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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의 시선] 5182명 접종, 9만 7000명 분 폐기
강주안 논설위원 대중교통 마스크 의무가 해제된 지난 20일 ‘지하철 폭행남’이 떠올랐다. 왜 마스크를 안 쓰냐고 항의하는 동승 시민을 험하게 가격하던 성난 얼굴. 코로나19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괴이한 풍경을 빚었다. 방역 패스도 낯설었다. 예방 접종을 두려워한 사람은 식당 출입이 막혔다. 대형마트도 못 갔다. 백신은 꿈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희망 전도사였다. 대통령은 21대 총선 직전인 2020년 4월 9일, 코로나19 국산 치료제와 백신의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다. 청와대는 “코로나19 치료제 및 백신 개발이 조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 집중 지원하기 위한 범정부지원단을 구성해 이번 주부터 본격 가동한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 백신 개발 등에 2100억원을 투자하고, 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를 추가경정예산에 반영한다고 밝혔다. 국산 치료제와 백신이 곧 개발돼 세계 각국이 한국산 백신을 구매하겠다고 줄을 서고 다양한 인종의 확진자가 한국산 치료제 덕분에 목숨을 건지는 상상을 유포했다. ━ “백신 주권” 장담한 문재인 정부 ━ “끝을 보라”며 수천억 쏟아 부어 ━ 국산 치료제 이어 백신도 물음표 비슷한 시점에 직업도 소득 수준도 묻지 않고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주겠다는 청와대 발표가 나왔다. 당시 야당이던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역시 맞장구쳤다. 미친 짓이란 걸 모두가 알았지만, 선거의 광풍은 정치권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국산 백신의 춘몽에 도취한 탓일까. 다른 나라들이 아스트라제네카나 화이자·모더나 같은 외국 백신을 발 빠르게 확보하는 동안 우린 OECD 꼴찌 접종국이 됐다. 궁지에 몰릴 때마다 국산 치료제와 백신을 묘약처럼 꺼냈다. 대통령은 그해 10월 국회 연설에서 “치료제와 백신이 다른 나라에서 먼저 개발되어 수입할 수 있게 되더라도 개발 경험 축적과 백신 주권, 공급가격 인하를 위해 끝까지 자체개발을 성공시키겠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 진상은 드러난다. 셀트리온이 개발한 치료제 ‘렉키로나’는 존재감이 사라졌다. 국산 치료제가 큰 몫을 하리란 기대도 수그러든 지 오래다. 화이자의 ‘팍스로비드’를 열심히 수입해서 먹고 있을 뿐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21년 1월 20일 오전 경북 안동시 SK바이오사이언스를 방문해 코로나19 백신 생산 시설을 시찰하던 중 최태원 SK회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SK바이오사이언스를 비롯한 국내 제약업체의 백신 개발을 적극 지원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 전 대통령이 직접 경북 안동 공장을 방문하면서 기대를 부풀린 국산 백신 SK바이오사이언스의 ‘스카이코비원’은 어떤 상황인지 정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질병관리청은 지난 1일까지 5182명이 접종했다고 답했다. 반면 폐기한 물량이 9만 7000회분이다. 유효기간 경과로 버린 국산 백신이 접종에 사용한 물량의 18배다. 정부가 ‘스카이코비원’을 선 구매 계약한 물량은 무려 1000만 회분이다. 여기에 드는 예산이 2200억원이다. 1만 명도 안 맞은 백신의 1000만회 분을 어떻게 소화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당초 6개월이던 유효기간을 두 차례에 걸쳐 12개월까지 연장했지만, 그 사이 990만명에게 접종하는 묘안을 찾아낼 수 있을까. SK바이오사이언스 측은 “스카이코비원을 바탕으로 다가 백신 등 연구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번 백신 개발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상황은 만만치 않다. 2020년 이후 예산 2575억원을 ‘코로나19 백신 임상 지원’에 투입해온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말 사업을 종료했다. 문재인 정부가 띄운 ‘글로벌 백신 허브’ 관련 사업은 쪼그라들었다. 정부 지원을 받으며 백신을 개발해온 국내 업체들은 대부분 3상에 들어가지도 못한 상태다. 국내 누적 감염자가 3000만 명을 넘어서고 대다수가 백신을 접종한 상황에선 임상시험 대상자를 구하기조차 어렵다. “대세가 된 mRNA 방식으로 1상을 마쳤으나 2상에 들어가지 못해 안타깝다”(큐라티스 최유화 전무)는 말이 현실을 보여준다. 복지부 측은 “내년에 신규로 백신 개발 임상 지원 관련 사업을 추진해 국산 백신 개발을 중단 없이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현장에선 혼란스러워한다. 얼마 전 검찰이 코로나19 백신 개발과 관련해 식품의약품안전처 압수수색을 벌이면서 더 어수선하다. 문재인 정부가 “끝을 보라”고 장담하던 국산 치료제와 백신의 결말은 허무해지고 있다. 일련의 과정을 되짚어 봐야 한다. 마스크 없이 지하철을 타게 됐다고 해서 막대한 예산을 지원한 국산 치료제와 백신이 계륵 신세가 된 과정을 살피지 않으면, 패닉에 빠진 국민 앞에 번드르르한 조감도를 걸고 나랏돈을 쏟아붓는 행태는 반복된다. 당장 1년 뒤 총선을 겨냥해 공수 교대한 여야가 ‘전 국민 재난 극복 축하금’ 뿌리기에 골몰할지 모른다. 코로나19는 팬데믹이 끝나도 정치권을 매개체 삼아 국민 세금을 빨아먹는 풍토 흡혈귀로 우리 곁을 배회할 가능성이 크다. 관련기사 “10년 넘게 추적하는 간첩 수사, 국정원 손 떼면 끝장”[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의 시선] 물러날 때를 놓친 장관의 비애 [강주안의 시선] 출입문 통과용 마스크 규제 코로나 엔데믹 된다는데 이제 국산 백신 개발?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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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69시간’ 논란이 알려주는 것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5년만 버티면 된다’가 아니라 ‘1년만 버티면 된다’가 됐습니다.” 최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주최 포럼에서 김진표 국회의장이 한 말이다. 대선이 5년마다 치러지니 패한 정당이나 지지자 사이에선 ‘버틴다’는 표현이 쓰이곤 했다. 그런데 여야 정치권이 요즘은 1년 가량 남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16일 국회에서 열린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향 토론회에 'MZ노조'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유준환 의장(왼쪽) 등이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 모두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총선에서 제1당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인 것이 배경이라고 김 의장은 설명했다. 실제 여론조사에서 양대 정당의 지지율은 큰 차이가 없다. 여기에 지난 대선이 역대 최소 표차로 승부가 갈렸고 역대 최대 의석수 차이의 여소야대 국회인 상황이 더해져 있다. 여야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는 이유다. 예비후보자 등록 시작이 9개월도 안 남을 정도로 총선이 다가왔음을 실감한 건 ‘주 69시간 근무’ 논란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신속한 대응을 보면서다. 어제 윤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 대통령실 안상훈 사회수석이 현안브리핑에 나섰다. 그는 “연장 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는 윤 대통령의 입장을 전했다. 방일이라는 대형 이슈 속에서도 노동시간 개편안 보완 입장을 전하느라 애를 쓴 것이다. ■ 「 여야 "1년만 버티자" 분위기 MZ, 과거사보다 69시간 민감 유권자가 심판할 총선 임박 」 윤 대통령은 근무시간 유연화를 노동개혁 국정과제 중에서도 우선 순위에 뒀었다. 대통령실이 앞장서 신속히 재검토를 밝힌 것은 ‘MZ 세대’ 표심의 이탈을 막는 게 시급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에선 세대별 지지 구도가 깨졌다. 과거 60대 이상은 보수 정당 지지세가 뚜렷한 반면 20~30대는 진보 정당 지지 경향이 강했었다. 하지만 지난 대선 출구조사에 따르면 MZ 세대 남성은 윤 대통령에게 많은 표를 줬다. 고령화로 60세 이상 유권자가 전체의 30%가량을 차지하고 투표율도 높긴 하지만, 40~50대에서 진보 성향이 더 높다는 걸 고려하면 젊은 세대의 표를 확보하지 못하고선 여권이 총선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여론조사에서도 MZ 세대는 윤 대통령의 강제징용 보상 해법인 ‘제3자 변제’보다 노동시간 개편안에 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갤럽의 지난 8~9일 1002명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20대에서 19%, 30대에서 13%에 그쳐 다른 연령대보다 낮았다. 특히 전체 지지율은 2%포인트 떨어졌지만 20대는 5%포인트, 30대는 10%포인트나 하락했다. 이와 달리 제3자 변제 방안에 대해선 20대의 30%가 찬성 입장을 보였다. 젊은 세대에게 강제징용 이슈보다 주 69시간제 파급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고). 내년 총선에서 과반을 못 얻으면 레임덕이 올 것(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란 전망이 나오는 여권만 급한 게 아니다.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패하고 이재명 당 대표의 사법리스크에다 내분까지 겪는 민주당도 총선에 존망이 달려있다. 민주당은 주 69시간제 개편을 비판하면서 이 대표부터 청년층을 만나며 이슈화하려던 참이다. 근로시간 개편은 법 개정 사안이라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의 동의 없이는 국회 통과가 어렵다. 정부의 보완책을 봐야겠지만, 민감한 MZ 세대 표심을 놓고 여야의 치열한 수 싸움이 예상된다. 정부·여당은 이참에 엉성한 국정과제 추진 체계를 이대로 두고선 민심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선 때 윤 대통령은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120시간이라도 일하고 이후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논란을 낳았었다. 이번에 발표된 개편안도 ‘120시간’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 연장 근무를 더 하고 원할 때 푹 쉴 수 있다는 논리가 바탕이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가 전문가들로만 꾸린 연구회가 내놓은 안은 여러 설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연차를 다 못 쓰는데 가능하겠느냐”는 단순한 질문을 풀어내지 못했다. 문제가 터진 뒤에야 한덕수 국무총리가 고용노동부 장관 등을 질타했다는데, 정부가 입법예고까지 한 법안에 대해 대통령실이나 관련 부처, 여당 어디에서도 사전에 예상되는 문제를 걸러내지 못한 게 여권의 현 주소다. 주 69시간제 논란은 선거의 계절이 다가왔으며,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성별로도 지지 성향이 갈리고 이해가 걸린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MZ 세대는 선거의 뚜렷한 변수로 부상했다. 대화와 양보에 관심 없고 진영별 강경론에 빠진 여야가 앞으로 다양한 이슈에서 어떤 생존법을 찾아낼지 지켜보고 평가할 일이다. 김성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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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공직으로 간 아가동산 변호사들
안혜리 논설위원 한국의 주요 사이비종교 사건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로 연일 시끄럽다. 농락당한 여성 알몸을 노출하고 외설적 대화 녹취를 반복적으로 재생한 탓에 흥행만 노린 '다큐 포르노'라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외부인은 알 수 없는 교단 내 성폭력과 재산 갈취, 노동 착취 등을 당사자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냈기에 사이비 교주를 향한 대중의 분노를 펄펄 들끓게 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 1996년 12월 검찰이 김기순씨 등 아가동산 사건 관련자들을 기소했을 당시 방송 보도 화면. 무죄로 이끈 민변 출신 변호인 등은 판결 이후 청와대 등에서 주요 공직을 맡았다. [사진 MBC 방송 캡처] 다큐 공개 전후로 각각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던 기독교복음선교회(JMS)와 아가동산 등 네 사건 모두 끔찍하지만 나는 아가동산 편이 유독 소름 끼쳤다. 친 이모까지 동원해 다섯 살 먹은 낙귀를 각목으로 때려죽이는 장면의 재연이나 아들의 억울함은 외면한 채 교주 김기순을 위해 위증했던 낙귀 엄마가 뒤늦게 후회하며 스스로 양 뺨을 시뻘게지도록 때리는 모습 등 고발의 수위가 높아서만이 아니다. 고통과 죄의식 속에 사는 탈퇴자들과 달리 김기순은 신도 헌금으로 키운 신나라레코드를 여전히 유지하며 부를 누리며 잘살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이었다. 여기엔 상해치사 공소시효(당시 7년)를 넘겨 8년 만에 기소가 이뤄진 법적 한계에다 실패한 사체 발굴(강미경 사건) 등 검찰의 실책도 한몫했다. 하지만 조세 포탈 등 경미한 죄목으로만 벌을 받은 건 한 김기순 조력자의 표현대로 "유명 변호사"의 공이 컸다. 찾아보니 사건이 처음 불거진 1996년 서울지검에서 퇴직한 A 변호사, 그리고 비슷한 시기 서울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은 B 변호사였다. 막 개업한 '전관' 두 사람은 사시 동기라는 점 외에도 다시 공직에 진출한 경력까지 똑같다. A 변호사는 김대중 정부 시절 '옷 로비 의혹사건' 특검팀 특검보를 거쳐 노무현 청와대에서 사정 비서관으로 재직했다. 사시 동기인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등 진보 성향 판사들과 함께 우리법연구회를 만든 B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추천위원과 대북송금 특검보를 거쳐 현직 판사가 맡아온 관례를 깨고 대법원장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B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출신이고 A 변호사는 범민변계로 분류된다. 민변은 1997년 12월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과 함께 급성장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엔 '민변 정부'라고 불릴 만큼 숱한 고위 공직자를 배출해 전성시대를 열었다. 두 변호사는 이런 흐름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었다. 1996년 검찰에 자진 출석한 아가동산 김기순씨. [중앙포토] 변호사의 사건 수임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제아무리 악랄한 흉악범이라도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변호인은 그런 고객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게 본연의 역할이니 말이다. 또 형사 사건 변호사라고 공직을 맡지 말란 법도 없다. 하지만 이들이 선뜻 공직에 간 선택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이비종교 교인으로 의심받는 이들이 8월 찜통더위에 어린아이를 돼지 축사에 가둬 굶기고 매질한 끝에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를 받은 참혹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제대로 죗값을 치르지 않도록 법 기술을 구사한 변호사들이 판결 후 검찰·법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요 공직을 맡은 건 불필요한 오해와 논란을 낳을 수밖에 없다. 당장의 이해충돌은 아닐지 몰라도 숱한 피해자를 양산한 가해자 측 변호인의 공직행 자체가 김기순의 공고한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작용할 수 있어서다. 혹시 아가동산 탈퇴자를 숨게 만들고 추가 폭로까지 막는 효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을까. 지난 2001년 서울지법 남부지원은 김기순 측의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아가동산 그 후 5년' 편을 방송 당일 결방시켰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당시 김기순 측 대리인 역시 김대중 정부에서 방송위 방송발전기금위원으로 임명(본인 고사)될 정도로 잘 나가던 민변 언론특위 위원장 출신 C 변호사였다. 이 변호사는 아가동산 보도를 '언론에 의한 살인'이라며 모든 언론사에 관련 기사 삭제를 요구하고,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과 함께 언론(피해)인권센터까지 만들었다. 언론 보도 피해 구제를 내세웠지만, 김기순이 후원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가동산을 수사했던 수원지검 여주지청 출신 강민구 변호사는 "법원에서 폭행에 따른 사망은 인정했지만 공소시효 등 법리적으로 무죄를 받았을 뿐인데 당당하게 무죄 운운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힌다"고 했다. 평소 피해자의 인권을 앞세우는 민변 출신 변호사들이 김기순의 인권을 앞세워 정작 수많은 다른 피해자 인권을 외면하는 행태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는 24일 아가동산 측이 낸 방송중단 가처분 신청에 대한 심문이 열린다.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여러 의미에서 궁금하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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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의 시선] 개혁 의지 실종된 국민연금
주정완 논설위원 국민의 노후자금이 1년 만에 약 80조원이나 쪼그라들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최근 발표한 지난해 국민연금 기금의 평가손실이다. 연간 수익률은 마이너스 8.22%를 기록했다. 1999년 기금운용본부 출범 이후 최악의 성적표다. 기금운용본부의 입장은 뜻밖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얘기다. 기금운용본부는 보도자료에서 “2022년은 주식과 채권 시장이 동시에 하락한 이례적인 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해외 연기금들의 운용 수익률도 글로벌 증시 급락 등의 영향으로 하락했다. 주요 연기금 중 국민연금의 성과는 상대적으로 양호하다”고 덧붙였다. ■ 「 지난해 기금 평가손실 약 80조 민간자문위 합의안 마련 실패 예고된 재앙 반드시 막아내야 」 비유하면 이런 식이다. 어떤 학생이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왔다. 그는 성적이 떨어진 이유를 이렇게 변명한다. “국어와 수학이 동시에 어려웠던 시험은 이례적이다. 점수가 떨어진 건 시험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지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변명이 전혀 터무니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너무 순진하다. 실제로 지난해 글로벌 금융시장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국민연금으로선 투자 수익을 내는 데 불리한 여건이었다. 다만 유리한 요소도 없지 않았다. ‘킹달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달러 가치가 급등한 점이다. 국민연금 수익률은 원화로 계산한다.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국민연금은 지난해 해외 투자에서 상당한 환차익을 냈을 것이다. 개인의 노후자금이 이렇게 ‘펑크’를 냈다면 그 집은 난리가 났을 게 뻔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반응은 생각보다 차분하다. 국민연금 가입자 중에는 수십 년 뒤에나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청년 세대도 적지 않다. 이들에겐 당장의 연금 수익률이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연금 수익률 악화는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연금 고갈 시기를 더욱 앞당기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발표한 재정추계에 따르면 2055년이 되면 국민연금 기금은 완전히 바닥난다. 1990년생이 국민연금을 받을 65세가 되면 연금 기금이 한 푼도 남지 않는다. 2018년 추계와 비교하면 고갈 시기가 2년 빨라졌다. 이대로 가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예고된 재앙’이다. 그나마 매년 꾸준한 수익률을 낸다는 기본 전제가 깨지면 재정추계도 원점에서 다시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편향 논란이 있는 검찰 출신 한석훈 변호사가 기금운용위원회 상근 전문위원을 맡은 건 좋지 않은 신호다. 한 변호사는 자신의 책(『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재판 공정했는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옹호하면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과 대법원의 유죄 판결은 부당했다고 주장했다. 개인으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겠지만 공직자로선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 변호사는 국민연금 의결권에 대해서도 법원 판례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2019년 발표한 ‘연기금의 주주 의결권 행사와 배임죄’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그는 논문에서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의 ‘독립성 원칙’을 부정했다. 그러면서 “원래 기금의 관리·운용 책임을 맡은 보건복지부가 정당한 지시나 지도를 한다면 공단(국민연금공단)은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인물이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전문위원을 맡는 게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여야 정치권은 입으로는 연금 개혁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총대’를 매고 개혁을 추진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국회는 지난해 10월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연금특위는 민간자문위원회에 연금 개혁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지금까지 논의 진행을 보면 실망스럽다. 국회 연금특위는 지난 1월 3일 이후 두 달 넘게 회의 한 번 열지 않고 있다. 민간자문위에선 전문가 의견이 엇갈리면서 합의안 마련에 실패했다. 이러다간 특정한 방향성 없이 여러 의견을 취합한 수준의 ‘맹탕 보고서’가 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제는 남은 시간이 정말 없다. 2007년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연금을 부분적으로 개혁한 지 벌써 16년이 지났다. 당시 연금 개혁을 추진했던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은 “개혁을 하루 늦추면 늦추는 만큼 나중에 사고가 터질 때 폭발력이 커진다. 우리 딸·아들·손자·손녀들의 삶은 쓰나미와 같은 충격에 휩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입장이나 진영을 떠나 백번 맞는 말이다. 부디 이번만큼은 정부와 정치권이 정치적 이해득실을 내려놓고 미래 시대에 대한 책임감으로 개혁에 나서주길 바란다.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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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의 시선] 민주당의 ‘50억 클럽’ 특검 법안 무리수
강찬호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이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 통과에 매달리고 있다. 성남시장 시절 대장동 사업의 결재권자로, 수천억원대 배임 혐의를 받는 이재명 대표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시도로밖에 볼 수 없다. 공당이 자당 대표가 핵심 피의자인 사건에 특검을 추진하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게다가 ‘대통령이 소속되지 않은 국회 교섭단체’, 즉 민주당에게만 특검 후보 추천권을 주겠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 형사소송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꼼수다. 오죽하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수사 대상이 수사 검사를 정하는 것”이라 비판했겠는가. 민주당 뜻대로 특검이 관철되면, 수사인력 구성과 사무실 마련에만 달포는 걸릴 것이다. 이 대표 측은 시간을 벌면서 퇴진 압박을 무마하고 공천 작업에 속도를 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검찰의 대장동 수사가 장기간 공전할 우려다. 특검이 ‘50억 클럽’을 수사한다면 누구부터 수사할것인가. 바로 김만배씨다. ‘50억 클럽’ 멤버들은 상호 연결고리 없이 각자 김만배씨와 접촉했다. 특검이 개시되면 김씨를 장기간 수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대장동 수사는 어떻게 되나. 김만배씨는 이 대표의 핵심 의혹인 ‘428억원 뇌물 약정설’의 진위를 가릴 키를 쥔 특급 피의자다. 김씨가 ‘50억 클럽’ 특검에 소환돼 장기간 수사받게 된다면 대장동 수사는 자칫 멈춰 설 수도 있다. ‘김만배 빼돌리기’로 대장동 수사를 무력화한다는 게 민주당 특검의 노림수로 읽히는 이유다. ■ 「 피의자가 검사 정하겠다는 뜻? ‘김만배 빼돌리기’로 변할 수도 정략적 특검은 부실 가능성 커 」 특검은 검찰이 수사 의지가 없거나 수사가 부실할 때 하는 것이다. 수사가 한창인데도 정치적 목적으로 밀어붙인 특검은 빈 수레로 끝날 공산이 크다. 세월호 특검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강행된 이 특검은 90일간 이어졌지만 “CCTV 조작 등 의혹을 입증할 증거를 찾을 수 없다”며 관련 의혹을 불기소 처분했다. 민주당은 50억 뇌물 혐의로 기소된 곽상도 전 의원의 1심 무죄 판결을 특검의 명분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곽 전 의원은 문재인 정부 검찰의 기소로 이미 재판을 받고 있다. 이런 시점에 무슨 특검인가. 차라리 특별법원을 만들자고 한다면 말이 될지 모르겠다. 이원석 검찰총장과 한동훈 장관은 “새 수사팀을 구성해 고강도 수사로 전모를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또 검찰은 김만배씨를 구속하면서 재산 전부에 대한 보존 처분을 내렸다. ‘50억 클럽’ 수사 의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따라서 지금은 특검 대신 검찰 수사를 지켜보는 게 순리다. 더욱이 곽 전 의원은 50억 클럽의 여러 피의자 중 한 명일 뿐, 사건의 본질은 이재명 대표의 성남시장 재직 시절 민간업자에게 수천억 원의 이득을 안긴 결정의 주체가 누구인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것 아닌가. 특검법안이 ‘대장동 사업자금과 개발 수익 의혹’을 수사 대상으로 명시한 것도 ‘물타기’용 포석일 가능성이 크다. 윤석열 대통령이 주임검사를 맡았던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사건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당시 수사팀이 수사를 기피해 당시 대출된 돈이 대장동 사업의 종잣돈이 됐다며 “대장동 게이트 몸통은 윤석열”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부산저축은행은 김만배 주변이 아니라, 그 이전에 대장동 개발 사업을 하려던 이들의 자금줄이었다. 지금의 대장동 게이트와는 큰 관계가 없다. 게다가 이 의혹은 윤 대통령의 검찰총장 시절 그를 퇴진시키려고 관련 의혹을 뒤졌던 문재인 정권 검찰조차 혐의점을 찾지 못한 사안이다. 대장동 게이트와 관련해 구속된 이 대표 최측근 정진상씨의 변호인단 중엔 친명계 변호사가 있다. 이 대표의 또 다른 뇌관인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이화영 전 경기도 부지사의 변호인도 친명계로 분류된다. 그들은 내년 총선에서 친명계 인사로 민주당 공천을 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의 측근인 이들이 이 대표의 혐의 입증에 결정적 진술을 할 수 있는 정씨와 이 전 부지사의 변호인을 맡은 것부터가 난센스다. 정씨와 이 전 부지사를 변호하기에 앞서 그들의 상황을 살피고, 변심을 막기 위해 이 대표가 보낸 ‘감시인’ 아니냐는 논란마저 일고 있다. 실제로 이 전 부지사 가족 주변에선 “왜 자기 죽으려고 이재명에게 붙어 있냐”며 불만스러워한다는 얘기가 돈다. 민주당 소식통은 “이 전 부지사가 (가족과 이 대표 사이에서) 고민을 얼마나 했으면 임플란트 치아가 빠졌겠나”라고 했다. 부조리 드라마가 따로 없다. 이런 사이에 민주당 지지율은 추락하고 있다. ‘이재명 리스크’에 갇혀 무리수를 연발하는 제1야당의 모습이 볼썽사나울 뿐이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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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와 재외동포청의 막중한 임무[장세정의 시선]
장세정 논설위원 여야가 극한 대립과 정쟁을 이어가는 가운데 지난달 27일 보기 드문 광경이 국회에서 연출됐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표결한 그 날, 국회에서 별도로 100건의 법률 개정안이 상정됐다. 그중에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반대표 없이 여야 의원 267명의 찬성으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여당이 제안한 법안마다 '일단 반대'부터 외쳤던 야당이 다른 모습을 보여줘 신선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8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선열 합동 봉송식'에서 영현 봉송을 보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국가보훈부 승격은 윤 대통령의 주요 대선 공약이었다.[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정부 출범 8개월여 만에 여야 합의로 정부조직법이 극적으로 개정됨에 따라 오는 6월쯤 국가보훈처는 국가보훈부로 승격되고, '지구촌 한민족 공동체' 구축의 구심점이 될 재외동포청이 외교부 외청으로 신설된다. 사실 이번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여당이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을 일단 유보하면서 합의에 돌파구가 열렸다. 윤 정부와 여당으로서는 적극적 지지층인 '이대남'의 반발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각오한 결정이었다. 그만큼 윤 대통령의 주요 공약인 국가보훈부와 재외동포청 신설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의지가 반영됐다는 후문이다. '보훈 가족' 출신인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국가보훈부 승격을 위해 누구보다 동분서주했다. 그는 앞으로 보훈과 선양을 통한 대한민국 정체성 재정립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게 됐다. [중앙포토] 당장은 크게 부각되지 않더라도 국가보훈부와재외동포청 신설은 두고두고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 식민지와 6·25전쟁의 혼란을 겪으면서 천신만고 끝에 탄생한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이 성장·발전하는 과정에서 독립·건국·호국에 헌신한 수많은 유공자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선양하겠다는 의지를 만천하에 선언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 7대 경제 강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이 지구촌에 흩어져 사는 재외동포 730여만명을 국격에 걸맞게 제대로 끌어안겠다는 각오를 대내외에 피력한 의미도 작지 않다. 여야 합의와 범국민적 지지로 출범할 두 기관은 앞으로 어깨에 짊어질 임무가 막중하다. 큰 기대만큼이나 해야 할 과업이 산적해 보인다. 1961년 군사원호청 창설 이후 62년 만에 독립부서가 되는 국가보훈부는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정립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민주화를 거치면서 독립·건국·호국 등에 대해 이념과 정파에 따른 이견이 난무하면서 극심한 가치관 혼란을 겪었다. 자유민주주의 헌법 가치에 맞는 이들을 더욱 빛나게 하고, 이에 역행하는 세력을 배척하는 분명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정치적 이유로 억울하게 잊히거나 저평가되거나 심지어 매도당한 유공자를 신원(伸寃)해야 한다. 이승만(오른쪽 셋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의 1920년 상하이 체류 당시. 가장 대표적 독립운동가이자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을 기리는 '이승만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방송 영상 캡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건국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을 기리는 변변한 기념관조차 없는 현실은 기가 막힐 따름이다. 윤석열 정부가 서울시와 협의해 '이승만 기념관'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다니, 소모적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번듯한 기념관을 만들어 당당하게 선양해야 한다.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가짜 유공자가 진짜로 둔갑하거나, 공적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사례도 제자리를 찾아줘야 한다. 4·3과 여순 및 5·18에 대한 적절하고 합당한 자리매김은 필요하지만, 특정 정치 세력이 정의를 독점하거나 정파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방화벽을 단단히 갖추는 일도 빼놓을 수 없겠다. 파행을 겪어온 광복회 정상화도 시급하고, 베트남 참전 왜곡에도 대응해야 한다. 국가보훈부 장관은 '현대판 제사장(祭司長)'이라 볼 수 있다. 전통시대에 하늘과 군왕 사이에서 의례를 주관했다면, 이제는 국가와 국민, 역사와 국민 사이에서 교감을 끌어내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과 충성이 자연스럽게 생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지난해 여름 새뮤얼 파파로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과 환담하는 모습. 파파로 사령관은 "미국의 보훈 문화는 레이건 대통령의 보훈부 신설로 가능했다"고 조언했다. [국가보훈처] 조태용 주미 한국대사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지난해 7월 27일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열린 '추모의 벽' 준공식에 참석해 추모의 벽에 헌화, 묵념하고 있다. 추모의 벽에는 3만6634명의 참전 미군과 7174명의 한국군 카투사 등 6.25 전사자 4만3808명의 이름을 새겼다. [국가보훈처] 국가보훈부 승격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 발로 뛴 박민식 현 국가보훈처장(장관급)은 부친인 고(故) 박순유 중령이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보훈 가족'이다. 지난해 여름 방미했을 때 새뮤얼 파파로 미국 태평양함대사령관은 박 처장에게 "미국의 앞선 보훈 문화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던 1988년 보훈부(DVA)를 신설하면서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국가보훈부 출범을 계기로 국가가 그동안 소홀히 했던 보훈과 선양을 재점검해야 한다. 예컨대 구멍 많은 '국립묘지법'을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 일제에 의해 유해조차 사라진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한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60~1920) 선생도 일제가 총살한 뒤 시신을 감췄다. 이런 독립운동가의 배우자는 현행법에선 국립묘지 합장 자격이 없다. 다행히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 윤주경 의원(국민의힘) 등이 특별 묘역 조성 등 법안을 발의한 상태이니 여야가 초당적으로 뜻을 모아야 할 것이다. 104주년 3·1절 즈음에 국가보훈부와 재외동포청의 의미를 함께 새겨보면 좋겠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컬러 얼굴 영상이 송출되고 있다. 화면에는 "러시아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내 심장이 더 차갑다"는 최 선생의 말씀이 보인다. 1920년 4월 일제에 의해 총살된 최 선생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르면 8월 키르기스스탄에 묻힌 부인의 유해를 봉환해 국립묘지에 먼저 합장묘지를 조성하는 방안이 논의중이다. [국가보훈처]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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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사단’ 검사들, 50억 클럽 수사 언제 하나 [김성탁의 시선]
김성탁 논설위원 “과거 어떤 사건 수사할 때는 박수 치시고 잘하고 있다고 하시던 분들이 이젠 ‘정치 검찰’이라 하시니 마음이 안 좋습니다.”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와 관련한 압수수색을 위해 지난해 10월 민주당사에서 의원들과 대치하던 한 검사의 말이다. 이 검사는 윤석열 대통령이 수사팀장을 맡은 2016년 국정농단 사건 특검팀의 일원이었다. 한때 자신들을 ‘정의로운 검사’로 치켜세우던 민주당 의원들의 달라진 태도를 원망하는 반응이었다.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혐의 관련 1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비슷한 말을 했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민주당 의원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다”고 하자 한 장관은 “제 검사 인생의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는 문재인 정권 초반기 (박근혜 정부 관련) 수사들일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당시에 저를 굉장히 응원하고 지지해 준 것으로 기억한다”며 “전 그때와 달라진 게 없다”고 밝혔다. 민주당이 한때 이른바 ‘윤석열 사단’ 검사들을 응원했던 게 사실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이 대표적이고 이후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 정부 핵심 인사들을 수사하고,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반대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이후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후보로 대선에서 승리했고, 한직으로 쫓겨났던 측근 검사들도 정부와 검찰 요직에 포진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수사가 장기간 진행 중이라 이제 양측은 사사건건 갈등하고 있다. ■ 「 과거 '살아있는 권력' 수사 평가 박영수 등 '검찰식구' 수사 부진 '윤 정부 검사'로 남는 일 없어야 」 위례·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관련해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이 대표는 “대선에서 패배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한 장관은 “대선에서 이겼으면 권력을 동원해 사건을 못하게 뭉갰을 것이란 말로 들린다”고 맞받았다. 이 대표가 대선 승자였다면 수사가 지금 같은 속도와 규모로 진행되기 어려웠을 거라는 데 동의한다. 문 정부에서 관련 수사가 지지부진했고, 인사권을 통한 검찰 장악이 역대 정권에서 반복돼 오지 않았나. 이 대표와 민주당이 반발하더라도 제기된 의혹에 대한 수사는 피할 수 없고, 법정에서 판가름나게 돼 있다. 제1야당 대표와 관련된 여러 건의 수사는 윤석열 사단 검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주로 특수통인 이들을 이끌었던 윤 대통령은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 이력이 있다. 2003~2004년 노무현·이회창 캠프의 불법 대선 자금을 파헤쳤다. 2013년 당시엔 청와대가 원치 않던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했다. 국회 법사위 국감에서 상관인 서울중앙지검장의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가 징계를 받고 좌천됐었다. 윤 대통령과 측근 검사들에 대해선 진영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지만, 이런 전력은 집권의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검찰의 역할에 충실해 왔다고 강조하는 현 정부 요직 검사들에게는 이제 다른 숙제가 주어지고 있다. 대장동 의혹 관련 이른바 ‘50억 클럽’ 수사다. 이 의혹에는 김수남 전 검찰총장, 박영수 전 국정농단 특검, 곽상도·최재경 전 민정수석, 권순일 전 대법관 등 검찰과 사법부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이 등장한다. 윤 대통령과 측근 검사들이 과거 수사를 같이했거나, 친밀한 관계였던 이들이 많다. 최근 곽 전 의원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에 비난이 쇄도하면서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JTBC가 최근 공개한 김만배씨 등의 육성에는 “곽상도는 고문료로는 안 되지” “다른 사람보다 아들한테”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50억 클럽으로 거론된 인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50억씩 줄 때 총액을 계산하는 육성도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검찰이 이들을 어떻게 수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이 대표나 기업 관련 사건에선 압수수색 소식이 줄을 잇는데, 누가 들어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 보도돼도 이들과 관련해선 어떤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지 감감무소식이다. 살아있는 권력에 도전했던 검사들이라면 검찰 출신, 더욱이 인연이 있는 인사들에 대해선 더욱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윤 대통령은 과거 국회에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국정 최고책임자 자리에 있다. 민주당사 압수수색에 나섰던 검사는 “과거 당사 압수수색이 무산된 적도 많다”는 주장에 “저희는 안 그러고 싶다. 선배들과는 다르고 싶다”고 대답했다. 현 정부 실세 검사들이 이 의혹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다면 그들이 비판하는 선배들처럼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된 검사’로 기억될 것이다. 50억 클럽 관련해선 이미 특검법이 발의돼 있다. 김성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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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윤 대통령이 호통칠 대상은 따로 있다
안혜리 논설위원 혁신은커녕 지난 수십 년간 땅 짚고 헤엄치기 식 이자놀이만 즐기다 국민 욕받이가 된 은행 편들 생각은 없다. 아무리 내수산업이라지만 대놓고 배짱 장사 하는 통신사도 밉긴 마찬가지다. 외국 항공사에 비해 쌓기도 쓰기도 힘든 마일리지 제도만으로도 화나는데, 이미 공들여 쌓은 마일리지의 값어치를 뚝 떨어뜨리는 개편안을 소급 적용하겠다는 항공사는 더 말해 뭐할까. 소비자 눈높이에서 볼 때 선량한 이윤 추구라고 두둔하기엔 이들 기업의 도가 지나쳤다. 지난해 6월 확장 이전했던 로톡 운영사 로앤컴퍼니 사무실 앞. 직원 절반을 내보낸 후 재택근무로 전환하기로 했다. 연합뉴스 "은행은 공공재적 시스템"(1월 30일)으로 시작한 윤석열 대통령의 기업 때리기 발언이 "은행 고금리로 국민 고통 크다"(13일)를 거쳐 "금융·통신은 이권 카르텔"(15일)이라는 거친 표현으로 강도를 더해가는 데는 이처럼 돈벌이에 혈안이 된 일부 독과점 기업들의 호구 노릇 하다 임계치에 다다른 국민 불만이 자리 잡고 있다. 대통령 발언을 신호탄으로 각 부처 장관들까지 나서서 아무 거리낌 없이 연일 기업을 윽박지르는 배경이다. 주요 타깃이 된 은행·통신은 물론이요, 코로나 19로 존폐 기로에 놓였던 항공사도 비껴가지 못한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대한항공 마일리지 개편을 비판했던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눈물의 감사 프로모션을 하지는 못할망정"이라며 무슨 시민단체나 할법한 감정적 비판을 이어간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은행은 대출금리를 낮추고, 통신사는 싼 요금제를 내놓고, 실세 장관의 분노를 산 항공사는 마일리지 개편안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으니 당장 혜택을 본 국민은 "속 시원하다"며 박수를 친다. 모두 환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근본적 해결책 없는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은 시장경제 원칙을 역행하는 포퓰리즘'이라는 식의 국민 정서와 거리가 먼 원론적 비판은 굳이 안 하련다. 기업과 시장을 존중하는 대신 '선의로 포장한 반(反) 자본주의적 정책 독주를 일삼아 각종 부작용을 낳았던 지난 문재인 정부와 뭐가 다르냐'는 문제 제기도 일단 접어두겠다. 지난 2021년 헌재의 위헌 판결 이후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로앤컴퍼니 김본환 대표(왼쪽)와 정재성 부대표. 이후 주무부처인 공정위와 법무부의 결정 지연으로 피해는 더 커졌다. 장진영 기자 하지만 이해당사자 간 조정 역할은 고사하고 이익단체의 위법 행위조차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고 수수방관한 탓에 결국 존폐 위기에 몰린 변호사판 '타다'인 법률 플랫폼 서비스 '로톡'을 보고 있자니 정부가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대통령실이 기업 때리기 명분으로 앞세웠던 혁신이나 국민 편의라는 측면에서 봐도 로톡 관련한 정부의 행보는 문제가 있다. 또 여러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전 정권 탓" 역시 이번 사안에서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인 지난해 5월 헌법재판소가 로톡 광고를 금지한 대한변호사협회(변협)의 새로운 광고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뒤에도 공정위·법무부 등 주무부처는 1년 가까이 판단을 미루거나 방치했고, 그 과정에서 로톡은 제대로 사업을 영위하기 어려울 만큼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로톡을 운영하는 로앤컴퍼니는 변협의 세 차례 고발 등 법적 분쟁에 대응하기 위한 법률 비용만 10억원 이상 쓰는 등 기존 변호사업계와의 갈등으로 인한 누적 적자가 100억원에 달하면서 지난 17일 직원 절반 감원을 목표로 희망퇴직 접수에 나섰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정부가 제때 개입했더라면 구조조정은 없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터무니없는 불만이 아니다. 공정위가 부당행위와 관련해 변협 제재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낸 게 벌써 지난 2021년 11월이다. 신속하게 결정해도 모자를 판에 공정위는 오히려 제재 여부와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전원회의 기일 지정을 "변협 요청"이라며 이례적으로 계속 연기해 1년을 넘겼다. 오늘(23일)로 예정된 전원회의에서 설령 법정 최고 과징금(20억원)이 변협에 부과된다 한들 로톡 입장에서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손해만 남았을 뿐이다. 법무부도 마찬가지다. 법무부는 변협 감독기관으로, 법령에 어긋나는 결의를 취소하거나 부당한 징계는 철회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간 갈등 국면에서 관리·감독에 나서지 않았다. 변협의 징계에 대해 이의신청하면 변호사법상 법무부 징계위원회는 90일 이내에 징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로톡 측은 90일(3월 8일) 이전이라도 빨리 판단을 내려달라고 계속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애타는 건 그저 기업뿐이다. 이 사안과 관련해 한동훈 장관이 "현 단계에서 법무부가 특정한 입장을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답해온 걸 보면 신속한 결정은커녕 아예 결정 자체를 미룰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의 "영업사원" 운운이 립서비스인 줄은 알았지만 왕조도 아닌데 대통령이 누굴 희생양 삼아 제왕적으로 호통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꼭 필요하다면 그 대상은 기업이 아니라 기업 발목 잡는 정부가 돼야 하지 않을까.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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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文정부 靑인사 "성남공항 통해 달러뭉치 北으로 나갔다" [장세정의 시선]
이재명 전 성남시장(민주당 대표)의 '시정(市政) 토착 비리 의혹'을 수사해온 검찰이 지난 16일 법원에 청구한 구속영장을 찬찬히 반추해 본다. 첫째, 다채로운 '종합 비리 세트'에 놀란다. 뇌물·배임에다 이해충돌방지법 혐의까지 들어있다. 둘째, 문재인 정부 시절 검찰의 심각한 직무유기가 엿보인다. 2021년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 경쟁자였던 이낙연 캠프가 제기한 수많은 의혹에 대해 문 대통령이 임명한 김오수 검찰총장 체제에서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 짐작된다. 2018년 6월 3일 당시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서울역-평양역(도라산역) 연결 열차 탑승 행사장에서 귓속말하는 모습. 이 대표의 최측근 이화영은 얼마 뒤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된다.연합뉴스 2018년 11월 15일 당시 이재명 경기지사(왼쪽)가 성남 제2판교테크노밸리를 방문한 이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왼쪽 둘째) 등 북한 대표단과 기념촬영하는 모습. 맨 오른쪽은 김성태 쌍방울그룹 회장의 대북 사업 창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아태평화교류협회 안부수 회장. [뉴스1] ] 거대 의석(169석)을 동원한 민주당의 방탄 노림수를 고려하면 체포동의안은 27일 국회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쌍방울 대북 송금 및 변호사비 대납, 백현동 부동산 개발 비리, 대선 경선 자금 비리, 정자동 호텔 건설 특혜 의혹 등에 대한 수사가 줄줄이 대기 중이다. 시정 농단으로 규정된 '토착 비리 수사 시즌1'이 끝난 시점에 미리 보는 '수사 시즌2'의 핵심 도정 농단 혐의는 대북 송금 비리일 것이다. 검은돈을 챙긴 경제 공동체의 부패 혐의들과는 차원이 달라서다. 2000년 6월14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목란관에서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한 뒤 손을 맞잡아 들며 밝게 웃고 있다. [평양 청와대사진기자단]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의 최초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현대그룹을 통해 북한에 4억5000만 달러를 보낸 사실이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특검 수사에서 드러났다.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구속됐고,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은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의 영예를 안겨줬지만, 북한 정권에 뒷돈을 주고 정상회담과 노벨상을 샀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치적을 남기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 카드를 동원했다면, 이재명 전 지사는 대권을 잡기 위한 정치적 선(先)투자 차원에서 북한에 거액을 건넸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2018년 문재인·김정은의 3차 정상회담 방북단 명단에 박원순·최문순 등 '친문' 광역단체장이 포함됐지만, 당시 이 지사는 '비문'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자 대권 후보로 가는 돌파구 한방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2018년 7월 당시 이재명 경기지사는 이해찬 민주당 대표의 최측근인 쌍방울그룹 사외이사를 지낸 이화영 전 의원을 경기도 평화 부지사에 임명했다. 이 전 지사는 대북 송금 의혹을 받고 있다.[사진 경기도청] '민주당 상왕' 이해찬의 최측근 이화영 쌍방울 사외이사를 경기도 평화 부지사로 영입한 이 지사가 이화영 인맥인 쌍방울그룹 김성태 회장을 통해 북한에 800만 달러(이재명 방북 경비 300만 달러 포함)를 보낸 것으로 검찰은 의심한다. 유능한 행정가 이미지를 만들고 '정치 자금 저수지'로 쓰기 위해 대장동·백현동·위례신도시 등 부동산 개발 비리를 저질렀다면, 불법 대북 송금은 북한 정권의 환심을 사서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유능한 정치 지도자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시도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북 송금이 한 푼도 없었을까. 이와 관련, 필자는 주목할만한 말을 들었다. 2018년 세 차례 열렸던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공직자에 따르면 대통령 전용기 등 방북 항공편이 오갔던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북한으로 규정을 초과하는 거액의 달러 뭉치가 반출됐고, 돌아오는 비행기에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세습 정권 우상화와 공산주의 이념 서적이 가득 실려 왔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공항에는 출입국관리를 담당하는 법무부와 관세청 파견 공무원들이 있었지만, 신고 없이 반출할 수 있는 한도(1인당 1만 달러)를 넘긴 달러 뭉치가 아무런 제지 없이 북측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2018년 9월 20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2박3일간 방북 일정을 마치고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해 임종석 비서실장 등의 영접을 받고 있다. 오른쪽 끝은 주영훈 경호실장, 둘째는 김의겸 대변인.[평양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4월 27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서훈 국가정보원장, 문 대통령, 임종석 비서실장, 북한 김영철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 위원장,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한국공동사진기자단,연합뉴스]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 부지점장을 역임한 윤석구 전 우리종금 전무는 최근 출간한 『내 마음의 은행나무』에서 "(개성공단 입주 기업의) 임가공에 따른 원단과 완제품도 건건이 세관(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 검사를 받아야 하므로 통관 때마다 애를 먹었다"고 회고했다. 경협 차원에서 단돈 1달러가 오가는 절차도 이렇게 까다로운데, 정상회담을 전후해 청와대가 출입국관리법과 외국환거래법을 위반했다면 철저하게 수사해야 할 것이다. 2019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능라도 5·1경기장에서 평양시민 15만명을 상대로 파격적인 생중계 연설을 했다. 대북 비밀 협상 경험이 많은 국가정보원 출신 고위 당국자는 "북한은 비밀 접촉 때마다 예외 없이 뒷돈을 요구했다"며 "김정은의 풍산개 선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양 연설 같은 초대형 정치 이벤트에는 십중팔구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8년 9월 19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능라도 5·1경기장에서 평양 주민 15만명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한국 대통령이 분단 이후 북한에서 한 최초의 연설이었는데 방송으로 생중계됐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평양냉면도 공짜가 없는데 평양연설이 공짜라면 누가 믿겠나. 인도주의 차원이 아니라면 북한에 몰래 뒷돈을 보내는 국기(國基) 문란 범죄는 예외 없이 단죄해야 마땅하다. 북한에 보낸 뒷돈은 핵미사일로 전용돼 대한민국 안보와 국민 생명을 노리는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결국 돌아오기 때문이다. 장세정 논설위원 관련기사 공무원들 내년 총선까지 일 안하고 논다? 냉소 부른 그 사건 [장세정의 시선] 文정부 때 '워라밸' 즐긴 검사들…어쩌다 '과로사 위기' 몰렸나 [장세정의 시선] 韓젖소 101마리 네팔 간다…美원조가 만든 '나눔의 기적' [장세정의 시선] 대장동 첫 보도한 그 "이재명 캠프에 간 '총알' 상상초월 규모" [장세정의 시선] 北이 증오한 '文정부 적폐 1호'...김정은 폭주에 떠오른 이 남자 [장세정의 시선] '월북자 아들' 낙인에 육사도 포기..."살인방조로 文 고발할 것" [장세정의 시선]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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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컷칼럼] 친명 좌장 정성호의 이중플레이? 정진상·김용 ‘특별면회’ 유감
. .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원내 최측근인 정성호 의원이 최근 대장동 비리 사건으로 구속된 정진상 전 당 정무조정실장과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특별면회해 ‘회유성’ 발언을 했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정 의원은 그동안 “이 대표 개인의 사법 리스크와 민주당 당무는 별개”라고 강조해왔다. 이 대표가 ‘제1야당 대표’란 완장을 벗고 개인 자격으로 수사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랬던 정 의원이 대장동 비리 의혹으로 구속된 이 대표의 왼팔과 오른팔을 ‘특별면회’ 형식으로 만나 논란이 될 수 있는 발언을 했다니 그 자체가 충격적이다. 수감자와 면회인 간에 칸막이가 쳐진 가운데 10분만 허용되는 일반면회와 달리, 특별면회는 그 3배인 30분간 가능하다. 칸막이도 없어 서로 밀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이뤄진다. 또 일반면회는 대화 내용이 녹취되지만, 특별면회는 녹취가 허용되지 않아 입회 교도관이 대화를 메모하는 게 전부다. 면회시 발언이 논란이 될 경우 “내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고 빠져나갈 여지가 생기는 게 ‘특별면회’다. 정 의원은 “재판 잘 준비하라는 위로였을 뿐 회유 사실이 전혀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면회에 입회한 교도관이 작성한 대화록을 검찰이 조사해보니 “알리바이를 만들라” “이대로 가면 이재명이 대통령 된다” 같은 말이 기록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검찰 소식통이 전했다. 소식통은 “대화를 듣고 메모한 교도관이 이런 얘기를 어떻게 지어낼 수 있나. 정 의원은 ‘격려였을 뿐’이라지만 수사하는 검사들 입장에선 ‘끝까지 버티며 입을 다물라’는 단속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정 의원과 지난달 초 통화했던 기자로서도 유감이다. 정 의원은 “요즘 조용히 살고 주로 지역(양주)에만 있는다”고 말했다. 기자가 “검찰 수사와 관련해 이 대표랑 얘기하나”고 물으니 “나, 이재명 하고 전혀 얘기를 안 한다. 정말이다”고 했다. “전혀 얘기를 안 한다고요?”라고 재차 물으니 “안부 전화는 하지만 수사 문제는 얘기 안 해. 그건 당에서 공식적으로 결정할 문제다. (또) 이 대표 본인이 (수사에) 전문가라는데 내가 뭐라 얘기하나”고 대답했다. 정 의원은 “내가 (이재명) 옆에서 이래라 저러라 하는 건, 세상에 비밀이 없는데 바람직하지 않다”라고도 했다. 이어 “날 ‘친명 좌장’이라 부르지 말라. 난 계파에 질색하는 사람이다. (당무는) 이재명 대표가 공조직 통해서 움직이고 해야 하는 거지”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정 의원은 그 시점에서 이미 김용(지난해 12월 9일)에 이어 쌍방울발 3억2000만원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된 이화영 전 경기부지사(12월 16일)를 특별면회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자와 통화 뒤인 1월 18일에는 정진상도 특별면회했다고 한다. 한 달여 사이에 대장동 게이트·대북 송금 사건 등 이 대표 의혹과 관련해 구속된 측근 3명을 접견한 것이다. 남욱 변호사 등 대장동 관련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며 수사 뉴스가 쏟아지던 시점이었다. 정 의원의 말을 ‘소신 발언’으로 여기고 칼럼에 소개까지 했던 기자로선 극도의 서운함을 느꼈다. “겉으론 ‘탈명(친명 이탈)’, 속으론 ‘찐명(진짜 친명)’의 이중 플레이 아니냐”는 비판이 검찰에서 나오는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 의원은 “검찰이 개인적인 접견과 대화까지 흘리며 먼지털기식 수사를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은 검찰 수사 라인을 면회록 유출 주범으로 찍고 공수처에 고발키로 했다. (공수처의 공정한 수사를 전제로) 정 의원과 검찰 중 누구 말이 옳은지는 추후 판명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대표 의혹과 당 간의 거리두기’를 강조해온 정 의원이 이 대표 의혹과 관련돼 구속된 측근 3명을 특별면회해 ‘위로’인지 ‘회유’인지 논란이 될 말을 한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민주당에서 드물게 공사를 구별하는 정치인으로 정 의원을 봐온 국민을 실망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싶다. 지난달 통화에서 ‘이재명 체포동의안에 대한 입장’을 묻자 그는 “(부결 당론 대신) 의원 개인의 양식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그 입장만은 지키길 바란다. 이번 기회에 특별면회 제도도 따져봐야 한다. 일반인은 특별면회 따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지만 국회의원 같은 권력층엔 쉽게 허용된다. 법무 전문가는 “특별면회는 녹취가 안 돼 발언의 진위 논란이 생기기 십상”이라며 “수감자가 몸이 불편한 경우 등 말 그대로 ‘특별’한 사안에만 특별면회가 허용돼야 한다”고 했다. 동감이다. 글=강찬호 논설위원 그림=이시은 인턴기자 강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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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의 시선] 세대 간 양보 필요한 지하철 무임승차
주정완 논설위원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은 줬다가 뺏어가는 사람이란 말이 있다. 애초에 뭔가를 줄 때부터 함부로 결정해선 안 되는 이유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 복지제도라면 더욱 신중히 해야 한다. 일단 시행한 복지제도는 나중에 축소하거나 폐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옛 소련에서 배워온 제도라는 점이다. 그는 1979년 보건사회부 과장 때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당시 시내를 구경하다가 어떤 할머니가 무료로 버스를 타는 걸 봤다고 한다. 주위에 있던 학생에게 물어보니 노인에겐 무임승차 혜택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공산국가는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배웠던 한국 공무원으로선 놀라운 장면이었다. ■ 「 43년 전 경로우대 명목으로 시작 런던은 출근 시간대 유료로 운영 사회적 공론화로 합의점 찾아야 」 옛 소련 출장에서 돌아온 그는 당시 진의종 보사부 장관에게 경로우대제 도입을 건의했다고 한다. 아직 국내에는 노인복지법이 없던 때였다. 보사부가 제안한 ‘경로우대제 실시안’은 1980년 4월 11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70세 이상에게 철도·지하철·시외버스 요금과 공원 입장료 등을 50% 할인하는 내용이었다. 시행 시기는 그해 5월 8일 어버이날부터였다.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가 국정 전반을 담당하던 시절이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예전 국무회의 자료를 검색해 봤다. 이 자료에선 경로우대제 도입의 취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도시산업화 사회의 노인 문제에 대처하여 노인 복지 증진. 전통적 미덕을 기려 노인을 우대하고 경로효친 사상 양양.” 그러면서 “관계 부처(지하철은 서울시)와 합의했음”이라고 적었다. 정부는 이듬해 노인복지법을 시행하면서 할인 대상을 65세 이상으로 넓혔다. 84년에는 노인복지법 시행령을 고쳐 지하철 요금 할인 폭을 100%로 높였다. 지하철 노인 할인을 도입한 지 43년이 지났다. 그동안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노인 인구가 급격하게 늘었다. 통계청은 65세 이상 인구가 내년에는 1000만 명을 웃돌 것으로 전망한다. 80년(146만 명)과 비교하면 850만 명 넘게 증가한 규모다.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 내후년이면 한국은 유엔이 분류한 초고령사회(고령 인구 비율 20% 이상)로 진입한다. 예전엔 얼마 되지 않았던 노인 무임승차 인원도 이제는 사회적으로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기준으로 노인 무임승차는 연간 4억 회를 넘었다. 노인 1인당 평균으로 계산하면 약 53회다. 만일 돈을 내고 지하철을 탔다면 5500억원어치에 해당한다. 무임이 아니었다면 지하철을 타지 않았을 사람까지도 포함한 금액이다. 이제라도 노인 무임승차는 폐지하거나 할인 폭을 축소하는 게 답일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노인 무임승차로 인한 사회적 편익이 비용보다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14년 한국교통연구원이 펴낸 연구보고서(‘교통부문 복지정책 효과분석’)다. 보고서는 ▶노인 건강 증진과 우울증 감소 ▶노인 운전 축소로 인한 교통사고 감소 ▶노인 경제활동 확대로 인한 복지비용 축소 ▶관광 활성화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면서 “지하철 운영 적자의 근본 원인은 낮은 운임이지 무임승차 제도로 인한 손실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냈다. 대안은 없을까. 영국 런던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런던은 60세 이상에게 버스·지하철 등 대중교통 무료 혜택을 주고 있다. 65세 이상, 지하철만 무료 혜택을 주는 서울보다 범위가 넓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평일 오전 9시 이전에는 노인도 돈을 내야 한다. 복잡한 출근 시간대는 무임승차를 제한한다는 의미다. 우리도 혼잡 시간대에는 노인 무임승차를 제한하는 방안을 논의해 볼 수 있겠다. 혼잡 시간대가 아니면 탑승객이 다소 증가해도 지하철 운영사 입장에서 별로 비용이 늘어나지 않는다. 일부에선 이번 기회에 노인 기준 연령을 높이자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무임승차뿐 아니라 정년연장이나 연금 수급연령 상향 등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현재 노인 무임승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현행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기도 부담스럽고 아예 폐지하기도 어렵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묘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가 한 발씩 양보해 사회적 합의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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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의 시선] 친명 좌장 정성호의 이중플레이? 정진상·김용 ‘특별면회’ 유감
강찬호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원내 최측근인 정성호 의원이 최근 대장동 비리 사건으로 구속된 정진상 전 당 정무조정실장과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특별면회해 ‘회유성’ 발언을 했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왼쪽)과 이재명 대표. 연합뉴스 정 의원은 그동안 “이 대표 개인의 사법 리스크와 민주당 당무는 별개”라고 강조해왔다. 이 대표가 ‘제1야당 대표’란 완장을 벗고 개인 자격으로 수사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랬던 정 의원이 대장동 비리 의혹으로 구속된 이 대표의 왼팔과 오른팔을 ‘특별면회’ 형식으로 만나 논란이 될 수 있는 발언을 했다니 그 자체가 충격적이다. 수감자와 면회인 간에 칸막이가 쳐진 가운데 10분만 허용되는 일반면회와 달리, 특별면회는 그 3배인 30분간 가능하다. 칸막이도 없어 서로 밀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이뤄진다. 또 일반면회는 대화 내용이 녹취되지만, 특별면회는 녹취가 허용되지 않아 입회 교도관이 대화를 메모하는 게 전부다. 면회시 발언이 논란이 될 경우 “내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고 빠져나갈 여지가 생기는 게 ‘특별면회’다. ■ 「 ‘소신발언’ 돋보였던 정성호 의원 구속된 친명 측근 3명 잇단 면회 회유 논란 떠나 그 자체로 부적절 」 정 의원은 “재판 잘 준비하라는 위로였을 뿐 회유 사실이 전혀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면회에 입회한 교도관이 작성한 대화록을 검찰이 조사해보니 “알리바이를 만들라” “이대로 가면 이재명이 대통령 된다” 같은 말이 기록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검찰 소식통이 전했다. 소식통은 “대화를 듣고 메모한 교도관이 이런 얘기를 어떻게 지어낼 수 있나. 정 의원은 ‘격려였을 뿐’이라지만 수사하는 검사들 입장에선 ‘끝까지 버티며 입을 다물라’는 단속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정 의원과 지난달 초 통화했던 기자로서도 유감이다. 정 의원은 “요즘 조용히 살고 주로 지역(양주)에만 있는다”고 말했다. 기자가 “검찰 수사와 관련해 이 대표랑 얘기하나”고 물으니 “나, 이재명 하고 전혀 얘기를 안 한다. 정말이다”고 했다. “전혀 얘기를 안 한다고요?”라고 재차 물으니 “안부 전화는 하지만 수사 문제는 얘기 안 해. 그건 당에서 공식적으로 결정할 문제다. (또) 이 대표 본인이 (수사에) 전문가라는데 내가 뭐라 얘기하나”고 대답했다. 정 의원은 “내가 (이재명) 옆에서 이래라 저러라 하는 건, 세상에 비밀이 없는데 바람직하지 않다”라고도 했다. 이어 “날 ‘친명 좌장’이라 부르지 말라. 난 계파에 질색하는 사람이다. (당무는) 이재명 대표가 공조직 통해서 움직이고 해야 하는 거지”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정 의원은 그 시점에서 이미 김용(지난해 12월 9일)에 이어 쌍방울발 3억2000만원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된 이화영 전 경기부지사(12월 16일)를 특별면회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자와 통화 뒤인 1월 18일에는 정진상도 특별면회했다고 한다. 한 달여 사이에 대장동 게이트·대북 송금 사건 등 이 대표 의혹과 관련해 구속된 측근 3명을 접견한 것이다. 남욱 변호사 등 대장동 관련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며 수사 뉴스가 쏟아지던 시점이었다. 정 의원의 말을 ‘소신 발언’으로 여기고 칼럼에 소개까지 했던 기자로선 극도의 서운함을 느꼈다. “겉으론 ‘탈명(친명 이탈)’, 속으론 ‘찐명(진짜 친명)’의 이중 플레이 아니냐”는 비판이 검찰에서 나오는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 의원은 “검찰이 개인적인 접견과 대화까지 흘리며 먼지털기식 수사를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은 검찰 수사 라인을 면회록 유출 주범으로 찍고 공수처에 고발키로 했다. (공수처의 공정한 수사를 전제로) 정 의원과 검찰 중 누구 말이 옳은지는 추후 판명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대표 의혹과 당 간의 거리두기’를 강조해온 정 의원이 이 대표 의혹과 관련돼 구속된 측근 3명을 특별면회해 ‘위로’인지 ‘회유’인지 논란이 될 말을 한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민주당에서 드물게 공사를 구별하는 정치인으로 정 의원을 봐온 국민을 실망에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싶다. 지난달 통화에서 ‘이재명 체포동의안에 대한 입장’을 묻자 그는 “(부결 당론 대신) 의원 개인의 양식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그 입장만은 지키길 바란다. 이번 기회에 특별면회 제도도 따져봐야 한다. 일반인은 특별면회 따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지만 국회의원 같은 권력층엔 쉽게 허용된다. 법무 전문가는 “특별면회는 녹취가 안 돼 발언의 진위 논란이 생기기 십상”이라며 “수감자가 몸이 불편한 경우 등 말 그대로 ‘특별’한 사안에만 특별면회가 허용돼야 한다”고 했다. 동감이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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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의 시선] 물러날 때를 놓친 장관의 비애
강주안 논설위원 “조국 전 장관의 딸이 아니라 조민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다”는 조민씨의 인터뷰가 이목을 끌었다. 방송인 김어준씨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그의 발언 중엔 한숨 나오는 대목이 많았으나 한 가지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아버지가 장관직을 하지 않으셨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랬을 것이다. 만약 조 전 장관이 후보자 시절 조민씨의 논문 관련 의혹이 제기됐을 때 장관직을 던졌다면 가족과 지인이 겪은 고통은 크게 줄었으리라. 공소시효 때문에 검찰이 수사가 미진한 상태에서 서둘러 기소했을 때만이라도 내려왔다면 수사 강도는 약해졌을 거다. ━ 부친 실형 선고 날 딸 조민 발언 ━ “장관 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 조민씨는 검찰과 언론, 정치권이 너무 가혹하다고 말했다. 사인(私人)의 입시 비리라면 그리 볼 수 있다. 조 전 장관은 청문회 과정에서 불법 의혹이 드러나 법무부 장관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부적합한 인사가 국무위원 자리에서 버티면 야당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언론 역시 교체를 주장한다. 수사로 범죄를 밝혀내는 길 이외엔 조 전 장관을 퇴진시킬 방도가 없었기에 검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고 본다. 조 전 장관이 상식에 맞게 처신했다면 검찰 수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언론의 관심에서조차 멀어졌으리란 사실은 윤석열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가 자녀 입시 특혜 의혹 등이 불거진 직후 사퇴한 정호영 전 경북대병원장 사례가 말해준다. 장관 후보자 지명 직후 언론은 정 전 원장 관련 의혹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지만, 사퇴 이후엔 관심이 사라져 지난달 경찰이 자녀의 의대 편입 특혜 의혹을 무혐의로 결론 내고 농지법 위반 혐의만 검찰에 송치한 사실은 별로 조명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조 전 장관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면 현 정부에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야당의 타깃이 됐다. 두 장관 모두 대통령의 신임이 각별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대정부질문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 장관의 자리가 비어있다. 장진영 기자 / 20230208 야 3당이 어제 국회 본회의에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이 장관은 개인 비리로 궁지에 몰린 조 전 장관의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국무위원으로서 159명이 목숨을 잃은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책임을 추궁당했다. 축제를 구경하러 온 젊은이들이 길에서 대거 숨지는 초유의 사태는 야당이 주장한 ‘내각 총사퇴’까진 아닐지언정 국무총리가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비극이다. 희생자 49재나 참사 100일 등 계기가 있을 때마다 이 장관 거취에 관심이 쏠렸다. 참사 직후 윤 대통령은 경찰을 강하게 질타했다. 1만자 넘는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공개했다. 예정된 행사인 데다 사고 현장 인근에 파출소가 있고 112 신고가 낮부터 이어진 점을 고려할 때 경찰에 대대적인 문책 인사가 단행되리란 예상이 나왔다. 그러나 서울 용산경찰서장에게만 지휘 책임을 묻고 말았다. 이 장관이 밀어붙인 행안부 경찰국 신설이 일을 더 꼬이게 했다. 민주화 흐름 속에 폐지한 행안부의 경찰 통제 조직을 31년 만에 부활하는 조치는 경찰 내부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이 와중에 이태원 참사가 터졌다. 경찰 통제를 위해 행안부에 경찰국을 신설했는데 경찰의 부실 대응으로 참사가 발생했으니 장관의 부담이 커졌다. “경찰 지휘 권한이 없다”는 그의 해명은 군색하게 비쳤다. 참사 이후 100일이 지나도록 이 장관과 경찰 수뇌부는 “오늘은 물러나려나”하는 시선을 견뎌왔다. 사퇴를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는 많다. 야당과 언론에 밀리는 모양새가 싫어서 버틴다는 인상이 짙다. 그럴수록 당사자의 입지는 쪼그라든다. ━ 국무위원의 막중한 책임 환기 국회의 탄핵소추는 정국을 180도 반전시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례를 떠올리게 한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각하 또는 기각하면 이 장관은 화려하게 복귀하는 앞날을 상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둘은 너무 다르다. 노 전 대통령은 선거로 뽑혔다. 자신의 손으로 선택한 대통령을 내쫓으려는 시도에 국민이 분노했다. 이 장관은 선출된 적이 없다. 야당의 장관 탄핵소추는 억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런 무리수에 야 3당이 힘을 합친 이유는 대형 참사에도 불구하고 책임자들이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조화를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이 어제 시작됐다. 9년 전 발생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김석균 당시 해양경찰청장에 대한 재판은 그제 2심이 끝났다. 조 전 장관은 지난주 1심 판결을 받았다. 법적 책임 판단에 걸리는 시간은 인내를 요구하기엔 너무 길다. 장관은 법적 책임 뒤로 피신하기 어렵다. 관련기사 [강주안의 시선] 선출직 vs 임기 vs 실세 [강주안의 시선] 출입문 통과용 마스크 규제 대리운전 지옥 만든 만취청년 '아침 콜'…쥔 돈은 1만6천원 뿐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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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 다음 알파세대, 그들 세상은 행복할까 [김성탁의 시선]
━ '내가 주인공' 초등학생 세대 김성탁 논설위원 최근 출근길 라디오에서 새로운 세대 얘기를 들었다. MZ세대에 이은 알파(α)세대다. 1980~90년대 태어나 30~40대가 된 MZ세대의 자녀로, 요약하면 지금 초등학생들이다. 1970년대생 X세대에 이은 YZ세대를 '밀레니얼'의 영문 앞글자를 따 MZ세대로 불렀다. 알파벳이 끝났으니 처음으로 돌아갔는데, 새로운 출현을 강조하기 위해 알파를 쓴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모습. 연합뉴스 소비자 트렌드 전문가인 전미영 박사가 알파세대에 대해 들려준 내용은 흥미로웠다. 예전엔 전교 1등이면 스포츠를 못해도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고 ‘엄친아’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곤 했지만, 알파세대는 자신을 주인공이라 여긴다고 한다. 모든 것을 잘하는 대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설명이었다. 이 세대가 꼽는 ‘최고의 하루’도 이색적이다. 하교 후 친구들과 천원 샵 형태의 매장에서 소소한 구매를 하고 네 컷 사진을 찍은 뒤 마라탕으로 저녁을 먹고 버블티를 마시며 대화하는 것이다. 전 박사는 MZ세대 부모가 과거와 다른 교육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기존 국·영·수 위주 사교육 외에 코딩을 가르치고 특히 경제 교육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용돈을 준 뒤 가족 식사에서 더치페이를 하도록 하면서 돈에 대한 관념을 심어준다는 사례가 소개됐다. 간신히 X세대 분류에 걸쳤으면서 스스로 X세대의 특징을 가졌는지 확신하지 못한 세대로서, 새 세대의 등장이 반갑고 신기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이 사는 세상은 과연 행복할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알파세대의 선두가 막 중1에 입학한다는 대목에서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 사교육, 집값…여건은 그대로 지역별 사정이 달랐을 수 있지만 X세대에겐 중학교 때부터 매일 학원에 다니던 기억은 많지 않다. 고교 평준화가 실시되고 본고사는 사라진 시대였다. 대입 학력고사가 암기 위주여서 창의성을 떨어뜨린다는 우려 속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된 이후 사교육 시장은 팽창했다. 요즘 중학생들의 방과 후 일상은 대개 학원 가기일 것이다. 교육 당국이 무슨 말을 하든, 중학교 때 수학·과학 등 어려운 과목의 선행을 해 놓지 않으면 고교 내신 점수 따기가 힘들다고 학부모들은 여긴다. 알파세대가 이르면 중학교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입시 전선에 발을 들여놓고도 네 컷 사진과 버블티 수다를 즐기는 ‘소확행’을 만끽할 수 있을까. 고등학생이 되면 수시와 정시로 나뉜 대입을 준비하려고 내신은 물론 수행평가 발표도 신경 써야 한다. 상대평가인 내신 경쟁은 치열하고 수능 준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학기 중엔 과목별 내신 학원을 돌고, 방학이면 수능 맞춤형 특강으로 바쁘다. 알파의 부모인 MZ의 생각이 이전 세대와 다르다면 변화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MZ는 이런 대입 경쟁을 지나 취업 전쟁도 치른 세대다. 대기업 정규직 취업자라면 형편이 낫겠지만, 대다수는 맞벌이해도 남는 게 별로 없음을 경험 중일 것이다. MZ세대 중엔 집값 폭등에 불안해하다 ‘영끌’ 매수로 고금리 이자를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부동산은 꿈도 꿀 수 없어 코인과 주식에 투자했다가 손실이 언제 메꿔질지 한탄하는 경우도 많다. 양극화 속 계층 이동 사다리가 얼마나 오르기 어려운지 아는 이들이 자녀를 사교육에서 해방시키고 잘하고 좋아하는 것에 도전하라고 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들이 강조하는 경제 교육 역시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가 성인이 됐을 때 집값·전셋값을 마련하려면 수입을 잘 관리하고 투자하는 법을 일찍 알려줘야 해선 아닐까. ━ 기성세대가 시스템 바꿔줘야 알파세대가 사는 세상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 사회 시스템이 이대로라면 그렇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다. 1타 강사들이 소유한 건물이 즐비한 서울 대치동이나 비슷한 각 지역 학원가에 모든 학생을 몰리게 하는 학교 교육과 대입 제도가 그대로라면. 학벌에 따라 취업의 질이 달라지고 대기업 정규직이 아닐 경우 임금과 처우가 열악하다면. 지방에 일자리가 없어 수도권에 살아야 하는데 거주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면…. 초기 X세대가 대입을 치르던 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화제였다. 30년가량 지난 지금은 ‘반드시 성적순으로 행복한 건 아니다’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TV 프로그램에서 한국에 수학여행을 온 미국 10대들은 문화와 음식이 훌륭하고 정을 느꼈다고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한 학생은 “한국 사람들이 일을 조금 덜 하면 좋겠다. 건강과 행복을 희생하는 것 같다”고 했다. 기성세대가 지금 할 일을 해야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 베타(β)세대부터라도. 김성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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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당신이 못 간 신혼여행에 드리운 문 정부 그림자
안혜리 논설위원 지금 대한민국은 여권 대란이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온갖 잡음을 내는 여권 국민의힘 얘기가 아니라, 진짜 여권(passport)이 문제다. 각종 커뮤니티에는 신청한 여권이 나오지 않아 열흘 넘게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가려던 여행을 취소하고 위약금을 내거나 출장을 늦췄다는 경험담이 넘친다. 심지어 신혼여행을 제때 못 갔다는 사연도 있다. 발급 업무를 대행하는 구청 창구에서 두세 시간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 예상을 훌쩍 넘겨 보름 만에 겨우 발급된 여권을 찾는 데만 1시간 40분이 걸렸다는 사람까지 봤다. 이러니 민원이 폭주할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난해 12월 서울 은평구청 야간 민원실 민원의 90% 이상이 여권 관련이었다. 실제로 지난달 평일에 종로구청 여권발급 창구에 가보니 발급신청 대기인은 오전 오후 할 것 없이 30명 가까이 됐고, 지난해 12월 중순만 해도 4일로 안내하던 소요 기간은 '평일 기준 8~10일'로 늘었다. 예년 상황을 기대하고 신청했다간 출국일을 못 맞춰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청 여권 민원실의 여권 신청 대기표. 지난해 12월만 해도 3~4일 걸리던 게 지금은 보름 넘게 소요된다. 연합뉴스 세계 각국의 코로나 19 입·출국자 방역 완화 조치에 따라 지난해 하반기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여행 수요가 겨울방학과 맞물려 여권 발급 신청으로 이어진 게 직접적 원인이다. 한해 500만권 수준이던 여권 발급은 2021년 67만권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9월 150만권을 회복했다. 이후 연말까지 석 달 동안 132만권(월평균 44만권), 그리고 올 1월에만 53만권이 발급됐다. 수요 폭증이 맞다. 하지만 이게 작금의 여권 대란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 충분히 예상된 상황이었던 만큼 여권 발급 업무를 담당하는 한국조폐공사가 보다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약간의 지체는 있었을지언정 불과 한 달 만에 발급에 걸리는 시간이 세 배 이상 늘어나지는 않았을 거란 얘기다. 결국 빈말이 됐지만 반장식 조폐공사 사장은 올 초 한 언론 기고문에서 '수요 폭증에 대비해 공백 여권을 충분히 비축했기 때문에 한꺼번에 요청이 쏟아져도 공급 차질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공백 여권이란 말 그대로 빈 여권이다. 미리 생산해뒀다가 신청이 들어오면 조폐공사 여권발급과에서 정보만 얹히면 된다. 조폐공사는 지난해 285만권의 공백 여권을 확보하기도 했고 자동화 생산설비를 갖췄기 때문에 설비를 가동할 최소한의 인원만 있다면 여권 발급이 이렇게까지 늦춰질 이유가 없다. 결국 일할 사람의 문제다. 평소 워라밸 좋기로 유명한 조폐공사의 조직문화,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경직된 주 52시간 정책이 숨겨진 원인이라는 얘기다. 조폐공사는 코로나 초기인 2020년부터 순차적으로 비정규직 일용직인 여권발급원의 계약을 해지했다. 사측과 노동자 간에 다툼의 여지는 있으나 원론적으론 일이 없으니 사람을 줄인 걸 뭐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일이 늘어나면 사람을 늘리거나 같은 인원으로 초과근무를 통해 늘어난 업무량을 소화하는 게 맞다. 하지만 조직 내 인력 재배치로 담당 업무자 수를 일부 늘린 건 지난달 하순에야 이르러서다. 추가 채용은 아예 없었다. 그렇다고 기존 인원이 밤이든 주말이든 집중적으로 근무해 늘어난 물량을 소화한 것도 아니다. 과연 워라밸 좋기로 유명한 조폐공사답다. 점점 실물화폐를 안 쓰는 추세라 조직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본사가 서울도 아닌 데다 금융공기업처럼 연봉이 높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직장인 커뮤니티나 채용플랫폼 평가를 보면 직원 만족도는 대한민국 최상위권이다. 워라밸 덕분이다. 원래부터 '돈(연봉) 적고 미래 불확실하지만 워라밸은 그거 다 포기할 정도로 개꿀'이라는 리뷰가 붙을 정도였지만 여권 업무가 폭주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이후 쓰여진 리뷰에도 '워라밸 넘어 (워크는 없이) 라라밸 지향하는 이곳으로 오시오'라는 식의 내용이 적지 않다. 직원 만족도 높은 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만 공기업인 만큼 국민에 불편을 끼치면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업무가 폭주하든 말든 칼퇴로 직원만 행복하고 제때 서비스받아야 하는 국민은 고통받는다. 그런데도 이 조직에서 별다른 문제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특유의 조직문화에 더해 지난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강력한 주 52시간 정책 덕에 주 12시간을 넘기는 집중 근무가 사실상 불법이라 떳떳한 거다. 마침 문 정부 말기에 알박기 낙하산으로 온 문재인 청와대 일자리 수석 출신 반장식 사장은 근로시간 단축 법안에 관여한 인물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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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들 내년 총선까지 일 안하고 논다? 냉소 부른 그 사건 [장세정의 시선]
장세정 논설위원 "내년 총선까지는 제대로 일하기가 어렵다." "승진하겠다고 나서다 블랙리스트로 몰리면 저만 손해다." 요즘 사석에서 공무원들을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토로하는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 공직사회는 자의든 타의든 상하 막론하고 총체적 복지부동(伏地不動)이 만연해 우려스럽다. 2018년 당시 청와대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정해구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장. 성공회대 교수 출신인 정 위원장은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 혁명 이론에 밝다고 한다.[연합뉴스] 실·국장급 이상 고위직은 장·차관과 대통령실 눈치를 살피고, 하위직으로 가면 '배 째라'는 냉소적 분위기가 넘친다. 일을 제대로 시키는 상급자도 없고, 성실히 일하는 하급자도 드물다 보니 감사원이 탈탈 털어도 먼지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는 차라리 헛웃음이 나온다. 납세자 국민이 볼 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공직사회가 이 지경이 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2018년 공무원노조(전공노) 합법화 여파,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민간기업의 '직장 내 괴롭힘(갑질) 금지법'이 공직사회에 준 영향, 지난 5년 집값 폭등에 따른 하위직들의 '벼락 거지' 박탈감,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근로조건이 크게 좋아진 민간 기업으로 무더기 전직에 따른 후유증도 크다. 2017년 7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은경 환경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이동하며 대화하고 있다. 가운데는 조국 당시 민정수석. 김 전 장관은 '블랙리스트'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됐다.[청와대사진기자단] 공무원들은 블랙리스트 사건과 그에 따른 전반적 인사 파행을 지목한다. 인사 순환이 제대로 안 되니 공직사회에 활력이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는 얘기다. 정권교체 8개월이 지났지만, 각 부처 인사 상황을 보면 요로마다 '묵은 때'와 '혈전(血栓)'이 잔뜩 끼어 동맥경화가 심각하다. 공공부문 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에 따르면 350개 공공 기관의 기관장과 임원 3080명 중 문 정부 시절 임명한 인사 2655명(86.2%)이 안 나가고 버티고 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임기 말에 자기 진영 사람을 요직에 대거 앉힌 '알박기' 인사의 부작용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와중에 2017년 집권한 문재인 정부 초기까지만 해도 중앙부처들의 경우 운영지원과장(옛 총무과장)들이 물갈이 인사의 총대를 주로 멨다는 것이 정설이다. 산하 기관장들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사표를 종용·압박했고, 대부분 당시 관행대로 조용히 물러났다. 그 와중에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터져 김은경 환경부 장관은 지난해 1월 대법원에서 직권남용과 업무방해 등 혐의로 징역 2년의 유죄가 확정됐다. 지난 19일 검찰은 블랙리스트 책임을 물어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유영민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조명균 전 통일부 장관, 조현옥 전 인사수석과 김봉준 전 인사비서관 등 5명을 재판에 넘겼다. 2020년 11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조현옥 주독일대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문 정부 청와대에서 초대 인사수석을 지낸 조 전 대사는 '블랙리스트' 혐의로 최근 검찰에 기소됐다.[사진기자협회] 실제로 블랙리스트 사건은 정권교체 이후에도 자리를 고수하는 고위 공직자를 양산했다.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은 문 정부 시절 각종 권력형 부정부패가 만연했는데도 제 역할을 못 했다는 정치권의 질타를 받았지만, 사퇴론에 맞서고 있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종편 재승인 심사 개입 혐의로 방통위 과장이 지난 11일 구속되자 "참담하다"면서도 본인 사퇴는 거부했다. 성공회대 교수 출신의 정해구 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장의 거취도 뜨거운 감자다. 그는 2017년 6월 좌파 인사 등으로 구성된 '국가정보원(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가 기밀이 가득한 국정원 메인 서버를 열람했다는 이유로 시민단체에 의해 서훈 전 국정원장과 함께 검찰에 고발됐다. 그는 2021년 3월 정부 싱크탱크를 총괄하는 요직인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자리를 차지했다. 정권 교체 이후 법적·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버티고 있다. 문 정부 이념에 치우친 인사들은 마치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의 진지전(陣地戰) 혁명 전략을 응용한 듯 곳곳에 진지를 구축한 형세다. 공직사회에서 물갈이 인사가 가로막히면 국가경쟁력을 좀 먹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간과 국민 부담으로 전가된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윤 정부는 공직사회 기강을 다잡겠다며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 공직 감찰팀을 신설하고, 총리실에는 고위 공직자 감찰을 전담할 감찰팀을 추가로 만든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감찰이 두려워 공직사회가 달라질지는 미지수다. 2021년 6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정보원에서 새 원훈석(신영복체) 제막을 마치고 참석자들(당시 직책)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해구 경제인문사회 연구회 이사장, 서훈 국가안보실장, 김경협 국회 정보위원장(민주당), 문 대통령, 박지원 국정원장, 윤형중 국정원 1차장, 박정현 국정원 2차장, 김선희 국정원 3차장, 박선원 국정원 기조실장. 정 이사장은 2017년 6월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가 기밀이 들어 있는 국정원 메인 서버를 열람했다는 이유로 시민단체에 의해 고발됐다. [청와대, 연합뉴스] 교육·노동·연금 등 3대 개혁과는 별도로 공직사회 대수술에도 착수해야 한다. 내년 4월 총선까지 눈치만 보면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공직사회에 전기충격이라도 가해야 한다. 물론 채찍만으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공무원 처우 개선 방안도 동시에 검토해야 한다. 아울러 대통령이 임명하는 주요 자리는 대통령 임기와 맞추는 방향으로 법을 정비해야 한다. 만년 야당 할 생각이 아니라면 여야는 초당적으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러다 공직 사회가 공복(公僕) 의식을 깡그리 상실할까 걱정스럽다. 관련기사 文정부 때 '워라밸' 즐긴 검사들…어쩌다 '과로사 위기' 몰렸나 [장세정의 시선] 韓젖소 101마리 네팔 간다…美원조가 만든 '나눔의 기적' [장세정의 시선] 대장동 첫 보도한 그 "이재명 캠프에 간 '총알' 상상초월 규모" [장세정의 시선] 北이 증오한 '文정부 적폐 1호'...김정은 폭주에 떠오른 이 남자 [장세정의 시선] '월북자 아들' 낙인에 육사도 포기..."살인방조로 文 고발할 것" [장세정의 시선]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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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의 시선] 미분양 매입? 모럴 해저드부터 막아야
주정완 논설위원 “월가를 점령하라.” 10여년 전 글로벌 금융의 중심지 미국 뉴욕 월가에서 이런 구호가 터져 나왔다. 시위대의 분노에 불을 붙인 건 금융권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는 천문학적 구제금융을 금융권에 쏟아부었다. 금융 시스템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다. 금융회사 임직원들이 막대한 보너스를 챙겨가는 걸 막지 못했다. 이후 국민 세금으로 월가가 ‘돈 잔치’를 벌였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여당(공화당)에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됐다. 이듬해 1월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민주당)은 “부끄러운 일이자 무책임의 극치”라고 지적했다. 조 바이든 부통령은 “그 사람들을 교도소에 보내고 싶은 심정”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도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실망한 대중이 거리로 나서면서 극심한 사회적 진통을 겪었다. ■ 「 둔촌주공 등 미계약 물량 급증세 업계 요구에 정부가 사들일 태세 ‘이익 사유화, 손실 공공화’ 안 돼 」 자유시장은 효율적이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시장의 실패가 발생하면 정부가 부득이하게 개입할 수도 있다. 불이 났을 때 긴급히 현장에 출동해 불을 끄는 소방대원 같은 역할이다. 이때 정부가 화재 진압을 위해 뿌린 물(공적자금)은 곧 국민의 세금 부담이다. 따라서 두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첫째는 시장의 실패를 초래한 당사자들의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이다. 자신은 전혀 손해 보지 않으면서 정부에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건 용납하기 어렵다. 둘째는 대주주와 경영진에게 응분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이런 원칙이 사라지면 국민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현재 국내에서도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려는 분야가 있다. 미분양 주택 시장이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통계를 보자. 지난해 11월 말 기준 전국의 미분양 주택은 5만8000가구였다. 4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특히 증가 속도가 가파른 게 심상치 않다. 한 달 전과 비교하면 1만1000가구나 늘었다. 정부가 위험 수위로 간주하는 6만 가구를 넘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개별 사업장에서도 불안한 소식이 잇따라 들려온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 단지(올림픽파크포레온)가 대표적이다. 사업자가 정확한 계약률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1순위 당첨자의 상당수가 계약을 포기했다고 한다. 서울 마포구 마포더클래시에선 분양 물량의 절반 이상이 이른바 ‘줍줍(무순위 청약)’으로 나왔다. 그나마 서울의 역세권 아파트 단지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경기도나 인천에선 청약 접수 단계부터 대규모 미달을 면치 못하는 사업장이 속출한다.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판매자가 가격을 내리는 게 상식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때로는 판매자가 적자를 감수하기도 한다. 팔리지 않는 재고를 떠안는 것보다는 손해를 보고 파는 게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양 시장은 거꾸로 간다. 미분양은 갈수록 쌓이는데 분양가는 오히려 올리는 모습이다. 건설업계는 원가 상승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청약자의 계산은 전혀 다르다. 신규 아파트를 분양할 때는 기존 아파트보다 싸게 내놔야 경쟁력이 있다. 이미 상당수 단지에서 기존 아파트 매매가가 최고가 대비 20~30% 떨어졌다. 일부에선 아파트 가격이 더 내려갈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러니 청약시장 열기가 싸늘하게 식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미분양 주택 매입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이달 초 국토부 업무보고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지시한 사항이다. 이미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동원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정부가 부동산 규제를 푸는 것과 직접 시장에 개입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시장의 실패로 인해 정말 부득이하다면 정부가 미분양 주택을 사줄 수도 있다. 다만 전제 조건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사자의 철저한 자구 노력과 응분의 책임 추궁이다. 건설업계는 시장 분위기에 맞게 분양가를 최대한 내려 물건을 사줄 사람을 찾는 게 우선이다. 그래도 안 되면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 비싼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물건이 안 팔린다고 하소연하는 건 사회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 잘 나갈 때는 한껏 이익을 누리면서 어려울 때는 공공에 손실을 떠넘기는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공공화’는 용납될 수 없다. 월가의 돈 잔치를 막지 못했던 미국 정부의 실책이 국내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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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의 시선] 이재명이 정성호의 고언 경청해야 할 이유
강찬호 논설위원 “수사 왜 안 하냐고요? 이재명 지사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고 있지 않습니까. 검찰이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나면 수사하자’고 합니다.” 2018년 6월 성남FC 후원금 의혹과 관련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당시 경기지사)를 뇌물죄 등 혐의로 고발했던 장영하 변호사는 수사에 진척이 없자 분당경찰서를 찾아가 따진 끝에 이런 고백을 들었다. 2018년 지방선거 당시 방송토론회에서 친형을 입원시킨 사실이 없다고 거짓말한 혐의로 재판받아온 이 대표에게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게 2020년 7월이니, 검경은 고발장이 접수된 지 2년 넘게 ‘간’만 보며 이 대표 재판 결과에 따라 수사를 할지 말지 정하려 한 꼼수를 부린 정황이 짙다. 아니나 다를까. 이 대표가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경찰은 계속 수사를 뭉개다 3년이 넘은 2021년 7월 ‘무혐의 불송치’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고발인의 이의 제기로 사건은 종결되지 않고 검찰로 넘어갔다. 하지만 ‘친문’ 박은정 지청장(당시) 산하의 성남지청에서도 수사는 공전을 거듭했다. 이에 반발한 박하영 차장검사가 사표를 내는 등 갈등이 커지자 검찰은 경찰에 보완수사를 지시했다. 사건을 이첩받은 경기남부경찰청은 지난해 9월 의혹의 실체를 인정,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해 수사가 지금까지 진행되온 것이다. 즉 이 사건은 단 한 번도 무혐의 처분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민주당 안팎에선 “이미 경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린 사건”이라는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리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 「 개인 수사가 ‘정치보복’이란 야당 “사법리스크는 본인이 대응해야” ‘친명 좌장’의 소신 발언 곱씹어야 」 대장동 의혹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은 2021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낙연 후보 측이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문재인 검찰은 ‘꼬리 자르기’ 수준의 수사에 그쳤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검찰이 제대로 파고들자 친문 김명수 대법원장 산하의 법원조차 이 대표 최측근 정진상·김용의 구속영장을 발부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민주당 안팎에선 ‘윤석열 검찰의 보복 수사’란 주장만 난무한다. 대장동 비리는 가벼이 넘길 문제가 아니다. 지난 9일 경기도 가평군에선 전·현직 공무원 4명이 브로커·지방지 기자의 청탁·압력을 받고 청평호 불법 레저 시설에 축구장보다 넓은 수면 독점권을 준 혐의로 기소됐다. 지자체-업자-브로커-지역 언론이 유착해 사익을 챙긴 형국이 대장동 판박이다. 웬만한 지자체마다 이런 의혹이 비일비재하다니 원조 격인 대장동 의혹을 엄단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토착 정경 비리 천국이 될 것이다. ‘이재명 지키기’용 가짜뉴스와 방탄 추태가 판치는 민주당에서 역설적으로 상식에 부합하는 언행을 하는 이가 ‘친명 좌장’ 정성호 의원이다. 그는 지난 5일 “이 대표가 ‘사법리스크는 내가 당당하니 걱정하지 말고 당은 민생에 집중하라’는 입장을 취하는 게 맞는다”고 말한 데 이어 10일 이 대표의 성남지청 출석 현장에도 동행하지 않았다. 정 의원에게 직접 발언의 진의를 물어봤다. 그는 “난 이재명이 무죄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검찰이 이런 사건 수사했다가 무죄 나온 게 한두개냐. 그러나 (수사와 관련해) 이 대표가 아무 얘기가 없으니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나. 따라서 ‘수사는 내가 대처할 테니 당은 민생에만 충실하라’고 밝히며 의연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얘기한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 쪽에서 이 발언이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던가”고 질문하니 “그런 일 없었다”고 했다. “친명 좌장이니 수사와 관련해 이 대표와 얘기를 나누지 않나”고 물으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난 이 대표와 전혀 얘기 안 한다. 안부 전화나 하는 수준이지, 수사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 한다. 그건 당에서 다룰 문제다. 또 이 대표 본인이 (수사에) 전문가라고 하는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겠나. 그리고 날 ‘친명 좌장’이라 부르지 말라. 당에 친명계가 어디 있나. 난 갈라치기에 질색하는 사람이다. 대선 끝나고 이른바 친명이란 의원들과 밥 한번 먹은 적이 없다.” “이 대표 체포 동의안이 상정되면 어쩔 건가”는 질문에 정 의원은 “의원들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부결’이 당론으로 정해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체포동의안은 무기명 비밀투표”라며 대표라도 당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일축했다. 정 의원은 통화 말미에 이렇게 강조했다. “이 대표는 국민을 믿고, 사법부를 믿고 의연하게 가면 된다. 대표로서 할 일이 수사 대처만은 아니지 않나. 제1야당 지도자로 할 일을 하면 된다. 재판 결과 무죄가 나오면 대통령 되는 거고, 유죄가 나오면 어려운 것 아니겠나” 이 대표가 곱씹어볼 조언이 아닐까.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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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보호 되레 더 버거워진다..연쇄살인범의 앳된 얼굴 [세컷칼럼]
. . . 강주안 논설위원 20세기 기자의 최대 고역은 ‘얼굴 사진 구하기’였다. 흉악범 사진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준법과 탈법의 경계선을 타는 일도 벌어졌다. 한번은 남편이 보낸 킬러에 살해당한 피해자의 사진을 확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상가에 찾아가 유족을 위로한 뒤 간절하게 애원해 주민등록증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행여 마음이 변할까 빠른 걸음으로 장례식장을 나서는데 낯익은 경쟁사 기자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 아닌가. “구했죠?” 낭패감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 그에게 차마 거짓말을 못 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를 붙들고 간청한다. 옆에 선 사진기자가 찍을 수 있도록 주민증을 보여줬다. “꼭 단독 기사로 보도해야 한다”는 선배 지시를 어긴 셈이지만, 한발 늦은 기자의 참담함을 알기에 거절을 못 했다. 유치원생이 유괴당했을 땐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사진을 입수해야 했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2000년대 들어 피의자 인권이 강조되면서 기자의 고생도 끝난 줄 알았다. 악몽이 되살아난 건 2019년 화성연쇄살인 사건 범인이 밝혀지면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모티브가 된 희대의 살인범이 법무부 보호를 받는 건물에 은신해온 사실만큼이나 황당했던 건 언론에 나온 그의 얼굴이다. 고교 졸업 앨범 사진. 환갑이 다된 이춘재 기사에 교복 입은 청소년이 붙어 다닌다. 최근엔 택시 기사와 동거녀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이기영의 신상 공개 사진이 실물과 영 다르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강력범죄처벌법에 따라 신상 공개를 결정했지만, 범죄자 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현재 모습과 판이하더라도 신분증 사진을 내보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21세기에도 민간 섹터의 범죄자 사진 찾기는 계속된다. 신상공개 강력범 옛날 얼굴 공개 국가도 사람의 얼굴은 금세 바뀐다는 사실을 잘 안다. 신상이 공개된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에게 1년마다 최근 사진을 올리라고 한다. 헌법재판소 역시 이 조항에 대해 2015년 합헌 결정을 하면서 “외모는 다른 신상정보에 비해 쉽게 변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범죄자는 얼굴이 쉽게 바뀔 수 있으니 매년 새 사진을 제출해야 하고 어떤 살인자는 30년 전 앳된 사진 뒤에 숨는다. 신상 공개 제도의 일관성 결여가 빚어낸 현상이다. 유영철 같은 끔찍한 살인범조차 얼굴을 감춰주는 변화에 반감이 커지자 2010년 강력범에 대한 신상공개가 시작됐다. 한데 제도의 약점을 아는 범죄자가 재주껏 감추면 최근 얼굴을 알 수가 없다. 경찰이 심의위원회를 거쳐 신상 공개를 결정해도 현재 얼굴과 동떨어진 모습이 공개되는 사례가 빈발하면서 공은 다시 네티즌 수사대와 언론에 넘어갔다. SNS를 뒤지고 지인을 수소문한다. 네티즌 나서 군복샷·교복샷 올려 이 과정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옷이 군복이다. 남자들은 대개 군 복무 시절 찍은 사진을 몇장씩 갖고 있다. SNS에도 올린다. 이기영은 부사관 시절 정복을 입은 모습이 인터넷에 퍼졌고 이춘재는 탱크 앞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교복도 흔하다. 아직도 얼굴이 명확히 공개된 적 없는 유영철은 중학교 졸업 앨범 사진이 돌아다닌다. 우스꽝스러운 강력범 ‘군복샷’ ‘교복샷’은 연쇄살인범뿐 아니라 강도와 폭력배조차 수사기관이 찍은 ‘머그샷’을 공개하는 미국과 대비된다. 미주리주에선 매춘 업소에 갔다가 단속된 남성의 사진을 공개해 논란이 됐으나 정당한 행위라는 법원 판결이 나온 사례도 있다. (이상현 ‘체포된 형사 피의자의 초상권의 제한된 보호범위: 미국법과의 비교 분석’)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 이춘재. [뉴시스] 학계의 견해는 엇갈린다. 성중탁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신상공개에 문제가 많다는 입장이다. “얼굴을 공개한다고 공익적 효과가 큰 것도 아닌데 가족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다. “얼굴이 다르면 다른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한다. 제대로 공개하라는 주문도 나온다. “인권 이슈가 있는 걸 알면서도 공공의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해 도입한 제도인데 피의자에 따라 차이가 생기면 안 된다”는 지은석 전북대 로스쿨 교수가 대표적이다. 공개 대상 줄이되 제대로 알려야 현행 방식에 문제가 많아서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진단엔 대부분 동의한다. 하주용 인하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의 “적용 대상을 더 엄격히 제한하되 최근 모습을 공개하는 게 필요하다”는 제안에 수긍이 간다. 신상 공개의 대상은 또 늘었다. 지난 12일 법무부가 새로운 인물군을 추가했다.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끊고 도주한 자다. 범죄 예방을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 늘려야 하겠지만 이쯤에서 한 번쯤 일관성 있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하면 온-오프를 다니며 정보를 찾는 사람들로 인해 인권 보호는 더 버겁게 된다. 글=강주안 논설위원 그림=이시은 인턴기자 강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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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의 시선] 연쇄살인범의 앳된 얼굴
강주안 논설위원 20세기 기자의 최대 고역은 ‘얼굴 사진 구하기’였다. 흉악범 사진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준법과 탈법의 경계선을 타는 일도 벌어졌다. 한번은 남편이 보낸 킬러에 살해당한 피해자의 사진을 확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상가에 찾아가 유족을 위로한 뒤 간절하게 애원해 주민등록증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행여 마음이 변할까 빠른 걸음으로 장례식장을 나서는데 낯익은 경쟁사 기자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 아닌가. “구했죠?” 낭패감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 그에게 차마 거짓말을 못 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를 붙들고 간청한다. 옆에 선 사진기자가 찍을 수 있도록 주민증을 보여줬다. “꼭 단독 기사로 보도해야 한다”는 선배 지시를 어긴 셈이지만, 한발 늦은 기자의 참담함을 알기에 거절을 못 했다. 유치원생이 유괴당했을 땐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사진을 입수해야 했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2000년대 들어 피의자 인권이 강조되면서 기자의 고생도 끝난 줄 알았다. 악몽이 되살아난 건 2019년 화성연쇄살인 사건 범인이 밝혀지면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모티브가 된 희대의 살인범이 법무부 보호를 받는 건물에 은신해온 사실만큼이나 황당했던 건 언론에 나온 그의 얼굴이다. 고교 졸업 앨범 사진. 환갑이 다된 이춘재 기사에 교복 입은 청소년이 붙어 다닌다. 최근엔 택시 기사와 동거녀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이기영의 신상 공개 사진이 실물과 영 다르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강력범죄처벌법에 따라 신상 공개를 결정했지만, 범죄자 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현재 모습과 판이하더라도 신분증 사진을 내보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21세기에도 민간 섹터의 범죄자 사진 찾기는 계속된다. ━ 신상공개 강력범 옛날 얼굴 공개 국가도 사람의 얼굴은 금세 바뀐다는 사실을 잘 안다. 신상이 공개된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에게 1년마다 최근 사진을 올리라고 한다. 헌법재판소 역시 이 조항에 대해 2015년 합헌 결정을 하면서 “외모는 다른 신상정보에 비해 쉽게 변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범죄자는 얼굴이 쉽게 바뀔 수 있으니 매년 새 사진을 제출해야 하고 어떤 살인자는 30년 전 앳된 사진 뒤에 숨는다. 신상 공개 제도의 일관성 결여가 빚어낸 현상이다. 유영철 같은 끔찍한 살인범조차 얼굴을 감춰주는 변화에 반감이 커지자 2010년 강력범에 대한 신상공개가 시작됐다. 한데 제도의 약점을 아는 범죄자가 재주껏 감추면 최근 얼굴을 알 수가 없다. 경찰이 심의위원회를 거쳐 신상 공개를 결정해도 현재 얼굴과 동떨어진 모습이 공개되는 사례가 빈발하면서 공은 다시 네티즌 수사대와 언론에 넘어갔다. SNS를 뒤지고 지인을 수소문한다. ━ 네티즌 나서 군복샷·교복샷 올려 이 과정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옷이 군복이다. 남자들은 대개 군 복무 시절 찍은 사진을 몇장씩 갖고 있다. SNS에도 올린다. 이기영은 부사관 시절 정복을 입은 모습이 인터넷에 퍼졌고 이춘재는 탱크 앞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교복도 흔하다. 아직도 얼굴이 명확히 공개된 적 없는 유영철은 중학교 졸업 앨범 사진이 돌아다닌다. 우스꽝스러운 강력범 ‘군복샷’ ‘교복샷’은 연쇄살인범뿐 아니라 강도와 폭력배조차 수사기관이 찍은 ‘머그샷’을 공개하는 미국과 대비된다. 미주리주에선 매춘 업소에 갔다가 단속된 남성의 사진을 공개해 논란이 됐으나 정당한 행위라는 법원 판결이 나온 사례도 있다. (이상현 ‘체포된 형사 피의자의 초상권의 제한된 보호범위: 미국법과의 비교 분석’)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 이춘재. [뉴시스] 학계의 견해는 엇갈린다. 성중탁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신상공개에 문제가 많다는 입장이다. “얼굴을 공개한다고 공익적 효과가 큰 것도 아닌데 가족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다. “얼굴이 다르면 다른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한다. 제대로 공개하라는 주문도 나온다. “인권 이슈가 있는 걸 알면서도 공공의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해 도입한 제도인데 피의자에 따라 차이가 생기면 안 된다”는 지은석 전북대 로스쿨 교수가 대표적이다. ━ 공개 대상 줄이되 제대로 알려야 현행 방식에 문제가 많아서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진단엔 대부분 동의한다. 하주용 인하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의 “적용 대상을 더 엄격히 제한하되 최근 모습을 공개하는 게 필요하다”는 제안에 수긍이 간다. 신상 공개의 대상은 또 늘었다. 지난 12일 법무부가 새로운 인물군을 추가했다.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끊고 도주한 자다. 범죄 예방을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 늘려야 하겠지만 이쯤에서 한 번쯤 일관성 있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하면 온-오프를 다니며 정보를 찾는 사람들로 인해 인권 보호는 더 버겁게 된다. 관련기사 대리운전 지옥 만든 만취청년 '아침 콜'…쥔 돈은 1만6천원 뿐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의 시선] 출입문 통과용 마스크 규제 [강주안의 시선]가해자의 고통 또한 끝나지 않는다 [강주안의 시선] 선출직 vs 임기 vs 실세 [강주안의 시선] 이대준 주무관 월북 논란을 끝내려면 부하가 밥값 낸다···'우렁경찰' 만든 말, 승진 안할 거야?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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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의 시선] '하루이틀삼일사흘’ '하드캐리하길'
━ 사흘이 4일? 또 번진 문해력 논란 김성탁 논설위원 ‘난 안 심심한데. 진심이라면서 '심심한 사과'라니….” 몇 달 전 마음이 간절하다는 표현을 지루하다는 단어와 헷갈린 이들이 많아 문해력 논란이 일었었다. 2020년엔 광복절이 토요일이어서 다음 월요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됐는데 ‘사흘 황금연휴’ 보도가 나가자 ‘3일인데 왜 4일로 계산하느냐’는 반론이 나왔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사흘의 뜻은 전파됐을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 래퍼 노엘이 발표한 노래 가사 때문에 논란이 재점화했다. SNS에 공개된 가사에 ‘하루이틀삼일사흘’이란 표현이 담겼다. 실수일 수 있지만 사흘을 ‘4일’로 혼동한 게 아니냐는 반응이다. 사진 노엘 인스타그램 한자 교육이 급감하고 독서량이 줄면서 문해력 비상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학교 안내문에 ‘중식 제공’이라고 적자 젊은 학부모가 ‘우리 아이는 한식을 좋아한다’고 항의했다거나, 도서관 사서 선생님에게 반납하라는 문구를 보고 책을 사서 보냈다는 경우까지 전해졌다. ‘골이 따분한(고리타분한) 성격’처럼 잘못 쓰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도 문해력 강화를 강조하고, 한자를 쓸지는 모르더라도 의미는 가르치자는 제언 등이 쏟아졌다. 하지만 요즘 의사소통에 쓰이는 말 가운데 무슨 뜻인지 헷갈리는 현상은 젊은 세대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맏형 진이 지난해 말 입대하면서 팬 커뮤니티에 ‘자, 이제 커튼콜 시간이다’는 문구를 올렸다. 커튼콜은 공연 후 출연진이 관객의 박수에 답해 다시 무대로 나오는 것을 뜻한다.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웠는데, 진이 ‘게임 캐릭터 진의 대사’라고 힌트를 남겼다. 찾아보니 온라인게임 캐릭터 진이 ‘공격 모드’에 쓰는 표현이었다. ━ 게임용어 낯선 기성세대들 당황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세대가 일상에서 쓰는 생소한 표현은 이 밖에도 많다. ‘내가 하드캐리 할 테니 나를 믿고 따라와’에 등장하는 하드캐리는 팀워크가 중요한 게임에서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한 플레이어나 행위를 가리킨다.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를 순간적으로 올리는 스킬을 ‘버프’라고 하는데 ‘오늘 점심시간에 버프 받고 일했다’는 식으로 쓰인다고 한다. 중장년 세대에겐 대개 해석 불가다. 카타르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태극기에 적어 열풍을 일으킨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표현도 유래는 게임 관련이었다. ‘롤드컵’으로 불리는 리그오브레전드 2022 월드컵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프로게이머가 1라운드 패배 후 인터뷰에서 “저희끼리만 안 무너지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자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제목이 달렸다고 한다. 문해력이 떨어지면 사회의 지적 기반이 허약해 지고, 학습 역량 저하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급속한 디지털화가 진행된 한국에서 문해력 저하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모두에게 문제다. 소통에 차질이 생겨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워질 뿐 아니라 무엇이 사실인지 판단이 힘들어지고 가짜 정보와 가짜 뉴스 구별에 구멍이 난다. 정치적 진영 논리가 팽배한 국내 상황에선 확증 편향에 쉽게 빠지는 현상도 뚜렷하다. 사회적 갈등의 접점을 찾기 어렵고,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 대한 공격이 디지털 공간에 난무한다. 이런데도 좋은 학벌에 화려한 경력을 지녀 문해력 부족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정치인들마저 소통의 문을 닫은 채 상대를 밟고 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 사의를 표명한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이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2023 서울시당 신년인사회에서 김기현 의원과 인사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 해석 난감한 정치지도자들 언행 한자어나 게임 용어가 아닌데도 정치 주역들이 쏟아내는 언어는 해석하기 쉽지 않다. 윤 대통령은 “당무에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었다. 하지만 국민의힘 당 대표 선출을 앞둔 ‘윤심’ 논란 속에 저출산고령사회위 부위원장인 나경원 전 의원과 대통령실이 보여주는 양상은 국민의 문해력을 시험한다. 나 전 의원은 사의를 보냈다는데 대통령실은 “들은 바 없다”고 했다. 친윤 측의 난타전에 이어 이제는 나 전 의원에 대한 애정이 커 사의를 수용할 뜻이 없다는 보도가 전해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선후보 시절 국회의원 불체포·면책 특권 폐지를 공약했다. 하지만 어제 회견에선 “경찰이 적법하게 권한을 행사하면 수용하겠지만, 경찰복을 입고 강도 행각을 벌인다면 판단은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8개월이 넘도록 윤 대통령과 제1야당 지도부는 만난 적이 없다. 올 신년인사회 때도 이 대표가 불참했는데, 정부가 e메일로 초대했다는 신경전만 시끄러웠다. 요새 표현대로 주문해본다. 하루이틀삼일사흘 ‘커튼콜 시간’이라며 서로 공격만 할 게 아니라 중꺾마 정신으로 대화를 하드캐리해달라. 김성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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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창비와 김어준이라는 권력
안혜리 논설위원 창비(창작과비평)와 김어준. 지난 세기부터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권력을 상징해온 두 키워드가 2023년 시작부터 사람들 입에 나란히 오르내리고 있다. 한쪽은 돈도 안 되는 논란으로 한숨짓고, 다른 한쪽은 쏟아져 들어오는 돈 앞에서 환호성을 지른다. 표면적으론 이처럼 양극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이벤트는 결국 같은 맥락 위에서 봐야 한다. 그들만의 작은 왕국을 구축한 편향적 권력의 작동 방식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해악 말이다. TBS에서 하차한 김어준은 9일 새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 캡처 먼저 6년 3개월 만에 드디어 TBS(교통방송) 라디오 진행자에서 하차한 김어준 얘기부터 해보자. TBS에서 진행하던 같은 시간에 같은 이름을 내건 새 유튜브 채널로 지난 9일 시작한 김어준 방송은 당장은 모두에게 윈윈이다. 방송 첫날부터 슈퍼챗 전 세계 1등, 사흘 만에 구독자 87만명을 넘기며 돈벼락을 맞고 있는 김어준이 가장 큰 수혜자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선동으로 그렇게 쉽게 큰돈을 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긴 하지만 선량한 시민의 아까운 세금이 아니라 맹목적 추종자들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 굳이 안타까워할 필요는 못 느끼겠다. 무엇보다 그에게 비판적인 사람들로선 서울시의 재정 지원으로 운영하는 방송국에서 라디오 전파라는 공공재를 점유하며 정치적 편향성을 뛰어넘는 각종 음모론의 생산기지 노릇을 해온 김어준의 퇴출 자체가 큰 선물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외면하기 어렵다. 최다 제재 기록을 세우며 법정 제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이미 보였던 김어준이다. 이젠 아예 방송심의라는 최소한의 족쇄마저 풀어버렸으니 가뜩이나 거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로 둔갑시켜온 그의 재주가 어떤 혼란을 불러올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 선동에 휘둘려 대통령궁을 비롯해 의회와 대법원까지 짓밟으며 민주주의를 유린한 최근의 브라질판 대선 불복 폭동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극성 팬덤을 확보한 음모론자가 끼치는 폐해는 결국 온 사회가 떠안을 수밖에 없어서다. 지난 2015년 소설가 신경숙 표절과 관련한 문제제기 후 열린 토론회. 당시 신경숙 작가 책을 출간했던 창비는 최근 장강명 작가가 이 부분을 언급하자 문장 수정을 요구해 논란을 일으켰다. 중앙포토 이번엔 창비의 장강명 작가 글 검열 논란이다. 과정을 상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단순히 출판사가 몇몇 문장을 손보려다 작가와 의견이 갈려 잡음이 생긴 게 아니다. 이보다는 조작한 진실을 제3자가 쓴 기록으로 남기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만하다. 발단은 이미 보도된 대로 '신경숙의 표절을 창비가 궤변으로 옹호하며 표절 기준을 무너뜨리려 한 것에 대해 한국작가회의는 끝내 아무 논평도 내지 않았다'는 문장 하나였다. 앞서 작가가 웹진으로 공개한 글에도 포함된 문장이다. 정 동의할 수 없다면 책 마지막에 출판사 입장을 별도로 밝히거나 편집자 각주를 달 수도 있는데 그 대신 본문 한가운데에 '표절에 대해 창비와 나의 입장은 다르다'는 문장을 넣으라고 작가에게 요구했다. 표절이라는 건 장 작가의 일방적 주장이고 표절이 객관적 사실로 드러난 건 아니라는 뉘앙스를 작가 본인의 글로 남기려 한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는 당 구호 그대로 왜곡된 사실을 역사로 만들기 위해 신문·잡지 등을 고쳐 쓰는데, 이것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김어준식 선동만큼 위험해 보이는 이유다. 저자와 편집자 간의 3차에 걸친 교정까지 모두 끝난 마당에 왜 출판사 경영진이 무리하게 이런 시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난 2015년 신경숙 작가의 표절로 세상이 떠들썩했을 때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한국작가회의의 전신) 결성을 주도하며 비단 문단뿐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창비의 정신적 지주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당시 편집인)가 보였던 입장과 관련된 게 아니냐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당시 백 교수는 유사성은 인정하면서도 "표절로 단정 지을 수 없다"며 부인했다.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건이 불거진 후 비슷한 사례가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2021년 창비 편집주간을 지낸 한 역사학자의 책 서평을 부탁받았던 강진아 한양대 교수는 당시 서평과 관련한 한 기고 글을 통해 '중국 비판이 집중된 부분에 대해 반박과 수정 요청을 받았다, 진보 지식인 사회에서 중국론이 가지는 민감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썼다. 중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창비가 검열했다는 이야기다. 창비가 점유하고 있는 문화권력을 감안할 때 이런 식의 공론장 왜곡이 더 많지 않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이미 지나간 창비의 망신과 김어준의 하차, 대수롭지 않아보이는 이벤트에 자꾸 신경이 쓰이는 이유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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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정부 때 '워라밸' 즐긴 검사들…어쩌다 '과로사 위기' 몰렸나 [장세정의 시선]
장세정 논설위원 죄를 지었다면 경찰·검찰의 수사를 받고, 혐의가 드러나면 기소돼 재판에서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법치국가에서 상식이다. 너무도 당연한 형사사법 절차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비정상적으로 굴러갔다. 술에 취해 택시 기사를 폭행한 이용구 변호사(문 정부 법무부 차관) 사건을 축소·은폐했던 경찰의 권력 눈치 보기 사례는 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무엇보다 지난 5년 검찰과 법원의 파행이 심각했다. 군사 독재 정권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강골 검사와 대쪽 판사가 보이지 않았으니 법과 상식이 실종될 수밖에 없었다. 2017년 5월 11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민정수석과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 하반기부터 이른바 '조국 사태'를 거치며 상식과 시비가 전도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비리 의혹을 받는 자들이 오히려 눈을 부라리며 큰소리쳤으니 말 그대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다. 법이 능멸당하고 상식이 실종되는 와중에 검찰만이라도 제역할을 했으면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추미애·박범계 법무부 장관과 김오수 검찰총장 체제에서 '친문 정치 검사들'은 의혹이 불거져도 눈을 감기 바빴다. 수사 흉내를 내더니 대충 덮거나 물타기하기 급급했다. 심지어 신성식 검사장(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은 서울중앙지검 3차장 시절이던 2020년 6∼7월 존재하지도 않는 녹취록 내용을 KBS 기자에게 흘려준 혐의로 지난 5일 뒤늦게 기소됐다. 권력 비리를 수사해야 할 검사가 사실 왜곡 범죄를 저질렀다니 기가 찰 일이다. 2018년 3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차담회에서 추미애 민주당 대표, 박범계 수석대변인과 웃고 있다. 2019년 '조국 사태'가 터진 이후 추 대표와 박 대변인은 연이어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됐다. 연합뉴스 2019년 11월 8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오수 법무부 차관, 이성윤 검찰국장의 보고를 받고 있다. 나중에 김 차관은 검찰총장으로, 이 국장은 서울중앙지검장 등으로 승승장구했다.연합뉴스 지난 5년의 법치 파행도 모자라 국민의 심판으로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도 민주당은 거대 의석을 무기 삼아 지난해 4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을 만들어 검찰 수사에 족쇄를 채웠다. 이에 맞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법 개정 없이도 검수완박을 우회할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내 비리 수사에 숨통을 틔웠다. 하지만 문 정부에서 쏟아진 권력형 비리 의혹이 사실상 방치되는 바람에 지금 검찰은 5년간 쌓인 '수사 설거지'하기 바쁘다. 자존심이 땅에 떨어진 엘리트 검사들은 지금 이원석 검찰총장 체제에서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비리 수사에 명운을 걸고 있다. "문 정부 시절 특수부 검사들은 정치 외압으로 수사를 못 해 '워라밸(일·생활의 균형)'을 즐겼으나, 서울중앙지검과 수원지검 검사들은 인력 부족 와중에 수사할 사건이 넘쳐나 자칫하면 과로사할 것 같다"는 말이 법조계에 나돌고 있을 정도다. 내일(10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출두한다. 이 대표를 둘러싼 성남 FC 불법 후원금 의혹은 문 정부 시절 경찰의 부실 수사 논란 와중에 불송치 결정됐고, 지난해 1월엔 성남FC 수사 무마 논란이 벌어져 친문 성향 박은정 당시 성남지청장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검찰에 고발당했다. 정치에 휘둘린 성남FC 의혹 사건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국민 신뢰와 사법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할 책임이 검찰 앞에 놓여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지난 1월 2일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를 방문한 모습. 사진 페이스북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95) 할머니가 2020년 1월 '김복동 센터' 건립 기금을 당시 윤미향 정의연 이사장(현 무소속 의원)에게 전달하는 모습. 길 할머니는 2017년 국민성금 1억원 중 5000만원을 정의연에 기부했지만 정의연 기부자 명단에 길 할머니는 없었다. 윤 의원은 횡령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사진 김복동의 희망 검찰이 그나마 기본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면, 법원은 여전히 암담한 지경이다. 무엇보다 정치 사건의 재판을 질질 끌어 사법 정의가 제때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조국 전 장관 비리가 언제 터졌는데 재판은 아직 1심도 끝나지 않았다. 자녀 입시 비리와 감찰 무마 등으로 기소된 조국 전 장관에겐 지난달 징역 5년이 구형됐다. 윤미향 무소속(전 민주당) 의원이 연루된 정의기억연대 후원금 사적 유용 의혹 등은 2020년 5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5) 할머니가 폭로하면서 공분을 일으켰다. 그해 9월 사기·횡령·배임 등 8개 혐의로 기소됐지만, 재판이 지연되면서 지난 7일 윤 의원에게 징역 5년이 구형됐다. 법원이 다음 달 10일에야 1심 선고를 한다니 대법원까지 가면 윤 의원은 4년간 세비를 고스란히 챙길 상황이다.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은 검찰이 2020년 1월 한병도 전 청와대 정무수석,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황운하 전 울산경찰청장 등 13명을 재판에 넘겼으나 법원은 1년 3개월간 본재판을 한 번도 열지 않았고 3년이 지난 지금도 1심 재판 중이다. 당시 재판을 맡은 김미리 부장판사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회장을 지내 '사법부 하나회'란 비판을 받은 우리법연구회 출신이어서 구설에 올랐다. 2018년 8월 6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선수(왼쪽 첫째) 대법관, 노정희(맨 오른쪽) 대법관 등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김명수 대법원장(오른쪽 뚤째)과 웃으며 환담장으로 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일본 검찰과 미국 대법원처럼 법을 다루는 기관이 중심을 잡아주면 나라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강도와 살인범도 나쁘지만, 정치 검사와 정치 판사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더 클 수도 있다. 검찰에 이어 사법부가 하루속히 제자리를 찾도록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다. 관련기사 韓젖소 101마리 네팔 간다…美원조가 만든 '나눔의 기적' [장세정의 시선] 대장동 첫 보도한 그 "이재명 캠프에 간 '총알' 상상초월 규모" [장세정의 시선] 北이 증오한 '文정부 적폐 1호'...김정은 폭주에 떠오른 이 남자 [장세정의 시선] '월북자 아들' 낙인에 육사도 포기..."살인방조로 文 고발할 것" [장세정의 시선]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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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의 시선] 일요일도 편하게 마트에 가고 싶다
주정완 논설위원 얼마 전 집 근처 대형마트에 갔다. 즉석식품 코너에서 치킨을 골랐다. 가격은 1만5800원. 치킨 프랜차이즈보다 가격은 약간 저렴했다. 양은 두 배 정도로 많았다. 맛은 그저 그랬다. 갓 튀긴 치킨의 따뜻하고 바삭한 느낌은 없었다. 프랜차이즈 치킨과 마트 치킨은 장단점이 뚜렷했다. 뭐가 낫다고 일률적으로 말하긴 어려웠다. 마트 치킨은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나라 유통업의 변화를 상징하는 품목이다. 2010년에는 한바탕 난리를 일으켰던 적도 있다. 당시 롯데마트는 5000원짜리 ‘통큰치킨’을 내놨다가 8일 만에 손을 들었다. 치킨집을 하는 자영업자의 극심한 반발 때문이다. ■ 「 격주 일요일 마트 의무휴업 규제 전통시장 살리기 효과 거의 없어 온라인 쇼핑몰만 반사이익 누려 」 지난해 6월에는 홈플러스가 6990원짜리 ‘당당치킨’을 내놨다. 12년 만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고물가 시대를 맞은 소비자들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비율) 치킨을 환영했다. 프랜차이즈 치킨 가격이 너무 비싼 게 아니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른 마트도 비슷한 상품을 잇달아 내놨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트 치킨은 시장에 자리를 잡았다. 유통업계에는 마트 치킨보다 훨씬 어려운 숙제가 남아 있다. 2012년 도입한 대형마트 의무휴업제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대도시에선 매달 둘째·넷째 일요일을 의무휴업일로 지정했다. 주말에 장을 보는 소비자가 가장 불편하게 느낄 만한 날을 골랐다. 만일 소비자 편익만 생각한다면 당장 없애야 하는 규제다. 그런데도 11년 전에는 사회적으로 의무휴업제가 받아들여졌다. 그 무렵은 대형마트의 전성기였다. ‘빨대효과’를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마트가 신규 점포를 열면 주변 상권의 매출을 급속히 빨아들인다는 주장이다. 마트에 휴업을 강제하면 소비자의 발길이 전통시장으로 향할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규제를 도입한 초기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유효할까. 거의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2020년 8월 한국유통학회 학술대회에서 조춘한 경기과학기술대 교수(스마트경영학과) 등이 발표한 논문이다. 조 교수팀은 소비자 465명에게 마트가 쉬는 날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전통시장에 간다는 응답은 5.8%에 그쳤다. 마트 의무휴업으로 혜택을 받는 건 전통시장이 아니라 슈퍼마켓이나 온라인 쇼핑몰이란 설명이다. 그나마 2018년을 고비로 마트 주변 슈퍼마켓의 일요일 매출이 감소세로 돌아섰다. 조 교수는 논문에서 “대형마트의 빨대효과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트 의무휴업의 장기화는 오프라인 소비의 침체, 온라인 소비의 활성화를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오프라인 침체, 온라인 활성화는 정부 통계에서도 뚜렷하게 보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하는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이다. 대형마트 3개사의 매출액은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년 연속 감소했다. 반면 온라인 유통업체 12개사의 매출액은 3년 연속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어느새 마트 전성시대는 저물고 온라인 쇼핑 전성시대가 열렸다. 코로나19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전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다. 그러던 중 대구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해 12월 19일 지역상인 대표 등과 협약식을 했다. 마트 의무휴업일을 일요일이 아닌 평일로 옮기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휴업일 변경은 시장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라 이해 당사자와 합의를 해야 하고 지방의회 과반수 찬성으로 조례도 고쳐야 한다. 앞으로 홍 시장이 구체적인 성과를 낸다면 다른 대도시 시장에게도 상당한 자극이 될 것이다. 정부도 지난해 12월 28일 전국상인연합회 등과 협약식을 했다. 이건 좀 두고 봐야 한다. 협약서 표현이 애매모호하다. “시장·군수·구청장의 자율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지속 협의하여 추진한다”고 했다. 일단 휴업일 규제 완화를 위해 사회적 논의의 첫발을 뗀 정도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 말은 영화 제목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예전엔 부당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과거에 정당했다고 지금까지 정당할 것이란 보장도 없다. 11년 전 소비자와 지금의 소비자는 당연히 다르다. 오래된 규제가 지금도 정당한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대형마트에 격주 일요일 휴업을 강제한 목적이 전통시장 살리기였다면 더는 맞지 않는 얘기다. 유통시장 주도권은 한참 전에 온라인 쇼핑으로 넘어간 상태다. 소비자 선택을 제한하는 규제는 최소한으로 그쳐야 한다. 이제 소비자가 일요일에도 편하게 장을 볼 수 있게 하자. 주정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