앤드루 어바인의 등산화. [AP=연합뉴스] 실종 당시 22살의 영국 옥스퍼드대 학생이었던 어바인은 정상을 약 250m 남겨둔 높이 8600m 지점까지 오른 것이 목격됐다. 하지만 그 직후 구름떼가 덮치며 어바인의 행방은 미궁에 빠져버렸다. 함께 정상을 향하던 산악인 조지 맬러리의 유해는 1999년에 발견된 바 있다. 과연 이들이 에베레스트 최정상을 밟았는지는 산악계 최대 관심사이자 논란거리였다. 사실이 확인된다면 세계 최초의 에베레스트 정복 기록은 다시 써야 한다. 지금까지는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의 1953년 등정이 세계 최초로 알려져 있다.   어바인 유해의 발견은 이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한편으로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100년 동안 눈 속에 꽁꽁 얼어붙어 있어 눈에 띄지 않았던 유해가 에베레스트의 눈과 얼음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세상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점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지미 친은 유해가 발견되기 일주일 전부터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렇듯 문제는 심각하다. 기후변화로 지구 온도가 올라가면서 에베레스트를 뒤덮은 눈이 녹으며, 눈 아래 얼음층이 노출되고 있다. 햇빛을 반사하는 흰 눈과 달리 어두운 색의 얼음은 햇빛을 흡수한다. 이는 얼음 녹는 속도를 가속하는 결과를 빚는다. 에베레스트 환경 변화가 더 가팔라지는 것이다.   어바인이 갖고 있던 코닥 카메라도 앞으로 추가로 발굴될지도 관심사다. 필름이 현상·인화 가능한 상태로 남아있다면 에베레스트 세계 첫 등정 미스터리 해결의 결정적 증거가 될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과거가 드러나고 있지만, 이는 우리가 맞이할 미래를 위한 밝은 징후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안착히 글로벌협력팀장

    2024.10.15 00:20

  • [글로벌 아이] 연이어 닥친 미 허리케인…대형 재난의 선거공학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대형 재난이 닥치면 정부의 진짜 실력이 드러난다. 특히나 선거를 앞두고 터진 재난 재해와 정부의 대처 능력은 유권자들에게 중요한 심판 척도가 된다.   미국도 그랬다. 2005년 8월 미 본토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최소 1380명의 인명 피해(사망·실종)를 낳았고, 대응 및 피해 수습 과정에서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듬해 상·하원 중간선거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반면 2012년 대선을 일주일 남겨놓고 허리케인 샌디가 닥치자 대책회의를 진두지휘하고 공화당 소속 크리스 크리스티 당시 뉴저지 주지사와 피해 현장을 돌며 재난 대응 사령탑 이미지를 부각시킨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막판 부동층 표를 흡수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 아이젠하워 청사에서 허리케인 ‘밀턴’ 관련 브리핑을 듣고 있다. [AFP=연합뉴스] 2주 전 핵심 경합주 노스캐롤라이나·조지아를 포함한 남동부를 휩쓸며 2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허리케인 헐린에 이어 또 하나의 초대형 허리케인 밀턴이 남부 플로리다를 관통했다. 11월 5일 미 대선을 앞두고 연이어 닥친 대형 재난이 ‘옥토버 서프라이즈(10월의 돌발변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공교롭게도 피해 지역 상당수가 공화당 강세 지역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바이든·해리스 행정부의 대응을 질타하며 공격 소재로 삼고 있다. “연방정부와 노스캐롤라이나의 민주당 주지사가 공화당 지역 사람들을 돕지 않으려 한다”고 비난했고, “해리스가 연방재난관리청(FEMA) 자금 10억 달러(약 1조3400억원)를 불법 이민자 주택 비용에 썼다”고 주장했다. 근거가 뭔지는 대지 않았다. 일부 극우 인사들은 심지어 “정부가 허리케인 경로를 조작해 공화당 우세 지역에 피해가 집중되게 했다”는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다.   이런 공격이 잘 먹혀들지는 않는 모습이다. 노스캐롤라이나 유력 지역지인 샬럿 옵서버는 최근 사설을 통해 “트럼프가 재난 상황을 정쟁화하며 거짓과 음모를 유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선거운동의 기회가 아니다”는 경고도 했다.   선거가 임박할 때 유권자들의 민심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할퀴고 간 상처가 드러나듯 투표가 끝나고 나면 민심의 매서움을 실감하게 된다. 미 유권자들도 조용히,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바이든·해리스의 재난 대처가 어땠는지를, 그리고 트럼프가 편 재난의 정치 무기화가 타당했는지를 말이다. 그 결과가 투표함 개봉과 함께 표출될 날이 머지않았다.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2024.10.11 00:32

  • [글로벌 아이] 일본 정부가 하지 못하는, 아니 하지 않는 일

    정원석 도쿄 특파원 “물이 쏟아진다! 천장이 뚫렸다!”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 30분경,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宇部)의 해저 탄광에서 석탄을 캐고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다. 도코나미(床波) 해안 입구부터 1㎞ 먼바다에 떨어져 있던 지점의 갱도 천장이 뚫렸다. 바닷물이 빠른 속도로 유입됐고 인부들은 입구를 향해 질주했다. 넘어지면 그대로 밟혀 일어나지 못했다.   물은 갱도 입구까지 삽시간에 차올랐다. 이날 따라 채굴량을 늘리라는 재촉을 받던 오전조 183명이 나오지 못했다. 사고 소식에 자다 뛰쳐나온 야간조는 입구를 목전에 두고 물에 휩쓸리는 동료를 목격했다. 가족들은 물이 넘실대는 갱도를 바라보며 “아이고, 아이고” 울부짖었다. 곡소리는 며칠 동안이나 계속됐다.   이번에 발견한 장생 탄광의 갱도 입구. 정원석 기자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는 이름이 무색한 장생(長生·죠세) 탄광 참사 이야기이다. 이 해저 탄광은 ‘조선 탄광’으로 불렸다.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광부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희생자 중 136명은 조선인이었다.   우베시 전체 석탄 생산량의 90%는 장생 탄광 같은 해저 탄광에서 나왔다. 고된 노동인 만큼 대우가 좋아 일본인도 선호했지만, 장생 탄광은 예외였다. 위험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김원달씨는 생전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바다 밑 갱도에선 어선의 ‘통통’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썼다. “철조망과 무장 경비들이 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출해 어머니에게 돌아가겠다”던 그는 결국 인재(人災)에 희생됐다. 당시 법으로 장생 탄광은 채굴을 하면 안 됐다. 지층 두께가 40m가 넘어야 했지만, 30m에 불과했다. 탄광 사장은 이후 재판에서 “법을 위반했다”고 털어놓았다.   사고는 무관심과 은폐 속에 잊혔다가 반세기가 지나 한 일본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2013년엔 시민 모금으로 마련한 1600만 엔으로 추모 공간도 만들었다. 희생자 183명의 이름을 새기고, 강제노동과 참사에 대해 사과를 담은 추도문도 붙였다. 이들은 수소문해 찾은 유족들과 일본 정부에 유골 발굴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유골 위치를 알 수 없다”며 발굴 작업에 난색을 보였다.   이들은 직접 크라우드펀딩에 나섰다. 한일 양국에서 천엔, 만엔이 모여 800만 엔이 됐다. 증언을 바탕으로 굴착기를 동원해 갱도를 찾다 지난 9월 25일, 입구를 발견했다. ‘장생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지난 30년 활동의 결과이다. 이노우에 요코(井上洋子) 대표는 “정부가 유골 위치를 모른다며 도망칠 핑계로 삼는다면, 직접 유골이 있다고 확인시켜주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원석 도쿄 특파원

    2024.10.08 00:35

  • [글로벌 아이] ‘이시바 시대’ 중·일 관계와 대만, 그리고 한국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이시바 시게루(石破茂·67) 일본 총리가 취임했다. 중국은 절제된 반응을 보였다. 외교부 대변인이 먼저 “중·일 네 개의 정치문건이 확립한 각 항목의 원칙과 컨센서스를 엄수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당선 축전에서 똑같이 말했다.   암호 같은 축전을 해독하려면 지난 여름에 벌어졌던 ‘사건’부터 살펴야 한다. 지난 7월 26일 라오스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가미카와 요코(上川陽子) 일본 외무상이 만났다. 회담 후 “일본 측은 하나의 중국 입장을 견지하며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밝혔다”라고 중국이 발표했다.   곧 사달이 벌어졌다. 8월 1일 일본 기자가 린젠(林劍) 중국 대변인에게 “중국 측 발표가 정확했나” 캐물었다. 린 대변인은 “하나의 중국 원칙은 국제 관계의 기본 준칙이자 국제 사회의 보편적인 컨센서스”라며 “일본은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서 이를 승낙했다”라고 대답했다.   지난 8월 13일 이시바 시게루 의원(왼쪽)이 라이칭더 대만 총통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대만 총통부] 2일 가미카와 외무상이 직접 나섰다. 기자를 만나 “일본의 대만 입장은 1972년 일·중 공동성명에 적힌 바와 같다. 이 입장에 변화는 없다”라고 했다. “중국 측 발표가 일본 측 발언을 정확히 보여주지 않았다”며 중국에 항의한 사실도 확인했다.   중국은 당황했다. “일·중 공동성명에 적힌 바”라는 워딩을 “하나의 중국 입장을 견지한다”로 고친 것에 일본이 정색하고 나서서다. 일본도 중국의 저의를 의심했다. 두 나라 모두 정면을 공격할 듯 위장한 뒤 후방을 치는 병법 암도진창(暗度陳倉)을 떠올렸다.   새로운 이시바 총리는 ‘하나의 중국’을 어떻게 요리할까. 그는 대만을 줄곧 왕래한 대만통이다. 지난 8월에도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총통과 만나 “오늘의 우크라이나는 내일의 아시아”라고 했다.   이시바 총리는 ‘아시아판 나토(NATO)’ 창설을 주장한 안보통이다. 동시에 2002년 방위상 취임 이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또 “중국 최고 지도자는 10년마다 일본을 방문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중국 포용론자이기도 하다.   11월 미 대선이 끝나면 페루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린다. 시 주석과 이시바 총리의 회담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1992년 수교성명에서 ‘하나의 중국’ 입장을 존중한다고 했다. 최근 논란인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의 지지와 맞바꿨다. 모든 통일은 ‘현상 변경’이다. 또 대만해협과 한반도 평화는 모두 중요하다. 중국·일본 정치인의 관련 발언을 토씨 하나까지 놓칠 수 없는 이유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10.04 00:14

  • [글로벌 아이]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정강현 워싱턴 특파원 우버 차량은 펜실베이니아 대학 캠퍼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전날(9월 10일) 미국 대선 TV 토론 취재 현장에서 직접 들은 해리스의 말 한마디 때문에 잡아탄 우버였다. “와튼 스쿨에서도 트럼프의 경제 정책이 재정 적자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거라고 지적했고….” 트럼프가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 와튼 스쿨 출신임을 상기시키면서 비꼰 말.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우버는 필라델피아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중이었고, 나는 예순쯤 돼 보이는 백인 운전사에게 어색한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해리스가 이겼단 평가가 많던데 어제 토론은 어땠어요?” “글쎄요, 보다 말다 해서….” “트럼프가 워낙 거짓말을 많이 하던데요.” 우버 기사는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창문을 내리더니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도대체 뭐가 거짓말이란 거죠?”   지난 7월 15일 밀워키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트럼프 지지자가 객석을 바라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 운전사는 모른 체했거나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트럼프는 토론 내내 사실이 아니거나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놨다. 예컨대 그는 ‘오하이오 주 스프링필드에선 이민자들이 개와 고양이를 먹는다’는 거짓말을 수천만 명이 지켜보는 생방송 도중에 공공연히 꺼냈다. ‘(민주당 지지 성향 일부 주에선) 출산 후 낙태가 이뤄진다’는 거짓말은 또 어떤가. 공적 무대인 TV 토론에서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공직자 후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질문은 꼬리를 물었지만, 트럼프를 향한 맹신을 감추지 않는 그에게 차마 더 물어볼 순 없었다.   한 달 남짓 남은 미국 대선은 이성적 판단이 아닌 맹목적 믿음의 대결로 변질되는 것 같다. 거짓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거짓말일지라도 기꺼이 믿으려는 유권자들이 결집해 ‘트럼프 바람’을 다시 일으키는 중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해리스 쪽에도 이 같은 맹신의 바람은 분명히 있다. 역사상 최악의 양극화 선거가 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점차 현실로 굳어져 가는 모양새다.   세계 최고 경영대라는 와튼 스쿨은 진리를 탐구하는 젊음으로 찬란했다. 저 나이 무렵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트럼프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진리를 좇았을까. 진리나 진실과 무관한 지점에서 거짓말이 쏟아져도 초박빙 판세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 희한한 대선이다. 역사상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대선이라는 미국 언론들의 분석이 호들갑만은 아닌 것이다. 가을의 초입이었지만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엔 더운 바람이 불었다.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정강현 워싱턴 특파원

    2024.10.01 00:24

  • [글로벌 아이] 전통을 지킨다는 것

    김현예 도쿄 특파원 정좌한 이의 쉼 없는 붓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숨마저 죽이게 된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목기를 한손에 들고, 갓난아이 얼굴을 쓸어내리듯 넙적붓으로 느리고 부드럽게 옻칠을 해나간다. 칠기 하나를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꼬박 2개월. 작은 나무 책상 앞에 앉아 옻칠을 반복하는 사이토 시호를 지난 11일 이와테현 하치만타이시 앗비(安比) 칠기공방에서 만났다.   올해 나이 서른셋. 처음부터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여느 젊은이들이 그렇듯, 도회지로 떠나 취업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깜짝 놀랐다. “고향이 칠기로 유명한 곳 아냐?” 이와테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옻과 칠기의 산지. 칠기에 무심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고, 한편으론 고향의 유명세가 놀랍기도 했다. 고향엔 숙식만 해결하면 무료로 칠기 기술을 전수해주는 센터도 있었다. 고향의 전통을 지켜보자는 생각에 고민 끝에 짐을 쌌다. 당시 나이 29살. 2년간 공부를 한 뒤, 칠장이가 됐다.   지난 11일 일본 이와테현 한 칠기공방에서 사이토가 목기에 옻칠을 하고 있다. 김현예 기자 최근 일본 전통 산업 현장에선 사이토와 같은 젊은이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사이토가 칠기를 배운 센터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10대부터 20대 청년이 수두룩하다. 옻 생산 현장도 마찬가지다. 이와테현 니노헤시의 한 옻나무밭. 옻 채취 작업을 하는 5명 모두 20~30대. 이들은 허리춤에 곰을 쫓는 방울을 달고, 무선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놓고 일한다. 한 청년은 “후계자가 부족하단 이야기를 듣고 참여하게 됐는데, 이 기술을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했다.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에 있는 철기공방 타야마스튜디오도 그렇다. 고령의 주철 장인들이 땀 흘려 일하던 공방에서 이젠 20대 청년들이 숯불을 피워 옛 방식대로 철기 주전자를 만든다. 이와테의 명물 ‘남부 철기’다.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 후 이곳으로 옮겨와 올해로 7년째 철주전자를 만들고 있는 나가사카 하이토는 “전보다 스스로 노련해졌다고 느낄 때가 가장 즐거운 순간”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고령화를 맞이한 일본이 전통 산업 계승자를 그냥 찾아낸 건 아니다. 패전 후 사라지다시피 했던 옻나무를 심고, 생산부터 복원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이뤄진 국가 지원책, 장인으로부터 2년간 무료로 전수할 수 있도록 한 지방 도시의 촘촘한 교육 지원 등이 맞물려 마중물 노릇을 했다.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이런 것이지 않을까.     김현예 도쿄 특파원

    2024.09.27 00:24

  • [글로벌 아이] TV토론이 성사되지 않는 이유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70인치 TV의 가로 길이는 158㎝, 세로는 88㎝다. 스마트폰 화면은 더 작다. 지난 10일 6710만 명의 미국의 유권자들은 이 작은 화면을 다시 좌우로 나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함께 띄운 포맷의 TV토론을 봤다.   트럼프는 해리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무시 전략으로 읽혔다. 반면 해리스는 내내 트럼프를 응시하며 집요한 추궁을 이어갔다. 결과적으로 방송된 화면은 트럼프를 향해 호통치는 해리스와, 정면만 응시한 채 호통을 듣는 트럼프의 모습이 됐다. 그리고 토론 직후 유권자의 63%는 해리스가, 37%는 트럼프가 승리했다고 평가했다.   지난 10일 화면이 분할돼 방송된 TV 토론을 지켜보는 미국의 유권자들. [AP=연합뉴스] 6월 바이든 대통령과의 토론 장면은 달랐다. 당시엔 바이든을 향해 ‘실정’을 지적한 트럼프와, 혼이 나는 학생처럼 고개를 숙인 채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바이든이 좌우로 분할돼 반복적으로 노출됐다. 결과는 트럼프의 압승이었다.   유권자들은 토론의 내용 못지않게 영상과 이미지에 주목한다. 1960년대 존 F 케네디가 작은 흑백 브라운관 TV에서도 증명한 정치학의 고전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 토론은 바이든의 후보 사퇴로 이어진 6월과는 달리 해리스의 극적인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웬디 쉴러 브라운대 교수는 “대선이 임박하면서 토론의 영향력이 부동층에 대한 확장보다는 기존 지지자에게 확신 또는 실망을 주는 정도로 축소됐다”며 “해리스가 트럼프의 평정심을 잃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도록 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시다 스코치폴 하버드대 교수는 처음부터 “두 사람의 추가 TV토론은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의 ‘고령 논란’은 민주당 지지자가 지지를 철회하게 만들 수 있는 이슈였던 반면, ‘해리스는 급진 좌파’라거나 ‘트럼프는 이상하다(weird)’는 프레임으로는 ‘집토끼’들의 지지를 철회하도록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괜한 부담을 지고 실효성 없는 토론을 할 이유가 적다는 설명이었다.   남은 기간엔 본격적인 진흙탕 싸움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이미 거짓말도 불사한 주장을 편다. 아직 미래를 내세우는 해리스 역시 끝까지 이 기조를 유지할지 미지수다.   토머스 슈워츠 밴더빌트대 교수는 “미국이 계속 ‘자유와 민주주의의 등불’로 남을 수 있을지를 결정할 위험한 선거”라고 했다. 전문가들도 극단적 양극화가 장기화할 거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절반으로 분할된 TV토론 화면처럼 말이다.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2024.09.24 00:29

  • [글로벌 아이] ‘혐오의 씨앗’이 싹튼다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정말 걱정이다. 중국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   18일 중국 광둥성 선전시에서 벌어진 일본인 초등생 흉기 피습 사건에 대한 한 일본인 남성의 반응이다. 10살짜리 피해 학생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하루 만에 숨졌다. 등굣길을 함께 하던 부모도 참극을 막지 못했다.   중국에서 4년째 거주 중인 그는 “나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면서 “외국인의 안전을 지켜주겠다는 중국 정부의 말을 믿을 수밖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라고 수화기 건너에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제 막 4살이 된 그의 아이는 자택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유치원에 다닌다.   18일 피습사건이 발생한 중국 광둥성 선전시 일본인 학교에서 당국이 조사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붙잡힌 피의자는 44세 중국인 남성이다. 범행 동기는 아직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중국 당국은 사건을 추가 조사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건 날짜를 두고 묘한 해석이 나온다. 93년 전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은 이날을 국치일로 지정하고 주요 도시에서 추도식을 열어왔다. 반일감정이 이번 범행의 기폭제가 됐을 거란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중국 내 일본인을 향한 공격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지난 6월엔 장쑤성 쑤저우시에서 중국인 남성이 일본인 모자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하교 중인 일본인 학교 스쿨버스가 습격당했다. 이 남성을 막으려던 중국인 여성 안내원이 결국 숨졌다. 일본인 모자도 상처를 입었다. 지난해 8월엔 산둥성 칭다오시 일본인 학교에 돌이 날아들었다.   비단 일본뿐 아니다. 곳곳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이어졌다. 지난 6월 지린성에서 미국인 대학 강사 4명이 흉기에 찔려 쓰러졌고, 지난 3월엔 쓰촨성에서 시위 현장을 취재하던 네덜란드 기자들이 폭행당했다. 그럴 때마다 중국 당국은 ‘우발적 범죄’라는 점만 강조했다.   이러한 외국인 대상 범죄의 근간엔 ‘중국식 애국주의’가 있다. 외국인을 배척하고 맞서야 할 ‘적’으로 보는 인식이다. 외국 기업 불매운동이 대표적이다. 결국 강력 사건까지 벌어졌다. 관영 매체들은 그제야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중국에 촘촘히 뿌려진 ‘혐오의 씨앗’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있다.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지 불 보듯 뻔하다. 이를 방조해왔다는 눈초리를 받는 중국 당국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 모든 외국인의 안전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겠다”는 말이 공염불에 그치지 않길 바란다.     이도성 베이징 특파원

    2024.09.20 00:44

  • [글로벌 아이] 미 대선 흔드는 ‘거짓말’의 정치학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결국 물러난 이유는 불법 도청이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거짓말 때문이었다. 닉슨에 이어 두 번째로 탄핵 대상이 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역시 비슷했다. 성 추문이 아니라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거짓말이 사유가 됐다. 미국 최고 권력자에게 거짓말이 어떻게 치명상을 안기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선거판에서 상대 후보의 권위와 신뢰를 무너뜨리고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는 논점을 흐려 피해 가는 대표적인 기술이 ‘거짓말쟁이’ 낙인찍기다. ‘세기의 대결’로 불린 10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간 TV 토론. 눈길을 끈 건 두 후보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이는 장면이었다.   지난 10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선 토론에서 맞붙은 카멀라 해리스(오른쪽)와 도널드 트럼프. [AFP=연합뉴스] 뜨거운 이슈인 낙태권 문제가 불을 댕겼다. 트럼프는 먼저 “해리스가 택한 부통령 후보는 임신 9개월 낙태도 괜찮고, 출생 후 죽임(execution after birth)도 괜찮다고 말한다”고 주장했다. 해리스는 “처음부터 말씀드렸듯 오늘 거짓말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맞받으며 “트럼프가 재선하면 전국적인 낙태금지법에 서명할 것”이라고 역공을 폈다. 트럼프 역시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응수했다.   트럼프는 정부 기관을 향해서도 ‘거짓말’ 공격을 퍼부었다. 이민자 폭증의 심각성을 거론하며 “그들이 주민의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주장을 내놨다가 진행자가 “FBI는 범죄가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고 짚자 “FBI의 사기”라고 했다. 구체적인 근거는 대지 않았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로 잘 알려진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저서 『리더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에서 위정자가 ‘공포 조장’이나 ‘전략적 은폐’ 같은 유형의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나면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맞을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다. 대선 TV 토론은 후보의 자질과 품성, 능력을 검증하는 무대다. 미 국민 6700만여 명이 시청한 TV 토론에서 명확한 논거 없이 자신에게 불리한 얘기를 거짓말로 몰거나 사실관계를 비트는 허위 주장을 늘어놓는다면 책임 있는 국가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다.   뉴욕타임스(NYT)를 비롯한 권위 있는 매체가 TV 토론에서 발언 하나하나를 팩트체크하는 것은 그래서다. NYT가 트럼프 발언 33건을 팩트체크한 결과 16건이 ‘거짓’으로 판단됐다. 해리스는 조사 대상 발언 8건 중 2건이 ‘거짓’으로 판정 받았다. 이런 팩트체크 결과와 11월 5일 대선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2024.09.13 00:16

  • [글로벌 아이] 유력 차기 일본 총리 후보의 ‘결착’과 ‘감사’

    정원석 도쿄 특파원 “당신이 일본 총리가 돼 G7 정상회담에 나갔다간 ‘지적 수준이 낮아서 망신당할 것’이란 걱정이 많다.”   지난 9월 6일 일본의 새로운 총리에 출사표를 내던진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43) 전 환경상의 출마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프리랜서라고 밝힌 한 일본 기자가 던진 말이다. ‘매듭’이나 ‘해결’을 뜻하는 ‘결착(決着)’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비장한 표정으로 연설을 이어가다 저 말을 듣곤 입술을 살짝 깨무는 모습도 중계 화면에 잡혔다.   5년 전 환경상 재직 당시 기후변화 대책을 묻는 질문에 “재미있고, 쿨하고, 섹시하게”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이후 그 장면은 온라인에 박제됐고, ‘멍청하다’는 이미지가 쫓아다녔다. 질문을 가장한 ‘막말’이라 느꼈을 법도 한데, “과거 발언을 반성하고 있다”며 “총리직을 내려놓을 때쯤이면 그래도 ‘괜찮은 녀석이었다’는 평을 받겠다”며 대처했다.   지난 7일 도쿄 긴자에서 고이즈미 신지로 자민당 총재 후보가 가두 연설에 나서고 있다. 정원석 기자 앞으로 연달아 이어질 TV토론을 앞두고 자민당 내에선 “밑천 드러나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 나온다곤 하지만, 현재까진 고이즈미 후보가 총재 선거에서 승리해 일본 총리가 되는 미래가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되고 미디어에 노출이 된다. 출마 발표 직후인 7일 주말, 도쿄 긴자(銀座) 가두연설에 나서 “기득권이 인정하는 개혁 밖엔 추진하지 못 하는 당을 개혁하겠다”고 소리 높였다. 고이즈미 후보 측은 이날 가두연설에 5000명 이상 모였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밝혔는데, 기자가 실제 현장에서 보기에는 외국인 관광객 등 유동인구를 제외하면 1000여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가 총리가 된다면 신경 쓰이는 것은 한·일 관계 등 외교 문제다. 부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82) 역시 총리 재임 기간(2001~2006)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해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샀다. 고이즈미 후보 역시 올해 8월 15일에도 야스쿠니신사를 찾았기 때문에 총리가 돼서도 참배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앞으로 적절히 판단하겠다”면서도 지금껏 참배한 이유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 대한 감사·존숭(尊崇)을 표하고, 이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그로서는 애국선열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겠지만, 제국주의 시대의 과오를 ‘감사’란 단어로 포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가 말하는 ‘결착’에 한·일 양국이 풀지 못한 난제는 포함되지 않은 듯했다. 실제로 그의 출마 발표에 ‘한국’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정원석 도쿄 특파원

    2024.09.10 00:30

  • [글로벌 아이] 설리번이 베이징으로 온 진짜 까닭은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마오쩌둥 : “나는 우파가 집권했을 때를 더 좋아합니다.”   리처드 닉슨 : “미국에서는 좌파가 말만 하는 것을 우파가 행동으로 하지요.”   1972년 2월 미·중 첫 정상회담 대화록이다. 마오의 베이징 관저 국향서옥(菊香書屋)에서 이뤄졌다. 1990년대 비밀 해제로 알려졌다. 마오의 어록은 중국의 지침이 됐다. 다만 격렬한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 60일 남은 미국 대선을 보는 중국의 심정은 복잡하다. “트럼프와 해리스가 중국에는 두 잔의 독배”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지난달 27일 양타오 국장(가운데)과 제이크 설리번 보좌관(오른쪽)이 레드 라인을 밟고 있다. [위챗 캡처] 지난달 27~29일 제이크 설리번(48)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베이징 방문이 화제다. 많은 해석이 쏟아졌다. 중국중앙방송(CC-TV)이 SNS 계정 위위안탄톈(玉淵譚天)에 중국의 속내를 내비쳤다. CC-TV는 키워드 ‘전략적 인식 최우선’ ‘회담장 옌치후(雁栖湖)’ ‘드문 군사 회견’ ‘두 번째 2라운드’로 설리번의 베이징 50시간을 재구성했다. 네 번째 키워드를 공항에서 서로 레드라인을 밟은 채 악수하는 양타오(楊濤) 북미국장과 설리번의 사진으로 시작했다. 이어 “바이든 정부의 임기가 곧 끝나는데, 성사된 사안이 (대선이 끝나는) 3개월 뒤에도 유효할까”라고 물었다.   답안도 제시했다. 무역 실무그룹 2차 차관급 회의, 2차 인공지능 대화, 존 포데스타 기후특사 방중 등 세 가지 ‘제2라운드’를 제시했다. 끝으로 “이러한 불변(不變)이 중·미 관계를 견인해 건강하고 안정적인 발전궤도로 되돌리도록 도울 것”이라고 했다. ‘불변’은 민주·공화당 행정부 교체를 원치 않는 중국의 속내로 읽힌다. 옌치후 회담장의 꽃도 눈길을 끌었다. 희고 큰 꽃잎이 인상적인 스파티필룸(Spathiphyllum)을 놓았다. 꽃말은 순수함과 평화. 중국에선 순풍을 탄 배처럼 순조로운 ‘일범순풍(一帆風順)’을 뜻한다. 민주당 후보를 돕기 위해 멀리 온 설리번에게 보내는 중국의 대답인 셈이다.   그렇다고 노회한 중국이 ‘올인’하지는 않았다. 트럼프 집권 당시 워싱턴에 근무했던 추이톈카이(崔天凱) 전 대사의 미국 파견을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지난 2016년 대선 기간 마이클 플린 안보보좌관 내정자가 러시아 대사를 만났다가 탄핵 위기까지 몰렸던 러시아 게이트의 학습효과다.   양자 외교에서 발표 자료는 대내용 선전에 불과하다는 게 외교가 속설이다. 설리번의 베이징 50시간이 미 대선 직전 선거 판세를 뒤흔들 ‘옥토버 서프라이즈’(10월에 터지는 대형 변수)까지 막아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09.06 00:14

  • [글로벌 아이] 정치의 말들, 말들의 정치

    정강현 워싱턴 특파원 문학이 말의 예술이라면, 정치는 말의 기술이다. 말을 다듬는 재주보다 말을 부리는 솜씨가 정치인의 성패를 가른다. 지난달 19일부터 나흘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를 취재했다. 전대 현장은 정치 언어 기술자, ‘연설 천재’들로 반짝였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의 ‘정치 언어’는 청중들과 스미고 짜이면서 ‘문학 언어’의 경계마저 넘나들었다.   이를테면 국내 언론에 타이틀로 뽑힌 오바마 전 대통령의 “예스, 쉬 캔(Yes, she can)”은 실은 원고엔 없는 대목이었다. 맨 앞줄에 있던 청중이 먼저 오바마의 16년 전 구호 “예스, 위 캔(Yes, we can)”을 뒤틀어 “예스, 쉬 캔”이라고 외쳤고, 오바마가 그걸 받아주면서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미셸 오바마 여사의 “두 섬씽(Do something·뭐라도 하세요)!” 역시 청중과 같은 말을 반복해서 주고받는 리듬 속에서 그 의미가 더 깊숙이 각인됐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인 미셸 여사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 ‘스타 연사’들의 강렬한 정치 언어는 그 자체로 정치 행위로 읽히기도 했다. 정치의 말들이 세심하게 정교해지면 그 말들이 정치를 주도하기도 한다는 것. 미국 정당의 축제 현장에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어쩐지 착잡해졌다. 우선 저급한 우리 정치 언어가 떠올라서였기도 했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날 그곳에서 끝내 말해지지 않은 말들 때문이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을 하면서 언급한 ‘독재자 김정은’ 이름 한 토막을 제외하면, 나흘간 한반도 문제가 연사들의 입에 오른 건 없다. 민주당은 전당대회 기간에 아예 ‘북한 비핵화’ 목표를 삭제한 정강을 추인했다. 민주당 내부에서 한반도 문제가 후순위로 밀리고 있단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하지만 끝내 말해지지 않은 말들에 대한 우리 외교 당국의 대응은 너무 느슨해 보인다. 외교부나 주미 대사관 측은 민주당 정강에서 비핵화 목표가 삭제된 배경이나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미 양국의 북한 비핵화 의지는 확고하다”는 원칙만 재확인할 뿐이다.   정치 언어에선 말해지지 않는 것 또한 강력한 메시지다. 미국 유력 정당에서 한반도 문제가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면, 즉각 대응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차라리 ‘연설 천재’ 미셸 여사의 이 간명한 명령문을 우리 외교 당국을 향한 다급한 메시지로 읽고 싶다. “뭐라도 하세요(Do something)!”     정강현 워싱턴 특파원

    2024.09.03 00:20

  • [글로벌 아이] 고시엔의 진짜 피날레

    김현예 도쿄 특파원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최고의 응원이 가능했습니다. 감사만으론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후배들에게 뜨거운 추억, 부탁합니다!”   지난 23일 일본 효고현 ‘고교야구 성지’로 불리는 고시엔 구장. 일본 전국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 한국계인 교토국제고의 승리로 경기가 끝나자, 응원 북을 끌어안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던 야마모토 신노스케(3학년) 응원단장이 모자를 벗어들고 손을 모았다. 우렁찬 인사가 향한 건 교토산업대부속고 관악부(管樂部) 학생들. 중·고교 도합, 학생이 180여 명에 불과한 교토국제고엔 응원가를 연주해줄 관악부가 없다. 그러다 보니 같은 지역 타학교 학생들이 불볕더위에도 무거운 악기를 들고 와 매 경기 옆자리에서 ‘우정 응원’을 해준 것인데, 이에 대한 감사를 표한 것이었다.   지난 23일 한국계 교토국제고가 승리하자 응원하던 야구부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김현예 기자 야마모토는 야구 선수를 꿈꿨다. “여기라면 나도 성장할 수 있겠다”는 꿈을 품고 교토국제고에 입학했다. 선수복을 입고, 맹훈련했지만 출전 선수 명단에 들 순 없었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탓이다. 고교 3학년의 마지막 여름. 일본의 여느 고교 3학년생이 대입 시험에 몰두할 때, 그는 응원단장이 돼 고시엔에 섰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시상식 피날레까지 끝까지 지켜본 뒤 그가 교토산업대부속고 관악부에 정중히 ‘뜨거운 추억’을 ‘앞으로도’ 부탁한 건, 그날이 고교 야구선수로서의 마지막 날이었던 탓이다. 야마모토의 인사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번엔 교토산업대부속고 관악부 리더인 고바야시 스키(3학년)양이 나섰다. “오늘 응원 정말 즐거웠습니다. 일본 제일, 정말 멋집니다. 응원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학생들은 서로를 향해 허리를 숙여 감사하다는 말을 주고받고, 박수를 보냈다. 교토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기 전, 두 학교 학생들은 “일본 제일, 해냈다”를 외치며 환한 얼굴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고시엔 경기가 막을 내린 지 일주일이 흘렀다.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보다, 장관의 축하 인사보다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건 고시엔 조연이지만 주연 같았던 10대 응원단장과 관악부 대표의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다.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의연함과 자신감이 이들의 말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교토국제고의 우승이 한국서도 화제다. 106회나 열릴 정도로 고시엔이 사랑받는 데엔 입시 지옥, 학원 뺑뺑이가 아닌, 이런 10대들의 성장 드라마가 있다는 걸 한국의 어른들이 한 번쯤돌아봐 주면 어떨까.     김현예 도쿄 특파원

    2024.08.30 00:36

  • [글로벌 아이] 해리스의 필승 전략은 시간 보내기?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됐다. 부통령을 지냈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 사퇴 전까지 존재감이 거의 없던 인물이다. 지난주 전당대회 연설에 관심이 쏠렸던 이유다.   전당대회가 열린 시카고 유나이티드센터에서는 버락 오바마, 미셸 오바마, 빌 클린턴 등 ‘연설의 신(神)’급 인사의 연설이 이어졌다. 무명에 가깝던 팀 월즈 부통령 후보 지명자의 15분짜리 미식축구 ‘작전지시’ 방식의 연설도 스타 탄생을 알린 계기로 평가됐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 22일 민주당 전당대회 대선 후보 수락 연설 도중 활짝 웃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에서 마지막 무대에 오른 해리스는 가장 큰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느껴진 환호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해리스는 38분의 연설 중 초반 13분을 어머니와 자신의 유년시절을 설명했다. 숨 쉴 틈 없는 환호가 나왔던 이전 연사들 때와는 달리 어색한 고요함이 반복됐다. 그리고 나머지 25분간 트럼프를 15번 언급했다.   단순화하면 집권 여당이 선거를 70여일을 남기고 당원들에게 대선 후보를 처음 소개했고, 소개를 받은 후보는 자신의 미래 비전 대신 상대방에게 반대한다는 비전을 천명했다는 의미가 된다. 미국 정치사를 연구해온 로버트 슈멀 노터데임대 교수는 “해리스는 과거 성장기가 아니라 미래 리더십을 보였어야 했다”며 “왜 최고사령관이 돼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해리스는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 출신이다. 상원의원 4년 만에 부통령으로 발탁돼 정치경력이 짧다. 부통령 때는 외교, 안보, 경제 분야에서의 경험 부족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갤럽이 최근 발표한 그의 호감도는 47%까지 올랐다.   이는 정치인 해리스에 대한 평가와는 다르다. 지난해 6월 NBC방송의 조사에서 ‘부통령 해리스’에 대한 호감도는 32%로, 스스로 ‘돌아가선 안 될 과거’로 규정한 트럼프의 호감도 41%보다 낮았다.   전당대회 현장에서 만난 민주당의 한 대의원은 “해리스가 스스로 증명해야 할 과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시간은 해리스의 편”이라고 했다. “TV토론 직후인 10월 초면 이미 사전투표 국면이라 실수나 잘못이 나와도 투표에 반영될 시간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의 말은 현실적이다. 트럼프가 연일 “해리스는 언론 인터뷰도 안 한다”며 빠른 검증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미국 정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입장에선 경험해본 트럼프의 ‘2기’ 또는 검증되지 않은 ‘해리스 1기’ 중 어떤 결론이 날지 끝까지 마음 졸이며 지켜봐야 할 처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     강태화 워싱턴 특파원

    2024.08.27 00:18

  • [신경진의 차이나는 차이나] “6~7분이면 충전 OK”…중국, 전기차 이어 ‘수소차 굴기’ 박차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6~7분만 충전하면 대략 640㎞도 무리 없이 주행할 수 있다.”   지난달 방문한 상하이 자딩(嘉定)구의 수소 연료전지 시스템 제조사 제칭커지(捷氫科技·SHPT)에서 만난 관계자는 수소차의 강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기차 등 다른 신에너지차에 비해 충전 속도와 주행 거리 등 효율 면에서 뛰어나다는 주장이다. 그는 대형 디젤 상용차를 수소차가 대체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  「 상하이·베이징 등에 시범구 지정 “수소차 관용 정책 필요” 목소리 보급 정체, 과다 경쟁 등은 위기 “잠재력 큰 만큼 한·중 협력 기대” 」    베이징 다싱 국제 수소시범구의 수소충전소. 중국 내 수소충전소는 428기로 세계 1위다. 신경진 기자 지난달과 이달 상하이와 베이징의 수소산업 시범구를 각각 방문했다. 현지 업체 관계자들은 수소차와 관련 산업의 확대를 확신했다. 상하이의 수소 장비 제조사인 리파이어(REFIRE) 직원은 “2017년부터 상하이에 7.5t 수소 트럭 500대, 광둥 포산(佛山)시에는 수소 버스 455대 등을 납품했다. 실적이 계속 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파리기후협정으로 탄소 중립을 피할 수 없는 만큼 이제 수소차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상하이는 수소전지를 전기차 충전시스템으로도 활용한다. 푸둥의 한 쇼핑몰 주차장에는 리파이어와 충야파워테크놀로지가 협업한 급속충전 시설이 가동 중이었다. “별도 전력망이 없어도 10㎡ 자투리땅을 쾌속 충전소로 바꿀 수 있다”고 현지 직원은 설명했다. 지난 20일 찾아간 베이징 다싱(大興)의 국제수소시범구엔 베이징에서 창장삼각주까지 1300㎞에 이르는 수소 트럭 노선을 개척한 링뉴칭넝(羚牛氫能), 상장사 시노하이텍 등 수소 관련 기업 100여 곳과 충전소가 성업 중이었다.   리창 “수소에너지 발전 가속” 공식화 세계 전기차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은 수소차 분야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중국의 ‘신에너지차 굴기(崛起)’에는 기술 관료의 역할이 컸다. 내연기관 전문가 출신으로 2010~2020년 공업정보화부 부장을 역임하면서 중국의 전기차 정책을 진두지휘한 먀오웨이(苗圩)의 저서 『차선 바꾸기 경주(換道賽車)』에는 추진 과정이 자세히 담겨있다.   먀오 전 부장은 “‘길’이 차를 기다릴지언정 차가 ‘길’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寧可‘路’等車 不讓車等‘路’)”라며 충전 인프라 강화를 강조했다. 중국이 내연기관차를 건너뛰고 신에너지차 강국이 된 비결이다. 수소차 분야에도 ‘길이 차를 기다리는’ 정책을 적용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소 충전소(총 428기)를 보유하고 있다.   상하이 자딩의 수소기업 제칭커지(SHPT) 전시실. 신경진 기자 중국의 본격적인 수소차 질주는 2020년 9월에 시작됐다. 재정부·공업정보화부·과기부·발개위·에너지국 다섯개 부처가 ‘연료전지차 시범응용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면서 베이징·상하이·광둥 포산시·허난성·허베이성의 5대 도시 클러스터를 수소 시범구로 지정했다. 클러스터마다 파격적 지원 정책을 도입하는 한편, 보급 확산을 위해 수소 ㎏당 가격을 35위안(6600원) 미만으로 유지하도록 규정했다.   먀오 전 부장은 중국의 글로벌 수소차 시장 석권을 자신했다. “중국 제품이 한걸음에 하늘에 오를 수는 없지만, 사용 장려 정책을 수립하고, 입찰과 구매에서 과거 실적에 대해 불합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며, 사용 중 발생하는 문제는 관대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련 시장이 성숙하고 자국산의 경쟁력이 오를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수소 산업 지원은 계속될 전망이다. 지난 3월 리창(李強) 총리는 정부 업무보고에서 “첨단 신흥 수소에너지, 신소재, 혁신 신약 산업의 발전을 가속하겠다”라고 말했다. 처음으로 수소 분야가 국가 역점 사업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지난달 11일 찾아간 상하이 푸둥 쇼핑몰의 수소전지를 활용한 급속 충전 시설. 신경진 기자 물론 현재 업계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수소차의 높은 가격 때문에 보급은 지체되고, 관련 기업들은 미수금이 늘면서 ‘자금 보릿고개’에 직면한 상황이다. 지난 15일 중국 경제지 ‘제일재경’은 전환기를 맞은 수소차 업계의 현실을 전하기도 했다.   중국자동차제조협회 집계에 따르면 2023년 중국이 생산한 수소연료전지 차량은 5631대, 판매 차량(전년도 재고 포함)은 5791대에 그쳤다. 전년 대비 49.4% 늘긴 했지만, 96개 기업의 합산이란 점을 고려하면 아직 ‘규모의 경제’와는 동떨어져 있음을 짐작게 한다. 실제 100대 이상을 판매한 기업은 15곳에 불과했다. 2024년 상반기 판매량은 2490대로 집계됐다.   김영희 디자이너 중복·과잉 투자 우려도 나온다. 중국의 31개 지방정부 중 27곳이 수소산업 계획을 세웠다. 7월 기준 등록된 수소 관련 기업 총수는 4000개사가 넘는다. 미수금이 쌓이면서 선수금 60% 없이는 계약부터 꺼리는 분위기다.   김영희 디자이너 업계는 보조금 확대를 요구한다. 49t 수소 트럭의 제조가는 120만 위안(2억2500만원)으로, 현재 보조금 37만 위안(6900만원)을 고려해도 판매가 50~60만 위안에 불과한 디젤 트럭보다 20~30만 위안이 비싸다. 제일재경은 49t 수소트럭의 판매가를 80만 위안, 수소 충전가격을 25위안/㎏으로 낮출 것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한·중 간 협력 아이템 가능성 김영희 디자이너 수소 산업은 한국과 중국 양국이 시너지를 높일 수 있는 협력 아이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왕쥐(王菊) 국제수소연료전지협회(IHFCA) 비서장은 “한·중은 수소산업에서 협력 기회가 매우 많다. 잠재력도 큰 만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싱에서 만난 류화둥 수소에너지교류센터 주임은 “지금까지 보급된 수소 차량 규모는 중국이 1만8487대, 한국은 3만4000여 대로 수소산업은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이미 중국 수소차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지난 2021년 1월 광저우시에 현대차 수소연료전지시스템 법인을 설립하고 20만㎡ 부지의 연료전지 공장을 준공했다. ‘에이치투(HTWO)’라는 수소 밸류 체인 브랜드도 구축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향후 시범 도시군 제도의 변화와 연료전지시스템 원가의 절감이 이뤄지면 본격적인 경쟁을 거쳐 살아남은 몇 개 업체가 시장을 주도할 것”이라면서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중국 수소차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이강표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중국 수소 시장의 미래 잠재력을 고려할 때 보조금과 시장진입 등에서 현대차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한국 정부의 지속적인 관여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4.08.26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