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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시평] 게릴라전 닮아 가는 여권의 선거 전략

    이현상 논설실장 물과 물고기의 관계. 마오쩌둥(毛澤東)이 했다는 이 말은 게릴라전의 핵심을 찌른다. 물자와 병력이 부족한 비정규군은 인민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 후 급격한 태세 전환을 하는 정부·여당을 보면서 떠오른 단어가 게릴라전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은 무조건 옳다”며 참모와 각료들에게 ‘민심의 바다’로 뛰어들 것을 주문하고 있다. 부족한 의석수와 30%대에 머무르는 지지율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여권이 총선을 앞두고 쏟아내는 이런저런 정책들은 의표를 찌른다. 그러나 다른 말로 하면 느닷없고 뜬금없다. 시작은 김포의 서울 편입이었다. 주식 공매도 금지, 업소용 전기료 동결과 대용량 산업용 전기료 인상, 일회용품 규제 백지화, 대주주 주식양도세 기준 완화 등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연금 개혁이나 근로시간 개편 같은 골치 아픈 문제들은 국회나 경사노위로 슬쩍 넘겼다. 사이사이 간주곡처럼 탐욕스러운 기업과 은행 때리기로 박자를 맞췄다. 그야말로 게릴라전을 닮았다.     ■  「 민심 명목으로 쏟아지는 정책들 변신보다는 급조·후퇴로 비쳐져 임기응변이 최종 승리 보장 못해 결국 비전·리더십으로 승부 내야 」    태세 전환의 속도와 내용이 어지럽다. 정부가 수행하던 ‘정규전’과는 180도 다르다. 환경이나 균형발전 등 우리 사회가 합의했던 미래 그림과도 모순된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가령, 윤석열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는 국토 균형발전이다. 지난 7월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가 출범했고, 9월에는 ‘지방시대 선포식’까지 열었다. 여당에서 김포 편입론이 나오고 사흘 뒤 윤 대통령은 대전에서 열린 ‘제1회 지방자치 및 균형발전의 날 행사’에 참석해 지역 교육과 의료를 강조했다. 그러나 김포의 그림자에 묻혀 대통령의 메시지는 존재감이 없어졌다.   불과 얼마 전 “공매도가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소리 높였던 금융위원장은 당과 용산의 채근에 입장을 바꿨다.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쯤이야 별거 아니라고 치자. 한국 경제의 ‘군사 교리’가 흔들리는 것이 진짜 문제다. 한국은 곡절이 있긴 했지만 시장경제라는 전투 지침에 따라 분투해 세계 10위권 경제를 일구었다. 선거철마다 이 지침이 요동치는 게 이제 당연해졌다. 대용량 산업용 전기료 외 인상 유보, 대주주 주식양도세 완화 등도 정공법을 벗어난 변칙 전술이다. 그 와중에 보인 사소한 작전 미스는 차라리 애교다. 카카오 갑질을 호소했던 택시운전기사가 대선 때 국민의힘 당직자였고, 은행 갑질에 눈물짓던 자영업자의 실체는 매출 100억원대 기업인이었다.   급조된 정책의 효과도 의심스럽다. 공매도 금지 다음 날 폭등했던 주가는 일일천하로 끝났고, 묘수로 여겼던 김포 편입은 다른 지역의 반발로 역효과를 걱정하게 생겼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대를 벗어날 기미가 없고, 여당 지지율도 제자리다. 그래도 뭔가 변하려는 노력, 민심 가까이 가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결과는 신통찮지만 노력은 가상하다고나 할까.   도덕 교과서처럼 총선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표를 얻어야 권력을 쟁취하는 정치제도에서 민심을 얻기 위한 정책은 불가피하다. 정책 전환이 필요하면 해야 하지만, 그에 이르기까지 고민의 과정을 보여주는 서사와 스토리텔링 또한 필요하다. 그런 전략과 노력이 없다면 유연한 변신이 아니라 무책임한 후퇴로 여겨질 뿐이다. 즉흥적이고 파편적인 정책은 어렵게 쌓아온 보수의 정체성마저 흔들 수 있다.   게릴라전은 분명 유용한 전술이지만 임기응변의 몇 개 전투가 전체 국면을 바꿀 수는 없다. 역사상 게릴라전이 효과를 거둔 전쟁이 몇몇 있지만, 최종 승리는 언제나 정규군의 몫이었다. 파리의 레지스탕스, 2차대전 때 이탈리아의 파르티잔은 훌륭하게 싸웠지만 연합군이 없었다면 의미 없는 희생에 그쳤을 것이다. 베트콩은 북베트남군이 밀고 내려와 승자로 남았고, 만주 유격대는 소련군의 힘으로 북한 장악에 성공했다. 앞으로 5개월 남은 총선이 게릴라전을 연상케 하는 무(無)맥락 정책 몇 개로 좌우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현재 여당의 모습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윤 대통령은 여의도 정치 문법에 익숙지 않고, 인요한 혁신위원장도 정치 경험이 사실상 없다. 혁신의 목표가 뭔지도 분명치 않은 상황이다. 대통령 스스로 정치 초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문가나 경험자의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더 꼬일 가능성마저 있다. 지금 여권에서 전체 상황을 조망하며 그림을 그리는 전략가가 있는지 의문이다. 선거전이 파편적 게릴라전이 돼서는 승산이 없다.   본질은 정치 리더십의 혁신이다. 얄팍한 정책으로 본질을 가린다면 역풍이 불 가능성이 크다. 헨리 키신저는 베트남전쟁 중 “정규군은 이기지 못하면 지는 거고, 게릴라는 안 지면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저성장과 양극화 위기에 빠진 한국을 ‘안 지면 그만’이라는 자세의 리더십이 이끌어 간다면 서글프지 않은가. 승부는 미래 비전과 이에 어울리는 리더십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즉 ‘정규전’에서 결정된다. 여든, 야든 마찬가지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11.16 00:53

  • [세컷칼럼] 저절로 통하는 정치는 없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즐겨 쓰던 붓글씨는 ‘경청’이었다. 아들인 이건희 회장에게도 가끔 선물했다고 한다. 기업을 취재하던 시절, 관련 기사를 썼더니 다음 날 삼성 홍보실에서 전화가 왔다. “敬聽(경청)이 아니라 傾聽(경청)입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다’와 ‘몸을 기울여 듣다’의 차이다. 둘 다 사전에 나오긴 한다. 듣는 건 마음의 행위라고 생각해 무심코 ‘敬聽’으로 썼는데, 아니었다. 홍보실 직원의 말이 걸작이었다. “몸 기울이지 않으면 듣고 있다는 걸 상대가 어찌 알겠습니까.”   ■  「 마치 민심 몰랐다는 듯 호들갑 쌍방향 소통 부족했다는 증거 “보여주기 정치는 없다”는 고집 ‘침묵의 권력’ 행사한 것 아닌가 」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후 여권 안팎에서 쇄신 요구가 쏟아진다. 국민의힘은 잠시나마 요란했는데, 용산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내심 충격을 받았을진 몰라도 내색은 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선거 결과에서 교훈을 찾아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를 추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였다. ‘변화’보다는 ‘차분’이라는 단어에 더 힘을 실었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태도가 여당에서 김기현 대표 체제 유지와 임명직 당직자 교체라는 어정쩡한 수습책으로 이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을 대표하는 태도 중 하나는 “쇼하지 않겠다”다. 수사로 말한다는 검사 출신이라 그런지, 정치인의 과시성 이벤트를 싫어한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국내 정치에 남북통일 문제를 이용하는 쇼는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비상경제민생회의를 TV 생중계하며 “쇼를 연출하거나 이런 거는 절대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정치적 고비 때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1월 이태원 참사 때는 “책임이라는 건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한다”는 논리로 ‘정치적 문책’을 거부했다. 검사 출신의 한계라는 지적에도 아랑곳없었다. 취임 1년 즈음 분위기 쇄신을 위한 개각론이 제기됐을 때도 “국면전환용 개각은 없다”고 못 박았다. 지지율이 갑자기 내려가도 ‘보여주기 정치’는 없다는 메시지를 낼 뿐이다. 비교적 담담한 보선 패배 반응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윤 대통령의 ‘쇼 혐오’는 ‘쇼통’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던 전임 문재인 정부와는 차별화 포인트다. 탁현민이라는 ‘걸출한’ 연출가를 뒀던 문재인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화려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광화문 호프집에서 시민들과 만나 맥주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임기 중 두 차례 ‘국민과의 대화’를 TV 생중계했다. 그럼에도 문 정부가 ‘불통’ 딱지를 못 뗀 것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했기 때문이다. ‘국민과의 대화’는 우호적인 패널 구성으로 ‘팬미팅’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 와중에 문 대통령은 현실과 동떨어진 ‘부동산 안정론’을 펼쳐 빈축을 샀다.   문제는 이런 쇼마저 아쉽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난해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이 윤 대통령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이었다. 지난해 11월 18일 중단된 출근길 질의응답(도어스테핑)은 재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소통의 기본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인데, 국민은 국무회의나 국가 행사에서나 대통령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듣는다. 몸은 청와대를 나왔지만, 마음은 청와대보다 더한 구중심처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말이 권력이듯 침묵도 권력이다. 말하고 싶을 때 입 열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입 다물 수 있는 것이 힘이다. 윤 대통령은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을 국민에게 행사한 셈이다. 용산은 이를 ‘묵묵함’이라고 쓰지만, 국민은 ‘답답함’이라고 읽는다. ‘의연함’이라고 말하지만, ‘오만’이라고 느낀다.    “용산만 쳐다보지 말고 쓴소리도 하라.” 여당의 강서 패배 후 한 신문에 나온 대통령실 관계자의 반응이다. 사실이라면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정말 대통령실이 분위기를 몰랐단 말인가. 매일같이 쏟아지는 여론조사는 쌓아두기만 하는 건가. 맥줏집에서 옆자리 테이블에 잠깐만 귀 기울이면 쉽게 짐작했을 민심이다. 집단편향에 빠져 듣고 싶은 것만 들었기 때문에 이런 어이없는 반응이 나온다.    “용산이 민심을 못 읽으면 시정을 요구해 관철시키겠다.” 2기 체제를 시작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말했다. 여당으로서 당연한 역할이다. 그러나 장삼이사라도 알 만한 이야기를 집권 정당이 큰마음 먹어야 대통령실에 전달하는 상황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에 종속돼 자율성을 잃은 우리 정당 시스템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땅히 할 말을 대단한 용기를 내야 할 수 있는 조직이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나. 팬덤 정치에 오염된 우리 정치가 어느새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여나 야나 마찬가지다.    쓴소리는 하는 쪽의 용기가 우선이겠지만, 듣는 쪽의 용기가 더 필요하다. 듣기 싫은 소리라도 반응해야 한다. 쇼라도 해야 한다. 몸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대통령실은 국민을 상대로 ‘침묵할 수 있는 권력’을 포기해야 한다.       글 = 이현상 논설실장,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2023.10.21 23:00

  • [중앙시평] 저절로 통하는 정치는 없다

    이현상 논설실장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즐겨 쓰던 붓글씨는 ‘경청’이었다. 아들인 이건희 회장에게도 가끔 선물했다고 한다. 기업을 취재하던 시절, 관련 기사를 썼더니 다음 날 삼성 홍보실에서 전화가 왔다. “敬聽(경청)이 아니라 傾聽(경청)입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다’와 ‘몸을 기울여 듣다’의 차이다. 둘 다 사전에 나오긴 한다. 듣는 건 마음의 행위라고 생각해 무심코 ‘敬聽’으로 썼는데, 아니었다. 홍보실 직원의 말이 걸작이었다. “몸 기울이지 않으면 듣고 있다는 걸 상대가 어찌 알겠습니까.”     ■  「 마치 민심 몰랐다는 듯 호들갑 쌍방향 소통 부족했다는 증거 “보여주기 정치는 없다”는 고집 ‘침묵의 권력’ 행사한 것 아닌가 」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후 여권 안팎에서 쇄신 요구가 쏟아진다. 국민의힘은 잠시나마 요란했는데, 용산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내심 충격을 받았을진 몰라도 내색은 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선거 결과에서 교훈을 찾아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를 추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였다. ‘변화’보다는 ‘차분’이라는 단어에 더 힘을 실었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태도가 여당에서 김기현 대표 체제 유지와 임명직 당직자 교체라는 어정쩡한 수습책으로 이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을 대표하는 태도 중 하나는 “쇼하지 않겠다”다. 수사로 말한다는 검사 출신이라 그런지, 정치인의 과시성 이벤트를 싫어한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국내 정치에 남북통일 문제를 이용하는 쇼는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비상경제민생회의를 TV 생중계하며 “쇼를 연출하거나 이런 거는 절대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정치적 고비 때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1월 이태원 참사 때는 “책임이라는 건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한다”는 논리로 ‘정치적 문책’을 거부했다. 검사 출신의 한계라는 지적에도 아랑곳없었다. 취임 1년 즈음 분위기 쇄신을 위한 개각론이 제기됐을 때도 “국면전환용 개각은 없다”고 못 박았다. 지지율이 갑자기 내려가도 ‘보여주기 정치’는 없다는 메시지를 낼 뿐이다. 비교적 담담한 보선 패배 반응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윤 대통령의 ‘쇼 혐오’는 ‘쇼통’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던 전임 문재인 정부와는 차별화 포인트다. 탁현민이라는 ‘걸출한’ 연출가를 뒀던 문재인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화려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광화문 호프집에서 시민들과 만나 맥주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임기 중 두 차례 ‘국민과의 대화’를 TV 생중계했다. 그럼에도 문 정부가 ‘불통’ 딱지를 못 뗀 것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했기 때문이다. ‘국민과의 대화’는 우호적인 패널 구성으로 ‘팬미팅’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 와중에 문 대통령은 현실과 동떨어진 ‘부동산 안정론’을 펼쳐 빈축을 샀다.   문제는 이런 쇼마저 아쉽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난해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이 윤 대통령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이었다. 지난해 11월 18일 중단된 출근길 질의응답(도어스테핑)은 재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소통의 기본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인데, 국민은 국무회의나 국가 행사에서나 대통령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듣는다. 몸은 청와대를 나왔지만, 마음은 청와대보다 더한 구중심처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말이 권력이듯 침묵도 권력이다. 말하고 싶을 때 입 열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입 다물 수 있는 것이 힘이다. 윤 대통령은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을 국민에게 행사한 셈이다. 용산은 이를 ‘묵묵함’이라고 쓰지만, 국민은 ‘답답함’이라고 읽는다. ‘의연함’이라고 말하지만, ‘오만’이라고 느낀다.   “용산만 쳐다보지 말고 쓴소리도 하라.” 여당의 강서 패배 후 한 신문에 나온 대통령실 관계자의 반응이다. 사실이라면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정말 대통령실이 분위기를 몰랐단 말인가. 매일같이 쏟아지는 여론조사는 쌓아두기만 하는 건가. 맥줏집에서 옆자리 테이블에 잠깐만 귀 기울이면 쉽게 짐작했을 민심이다. 집단편향에 빠져 듣고 싶은 것만 들었기 때문에 이런 어이없는 반응이 나온다.   “용산이 민심을 못 읽으면 시정을 요구해 관철시키겠다.” 2기 체제를 시작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말했다. 여당으로서 당연한 역할이다. 그러나 장삼이사라도 알 만한 이야기를 집권 정당이 큰마음 먹어야 대통령실에 전달하는 상황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에 종속돼 자율성을 잃은 우리 정당 시스템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땅히 할 말을 대단한 용기를 내야 할 수 있는 조직이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나. 팬덤 정치에 오염된 우리 정치가 어느새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여나 야나 마찬가지다.   쓴소리는 하는 쪽의 용기가 우선이겠지만, 듣는 쪽의 용기가 더 필요하다. 듣기 싫은 소리라도 반응해야 한다. 쇼라도 해야 한다. 몸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대통령실은 국민을 상대로 ‘침묵할 수 있는 권력’을 포기해야 한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10.19 01:00

  • [중앙시평] 감세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이현상 논설실장 7, 9월마다 나오는 주택분 재산세 고지서를 받고 놀랐다. 지난해보다 40% 가까이 줄었기 때문이다. 20% 정도 경감될 것이라는 정부 발표는 있었지만, 훨씬 더 큰 폭이었다. 집값 내린 탓이 컸다. 그러나 공시가격현실화율이나 공정시장가액비율 같은 부과 기준도 내렸다. 세금 적게 내는 건 좋은데, 이래서 나라 살림이 제대로 될까 살짝 걱정됐다.     ■  「 경제 침체로 세수 펑크 59조 예상 저성장 시대 구조적 문제 될 수도 재정 역할 커지는데 감세만 고집 경제에 득일지 실일지 따져봐야 」    종부세 내보는 게 소원(?)인 처지에서 이런 걱정이 오지랖일 수도 있겠다. 고가 주택이나 다주택자의 체감 경감 폭은 훨씬 더 크다. 국회예산정책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공시가격 15억원인 1주택자의 보유세(종부세 포함)는 2021년 450만원에서 올해 265만원으로 줄었다. 조정대상지역에 공시가격 7억5000만원짜리 아파트 두 채를 가진 사람의 보유세는 1473만원에서 358만원으로 1115만원이나 깎였다.   올해 ‘세수 펑크’가 59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추계가 나왔다. 작년 예산을 짤 때 생각했던 국세 수입과 14.8%나 차이 난다. 세금이 너무 많이 걷힌 재작년과 작년에도 두 자릿수 오차율이었다. 대규모 나라 살림을 정확히 가늠하기란 쉽지 않을 거다. 그래도 오차율은 통상 5~6% 정도였다. 그만큼 우리 경제가 요동쳤다는 방증이겠지만, 세수 당국의 실력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부족분을 지난해 남긴 돈(세계잉여금), 올해 남길 돈(불용액), 다른 주머닛돈(기금 여유 재원) 등으로 막겠다는 생각이다. 미봉책이다.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특히 외환 방파제 격인 외국환평형기금을 허물어서 세수 부족분을 메우겠다는 발상은 위험하기조차 하다. 미국 기준금리 인상이 멈추고 약달러 기조로 돌아서면(환율 하락) 외환 대책의 손발이 묶일 수 있다.   세수 펑크로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 것이 감세 정책이다. 야당은 세수 펑크의 원인 중 하나로 ‘부자 감세’를 지적한다. 정부는 억울해 한다. 감세 때문이 아니라 예상 밖 경기 침체와 부동산 위축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구조적 저성장 전환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피크 코리아’라는 말이 나오는 판이다. 만성적 세수 부족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감세가 경제를 살릴 수 있느냐는 경제학계의 묵은 논쟁거리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 감세 정책의 근거에는 ‘래퍼 곡선’이 있었다. 세수와 세율의 관계를 ‘역(逆) U’ 자 모양으로 그린 곡선이다. 적정 세율(뒤집어 놓은 U자의 정점)을 지나면 세율이 높을수록 세수는 오히려 줄어든다는 설명 틀이다. 직관적으론 그럴듯해 보여도 현실 적용은 ‘글쎄’였다. 무엇보다 세수가 정점을 이루는 적정 세율을 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레이건 정부는 최고 소득세율을 70%에서 28%로 낮추는 등 감세 정책을 폈지만 임기 중 재정 적자는 더 커졌다. 그 고통을 빈곤층이 떠안았다. ‘복지 여왕’이라는 말로 조롱당하기까지 했다. 민주당 성향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부자 감세론에 대해 ‘때만 되면 되살아나는 좀비 경제학’이라는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런 독설까진 아니더라도 감세가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생각은 따져볼 게 많다. 윤석열 정부는 지속적 감세 정책을 펴면서 법인세, 소득세, 종부세, 가업상속공제 등을 손봤다. 자녀 결혼 자금에 매기는 증여세까지 완화했다. 지난해 세법 개정을 통해 5년간 줄어드는 세수가 60조원이 넘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작년만큼 크진 않지만 올해도 2028년까지 5년간 3조원 넘는 감세안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곳간이 비면서 꼭 써야 할 데도 못 쓰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16.6%나 삭감한 게 대표적이다. R&D 예산은 외환위기 때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줄어든 적이 없었다. 농부가 굶어 죽어도 베고 죽는다는 종자 같은 것이었다. 이런 예산이 ‘카르텔’ 딱지가 붙어 싹둑 잘려나갔다.   감세를 우습게 보면 큰코다친다. 지난해 9월 리즈 트러스 당시 영국 총리는 섣부른 감세안을 발표했다가 후폭풍으로 취임 50일 만에 사퇴하고 말았다. 부족한 세수 대책이 없어 파운드화 폭락 등 대혼란을 겪었다. 세출을 줄이고 이런저런 방편으로 막아 보겠다는 우리 정부와는 다르다지만, 결국 임시변통이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반면교사가 아닐 수 없다.   정부는 ‘부자 감세’라는 말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지만, 쉽게 볼 프레임이 아니다. 세금이란 게 본래 부자들의 몫이 큰 만큼 감세 혜택 역시 이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감세의 낙수 효과가 진짜 있는지, 거둘 덴 거두고 깎을 덴 깎고 있는지, 사회적 위화감 같은 부작용은 없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재정의 역할은 외면한 채 감세라는 사탕만 남발하면 경제는 기능 부전(不全)에 빠지고 만다. 우파=감세, 좌파=증세라는 낡은 도그마에 매달릴 때가 아니다. 유연하게, 실용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09.21 00:50

  • [세컷칼럼]피크 차이나, 피크 코리아

    우리에게는 흔히 ‘IMF 사태’로 통용되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는 세계 경제학계에서는 ‘아시아 금융위기’로 불린다. 전 세계적 위기로 전이되지 않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위기의 원인에 경제 후발 주자로서 아시아 국가의 발전 특성이 결부됐다는 의미도 있다. 이런 시각의 대표적 경제학자가 당시 위기를 예견했던 미국의 폴 크루그먼이다.   ■  「 부동산·부채 주도 성장 중국 경제 효율 낮은 화차에 석탄 퍼부은 격 우리 경제도 생산성에 의문부호 경제활력 되살릴 큰 그림 나와야 」    크루그먼은 ‘총요소생산성 정체’에서 위기의 징후를 읽었다. 총요소생산성은 노동, 자본 같은 단일 요소로는 파악하기 힘든 복합적 생산성을 말한다. 기술 혁신, 노사·경영체제, 법·제도 등 한 국가의 ‘보이지 않는 능력’이 총체적으로 반영된 개념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노동력과 자본력 투입을 늘려 빠른 성장을 이뤄냈지만, 어느 순간 한계에 봉착했다. 석탄으로 달리는 화차에 비유해볼 수 있겠다. 석탄을 퍼넣으며 속도를 내던 화차가 석탄이 떨어지자 뚝 멈췄다. 세상은 낡은 증기 기관 시대에서 고속 열차 시대로 이미 바뀐 걸 몰랐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크루그먼의 지적은 아직도 유효할까. 유감스럽지만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번엔 중국이다. 중국은 90년대 후반의 아시아 금융위기를 피했다. 시장은 개방했지만 금융의 문은 닫아걸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비껴간 중국은 한국이 경제위기 충격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데 든든한 시장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동안 누적된 모순과 문제점이 이제 슬슬 나타날 조짐이다. 헝다(恒大)나 비구이위안(碧桂園) 같은 부동산 위기가 그 현장이다.      2015~19년 중국의 총요소생산성 평균 증가율은 OECD 국가보다 1.8%포인트나 낮았다(한국경제연구원). 덩치는 커졌지만 효율성이 한참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2008~21년 중국의 인프라 및 경질 자산(hard asset)에 대한 투자는 GDP의 44%. 전 세계 평균 25%, 미국 20%의 배 수준이다. 중국 경제는 석탄을 퍼부어 질주하는 화차였던 셈이다. 점점 세지는 미·중 갈등은 중국에 불리한 요소다. 미국에 맞서 자립경제를 추구할수록 기술혁신이 더 어려워지는 딜레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첨단기술 약소국의 비애다. 중국의 GDP 대비 수입 비중이 1%포인트 줄어들면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0.3%포인트 감소할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그렇다고 중국 경제가 당장 무너져 내릴 부실 건물은 아니다. 부채 비율이 높거나 유동성이 떨어지는 업체에 대한 은행 대출을 막은 ‘3개 레드라인’(三道紅線)이 부동산 위기를 불렀지만, 중국은 의외로 느긋하다. 기준금리 격인 대출우대금리(LPR)도 찔끔 내리는 데 그쳤다. 최근 공산당 기관지 추스(求是)가 한동안 사라졌던 시진핑 주석의 정치구호 공동부유(共同富裕·함께 잘살자)를 다시 꺼낸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위기가 어렵긴 하지만 관리 가능하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최근의 경제 상황을 ‘기복 있는 발전, 곡절 있는 전진(波浪式發展, 曲折式前進)’의 과정이라고 정리했다.      중국 경제가 정점을 쳤다는 ‘피크 차이나’론은 섣부르다. 최근 중국 경제 난맥을 ‘차이나 런’의 신호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하다. 중국 같은 거대 경제가 중진국까지 오른 이상 성장률 하향은 불가피하다. 중국 시장에서 우리 상품의 위치가 과거만 못 한 것이 중국의 위축 때문인지, 우리 상품의 경쟁력 저하 때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아직도 우리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중국의 40년 호경기 성장 모델’이 끝났다는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사에 등장한 전망치 중 하나가 향후 수년간 중국 성장률이 4% 미만일 것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예측이다. 중국을 불안한 눈으로 보는 한국은? 2020년대엔 2.2%, 2030년 이후에 1%대가 IMF 전망이다. 이 수치로만 놓고 보면 ‘피크 차이나’보다는 ‘피크 코리아’가 더 눈앞에 와 있다. 중국도 걱정이지만, 진짜 걱정해야 할 건 우리 처지다.      한국이 ‘IMF 사태’로부터 빠르게 회복했고 금융 체질도 개선된 건 사실이지만, 경제 효율성은 여전히 의문의 대상이다. 지난 2월 전경련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총요소생산성은 G5 국가(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보다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1이라면, 우리는 0.614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차이가 큰 항목은 ‘사회적 자본’과 ‘규제 개혁’이었다. 정부나 제도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고, 규제가 민간의 투자 활력을 옭아매고 있다는 이야기다. GDP보다 많은 가계 부채가 소비를 짓누르는 데도 부동산 연착륙 명분으로 문제 해결에는 소극적이다. 대통령의 ‘카르텔’ 서슬에 연구개발(R&D) 예산은 확 깎일 조짐이다. 경제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고 혁신의 활력을 키울 담대한 정책 구상이 없으면 ‘피크 코리아’는 그만큼 더 가까워진다. 폴 크루그먼의 경고는 아직 우리 주위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글=이현상 논설실장 그림=임근홍 인턴기자

    2023.08.29 23:00

  • [중앙시평] 피크 차이나, 피크 코리아

    이현상 논설실장 우리에게는 흔히 ‘IMF 사태’로 통용되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는 세계 경제학계에서는 ‘아시아 금융위기’로 불린다. 전 세계적 위기로 전이되지 않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위기의 원인에 경제 후발 주자로서 아시아 국가의 발전 특성이 결부됐다는 의미도 있다. 이런 시각의 대표적 경제학자가 당시 위기를 예견했던 미국의 폴 크루그먼이다.     ■  「 부동산·부채 주도 성장 중국 경제 효율 낮은 화차에 석탄 퍼부은 격 우리 경제도 생산성에 의문부호 경제활력 되살릴 큰 그림 나와야 」    크루그먼은 ‘총요소생산성 정체’에서 위기의 징후를 읽었다. 총요소생산성은 노동, 자본 같은 단일 요소로는 파악하기 힘든 복합적 생산성을 말한다. 기술 혁신, 노사·경영체제, 법·제도 등 한 국가의 ‘보이지 않는 능력’이 총체적으로 반영된 개념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노동력과 자본력 투입을 늘려 빠른 성장을 이뤄냈지만, 어느 순간 한계에 봉착했다. 석탄으로 달리는 화차에 비유해볼 수 있겠다. 석탄을 퍼넣으며 속도를 내던 화차가 석탄이 떨어지자 뚝 멈췄다. 세상은 낡은 증기 기관 시대에서 고속 열차 시대로 이미 바뀐 걸 몰랐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크루그먼의 지적은 아직도 유효할까. 유감스럽지만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번엔 중국이다. 중국은 90년대 후반의 아시아 금융위기를 피했다. 시장은 개방했지만 금융의 문은 닫아걸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비껴간 중국은 한국이 경제위기 충격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데 든든한 시장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동안 누적된 모순과 문제점이 이제 슬슬 나타날 조짐이다. 헝다(恒大)나 비구이위안(碧桂園) 같은 부동산 위기가 그 현장이다.   2015~19년 중국의 총요소생산성 평균 증가율은 OECD 국가보다 1.8%포인트나 낮았다(한국경제연구원). 덩치는 커졌지만 효율성이 한참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2008~21년 중국의 인프라 및 경질 자산(hard asset)에 대한 투자는 GDP의 44%. 전 세계 평균 25%, 미국 20%의 배 수준이다. 중국 경제는 석탄을 퍼부어 질주하는 화차였던 셈이다. 점점 세지는 미·중 갈등은 중국에 불리한 요소다. 미국에 맞서 자립경제를 추구할수록 기술혁신이 더 어려워지는 딜레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첨단기술 약소국의 비애다. 중국의 GDP 대비 수입 비중이 1%포인트 줄어들면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0.3%포인트 감소할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그렇다고 중국 경제가 당장 무너져 내릴 부실 건물은 아니다. 부채 비율이 높거나 유동성이 떨어지는 업체에 대한 은행 대출을 막은 ‘3개 레드라인’(三道紅線)이 부동산 위기를 불렀지만, 중국은 의외로 느긋하다. 기준금리 격인 대출우대금리(LPR)도 찔끔 내리는 데 그쳤다. 최근 공산당 기관지 추스(求是)가 한동안 사라졌던 시진핑 주석의 정치구호 공동부유(共同富裕·함께 잘살자)를 다시 꺼낸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위기가 어렵긴 하지만 관리 가능하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최근의 경제 상황을 ‘기복 있는 발전, 곡절 있는 전진(波浪式發展, 曲折式前進)’의 과정이라고 정리했다.   중국 경제가 정점을 쳤다는 ‘피크 차이나’론은 섣부르다. 최근 중국 경제 난맥을 ‘차이나 런’의 신호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하다. 중국 같은 거대 경제가 중진국까지 오른 이상 성장률 하향은 불가피하다. 중국 시장에서 우리 상품의 위치가 과거만 못 한 것이 중국의 위축 때문인지, 우리 상품의 경쟁력 저하 때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아직도 우리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중국의 40년 호경기 성장 모델’이 끝났다는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사에 등장한 전망치 중 하나가 향후 수년간 중국 성장률이 4% 미만일 것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예측이다. 중국을 불안한 눈으로 보는 한국은? 2020년대엔 2.2%, 2030년 이후에 1%대가 IMF 전망이다. 이 수치로만 놓고 보면 ‘피크 차이나’보다는 ‘피크 코리아’가 더 눈앞에 와 있다. 중국도 걱정이지만, 진짜 걱정해야 할 건 우리 처지다.   한국이 ‘IMF 사태’로부터 빠르게 회복했고 금융 체질도 개선된 건 사실이지만, 경제 효율성은 여전히 의문의 대상이다. 지난 2월 전경련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총요소생산성은 G5 국가(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보다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1이라면, 우리는 0.614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차이가 큰 항목은 ‘사회적 자본’과 ‘규제 개혁’이었다. 정부나 제도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고, 규제가 민간의 투자 활력을 옭아매고 있다는 이야기다. GDP보다 많은 가계 부채가 소비를 짓누르는 데도 부동산 연착륙 명분으로 문제 해결에는 소극적이다. 대통령의 ‘카르텔’ 서슬에 연구개발(R&D) 예산은 확 깎일 조짐이다. 경제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고 혁신의 활력을 키울 담대한 정책 구상이 없으면 ‘피크 코리아’는 그만큼 더 가까워진다. 폴 크루그먼의 경고는 아직 우리 주위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08.24 01:00

  • [중앙시평] 무엇이 그들의 뇌를 게으르게 만들었나

    이현상 논설실장 독고다이. 홍준표 대구시장의 별명이다. 일본어로 ‘특공대’를 뜻한다고 한다. 홍 시장도 은근히 이 별명을 좋아하는 듯하다. 독불장군이라는 비판에 “독불장군은 부하라도 있지, 나는 적진을 단독으로 휘젓는 일당백 용사”라고 맞받아친 적도 있다. 그 별명답게 홍 시장은 정치적 고비를 개인기와 정치감각으로 넘어왔다. 지난 대선 당내 경선에서는 당심(선거인단)에서 패했지만, 민심(여론조사)에서는 앞섰다. 특히 2030 표심에서는 특유의 입심과 소통으로 압도적 우위를 보였다.     ■  「 여야 정치권의 잇따른 실언 논란 진영 정치에 기댄 안일함 아닌가 ‘쉬운 길’ 가지 않겠다는 윤 정부 정치 언어에서도 차별점 보여야 」    그런 홍 시장이 물난리 중 골프로 물의를 빚은 것은 의외다. 골프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오만한 태도였다. 당의 징계 절차에 응한다면서도 SNS에 ‘과하지욕’(跨下之辱·가랑이 밑을 기는 치욕)이라는 단어를 올렸다가 삭제했다. 자신이 한고조 유방의 대장군 한신이라도 된다는 말일까. 태도를 탓하기 전에 감각이 의심된다. 몸담은 지역의 정치적 지형이 일방적으로 기우는 곳이 아니었다면 그의 오기가 이렇게 작동했을까. 예민했던 정치 감각이 안온한 둥지 속에서 어느새 무뎌진 걸까.   최근 여야 정치권의 실언이 이어지고 있다. 프로이트는 “실수는 잠재의식의 표출”이라고 했다. 말실수의 한자락만 들치면 말 주인공의 무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실업급여는 시럽급여”라는 말이다. 그 말이 나온 공청회에서 노동부 직원이 “남자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용센터로) 오시는데, 여자들, 계약기간 만료, 젊은 청년들은 이 기회에 쉬겠다고 온다. 실업급여 받는 중에 해외여행 가서 선글라스를 사서 즐긴다”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 여당 정책위원장은 ‘시럽급여’라는 멋진(?) 카피(문안)를 만들었다. 여성·청년·계약직에 대한 편견을 한꺼번에 드러냈다. 실업급여에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니다. 재정도 걱정이고, 도덕적 해이 소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개선할 점이 있다면 진지하게 검토해 고쳐나가면 된다. 가벼운 말 한마디로 실업자의 상처를 헤집을 일이 아니다. 사회적 안전망에 기대어 힘들게 고개를 넘는 사람들에게 실업급여가 달콤한 시럽은커녕 쓰디쓴 모멸이 됐다.   양평고속도로 백지화를 “일종의 충격요법”이라고 한 국토부 관계자의 말도 불쾌하다. 양평군민과 국민이 실험 대상인가. 사업재개의 뜻이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다. 사실 무례함은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느닷없이 백지화 선언을 할 때부터였다. 아무리 야당의 시비가 터무니없다 해도 설명 대신 다짜고짜 싸움을 건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당사자야 정치적 존재감을 뿜뿜 드러냈겠지만, 국민 편익에 기여할 조(兆) 단위 국책 사업이 존재감 과시의 도구가 돼버렸다.   한심한 것은 이런 실수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탄핵 기각으로 복귀하긴 했으나,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경찰이나 소방관을 미리 배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은 헌법재판소로부터도 지적받을 정도로 부적절했다. 그런데도 수해 중 대통령실은 “(대통령이) 서둘러 귀국한다고 상황을 바꾸기 어렵다”고 했다. 그 며칠 뒤 김영환 충북지사가 “(오송 참사 현장에) 갔다고 해도 상황이 바뀔 것은 없었다”고 똑같은 실언을 했다. 뭐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다.   물론 실언이 여당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대통령이 나라를 궁평지하차도로 밀어 넣는다” 식의 막말은 민주당의 전매특허처럼 돼버렸다. ‘핵 폐수’ ‘세슘 우럭’ ‘× 먹을지언정’ 같은 선동의 언어도 서슴지 않는다. 여당으로선 거대 야당의 언어폭력, 가짜뉴스에 ‘공자 같은 말씀’으로만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객관화다. 정치란 결국 언어 행위다. 그것도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미디어에 증폭돼 나타나는 언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들리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정치 언어다.   뇌는 인체 중 가장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장기다. 몸무게의 2%에 불과하지만, 20%의 열량을 사용한다고 한다. 인간이 이성과 논리보다는 편견과 느낌에 더 의존하는 것은 그 방법이 에너지가 덜 들기 때문이다. 정치가 ‘진영 논리’에 기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도층 설득보다 힘과 노력이 덜 들기 때문이다. 진영 논리는 사람의 뇌를 게으르게 한다. 우리/상대의 이분법 속에 논리 회로는 멈춘다. ‘진영 논리’라곤 했지만, 사실 진영 싸움은 ‘논리의 빈곤’을 걱정하지 않는다. ‘싸움의 빈곤’을 걱정할 뿐이다. 여야의 잦은 실언은 진영 논리에 기대어 쉽고 즉자적인 정치에 몰두하는 ‘게으른 뇌’의 소산은 아닌가.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처럼 ‘쉬운 길’은 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선거에 지더라도 미래 세대에 부담을 주는 나랏빚을 더 늘리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말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비판에 대한 대응 방식은 문 정부의 ‘전 정부 탓’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는다는 니체의 경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07.27 01:02

  • [세컷칼럼] 대한민국 조롱하는 벌처펀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폴 싱어 회장은 명문 로체스터대 심리학과와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투자 기법은 심리와 법이 교묘하게 얽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각한 채무 위기를 겪던 아르헨티나 국채에 투자해 막대한 이익을 거둔 것도 그런 예다.    엘리엇은 1990년대 중후반 액면가 20% 수준에 아르헨티나 국채를 사들였다. 2001년 아르헨티나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 뒤 채권자 93%가 액면가 3분의 1 정도만 받기로 타협했지만, 엘리엇은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국채 보유자들이 사라질수록 끝까지 버틴 자신은 유리해질 것으로 봤다. 죄수의 게임이었다.   ■  「 ISDS 소송서 승리 선언한 엘리엇 한국을 부패국 묘사, 오만한 태도 정부는 당연히 불복 절차 밟아야 투기자본에 대한 방어대책 절실 」   이런 배짱을 받친 것은 ‘창조적’ 소송 기법이다. 엘리엇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의 준비금, 연기금은 물론이고 미국 소재 아르헨티나 위성발사대, 아프리카 가나에 입항한 군함까지 압류를 시도했다(군함은 실제로 두 달간 억류됐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아르헨티나에 압박을 주기엔 충분했다. 엘리엇은 14년 소송전 끝에 2015년 아르헨티나로부터 24억 달러를 받아냈다. 투자 원금 대비 1270%의 초고수익이었다.    이런 ‘심리와 법’의 고수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도발했다. 정부의 1300억원 배상 책임(이자 및 소송비용 포함)으로 결론 난 삼성물산 관련 ISDS(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 중재판정 직후 ‘승리 선언문’을 냈다. “아시아에서 주주행동주의 투자회사가 최고위층의 부패 범죄행위에 대해 승리한 최초의 분쟁 사례”라는 자랑과 함께 “한국 정부가 이번 판정을 교훈 삼아 부패와 계속 싸워나가기 바란다” 같은 주제넘은 충고까지 했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름까지 들먹였다. “(이들의) 검찰 재직 시절 수사로 위법이 입증된 사건.” 세계 경제 10위에 자유민주주의 동맹의 한 축을 자부하는 국가가 일개 투기자본으로부터 조롱받은 꼴이 됐다. 자기 땅에 공장을 지으라는 미국 정부 요구에 사업 기밀 공개 압박까지 받으면서도 냉가슴만 앓는 우리 기업 처지와 대비되지 않는가. 도를 넘는 방자함으로 우리 정부의 평정심을 흩트려 놓겠다는 전략인가.    수모의 빌미를 우리가 제공한 측면이 없지 않다. 2015년 엘리엇의 삼성물산 합병 반대는 우여곡절 끝에 엘리엇의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사들였던 엘리엇은 손실을 본 채 한국을 떴다. 그러나 이듬해 시작된 이른바 국정농단 수사가 반전의 계기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묵시적 청탁’ ‘제3자 뇌물’이라는 이례적 혐의가 적용됐다. 수사와 재판 결과에 시비 걸기는 힘들지만, 그런 혐의 적용이 ‘정치적’이라고 의심하는 국민도 상당수 있다. 이 수사 및 재판 결과를 엘리엇은 중재 과정에서 자신들의 논거로 이용했다. 우리 스스로 엘리엇에 무기를 쥐어준 셈이 됐다.    PCA(국제상설중재재판소) 중재판정부의 공정성과 법 논리도 따져볼 게 수두룩하다.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영본부장 등이 위법 행위가 확정됐지만, 그 행위가 국민연금의 합병 찬반 의사를 굴절시켰는지는 증거가 없다. 이와 관련해 서울중앙지법은 삼성물산 개인투자자 72명이 낸 국가 상대 손배소에서 “찬반 최종 결정권은 국민연금 투자위원회에 있었다”는 1심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우리 정부가 이번 중재판정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일대 사법적 혼란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설령 국민연금의 선택이 굴절됐다 치자. 그러나 그 굴절이 주총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는지는 또 따져봐야 한다. 2015년 5월 17일 삼성물산 주총에서 나온 합병 찬성률은 69.53%였다. 당시 주총 참석률(83.57%) 등을 고려했을 때 전체 지분의 55.71%가 찬성하면 합병 건은 통과될 수 있었다(합병 특별결의의 경우 참석주 3분의 2 찬성이 필요). 당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지분율은 11.21%였다. 설혹 국민연금이 반대했더라도 58% 찬성률로 합병안 통과가 가능했다는 산술적 계산이 나온다. 물론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의 위법 행위가 결정을 뒤집었고, 이 바람에 막대한 손해를 봤다는 엘리엇의 주장에 쉬 동의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중재판정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정부의 조처’로 봤다. 판정이 그대로 확정되면 기금 규모가 100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의 투자 활동에 큰 제약이 걸릴 수 있다. 자신들에 불리한 결정이 날 때마다, 혹은 관련 공무원의 개인적 비리·일탈이 벌어질 때마다 해외 투기자본이 시비 걸 가능성이 커진다.    정부는 당연히 불복 절차에 나서야 한다. 낮은 이의제기 수용률, 소송 비용이나 이자를 따지기에 앞서 국가의 체면이 걸린 문제다. 무엇보다 우리 기업의 미래엔 아무 관심 없이 알짜배기 기업의 현재 빼먹기에만 몰두하는 해외 투기자본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벌처펀드의 봉이 돼서는 우리의 성장과 일자리가 위험해진다.       글=이현상 논설실장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7.02 23:00

  • [중앙시평] 대한민국 조롱하는 벌처펀드

    이현상 논설실장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폴 싱어 회장은 명문 로체스터대 심리학과와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투자 기법은 심리와 법이 교묘하게 얽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각한 채무 위기를 겪던 아르헨티나 국채에 투자해 막대한 이익을 거둔 것도 그런 예다.   엘리엇은 1990년대 중후반 액면가 20% 수준에 아르헨티나 국채를 사들였다. 2001년 아르헨티나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 뒤 채권자 93%가 액면가 3분의 1 정도만 받기로 타협했지만, 엘리엇은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국채 보유자들이 사라질수록 끝까지 버틴 자신은 유리해질 것으로 봤다. 죄수의 게임이었다.     ■  「 ISDS 소송서 승리 선언한 엘리엇 한국을 부패국 묘사, 오만한 태도 정부는 당연히 불복 절차 밟아야 투기자본에 대한 방어대책 절실 」    이런 배짱을 받친 것은 ‘창조적’ 소송 기법이다. 엘리엇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의 준비금, 연기금은 물론이고 미국 소재 아르헨티나 위성발사대, 아프리카 가나에 입항한 군함까지 압류를 시도했다(군함은 실제로 두 달간 억류됐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아르헨티나에 압박을 주기엔 충분했다. 엘리엇은 14년 소송전 끝에 2015년 아르헨티나로부터 24억 달러를 받아냈다. 투자 원금 대비 1270%의 초고수익이었다.   이런 ‘심리와 법’의 고수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도발했다. 정부의 1300억원 배상 책임(이자 및 소송비용 포함)으로 결론 난 삼성물산 관련 ISDS(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 중재판정 직후 ‘승리 선언문’을 냈다. “아시아에서 주주행동주의 투자회사가 최고위층의 부패 범죄행위에 대해 승리한 최초의 분쟁 사례”라는 자랑과 함께 “한국 정부가 이번 판정을 교훈 삼아 부패와 계속 싸워나가기 바란다” 같은 주제넘은 충고까지 했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름까지 들먹였다. “(이들의) 검찰 재직 시절 수사로 위법이 입증된 사건.” 세계 경제 10위에 자유민주주의 동맹의 한 축을 자부하는 국가가 일개 투기자본으로부터 조롱받은 꼴이 됐다. 자기 땅에 공장을 지으라는 미국 정부 요구에 사업 기밀 공개 압박까지 받으면서도 냉가슴만 앓는 우리 기업 처지와 대비되지 않는가. 도를 넘는 방자함으로 우리 정부의 평정심을 흩트려 놓겠다는 전략인가.   수모의 빌미를 우리가 제공한 측면이 없지 않다. 2015년 엘리엇의 삼성물산 합병 반대는 우여곡절 끝에 엘리엇의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사들였던 엘리엇은 손실을 본 채 한국을 떴다. 그러나 이듬해 시작된 이른바 국정농단 수사가 반전의 계기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묵시적 청탁’ ‘제3자 뇌물’이라는 이례적 혐의가 적용됐다. 수사와 재판 결과에 시비 걸기는 힘들지만, 그런 혐의 적용이 ‘정치적’이라고 의심하는 국민도 상당수 있다. 이 수사 및 재판 결과를 엘리엇은 중재 과정에서 자신들의 논거로 이용했다. 우리 스스로 엘리엇에 무기를 쥐어준 셈이 됐다.   PCA(국제상설중재재판소) 중재판정부의 공정성과 법 논리도 따져볼 게 수두룩하다.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영본부장 등이 위법 행위가 확정됐지만, 그 행위가 국민연금의 합병 찬반 의사를 굴절시켰는지는 증거가 없다. 이와 관련해 서울중앙지법은 삼성물산 개인투자자 72명이 낸 국가 상대 손배소에서 “찬반 최종 결정권은 국민연금 투자위원회에 있었다”는 1심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우리 정부가 이번 중재판정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일대 사법적 혼란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설령 국민연금의 선택이 굴절됐다 치자. 그러나 그 굴절이 주총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는지는 또 따져봐야 한다. 2015년 5월 17일 삼성물산 주총에서 나온 합병 찬성률은 69.53%였다. 당시 주총 참석률(83.57%) 등을 고려했을 때 전체 지분의 55.71%가 찬성하면 합병 건은 통과될 수 있었다(합병 특별결의의 경우 참석주 3분의 2 찬성이 필요). 당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지분율은 11.21%였다. 설혹 국민연금이 반대했더라도 58% 찬성률로 합병안 통과가 가능했다는 산술적 계산이 나온다. 물론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의 위법 행위가 결정을 뒤집었고, 이 바람에 막대한 손해를 봤다는 엘리엇의 주장에 쉬 동의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중재판정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정부의 조처’로 봤다. 판정이 그대로 확정되면 기금 규모가 100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의 투자 활동에 큰 제약이 걸릴 수 있다. 자신들에 불리한 결정이 날 때마다, 혹은 관련 공무원의 개인적 비리·일탈이 벌어질 때마다 해외 투기자본이 시비 걸 가능성이 커진다.   정부는 당연히 불복 절차에 나서야 한다. 낮은 이의제기 수용률, 소송 비용이나 이자를 따지기에 앞서 국가의 체면이 걸린 문제다. 무엇보다 우리 기업의 미래엔 아무 관심 없이 알짜배기 기업의 현재 빼먹기에만 몰두하는 해외 투기자본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벌처펀드의 봉이 돼서는 우리의 성장과 일자리가 위험해진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06.29 01:03

  • [세컷칼럼] 거부권에 갇힌 민주당의 부조리 정치

    승산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에겐 비장미가 있다. 알베르 카뮈가 수필 ‘시시포스 신화’에서 조명한 부조리의 철학이다. 그러나 국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정당이 무망한 싸움을 반복한다면 어떨까. 자신들의 정치 철학을 과시하고 지지 기반을 넓히는 효용이 있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상대에 가할 타격만 생각하면서 자기가 입는 내상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해의 셈법이라면. 이건 비장미도 뭣도 아니다. 그냥 부조리일 뿐이다.   ■  「 실패 알면서 덤비는 시시포스인가 최선 힘들면 차선 모색이 책임정치 대안 정당의 이미지만 갈수록 훼손 대통령실도 자제의 덕성 발휘해야 」   “이 법에 정부와 여당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입법부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5월 24일 민주당 소속 전해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노란봉투법의 본회의 부의 요구안 표결을 강행하면서 한 말이다. “옳든 그르든 답이 있어야 책임지는 것이 입법부의 역할”이라는 언급도 덧붙였다. 무슨 말일까. ‘그른 답’이라도 일단 내놓으면 책임을 다했다는 이야기인가. 이거야말로 ‘면피 정치’ ‘알리바이 정치’ 아닌가. 파업 장려법이라는 이 법이 용산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곤 전 위원장도 생각지 않았을 터다. 굴러내릴 줄 알면서도 밀어 올린 시시포스의 바위인가. 비장미는커녕 자기 합리화만 보인다.    21대 국회 후반기 들어 법사위 심사를 건너뛰고 본회의에 직회부된 법안은 모두 11건이다. 역대 가장 많은 숫자다. 이미 양곡법, 간호법은 대통령 거부권 문턱에서 폐기됐다.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 방송법, 화물자동차법(안전운임제) 개정안도 비슷한 길을 밟을 공산이 크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윤석열 대통령이 이들 논란의 법안에 서명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임기가 끝나도 당장 사정이 바뀌기는 어렵다. 내년 총선 결과가 야당에 유리하게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툭하면 국회 일을 법대(法臺)로 가져가는 ‘정치의 사법화’가 문제지만, 사법 환경도 야당에 녹록지 않다. 윤 대통령 임기 중 대법관과 재판관 상당수가 교체될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점점 보수적 색채가 짙어질 게 뻔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타협을 통해 차선이라도 모색하는 게 원내 1당의 책임 정치 아닌가. 베버식 표현대로라면 ‘신념 윤리’를 위해 ‘책임 윤리’를 저버린 꼴이 됐다. 당 대표 안위에 매달리는 당 상황을 생각하면 그 ‘신념’조차 의심스럽지만.    민주당은 특정 직역의 표도 겨냥하면서 대통령은 정치적 궁지로 몰아넣는 ‘일석이조’를 노렸다. 효과가 있을까. 간호법은 의사 표보다 간호사 표가 더 많다는 계산에서 강행됐지만, 간호사 숫자의 두 배 가까운 간호조무사들을 돌아서게 했다. 물리치료사·응급치료사 등의 다른 직역 의료단체가 민주당을 보는 눈도 싸늘해졌다. 벼농사 농업인, 노조, 간호사 등 특정 직역 편을 드는 과정에서 균형과 보편성을 잃어버린 모습이 과연 중도층에 어떻게 비칠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우락부락 입법 과정에서 대안 정당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이 민주당으로선 더 큰 손실이다.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느냐”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양이원영 의원은 “통치세력으로서 유능함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대통령 거부권 앞에서 소리 나지 않는 도돌이 연주만 거듭하는 정당에 썩 어울리는 발언은 아닌 듯하다. 신화에 따르면 시시포스를 쉼 없는 도로(徒勞)로 내모는 것은 복수와 징벌의 여신 에리니에스의 채찍질이라고 한다. 민주당을 끝없이 부조리로 모는 세력은 누구인가.    대통령의 거부권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견제와 균형을 위한 장치다. 1787년 미국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참가한 독립 13개 주 대표들은 인류 사상 새로운 정치 체제인 대통령제에 합의하면서 거부권이란 무기를 그 자리에 부여했다. 군주제 회귀에 대한 강한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행정 수반에게 강력한 헌법상 권리를 인정했다. 의회가 민중의 대의기구임은 분명하지만, 무소불위 입법부가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행정 수반이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의 암호해독자’(제임스 매디슨의 표현) 역할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헌법에 보장된 장치라고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목숨을 걸고 침을 쏘는 벌처럼 거부권은 신중하게 행사되는 것이 맞다. 헌법기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자제할 줄 알아야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법이다(대니얼 지블랫 하버드대 교수). 경위야 어떻든, 대의 기구인 국회의 결론을 국민의 또 다른 대표인 대통령이 거부하는 장면은 보통 상황이 아니다. 그 자체로 집권 세력의 부담이다. 미 제헌회의 13개 주 대표들이 결국 대통령제에 합의한 것은 그 자리의 첫 번째 주인공이 조지 워싱턴이란 ‘덕성의 정치인’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으로서는 야당이 쳐놓은 거부권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제와 인내, 대화와 타협이라는 ‘덕성’을 발휘해야 한다. 야당의 불모(不毛) 정치와 차별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글=이현상 논설실장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6.04 23:00

  • [중앙시평] 거부권에 갇힌 민주당의 부조리 정치

    이현상 논설실장 승산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에겐 비장미가 있다. 알베르 카뮈가 수필 ‘시시포스 신화’에서 조명한 부조리의 철학이다. 그러나 국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정당이 무망한 싸움을 반복한다면 어떨까. 자신들의 정치 철학을 과시하고 지지 기반을 넓히는 효용이 있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상대에 가할 타격만 생각하면서 자기가 입는 내상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해의 셈법이라면. 이건 비장미도 뭣도 아니다. 그냥 부조리일 뿐이다.     ■  「 실패 알면서 덤비는 시시포스인가 최선 힘들면 차선 모색이 책임정치 대안 정당의 이미지만 갈수록 훼손 대통령실도 자제의 덕성 발휘해야 」    “이 법에 정부와 여당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입법부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5월 24일 민주당 소속 전해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노란봉투법의 본회의 부의 요구안 표결을 강행하면서 한 말이다. “옳든 그르든 답이 있어야 책임지는 것이 입법부의 역할”이라는 언급도 덧붙였다. 무슨 말일까. ‘그른 답’이라도 일단 내놓으면 책임을 다했다는 이야기인가. 이거야말로 ‘면피 정치’ ‘알리바이 정치’ 아닌가. 파업 장려법이라는 이 법이 용산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곤 전 위원장도 생각지 않았을 터다. 굴러내릴 줄 알면서도 밀어 올린 시시포스의 바위인가. 비장미는커녕 자기 합리화만 보인다.   21대 국회 후반기 들어 법사위 심사를 건너뛰고 본회의에 직회부된 법안은 모두 11건이다. 역대 가장 많은 숫자다. 이미 양곡법, 간호법은 대통령 거부권 문턱에서 폐기됐다.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 방송법, 화물자동차법(안전운임제) 개정안도 비슷한 길을 밟을 공산이 크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윤석열 대통령이 이들 논란의 법안에 서명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임기가 끝나도 당장 사정이 바뀌기는 어렵다. 내년 총선 결과가 야당에 유리하게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툭하면 국회 일을 법대(法臺)로 가져가는 ‘정치의 사법화’가 문제지만, 사법 환경도 야당에 녹록지 않다. 윤 대통령 임기 중 대법관과 재판관 상당수가 교체될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점점 보수적 색채가 짙어질 게 뻔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타협을 통해 차선이라도 모색하는 게 원내 1당의 책임 정치 아닌가. 베버식 표현대로라면 ‘신념 윤리’를 위해 ‘책임 윤리’를 저버린 꼴이 됐다. 당 대표 안위에 매달리는 당 상황을 생각하면 그 ‘신념’조차 의심스럽지만.   민주당은 특정 직역의 표도 겨냥하면서 대통령은 정치적 궁지로 몰아넣는 ‘일석이조’를 노렸다. 효과가 있을까. 간호법은 의사 표보다 간호사 표가 더 많다는 계산에서 강행됐지만, 간호사 숫자의 두 배 가까운 간호조무사들을 돌아서게 했다. 물리치료사·응급치료사 등의 다른 직역 의료단체가 민주당을 보는 눈도 싸늘해졌다. 벼농사 농업인, 노조, 간호사 등 특정 직역 편을 드는 과정에서 균형과 보편성을 잃어버린 모습이 과연 중도층에 어떻게 비칠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우락부락 입법 과정에서 대안 정당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이 민주당으로선 더 큰 손실이다.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느냐”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양이원영 의원은 “통치세력으로서 유능함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대통령 거부권 앞에서 소리 나지 않는 도돌이 연주만 거듭하는 정당에 썩 어울리는 발언은 아닌 듯하다. 신화에 따르면 시시포스를 쉼 없는 도로(徒勞)로 내모는 것은 복수와 징벌의 여신 에리니에스의 채찍질이라고 한다. 민주당을 끝없이 부조리로 모는 세력은 누구인가.   대통령의 거부권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견제와 균형을 위한 장치다. 1787년 미국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참가한 독립 13개 주 대표들은 인류 사상 새로운 정치 체제인 대통령제에 합의하면서 거부권이란 무기를 그 자리에 부여했다. 군주제 회귀에 대한 강한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행정 수반에게 강력한 헌법상 권리를 인정했다. 의회가 민중의 대의기구임은 분명하지만, 무소불위 입법부가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행정 수반이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의 암호해독자’(제임스 매디슨의 표현) 역할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헌법에 보장된 장치라고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목숨을 걸고 침을 쏘는 벌처럼 거부권은 신중하게 행사되는 것이 맞다. 헌법기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자제할 줄 알아야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법이다(대니얼 지블랫 하버드대 교수). 경위야 어떻든, 대의 기구인 국회의 결론을 국민의 또 다른 대표인 대통령이 거부하는 장면은 보통 상황이 아니다. 그 자체로 집권 세력의 부담이다. 미 제헌회의 13개 주 대표들이 결국 대통령제에 합의한 것은 그 자리의 첫 번째 주인공이 조지 워싱턴이란 ‘덕성의 정치인’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으로서는 야당이 쳐놓은 거부권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제와 인내, 대화와 타협이라는 ‘덕성’을 발휘해야 한다. 야당의 불모(不毛) 정치와 차별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06.01 01:02

  • [이현상의 직격인터뷰] 획일적 ‘플랜테이션’ 대학에선 거목이 클 수 없다

     ━  ‘일대 혁신’ 내걸고 취임 100일…유홍림 서울대 총장   이현상 논설실장 캠퍼스는 몰라보게 변했다. ‘샤’자 정문 밑을 지나던 차로는 옆으로 비켜났고, 교내는 새로 들어선 건물로 빽빽해졌다.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계단’은 그대로지만, 축제장으로 쓰였던 행정관 앞 잔디광장은 새로 들어선 지하 주차장과 캐스케이드(계단형 수경시설)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리 대학의 질적 변화는 이런 외양의 발전을 따라가고 있을까. 인공지능(AI), 4차 산업혁명, 융복합 같은 단어가 난무하는 지금, 우리 대학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가. 그 발걸음의 속도는 또 어떤가. 지난 2월 1일 4년의 임기를 시작한 유홍림 서울대 총장을 찾은 것은 이런 궁금증 때문이었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집무실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  「 규제와 칸막이로 다양성 잃어…생태계 숨쉬는 ‘자연림’ 돼야 1, 2학년 대상 융합형 교육하는 ‘학부대학’ 2025년 설립 준비 신설되는 첨단융합학부, 새로운 교육 모델의 실험장이 될 것 」    혁신 대학 특징은 다양성과 융합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생태계가 살아 숨 쉬는 자연림 같은 대학 환경에서 큰 인재가 자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취임 후 100일이 지났다. 취임사에서 ‘대전환 시대 서울대의 일대 혁신’을 내걸었는데.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앞으로 대학이 어떻게 가야 하나, 존재 이유는 뭔가, 서울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총장 출마 결심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10년 후 서울대가 지금 같아서는 안 된다는 젊은 교수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서울대는 이런저런 발전계획이 있었다. 1975년 종합화, 2011년 법인화 때도 그랬다. 작년에는 ‘중장기발전계획’도 발표됐다. 그러나 큰 틀의 변화를 체감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진짜 변화가 필요하다.”   가장 변하지 않은 게 무엇인가. “관료제형 대학의 모습이다. 서울대가 국립대인 데다, 국가 주도의 대량 인력 공급이 필요한 상황이어서 불가피한 측면은 있었다. 그러나 규제가 획일적으로 적용되다 보니 다양성을 잃었다. 농업으로 치면 단일 작물을 대량으로 경작하는 ‘플랜테이션’이다. 학생 및 교수로 서울대에서 40여년을 보냈는데, 규정집이 점점 두꺼워졌다. 규정은 기본적으로 불신의 산물이다. 지나치게 강조되면 유연성이나 탄력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대학 교육이 ‘플랜테이션 경작’을 닮았다는 진단이 인상적이다. “미래에 필요한 지식과 인재의 형태는 과거와는 다르다. 엄청난 능력을 갖춘 개인(super-empowered individual)에 의해 세계가 바뀔 수 있는 시대다. 스티브 잡스가 좋은 예 아닌가.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네르바 대학, 애리조나 주립대 같은 세계적 혁신 대학의 목표는 그런 개인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런 개인은 지금의 ‘플랜테이션’ 같은 대학에선 나올 수 없다.”   혁신적 대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자연림(natural forest) 같은 모습이다.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대학들은 다양성을 최대한 확보하고 있다. 그런 다양성을 이어주는 연결성이 또 다른 특징이다. 공간적 캠퍼스가 아니라 네트워크와 플랫폼이 요체다. 그 위에서 유연성, 자발성, 자생성 등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자연림 하면 약육강식에 대한 거부감이 앞서지만, 오해다. 모든 게 연결돼 결국 균형을 이루는 생태계가 자연이다. 경쟁도 물론 있지만, 경쟁과 함께 협업이 가능한 에코 시스템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대학이다.”   학문의 출발은 연결성에 대한 인식   지난 2월 8일 총장 취임식에서 유홍림 총장이 오세정 전임 총장(오른쪽)으로부터 서울대 상징 열쇠를 전달받고 있다. [연합뉴스] 유 총장은 총장 출마의 변으로 J.S.밀의 ‘자유론’을 인용한 바 있다. “인간은 틀에 맞춰 제작돼 주어진 작업을 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방으로 뻗어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오직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만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다.”   총장 출마하면서 학부대학 신설 구상을 밝혔는데. “입학 후 1~2년이 가장 중요하다. 진로와 가치관이 결정되는 시기다. 학부대학은 1~2학년 학생에게 문제해결 능력, 소통 및 공감 능력, 비판적 사고력, 시민성 같은 공통 교육을 진행하는 과정이다. 지금도 교양과정이 있지만, 이 역시 분절적이고 플랜테이션적 학사과정이라 한계가 있다. 학생들은 거대한 우주로부터 내면의 사소한 감정까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배우고 싶어한다. ‘존재의 거대한 사슬’에 대한 인식이다. 이를 배우는 게 큰 대(大)자 쓰는 대학 아닐까. 철학자 칸트도 출발은 천체 물리학이었다. 최첨단 로보틱스, 하이테크 등이 인간의 행복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고민해야 한다. 이런 연결성에 대한 시선이 학문의 출발이라고 본다. 서울대 종합화(1975년) 50주년인 2025년에 맞춰서 학부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에 생기는 첨단융합학부, 기존의 자유전공학부와 기초교육원이 학부대학에 포함될 것이다.”   서울대는 최근 교육부와 협의를 거쳐 218명 규모의 첨단융합학부 신설을 확정했다. ▶디지털헬스케어 ▶차세대 지능형반도체 ▶지속가능기술 ▶혁신신약 ▶융합데이터과학 등 5개 전공 과정이다. 유 총장은 “내년부터 신입생을 뽑는 첨단융합학부를 새로운 교육 실험 모델로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첨단융합학부는 기존 공과대학 교수진뿐 아니라 인문·사회대학 교수진도 참여시킨다는 구상이다.   “공간이 교육이다”는 말이 있다. ‘레지덴셜 칼리지(RC·기숙형 대학)’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서울대에서 ‘LnL’(Living & Learning)이라는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 미국 스탠퍼드 등 서양의 전통 명문 대학들은 애초부터 RC 형태지만, 우리는 아직 실험 단계다. 캠퍼스 내 기숙사(관악사) 한 동을 리모델링해서 다양한 학과 학생을 입주시켰다. 지난해 300명을 모집했는데, 경쟁률이 4대 1이 될 만큼 높았다. 장기적으로 기숙사를 학부대학 과정과 결합할 구상도 있다. 단과대 학생을 섞어서 입주시켜 융복합형 인재로 키우고 싶다. 모든 비(非)교과 프로그램은 학생들 스스로 개발하게 해 자연스럽게 시민성과 리더십 함양으로 연결할 생각이다. 이를 위해 기숙사 재건축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와 별도로 캠퍼스 내에 학내 구성원의 학습, 교류, 소통의 공간으로 ‘SNU Commons’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대학 총장은 멀티형 리더십 요구돼   작년에 발표된 중장기발전계획에는 ‘서울대엔 2200명의 총장이 있다’는 표현이 있다. 혁신은 좋지만, 구성원의 생각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게 총장 리더십의 핵심이다. 교수, 학과, 단과대 등 자율적인 주체가 워낙 많으니까. 서울대 총장은 ‘선출직’과 ‘임명직’이라는 상반된 성격이 있다. 이사회가 최종 결정을 하지만, 교수들은 자신들이 선출에 사실상 간여한다고 생각한다. 총장이 강한 장악력을 쥐어야 한다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맞선다. 결국 소통과 설득이 중요하다. 명분과 비전이 합의를 이끌 원동력이다. 지금의 대학 총장은 멀티태스킹(다중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야 하고, 때로는 세일즈를 해야 한다.”   서울대 교수진의 연구가 평균적으론 우수하지만, 아주 탁월한 실적(Only One)은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 있다. “교육도 그렇지만, 연구도 ‘자연림’ 환경이 중요하다. 전임 교원을 학과부 소속으로 두는 학칙부터 바꿔야 한다. 전체 대학 소속도 있어야 하고, 단과대 소속도 있어야 한다. 소속을 유연화하면 융합·소통이 쉬워진다. 커뮤니티가 중요하다.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는 수상 소감에서 동료 교수에 대한 감사부터 표했다. 선진국 대학처럼 ‘브라운백 미팅’(샌드위치 등을 들며 하는 모임) 등을 통해 교수들끼리 교류하는 문화가 활성화해야 한다.”   제도혁신위원회가 신설됐는데. “두 가지가 목표다. 규정집을 줄이는 것과 ERP(전사적 자원관리) 도입. 규제는 ‘포지티브 형’에서 ‘네거티브 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명시적 규제를 빼고는 기본적으로 모두 푼다는 뜻이다. ERP는 효율적인 행정지원 체계를 위해서 필요하다. 그래야 관료제형 대학에서 플랫폼형 대학으로 갈 수 있다.”   입시제도는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나. “대학별 특성화가 제대로 되려면 대학별로 입시 자율성이 커져야 한다. 서울대 입시 제도가 초중등 수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조심스럽긴 하나, 큰 방향은 자율 강화다. 앞으로 AI나 하이테크의 발전으로 ‘기초학력’의 개념도 달라질 것이다. 수학 문제 푸나 못 푸나가 기초학력의 기준이 아니게 될 수 있다.”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시구가 유명하다. 그 시구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보나. “이 시구는 1971년 종합캠퍼스(관악캠퍼스) 기공식에 부친 축시다. 다양성·유연성·연결성·포용성 같은 개념은 어쩌면 캠퍼스 종합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칸막이가 문제 된다. 그걸 넘어서는 것이 이 시구를 유효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본다.”    ◆유홍림 총장=1961년 충북 청주 출생. 청주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미국 럿거스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 정운찬 전 총장에 이어 21년 만의 사회대 출신 총장. 포용력과 온화한 성품을 지닌 외유내강형 학자라는 평. 이현상 논설실장, 정리=김홍범 기자

    2023.05.19 00:54

  • [세컷칼럼] 외교는 정치다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내년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국빈을 불러놓고선 회담의 주목도를 흐리는 일 아니냐는 질문이 나온 건 당연했다. 이에 대한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의 대답. “세계 무대에서 윤 대통령의 리더십과 관점, 그리고 한국의 선한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는 기간이 될 것이다.” 돌려 말했지만, 윤 대통령의 국빈방문과 바이든의 출마 선언이 ‘윈-윈’할 것이라는 뉘앙스다. 외교가 우선인지, 정치가 우선인지 알쏭달쏭하다.   ■  「 바이든의 정치에 기여한 국빈방문 기시다는 정상회담 후 인기 급상승 외교 성과가 정치적 결실 맺으려면 절제된 말과 ‘반 발자국 정신’ 필요 」   아닌 게 아니라 윤 대통령의 국빈방문은 바이든으로서는 훌륭한 정치 이벤트였다. 43분간 진행된 윤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에는 자유가 46번, 동맹이 27번, 민주주의가 18번 언급됐다.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미국의 역할이 강조됐다. 미국적 가치에 대한 헌사였다. 바이든 입장에서는 중·러에 맞선 동맹 확보의 성공을 과시하는 기회가 됐다. 양국의 경제 현안이었던 반도체 문제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언급되지 않았다. IRA와 반도체법은 바이든의 재출마 포석 중 하나다. 뉴욕타임스는 “윤 대통령의 국빈방문 중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민을 화나게 했던 IRA를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웠다”고 지적했다. 바이든은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윤 대통령에게 내심 고마웠을 법하다.    정상회담 효과를 즐기는 것은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20%대 지지율이 최근 50%대를 돌파했다(니혼게이자이 여론조사). ‘나가타초(永田町·의사당이 있는 일본 정치 중심지)의 재미없는 남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기시다의 존재감이 확 뛰었다. 낮은 지지율로 중의원 해산 걱정을 하던 기시다는 이제 오히려 높은 지지율 때문에 의회 해산을 저울질하고 있다. 이참에 선거를 다시 치러 안정적 집권 기반을 마련하려는 ‘행복한 고민’이다.    7일 방한하는 기시다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발언을 할지 관심이다. 상황이 녹록지는 않다. 기시다가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가 담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계승 의지를 표명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지만, 구체적 표현 수준은 지켜봐야 한다. 지난 3월 정상회담 때는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뜨뜻미지근한 언급에 그쳤다. 당내 입지가 약한 기시다로서는 당내 강경 우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지난달 치러진 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이겼다고는 하나 자민당보다 더 오른쪽인 일본유신회가 약진한 것도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우파의 주장은 논리가 아니라 ‘정념’이다. ‘합리적’ 기시다가 이를 돌파할지가 주목된다.    윤 대통령도 한미정상회담 이후 지지율이 올랐다. 리얼미터 조사 결과 국정 수행 긍정 평가가 한 주 전보다 1.9%포인트 상승했다. 그러나 한일관계 논란, 도·감청 시비 등으로 잃어버린 지지율의 회복에는 미치지 못한다. 지지율 하나로 외교 성과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미·일의 지도자가 즐기는 외교 효과를 우리 대통령은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성찰해야 한다. 결국 섬세함이다. 문제의 상당 부분은 대통령의 지나치게 직설적인 화법에 기인한다. 엊그제(2일) 기자단 간담회에서 나온 “(중국이) 대북 제재에 동참 안 하면서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냐” “적대 행위만 안 하면…” 등의 발언도 외교적 용어로 적절한지 의문이다. 지나친 공격적 언어는 중국이 중시한다는 ‘체면 외교’의 여지를 없애버릴 수 있다. 아무리 잘못한 상대에게도 최소한의 체면은 남겨둔다는 ‘류몐즈(留面子)’라는 중국 단어도 있지 않은가. 중국의 눈치를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강한 용어만이 국가적 자존심을 표현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말은 참모의 입을 통해 나오게 해도 충분하다. 외교야말로 ‘굿캅배드캅’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국민과의 ‘반 발자국’ 거리다. 영국의 외교관 로버트 쿠퍼는 “국가는 머리가 조언하는 대로보다는 심장이 요구하는 대로 반응한다”고 했다. ‘100년 전 일 무릎’ 발언은 말하자면 국가의 심장을 건드린 셈이다. 영국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서 일했던 이 노(老) 외교관은 “대외 정책도 결국 국내 정치에 의해 좌우되며, 대외 정책이 항상 이익을 두고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는 조언을 남겼다(『The Breaking of Nations』, 이상돈닷컴 참조).    외교의 목적은 ‘국익’이다. 하지만 국익의 개념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외교가 국가라는 ‘단일 행위자’가 한다는 생각도 순진하다. 외교는 안보·경제·여론 등이 정치 지도자의 인식을 통해 구체화하는 복합적 과정이다. 지도자의 인식이 국민과 거리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 거리부터 좁히는 것이 외교의 첫걸음이다. 지도자가 생각하는 국익이 종래엔 국민의 이익에 닿는다는 점을 절제된 언어로, 끈기 있게 설명해야 한다. 전쟁이 외교의 연장선에 있듯이 외교는 정치의 연장선에 있다.     글=이현상 논설실장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5.07 23:00

  • [중앙시평] 외교는 정치다

    이현상 논설실장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내년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국빈을 불러놓고선 회담의 주목도를 흐리는 일 아니냐는 질문이 나온 건 당연했다. 이에 대한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의 대답. “세계 무대에서 윤 대통령의 리더십과 관점, 그리고 한국의 선한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는 기간이 될 것이다.” 돌려 말했지만, 윤 대통령의 국빈방문과 바이든의 출마 선언이 ‘윈-윈’할 것이라는 뉘앙스다. 외교가 우선인지, 정치가 우선인지 알쏭달쏭하다.     ■  「 바이든의 정치에 기여한 국빈방문 기시다는 정상회담 후 인기 급상승 외교 성과가 정치적 결실 맺으려면 절제된 말과 ‘반 발자국 정신’ 필요 」    아닌 게 아니라 윤 대통령의 국빈방문은 바이든으로서는 훌륭한 정치 이벤트였다. 43분간 진행된 윤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에는 자유가 46번, 동맹이 27번, 민주주의가 18번 언급됐다.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미국의 역할이 강조됐다. 미국적 가치에 대한 헌사였다. 바이든 입장에서는 중·러에 맞선 동맹 확보의 성공을 과시하는 기회가 됐다. 양국의 경제 현안이었던 반도체 문제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언급되지 않았다. IRA와 반도체법은 바이든의 재출마 포석 중 하나다. 뉴욕타임스는 “윤 대통령의 국빈방문 중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민을 화나게 했던 IRA를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웠다”고 지적했다. 바이든은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윤 대통령에게 내심 고마웠을 법하다.   정상회담 효과를 즐기는 것은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20%대 지지율이 최근 50%대를 돌파했다(니혼게이자이 여론조사). ‘나가타초(永田町·의사당이 있는 일본 정치 중심지)의 재미없는 남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기시다의 존재감이 확 뛰었다. 낮은 지지율로 중의원 해산 걱정을 하던 기시다는 이제 오히려 높은 지지율 때문에 의회 해산을 저울질하고 있다. 이참에 선거를 다시 치러 안정적 집권 기반을 마련하려는 ‘행복한 고민’이다.   7일 방한하는 기시다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발언을 할지 관심이다. 상황이 녹록지는 않다. 기시다가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가 담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계승 의지를 표명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지만, 구체적 표현 수준은 지켜봐야 한다. 지난 3월 정상회담 때는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뜨뜻미지근한 언급에 그쳤다. 당내 입지가 약한 기시다로서는 당내 강경 우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지난달 치러진 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이겼다고는 하나 자민당보다 더 오른쪽인 일본유신회가 약진한 것도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우파의 주장은 논리가 아니라 ‘정념’이다. ‘합리적’ 기시다가 이를 돌파할지가 주목된다.   윤 대통령도 한미정상회담 이후 지지율이 올랐다. 리얼미터 조사 결과 국정 수행 긍정 평가가 한 주 전보다 1.9%포인트 상승했다. 그러나 한일관계 논란, 도·감청 시비 등으로 잃어버린 지지율의 회복에는 미치지 못한다. 지지율 하나로 외교 성과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미·일의 지도자가 즐기는 외교 효과를 우리 대통령은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성찰해야 한다.   결국 섬세함이다. 문제의 상당 부분은 대통령의 지나치게 직설적인 화법에 기인한다. 엊그제(2일) 기자단 간담회에서 나온 “(중국이) 대북 제재에 동참 안 하면서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냐” “적대 행위만 안 하면…” 등의 발언도 외교적 용어로 적절한지 의문이다. 지나친 공격적 언어는 중국이 중시한다는 ‘체면 외교’의 여지를 없애버릴 수 있다. 아무리 잘못한 상대에게도 최소한의 체면은 남겨둔다는 ‘류몐즈(留面子)’라는 중국 단어도 있지 않은가. 중국의 눈치를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강한 용어만이 국가적 자존심을 표현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말은 참모의 입을 통해 나오게 해도 충분하다. 외교야말로 ‘굿캅배드캅’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국민과의 ‘반 발자국’ 거리다. 영국의 외교관 로버트 쿠퍼는 “국가는 머리가 조언하는 대로보다는 심장이 요구하는 대로 반응한다”고 했다. ‘100년 전 일 무릎’ 발언은 말하자면 국가의 심장을 건드린 셈이다. 영국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서 일했던 이 노(老) 외교관은 “대외 정책도 결국 국내 정치에 의해 좌우되며, 대외 정책이 항상 이익을 두고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는 조언을 남겼다(『The Breaking of Nations』, 이상돈닷컴 참조).   외교의 목적은 ‘국익’이다. 하지만 국익의 개념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외교가 국가라는 ‘단일 행위자’가 한다는 생각도 순진하다. 외교는 안보·경제·여론 등이 정치 지도자의 인식을 통해 구체화하는 복합적 과정이다. 지도자의 인식이 국민과 거리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 거리부터 좁히는 것이 외교의 첫걸음이다. 지도자가 생각하는 국익이 종래엔 국민의 이익에 닿는다는 점을 절제된 언어로, 끈기 있게 설명해야 한다. 전쟁이 외교의 연장선에 있듯이 외교는 정치의 연장선에 있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05.04 01:04

  • [중앙시평] 노적봉이라도 쌓자는 건가

    이현상 논설실장 양곡관리법 개정을 밀어붙인 민주당의 주요 명분은 식량안보다. 이재명 대표는 “양곡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식량안보 전략 포기 선언”이라고 했다. 민주당이 생각하는 식량안보란 어떤 걸까. 한반도 주변에 전쟁이 나서 갑자기 식량 수입이 뚝 끊어지는 상황을 상정한 걸까.   한국의 쌀 자급률은 90%가 넘는다. 나머지 10%도 쌀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WTO(세계무역기구) 규약에 따라 의무 수입하는 TRQ(저율관세할당물량) 때문이다. 고립된 성(城)을 놓고 벌이는 사극 전투 장면을 너무 열심히 본 탓일까. 민주당의 식량안보론은 시대착오적이다. 우리 국토가 좁다지만 성 한 채와 비교할 수는 없다. 식량 수입이 위협받을 정도의 극단적 상황이라면 한국이 거의 전량 수입하는 에너지는 더 위험하다. 염화칼륨·요소 같은 비료 원자재도 끊어질 가능성이 높다. 농지가 널려도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쌀이 넘쳐도 유통할 방법이 사라진다.     ■  「 민주당의 시대착오 식량안보론 국가를 좁은 성쯤으로 여기는 듯 정책 정당으로서 밑바닥 드러내 식량안보 강국 어딘지부터 보라 」    2005년 ‘공공비축제’ 도입 이후 정부는 매년 6000억~1조원을 햅쌀을 사는 데 쓴다. 이렇게 쌓아둔 쌀은 3년쯤 지나면 가공용으로 헐값에 넘어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보관 비용으로 매년 수천억 원이 들어간다.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물량을 사들이는 ‘시장 격리제’도 운영한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공공비축제 도입 이후 17번의 시장격리를 위해 23조원이 들었다. 다 국민 세금이다. 식량안보를 위한 보험료쯤으로 생각하자고? 보험료는 적정 요율이란 게 있다. 위험 대비랍시고 밑도 끝도 없이 보험을 늘리는 건 어리석은 살림꾼이나 할 짓이다.   사실 민주당이 식량안보의 개념을 정확하게 아는지조차 의문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한 2022년 세계식량안보지수(GFSI) 1위 국가는 핀란드다. 동토의 이 나라가 식량 자급률이 뛰어나 1위를 했을 리는 없다. 핀란드는 구매능력, 공급능력, 식품안전 및 품질, 지속가능성 등 평가 네 부문 모두 상위권이다. 식량 수입을 위한 높은 경제력과 안정적 네트워크가 있고, 그 위에 소비자 기호와 건강을 고려하는 식량 관리 체계까지 골고루 갖췄다는 뜻이다.   식량안보를 자급률로만 따지는 건 좁은 시야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자급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세계 곳곳에서 들여오는 다양한 식재료와 맛을 즐길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다. 식량자급률이 80%에 달했던 1970년대 말 우리 식탁이 지금처럼 풍성했던가. 자급률이 90%에 이른다는 북한의 만성적 식량 부족은 또 어떤가. 식량안보를 칼로리의 보급으로만 따질 수는 없다. 소득 4만 달러를 바라보는 국가라면 영양 균형, 식습관, 기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대규모 곡물 생산국 대신에 아일랜드·노르웨이·네덜란드·스웨덴 같은 북유럽 고소득 국가가 식량안보 10위권에 포진한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GFSI 순위에서 한국은 39위다.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비(非)농업 국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비관할 수치도 아니다. 한국의 순위를 떨어뜨린 요인 중 하나는 높은 수입 농산물 관세다. 이 부문에서 한국은 0점을 받았다. 수입쌀 관세율 513%가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치자. 하지만 국제가보다 6배나 비싼 쌀이 우리 농업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것만은 직시해야 한다. 쌀 산업에 지원이 집중되다 보니 벼농사는 100% 가까이 기계화됐다. 정부가 수매해주니 판로도 걱정할 필요 없다. 큰돈은 못 벌어도 ‘쉬운 농사’가 되다 보니 고령의 농민들이 논을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바람에 부농의 꿈을 꾸는 젊은 상품작물 재배자의 밭일은 더 힘들어졌다.   우리 식생활과 기후가 비슷한 일본은 GFSI 6위다. 일본의 식량자급률은 한국과 큰 차이 없다. 그런데도 상위를 점한 것은 월등한 수입 역량 때문이다. 일본은 2000년대부터 미쓰이·마루베니·미쓰비시 등 종합상사들이 산지의 곡물엘리베이터(곡물의 저장·이송 인프라)를 확보해왔다. 일본 농협 격인 젠노(全農)만 해도 60개를 확보했다고 한다. 한국은 이제 겨우 2개를 확보한 상태다.   성안에서 노적가리 쌓듯 든든하게 식량부터 확보해놓자는 전략은 시대착오적이다.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자급하자는 생각만큼 터무니없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 된 것은 개방과 네트워크 활용 덕분 아니던가. 물론 수입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식량 자급률을 일정 정도로 올리는 건 필요하다. 그러나 이미 자급률 100% 가까운 쌀은 아니다. 밀·콩 같은 자급률 낮은 곡물로 정책의 눈을 돌려야 한다.   민주당으로선 거부권을 행사한 윤석열 대통령이 농심의 덫에 걸려들었다며 쾌재를 외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책 정당으로서 역량 바닥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쌀 농가의 불만을 다독이며 전체 농업 발전의 밑그림을 다시 그려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확실한 건 “밥 한 공기 더 먹자”는 한심한 대책으로는 길이 없다는 점이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04.06 01:02

  • [세컷칼럼] 트루먼 명패의 뒷면

    한·일 과거사 문제는 지뢰밭이다. 독도,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가 난마처럼 얽혀 있다. 함부로 들어갔다간 길을 잃는다.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문을 열었다가 중상을 입었고, 문재인 정부는 슬며시 되돌아 나와 그 문을 닫고는 지지율 호재로 사용했다. 그 지뢰밭에 윤석열 대통령이 다시 들어갔다. 무사귀환할 수 있을까.   결단은 필요했다. 막혀버린 한·일 관계의 물줄기를 터야 했다.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두 나라의 과거 문제에 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를 위태롭게 하고 미래를 좁히는 일이다. 당장 미국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very much support),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가 결정됐다. 한미동맹이 한 단계 더 진화할 것이라는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현재로선 ‘대승적 결단’의 결과를 예단하기 힘들다. 해외 여론은 우호적이지만, 국내 여론은 갈린다. ‘동냥은 필요 없다’는 피해자 당사자의 목소리도 카랑카랑하다. 문제는 일본이다. 박근혜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했던 아베는 합의문 외엔 한 톨의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에 사죄 편지를 보내는 방안이 거론되자 “털끝만큼도 생각 없다”고 차갑게 대꾸했다. 그 순간 합의문은 한국민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버렸고, 박근혜 정부 입장이 난처해졌다. 일본의 4월 지방선거 과정에서 비슷한 망언이 돌출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절반을 채운 잔이 더 차기는커녕 깨져버릴지 모른다.     ■  「 “책임은 내가 진다”는 명패 뒤쪽엔 “나는 미주리주 출신이다”는 문구 현실도 당위만큼 살피겠다 의지 과거사 해결, 당위·현실 함께 봐야 」    총론이 옳다고 해서 각론을 안 짚어볼 수는 없다. 우리 패를 성급하게 보여줘 일본에 주도권을 넘겨줬다는 지적은 새길 필요가 있다. 한·미·일 삼각 공조를 앞세운 미국의 채근에 마음이 급했겠지만, 쫓기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포커판에서 실력과 운 외에 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돈이 적거나 일찍 일어나야 하거나. 실무진이 ‘속도 조절론’을 주장했으나 윤 대통령은 “책임은 내가 진다”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윤석열식 리더십을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 만큼 정치적 부담은 오롯이 대통령의 어깨에 얹힐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결단하면 떠오르는 것이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명패(정확하게는 좌우명패)다. 명패에 적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대통령의 자세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다. 2차 대전 중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급서(急逝)로 부통령에서 얼떨결에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이 명패 뒤에서 여러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두 차례의 원폭 투하, 마셜 플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베를린 공수 작전, 한국전쟁 파병 등.   그러나 트루먼의 명패에는 책임을 강조한 멋진 문구만 있었던 건 아니다. 명패 뒷면에 “나는 미주리 출신이다(I’m from Missouri)”가 적혀 있었다는 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실이다. 결단을 앞둔 트루먼은 왜 자신의 출신을 되새겼을까.   지금은 공화당세가 완연하지만, 20세기 미주리는 전형적인 ‘스윙 스테이트’(민주당과 공화당을 번갈아 지지하는 주)였다. 그만큼 현실주의 기질이 강한 지역이다. 주의 별명이 ‘쇼 미(Show Me) 스테이트’다. “거품 문 공허한 웅변은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 나에겐 보여줘야 한다. 나는 미주리 출신이다”는 이 곳 출신 연방 하원의원 윌러드 던컨 밴디버의 1899년 연설이다. 미주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다. “나는 미주리 출신”이라는 숨은 좌우명은 “따져볼 건 따진다”는 현실 중시 다짐은 아니었을까. 주세(州勢)가 약한 중부 출신으로 트루먼이 중앙 정치 무대에서 성공한 것도 이런 현실주의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명패의 앞면이 대통령의 ‘당위’였다면, 명패의 뒷면은 정치인의 ‘존재’였던 셈이다.   지도자의 결단은 고독하다. 그래서 비장미를 띤다. 그러나 ‘결단’과 ‘독단’ 사이의 경계선은 생각보다 흐릿하다. 대통령은 개인이지만, 대통령직은 제도다. 공화적 가치가 집약된 헌법 기구다. 최종적 의사 결정은 지도자의 몫이지만, 마지막까지 듣고 설득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놓은 의사 결정 과정은 종종 “나에겐 보여줘야 한다”는 날 선 목소리와 맞닥뜨린다. 당장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렇다. 5년 단임제의 숙명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강제징용 해법은 윤 대통령 취임 후 가장 큰 결단이다. 정권의 지지 여부를 떠나 이 결단이 실패하면 한국 외교는 갈 길을 잃는다. 이를 위해서라도 당위와 존재(현실)의 조화를 찾아야 한다.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일을 결단만으로는 할 수가 없다.   윤 대통령의 용산 집무실 책상 위에는 트루먼의 명패를 본뜬 명패가 있다. 지난해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것이다. 그 명패 뒷면에 어떤 문구가 있는지, 혹은 비어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만일 비어 있다면 어떤 문구를 써넣을지 윤 대통령이 고민해봤으면 한다. 결단은 현실과 결합할 때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다.     글=이현상 논설실장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3.12 23:00

  • [중앙시평] 트루먼 명패의 뒷면

    이현상 논설실장 한·일 과거사 문제는 지뢰밭이다. 독도,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가 난마처럼 얽혀 있다. 함부로 들어갔다간 길을 잃는다.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문을 열었다가 중상을 입었고, 문재인 정부는 슬며시 되돌아 나와 그 문을 닫고는 지지율 호재로 사용했다. 그 지뢰밭에 윤석열 대통령이 다시 들어갔다. 무사귀환할 수 있을까.   결단은 필요했다. 막혀버린 한·일 관계의 물줄기를 터야 했다.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두 나라의 과거 문제에 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를 위태롭게 하고 미래를 좁히는 일이다. 당장 미국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very much support),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가 결정됐다. 한미동맹이 한 단계 더 진화할 것이라는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현재로선 ‘대승적 결단’의 결과를 예단하기 힘들다. 해외 여론은 우호적이지만, 국내 여론은 갈린다. ‘동냥은 필요 없다’는 피해자 당사자의 목소리도 카랑카랑하다. 문제는 일본이다. 박근혜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했던 아베는 합의문 외엔 한 톨의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에 사죄 편지를 보내는 방안이 거론되자 “털끝만큼도 생각 없다”고 차갑게 대꾸했다. 그 순간 합의문은 한국민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버렸고, 박근혜 정부 입장이 난처해졌다. 일본의 4월 지방선거 과정에서 비슷한 망언이 돌출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절반을 채운 잔이 더 차기는커녕 깨져버릴지 모른다.       ■  「 “책임은 내가 진다”는 명패 뒤쪽엔 “나는 미주리주 출신이다”는 문구 현실도 당위만큼 살피겠다 의지 과거사 해결, 당위·현실 함께 봐야 」    총론이 옳다고 해서 각론을 안 짚어볼 수는 없다. 우리 패를 성급하게 보여줘 일본에 주도권을 넘겨줬다는 지적은 새길 필요가 있다. 한·미·일 삼각 공조를 앞세운 미국의 채근에 마음이 급했겠지만, 쫓기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포커판에서 실력과 운 외에 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돈이 적거나 일찍 일어나야 하거나. 실무진이 ‘속도 조절론’을 주장했으나 윤 대통령은 “책임은 내가 진다”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윤석열식 리더십을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 만큼 정치적 부담은 오롯이 대통령의 어깨에 얹힐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결단하면 떠오르는 것이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명패(정확하게는 좌우명패)다. 명패에 적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대통령의 자세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다. 2차 대전 중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급서(急逝)로 부통령에서 얼떨결에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이 명패 뒤에서 여러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두 차례의 원폭 투하, 마셜 플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베를린 공수 작전, 한국전쟁 파병 등.   그러나 트루먼의 명패에는 책임을 강조한 멋진 문구만 있었던 건 아니다. 명패 뒷면에 “나는 미주리 출신이다(I’m from Missouri)”가 적혀 있었다는 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실이다. 결단을 앞둔 트루먼은 왜 자신의 출신을 되새겼을까.   지금은 공화당세가 완연하지만, 20세기 미주리는 전형적인 ‘스윙 스테이트’(민주당과 공화당을 번갈아 지지하는 주)였다. 그만큼 현실주의 기질이 강한 지역이다. 주의 별명이 ‘쇼 미(Show Me) 스테이트’다. “거품 문 공허한 웅변은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 나에겐 보여줘야 한다. 나는 미주리 출신이다”는 이 곳 출신 연방 하원의원 윌러드 던컨 밴디버의 1899년 연설이다. 미주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다. “나는 미주리 출신”이라는 숨은 좌우명은 “따져볼 건 따진다”는 현실 중시 다짐은 아니었을까. 주세(州勢)가 약한 중부 출신으로 트루먼이 중앙 정치 무대에서 성공한 것도 이런 현실주의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명패의 앞면이 대통령의 ‘당위’였다면, 명패의 뒷면은 정치인의 ‘존재’였던 셈이다.   지도자의 결단은 고독하다. 그래서 비장미를 띤다. 그러나 ‘결단’과 ‘독단’ 사이의 경계선은 생각보다 흐릿하다. 대통령은 개인이지만, 대통령직은 제도다. 공화적 가치가 집약된 헌법 기구다. 최종적 의사 결정은 지도자의 몫이지만, 마지막까지 듣고 설득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결단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놓은 의사 결정 과정은 종종 “나에겐 보여줘야 한다”는 날 선 목소리와 맞닥뜨린다. 당장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렇다. 5년 단임제의 숙명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강제징용 해법은 윤 대통령 취임 후 가장 큰 결단이다. 정권의 지지 여부를 떠나 이 결단이 실패하면 한국 외교는 갈 길을 잃는다. 이를 위해서라도 당위와 존재(현실)의 조화를 찾아야 한다.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일을 결단만으로는 할 수가 없다.   윤 대통령의 용산 집무실 책상 위에는 트루먼의 명패를 본뜬 명패가 있다. 지난해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것이다. 그 명패 뒷면에 어떤 문구가 있는지, 혹은 비어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만일 비어 있다면 어떤 문구를 써넣을지 윤 대통령이 고민해봤으면 한다. 결단은 현실과 결합할 때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03.09 01:04

  • [세컷칼럼] 가난한 노인, 젊은이의 미래가 되게 할 건가

    대한민국에서 늙음은 부끄러움이다. 젊어 보인다는 사교성 발언이 난무하고, 한 살이라도 더 어려 보이게 한다는 옷과 화장품이 인기다. 늙을 ‘노(老)’자는 아예 기피 대상이 돼 관청에서도 노인은 ‘어르신’이라는 단어로 대체됐다. 그 요란한 공경 뒤편에는 ‘틀딱’ ‘노인충’ ‘연금충’ 같은 혐노(嫌老) 비하어가 판을 친다.   늙음을 더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가난이다. 65세 이상 한국 노인 10명 중 4명은 ‘상대적 빈곤층’이다. 중위소득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살아간다. 이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단연 수위다. OECD 평균(2019년 13.5%)의 3배나 된다. 그나마 소득 하위 70%의 고령자에 지급되는 기초연금이 도입되면서 나아진 것이 이 정도다. 각종 경제지표에서 어느덧 OECD 상위권을 차지하게 된 한국이지만, 이 뿌듯한 수치(數値)를 만든 노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수치(羞恥)스러운 통계뿐이다.     ■  「 OECD 압도적 1위 노인 빈곤율 60년 뒤에도 여전할 것이란 전망 국민연금 실질 소득대체율 20%선 더 내고 더 받는 방안 고민해봐야 」    문제는 노인의 현재가 젊은이의 미래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66세 이상의 상대적 빈곤율(40.4%)은 18~65세 빈곤율(10.6%)의 4배에 가깝다(통계청 ‘한국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이행보고서 2022’). 그 격차가 선진국 중 노인 빈곤율이 비교적 높은 축인 스위스나 호주(각각 2.5배), 일본(1.5배)을 압도한다. 전체 인구보다 오히려 노인의 빈곤율이 더 낮은 프랑스·네덜란드 같은 나라와 비교는 언감생심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늙어서 가난해질 위험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현재 국민연금의 명목 소득대체율은 42.5%다. 기금 고갈을 늦추느라 해마다 낮춰 왔다. 2028년까지 40%로 낮아지게 돼 있다. 그러나 생애 평균 월급 400만원 받던 사람이 국민연금으로 160만원쯤 받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제로는 그 절반 정도다. 명목 소득대체율은 40년 가입을 전제로 하는데, 평균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18.7년에 불과하다. 그래서 실질 소득대체율은 22% 수준에 그친다.   지금 국회 연금개혁특위에서 논의되는 두 축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이다. 현재 9%인 보험료율을 높이자는 데에는 의견이 모이는 듯하다. 그러나 소득대체율에 대해서는 엇갈린다. 민간자문위원회는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현행 유지안과 인상안을 나란히 제시했다.   국민연금 재정 추계에 따르면 2080년대가 되어도 신규 수급자의 평균 가입 기간은 27년 정도다. 이 경우 실제 소득대체율은 23~24%에 불과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여유 있는 사람들은 국민연금과 더불어 퇴직연금·개인연금 등의 3중 전략을 짜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용돈 연금’에 만족해야 한다. 이래서야 불명예스러운 노인 빈곤율을 개선할 수 없다. 최근 국민연금연구원은 2020년 태어난 아이들이 노인이 되는 2085년이 돼도 노인 빈곤율은 29.8%에 달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실질 소득대체율을 높이지 않으면 ‘세계 최악의 노인 빈곤국’이란 타이틀을 미래 세대도 여전히 짊어질 공산이 크다.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열심히 일해도 안정적 노후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누가 자신의 노후비용을 미리 털어 자녀 양육에 쓰려 하겠는가. 연금 개혁의 목적은 연금 재정 고갈을 늦춰 공적 연금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고갈 시점을 아무리 늦춘들 연금 재정은 언젠가 바닥이 드러난다. 고갈 시점을 늦추는 데 몰입해 ‘푼돈 연금’을 이어간다면 연금에 대한 믿음 자체가 고갈될 수 있다.   공적 연금의 기능 확대를 사회적 부담으로만 여기는 것은 단견이다. 2060년대 이후 노인 인구 비중은 전체의 45%를 넘는다.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가난에 시달린다면 우리 경제는 위축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보험료율을 더 높이고, 점진적으로 수급 개시 연령을 늦추더라도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방안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높은 노인 빈곤율이 유지된다면 우리 사회는 계속해서 양극화와 이에 따른 갈등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투표권을 가진 노인들의 공적 부조 요구가 강해지면서 재정 압박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2008년 도입된 기초노령연금(기초연금의 전신)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대략 10만원꼴로 올라갔다. 윤석열 정부도 임기 중 기초연금을 30만원에서 4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이미 약속한 바 있다. 이런 악순환을 되풀이하느니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제고에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쉽지 않은 길이다. 정년 연장, 노인 일자리 확대, 복지 시스템 조정 같은 난제가 세트로 딸려 있다. 그러나 이대로 가난한 미래를 기다릴 수는 없다. 소모적인 현금 복지를 정리해 국민연금 지원에 활용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노력 없이 얻는 유일한 것이 노년이라지만, 노년의 행복은 노력 없이 얻을 수 없다. 그 노력을 개인에만 맡긴다면 국가의 존재 이유가 없다.     글=이현상 논설실장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2.12 23:00

  • [중앙시평] 가난한 노인, 젊은이의 미래가 되게 할 건가

    이현상 논설실장 대한민국에서 늙음은 부끄러움이다. 젊어 보인다는 사교성 발언이 난무하고, 한 살이라도 더 어려 보이게 한다는 옷과 화장품이 인기다. 늙을 ‘노(老)’자는 아예 기피 대상이 돼 관청에서도 노인은 ‘어르신’이라는 단어로 대체됐다. 그 요란한 공경 뒤편에는 ‘틀딱’ ‘노인충’ ‘연금충’ 같은 혐노(嫌老) 비하어가 판을 친다.   늙음을 더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가난이다. 65세 이상 한국 노인 10명 중 4명은 ‘상대적 빈곤층’이다. 중위소득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살아간다. 이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단연 수위다. OECD 평균(2019년 13.5%)의 3배나 된다. 그나마 소득 하위 70%의 고령자에 지급되는 기초연금이 도입되면서 나아진 것이 이 정도다. 각종 경제지표에서 어느덧 OECD 상위권을 차지하게 된 한국이지만, 이 뿌듯한 수치(數値)를 만든 노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수치(羞恥)스러운 통계뿐이다.     ■  「 OECD 압도적 1위 노인 빈곤율 60년 뒤에도 여전할 것이란 전망 국민연금 실질 소득대체율 20%선 더 내고 더 받는 방안 고민해봐야 」    문제는 노인의 현재가 젊은이의 미래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66세 이상의 상대적 빈곤율(40.4%)은 18~65세 빈곤율(10.6%)의 4배에 가깝다(통계청 ‘한국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이행보고서 2022’). 그 격차가 선진국 중 노인 빈곤율이 비교적 높은 축인 스위스나 호주(각각 2.5배), 일본(1.5배)을 압도한다. 전체 인구보다 오히려 노인의 빈곤율이 더 낮은 프랑스·네덜란드 같은 나라와 비교는 언감생심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늙어서 가난해질 위험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현재 국민연금의 명목 소득대체율은 42.5%다. 기금 고갈을 늦추느라 해마다 낮춰 왔다. 2028년까지 40%로 낮아지게 돼 있다. 그러나 생애 평균 월급 400만원 받던 사람이 국민연금으로 160만원쯤 받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제로는 그 절반 정도다. 명목 소득대체율은 40년 가입을 전제로 하는데, 평균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18.7년에 불과하다. 그래서 실질 소득대체율은 22% 수준에 그친다.   지금 국회 연금개혁특위에서 논의되는 두 축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이다. 현재 9%인 보험료율을 높이자는 데에는 의견이 모이는 듯하다. 그러나 소득대체율에 대해서는 엇갈린다. 민간자문위원회는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현행 유지안과 인상안을 나란히 제시했다.   국민연금 재정 추계에 따르면 2080년대가 되어도 신규 수급자의 평균 가입 기간은 27년 정도다. 이 경우 실제 소득대체율은 23~24%에 불과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여유 있는 사람들은 국민연금과 더불어 퇴직연금·개인연금 등의 3중 전략을 짜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용돈 연금’에 만족해야 한다. 이래서야 불명예스러운 노인 빈곤율을 개선할 수 없다. 최근 국민연금연구원은 2020년 태어난 아이들이 노인이 되는 2085년이 돼도 노인 빈곤율은 29.8%에 달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실질 소득대체율을 높이지 않으면 ‘세계 최악의 노인 빈곤국’이란 타이틀을 미래 세대도 여전히 짊어질 공산이 크다.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열심히 일해도 안정적 노후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누가 자신의 노후비용을 미리 털어 자녀 양육에 쓰려 하겠는가. 연금 개혁의 목적은 연금 재정 고갈을 늦춰 공적 연금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고갈 시점을 아무리 늦춘들 연금 재정은 언젠가 바닥이 드러난다. 고갈 시점을 늦추는 데 몰입해 ‘푼돈 연금’을 이어간다면 연금에 대한 믿음 자체가 고갈될 수 있다.   공적 연금의 기능 확대를 사회적 부담으로만 여기는 것은 단견이다. 2060년대 이후 노인 인구 비중은 전체의 45%를 넘는다.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가난에 시달린다면 우리 경제는 위축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보험료율을 더 높이고, 점진적으로 수급 개시 연령을 늦추더라도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방안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높은 노인 빈곤율이 유지된다면 우리 사회는 계속해서 양극화와 이에 따른 갈등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투표권을 가진 노인들의 공적 부조 요구가 강해지면서 재정 압박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2008년 도입된 기초노령연금(기초연금의 전신)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대략 10만원꼴로 올라갔다. 윤석열 정부도 임기 중 기초연금을 30만원에서 4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이미 약속한 바 있다. 이런 악순환을 되풀이하느니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제고에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쉽지 않은 길이다. 정년 연장, 노인 일자리 확대, 복지 시스템 조정 같은 난제가 세트로 딸려 있다. 그러나 이대로 가난한 미래를 기다릴 수는 없다. 소모적인 현금 복지를 정리해 국민연금 지원에 활용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노력 없이 얻는 유일한 것이 노년이라지만, 노년의 행복은 노력 없이 얻을 수 없다. 그 노력을 개인에만 맡긴다면 국가의 존재 이유가 없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02.09 00:59

  • [세컷칼럼] 법에 갇힌 정치

    경찰청 특수수사본부가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관련해 행정안전부와 서울시 등 상급기관의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놀랍지 않다. 2014년 세월호 사건 때도 고위 공무원은 처벌받지 않았다. 유일하게 처벌된 공무원은 가장 먼저 현장에 출동했던 해경 구조정장이었다. 사유는 업무상 과실. 해경청장 등 지휘부 10명이 기소됐지만 1심부터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다. 현장 상황 판단이 어려웠다는 이유다. 9차례나 수사와 조사가 이뤄졌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300명 넘게 희생된 대형 참사에서 국가 차원의 형사 책임은 작은 구조정에 탔던 경위 한 명이 떠맡은 꼴이 됐다.     ■  「 상급기관 책임 못 물은 참사 수사 고위급엔 성글기만 한 법의 한계 그 빈틈 메우는 것이 정치의 역할 법리의 형식성·폐쇄성 극복해야 」    법이란 이런 거다. 실무자의 잘못을 잡아내긴 쉬워도 고위급을 징벌하기는 쉽지 않다. 반드시 법이 강자 편이라서가 아니다. 현장 실무자들의 실수·게으름·부주의는 촘촘한 법 조항이나 규정집을 들이대면 어렵지 않게 짚을 수 있다. 그러나 '컨트롤타워'의 잘못을 법의 잣대로 심판하는 건 한계가 있다. 지휘 소홀과 참사 사이의 인과 관계가 명확지 않기 때문이다. 상급자는 '포괄적 책임'을 지지만, '포괄'이란 말은 빠져나갈 구멍도 많다는 뜻이다. 노자는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빠져나가기 힘들다"고 했지만, 그야말로 도가(道家)적 희망일 뿐이다. 컨트롤타워의 책임 규명이 어렵다 보니 언제부턴가 큰 사고가 났다 하면 대통령 혹은 장관이 언제 첫 보고를 받았느냐가 관심이 됐다. 잘잘못을 따지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현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하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 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검사 출신 대통령답게 증거주의 법정신에 충실한 발언이다. 윤 대통령이 표방한 '법치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그 자체로 시비 걸기 힘들다. 적어도 검찰·법원이 있는 서초동이라면. 그러나 용산과 여의도라면 다르다. 고위층에게는 성근 법의 그물을 메워주는 역할을 정치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딱딱 책임론'은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는 편리한 논리가 될 위험이 있다.   그 한 단면을 얼마 전 국정조사장에서 목격했다. "주말 저녁이면 저도 음주할 수 있다. 그런 것까지 밝혀드려야 하나." 전국 치안의 총책임자 윤희근 경찰청장의 항의다. 맞다. '멸사봉공'은 고리짝 냄새나는 단어다. 아무리 고위 공직자라도 사생활은 있다. 그러나 159명의 비극 앞에 굳이 그렇게 말해야 했는가는 다른 문제다. 윤 청장과 같은 연령의 50대 중반 월급쟁이가 회사 일로 상사한테서 비슷한 추궁을 받았다면 일단 머리부터 숙였을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쯤 되면 이건 비굴이 아니라 예의에 속한다는 걸 안다. '법적 책임론'이라는 보호막이 없었다면 이런 당혹스러울 정도의 당당함이 가능했을까.   윤희근뿐만인가. 구속된 이임재 전 용산서장이나 박희영 용산구청장도 법적 책임을 부인한다. 이 전 서장은 기동대 요청 사실을 놓고 서울경찰청장과 다투고 있고, 박 구청장은 측근을 통해 "국민정서법 때문에 구속이 됐다고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의혹을 받는다. '법적 책임' 논리에 따라 상급기관은 빠져나가면서 1차 책임기관장인 자신들만 당하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와중에 "잘못이 드러나면 누구든 책임을 묻겠다"던 대통령은 이상민 행안부 장관을 포함한 개각을 사실상 없던 일로 했다.   집권 과정에서 윤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는 '법과 원칙'이었다. 낙하하던 지지율도 노조의 불법 파업에 대한 정면 대응을 통해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뭐든지 과잉은 위험하다. 주변을 법 논리로 무장한 법률가로 채우면 정치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 정확하게는 협상과 조정, 타협을 원칙의 훼손으로 보는 탈(脫)정치적 시각이 문제다.   끼리끼리 뭉쳐서는 세상을 제대로 보기 힘들다. 7년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전, 과학철학자 장대익 교수(가천대)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학생들에게 대국 결과를 예측하게 하고 동시에 다섯 명의 '절친' 이름을 적어내게 했다. 그리고 이들 다섯명이 서로 친한지 살펴봤다. 이른바 '에고 네트워크 밀도' 조사다. 에고 네트워크란 나를 중심으로 한 주변인들 간의 연결 정도를 말한다. 다섯명이 서로 친하다면 에고 네트워크 밀도가 높고, 다섯 명끼리 잘 모른다면 밀도가 낮다고 할 수 있다. 실험 결과, 밀도가 낮을수록 알파고의 승리를 예견한 비율이 높았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야 세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장대익 『공감의 반경』)   문재인 정권의 폐쇄성과 대결해 승리한 윤석열 정부다. 그러나 윤 정부 또한 법률가와 법 논리로 짜인 에고 네트워크의 밀도를 자꾸 높여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고밀도의 에고 네트워크는 신념의 강화를 되먹임한다. 유튜브의 알고리듬이 그런 것처럼. 딱딱 책임만 물어서야 정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지만, 정치가 법의 최소한일 수는 없지 않은가.   글=이현상 논설실장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1.12 22:59

  • [중앙시평] 법에 갇힌 정치

    이현상 논설실장 경찰청 특수수사본부가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관련해 행정안전부와 서울시 등 상급기관의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놀랍지 않다. 2014년 세월호 사건 때도 고위 공무원은 처벌받지 않았다. 유일하게 처벌된 공무원은 가장 먼저 현장에 출동했던 해경 구조정장이었다. 사유는 업무상 과실. 해경청장 등 지휘부 10명이 기소됐지만 1심부터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다. 현장 상황 판단이 어려웠다는 이유다. 9차례나 수사와 조사가 이뤄졌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300명 넘게 희생된 대형 참사에서 국가 차원의 형사 책임은 작은 구조정에 탔던 경위 한 명이 떠맡은 꼴이 됐다.     ■  「 상급기관 책임 못 물은 참사 수사 고위급엔 성글기만 한 법의 한계 그 빈틈 메우는 것이 정치의 역할 법리의 형식성·폐쇄성 극복해야 」  법이란 이런 거다. 실무자의 잘못을 잡아내긴 쉬워도 고위급을 징벌하기는 쉽지 않다. 반드시 법이 강자 편이라서가 아니다. 현장 실무자들의 실수·게으름·부주의는 촘촘한 법 조항이나 규정집을 들이대면 어렵지 않게 짚을 수 있다. 그러나 '컨트롤타워'의 잘못을 법의 잣대로 심판하는 건 한계가 있다. 지휘 소홀과 참사 사이의 인과 관계가 명확지 않기 때문이다. 상급자는 '포괄적 책임'을 지지만, '포괄'이란 말은 빠져나갈 구멍도 많다는 뜻이다. 노자는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빠져나가기 힘들다"고 했지만, 그야말로 도가(道家)적 희망일 뿐이다. 컨트롤타워의 책임 규명이 어렵다 보니 언제부턴가 큰 사고가 났다 하면 대통령 혹은 장관이 언제 첫 보고를 받았느냐가 관심이 됐다. 잘잘못을 따지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현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하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 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검사 출신 대통령답게 증거주의 법정신에 충실한 발언이다. 윤 대통령이 표방한 '법치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그 자체로 시비 걸기 힘들다. 적어도 검찰·법원이 있는 서초동이라면. 그러나 용산과 여의도라면 다르다. 고위층에게는 성근 법의 그물을 메워주는 역할을 정치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딱딱 책임론'은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는 편리한 논리가 될 위험이 있다.   그 한 단면을 얼마 전 국정조사장에서 목격했다. "주말 저녁이면 저도 음주할 수 있다. 그런 것까지 밝혀드려야 하나." 전국 치안의 총책임자 윤희근 경찰청장의 항의다. 맞다. '멸사봉공'은 고리짝 냄새나는 단어다. 아무리 고위 공직자라도 사생활은 있다. 그러나 159명의 비극 앞에 굳이 그렇게 말해야 했는가는 다른 문제다. 윤 청장과 같은 연령의 50대 중반 월급쟁이가 회사 일로 상사한테서 비슷한 추궁을 받았다면 일단 머리부터 숙였을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쯤 되면 이건 비굴이 아니라 예의에 속한다는 걸 안다. '법적 책임론'이라는 보호막이 없었다면 이런 당혹스러울 정도의 당당함이 가능했을까.   윤희근뿐만인가. 구속된 이임재 전 용산서장이나 박희영 용산구청장도 법적 책임을 부인한다. 이 전 서장은 기동대 요청 사실을 놓고 서울경찰청장과 다투고 있고, 박 구청장은 측근을 통해 "국민정서법 때문에 구속이 됐다고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의혹을 받는다. '법적 책임' 논리에 따라 상급기관은 빠져나가면서 1차 책임기관장인 자신들만 당하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와중에 "잘못이 드러나면 누구든 책임을 묻겠다"던 대통령은 이상민 행안부 장관을 포함한 개각을 사실상 없던 일로 했다.   집권 과정에서 윤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는 '법과 원칙'이었다. 낙하하던 지지율도 노조의 불법 파업에 대한 정면 대응을 통해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뭐든지 과잉은 위험하다. 주변을 법 논리로 무장한 법률가로 채우면 정치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 정확하게는 협상과 조정, 타협을 원칙의 훼손으로 보는 탈(脫)정치적 시각이 문제다.   끼리끼리 뭉쳐서는 세상을 제대로 보기 힘들다. 7년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전, 과학철학자 장대익 교수(가천대)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학생들에게 대국 결과를 예측하게 하고 동시에 다섯 명의 '절친' 이름을 적어내게 했다. 그리고 이들 다섯명이 서로 친한지 살펴봤다. 이른바 '에고 네트워크 밀도' 조사다. 에고 네트워크란 나를 중심으로 한 주변인들 간의 연결 정도를 말한다. 다섯명이 서로 친하다면 에고 네트워크 밀도가 높고, 다섯 명끼리 잘 모른다면 밀도가 낮다고 할 수 있다. 실험 결과, 밀도가 낮을수록 알파고의 승리를 예견한 비율이 높았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야 세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장대익 『공감의 반경』)   문재인 정권의 폐쇄성과 대결해 승리한 윤석열 정부다. 그러나 윤 정부 또한 법률가와 법 논리로 짜인 에고 네트워크의 밀도를 자꾸 높여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고밀도의 에고 네트워크는 신념의 강화를 되먹임한다. 유튜브의 알고리듬이 그런 것처럼. 딱딱 책임만 물어서야 정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지만, 정치가 법의 최소한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현상 논설실장 leehs@joongang.co.kr

    2023.01.12 00:56

  • [이현상의 시시각각] 윤 대통령, 마거릿 대처가 될 수 있을까

    이현상 논설실장 윤석열 대통령은 5월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영국 전시내각 때 처칠과 애틀리의 '파트너십'을 거론했다. 갓 취임한 대통령의 협치 의지가 주목받았다. 그러나 최근 노동계에 대한 강경 대응을 보면 윤 대통령의 롤 모델이 윈스턴 처칠에서 마거릿 대처로 바뀐 듯하다. 대처는 고복지·고비용·저효율의 '영국병(病)'을 과감한 개혁으로 돌파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가라앉던 영국을 서방 주요 국가로 다시 만들었다. 개혁 핵심은 기득권 노조와의 정면 대결이었다.   ■  「 강성 노조와 정면 대결 선택 비슷 대처는 중산층 지지로 11년 집권 지지율 뒷받침돼야 개혁도 가능 」    1970년대 영국에서 노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1973~74년 탄광노조 파업은 에드워드 히스가 이끌던 보수당 정권을 무너뜨릴 정도였다. 그러나 노조의 과도한 투쟁은 국민, 특히 중산층을 질리게 했다. '불만의 겨울'이라 불리던 78년 말~79년 초 공공부문 총파업 사태가 그 정점이었다. 기차·버스·지하철이 모두 섰다. 진료를 거부당한 환자가 죽어나갔다. 여론의 70%가 "노조가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답했다. 79년 5월 총선에서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압승한 배경에는 이런 노동계의 '패착'이 있었다.   (울산=뉴스1) 윤일지 기자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의 집단운송거부(총파업) 행동이 7일째 이어진 30일 오후 울산 남구 석유화학단지에서 조합원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2022.11.30/뉴스1 화물연대 파업에 업무개시명령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한 윤 대통령의 뇌리에도 '한국병'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을 법하다. '법과 원칙'이야말로 새 정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유시장과 민영화 강조, 공공부문 축소, 낭비적 복지의 효율화 같은 정책 기조도 대처와 윤 대통령이 닮았다.   그러나 이미지가 겹친다고 정치 여건까지 비슷한 건 아니다. 총선에서 세 번이나 승리하며 11년 동안 집권한 대처는 전후 최장기 총리라는 명예를 안았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임기 1기 때는 산업구조 조정으로 실업률이 폭증하면서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졌다. 때마침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1982년)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재집권이 힘들 정도였다. 대처의 개혁 성과가 수치로 확인된 것은 임기 2기인 80년대 중반이 돼서였다.   윤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4년 반 남았다. 당장 1년4개월 뒤엔 정권 후반기의 운명을 가를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노동·연금·교육 등 '3대 개혁'을 과제로 꼽고 있다. 개혁이라는 게 반발은 눈앞이고, 성과는 더디기 마련이다. 개혁 성과를 총선 전략으로 내걸기 힘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그 과제를 마냥 미적대면 보수층의 지지마저 잃을 가능성이 있다. 딜레마다.   영국병을 치유한 대처의 업적은 크지만 그늘도 깊다. 2013년 대처가 사망했을 때 노동자의 도시 리버풀에서는 "마녀가 죽었다"는 환성이 터졌다. 죽음 앞에서도 풀리지 않은 증오다. 그래도 대처가 과감한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미들 잉글랜드'라 불리는 중산층의 확고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어떤가. 취임 6개월 현재 지지율은 30%대다. 당내 갈등, 인사 문제, 잇따른 태도와 말실수 등으로 지지층 다수가 이탈했다. 반대가 지지의 배를 넘는다. 돌아선 지지층 중 일부는 절대 비토(veto)가 되는 현상까지 관찰된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 회피, 언론에 대한 감정적 대응 등이 이런 리스크를 키우고 있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내후년 총선에서 개혁의 '성과'보다는 여전히 개혁의 '필요성'을 앞세워 지지를 호소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상황에서 지지율마저 지지부진하면 어떻게 될까. 악재가 거듭돼도 지지율이 더 빠지지 않는 건 윤 대통령으로선 다행이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는 건 위험하다. 문재인 정부도 40% 콘크리트 지지에 만족하다 정권을 내줬다. '콘크리트'라는 말 자체가 탄력 회복성이 작다는 뜻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영국 노조가 대처를 도왔던 것처럼 지금 민주당은 당 대표 지키기에 올인하면서 윤 대통령을 돕는 형국이다. 그 반사이익이 사라지는 순간 윤석열 정부는 더 위험해질지 모른다. 이제 보고 싶은 것만 볼 게 아니라 봐야 하는 것에도 눈을 돌릴 때다.  이현상 논설실장 leehs@joongang.co.kr

    2022.12.02 01:32

  • [이현상의 시시각각] 이름 부르지 않아도 이미 꽃이다

    이현상 논설실장 종교로써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한 신부가 서울 한복판 길거리 미사를 집전하며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그다음 날 방송에 나와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 패륜이라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패륜하는 기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부에 따르면 이름을 부르는 건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을 위한 기도 의식이란다. 패륜(悖倫).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어그러짐, 또는 그런 현상. 국어사전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희생자들의 영혼은 '패륜'을 넘나드는 호명(呼名)을 달가워할까. 특히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면.   ■  「 이름 공개가 진짜 애도라는 궤변 유족 심경 고려 부족 스스로 인정 공감이라는 이름의 폭력 멈춰야 」    희생자 명단은 '시민언론 민들레'라는 단체 홈페이지에 아직 떠 있다. 항의가 들어오면서 30명 가까운 이름이 OOO로 처리됐다. '민들레'는 부담을 못 이겼는지 명단 공개의 취재와 이유에 대해 장황한 설명의 글을 띄웠다. '명백한 사회적 죽음'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의 극치' '남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이 뭔가 찾는 노력' 같은 구절이 보인다. 그까지는 이해된다. 그러나 다음 문장. "명단 공개가 우리 자신의 완전한 확신과 빈틈없는 준비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고 감히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유족들의 심경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충분했느냐에 대해 감히 그렇다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 인근에 추모 메세지가 붙어있다. [연합뉴스] 무슨 말인가. 선의만은 훌륭했다, 그러니 이해해 달라? 명색이 '언론'을 자처하는 곳에서 이런 유아기적 발상을 부끄럼도 없이 내뱉는다. 개인정보보호법, 혹은 피해자 중심주의 같은 말을 들먹이는 것도 아깝다. 법 이전에 상식의 문제다. 그들이 이름 외에 희생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뭔가. 울고 웃던 얼굴, 사소한 버릇,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중 단 하나라도 아는 게 있는가. 아무리 뜻이 좋다 한들 생면부지 사람들이 남의 이름을 함부로 이용할 권리가 있는가. '민들레'는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름만으로 개인이 특정되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그 말이 맞는다면 명단 공개가 어떻게 구체적 애도의 출발점이 되는가.   개인적 생각을 말해도 된다면, 내가 어쩌다 불행한 일에 휘말렸을 때 나의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먹이는 건 싫다. 더구나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 전체 희생자 명단, 사진, 프로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된다면 끔찍하다.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는 가급적 본명을 쓰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이름이 주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임금이나 죽은 어른의 본명을 '휘(諱)'라고 했다. '꺼린다'는 뜻이다. 심지어 웬만한 양반·문인들은 지인들끼리 본명 대신 자(字)나 호(號)로 불렀다. 추모한답시고 함부로 부른 이름에 모욕과 조롱이 주술처럼 붙는다면 그네들은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공감의 진짜 뜻이 흐려진 지 오래다. 진영 대립이 거세지면서 '선택적 공감'이라는 희한한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참사를 정치화하려는 세력이 즐겨 내세우는 단어가 공감이다. 이번 명단 공개는 공감이라는 말조차 붙이기 어렵다. 폭력일 뿐이다. 최근 『공감의 반경』이라는 책을 낸 장대익 가천대 석좌교수는 "공감은 인류 역사 속에서 갈등의 치료제였을 뿐만 아니라 증폭제로도 작용했다"고 말한다. 이번이 딱 그런 경우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세상에 어떤 참사에서 이름도 얼굴도 없는 곳에 온 국민이 분향하고 애도를 하냐"는 말로 논란을 자초했다. 당 일부에선 여전히 실명 공개를 주장한다. 가짜 공감들이다. 이런 야당을 공격하는 여권도 민망하긴 마찬가지다. 참사 3주일이 되도록 책임지고 물러난 고위직이 하나도 없다. 가짜 공감보다 더 무서운 '무공감'이다.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이미 커다란 사회적 의미가 됐다. 이름 부르지 않아도, 영정 사진 하나 없어도, 이미 그들은 꽃이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2.11.18 00:54

  • [이현상의 시시각각] 이태원이 세월호가 안 되려면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001일째 아침을 맞는 칠면조는 행복했다. 자신을 향한 주인의 손에는 당연히 모이가 있을 테니. 그런데 그 손이 칠면조의 목을 움켜쥐었다. 칠면조는 그날이 추수감사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행복했던 1000일은 1001일째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투자 전문가 나심 탈레브의 책 『블랙 스완』에 나오는 우화다.   어찌 투자의 세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겠는가. 이태원 참사는 칠면조의 1001번째 날이었다. 아무도 예견 못 한 '블랙 스완'이었다. 확률분포의 극단 중 극단에 있던 가능성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은 사후 확증 편향에 불과하다.     ■  「 핼러윈 참사는 예측 어려운 비극 그래도 정부 무한책임 인정해야 사과와 문책에 뜸 들일 이유 없어 」  코로나19 이전 3년간(2017~2019년) 핼러윈 직전 토요일 이태원역 하차객 수는 6만 명 선이었다. 올해는 8만 명이었다. 매년 37~90명이던 경찰 투입 인력은 올해 137명이었다. 인파는 30% 늘었지만, 경찰 인력은 최소 50% 늘었다. 그런데도 사고를 막지 못했다. 특정 수치를 넘기면 물리 현상이 달라지는 '임계치'를 생각 못 한 것이다. 서울경찰청 112상황실은 숨넘어가는 신고를 연거푸 받고도 상황 파악을 시도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용산경찰서에 전파했고, 경찰서는 다시 일선 파출소로 넘겼다. 역시 극단의 가능성을 예상 못 한 탓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왼쪽)이 이태원 참사 엿새째인 3일 오전 서울광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태원 참사는 윤석열 정부의 불운임이 틀림없다. 누군가는 "문재인 정부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근거 없다. 국가 행정 시스템의 역량과 관행이 몇 달 만에 확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정부가 스스로 이 불운을 한탄하며 무한 책임을 부인하는 순간, 문제가 달라진다. 외재하던 리스크가 정권 내부로 스며든다.   "경찰을 미리 배치한다고 해결될 수 없었다"는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발언에는 이 사건을 불운으로 보는 시각이 깔렸다. 그 생각을 드러내자 여론의 화살이 정부로 쏟아졌다. 압력은 이태원 비극의 골목길에만 쌓이는 게 아니다. 감당 못 할 사태를 겪은 공동체의 분노는 배출구를 찾는다. 총리의 허튼 농담, 장관의 책임 회피는 그 무시무시한 압력을 건드렸다.   민주당은 정쟁 자제 모드에서 공세로 돌아섰다. 지도부의 한 초선 의원이 "반 박자 느리게 가야 역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정치가 여론전임을 제대로 간파했다. 그렇다면 여권의 대응은 한 가지다. '반 박자 빠르게' 행동하는 거다. 이상민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 문책이 피할 수 없는 수순이라면 망설여서는 안 된다. "사건 수습이 먼저"는 안이한 판단이다. 수습 자체에 문책이 포함돼야 한다.   사과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때 박근혜 대통령의 공식 사과는 사고 발생 14일 만에 국무회의에서 나왔다.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20일 뒤 대국민 담화를 또 해야 했다.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숙였지만, 여론은 이미 돌이킬 수 없어졌다. 용산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이미 추모식장 등에서 여러 차례 유감의 뜻을 밝혔다"고 했지만, 어림없다. 공식적이고 진지한 사과 담화가 신속하게 나와야 한다. 그 사과에는 '미안하다'는 말뿐 아니라 '내 잘못입니다'와 '이렇게 고치겠습니다'가 들어가야 한다. 첫 사과에서 '내 탓이오'보다 '적폐 청산'을 강조했다가 여론의 반발을 자초한 박 전 대통령의 우(愚)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참사의 정치화'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다. 가짜뉴스, 비논리적 인과 주장, 거친 구호가 벌써 시작됐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섣부른 대응은 자칫 '정치의 참사화'를 부를 뿐이다. 비극을 정쟁에 이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비극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태도도 역풍을 부른다. 행안부가 '참사, 희생자, 피해자' 대신 '사고, 사망자, 부상자'로 표기하라는 공문을 각 시·도에 보냈다. 괜한 짓이다. 진지하고 신중한 자세로 중도층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숙제다. 실패한다면 민심의 손이 정권의 목덜미를 움켜쥘 수도 있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11.04 0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