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경 칼럼] 옳은 개혁도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이하경 대기자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사법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서울대 법대 교수 출신인 박세일 청와대 정책수석이 주도했다. 세계 최저 수준인 국민 1인당 변호사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로스쿨을 도입한다는 소문이 났다. 대법원이 협상을 제안했고, 사법개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법원·검찰·변호사 대표와 청와대 인사들이 참여했다. 개혁의 주체와 대상이 머리를 맡대고 숙의했다. 연간 300명인 변호사 배출 숫자를 96년 500명, 97년 600명 등 단계적으로 늘려 2000년 이후에는 1000~2000명으로 확대하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합의는 지켜졌고,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로스쿨이 문을 열었다. 매년 1700여 명의 변호사가 배출되고 있다.     ■  「 의대 증원 맞지만 2000명은 무리 세종·영조도 경청…현실 반영해 이승만·박정희 통합 토대로 추진 김영삼 사법개혁도 단계적 접근 」    의대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윤석열 정부 의료개혁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압도적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집단 파업 중이고,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면서 청와대와 소통했던 원로 법조인의 의견을 들었다. “이렇게 선전포고식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의료계와 충분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 2035년에 1만 명의 의사가 부족하지만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대통령이 5년간 매년 2000명 증원 카드를 던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전문가도 2000명 카드를 제시한 적이 없다. 정부안의 근거가 됐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3개 기관의 당사자들은 연간 750명에서 1000명 정도를 늘리면서 연착륙시키자고 한다. 의료개혁이 처음에는 지지율을 확 끌어올렸지만 지금은 총선 감점 요인이 돼버렸다.   의사 정원을 늘리는 의료개혁은 백번·천번 옳은 정책이다. 의사가 환자를 떠나고, 정원을 줄이자는 건 상식이하다. 그러나 개혁은 나의 방향이 옳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한국의 의사집단은 전투력이 강하지 않은가.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의약분업 과정에서 의대 정원을 351명 줄였고, 2020년 문재인 정부 때는 의사국가고시를 거부하면서 400명 증원 카드를 무산시켰다. 법률가들이 포진한 윤 정부는 “법대로 하자”고 나온다. 그러나 미국의 법 사상가 홈스 전 연방 대법관은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라고 했다. 세심한 소통과 공감의 과정이 필요했다. 윤 정부는 경직됐고, 서둘렀다.   조선의 성공한 전제군주들도 이렇게 거칠지는 않았다. 1428년 세제개혁에 착수한 세종은 전답 1결당 10말을 정액 징수하는 균등부과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백성 17만 명의 의견을 물었다. 땅이 기름지고 소출이 많은 경상·전라도 농민은 압도적으로 찬성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반대가 더 많았다. 세종은 시행을 유보했다. 격렬한 찬반 토론과 시범 실시를 거쳐 전면 실시된 것은 성종 때인 1489년이었다. 개혁 착수 61년 만이었다.   17세기에 소빙하기가 전 세계를 강타해 유럽에서는 대역병과 마녀사냥이 극성을 부렸다. 중국 대기근은 농민 반란을 촉발해 명청 교체가 이뤄졌다. 조선에서는 경신(庚辛)대기근이 닥쳐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시체가 거리를 메웠다. 민생이 초토화된 뒤 등장한 군주가 영조다. 천한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나 사가(私家)에서 청년기를 보낸 영조는 서민의 참상을 알았다. 죽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젖먹이에게 물리는 황구첨정(黃口簽丁)에 시달리던 백성을 위해 군역을 절반으로 줄여 주는 균역법을 시행했다. 창경궁 홍화문에서 백성들의 애소(哀訴)를 들었기에 가능했다. 현실에 바탕을 둔 세제 개혁으로 조선은 임란(壬亂), 호란(胡亂)과 대기근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도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과감하게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하고, 대지주인 한민당 지도자 김성수의 자기희생적 협조를 얻었기에 성공했다. 내부 통합에서 출발해 전 국민을 지주로 만든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민주화 조치였다. 한국전쟁 때 적화되지 않고 훗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훗날 비판자가 되는 장준하가 발행한 『사상계』 지식인 그룹의 경제개혁 제안에 주목했다. 계획경제, 공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론, 기간산업 집중 육성, 미국 이외 국가로의 원조 다각화, 저축 강행과 소비절약, 수출 확대는 군정의 정책에 모두 반영됐다. 사상계는 교착된 한·일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새 정부가 직면할 현실을 측면에서 도와줬다. 함석헌은 5·16을 “신속히 이뤄져야 할 복부 수술”이라고 했다(『만주 모던』 한석정).   윤 대통령이 달라져야 한다. 국민의힘 수도권 후보들의 제안대로 의대 정원까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협의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 결과와 무관하게 예스맨들을 모두 내보내고 “노”라고 직언할 수 있는 인물로 새 진용을 짜야 한다. 아무리 미워도 야당과 대화하고 통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남은 임기 3년 동안 옳으면서도 성공한 개혁을 이뤄낼 수 있다.     이하경 대기자

    2024.04.01 01:03

  • [고현곤 칼럼] 의정 충돌에서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

    고현곤 편집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대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나흘 만인 6월 28일, 병원 앞까지 닥쳤다. 의료진은 부상자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치료를 계속했다. 얼마 안 가 북한군이 국군 저지선을 뚫고 병원에 난입했다. 부상자와 의료진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 9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의료진은 끌려갔다. 공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6·25 서울대 의대 학살사건이다. 추모비가 서울대병원에 있다.     ■  「 응급실 비운 의사 비난받아 마땅 디테일 없이 우격다짐, 정부도 문제 이념보다 뿌리 깊은 계층갈등 노출     애꿎은 국민만 각자도생 내몰려 」    이유야 어떻든 이번 의정 충돌에서 전공의가 응급실·중환자실·수술실을 떠난 건 유감이다.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곳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 환자를 등지는 모진 행태에 국민은 놀라고 실망했다. 환자를 내 가족이라고 여겼으면 그랬겠나. 중증·응급환자만이라도 번갈아 지켰으면 더 많은 응원을 받았을 텐데 아쉽다. 환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난주 방재승 전국 의대교수 비대위원장이 “국민 없이는 의사도 없다는 걸 잊었다”고 말했다. 사과가 너무 늦었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국민과 의사 사이에 쌓인 상처와 불신은 오래 남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의 발언은 도를 넘었다. 환자 곁에 남은 전공의를 조롱했다. “평생 박제해야 한다”는 식의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의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말했다. 우월감과 특권의식이 묻어나는 부적절한 발언이다. ‘겸손한 자가 강한 자’라는 진리를 모르는 모양이다. “이런 나라에 살기 싫어 용접을 배우고 있다” “포도 농사를 짓겠다” 같은 말이 쏟아졌다. 의사가 용접이나 포도 농사를 못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은 아니다. 당장 대한용접협회는 “의사들이 용접을 우습게 생각하는 듯하다”고 유감을 표했다.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의 치부인 계층·빈부 갈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념·지역·세대 갈등보다 뿌리 깊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더 심해졌다. 요새 사석에서 균형감을 잃고 과하게 의사 편을 드는 사람이 눈에 띈다. 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전공의가 혹사당한다. 차라리 잘됐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1년쯤 놀면 어떻냐”고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흥분해 의아했다. 환자 걱정은 관심 밖이었다. 다 이유가 있었다. 딸이 레지던트 2년 차였다.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온 나라가 이기심의 수렁에 빠졌다.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부의 일 처리는 서툴고 거칠다. 전략도, 홍보도 부족하다. 의대 증원은 오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안이다. 어떻게 풀지 정부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2000명 증원의 근거가 무엇인지, 실제로 현장에서 몇 명이나 더 가르칠 여력이 있는지, 뒤죽박죽 의료 수가는 어떻게 개선할지, 격무인 전공의의 노동인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정부가 디테일을 건너뛰고 덜컥 2000명 증원을 강행하는 바람에 반발이 커졌다. 너무 만만하게 봤거나, 무리하게 밀어붙였거나. 4대 필수의료 패키지는 증원 발표 불과 닷새 전에 나왔다. 좀 더 일찍 마련해 시간을 갖고 의료계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다급해진 정부가 이달에 전공의 처우개선 토론회를 잇따라 열었다. 그동안 뭐하다 이제 와서? 일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증원 규모도 복수 안을 놓고 그 흔한 공청회라도 열었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쉬쉬하다 군사 작전하듯 전격 발표했다. 단숨에 대학별 배정까지 마친 건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나라를 뒤집어 놓을 일인가. 처음에 정부는 지지율 상승에 내심 고무됐던 것 같다. 생각이 짧다. 환자가 불편해지면 정부가 욕을 먹게 돼 있다. 지지율이 꺾이고 사태가 심상치 않자 부랴부랴 유화 제스처를 보냈다. 정부의 실력이 딱 이 정도 아닌가 싶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노동·교육·연금 3대 구조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신년사 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2022년 대선 공약이었다. 정권 전반부, 개혁의 골든타임이 다 가도록 손도 못 댔다. 지난해 뜬금없이 “이념이 제일 중요하다”며 전선을 넓혔고, 국운이 걸린 듯 엑스포에 매달렸다. 잇따른 구설을 수습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의사 증원 하나 매끄럽게 못 풀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3대 개혁은 언감생심이다. 총선이 끝나면 새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이합집산이 벌어질 게 틀림없다. 정권의 힘은 갈수록 떨어진다. 국정관리 능력이 부족하고, 힘마저 빠진다면 무슨 수로 3대 개혁을 할 수 있겠나.   이번 사태는 의사도 잘못했고, 정부도 잘못했다. 양비론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국민을 불안하게 한 것만으로도 양측 모두 할 말이 없게 됐다. 사과부터 해야 한다. 의정 충돌을 중재할 만한존경받는 어른도, 정치인도 안 보인다. 섣불리 나섰다가 망신만 당할 분위기다. 그러는 사이 국민은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며 각자도생의 정글로 내몰렸다. 의지할 곳이 없다. 나라가 어수선하다. 고현곤 편집인

    2024.03.26 00:41

  • [최훈 칼럼] ‘용산 리스크’의 재구성

    최훈 주필 모든 정치의 정답은 꿈틀거리는 민심의 현장이다. 이종섭 호주 대사 거취 논란이나 황상무 수석의 ‘횟칼 테러’ 발언 여파로 총선은 다시 출렁거리고 있다. 황 수석 사퇴와 이 대사 귀국으로 임시 봉합한 국면이지만 싸늘한 여론과 수도권 지지도 폭락에 놀라 수용한 터라 효과조차 미미한 듯하다. 여당은 애써 잠재웠던 ‘윤석열-한동훈’ 갈등이 되살아나면서 총선이 다시 ‘윤석열 대 야당’의 정권 심판 구도로 바뀌는 악재에 초긴장이다.     ■  「 민심 둔감 이종섭·황상무 사태로 오만 프레임 갇히고 만 대통령실 ‘엘리트’ 내부논리 과잉편향 접고 현장 민심 존중하는 공감 노력을 」    수도권(서울 3, 경기 2)에서 영끌하며 뛰고 있는 국민의힘 후보 5인에게 ‘용산 리스크’가 낳은 현장을 들어보았다. “다녀보면 ‘매일 친명횡재다 뭐다 이재명 욕은 다 하면서 자기들은 왜 이리 마음대로 하나’란 얘기다. ‘어린 해병이 죽었는데 책임은커녕 대사로 내보내 놓고 도대체 국민 알기를 뭘로 아느냐’란다. ‘지금도 이리하는데 국회까지 쥐여주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겠느냐’고 한다. 용산이 오만의 프레임에 갇혔다. 3%, 1천 표 차 생사라 끼니 거르고 돌아다니는 데 한 주 새 수도권 지지 15%가 빠지니 맥만 빠질 뿐이다.”(경기 A후보)   “보수층의 용산 원망이 더 많더라. ‘4년 동안 야당에 발목 잡혀 생고생을 했는데 다시 지려고 작정했느냐’며 화를 낸다. ‘왜 하필 이때 굳이 이거냐’란 절박감의 분노다. 정치 관심이 많을수록 이종섭 대사에 부정적이더라. ‘피의자인 양반을 갑자기 대사로 내보내니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침묵하라 꼬리 자른 것 아니냐’고들 한다. ‘아 이게 뭔가 있구나’라는 의심이 퍼지는 건 순간이다. 공수처 문제점 얘기해 봤자 먹고살기 바쁜 이들이야 임명한 대통령실 잘못이라 생각할 수밖엔 없지 않냐. 살판난 민주당의 빅 마우스에 막기조차 버겁다.”(서울 B후보)   “가장 걱정은 이재명 사천 파동에 가라앉던 정권심판론이 되살아난 분위기다. 민주당이 다시 으쌰으쌰다. 정권심판론 도지니 여기저기 민주당과 진보당이 후보 단일화를 한다. 선거가 기세, 바람 아닌가. 용산이 매사 독선적으로만 각인되니 과거 조국 수사도 무리 아니냐는 의심으로 뒤바뀐다. 조국당 지지율 좀 보라. 비례 조국당 찍으러 집 나선 이들이 지역구의 여당 찍을 리도 없지 않냐”(서울 C후보)   “중도층은 윤석열-한동훈 갈등에 민감하더라. 남의 말 잘 안 듣는다는 윤 대통령에게, 한 위원장이 바른말 좀 하고, 그걸 대통령이 들어주는 모양새면 ‘아 이 당은 그래도 기대는 해볼 만하네’라는 이들이 중도층이다. 중도층이 가름할 총선 보름 앞에 이 모양이니…. 며칠 전 대통령이 농협의 ‘875원 대파 한 단’ 들고 “이 가격이 합리적”이라 한 것도 말이 많더라. 왜 자꾸 시빗거리 만드는 건지. 그냥 좀 가만히 계셔줬으면 ….”(경기 D후보) “이거 의료 대란 기류도 묘해진다. 자꾸 불통 용산 이미지이다 보니 2000명 증원도 일방적 밀어붙이기 아니냐는 심리적 요동이 느껴진다. 어제 한 위원장이 의사들 만났다지만 환자들만 피해인 대란이 이어지면 다 나라님 탓일까 봐 걱정이다.”(서울 E후보)   총선의 승패 떠나 3년 넘게 국정을 더 이끌어 가야 할 용산이다. 수도권의 아우성 직전 이종섭 사태에의 대통령실 입장은 이랬다. “공수처·민주당, 일부 친야 언론이 결탁해 덫 놓은 정치 공작.” 황상무 파문 때는 “사람 그렇게 쓰는 것 아니고, 리더십 원칙이 더 중요” “언론 자유가 우리 정부 국정 철학일 뿐”이라며 6일을 끌었다. 내부의 지체된 판단은 결국 현장에 최악의 나비효과를 몰고 왔다. 바로 용산의 민심 공감(共感)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고, 그들의 느낌·시각을 이해하며, 그렇게 이해한 통찰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는” 상태다. 용산의 최대 오류는 바로 자기 내부 논리에 대한 선택적 과잉 공감이다. “공감이란 마일리지 같은 것”(과학철학자 장대익)이어서 자신에게만 쓰면 다른 이들에겐 쓸 수가 없다. 내 편에만 쓰면 다른 편에겐 해악이 될 위험이 공감의 양면성이다.   그러니 용산의 내부 소통이 늘 의문이다. 윤 대통령의 격노가 다반사라더라도, 먼저 현장을 느끼며 “노”하는 참모들이 버텨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엘리트 집단이라 자부할 용산의 국가적 책무다. 도대체 안보실의 누가 이 대사를 밀어붙였나. 누가 황 수석 사퇴를 그리 끌어갔는가. “성공에는 100명의 부모가 있지만 실패는 고아”이듯 일 터지면 그 뒤로 숨기 바빠 대통령만 홀로 전면에 서 있는 게 용산의 기억이다.   최고의 비서실장이던 레이건 대통령의 제임스 베이커는 “나쁜 결과를 막을 사전 노력이 핵심이며, 이를 위해 비서실장은 늘 ‘노 맨(No Man)’이자 게이트 키퍼여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소중한 통찰을 그는 레이건 장례식 추모사에 남겼다. “그 누가 자신의 라이벌 선거참모를 두 차례나 했던 이를 자기 비서실장에 임명하겠는가. 늘 너그러이 (‘노 맨’을) 받아주던 그를 위해 나는 8년 매일매일을 노력할 수 있었다.” 맞다. 먼저 대통령이 달라지길 바란다.     최훈 주필

    2024.03.25 00:50

  • [염재호 칼럼] 누가 유권자인가?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2대 국회의원선거의 사전투표까지 20여 일도 채 남지 않았다. 다음 주말부터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 지하철역마다 허리를 굽혀 표를 구걸하는 후보들의 모습을 열흘 정도는 지켜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투표권을 가진 사람을 유권자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정치에서 진정 무슨 권한을 가진 것일까?   유권자인 국민은 총선이 끝나면 국회의 이전투구를 바라보며 맥없이 정치혐오에 빠지게 된다. 역대 최악의 국회라고 평가받는 21대 국회보다 22대 국회가 더 나을 것 같지도 않다. 양대 정당은 시스템 공천이라고 하지만, 국가를 위해 봉사할 유능한 인물들을 유권자인 국민에게 공천한 것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위성정당제로 어처구니없이 탈바꿈해 유권자를 농락하는 비상식적 제도로 전락했다.     ■  「 입법권 남용과 과잉특권 빈축 국회 정당 후보 공천 시스템도 비합리적 국회의원 소명의식과 정치력 절실 AI 활용한 후보 검증 시스템 갖춰야 」    국회의원 후보들은 본 선거보다 정당 공천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후보 개인의 능력이나 비전보다 정당 중심 투표 경향 때문이다. 하지만 공천과정에서 국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여론조사는 왜곡되기 쉽고 극렬 지지당원들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형식은 시스템 공천이지만, 실질은 당 대표나 지도부의 뜻에 좌우되어 사천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민주화 이후 국정운영에서 국회의 영향력은 점점 비대해지고 있다. 17대 국회에서 정부의 입법발의는 1102건, 의원발의는 5728건이던 것이 점점 늘어나 21대 국회에서 정부발의는 831건으로 축소되고 의원발의는 2만3584건으로 증가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국정을 책임지는 헌법기관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신들만이 선출된 권력이라고 행정부 공무원들을 폄하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예산심의 과정에서 쪽지예산으로 지역구 챙기기에 급급하고, 예산안이 통과되면 플래카드를 내걸고 자신이 따온 지역구 예산 자랑에 여념이 없다. 지역의원인지 국정을 담당한 국회의원인지 모를 정도다.   국회의원은 임기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장기표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는 국회의원 특권을 없애야 바른 정치가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특권은 180여 개나 되고 연봉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1억5500만원인데, 우리나라 정치인 신뢰도는 167개국 중 114위라고 한다. 우리 국회의원 보좌관은 6명인 반면에 스웨덴은 보좌관 한 명을 국회의원 두 명이 공유하고, 출퇴근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봉급은 국민 전체 근로자 평균임금만 받는다고 한다.   막스 베버가 강의를 책으로 엮은 『직업으로서 정치』는 정치가의 역할을 잘 알려주는 불후의 명작이다. 영어에서 직업(vocation)은 하늘로부터 부름 받은 소명이나 사명감을 뜻한다. 단순히 일의 대가로 보수를 받는 직업의 의미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막스 베버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책으로 펴낼 때 직업 대신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제목을 정했다.   베버는 정치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자질이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이라고 했다. 단지 열정만으로는 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고 냉철한 균형적 판단이 중요하다. 정치가가 냉철한 균형적 판단을 갖기 위해서는 ‘신념의 윤리’보다 ‘책임의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도덕적 근본주의와 같은 신념의 윤리만 갖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미래의 문제를 설득과 합의를 통해 풀어나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소명감으로 일해야 한다. 정치를 월급 받고 특권 누리는 직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금품을 받거나 공천을 얻기 위해 아첨, 거짓말, 막말을 일삼지 않아야 한다. 자신에게 불리해도 바른말을 하고 국가의 미래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번 공천 과정에서도 과거 발언 문제나 금품수수 증거로 공천이 취소되는 사례가 나왔다. 이제 인공지능(AI)의 도입으로 국회의원 후보 자질을 철저하게 평가하는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 방식을 활용하여 과거 모든 언행을 낱낱이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회, 정당학회, 정책학회 등 전문가 단체들이 나서서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철저한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게 해주어야 한다.   유권자는 후보의 정치적 식견과 품격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질 권리가 있다. AI 시대를 맞아 이제부터는 막말과 거짓 선동, 국회 질의 내용과 수준, 국가 미래를 위한 정책대안 제시, 지역구를 넘어선 국정 관련 활동, 정치적 설득과 통합 능력, 품격 있는 언행 등을 전문가 집단이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서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권자가 선거에서 후보와 정당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할 수 있는 진정한 권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3.19 00:42

  • [장훈 칼럼] 차라리 AI 후보에게 투표하고 싶다

    장훈 중앙대 명예교수·본사 칼럼니스트 비관적 반응들이 먼저 제기될 수 있다. 인공지능(AI)은 언젠가 인간 자율성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AI가 정치에 도입되면, 민주정치보다는 감시와 통제에 쓰이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는 갑갑한 정치 현실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헛헛한 공상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4월 총선을 앞두고 AI 정치인의 가능성을 논해보려는 데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 첫째, 선거철 한국의 정당은 까마득한 절벽으로 추락하고 있다. 권력 다툼을 위해서라면 온갖 반칙, 위법, 떼법을 총동원하는 아수라장이 매일 매일 펼쳐지고 있다. 무언가 파괴적 혁신 없이는 정치의 타락은 스스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둘째, 챗GPT4, 소라, 코파일럿 등이 보여주듯 AI의 발전은 근대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삶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일자리, 돌봄, 여가, 전쟁 등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오는 중이다.     ■  「 선거철 정당의 타락이 도를 넘어 기성 정치에 파괴적 혁신이 필요 무감정 AI로 분노의 정치를 제어 AI로 반헌법과 반칙 걸러냈으면 」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의 선거-정당정치가 18~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등장한 근대적 개인들의 건축물이라는 점을 돌아본다면, AI 혁명이 불러오는 인간 존재의 재설정은 결국 선거-정당정치의 본질적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 18세기 부르주아들이 열었던 ‘그들만의 민주주의’가 200여 년 만에 ‘모든 사람의 민주주의’로 진화했듯이, AI 혁명이 민주주의를 상상 너머의 세계로 끌어올릴 가능성도 꿈꾸어 볼 만하다.   #1. 이미 숱하게 지적되었지만, 4월 총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우리 정당들의 자멸적 행태부터 간단히 돌아보자. 다양한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필자는 우리 정당정치의 타락을 주도하는 것은 정당을 장악한 포퓰리스트들과 이들을 열성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치 훌리건들이라고 본다.   포퓰리스트들은 여러 얼굴을 갖고 있지만, 공통적인 특성은 민주정치의 제도와 절차, 법치를 한없이 가볍게 여긴다는 점이다. 사례는 차고 넘친다. 2024년 총선 지역구 획정의 법정 기한은 2023년 3월이었다. 다수당인 민주당은 2024년에 들어서야 마침내 준연동형 선거구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여야 정당들은 그제야 지역구 획정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누더기가 된 공천 과정, 여야 정당들의 위성정당 급조, 선거 이후 이들의 예정된 원대복귀 등은 제도와 절차가 이미 파산 지경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러한 추락을 멈출 주도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파당적 훌리건으로 빠져들거나 무심한 방관자, 냉담자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결국 관습적 사고를 넘어서는 혁신, 파괴적 혁신만이 추락을 멈출 수 있다.   #2. 산업혁명에 먼저 성공하고 근대 민주주의의 외양을 갖추기 시작하던 18세기 영국인들에게 보통선거권은 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AI 정치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권자와 의사소통, 정책 결정 과정 등에 데이터 처리와 연산 결과를 활용하는 AI와 인간 정치인이 결합한 AI-휴먼 정치인의 등장은 신기루처럼 들릴 수 있다.   허황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혁신 국가들은 이미 AI 정치실험에 나서고 있다. 뉴질랜드는 2022년 최초의 인공지능 정치인 SAM을 공개하였다. SAM은 방대한 역사 자료, 요즘 이슈들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들, 공공정보, 뉴스 등을 언어학습모델에 기반하여 취합한다. 이를 바탕으로 시민들의 질문에 상시로 답하고 정책결정자들의 결정에 기초를 제공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숱한 난관이 있겠지만, AI-휴먼 정치인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의 혁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감정과 편견, 증오에 사로잡힌 현대 정치의 종말. AI에게는 감정이 없다. 상대에 대한 적개심도, 우리 편에 대한 광적인 집착도 없다. 따라서 상대편에 대한 분노와 모욕으로 뒤범벅된 우리 정치에 AI의 무감정이 도입된다면 역설적으로 정치의 정화, 이성의 회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를 AI 시대 정치 이성의 재규정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둘째, AI-휴먼 정치인에게 대한민국 헌법, 3·1 독립선언문, 국내외의 정치학 고전들을 학습시키고 이를 모든 정책 결정의 기반으로 삼게 한다. AI 에이전트가 모든 정책 결정을 기계적으로 헌법정신에 종속시키도록 설계된다면, 법치에 대한 조롱, 법치의 오남용은 줄어들지 않을까? 정리하자면,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수공업) 노동의 종말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기계를 다루고 통제하는 호모 테크니쿠스의 역량을 발휘하면서 오늘의 경제적 번영과 보편 민주주의를 일구어왔다.   AI가 주도하는 제2의 기계 시대 역시 많은 두려움을 자아내고 있지만, 이미 AI를 훈련하고 협력하는 흐름은 빅테크 사무실, 의약 실험실, 첨단 스마트 팩토리 등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마찬가지로 AI 정치인은 단순한 현실 도피용 꿈이 아니다. 여야 후보들보다는 나는 AI후보에게 투표하고 싶다.   장훈 중앙대 명예교수·본사 칼럼니스트

    2024.03.18 00:38

  • [이하경 칼럼] ‘대만 재앙’의 한반도 충격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이하경 대기자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지난달 ‘대만 재앙’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대중국 정책을 설계한 매슈 포틴저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도 3인의 공동 기고자 중 한 사람이었다.   기고문은 중국이 대만을 합병하고 미국을 아시아에서 몰아낸다면 “미국의 동맹국들은 자체 핵무기 개발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미 역량을 갖춘 것으로 분석했다. 이어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경제적으로 활성화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양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힘을 갖게 된다”고 했다. 헤지펀드 매니저인 켄 그리핀의 “대만 반도체에 대한 접근권을 잃으면 미국 GDP가 5~10% 감소할 것이며, 이는 ‘즉각적인 대공황’을 의미한다”고 한 발언을 인용했다. 고(故)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포틴저에게 “미국이 ‘세계 해안에서 떨어진 섬’과 유사해지기 시작할 수 있다”고 경고했던 사실도 공개했다.     ■  「 미 CIA ‘중, 2027 대만 공격’ 공개 왕이 ‘한반도 전쟁 불가’ 말했지만 미국 힘 분산 위해 북 사주 가능성 한·미·일 안보태세, 대화 모두 필요 」    중국은 대만을 침공할 것인가. 윌리엄 번스 미 CIA 국장은 지난해 10월 “시진핑이 2027년까지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끝내라는 지시를 군에 내렸다”고 했다. 우자오셰 대만 외교부장도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더 커졌으며 시기는 2027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027년은 시진핑 집권 4기가 시작되고 인민해방군 건군 100주년이 되는 해다.   대만에서 전쟁이 터지면 한반도는 바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양회(兩會) 기간 중인 지난 7일 “세계는 이미 충분히 혼란스럽다. 한반도까지 전쟁이나 동란을 보태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진심이기 바란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을 지키려는 미국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북한의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9월 CNN 인터뷰에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북한 역시 도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강력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올해 1월 “미국은 유럽과 중동에서 억지력을 잃었고, 아시아에서도 억지력을 잃기 직전이거나 이미 잃었다”고 했다.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온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만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트럼프는 지난해 9월 NBC 인터뷰에서 “대만을 방어하기 위해 미군을 보내겠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주한미군 철수도 거론했던 사람이다. 대만과 한국 방위는 장사꾼 출신의 흥정 대상이 될 운명인가. 이 와중에 김정은은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을 주저 없이 초토화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로버트 칼린과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한반도 정세가 1950년 6월 초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하고 철저한 안보태세를 갖춰야 한다. 유사시 주한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킨 것은 윤 대통령의 탁월한 업적이다. 동시에 대화도 해야 한다. 평화의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대화는 필수다. 미국 NSC 대변인은 지난주 “한반도에서 우발적인 충돌의 위험을 줄이는 것을 포함한 여러 대화를 모색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기시다 총리도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 중이고, 북한도 호응하고 있다. 정작 당사자인 한국만 다른 분위기다. 통일부 조직에선 ‘교류’가, 외교부에서는 ‘평화’와 ‘교섭’이 사라졌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북한이 호전성을 드러내는 것은 경제난으로 인한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강대강으로만 맞서지 말고 지혜롭게 다양한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안정된 민주주의와 세계 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한국은 지킬 것이 너무도 많은 나라다. 북의 온건파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강력한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   한반도는 지구상 최악의 지정학적 화약고다. 소련은 미국과 힘을 합쳐 제2차 세계대전을 끝장냈다. 그러나 불과 5년 만에 김일성에게 설득당한 소련이 중국까지 끌어들여 한·미와 대결한 “3차 세계대전의 대체물”(윌리엄 스툭 조지아대 석좌교수)이 한국전쟁이다. 북한·중국·러시아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다. 이럴수록 안보태세를 단단히 하되 대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대만해협에서도 중국과 대만은 2010년 체결한 양안 경제협력기본협정(EFA)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대만의 대중국 수출액은 1522억 달러였다.   남과 북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고, 강대국들은 쉴 새 없이 으르렁거린다. 이렇게 험악한 한반도에서 평화가 이뤄질 수 있을까. 우리의 간절함이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만일 한반도에 비핵 평화가 찾아온다면 1795년 칸트가 “전쟁은 악인을 제거하기보다 많이 만드는 점에서 나쁘다”면서 주창한 전 세계의 영구평화가 실현되지 않을까. 이하경 대기자

    2024.03.11 00:36

  • [최훈 칼럼] 비움이 없는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그릇’

    최훈 주필 인생만사 새옹지마란 정치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아직 1라운드지만 두세 달 전에 비해 총선 판세가 확 뒤집혔다. 지난 연말만 해도 “정권 견제, 야당 다수 당선 기대”가 51%를 넘어서며 죽을 쑤던 쪽은 국민의힘이었다. 반대로 더불어민주당은 “수도권을 석권하면 200석도 가능, 윤석열 정부 탄핵도 할 수 있다”며 기세등등했었다. 그러던 흐름이 요즘은 “여당 다수 당선 희망” 38%, “제1 야당 다수” 35%, “제3지대 다수” 16%(한국갤럽 2월 27~29일)로 뒤바뀌었다.     ■  「 ‘비명횡사 친명횡재’에 흐름 반전 ‘여당 다수’ 기대, ‘민주 다수’ 앞서 비우질 않아 채움도 없는 이 대표 여야 어디든 ‘오만·독주’면 필패  」    이런 반전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탐욕’ 이미지 때문이다. 180석 공룡 정당을 물려받은 이 대표의 대권욕이 당내 분란과 민심 이반을 불렀다. 이미 지사·국회의원·제1당 대표의 자리에 올라선 이 대표로선 마지막 정점인 대통령에의 꿈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2년 반 뒤 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겨야 한다. 당내의 절대적 지지 기반? 필수다. 백현동·대장동·대북 송금 관련 체포동의안에의 반란표? 한 번 당해 봤으니 철벽을 쳐야 한다. 조금이라도 걸림돌 될 세력과 인물들? 아예 싹을 잘라놓아야 할 터다.   소년공 시절 야구 글러브 공장 프레스에 눌려 왼쪽 팔이 굽어버린 이 대표는 “내 생에 봄날은 없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었다. 그러곤 자서전 말미에 “좌절의 밑바닥에서야 비로소 싹텄던 희망의 씨앗” “숨이 턱에 차도록 페달 밟아 올라가야만 겨우 문이 열렸던 운명의 고갯길” “결국 정상의 희열을 맛볼 수 있었던 인생의 섭리”라고 자기 삶을 정리했었다.   정치적으론 승승장구였던 그에게 요즘 네 가지 판단 착오가 드러났다. “아니 이 정도까지 할진 몰랐다”는 당심, 민심의 이반이 나타난다. 지난해 강서구청장 선거 압승에 이어 ‘김건희 여사 명품백’ 사건은 자만을 키운 양분이 됐다. “불체포특권 포기”를 호언했다가 자신의 체포동의안 표결 전날 ‘반대표’를 요구하자 믿지 못할 사람이 돼버렸다. ‘위성정당 금지’의 대선 공약과 달리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며 다시 위성정당을 수용, 불신은 더해졌다. ‘비명횡사 친명횡재’ 공천은 그 모든 욕심의 정점이다.   야당은 내려놓고 비웠을 때 승리했다. 정책·인사·예산 권력을 모두 쥔 여권과의 싸움에선 민심 얻을 명분이 유일한 무기다. 2016년 총선 직전 야권의 분열로 “여당 180석” 전망이 나올 때 민주당은 당의 주류인 이해찬·정청래를 공천에서 내치는 초강수 쇄신을 했다. 단 1석 차이 원내 1당에 올라섰다. 노무현을 대통령까지 만든 건 스스로 사지(死地)인 영남에서 두 차례나 낙선하면서도 ‘지역구도 타파’의 명분을 지킨 삶의 궤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총재 시절 ‘당내 독재’란 얘기 듣는 걸 극도로 꺼렸다. 모든 당내 경선 때마다 김상현·정대철·이기택 등 비주류 경쟁 주자들이 오히려 적절한 약진을 해주길 골몰했다. ‘대통령의 그릇’인 이가 대통령이 된다.   지금 이 대표에겐 ‘대통령의 그릇’임을 보여 줄 명분도, 원칙과 소신도, 배짱과 결기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소양이 없다면 그냥 머리 안 좋은 정치인이다. 그런데 내친 공천 자리에 친명 호위무사들만 채우려 한다면 그건 나쁜 정치인이다. 탐욕이다. 대통령 꿈꾸는 이가 양지 바른 텃밭인 인천 계양을에서 금배지 한 번 더 다는 게 무슨 명분이 있는가. 아무 것도 내려놓지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새로 쌓아 갈 공간은 없다. 혹 자수성가형의 심리 특성인 ‘이룬 것에의 집착’은 아닐까.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버리며 해야 한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 있다면 지금 이 대표를 보고 뭐라 했을까.   그의 예상 밖 두 번째 착오는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의 상대적 선전일 터다. 큰 잡음 없이 안정적이다. 유세의 동선과 메시지 등도 중도층에 거부감이 적다. 물론 혁신이나 감동도 없다는 평가가 공존하지만…. “한 위원장 잘한다” 52%(‘잘못’ 42%), “이 대표 잘한다” 36%(‘잘못’ 61%)가 최근 민심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거 쟁점에서 사라진 건 그에겐 세번 째 혼돈이다. 지난달만 해도 29%대 지지도의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의 대결 구도로 승리를 장담했지만 돌연 타깃이 증발해 버렸다. 이젠 이재명 대 한동훈의 대결 구도다. 더구나 사흘 전 윤 대통령의 지지도가 8개월 만의 최고치인 39%(한국갤럽)로 치솟았다. “의대 증원에의 뚝심” 평가가 그중 21%다. 여당 총선 승리의 필요조건 중 하나가 대통령 지지도 40%였다. 이대로라면 총선은 ‘윤석열 심판’이 아니라 ‘이재명 심판’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 이 대표의 혼란은 신당이다. 거대 정당에의 혐오로 제3지대 정당이 자리잡을 공간이 커졌다. 더구나 이준석·이낙연 신당은 물론 심지어 조국 신당까지 민주당 측의 표를 더 삭감할 구도다. 아직도 무당층·중도층은 19~29%다. 총선 결과 예측은 그러니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분명한 변수가 하나 있다. 누가 더 기득권을 내려놓고, 비우며, 새로운 정치개혁 영혼을 채워가느냐다. 오만과 독주를 심판하러 기다리는 게 대한민국 선거다. 37일이 남았다. 최훈 주필

    2024.03.04 00:36

  • [고현곤 칼럼]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사외이사 유감

    고현곤 편집인 사외이사를 본격 도입한 건 1998년 2월이다. 외환위기 직후였다. 기업의 민낯이 드러나자 대주주와 경영진의 전횡을 감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사회에 외부 전문가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했다. 이들에게 기업 내 야당 역할을 기대했다. 나라의 명줄을 쥐고 있던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사항이기도 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들 진지했다. 그해 9월 중앙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A사가 자금난을 겪는 계열사를 지원하려고 했다. 사외이사들이 주주에게 피해를 준다며 반대해 결국 지원은 무산됐다. 곳곳에서 경영진과 사외이사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요새는 드문 풍경이다. 지난해 100대 기업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반대표를 던진 것은 0.4%에 불과했다. ‘거수기’라는 오명이 따라 다닌다.     ■  「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 기업 감시 초심 잃고 경영진과 유착 지배구조 엉망, 정부 낙하산 악순환 3월 주총 줄대기 전 각자 돌아보길 」    처음에는 사외이사 보수가 많지 않았다. 급여를 주지 않는 기업도 있었다. 삼성·LG·현대차처럼 큰 기업이 활동비·자문비 명목으로 월 200만원 남짓 지급했다. 포스코는 매달 한 차례 이사회 때마다 50만원의 거마비를 지급했다. 연봉으로 치면 600만원. 지금은 평균 연봉 1억500만원. 화폐가치가 떨어진 점을 감안해도 격세지감이다. 사외이사 연봉 1억원 넘는 기업이 삼성전자·SK·SK텔레콤 등 13곳에 달한다. 이쯤 되면 부업인지, 본업인지 헷갈릴 정도다.   방만한 경영을 막기 위해 사외이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던 교수들이 그 자리를 꿰찼다. 98년 3월 서울대가 사외이사 겸직을 허용했다. 처음엔 무보수에 한해서였다. 절제된 맛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대 전임 교원 중 9.4%(215명)가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물론 보수를 받는다. 교수들은 사외이사 소득 일부를 학교발전기금으로 낸다. 서울대가 거둔 돈만 지난 4년간 35억원. 대학과 교수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구조다. 관료들도 현직에서 물러나면 사외이사 자리부터 알아본다. 노후 대책으로 이만 한 게 없다.   인맥을 총동원해 기업에 줄을 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기업이 갑이 돼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고른다. 적당한 간판에 까다롭지 않은 사람을 환영한다. 바람막이나 대외 로비에 활용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교수와 관료·법조인이 기형적으로 많은 이유다. 지난해 100대 기업 사외이사 457명 중에 42%가 교수다. 기업인은 19%, 관료 15%, 법조인 13%다. 4대 금융지주·은행(KB·하나·우리·신한)은 교수가 특히 많다. 사외이사 50명 중 36명이 교수다.   56년 사외이사를 가장 먼저 도입한 미국은 정반대다. 사외이사의 80~90%는 풍부한 사업 경험을 가진 전문경영인이다. 경쟁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을 영입한다. 미국 기업 절반은 사외이사에 교수가 한 명도 없다. 이사회는 긴장감이 흐른다. 지난해 오픈AI 이사회가 ‘챗GPT의 아버지’ 샘 올트먼 CEO를 전격 해임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세상을 놀라게 한 쿠데타였다.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도 자기가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이사회 결정의 잘잘못을 떠나 우리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국내에서 끝판왕은 포스코, KT, KT&G, 금융지주 등 ‘주인 없는 기업’의 사외이사다. 회사별로 차이는 있으나 업계의 정설은 이렇다. 회장은 가까운 사람을 사외이사로 앉히고, 최고의 대우를 해 준다. 사외이사는 회장의 연임을 돕는다. ‘셀프 연임’에 성공한 회장은 다시 사외이사를 연임시킨다. 회장이 물러날 때는 배신하지 않을 측근을 후임 회장에 앉히기도 한다. 견제도 받지 않는다. 명실공히 ‘그들만의 기득권 카르텔’이다. 기업 지배구조가 떳떳하지 못하니까 정부가 만만히 보고 ‘낙하산 인사’를 내리꽂는 것 아닌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기도 하다.   포스코는 지난해 8월 캐나다 호화 이사회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1주일 동안 이사회는 딱 한 번 열었다. 나머지는 전세 헬기를 타고 시찰, 관광, 골프로 6억8000만원을 썼다. 강심장이다. 최정우 회장이 3연임을 노리던 중이었다. 후임 회장을 뽑는 사외이사 7명이 참여했다. 물의를 빚자 사외이사 측은 “새 회장을 뽑는 중요한 시기에 후보추천위원회의 신뢰를 떨어뜨려 이득을 보려는 게 아닌가”라고 맞받아쳤다. 사과도, 사퇴도 없다. 회사 내에선 “병당 120만원짜리 와인을 곁들인 게 화근”이라는 말이 나온다. 최고급 와인을 먹는 바람에 재수없게 걸렸다는 건가. ‘사심 없이 헌신하라’는 박태준 초대 회장의 창업 정신은 온데간데없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세운 기업에서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회사에 손실을 끼쳤는지 철저히 수사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후임 회장은 뒤틀린 이사회부터 바로잡기 바란다.   3월은 12월 결산법인의 주총 시즌이다. 사외이사 시장도 큰 장이 섰다. 사외이사의 세 가지 자격 요건은 전문성·독립성·도덕성이다. 올봄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막판 줄대기에 바쁜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격을 갖췄는지 돌아봤으면 한다. 초심을 잃고 변질된 사외이사야말로 개혁 대상이다. 고현곤 편집인

    2024.02.27 00:38

  • [염재호 칼럼] 인구절벽과 우수 유학생 유치정책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예일대학교 로스쿨 에이미 추아(Amy Chua) 교수의 책 『제국의 미래』를 보면 역사상 강대국으로 부상한 제국의 특징은 외부 세력에 대한 관용과 포용에 있었다. 당나라 제국의 발흥도 많은 외국인을 유입시켜 포용한 정책에 기인했다고 책에서 설명한다. 수도 장안(長安)에는 당시 지구상 도시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있었고 인종의 다양성도 뛰어났다.   당 태종은 신라인 7만 명을 받아들였고 신라의 귀족과 관리들을 관직에 등용했다. 신라 후기에는 매년 100여 명의 6두품 이하 자제들이 당나라로 건너가 10년 정도의 유학생활을 했다. 840년 한 해에 105명 유학생이 동시에 신라로 귀국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당나라 홍로사(鴻臚寺)에서는 외국 유학생을 위해 숙식과 의복을 제공하는 장학제도를 운용했다. 당나라 과거시험에 906년까지 58명, 이후 925년까지 22명의 신라인이 급제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도 당나라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감찰과 문한을 맡는 도통순관과 관역순관이라는 직책으로 복무하다가 17년 만에 고국 신라로 귀국했다.     ■  「 제국의 강점은 다양성과 포용력 국가경쟁력 핵심은 인력시스템 해외인력으로 인구절벽 극복해야 우수 유학생 유치 위한 전략 시급 」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찾아온 이민자들의 천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1933년부터 1950년 사이에 13만 명에 달하는 유럽 지식인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5년 이후 아시아계 미국 이민자 숫자는 약 2200만 명에 달해 인구의 6.8%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전체 인구 3억3000만 명 가운데 백인 57.8%, 히스패닉 18.7%, 흑인 12.4%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미국, 캐나다, 브라질은 건국한 연도와 국토면적은 비슷하지만 이민을 적극 수용한 미국만 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1776년, 브라질은 1822년, 캐나다는 1867년 건국했다. 국토 면적은 미국 983만㎢, 캐나다 998만㎢, 브라질 851만㎢로 비슷하다. 하지만 인구는 미국이 3억3000만 명인 데 비해 브라질은 2억1000만 명, 캐나다는 3400만 명에 불과하다. 인종 분포도 캐나다는 73%가 유럽계이고, 브라질도 유럽계 백인 47.7%에 백인과 흑인 혼혈 물라토 43.1%로 다양하지 않다.   지금 미국 경제에서 지식노동은 한국, 인도, 중국 등 아시아계 인력에 의존하고 육체노동의 대부분은 히스패닉이 담당하고 있다. 첨단산업의 메카 실리콘 밸리의 인구 비중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36.2%, 컴퓨터 엔지니어의 29.6%가 아시아계이다. 미국 건설현장 노동자의 60%는 히스패닉이 담당한다. 히스패닉 인구가 42.1%를 차지하는 뉴멕시코, 32%가 넘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에서는 이들이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인구절벽을 맞은 우리나라의 미래는 심각하다. 2016년 생산가능인구는 3763만 명으로 정점을 찍고 하락하고 있으며, 2022년 합계출산율은 0.78명까지 내려갔고, 총인구도 2020년 5184만 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가면 2100년에 인구가 2000만 명대가 된다고 한다. 이제 저출생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하고 다각도로 미래 인구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홍콩과기대 김현철 교수의 홍콩 가사도우미 경제학은 흥미롭다. 홍콩이 1974년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를 도입한 이후 대졸 여성 노동시장 참여율이 평균 25% 상승했다고 한다. 2022년 홍콩에는 약 34만 명, 싱가포르에는 약 27만 명의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있다. 다음 달부터 고용노동부와 서울시의 시범사업으로 필리핀에서 100명의 가사도우미가 입국하게 된다. 가사도우미 외국인 노동인력 유입이 본격화되면 출생률 변화도 기대해볼 만하다.   외국인 유치에서 단순 노동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우수 인재 영입이다. 학령인구가 줄어들고 대학등록금 억제정책 때문에 사립대학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해온 외국유학생 유치 활동을 넘어서 정부가 체계적으로 우수 유학생 유치를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초중고 12년간의 교육비용을 자국에서 부담한 우수 인력들이 대학과 대학원에 유학생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고급인력으로 정착하면 국가적으로 큰 도움을 얻게 된다. 현재 미국에는 약 95만 명, 일본은 약 35만 명의 외국인 유학생이 있다. 우리는 약 16만 명의 유학생이 있는데 정부는 2027년까지 30만 명까지 늘리겠다고 한다. 단순한 숫자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유학생을 확보할 전략이 필요하다. 우수 유학생 유치정책으로 일본 정부는 일본학생지원기구(JASSO)를 통해 도쿄 오다이바에 국제연구교류대학촌 시설을 유치하고, 도쿄국제교류관에 외국인 유학생과 연구자를 위한 주거시설을 건립했다.   앞으로 지구촌 노동력은 더욱 활발하게 이동할 것이다.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은 우수 인력 확보를 위한 시스템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데 달려있다. 이제 단일 민족의 차원을 넘어 다양성과 다문화를 끌어안아야 한다. 제국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포용의 힘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2.21 00:48

  • [이하경 칼럼] 되살려야 할 이승만과 제헌국회의 협력

    이하경 대기자 우남(雩南)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공산 세력으로부터 지켜낸 거인(巨人)이다. 강대국 미국은 오판을 거듭했지만 우남은 오차 없는 국제정세 판단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김덕영 감독의 다큐영화 ‘건국전쟁’을 관람했다. 많은 분이 “저평가된 우남의 실체를 알게 됐다”고 했는데 실제 그랬다. 우남의 전모를 보다 균형 있게 파악하려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제헌국회와의 갈등과 협력을 편견 없이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가면서 우남에게는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5·10 총선, 헌법 제정, 대통령 선출, 내각 구성을 통해 정부를 출범시키고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넘겨받아 8월15일 신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해야 했다. 9월21일 시작되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는 것도 중대사였다.     ■  「 미국 오판으로 초래된 북의 남침 우남, 초인적 노력으로 나라 구해 제헌국회, 당략 초월 ‘민주’ 지켜 한반도 위기 대비 견제·협력 필요 」    그래서 5월31일 구성된 제헌국회에 “1분이라도 빨리 우리 헌법을 통과시키자” “비율빈(필리핀)은 이틀 만에 만들었다”고 채근했다. 일본은 착수 9년 만인 1889년에 메이지 헌법을 제정했는데 한국은 한 달여 만에 해치웠다. 우남은 나라를 잃은 뒤 외교를 통한 독립을 성취하는 데 한평생 매달렸지만 좌절했다. 그래서 새 정부 수립의 성공 가능성을 100% 낙관하지 못했다. 남로당의 준동도 불안감을 키웠다. 그가 실권을 가진 초당적 지도자가 되려 한 배경이다.   반면에 최초의 국가기관인 제헌국회는 민주적 절차를 중시했다. 우남의 거부로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 급선회했지만 헌법에서 내각제적 요소를 최대한 살렸다. 대통령의 결정은 국무회의 과반수 의결을 거쳐야 집행될 수 있게 했다. 국회는 총리를 인준하고, 총리와 장관을 부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통령의 설명을 요구했고, 정부의 책임성(accountability)을 제도화했다.   제헌국회는 재석 196명 중 180명의 압도적 찬성으로 우남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확고한 국부(國父)의 위상이 확인됐다. 문제는 초대 국무총리 인선이었다. 우남은 김성수·신익희·조소앙 등 국회가 원하는 지도자 대신 북에서 내려온 목사 이윤영 의원을 선택했다. 국회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시켰다.   우남이 담화를 통해 “인준 부결은 파벌주의 때문이며 참된 민의가 아니다”고 하자 “이런 어법은 천황제와 비슷하다”(노일환 의원)는 반발이 나왔다. 파국 일보 직전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우남은 국회에 나와 “국회가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총리를 인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전제국가가 아니라 민주국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환영한다”고 물러섰다.(『오늘이 온다』 권기돈)   임기 2년의 제헌의원 200명은 “1인1당”의 자유를 누렸다.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당당하게 발언했다. 대부분 짐칸에 덮개를 씌운 트럭이나 전차를 타고 출퇴근했지만 주말에도 국회에 나와 치열하게 토론했다.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당리당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의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1950년 1월19일 미국 하원이 6000만 달러 규모의 한국경제원조안을 부결시켰다. 국회는 원조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조헌영 의원은 찬성하면서도 “왜 부결시켰는지는 알아야 한다. 미국은 한국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고 대통령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정파를 초월해 존경받았던 ‘토론 종결자’ 조 의원은 고려대 교수였던 조지훈 시인의 부친이고,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조부다.   일주일 뒤인 1월 26일 민국당 서상일 의원 외 78인은 “대통령제로는 민주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며 내각제 개헌안을 발의했다. 야당 출신 신익희 국회의장은 개헌에 찬성하면서도 우남을 “나라의 지보(至寶)이고 국부”라며 “그분이 종신대통령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국정 운영의 일방통행은 거부하지만 우남이 존경받는 인물임은 인정했다.   우남은 1949년 상반기 미군 철수가 기정사실화되자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다. 미국은 거꾸로 북침을 우려해 외면했다. 2차 세계대전을 막 끝낸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남북 충돌로 3차대전이 터지기를 원하지 않았고, 소련도 같은 입장일 것으로 오판했다. 우남의 판단이 맞았다. 피란길에 허정을 만난 우남은 “미국놈에게 속았다”고 했다.(『허정 회고록』) 하지만  초인적 노력으로 미국의 지원을 끌어냈고, 반공포로 2만5000명을 석방하는 광인(狂人)전략까지 동원해 소원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거머쥐었다.   제헌국회는 1949년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들었고, 6·25전쟁 중의 민심이반을 막았다. 우남과 제헌국회가 합력했기에 가능했다. 한반도 정세는 6·25 전과 흡사하다. 중국·러시아·북한은 밀착 중이고, 트럼프는 동맹을 헌신짝으로 여기고 있다. 우남처럼 국제정세를 꿰뚫고 강대국에 맞서는 용기 있는 지도자, 당리당략을 초월해 견제와 협력에 나선 제헌의원들의 2인3각 애국심을 되살려야 한다. 이하경 대기자

    2024.02.19 00:45

  • [장훈 칼럼] 한동훈 현상:세대 교체론, 자질론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1 역설 한 가지. 우리 정치에서는 현실이 상상력을 앞질러 간다. 필자는 그동안 금년 말에나 한동훈 현상에 대한 칼럼을 써볼까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한동훈 현상은 예상을 앞질러 현실정치의 중심에 서 있다. 한 위원장은 여당 내 힘겨루기뿐만 아니라 제1야당과의 경쟁에서도 중추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4월 총선은 정부 심판론보다 여당 비대위원장 평가가 우선하는 특이한 선거가 될 조짐마저 보인다. 새 정치 스타가 솟구쳐 오르다 보니, 뜨거운 열광과 싸늘한 냉소가 이어진다. ‘73년생 한동훈’에 대한 지지층의 기대가 폭발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비판을 넘어선 험한 말들이 쏟아진다.     ■  「 탈산업화 세대 정치리더의 등장 윤·한 갈등은 세대 갈등이기도 공직 우등생이 정치리더로 변신 특권 폐지 등 리더 역량 시험대에 」    #2 이 칼럼의 목적은 한동훈 현상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그렇다고 맹렬한 비난에 동참하지도 않을 것이다. 열광과 냉소를 떠나 세 가지 관점에서 한동훈 현상의 의미를 짚어보려 한다. ①세대교체론. 윤석열 대통령이 산업화 시대 세계관의 마지막 계승자라면, 한동훈 위원장은 탈산업화 세대가 보수 정당의 주류로 등장했다는 신호탄이다. ②자질론. 한동훈 위원장은 한국의 교육 체제가 길러낸 최상급 인재이다. 뛰어난 문제풀이 능력을 바탕으로 세속적 성공의 사다리를 밟아온 이 제도권 인재는 과연 정치의 험난한 세계에서도 능력을 발휘할까? ③민주화 세대 청산론. 한동훈 장관이 여당 리더로 변신하면서 내세운 최우선 과제는 민주화 특권 계급 청산론이었다. 과연 그의 문제 설정에 대해 동료 시민들은 얼마나 지지를 보낼 것인가?   #3 먼저 세대론. 민주화 이후 보수 계열 정당에서 세대교체의 과제는 사실 같은 문제의 무한 반복이었다. 누가 언제 산업화 시대의 세계관, 멘탈리티를 벗어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 것인가?   이준석 대표 체제의 막간극을 거쳐 윤석열 정부 3년 차를 맞으면서 윤 정부가 산업화 세계관의 마지막 주자라는 점은 명확해지고 있다. 임기 초반의 각오와는 달리 점차 관료 중심주의, 성장 목표에의 몰입, 수직적 소통에 기대는 모습은 산업화 멘탈리티의 회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보니 “술을 전혀 안하고 대신 커피를 마시는” 신인류 한동훈 위원장이 상징하는 세대, 문화적 기호들은 지지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커피, 음악, 옷맵시 등은 단지 개인 취향이 아니다. 그가 상징하는 취향의 발산은 곧 구시대의 집단주의, 위계질서, 돌격 정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오렌지 세대(혹은 서태지 세대) 리더의 부상에 적지 않은 이들이 당황해하고 있지만, 사실 이들이 곳곳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지는 꽤 됐다. 기업, 문화예술계, 과학기술계에서 이들 세대는 진작 주류로 진입해 있다. 다만 기득권의 철옹성이었던 정치, 특히 정당정치에서 이들 세대의 주류화가 미뤄져 왔을 뿐이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위원장의 갈등은 한편으론 당-정 갈등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연되어 온 정치세대교체를 둘러싼 갈등이기도 하다.   #4 윤 대통령-한 위원장의 세대 갈등(과 봉합)이 빚어내던 만큼의 극적 요소들은 많지 않지만, 필자가 눈여겨보는 것은 한동훈 위원장의 자질을 둘러싼 토론이다. 한편에서는 그의 군더더기 없는 언어 구사와 상황 요약 능력을 떠받들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제1야당에 맞서는 말싸움 실력 외에는 보여준 것이 없다는 냉소적 평가도 뒤따른다.   하지만 자질론의 핵심은 한동훈 위원장의 화려한 경력을 뒷받침해 온 자질과 정치리더로서의 자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 있다. 대학입시-사법시험-검찰 요직을 거치며 한 위원장이 세속적 성공의 길을 달려온 바탕에는 탁월한 문제풀이 능력이 있었다. 법률, 대학 교육과정이라는 분명한 준거들이 있고 이 준거들 안에서 문제를 빨리 효율적으로 푸는 것이 그의 검증된 능력이었다.   반면 정치의 세계에서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문제풀이와는 전혀 다르다. 문제의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따로 모범답안이 나와 있지도 않다. 대표 사례들을 꼽아보자. 인구위기, 사회 양극화, 인공지능의 도전, 기후변화. 이들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가장 해결이 어려운 문제는?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는?   결국 주어진 문제를 풀이하기보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살피는 능력,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 문제 해결의 완급 조절이 곧 리더의 자질이다. 이 점에서 한동훈 위원장의 정치적 자질 검증은 현재 진행형이다.   검증의 첫 무대는 당연히 이번 총선의 핵심 이슈들이다. 한동훈 위원장은 세대교체, 특권 정치의 타파, 민주화 운동세력의 청산을 이번 선거의 핵심 과제들로 내걸었다. 이러한 문제설정에 유권자들이 얼마나 호응하는가에 따라 우리 정치는 방향을 바꾸게 된다. 지루하게 이어져 온 산업화세대-민주화 운동세대의 패권이 마침내 막을 내릴지? 민주화 이후 심화하여 온 정치 귀족들의 특권화는 멈추게 될지?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한 세대가 여야 정당을 주도하는 시대가 열리게 될지?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2024.02.05 00:36

  • [고현곤 칼럼] 닥치고 가덕도

    고현곤 편집인 동남권 신공항을 처음 꺼낸 건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이듬해 이명박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받았다가 2011년 백지화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시 후보지 세 곳을 평가했다. 가덕도는 꼴찌였다. 파리공항공단 측은 김해신공항 818점, 밀양 665점, 가덕도 635점을 줬다. 장마리 슈발리에 수석연구원은 “가덕도는 국토 남쪽 끝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고 건설비가 많이 든다. 공항 입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시 군불을 땠다. 김해신공항을 흠집 내더니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둔 2021년 느닷없이 가덕도로 바꿨다. 1등(김해)이 문제 있다며 2등(밀양)을 건너뛰고, 3등(가덕도)으로 직행했다. 기이한 결정이었다.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는 특별법을 만들어 대못을 박았다. 부산 표를 구걸하는 야당(국민의힘)이 합세했다. 일사천리의 진풍경이었다. 예타 면제는 두고두고 나쁜 선례로 남았다. 지난주 통과한 ‘달빛철도특별법’도 가덕도의 아류다.     ■  「 부산 표 구걸…여야 합작 ‘정치공항’ 활주로 1개 13조, 김해공항의 세 배 무리한 공기 단축, 부등침하 우려 엑스포 없는데 조기 개항해야 하나 」    지난해 3월 윤석열 정부는 2030 부산엑스포전에 개항하겠다며 공사 기간을 5년6개월이나 앞당겼다. 마음만 먹으면 뚝딱 줄일 수 있는 건지 의아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당초 안은 바다에 짓는 것이었는데, 바다와 육지에 걸쳐 짓는 공법으로 바꿨다. 매립 규모가 줄면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 꼴찌인 가덕도에, 공법도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누더기가 됐다. 활주로 달랑 1개의 여야 합작 ‘정치공항’이 탄생하는 것이다.   가장 큰 논란은 안전 문제다. 특별법 처리 당시 국토부는 “진해 비행장과 공역이 중첩되고, 김해공항 관제 업무가 복잡해져 안전사고 위험이 증가한다. 수심이 30m에 이르고 태풍이 지나는 길목”이라고 지적했다. 활주로 1개로는 화재 등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 부등침하(땅이 불균등하게 가라앉는 현상) 우려도 있다. 2022년 사전타당성조사 연구진은 “바다~육지 공항은 지반의 지지력 차이가 커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바다 쪽 활주로가 육지 쪽 활주로보다 많이 가라앉을 수 있다는 의미다.   난공사로 비용도 많이 든다. 김해공항 확장에 4조7000억원이 필요하다. 가덕도는 세 배인 13조5000억원. 활주로를 1개 추가하면 7조원이 더 든다. 도로와 공항철도, 해상여객터미널 건설비는 별도다. 외항에 짓는 만큼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실제 사업비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가덕도의 비용 대비 편익 비율은 0.58이다. 공항을 지어서 얻는 편익이 비용의 절반에 그친다. 경제성으로 따지면 지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원안대로 김해공항을 확장하고, 남는 세금은 어려운 이웃 돕는 데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이용객은 불편하다. 부산에서 가덕도는 김해공항보다 멀다. 활주로 1개로는 국내선이 들어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국제선은 가덕도, 국내선은 김해공항으로 이원화된다. 항공사는 비용이 증가한다. 공항이 불편하고 비싸면 흥행이 안 된다. 텅 빈 활주로에 고추를 말리는 전남 무안공항처럼. 이미 웬만한 수요는 인천공항 2여객터미널과 서울~부산 KTX가 흡수했다. 자칫 부산 시민은 들러리 서고, 가덕도 인근 땅 주인과 관련 업자만 배 불리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사정을 잘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러는 사이 가덕도 시계는 돌아간다. 지난해 말 기본계획을 고시했고, 올해 5000억원 넘는 예산을 편성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담당 공무원이 직무유기로 검찰에 불려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보수·진보가 모처럼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인들은 표만 생각한다. 문제점에 눈 감고, 지역에 장밋빛 환상을 심었다. 문 전 대통령은 특히 노골적이었다. 2021년 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가덕도 앞바다에서 “신공항 예정지를 눈으로 보니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별반 차이가 없다. 지난해 12월 엑스포 불발 1주일 만에 부산을 찾았다. “지역 현안 사업은 그대로 더 완벽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개항을 무리해 가며 5년 이상 앞당긴 건 엑스포 때문이었다. 유치에 실패하니 이번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기 개항을 밀어붙인다. 어처구니없는 악순환이다. 촉박한 엑스포 시간표가 없어진 만큼 안전과 비용을 따져 다시 검토하는 게 맞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한술 더 떴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정부가 가덕도를 국내 공항 정도로 대폭 축소해서 땜질한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스타일의 저열한 비방이다.   젊은 정치인도 오십보백보다. 2021년 7월 당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가덕도 특별법은 우리 당이 앞장서 입법했다”고 자랑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최근 부산을 찾아 “조기 개항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기존 정치와 선을 긋고,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면서 똑같은 구태 정치를 한다. 다들 자기 장사와 표 계산에 바쁘다. 세금을 자기 돈처럼 아껴 쓰고, 자신보다 나라의 앞날을 더 걱정하는 지도자가 안 보인다. 좌우, 신구를 막론하고. 고현곤 편집인

    2024.01.30 00:52

  • [이하경 칼럼] 제왕적 대통령제 유감

    이하경 대기자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이 세계의 뉴스가 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주 ‘2200달러짜리 디올 손가방이 한국의 여당을 뒤흔들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영국 BBC방송과 더 타임스, 텔레그래프도 이 사안을 보도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국민이 걱정을 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한 뒤 여당과 대통령실 간에 불협화음이 있었다. 사과를 요구하는 민심에 윤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주목된다. 윤 대통령을 아끼는 지기(知己)가 대신 반성문을 써서 전해주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제왕적 대통령의 시련에는 예외가 없는 것일까.     ■  「 일본은 신 같은 천황 권력도 제한 한국, 심부름꾼을 전제군주로 모셔 윤 대통령 ‘명품백 수수’ 대응 주목 지기는 대신 반성문 써준다는데… 」    한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된 것은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의 고집 때문이었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열여섯 차례의 헌법 기초위원회 회의를 갖고 6월 21일 내각제 헌법 초안을 확정했다. 당대 최고의 헌법학자인 유진오가 주도했기에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 임기 동안 정부가 안정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며 대통령제로 바꾸자고 했다. 한민당 당수인 김성수가 동의했고,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인 김준연이 연필로 관련 조항 몇 대목을 고쳤다. 유진오는 “기형적 정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해서 다음 날 대통령제 헌법안이 본회의에 넘겨졌고, 7월 12일 통과됐다.   유진오 헌법안은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참고했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토대로 자유·평등·복지가 구현되는 국민주권적인 민주국가를 지향했다.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까지 보장하는 진보성도 갖췄다. 하지만 핵심인 권력구조가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급변침한 것은 민주주의 역사를 퇴행시키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아홉 차례의 개헌을 거친 한국 특유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됐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줘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책 결정과 집행을 가능하게 했고,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원적 가치와 민의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전제군주를 복제하는 위험한 구조를 만들고 말았다.   일본의 제헌 과정은 오랜 시간 숙성 과정을 거쳤다. 1880년이 되자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열자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났다. 눈이 밝은 메이지 정부 최고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1871년부터 서양 헌법 서적을 입수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1880년 12월 원로원이 작성한 헌법안에 대해 “서양 각국의 헌법을 모아서 베낀 것이며 일본의 국체와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원로원 안은 폐기됐다. 이토는 1882년 3월 입헌군주제의 원산지인 유럽으로 떠났다. 독일 헌법 전문가 모세의 강의를 들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 슈타인 교수로부터는 헌법으로 군주권을 제한하는  군주기관설을 배웠다. 19세기 전반 유럽 시민혁명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최첨단 헌법이론이었다. 영국 런던에서도 입헌군주제 운용의 구체적 현실을 점검했다. 1년5개월 만에 귀국했다.   1885년 45세에 초대 총리가 된 이토는 열한 살 어린 메이지 천황이 “실권 없는 로보트 취급을 당한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실제로 천황은 각료들이 국사를 상주(上奏)하려 해도 만나지 않고 사보타주했다. 이토는 천황을 소년시절부터 모신 동갑내기 시종 후지나미를 슈타인 교수에게 보내 2년3개월간 강의를 듣게 했다. 헌법을 몰랐던 말(馬) 전문가 후지나미는 귀국해 천황과 황후에게 33시간 동안 헌법과 입헌군주의 역할을 강의했다. 일본에 군주기관설을 적용하기 위한 치밀한 작업이었다.   이토는 1888년 총리에서 물러나 초대 추밀원 의장으로 제헌 작업에만 몰두했다. 이노우에 고와시가 만든 초안을 놓고 식사도 걸러가면서 밤늦게까지 토론했다. 젊은 관료들은 전직 수상의 의견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이토가 “자기 의견을 마음껏 말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89년 2월 11일 메이지 헌법이 공포됐다(『이토 히로부미』 이토 유키오).   두 나라가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이렇게 달랐다. 일본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한국은 거꾸로 심부름꾼인 공복(公僕)에게 전제군주의 지위를 부여하는 단초를 만들었다. 일본은 정교하게 설계된 입헌군주제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이토는 조선 병탄(倂呑)의 원흉이었고,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됐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이었다. 반면에 한국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제로 고통받고 있다.   이 나라는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면 정부와 민간 기업, 범부(凡夫)의 일상까지 집단 몸살을 앓는다. 일류 기업과 한류의 파워로 국가 위상은 올라갔는데 언제까지 이런 전근대적인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악순환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정치권도, 국민도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건강한 권력구조를 만드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4.01.29 00:28

  • [염재호 칼럼] 인본주의 시대에서 물본주의 시대로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새해가 밝았다. 이제 인류는 본격적으로 문명사의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인간이 만든 데이터 시스템에 의해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의 인류 문명사가 사물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문명사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는 순간이다.   천 년 이상의 중세 암흑기에 유럽인들은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는 신본주의(神本主義) 시대를 살았다. 인간의 삶은 오로지 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삶이었다. 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로마가 서기 313년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국가로 변화하면서 중세 유럽은 신이 중심이 된 사회로 바뀌었다. 하나님을 위해 대규모 성당을 건축하고 교황의 권위는 황제의 세속적 권위를 능가하곤 했다. 신이 모든 삶의 중심인 신본주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  「 디지털 사회로 인류문명 대전환 사물이 인간을 규율하는 시대로 인본주의 쇠퇴와 인공지능 확산 인간 주체성과 존엄성은 지켜야 」    이런 신본주의가 인간이 발명한 금속활자와 인쇄술의 발전으로 종교개혁, 르네상스,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회로 바뀌었다. 삶의 중심이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왔고 인간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적 인권을 갖게 되었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정당성의 논리도 제공해주었다.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과학지식이 발전하고 20세기 들어서 대량생산체제가 확립되면서 풍요로운 대량소비의 시대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는 인간 탐욕을 부추겨 지구 생태계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화석연료 남용으로 기후위기가 나타나고 넘쳐나는 쓰레기로 환경이 파괴되었다. 매년 약 600억 마리의 닭, 26억 마리의 오리, 15억 마리의 돼지, 5억 마리의 양, 4억 마리의 소가 식량으로 도축된다.   이제 다른 동물이나 물체를 객체로 지배하던 인간 중심의 삶에 변화가 일고 있다. 애완견(愛玩犬)이 반려견(伴侶犬)의 지위에 올라섰다.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지난해 반려견의 유모차인 소위 개모차가 어린아이 유모차 구매량을 57% 대 43%로 추월했다고 한다. 동물보호 차원에서 육식을 거부하는 채식주의가 늘어나고 동물학대는 아동학대 못지않은 심각한 범죄행위로 여겨진다.   언어 표현에서도 객체인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이들을 주체로 대접하여 능동태 서술어를 활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신문이나 TV의 편집 지침에서도 모든 객체의 “된다”라는 표현을 “한다”로 바꾸게 한다. 자연현상인 “폭풍이 확산된다”를 “폭풍이 확산한다”로, “문제가 악화되면”을 “문제가 악화하면”으로, “금리인하가 지속된다”를 “금리인하가 지속한다”로 바꿔 쓰도록 한다. 객체도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 알게 모르게 인간중심 인본주의를 서서히 침몰시키고 있는 것이다.   2023년은 인류가 인공지능(AI)으로 새로운 문명사를 써내려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2022년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GPT 3.5 출현 5개월 만에 GPT 4가 등장하여 본격적인 인공지능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을 인류는 깨닫기 시작했다. 올해 CES나 다보스 포럼에서도 인공지능이 모든 주제를 석권했다.   이제 스마트폰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인간이 주체적인 삶보다 사물에  의해 지배받는 삶을 살고 있다. 먹고 마시고 물품을 구매하는 행위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매개로 한 정보에 의해 이루어진다. 보고 싶은 책이나 영화도 우리의 이전 행위를 분석한 자료에 의해 추천되고 유도된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도 가짜뉴스로 유포되는 정보를 그럴듯하다고 판단한다. 유튜브나 SNS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내용만 반복적으로 보고 듣다 보면 인간은 자신의 판단능력이 상실된 채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어 확증편향에 빠져버리게 된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나 우리나라 총선에서도 이런 현상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이제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인간 본연의 주체적 삶은 점점 상실될 것이다. 마치 객관적 진실처럼 보이는 여론조사, 뉴스, 다른 사람들의 행동양식, 상업주의 광고 등과 같은 객체들에 의해 주체인 인류의 삶이 지배되는 물본주의(物本主義)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신본주의 시대의 정치체제인 군주제가 인본주의 시대가 되면서 투표선거제에 의한 민주주의로 바뀌었다면, 빠른 미래에 물체인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할지 모른다. 인간의 주체적 판단보다 객체인 인공지능의 판단이 더 뛰어나고 효율적이라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이나 객관적 현상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는 물본주의 현상이 가속화될 것 같아 씁쓰름한 한 해의 시작이다. 하지만 인본주의 시대에도 신을 믿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물본주의 시대가 되어도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은 유지되면 좋겠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1.24 00:30

  • [최훈 칼럼] ‘강제 당론 투표’ ‘제왕적 당대표’ 폐지가 정치 혁신이다

    최훈 주필 총선 79일 앞의 예비후보들이 ‘금배지’ 꿈에 부풀어 뛰고 있다. 각자의 사회적 성취를 토대로 국가·국민을 위해 선량을 해보겠다는 멋진 포부와 열정을 응원하고 싶다. 현실은 그러나 참담하다. “강경파가 박수부대를 동원해 의원총회에서 밀어붙인다. 수시로 당론을 정해 안 따라가면 가차 없이 징계다. 강제 당론이 일상이다. 당대표까지 공천권을 갖고 횡포 부리니 줄을 설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왜 하냐고…. 그냥 한 번 더 하기 위해서가 유일한 목표들이다.”     ■  「 의원 소명은 오로지 국익 위한 양심 거대정당 당론 강압, 의원 영혼 말살 공천권 횡포 당 대표직 하등 불필요 철폐 없인 어떤 정치 개혁도 공염불 」    민주당을 탈당한 조응천 의원의 ‘초선 4년’ 토로다. 정치가 왜 이 모양인지 정곡(正鵠)을 짚었다. 야도, 여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인재 영입’이다, ‘새 피 수혈’이다 마술피리에 홀려 따라간 의원들은 총선 다음 날부턴 영락없는 거대 정당의 노예 신세다. 짧은 79일의 유권자 상전 노릇이 끝나면 국민도 거대 정당 밑 노예의 길 시작이다. 지금의 총선은 후보·정당·국민 3자의 ‘노예계약서’ 서명식일 뿐이다. 영원한 악순환이다.   주범은 ‘강제적 당론 투표’와 ‘제왕적 당대표’다.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46조2항)고 헌법은 적시했다. “선출된 의원이 선거구민, 정당 및 이익단체 등의 특수이익이 아니라 전체 국민을 위한 국가이익을 추구하도록 보장한 자유 위임의 원칙”이라고 헌법재판소는 2019년 해석했다. ‘전체 국민을 위한 국가이익’만이 ‘양심’이다.   현실은 거꾸로다. 지난 연말 쌍특검법안 통과를 보자. 야권 183명 투표에 ‘50억 클럽’ 특검은 183명 찬성, ‘김건희 여사 특검법’은 182명 찬성. 그 찬반 논리를 차치하고, 21세기 대낮에 무슨 ‘북한식 투표’ 느낌이다. 당론에 따른 투표 추종도와 자기들끼리의 정당 단합도는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일 터다. 물론 여당 역시 당론으로 투표 전 퇴장했으니 크게 할 말도 없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에 대한 당내 이탈표에 ‘개딸’들의 ‘수박 색출’ 난동 역시 같은 맥락.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스스로 예종하는 풍토가 생긴 건 가장 슬프다. 당대표 경선 당시 여당 초선의원 50여 명이 ‘나경원 비난’ 연판장을 돌리며 용산에 주파수 맞춘 장면은 ‘영혼 소멸’의 상징이다. 영혼들이 없어지니 민주당의 가장 보수적 의원과 국민의힘의 가장 진보적 의원 사이, 즉 중도온건파는 모두 멸종이다. 민주적인 당내 토론도 함께….   당론 강제는 우리 의회를 심각한 위헌·위법적 상태로 만들었다. 국회는 국가의 기구다. 정당은 사적 결사체일 뿐이다. 정당법 2조는 “정책 추진, 공직선거 후보자 추천,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이 목적인 국민의 자발적 조직”으로 정당을 규정한다. 자발적 결사체가 국가 기구인 국회의원들의 의사를 강제 구속하는 게 바로 위헌·위법적이다. 어느 법률에도 “국회의원이 소속 정당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다른 암 덩어리, 제왕적 당대표다. 모든 분란·갈등의 진원이다. 박정희 시대와 군부 정치, 3김 시대의 극한 대결 속에 강력한 자기 진영 통제를 위해 만든 제도가 당 총재다. 스스로는 당권을 징검다리 삼아 차기 대권을 노린다. 그리 하려니 모든 공천권과 당직 인사, 자금 루트를 거머쥐며 의원들을 꼭두각시로 만든다. 용산이 억지로 만든 김기현 당대표의 블랙코미디 경선, 한 틈의 대선 패배 성찰도 없이 당대표로 직행, 방탄 사당화 논란을 자초한 이재명 대표의 사례를 보라. 당대표 만들어 이익 공유를 꾀했던 게 송영길 캠프의 경선 돈봉투 살포 아닌가. 하등 쓸모없는 옥상옥 계륵(鷄肋), 당대표다.   미국처럼 의원들이 선출한 여야 원내대표가 독립적인 의회의 입법·정책을 주도해 가면 될 뿐이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 역시 야당 대표가 아니라 입법부 소속인 여야의 원내 지도부와 정책을 협치해 가면 될 터다. 평소 국고보조금·후원금 등을 관리하다 선거나 전당대회 즈음 공정한 후보 경선의 룰과 과정을 관리해 주는 미국 정당의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공화당 RNC, 민주당 DNC)’ 정도 느슨한 조직이면 충분하다. 인사 청탁과 민원 창구일 뿐인 지역구 당협(지구당) 또한 선거 때의 한시적 자원봉사 조직이면 족하다. 당대표 눈도장 찍으러 몰려다닐 시간, 의정에 충실토록 하자. 당론 추종과 충성심만을 공천 잣대 삼는 건 망국의 지름길이다. 물론 꼼꼼하게 의정 성과를 계량해 공천에 반영할 데이터 시스템이 선행돼야 한다. 정치 신인 충원을 위해선 당원만이 아닌 지역 주민들의 여론, ‘새피’ 들의 사회적 기여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새 시대의 공천 시스템이 나와야 할 시간이다.   “천국에 가더라도 정당과 함께라면 가지 않겠다”(토머스 제퍼슨)는 비유처럼 우리 공룡 정당들은 극한 혐오의 대상이 된지 한참이다. 후보들에게 “불체포 특권 포기” “금고 이상 시 세비 반납” 등 갑질만 해댈 게 아니다. 쇄신의 대상은 바로 그 거대한 기득권 정당과 그 당의 제왕들이다. 강제 당론 투표, 전횡 일삼는 당대표직을 없애겠다고 국민에게 공약하라. 그것만이 진정한 정치 교체다. 그런 혁신에 표를 주고 싶다. 최훈 주필

    2024.01.22 00:24

  • [이하경 칼럼]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이하경 대기자 힘센 사람이 권력에 취하면 판단이 흐려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인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60%가 넘는 반대 여론과 충돌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총선용 여론 조작 법안”이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민의 불쾌한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가족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는 없었다. “위헌적 권한 행사”라는 야당의 서늘한 주장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차남 김현철 때문에 몰락했다. 대선 일등공신 김현철은 안기부와 청와대에 심복을 두고 막강한 정보력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소통령’의 전횡을 YS에게 직보(直報)한 박관용 비서실장은 반격을 당해 바로 힘을 잃었다. 김현철의 특급 참모는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이었다.     ■  「 윤 대통령, 배우자 문제로 시험대 정치 9단 양김도 아들 관리 실패 특별감찰관이 모든 의혹 조사를 대통령·배우자 일정도 공개해야 」    1997년 김기섭 파문으로 시끄러울 때 노신영 전 총리를 만나 소회를 들었다. “안기부에서는 매일 수천 건의 정보와 첩보가 생산된다. 그중 5건만 부장에게 올라온다. 2년8개월 동안 부장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보고했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내용이다. 김기섭은 권한 없는 대통령 아들에게 매일 보고했다. 명백한 국정농단이다.”   김현철은 한보게이트의 몸통으로 지목돼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여권과 검찰 수뇌부는 서울대 교수들이 4·19 혁명 때처럼 시위에 나설 거라는 보고를 받고 당황했다. 검찰은 서둘러 별건수사에 나섰고, 조세포탈이라는 금시초문의 죄명을 적용했다.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편법이었다.   김현철은 검찰 재소환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이틀 조사받고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YS는 “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다”고 했다. 김현철은 이틀 뒤인 1997년 5월17일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는 최초로 구속됐다. YS를 만나고 나온 신상우 전 해수부 장관은 “대통령이 넋이 나갔다”고 했다.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없었고, 결국은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장남 김홍일은 정치적 동지였다. 김홍일은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얻었고,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DJ 집권 이후 단숨에 권력 실세가 됐다. 박주선 법무비서관은 초대 내각 각료 명단을 발표하기 위해 걸어가는 도중 DJ의 전화를 받았다. “나 때문에 고문당해 불구가 된 아들의 부탁이오….” 장관 한 사람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조승형 헌법재판관의 국정원장 기용이 은밀히 검토됐을 때 밤늦게 김홍일의 동교동 자택 문을 두드린 적이 있다. 자다가 일어난 그는 “없던 일이 됐다”고 화끈하게 확인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견제를 많이 받아서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지만 돌아가는 건 다 안다.” 다른 취재로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인사 청탁을 하는 방문객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인기 트로트 가수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 아들의 영향력은 전방위적이었다.   당시 대통령 친인척과 가족을 관리하는 민원비서관은 김홍일의 30년 친구였다. 허술한 감시는 비극을 불렀다. 김홍일은 권력형 뇌물비리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DJ의 다른 두 아들은 재임 중 구속됐다. 분노한 민심 앞에서는 검찰도 이들에게 총구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민심을 잘 읽었던 ‘정치 9단’ YS·DJ도 이렇게 자식 관리에 실패했고, 임기 말에 눈물 흘렸다. 윤 대통령은 임기를 2년도 채우기 전에 고난의 시험대에 올랐다. 가혹한 운명이지만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조기에 민심을 수용하면 남은 기간의 국정 운영은 순항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당당하게 특검을 받겠다고 나왔어야 했다.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당선된 승부사 대통령의 모범답안이었다. 이제라도 민심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제2부속실을 설치해 배우자를 관리하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선 공약대로 특별감찰관을 임명하고 해외순방 중 김건희 여사 명품 쇼핑, 명품백 수수, 인사청탁,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등 배우자 관련 의혹을 빠짐없이,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문제가 드러나면 일벌백계하고 대국민 사과와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내친김에 대통령과 배우자가 언제 누구를 만났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무성했던 루머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대통령이 민심에 맞서거나 마지못해 따라가는 시늉만 하면 안 된다. 하늘의 그물은 커서 성긴 듯하지만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노자 도덕경). 선행도, 악행도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마음을 내려놓고 하늘 같은 국민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YS·DJ조차 피할 수 없었던 비극적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끝까지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이하경 대기자

    2024.01.08 00:42

  • [고현곤 칼럼] 육영수 여사가 생각나는 새해 아침

    고현곤 편집인 1968년 7월 3일 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물난리가 났다. 잠원동 주민 300여 명이 신동초등학교에 긴급 대피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폭우 속에 황토물 교정을 철벅철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 밤중에 누굴까?” 그는 교사 안으로 들어오며 머리를 감쌌던 흠뻑 젖은 수건을 벗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사님 아냐?”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육영수 여사는 “여러분 얼마나 고생 많으세요”라고 인사한 뒤 가져온 구호 물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나룻배를 타고, 발목까지 빠지는 흙탕길을 고무신 차림으로 걸어서 그곳까지 온 것이다.   그해 호남은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 현장을 찾은 육 여사는 논두렁길로 걸어갔다. 말라 타버린 논 구석에 양수기가 있었다. 올라서서 양수기를 밟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뒤덮인 빈 양수기가 쩍쩍 소리를 냈다. 그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다가갔다. 육 여사는 울먹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사람들을 어떡하지….”   육 여사는 소리소문 없이 봉사와 선행에 힘썼다. 보육원, 양로원 등 사회의 그늘진 곳을 보살폈다. 67년 말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정부·여당 송년회에 육 여사가 불참했다. 의아해하는 참석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집사람은 보육원에 가느라 못 왔다”고 실토하는 바람에 모두 아무 말을 못 했다. 육 여사가 만든 사회봉사단체 양지회는 전국 87개 나환자촌 지원의 대명사였다. 그는 한센인들을 찾아가 손을 덥석 잡고, 고구마를 나눠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육 여사는 검소했다. 이애주 전 의원의 증언. 육 여사가 흉탄에 스러진 74년 8월 15일 서울대병원 간호사였다. “서거하신 후 유품을 정리하는데, 글쎄 한복 속옷을 기워 입으셨더라고요. 알뜰하고 소박한 성품을 생각하며 유품 앞에서 다시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남들이 화려한 자리라고 부러워하는 대통령 부인이지만, “청와대는 항상 중류 살림을 하자”며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비싼 옷을 입는 일이 없었다. 청와대에는 그 흔한 꽃꽂이도 못 하게 했다. 박 대통령은 육 여사 서거 후 이렇게 회고했다. “살아생전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다들 가난하게 산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비슷한 시기,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는 사치 행각을 벌였다. 명품 구두만 3000켤레가 넘었다. 육 여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의 부인이었지만.     ■  「 한복 속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 권력 누린다는 원성 살까 봐 늘 조심 조용히 봉사 선행, 온 국민 존경받아 육 여사 같은 영부인 또 볼 수 있을까 」  그는 사려 깊고 겸손했다. 가수 이미자씨 레코드판 한 장을 산 것이 알려진 후 가게에 들른 적이 있었다. 한 직원이 “영부인님, 이것도 사주세요”하고 물건을 내놓았다. 육 여사가 “근혜 엄마라고 하면 몰라도 영부인이라고 하니까 깎지도 못하겠네요”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웃긴 적이 있다. 김두영 전 청와대 2부속실 비서관의 증언. “육 여사는 권력을 즐기는 행세로 국민의 원성을 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늘 조심했다. 오만하게 보일까 봐 행사장에서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을 정도였다.”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았다. 국가의 대소사와 인사는 대통령의 영역이라 판단해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소소한 민원 처리는 자기 일이라고 여겼다. 매일 50여 통의 민원 편지를 뜯어보고 답장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내 앞으로 온 편지는 절대 손대지 마라”고 하고, 민원을 직접 챙겼다. 도봉동 토굴 속에 산다는 어느 소년의 편지를 읽고는 주소도 모르는 그곳 일대를 직접 뒤졌다. 기어이 소년을 만나고는 아이스크림 장사에 필요한 장사 밑천을 대준 일도 있었다.   잡음이 나지 않도록 주변을 늘 단속했다. 청와대 내 야당을 자처해 대통령이 알아야 할 일은 직접 전달했다. 한 번은 박 대통령 친척이 운전하다 사망사고를 냈다. 다들 쉬쉬하고 덮으려고 했는데, 육 여사가 그 소식을 대통령에게 전하는 바람에 그 친척은 구속됐다. 김종필 전 총리는 회고록에 “국민에게 퍼스트레이디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처음으로 알린 분”이라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에게 저항하던 사람들도 육 여사의 인품에는 고개를 숙였다.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은 육 여사 영결식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심은 평화와 사랑의 씨가 자라 그 꽃을 피우게 해 달라.” 김 추기경은 훗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국모(國母)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분”이라고 썼다. 서슬 퍼런 독재 시절, 박 대통령의 철권(鐵拳) 이미지를 육 여사가 절묘하게 보완한 셈이다. 서거한 74년을 기점으로 박정희 정권이 서서히 무너진 건 우연이 아니다.   그 뒤 대통령 부인이 여럿 나왔다. 이희호 여사처럼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훌륭한 분도 있었다. 하지만 육 여사만큼 온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품격 있게 대통령 부인 역할을 잘 해낸 인물은 없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육 여사가 생각나는 2024년 새해 아침이다. 고현곤 편집인

    2024.01.02 03:09

  • [최훈 칼럼] ‘퍼스트레이디 스트레스’ 해소하고 가야

    최훈 주필 덕담 나눠야 할 새해 아침이다. 하지만 에두를 필요도 없이 정국은 혼돈의 블랙홀 속이다. 그 중심은 야권이 단독 통과시킨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다. 대통령실은 “이송 즉시 거부”다. 민주당·정의당이 정권의 아킬레스 건이라 본 김건희 여사를 고리로 치명타를 가하려는 총선용 전략 카드임은 분명하다.   사실 2009~2012년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디테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별로 알고 싶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국민의 특검 찬성 여론은 매우 높다. 67%(서울경제)~70%(국민일보)가 거부권 반대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여당은 ▶야당만의 특검 추천 ▶수사 브리핑 허용 ▶총선 전후의 조사 시점을 들어 “국민 선택권을 침해하는 악법”으로 규정한다. 검사 출신답게 법규 해석에 초점을 맞춘 접근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국민의 70%는 과연 앞뒤 분간 못하는 바보일까. ‘법 해석’과 ‘국민 정서’의 사이. 상황은 왜 이리 흘러온 걸까.   윤석열 대통령은 “50살이 다 돼서 아내 만나 결혼(2012년)한 것”을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았다. 그러나 대선후보 시절부터 아내의 사건들로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학력·경력 부풀리기 등으로 대국민 사과에 나선 김 여사는 “깊이 반성하고, 국민 눈높이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며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고개를 숙였었다.   그에 앞선 2021년 여름,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야인인 윤 대통령의 국민의힘 입당을 권하려고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자택에 적잖은 정치인이 들렀다. 당시 이들이 고개를 꺄우뚱거리며 전해 준 얘기가 있다. “입당을 권유하자 옆 의자에 앉아 있던 김 여사가 ‘우리가 입당하면 저를 보호해 주실 수 있나요’라 하더라. ‘우리’ 라는 단어가 유독 기억에 남더라.” 다른 인사가 전한 장면. “바로 옆 김 여사가 ‘오빠는 (정치에 대해선) 잘 모르니 (이 분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 하더라.” 당시 ‘아크로비스타의 기억’은 여당 관계자들의 이런 해석을 낳았다. “김 여사 스스로는 윤 대통령의 오늘이 있기까지 적잖은 기여의 지분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더라. 정치적 창업 동업자쯤 여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김 여사는 대선 직전 공개된 한 불법도청 녹음에선 “우리 남편은 완전 바보다. 내가 다 챙겨줘야지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하긴 모든 아내에게 남편들은 바보일 수도 있겠으니….     ■  「 김 여사 특검법, 총선용 공세 맞지만 ‘찬성 70%’ 여론의 이유도 성찰해야 사과, 특별감찰관제 등 제도 정비로 국민 납득할 ‘문제해결’노력이 우선 」  우리의 법엔 ‘대통령 부인’의 권리·책임·의무 규정이 없다. 이리 보면 공인, 저리 보면 사인이니 경계선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엔 없다. 이 정권 들어 “그 문제는 내게 맡겨 달라”는 대통령의 의중 따라 특별감찰관제나 제2부속실 등의 관리 시스템도 없었다. 그러니 사달이 이어진다. 2022년 6월엔 코바나컨텐츠 임직원 3명이 김 여사의 봉하마을 일정에 동행, 참배해 클릭이 몰렸다. 그중 한 명이 “무속인 같다”는 게 출발이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무슨 법사나 무속의 얘기가 끊이지 않던 탓에 대중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사건쯤이다. 그중 한 명은 대선 기간 논란이던 ‘개 사과’ 인스타그램을 올린 이였다.   지금껏 구설은 끊이지 않아 왔다. ‘김건희 라인’이란 인사 논란이 해외 출장의 행사 의전·홍보 등을 담당하는 대통령실 내부에서 불거져 나왔다. 김 여사가 여당 여성 의원들을 초청한 관저에선 한 영남 의원이 “오늘 온 여성 의원들은 다 공천되도록 여사께서 배려해 달라”고 농반진반 얘기를 꺼내, 관계자들이 “쉬쉬”에 애먹기도 했다. 대통령의 나토 순방 기간 중 리투아니아 언론은 김 여사가 경호원·수행원 등 16명과 나서던 중 명품 편집매장에 들른 사실을 보도, 야권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 두 달 뒤 재미교포 친북 목사에게 디올 백을 받은 건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과오였다. 물론 불법 녹음의 덫에 경계와 긴장도 풀어졌을 터다. 하지만 유튜브에 뜬 당시 대화는 대통령 부인의 격(格)과 역할의 선(線)은 어디인지 심각한 성찰을 낳게 했다. “제가 이 자리에 있어 보니까 정치는 다 나쁘다고…” “저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면 제가 적극적으로 남북 문제에 나설 생각” “남북통일을 좀 해야 되고, 우리 목사님도 한번 크게 저랑 같이 할 일 하시고….”   내용도 잘 모르는 여사 특검법안의 ‘찬성 70%’는 바로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국민의 스트레스 지수인 듯싶다. 늘 조마조마한 국민의 우려와 걱정을 해소해 달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할 특별감찰관제를 도입, 아예 야권이 추천하라고 하는 건 어떨까. 국가기밀 접근권을 제한한 제2부속실의 공적 울타리 안에서 여사가 떳떳하게 활동할 순 없는가. 무엇보다 디올 백 수수 만은 정중히 사과해야 옳다. 보수 진영에서조차 요즘 ‘6·29선언급 쇄신’만이 살길이라 한다. 한동훈 위원장 앞의 가장 높은 허들, ‘고양이 목 방울 달기’다. 최훈 주필

    2024.01.01 02:54

  • [염재호 칼럼] 국격과 외교부총리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올 한 해 국민의 많은 관심을 모으며 윤석열 정부가 혼신의 힘을 기울인 일은 아마 부산엑스포 유치였을 것이다. 대통령, 국무총리, 부산시장뿐 아니라 4대 그룹 총수와 CEO들이 총동원되어 182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부산엑스포 유치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엑스포 민관합동 유치위원회 위원들의 활동을 합치면 지구를 496바퀴 돌 정도였다고 한다. 재계 리더와 경영진이 175개국 3000여 명의 정상과 장관을 만나기 위해 이동한 거리만도 지구를 197바퀴 돌 정도라고 한다.     ■  「 엑스포 유치 실패, 외교력 부족 탓 국격 걸맞게 외교 역량 강화해야 피크 코리아 늪 탈피 위해서라도 부총리급 세계 전략 사령탑 필요 」    아라비아 반도와 걸프만 지역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에미리트(UAE)의 2020엑스포 유치와 카타르의 2022월드컵 유치로 자존심이 상해 2030 엑스포 유치에 필사적이었다.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막강한 오일머니의 자금력을 앞세워 엑스포 유치에 전력을 기울였다. 늦게 출발했지만 우리도 약 60개국에서 지지 약속을 받아냈다면서 마치 서울올림픽과 한일월드컵 유치와 같은 성공신화를 믿었는지 모르겠다. 결과는 165개국이 참가한 1차 투표에서 사우디 리야드 119표, 대한민국 부산 29표, 이탈리아 로마 17표로 참패를 당했다.    K팝, K드라마의 인기를 앞세워 최종 프레젠테이션도 해 보았지만 외교력에서 사우디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단순히 자금력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외교적 역량이 떨어진 부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세계 3대 메가 이벤트 중에서 스포츠 중심인 올림픽과 월드컵과 달리 경제와 문화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엑스포는 외교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외교현장에서 우리의 국격은 경제력만큼 높지 않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의 외교 전략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우리 나름의 외교 역량을 키우지 못했다. 사회주의국가 출신 주한 대사들이 종종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을 보고 놀라곤 한다. 우리 외교관은 영어만 주로 하고 주재국 언어를 못하는 경우도 많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주요국에서 정치권 인물이 대사로 임명되면 중국어나 일본어를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나라는 수출주도형 경제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외교력은 10위권에 한참 못 미친다. 2022년 우리나라는 GDP 1조 6732억 달러로 세계 13위에 올랐다. 네덜란드는 9919억 달러로 18위를 차지했다. 제국의 경험이 있는 네덜란드는 강소국 외교를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 해외공관은 116개이지만 네덜란드는 129개의 공관을 갖고 있다. 공적 원조인 ODA 예산도 2022년 네덜란드는 65억 달러지만 우리나라는 29억 달러로 절반에도 못 미친다.   미·중 갈등 심화로 글로벌 밸류 체인이 붕괴하고 국제질서가 새롭게 태어나려 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힘을 합치고, 이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와 투자는 매우 적극적이다. 우리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남미, 중동,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외교부의 지위와 역량은 매우 초라하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가 경제를 총지휘하던 경제기획원의 전통이 이어져 기획재정부장관이 경제부총리의 역할을 맡고 있다. 교육부 장관도 사회부총리를 겸하고 있다. 통일부와 과학기술부의 장관도 부총리를 겸직했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핵심이 수출이고 강대국에 둘러싸여 외교가 무엇보다 중요한데도 외교부는 부총리 자리를 겸직해보지 못했다. 대통령 다음 의전 서열에서도 미국은 부통령(상원의장 겸임), 하원의장, 연방 대법원장에 이어 국무부 장관이 5번째인데, 우리나라 외교부 장관의 의전 서열은 국회의장, 총리 등에 이어 18번째인 대통령 비서실장 바로 다음인 19번째다.   윤석열 정부가 포용외교를 위해 내년도 ODA 예산안을 올해 4조5000억원에서 44% 비약적으로 늘어난 6조5000억원으로 편성했다. 비록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2000억원 이상 감액되었지만 전무후무한 예산 증액이다. OECD 개발원조위원회는 28개 회원국에 각국 GDP의 0.3%를 ODA 예산으로 지출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2022년 우리나라 ODA 예산은 GDP의 0.17%에 불과했다.   국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제력에 걸맞은 외교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국가의 소프트파워인 문화, 외교 등의 격이 올라야 경제도 살아날 수 있다. 국내 정치의 많은 문제로 인해서 한국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여기가 정상이라고 ‘피크 코리아’를 말하니 걱정이다. 신자유주의 글로벌 경제 질서가 요동치는데 국내 정치는 정쟁에 여념이 없다. 이제 세계 전략을 설계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외교부 장관이 부총리급 세계전략 사령탑이 되어서 국제사회에서 우리 외교력을 강화하고 국격과 경제력을 더욱 높여야 한다. 우리 국민의 피땀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여기가 정상이니 내려가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12.27 00:44

  • [장훈 칼럼] 대 인플레 시대, 공감의 정치는 어디에?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무대 위 움직임은 요즘 현란하다. 이낙연 신당, 제3지대 신당으로 고조되던 분위기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깜짝 등장으로 정점을 찍고 있다. 새로운 기대감, 절박감, 위기감이 연쇄 반응 중이다. 이제 승부는 팽팽해졌고 뉴스라인은 선거 드라마가 덮고 있다.   드라마의 열기 속에서 필자가 오늘 독자들과 생각해보려는 질문은 이렇다. 정치 드라마는 과연 선거 표심을 얼마나 움직일까? 숫자에 어두운 정치학자들이 가끔 쓰는 계산식 가운데 고통 지수(misery index)가 있다. 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합한 수치인데, 이 고통 지수가 지난해보다 높아지면 집권 여당은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미국 정치학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내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전망이 어두운 첫째 이유는 고삐 풀린 인플레 때문이다(미국 인플레는 최근 몇 주  진정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표심을 좌우하는 건 결국 인플레 구조적인 인플레 시대 인정하고 시민들 삶의 고통을 어루만져야 솔직과 검약이 공감정치의 출발 ■  「」    여야 정당들의 긴박한 드라마가 수면 위 파도라면, 그 파도를 움직이고 선거 민심을 좌우하는 저류는 시민들 삶을 위협하는 생활 인플레이다. 인플레가 높으니 여당 책임론이 우선이라는 단순 도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다음을 차례로 살펴보자. ①인플레 수치(numbers)와 싸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플레를 설명하고 시민들 고통을 이해하려는 리더의 내러티브다. 이 점에서 윤석열 정부는 전면적인 정비가 필요하다. ②윤 대통령과 여당이 물가 관리에 힘을 쏟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구태의연하다. ③시민들의 생활 고통에 공감하는 내러티브가 정비된다면 내년 총선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다.   첫째, 내러티브의 문제. 오늘날 인플레는 사실 글로벌 현상이고 지정학의 격변에서 비롯된 구조적 도전이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노력만으로 인플레를 잡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인플레에 대처하는 내러티브라도 바뀌어야 한다. 내러티브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플레는 생각보다 오래갈 것이며,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가 고통과 눈물의 대(大) 인플레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솔직하게 알려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인플레 시대 시민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검약한 생활을 호소하는 대통령의 공감 내러티브가 절실하다.   먼저 구조적인 인플레. 중국이 G2로 부상하던 지난 20여 년이 대 디플레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 20년은 대 인플레이션의 시대다. 중국의 풍부한 저임금 노동과 저렴한 상품이 세계인들에게 낮은 물가를 선물하던 시대는 끝났다. 세계는 양 진영으로 재편 중이고 탈중국은 곧 중국발 디플레의 끝을 뜻한다. 지정학적 불안은 또한 석유와 식량의 수입 이동 거리를 늘리고 있으며 이는 고물가의 또 다른 구조적 요인이다.   내러티브의 또 다른 축은 공감이다. 윤 대통령은 한편으론 인공지능, 로봇, 양자 혁명이 주도하는 미래 비전을 말할 수 있다. 동시에 보통 시민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한번 오른 소비자 물가를 되돌리기는 어려우며 무려 2200조 원에 이르는 가계부채(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세계 1위)를 짊어진 개인들에게 저금리의 세상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을 함께 아프게 느껴야만 한다. 시민들 삶에 공감하는 내러티브는 대통령과 주변의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서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대통령 관저의 실내 온도를 낮추고 두꺼운 스웨터를 입은 채 생활하는 윤 대통령 부부의 사진이 얼어붙은 민심을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다.   둘째, 인플레에 대응하는 정부의 접근 방식은 크게 손봐야만 한다. 물론 긍정적 신호도 있다. 내년 예산안에서 보듯이 윤 대통령은 긴축 재정이라는 칼을 빼 들었다. 다양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정부 예산에 허리띠를 졸라매었다.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정부 예산의 긴축으로 민심을 감동시키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세부적인 인플레 대응책으로 넘어가 보면 답답함은 커진다. 얼마 전 경제 부총리는 라면 제조회사들에 가격 인하를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나선 바 있다. 공개압박은 주류 업계, 밀가루 제분업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방식 아닌가? 30~40년 전 발전국가 시대에 하던 정부의 가격 누르기는 2023년 한국의 현실과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는 식료품의 수입, 유통, 제조, 재료 수급 등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서 합리화를 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요약하자면, 결국 내년 봄 표심을 움직이는 힘은 정치 드라마보다는 ‘먹고사니즘’의 결정체인 인플레다. 지난해 봄 대통령 선거에도 온갖 드라마가 연출되었지만 정작 유권자들이 가장 중요한 투표 요인이라고 응답한 것은 부동산 가격의 폭등이었다. 외부로부터 구조적으로 닥쳐오는 인플레의 불길을 잡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래도 민심을 달래는 길은 있다. 진솔한 태도와 위로의 말로 리더는 성난 민심을 움직이기도 한다고 역사는 기록해왔다.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2023.12.25 00:35

  • [이하경 칼럼] ‘아는 형님’ 인사 유감

    이하경 대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내 방식이 맞다”는 확신이 강하다. 검사 시절 살아 있는 권력과 맞섰고, 검찰을 떠난 뒤 딱 1년 만에 대통령이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강서구청장 선거와 부산엑스포 유치 참패로 거침없는 불패의 신화(神話)는 깨졌다. 모든 관계자가 예견한 결과를 대통령만 몰랐다. 불통의 벌거숭이 임금님이 됐다.   이쯤 되면 바뀔 법도 하지만 특유의 국정운영 스타일은 여전하다. 검찰 선배 김홍일 국민권익위원장을 방송통신위원장에 지명했다. 전문성보다 학연과 근무연을 중시하는 ‘아는 형님’ 인사가 되풀이된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하는 헌법 1조의 민주공화국 정신과 충돌한다. 인재풀이 좁아져 국가 경쟁력이 약화돼 국민이 피해를 입으면 누가 보상할것인가.     ■  「 윤 대통령 사심 없고 정책 바로 서 스스로 미숙·결핍을 인정한 뒤 혹독한 감시도 자청해서 받고 과거·친소 불문 인재 써야 성공해 」    김건희 여사 리스크도 문제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동향(同鄕) 목사로부터 명품백을 선물받았다고 한다. 목사는 다섯 번 선물을 제의했는데 명품을 주겠다고 했던 두 번만 면담이 성사됐다고 했다. 목사는 김 여사가 인사청탁을 받는 전화통화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던 맹세는 어디로 갔는가.   여권이 정권을 되찾는 데 성공하고도 불과 1년 반 만에 세 번째 비대위를 꾸릴 정도로 혼란을 겪는 것은 윤 대통령의 경험 부족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대선에 출마하기 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뭔가 허술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해 주저하는 불면의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 성찰의 힘으로 자세를 낮춰 경청하고, 혹독한 감시를 자청했다면 지금의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 개국 8년 만에 왕위에 오른 태종은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권신(權臣)과 친형제까지 죽인 무서운 인물이었다. 어느 날 왕의 휴식 공간인 편전(便殿)에 몰래 들어와 있던 사관(史官) 민인생을 발견하고 “들어오지 않는 것이 맞다”고 했다. 그러나 민인생은 “신(臣)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신여불직(臣如不直) 상유황천(上有皇天)”라고 맞섰다. 태종은 그를 처단하지 않고 존중했다. 이런 관용의 힘으로 조선 500년 동안 군주의 절대 권력은 끊임없이 감시받고 절제될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이 배우자를 감시할 수 있는 특별감찰관과 공식적으로 보좌할 제2부속실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요즘 시대의 하늘은 민심이다. 그런데 윤 정권은 민심과 불화하고 있다.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사건 특검법이 28일 민주당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다고 한다. 이 와중에 명품백 사건이 터졌고 국민 70%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반대하고 있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대통령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민심과 싸우는 형국이 된다. 방치하면 내년 총선은 ‘김건희 총선’이 될 것이다.   이런 지경인데도 여권 전체가 그저 윤심(尹心)만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을 대통령이 결정하는 특이한 구조 때문이다. 윤재옥 국민의힘 대표권한대행은 윤 대통령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90도 인사를 했다. 여권의 시곗바늘은 전제군주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 이 기이한 장면을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예수와 함께 죽겠다고 맹세했던 베드로도 재판정에 선 예수를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했다. 지금 아부꾼들은 대통령이 뿌려주는 권력이라는 마약을 한 방울이라도 더 핥기 위해 충성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의 황혼이 찾아오면 첫닭이 울기도 전에 싸늘하게 배신할 것이다. 염량세태(炎凉世態)는 박근혜 탄핵으로 이미 증명된 권력의 법칙이다.   한 사람의 진면목을 알려면 그에게 권력을 쥐여주면 된다. 더 가질수록 도파민이 많이 분비돼 뇌의 중독 중추가 활성화되고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경계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유령인 줄 알고 떨었는데 내가 유령으로 판명된 공포영화 ‘디 아더스’의 반전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아직 기회는 충분히 있다. 윤 대통령은 사심이 없고, 정책 방향이 대체로 바로 서 있다. 게다가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방탄당, 입법폭주당의 오명을 떨쳐내지 못하고 민생에서 멀어져 있다. 윤 대통령은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미숙함과 결핍을 인정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유·무죄로 판단하는 검사의 이분법적 가치관만으로는 품을 수 없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세계가 있다. 흑과 백이 아니라 경계가 모호한 회색지대에 더 많은 진실이 숨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엄중함을 알면 ‘아는 형님’ 카드를 남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반대하고 비판하더라도 내게 없는 지혜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하늘로 여겨야 한다. 그러면 모두가 협력자가 될 것이다. 뛰어난 인재는 과거 불문, 친소 불문하고 요직에 기용해야 한다. 성공한 정권,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3.12.18 00:53

  • [최훈 칼럼] ‘21년 검사’ 한동훈의 정치 도전…빛과 그림자

    최훈 주필 지난주 대상홀딩스우라는 생소한 주식 종목이 7일 연속 상한가를 찍었다. 정치 데뷔를 앞둔 한동훈 법무장관이 서울 현대고 동기인 배우 이정재씨와 함께 식사한 뒤였다. 이씨의 여자친구가 이 회사의 2대 주주 오너다.   한 장관의 초임은 2001년 5월 1일 서울지검. 작년 5월 정무직 법무장관이 됐으니 검사 21년이었다. 깜짝 발탁이라 화제였으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주변에 “한동훈이는 (고생도 많았으니) 이제 칼잡이는 좀 그만 시키려고 그래”라고 말했다는 전언이 들렸다. “칼 거둬주고 펜을 쥐어줬다”(장제원 의원)는 낙점 이유에서 대통령의 개인적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존 F 케네디가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를 키우려고 논란 무릅쓰고 법무장관에 앉힌 사례도 소환됐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추미애를 법무장관에 앉혀 차기군을 넓히려 했으나 그만 제 발등에 도끼를 찍고 말았다.     ■  「 여권 차기 주자 1위의 등판 임박 그 영향력이 총선 주요 변수 부상 ‘지지층 과반이 60대 이상’은 한계 관건은 중도 잡을 균형·미래·실용 」    검사 한동훈은 인정사정없었다. 선배인 윤석열 검사조차 “한동훈이는 수사에 ‘유도리(융통성의 일본 표현)’가 없어”라고 했을 정도였다. “윤석열 빼곤 누구 말도 듣지 않는다더라”는 얘기도 돌았다. 당한 사람들이야 인정이 어렵겠지만 검사로선 뭐라 깎아내리기 힘든 자세겠다. 스카프·넥타이·벨트·안경·가방에 펜까지 70년대생 X세대 출신의 감각도 온라인을 장식했다. 121일 앞의 총선. 변수 중 하나가 그의 총선 영향력이다.   여당의 구원투수로 50세의 장관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지형임은 분명하다. 사흘 전 “장래 대통령감이 누구냐”는 차기 지도자 선호 조사(한국갤럽, 12월 5~7일) 결과에서 한 장관은 16%로 여권 1위, 전체 2위다. 19%의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여권의 다음은 홍준표(4%), 오세훈·이준석·원희룡(각 2%), 유승민(1%) 순. 지난 대선에서 외부의 ‘정치 신인 윤석열’을 영입하며 가까스로 여당이 된 국민의힘은 강서구청장 보선 참패 이후 총선의 구원투수조차 다시 밖에 기대야 하는 자생력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달 말 원포인트 개각으로 한 장관에게 비춰질 스포트라이트를 극대화해야 할 다급한 구도다.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에게 퍼부은 국회의 맹폭 장면들로 그는 정치적 자본을 쌓았다. 여의도 정치문법 따윈 깡그리 무시였다. 이 ‘태도 보수’의 저돌적 반란에 “사이다 같다”“똑똑하고 말 잘한다”“자기 흠 없으니 당당하다”는 박수가 나왔다. 동시에 “싸가지없다” “깃털같은 가벼움” “재승박덕”이라는 세평이 엇갈렸다. ‘정치인 한동훈’에 대한 여당의 기대 지점 역시 민주당에 타격을 가할 21년 칼잡이의 선거 전투력이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짙다. 차기 여권 1위 한동훈 지지층의 과반(54%)은 60~70대 이상 고령층이다. 그들이 오래도록 공과 흠을 다 보아왔던 홍준표·오세훈·원희룡의 노련함보다 뉴페이스에 보수의 차기를 베팅한 결과다. 20·30·40 대의 한동훈 지지는 6%,12%,10%에 그친다. 여당 지지자들은 41%가 한 장관을 압도적 1위로 꼽았지만 민주당 응원자들은 1%만 그를 골랐다. 역시 윤 대통령 직무를 긍정 평가하는 이들의 42%는 대통령의 막내동생 같은 그를 압도적 1위로 올렸지만, 부정평가층에선 3% 바닥이다. 무엇보다 총선의 “야당 다수 승리” 기대가 51% 과반으로 “여당 다수 승리”(35%)를 한참이나 앞서 있다. ‘신인 한동훈’에겐 명확한 빛과 그림자다.   정치의 오랜 딜레마가 하나 있다. ‘왜 똑똑한 사람들이 정치에만 오면 다 바보가 될까.’ 2013년 예일대에서 수학 더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분류해 ‘총기규제와 범죄의 함수’ 문제를 푸는 비교 실험을 해봤다. 그런데 자기 이데올로기와 맞지 않는 문제에는 똑똑한 이들이 더 오답을 내는 경향을 보였다. 바로 ‘이념’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올바른 답보다 늘 자신이 옳다는 걸 뒷받침하는 답을 찾아갔다. 그 좋은 두뇌를 그렇게만 사용해 서로 싸움만 거세지니 “이념의 진영에 갇히면 똑똑한 이들이 더 바보가 된다”는 결론이었다(에즈라 클라인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   ‘똑똑한 한동훈’의 성패 가를 잣대는 명확하다. 보수도, 진보도 아니라는 거대한 30%대의 중도층에 어필할 ‘확장성’이다. 검사와 정치는 상극이다. 현실의 정치는 곳곳 선악 분명치 않은 회색 지대다. 무슨 고시처럼 정해진 답도 없다. 검사야 피의자와 타협, 조정할 일도 없다. 그러나 매번 차선, 차악을 골라가야 할 조정과 균형(balance)의 예술이 그가 부닥쳐야 할 정치다.   민주당을 좀 베 달라는 여당의 미션을 그가 피할 순 없을 터다. 하지만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의 환호에 취해 골수우파 진영의 돌격대장에 머문다면 정치적 미래란 없다. 정치의 성공 조건은 늘 ‘모든 것의 밸런스’다. ‘나라의 미래’는 바로 새 시대의 신인인 그가 향해야 할 목표다. ‘이민청’ 같은 자신만의 미래·실용 어젠다 찾아라. 막장에 다다른 우리 정치. 새로운 자극과 혁신의 ‘정치 교체’ 가 바로 갑갑한 이 시대의 이성이다. 그게 한동훈이든, 다른 누구든 말이다. 최훈 주필

    2023.12.11 00:38

  • [고현곤 칼럼] 엑스포 실패에서 생각해볼 것

    고현곤 편집인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전이 참패로 끝났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몇 가지 짚어볼 게 있다. 무엇보다 엑스포 유치에 국가의 에너지를 너무 썼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것처럼 집착한 건 이해할 수 없다. 애초에 승산이 적은 싸움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32년 건국 100주년이다. 왕실 권력 다툼 끝에 집권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왕위 계승을 전후해 국민에게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 그 일환으로 1조 달러 이상 들여 세계 최대 스마트시티(네옴시티)를 계획했다. 100주년 즈음해 2027 동계아시안게임, 2030 엑스포, 2034 월드컵·하계아시안게임 같은 국제대회를 쓸어담는 것도 같은 이유다. 돈이 남아돌아 오일머니를 뿌리는 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다.     ■  「 승산 적은 싸움에 정부·기업 총동원 디지털시대, 엑스포 경제 효과 의문 2025년 오사카도 흥행 부진 먹구름 유치 못한 게 어쩌면 다행일 수도 」    손자병법에 나와 있듯 상대가 강하면 피해 가는 게 현명하다(强而避之, 강이피지).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성과를 내려고 조급했거나 잘못된 정보로 오판했던 것 같다. 대통령에게 보고가 제대로 됐는지도 의문이다. 도중이라도 버겁다고 판단했으면 세련되게 발을 뺐어야 했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정부가 끝까지 이길 것처럼 밀어붙여 의아했다. 실패했을 때의 출구전략도 딱히 없어 보였다. 우리가 모르는 비장의 카드가 있는 줄 알았다. 뚜껑을 열어 보니 별게 없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이 과도하게 동원됐다. 과거에도 몇몇 기업이 국제대회 유치에 앞장섰지만 이번처럼 4대 그룹, 10대 그룹 하는 식으로 죄다 나선 건 이례적이다. 분초를 아껴 써야 하는 대기업 회장들이 사업을 뒤로한 채 대통령을 따라다녔다. “회장이 올해 회사 일보다 엑스포 때문에 해외 출장 다닌 게 더 많다”(모 대기업 관계자). 단순히 한국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애국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회장들은 대부분 고민과 약점이 있다. 사업 부진, 인수합병, 승계 같은 현안이 있다. 이런저런 재판도 진행 중이다. 문재인 정부와 가깝게 지낸 죄(?)로 잔뜩 얼어 있는 기업도 있다. 정부에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 대통령이 ‘나를 따르라’고 하면 만사를 제쳐둘 수밖에 없다. 재계에선 “회장들끼리 함께 해외를 다니면서 친해진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라는 말이 나온다.   더 근본적인 의문은 엑스포가 온 나라가 매달릴 정도로 경제 효과가 크냐는 점이다. 과거 엑스포는 각국이 한데 모여 산업·과학기술 성과를 알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지금은 디지털의 발달로 굳이 모이지 않고도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필요한 것을 얻는다.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국경의 개념도 사라지고 있다. 정부가 판을 깔아주지 않아도 기업·개인이 할 수 있는 게 많다. 엑스포 같은 국가 대항전 성격의 오프라인 행사는 매력이 줄었다.   2025 일본 오사카 엑스포도 위기다. 2018년 러시아를 제치고 유치했을 때만 해도 경제 효과가 2조 엔(약 18조원)이 넘는다며 축제 분위기였다. 개막 1년여를 앞둔 지금은 사뭇 다르다. 50여 개국이 자국 부담으로 전시관을 짓겠다고 했으나 실제 건설에 착수한 곳은 한국과 프랑스·룩셈부르크 등 손에 꼽힌다. 멕시코·러시아·에스토니아처럼 자국 정치 상황, 비용 문제로 불참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행사장 건설비는 2018년 1250억 엔에서 최근 2350억 엔으로 두 배로 뛰었다. 그사이 자재비와 인건비가 많이 올랐다. 건설비를 3분의 1씩 내야 하는 중앙정부와 오사카 지방정부, 재계 모두 근심이 깊다. 재계는 “기부금을 더 모으기 어렵다”며 난색이다. 기업들은 엑스포 입장권을 수만~수십만 장씩 떠안는다.   일본 여론은 싸늘해졌다. 경제 효과가 불투명한 데다 늘어난 비용을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결국 국민 부담이다. 고령층 의료 등 돈 쓸 곳이 많은데 일회성 행사에 재정을 쏟아붓는 게 맞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달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오사카 엑스포가 ‘필요 없다’는 응답이 68%에 달했다. 사회학자인 요시미 신야 도쿄대 교수는 “이제 일본에서 올림픽도, 엑스포도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런데 국내 연구기관들은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면 일자리 50만 개를 창출하고, 61조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전망했다. 근거가 약하다. 5050만 명이 엑스포를 찾을 것이란 예측도 수긍하기 어렵다. 밀라노(2015년)·두바이(2021년) 엑스포는 방문객이 2000만 명대 초반이었다. 오사카 엑스포는 2820만 명(외국인 350만 명 포함)을 기대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다. 일본 인구의 절반이 안 되는 한국에서 오사카의 두 배 가까운 방문객은 무리다. 게다가 2030년이면 65세 이상 고령층이 130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한다. 엑스포 구경 다닐 사람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얘기다. 행사 후 관련 시설을 어떻게 활용할지의 고민도 고스란히 남는다.   정부가 엑스포 유치에 공들일 시간에 연금·노동·교육 3대 개혁이나 저출산 문제에 매진했으면 지금쯤 뭐라도 진전이 있지 않았을까. 엑스포를 유치하지 않고, 여기서 멈춘 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고현곤 편집인

    2023.12.01 00:47

  • [염재호 칼럼] AI 시대의 상상력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지난해 11월 챗GPT 3.5가 전격적으로 출시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GPT4가 나왔다. 드디어 인공지능이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예측이 실감 나게 다가오고 있다. 수퍼 컴퓨터로 24시간 쉴 새 없이 기계학습을 하는 인공지능은 인간 행동과 언어의 모든 패턴을 분석하여 스스로 생성한 정보로 자신의 판단을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20세기에는 기계화 도입으로 인간의 육체적 능력을 대체하는 변화가 나타났다면 21세기에는 인공지능 도입으로 인간의 지적 능력을 대체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마침내 직업 대전환에 대한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일자리의 미래 2023’ 보고서에 따르면 2027년까지 전 세계에서 83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690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으로 전망된다. 챗GPT의 등장으로 향후 5년 이내에 기존 일자리의 23%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 도입으로 사무, 행정 분야뿐 아니라 법률, 의료, 연구 등 전문분야까지 변화의 바람은 거세게 불 것이다.     ■  「 반복적 일보다 창의력 중요해져 호모 파베르에서 호모 루덴스로 수도권 교통 주거도 상상력 필요 상상력으로 미래 국정 설계해야 」    제러미 리프킨이 예견한 ‘노동의 종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인간은 주 3일 정도 일하거나 일없이 기본소득만 받으며 평생을 살지도 모른다. 옛날 귀족들은 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 노동은 하인들에게 시키고 자신들은 문학, 예술 등과 같은 도락을 일삼으며 평생을 살았다. 이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노동하던 인간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에서 네덜란드의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개념인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 대전환하여 살게 될지 모른다.   1940년대 미국에서는 주 70시간 정도 일했다. 이제 유럽에서는 주 30시간 정도 일한다.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인간의 노동시간이 아니라 기술혁신이기 때문이다. 문화나 예술도 고부가가치를 생산해낸다. 이전엔 놀이라고 치부하던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의 활동이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입을 올리고 있다. 먹는 것이나 여행 등 취미 생활로 돈 버는 유튜버들도 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했다. 자신을 과학자가 아니라 상상력을 자유롭게 끌어내는 예술가라고 했다. 21세기 미래를 주도하는 것은 노동의 힘이 아니라 상상력의 힘이 될 것이다. 노동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관료제적 특성들은 이제 20세기 역사적 유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서울의 주택난이 심각해도 이를 풀어내는 상상력은 초라하다. 서울은 지구단위 계획 때문에 도심은 상업지구로 만들고 주거는 외곽이나 신도시로 내몰았다. 그래서 직장 출퇴근에 한 시간 이상 걸린다. 기존 사대문 안에 있는 초등학교는 주민이 없어서 전교생 100명을 겨우 유지할 정도다. 명동의 땅값이 평당 수억원이 넘지만 사오층 정도 상가건물이 즐비하다. 반면에 뉴욕 맨해튼에는 수십층짜리 주상 아파트들로 가득 차 있다. 서울이 U자형 스카이라인인데 반해 맨해튼은 역 U자형으로 도심에 초고층 건물과 주거공간이 많다. 이처럼 명동 등 도심과 용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철로 위에 60~70층 임대아파트를 건설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100여만원의 월세를 내고도 24시간 어린이집, 병원, 공유 주방, 피트니스 센터, 스카이라운지 등의 시설을 갖춘 도심 고층 임대아파트에서 젊은이들이 살게 해야 한다.   김포 골드라인 초과밀 문제로 김포를 서울시에 편입하려는 정치권 논의가 뜨겁다. 일본 도쿄에는 출퇴근 시간에 많은 특급 전철이 일반 전철의 절반 정도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우리는 특급열차가 통과할 대기 공간이 정차 역에 없어서 대부분 전철이 모든 역에 정차한다. 주거공간이 수도권 외곽이기에 긴 시간 출퇴근 교통지옥에 시달린다. 현재 1호선은 10량, 경전철은 4량, 대부분 지하철은 8량으로 운행한다. 출퇴근 과밀 시간에 몇 개의 차량을 더 연결하여 운행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지하철 8량에 4량 정도를 추가하면 수송인력이 50% 늘고 이곳을 카페나 레스토랑처럼 운영할 수도 있다. 지정 좌석에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탑승하여 커피 마시고 토스트 먹으며, 일도 하고 음악이나 영화를 감상하며 출퇴근할 수 있다. 승하차는 차량 연결문을 통해 8량이 있는 곳을 통해 하면 된다. 스위스 산악열차도 스타벅스 카페 차량을 객차에 연결하여 운행한다.   인공지능(AI) 시대에선 평범한 생각이나 반복적 일은 컴퓨터,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 우리가 이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상상력과 창의력뿐이다. 20세기 관료제의 꽉 막힌 사고에서 벗어나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만이 21세기에 AI를 뛰어넘어 인류가 잘살 수 있는 길이다. 국정을 맡은 정치지도자들과 관료들도 과거에 얽매인 정치와 규제가 아니라 상상력으로 미래의 문제를 푸는 국정운영을 해야 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11.29 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