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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필진

본사 칼럼니스트 · 명지대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미학과 학사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박사
전 영남대 교수, 영남대 박물관장
전 명지대 교수,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전 문화재청장
전 제주추사기념관 명예관장
현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현 용산공원추진위원회 민간공동위원장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 [문화의 창] 우리 인문학의 연구 환경에 대하여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요즘 대통령 선거판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대한민국이 과연 문화 선진국인가 싶다. 서로 비방하는 행태는 거의 인간성의 황폐화를 보여주는 것 같아 자괴감이 일어난다. 이런 판국에 인문학을 말한다는 것이 사치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품격이란 기본적으로 인문정신과 관계된다.   인문학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자세와 시대정신을 탐구하는 한 시대 지성의 상징이다. 인문대학이 없으면 종합대학이 될 수 없다. 인문학은 한때 ‘인문이 밥 먹여 주냐’는 냉대 속에서 ‘교양’ 정도로 생각되어 왔다.   ■  「 인문학은 시대 정신의 상징 AI 시대에도 사고의 바탕 교수평가제 논문 중심 벗어나 저서에 높은 비중 두어야 」    그러나 컴퓨터, AI 등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이를 운용하는 사고의 기본은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각성이 일어났다. 이에 기존의 ‘교양 강좌’는 ‘인문학 강좌’라는 이름으로 자못 왕성히 열리고 있다. 카이스트, 포스텍 같은 유수한 과학기술대학에는 인문학 교수단이 따로 꾸려져 있다.   인문학의 기본 인력은 인문대학 교수들이다. 이들의 연구논문과 저술이 그 시대 인문학의 가장 큰 결실이다. 이에 나라에서는 교수 업적평가에서 논문 발표 수를 대대적으로 강화하였다. 대학마다 차이가 있지만 정교수가 될 때까지 조교수 5년, 부교수 6년의 11년 동안 1년에 2~3편의 논문을 써야 한다. 내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거의 2배 이상 강화되었다.   그 결과 많은 인문학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인문학의 연구 수준이 높아졌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교수들은 부과된 논문 편수를 채우기 위해 테마를 세분화하거나, 충분히 연구가 심화되기 전에 급히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사실 인문적 상상력이 요구되는 연구논문을 이렇게 계량화시켜 평가하는 것 자체에 무리가 있다. 그러나 교육부와 매스컴의 대학평가에서 절대적 수치로 작용하기 때문에 당사자인 인문학 교수들은 차마 자기 입으로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   학자에게는 연령의 리듬이 있다. 박사학위를 막 취득한 30대에는 문제의식이 왕성하고, 40대의 조교수, 50대 전반의 부교수 시절에 학문적 열정이 최고조에 달하며 50대 후반, 정교수 시절에 원숙한 경지로 나아가는데 그 아까운 세월을 강요된 논문 편수 채우는 데 다 보내고 열정도 체력도 시들어가면서 정년퇴임을 맞이한다. 그래서 후배 교수들은 나에게 좋은 시절에 교수 생활을 했다고 부러움을 말하곤 한다.   교수업적은 저서로도 평가되고 있는데 그 평점이 크게 잘못 되었다. 논문 1편을 100점으로 치면서 일반학술저서도 100점이다. 게다가 개설서나 대중서는 50점이다. 이런 기준이라면 내가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교수업적 평가에서 50점, 아니면 각주가 없다고 0점을 받게 된다.   사실 자기 저서를 갖는다는 것은 모든 인문학자들의 꿈이며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이다. 그중 개설서와 대중서는 전문학술서보다도 훨씬 쓰기 어렵다. 연륜과 능력과 공력이 몇 갑절 들어가야 한다. 만약 저서에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면 부진을 면치 못하는 인문학 출판계에 획기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인문학의 연구 인력으로는 교수 이외에도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시간강사로, 연구소 연구원으로, 박물관 학예사로, 또 정부 각 기관에 퍼져 있다. 이들은 학회를 통하여 학문 활동에 동참한다. 그러나 우리 인문학의 학회들은 가난한(?)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기 때문에 정례 논문발표회에 수준에 머물고 좀처럼 국제학술대회 같은 거대 담론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은 2009년부터 한국연구재단에 흡수되었는데, 2021년 기준으로 1년 예산 7조7000억원 중 인문사회 학술연구 지원액은 약 2700억원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이공분야 연구개발비는 약 3조6000억원이다.   지난 해 포스코의 한 문화행사에서 최정우 회장을 만났을 때 인문학의 열악한 연구 환경을 설명하자 포스코재단에서 미력이나마 돕고 싶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직간접으로 관계하는 한국미술사학회,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중앙아시아학회, 한국고간찰연구회 등 3개 학회와 2개 연구소에 각 2000만원 내지 1500만원을 연구비로 지원해 주었다.   수혜 받은 학회와 연구소는 석 달 가뭄에 맞는 단비 같다고 고마워하며 3개 학회는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었고, 두 연구소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포스코재단은 지원금의 집행 내역을 보고는 올해도 계속 연구비를 지원하였다.   우리 인문학자들은 학문을 천직으로 삼고 오늘도 변함없이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이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는 학자들이 있어 우리 사회가 이만큼 성숙하고 있는 것이다. 제도가 정비되면 훨씬 더 발전할 수 있는데 이런 문제는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가.   오는 3월 9일에 선출되는 대통령은 인수위 때부터 학문 정책을 주요 국정과제의 하나로 삼아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문화대통령’으로 큰 업적을 이루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2.01.20 00:42

  • [문화의 창] 100년 뒤 지정될 국보·보물이 있는가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10여 년 전, 문화재청장으로 있을 때 이야기이다. 재임한 지 4년 째 되던 해 기자들과 가진 간담회 때 느닷없이 “문화재청장을 오래 지내면서 말 못할 고민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있었다. 이때 나도 모르게 나온 것은 “100년 뒤 지정될 국보·보물이 이 시대에 창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라는 대답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내가 마음속에 깊이 품고 있던 사회적 과제이다. 현재 국가문화재로 지정하는 유물·유적은 100년 이상의 수령이 필요조건이다. 근대 문화재가 아직 국보·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것은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 국가 문화재 100년 넘어야 대상 100년 된 건물이 희귀한 세상 주택은 한 시대 건축의 기본 시류에 맞게 국토 운영해야 」    그러나 몇 십 년이 더 지나면 1950년대에 제작된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의 작품 중 몇 점이 보물로 지정될 것이다. 그래서 연전에는 현역 미술 평론가들에게 어느 작품이 대상으로 될 만한가 설문조사를 한 바도 있다.   문제는 건축이다. 현대건축의 기술과 재료의 발달로 멀쩡한 집을 부수고 재건축하는 것이 다반사로 된 오늘날의 추세로는 수령 100년을 넘길 건축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까 싶다. 그중에서도 건축의 기본이라 할 주택 문제는 더욱 회의적이다.   안동 의성김씨 종택, 1588년, 보물 제450호. [사진 한국관광공사] 조선시대엔 목조에 기와를 얹은 ‘한옥’이라는 주택 형식이 완성되어 하회마을의 ‘양진당’(보물 306호)과 ‘충효당’(보물 414호), 안동 내앞의 ‘의성김씨 종가집’(보물 450호), 경주 양동마을의 ‘무첨당’(보물 411호)과 ‘관가정’(보물 442호) 등이 나라의 보물을 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면 우리시대 시대정신을 담아낸  ‘현대주택’이 몇 채나 지어졌을까. 그동안 우리나라는 일정 규모가 넘는 집은 ‘호화주택’으로 치부하여 중과세가 부여되어 왔고 이에 대한 국민정서의 거부감도 없지 않았다. 나라가 가난했던 50년 전에는 시대 분위기 상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나 100평 넘는 복층 아파트가 즐비한 오늘날, 100평 넘는 저택을 짓는다고 호화주택이라는 비난의 대상으로 될 것 같지 않다. 문화재란 최고 수준의 예술, 최고의 기술, 최고의 재력이 만나야 된다. 평범한 주택은 민속이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는 아니다. 사실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한옥들도 그 당시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라 불린 호화주택이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조선시대에는 삼천리강산 곳곳에 아름다운 정원(庭園), 원림(園林), 별서(別墅), 정사(精舍)를 지어 오늘날 우리들은 이곳을 행복한 답사처로 찾아가고 있다. 정원은 집 울타리 안에서 자연을 아름답게 가꾼 것이고, 원림은 풍광 좋은 곳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정원과 원림의 차이는 자연과 인공의 관계가 바뀐 것이다. 별서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별장이고, 정사는 집 가까이에 있는 독서처다. 이것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 명승이다.   봉화 닭실마을에 있는 ‘청암정’(명승 60호)은 대표적인 정원이고, 담양의 ‘소쇄원’(명승 40호)과 ‘윤선도 원림’(명승 34호)으로 지정된 ‘보길도 세연정’이 대표적인 원림이며, ‘독락당’으로 유명한 경주 안강의 ‘옥산정사’(보물 제413호)가 대표적인 정사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시대에 훗날 명승으로 지정될 정원, 원림, 별서, 정사가 지어진 것이 있는가. 이 또한 ‘별장’이라는 것에 대한 국민정서의 거부감과 세제상 중과세를 부여하는 규제 때문이다. 국토를 아름답게 가꾸며 삶을 건강하게 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어 나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속세는 막강한 것이어서 저택과 별장은 상속세 두 번 맞으면 자산 가치가 제로에 가깝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사회로 환원된다. 프랑스 르와르 강변의 대저택들이 다 그런 것이다.   요즘 시골에 폐가가 즐비하여 사회적 문제로 된 지 벌써 오래다. 만약에 도시인들이 그 폐가를 사서 작은 원림으로, 정사로, 별서로 가꿀 수 있도록 합법적인 길을 열어주고 1가구 2주택 양도소득세에서 제외해 준다면 폐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고령화시대 현대 도시인의 삶은 시골에 별서를 장만하여 ‘5도2촌’, 또는 ‘2도5촌’으로 지내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다차’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반세기 전, 1인당 국민소득 몇 백 달러밖에 안 되던 시절에 제정된 호화주택·별장·농가주택에 대한 규제를, 3만 달러가 넘는 지금 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은 마치 인구는 줄어드는데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던 것과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다.   부동산 파동의 근본 요인 중 하나는 아파트가 현찰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택에는 그런 환금성이 없다. 그렇다면 규제를 풀어 주택 건설경기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아파트 값 파동을 막는 첩경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진정 국토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인지 원점에서 생각하고 과감하게 바꿀 때가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집의 본원적 기능을 회복하는 길이며, 무엇보다도 우리네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1.11.25 01:06

  • [문화의 창] 미술시장에 ‘안목’은 살아 있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요즘 미술시장이 모처럼 호황을 누리고 있다. 우리나라 양대 경매회사인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은 봄·가을로 두 차례 열던 메이저 경매를 격월로 늘렸는데 매번 높은 낙찰률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 매달 이비드(eBid), 프리미엄 경매가 열리고, 위클리 세일도 있어 연중 경매가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 ‘화랑미술제’도 유례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지난 3일부터 닷새간 코엑스에서 한국화랑협회 소속 100여 화랑들이 벌인 이 미술제는 관람객이 예년보다 30%가 많은 4만8000명이 다녀갔고 ‘빨간딱지’의 풍년으로 지난해보다 두 배 가까운 판매율을 보였다고 한다. 미술 관계자들은 ‘이건희 컬렉션 기증’이 가져온 문화적 자극이 이런 미술 붐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한다.   ■  「 모처럼 미술 붐 일며 경매도 활발 하지만 전통 회화는 침체 이어져 그래도 노련한 안목은 살아 있어 고전 명화의 가치, 변함 없을 것 」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입장에선 이게 다 여유 있는 사람들의 한가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미술 문화는 생활에 여유있는 사람들의 애호와 지지를 받으며 이를 토대로 창작된 미술 작품들이 만인의 문화적 향유로 돌아가는 법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에 비해 미술 시장이 턱없이 빈약하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선진국들이 보여주는 규모의 4분의 1도 안 된다고 한다. 이는 국민이 생활 속에서 미술을 즐기고 애호하는 문화 활동을 그만큼 안 한다는 얘기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술 시장의 활기가 G7 진입을 코앞에 둔 우리나라가 선진국 사회로 가는 징표라면 반갑기 그지없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 정양사’. 종이에 수묵담채, 28x41㎝. 그런데 최근 미술 시장의 동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애호가들의 취향이 너무 유행 사조에 몰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색조의 추상미술이 꾸준히 상종가를 유지하고 있고, 캐릭터나 카툰 식의 가벼운 도상을 화려한 색채로 변형시킨 경쾌한 그림들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는 반면에 전통적인 회화의 ‘그림 같은 그림’들은 오히려 깊은 침체에 빠져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화랑미술제야 최신의 경향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것이라 그렇다 하겠지만 옥션에서 우리 근현대 미술의 근간을 이루는 사실적인 화풍의 구상회화와 수묵담채가 주조를 이루는 한국화의 대가들의 작품이 턱없이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까지 일어난다.   이는 전통을 사랑하고 거기에 익숙한 나이든 애호가들은 뒤로 물러가고 현대성을 추구하는 젊은 애호가들의 취향이 전통에서 멀어진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 등장한 애호가들의 취향이 자기 눈이 아니라 유행에 휩싸이면서 일어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오늘의 현재가 내일엔 전통으로 된다. 유행의 열풍이 지나면 냉혹한 객관적 심판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 근대 미술사 100년의 역사에는 ‘한국화 10대가’로 좁혀졌다. 그 ‘10대가’는 세월이 흐르면서 ‘6대가’로 좁혀졌고, 오늘날엔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을 쌍벽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런 청전과 소정의 그림 값이 젊은 인기 화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는 건 결코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애호가들은 모름지기 이미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진 고전에 대한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러나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된다. 비록 침체의 늪에 빠져 있는 전통 회화의 세계이지만 노련한 안목들은 언제나 길목을 지키고 있어 가히 명화라 할 만한 작품이 나오면 시작가의 몇 배에 낙찰되고 있다.   얼마 전 서울옥션에서는 청전 이상범의 10폭 일지병풍으로 이루어진 폭 4.5미터의 ‘산수화’ 대작이 시작가 1억원에서 경매를 시작했는데 낙찰가는 4억2000만원이었다. 당대의 안목으로 불리는 분과 굴지의 사립미술관이 끝까지 경쟁하여 경매장을 긴장시키고 낙찰봉이 떨어지면서 장내엔 축하의 박수가 울렸다.   이달에 열린 마이아트 경매에서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 정양사’라는 환상적인 진경산수가 시작가 1억 원에 출품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치열한 경쟁 끝에 전화 응찰자가 3억7000만원에 낙찰 받아갔다. 비록 조선 500년 역사에서 최고가는 화가로 화성(畵聖)이라 불리는 분의 작품 값 치고는 낮은 편이지만.   또 얼마 전 케이옥션에는 도상봉의 소품으로 ‘삼청공원’이라는 아주 고상한 풍경화가 출품되어 시작가 3500만원에 경매에 들어갔는데 여럿이 경쟁한 결과 8400만원에 낙찰되었다.   일반인들은 왜 이렇게 높은 가격을 마다 않고 경쟁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듯하다. 그 이유는 예술적 가치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만사가 그렇듯이 2등과 3등, 3등과 4등은 한 등급 차이이지만 1등과 2등 차이는 몇 등급 차이인지 모르는 것이다. 영어로 프라이스리스(priceless)라 한다.   결국 이런 작품들이 우리 미술사를 빛내주는 미래의 문화유산이다. 안목 있는 소장가들은 이런 명화를 애장하고 있다가 미술관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하고, 명품 도록에 소개하기도 함으로써 우리 문화유산의 높이와 넓이를 확대시켜 주며 우리나라가 문화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1.09.30 00:46

  • [문화의 창] ‘궁모란대병’을 보셨나요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지난 7월에 열린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에서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한다고 결정하였다. 이는 1964년 이 회의가 설립된 이래 반세기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과연 선진국임을 자부할 수 있는가 라고 자문해 볼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경제적 성장에 따른 분배와 노동의 문제,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는 정치라는 이름의 저질스러운 논쟁을 보면 아직 멀었다는 냉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중 선진국다운 나라로 되기 위하여 우리가 깊이 노력해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국가 의전(儀典, protocol)이다. 대한민국이 졸부의 나라가 아니라 선진문화국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의전의 격을 올려야 한다.   모든 국가에는 그 나라의 품격을 보여주는 의례(儀禮)가 있다. 조선왕조에는 다섯 가지가 있었다. 종묘제례의 길례(吉禮), 왕가의 결혼식인 가례(嘉禮), 왕실의 장례식인 흉례(凶禮), 군대의 의장사열인 군례(軍禮),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빈례(賓禮). 이를 국조오례라 하였다. 세종대왕은 이 의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고 이에 따르도록 했다.   의전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에 따른 제반 형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미술을 예로 들어 본다면 조선왕실의 행사 때는 옥외에 설치하는 여러 종류의 병풍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로 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는 반드시 이 병풍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된 병풍은 ‘궁모란대병(宮牧丹大屛)’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안녕, 모란’ 전시에 진열된 ‘궁모란대병’. [사진 유홍준] 본래 모란병풍은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혼례식 때 신랑 신부가 맞절하는 초례청에는 꼭 설치되는 ‘국민 장식병풍’이었다. 그중 궁궐의 모란병풍은 도화서의 전문화가들이 제작한 것으로 품격과 스케일이 민간의 그것과 달라 ‘궁모란대병’이라 불렸다.   ‘궁모란대병’은 각 폭마다 신비롭게 생긴 괴석을 타고 오른 굵은 줄기에 탐스러운 모란 꽃송이가 최소 아홉 송이가 달려있다. 줄기는 갈색이고 잎은 초록인데 꽃은 빨강·하양·노랑·분홍빛을 띠고 있어 오색이 찬란하다. 어찌 생각하면 촌스러울 것 같지만  ‘궁모란대병’은 그렇지가 않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고 말한 ‘화이불치(華而不侈)’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옛날에는 그림 표구를 장황(裝潢)이라고 하였는데 ‘궁모란대병’을 8폭 병풍으로 장황하면 전체 높이는 2.7미터 폭은 4미터에 이르는 대작으로 된다. 무게 때문에 4폭 병풍으로 장황하기도 하지만 이를 셋 이어 펼치면 10미터가 넘는 12폭 장관을 이룬다.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안녕, 모란’이라는 제목의 특별전(10월31일까지)이 열리고 있는데 전시장을 들어가자마자 ‘궁모란대병’ 네 틀이 펼쳐 보이는 장대한 아름다움에 절로 감탄을 발하게 된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모두 여기 있는 듯한 감동이 있다.   모든 명화는 현대화 같다는 불문율이 있다. ‘궁모란대병’이 모란꽃을 전개해 간 조형어법은 마치 현대미술에서 단일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확대해 나아간 ‘올 오버 페인팅(all over painting)’처럼 다가온다. 요즘 세계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우리 ‘단색조 회화’의 동어반복적 공간경영과 비슷한 조형효과를 내고 있다.   이런 ‘궁모란대병’이건만 관객들은 우리에게 이런 화려함이 다 있었냐고 놀라는 분위기이다. 그동안 검소한 것만이 미덕인양 소박한 아름다움을 강조해 온 조선시대 양반문화에만 익숙하고 궁궐 의전의 높은 품격에 대해서는 소원했던 탓이다. 그리고 좀처럼 ‘궁모란대병’을 볼 기회가 없기도 했다. 다행히 15년 전에 경복궁 내에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됨으로써 비로소 궁중미술의 진수를 이렇게 하나씩 배워가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본래 왕실문화란 그 시대 최고가는 기술과 최고가는 정성과 최고가는 재력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나라 문화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비의 절약만을 강조하고 화려한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면 이런 수준 높은 문화는 창출되지 않는다. 국격을 위해서는 문화에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 정조대왕은 경희궁을 복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궁궐은 화려하고 장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나라의 권위와 품위를 나타내기 위함이지 결코 여기에서 호사를 누리겠다는 뜻이 아니다.”   ‘안녕 모란’전에서는 궁중여인의 혼례복, 나전칠기, 도자기 등 왕실공예에 나타난 모란무늬까지 보여주고 있어 안복의 호사를 누리게 되는데 별실로 꾸며진 영상실로 들어서니 미디어아트로 모란이 만발한 정원에서 모란 향기까지 피어나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 박물관들은 이처럼 오감으로 즐기는 전시회로 나아가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한민국의 전시 디스플레이만큼은 선진국이라 자부해도 좋다는 흐뭇함이 일어난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1.08.05 00:43

  • [문화의 창] 김두종 박사의 『한국고인쇄기술사』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지난 2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제2회 한국학 저술상으로 선정된 고(故) 일산(一山) 김두종(金斗鍾, 1895∼1988) 박사의 『한국고인쇄기술사』(탐구당, 1974년)에 대한 시상식이 있었다. 이 상은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의 고(故) 산기(山氣) 이겸로(李謙魯) 선생을 기려 설립한 ‘산기재단’이 후원하는 것으로 지난해 첫 수상자는 작년 10월에 별세한 역사학자 김용섭 교수였다.   다른 곳도 아닌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해방 후 간행된 한국학의 명저에 주는 저술상이니 고인에게는 사후의 큰 영광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이 상을 계기로 35년 전에 돌아가신 김두종이라는 훌륭한 학자를 다시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뜻깊게 다가온다.   김두종은 뛰어난 서지학자였음에 틀림없지만 본령은 의사였다. 김두종은 1896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우다 신학문이 들어오자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3년 만에 마치고 상경하여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1918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 때 선언문을 배포하며 가담하여 퇴학당하였다. 그러자 김두종은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부립)의과대학에 들어가 1924년에 졸업하고 봉천에 있는 만주의과대학에서 임상 수련을 마쳤다. 이후 하얼빈에서 제세의원을 개원하여 약 7년간 내과의사로 지냈는데 이때 만주의 독립군 인사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언 43세가 된 김두종은 자신이 배워온 의학이 서양의술에만 치중하고 있음에 불만을 느끼고 1938년 만주의과대학의 동아(東亞)의학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김두종은 중국과 한국의 의학사를 연구하며 한문서적을 많이 접하면서 고인쇄본을 감식할 수 있는 지식도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훗날 그의 서지학 저술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4년). 사실 한국의 고인쇄 기술은 대단히 뛰어난 것이어서 민족적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장르이다. 런던의 영국도서관 갤러리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은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광정 다라니경』이고,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찍은 인쇄물은 고려시대 『직지』라고 소개되어 있을 정도다. 고려 팔만대장경, 조선시대 갑인자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8·15해방 이듬해인 1946년 김두종은 귀국하여 몇몇 의과대학에서 의학사를 강의하였고 1947년에는 윤일선과 대한의사학회를 창립하였다. 내과 의사이면서도 의학사나 의사학 같은 기초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시상식에 참석한 송상용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1960년에 창립한 ‘한국과학사학회’는 김두종 선생이 주도하여 초대 회장까지 맡으신 것이라고 한다. 이런 학문적 자세 때문에 학술원 원로회원이 되어 외솔 최현배, 월탄 박종화, 두계 이병도, 일석 이희승 등 당대의 석학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김두종은 의사로서도 적극 활동하여 1948년에는 제2대 서울대 부속병원장을 지냈고, 조선적십자사의 초대 보건부장을 역임하셨다. 해방공간과 6·25동란 중에도 연구에 전념하여 휴전 이듬해인 1955년에는 『한국의학사(상·중세편)』(정음사)을 출간하였다.   의사로서 명성과 높은 인품으로 숙명여대 총장, 성균관대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60년 65세로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김두종은 훗날 고백하기를 “앞으로 여생은 의학사 연구는 물론이고 비록 내 전공은 아니지만 뒷사람들에게 알려줄만한 지식도 정리하여서 남겨 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결국 이런 결심이 1966년에는 『한국의학사』(584면), 1973년에는 『한국고인쇄기술사』(630면, 사진 140컷)라는 두 분야의 금자탑을 세운 것이었다. 나이 65세에 뜻을 세우고 78세에 결실을 맺으신 것이다.   여담 같지만 우리나라엔 문자학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낸 의사분들이 많다. 종두법을 시행한 지석영 선생은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의 저자로 주시경과 함께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국어학자이셨고, 기계식 한글타자기로 유명한 안과 의사 공병우 박사는 한글학회 이사장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의사분들은 직업이 생명을 다루기 때문인지 연구 자세에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면이 있어 좋은 귀감이 된다.   김두종 박사 저술의 위대함은 기왕에 알려진 문헌을 보고 연구한 것이 아니라 이 희귀한 분야의 자료를 직접 수집하며 체계를 세웠다는 점에서도 각별하다. 김두종 박사는 평생 수집한 전적 1315종 4983책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여 그의 아호를 딴 ‘일산문고’가 개인문고 제1호로 되어 있고, 의학 관계 자료와 전적 2743권은 한독약사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그중에는 허준의 저서 한 권(보물 1111호)과 한글로 된 구급처방전인 『구급 간이방』(보물 제1236호) 등  보물이 두 점 들어 있다.   시상식에서 유족들은 상금 전액(3000만 원)을 당신이 창립한 대한의사(醫史)학회에 기부하셨고, 탐구당은 출판사에 주는 상금 1000만 원으로 오래 전에 절판된 『한국고인쇄기술사』를 복간하겠다고 하였다. 아! 각박한 요즘 세상에 이 얼마나 흐뭇한 이야기인가.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1.06.10 00:41

  • [문화의 창] 암울한 시절에 꽃피운 우리 근대미술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역병(疫病, 코로나19) 속에 나날을 보내자니 만사가 우울하여 유난히도 일찍 찾아온 봄꽃의 축제를 맞이하면서도 심드렁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봄날이었지만 뜻밖에도 지금보다 훨씬 암울했던 시절 우리 선인들의 삶과 예술을 보여주는 두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서울 강남 가로수길에 있는 예화랑에서는 ‘洄(회): 지키고 싶은 것들’이란 제목 하에 꼭 100년 전, 제1회 ‘서화협회전’ 당시 전시장을 채웠던 서화가의 작품 38점을 내보이고 있다(24일까지). 작가의 면면을 보면 심전 안중식, 소림 조석진, 위창 오세창, 해강 김규진, 우향 정대유, 소호 김응원 등의 작품과 이 분들에게 그림을 배운 소정 변관식, 무호 이한복 등 우리 근대 한국화의 선구들이다.   돌이켜 보건대 1921년 4월 1일부터 3일 간 중앙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서화협회전은 한국미술사 최초의 대중전시회였다. 3·1독립운동 2년 뒤에 열린 이 전시회를 당시 언론에서는 “꿈속에 있는 조선 서화계를 깨우는 첫 소리”라며 감격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아직 전시장도 없고, 미술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아 ‘서화’협회로 출발하였지만 온 국민이 여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일제가 부랴사랴 이듬해(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한 것이 우리 근대미술 초기의 상황이다.   예화랑이 이런 기획전을 하게 된 것은 화랑대표 김방은의 증조부인 규당 김재관이 서화미술회 선생님들께 이름까지 넣어 받은 쌍낙관 그림들을 이번에 모두 공개하게 된 것이다. 그림의 내용과 형식은 전통회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근대미술 초기의 분위기를 한 분의 컬렉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고맙고 신기했다. 특히 김재관이 1915년에 서화미술회 서과(書科) 우등생으로 받은 상장에 부상으로 화선지 두 묶음, 붓 한 자루, 먹 두 알을 수여한다고 쓰여 있는 것이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우리의 근대미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구본웅이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1935년, 캔버스에 유채, 62x5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서화협회전은 일제의 탄압에 1936년, 제15회전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이때가 되면 우리 근대미술은 그런 질곡에도 불구하고 자기 역량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1930년대 중엽 이후 우리 근대미술 화가들이 당대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예술세계를 천착해 나가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5월 30일까지).   구본웅, 정현웅, 길집섭, 김용준, 김환기, 이중섭, 최재덕 등 개성적인 화가들과 박태원, 백석, 이상, 이태준, 김광균, 구상 등 전설적인 문인들 사이의 예술적 교감을 보여주는 문헌자료와 인쇄미술 200여 점, 사진 및 시각자료 300여 점, 그리고 미술작품 140여 점으로 마치 장편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스토리텔링으로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   전시기획력이 뛰어나고 디스플레이가 멋질 뿐만 아니라 유족들이 소장해온 스케치북, 스크랩 북, 편지 등 새로운 자료들이 대대적으로 공개되어 있고 그동안 월북화가라는 이유만으로 작품을 볼 수 없었던 최재덕, 김만형, 길진섭, 김용준 등의 명작들이 다수 소개되어 전시회의 뜻을 더하고 있다.   역사적 체감으로 말하자면 일제강점기는 분명 암흑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 어둠을 해쳐나가는 선인들의 몸부림이 문학과 미술 곳곳에 절절이 나타나 있다. 1933년 ‘모던 보이’ 이상은 종로에 ‘제비’ 다방을 열었다. 이곳에서 화가와 문인들은 아방가르드를 표방하며 서툰 솜씨로 모더니즘을 익혀갔다. 구본웅이 그린 친구(이상)의 초상에는 그런 야수파적인 강렬함이 빛나고 있다.   김광균이 ‘와사등’에서 보여준 이미지즘은 빠른 속도로 신문화의 충격을 받아들이며 ‘시는 그림같이, 그림은 시같이’ 나아갔다. 그 역동의 문예사조가 암울한 시절에 이루어졌다는 것이 역설로 다가온다. 낭만도 있었다. 출판인 조풍연의 결혼을 축하하는 화첩에는 길진섭, 김환기 등 당대 화가들의 화사한 그림들이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   책 표지는 화가의 중요한 장르 중 하나였다. 괴석 옆에 진달래꽃을 그린 김소월의 ‘진달래꽃’부터 아무런 꾸밈이 없는 백석의 ‘사슴’까지 수많은 독서인의 심금을 울렸던 책들의 장정은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본격 미술이 아니라고 치부하기 쉬운 신문 잡지의 삽화들은 문학과 미술이 만나는 현장이었다. 당시 정현웅은 "틀을 깨고 인민 속으로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가장 새롭고, 가장 강력한 미술양식은 인쇄미술”이라고 외칠 정도였다.   역병만 아니었으면 장사진을 이루었을 이 전시회는 우리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강력히 전하고 있다. 하나는 후손들이여, 근대를 무시하지 말라는 무언의 꾸지람이다. 오늘날 세태는 우리 근대미술을 상징하는 ‘한국화 6대가’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존재조차 모른다. 근대가 없었으면 현대도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는 이상의 외침이다. 그 외침의 근저에 깔린 힘겨움을 생각하면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마냥 부끄러워진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1.04.15 00:54

  • [문화의 창] 옛 관아는 이렇게 생겼답니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국내 답사 중에는 별로 느끼지 못하다가도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크게 아쉬움이 생기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유럽의 도시들은 한결같이 오래된 옛 시청 청사를 중심으로 발전해 역사의 향기가 일어나고 있건만 우리나라 도시엔 조선시대 관아가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려 327 군현에 달하던 지방 도시에서 옛 관아라고는 몇몇 현청의 객사와 동헌 건물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제주, 나주, 김제, 홍산, 무장, 거제 등 여섯 고을 관아 터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고 토지 매입과 건물 복원을 시행해 가고 있다. 그러나 수도 한양에 있었던 그 많던 관아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광화문 앞에 육조(六曹)거리가 있었다는 말만 들었지 육조 건물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전통 사회에서 근대 도시로 이행하는 과정에 목조건물이 겪은 숙명이었고, 원흉은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하면서 모두 파괴하여 버린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카메라가 보급되기 이전이어서 사진으로 전하는 것도 없고 옛 문헌의 삽도만 있을 뿐이다.   그런 중 조선후기 문신인 하석(霞石) 한필교(韓弼敎,1807~1878년)가 자신이 평생 동안 근무했던 15곳의 관아를 전문화가에게 기록화로 그리게 하여 화첩으로 엮은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가 있어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다. ‘숙천제아도’란 ‘잠자고 지내며 근무한 여러 관아의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 화첩은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 옌칭(燕京)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근래에 책(2012년, 민속원)으로 발간되었고, 특별전(2015년, 리움 ‘한국 건축 예찬’)에 한차례 소개된 바 있다.   한필교의 ‘숙천제아도’에 실린 조선시대 호조 관아. 한필교는 1833년 진사에 합격한 뒤 70평생을 관료로 지냈는데 그는 34세 때인 1840년에 홀연히 자신이 근무한 관아들을 그림으로 남기겠다는 뜻을 세웠다.   “그림은 사물을 그리는 것이니 천지간의 오묘함을 전하지 못할 것이 없다…. 나는 헌종3년(1837)에 처음 벼슬길에 올랐는데 한가한 날 화가에게 명하여 내가 그동안 거쳐 왔던 관아들을 한 폭씩 그리게 했다. 이후 역임하는 관아마다 그림을 그리게 하여 화첩으로 꾸미고 그 관아가 있던 위치와 내가 맡았던 직책을 써넣었다.”   이리하여 이 화첩에는 한양에 있는 관아 9곳, 지방 관아 6곳이 그려져 있다. 화첩에 실린 15폭의 그림은 모두가 뛰어난 기량과 조형적 성실성으로 한눈에 그 관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다. 화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화공(畵工)이라고만 하여 아쉽기만 한데 그중에는 같은 화가가 그린 듯 비슷한 화풍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도 기록화에도 능했던 도화서 화원들의 솜씨일 것으로 보인다.   ‘숙천제아도’에 실려 있는 호조, 공조, 선혜청 등의 건물을 보면 관아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사람이 생활하는 인간적인 분위기가 따뜻하게 다가온다. 각 관아는 책임자인 당상관(정3품 이상)이 근무하는 당상대청(堂上大廳)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건물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마당이 여럿으로 분할되어 있고 서비스 공간이 풍부하다.   특히 관아마다 반듯이 네모난 연지에 정자가 곁들여 있어 생활의 여백이 느껴진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공자님 모신 사당은 없는데 오히려 토속신을 모신 신당(神堂)이 빠짐없이 들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어디를 보아도 오늘날의 ‘공무원 표’ 건물과는 전혀 다르고 주택과는 또 다른 한옥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중 말을 관장하는 부서인 사복시는 마구간이 있는 특이한 공간배치와 함께 말을 조련하는 모습까지 그려 있어 재미있게 보았다.   이를 보고 있자면 “아! 옛 관아가 이렇게 생겼구나!”라는 감동과 감회가 절로 일어난다. 이렇게 옛 관아의 모습을 생생한 기록화로 남겨준 한필교가 고맙고 존경스럽기만 한데 그는 이미 후대에 이 그림이 지닐 가치를 예견한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화첩은 붓과 먹으로 희롱한 것에 지나지 않아 특별한 용도로 쓰기에는 넉넉지 못하지만 대문과 담장, 건물 배치의 크고 밝은 모습, 관아 건물의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이 한 폭의 그림 속에 다 그려져 있다. 그곳에 가 보지 않고도 어느 관청, 어느 관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으니 그림이 아니라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후세인으로 하여금 옛 제도가 어떠한지 고찰하기에는 넉넉할 것이다. 아! 그림이란 참으로 (사회적) 기능이 적지 않구나…. 애오라지 후세에 전하는 보물이 될 만하지 않은가.”   본래 미술사에서 건축은 궁궐, 사찰, 관아, 학교, 주택 등으로 이어지건만 조선시대 건축사에서 관아 건축은 사실상 공백으로 되어 왔다. 그래서 지금 광화문 광장, 서울 정부종합청사 건너편에서 진행 중인 3정승이 근무하던 의정부(議政府) 관아 복원에 새삼 주목하게 된다. 이를 위한 발굴조사는 이미 끝나 건물의 위치들이 모두 확인되었다는데 모름지기 ‘숙천제아도’에 나오는 그런 품격과 한옥의 아름다움이 있는 관아의 복원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1.02.18 00:47

  • [문화의 창] 문화재 쇄국이 국격을 떨어트리고 있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런던의 영국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유럽과 미국의 대형 박물관은 제국주의 시대 산물로 항시 약탈 문화재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결국은 세계 각국의 예술과 전통을 보여주는 인류 문화유산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문화예술의 나라답게 서양미술의 루브르 박물관 이외에 근세 미술의 오르세 박물관, 동양 미술의 기메박물관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독일도 베를린 시내에 페르가몬 박물관, 신·구 박물관 등이 ‘박물관 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맞은편에 동독 시절 공산당 당사로 쓰인 옛 프로이센 궁궐을 개조한 ‘베를린 왕궁, 훔볼트 포룸(Forum)’이 바야흐로 개관을 앞두고 있다.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는 프로이센 출신의 지리학자로 베토벤, 괴테, 칸트 등과 함께 독일이 자랑하는 문화 위인이며 포룸은 복합문화공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독일 통일 후 연방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해온 이 포룸은 약 3만㎡에 베를린 민속학박물관, 동아시아 박물관을 흡수하여 방대한 비(非) 유럽문화권 전시공간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3층 동아시아관의 한국실은 중국실, 일본실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60㎡(약 20평)로 그것도 중국실 끝자락에 곁다리처럼 붙어 있다고 한다.   이 날벼락 같은 소식에 베를린 자유대학의 이은정 교수 등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겐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다. 박물관이란 건물과 유물로 구성되는데 이들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유물은 약 160점밖에 없고 그것도 전시유물로는 질이 낮아 현대미술 프로젝트로 꾸밀 참이라고 한다. 이런 낭패가 있는가.   개관을 기다리고 있는 베를린 왕궁, 훔볼트 포룸(Forum). [사진 훔볼트 포룸 홈페이지] 그러나 이런 문화적 대참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35년 전, 난생 처음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갔을 때 나는 방대한 규모의 중국실, 일본실에 비해 한국 유물은 복도에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도 억울하고 서러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여기에 한국실이 생긴 것은 1998년에 국제교류재단이 삼성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167㎡의 공간을 확보한 뒤였다.   영국박물관도 한국 유물이 복도에 진열되어 있었다. 한빛문화재단의 고 한광호 회장은 민족적 자존심에서 100만 파운드(당시 약 16억 원)를 기부하며 한국실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것이 종잣돈이 되어 국제교류재단이 약 300㎡ 규모의 한국관을 만든 것은 2000년의 일이다. 기메(동양)박물관은 2001년에 대대적으로 리노베이션 하면서 역시 우리 정부의 지원과 이우환 화백이 기증한 조선시대 유물들로 한국실을 꾸며놓았다.   이렇게 21세기 문턱에서 뉴욕, 런던, 파리의 주요 박물관에 한국실이 생겼지만 사실 이는 울며 겨자 먹기의 궁여지책이었다. 왜 우리가 유물과 돈을 갖다 바치며 한국실을 꾸며달라고 애걸복걸해야 한단 말인가. 그네들 스스로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한국의 위상에 걸맞은 대접을 해야 마땅한 것 아닌가. 그러나 유럽과 미국 박물관의 관계자들은 한국의 문화재 쇄국정책이 자초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20년 전, 영국박물관의 로버트 앤더슨 관장과 큐레이터 제인 포탈이 한국에 와서 조선시대 목기와 도자기를 구입하였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문화재보호법상 이들은 가져갈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목과 예산으로 한국유물을 구할 수 없다며 우리를 ‘멍청하다’고 비웃었다. 나는 문화재청장 시절 이 법의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국회는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을 넣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수속까지 밟으며 유물을 구해갈 외국 박물관은 없었다.   우리는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보면 죄다 환수해야 한다는 ‘애국심’을 발동한다. 그러나 식민지시대 피해 의식으로 두른 보호벽이 이제 와서는 세계화를 막는 장벽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문화재는 국내외에서 비참할 정도로 저평가되고 있다. 엊그제 열린 한 국내 옥션에선 1500년 된 가야토기가 30만원에 낙찰될 정도인데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는 몇 해 전부터 한국 유물은 구하기 힘들어 폐쇄하고 일본미술 경매 때 ‘부록’처럼 시행하고 있다.   약탈문화재는 끝까지 찾아와야 하고 중요문화재는 절대로 나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인사동 고미술상 진열장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일반적인 유물은 해외로 나아가는 길을 과감히 열어주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진정 문화재를 사랑하는 길이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값이 싸도 유물을 사지 못한다. 영국 사람이 가야토기를 사 가면 영국 토기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사람도 가야토기를 사랑할 정도로 우리 문화재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것이다. 본래 한 나라의 문화재는 이역 땅에서 그 나라의 문화 외교사절 역할을 하는 법이다. 이제 우리는 문화재가 해외로 나아가 한류의 나라, 대한민국이 역사와 전통에서도 문화강국임을 당당히 증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0.12.24 00:32

  • [문화의 창] 애호가에게 보내는 감사와 경의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어쩌다 강연을 가서 연사로 소개를 받고 있자면 저절로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생각해 보게 된다. 대개 명지대 석좌교수로 문화재청장을 지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펴낸 작가임을 덧붙이곤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나는 미술사가 내지 미술평론가이다. 대학에 소속된 학과는 미술사학과이고, 신춘문예를 통해 미술평론가로 등단하였고, 국보순례를 비롯한 저술의 내용은 미술이며, 무엇보다도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이 아니라 미술인이라는 직업의식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미술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화가, 조각가, 디자이너 등 예술가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미술이란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과 관객 사이에 미술관, 화랑, 옥션, 화방과 표구, 미술 저널리즘 등이 작동하면서 미술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 중 미술인이 아니면서 미술문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분이 따로 있으니 다름 아닌 미술애호가이다. 전시회를 찾아와 작품을 감상해 주는 관객이 있어야 미술계는 활기를 띠게 되고 미술작품을 구매하는 애호가가 있어야 미술시장이 형성되어 그것이 작가의 생활과 창작활동의 지원으로 되고, 결국은 우리 시대 미술문화의 창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미술애호가도 초보에서 고수에 이르기까지 층이 다양하지만 ‘애호가의 생리’라는 것이 있다. 애호가의 첫 단계는 전시장을 찾아가는 관객을 넘어 작품을 한 점 구입하면서 시작된다. 그것은 음악을 좋아하여 음반을 사고 연주회를 찾아가는 것, 문학을 좋아하여 소설과 시집을 사서 읽는 것과 똑같은 문화생활의 영위이다. 그것이 10년, 20년 지나 애장품이 쌓이게 되면 애호가는 수장가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식에서 손창근(오른쪽)·김연순 부부. 애호가의 기본은 문자 그대로 사랑이다. 미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돈 내고 미술품을 사지 않는다. 정조시대의 대(大) 수장가인 김광국이 남긴 ‘석농화원(石農畵苑)’이라는 기념비적 회화 컬렉션에 대하여 유한준이라는 문인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진정으로 알게 되면 작품을 모으게 된다”며 사랑으로 시작하여 안목으로 집대성한 위업이라고 했다. 안목이 높아지고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 되면 보다 좋은 고가의 작품을 사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애호가의 생리는 컬렉터의 생리로 바뀐다. 관심 있는 장르에 집중하면서 수장품에 체계를 세우는 단계로 들어간다. 컬렉터들은 이를 ‘구색 맞추기’라고 한다. 취미에 변화가 생겨 유화에서 한국화로, 현대미술에서 고미술로 옮겨가기도 한다. 그런데 미술품은 고가품이기 때문에 아무리 재력가라고 해도 마냥 구입만하여 쌓아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또 공간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장가들은 자신이 주력하고자 하는 장르의 구색 맞추기를 위하여 다른 미술품을 팔게 된다. 때론 좋은 작품 하나를 사기 위하여 여러 점을 팔기도 한다.   이렇게 컬렉션의 체계를 위하여 작품을 교환하는 것은 수장가의 생리일 뿐 상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때 어떤 작품은 값이 높아지고 어떤 작품은 폭락되어 있기도 한다. 박수근, 김환기, 이우환의 예술이 재평가되어 몇 배 오른 것을 보면서 미술품을 마치 투기의 대상인양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큰 오해다. 값이 그렇게 오를 것을 예측하고 구입한 ‘귀재’는 없다. 좋아서 샀는데 올랐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반대로 당시 최고의 인기 작가였던 청전, 소정 등 한국화6대가의 작품은 20년 전의 구입가도 받기 힘들다. 그러나 진정한 애호가는 언젠가 다시 재평가되는 날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기다린다. 값이 올랐건 내렸건 수장가는 이런 작품 교환을 통하여 컬렉션의 질을 높이며 체계화한다.   컬렉터들은 정성들여 모은 수장품이 흩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수장품 한 점, 한 점이 다 자식 같다고 한다. 그래서 컬렉션의 이상은 미술관 건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세기에 몇몇을 낳을 뿐이고 대개는 둘 중 하나의 길을 걷는다. 하나는 자손에게 넘겨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공립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컬렉터의 자유이지만 자손에게 넘겨주려면 차라리 팔아서 돈으로 주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애정이 없는 유물은 예술품이 아니라 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은 컬렉터의 보람이자 영광으로 남는다.   우리나라 자수의 아름다움에 주목하여 열정적으로 수집한 고 허동화 선생의 ‘사전(絲田) 컬렉션’은 내년 봄 안국동 풍문여고 자리에 개관하는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되었고, 손세기·손창근 부자로 이어져온 전설적인 고서화컬렉션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마지막으로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어 내달 11월에 특별전이 열린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한 일인가. 나는 미술인의 한 사람으로 이 애호가분들에게 깊은 감사와 함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래서 예술사회학에는 다음과 같은 명제가 있다. 한 시대의 미술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예술가(생산자)이지만 이를 발전시키는 것은 애호가(소비자)이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0.10.29 00:21

  • [문화의 창]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생각한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지난 7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한 ‘새 보물 납시었네’는 최근 3년간(2017~19년) 국보,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특별전으로 그야말로 문화유산 축제의 장이건만 개막 3주 뒤부터는 폐쇄되어 이달 말(27일)이 지나면 끝난다. 너무도 아쉬워 제발 마지막 일주일만이라도 열 수 있기를 손 모아 기도한다.   이 전시회에는 21세기에 극적으로 발굴된 백제 사리함 두 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국보 제327호)와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보물 제1991호)가 10년간의 보존처리를 마치고 국보·보물 자격으로 출품되었다. 그림과 글씨로는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  22건이 지정되어 겸재 정선의 ‘해악(금강산) 전신첩’, 단원 김홍도의 ‘고사인물도’,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추사 김정희의 ‘대팽고회(성대한 요리와 우아한 모임)’ 같은 천하의 명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특히 현재 심사정의 길이 9미터에 달하는 대작 ‘촉잔도’를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와 진열장을 마주하고 함께 전시하면서, 46억 화소로 스캔한 ‘강산무진도’의 디테일을 사방 벽면에 이미지월로 보여준 것은 실로 장관이었다.   그중 내가 가장 감동받은 것은 각종 『조선왕조실록』이 『태백산사고본』만 제외하고 총동원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일찍이 1973년에 『정족산사고본』(2,077책)이 국보 제151-1호로 지정된 바 있는데, 새로 『오대산사고본』 『적상산사고본』 『봉모당본』, 그리고 『낙질 및 산엽본』(국보 제151-6호)까지 지정되어 그 험난했던 망실과 이동과 보존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 효종실록, 종이에 활자 인쇄, 51.2x32.9㎝,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조실록』은 태종 때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세종대왕은 역시 선견지명이 있어 만약을 위해 4부씩 만들게 하여 경복궁 춘추관(오늘날 국사편찬위원회),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분산 보관시켰다. 이것이 4대 사고의 시작이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서울, 충주, 성주의 실록이 모두 불타버리고 6월에는 하나 남은 전주 사고도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다.   경기전의 참봉 오희길(吳希吉)은 내장산으로 옮길 생각을 했으나 이를 모두 담으려면 60여 궤짝에 말 20여 필이 필요로 하였다. 전쟁에 정신없는 관리들은 땅에 묻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이에 오참봉은 태인에 살고 있는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에게 도움을 청하자 이들은 집안사람과 하인 등 30여 명을 인솔하고 와서 실록을 내장산 산속 암자로 피란시켰다. 이후 두 사람은 물경 1년 하고도 닷새 동안 이듬 해(1593년) 7월 조정에서 충청도 아산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질 때까지 내장산에 기거하며 실록을 지켰다. 그때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였다. 벼슬도 없는 무명의 선비가 사재를 털어가며 끝내 실록을 지켜낸 것이다. 훗날 이들에게는 별제(6품) 벼슬이 내려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의병(義兵) 못지않은 의인(義人)이자 애국자이고 문화유산 지킴이의 상징이다.   조선 효종실록, 종이에 활자 인쇄, 51.2x32.9㎝, 국립고궁박물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실록은 새로 4부를 복간하여 춘추관에 1부, 강화 마니산(후에 정족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후에 적상산)에 4대 사고를 지어 보관하였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와 6·25동란 때 실록은 또 다시 망실의 아픔을 겪게 된다. 『오대산사고본』은 일제가 동경대학 도서관으로 가져갔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57책만 겨우 건졌다. 그런데 훗날 도서관에서 대출해갔다가 반납하지 않았던 17책이 발견되었고 또 1책이 민간에서 확인되어 총 75책이 되었다. 이 『오대산사고본』은 2006년에 환수되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적상산사고본』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해방 직후 도난 사건으로 낙권이 많이 생긴 상태에서 6·25때 북한군이 가져가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춘추관 본은 전란 중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그 일부 남아 있는 것이 『낙질 및 산엽본』이다. 오직 『정족산사고본』은 규장각에, 『태백산사고본』은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게 관민이 합심하여 지켜온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오늘날엔 누구나 인터넷으로 원문과 한글 번역을 볼 수 있는데 이는 2006년, 국사편찬위원회 이만열 위원장이 로또 기금 지원을 받아내어 문화재청과 함께 개인이 갖고 있던 판권을 사서 무료 서비스를 하게 한 것이다.   인터넷 개통식 날 사회자가 실록은 왕조의 기록이자 조선시대 생활만사가 다 들어 있다고 하자 짓궂은 한 청중이 ‘개고기’가 나오냐고 물었다. 이에 검색해 보니 기사가 모두 8개 떴다. 그중 『중종실록』 29년(1534) 9월 3일자에는 권력자인 김안로는 개고기를 좋아해서 그에게 아부하는 자는 맛있는 개고기를 상납했다며 나라 풍속에 여름에 개고기를 삶아서 먹는 것은 가장(家獐)이라고 하고 개고기 구이는 견적(犬炙)이라고 한다는 주석까지 달렸다. 『조선왕조실록』은 실로 국보 중의 국보이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0.09.03 00:39

  • [문화의 창] 서예가 이렇게 소중한 장르이던가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지속되면서 거의 모든 분야가 말할 수 없는 손실과 상처를 입고 있다. 미술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처럼 공들인 기획전이 일반에게 제대로 공개되지 못한 채 막을 내려야 하는 허망한 일이 계속되고 있다. 본래 미술관의 전시 스케줄은 최소 1년 전에 확정된 것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도, 연기할 수도 없다.   이런 상태에서 지난 3월 30일에 온라인으로 개막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한국 근현대 서예 특별전인 〈미술관에 서(書)〉라는 전시회가 5월 3주간의 공개 이후 휴관에 들어가 이달 말에 끝나고 만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근현대 서예가의 대표작 300여점과 관련 자료 70여점으로 꾸며진 이 전시회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서예의 어제와 오늘을 본격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지필묵의 시대가 끝나고 펜글씨 시대도 지나고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아이티 시대로 바뀌면서 깊은 침체에 빠져 있지만 서예라는 장르가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다운 예술세계인가를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이 전시회의 제1부는 ‘서예를 그리다, 그림을 쓰다’라는 프롤로그로 서화가 하나로 어우러진 전통을 상기시켜 준다. 근원 김용준, 수화 김환기의 작품에서는 그림과 글씨가 행복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고암 이응노, 남관은 문자추상에로 나아갔으며, 이우환의 회화와 김종영의 조각에서는 서예의 필획이 창작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서예가 근현대 미술가에게 창작의 중요한 원천이자 자양분이었음을 여실히 말해준다.   , 1978년, 종이에 먹, 84.0x64.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src="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7/09/9f58a51f-5e2c-4d0b-b1f2-b13d73cf9eae.jpg"/> 서희환, , 1978년, 종이에 먹, 84.0x64.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제2부는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글씨가 그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일제강점기부터 활약한 한국 근현대 서예 제1세대들의 작품으로 꾸며졌다. 모던한 형태미를 추구한 소전 손재형, 필획의 조형성을 굳게 견지한 일중 김충현과 여초 김응현 형제, 획에서 칼맛을 느끼게 하는 검여 유희강 등의 개성적인 작품들에서는 서예의 멋과 힘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특히 여초 김응현의 광개토대왕비의 웅혼한 서체와 금강경 5천5백 자의 흐트러짐 없는 대작은 그 공력에 압도되고, 오른손이 마비되자 왼손으로 극복한 검여 유희강의 좌수서는 보는 이의 심금을 울려준다. 그리고 제주도의 소암 현중화는 취필로, 전주의 강암 송성용은 현대적 문기로 지방 서예계의 존재감을 확고히 드러내주고 있다.   아울러 한글 서예의 다양한 모습도 보여준다. 소전 손재형의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일중 김충현의 ‘유관순 기념비’. 여초 김응현의 ‘세종어제훈민정음’ 등은 한글서예의 고전으로 삼을 만한 것이며, 갈물 이철경의 궁체와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는 평보 서희환의 파격적인 한글예서체, 원곡 김기승의 성경글씨, 쇠귀 신영복의 ‘어깨동무체’ 등은 한글 서예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디스플레이도 대단히 현대적이어서 한문 서예는 검은 톤, 한글서예는 흰 톤으로 분리해 놓았다.   제3부는 ‘다시 서예: 현대 서예의 실험과 파격’이라는 주제로 1세대들에게 서예를 배운 제2세대의 개성 넘치는 작품세계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초정 권창륜, 하석 박원규 등 오늘날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원로 중진 서예가로 여기서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지만 대체로 ‘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전이된 현대서예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제4부 ‘디자인을 입다, 일상을 품다’는 21세기의 일상 속에 소비되는 서예의 ‘팝 아트’ 코너이다. 흔히 캘리그래피, 타이포그래피라 불리며 책 표지, 영화 포스터, TV프로그램의 제목, 술을 비롯한 상품 이름 디자인에 활용된 글씨는 서예가 우리 생활 속에 깊이 파고 들어있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서예는 결코 잊혀져가는 지난날의 장르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깊은 각성에 이르게 된다.   사실 서예는 서양에 대한 동양 문화의 진수이다. 지필묵을 매개로 한 같은 글씨이지만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 우리는 서예(書藝)라고 부르고 있는 데에서 한중일 문화의 보편성과 독자성이 간취된다. 우리는 모름지기 서예 문화를 중국, 일본의 그것과 보조를 맞추어가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2018년 국회에서는 ‘서예진흥법’이 통과된 바 있다. 서예계는 내심 이 전시회를 계기로 ‘서예진흥법’ 시행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중등학교에서 서예교육의 부활, 예술의전당 서예관의 위상 재정립, 국립서예박물관의 건립 등 당면과제가 도출되기를 희망했는데 이렇게 관람조차 막히고 만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그러나 코로나19 시대의 새로운 미술감상법이 나왔다. 지난 3월30일 유튜브를 통해 중개된 ‘온라인 오픈’에서는 전시 기획을 담당한 배원정 학예사가 4개 전시실 전체를 안내한 90분짜리 동영상이 소개되었는데 단기간에 무려 7만7천여 명이 접속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본 열람자들은 한결같이 ‘서예가 이렇게 소중한 장르이던가’라는 새로운 일깨움이 있었다고 했다. 물론 지금도 온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0.07.09 00:53

  • [문화의 창] 국립중앙박물관 3층 세계문화관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코로나19 사태는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 속의 방역을 강요하며 벌써 몇 달 째 갑갑하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 적어지면서 환경오염이 현격히 줄어들어 대기가 깨끗해지고, 베니스 항구에 물고기가 돌아오고, 인도에 홍학이 떼로 몰려와 춤추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인간이 좀 자제하며 살면 지구가 다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내 주위 사람들 근황을 보면 모든 약속이 취소되면서 갑자기 많은 시간을 얻게 되어 그동안 밀렸던 독서를 하고, 논문을 쓰고, 서랍을 정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고 한다. 나도 일 년은 걸려야 쓰던 답사기를 석 달 만에 탈고하면서 옛날 선비들이 귀양살이 시절에 글을 많이 쓴 이유를 알 만했다.   그런 중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 것은 우리의 방역 시스템과 그 와중에 총선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세계가 앞다투어 대한민국은 진짜 선진국이라고 칭송하는 것이다. 이건 ‘국뽕’같은 얘기가 아니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10위에 들어왔고, 국민소득도 3만 달러를 넘었다.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혁명은 국민들의 민주역량을 증명해주며 K팝을 비롯해 한류가 유럽 한복판에서 중앙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퍼져나간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 선진국 의식이 없는 이유에 대해 혹자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민족적 열등감의 잔재 때문이라고 하고, 혹자는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체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선진국임을 대한민국 사람들만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듣고 보면 선진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체감하기 힘든 것은 삼풍아파트 붕괴, 성수대교 사고, 세월호 침몰, 용산 참사 같은 후진국형 대형사고들이 잊을 만하면 일어나고, 자살률은 세계 최고이고 국민의 행복 만족도는 바닥을 기고 있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겉은 선진국이고 속은 후진국인 셈이다. 겸손이 아니라 실제다.   , 투르판(吐魯番) 아스타나(阿斯塔那)고분 출토, 마(麻)에 채색. 높이 189x79cm, 7세기.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src="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5/14/262237f9-7b68-4cf3-96f5-81b9bd331999.jpg"/> , 투르판(吐魯番) 아스타나(阿斯塔那)고분 출토, 마(麻)에 채색. 높이 189x79cm, 7세기.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화유산의 전문가 입장에서 구체적 예를 들어본다.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 굴지의  규모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움, 영국의 브리티시 뮤지움, 프랑스의 루브르, 러시아의 에르미타시 미술관에 이은 다섯째였는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중국이 천안문광장 앞 국가박물관을 우리보다 약간 넓게 증축해 여섯째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박물관이 여섯째 간다고 말하기 멋쩍은 것은 관람하고, 이용하는 박물관 문화가 아직도 후진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3층에는 ‘세계문화관’이 있다. 실크로드 유물을 중심으로 중국, 일본, 인도, 동남아시아, 이집트 유물까지 전시하고 있다. 그저 구색 맞추기로 꾸민 것이 아니다.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은 두 가지 분야에서 세계적 컬렉션임을 자랑한다.   하나는 신안 해저유물이다. 신안 앞 바다에 침몰한 원나라 무역선에서 인양한 유물은 약 3만 점이다. 그중 원나라 도자기만 2만 여 점이다. 이와 별도로 중국 고화폐가 800만 점, 무게로 약 25톤이 있는데 이는 화폐주조 기술이 없던 13세기 일본이 수입해 가던 유물이다.   또 하나는 둔황, 투루판, 누란 등 실크로드 오아시스 도시들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20세기 초 제국주의 탐험가들이 중앙아시아 유물을 도굴해 간 것은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영국의 오렐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독일의 르 코크, 스웨덴의 스벤 헤딘, 러시아의 올덴부르크, 미국의 랭든 워너, 그리고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중 오타니 탐험대가 실크로드에서 수집해온 낙타 145마리 분량의 약 5천 점 가운데 3분의 1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중 주요 유물들이 지금 3층 세계문화관에 전시되어 있다. 우리 손에 들어온 오타니 컬렉션은 당시 일본, 중국, 한국 세 곳으로 분산되어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소장됐던 1700여점을 그대로 인수받은 것이다.   그 행위의 도덕성과 유물 소유의 정당성은 나중 문제로 하고 유물의 가치만은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다. 특히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를 그린 7세기 ‘복희와 여와도’가 유명하다. 지금 투루판에는 ‘영원한 휴식’이라는 뜻의 아스타나 고분이 있는데 이 유적지 안마당에는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을 바탕으로 만든 상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이 유물을 본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지금 우리나라 박물관의 자랑과 동시에 그것을 향유하는 자세의 부끄러움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선진국의 각 도시 시민들은 크던 작던 자기 도시의 박물관을 일 년에 서너 번은 가게 된다. 또 각 박물관은 특별전, 강연회, 음악회 등 이른바 뮤지움 액티비티로 시민들이 철마다 찾아오게 한다. 그게 선진국의 박물관 문화다. 근데 이게 어디 박물관에 국한된 이야기이겠는가.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0.05.14 02:04

  • [문화의 창] 봉준호와 방시혁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코로나19로 나라가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된 이 시점에 문화의 창으로 세상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한가로워 미안한 마음 없지 않은데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온 세계가 난리인 것을 보면 역시 지구촌은 한 식구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직전,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하는 기쁨에 젖어 있었다. 이 엄청난 성취에는 아무리 박수를 보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방시혁의 BTS도 마찬가지였다. K팝의 세계적 반향은 실로 놀라운 뿐이다. 좋은 예가 있다. 요즘 우리나라 BBC 채널에서는 작년 여름에 방영한 여배우 조안나 럼니의 ‘실크로드 탐사’ 시리즈를 재방송하고 있다. 조안나의 실크로드 탐사는 베니스에서 출발, 지중해를 지나 이스탄불- 아나톨리아 반도- 조지아- 이란을 거쳐 키르키스탄의 이식쿨 호수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이식쿨호수에서 조안나는 여기가 중세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흑사병의 발생지라며 실크로드가 꼭 좋은 것만을 가져온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국경도시에 와서 천산산맥을 가리키며 저 산 너머가 중국인데 중국 정부로부터 촬영허가를 얻지 못해 탐사 프로그램을 마치게 됐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리고는 시내로 들어왔는데 한 무리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춤을 추자 조안나는 화풀이라도 하듯 멋진 스카프를 날리며 이들을 따라 신나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춤판이 끝나고 나서 젊은 아이들에게 이 춤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큰 목소리로 “K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류가 여기까지 흘러간 것이었다.   나는 우리 영화와 음악의 이러한 세계적 성취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말할 수 없는 자랑과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 생을 문화계에 몸담고 살아온 나로서는 낭패감 같은 게 없지 않음을 숨길 수 없다. 나는 이제까지 문화활동을 하면서 건방지게 말해서 ‘민족주의’의 기조 하에 사고하고 행동했다. 나의 세대에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를 갖고 자기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봉준호와 방시혁은 그런 것을 훌쩍 넘어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마틴 스콜세지가 말한 ‘가장 개인적(personal)인 것이 가장 창의적(creative)이다’라는 것을 예술 신조로 삼았다고 했다. 봉준호는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했을 뿐이고, 방시혁은 좋은 노래를 만들려고 했을 뿐이다. 자기가 좋다고 생각한 것을 자신있게 밀고 나갔고 그것이 성공한 것이다.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본인들은 의식한 일도 없겠지만 우리 세대는 자신의 전통과 자존심을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사조를 열심히 익히면서 서양의 신사조에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경험의 축적이 많은 장르의 체험이라는 자산이 되었다. 나는 BTS와 K팝 동영상을 보면서 공부해 보았다.  BTS 노래 중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정도만 그럴 듯했고 다른 곡은 끝까지 듣기도 힘들었으니 확실히 공부한 것이다.   그런 중 유럽의 한 음악평론가가 이렇게 분석한 게 있었다. K팝은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의 뛰어난 음식인 비빔밥 같은 음악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신선한 재료를 맛있는 소스를 넣고 비벼서 영양가도 있고 맛도 있단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K팝은 한 가지 장르가 아니라 EDM(Electronic Dance Music)을 바탕으로 해 팝, 힙합, 발라드, 리듬 앤 블루스 등 여러 요소가 잘 어울린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 대중음악에서 이런 장르의 복합은 서태지와 아이들 때 먼저 나타났는데 그때는 SNS가 발달하지 않아서 한국 내에만 머물었는데 2002월드컵 축구 때 붉은 악마들의 응원에서 보여준 떼창의 힘이 여기에 더하면서 BTS 같은 음악이 나온 것이라고 했다.   특히 BTS의 노래에는 퇴폐적이거나 감각적인 유흥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과 용기를 담고 있어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공통된 고통을 받고 있는 세계 젊은이들에게 큰 공감을 얻고 있는데 이 점은 비틀즈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내가 판단하건데 봉준호와 방시혁의 예술창작 행위에서 중요한 점은 ‘그냥’ 좋은 영화를 만들었고, ‘그냥’ 좋은 노래를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자신감을 얻기 위해 지난 50년간, 아니 1백년간 우리는 얼마나 고민하고 노력해 왔던가. 앞 시대의 민족주의는 그들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중요한 문화적 DNA로 그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봉준호와 방시혁의 예술적 성취의 바탕에는 이런 문화적 축적이 있었던 것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 우리가 우리 기준대로 방역체계를 갖고 밀고 나아가 이런 정도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또한 문화적 자신감이 아니면 행하기 힘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생각한 대로 행하는 것이 곧 세계적인 것으로 통할 수 있는 문화능력을 갖고 있다. 이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0.03.19 00:43

  • [문화의 창] 미술로 보는 근현대사의 명암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연말연시를 보내면서 미술계에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세 개의 대규모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0주년을 맞아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 등 세 전시장에서 열고 있는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전, 갤러리현대가 개관50주년을 앞두고 마련한 ‘한국근현대인물화: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전, 경기도미술관의 ‘시점(視點)·시점(時點)-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이다. 이 세 전시는 모두 방대한 규모일 뿐만 아니라 한결같이 주제를 미술과 사회, 미술과 인간, 미술과 시대로 삼고 있어 마치 그림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보는 듯한 감동이 있다.   우리 근대미술은 19세기말 개화 바람과 함께 시작되었으나 구체적으로는 1914년, 춘곡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면서 최초의 서양화가가 된 때를 본격적인 출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5년, 두 번째 유학생인 김관호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문부성이 주관하는 ‘문전’에 ‘해질 녁’을 출품해 특선을 수상하면서 서양화라는 신미술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관호, 해질녘, 1915년, 캔버스에 유채. [사진 도쿄예술대학 소장] 이때 동경에 있던 춘원 이광수는 ‘아! 특선, 특선이라! 특선이라면 미술계의 알성 급제다… 장하도다 우리 김군!’이라는 흥분에 가득 찬 관람기를 동경발 속보로 보냈다. 그런데 정작 신문은 대동강변에서 미역 감는 두 여인을 그린 이 작품을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게재하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고 했다. 그런 김관호의 환상적인 누드화가 지금 갤러리현대 전시장에 걸려 있다. 작품 곁에 진열된 당시 신문 기사 판넬을 보고 있자니 격세지감과 함께 미술과 시대의 괴리를 절감케 한다.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관에 전시된 우리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 앞에서 나는 또 다른 낭패감을 지울 수 없었다. 조형언어의 난해함을 넘어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으로 가득하다. ‘벌거벗은 여인’인 고로 게재치 못했다는 괴리감이 지금 나에게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AI, 5G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한 나 같은 아날로그 세대들을 무참하게 소외시켜 버린다. 확실히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되 항시 앞서 나간다는 점을 말해 주는 듯하다.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지만, 어쩔거나 시대감각의 낙오에서 나온 것임을. 그저 나의 인생이 녹아 있는 지난 시절 속에서 나의 서정을 발해야지….   그러나 내가 산 시절이라는 게 말처럼 간단치가 않다. 이번 세 특별전은 모두 1980년대 민중미술을 대대적으로 전시하고 있는데 이를 다루는 시각이 제각기 다르다. 경기도미술관은 처음부터 80년대 소집단미술운동의 ‘아카이브’ 전시회임을 표방하면서 폭압적인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저항하던 미술인들의 뜨거운 예술혼을 발굴, 집대성하고 있다. 이에 반해 갤러리현대는 민중미술 중 80년대의 인물화라는 관점에서 조형적으로 세련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전시장 내 작품뿐만 아니라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때 사용된 걸개그림까지 전시하면서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광장’ 미술을 복원하고 있다.   전시회에 혹독한 비판을 가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아직도 민중미술에 대한 기존의 거부감이라는 면이 없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이 세 전시장에서 보여주는 작품들 모두가 80년대 미술운동이 낳은 예술적 소산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세 특별전의 의의는 그 동안 제도권에서 소외됐던 민중미술이 비로소 우리 현대미술의 어엿한 시대 양식으로 받아들고 있다는 점에 있다. 반세기만의 제도권 입성이다. 이미 많은 외국의 현대미술사가들은 우리 민중미술을 30년대 멕시코의 벽화운동이나 중국 루쉰의 목판화 운동같은 제3세계의 한 사조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 80년대 민중미술을 70년대 단색조 추상미술과 함께 한국의 독특한 미술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서울·과천·안산으로 전시장을 둘러보려면 적지 않은 다리품을 팔아야 하지만 근대미술 초기부터 해방공간, 한국전쟁기, 산업화와 민주화의 현장, 그리고 4차산업시대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작품을 만나는 기쁨에 전시장 순례는 보람차다. 그중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작품 하나만 꼽으라면 근원 김용준이 1948년, 회갑을 맞이한 벽초 홍명희에게 큰 절을 올리는 근원 자신의 그림이다. 그 시절 세상은 날카롭게 대립했어도 원로를 원로답게 모시던 아름다운 세태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오늘날의 사회풍조를 생각하면 가슴이 더욱 뭉클해진다.   전시장을 돌면서 아쉬운 점은 관람객이 너무 적은 것이다. 반 고흐, 데이비드 호크니같은 서양 유명화가의 블록버스터 전시회에는 줄을 서면서 우리의 근현대사를 비춰주는 모처럼 만의 대규모 전시장이 한산하다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 좋은 전시회가 열릴 때 많은 관객이 찾아와야 더 좋은 전시회가 열린다.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공급자이지만 이를 발전시키는 것은 소비자이다. 세 전시 모두 내달 초까지 열린다. 설 연휴에 많은 관객들이 찾아갔으면 좋겠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20.01.23 0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