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성희
필진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일보 문화부장
중앙일보 미디어팀장
방송심의위 시청자불만처리위원
여성영화제 자문위원
저서 '파워 콘텐츠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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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컷칼럼] 아동이라는 사회적 약자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비극이었다. 서이초 교사가 아니었으면 세상에 알려지지도, 주목받지도 못했을 죽음이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의정부 호원초 이영승 교사. 애초 단순 추락사로 보고됐으나, 최근 경기도교육청 조사 결과 학부모의 악성 민원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정황이 드러났다. 부임 첫해인 2016년 수업 시간에 페트병을 자르다가 아이가 손등을 다친 게 악성 민원의 출발이었다. 교사의 입대 후에도 민원은 이어졌다. 학부모는 학교안전공제회로부터 200만원 치료비를 보상받았지만, 이 교사에게 한 달에 50만원씩 400만원을 받아냈다. 인터넷에는 학부모와 학생의 신상이 공개됐다. 이 교사의 부친은 학부모에 대한 형사 고소를 검토하며 “영승이의 첫 제자에게 사적 제재란 있을 수 없다. 법에 맡겨 달라”고 했지만, 분노한 대중의 항의가 학부모 직장까지 빗발쳤다. 이 교사에게 악성 민원을 했던 또 다른 학부모는 장례식장을 찾아와 정말 사망한 게 맞느냐며 확인했다고 하니, 끔찍한 일이다. ■ 「 교육 현실 무시한 ‘아동학대’ 낙인 보호받으면서 훈육받아야 할 아동 성역화한 절대약자 프레임은 문제 」 드디어 교권 보호 4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초·중등교육법 등에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는 아동학대 범죄로 보지 않는다는 예외 조항을 뒀다. 교사들의 목숨과 맞바꾼 결과다. 이달 초 4년간의 악성 민원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한 대전의 40대 여교사는 친구 얼굴을 때린 학생을 교장실에 보냈다가 아동학대로 고소당했는데, 아동권리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이 정서적 학대라고 판단·자문한 것이 근거가 됐다. 교육적 특수성을 무시한 기계적 자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교사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아동학대처벌법과 아동복지법 개정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하는 이유다. 교육평론가 이범씨는 지금의 교권 부재 상황에 보수·진보 모두의 직무유기를 질타하면서 상대적으로 인권 감수성이 높다는 진보가 어쩌다 교권을 외면하게 됐는지 흥미로운 칼럼을 썼다. 상당수 진보 교육감들이 교사 출신이고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며 학생 인권에는 관심이 많지만, 교육노동자인 교사의 권리에는 왜 별 관심이 없었는지 분석했다. 이씨는 “약자 옹호는 진보의 정체성”이고 “아동은 대표적 약자”인데, 정치적 올바름을 중시하는 “한국 진보의 패러다임에서 약자란 (각기 다른 구체적 개인들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집단(적 존재)”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아동이 특정한 경우에 폭력 행사의 주체이거나 상황의 지배자일 수 있음에 애써 눈감은 것”이라고 썼다. 교육 현장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고, 약자인 아동도 잘못할 수 있는데 강력한 ‘아동=약자’ 프레임이 현실을 왜곡했다는 얘기다. 실제 교육적 상황의 복잡한 맥락은 제거한 채 ‘아동학대범’ 낙인을 남발한 배경이다. 그런데 이씨에 따르면, 이런 ‘집단적 약자성’은 최근 세계적으로 흔들리는 추세다. 지난 6월 미국에서, 1960년대 소수인종의 대학입학에 혜택을 주기 위해 제정했던 ‘소수자 우대법(affirmative action)’이 위헌 결정을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제는 저소득층 백인 학생보다 부유한 흑인 학생을 소수자로 우대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흑인은 하나의 집단으로 여전히 약자인가 하는 의문이 일고 있다(백인이라고 모두 부자가 아니듯 흑인이라고 모두 가난하지도 않다. 개인차가 있을 뿐이다). 결과는 이른바 ‘PC(정치적 올바름)주의’의 균열이다. 도그마가 돼버린 ‘PC 과잉’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보수·진보가 한목소리로 ‘교권 회복’ ‘교권 수호’를 외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성역화된 ‘아동=절대 약자’ 프레임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PC 흐름이 거셌던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변화다. 어쨌든 아동은 철저히 보호받아야 할 약자이자 동시에 훈육의 대상이고, 교사가 절대적 권력자로 군림하던 시대도 끝났다. 교권을 보장받는 교사로부터 제대로 교육받는 게 아동 인권에도 좋은 일이고 말이다. 글=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윤지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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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아동이라는 사회적 약자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비극이었다. 서이초 교사가 아니었으면 세상에 알려지지도, 주목받지도 못했을 죽음이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의정부 호원초 이영승 교사. 애초 단순 추락사로 보고됐으나, 최근 경기도교육청 조사 결과 학부모의 악성 민원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정황이 드러났다. 부임 첫해인 2016년 수업 시간에 페트병을 자르다가 아이가 손등을 다친 게 악성 민원의 출발이었다. 교사의 입대 후에도 민원은 이어졌다. 학부모는 학교안전공제회로부터 200만원 치료비를 보상받았지만, 이 교사에게 한 달에 50만원씩 400만원을 받아냈다. 인터넷에는 학부모와 학생의 신상이 공개됐다. 이 교사의 부친은 학부모에 대한 형사 고소를 검토하며 “영승이의 첫 제자에게 사적 제재란 있을 수 없다. 법에 맡겨 달라”고 했지만, 분노한 대중의 항의가 학부모 직장까지 빗발쳤다. 이 교사에게 악성 민원을 했던 또 다른 학부모는 장례식장을 찾아와 정말 사망한 게 맞느냐며 확인했다고 하니, 끔찍한 일이다. ■ 「 교육 현실 무시한 ‘아동학대’ 낙인 보호받으면서 훈육받아야 할 아동 성역화한 절대약자 프레임은 문제 」 드디어 교권 보호 4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초·중등교육법 등에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는 아동학대 범죄로 보지 않는다는 예외 조항을 뒀다. 교사들의 목숨과 맞바꾼 결과다. 이달 초 4년간의 악성 민원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한 대전의 40대 여교사는 친구 얼굴을 때린 학생을 교장실에 보냈다가 아동학대로 고소당했는데, 아동권리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이 정서적 학대라고 판단·자문한 것이 근거가 됐다. 교육적 특수성을 무시한 기계적 자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교사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아동학대처벌법과 아동복지법 개정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하는 이유다. 교육평론가 이범씨는 지금의 교권 부재 상황에 보수·진보 모두의 직무유기를 질타하면서 상대적으로 인권 감수성이 높다는 진보가 어쩌다 교권을 외면하게 됐는지 흥미로운 칼럼을 썼다. 상당수 진보 교육감들이 교사 출신이고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며 학생 인권에는 관심이 많지만, 교육노동자인 교사의 권리에는 왜 별 관심이 없었는지 분석했다. 이씨는 “약자 옹호는 진보의 정체성”이고 “아동은 대표적 약자”인데, 정치적 올바름을 중시하는 “한국 진보의 패러다임에서 약자란 (각기 다른 구체적 개인들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집단(적 존재)”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아동이 특정한 경우에 폭력 행사의 주체이거나 상황의 지배자일 수 있음에 애써 눈감은 것”이라고 썼다. 교육 현장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고, 약자인 아동도 잘못할 수 있는데 강력한 ‘아동=약자’ 프레임이 현실을 왜곡했다는 얘기다. 실제 교육적 상황의 복잡한 맥락은 제거한 채 ‘아동학대범’ 낙인을 남발한 배경이다. 그런데 이씨에 따르면, 이런 ‘집단적 약자성’은 최근 세계적으로 흔들리는 추세다. 지난 6월 미국에서, 1960년대 소수인종의 대학입학에 혜택을 주기 위해 제정했던 ‘소수자 우대법(affirmative action)’이 위헌 결정을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제는 저소득층 백인 학생보다 부유한 흑인 학생을 소수자로 우대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흑인은 하나의 집단으로 여전히 약자인가 하는 의문이 일고 있다(백인이라고 모두 부자가 아니듯 흑인이라고 모두 가난하지도 않다. 개인차가 있을 뿐이다). 결과는 이른바 ‘PC(정치적 올바름)주의’의 균열이다. 도그마가 돼버린 ‘PC 과잉’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보수·진보가 한목소리로 ‘교권 회복’ ‘교권 수호’를 외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성역화된 ‘아동=절대 약자’ 프레임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PC 흐름이 거셌던 우리 사회에 의미심장한 변화다. 어쨌든 아동은 철저히 보호받아야 할 약자이자 동시에 훈육의 대상이고, 교사가 절대적 권력자로 군림하던 시대도 끝났다. 교권을 보장받는 교사로부터 제대로 교육받는 게 아동 인권에도 좋은 일이고 말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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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우리들은 교육을 지킨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언제야 이 비극이 멈출까. 2학기 들어 언론에 알려진 것만 9명의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대 서울 서이초 새내기 여교사로 시작해 정년을 1년 앞둔 60대 체육 교사, 대전의 24년 차 40대 여교사까지 나이, 성별,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유치원 교사나 특수교사에 대한 학부모 갑질 사례도 속속 알려졌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매년 20여 명의 공립학교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정당한 훈육이 아동학대로 내몰리는 살얼음판 같은 현실 속에 그간 우리가 몰랐던 너무도 많은 죽음이 있었다. 그저 교사라면 안정적인 직업 정도로만 여겼던 우리 모두의 선입견이 부끄럽고 죄스럽다. 사망한 서이초 교사의 49재이자 '공교육 멈춤의 날'인 지난 4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추모집회에서 교사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24년 차 대전 여교사는 무려 4년간 악성 민원에 시달렸다. 팔로 친구 목을 조르는 아이를 제지했다는 등의 이유로 아동학대로 고소당했고,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가 나왔지만 악성 민원은 계속됐다. 학부모가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민사소송에도 시달려야 했다. 서이초 교사 추모 집회에 나가 ‘뭔가 달라질 것’이라 희망을 걸었던 교사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23 교사 직무 관련 마음 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심한 우울증을 겪는 교사가 일반 성인의 4배였다.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도 최대 5.3배 높았다. ■ 「 잇따른 교사들의 극단적 선택 교권 회복 대책 마련과 함께 교육 자체의 위기도 성찰해야 」 정부는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다. 교육부는 악성 민원에서 교사를 보호하는 고시안(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지난 1일부터 시행 중인데 실효성 문제가 있다. 여야 없이 법적 정비를 약속했던 정치권은 지난 7일 ‘교권 회복 4법’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교권 침해 행위로 제재받은 기록을 학생생활기록부에 남기는 문제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교사들의 목숨 건 사투가 이어지는 만큼 실효성 있으면서도 빠른 대책이 필요하다. 지금 논의는 ‘교권 회복’에 맞춰져 있지만, 사실 사안의 핵심은 그를 넘어선다. 교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날 “공교육이 멈췄다”는 게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다. 요즘 학부모들은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니 교사에게 거리낌 없이 ‘소비자 주권’을 행사한다지만, 똑같이 돈을 내면서도 학원 교사들에 대한 태도는 다르다. 어차피 입시전쟁이니 공부는 사교육으로 해결하고 학교는 친구나 사귀는 곳이라 말하는 학부모들도 있다. 학원에서 면학 분위기를 흐리거나 딴짓하면 아이를 잡아달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결국 입시경쟁, 성적 만능주의로 인한 공교육의 총체적 붕괴가 낳은 참사다. 그것도 사교육 의존도가 높아져서 공교육이 무력해졌다는 차원을 넘어, 입시와 성적이 모든 게 돼버린 교육 자체의 위기다. 그저 시험을 잘 보는 게 아니라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인생에 불가피한 좌절과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지 삶의 기술과 태도, 시민성을 가르치는 교육의 핵심은 뒤로한 채 오직 ‘내 아이 기죽이지 말라’는 부모들의 이기적인 아우성만 가득한 현실이다. 지난 4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교사들의 외침 중에 “우리들은 교육을 지킨다” “우리들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구호가 가슴에 오래 남았다. 지금 교사들이 지키려는 건 단순히 교권만이 아니다. 교육이다. 우리 사회가 함께 바로 세워야 하는 것도 교육이다. 지금은 자기 자녀가 아동학대를 당했다며 교사를 신고하지만 그렇게 제대로 훈육받지 않는 아이들은 조금만 자라면 부모도 공격한다. 최근 한 중등교사는 온라인에 “교육이나 훈육이 불가한 초등학교에서 6년을 보내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진짜 헬파티가 열린다. 이제는 부모가 아이를 이길 수 없고, 학교에서는 당연히 재량으로 지도할 수 없다. 이들은 사회인으로서 조직 생활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세대로 자란다”며 “공교육 정상화에 학부모 역할이 정말 크다”는 글을 올렸다. 툭하면 아동학대로 교사를 신고하지만 지난해 아동학대 가해자의 80%가 부모였다. 학대 장소도 81%가 집이었다(복지부). 반면에 지난해 교사를 대상으로 한 아동학대 신고 중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례는 1.5%였다(전교조).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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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한 시사 프로그램의 오만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건 아마도 K팝의 대표 스캔들이자 방송 저널리즘의 대표 스캔들로 기억될 것 같다. 한 달 넘게 연예계를 넘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4인조 걸그룹 피프티피프티 사태의 불똥이 SBS ‘그것이 알고 싶다’로 튀었다. 소속사 어트랙트와 전속계약 해지 분쟁 중인 피프티피프티 사태를 다룬 ‘빌보드와 걸그룹-누가 날개를 꺾었나’(19일 방송) 편이 일방적으로 멤버들을 감싼 편파·부실방송이라는 논란에 휘말린 끝에 방송 5일 만에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SBS 시청자 게시판 항의 글이 4000개가 넘고, 한국연예제작자협회와 한국매니지먼트연합도 항의 성명을 냈다. SBS는 물론이고 국내 TV 탐사 프로의 간판인 ‘그것이 알고 싶다’의 30년 명성에 크게 금이 갔다. 지난 19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빌보드와 걸그룹-누가 날개를 꺾었나’ 편에 등장한 그룹 피프티피프티. 해당 방송은 편파보도라는 시청자 항의가 빗발쳐 방송 5일 만에 사과문을 냈다. [사진 SBS 캡처] 중소 기획사 소속 신인으로 빌보드에서 약진한 피프티피프티는 ‘중소돌의 기적’으로 불렸다. 빌보드 바람이 분 지 석 달 만에 소속사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활동을 중단했지만, 노래 ‘큐피드’는 여전히 빌보드 ‘핫 100’ 20위권에 있다. 전형적으로 가수보다 노래가 유명한 경우다. 퍼포먼스 중심의 기존 K팝과 달라 K팝인 줄 모르고 즐기는 외국인도 많다. 통상 아이돌의 전속계약 분쟁은 기획사의 갑질과 불공정 노예계약으로 받아들여져 여론의 지지를 받는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외부 세력에 의한 템퍼링(계약 중인 아티스트 빼가기) 의혹이 불거졌고, 피프티 측이 내건 계약해지 사유가 통상적인 아이돌 문화ㆍ산업의 관행에 비추어 이례적이어서다. 아이돌의 실력뿐 아니라 인성과 선한 영향력이 중시되는 게 K팝이다. 사태가 기획사의 갑질이 아니라 정의와 신의의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 「 걸그룹 ‘피프티’ 보도 5일 만에 사과 ‘그것이 알고 싶다’ 30년 명성 먹칠 짜인 선악구도, K팝 이해부족 겹쳐 」 ‘그것이 알고 싶다’의 참전은 상황을 악화시켰다. 소송 중이라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데 이미 정황이 드러난 핵심적 쟁점과 의혹들은 제대로 다루지 않은 채 ‘어른들의 욕망이 아이들의 꿈을 꺾었다’는 감성적 결말로 달려갔다. 애초부터 선악이 명백한 구도였다. 크로스체크도 게을리했다. 소속사의 태도를 문제 삼은 멤버 부모와 내부 제보자의 주장은 금방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음원 수익 정산을 비전문가의 주먹구구식 추측에 맡기고, 진행자 김상중은 그래미상과 에미상을 헷갈리는 어처구니없는 멘트도 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2020년 음원 사재기 보도(’조작된 세계-음원 사재기인가, 바이럴 마케팅인가?') 때도 엉뚱한 아이돌을 사재기 그룹으로 지목했다가 논란이 되자 뒤늦게 사과했다. K팝 팬덤의 상식이라 할 ‘음원총공’에 대한 이해 부족의 결과였다. K팝 팬들 사이에서는 연예계나 아이돌 이슈를 잘 모르는 ‘그것이 알고 싶다’가 매번 계몽주의적 시선으로 참전해 사안을 호도한다는 불만이 많다. 한 K팝 팬은 “그간 명확하고 악질적인 불공정 계약 사례가 있었는데 그때 ‘그것이 알고 싶다’는 뭘 했는가”라고 물었다. 제작진이 사과문에 쓴 대로 이번 방송이 '지속 가능한 K팝을 위한 고민'이었다면 사안의 시시비비부터 가리는 게 정석이다. 취약한 중소 기획사는 물론이고 K팝의 덩치가 커지면서 향후 해외자본 등의 템퍼링이 시장을 교란할 가능성이 충분한데, 의혹이 사실인지 아닌지 애써 외면했다. 대신 ‘K팝 비즈니스는 도박판이고 아이돌은 피해자’라며 엔터 업계를 내려다보는 정형화된 시선, ‘피프티=배신돌’이라는 대중의 시각과 차별화하려는 욕망이 무리수를 낳았다. 이쯤 되면 정보를 모아 결론을 내는 게 아니라 결론을 내놓고 정보를 맞춘 격, 법적 분쟁 중인 일방에 유리한 근거를 만들어준 꼴, 시사 프로 제작진의 엔터 산업에 대한 편견의 산물이란 비판을 면키 어렵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후속 방송을 예고했지만, 냉소적 반응이 많다. 멤버들은 프로그램 말미에 나온, 제작진에게 쓴 손편지에서 “PD님 말씀대로 방송을 통해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알고 싶다’의 명예회복도 쉽지 않아 보인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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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분노사회의 끝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카페에 노트북이며 휴대폰이며 가방을 놓고 자리를 비워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는 안전한 나라였다. 외국인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 치안 하나는 확실하다는 것도 옛 얘기가 되는 걸까. 불과 며칠 새 백주대낮 도심 한복판에서 끔찍한 ‘묻지마 흉기 난동’이 두 차례 벌어졌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시민들이 무고한 생명을 잃었다. 해외뉴스에서나 보던 ‘외로운 늑대’들에 의한 무차별 테러다. 삶과 죽음을 가른 건 운 좋게 그때 거기에 없었다는 것뿐이다. 지난 3일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한 경기도 분당 서현역 일대를 경찰이 통제하고 있다. [사진 뉴스1] 인터넷에는 살인예고 글이 쏟아진다. 보름 남짓 315건이 올라와 119명이 검거, 12명이 구속됐다. 검거된 사람의 52%가 미성년자였다. “장난이었다”는 해명이 많지만 ‘여성 20명 살해 예고’를 한 20대 남성은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 5개월간 살해 협박 등 여성 혐오 글을 1700개 올리고 흉기를 구입해 검찰은 여성혐오범죄라고 못 박았다. 프로게이머 페이커, 기획사 하이브·SM도 협박받았다. 유행처럼 번져 진위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지만, 사회 곳곳에 쌓인 공격성과 분노가 일촉즉발이라는 건 분명하다. 분노가 만연하고, 집단화한 분노가 갈등과 범죄로 이어지는 ‘분노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 「 흉기난동, 흉포해지는 분노범죄 처벌강화에 구조적 해법도 함께 정신건강 사회안전망 마련해야 」 신림역 살인사건 피의자 조선(33)과 서현역 살인사건 피의자 최원종(22)은 둘 다 ‘고립된 외톨이’였다. 사회적 접촉이 없는 가운데 개인적 좌절과 사회적 불만을 불특정 다수에게 폭발시켰다.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조선은 또래 남성들을 마치 슈팅게임하듯 공격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으로 경찰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는 최원종은 조현병 치료를 스스로 중단해 상황이 악화됐다. 악랄한 범죄자일 뿐인 가해자들에게 서사를 만들어주지 말라는 목소리도 있지만(통상 이런 범죄자들은 자신이 미디어에 어떻게 묘사되는지 궁금해 한다), 그와 별개로 범행 동기를 밝히는 일은 중요하다. 정부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공중협박죄나 가석방 없는 종신형 신설, 사법입원제 도입 등을 검토 중이다. 특히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강제입원을 지금처럼 보호자가 아니라 사법기관이 결정하게 하는 ‘사법입원제’는 그간 도입 논의가 많았으나 현실적 인프라 부족과 환자 인권 문제 등으로 제동이 걸렸었다. 그러나 중증 정신질환자의 경우는 치료가 곧 인권이며, 이들의 치료·관리를 그저 가족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공공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선진국 중 보호의무자에 의한 (강제)입원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는 없다. 물론 사후 처벌 강화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본질은 분노범죄의 사회구조적 배경일 것이다. 과도한 경쟁과 좌절, 불평등과 양극화, 실업 등 경제난, 상대적 열패감을 안기는 SNS, 혐오를 무한증식시키는 인터넷 문화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분노의 심리적 메커니즘도 중요하다. 2000년 호주 연구팀에 의하면 분노 촉발 상황 1위는 ‘부당하게 대우받는 경우’(44%)였다(『인간의 모든 감정』). 불공정하다거나 억울하다고 느끼는 것이 가장 강력한 분노 감정이 된다는 얘기다. 지난 2월 20대 여성을 유인 살해한 정유정의 범행 동기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는 것이었다. 한창 논란인 진상 학부모들의 갑질도 알고 보면 ‘내 자식의 손해를 참을 수 없다’는 분노에서 출발한 것이다. 고립된 외톨이 범죄이든,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이든, 분노조절장애급 진상 고객의 갑질이든 그 뿌리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사회구조적 근원을 찾고, 동시에 왜곡된 분노 감정을 관리하는 심리적 케어라는 투 트랙 대책이 필요하다. 세계 최고 자살률에서 보듯 나를 향한 분노 표출이 이제는 무차별 살상으로 옮겨가고 있다. 인터넷의 분노가 거리로 나오고 있다. 정신건강에 대한 사회안전망 구축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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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컷칼럼] 교사의 자격, 부모의 자격
언제까지 이런 비극을 봐야 하나. 또 하나 젊은 생명이 지고, 그제야 세상이 허둥지둥 움직인다. 거리에는 추모와 공분의 물결이 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며 정치권도 나선다. 6개월 전에도 새내기 기간제 여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언제부터 우리 교실이 이렇게 됐을까. 진상 갑질 학부모의 악성 민원이 도를 넘었다. 통상적인 교육지도지만 꼼짝없이 아동학대범으로 몰려도 속수무책이다. 내 아이만 칭찬 스티커를 못 받았으니 아동학대라고 신고한 부모, 오토바이 등교를 제지했더니 ‘인권 침해’라 따지는 학생, 교과서 속 동시에 나오는 것처럼 까치발로 몇 걸음 걸어보게 했다가 아동학대로 고소당한 교사. 교실에서 폭력이 일어나도 소리를 질러 공포심을 느끼게 하거나 신체 접촉이 이뤄지면 아동학대가 될 수 있으니 교사는 웃으면서 “친구야, 그만하세요”라고 해야 한다. '한국교원총연합회 2030 청년위원회'를 비롯한 교사들이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교권보호 대책 마련 촉구 및 교권침해 설문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뉴스1] 보육과 돌봄까지 교실에 요구하면서 수업 중 아이에게 약을 먹이거나 화장실 뒤처리를 봐 달라는 부모도 등장했다. 이 정도는 애교다. “XX학번 교대 졸업생들이 수능을 잘 봤으니 담임은 그 학번으로 해 달라.” “아이들 지도에 문제없게 출산은 방학 중 해 달라.” “(교사) 부모까지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황당한 민원들이다. 유명 웹툰 작가 주호민씨가 발달장애 아들을 가르치는 특수교사를 아동학대로 고소한 사실도 논란이 됐다. 교사는 직위 해제됐고, 다른 학부모들은 훌륭한 선생님을 잃었다며 탄원서를 냈다. 주씨는 아이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교사의 음성을 녹음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걸까. 아동학대로 ‘의심만 가도’ 신고가 가능하고, 포괄적이고 애매모호한 ‘정서적 학대’라는 법 규정이 문제다. 아동학대 근절이라는 취지에는 맞지만, 교육 현장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정당한 훈육과 학대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아동학대죄는 ‘아동기분상해죄’라는 교사들의 자조가 나올 법하다. ■ 「 터져나오는 교권 회복 목소리 관련 법·제도 정비와 함께 역지사지 인권 의식 갖춰야 」 여야가 이견 없는 아동학대법 개정과 달리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는 여야가 엇갈린다. 정부·여당은 진보 교육감들이 만든 학생인권조례를 교권 실종의 근원으로 지목하며 개정론을 들고나왔고, 야당은 학생 인권과 교권은 배치되는 게 아니라며 개정에 반대한다. 그러나 학생 인권이 올라간다고 교권이 추락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학생(학부모)과 교사가 갑을 관계가 돼버렸다면 그 또한 학생인권조례의 취지에 어긋난다. 사실 이번 사태에서 제일 안타까웠던 것은 스물셋 여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에 학부모에게 들었다는 “교사 자격이 없다”는 말이었다. 실제 많은 학부모가 민원을 제기하며 ‘교사의 자격’을 거론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부모의 자격’이 있을까. 교사에게도 인격이 있으며 시도 때도 없이 호출되지 않고 사생활을 보호받아야 하는 ‘개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부모, 교육 현장을 고객 만족 서비스 현장쯤으로 여기며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부모, 내 아이는 절대 손해 보지 말아야 하고 내 아이의 행복을 위해 온 세상이 조아려야 한다고 믿는 부모, 제대로 가정교육을 못 받은 ‘금쪽이’들을 학교에 맡겨놓고 소비자 의식을 발휘하는 부모···. 교사들은 임용고시라도 봤지만, 학부모는 그저 아이를 낳기만 하면 ‘자격’이 절로 주어지는 걸까. 한 교사는 “학부모들이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서 학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지만 더는 과거 같은 촌지, 체벌, 차별이 난무하는 현장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과연 작금의 상황이 학생 인권과 교권의 충돌인지, 아니면 진상 학부모 인권과 교권의 충돌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아동학대를 주장하는 학부모의 가정에 똑같은 기준의 아동학대가 없는지 묻고 싶다는 교사도 있었다. 법·제도 정비와 함께 나의 권리를 주장할 때는 상대방의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인권 교육의 ABC가 필요하다. ‘역지사지, 공존하는 시민성’이 제도 개선과 같이 가야 한다. 글=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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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교사의 자격, 부모의 자격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언제까지 이런 비극을 봐야 하나. 또 하나 젊은 생명이 지고, 그제야 세상이 허둥지둥 움직인다. 거리에는 추모와 공분의 물결이 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며 정치권도 나선다. 6개월 전에도 새내기 기간제 여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언제부터 우리 교실이 이렇게 됐을까. 진상 갑질 학부모의 악성 민원이 도를 넘었다. 통상적인 교육지도지만 꼼짝없이 아동학대범으로 몰려도 속수무책이다. 내 아이만 칭찬 스티커를 못 받았으니 아동학대라고 신고한 부모, 오토바이 등교를 제지했더니 ‘인권 침해’라 따지는 학생, 교과서 속 동시에 나오는 것처럼 까치발로 몇 걸음 걸어보게 했다가 아동학대로 고소당한 교사. 교실에서 폭력이 일어나도 소리를 질러 공포심을 느끼게 하거나 신체 접촉이 이뤄지면 아동학대가 될 수 있으니 교사는 웃으면서 “친구야, 그만하세요”라고 해야 한다. '한국교원총연합회 2030 청년위원회'를 비롯한 교사들이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교권보호 대책 마련 촉구 및 교권침해 설문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뉴스1] 보육과 돌봄까지 교실에 요구하면서 수업 중 아이에게 약을 먹이거나 화장실 뒤처리를 봐 달라는 부모도 등장했다. 이 정도는 애교다. “XX학번 교대 졸업생들이 수능을 잘 봤으니 담임은 그 학번으로 해 달라.” “아이들 지도에 문제없게 출산은 방학 중 해 달라.” “(교사) 부모까지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황당한 민원들이다. 유명 웹툰 작가 주호민씨가 발달장애 아들을 가르치는 특수교사를 아동학대로 고소한 사실도 논란이 됐다. 교사는 직위 해제됐고, 다른 학부모들은 훌륭한 선생님을 잃었다며 탄원서를 냈다. 주씨는 아이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교사의 음성을 녹음했다. ■ 「 터져나오는 교권 회복 목소리 관련 법·제도 정비와 함께 역지사지 인권 의식 갖춰야 」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걸까. 아동학대로 ‘의심만 가도’ 신고가 가능하고, 포괄적이고 애매모호한 ‘정서적 학대’라는 법 규정이 문제다. 아동학대 근절이라는 취지에는 맞지만, 교육 현장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정당한 훈육과 학대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아동학대죄는 ‘아동기분상해죄’라는 교사들의 자조가 나올 법하다. 여야가 이견 없는 아동학대법 개정과 달리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는 여야가 엇갈린다. 정부·여당은 진보 교육감들이 만든 학생인권조례를 교권 실종의 근원으로 지목하며 개정론을 들고나왔고, 야당은 학생 인권과 교권은 배치되는 게 아니라며 개정에 반대한다. 그러나 학생 인권이 올라간다고 교권이 추락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학생(학부모)과 교사가 갑을 관계가 돼버렸다면 그 또한 학생인권조례의 취지에 어긋난다. 사실 이번 사태에서 제일 안타까웠던 것은 스물셋 여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에 학부모에게 들었다는 “교사 자격이 없다”는 말이었다. 실제 많은 학부모가 민원을 제기하며 ‘교사의 자격’을 거론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부모의 자격’이 있을까. 교사에게도 인격이 있으며 시도 때도 없이 호출되지 않고 사생활을 보호받아야 하는 ‘개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부모, 교육 현장을 고객 만족 서비스 현장쯤으로 여기며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부모, 내 아이는 절대 손해 보지 말아야 하고 내 아이의 행복을 위해 온 세상이 조아려야 한다고 믿는 부모, 제대로 가정교육을 못 받은 ‘금쪽이’들을 학교에 맡겨놓고 소비자 의식을 발휘하는 부모···. 교사들은 임용고시라도 봤지만, 학부모는 그저 아이를 낳기만 하면 ‘자격’이 절로 주어지는 걸까. 한 교사는 “학부모들이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서 학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지만 더는 과거 같은 촌지, 체벌, 차별이 난무하는 현장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과연 작금의 상황이 학생 인권과 교권의 충돌인지, 아니면 진상 학부모 인권과 교권의 충돌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아동학대를 주장하는 학부모의 가정에 똑같은 기준의 아동학대가 없는지 묻고 싶다는 교사도 있었다. 법·제도 정비와 함께 나의 권리를 주장할 때는 상대방의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인권 교육의 ABC가 필요하다. ‘역지사지, 공존하는 시민성’이 제도 개선과 같이 가야 한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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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수신료 분리징수 이후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논란이던 TV(KBS·EBS) 수신료 분리징수가 드디어 시행됐다. 1994년 수신료를 전기요금에 합산하는 통합징수제가 시행된 지 30년 만이다. 역대 정부가 만지작거리던 것을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였다. 정부는 “국민이 수신료 징수 여부와 금액을 명확히 알게 됐으며, TV 없는 집이 수신료를 내지 않을 권리가 강화됐다”고 밝혔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민이 세금처럼 내는 돈으로 연간 수신료가 6900억원씩 징수되고, 1000억원 이상이 1000명이 넘는 무보직 상태 직원에게 높은 봉급으로 지급되고 있다”며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방만한 운영”이라고 지적했다. 야당과 KBS는 반발했다. KBS는 헌법소원을 냈다.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통합 징수를 반대했던 민주당은 통합 징수를 못 박은 방송법 개정안을 내놨다. 속전속결이다 보니 현장에서는 당분간 혼란이 예상된다. 분리 납부 시스템은 정비 전이다. 아파트 단지는 한전과 종합 계약을 맺고 있어 세대별 분리 납부가 훨씬 복잡하다. 분리 징수로 수신료 수익이 줄면 월 2500원 수신료 중 2.8%(월 70원)를 받던 EBS는 타격이 크다. ■ 「 KBS 반발하지만 여론은 미지근 진짜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려면 공정성으로 수신료 가치 입증해야 」 통합징수제는 1980년대 ‘시청료 거부 운동’의 여파로 수신료 수입이 줄어들자 홍두표 사장 시절의 KBS가 내놓은 묘안이었다. 안정적 재원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시청자의 선택권을 훼손하고, 국민의 98%가 케이블·IPTV 등 유료방송을 통해 TV를 보는 상황에서 ‘이중과세’란 비판이 잇따랐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수신료 징수의 정당성이 약화하는 세계적 추세도 있다. 공영방송 수신료는 시청 여부와 상관없이 TV 수상기에 부과되는데, 이제는 TV 없이 TV를 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많은 공영방송이 수신료 인하 혹은 폐지 움직임에 처해 있다. KBS는 국가기간방송으로서 재난, 지역, 장애인 방송 등을 공익성의 증거로 내세우고 있으나 막상 존재감을 보여준 적은 없다. 경영 혁신을 약속했지만 큰 덩치는 여전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편파성. 독립된 재원으로 독립성·공공성을 추구하는 게 공영방송인데, 우리 공영방송들은 “정치권력과 유착한 편파적인 불공정 보도가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 고착화”(황근 선문대 교수)된 문제가 있다. 세계 8대 공영방송사 사장들의 협의체인 GTF가 이번에 낸 성명에는 “허위 정보와 여론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시기에 많은 공영방송사가 큰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민주주의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인 공영방송을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 맞는 말인데, 여론 양극화를 부추긴 데 KBS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게 문제다. 모든 미디어가 정치적 입장을 가질 수 있지만, 적어도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은 특정 정파의 전유물일 수 없다. 특히 여론 양극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중간지대를 만드는 것이 공영방송의 역할, 존재 이유 아닌가. KBS가 모범으로 삼는 영국 BBC는 진보 성향이지만 어떤 정부와도 각을 세운다. 물론 공영방송의 근간을 흔들면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패싱한 정부 태도는 문제다. 그러나 그런 정부의 무리수에도 별다른 국민적 저항이 일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KBS는 현 상황을 정치 쟁점화하지만, 홍성철 경기대 교수의 말대로 “수신료 분리징수를 반기는 것은 월 2500원이 아깝기 때문이나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 한마디로 공영방송 KBS에 대한 실망감”이다. KBS는 이걸 직시해야 한다. 역대 모든 정권이 공영방송을 손에 넣으려 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특정 정파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중립성, 공정성을 저버린 KBS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국민의 방송’ ‘수신료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는 한 KBS가 있어야 할 이유를 국민은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수신료 분리징수가 진짜 KBS 개혁의 출발점이 돼야 하는 이유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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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그림자가 된 아기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뉴스 보기가 겁날 정도다. 며칠 새 몇 명의 소식이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경남 거제시에서 체포된 한 사실혼 부부는 지난해 생후 5일 된 아기를 야산에 암매장했다. 30대인 엄마가 다른 남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또 다른 아이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경기도 과천의 50대 여성은 2015년 다운증후군 남자 아기를 출산하고 며칠 후 숨지자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수원의 20대 여성은 2019년 출산한 남자 아기를 집에서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모두 병원에서 태어났으나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미신고 ‘그림자’ 아기들로, 친부모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살인 및 사체은닉 혐의로 구속된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2구 사건' 피의자인 30대 친모가 지난달 30일 경기도 수원남부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사진 연합] 앞서 충격을 던진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2구 사건’의 30대 친모는 살인 및 사체은닉 혐의로 지난달 30일 검찰에 송치됐다. 2018년, 2019년 두 차례에 걸쳐 2명의 신생아를 출산 다음 날 목 졸라 죽이고 시신을 비닐봉지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형량이 낮은 영아살해죄(10년 이하 징역) 적용을 검토했다가 살인죄로 변경했다. 이참에 70년 전 제정돼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영아살해죄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영아와 영아 아닌 자의 생명 보호를 달리 보는 것이 아동 인권을 강조하는 사회적 인식에 맞지 않는 데다 아동학대 등 다른 범죄에 비해 형량도 낮아서다. 해외 주요국은 이미 영아살해죄를 폐지했거나 영아살해에 대한 감경 규정을 인정하지 않거나 아동 유기를 가중 처벌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폐지 법안이 발의된 적이 있다. ■ 「 미신고 영아 대상 범죄 엄벌하되 만시지탄 출산통보제 도입 이어 보호출산제로 산모ㆍ아기 지켜야 」 2015~2022년 미신고 영아가 2236명에 달한다는 감사원 발표 이후 현재 경찰이 수사 중인 관련 사건은 79건이다. 이 중 사망 영아가 8명, 소재 미확인 영아가 74명이다. 여기에는 병원 밖에서 출산한 영·유아는 포함되지 않아 실체적 진실은 훨씬 더 충격적일 수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병원 밖 출산은 연간 100~200건. 특히 성범죄 피해자, 10대 미혼모, 난민을 포함한 불법체류자 등 임신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위기 산모’일수록 산모의 신분이 드러나는 병원 출산을 꺼리고, 고시원·화장실·모텔 등 위험한 환경에서 자가 분만을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 경찰청에 의하면 이번 감사원 발표와 별개로 2013~2022년 영아살해는 85건, 영아유기는 1185건이었다. 저출생 문제 해결에 수백조원 예산을 퍼부으면서 태어난 생명도 지키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났다. 지난달 30일 의료기관의 아동 출생신고를 의무화한 ‘출생통보제’ 법안(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이 드디어 국회를 통과했다. 미신고 영아 살해나 불법 입양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법안이 처음 발의된 것이 2008년이라 만시지탄이 있고, 당정이 병행도입 의지를 밝혔던 ‘보호출산제’가 야당 반대로 통과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보호출산제는 위기 산모가 병원에서 익명으로 낳은 아기를 국가가 보호하는 제도다. 야당은 이 제도가 산모의 양육 포기를 부추길 수 있다며 반대하지만, 현장의 절박함을 외면한 처사다. 출생통보제가 도입되는데 익명 출산이 보장되지 않으면 병원 밖 출산이 더 늘어나고 산모와 아기가 더욱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보호출산제 없는 출생통보제란 반쪽짜리 대책일 뿐이다. 잔인한 영아살해는 더욱 엄정하게 처벌하되 위기 산모의 임신·출산은 국가·사회적으로 지원하는 투 트랙의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영아살해죄 폐지 목소리에 대해서도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산후우울증이라는 것이 실존하고, 특히 10대 미혼 산모의 경우 불안정한 정신상태에서 범행하는 경우가 많다”며 신중론을 폈다. 악질적 범죄는 엄벌해야 하지만 미성숙한 위기 산모가 누구의 도움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범죄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많은 만큼 단순 폐지보다는 성립 요건을 엄격히 따져 법을 적용하자는 얘기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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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컷칼럼] 소수자를 보지 않을 다수자의 권리
시민 주최 문화행사를 놓고 경찰과 행정 당국이 충돌하는 이례적 풍경이 연출됐다. 지난 17일 대구에서 열린 성소수자 축제인 대구퀴어문화축제 얘기다. 시청 공무원 500명이 불법 도로 점거라며 행사 차량을 막아서고, 경찰 기동대 1500명은 길을 터주려 하면서 대치 상황이 연출됐다. “퀴어축제 반대” 의사를 밝힌 홍준표 대구시장이 집회 허가를 내준 경찰의 교통 통제 협조 요청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홍 시장은 SNS 등을 통해 “1%도 안 되는 성소수자의 권익만 중요하고, 99%의 성다수자의 권익은 중요하지 않냐”며 “99% 시민들이 불편한 번화가 도로 점거 불법 집회는 공공성이 없다” “집회를 하려면 다른 곳에 가서 하시라”는 발언을 이어왔다. 앞서 법원이 이 지역 상인들이 낸 집회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집회는 정치적 약자나 소수자의 의사를 표현하는 유일한 장이 될 수 있다”면서 “상인들의 재산권과 영업의 자유 제한 정도가 표현의 자유보다 무겁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바탕 소동 끝에 행사는 예정대로 열렸으나, 홍 시장은 대구경찰청장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대구퀴어축제는 2009년 시작돼 올해로 15년째다. 해외에도 유사한 퍼레이드들이 많고 우리나라는 2000년 서울퀴어축제를 필두로 전국 9개 도시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해 여름 서울퀴어축제 때는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참석하기도 했으나, 올해는 서울광장 사용이 불허됐다. 서울광장 사용을 심사한 시민위원회에서는 “(성소수자들이) 표현할 자유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보지 않을 자유도 중요하다”는 등의 발언이 나왔다. 춘천퀴어축제도 장소 대관에 난항을 겪었다. ■ 「 잇딴 퀴어문화축제 제동 논란 다수자의 '싫어할 권리'라지만 소수자는 존재 자체 부정당해 」 그런데 ‘성소수자의 권익 못지않게 성다수자의 권익도 중요하다’는 말은 얼핏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과연 성다수자가 도로를 불편 없이 사용하는 권익과 성소수자가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권익을 등치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수자에게 소수자(퀴어축제)를 안 볼 권리가 있으니 소수자는 헌법이 보장한 집회의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홍시장은 대구 이슬람 사원 건립을 반대하는 일부 기독교 단체를 향해서는 “종교의 자유 침해일 뿐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도 반한다”며 “글로벌 대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10억 이슬람을 배척하고는 만들 수 없다”고 강조했는데 이와 대비된다. 성소수자를 ‘싫어하거나,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존재적 특질만으로 따지자면 ‘흑인을 싫어할 권리’ ‘장애인이나 아시아인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소수자가 스스로 드러내며(가시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해 달라는 게 퀴어축제의 본질일 텐데, 다수자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하라는 건 아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굉장히 낯선 어감인 ‘성다수자’와 성소수자를 권익이 배치되는 관계로 놓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극빈층이 잘살게 된다고 부자가 가난해지는 게 아니고 여성 인권을 신장한다고 남성 인권이 후퇴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성소수자의 인권이 개선된 사회는 사회 전반의 인권이 개선된, 그래서 다수자의 인권도 개선된 사회임은 세상이 아는 바다(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한 게 1990년이다). 성다수자와 성소수자라는 또 다른 갈라치기 속에서 인권의식의 퇴보가 우려된다. 같은 날 밤 서울 여의도에서는 전 세계 40만 팬이 운집한 가운데 ‘BTS 10주년 페스타’가 열렸다. 서울 전역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시민들도 교통 통제에 기꺼이 협조했다. 데뷔 10년 BTS 일곱 청년의 성취가 감격스럽다가도 성소수자를 포함해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소수자성’으로 전 세계 젊은이를 사로잡은 이들의 메시지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먹통인 건 아닌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글=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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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소수자를 보지 않을 다수자의 권리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시민 주최 문화행사를 놓고 경찰과 행정 당국이 충돌하는 이례적 풍경이 연출됐다. 지난 17일 대구에서 열린 성소수자 축제인 대구퀴어문화축제 얘기다. 시청 공무원 500명이 불법 도로 점거라며 행사 차량을 막아서고, 경찰 기동대 1500명은 길을 터주려 하면서 대치 상황이 연출됐다. “퀴어축제 반대” 의사를 밝힌 홍준표 대구시장이 집회 허가를 내준 경찰의 교통 통제 협조 요청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홍 시장은 SNS 등을 통해 “1%도 안 되는 성소수자의 권익만 중요하고, 99%의 성다수자의 권익은 중요하지 않냐”며 “99% 시민들이 불편한 번화가 도로 점거 불법 집회는 공공성이 없다” “집회를 하려면 다른 곳에 가서 하시라”는 발언을 이어왔다. 앞서 법원이 이 지역 상인들이 낸 집회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집회는 정치적 약자나 소수자의 의사를 표현하는 유일한 장이 될 수 있다”면서 “상인들의 재산권과 영업의 자유 제한 정도가 표현의 자유보다 무겁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바탕 소동 끝에 행사는 예정대로 열렸으나, 홍 시장은 대구경찰청장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17일 오전 대구에서 열린 대구퀴어문화축제 현장. 시청 공무원과 경찰이 충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연합] 대구퀴어축제는 2009년 시작돼 올해로 15년째다. 해외에도 유사한 퍼레이드들이 많고 우리나라는 2000년 서울퀴어축제를 필두로 전국 9개 도시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해 여름 서울퀴어축제 때는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참석하기도 했으나, 올해는 서울광장 사용이 불허됐다. 서울광장 사용을 심사한 시민위원회에서는 “(성소수자들이) 표현할 자유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보지 않을 자유도 중요하다”는 등의 발언이 나왔다. 춘천퀴어축제도 장소 대관에 난항을 겪었다. ■ 「 잇딴 퀴어문화축제 제동 논란 다수자의 '싫어할 권리'라지만 소수자는 존재 자체 부정당해 」 그런데 ‘성소수자의 권익 못지않게 성다수자의 권익도 중요하다’는 말은 얼핏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과연 성다수자가 도로를 불편 없이 사용하는 권익과 성소수자가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권익을 등치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수자에게 소수자(퀴어축제)를 안 볼 권리가 있으니 소수자는 헌법이 보장한 집회의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홍시장은 대구 이슬람 사원 건립을 반대하는 일부 기독교 단체를 향해서는 “종교의 자유 침해일 뿐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도 반한다”며 “글로벌 대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10억 이슬람을 배척하고는 만들 수 없다”고 강조했는데 이와 대비된다. 성소수자를 ‘싫어하거나,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존재적 특질만으로 따지자면 ‘흑인을 싫어할 권리’ ‘장애인이나 아시아인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소수자가 스스로 드러내며(가시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해 달라는 게 퀴어축제의 본질일 텐데, 다수자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하라는 건 아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굉장히 낯선 어감인 ‘성다수자’와 성소수자를 권익이 배치되는 관계로 놓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극빈층이 잘살게 된다고 부자가 가난해지는 게 아니고 여성 인권을 신장한다고 남성 인권이 후퇴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성소수자의 인권이 개선된 사회는 사회 전반의 인권이 개선된, 그래서 다수자의 인권도 개선된 사회임은 세상이 아는 바다(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한 게 1990년이다). 성다수자와 성소수자라는 또 다른 갈라치기 속에서 인권의식의 퇴보가 우려된다. 같은 날 밤 서울 여의도에서는 전 세계 40만 팬이 운집한 가운데 ‘BTS 10주년 페스타’가 열렸다. 서울 전역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시민들도 교통 통제에 기꺼이 협조했다. 데뷔 10년 BTS 일곱 청년의 성취가 감격스럽다가도 성소수자를 포함해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소수자성’으로 전 세계 젊은이를 사로잡은 이들의 메시지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먹통인 건 아닌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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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아미와 개딸 사이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남성 크로스오버 중창팀을 뽑는 JTBC 서바이벌 오디션 ‘팬텀싱어4’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 투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절실한 마음을 잘 알기에 흔쾌히 약속했다. 가족을 동원해 매일 온라인 투표를 하고, 지난 2일 생방송 최종 경연 일에는 문자투표도 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결승에 오른 3팀 팬들이 여는 투표 인증 경품 이벤트가 한창이었다. 경품 수준이 치킨, 문화상품권에서 골드바, 안마의자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팬들이 돈과 시간,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지난해 서올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에 이재명 대표 열혈팬덤인 '개딸'들이 보낸 화환들이 놓여 있다. [사진 뉴스1] 여느 아이돌 팬덤도 다르지 않다. K팝 팬덤이 약간의 자조를 섞어 스스로 ‘노동앰’(노동하는 애미)’이라 부르는 이유다. 상당수 아이돌이 시청자 문자투표로 결정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로 출발하기 때문에 연습생 신분일 때부터 ‘노동’이 시작된다. 내 손에 상대의 생사여탈권이 쥐어지니 ‘과몰입’도 시작된다. ‘애미’라는 표현은, 아이돌을 자기가 키우는 대상으로 보는 ‘양육팬덤’이어서다. 데뷔 후에는 음악방송 1위를 향해 ‘노동’한다. 음반을 사고, 스트리밍하고, 유튜브 뮤직비디오도 무한 재생하며 음방 1위에 필요한 점수를 채운다. 자발적이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요즘은 임영웅 등 트로트 스타들을 좋아하는 장노년 팬들도 ‘노동’한다. 투표가 중요한 각종 시상식에도 참전한다. 팬이 아닌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세계적 아이돌 BTS도 예외는 아니다. BTS 현상의 핵심은 BTS가 아니라 아미(팬클럽)란 말이 있을 정도다. 아미 팬덤은 K팝 팬덤 문화를 해외에 수출했고, 마침내 세계 대중문화의 지형도를 바꿨다. 보상은 별거 없다. 그저 아이돌이 좋아서, BTS가 좋아서, BTS를 함께 좋아하는 다른 팬들이 좋아서, 모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나 자신이 좋아서, BTS 성취가 내 성취 같아서다. 홀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공동의 이름(팬덤명)과 행동양식을 갖기에 소속감과 함께 스타에게 부끄럽지 않은 팬이 되겠다는 마음도 다진다. 팬과 스타의 동반성장이다. 그러나 열광이 있는 곳엔 늘 과열이 있다. 도를 넘는 극성팬들이 있고, 한때는 라이벌 팬덤들이 물리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요즘은 소속사에 ‘헤메코(머리ㆍ화장ㆍ의상)가 별로다’ ‘안무를 바꿔라’ ‘특정 멤버의 분량을 늘려라’ 같은 ‘시어머니질’도 한다. 그러나 ‘팬은 스타의 얼굴’이라며 자정 작용이 일어난다. 사회적 평판을 의식하며 팬덤 이름으로 기부나 선행을 하고, 문제 있는 아이돌 멤버를 팬덤이 먼저 손절하기도 한다. 성숙한 팬덤과 악성 팬덤이 갈리는 지점이다. 팬덤이 성숙해야 아이돌이 오래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요즘 정치권에 느닷없이 아미가 호출됐다. 일체의 내부 비판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열혈팬덤 ‘개딸’과의 결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BTS보고 아미를 그만두라는 얘기가 가능하겠냐”(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는 말이 나왔다. 이 대표를 BTS에, 개딸을 아미에 빗대는 난센스야 그들의 자유라지만, ‘팬덤이 싫어서 그 아이돌이 싫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이돌 팬덤의 첫 번째 불문율이라는 걸 알고나 하는 얘기일까. 어차피 K팝은 열성팬덤만 잡으면 되는 팬덤 비즈니스지만, 정치란 팬덤을 넘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다. 하긴 민주당 친명 강경파 ‘처럼회’ 멤버인 이수진 의원이 진보 유튜브 채널에 나와 “윤석열 그분을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이 너무너무 싫어요. 너무 싫어 죽겠어요. 지금도 윤석열하고 사진 찍고 싶다 그러고 잘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피가 끓죠”라고 말하며 박수받는 세상이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에게 증오를 퍼붓는 선출직 공직자의 믿기 힘든 망언이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해 개딸들에 대해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행태”라고 했지만 그건 대한민국을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에 올려놓은 아미 얘기다. 팬덤정치의 끝은 고립을 자초하는 게토화일 뿐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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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저출생 시대의 노키즈존(No Kids Zone)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얼마 전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노시니어존(No Senior Zone)’ 카페. 출입문의 ‘60세 이상 어르신 출입제한’ 고지 옆에 ‘안내견은 환영합니다’ 스티커가 대비를 이뤘다. 스스로 카페 단골이라고 밝힌 이는, 홀로 카페를 하는 여사장을 ‘마담’이라 부르며 희롱하는 나이 든 고객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대리 해명했다. 사장이 고객을 안 받겠다니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지만, 어디 ‘무매너’가 나이 문제인가. 아동차별 논란이 있는 ‘노키즈존(No Kids Zone)’이 물꼬를 트고 ‘노시니어존’이 나왔으니 다음은 뭘까. 시중에는 ‘노중딩(혹은 교복)존’ ‘노프로페서(교수)존’ 등이 등장했다. 이에 앞서 ‘49세 이상(은) 정중히 거절’한다는 식당, ‘40대 이상 커플 사절’을 내건 캠핑장도 있었다. 아동의 출입을 제한하는 노키즈존이 전국에 500곳이 넘는다. 서울의 식당에 붙은 노키즈존 문구. [중앙포토] 조만간 60세 이상 어르신에 합류할 입장에서 쓰자면 굳이 노시니어존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이미 나이를 충분히 의식하며 산다.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핫한 카페에 들어갈 땐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위축된다. 그뿐일까. 디지털 문해력이 떨어지는 노인층은 사용도 접근도 힘든 무인가게, 무인주문대 등 시니어를 배제하는 공간은 점점 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10년 전쯤 등장해 500곳 넘게 늘어난 우리나라 노키즈존에 주목했다. 해외에서도 비행기 좌석 배정이나 도서관 이용에서 아동에게 제한을 두는 문제가 종종 논란이 되지만, 한국처럼 심각한 저출생 국가에서 카페ㆍ식당 같은 일상적 노키즈존은 출산과 육아를 점점 더 선택하기 어려운 옵션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노ㅇㅇ존’의 핵심은 특정 고객의 입장을 제한하는 게 영업의 자유인가, 아니면 어디서든 배제되지 않을 인권과 차별의 문제인가이다. 노키즈존에 앞서 키즈 카페나 미성년자 출입금지 유흥업소 등 고객 제한 공간이 있지만, 이는 고객 맞춤형 전용공간이나 특정 연령대 보호 목적의 출입제한으로 성격이 다르다. 2021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71%가 노키즈존에 찬성했다. 아직은 노키즈존에 대해 업주의 자유고, ‘안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노키즈존 반대'(17%)보다 훨씬 많았다. 최근 제주도에서는 도의회 차원에서 도내 ‘노키즈존 지정 금지 조례’ 제정을 추진하다 보류했다. 더 많은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봤다. 제주도는 관광객만큼 고객 민원이 많고 노키즈존이 국내에서 제일 많은 지역이다. 사실 누구나 공감하는 바지만 노키즈존에서 진짜 문제인 것은 아동이 아니라, 아동을 적절히 통제하거나 매너를 훈육하지 않는 무개념 부모다. 다른 고객을 배려해달라는 업장 측의 요청에 툭하면 인터넷으로 달려가 난리 치는 ‘젊은 진상’ 부모를 막을 수 없으니 아동을 막는다. 앞서 노시니어존 카페처럼 특정한 문제 고객을 막지 않고 그 연령대 다수 고객을 원천 봉쇄한다. 불량 고객을 거른다지만 항상 배제되는 것은 아동ㆍ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다. 과일반화에, 나이 차별이 발생한다. 주취자의 고성방가가 꼴사납지만 지금껏 ‘노어른존’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자영업자의 고충은 고충대로 이해하지만, 노키즈존이 영업의 자유를 넘어 인권과 차별 이슈가 되는 이유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노키즈존을 차별행위라고 판단했다. 최근 한국을 찾은 인구학자 데이비드 콜먼 옥스퍼드대 명예교수는 “결혼ㆍ과한 노동ㆍ교육열 등 ‘한국다운 것’이 변해야 저출생 문제가 풀린다”는 진단과 함께 “경제적 지원만으로는 부족하고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키즈존도 한국적 ‘육아 문화’의 하나일 것이다. 장거리 버스 뒷자리 아이가 계속 칭얼대면 짜증 나고 ‘나쁜 자리 운’을 푸념할 수는 있지만, ‘맘충’(젊은 엄마 비하 표현)을 탓하며 ‘노키즈 버스’를 요청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엄마가 아이와 버스 타는 것, 식당 가는 것조차 눈치 보인다면 저출생 개선은 요원한 얘기일 것이다. 나도 과거에는 아이였고, 떼쓰는 아이 때문에 곤혹스러운 엄마였다. 그리고 나의 미래는 어르신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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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컷칼럼] 우울증 소녀를 노리는 사람들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요즘 연일 이름이 오르내리는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우울갤)’ 얘기다. 이름처럼 우울한 사람들이 익명성에 기대어 교류하는 우울갤은 국내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 포털 디시인사이드에서도 방문객 상위 1%의 인기 게시판이다. 지난 3월 방문자만 800만 명에 달했다(시밀러웹 집계). 하필 어린이날 새벽이었다. 우울갤에서 만난 15, 17세 소녀 두 명이 서울 한남대교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 구조됐다. 두 소녀는 과정을 소셜미디어로 생중계했고, 현장에는 “이들을 말리러 왔다”는 성인 남성 한 명이 있었다. 지난달 16일 우울갤 이용자인 여고생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투신 사망해 충격을 안긴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이다. 그때도 과정이 소셜미디어로 생중계됐고, 20대 남성이 동행했다. 이 20대 남성은 자살방조와 자살예방법 위반 혐의로 입건됐다. 여고생이 우울갤에서 성착취를 당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 「 ‘진화된 n번방’ 의심 우울증 갤러리자살방조, 미성년 성착취 의혹까지엄중수사, 강력처벌로 재발 막아야 」 경찰은 이번에 존재가 드러난 우울갤 오프 모임인 ‘신대방팸’의 20대 남성 4명을 미성년자 의제 강간, 폭행 등의 혐의로 입건했다. 우울갤의 또 다른 오프 모임인 ‘신림팸’의 핵심 인물인 20대 여성에게는 지난달 징역형이 선고됐다. 미성년 여성을 포함한 우울갤 이용자들에게 술, 수면유도제, 마약 등을 권유한 혐의다. 여학생 성착취 의혹도 받는다. 범죄심리학자인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여고생 투신 사건 직후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이는 성착취, 자살조장, 마약 투약 등 최악의 조합이 다 모인 진화된 n번방 사건”이라고 단언했는데, 과장이 아니었음이 속속 드러나는 중이다. 이 교수는 “3년 전 n번방만 해도 마약이 이렇게 일반화되지 않았고, 자살이 이렇게 방치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결합한 형태로 우울증 갤러리에서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며 엄중한 수사를 촉구했다. 우울갤 주 이용자가 10대 여성과 20대 남성이며, 정신적으로 취약한 10대 여성을 노리는 ‘패션(가짜) 우울증’ 이용자가 상당수라는 내부 증언도 나왔다. 우울갤의 미성년자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올 1, 2월에만 4건의 법원 판결이 나왔다. 디시인사이드는 경찰의 우울갤 임시 폐쇄 요청을 거부하고 자체 모니터링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효율성은 미지수다. 폐쇄가 능사는 아니지만 철저한 익명성을 기반으로 덩치를 키워온 디시인사이드 갤러리가 예의 ‘배설’을 넘어 범죄나 자살방조의 온상이 되고 있다면 사회적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한편 최근 여성신문은 우울갤 외에도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을 ‘멘헤라‘라고 부르며 그루밍(길들이기) 성폭력을 모의하는 글이 다수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멘헤라(メンヘラ)는 ‘멘털 헬스가 좋지 않아 보이는 사람’을 일컫는 일본의 인터넷 신조어다. 가정폭력이나 집단괴롭힘, 부모의 이혼 등으로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애정 결핍에 빠진 젊은 여성들을 성적으로 소비하기 쉬운 대상이나 성범죄의 타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살방조 등이 죄의식 없이 일어나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우울증 사냥꾼’들에 의한 성착취에 노출되거나 더 큰 범죄에 끌려 들어갈 소지가 크다”고 우려했다. 2021년 10대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7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특히 12~15세 자살률이 2016년보다 5배 가까이 폭증했다. 2019년 5만4000명이던 우울증ㆍ불안장애 진료 아동ㆍ청소년도 2022년 상반기에만 4만6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우울증 진료를 받은 10대 여성은 10대 남성보다 1.7배 많았다(2021년). 이 자체도 충격적인데, 학대나 학폭 등으로 상처를 입고 집이나 학교라는 보호망도 없는 곳에서 누군가 고통을 나눌 사람을 찾다가 ‘우울증 소녀 사냥꾼’의 레이더에 포착된다니, 심지어 여자 초등생까지 제물이 된다니. 가정의 달 5월이 무색하게 우울한, 아니 참담한 일이다. 글=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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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우울증 소녀를 노리는 사람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요즘 연일 이름이 오르내리는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우울갤)’ 얘기다. 이름처럼 우울한 사람들이 익명성에 기대어 교류하는 우울갤은 국내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 포털 디시인사이드에서도 방문객 상위 1%의 인기 게시판이다. 지난 3월 방문자만 800만 명에 달했다(시밀러웹 집계). 하필 어린이날 새벽이었다. 우울갤에서 만난 15, 17세 소녀 두 명이 서울 한남대교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 구조됐다. 두 소녀는 과정을 소셜미디어로 생중계했고, 현장에는 “이들을 말리러 왔다”는 성인 남성 한 명이 있었다. 지난달 16일 우울갤 이용자인 여고생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투신 사망해 충격을 안긴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이다. 그때도 과정이 소셜미디어로 생중계됐고, 20대 남성이 동행했다. 이 20대 남성은 자살방조와 자살예방법 위반 혐의로 입건됐다. 여고생이 우울갤에서 성착취를 당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 이용자인 10대 소녀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시도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우울증 갤러리가 미성년자 성착취, 자살방조 등이 결합된 '진화돤 n번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 셔터스톡] 경찰은 이번에 존재가 드러난 우울갤 오프 모임인 ‘신대방팸’의 20대 남성 4명을 미성년자 의제 강간, 폭행 등의 혐의로 입건했다. 우울갤의 또 다른 오프 모임인 ‘신림팸’의 핵심 인물인 20대 여성에게는 지난달 징역형이 선고됐다. 미성년 여성을 포함한 우울갤 이용자들에게 술, 수면유도제, 마약 등을 권유한 혐의다. 여학생 성착취 의혹도 받는다. 범죄심리학자인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여고생 투신 사건 직후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이는 성착취, 자살조장, 마약 투약 등 최악의 조합이 다 모인 진화된 n번방 사건”이라고 단언했는데, 과장이 아니었음이 속속 드러나는 중이다. 이 교수는 “3년 전 n번방만 해도 마약이 이렇게 일반화되지 않았고, 자살이 이렇게 방치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결합한 형태로 우울증 갤러리에서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며 엄중한 수사를 촉구했다. 우울갤 주 이용자가 10대 여성과 20대 남성이며, 정신적으로 취약한 10대 여성을 노리는 ‘패션(가짜) 우울증’ 이용자가 상당수라는 내부 증언도 나왔다. 우울갤의 미성년자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올 1, 2월에만 4건의 법원 판결이 나왔다. 디시인사이드는 경찰의 우울갤 임시 폐쇄 요청을 거부하고 자체 모니터링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효율성은 미지수다. 폐쇄가 능사는 아니지만 철저한 익명성을 기반으로 덩치를 키워온 디시인사이드 갤러리가 예의 ‘배설’을 넘어 범죄나 자살방조의 온상이 되고 있다면 사회적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한편 최근 여성신문은 우울갤 외에도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을 ‘멘헤라‘라고 부르며 그루밍(길들이기) 성폭력을 모의하는 글이 다수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멘헤라(メンヘラ)는 ‘멘털 헬스가 좋지 않아 보이는 사람’을 일컫는 일본의 인터넷 신조어다. 가정폭력이나 집단괴롭힘, 부모의 이혼 등으로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애정 결핍에 빠진 젊은 여성들을 성적으로 소비하기 쉬운 대상이나 성범죄의 타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살방조 등이 죄의식 없이 일어나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우울증 사냥꾼’들에 의한 성착취에 노출되거나 더 큰 범죄에 끌려 들어갈 소지가 크다”고 우려했다. 2021년 10대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7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특히 12~15세 자살률이 2016년보다 5배 가까이 폭증했다. 2019년 5만4000명이던 우울증ㆍ불안장애 진료 아동ㆍ청소년도 2022년 상반기에만 4만6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우울증 진료를 받은 10대 여성은 10대 남성보다 1.7배 많았다(2021년). 이 자체도 충격적인데, 학대나 학폭 등으로 상처를 입고 집이나 학교라는 보호망도 없는 곳에서 누군가 고통을 나눌 사람을 찾다가 ‘우울증 소녀 사냥꾼’의 레이더에 포착된다니, 심지어 여자 초등생까지 제물이 된다니. 가정의 달 5월이 무색하게 우울한, 아니 참담한 일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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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1020의 '극단적 선택'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대중의 사랑 속에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아이돌의 ‘극단적 선택’ 말이다. 이번에는 아스트로 멤버 문빈이다. 올해 25세. 아이돌 최고 춤꾼 중 하나였고, 늘 웃는 얼굴에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K팝 특유의 경쟁 시스템 속에서 심리적 압박이 적지 않았다고 추측할 뿐이다. 문빈은 이달 초 해외 공연 때 컨디션 난조로 출국을 미뤘고, 공연 후 인터넷 라이브방송을 하면서 “조금 힘들었지만 내가 선택한 직업이니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극단적인 선택을 해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인기 아이돌 그룹 아스트로의 멤버 문빈. [뉴스1] 아이돌뿐이 아니다. 최근 서울 강남에서는 닷새 동안 3명의 10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중 한 명인 10대 여고생은 그 과정을 SNS로 생중계했다. 현장에는 인터넷 커뮤니티(디시인사이드 우울증갤러리)에서 만난 20대 남성이 함께 있었는데 해당 여고생이 성착취를 당하고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됐을, 범죄의 가능성도 우려된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는 성착취, 자살 조장, 마약 투약 등 최악의 조합이 다 모인 ‘진화된 n번방’ 사건”이라며 엄중 수사를 촉구했다. 디시인사이드의 사회적 책임도 강조했다. 이 외에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30대 워킹맘, 전세 사기 피해자들, 성폭행 친부의 낮은 형량에 절망한 20대 딸 등 젊은이들이 잇따라 목숨을 버렸다. 우리나라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부동의 자살률 1위 국가다. 자살자 수가 OECD 평균의 2배를 넘는다. 자살률은 2011년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였는데 최근 4~5년 다시 늘고 있다. 고령자 자살률은 줄고 있는 데 반해 1020은 증가하는 게 눈에 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대 자살률은 2017년(인구 10만 명당) 16.4명에서 2021년 23.5명으로, 10대 자살률은 같은 기간 4.7명에서 7.1명으로 늘었다. 2021년 자살 원인은 정신적 문제(40%), 경제생활(24%), 육체적 질병 문제(18%) 순이었다. 특히 젊은 층의 정신건강에 빨간 불이 켜졌다. 2021년 20대 우울증 환자는 2017년에 비해 127%나 늘었다. 20대 불안장애 환자도 87% 늘었다. 한국 사회 특유의 과당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비교를 부추기는 SNS 등이 요인으로 거론된다. 높은 자살률의 방증일까, 우리에겐 자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꺼리는 분위기가 강하다.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고, 자살자나 유가족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혹은 자살을 조장할 가능성(유명인의 자살을 따라 하는 베르테르 효과)을 경계하면서다. 지금 이 글도 그렇지만 한국 언론들은 한국자살예방협회와 함께 마련한 ‘자살보도 윤리강령’에 따라 ‘자살’ 대신 ‘극단적 선택’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런데 나종호 예일대 의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여러 인터뷰에서 “완곡한 표현을 하는 것이 자살을 줄이거나 예방한다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이 도리어 자살을 가능한 하나의 선택지로 받아들이게 하며, 유족에게 선택의 이유를 따져 묻게 해 고통과 죄의식만 안겨준다는 설명이다. 해외 언론들이 자살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쓰는 이유다. 인터넷에는 이런 댓글들이 있다. “몸이 아파서 죽는 걸 선택이라고 하지 않는데, 정신이 아파서 죽는 건 왜 선택이라고 할까.” “자살은 상황에 내몰려 하는 것이지 선택일 수 없다.” 중요한 건 ‘극단적 선택’이라는 우회적 표현에도 극단적 선택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 교수 말대로 “(자살이란) 문제를 직면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의 방어기제”만 공고히 한 건 아닐까.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도 21일 “극단적 선택이란 용어의 자제”를 촉구했다. 세계 최고 자살률, 최저 출생률, 삶의 만족도 전 세계 59위, 아동·청소년 삶의 만족도 OECD 최하위(2022). 새삼 확인한 우리 사회의 성적표다. 최근 정부가 2027년까지 자살률을 30% 낮추는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을 세웠지만, 이 역시 수치 낮추기 실적 위주보다 사회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 노력이 동반될 때 의미 있을 것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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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컷칼럼] 학폭이 장난이었다는 아이들
정부가 학교폭력 징계 기록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기한을 2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징계 전력을 수시뿐 아니라 정시에도 반영하는 ‘학교폭력 근절대책’을 검토하고 있다. 가해 학생 엄단 원칙에 입각해 대입과 취업에서 확실하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다. 최근 자녀 학폭 이슈로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경우처럼, 일부 권력가 자제들의 학폭 가해 불공정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며, 청소년기 일탈이 평생의 커리어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과하다는 비판이 많다. 오는 12일 총리가 발표할 최종 대책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될지 지켜볼 일이다. 2012년 학생부에 학폭 가해 사실을 명시하게 한 ‘학폭근절 종합대책’이 나온 지 10년, 그로 인해 학폭이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학생부 기재를 막기 위한 가해자 측의 불복과 소송으로 피해자ㆍ가해자 분리가 늦춰지며 피해자 보호가 미비했다는 지적이 많다. 앞으로 징계 기록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소송이 남발될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 보호·용서와 가해자의 사과ㆍ반성이라는 교육적 해법 대신 사법 절차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학교를 유사 사법체계로 만들 것”(한성준 좋은교사운동 공동대표)이란 우려도 나온다. 또 현행 소년법은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에 대해서도 ‘소년의 보호처분은 그 소년의 장래 신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는데, 이보다 경미한 학폭으로 더 큰 불이익을 받는다면 형평에 맞지 않다. 점차 저연령화하는 학폭은 해당 안 된다는 문제도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22년 학폭 실태조사(1차)에 따르면 초등학교 피해 응답률이 3.8%로 가장 높았고 중학교(0.9%), 고등학교(0.3%) 순이었다. 그런데 같은 조사(2차)에서 가해 학생들이 학폭을 한 이유 1위는 ‘장난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62%)였다. 정순신 변호사 아들이나 학폭 드라마 ‘더 글로리’의 가해 학생들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장난이었다.” 가해 학생을 포함한 전체 학생이 뽑은 학폭 원인 1위도 ‘장난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66%)였다. ‘강해 보이려고’ ‘화풀이 또는 스트레스 때문’이란 응답이 뒤를 이었다. 결국 학폭 현장에서는 그 처벌의 강도와 무관하게, 폭력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말 그대로 ‘장난처럼’ 일어나는 학폭이 많다는 얘기다. 학생들은 학폭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방법으로 ‘공감·의사소통·감정조절 등의 교육’(29%)을 꼽았는데 그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 「 가해 학생 엄벌주의로는 한계 폭력과 감정 문해력 키워주고 교육적 해법 포기하지 말아야 」 ‘TC 유니트(Therapeutic Community Unit)’라는 교도소 제소자들의 집단상담ㆍ갱생 프로그램을 소개한 일본 다큐 ‘프리즌 서클’과 그 제작 뒷얘기를 다룬 동명의 책에 따르면, 범죄자들은 공통으로 ‘감정적 문해력(Emotional Literacy)’의 부족을 보였다. 감정적 문해력이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며,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을 말한다. 감정적 문해력이 낮으면 분노 같은 특정 감정에 휘둘리지 않거나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일종의 ‘감정 문맹’이다. 이 감정 문맹들은 ‘상대를 물건처럼 다루며 타인에게 가한 고통에 책임지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학폭을 여기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학폭이 장난이었다는 아이들 역시 상대가 호소하는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감정 문맹들 아닐까. 어려서부터 폭력적 미디어, 게임 등에 노출돼 폭력에 대한 감정적 문해력이 떨어지고, 폭력을 행사하고도 아무 죄의식 없는 악순환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그저 가해자 엄벌이 정답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어린 감정 문맹 뒤에는 "홧김에" "술기운에” “욱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성인 감정 문맹들이 있을 것이다. 학폭은 폭력을 부르는 우리 사회가 학교라는 보호벽을 뚫어버린 결과임을 인식하는 데서, 해법도 출발할 것이다. 글 =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 = 안은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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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학폭이 장난이었다는 아이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부가 학교폭력 징계 기록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기한을 2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징계 전력을 수시뿐 아니라 정시에도 반영하는 ‘학교폭력 근절대책’을 검토하고 있다. 가해 학생 엄단 원칙에 입각해 대입과 취업에서 확실하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다. 최근 자녀 학폭 이슈로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경우처럼, 일부 권력가 자제들의 학폭 가해 불공정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며, 청소년기 일탈이 평생의 커리어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과하다는 비판이 많다. 오는 12일 총리가 발표할 최종 대책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될지 지켜볼 일이다. 학폭 문제를 다뤄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킨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2012년 학생부에 학폭 가해 사실을 명시하게 한 ‘학폭근절 종합대책’이 나온 지 10년, 그로 인해 학폭이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학생부 기재를 막기 위한 가해자 측의 불복과 소송으로 피해자ㆍ가해자 분리가 늦춰지며 피해자 보호가 미비했다는 지적이 많다. 앞으로 징계 기록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소송이 남발될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 보호·용서와 가해자의 사과ㆍ반성이라는 교육적 해법 대신 사법 절차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학교를 유사 사법체계로 만들 것”(한성준 좋은교사운동 공동대표)이란 우려도 나온다. 또 현행 소년법은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에 대해서도 ‘소년의 보호처분은 그 소년의 장래 신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는데, 이보다 경미한 학폭으로 더 큰 불이익을 받는다면 형평에 맞지 않다. 점차 저연령화하는 학폭은 해당 안 된다는 문제도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22년 학폭 실태조사(1차)에 따르면 초등학교 피해 응답률이 3.8%로 가장 높았고 중학교(0.9%), 고등학교(0.3%) 순이었다. 그런데 같은 조사(2차)에서 가해 학생들이 학폭을 한 이유 1위는 ‘장난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62%)였다. 정순신 변호사 아들이나 학폭 드라마 ‘더 글로리’의 가해 학생들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장난이었다.” 가해 학생을 포함한 전체 학생이 뽑은 학폭 원인 1위도 ‘장난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66%)였다. ‘강해 보이려고’ ‘화풀이 또는 스트레스 때문’이란 응답이 뒤를 이었다. 결국 학폭 현장에서는 그 처벌의 강도와 무관하게, 폭력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말 그대로 ‘장난처럼’ 일어나는 학폭이 많다는 얘기다. 학생들은 학폭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방법으로 ‘공감·의사소통·감정조절 등의 교육’(29%)을 꼽았는데 그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TC 유니트(Therapeutic Community Unit)’라는 교도소 제소자들의 집단상담ㆍ갱생 프로그램을 소개한 일본 다큐 ‘프리즌 서클’과 그 제작 뒷얘기를 다룬 동명의 책에 따르면, 범죄자들은 공통으로 ‘감정적 문해력(Emotional Literacy)’의 부족을 보였다. 감정적 문해력이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며,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을 말한다. 감정적 문해력이 낮으면 분노 같은 특정 감정에 휘둘리지 않거나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일종의 ‘감정 문맹’이다. 이 감정 문맹들은 ‘상대를 물건처럼 다루며 타인에게 가한 고통에 책임지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학폭을 여기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학폭이 장난이었다는 아이들 역시 상대가 호소하는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감정 문맹들 아닐까. 어려서부터 폭력적 미디어, 게임 등에 노출돼 폭력에 대한 감정적 문해력이 떨어지고, 폭력을 행사하고도 아무 죄의식 없는 악순환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그저 가해자 엄벌이 정답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어린 감정 문맹 뒤에는 "홧김에" "술기운에” “욱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성인 감정 문맹들이 있을 것이다. 학폭은 폭력을 부르는 우리 사회가 학교라는 보호벽을 뚫어버린 결과임을 인식하는 데서, 해법도 출발할 것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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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작가들의 죽음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해 7월 웹툰업계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글로벌 흥행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의 작화를 담당하던 장성락 작가의 사망 소식이었다. 지병이 있었다지만 서른일곱 청년의 갑작스러운 죽음. 웹툰업계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이목이 쏠렸다. 산업이 커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작가들이 소모품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수술 때문에 연재를 쉬겠다는 작가에게 “휴재하면 매출이 떨어져서 곤란하다”는 제작사와 플랫폼, 외국에서는 격주나 한 달 걸리는 분량을 일주일에 해치우는 초인적 관행, 1년에 수억원 버는 스타작가들의 이면에 최저임금 수준도 받지 못하는 작가가 태반인 현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고 이우영 작가가 그림을 그린 극장판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 즐거운 나의 집' 스틸컷. 장 작가의 죽음이 준 충격은 지난 2월 웹툰을 포함한 만화 분야에 표준계약서 사용 권고를 골자로 하는 만화진흥법 개정안 국회 통과로 이어졌다. 표준계약서가 강제력은 없지만, 작가들의 권리 확대에 제도적 길이 열린 셈이다. 문체부는 창작자들이 요구해 온 휴재권 보장과 회차별 컷 분량 제한 조항 등이 포함된 새로운 웹툰 표준계약서 초안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다. 인기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의 그림을 그린 이우영 작가다. 15년 전 제작사와 맺은 불공정 계약으로, 원작자인데도 저작권 침해로 고소당해 고통받다가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원작자임에도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자신의 다른 작품에 등장시켰다는 이유로, 부모님 농장에서 ‘검정고무신’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법 지식이 부족한 작가가 사업화를 제안하는 회사만 믿고 저작권 지분을 넘기는 갑질 독소조항에 사인한 게 평생의 족쇄가 됐다. '이우영 작가 사건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회사가 77개 부가사업을 벌이는 동안 작가가 수익 배분받은 돈은 1200만원 정도”였다. 1960, 70년대 원작 배경을 현재로 바꿔 새 버전을 내고 싶다는 작가의 창작 의지조차 회사는 꺾어버렸다. 안타까운 선택을 하기 며칠 전 작가는 아내에게 “사람이 죽어야 이슈가 될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검정고무신’에 앞서 불공정 계약의 원조로 꼽히는 그림책 ‘구름빵’의 백희나 작가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작가에게 저작권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작품의 본질을 지키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백 작가는 2004년 ‘구름빵’ 출간 당시 1850만원을 받고 저작권 등 모든 권리를 출판사에 양도하는 ‘매절 계약’을 했고, 이후 ‘구름빵’은 애니메이션ㆍ뮤지컬 등으로 수천억원대의 부가가치를 올렸다. 작가는 저작권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이후 창작자가 유통업자 등에게 공정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구름빵 보호법’이 여러 건 발의됐으나 흐지부지됐다. 백 작가는 “정부가 이번에도 실태점검을 하겠다고 하는데 ‘구름빵’이 이슈됐던 10년 전과 똑같은 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1년 30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아사한 이후 프리랜서 창작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는 예술인복지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장성락 작가의 죽음이 표준계약서를 장려하는 법 개정으로 이어졌고, 이제 이우영 작가의 죽음이 창작자가 존중받는 공정하고 선진적인 저작권 시스템 정비로 이어진다면 그나마 헛되지 않은 죽음이 될까. 한류 강국 대한민국이 아직도 콘텐트산업 생태계의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는 상징적 사건이 바로 이들 작가의 죽음이다. 현재 국회에는 저작물의 수익이 계약 당시보다 현저히 많은 경우 창작자가 추가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저작권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문체부는 불공정 계약 방지를 위해 ‘저작권 법률지원 센터’ 구축 TF를 발족시켰고,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에 2차적 저작물 작성권 관련 내용을 넣겠다고 밝혔다. 과거 문체부는 “지난 8년 동안 온갖 이유를 대며 저작권법 개정 운동을 사실상 막았다”(하신아 웹툰작가노조 위원장)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에는 진짜 달라질지, 더 이상 ‘희망고문’은 없을지 지켜볼 일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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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컷칼럼] ‘나는 신이다’ 명과 암
■ 「 사이비 종교 실태 고발 다큐 파장 반향 크지만 선정성 논란 구조적 접근 부족도 아쉬워 」 울먹이는 여신도의 성폭행 피해 고발 인터뷰로 시작하는 첫 장면부터가 충격적이다. 사이비 종교의 실태를 파헤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얘기다. 다큐 최초로 국내 넷플릭스 TV 시리즈 1위에 오르며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예능 ‘피지컬: 100’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MBC(시사교양국)가 제작했다. 회사에서 제작이 엎어지자 조성현 PD가 넷플릭스를 두드렸다. 압권은 무수한 여신도에 대한 교주의 성폭력 의혹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복음선교회(JMS) 편이다. 메시아를 자처하는 JMS 정명석 총재는 2018~2019년 2명의 여신도에 대한 성폭력(준강간, 강제추행 등) 혐의로 구속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이다. 프로그램 공개 전 JMS 측은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으나 법원은 기각했다. 정 총재는 2009년에도 신도 성폭행 등의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출소한 바 있다. 정 총재는 관련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으나, 이원석 검찰총장은 “범행에 상응하는 엄정한 형벌이 선고돼 집행될 수 있도록 공소 유지에 최선을 다하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사이비 종교는 취약층을 집중적으로 파고들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JMS 신도들이 명문대를 포함한 대학가, 검사, 의사, 연예인 등 사회 고위층에 고루 퍼져 있다는 점도 충격적이다. ‘반JMS 운동’을 펴온 김도형 단국대 교수는 KBS ‘더 라이브’에서 “KBS PD와 성우도 현직 JMS 신도”라는 폭탄 발언을 해 진행자가 황급히 방송을 마무리하는 일이 벌어졌다(KBS는 진상조사와 상응 조치를 약속했다). 사이비 종교가 개인과 가족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공분이 커지면서 인터넷에는 ‘신도 색출’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그런데 프로그램의 사회적 파장, 성과와 무관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연출 태도는 논란거리다. JMS 편에서는 여신도들의 나체 목욕 장면, 성폭행 현장 대화 녹음, 성폭력 과정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나왔다. 오대양 집단 변사에서도 목맨 사체 등이 그대로 노출됐다. 물론 피해자들은 인터뷰 공개에 동의했으며, 높은 발언 수위 그대로 내보내 달라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성현 PD는 지난 10일 기자간담회에서 “실제 누군가가 당했던 피해 사실이다. 모자이크 화면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교단)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게 조작된 거짓말이라는) 방어 논리를 세워 나갈 거라 생각했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의 말대로 충격적인 만큼 파장이 큰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프로를 다 보고 나서도 정작 왜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사이비 종교가 활개 치는지, 그걸 용인하는 사회구조적 문제는 무엇인지, 교주의 성폭력을 신과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가스라이팅(세뇌)은 어떻게 가능한지, 종교의 자유와 사이비 종교 현상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등 본질적 질문들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건 어찌 봐야 할까. 피해자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제작진은 참혹한 피해의 전시·재연을 넘어 피해자 보호에 더 방점을 찍어야 했던 건 아닌지 의문이다.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실제 피해 장면은 최대한 절제하면서 구조적 문제에 집중해 성폭력 재현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리얼 나르코스 리포트’ 등 기왕의 넷플릭스 인기 고발 다큐들이 끔찍한 범죄 현장을 그대로 내보내 ‘참혹함의 상업화’란 비판을 받았던 것과 대비된다. “이건 선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참담함의 문제”(조PD)고, 이걸 선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더 선정적이라는 목소리도 있지만, 맥락이 제거된 채 자극적으로 소비될 가능성까지 고려하는 게 연출자의 윤리적 태도가 아닐까.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당한 피해자가 잘못이라는 목소리가 여전히 있다던데, 그것이야말로 사이비 종교의 작동 방식에 대해 이 다큐가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글 =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 = 안은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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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나는 신이다’ 명과 암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울먹이는 여신도의 성폭행 피해 고발 인터뷰로 시작하는 첫 장면부터가 충격적이다. 사이비 종교의 실태를 파헤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얘기다. 다큐 최초로 국내 넷플릭스 TV 시리즈 1위에 오르며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예능 ‘피지컬: 100’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MBC(시사교양국)가 제작했다. 회사에서 제작이 엎어지자 조성현 PD가 넷플릭스를 두드렸다. 사이비 종교의 실태를 파헤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중 정명석 JMS 총재 편. [넷플릭스 캡처] 압권은 무수한 여신도에 대한 교주의 성폭력 의혹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복음선교회(JMS) 편이다. 메시아를 자처하는 JMS 정명석 총재는 2018~2019년 2명의 여신도에 대한 성폭력(준강간, 강제추행 등) 혐의로 구속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이다. 프로그램 공개 전 JMS 측은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으나 법원은 기각했다. 정 총재는 2009년에도 신도 성폭행 등의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출소한 바 있다. 정 총재는 관련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으나, 이원석 검찰총장은 “범행에 상응하는 엄정한 형벌이 선고돼 집행될 수 있도록 공소 유지에 최선을 다하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사이비 종교는 취약층을 집중적으로 파고들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JMS 신도들이 명문대를 포함한 대학가, 검사, 의사, 연예인 등 사회 고위층에 고루 퍼져 있다는 점도 충격적이다. ‘반JMS 운동’을 펴온 김도형 단국대 교수는 KBS ‘더 라이브’에서 “KBS PD와 성우도 현직 JMS 신도”라는 폭탄 발언을 해 진행자가 황급히 방송을 마무리하는 일이 벌어졌다(KBS는 진상조사와 상응 조치를 약속했다). 사이비 종교가 개인과 가족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공분이 커지면서 인터넷에는 ‘신도 색출’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그런데 프로그램의 사회적 파장, 성과와 무관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연출 태도는 논란거리다. JMS 편에서는 여신도들의 나체 목욕 장면, 성폭행 현장 대화 녹음, 성폭력 과정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나왔다. 오대양 집단 변사에서도 목맨 사체 등이 그대로 노출됐다. 물론 피해자들은 인터뷰 공개에 동의했으며, 높은 발언 수위 그대로 내보내 달라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성현 PD는 지난 10일 기자간담회에서 “실제 누군가가 당했던 피해 사실이다. 모자이크 화면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교단)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게 조작된 거짓말이라는) 방어 논리를 세워 나갈 거라 생각했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의 말대로 충격적인 만큼 파장이 큰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프로를 다 보고 나서도 정작 왜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사이비 종교가 활개 치는지, 그걸 용인하는 사회구조적 문제는 무엇인지, 교주의 성폭력을 신과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가스라이팅(세뇌)은 어떻게 가능한지, 종교의 자유와 사이비 종교 현상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등 본질적 질문들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건 어찌 봐야 할까. 피해자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제작진은 참혹한 피해의 전시·재연을 넘어 피해자 보호에 더 방점을 찍어야 했던 건 아닌지 의문이다.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실제 피해 장면은 최대한 절제하면서 구조적 문제에 집중해 성폭력 재현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리얼 나르코스 리포트’ 등 기왕의 넷플릭스 인기 고발 다큐들이 끔찍한 범죄 현장을 그대로 내보내 ‘참혹함의 상업화’란 비판을 받았던 것과 대비된다. “이건 선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참담함의 문제”(조PD)고, 이걸 선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더 선정적이라는 목소리도 있지만, 맥락이 제거된 채 자극적으로 소비될 가능성까지 고려하는 게 연출자의 윤리적 태도가 아닐까.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당한 피해자가 잘못이라는 목소리가 여전히 있다던데, 그것이야말로 사이비 종교의 작동 방식에 대해 이 다큐가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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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장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내 침실 벽에는 잔 다르크의 명언이 걸려 있다. “나는 두렵지 않다. 이 일을 위해 태어났으므로.” 내 삶이 어떻게 전개되든 나는 살아가게 되어 있고, 내 삶이 어떻게 풀리든 나는 그것을 견뎌 내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조현병과 싸운 소설가 에즈메이 웨이준 왕의 자전적 에세이 『조율하는 나날들』 중. 작가는 예일대에 입학했으나 정신병동에 입원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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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장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넘쳐나고 행복한 사람은 적은 이유를 아는가. 불행은 손에 잡히고, 행복은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즐거운 일이 없다고 한탄만 할 게 아니라,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내야 한다. 커피 향이 행복감을 준다면 매일 아침 좋은 원두를 갈아 마시고, 일기 쓰기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면 좋은 필기도구로 매일 하루의 단상을 적어 보시라. 『논어로 여는 아침』(김훈종)의 제언이다. “관념에 머무르게 방치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만들어 손에 쥘 수 있을 때, 행복은 우리를 무시로 찾아올 것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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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장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가난하고 힘이 없고 고달프다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내면의 빛과 소박한 기품을/ 스스로 가꾸지 않으면 나 어찌 되겠는가/ 내 고귀한 마음과 진정한 실력과 인간의 위엄은/ 어떤 호화로운 장식과 권력과 영예로도/ 결코 도달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으니// 늘 단정히/늘 반듯이/ 늘 해맑게 새봄, 새날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을 다잡으며 박노해 시인의 ‘늘 단정히’를 읽는다. 오래전 초등학교 입학식 날 “가난과 불운이 네 눈빛을 흐리게 하지 말거라”던 어머니의 당부를 떠올리며 쓴 시의 마지막 두 연이다.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에 수록됐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