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범 프로필 사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문화스포츠피플 에디터
중앙일보 국제부장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일보 파리특파원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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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데이 칼럼] 고개 들어 하늘을 보자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세모에 ‘돈 룩 업(Don’t look up)’이라는 영화를 봤다. 천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우연히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혜성을 관측한다. 학생은 지도교수에게 보고하고, 두 사람은 혜성이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크기라는 것과 그것이 지구와 충돌한 운명의 날짜가 6개월여밖에 안 남은 사실을 계산해낸다.   두 사람은 TV 토크쇼에도 출연하고 백악관도 방문해 닥칠 재앙을 경고하지만, 오히려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그들의 학교가 명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혜성을 파괴할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며, 이윽고 혜성이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거리에 모습을 드러낸다.   ■  「 명백함도 부인하는 확증편향 우리 분노가 그런 건 아닌지 증오는 뜨거운 석탄 쥐는 것 호시우행하는 한 해 되기를 」    여기서 정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진다. 명백한 과학적 사실에도 혜성의 접근을 부인하던 무리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지 말라(don’t look up)’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다. 눈에 훤히 보이는 위험마저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확증편향’의 가공할 힘이다.   영화의 결말은 설명이 필요 없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돈룩업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을 되새겨보는 게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는 것일 터다.   모바일 환경의 정보 과잉 시대는 확증편향을 그야말로 일상으로 만든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닿는 정보 중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래서 더 편향되고 더 확신이 굳어진다.   선데이 칼럼 1/8 이를 부추겨서 클릭 수를 늘리는 유사 언론들이 가세해 자극적 제목으로 각을 키운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진대도 이들은 부끄러움이 없다. 다시 낚싯바늘을 던지면 그만이다. ‘○○○ 사건, 극적 반전!’   우리가 익히 경험한 대로 확증편향은 흔히 패거리주의와 짝을 이뤄 종말론적인 아집과 독선을 낳는다. 사무실 PC를 빼돌리는 장면을 보면서 “증거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해설을 할 수 있는 게 그래서다.   일단 편이 갈라지면 우리 편은 팥을 쒀도 메주가 되고, 상대편은 흰옷을 입어도 검게 보인다. 이해득실의 판단만 있을 뿐, 진실을 보려는 노력은 성가시다. 상대가 아무리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도 조작이요 거짓일 뿐이다.   싸움이 시작되고 상대를 향한 분노와 증오는 이제 필연이다. 시퍼렇게 날 선 말들이 오가고 육두문자가 춤을 춘다. 그러다 고소 고발로 이어지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다 다툼의 원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삿된 감정싸움만 남는다. ‘코삼비 계곡의 승려들’처럼 말이다. 부처가 코삼비에 머물 때 불법(佛法)의 해석을 놓고 두 비구 그룹이 다퉜다. 보다 못한 부처가 싸움을 멈추라고 말하자 승려들이 부처에게 말했다.  “세존은 빠지세요. 우리 일입니다.”   정치적 목적이 끼어들면서 분노와 증오는 맹목적이 된다. SNS에 한마디씩 던지며 찍는 좌표에 따라 대중들의 분노는 이리 쏠리고 저리 달려간다. 90년 전 괴벨스가 히틀러를 위해 한 짓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말했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프로파간다의 가장 큰 적은 지성주의다.”   이런 싸움은 대부분 파국을 맞고서야 끝나게 마련이다. 425년 전 첫 출간된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고, 그것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그렇다. 사람은 바뀌지 않고 인간사 역시 늘 그 모양이다. 숱한 오해와 옥생각이 중첩되는데, 분노와 증오가 너무 짙어 진실의 바탕색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때는 화해라도 했다. 그 화해가 얼마나 지속할는지는 몰라도 화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인스턴트 분노의 시대에는 화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분노와 증오의 통조림을 따서 오븐에 넣고 끓인 뒤 맛을 보기도 전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새 통조림을 딸 준비를 한다. 화해가 자리할 틈이 없다.   처음부터 분노와 증오의 싹을 잘라야 하겠다. 정당하게 분노하고 증오할 일이 왜 없겠냐마는, 자칫 소비되고 버려지는 게 분노하고 증오했던 나 자신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나한테 화가 미치는 까닭이다. 『법구경』이 말하는 게 그것이다. “증오를 품는 것은 벌겋게 달아오른 석탄을 집어 드는 것과 같아서 그것을 다른 이에게 던진다 하더라도 나 먼저 데고 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괴벨스한테 배우면 되겠다. 선전 선동의 천재 괴벨스가 스스로 약점을 고백하지 않았나 말이다. ‘지성주의’가 별 게 아니다. 화를 내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하는 게 지성이다. 우리 편이 뭐란다고 무조건 믿는 게 아니라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는 게 지성주의인 것이다.   그것이 곧 나를 위한 길이요 우리 편을 위한 길이며,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한 길이다. 2022년 새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해가 됐으면 좋겠다. 호랑이해에 비춰 말하자면 ‘호시우행(虎視牛行)’이다. 판단은 호랑이처럼 냉정하게 하고, 행동은 소처럼 우직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동안 우직하게 믿고 사납게 행동하는 우시호행, 즉 돈룩업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며 말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01.08 00:30

  • [선데이 칼럼] 국민이 그리 우스운가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감탄고토(甘呑苦吐)’는 요즘 말로 ‘K-사자성어’다. 대부분의 사자성어와는 달리 우리 속담을 한역한 것이다. 중국 명나라 때 속담집 『이담(耳談)』에, 정약용이 우리 속담을 추가해 펴낸 『이담속찬(耳談續纂)』에 나온다. 다산은 이런 해설을 달았다. “이전에 달게 먹던 것을 지금은 쓰다고 뱉는다. 사람은 이익에 따라 교묘히 바뀐다.”   감탄고토를 인간의 보편적 성정(性情)으로 본 것이다. 사실 그렇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다른 게 인지상정인 거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비판도 정당하다. 인간 속성이 그렇다 해서 그런 행태에 대한 비난까지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  「 공약 뒤집기가 그리 쉬운데 국민 뜻 포장 왜 안 쉽겠나 그것이 포퓰리즘이요 독재 신뢰 없이 대권은 꿈일 뿐 」    이해 당사자가 많은 경우 비판 강도도 따라 커진다. 이번 수능시험 문제 오류처럼 말이다. 비교할 개체 수가 음수(陰數)가 되는 초현실적인 문제도 그렇지만, 이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태도가 더 비난받아 마땅하다.   평가원은 “문항의 조건이 완벽하진 않아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타당성이 유지된다”는 역시 초현실적 논리로 오류 지적을 묵살했다. 평가원은 2008년 수능 복수정답 논란 때도 오류를 인정하지 않았었는데(그것이 그들이 사는 법이었던 거다), 그때 대학교수로서 분연히 비판했던 게 이번에 사표를 쓴 강태중 평가원장이었다. “채점 전 소수의 학생이 이의제기했을 때 타당한 증거로 좀 더 일찍 검토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13년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책임을 얼버무리다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된 것이다.   선데이 칼럼 12/18 이 정도는 그래도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인지상정을 말하던 다산도 놀라 넘어질 만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우리네 여당의 대통령 후보다. 온 국민이 이해 당사자인 문제를 놓고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달라도 너무 다른 까닭이다. 180도 말을 뒤집는 건 물론, 화장실을 다녀온 사실조차 부인할 때는 듣는 사람이 난감할 지경이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이재명 후보의 감탄고토 평가는 가히 기네스북감이다. 대구 가서 “존경하는 박근혜 대통령님”이라고 하더니, 나흘 뒤 “존경하는 대통령이랬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고 말을 바꿨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쿠데타와 5·18만 빼면 잘했다는 호남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곤욕을 치른 야당의 윤석열 후보를 겨냥해 “(살인강도도) 살인·강도를 했다는 사실만 빼면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말이냐”고 비판한 이 후보였다. 그러더니 본인이 경북에 가서는 “3저 호황을 잘 활용해 경제가 제대로 움직이게 한 것은 성과가 맞다”고 했다. “윤석열 말과 뭐가 다르냐”는 비판을 받자 이틀 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라고 또 뒤집었다.   이재명식 유연성과 실용주의라지만, 국민을 바보로 알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자기부정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뒤집힌 거라도 말은 된다. 대장동 의혹으로 넘어가면 그야말로 ‘말인지 XX인지’ 모를 상황이 돼버린다.   이 후보는 “내가 사업 설계자”라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하지만 ‘화천대유’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단군 이래 최대의 민간개발 회수 치적’이 ‘단군 이래 최대 스캔들’로 변질돼가자, 국민의 힘 인사가 도둑 설계를 했다고 주장을 바꿨다. 최종 승인자가 자기였는데도, “노벨이 화약 만들었다고 9·11 테러를 설계한 거냐”며 언성을 높였다.   자신이 성남시장 때 성남도시개발공사 개발본부장으로 있던 인물이 구속영장이 청구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데 대한 반응에도 입을 다물 수 없다. “몸통은 놔두고 엉뚱한 데를 자꾸 건드려서 이런 참혹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대장동 특혜 의혹의 핵심이자 이 후보의 측근으로 알려진 유동규 전 성남도개공 사장 직무대리가 구속되자, “한국전력 직원이 뇌물 받으면 대통령이 사퇴하냐”며 스스로 대통령급이 돼 빠져나갔다. 이 후보가 자기 말처럼 의혹과 무관하기만 하다면, 이런 엽기 언어들도 다 괜찮다. 오히려 정치인한테 꼭 필요한 유머 감각일 수 있다. 최근 문제가 된 아들의 불법 도박도 넘어가 줄 수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내 맘대로 안되는 게 자식이다. 그것도 인지상정인 거다. 책임질 건 성인인 아들이 책임지면 된다.   치명적인 뒤집기는 공약에서 나온다. 기본소득, 국토보유세, 재난지원금 등 국가 경제를 좌우할 정책들이 한순간에 뒤집혀 버린다. “국민이 반대하면 안 한다”는 거라지만, 그렇게 쉽게 버릴 것 같으면 처음부터 꺼내지 말아야 했고 옳다고 생각한다면 끝까지 국민을 설득해 관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공약에) 반대하는 것은 악성 언론과 부패정치 세력에 놀아나는 바보짓”이라고 극언하더니, 하루아침에 국민이 반대해서 안 한다면 국민이 바보라는 얘기가 아니고 뭔가. 그런 것이 바로 포퓰리즘이요, 독재의 다른 얼굴인 것이다. 공약을 바꾸는 게 그리 쉬운데, 자기 이익을 국민 뜻으로 포장하는 건 얼마나 쉽겠나 말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표를 줄 수 있겠나.   이재명 후보의 적은 다른 사람 아닌 이재명이다. 자신 안의 ‘또 다른 나’를 다스리지 않으면, 그래서 초점이 이중으로 겹치지 않는 선명한 이재명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렇게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그의 대권 꿈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국민은 그가 생각하는 만큼 우습지 않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12.18 00:30

  • 사회문제 감성으로 버무린 소설집

    이대 나온 여자 이대 나온 여자 양선희 지음 독서일가   책 속 단편소설 5편을 한달음에 읽으며, 지난 10년 동안 작가가 어떻게 단편을 쓰지 않고 견뎌냈을까 의문이 들었다. 이들 단편은 모두 10년 전 작가의 등단 전후로 쓰인 것들이다. 물론 그동안 장편을 몇 편 써냈고 기자로 일하면서 단편까지 추가하기가 녹록찮았을 테지만, 잠시도 쉬지 못하는 작가의 열정을 알기에 들 수밖에 없는 의문이었다.   작가는 트렌디한 주제에 집착하는 요즘 젊은 작가들과 달리, 다양한 키워드에 관심을 갖는다. 직업병이 틀림없는데, 이 책에서도 학벌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비혼모, 파생상품, 동성연애 등 각종 사회 현상들을 과장 없는 시각으로 담담히 짚어낸다.   이는 역설적으로 기자에게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사회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조금은 과장이 섞이기 쉬운 까닭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기자적 글쓰기와 작가적 글쓰기를 성공적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날카로운 기자적 문제의식을, 따뜻한 작가적 감성으로 버무려 맛있으면서도 영양 풍부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가의 머릿속에 있을 많은 단편들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2021.12.18 00:20

  •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위태로운 역사 인식과 비어있는 역사의식

     ━  지도자의 역사의식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8세기 이탈리아 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는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책 『범죄와 형벌』에 “역사가 없는 나라는 행복하다”고 썼다. 역사란 대체로 폭력적이고 비극적이며 경천동지할 사건들을 기록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런 걸 기록할 게 없는 나라가 운이 좋은 나라고 그 국민이 행복한 국민이라는 것이다.   웃자고 한 얘기에 (게다가 100년도 더 지난 마당에)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죽자고 덤벼든다. 러닝메이트로 출마한 1899년 시카고에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반박한다. “역사가 없는 국가가 행복하다는 것은 저속한 거짓말입니다. 영광된 역사가 있는 나라야말로 행복한 나라입니다.”   ■  「 반일감정 선동하는 후보와 역사에 관심 없는 후보는 모두 대통령 자격 미달해 역사 속 선각자에 배워야 」    역사를 바라보는 학자와 정치인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논쟁(?)일 터다. 객관적 시각이 요구되는 학자로서는 비극적인 사건들이 눈에 더 띌 테고, 국민의 사기를 고양할 (흔히 자신의 사기를 고양할 욕구를 더 느끼지만) 필요가 있는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국가의 영광을 강조하게 되지 않겠나 말이다.   분명하면서 중요한 사실은 이처럼 역사가 정치인의 손에 쥐어지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국가에 영광만 계속되면 좋겠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21세기 대명천지에 미국 같은 강대국도 목숨 걸고 자기들을 도와온 아프가니스탄 조력자들을 팽개치고 달아나는 치욕을 겪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 경우 학자라면 담담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술하겠지만(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학자 출신 정치인이 특히 그렇다), 책임을 져야 할 정치인들은 사실을 호도하거나 남의 탓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마련인 것이다. 반대로 그것이 정적의 책임이라면 사실을 더욱 부풀리거나 왜곡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치열한 대선전이 펼쳐지고 있는 두 유력 후보의 손에서 역사가 신음하고 있다. 우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쥐고 있는 역사는 대단히 위태롭다. 그는 지난달 방한한 미국 민주당의 존 오소프 상원의원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한미 관계의 ‘그늘’이라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 얘기를 꺼냈다.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승인했기 때문”이라며 “결국 일본이 아닌 한반도가 분단돼 (한국)전쟁의 원인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거였다.   부끄러움은 국민 몫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호기롭게 말했을지 모르나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었다. 손님이 오면 덕담을 하는 게 예의인데 감정 섞인 지적을 한 데서 민망한 게 아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얘기도 덕담 뒤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보다는 너무도 밭은 역사 인식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미국이 필리핀 통치를 인정받는 대가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협약이다. 이후 일본이 한반도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직접적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 36년을 겪은 걸 미국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고교생도 하지 않을 말이다. 하물며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미 상원의원한테 미국 책임을 운운하는 건….   당시가 어떤 시대인가. 산업혁명 이후 유럽 국가들이 앞다퉈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국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였다. 그야말로 세계가 ‘열강’이라는 이름의 제국주의 국가와 그들의 먹잇감인 식민지 국가로 양분됐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에티오피아 제국과 타이 왕국 등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국가만이 (수많은 이권을 내주고서) 그나마 명목상의 주권을 지킬 수 있던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우리를 지켜줘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나. 당시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미국에 한반도는 지켜야 할 전략적 가치도 없었고, 한반도에 병력을 파견할 여유도 없었다. 미국이 일본과 밀약을 맺은 것도 그래서 나온 거였다. 몇 안 되는 자신의 식민지를 보장받기 위해서 말이다.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헨리 키신저가 1994년 펴낸 『외교』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한국은 전적으로 일본의 것이다(Korea is absolutely Japan’s). 조약으로 한국의 독립이 보장돼있기는 하나 한국은 조약을 들먹일 힘이 없다. 자신들도 못하는 일을 다른 나라가 대신 해주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것이 당시의 인식이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우리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지 미국의 탓이 아닌 거다. 그렇지 않다면 여당 후보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한테도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는가”라고 따져야 할 일이다.   반일감정 악용이 문제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이어 일본은 보름 뒤인 8월 12일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 또 20여일 뒤인 9월 5일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해 영국과 러시아에 한반도 지배권을 인정받았으며, 그것이 그해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이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인 까닭이다.   내친김에 말하자면 루스벨트의 후임자인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연두교서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지만, 그것 역시 1차대전 전후 세계 질서를 새롭게 세우는데 자기들에게 유리해서지 미국이 ‘성인(聖人)국가’여서가 아니다. 게다가 패전국들의 식민지에만 적용됐지 연합국이 지배하는 아시아 지역은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의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의 얕은 역사 인식만 위태로운 게 아니다. 거기에 바탕을 둔 근거 없는 반일감정을 이용해 표를 얻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더 문제다. 현 정권은 집권 기간 내내 국민을 친일과 반일로 편 가르고 자신들의 반대편에 선 보수세력을 ‘토착 왜구’로 모는 전략을 구사했다.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반일감정을 선동하는 ‘죽창가’가 울려 퍼질 정도였다.   이 후보는 그 전략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안철수 후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어가는 황소를 낙지가 살렸다는 속설처럼, 강성 지지층을 벌떡 일으켰던 친일 프레임의 마법을 소환한 것”이다.   실제로 이재명 후보는 틈나는 대로 국민의 반일감정을 자극하려 애쓴다. 그는 얼마 전 “산부인과라는 명칭은 일제의 잔재이므로 여성건강의학과로 바꾸겠다”는 공약까지 내세웠다가 비판을 받았다. 이름을 바꾸는 거야 뭐랄 게 없지만 ‘일제의 잔재’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반일을 내세우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다. 그렇게 치면 자신이 되려는 ‘대통령’이나 자신이 속한 ‘민주당’ 또한 일본이 만든 용어이니 먼저 바꿔야 할 거 아니냐는 얘기다.   여당 역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친일파’로 모는 전략을 구사하며 이 후보를 지원한다. “역사와 배경을 무시한 채 우리 정부가 일본 우경화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의 발로이며 일본 우익 세력을 두둔하는 행태”라는 것인데, 윤 후보가 다소 무지한 것은 맞는 것 같지만 앞서 말한 대로 역사와 배경을 무시한 것은 그들 자신이다.   윤 후보의 문제는 친일이 아니라 역사의식 부재다. 그것에 대한 우려는 윤 후보가 벌인 몇 가지 해프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캠프 페이스북 계정에 “너희들이 장래에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조선의 용감한 투사가 되어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술잔을 부어 놓으라”는 윤봉길 의사의 말 아래 윤 후보가 안중근 의사 영정에 술잔을 올리는 사진이 걸리면서 불거졌다. 윤봉길 의사와 안중근 의사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페이스북을 관리하는 관계자의 자질 부족 탓일 수도 있겠지만, 윤 후보가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고 피를 흘리는 모습의 조형물을 보면서 “이건 부마(항쟁)인가요”라고 물었던 전력이 있던 터라 다시 논쟁에 휘말렸다.   대통령 기소하고도 못 배워   어찌 보면 단순한 실수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윤 후보가 확고하고 분명한 역사의식이 있다면 할 수 없었던, 그리고 하지 말았어야 할 실수였다. 윤 후보의 해명을 들어봐도 평소 역사에 관심과 지식이  많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의 운명을 짊어질 대통령 후보로서는 치명적 약점일 수 있다. 초보 정치인으로서 여의도 정치 문법을 몰라 빚어진 말실수라는 변명이 통할 여지가 없다. 역사의식이 없다 보니 박근혜 전 대통령을 기소하고도 그가 왜 감옥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윤 후보에게 박근혜는 반면교사의 역사가 아니라, 그저 사건 번호 00000번의 특수사건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문제를 일으켰던 인물들을 캠프에 두면서도, 벌써부터 ‘문고리’니 뭐니 잡음이 나오는데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여당과 야당의 두 유력 후보의 역사 인식은 모두 문제가 있다. 유권자들은 역사 인식이 위태로운 인물과 역사의식이 부족한 인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국가와 국민에게는 둘 다 위험할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건 한쪽으로 치우친 역사 인식을 가진 이는 벼랑 끝에서 가운데로 돌아오고, 역사의식이 부족한 이는 지금부터라도 역사에 침잠해보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누가 되더라도 국가와 국민이 위험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한가지 알려주고 싶은 분명한 사실은 역사 속 선각자들은 남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고, 남을 증오하기보다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구히 흘러온 우리의 정신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일본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벼리는 대신, ‘동양평화론’을 구상했다. 다소 순진한 생각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나름대로 미래의 평화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려 한 것이다. 민족 대표 33인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3·1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병자수호조규 이후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렸다 해서 일본의 신의 없음을 죄주려 하지 않노라. (...) 자기를 채찍질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하고 꾸짖을 겨를이 없노라. (...) 오늘 우리가 맡은 바는 자기 건설만 있을 뿐이오,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게 아니도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필요하다면 원망 대신 용서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지도자의 품격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1.12.02 00:37

  • [선데이 칼럼] ‘생노병사고’ 공직자들이 있으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생로병사고(生老病死苦) 재상’이란 말이 있었다. 중국 북송의 신종(神宗) 때 일이다. 당시 황제를 보좌하는 재상과 부재상이 다섯 명이나 됐다. 황제의 나이가 어린 데다, 심각한 외교 안보와 재정 적자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한림학사 왕안석만 의욕적으로 나설 뿐, 나머지 넷은 뒷짐만 지고 일을 하지 않았다.   재상 증공량은 고령임을 내세워 거드름만 피웠고, 부필은 병을 핑계로 자리를 비우는 날이 많았다. 당개는 관직에 오른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났고, 조변은 매사에 몸을 사리며 엄살을 피웠다.   ■  「 도망가는 경찰관들 만든 건 자기 일 안하는 고위공직자 묵묵히 할 일 하는 국민까지 권력 촉수가 흐트려서 걱정 」    생로병사고란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네 가지 고통을 말하는 불교용어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이 네 가지 고통에다 그냥 일반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다섯 고위관리를 보고 사람들이 생로병사고 재상이라 비웃었던 것이다.   당시 북송이 어디 그럴 상황이었나. 북방에서 침입하는 요와 서하를 재물로 달래느라 나라 곳간에 구멍이 뚫렸다. 굴욕적 조약으로 얻은 평화로 문화의 꽃을 피웠지만,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고 대지주·대상인의 횡포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선데이칼럼 11/27 왕안석의 신법이란 그런 위태로운 상황을 타개하려는 고육책이었다. 하지만 다른 재상·부재상들은 이를 ‘소 닭 보듯’ 했고, 조정은 신법당과구법당으로 나뉘어 싸움만 거듭했다. 그 사이 국력은 기울고, 황제와 상황(上皇)이 여진족에게 끌려가도 구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아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재정난을 극복하고 백성을 보호해 부국강병을 이룬다는 왕안석의 개혁안 역시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취지만 그럴듯할 뿐 허점과 모순이 많아 오히려 고리대와 부정부패가 늘어나는 부작용으로 백성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   위험에 빠진 국민을 놔두고 도망치는 경찰들을 보며 생뚱맞게도 생로병사고 재상이 떠오른 건 북송과 지금 우리의 사정이 사뭇 흡사한 까닭일 터다.   출범 초부터 입만 열면 개혁을 외치던 정부와 여당은 ‘주거 참사’와 ‘일자리 파괴’ 말고는 달리 내세울 성과가 없다. 이런 결과를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그토록 말리던 주변 목소리들을 들은 척도 안 하던 오만한 아마추어리즘이 왕안석의 개혁을 닮았다. 혁명보다 어려운 게 개혁인데 국민 봉기에 얹혀간 자들이 혁명세력처럼 굴며 허술한 계획을 밀어붙였으니 성공할 리 없다.   그래서 죽어나는 건 국민뿐이다. 천정부지 아파트값에 죽어나고, 그래서 오른 세금에 죽어나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싸우느라 죽어난다. 일자리가 없어서 죽어나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죽어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싸우느라 죽어난다.   그들이 가장 중점 뒀던 검찰 개혁은 결국 검찰을 ‘바보’로 만드는 계획이었다. 그들이 말하던 ‘검수완박’이 그거였다면 성공을 거둔 셈이다. 민간 개발업자들이 수천억원대 이익을 챙겼는데, 그것을 자신의 ‘최대 치적’이라고 자랑하던 당시 시장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검찰의 결론인 것 같다.   그야말로 바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생각인데, 수뇌부가 정작 할 일은 않고 딴생각만 하는 ‘생로병사고’다 보니 조직이 따라서 그리되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법무장관이 세 번째 바뀌도록 바뀌지 않는 목표, ‘정권 재창출을 위한 노력 봉사’ 말이다. 그렇게 동원돼 무리를 거듭하다 나쁜X 때려잡는 것밖에 몰랐던 사람을 강력한 경쟁자로 만드는 아이러니를 낳았으면서도 말이다.   경찰은 처음부터 검찰을 견제하는 도구로 삼았으니 더 기대할 게 없었다. 수사권 독립의 요란한 팡파르 이후에도 경찰의 부실 수사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내사 사건 종결 과정에서 부실 수사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실시한다는 자체점검 역시 하나마나다.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 수사를 점검해 시정·재수사 등 8645건의 후속조치가 이뤄졌지만, 징계는 하나도 없고 주의·경고만 고작 4건이었다.   딴 생각하는생노병사고 수뇌부가 시늉만 하는 거다. 윗물이 그러하니 아랫물도 다를 수 없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생각 안 하고 제 안전이 우선인 ‘생노병사고’ 경찰관이 그래서 가능해진다. 수뇌부가 정권에 목매지 않고 국민 생명 보호에 헌신하는 경찰상을 보여왔다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나 말이다.   언감생심 헌신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할 일만 해주길 기대할 뿐이다. 공공기관의 수뇌부들이 권력 눈치를 안 보고 자기 할 일만 제대로 해도 나라 꼴이 이 모양이 되지는 않을 터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힘이었다. 굴곡진 현대사를 지나오는 동안 우리네 권력자들은 자기 할 일을 다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권력 주변을 서성이는 무리는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이 나라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온 국민들 덕이었다. 지금 이 나라가 휘청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것도 그런 권력 밖 국민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수록 교활해지는 권력의 촉수가 점점 더 그런 국민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니 문제인 거다. 편 가르고 싸움 붙여 국민들의 평정한 마음을 흐트리는데 생노병사고 공직자들이 막을 생각없이 따를 뿐이니 안타깝고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11.27 00:30

  • 외교 실패 정부에 전문가 10인의 조언

    미·중 경쟁시대와 한국의 대응 미·중 경쟁시대와 한국의 대응 진창수 외 9인 지음 윤성사   “2차 냉전 중인 미·중이 대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는 것이 가장 임박한(the soonest) 재앙이라 전망한다. 기후변화는 심각한 문제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이 남아있다.”   영국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최근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미·중의 ‘2차 냉전’을 가져왔고, 그 결과 대만이 화약고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과 중국의 갈등과 경쟁은 코로나 이전부터 전세계 수많은 전문가들을 우려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2018년 1월 무역분쟁으로 촉발된 양국 갈등은 그 동안 정치·경제·외교·안보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규범과 가치관에서까지 전면적인 확대일로를 걸어왔다. 따라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특히 중국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온 대한민국의 미래는 점점 더 안개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남북 관계에만 몰입해, 중국을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협력자’로만 인식하면서 중국의 위험을 관리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게다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외교 정책조차 국내적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해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 한·미 동맹의 이완, 한·중 관계 갈등의 지속, 한·일 관계 악화에도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쿼드·해양 갈등 등 동아시아 안보 질서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총체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못해 진창수 전 세종연구소 소장과 김민석 중앙일보 논설위원(전 국방부 대변인) 등 국내 외교안보 전문가 10명이 나섰다.     이들은 미·중 갈등의 본질에서부터 동아시아 해양안보, 양안 관계, 인권, 한·미 동맹과 한·중 한·일 한·러 관계, 북핵과 남북 관계 등 전반에 걸쳐 한국 외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국 외교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현 정부 관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차기 정부에서 한국 외교를 짊어지겠다고 자원하는 대선 후보들의 일독을 권한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2021.11.13 00:20

  • [선데이 칼럼] 최악 피하다 초악 만난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1500년 그리스어와 라틴어 격언을 모은 『아다기아』를 펴냈다. 소싯적 영어 공부하면서 외웠던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에디슨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같은 경구가 이미 이 책에 나온 것이다. 이와 함께 에라스무스는 오늘날 우리를 위해 ‘선택의 딜레마’에 관한 격언 두 개를 나란히 소개하고 있다.   먼저 “카리브디스를 피해 스킬라에게 잡힌다(evitata Charybdi in Scyllamincidi)”는 게 있다. 최악의 상황을 면하려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하는 경우다. 카리브디스와 스킬라는 귀향길에 오른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를 좁은 해협에서 기다리는 괴물들이다. 한쪽 기슭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세 줄로 난 입을 가진 머리가 여섯 개에, 목은 뱀처럼 긴 스킬라가 먹잇감을 노리고 있다. 건너편에는 하루에 세 번씩 물을 삼켰다 뱉어내는 거대한 소용돌이 카리브디스가 입을 벌리고 지나는 배를 기다리고 있다.   ■  「 최악 피하려는 차악 선택인가 최악을 피하려다 초악 만나나 SNS 무장한 선동꾼 막으려면 방관 아닌 적극적 선택이 필요 」    집으로 가려면 그 해협을 지나지 않을 수 없다. 고민 끝에 오디세우스는 스킬라 쪽으로 배를 몰고 간다. 카리브디스에 맞서다 배가 통째로 침몰하는 것보다는, 스킬라에게 선원 몇 명을 잃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스킬라의 한입에 하나씩 부하 여섯 명을 잃고 오디세우스의 배는 가까스로 해협을 통과할 수 있었다.   선데이 칼럼 11/6 오디세우스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악한 상황을 면하려고 한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연기 피하려다 불 속에 떨어진다(fumum fugiens in ignem incidi)”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경우가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플라톤의 『국가』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자유민의 통치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백성들은 연기를 피해 불꽃 속에 빠지듯 노예의 폭력에 강제로 복종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인다”는 우스개가 있지 않나 말이다.   독자들도 눈치챘겠지만, 에라스무스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건 우리 국민도 비슷한 선택의 딜레마에 놓여있는 까닭이다. 대통령 선거가 5개월도 안 남았는데 여야의 후보들 면면이 참으로 허름하다. 크고 작은 후보들 모두 비호감도가 호감도의 배를 훌쩍 넘는다. 단언컨대 정부 수립 이후 이런 예는 없었다. 찍을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그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데, 자칫하면 상상도 못 했던 ‘초악(超惡)’과 맞닥뜨리는 결과를 얻을지도 모르게 생긴 것이다.   왜 오늘날의 유권자들은 이런 선택을 강요당하는 걸까. (대한민국만이 아니다) 과거 정치인들에 비해 오늘날 정치인들의 자질과 능력이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3김’으로 일컬어지는 정치 거목들이 있었지만, 민주적 가치의 실천이나 투명성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의 정치인들이 (꼭 자발적 의지의 결과는 아닐지라도) 그들보다 앞서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에 비해 훨씬 탈권위적이고 투명해진 사회에서 버텨낼 수 없었을 터다.   어쩌면 그래서 오늘의 정치인들이 더 손해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정보가 통제되고 일방적으로만 흐르던 시대의 거목들과는 달리, 요즘 정치인들은 인터넷과 SNS라는 밝은 조명이 켜진 수족관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은 존재인 까닭이다. 정치 지도자로서의 신비감은 사라지고 시시콜콜한 일거수일투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다 보니, 정치적 메시지보다는 ‘쌍욕’이나 ‘쩍벌남’ 같은 이미지만 두드러져 쉽게 찌질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아예 그런 상황을 이용해 SNS가 포장해 낸 이미지만으로 정치를 하려는 무리도 있다. 열정과 책임감, 균형감각을 정치인의 세 가지 덕목으로 꼽는 막스 베버 대신 현대적 의미의 포퓰리즘 선구자인 후안 도밍고 페론을 추앙하는 선동정치꾼들이다. 페론은 "사악한 양키에 분연히 맞섰고 최초로 아르헨티나의 진정한 독립을 이뤄냈다”고 떠벌렸다. 그의 경제적 실패는 대중의 뇌리에서 사라졌고 정치적 성공만 기억됐다. 오늘날 인터넷과  SNS로 무장해 훨씬 강력해진 선동정치꾼들이 앞다퉈 페론을 모방하고 있다.   선택의 순간이 왔다. 프랑스 정치학자 레몽 아롱은 “선택은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좀 더 나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 사이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이 글의 논지대로 해석하자면 SNS로 피해를 본 정치인과 SNS를 이용하는 정치꾼 사이의 선택이라 요약해도 될 것 같다. 피상적인 것 같아도 그 차이를 알아보는 데 4개월여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이후 선택이 낳을 결과의 차이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일 것이다. 페론의 성공으로 미국은 곤경에 처했지만, 라틴 아메리카는 전체가 재앙에 빠졌다.   재앙을 피하려면 소극적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 선택이 필요하다. 찍을 사람이 없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고대 아테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는 그런 사람을 두고 일갈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조용함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무의미한 인간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11.06 00:30

  •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포퓰리스트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  베르사유의 고민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프랑스에서 서너 명의 닮은꼴 아이들이 줄줄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다면 옆 사람과 내기를 해도 좋다. 그들은 베르사유에 산다. 미니밴에서 네댓 명(때론 대여섯 명)이 우르르 내린다면 더 볼 것도 없다. 열이면 열, 베르사유 사람이다.”   15년 전 칼럼에서 썼던 내용인데, 그때보단 떨어질지 몰라도 여전히 승률 높은 내기가 될 거라 나는 믿는다. 파리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진 인구 9만 명의 베르사유는 지극히 보수적인 도시다. 부르주아와 가톨릭 전통주의자들 그리고 옛 귀족의 후손들이 주로 모여 산다. 이들은 콧대가 높다. 태양왕 루이 14세 때 세계 정치·외교·문화의 중심지에 산다는 자부심이다. 그들에게 아이를 갖는 것은 자랑스러운 가문을 빛내는 후손의 의무이기도 하다.   ■  「 극우 경계하던 보수의 텃밭 극우인사의 책 사인회 성황 정부 실패가 위험에 빠뜨려 내년 차기 정부, 교훈 삼아야 」    베르사유 주민들은 여전히 권력과 가까이 있다. 오랫동안 총리 별장으로 쓰이던 베르사유의 ‘랑테른’ 사냥 별장을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총리한테서 빼앗아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르코지는 거기에 자주 머물며 ‘We are the world’라 쓰인 티셔츠를 입고 조깅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베르사유 주민들은 루이 14세의 옛 동물원 부지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퍼스트레이디 브리지트 마크롱을 볼 수 있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도 그 별장을 이용했지만, 베르사유 주민들은 보수 쪽 대통령한테 좀 더 친근함을 느낀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보수화에 반대하며 2018년 ‘노란 조끼’의 물결이 프랑스 전역을 휩쓸 때도 베르사유는 노란색이 눈에 띄지 않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였다. “2000년대에는 뇌이(파리 근교로 사르코지 지역구)가 프랑스 우파의 수도였지만, 이제 베르사유가 센 강 우안(부르주아 거주 밀집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르몽드는 전한다.   하지만 이들은 극우파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드러내 왔다. 지난 2017년 총선에서 공화당의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프랑수아 피용이 비리 의혹으로 낙마해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도 극우파 정당인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RN)’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대신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정당 ‘전진하는 공화국(REM)’ 소속 후보를 선택했다.   베르사유에 뜬 프랑스의 트럼프   프랑스 부르주아와 기독교 전통주의, 옛 귀족의 후손들이 모여 살며 보수의 품격을 지켜왔던 베르사유에서도 극우의 바람이 일고 있다. 사진은 베르사유 궁전. [중앙포토] 그런데 그런 베르사유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극우 포퓰리스트 에리크 제무르(63)의 모습이 베르사유에서 자주 비치고 있는 것이다. 알제리 태생의 유대인 이민 2세인 제무르는 “프랑스에서 200만명의 외국인을 추방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는 인물이다. 2009년 보수 일간지 르피가로의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대부분의 (마약) 밀매자는 흑인과 아랍인”이라는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이후에도 문제의 발언을 그치지 않아 두 차례나 기소됐다.   이후 그는 2014년 출간한 『프랑스의 자살』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우익의 스타가 됐다. 이 책에서 제무르는 “68혁명의 가치가 만들어낸 이민자·동성애 문제가 프랑스를 망쳤다”는 도발적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좌파에 대한 감정적 비판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좌파의 치부를 조목조목 드러내 ‘품위 있는’ 극우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정치인으로 활동한 적이 없고 소속 정당도 없으며 출마 선언을 하지도 않았지만, 지난 6일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17%의 지지율을 기록해 마크롱 대통령(24%)에 이어 2위까지 치고 올라간 상태다.   제무르의 인기가 치솟자 프랑스 언론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보도하고 있다. 프랑스 미디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미디어비판행동(Acrimed)’에 따르면 지난 한 달 동안 TV에서 제무르에 관해 방송한 시간은 11시간이 넘는다. 경쟁자인 사회당의 안 이달고 파리시장의 2시간, 르펜 대표의 1시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르몽드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M’ 역시 최근호에서 베르사유에서 열린 제무르의 신간 『프랑스는 최종 답변을 하지 않았다』 사인회 소식을 전했다. 잡지는 “많은 베르사유 주민들이 사인받은 책을 얼른 가방에 숨기면서 사인회장을 떠난다”고 썼다.   극우파에 대한 경계의 시선이 남아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만큼 베르사유에서도 제무르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대선에서 2위로 마크롱과 결선투표까지 갔던 마린 르펜 RN 대표보다 지적이며, 가톨릭 전통주의자들보다 더 가톨릭의 가치를 존중하는 제무르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사유 출신으로 2019년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공화당 1번 순위를 받을 정도로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고 있는 프랑수아 사비에 벨라미 의원조차 “공화당이 왜 제무르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   극우파 대통령 나올 수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사회 통합을 위해 프랑스에서 새로 태어나는 이민 가정 아기들에게 ‘무함마드’ 같은 성을 붙이는 걸 금지하고 가톨릭 식 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주의자에게 프랑스 같은 문명사회가 열광하는 이유가 무얼까.   우리는 그 답을 미국에서 이미 보았다. 이민 문제에 대한 강경한 대응과 과격한 발언으로 분열된 미디어 환경에서 주목받는 수법으로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됐다. 제무르가 트럼프와 다른 점이라면 “트럼프가 지식인을 경멸하고 반지식인 전쟁을 주도했다면, 제무르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지적 포장이 필요한 프랑스에서 지적인 트럼프가 되길 원한다는 것”이라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분석한다.   물론 주별 선거인단을 승자 독식하는 미국식 선거제도와는 달리,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결선투표를 치러야 하는 프랑스에서 제무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건 아니다. 2002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극우파인 장마리 르펜 국민전선(FN) 대표가 17.8%를 득표한 반면, 2017년 결선투표에서는 그의 딸인 마린 르펜의 득표가 33.9%까지 올라갔다. 제무르는 아니더라도 그와 유사한 길을 걷는 어느 극우(또는 극좌) 후보가 엘리제궁에 입성할 날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활황만 계속되는 경제가 있을 수 없고 이민 문제 역시 갈수록 복잡해지고 해결이 어려워질 게 분명한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번잡함보다는 평온함, 역동적 성장보다는 옛 영화 추억하기를 선호하던 베르사유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민 문제가 더 이상 파리 같은 대도시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현재 베르사유의 중심지는 땅값이 치솟아 평당 5000만원이 넘는 곳도 나오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대가족들과 귀족 후손들이 주변 지역으로 밀려나고 있는 형편이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퀼로트(Sans-culotte 프랑스 대혁명 당시 주역이었던 무산 시민 계층)’에 점령된 파리에서 탈출하려는 부르주아들이 베르사유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치 1781년 파리 코뮌 때 파리 시 정부가 베르사유에 머물렀던 것처럼 말이다.   파리 코뮌이 ‘두 달 천하’로 끝난 뒤 130년간 우파의 아성으로 머물렀던 파리는 2001년 이후 사회당 소속 시장 두 사람이 줄곧 시장실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공공주택과 생태·환경 중시 정책 등 지속적인 좌파 정책으로 우파 지지자들을 화나게 만들어왔다. 특히 2001년부터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 밑에서 부시장을 하다 2014년 시장이 된 이달고는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뒤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시내 전역에서 시속 30㎞ 자동차 속도 제한, 노상주차장 없애고 자전거 도로와 보도 확대, 초고층 개발 백지화와 도시숲 조성, 에어B&B를 매입해 공공임대주택 전환, 기존주택 매입해 사회주택 비율 25%로 확대….   급진적 정책이 부른 후유증   좌파 파리시장들이 파리를 사람을 위한 도시로 만들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는 게 사실이다. 전임 들라노에 시장은 세계 최초로 무인대여 자전거인 ‘벨리브(서울시의 따릉이)’를 도입하고, 센강 우안 강변도로를 보행자 전용 도로로 만드는 친환경 정책으로 한때 대선 후보로 급부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은 수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행정 병목 현상을 초래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강변 보행자 전용도로는 행정소송이 이어져 2018년 행정재판소가 조례 취소를 판결한 바 있다.   더욱이 이달고 시장의 2기 공약들은 ‘모두의 파리(Paris en commun)’라는 이름과는 달리, 실현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급진적인 내용이 많다. 이달고 시장은 “성장과 효율이란 이유로 환경과 생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지만, 자칫 도시의 활력을 잃고 시민 간 갈등을 조장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미 그럴 조짐이 보이고 있다. 베르사유의 변화는 그 시작일 뿐이다. 아무리 이상적인 아이디어라도 현실이라는 토대 위에 서지 않는다면 이뤄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강행하다면 치러야 할 비용이 배보다 큰 배꼽이 될 수 있다.   멀리 프랑스의 문제가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크기 때문이다. 전임 서울시장 때 사회주택이나 공공임대 등 파리에서 어깨너머로 본 정책들을 서울에 도입한 게 여럿이다. 그것 중 상당수는 신임 시장에 의해 부인되고 있다. 오세훈 시장은 시민단체 출신인 전임 박원순 시장의 무분별한 지원으로 “서울시가 시민단체의 ATM이 됐다”고까지 비판한다. 일부 반발도 나오고 있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무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프랑스의 문제가 단지 파리의 문제에서 비롯된 게 아니듯, 이민자 문제를 따지자면 제국주의 식민정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듯, 우리의 문제 역시 중앙정부의 무능과 실책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부동산, 탈원전, 북핵 등 모든 문제가 현실을 무시한 과도한 이상주의에서 실패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실패는 또한 전임 정부의 실패가 그 자리를 깔아 준 것이다. 실패한 정권은 바뀌는 게 당연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하며 그런 변화 속에서 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게 국정이겠지만, 진폭이 지나치게 클 경우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하고 그것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된다.   몇 달 지나면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그것이 어떤 정부든 이제는 무리한 정책의 후유증을 생각하고 시행에 앞서 반대자들을 설득해 갈등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권이 아니라 국민만 생각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 정부의 출범을 기대하는 뜻에서 멀리 베르사유의 고민을 끌어다 써봤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1.10.21 00:34

  • [선데이 칼럼] 양화가 악화를 구축해야 할 대선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은 사실 ‘코페르니쿠스의 법칙’이 됐어야 했다. 지동설로 더 유명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화폐론』(1517년)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질과 저질 주화가 함께 유통되면 세공업자들이 양질의 주화를 골라내 은을 녹여낸 뒤 무지한 대중들에게 팔 것이다. (…) 열등 주화가 양질 주화를 몰아내기 위해 도입된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재정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이 비슷한 말을 한 것은 40여 년 뒤다.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경고한다.   “주화의 저질화가 영국 주화의 교환비율을 떨어뜨릴 것이며, 좋은 금화들이 영국에서 유출되고 있다.”   ■  「 수치 아는 선인 이익 좇는 악인 악인에 밀리는 선인들의 운명 악화도 퇴출되지만 막대한 피해 국가 지키려면 양화 잘 골라야 」    누가 주인이든 간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이 법칙이 인간 세상 최고의 보편적 공리(公理)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사회와 정치·문화 등 인간사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양화(선인)는 늘 악화(악인)에게 구축될 운명을 안고 태어난다.   이 슬픈 운명이 현실이 되고 마는 이유는 간단하다. 선인(善人)은 먼저 부끄러움을 알고, 악인(惡人)은 앞서 이로움을 좇는 까닭이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이른바 ‘대장동 게이트’가 단적인 예다. 게이트의 주역들이 회사 이름으로 삼은 ‘화천대유(火天大有)’와 ‘천화동인(天火同人)’이란 주역의 궤를 보는 눈이 서로 다르다.   선데이 칼럼 10/16 화천대유란 본래 ‘하늘의 도움으로 대풍(大豊)을 얻는다’는 뜻이며, 천화동인은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아 막힌 것을 통하게 한다’는 의미다. 각각 14번째, 13번째 괘인데 주역에서 가장 좋은 궤들로 통한다.   누군들 이런 점괘가 나오면 안 좋을 리 있겠나 마는, 선한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그 괘를 이루도록 더욱 노력할 따름이다. 하지만 악한 사람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에게 대유란 천하를 사고도 남을 만큼의 막대한 ‘부’이며, 동인이란 그러한 부의 창출을 가능케 하는 ‘권력 네트워크’다. 더욱이 그런 괘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괘를 만들어 세상을 속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끌어내는데 불법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주역의 가장 좋은 궤가 범죄로 전락한다.   여기에 부패가 섞여 들어간다. 악인들의 범죄에 권력자와 정치인들이 동원되는 것이다. 그 분야에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이익을 좇아 ‘배임’을 할 준비가 돼 있는 악화들이 늘 대기하고 있다. 창피하지만 언론도 마찬가지다.   대법원 이발소를 애용하는 기자 출신 화천대유 대주주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선거법 위반 판결을 전후해 8번이나 머리를 자르러 갔다. 그때마다 만났을 대법관은 무죄 의견을 거듭 냈고 결국 무죄 판결을 끌어낸 뒤 퇴임 후 화천대유의 고문 자리를 얻었다. 또 국정농단 의혹사건 특검을 지낸 대검중수부장 출신 변호사, 대통령 민정수석까지 지낸 역시 검찰 출신 야당 의원이 딸과 아들을 통해 천화대유로부터 막대한 특혜를 받았다.   단언할 순 없지만 그들이 그런 자리까지 오를 수 있던 것은, 평소 자신이 속한 조직의 미래(국가의 미래는 기대하지도 않고)보다는 자신의 다음 자리만을 추구해온 악화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사이 묵묵히 자기 일만 해온, 그래서 조직을 지킨 (나아가 국가까지 지킨) 양화들은 정당한 자신들의 몫까지 빼앗겼을 공산이 크다. 아, 가엾은 양화들의 운명이여!   구축된 양화들을 위로하자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더 크고 중요한, 국가와 국민의 명운을 좌우할 역사적 맥락에서 또 한 번 양화가 악화에 구축될 위험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천화동인과 화천대유 두 괘를 이어 읽으면 ‘어렵고 막힌 세상에서 군자들이 협력해 백성을 구하고 임금은 하늘의 뜻을 따라 밝은 정치를 펼친다’는 해석이 나온다. 주역은 화천대유에 이렇게 덧붙인다.   “군자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드러내며 순리에 따르고 삶을 즐긴다.(君子以遏惡揚善順天休命)”   화천대유 세 번째 효에는 ‘소인불극(小人不克)’이라는 구절이 있다. 아무리 괘가 좋아도 소인들은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 천화동인 두 번째 효에 ‘동인우종린(同人于宗吝)’이라는 구절도 있다. 이익을 좇아 끼리끼리 뭉쳐서는 또한 얻을 게 없다는 얘기다. 양화들은 새삼 강조할 것도 없는 당연한 말인데, 악화들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주역의 결론이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만, 그렇다고 악화가 영원하지는 않다. 대장동 악화들의 운명처럼 결국 응징과 함께 퇴출되고 만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도 많은 상처를 남긴 뒤다.   우리는 지금 대선이라는 중요한 결정을 코앞에 두고 있다. 여기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지금까지 그랬듯, 그 악화 역시 퇴출되겠지만 그때는 국민과 국가에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에 너무도 많은 해악을 끼친 다음이 될 것이다.   폴란드 국왕에게 저질 주화를 발행해 이득을 취하라고 건의하는 학자들에게 맞서 코페르니쿠스는 “화폐는 왕의 법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법을 따른다”고 말했다. 대선 역시 자신의 법을 따라 움직인다. 악화를 잘 구별해 양화를 골라야 할 이유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10.16 00:30

  • [선데이 칼럼] 길 쓸어놓으니 미친X 먼저 지나가더라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에 ‘길 쓸어놓으니 미친X이 먼저 지나간다’는 게 있다. 저속하긴 해도 이처럼 명쾌하게 의미가 와 닿는 다른 문장을 찾기 어렵다.   예컨대 인터넷이 그렇다. 기껏 월드와이드웹 망을 구축해놨더니 제일 먼저 와서 전방(廛房) 문을 연 것은 포르노나 도박 사이트들이었다. PC 통신 시절부터 갈고 닦았던 노하우를 인터넷에 풀어놓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노렸다.   ■  「 수상한 공익신고 청년 정치인 고개 든 청년정치 판 깰까 걱정 등 뒤의 전문가 살피지 않으면 무임승차 후 국정농단 반복돼 」    인터넷 기반이 스마트폰으로 옮겨가면서 뜬 SNS는 더욱 끔찍하다. 유익하고 건전한 소통의 장이 되리라는 기대는 진작에 무색해졌다. 알량하거나 과장된 심지어 거짓된 지식이나 정보로 혹세무민하는 난전(亂廛)이 됐다. 그 요란한 호객 소리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좀 더 성숙한 사람들마저 이리 긁히고 저리 쏠린다. 그럴 때마다 상처는 깊어지고 분노와 갈등 게이지가 치솟아 위험 경보 소리를 덮어버릴 정도다.   온라인 세상만 그런 게 아니다. 현실도 결코 덜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게 청년 정치다. 정치를 곧 ‘파워 게임’으로만 바라보는 구태를 바꿔보자고,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독려해왔다. 그리고 30대 제1야당 대표가 탄생할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청년 정치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정치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도 따라 커져가고 있는 마당에, 아뿔싸! 뭔 청년 ‘공익신고 호소인’이 다 쓸어놓은 길을 헤집고 지났다.   선데이칼럼 9/25 공익신고라면야 무에 나쁘겠나만, 그게 그렇게 순수하게 안 보이니 문제인 거다. 진보 진영에서 정치에 입문하더니 “진보로는 좋은 나라 못 만든다”며 보수 야당에 합류한 이였다. (정치경력 7년의 34세 청년 정치인이 거쳐온 정당만 8개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그가 야당 합류 전 청년정당을 직접 만들어 대표가 됐는데, 당원 명부에 월남전 참전 사망자가 포함돼있다. 한 사람이 여러 번 서명한 흔적도 보인다. 창당 요건을 갖추지 못한 거짓 창당이라는 의혹이 나온다.   그런 사람이 올해만 몇 차례나 국정원장과 만났고, 폭로 기사가 나온 날짜가 “우리 원장님과 내가 원한 게 아니다”고 말한다면 어찌 순수해보일 수 있겠나. 청년이 한다고 청년 정치가 아니다. 그처럼 ‘비범한’ 한 청년 정치인의 미래는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가까스로 숨 죽었던 청년들의 정치 혐오가 더욱 커질까 두려울 따름이다.   가뜩이나 정치에 대한 무력감과 배신감이 팽배한 때 아닌가. 보수정권의 국정 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5개월 동안 생업을 포기하고 주말마다 전국을 촛불 바다로 만들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탄핵·파면하며 깔아준 자락이었다. 그렇게 길을 쓸어놨더니 무임승차하듯 올라탄 정권이 자기들만 옳다는 오류와 오만에 빠져 무능과 위선의 국정 농단을 또 한차례 질펀하게 벌였다.   임기 내내 한 것은 번드르르한 말과 이미지 쇼뿐이었고, 이룬 것이라고는 서서히 권력의 시녀라는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공수처 하나에 불과하다. 그 결과 마스크 쓰라면 쓰고 백신 기다리라면 기다리는 말 잘 듣는 우리 국민이 맞닥뜨린 것은 천정부지 부동산 폭등과 더욱 가팔라진 고용 절벽, 억지로 멈춘 원전(그로 인한 누적 손실이 향후 30년간 1000조에 달할 것이라는) 그리고 매일매일 커지는 북핵 위협과 그것으로도 못 바꾼 ‘폭망’ 외교였다.   그야말로 “실천된 공약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밖에 없다”는 말이 더는 우스개가 아닌 현실이 됐다. 그것은 입만 살았던 진보 정치인들의 탓만은 아니다. 전문가들의 부역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영혼 없이 흐르는 물결 따라 떠내려가는 공무원들은 말할 가치도 없다.) 학문적 소신(만약 그런 게 있다면)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밥그릇, (결국은 그것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익에만 종사해온 반쪽짜리 생계형 지식인들이 정치인들의 입맛에 맞춰 밀어붙인 결과인 것이다. 현실에서 불가피한 부작용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권력자는 자신이 이런 전문가들을 부린다고 흔히 믿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떠한 사상이 정치와 사회에 스며드는 건 지식인들의 영향력에 의해서다.   “실무자들은 어떤 지적 영향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고 믿지만, 대개 이미 세상을 떠난 경제학자의 노예들이다. 권좌의 광인들은 허공에서 소리를 듣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광기를 학술 저자들이 몇 년이 지난 글로써 걸러내고 있을 뿐이다.”   케인스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에서 하고 있는 말이다. 권력자만 그런 게 아니다. 막 정치를 시작한 청년 정치인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와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25세나 30세가 지난 후에 새로운 이론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역시 케인스의 말이다.   정치인을 선택하기 위해 그의 뒤에 서 있는 전문가들을 살펴야 하는 이유다. 칼 포퍼의 경고가 도움이 된다. “지상의 천국을 약속하는 사람들은 지옥 말고는 어떤 것도 만들지 않는다.”   이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가 쓸어놓은 길을 미친X들이 지나가는 걸 수없이 봐야 할 터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09.25 00:30

  •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반목은 지도자들이, 전쟁은 젊은이들의 몫

     ━  무엇을 위한 역사인가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얼마 전 때아닌 점령군-해방군 논쟁이 있었다. “해방 후 이 땅에 들어온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군은 해방군이었다”는 느닷없는 주장이 나온 탓이었다. 늘 논란의 중심에 있는 김원웅씨지만 광복회장 자격으로 고교생들에게 주는 메시지였기에 한바탕 소동이 불가피했다.   영상에서 그는 자기소개를 마치자마자 본론을 꺼내 든다.   “소련군은 북한에 들어와서 곳곳에 포고문을 붙였습니다. ‘조선인이 독립과 자유를 되찾은 것을 축하드립니다.’ ‘조선인의 운명은 조선인들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조선 해방 만세.’”   마치 동화 구연을 하는 것처럼, 소련군 포고문을 속삭이듯 다정하게 소개한 그는 미군 포고문에 대해서는 고압적인 말투로 옮긴다.   ■  「 느닷없는 점령군 - 해방군 논쟁 아무 실익 없는 국력 낭비 불러 우리도 아프간처럼 안 되려면 과거 이용하는 세력 경계해야 」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남한을 점령한 맥아더 장군은 포고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다.’ ‘앞으로 조선인들은 내 말을 잘 들어야 된다.’ ‘안 들을 경우 군법회의에 회부해 처벌하겠다.’”   이미 분명한 선악 구분이 끝난 상태다. 포고문 내용이 아니라도 소련군은 ‘들어오고’ 미군은 ‘점령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벌어지자 신복룡 교수가 나섰다. 1987년 미국과 소련의 포고령을 국내 최초로 비교 분석한 글을 발표했던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도 “단지 수사(修辭)의 문제일 뿐 미-소 양쪽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었는데 그것이 무시되며 논란이 돼 실익 없는 국력 낭비만 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신 교수는 “당시 한반도에 있는 일본인 75만 명 중 35만 명이 무장하고 있었으며 미국과 소련은 그들의 무장해제에만 주목했지 한반도 해방은 관심사에서 비켜나 있었다”고 말한다. 포고문 내용은 “수많은 위성국 통치 경험이 있는 소련군과 그렇지 못한 미군 장교의 정치적 기술 차이에서 온 것”일 뿐 결국 양쪽 모두 점령군 성격이라는 얘기다.(중앙일보 2021년 7월 9일자 참조)   미국 비밀문서로 보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이런 의미 없는 논란을 종식할 만한 (종식될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문서가 있다.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김택곤 전 광주 MBC 사장의 최신 저서 『미국 비밀문서로 보는 한국 현대사 1945~1950』에 소개된 미국 비밀문서들이다. 미 군정의 1946년 2월 13일자 G-2 정기보고에는 이춘열이라는 공산주의자가 북한에서 돌아온 직후 조선공산당 당수인 박헌영에게 보낸 서신을 미군정 정보처가 검열한 내용이 있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인민들의 마음은 공산주의 선전에 감화돼 우리에게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정책이 탄압적으로 바뀌면서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남쪽으로 도피했으며 민심도 우리들과 멀어졌습니다.”   이춘열은 이어 “개선책을 속히 마련하지 않으면 북한 인민들이 공산주의 정책에 반동적인 태도를 보여 심각한 위협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즉시 이를 바로잡도록 일깨우는 핵심인물을 북한에 파견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당시 미군정은 남한에서 나도는 소련군의 잔학 행위 소문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당시 주한미군 정보처장 폴 니스트 대령은 “북에서 온 난민들을 수백 번 심문했지만 이들이 심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어 신중해야 한다”고 존 하지 사령관에게 보고하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미군 측 보고서이긴 하지만 이춘열의 서신은 당시 북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광복회장이라는 사람은 이어 미 군정이 “남한을 식민지로 써야 한다”는 비밀 보고서를 올렸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으로 있을 때 대외비 문서를 접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면서 보고서의 핵심은 “남한을 겉으로는 독립시키고 실제로는 일본에 이어서 식민지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택곤 그가 어떤 보고서를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역시 당시 미 군정이 작성한 비밀문서들을 종합할 때 들어맞는 얘기가 아니다. 우선 미군이 남한 땅을 ‘점령’한 지 16일이 지난 1945년 9월 24일 하지 사령관이 더글러스 맥아더 미군 태평양사령부 총사령관에게 보낸 극비 전문을 보자.   “현격히 다른 두 개의 정책을 펴는 두 개의 점령지역으로 갈라놓는 현재의 한국 분단은 앞으로 한국을 하나의 통일국가로 만들 때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 만일 한국을 완전히 통제해 일본처럼 대우하겠다는 제3의 국가들이 있다면, 그 같은 대우를 받지 않겠다는 한국인들의 끝없는 증오를 받게 될 것입니다. (…) 서로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두 편이 서로 나뉘어 분단을 계속한다면 이 나라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하지 장군은 이 전문에서 “한반도 분단은 미국과 소련 양국 모두에게 득이 안되며, 미국 소련 양국의 합의에 따른 잠정 정부 수립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남한을 식민지로 써야 한다는 뉘앙스는 결코 읽히지 않는다.   물론 이는 하지 장군의 의견이고, 그의 상관인 맥아더 사령관이 본국에 ‘식민지’ 운운하는 비밀 보고서를 보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 역시 미 본토에서 채택되지 않은 맥아더의 개인 의견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미국은 한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발을 뺄 궁리만 하고 있었다.   1947년 7월 주한미군 군정장관인 아처러치 소장은 워싱턴에서 조지 마셜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 행정부 고위 관계자들과 만난 뒤 하지 장군에게 보고했다. “한국 통치 업무를 전쟁부에서 국무부로 이관하는 문제를 논의했는데, 정작 마셜 장관은 일반적인 검토 수준에 그칠 뿐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거였다.   “전쟁부 핵심 고위층 대부분이 그렇듯 노체 전쟁부 차관보 역시 한국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체 장군은 미국은 단 두 군데, 즉 독일과 일본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전쟁부 전체의 입장은 ‘한국에서 빠져나오자(Let’s get out of Korea)’입니다.”   미국은 그 유명한 마셜 플랜 외엔 관심이 없었고, 그 안에 한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안다. 미국의 공산주의 팽창 우려에 편승해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됐고, 미 CIA의 강력한 “남침” 경고에도 불구,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했으며,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광복회장의 말을 예로 들었지만, 귀담아들을 만한 얘기가 아닌 만큼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한마디로 말하면 국제사회에서 자비란 없다는 것이다. 상대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절대적인 보호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모든 국가의 모든 결정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당장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인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결과일 뿐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 동안 전쟁을 한 것도, 야반도주하듯 철군을 한 것도 다 그래서다.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논리다. 해방이냐 점령이냐를 우리가 판단한들 자빠졌냐 넘어졌냐를 구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해방이나 점령을 당하지 않도록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남한이 결코 자립하지 못하고 짐만 될 것”이라던 미군정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고 대한민국은 선진국 반열에 당당히 올라섰다. 하지만 현실이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종교를 이데올로기로 바꾸면 아프가니스탄의 슬픈 현실에 우리의 미래를 투영해 볼 수 있다.   우리 민족도 외침을 많이 받았지만 우리끼리 많이도 싸우고 많이도 서로 죽였다. 해방 이후의 역사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미래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그리 투 디스어그리(agree to disagree)’해야 한다.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과거의 해석 차이로 미래를 망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과거를 이용하는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   김 전 사장은 책에서 결론처럼 말한다. “반목과 대립은 민족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던 어른들이 주도했지만 전쟁은 젊은이들의 몫이었다.”   이 글의 결론과 같다. 이 땅의 반목과 갈등으로 인한 피해는 77세 광복회장이 아니라 MZ세대들의 몫이란 말이다.   ■ 미국 극비문서로 벗긴 한국 현대사의 베일 「 한국 현대사에서 1945~1950년의 5년 만큼 비밀스러운 시간은 없을 터다. 우리 민족의 희망과 비극이 미국과 소련·중국·일본 등 4강의 이해가 얽힌 교차로에서 충돌했지만 신호는 어땠는지, 누구의 과실이 컸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나라가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자세로 그 시대를 마주하기 보다 정치적 논란의 도구로 삼거나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며 분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MBC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틈틈히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를 방문했다. 극비로 보관돼온 전문, 보고서들을 찾아 읽으며 한반도 역사의 물굽이가 어떻게 틀어졌는지 살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소용돌이 가운데 새롭게 살피고 해석을 더해야 할 실마리”를 찾았다.   그렇게 나온 책이 『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다. 여기에는 당시 미군정과 하지 사령관의 시각과 판단, 백악관과 마샬 국무장관의 관점, 좌우 합작의 실패 과정, 남한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 투쟁 같은 현대사의 주요한 대목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로 버마에 끌려간 조선 처녀 김연자, 한국전쟁에 참전한 한국계 미국인 에녹 리 등 민초들의 애절한 사연까지 들어있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주관적인 해석은 최대한 자제하는 대신, 독자들이 극비 문서들을 읽고 현대사의 한 장면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돼준다. 」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1.09.09 00:41

  • [선데이 칼럼] 국민을 부끄럽게 만든 죄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제 정말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이 나라 국민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태극기 부대가 야단법석을 부릴 때, 태극기가 쳐다보기조차 싫어지던 그때보다도 더하다. 참으로 민망하고 낯뜨거워서 고개를 들기 힘들다.   ‘민주 유공자 예우법’이 발의됐을 때 실소가 나왔다. 386 운동권들의 셀프 특혜가 가소로웠다. “대학 때 몇 년 학생운동한 경력으로 국회의원 된 자들이 자식들에게까지 유공자 특혜를 세습하려 한다”는 비판 그대로였다.   ■  「 운동권 셀프특혜, 윤미향 보호 이런 몰상식법 발의 가능케 한 진영논리 정점은 ‘언론징벌법’ 모든 게 대통령 책임으로 귀결 」    하지만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에 의해 바로잡혔다. “이러려고 민주화 운동 했냐”며 갖고 있던 유공자 지위까지 반납한 김영환 전 의원 같은 사람들이 있어 나라 꼴이 살았다. 설훈 의원을 대표로 여당 의원 73명이 발의한 법안은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선데이 칼럼 9/4 ‘5.18 역사 왜곡 처벌법’이 발의됐을 때는 설마 했다. 역사를 왜곡하는 거야 분명 잘못이지만, 역사를 달리 해석한다고 처벌하는 건 더 큰 잘못인 까닭이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며 국가보안법에 맞섰던 투쟁이 5.18 민주화운동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토록 반대하던 국가보안법과 똑같은 논리 구조로 5.18을 부인·비방하면 처벌하는 법을 만든다니 이런 난센스가 어디 있나 말이다.   그런데도 결국 이 법은 통과되고 말았다. 거여(巨與)가 힘으로 밀어붙였고, 법안을 대표 발의한 양향자 의원은 “역사 왜곡은 나라의 정체성을 흔드는 정신적 내란죄”라는, 독재자나 입에 담을 만한 발언을 서슴없이 외쳤다. “내 생각과 다르면 모두 반역”이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말하면 처벌하는 법안을 발의했던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본 욱일기를 사용하면 10년 이하 징역이나 2억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역사왜곡방지법안은 이에 비하면 귀엽다. 조국 전 법무장관이 죽창가를 외치며 반대자를 친일파로 몰 때마다 후렴구를 넣던 김용민 의원 작품이니 말이다.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고무하는 행위를 막겠다는 건데,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런 머리들로 국회에서 역사를 논하는 게 오히려 역사를 왜곡시킨다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어이없는 건 ‘위안부 피해자법’이다.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위안부 관련 단체에 대해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하는 걸 금지하고 있다. 위안부 후원금 유용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윤미향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참여한 법안이다. ‘윤미향 보호법’이란 말이 안 나올 수 있겠나. 오죽하면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까지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을까. 당연히 철회됐지만 이런 법안을 발의하는 의원들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하이라이트는 ‘언론중재법’이다. 생각나는 대로 조문을 뜯어고쳐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기도 어렵지만, 언론의 고의·중과실에 의한 허위 보도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피해액의 최대 5배까지 부과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말이야 맞다. 일부러 허위 조작 보도를 해서 피해를 입혔다면 5배 아닌 50배의 손해배상을 해도 마땅할 터다. 하지만 고의·중과실의 개념이 모호한 데다, 언론 스스로 고의·중과실이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아예 기사를 볼 수 없게 만드는 열람 차단 청구권 또한 설명이 안 된다.   ‘보복적’, ‘충분한’, ‘회복하기 어려운’ 등 주관적 해석의 가능성이 다분한 표현들을 보면 기가 막히다. 법안으로서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자기고백일 뿐이다. 징벌적 배상제도를 국내 최초로 언론에 도입하는 것에서는 언론 탓에 치부가 드러나는 자들의 조급함이 묻어난다.   이 모든 것이 언론의 비판 보도를 봉쇄하고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국제적인 언론단체들은 물론 유엔인권위원회까지 문제를 삼을 정도다. 정말 창피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가슴 답답하다. 이 모든 탈상식과 난센스들이 대명천지 의사당에서 벌어지는 건, 이 나라가 진영논리의 늪에 깊이 빠져있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은(또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면 금방 내 발목을 붙잡게 될 무리수를 강행하는 어리석음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은 편 가르기를 심화시켜온 현 정권의 책임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그 책임은 최종적으로 오직 한 사람에게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설훈이 나서든 김용민이 총대를 메든, 그들은 그걸로 그만이다. 그 모든 책임은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이 져야 할 짐이다. 대통령에게 최종법안에 서명하게 하거나, 아니면 거부권을 행사하게 하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다. 책임을 지란 뜻이다.   자기를 위한 서명이든, 자기편을 위한 서명이든 모두 대통령 자신의 책임으로 남는 것이다. 어떠한 허물도 서명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허물을 가리려 한, 그래서 더 국민을 부끄럽게 만든 또 하나의 책임만 더해질 뿐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09.04 00:30

  • [선데이 칼럼] 김연경 보유국 문재인 보유국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퇴직한 선배한테서 문자가 왔다. 배구 경기를 보다 떠올랐다면서, ‘김연경과 문재인이 같이 있는 나라’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거였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자”라는 주제라는 부연 설명까지 있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게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인 데다, 칭찬과 비판이 뻔하게 가름되는 얘기였던 까닭이다. 진보 성향(특히 대북 문제에 있어서)의 그 선배조차 ‘문재인 보유국’보다는 ‘김연경 보유국’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다음날 돌연 두 사람이 엮이는 일이 벌어졌다. 여자배구 대표팀의 귀국 기자회견 사회자가 무리를 했다. 역시 배구선수 출신인 사회자는 보기에도 안쓰럽게 상황을 몰아갔다. 우리 대표팀이 포상금을 받으려고 뛴 것도 아닌데, 후배인 김연경 선수에게 굳이 포상금 액수를 재확인시켰다. 그 포상금을 대통령이 사재 털어 준 것도 아니고 감사 인사를 할 건 대통령인데, 오히려 김 선수한테 대통령의 (당연한) 격려에 감사할 것을 강요했다.   “진짜 보는 내내 질문과 태도가 너무 ‘처참’해서 제가 다 선수에게 미안했다”는 댓글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비난이 빗발쳤고, 김 선수나 문 대통령 두 사람 모두 애꿎은 피해자가 됐다. 국민들 마음에도 생채기가 남았고, 오직 한 사람 또는 한 단체의 미래만 생각한 숟가락 올리기 역시 실패로 끝났다.   모든 사람이 패배자로 남는 이런 상황이 왜 벌어질까. 고민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리더십의 문제다. 이제 제보한 선배의 높은 눈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비교해야 한다.   선데이칼럼 8/14 김연경의 리더십은 어쩌면 이번 올림픽의 백미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라고 후배들을 독려하던 그의 외침이 특히 빛났다. 그 외침으로 패색 짙던 게임을 두 번이나 뒤집었지만, 그것은 승리의 주문(呪文)이 아니었다. 승패를 떠나 제 할 일을 다 하지 않는 후배들에 대한 일침이었다.   승패를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리 강팀을 만나도 주눅들 일이 없다. 내 자리에서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그만이다. 그러다 진다고 탓할 사람도 없다. 그런데 미리 포기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후배들을 그냥 넘기지 않은 것이다. 그게 올림픽 정신이고, 그런 김연경에 세계가 열광한 것이다. 한국에 역전패한 일본에서조차 “김연경에게 혼나고 싶다”는 유머가 나온 게 다른 이유가 아니다.   김연경의 리더십은 그가 국가대표로 한국에 도착해서부터 시작됐다. 주장으로서 팀워크를 해치는 사례들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그도 원치 않은 결과였겠지만) 주전이 두 명이나 이탈해야 했다. 그렇게 ‘김연경 혼자 다 하는’, 비정상이 되고 만 팀을 일깨워 모든 선수가 한 몸이 돼 움직이는 ‘원팀’으로 만든 게 그의 리더십인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대단히 불행하게도, 문 대통령의 리더십은 그런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처참’의 연속이다. 리더십의 요체는 책임이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게 한 뒤, 결과에 대해서는 인사권자가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인사는 망사(亡事)에 가깝고, 책임은 ‘나 몰라라’인 게 현실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4000만회분을 구했다고 자랑하던 백신이 감감무소식이어서 2차 접종을 못 하는 상황이 됐는데도 유감 표명조차 없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국산백신 개발에 더욱 속도를 내고 글로벌 허브 전략을 힘있게 추진”한다는 하나 마나 한 얘기인 걸 보면, 과연 대통령이 상황 보고를 제대로 받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청와대에 방역기획관 자리를 신설하면서 굳이 “백신 확보는 급할 것 없다”고 주장하던 인물을 앉히는 인사의 불가피한 결과일지 모른다. 국민이 느끼는 처참함은 늘 부록처럼 따라붙는다.   4년 넘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온 예들이 너무도 많아 열거하기 어렵다. 사실 예전 걸 들출 필요도 없다. 언제나 새로운 것이 준비돼있으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공영방송 KBS를 편파방송의 상징으로 만들었던 인물을 방송통신심의위원장으로내리꽂는 인사가 강행되고,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에 재갈을 물릴 언론중재법이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대선 정국에서 그런 시도들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짐작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공수처의 예에서 봤듯, 권력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설령 원하는 대로 정권 연장에 성공한다 해도 그 책임이 영원히 묻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최고권력자에게 집중된다. 전직 대통령들의 말로를 보면서도 모른다면 어리석다.   미국 남북전쟁 때 노예 해방을 위해 헌신한 헨리 워드 비처 목사의 말이 그것이다. “일을 도모함에 거짓이 있는 사람은 베틀의 실을 끊은 것과 같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잊어버릴 무렵 그 흠이 드러난다.” 이제라도 새겨들을 일이다. 권력자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처참함 대신 (선배 말대로) 희망을 갖고 싶은 국민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08.14 00:30

  •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독일 점령 프랑스서도 나쁜 프랑스인이 더 위험했다

     ━  무엇을 위한 반일인가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서울 정동길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꿀릴 게 없는 아름다운 길이다. 이문세가 노래한 대로 “이제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게 많다. 그중에서도 “언덕 밑 조그만 교회당” 정동교회와 덕수궁 돌담, 그리고 그 밑을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이 변함없다.   한때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은 연인은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었지만, 그건 “정동 언덕 위에 가정법원이 있었기에 이혼하는 부부들이 찾아 생긴 말”이라는 게 길 가다 주워들은 해설사의 설명이다. 지금 그 법원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변모해 더 많은 연인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길에 짜증을 유발하는 모습들이 생겨났다. 우선 미국 대사관저를 지키는 경찰 버스 대여섯 대가 차로 하나를 거의 차지하고 늘어서 있다. 그 바람에 차량들은 차로 하나로 교차 통행을 해야하고 보행자들은 옹색한 가설 인도로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야 한다. 추우면 히터를 트느라 더우면 에어컨을 트느라 버스는 늘 시동이 걸려있고 연신 매캐한 매연을 뿜어댄다.   2019년 한 대학생단체 회원들이 대사관저 담을 넘어들어가 점거농성을 벌인 이후 강화된 경비 조치다. 당시 사다리 2개를 놓고 담을 넘는 학생들을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던 경찰이 이제 반대로 (늘 그렇듯) 지나치게 많은 인력으로 오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찌푸려진 눈살을 가까스로 바로잡고 구세군 교회 쪽으로 언덕을 걸어오르다 보면 더욱 짜증나는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덕수궁 담벼락 한 켠을 허물고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이해 못 할 돈덕전 복원   세계 어디 내놔도 빠질 것 없이 아름다운 서울 정동길. 하지만 치욕의 역사와 반일감정, 그리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밥벌이로 삼는 ‘악한의지’가 스며있다. [연합뉴스] 문화재청 설명에 따르면 “일제에 의해 훼철된 돈덕전(惇德殿)” 복원 공사다. 1907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외국 사절들을 맞던 곳이며 순종황제 즉위식이 열렸던 장소라서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경운궁(덕수궁의 옛이름)의 북서쪽 구석에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 건물을 왜 복원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특별히 의미 있는 건축 양식도 아니고 인근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을 본떠 만든데다, 그 자리를 오랜 세월 지키고 있던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20여년 자리했을 뿐인 건물을 말이다. 더구나 설계도도 남아있지 않아 있던 그대로 복원할 수도 없고, 그래선지 돌과 벽돌로 제대로 짓는 게 아니라 철골로 겉모습만 살리는 복원이 왜 필요한 것인지 말이다.   옛것은 무조건 되살려야 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조선시대가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이상향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건물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현대적 건축양식과 전통을 조화시킨 이 시대가 자랑할 만한 걸 짓는 게 낫지 않을까.   ‘역사적’ 의미도 밭긴 마찬가지다. 돈덕전은 1902년 열릴 예정이던 ‘고종 즉위 40주년 칭경예식’을 위해 지은 것이었다. 고종은 이 행사를 통해 대한제국의 위용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 사정이 어디 자랑할 만한 거였나.   지그프리트 겐테라는 독일 기자가 돈덕전 건립 당시의 모습을 남긴 글이 있다.   “러시아 공사관을 모델로 현재 많은 비용을 들여 궁전을 새로 짓고 있다. 좀 더 화려하고 위엄 있게 짓는다고 한다. 계속되는 지출로 비어가는 국고가 지탱해줄 수 있다면 대기실과 기둥을 갖춘 베란다가 딸린 건물은 튼튼한 화강암으로 세워 장엄할 것이다. 그러나 국왕이 새 궁전에 거주할지는 의문이다. 황제의 생활 습관이 여전히 순수한 조선식이기 때문이다. 신축을 부추긴 외국인들에 대한 체면에 왕은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문화콘텐츠닷컴 재인용)   노나카 겐조라는 사람의 ‘석조전 건축의 경위’라는 글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돈덕전은 명치 34년(1901)에 낙성된 것으로 공사비는 16만원이었으나 실제 든 금액은 5만원 내외라는 말이 있어 문란한 재정을 알게 해준다.”   실제로 1904년까지는 돈덕전이 황제의 주요 활동공간이 아니었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 당시 화마를 피한 몇 안 되는 건물이었기에 용도가 생겼다가, 1919년 고종의 승하로 주인을 잃은 뒤 방치되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헐렸다.   문 정부의 반일 프레임   이런 초라한 역사의 건물을 굳이 복원하는 이유가 뭘까. 국민들의 반일 정서를 이용하려는 정치적 의도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미 그 앞에 ‘고종의 길’까지 만든 정부(서울시)다. 그 길 역시 고증 문제는 별개로, 일제가 두려워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간 왕의 도주로에 굳이 ‘왕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달리 생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내내 반일 프레임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악화되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은커녕 오히려 반일 정서를 부추기며 양국 관계를 악화시켰다. 일본이 정경 분리의 원칙을 무시하고 과거사 갈등을 수출 규제로 보복하자 기다렸다는듯 대통령이 이순신의 ‘상유십이(尙有十二)’를 운운하고 거북선 횟집에서 밥을 먹었다. 참모들과 지지자들은 ‘죽창가’와 ‘토착 왜구’ 같은 익지않은 용어들로 부응했다.   국민을 친일과 반일로 갈라놓고, 한·일 관계를 걱정하는 보수세력을 ‘친일파’로 몰아붙였다. 지지자들을 결속시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국내정치 전략이었다. 그 와중에 위안부 할머니나 독립운동가들을 위한다는 시민단체들의 앵벌이, 기회주의자들이 사복을 채웠다.   반일 프레임을 공고히 하다보니 고종 같은 무능한 군주도 일제에 항거한 투사로 미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나온 것이 고종의 길과 돈덕전 복원이었을 터다. 이 두 사업을 시작한 주체가 반일 시민단체를 지지세력으로 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라는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가 갑자기 돌변해 여러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했지만, 기대했던 도쿄에서의 ‘남북평화쇼’가 물 건너간지라 다시 반일 모드로 돌아설 게 분명하다. 올림픽 선수촌의 한국 선수단 거주동에 걸렸던 현수막부터 그렇다. 대한체육회는 부인하지만,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현수막 문구는 “전투에 참여하는 장군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는 IOC의 지적이 옳다. 거기엔 번뜩이는 재치도 없고 공연한 피해의식만 있을 뿐이며 따라서 불필요한 도발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친구 생일 파티에 가서 “작년에 네가 나 때렸잖아”라는 말을 반복하는 짓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그러면서 일본 극우세력이 욱일기를 흔들며 응원한다고 어찌 비판을 할 수가 있나 말이다.   별수 없이 철거하고 다시 단 현수막도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범 내려온다’는 문구와 함께 한반도를 호랑이로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웹툰 작가 윤서인처럼 “척추 나간 X신 호랑이”라고 흥분할 것까진 없겠으나, 그의 지적에 공감이 간다. “긍정과 응원·화합·행복·여유가 뭔지 모르고 매사에 악의적이고 적대적이고 건들기만 해봐 부들거리는 나라가 내 조국인 게 너무 슬프다.” 그의 말대로 “세계인의 축제에 참가하게 돼서 기뻐요”라든지, “어려운 시기에 모두 힘냅시다”라는 현수막을 거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재미있는 건 한반도 호랑이의 저작권자가 육당 최남선이란 사실이다. 그가 1908년 펴낸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 종합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렸다. 한반도를 토끼에 비유한 일본 지리학자 고토에 대한 반론이었다. 하지만 최남선은 변절한 지식인으로 반일단체들이 제일 경멸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닌가.   이상돈 교수는 “친일로 변절한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손꼽히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의 아이디어인 ‘호랑이 한반도’가 민족의 상징으로 도쿄 올림픽 선수촌에 휘날리고 있는 현실은 또 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나쁜 한국인들이 더 위험   ‘범 내려온다’는 문구는 더 웃기다. 원래 이 말은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것이다. 토끼를 찾으러 뭍에 나온 용궁의 자라가 수영을 하느라 진이 빠져 ‘토 선생’ 대신 ‘호 선생’이라 잘못 불렀다. 자신을 선생이라 불러주는 소리를 듣고 호랑이는 위엄있게 내려온다. 호랑이를 빼고 잔치를 벌였던 다른 동물들은 공포에 떤다.   여기까진 그럴듯하다. 하지만 책임감을 느낀 자라가 호랑이 ‘가운뎃다리’를 물었다. 호랑이는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의주 압록강까지 도망을 갔다. 이처럼 잠시 후 당할 망신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온갖 폼을 다 잡던 호랑이의 모습을 안다면, 한국 선수들의 투혼을 일깨우는데 사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있는 반일 감정엔 공연한 자격지심이 섞여있다. 태어날 때부터 조국이 일본에 버금가는 선진국이었던 MZ세대들에게는 결코 없는 감정이다. 그런 시대착오적 정서를 일부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자신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력들은 일제보다 더 나쁘다. 그런 세력에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들이 우리와 비교해서 자주 인용하는 게 프랑스다. 해방 후 독일 부역자 청산을 완벽하게 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간과되는 사실이 있다. 당시 독일은 프랑스 점령지역에서 불순분자(일제에게는 불령선인)들을 색출한 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로 보내 강제노역을 시켰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이 자기 동포들을 독일 당국에 무고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프랑스 출판의 역사’라 불리는 가스통 갈리마르도 그런 봉변을 당했다. 알고 보니 갈리마르가 출판을 거부했던 인물의 복수극이었다. 사실을 안 독일군 장군 한 명이 힘을 써 갈리마르는 무사할 수 있었다. 레지스탕스가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던 시기의 프랑스에서는 ‘착한’ 독일인보다 ‘나쁜’ 프랑스인이 더욱 위험했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도 반일 감정을 정치적 목적과 밥벌이에 이용하는 나쁜 한국인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그들을 더 경계해야 한다. 애꿎은 경찰들만 고생시키는 반미(를 악용하는 나쁜 한국인들)도 마찬가지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1.07.29 00:40

  • [선데이 칼럼] 누가 턱걸이를 하든 원산폭격을 하든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우리나라 신문기자들은 반성해야 한다. 물론 나를 비롯해서다. 이토록 좋은 환경에서 지금 정도밖에 신문을 못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좋은 환경이란 엔트로피 높은 대한민국이다. 재활용업체에는 쓰레기가 많이 나와야 좋고, 자동차 수리업체에는 접촉사고가 많은 게 좋다. 신문기자들한테도 사건 사고가 많은 게 장땡이다.   뉴욕타임스나 르몽드, 더타임스 같은 서구 신문 1면을 보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그렇다고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를 길게 늘어놓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눈이 확 떠지는 뉴스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체계적이고 안정적이다 보니 상식을 깨는 돌발뉴스가 그만큼 없는 까닭이다. 변명 같지만 서구 언론의 탐사보도가 발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야 어디 그런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자고 일어나면 벌어져 있는 사회다. 놀란 눈 뜨고 입 다물 수 없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고 일어난다. 이번 주만 해도 그렇다. 대부분의 조간이 월요일자 1면에 청해부대 집단감염 사태를 전했다. 화요일엔 청해부대 집단감염자가 247명으로 늘었다는 소식과 함께 대통령이 도쿄 올림픽에 안 간다는 뉴스가 나왔다. 수요일엔 청해부대원 귀국에 청와대의 이광철 민정비서관 사무실 압수수색 거부 기사가 실렸다. 목요일엔 대통령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도지사에 징역형을 확정한 대법원 판결을 보도했다.   금요일엔 조간 1면들이 제각각이었는데도, 예전 같으면 1면톱이었을 도쿄 올림픽 개막식 기사가 비교적 작게 취급됐다. 그만큼 다른 뉴스거리가 많다는 얘기다. 1면 편집자가 고민할 이유가 없다. 역시 변명 같지만 우리네 탐사보도가 뒤처진 이유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뉴스가 쏟아지니 굳이 공들여 탐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토록 뉴스가 많은데도 신문 독자들이 줄어든다는 건 분명 신문을 잘못 만들고 있다는 거다. 신문기자들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물론 내용보다는 플랫폼의 문제가 더 크다. 언제 어디서건 정보 접근이 가능한 유비쿼터스(이 용어조차도 진부하게 들리는) 시대에 하루 한 번 발행하는 (더구나 인력 배달이 필요한) 종이신문은 시대에 뒤떨어진 메신저인 게 사실이다.   선데이칼럼 7/24 하지만 변명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신문이 디지털 전환에 주력했지만 크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클릭 수 경쟁에 매몰돼 선정적인 토픽 양산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메이저 언론들마저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고품질 기사를 생산하기보다는, 고만고만한 기사들을 쏟아내기만 함으로써 스스로 마이너 언론들과 하향평준화한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이 어느 한 언론사의 홈페이지를 굳이 선택해서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고, 언론사들을 줄 세워 재주 넘게 하는 포털만 배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공연한 넉두리를 늘어놓자는 게 아니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은 바로잡혀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참이다. 그것은 이 땅의 신문사와 신문기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 언론, 나아가 이 나라의 미래(어쨌든 권력 남용을 감시할 언론이 있어야 하므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 타개를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있을 언론사 경영진들에게 훈수를 두는 건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다만 제작 측면에서 동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보려 한다. 차고 넘치는 SNS 주장들을 중계방송하지는 말자는 거다. 특히 SNS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부류들의 주장과 지지자들의 무조건적 호응,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대응들을 날것으로 독자들에게 전하지는 말자는 거다.   누구나 SNS에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지지 댓글을 달 수 있고 반대 의견도 말할 수 있다. 이미 SNS는 언론의 영역에 들어섰고, 팔로워가 많은 유력인사의 글은 어지간한 언론 기사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SNS는 SNS 담장 안에 놔두기로 하자.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마음껏 주장하고, 찬양하고, 비판하게 내버려 두기로 하자. 굳이 기사로 옮겨 언론과 독자의 수준을 떨어뜨리지는 말자는 얘기다. 팔로우하지도 않는 사람이 턱걸이를 하든, 그 지지자가 원산폭격을 하든 내가 알 바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경비행기를 태워주겠다고 꼬셨는지 아니든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보게 되니 짜증이 난다.   요즘 정치인들이 SNS 정치를 하니 기자들이 신경을 안 쓸 순 없겠다. 하지만 그것도 무시할 건 무시해야 한다. 말이 안 되는 정치인 SNS 얘기를 기사화하려면 그것의 진위를 밝혀서 써야 하는 거다. 그런데도 무슨 말만 하면 무조건 옮겨대니 아무말 대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 사이 독자와 더불어 언론의 수준이 떨어지고 정치가 희화화되며, 국격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무엇이든 말로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오늘날 중국을 G2를 자처하는 강대국으로 만든 초석을 다진 이는 말 많던 마오쩌둥이 아니라 말 아끼던 덩샤오핑이었다. 마오는 스스로 대자보까지 써붙였지만, 덩은 단지 24자만을 말했을 뿐이다.   지금 기자들이 만나야 할 건 덩과 같은 사람들이다. SNS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하느라 SNS를 할 시간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07.24 00:30

  • [선데이 칼럼]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나는 글을 쓸 때 옛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인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거기에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대체로 서양 고사(故事)보다는 동양 고사를 들었을 때 거부감이 더 크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얘기할 때는 가만있다가도 『사기 열전』을 말하면 찡그리는 경우를 본다. 아무래도 익숙함 속에서 고리타분함을 더 느끼는 모양이다.   또한 고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일수록 거부감을 갖는 것 같다. 『논어』 속 깊은 지혜를 안다면 “21세기에 무슨 공자왈맹자왈이냐”고 타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 그토록 좁고 느린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뭘 배울 게 있냐는 착각이 나온다. 스마트폰을 쓸 줄 모르던 공자보다 자신이 똑똑하다는 오만도 가능하다.   무식해서 용감할 뿐이다. 인간은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 세상이 나아진 건 인간(동시대 사람이지만 나보다 똑똑한)이 발견해 축적한 지식의 총량이 증가했을 뿐이다. 내가 똑똑해서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진보하지 않는다는 건 화성에서 드론을 날리는 21세기 대명천지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증명한다.   오늘날 ‘황제’나 ‘차르’라는 시대착오적 단어가 여전히 쓰임새를 잃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중국은 무산계급 혁명의 기치를 걸었던 공산당 출범 100년 만에 새로운 황제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다. 숨죽이던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벗어나 ‘전랑(戰狼)’의 발톱을 숨기지 않는 이 황제는 대내외로 거침이 없다.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거부하고 지구상 인구의 63%, 44억명을 하나로 묶는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야심을 펼치며 G2 대우를 당당히 미국에 요구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급기야 “우리를 괴롭히면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릴 것”이라 경고하기에 이른다. 지난 세기 이런 대국굴기(大國崛起)를 경험하지 못했던 14억 중국 인민은 환호작약하지만, 그들의 자존감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자못 크다. (우리도 큰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선데이칼럼 7/3 중국은 2018년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 2기 초과 연임 불가’ 조항을 삭제했다. 3연임은 물론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당대 최고권력자가 한 대 건너 차차기 후임자를 육성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 원칙도 깨졌음은 물론이다. 마오쩌둥 1인 독재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꼈던 덩샤오핑이 만든 (민주적이지는 않지만)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한 집단지도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시진핑 체제의 결말을 예측하는 건 섣불러도 그 과정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오던 홍콩 빈과일보가 사실상 강제폐간 당하고, 사주와 신문사 간부들이 잡혀들어가는 모습이 그것을 웅변한다. 폐간 날 한 간부가 외쳤다. “여기에 언론 자유도, 미래도 없다.” 인간이 진보한다면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절규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얼마 전 2036년까지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법안에 서명했다. 29년간 권좌에 있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통치 기간을 넘어설 수 있는 시간이다. 개정안에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면책권을 강화하는 조항도 있다. (우리도 많이 본 데자뷔다.)   미얀마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향해 실탄까지 발포했다. 시민들은 소수민족 반군 캠프에까지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저항군을 결성하는 등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국제사회는 실효성 있는 개입도 못 하고 힘없는 비판만 이어가는 형편이다.   이 모두가 민주주의란 용어가 귀에 못 박혀 진부하게 여겨질 정도인 오늘날 벌어지는 일들이다. 인간이 진보한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하긴 멀리 볼 것도 없다. 민주주의공화국의 이름으로 권력의 3대 세습이 버젓이 행해지는 왕조 아닌 왕조국가가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백성들은 굶어도 정권 안보를 위해 핵미사일 개발에만 올인하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건 인간이 진보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나라에 퍼주질 못해 안달하는 대한민국 정부, 고모부와 이복형을 잔인하게 살해한 김정은을 “정직하고 열정적이며 의지가 강하다”고 평가하는 대통령은 어이가 없어서 더 말하기도 싫다. 다만 앞서 든 국가들의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까닭에 하는 말이다. 오히려 그럴 조짐이 작지 않아 두려워서 하는 소리다.   이미 대통령의 30년 지기의 낙선 설움을 달래주려고 선거 개입까지 한 청와대다. 검찰이 그걸 수사하자 검찰 수사권을 빼앗고 수사팀을 해체해버리는 정부다. 정치적 중립을 위해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쫓아내려고 온갖 짓을 다 하더니, 감사원장의 사퇴를 두고는 임기와 정치적 중립을 운운하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여당이다. 그런 짓들을 다 적폐청산, 검찰개혁의 이름으로 행하는 정권이다. 자기들로 주류를 교체해 20년은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던 세력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진보하지 않는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이런 이들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지 두렵다. 유권자들이 정신 번쩍 차리고, 두 눈 부릅떠야 할 이유다. (정권이 바뀌어도 그래야 한다) 국가의 화복(禍福)은 유권자에 달렸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질 뿐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07.03 00:30

  •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5060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  정치 교체를 위하여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번 이 자리에 대한민국 정당들이 정부 수립 이후로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고 썼었다. 70년 넘도록 나눴다 다시 합치고, 이름 바꾸고 색깔 달리 칠했어도 결국 그게 그거였다. 겉만 번드레할 뿐(결코 참신하진 않았다) 내부의 찌든 때는 더욱 ‘고색창연’해졌다. 여건 야건, 보수건 진보건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더욱 교활해지기까지 했다. 지난 21대 총선 때 등장한 ‘대놓고 위성정당’들은 과거라면 부끄러워서 차마 생각하지도 못할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버젓이 만들어져 목적을 달성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런데도 부끄러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유권자들의 분열과 갈등을 악용한 작태였다. 유권자들이 개·돼지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역시 여건 야건, 보수건 진보건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다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껏 여의도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제법 신선한 바람이다. 그 흔한 국회의원 한번 못 해본 정치 경력 10년의 36세 정치인이 제1야당 대표로 선출된 것이다. 그 바람에 벌써부터 정권 교체니, 세대교체니, 정치 교체니 얘기들이 많지만 섣부르다. 돌풍이라지만 이준석 대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은 까닭이다.   사실 정권 교체와 세대교체, 정치 교체 중에서 가장 쉬운 건 정권 교체다. 내가 보기에 정권 교체는 7부 능선을 넘었다. 역시 섣부르다는 거 인정하지만, 워낙 현 정권이 ‘뻘짓’을 많이 했고 계속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달라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할 수 있는 말이다.   가장 쉬운 게 정권 교체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세대교체나 정치 교체는 다르다. 흔히 이준석 대표의 당선이 이른바 ‘이대남(20대 남성)’에게 소구한 결과라고 하지만, 그것은 4분의 1만 맞는 답이다. 민심이 (40대만 빼고) 전 세대에서 정권에 등을 돌리고, 제1야당의 고루한 당심 역시 민심과 어긋나는 걸 두려워하기 시작한 결과인 것이다. 2016년 총선에 이어 내리 4연패 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거였다.   대한민국 국민이 어수룩하면서도 현명하다. 참고 봐주다가도 회초리를 들 때는 가차 없이 혼낸다. 21대 총선 결과는 현 정권 지지가 아니라 보수 야당 응징이었다. 그렇게 말아먹고도 알량한 기득권 싸움이나 벌이는 데 대한 징벌이었다. 야당은 충격에 빠졌고 여당은 오만에 빠졌다.   오만의 끝은 독선이다. 야당의 잘못들을 여당이 고스란히 답습했다. 어처구니없는 검찰개혁으로 국정을 농단했고, 친문·친노로 뭉쳐 갑질을 해댔다. 그 더럽고 냄새나는 얼굴을 씻을 생각은 안하고 화장으로 가리려 들었다. 얼룩은 덮었지만 악취는 막지 못했다.   이에 대한 유권자들의 시범적 응징이 지난 4월의 재·보궐선거였다. 이 선거에서는 익히 예견됐던 여당의 참패보다 주목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정의당이 후보조차 내지 못한 사실이었다. 비록 당 대표의 성추행 사태가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앞선 총선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던 게 더 컸다.   자신에게 유리한 틀을 만들려고 정의당으로서는 생명과도 다름없는 ‘공정 절차’를 무시한 채 여당과 야합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성정당이라는 꼼수에 말려 성과 없이 명분만 잃었다. 유권자들의 신뢰를 잃은 게 더 뼈아팠다. 정의당뿐 아니라 정치권 전체가 이 대목에 밑줄을 그었어야 한다.   공정은 정의당의 최대 지지층인 젊은 세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이뤄지고 난 이후 자의식이 형성된 ‘MZ세대(1981~2010년 출생자)’에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취업도 어렵고 기껏해야 비정규직 일자리에 기대야 하는 ‘88만원 세대’, 그러다보니 결혼은 꿈도 못꾸고 연애조차 포기해야 하는 ‘N포세대’라 불리던 그들에게 정치권은 그 절망적 현실을 건널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했다.   보수·진보 너머 비전 제시했어야   하지만 ‘건국 이래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는 비극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그들에게 정치권은 부모세대의 학력과 자산이 대물림되는 세습 격차,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기회조차 독점하는 ‘그들만의 리그’를 기정사실화했을 뿐이다. 보수 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도덕성을 내세우던 진보 정당 역시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심지어 정의당마저 반칙을 용인하는 꼼수에 편승했던 것이다.   이들 세대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이라는데 있다. 공동체보다 내가 먼저다. 자기 삶에 직결되는 이해관계에 따라 진보편에 섰다가 보수 쪽으로 옮겨갔다 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바라는 건 한가지다.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다. 특혜는 안 줘도 되니까 방해만 하지 말라는 것이다.   90년대생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본 책 『K-를 생각한다』의 저자 임명묵(27)은 자신들에게 공정이란 “불안을 키우지 않는 것, 신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심리적 위축과 불안이 일상인 이들에게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국가 시스템, 시험제도다. 개혁이든, 특혜든 쓸데없이 개입해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지 말라, 시스템을 교란하지 말라는 요구 딱 거기까지다.”   이준석 돌풍은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과 함께 한다. 이들이 보수화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이들을 깨운 것은 SNS를 더 잘 다루는 좌파들이었다. 특히 조국 같은 이들의 페북 정치에 열광하다 실체를 알고 실망한 2030이 기득권의 위선에 돌(댓글)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실력과 공정을 외치던 이준석과 발을 맞추게 된 것이다.   이준석 대표의 당선은 반대로 이들의 참여를 더욱 가속시킬 것이다. 대구 출신이면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전남(순천-광양-곡성-구례갑)에서 출마하는 도전을 했던 천하람 변호사는 “이준석이 여의도 정치와 MZ세대를 이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큰 포털을 열었다”고 단언한다. “정치권, 특히 국민의힘과 MZ세대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4차원의 벽이 있었는데, 이준석이 그 벽을 허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인정하듯, 이준석호의 출범만으로 보수 야당의 완전한 세대교체를 이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치를 오직 ‘파워 게임’으로만 이해하는 ‘꼰대 세력’이 여전히 당의 주축인 까닭이다. 이준석 대표는 이들을 “국민의힘을 지켜주시는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결코 버팀목으로 그치길 바라지 않는다.   선출직 공무원 공천 자격시험 케이스가 리트머스 시험지다. 전례 없는 일인데다,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해 서울과학고, 하버드대를 졸업한 이준석 대표의 ‘능력주의’ 주장과 맞물려 당내 반발이 만만찮지만, 그는 주저함이 없다.   “국민 세금을 받고 일하려면 기본적인 능력은 필요하다. 공천심사관리위에서 도덕성과 능력을 본다는데, 며칠 동안 3000명의 후보를 어떻게 다 검증하나. 안 되는 걸 지금까지 했다고 거짓말한 거다.”   실제 2030세대들은 이 문제에 거부감이 덜하다. 앞서 임명묵의 말을 기억하는가. “최소한의 마지노선이 바로 시험”인 것이다. 물론 ‘교육세습’ 탓에 지능과 노력의 결실을 의미하는 ‘능력주의’와 출신과 배경으로 보상받는 ‘귀족주의’가 동의어가 될 수 있는 아이러니는 경계해야 한다.   능력주의가 차선의 대안   하지만 무작정 능력주의를 버리고 나면 대안이 뭐가 있겠나. 능력주의가 귀족주의나 족벌주의보다는 부작용이 훨씬 적다. 한번 시험으로 평생을 좌우하는 게 아니라, 능력 평가 방식을 보다 유연성 있게 접근하면 되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하는 얘기도 다른 게 아니다.   부자라서 좋은 과외선생 만나 공부를 잘하는 친구보다 시험 성적이 떨어져 탈락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아빠·엄마 찬스로 하지도 않은 인턴 경력을 쌓거나 없는 표창장을 위조해 남의 기회를 빼앗아가는 것은 참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준석 대표는 이런 능력주의를 통해 선출직 공무원들의 그치지 않는 자질 논란을 극복하겠다는 뜻이고, 다소 미흡하다 해도 해볼 만한 시도다. 여론조사 결과도 찬성(57%)이 반대(32%)보다 월등히 높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젊은 세대의 정치권 진입이 좀 더 수월해질 터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인생 스토리를 가진 젊은이가 아니라, 눈앞의 잘못에 눈감지 않으려는 평범하지만 큰 뜻을 품은 젊은이 말이다.   사적 영역에서 (인사청문회에서 흔히 등장하는) 온갖 편법·불법들을 마음껏 누리며 살다 국회의원 자리가 자신의 성공에 답하는 트로피라도 되는양 차지하고 특권만 누리려는 인물들이 채우는 작금의 정치 엘리트 충원 방식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세대교체요, 정치 교체다. 모든 세대의 유권자들이 바라는 것도 그것이다. 그것이 성공을 거두려면 지금 주축이 되고있는 50~60대 정치인들이 이준석 대표에 협조해야 한다. 이것 역시 섣부를 수 있지만, 어지러운 정치판에서 큰 허물 없이 10년을 버텨온 30대 정치인이 남아있었던 걸 복인줄 알아야 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5060 정치인들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제 박수를 받으며 떠나거나 최소한 뒤로 물러나 그야말로 버팀목으로 남아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이 나라의 주인이 자신들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들이 그동안 필요하면 불렀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 이벤트 대상으로 소비해온 MZ세대가 주인으로 성장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MZ세대들은 미련없이 떠날 것이다. 그들의 부모 세대들도 따라 떠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정치는 또다시 안개속을 헤매게 될 테고, 유권자들이 또한번 무거운 마음으로 정치권을 심판해야 할 것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1.06.24 00:35

  • [선데이 칼럼] 그거 거짓말이야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몇 년 새 지겹게 봐왔지만, 원래 ‘내로남불’류는 좌파의 주특기인 거다. 그 역사가 결코 짧지 않다. 좌파의 역사와 같이 해왔다. 100년 전 좌우 이데올로기가 피 튀기게 경쟁하던 때도 그랬다.   스탈린 시절 소비에트 체제의 잔혹성을 당시 서유럽 좌파 지식인들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까지 하던 찬양을 하루아침에 비판으로 바꾸기는 자존심이 상할 터였다. 그래서 소비에트를 옹호하기 위해(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이중 잣대를 꺼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이 정적들을 가혹하게 숙청할 때 조지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진취적인 이웃 국가(소련)가 정직한 사람들에게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인도적으로 신중하게 (…) 한 줌의 착취자와 투기자를 처단하려고 할 때, 우리가 짐짓 도덕적인 태도를 취하며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드골 정부에서 문화부장관까지 지낸 앙드레 말로 또한 이렇게 두둔했다. “종교재판이 기독교의 본질적 존엄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처럼 모스크바의 재판은 공산주의의 본질적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다른 현실에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까지 옹호했다.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정부에 대적하는 가장 악랄한 적들의 견해에 비춰보더라도 재판이 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음모의 존재를 밝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소련의 실상을 아는 오늘날 눈으로는 참으로 지독한 견강부회(牽强附會)지만, 그래도 이들에게는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이상을 좇으려니 스텝이 꼬일 수밖에 없는데, 신념은 지키되 궤변으로 빠지지 않게 (결국은 실패했지만)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까닭이다. 이중 잣대의 안과 밖 치수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내로남불 수준에는 미치지 않는다.   그런 좌파의 소심한 주특기가 유독 오늘날 이 땅에서 이렇게 추락하고 타락한 건 슬픈 현실이다. 주인이 생계형 또는 기회주의 좌파로 타락하니 불가피한 일이다. “증거 인멸 아닌 증거 보존을 위해 PC를 빼돌렸다”는 역사에 길이 남을 내로남불 어록을 남긴 작가, 자기의 최대 적이 자기인 걸 (자기만) 모르고 (자기를 어떻게 옥죌지 모를) 자서전까지 펴낸 내로남불 끝판왕 얘기는 더는 거론하고 싶지도 않다.   선데이칼럼 6/12 그들 아니더라도 이 땅에서 권력을 쥔 운동권 좌파들은 매사가 내로남불 아니면 견강부회, 아전인수(我田引水)에 수석침류(漱石枕流)다. 정권 출범 초부터 그렇게 지적을 받고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대선이 발등의 불로 떨어지니 여당은 그나마 달라진 시늉이라도 하지만 정부는 아니다. 달라질 의지는커녕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참석한 국제회의 소개 영상에 서울 아닌 평양의 위성사진이 등장한 건 작은 실수가 아니다. 국격 추락은 말할 것도 없고 두고두고 소환될 국제적 조롱거리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사과와 함께 엄격한 책임 규명, 설득력 있는 해명이 따랐어야 한다. 그런데 “국제행사인데 아무 곳이면 어떠냐”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은 입을 다물 수 없게 한다. 북한 좋아하는 정부이니만큼 무슨 의도가 담긴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만든다.   이번 검찰 인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듯, 부러 저질러놓고 어물쩍 눙치는 태도가 이 정부의 시그니처 행태이니 말이다. 충성파 검사들은 피의자 신분이고 뭐고 죄다 승진하고, 눈치 없이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거나 비판한 검사들은 죄다 좌천됐다. 그런 결과를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는데 인사권자인 법무장관은 “공정과 내실을 기했다”고 태연히 말한다. 승진한 검사나 물먹은 검사들 모두 웃었을 게 분명하다.   부동산 불법거래 의혹을 받아 출당 또는 탈당 권유를 받은 여당 의원들 경우도 그렇다. 사연도 있고 억울한 점도 있을지 몰라도 그리 거품 물고 난리 칠 일은 아닌 거다. 국민들은 이미 억울해도 법 때문에 그들처럼 못 하고, 그들처럼 했다가 단속돼 벌금 내고 유죄 받아도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해왔던 까닭이다. 국민 생각은 안 하고 나만 생각하니 내로남불이고 그래서 욕을 먹는 것이다.   공수처의 윤석열 수사 착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이 정권이 왜 그토록 공수처에 집착했는지 본심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야당을 배제하고 졸속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면서까지 말이다. 입으로는 개혁을 외치지만 속으론 딴생각한다는 걸 누구나 안다.   대부분 신문이 어제 사설에서 지적한 걸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다른 좌파의 입을 빌려 말할 수 있겠다.   아주 괜찮은 좌파다. 이념 또는 진영에 매몰되지 않고 잘못도 인정할 줄 안다. 그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이 땅의 좌파들이 배웠으면 하는 절망적인 바람을 가지고 말이다.   개혁 초기이던 1979년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여배우 셜리 매클레인이 만찬장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문화혁명 당시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하방(下放)된 노학자를 만났다. 학자는 그녀에게 “대학에서 강의할 때보다 인민공사에서 토마토를 재배하는 게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매클레인은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노라고 덩에게 말했다. 덩이 그녀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대답했다. “그거 거짓말입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06.12 00:30

  • [선데이 칼럼] 나만 잘하면 돼!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웅전』 말고도 많은 글을 썼다. 그중 남아있는 78편을 모아놓은 게 『모랄리아』다. 철학·정치·윤리·교육·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수상록으로, 거기에 ‘7현인의 만찬’이라는 글이 있다. 그리스의 일곱 현인으로 일컬어지던 인물들이 다양한 주제로 가상 대화를 나누는데, 민주정치란 어때야 하는지 각자의 의견을 말하는 장면이 재미있다.   먼저 아테네 민주정의 기초를 세운 개혁가 솔론이 말한다.   “범죄로 피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피해자 못지않게 범죄자를 기소하고 처벌하는 나라에서 민주정치가 가장 잘 운영되고 효과적으로 영속할 것이네.”   탁월한 연설가였던 프리에네의비아스가 두 번째로 말한다.   “모든 사람이 참주를 두려워하는 것만큼 법을 두려워하면 훌륭한 민주정치가 될 거야.”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의 아버지’라 칭한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이어 말했다.   “민주정치란 사람들이 지나치게 부유해지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난해지지도 않게 하는 것이지.”   다음은 스키타이의 아나카르시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존중받지만, 덕과 악덕의 정도에 따라 더 나은 사람과 못한 사람이 구분되어야 하네.”   경구 짓기로 유명했던 린도스의클레오불로스가 뒤를 잇는다.   “공직자가 법보다 비난을 더 무서워하는 나라가 가장 정의롭다네.”   여섯 번째로 미텔레네의 피타코스가 말했다.   “그런 나라는 나쁜 사람이 공직에 오르도록 허용하지 않고 좋은 사람이 공직을 거부하도록 허용하지도 않지.”   선데이 칼럼 5/22 마지막으로 스파르타의 킬론 차례다.   “법률에 최선의 주의를 기울일 뿐, 법률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는 게 최고의 체제라네.”   인용이 길어서 이번 칼럼을 거저먹는 듯하지만, 비난을 감수하고 장황하게 옮기는 것은 그만큼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는 까닭이다. 과연 현인은 현인이다. 어느 하나 버릴 말이 없다. 2600년도 더 지난 요즘 우리네 정치 상황에서도 귀에 쏙쏙 박힌다.   얼마 전 새 대표를 비롯한 집권당 관계자들이 성년의 날 간담회에 초청한 20대 청년들에게 혼쭐이 났다. 청년들의 지적이 워낙 일침견혈(一針見血)이어서 한마디 반박도 못 했다 한다. 특히 “민심을 받아들여야지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에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는 거다.   그럴 수밖에. 솔론이나 비아스, 킬론의 말이 바로 그 말이었으니까. 모든 사람이 정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 법을 두려워하고 지키는 사회가 민주사회인 것이다. 시민들은 그럴 준비가 돼있고 사회는 이미 그런데, 민주정치가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위정자들 탓이다. 특히 권력을 가진 자들이 법을 어기고 정의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서 입만 열면 정의와 공정이 어쩌고저쩌고 국민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민주화란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들이 그런 민주적 가치들을 짓밟고 서 있었던 것이다. PC를 빼돌리면서 “증거를 없애려는 게 아니라 증거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오만은 국민을 개·돼지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가족들이 합심해 온갖 불법과 탈법, 편법을 행한 법무장관을 마지못해 내치면서 “마음의 빚을 졌다”고 말하는 불손은 국민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린다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청년들은 “결과적 공정보다는 절차적 공정을 원한다”고도 했다. 아나카르시스와 클레오불로스, 피타고스의 말이 바로 그 얘기였다. 공직자라면 또는 공직자가 되려면 법을 지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도덕성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공직이란 게 승리자가 쟁취한 트로피나 특전이 아닌 까닭이다. 공직이란 명예는 보다 도덕적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고, 이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공직 주변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면 보물선에서 인양된 것 같은 그릇들을 구비하고 사는 인물이 (등 떼밀려서) 사퇴했다고 마음이 짠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리 종합선물세트 같이 살아온 인물을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장관에 임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라”던 당부를 충실히 지켰던 검찰총장을 못 잘라서 안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심성 공약보다는 “삶이 어려운 것 없게”나 잘하라는 주문 역시 탈레스가 말한 지나치게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삶과 다름아니다.   그리스 현인들이 말한 민주정치에 필요한 요소는 결국 세 가지다. 법과 도덕성, 민생 말이다. 오늘날 이 땅의 20대 현인들의 바람도 다르지 않다. 시공을 초월하고 남녀노소를 넘어서며, 그다지 추측하기 어렵지도 않은 진리인 것이다. 그것을 권력자들만 모른다. 사실 이 정권뿐 아니라 이전 정권도 늘 그래왔다. 그들의 말로가 늘 험했던 이유가 다른 게 아니다. 이런 진리가 어렵다면 좀 더 쉽게 권력자들에게 말해줄 수 있겠다. 자신들의 안위 문제이니 귀담아들었으면 좋겠다. “나만 잘하면 돼!”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05.22 00:30

  •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정부 수립 이래 달라진 게 없는 한국 정당

     ━  작동하지 않는 대의정치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의민주주의의 종언’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었다. 광우병 파동으로 온 나라가 촛불에 파묻혔던 2008년 6월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정상이 아니었다. 악의적 유언비어에 국민이 공포에 떨었다. 신뢰 잃은 여당은 속수무책이었고, 신난 야당은 국민 분노를 부추겼다.   정치는 없었다. 선량들은 국민을 대표하지 않았고, 국민도 선량들에 기대하지 않았다. 그때 이렇게 썼었다.   “대표들도 유권자들의 마음을 읽으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인수위 때부터 거듭된 경고음에 대통령은 귀를 막았다. 집권당은 그런 대통령의 눈치만 살폈고 청와대 입장만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야당은 아예 거리로 나섰다. 국민의 분노를 실지(失地) 회복의 기회로만 여겼다. 슬그머니 촛불 대열에 끼어들었지만 따가운 눈총 말고 다른 건 얻지 못했다.”   기댈 데 없는 국민은 직접 거리에 나섰다. 사실 촛불을 가장 먼저 든 건 선거권 없는 고교생들이었다.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는 급격한 교육 개혁을 시도했다. 초중고 자율화라는 이름으로 ‘0교시 수업’ ‘우열반 편성’ 등을 허용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고교생 100여명이 촛불을 들고 모인 게 시작이었다. 이후 서울 청계천광장과 광화문 일대에서 주말마다 다양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참으로 시작은 평화로왔으나 끝은 파괴적이었다.   퍼스펙티브 기름을 부은 건 MBC PD수첩의 보도였다.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위험을 과장한 명백한 오보였다. 과장된 만큼 국민의 공포를 키웠다. 그해 5월 2일 한 인터넷 카페가 주최한 ‘제1차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에 1만명이 모였다. (주최 측의 참여 예상 인원은 300명이었다.)   이후 거리행진으로 규모가 커진 촛불시위는 현충일 연휴와 6월 민주화 항쟁 21주년을 맞아 절정으로 타올랐다. 자유발언, 즉석토론, 문화행사 등의 비폭력 시위에 10~50대의 다양한 연령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일부 시민단체들이 집회를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폭력적으로 변질됐다. 당연히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는 줄었고 촛불은 서서히 꺼졌다. 5월 2일~8월 15일 사이 전국적으로 2398회의 촛불집회가 열렸다. 참여인원은 경찰 추산 93만2680명, 주최 측 주장 300만명이었다.   100일 이상 국가가 마비되는 상황에서도 정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촛불시위가 미국산 쇠고기 때문만이 아니라, ‘고소영’ ‘강부자’로 대변되는 인사 참사, ‘한반도 대운하’ 같은 일방통행에서 비롯된 국민 분노의 산물이었음에도 여당의 견제와 제동은 없었다. 오직 ‘친이’와 ‘친박’의 권력 다툼뿐이었다.   정부 일방통행, 여당은 하수인 전락   정치의 부재에는 정치권에 대한 대통령의 부정적 시각도 한몫했다. 이미 서울시장까지 거친 정치인이 됐는데도 이명박은 여전히 기업인에 머물렀다.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통하던 건설사 사장처럼 국가를 경영했고, 민주주의란 개념은 처음부터 머릿속에 없었다.   기관에 대해 얼마나 신뢰하십니까 그것을 일깨워줬어야 할 여당 의원들조차 기업 임원이나 간부처럼 굴었다. 대통령이 귀를 막고 정당이 역할을 못 하니 국민이 정부와 직접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의민주주의가 사망선고를 받은 게 2008년 촛불시위였다. 자기가 뽑은 선량에게 기대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인터넷에 올리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들며 의기투합해 밖으로 나온 게 촛불시위대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2016~2017년의 촛불 시위는 기획된 성격이 좀 더 짙었다. 2016년 10월 29일의 첫 촛불집회를 주최한 건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였다. 집회의 명칭도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 박근혜 시민촛불’이었다. 8년 전 촛불시위에도 불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던 일부 시민단체들이 총궐기하는 양상이었다. 사실 그들은 정권 초기인 2013년부터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대선이 “국가정보원 여론조작을 통한 부정선거”라는 주장이었다. 이듬해 세월호 침몰 때도 책임을 정권 탓으로 돌리며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그런 상황에서 최순실의 태블릿PC를 입수해 보도한 JTBC 보도가 기름을 부었다. 국정 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게 나라냐”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경찰 추산 1만2000명, 주최 측 주장 3만명이 광화문에 모였다.   이 촛불시위는 “모이자! 광화문으로! 밝히자! 전국에서! 박근혜 퇴진 4차 범국민행동” “박근혜 즉각 퇴진 범국민행동”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등의 명칭으로 바뀌며 23차 집회까지 이어졌다. 주최 측의 목표는 퇴진만이 아니라 ‘박근혜 구속 수감’이었다. 20차 집회 하루 전인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인용이 내려져 시민들이 외치던 퇴진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집회가 23회까지 계속된 이유다. 특히 그해 2월 25일 열린 17차 집회의 명칭은 ‘박근혜 4년, 너희들의 세상은 끝났다’로서, 집회 주최 측이 정치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때도 대의정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여당 의원들의 관심은 지금까지 떠받들던 대통령의 절망적인 운명도, 혹한 속에서도 촛불을 꺼뜨리지 않던 국민의 절절한 바람도 아니었다. 그들의 머릿속엔 오직 자신들의 정치생명 연장 생각만 있었다. 어떻게든 폐족이나 면해 책임 없는 야당으로 살아남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여러모로 난관과 장애가 가득할 게 분명한 다음 정권을 흔들어대다 보면 재기할 기회가 올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온 나라가 촛불에 타들어 갈 때 정치 대신 길에서 상황을 즐겼던 현 정권은 죽는 길인 줄도 모르고 독배를 마셨다. 길에서 지갑 줍듯 굴러들어온 정권인데도 마치 자신들을 위해 촛불이 켜진 줄 착각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야당은 지지 착각 속 거리 정치   사실 이명박의 정치 외면은 그 특유의 실용주의 결과물이었다. 정치는 안 해도 잘 먹고 잘살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임자가 존중받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청와대 뒷산에 올라 떨면서 바라본 촛불 시위가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시위의 배후에 친노세력이 있다는 정황을 포착하자, 약속을 저버리고 정치 보복에 들어갔다. 박연차를 비롯한 노무현 측근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와 함께 뇌물과 비자금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어졌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누구나 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정권을 주운 현 정부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의 ‘한풀이’가 검찰 개혁에 집중된 이유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도 많은 무리와 억지가 따랐다. 촛불시위를 자기들이 이룩한 혁명으로 명명한 이들은 혁명세력처럼 굴었다. 자칭 민주화 세력이라는 사람들이 민주주의 파괴에 거리낌이 없었다.   최장집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촛불시위부터 시작됐다”고 단언하는 이유다. “촛불시위로 인한 대통령 탄핵 이후 민주당 정부는 역사 청산, 적폐 청산 등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촛불시위를 혁명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이전 사회의 성과와 보수세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최 교수의 진단이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대의정치는 부재했다. 처음부터 대의(代議)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일방적으로 내 주장만 관철하려고 노력했고,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폐로 몰아붙였다. 송호근 교수는 이를 두고 “이번 정권이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면서 그들의 편협한 정책관을 강행했다”고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사회 민주화의 목표인) 격차와 차별 해소가 아니라 경쟁 상대인 정치세력을 내치는 레토릭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사실 현 정권의 이런 생각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2015년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준 문제를 놓고 여야가 대치했다. 입장만 바뀌었을 뿐 지금과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반대했지만 여당인 새누리당이 다수당이어서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때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이렇게 말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우리 주장을 야당의 정치공세로 여긴다면 중립적이고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 기관에 여야 공동으로 여론조사를 의뢰하기를 청와대와 여당에 제안한다.”   한마디로 의회민주주의의 부정이자 대의정치의 포기였다. 적어도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른 명이 넘는 장관급 임명을 강행한 정부의 수반이 할 얘기는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이 땅에서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도 마찬가지다. 최 교수는 “대통령이 책임성의 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정당인데, 정당이 늘 대통령의 하위도구, 수단으로 기능해왔다. 이승만 정부부터 현재까지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대의민주주의 작동한 적 있었나   그러다 보니 대의정치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은 턱없이 부정적이다. 대의제 기관인 정치인과 정당은 대표성 평가에서 각각 10점 만점에 2.95점, 3.89점에 불과했다.(그래픽 참조) 신뢰도 역시 대의제 기관이 다른 기관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국회의원과 정당의 신뢰도는 각각 2.49와 2.9로 판사(3.5)와 검사(3.32)보다 낮았다. 누가 누굴 개혁한다는 건지 실소가 나오는 상황인 것이다. 존 나이스비트 같은 미래학자가 “미래에 정치인이란 직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이유다.   현 정부 같으면 더욱 그렇다. 정부가 국민(사실은 지지자)과 직접 소통하니 대표가 필요 없다. 하지만 후유증이 크다. 편협한 세계관에 따른 일방통행식 정책 강행, 다른 의견은 덮어버리는 마녀재판, 현실무시 대안부재의 포퓰리즘을 우리가 이미 체험하고 있듯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나 느낀다. 대의정치는 더는 가장 효율적인 정치체제가 아니다. 그것이 부족함을 드러낼 때마다 촛불에 기댈 수도 없다. 그 비용을 떠안는 건 결국 국민이다. 대안이 없다는 체념은 도움이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정치와 국민을 잇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 〈계속〉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1.05.20 00:28

  • 10년 걸린 새 번역 ‘한서’

    한서 열전 1~3 한서 열전 1~3 반고 지음 신경란 역주 민음사   반고의 『한서(漢書)』 〈열전〉이 민음사에서 새로 번역돼 나왔다. 『한서』는 사마천의 『사기』와 함께 대표적인 고대 중국 역사서지만 국내 번역본은 많지 않았다. 워낙 방대한 분량이 가장 큰 이유일 텐데, 빈한했던 조선 후기 문장가 이덕무가 이불 위에 『한서』 책들을 주욱 펼쳐 덮어 겨울 추위를 이겨냈을 정도다. 80만자나 되는데 그중 50만자가 다양한 인물들의 전기인 〈열전〉이다. 번역본 역시 목침보다 두꺼운 게 3권이다.   기획부터 책이 나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중국에 거주하는 서지학자 신경란씨가 현대적 글맛을 살리기 위해 고대문학과 고대사를 전공한 자녀 2명과 함께 번역했다. 반고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집필을 시작했고 여동생 반소가 완결을 했듯, 이번 번역 역시 한 집안의 ‘집단지성’으로 이뤄진 셈이다.   반고는 당초 『사기 후전』을 집필하다가 ‘나라의 역사를 개인이 마음대로 서술한다’는 죄목으로 투옥됐다. 그러나 반고의 능력을 알아본 황제에 의해 집필을 계속하게 된다. 그 결과물이 중국 최초의 국정교과서인 『한서』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2021.05.08 00:21

  • [선데이 칼럼] 역사 대신 신화에 집착하는 정부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소설가 이병주가 대하소설 『산하』의 서문으로 쓴 게 딱 이 한마디였다.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이지만, 요즘처럼 이 말을 다시 생각게 하는 때도 많지 않을 듯하다. 이 정부가 약속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라는 신화의 끝이 과연 어디인지 답이 나오지 않는 까닭이다.   이병주는 신화에 더 관심이 있었다. 장석주 시인의 평가대로 “그는 작가란 햇빛에 바래진 역사를 새로 쓰는 복원자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사란 승자들의 기록인 만큼 결과만 따지게 되지만, 작가로서 그는 무명의 패배자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결과 아닌 동기에 달빛이라도 비추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게 일반적일진대, 이 정부는 좀 이상하다. 승리자이면서도 역사 대신 신화를 추구해왔다. 승리의 첫날부터 자기 역사를 써내려갈 생각보다, 과거 승리자들의 역사를 부정하는 데 몰두했다. 뿌리 깊은 피해의식의 발로인지 몰라도 과거 패배자들의 젖은 몸을 달빛에 쬐어 말리는 데 급급했다.   이 정부는 그렇게 임기의 절반을 이른바 ‘적폐 청산’으로 다 보내고, 나머지 기간에는 스스로 적폐가 되어갔다. 적폐 청산이란 폐단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나부터 안 하면 절로 이뤄지는 것인데, 음침한 달빛 아래서는 그런 진리가 보일 리 없었던 거다.   이들이 남길 만한 역사가 하나도 없는 이유도 다른 게 아니다. 뭔가를 해보려면 밝은 햇빛 속으로 나와 당당하게 겨뤄야 할 텐데, 잘못을 가려주는 어둠 속에서 무오류만 외치며 상대를 타도 대상으로 대하고 있으니 이룰 게 없고 이룬 것도 없는 것이다.   선데이칼럼 5/1 남은 1년 역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게 더 안타깝다. 지방선거의 패배로 뭔가 깨닫길 바랐지만, 신화의 자력은 너무도 강력했다. 미래를 걱정하는 합리적인 목소리들은 여전히 그늘 밑에서 음험한 입을 놀리는 자들의 목소리에 묻히고 만다. 대통령을 위해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며 낯 뜨겁게 구애하던 인물(그것도 국민대표인 국회의원이)을 대통령 대변인으로 삼은 건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병든 신화는 계속된다. 여당의 원내대표라는 사람이 순국선열과 성추행 피해자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불순한 의도 말고는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다. 순국선열과 국민, 피해자를 한꺼번에 불러놓고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면 뭘 사과한다는 건지 어찌 알겠나. 게다가 성추행 피해자라고 못 박지도 않는다. ‘피해 호소인’으로 넘어가려던 사고체계에서 여전히 한 발짝도 걸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청와대가 신설한 방역기획관 자리에 굳이 백신 늦장 도입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을 임명한 것도 비정상이다. 음모론 대가가 진행하는 대표적인 편파방송에 수십 차례나 출연해 백신 도입을 서두를 필요 없다고 열변을 토했던 전문가다. 그 결과는 누구나 안다. 방역 모범국이던 우리나라는 외신으로부터 ‘백신 굼벵이’라고 조롱받는 처지가 됐다. 전체 국민 접종률이 한 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해 대상 목표 대비 접종률만 발표해야 하는 질병관리청이 딱할 뿐이다.   이런 인사를 하는 대통령이니 방역수칙을 어기고 퇴임 참모들과 5인 술판을 벌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올해 집단면역은 사실상 물 건너가고, 사회적 거리두기 연장으로 국민 고통이 배가되는 상황에서 방역수칙 위반자에 대한 무관용을 외치던 대통령이었지만 말이다. 5인 회식은 안 되고 5인 만찬은 가능하다고 변명해야 하는 중수본만 모양이 빠졌을 따름이다.   형사 피의자가 검찰총장 후보자가 되고, 법무장관이 검찰총장 자격으로 “대통령 국정철학과의 상관성”을 공공연히 피력하는 것도 이들의 신화 속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북한이 서해에서 해안포 사격을 해도,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의 총격을 가해도 “절제된 방향으로 시행된 사소한 위반”일 뿐인 외무장관도 그들의 신화를 생각하면 분노할 일도 아니다. 사법부를 정치권 눈치나 보는 집단으로 전락시켜놓고 직을 걸 만한 일은 아니라는 대법원장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모습들이 모두 자기들만의 신화에만 빠져있는 까닭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는 『문명 이야기』에서 “신화는 무능력한 남편들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신화들이 하나같이 악의 뿌리로 여자를 지목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이 정부의 신화는 무능력한 좌파들의 작품이라고. 우파를 그야말로 악의 뿌리로 여기니 말이다.   이 말도 덧붙여야 하겠다. 이제 달빛 물든 신화 밖으로 걸어 나오라고. 그것이 옳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햇빛 가득한 양지에서 내 잘못된 부분을 살펴보라고. 남 탓하지 말고 내 실력 키워서 당당히 역사를 만들어가라고. 그러려면 우파를 악의 뿌리가 아닌, 내 부족함을 채워줄 동반자라고 여겨야 한다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능과 오만이 이 나라 국민이 원하는 모습은 아니라고. 그것을 다시 고집한다면 이번엔 국민이 그냥 넘기지 않을 거라고.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05.01 00:30

  •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초선의원들의 반성이 공허한 이유

     ━  선거 때면 나오는 데자뷔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시 한 줄 읽고 무릎을 쳤다. 최영미 시인이 조선일보에 해설한 신동엽 시인의 유고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였다. 최 시인이 썼듯, 4월 혁명을 온몸으로 증언했던 신동엽이다. 조선일보엔 지면관계상 일부만 소개됐지만, 우리는 전문을 다 감상해보자. 4월의 시인 신동엽 아닌가. 이 좋은 계절에 이훈범 글 길게 읽는 것보다 가치가 있을 터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아침 저녁/ 네 마음 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마음 조아리며/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서럽게/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쇠항아리 머리에 진 사람들   더불어민주당 초선의원들이 9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궐선거 패배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1969년 쓴 시인데 조금도 퇴색하거나 줄지 않은 울림이 있다. 어쩌면 세월의 더께에도 배우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의미가 더욱 선명해지고 커졌는지도 모르겠다. 머리에 쇠항아리를 지고 먹구름만 바라보며 하늘을 봤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여전하니 말이다.   보궐선거가 끝나자 여야에서 초선의원들의 성명이 잇따라 나왔다. 이긴 쪽은 감사와 함께 자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진 쪽은 반성과 함께 달라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하지만 그뿐, 감동은 없었다. 이긴 쪽에선 합당과 복당을 놓고 벌어지는 기싸움에 묻혔고, 진 쪽에선 패배 책임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항의 폭탄 세례를 받았다.   우리네 정치·정당 문화에서 초선의원들의 입지가 넓지 않은 건 사실이다. 충원 과정에서부터 운명적이다. 정당들이 교육을 통한 정치 엘리트 육성 기능을 저버리고, 당선 가능성이 높은 저명인사나 유권자에게 감동을 주는 사연을 가진 인물들로 손쉽게 공천을 하는 까닭이다. 여전한 계파정치에서 초선의원이 자신을 공천해준 계파 보스의 뜻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정치 훈련이 되지 않은 탓에 스스로 좌표 설정을 하지 못하고 지도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다니기만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초선의원들이 지도부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 선언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없진 않다. 하지만 행동과 함께 하지 않는 말은 공허할 뿐이다. 국회의원이 된지 고작 1년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랑스러운 말도 아니다. 초선의원들의 지난 1년은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었을 게 분명한 까닭이다. 부끄러운 줄 몰랐다거나, 더 부끄러운 시간이 있었다면 국민의 대표로서 자격미달이니 사퇴하는 게 낫다.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 지난해 4월 15일 이후 지난 보궐선거 전까지 이 나라는 의회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180석으로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여당은 기업규제 3법, 임대차 3법, 부동산 3법, 공수처법 등을 마구잡이로 통과시켰다. 국회법에 규정된 소위원회 법안 심사, 축조 심사, 찬반 토론 등도 없었다. 소수야당의 최후 보루였던 법사위원장 등 17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했으니 거칠 게 없었다. 상임위에 일방상정하고 표결처리를 밀어붙였다.   입법독재에 무저항 편승   국회 인사청문회 역시 그저 거쳐야 할 요식행위로 만들어 버렸다. 야당의 반대는 귓등으로 흘리고, 야당 동의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 정권 들어 야당 동의나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된 장관급 인사가 29명에 달한다. 2000년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입법독재” “의회민주주의의 조종(弔鐘)” “다수결의 횡포”… 전문가들이 백 번 외쳐도 들은 척도 안했다. 윤평중 교수의 분석이 냉철하다. “정치공학적으로 여러 가지를 계산했을 텐데, 어차피 욕을 먹을 바에야 숙원 프로젝트를 다하겠다는 오판.”   그는 오늘의 상황 마저 정확히 예견했었다. “이후 어떻게 상황이 진행될지 명약관화하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몰락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과거 정권이 어떻게 저물었는지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해 공수처 후속법이 통과됐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윤 교수는 “나라 전체로 볼 때 암울한 시나리오”라고까지 경고했다. 그때 우리의 더불어민주당 초선의원들은 뭐했나. 귀는 꽉 막고 입은 꾹 닫은 채 그저 ‘당론’이라 포장된 지도부 지시에 순종하지 않았던가. 쇠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먹구름을 쳐다보며 맑은 하늘이라 애써 믿지 않았나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당 이름으로 반성한다고 하니, 유권자들이 비웃고 열성 지지자들이 분노하는 것이다. 유권자에겐 위선이요, 지지자들에겐 배신인 것이다. 그들은 입장문에서 “초선의원들로서 충분히 소신 있는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경청하겠다”고 썼다. 말꼬리를 잡자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경청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고 뭔가.   ‘경청’이 아니라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당의 잘못이 아니라, 선배 의원들의 잘못이 아니라, 자기들의 잘못을 하나하나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같은 초선인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그들의 성명을 지지하면서도 “사과를 주도한 민주당 초선의원 상당수는 지난 1년 누구보다도 구태스러운 정치 행보로 진영논리에 매몰된 모습을 보였다”고 씁쓸해한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1년 전의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과연 초심이란 게 있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행동하지 않았나 말이다. 그런데도 통렬한 자기 고백과 머리를 땅에 찧는 사과 없이 “당 혁신의 주체가 되겠다”고 한들 누가 믿어주겠나.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권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보아온 데자뷔일 뿐이다. 2018년 자유한국당의 지방선거 참패 뒤에도 초선의원들이 나섰다. 그때도 “당 개혁이나 혁신에 초선들이 침묵하고 뒤로 빠졌던 점에 국민에 죄송하다”고 말했었다.   이에 앞서 초선의원 5명이 좀 더 강경한 발언을 한 것도 지금 더불어민주당의 이른바 ‘초선 5적’ 성명서와 유사하다. 그때 5명의 초선들은 중진의원들을 향해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정계 은퇴와 당 일선에서 빠질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까지 발표했었다.   당과 나는 다르다?   하지만 공허하긴 마찬가지였다. 친박과 비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의 집안싸움으로 유권자들한테 외면받았으면서도, 초선의원 대다수가 친박 프레임으로 당선됐기에 계파 문제를 청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그러니 달라질 리가 없고 달라질 수도 없었다. 보궐선거 후 국민의힘 초선의원들이 낸 성명서는 구구절절 옳았지만 들을 소리라곤 “우리 당이 잘해서 거둔 승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란 말밖에 없다. 이후 줄줄이 늘어놓은 각오들은 우리 당이 이렇게 형편없지만 나는 다르다는 변명과 다름 아니다. 내가 우리 당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과는 단 한줄도 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변화와 혁신의 주체가 되겠다”니 웃지 않을 사람이 있겠나 말이다. 역시 가소로울 뿐이다.   그들이 초선의원으로서 아무 것도 안 하는 동안 그들의 당은 당이 아니었다. 명색이 제1야당인데 존재감 제로였다. 당 밖의 인물들이 현 정부의 폭정에 항거하는 동안 그 당은 그들을 지원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것도 혹시나 주도권을 빼앗길까 소극적 지원으로 그쳤다.   보궐선거의 승리도 그들과 합쳐지기를 바라는 중도 유권자 덕이었다. 결과만 놓고 자만한다면, 또다시 쇠항아리 머리에 쓰고 먹구름 바라보려 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신동엽 시인 말처럼 마음 속 구름을 닦고 쇠항아리를 찢어야 한다. 그래야 맑은 하늘이 비로소 보인다. 그래야 국민 무서운 줄(경외) 알고, 국민의 아픔(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마찬가지다.   그 작업은 지난 1년 동안 초선의원으로서 내가 해야 했을 일과 내가 못한 일을 냉정하게 짚어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 그때는 조국이 문제가 안 됐는데 지금은 문제가 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때도 문제가 됐는데 말을 못한 거였다면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그것부터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론 그런 문제에 대해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자신이 서지 않는다면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야당의 경우라고 다를 게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으려고 뭘 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당론과 소신, 국익, 지역구민 의견(비례라면 대표하는 직군의 의견. 아,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중 무엇을 우선했는지 냉정히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당론을 따랐거나 아무 생각 없었다면 그것부터 사과해야 옳다. 그리고 앞으로 소신이나 국익에 충실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자신이 없으면 물러나는 게 좋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동엽 시인이 또 다른 시로 명령하지 않았던가. “껍데기는 가라!”   루쉰(魯迅)은 말했다. “황제와 대신들이 우민정책을 취하면 백성에게도 우군(愚君)정책이 있다.” 어리석은 지도자에 대처하는 태도인데, 전임 대통령들이 어떻게 됐는지 보면 설명이 필요 없을 터다. 국회의원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 백성들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존중하지만, 그 존중의 유효기간이 꽁치 통조림만큼 길지는 않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1.04.15 00:45

  • [선데이 칼럼] 누가누가 더 달라지나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번 보궐선거엔 강력한 신스틸러가 있었다. 주인공인 승자조차 그만한 아우라는 없었다. 압도적 표차였어도 그랬다. 어차피 야당이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선거였다. 그 막대기를 여당이 꺾었더라면 차라리 주연상을 탈 터였다.   신스틸러는 선관위였다. 잠깐씩 등장했어도 그때마다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었다. 선거 현수막에 ‘내로남불’ ‘무능’ ‘위선’이라는 단어 사용을 금했다. 누구나 특정 정당을 떠올릴 수 있는 단어란 이유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게 더불어민주당이라는 걸 다 안다는 거였다.   여기서 사실상 선거는 끝났다. 현 정권이 무능하고 위선적인 내로남불 정권이란 걸 선관위가 공식 확인했는데 또 뭐가 필요하겠나. 유권자 눈에 야당이 성에 차지 않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 철학자 레몽 아롱이 설파했듯, “선택은 늘 혐오스러운 것과 좀 더 나은 것 사이에서 이뤄지는” 까닭이었다. 선택이란 결코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이 아닌 것”이다.   집권 여당은 그 혐오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극복할 생각도 없었다. 기껏 생각해낸 구호가 이랬다. “투기 못 막았다고 투기꾼 찍고, 도둑 못 잡았다고 도둑놈을 뽑을 수 없다.” 유권자 눈엔 자기들도 투기꾼이요 도둑놈일 뿐인데, 결국 자기들을 찍지 말라고 한 거였다. 그걸 또 좋다고 빅마우스들이 퍼 나르기 바빴다.   현 정권이 내년 대선 때까지도 결코 달라지지 않을 거라 믿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아직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니 달라지려야 달라질 수가 없다. 선거 막판 열세를 뒤집어보겠다고 “국민에게 송구하다” 머리를 조아렸지만 뭘 어떻게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한 게 없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패배를 언론 탓 검찰 탓으로 돌리는 태도가 이미 예견돼 있었다.   선데이 칼럼 4/10 이 정부의 실세라는 한 인물은 선거운동이 한창일 때 “박원순이 뭘 그리 나쁜가”라고 난데없이 외쳐 자기편 선수조차 경악케 했다. 놀라게 한 사람이나 놀란 사람이나 그게 본심이었을 터다.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윤리란 한 공동체가 가진 편견의 종합”이라고 말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기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윤리의 상대성을 일컬은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조차 머쓱할 정도로 이들의 윤리는 너무도 편리하게 상대적이다.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내 편이냐 네 편이냐에 달렸다. 같은 시대 같은 상황에서도 내 편은 옳고 네 편은 그르다.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난 사안을 틈날 때마다 재조사 운운하는 게 그래서다. 그러다 공연히 뇌물 수수 사실만 다시 한번 상기시킬 뿐이지만 기운이 날 때마다 또다시 고개를 쳐들 것이다. ‘피의 사실 공표’가 검찰의 나쁜 버릇임은 분명한데, 정권에 불리한 수사 때만 문제를 삼는 것 또한 그래서다. 이른바 적폐 수사 때는 오히려 방조, 조장하던 걸 누구나 느꼈는데 말이다.   공수처장이 우리 편 피의자의 면담 요청에 자신의 관용차량으로 황제처럼 모시는 것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검찰 개혁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무리수를 써가며 통과시키더니, 일도 하기 전에 처장이 수사대상이 되고 조직은 ‘정권 비리 수호처’라는 오명을 썼다. 우리의 신스틸러 선관위가 선거 당일까지 공정성 논란을 일으키다 줄소송을 우려해 직원배상책임 보험에 가입한다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들린다.   이런 사람들이 선거에 졌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는 만무하다. 지도부가 사퇴하고 비대위를 구성하면 무엇하랴. 진정으로 달라지려면 지난 4년의 존재 가치를 모조리 부정해야 하는데 어찌 가능하겠나 말이다.   더 분명한 것은 달라지지 않을 게 이들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국민의힘 역시 크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데 나는 건다. 내 실력보다 상대 실수로 승리하는 게 대부분 우리네 선거 공식이며(이번에는 더욱), 승자들이 결과에 취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오는 것도 늘 봐오던 데자뷔였다. 대한민국 양대 도시 서울과 부산의 모든 구에서 압승한 것은 그동안의 설움을 자만으로 바꿔놓을 가능성을 키운다.   이들에게 자축보다 급한 건 강력한 당 밖 대선 후보들과 순조로운 통합을 이뤄내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 볼품없는 기득권을 내려놓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면 개표상황실의 당선자 옆자리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고 선거를 도운 인물이 앉아야 했다. 시정(市政)을 공동으로 한다는 말까지 않았나 말이다. 초선의원들도 개혁 성명을 발표했지만 울림이 없다. 개혁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말보다는 당의 변화와 쇄신에 밀알이 되려는 의지를 행동으로 먼저 보였어야 했다.   극단적인 무신론자들도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면 세상 모든 신에 기도하는 법이다. 우리네 정치권이 그렇다고 뭐라 할 건 없지만, 한 번쯤은 자기보다는 남을 위해, 나라와 국민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달라질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것이 궁극적인 승리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알아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달라진 쪽이 내년 대선의 승자가 되리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2021.04.10 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