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 프로필 사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일보 국제부 데스크
중앙일보 뉴욕ㆍ런던ㆍ브뤼셀 특파원
뉴욕 유엔본부 유엔기자협회(UNCA) 부회장
외교부 정책자문ㆍ자체평가 위원

응원
0

기자에게 보내는 응원은 하루 1번 가능합니다.

(0시 기준)

구독
-
  • [남정호의 시시각각]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은 안 된다

    남정호 칼럼니스트 한국이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몰렸다.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해 달라는 미국 주도의 나토와 그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러시아 사이에 끼인 것이다. 이런 와중에 최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주는 바람에 부족해진 포탄을 한국에서 사겠다고 해 상황이 복잡해졌다. 미국은 지난해 말 155㎜ 자주포용 포탄 재고가 줄어들자 한국에서 10만 발을 사들여 부족분을 채웠다. 그러다 최근 다시 구매를 요청했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살상용 무기는 지원해선 안 되며, 미국에 포탄을 팔더라도 우크라이나 우회수출  금지란 조건을 달아야 한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무기 지원이 명분과 실리 양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까닭이다.   명분부터 보자. 최근 방한한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달 30일 한 세미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의 승전을 도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항구적 평화를 위한 여건 마련의 유일한 길은 군사 지원"이라고. 영웅으로 떠오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개전 1주년인 지난 24일 "우리는 모두를 물리칠 것"이라며 항전 의지를 다졌다. 여기에 미국을 비롯한 영국·독일·프랑스 등 나토 회원국들이 공격용 무기 지원에 나섰다. 이쯤 되면 종전은커녕 끝 모를 장기전이 될 게 분명하다.    "전쟁은 늙은이들이 일으키지만 싸우고 죽는 것은 젊은이다"(허버트 후버 전 미국 대통령).  젊은 아들을 가진 우크라이나 어머니에게 젤렌스키의 항전 연설은 어떻게 들렸을까. 이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군은 10만~15만 명씩의 사상자를 냈다. 민간인 사상자도 2만여 명에 달한다. 이런 비극을 지속시킬 무기 지원이 과연 옳은 일인가. 지금 절실한 건 종전을 위한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이다. 그런데도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20일 보란 듯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전격 방문해 5억 달러의 추가 지원을 약속했다. 전쟁을 끝내기는커녕 부추기는 꼴이다.  지난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전격 방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지원을 재확인하며 무기 지원 문제 등을 논의했다. EPA=연합뉴스  이번 전쟁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일어난 게 맞다. 하지만 그 근원을 따지면 미국도 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통독이 추진되던 1990년 미국은 러시아 측에 "나토를 1인치도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독일 통일을 이뤄냈다. 그랬던 미국이 과거의 소련 연방국이자 러시아 코밑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수용하려 했으니 러시아가 가만 있을 리 없다. 이 때문에 세계 최고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 미 시카고대 교수는 오래전부터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추진되면 러시아가 침공할 것이며 여기에는 미국의 책임도 크다"고 역설해 왔던 것이다.   실리적으로도 무기 지원은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한국이 무기를 보내면 무얼 얻을까. 한·미 동맹이 강화되고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참여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한다. 하지만 제3국의 일로 한·미 관계에 결정적 변화가 있을까. 또 재건 사업을 한국이 독차지할 리 만무하다. 반면에 무기 수출로 러시아와 척을 지면 265억 달러(약 34조여원)에 달하는 한·러 무역이 결정적 타격을 입을 게 뻔하다. 또 주변 4강 중 한반도 통일을 바라는 나라가 러시아다. 중국 외에 남북한 간 중재를 해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모든 면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은 국익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비정하게 들리겠지만 지정학적으로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반도 안보와는 별 상관없는 머나먼 곳의 일이다. 지난달 말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가 한 모임에서 "(일본이) 이렇게 우크라이나에 힘을 쏟아도 괜찮은가"라며 "러시아가 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한 데에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 미국으로 포탄을 보내는 것이니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 영락없는 '눈 가리고 아웅'이다. 러시아가 바보인가. 우크라이나를 도울 길은 지뢰 제거 등 인도적 방법도 많다.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방조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남정호 칼럼니스트

    2023.02.28 01:00

  • "안보 문제가 핵심, 안보리 의제 다각 수렴할 것"

    곽영훈 신임 유엔한국협회 회장 인터뷰 곽영훈 신임 유엔한국협회 회장은 지난 15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안보리 진출을 돕겠다"고 밝혔다. 장진영 기자 "저는 지난 10여년 동안 이런 회장 자리를 맡아 달라고 요청해도 부응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엔 수용하게 됐습니다"  유엔한국협회를 새로 이끌게 된 곽영훈 신임 회장은 21일 취임을 앞두고 지난 15일 이렇게 털어놨다. 곽 회장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정책학과 교육학을 공부하고 동국대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딴 특이한 경력을 쌓아왔다.   현재 '사람과 환경그룹' 회장인 그는 다양한 경력을 살려 1970년대부터 한강 개발, 인천공항 건립 등 굵직한 국가건설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주도해 왔다. 유엔과의 인연도 남달라 1970년 이후 유엔개발계획(UNDP)의 시니어 컨설턴트로도 오랫동안 활동했다. 이처럼 창의적이고 열성적인 그가 유엔한국협회를 맡게 돼 주변의 기대가 크다. 특히 곽 회장은 한국의 유엔 안보리 진출을 다양한 방법으로 돕겠다는 뜻을 밝혀 눈길을 끈다.   그가 구상 중인 방식은 노르웨이 모델이다. 곽 회장은 "노르웨이의 유엔협회는 이 나라의 비상임이사국 도전을 앞두고 당선 후 안보리 의장국을 맡으면 어떤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인지 의견 수렴을 주도했다"며 "이런 내용을 선거운동 때 적절하게 사용해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노르웨이 유엔협회는 관련 전문가들을 상대로 3~4차례 원탁회의를 열었다. 이를 통해 평화 외교, 여성 참여 확대, 그리고 전시 민간인 보호와 같은 주제를 도출해 안보리 진출 후 이들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논의되도록 힘썼다는 것이다.    곽 회장은 이밖에 "한국은 안보상 국제 문제가 몹시 중요한 나라"라며 "우리 젊은이들에게 세계적인 현안을 어떻게 보고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줄 수 있는 포럼을 적극적으로 운영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유엔한국협회는 유엔과 국민을 잇는 다리가 돼 유엔의 이념을 확산, 고취하고 국제평화 유지와 세계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단체다. 전직 외교관과 학자 등 유엔 관련 전문가 100여 명으로 구성됐다. 매년 모의 유엔회의와 각종 세미나를 주관하며 평화와 번영의 이념을 전파하고 있다.  관련기사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유엔 안보리 진출 임박… 중추국 외교에 날개 달자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02.23 00:52

  •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유엔 안보리 진출 임박… 중추국 외교에 날개 달자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출사표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북한 도발 대응 등 한·미 간 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박진 외교부 장관이 이달 초 미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박 장관이 먼저 달려간 곳은 수도인 워싱턴이 아니었다. 유엔 본부가 자리 잡은 뉴욕이었다. 요즘 외교부의 핵심 현안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행보였다.     유엔 안보리 구성 국가 지난달 1일 미국을 방문한 박진 외교부 장관은 뉴욕 유엔본부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 한국의 유엔 안보리 진출 등을 논의했다. 연합뉴스 박 장관은 이곳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을 면담하고 각국 유엔 주재 대사들을 상대로 한국의 안보리 진출 필요성을 설명하며 열띤 선거 운동을 벌였다. 임기 2년의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다섯 나라를 새로 선출하는 올 6월 선거까지는 앞으로 3개월 남짓. 본격적인 선거전을 앞두고 안보리 진출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 그리고 현 상황은 어떤지 등을 짚어본다.         지난해 5월 새로운 대북제재 결의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렸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모습. 대북제재 결의안은 표결에 부쳐졌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부결됐다. [유엔] 안보리 진출하면 영향력 커져       안보리는 국제사회의 안보와 평화를 관장하는 유엔 기구로 회원국들은 여기에서 결정된 사안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다. 사실상 유엔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셈이다. 안보리는 거부권을 쥔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등 5개 상임이사국과 그렇지 않은 비상임이사국 10개국, 총 15개국으로 구성된다.     비상임이사국의 임기는 2년으로 매년 전체 인원의 절반인 다섯 나라가 새로 선출된다. 올해 임기가 끝나는 국가는 알바니아·브라질·가봉·가나·UAE이고 일본·몰타·모잠비크·스위스·에콰도르는 내년까지다.     한국은 이미 1996~97년, 2013~14년 두 차례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을 지낸 바 있지만 2024~25년 임기를 위해 세 번째 도전에 나섰다. 도대체 왜 또 하려는 것일까. 시급성만 따져보면 더 급한 외교 현안은 적지 않다. 북한 비핵화를 비롯한 한·일관계 개선, 공급망 구축 등 안보와 경제적 번영에 직결된 문제가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현 외교 라인은 유엔 안보리 진출을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삼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지향하는 '글로벌 중추국가'(Global Pivot State)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이 긴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보리는 강제력이 있는 15개 이사국의 결의를 통해 국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실상 유엔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이런 기구의 멤버가 된다는 것 자체가 명예로운 일인 데다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게 되면 한국의 실질적 영향력도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은 경제 규모로는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이다. 군사력과 문화 수준 등을 고려한 종합적인 국력으로 따지면 세계 6위라는 US뉴스앤월드리포트의 최근 보도도 있었다. 유엔 기여금 규모에서도 세계 9위여서 보다 적극적으로 국제적 문제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고도 필요하다.       게다가 국제사회의 모든 현안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어 우리에게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에너지 및 식료품 가격 상승 등을 통해 우리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요즘 현실이 단적인 예다. 특히 안보리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대북 제재 결의 채택은 물론 이행 조사까지 담당해 우리로서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2014년 9월에 열린 유엔기후정상회에서 한국 출신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연설하고 있다. [POOL]   "한국만 다 하냐"는 시각도   한국은 현재 유엔의 5개 분류 지역 중 하나인 아시아·태평양 그룹의 단독 후보인지라 당선에 큰 무리가 없을 거라는 관측이 많다. 그럼에도 외교부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지난해 말 예상을 깨고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선거에서 떨어졌던 뼈아픈 경험 탓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안보리, 경제사회이사회, 그리고 인권이사회 등 유엔 3대 기구 선거에서 진 적이 없었다.   인권이사국 선거 패배는 외교부는 물론 정치권에도 큰 충격으로 작용했다. 당시 여당은 북한인권결의안 참여 거부와 같은 문재인 전 정권의 잘못된 정책으로 떨어졌다고 비난한 반면 야권은 현 정부의 외교 실패라고 공격해 책임 공방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외교부 측은 국제기구 투표에서도 적용되는 냉혹한 '주고받기' 논리가 한국에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 무려 14개의 국제기구 선거에 후보를 냈다. 자연히 "이번에 우리를 밀어주면 다음번엔 그쪽 후보에게 표를 주겠다"는 식의 작전에 쓸 실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국제기구의 이사국과 주요 직책을 한국 출신이 맡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다른 나라에도 기회를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커졌다고 한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 국제사회의 각종 선거에 출마, 당선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지난해 11월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폴란드의 국경도시 메디카에 도착한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모습. AP=연합뉴스 난민·여성·아동 보호에 주력   외교부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에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오는 6월에 치러질 선거는 5개 지역별로 유효 투표의 3분의 2 이상을 얻은 국가 중 득표순으로 당선된다.   외교부는 당선을 위해 한국이 아·태 지역의 유일한 후보임을 강조하면서 회원국들의 확실한 지지를 확보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박용민 다자외교조정관은 "국제적 위상에 맞게 최대한 많은 표를 얻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박 장관 자신도 각국 지인들에게 직접 연락을 하거나 편지를 써 큰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게 외교부 측 설명이다.     한편 한국은 과거 두 번의 비상임이사국 임기 동안 무력분쟁에 고통받는 난민 및 민간인 보호 문제에 앞장선 경험이 있다. 이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공개 토론을 주관해 이에 대한 안보리 의장 성명까지 끌어냈다. 이번에 당선되면 지속가능한 평화 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보호 대상을 난민에서 여성과 아동으로까지 넓히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아울러 기후변화와 사이버 범죄 등이 새로운 안보 이슈로 떠오른 만큼 이 문제도 안보리에서 다뤄질 수 있도록 앞장설 방침이다.     관련기사 "안보 문제가 핵심, 안보리 의제 다각 수렴할 것"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02.23 00:50

  • [남정호의 시시각각] 중국 디커플링, 일본서 배우자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국이 자국 여행객에 대한 국제적 방역이 강화되자 지난 10일 딱 두 나라를 찍어 단기비자 중단 보복에 나섰다. 한국과 일본이다. 일본은 지난 29일 풀렸지만,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일이 손잡고 대응하면 어떨까. 강제징용 논란 등으로 양국 관계가 바닥인 요즘 분위기로는 망상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1965년 관계 정상화 이후 양국은 협력의 세월이 반목의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양국 관계에 치명상을 입힌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전까지, 40여년 간은 대체로 밀고 끄는 사이였다. 실제로 1970년대 초 미국 닉슨 행정부가 유엔군사령부를 없애겠다고 해 한국에 비상이 걸린 적이 있다. 그러자 1973년 유엔 총회에서 일본 대표는 “일방적 유엔사 해체는 한반도 평화를 위협한다”고 역설하며 한국을 대변했다. 유엔 무대에서의 치열한 남·북 외교전 때 미국과 함께 핵심 지원국 노릇을 한 것도 일본이었다. 70년대 말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완전 철수를 주장할 때도 그랬다. 1977년 워싱턴에 간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는 “‘철수’ 대신 ‘감축’으로 가야 한다”고 카터를 설득했다. 일본 힘이 얼마나 컸는지 모르지만 결국 유엔사도 무사했고 철수 문제도 감축으로 마무리됐다. 이뿐 아니다. 미·중 데탕트 이후 한국 공산권 외교의 전초기지 중 하나가 일본이었다. 일본은 자국 내 공산국 공관을 소통 채널로 활용토록 했다. 중국이 한국과 일본에 대한 단기비자 발급을 중단한 지난 10일 서울 시내 중국비자신청서비스센터의 모습. 연합뉴스 안보 협력도 긴밀했다. 북한의 위협이 날로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자위대 육상막료장인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 대장과 야마시타 간리(山下元利) 방위청 장관을 잇달아 초청했다. 이들은 군부대를 시찰하고 양국 간 군사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야마시타는 훈장까지 받는다. 이를 더 발전시킨 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그의 재임 중 한·일 안보정책협의회가 신설되고 국방부-자위대 간 핫라인이 설치됐다. 한국 해군과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공동 해난구조훈련(SAREX)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인 1998년이었다. 수많은 갈등 속에서도 일본이 한국을 도운 건 물론 자국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필요할 땐 손을 잡았던 한·일 관계가 악화한 건 반일 감정을 자기 정치에 이용하려 한 정치인들의 탓이 크다. 지지도 만회를 위해 독도에 간 이명박 대통령이나 위안부 합의를 깬 문재인 대통령 모두 한·일 관계를 망쳤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문 대통령 시절인 2017년엔 아무리 한·일 갈등이 심해도 계속됐던 SAREX마저 중단됐다. 일본이 한국의 쿼드(QUAD·4개국안보협의체) 가입에 부정적인 것도 관계 악화와 무관치 않다.  요즘 적잖은 이들이 일본을 한물간 나라로 여긴다. 제품 경쟁력이 떨어지고 일본 문화의 인기도 시들해진 탓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은 배울 게 많은 나라다. 최근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일본 내 마법의 말'이란 글이 실렸다. "미국은 일본 정부로부터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위한 산업정책을 배우라"는 게 핵심 메시지였다. 일본 정부가 중국 의존이 심한 경제 체질을 바꾸기 위해 기술 개발을 독려하고 수출입 다변화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한국에 절실한 노하우 아닌가. 상황이 이런데도 일부 정치인은 반일 카드를 여전히 남용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한·미·일 연합훈련을 두고 "극단적인 친일 행위", "일본군의 한반도 진주가 생길 수 있다"고 비판한다. 그럼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인 김대중 대통령이 한·일 군사협력을 중시했던 사실에 대해선 뭐라 할 것인가. 일본 잘못을 잊자는 게 아니다. 과거에 함몰돼 국익 도모의 기회까지 차버리진 말자는 얘기다. 특히 앞으로 심해질 '차이나 불링'(China Bullying·중국의 괴롭힘)에 맞서 함께 대응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의 한·일 관계 개선 노력도 이런 각도에서 바라봐야 한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01.31 01:12

  •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거세질 '차이나 불링'…기술·다변화로 이길 수 있다

    중국의 경제적 괴롭힘 대응 전략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국의 코로나 폭발로 한국과 중국 간 입국 규제 전쟁에 불이 붙었다. 시진핑 정권은 윤석열 정부가 중국인 입국자에 대한 방역을 강화하자 최근 한국인에 대한 단기·일반 비자 발급에 이어 경유 비자 면제까지 중단했다. 특정 국가와 정치·외교적 갈등이 빚어질 경우 중국이 경제나 다른 분야를 통해 보복하는 행태를 '차이나 불링(China Bullying)'이라 한다. 중국의 이번 조치는 전형적인 차이나 불링이 아닐 수 없다.  차이나 불링의 사례는 적잖다. 각국의 대응도 다양했다. 어떤 나라는 바로 무릎을 꿇었지만, 정면 승부에 나섰던 경우도 많았다. 당장은 힘이 부쳐도 다변화 조치 등의 와신상담 끝에 압박에서 해방된 나라도 적잖았다. 각국의 대응 형태와 중국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례를 짚어본다.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백기·읍소 등 대응 다양 차이나 불링이 본격화된 때는 중국의 경제력이 막강해졌던 2000년대 후반이었다.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달라이 라마가 체류 중이던 폴란드를 방문해 면담하자 중국 정부는 에어버스 150대의 구매를 취소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프랑스는 2009년 티베트가 중국 영토라는 성명을 내고 관계 개선에 나선다. 이후 중국은 적어도 8번의 경제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2018년에 나온 포스코경영연구원 보고서는 차이나 불링에 대한 대응 방식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첫째는 '백기투항형'으로 2008년 프랑스 사례와 함께 2012년 영국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당시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중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달라이 라마를 접견했다. 그러자 중국은 고속철도, 원자력 발전 등과 관련된 80억 파운드 규모의 투자를 중단하겠고 으름장을 놨다. 영국은 처음엔 강경하게 나왔지만 다음 해 캐머런도 티베트는 중국의 영토라고 선언하며 꼬리를 내렸다. 지난 2012년 6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영국을 방문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예배에 참석했다.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반대했던 중국은 경제적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해 영국은 결국 ″티베트는 중국 영토″라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로이터  두 번째는 '읍소무마형'으로 불가피한 상황을 설명하며 중국 측 양해를 구하는 방식이다. 2016년 11월 몽골은 자국 내 많은 티베트 불교 신자를 의식해 달라이 라마를 초청했다. 중국이 이에 통관세를 부과하고 전기 공급을 차단하자 몽골은 2020년까지 그를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즉각 사과했다. 2016년 이후 사드 갈등 때 문재인 정부가 보인 태도 역시 읍소무마형이다. 중국은 사드 배치 후 한한령(限韓令)과 함께 한국 관광 금지 등의 보복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문 정부는 맞서기는커녕 사드 추가 배치 배제, MD 체제 불참,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라는 '3불 정책'을 밝히며 무마에 나섰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굴복 않는 나라 많아   세 번째 유형은 중국에 당당하게 맞서는 '정면대응형'이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영토 분쟁을 이어온 필리핀과 베트남이 여기에 해당한다. 필리핀은 2012년 4월 중국 어선이 분쟁 지역인 스카버러섬에서 조업하자 군함을 보내 단속했다. 중국은 관광 중단과 바나나 수입 금지로 보복에 나섰으나 필리핀은 굴하지 않고 영토 문제를 국제중재재판소로 가져가 이긴다. 베트남 역시 분쟁지역인 시사(파라셀) 군도에서 중국이 석유 탐사를 강행하자 함정을 파견, 양측이 충돌했다. 사태가 악화하면서 베트남 내에서는 격렬한 반중 시위가 일어나 중국 기업들이 피해를 보았다.  마지막 유형은 한국이 가장 주목해야 할 '와신상담형'이다. 시장 다각화와 신기술 개발 등으로 차이나 불링을 슬기롭게 극복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맞붙었던 2010년의 일본, 2016년 대만, 그리고 2018년 호주가 그런 케이스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말 발표한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뼈있는 대중 정책을 제시했다. '상호 존중'의 원칙 아래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윤 정부는 최근 강단 있는 대응으로 인기를 얻은 터라 중국에 대해 호락호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중국은 차이나 불링으로 맞대응할 공산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한 나라들의 전례를 분석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틀림없다. 중국과 일본이 영유권 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위치.   일본, 기술 개발로 대응 2010년 영유권 분쟁 지역이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주변에서 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을 일본 순시선이 나포했다. 즉각 중국은 일본에 몹시 중요한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다. 희토류는 각종 전자 제품의 핵심 원료여서 이것 없이는 못 만드는 물건이 수두룩했다. 일본은 일단 구속했던 중국인 선장을 풀어주고 사태를 무마했다. 하지만 이는 시간벌기용 전략이었다. 이후 일본은 90%에 육박했던 대중 희토류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호주·베트남·인도 등 수입선 다변화에 노력했다. 더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일본 기업들이 희토류 없는 제품 개발에 힘을 쏟았다는 사실이다. 희토류 없는 산업용 모터 및 사용량을 절반으로 줄인 자석 등이 이때 탄생했다. 결국 일본의 대중 희토류 의존도는 2009년 86%에서 2015년 55%로 줄었다.  지난 2016년 8월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헬멧과 방탄조끼를 착용한 채 연설하고 있다. 차이 총통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거부감을 나타내며 대만의 보다 독립적인 지위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대만은 중국 정부로부터 경제적 보복을 당했다. AP   대만의 관광객 대체 전략 차이나 불링의 대표적 전략 중 하나가 관광 중단이다. 웬만한 나라에선 중국인 여행객이 관광산업의 최대 고객이다. 이런 터라 중국은 걸핏하면 특정 국가를 관광 금지국으로 지정해 못 가게 한다. 2016년 새로 취임한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반대하며 독립을 강조하자 관광 금지가 내려졌다. 당시 전체 관광객의 40%를 차지했던 중국 본토인들이 발길을 끊자 대만 관광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대만은 항복하는 대신 관광객 다변화에 나섰다. 우선 한국·태국 등에 비자 면제 특혜를 주고 판촉 행사를 펴는 등 공격적인 유치 작전을 폈다. 특히 동남아 국가에 눈을 돌리는 '신남방정책'을 채택했다. 이 결과 중국 관광객은 16% 줄었지만 2016년 한해 전체 숫자는 전년보다 2.5%나 늘었다. 다변화 정책의 승리였다.    지난 2020년 12월 호주 서부 해안의 피싱보트항에서 한 어부가 거대한 바닷가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중국은 호주 정부가 코로나 진원지에 대한 국제적 조사를 주장하자 호주산 바닷가재 등 수산물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다. AFP=연합뉴스 긴 싸움 끝에 승리한 호주    가장 주목해야 할 사례는 2020년 시작된 호주에 대한 차이나 불링일 것이다. 중국의 보복 조치 직전, 호주의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8.8%에 달했다. 그럼에도 호주는 2010년대 중반부터 태평양 지역에서의 중국 패권주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 사태와 관련, 중국에 대한 국제적 조사를 요구해 시진핑 정권의 분노를 샀다. 이에 중국은 보리·와인·면화·목재·랍스터·구리 등 대중 수출 비중이 20%를 넘는 품목에 대한 금수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당시 중국은 발전용 수입 석탄의 50%를 호주에서 들여왔으나 이 역시 수입 중단했다. 언뜻 봐서는 호주가 결정적 타격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구도였다.  그러나 호주 정부는 수입선이 끊어진 랍스터 업자들에게 지원금을 주는 등 피해 최소화에 노력하며 중국의 보복에 굴하지 않았다. 호주에 대한 중국의 경제 보복과 관련,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두 가지다. 먼저 중국은 금수 조치로 자국의 피해가 클 것 같은 품목은 건드리지 않았다. 철광석이 바로 그런 품목으로 중국 전체 수입의 50%를 호주산이 차지했다. 호주산 철광석을 막으면 중국의 제철 회사는 물론 철을 써야 하는 다른 업체들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둘째, 호주산 석탄의 중국행은 막혔으나 이 때문에 새로운 판로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호주산 석탄의 공급을 끊으면서 수입선을 러시아와 인도네시아로 돌렸다. 그러자 그간 이들 나라에서 석탄을 구입해왔던 한국·일본·인도 등이 호주산을 찾게 됐다. 호주로서는 큰 피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호주에 대한 경제 제재가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중국은 다시 호주산 석탄을 수입하기로 했다고 지난 12일 보도됐다. 2년간의 경제 갈등에서 호주가 승리한 셈이다.   다변화와 기술개발이 비결  차이나 불링을 극복한 나라들에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 우선 일본의 경우 수입선 다변화와 함께 중국에 의존해 왔던 희토류가 아예 없거나 이를 대폭 줄인 제품 개발로 대응한 점이 눈에 띈다. 중국의 여행 금지로 어려움에 부닥쳤던 대만은 한국과 함께 남쪽으로도 눈을 돌려 동남아 관광객 모집에 성공했다. 또 수입 금지 당한 파인애플 등 농산물 분야의 새로운 판로를 개척했다. 최근 중국과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호주의 경우, 수출 다변화와 함께 어려움에 처한 수산업자 등을 정부가 나서 지원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 같았던 석탄의 경우 시장 메커니즘으로 예상보다 피해가 작았다. 아울러 중국이 수입 금지를 취할 경우 막대한 자국 손실이 우려되는 철광석은 그대로 놔뒀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01.19 00:46

  • [남정호의 시시각각] 욕먹는 윤석열 외교 전략이 답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용(中庸)의 정책은 늘 인기가 없다. 좌우 어디서 보든 화끈하지 않은 탓이다. 치우침 없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 독트린인 한국판 '인도·태평양 전략' 역시 보수·진보 모두에게 욕을 먹었다. 문제는 중국이었다. 지난달 28일 발표된 이 전략을 두고 한 보수 논객은 "국제 법규를 밥 먹듯이 어기는 중국이 한국의 위협임을 밝히기는커녕 전략적 파트너로 치켜세웠다"고 분개했다. 미국의 톤은 달랐다. 지난 2월 전략 보고서에서 "중국의 강압과 침략은 전 세계에 걸쳐 있으며 인·태 지역에서 가장 심하다"고 비난했다. 캐나다의 중국 공격도 노골적이었다. 반면에 진보 쪽은 중국을 겨냥한 인·태 전략에 한국이 왜 끼느냐고 공격한다.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한국은 최대 교역국인 중국을 적대시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같은 전략을 두고 보수는 중국을 제대로 못 때렸다고, 진보는 쓸데없이 적으로 삼는다고 불만이다.   지난달 28일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그러나 양측이 비판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번 전략의 적절함에 대한 증거라고 필자는 본다. 종국적 지향점과 차디찬 현실을 두루 고려했기에 이런 균형 잡힌 전략이 나왔다고 믿는 까닭이다. 사실 이번 인·태 전략은 꽤 의외였다. 7차 북한 핵실험이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판에 무인기까지 휘젓고 다니는 요즘이다. 강철 같은 한·미 동맹이 절실한 때라 미국 편에 서서 일방적으로 중국을 때리는 독트린이 나올까 걱정이었다. 외교·안보 라인이 주로 미국통으로 채워진 터라 더욱 그랬다.     하지만 막상 나온 내용은 딴판이었다. 안보 측면이 강한 미 인·태 전략과는 달리 처음부터 이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이 강조됐다. 이어 자유·평화·번영이란 비전이 언급된 뒤 중국을 배려한 것이 분명한 포용성이 다뤄졌다. 전체적으로 중국을 의식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느 정권 못지않게 한·미 관계를 중시하는 현 정부에서 어떻게 이런 뜨뜻미지근한 전략이 나올 수 있는가. 궁금한 끝에 여기저기 알아보니 안개가 걷혔다. 우선 한·미 관계를 홀대한 듯한 인상은 착각임을 한 미국 전문가의 글에서 깨달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전략의 이름이었다.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이란 제목 자체가 윤 정부의 본심을 천명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전략적 모호성'이란 명분 아래 인·태 전략 참여를 꺼렸다. 반면에 윤 정부는 인·태 전략이란 이름의 독트린을 발표했으니 엄청난 변화다. 결국 필자는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셈이었다.   지난달 28일 박진 외교장관이 외교부에서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 설명회를 마친 뒤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고 한다. 초안을 만든 뒤 관계부처 회람을 거쳐 2안, 3안을 가다듬었다. 또 미·일·캐나다·EU 등의 인·태 전략도 꼼꼼히 참조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드 배치를 이유로 여전히 한국 기업을 홀대하는 중국을 후련하게 비판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나. 우선 현 정부는 국제관계, 특히 대북 문제와 관련된 중국의 중요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둘째, 한·중 경제 관계도 내칠 수 없는 대목이다. 당국은 전략 발표 전, 200여 개 주요 품목의 상호 의존도를 점검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당장 중국과의 관계를 끊기에는 한국 기업이 너무 취약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결국 대중 의존도를 줄이고 다변화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는 후문이다. 더불어 행간을 읽어 보면 중국에 대한 경고도 담겨 있다. '상호 존중'이 핵심 개념으로 중국이 법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한국도 가만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외교의 전설로 통하는 헨리 키신저. 키신저는 외교의 최고 덕목으로 중용과 융통성을 꼽는다. 한쪽에 치우치고 경직된 외교정책에 집착하면 상황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충고다. 누군들 화끈한 걸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실리를 챙기기 위해 중용을 잃지 않고, 때론 미지근하게 보이는 전략을 내미는 것도 진정한 용기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01.03 00:48

  •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북침설 등 6·25 낭설 여전… 해외 사료 수집 절실하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닻 올린 한국전쟁 글로벌 아카이브 사업  2023년 새해는 참혹했던 한국전의 포성을 멎게 했던 정전협정 70주년. 동족 간의 골육상쟁은 멈췄지만, 한반도의 허리는 여전히 잘려져 있고 형식적으로는 지금도 전쟁 상태다. 더 큰 문제는 북침설이 공공연히 제기될 정도로 진영 논리에 따라 한국전이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역사적 수수께끼도 수북하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정치권과 학계를 중심으로 한국전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글로벌 아카이브 구축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관련 자료를 집대성해 전쟁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하자는 거다. 정전 70주년을 앞두고 뜻깊은 글로벌 아카이브 구축 사업의 배경과 현황을 짚어본다.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역사의 불행 되풀이 말아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기소를 둘러싸고 여야 간 대치가 치열했던 지난 9월 13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는 눈길을 끄는 토론회가 열렸다.  '6·25전쟁 글로벌 아카이브 구축 성공 전략'이란 주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행사에 참석한 5선 중진 설훈 민주당 의원과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 의장을 비롯한 여야 의원 10여명 및 사학계 원로 등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다.  5선 중진 설훈 민주당 의원 연합뉴스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16개 참전국과 6개 의료지원국을 비롯, 세계 33개국과 남북한에 흩어져 있는 관련 문서와 참전용사들의 소장품 등 사료를 발굴해 한국전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자는 것이다. 당리당략을 뛰어넘는 숭고한 일이기에 여야의 중진 및 뜻있는 의원들이 뭉쳤다. 국회 내에 '6·25전쟁 글로벌기록유산 발굴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설 의원과 성 의장, 그리고 조광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맡았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 의장 뉴스1  이밖에 민주당 안규백·인재근·김한정·송옥주·김홍걸·양기대·정태호 의원과 국민의힘 김성원·정운천 의원, 그리고 무소속 양정숙 의원이 부위원장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번 사업은 한국전 아카이브 구축의 중요성을 인식한 설 의원의 주도로 시작됐다. 이후 사업의 중요성을 동감한 성 의장이 힘을 보태면서 추진력이 붙었다. 이 밖에 정운천 의원과 김두관 민주당 의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조광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김춘식 기자  설 의원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남긴 한국전과 같은 불행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전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이 있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관련 자료를 모아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성 의장도 "해방 후 한반도는 두 진영의 세계적 각축장이 됐으며 지금도 그 역사에 대한 평가가 진영 논리에 따라 왔다 갔다 한다"며 "한국전 아카이브 구축을 통해 우리의 역사가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고 공정하게 평가됨으로써 후대에 올바른 전쟁의 교훈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지난 9월 13일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625전쟁 글로벌 기록유산 발굴위원회' 출범을 기념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조평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  한국전은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내용과 미스터리가 너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유엔군 창설을 결의했던 1950년 7월 유엔 안보리 회의에 거부권을 가진 소련이 왜 불참했느냐는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미국의 개입을 유도해 중국을 참전시킴으로써 두 나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 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또 공산국이던 헝가리가 유엔군과 남한에 물자를 지원해줬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도적 차원에서 남쪽을 도왔을 가능성이 크지만 다른 속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함께 한국전 발발을 전후한 북한 내부 사정도 아직 밝혀야 할 부분이 많다. 특히 소련이 어떻게 북한군을 훈련하고 어떤 작전을 만들어줬는지도 규명돼야 할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당시 소련 군사고문단 단장인 니콜라이 바실리예프 중장이 본국 소련에 보낸 보고서가 결정적인 사료일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자료는 현재 러시아의 연방 대외정책문서보관소나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에서 잠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바실리예프는 북한군을 효율적으로 편성하고 훈련하는 한편 남침을 위한 준비를 지휘했다. 그는 공격 작전을 수립했을 뿐 아니라 막후에서 북한군을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6·25는 국제전, 사료는 태부족   이렇듯 한국전을 둘러싼 의문이 숱한데도 이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료는 빈약한 실정이다. 한국전은 남·북한군 외에 16개국으로 이뤄진 유엔군과 중공군, 소련군이 참여했던 진정한 의미의 국제전이다. 그뿐만 아니라 냉전이라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각국과 국제 관계에 깊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런 한국전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국내 및 해외 기관이 소장한 다양한 사료를 확보한 뒤 이를 토대로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었다. 국내 학계는 주로 남북한 사료에 의존해왔다. 그나마 1970년대 이후에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됐지만 미국 시각 중심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 유엔군 참전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자체적인 연구와 기념사업을 진행해왔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성과는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다. 노태우 정권 때인 1990년대 초 한·소 관계 정상화가 이뤄지면서 소련의 한국전 관련 문서가 국내에 전달됐다. 이를 통해 몰랐던 비화들이 속속 밝혀지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러시아 자료가 잠자고 있다.   1950년 겨울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된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의 저지선을 뚫고 탈출하는 미 해병대. 사진=위키피디아  한국전쟁 글로벌 아카이브가 구축되면 미국 자료 중심이라는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일변도의 연구가 갖는 문제는 한때 풍미했던 남침유도설 케이스를 통해 잘 드러난다. 미국의 한국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전 시카고대 교수는 1981년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남침유도설을 주장,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남침유도설은 결국 소련 옛 문서 연구를 통해 명백한 잘못임이 확인됐다. 입체적 연구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위원회 측은 전문 인력을 투입, 16개 참전국과 6개 의료지원국은 물론 러시아·중국 등 공산권 관련국과 중립국감독위원회 소속 국가 및  비공식 참여국(대만과 일본)까지 망라한 33개국과 남북한을 더해 전체 35개국의 자료를 수집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이 모을 자료는 해당 국가의 공문서와 공간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민간 분야에서 생산된 언론기사·사진·영상까지 모아 이를 데이터베이스화한다는 게 이번 사업의 목표다. 나아가 길게는 한국전 아카이브 센터를 만드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베트남전 센터 & 아카이브가 위치한 미국 텍사스테크대 도서관 전경. 사진=위키피디아   미국의 베트남 전쟁 아카이브    해외에는 특정 전쟁에 대한 아카이브가 존재한다. 실제로 미국 텍사스에는 ‘베트남 센터 & 아카이브’가 1989년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협력으로 설립됐다. 베트남전의 교훈을 후손들에게 물려준다는 게 설립 목적으로 센터는 관련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놓고 있다. 한국전과 관련한 기관도 있다. 미국 미주리주 인디펜던트시에 위치한 트루먼대통령도서관 산하 ‘한국전 자료 연구센터’가 그것으로 주로 미국 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별도의 한국전 글로벌 아카이브는 아직 없지만 만들어진다면 한국에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입지 조건이 여러모로 뛰어나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전 관련국과의 관계가 두루 좋다는 장점이 있다. 사드 배치 및 우크라이나전쟁 등으로 중국과 러시아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기는 했으나 미국 등과 비교해서는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어 주요한 문서 확보에 유리할 게 분명하다.   둘째, 언어 문제에서도 한국이 유리하다. 한국전을 입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영어는 물론 러시아·중국·프랑스어 등으로 된 1차 자료와 함께 남북한 문서를 해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해외 전문가들은 극히 제한돼 있다. 반면 국내의 경우 모국어인 한국어 외에 영어·불어·러시아어 등 다른 외국어에 능통한 자원이 많은 데다 서양 학자에 비해 중국어·일본어를 비교적 쉽게 배울 수 있어 보다 광범위한 연구가 가능하다. 요컨대 해외 자료까지 충실히 수집한 글로벌 아카이브를 국내에 설립하면 '한국전 연구를 하려면 한국에 가야 한다'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심을 수 있다. 이는 역사 분야 내 한국의 존재감을 한 단계 끌어올림으로써 국위 선양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12.15 00:50

  • [남정호의 시시각각] 중국 민주화, 백지시위로 동트나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며칠 전 서울 신촌의 한 대학에서 생각지 못한 걸 목격했다. 기둥에 붙은 반(反) 시진핑 벽보였다. '자유 중국(Free China)'이란 큼지막한 글씨 위에 "독재자가 아니라 우리의 리더를 우리가 선택하겠습니다" 등 시진핑 정권 치하에선 감히 언급할 수 없는 구호로 가득 찬 벽보였다. 살짝 표현이 어색한 게 중국 유학생이 붙인 듯했다. 지난 10월 중국 공산당 당대회 이틀 전, 베이징 중심부 쓰퉁차오(四通橋)에 걸렸던 반시진핑 현수막의 내용이란다. 중국 정부의 처벌이 두려웠을 텐데 무척 간절했던 모양이다. 요즘 중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백지 시위'가 우리 곁에 다가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지난달 27일 중국 베이징 량마차오에서 우루무치 화재 사망자를 추모하는 백지 시위가 열렸다. 로이터=연합뉴스  요즘 중국 전역은 팽팽한 긴장에 휩싸여 있다. 코로나 봉쇄로 촉발된 백지시위가 확산하는 가운데 개혁·개방의 상징인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까지 타계해 여차하면 반독재 운동이 터질 분위기다. 그간 중국에선 거물 정치인이 숨지면 민주화 운동이 불붙곤 했다. 중국의 민주화 운동을 일컫는 천안문(天安門) 사태의 경우 1976년 1차 때는 가장 존경받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 장례, 1989년 2차 때는 민주화의 상징인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장례를 계기로 발생했다. 게다가 오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다. 중국 인권운동가들은 이때 시위를 벌이곤 했다. 그러니 시진핑 정권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얼핏 보면 이번 백지시위는 유난스러운 코로나 봉쇄 정책 탓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런 인식에선 '위드 코로나 정책'으로 전환해 봉쇄를 풀면 문제가 풀릴 걸로 보일 것이다. 세계 제일의 안면 인식 기술을 갖춘 중국이라 시위자들을 쉽게 색출할 수 있어 시위가 곧 진압될 거라는 분석도 적잖다. 천안문 사태 때와는 달리 강력한 시위 지휘부가 없다는 점도 신속한 진압이 예상되는 이유다. 지난달 말 서울 신촌의 한 대학 캠퍼스에 중국의 코로나 봉쇄정책 등을 규탄하는 포스터가 붙었다. 남정호 기자  하지만 이런 시각은 도도한 역사적 흐름을 간과하고 있다. 이번 백지시위는 20여 년 전 중국을 세계 경제에 끌어들이기 위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킨 미국의 결단과 맥이 닿아 있다. 1990년 말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WTO에 중국이 들어가면 결국 민주화가 이뤄질 것으로 믿었다. 그는 1998년 중국 방문 직전, 이런 성명을 냈다. "장기적으로 세계가 중국을 끌어들일수록 이 나라에 더 많은 자유가 유입된다… 중국인들도 언론·출판·결사·신앙의 자유를 누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다." 경제 발전이 중산층 확대를 낳고 이들이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민주화가 이뤄진다는 '근대화 이론'에 기초한 낙관론이었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중국은 이런 기대와는 달랐다. 눈부신 성장은 이뤘지만 민주화는커녕 시진핑 정권이 들어선 이후 권위적 국가로 퇴행했다. 국제사회가 인권과 민주화 문제를 제기하면 시진핑 정권은 "중국의 발전 모델은 따로 있다"며 무시했다. 그럼에도 봉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데다 장쩌민의 장례와 국제 인권의 날까지 겹쳐 백지시위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지휘부가 없다고 하나 2010년대 초 '아랍의 봄' 때 목격했듯, 요즘은 주도 세력 없이도 얼마든지 반독재 시위가 이뤄지는 SNS 혁명의 시대다. 외국의 자유로운 공기를 느껴 본 중국인들도 부지기수다. 2000년 1000만 명이던 중국의 해외 관광객 수(연인원)는 코로나 발발 직전인 2019년에는 1억5500만 명에 달했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 문제에서 시진핑 정권은 진퇴양난이란 사실이다. 제로 코로나 정책을 버리면 의료시스템 마비로 200만 명 넘게 숨질 걸로 예상돼 쉽게 풀 수도 없다.  중국이 뿌리부터 변하면 안보에서 경제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화물연대 파업에서 월드컵까지 오만 중대사가 꼬리를 물지만 그럼에도 바다 건너 백지시위의 향방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12.06 01:10

  •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비장의 방패 전술핵…7차 북핵 실험 시 힘 받을 듯

    전술핵 재배치 논란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한·미 연합훈련을 구실로 북한이 최근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자 그 대책으로 거론되는 게 있다. 바로 전술핵 재배치다. 여권 중진들이 나서서 전술핵을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와대 안보라인에서도 신중히 검토 중이란 이야기도 들린다. 반면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극히 부정적이며 야권에서도 반대한다. 이 같은 논란을 계기로 전술핵이 무엇이며 도입 시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등을 짚어본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제한된 피해 주는 전술핵 전술핵이란 전투 현장 등에서 적군의 공격력을 줄이거나 특정 목표물을 파괴하는 등 제한된 피해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소형 핵무기를 뜻한다. 따라서 위력이 작고 이를 운반하는 미사일이나 포탄의 사거리도 짧은 게 일반적이다. 소형 핵탄두를 장착한 중력탄, 단거리 미사일, 포탄, 지뢰 또는 어뢰와 개인이 등에 메고 운반할 수 있는 핵 배낭이 여기에 해당한다. 현재 미군이 보유 중인 전술 핵무기는 B61 중력탄으로 0.3~170kt까지 파괴력을 조절할 수 있다. 한때 북한의 지하 방공호를 파괴하기 위해 미군이 전술핵을 벙커버스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반면 전략핵이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적국의 대도시 및 산업기지 등을 단숨에 날려버림으로써 전쟁 양상 자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핵무기다. 전략핵을 대규모로 보유한 미국·러시아·중국 등은 다른 대륙에 위치한 적국을 타격하기 위해 사거리 5500km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핵탄두를 실어 발사한다. 현재 미국의 주력 전략핵인 미니트맨3의 위력은 475kt으로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16kt)의 30배나 된다.   무기고에 보관 중인 전술핵 B61-12 중력탄의 모습. 현재 유럽의 5개 나토 회원국에 100여발이 분산배치돼 있다. 이밖에 미국 내에도 500여발이 존재하며 현재 개량 사업이 진행 중이다. 중앙일보 사진 자료 1991년 전술핵 철수 적잖은 인사들이 들여오자고 주장하는 전술핵은 과거 한국에도 상당 기간 존재했던 무기다. 미국은 한국전 이후 펼쳐진 냉전 시대 때 동서 진영 간 대립이 격화되자 1958년부터 전술핵을 들여왔다고 한다. 8인치 및 155mm 곡사포용 핵포탄과 서전트 및 랜스 지대지 미사일 등에 장착할 소형 핵탄두가 미군 부대에 보관돼 있었다. 북핵 문제가 본격화된 1990년대 이전까지 전술핵은 사실 북한을 겨냥했다기보다는 한반도 유사시 중국과 소련의 개입에 대비한 측면이 강했다. 한국 내 전술핵 규모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으나 1967년 950개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전술핵은 1987년 미국과 소련 간에 맺은 중·단거리 핵미사일 폐기조약을 계기로 1991년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철수 당시 한국엔 100개의 전술핵이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2S7M 말카 자주포. 전술핵 포탄을 쏘는 목적으로 개발됐다. 디펜스 블로그 전략핵보다 실용적 대북 억제력 강화 방안으로 전술핵 재도입이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여러모로 이점이 많은 까닭이다. 우선 전술핵의 위력은 전략핵보다 떨어지긴 해도 재래식 무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막대하다. 지금까지 개발된 가장 강력한 재래식 무기라는 러시아 열압력폭탄(ATBIP)의 폭발력도 44t에 불과하나 웬만한 전술핵은 이것의 수십 배, 수백 배에 이른다. 대북 억제력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이유다. 둘째, 전략핵은 엄청난 파괴력과 그 후유증으로 최후의 무기로 꼽힌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 같은 핵보유국을 향해 전략핵을 쓴다는 것은 완전한 상호 공멸을 의미하기에 사용 자체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긴급 상황이 아닌 한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반면 전술핵은 제한적 피해라는 특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사용이 어렵지 않다. 실용성 면에서 전략핵보다 낫다는 얘기다. 셋째, 심리적 효과가 크다. 특히 적이 핵을 보유하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핵으로 공격해 오더라도 똑같은 핵으로 응징할 수 있어 상대가 경거망동할 수 없을 거라는 인식 자체가 국민에 심리적 안도감을 준다. 이란이 어떻게든 핵을 개발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란의 가상 적국인 이스라엘은 1950년대에 핵무기 개발에 착수, 이미 200개 이상을 보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끝으로 재배치 지지자들은 전술핵을 들여오거나 도입하겠다고 선언하면 핵감축 협상 등을 통해 북핵을 없애거나 대폭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자발적인 핵 폐기 의지가 사라진 현 상황에서는 그나마 효과적인 해결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시각이다.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한반도 비핵화엔 걸림돌 전술핵 재배치에는 적잖은 단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궁극적 목표인 한반도 비핵화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전술핵을 들여온 상황에서 북한에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전술핵 재배치를 조건부로 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전술핵을 운용하되,북이 핵을 폐기하는 즉시 우리도 철수시킨다는 방침을 천명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북한이 핵을 폐기할 동기를 얻게 된다는 게 이들의 시각이다. 둘째, 전술핵이 생기면 핵전쟁 위험도 커질 수 있다. 휴전선 이남에 전술핵이 없으면 북한은 핵 대신 재래식 무기로 공격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도발 시 핵 보복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면 처음부터 핵을 동원, 남쪽의 전술핵을 철저히 파괴하려 할 게 틀림없다. 셋째, 한국에 미군 소유의 전술핵이 존재하면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과의 분쟁 발생 시 이를 주요 공격 목표로 삼을 게 뻔하다. 비록 전략핵만큼은 안 되지만 전술핵은 파괴력을 큰 폭으로 키울 수 있도록 설계돼 있어 여차하면 위협적인 대량살상무기로 변신하게 된다. 그러니 서해 바로 건너편에 배치된 미군 소유의 전술핵을 중국이 그냥 둘 리 만무하다.   2008년 당시 미 공군 유럽ㆍ아프리카 사령관인 로저 브래들리 공군 대장이 네덜란트의 볼켈 공군기지에서 열린 B61 전술 핵탄두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미 공군]   현 상황에선 실현 곤란 만약 윤석열 정부가 거세게 반발하는 야권과 진보세력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 전술핵 재배치를 추진한다면 과연 성사시킬 수 있을까. 현재로써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답 같다.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해줄 수 있는 미국의 현 바이든 행정부에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사실 핵 사용 및 확산 반대주의자다. 핵무기가 많아질수록, 배치 지역이 늘수록 핵 위험도 커진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핵 위험은 핵전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실수, 또는 컴퓨터의 오작동에 의한 핵미사일 발사, 핵무기 폭발사고에 따른 방사능 누출, 도난 또는 밀매를 통한 테러 단체로의 유출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취임 후 입장을 바꾸기는 했지만 대선 후보 시절 바이든은 "핵 공격에만 핵무기로 대응한다"는 원칙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미국 핵전략의 근간을 설명한 '2022년 핵태세검토보고서(NPR)'도 지난해에 이어 핵 전략 못지않게 핵 위험에 대한 내용이 비중 있게 실려있다. 이런 바이든이라 현 상황에서 전술핵 한국 재배치를 동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난달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전술핵 재배치론을 두고 "무책임" "위험" 운운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에서 전술핵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 "한국과 미국 조야의 여러 의견을 경청하고 따져보고 있다"며 재배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뉴스1 미 정치인도 전술핵 지지 그렇다면 북한의 위협이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전술핵 재배치는 불가능한 카드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무엇보다 한반도 상황이 급변하면 전술핵도 하나의 유력한 대책으로 검토될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전환을 끌어낼 만 한 상황 변화라면 북한의 7차 핵실험 또는 최신형 ICBM 실험 성공 등을 꼽을 수 있다. 미국 본토에 대한 북한 핵 위협이 크게 고조되면 바이든의 생각도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바이든 행정부는 여차하면 핵무기까지 동원하는 확장억제로 동맹국 한국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전면적 공격이라고 보기 애매한 '회색지대'에서의 도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도 있다. 2010년 천안함 격침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남쪽 보복 공격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자제시키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런 터라 북한군이 백령도를 기습 공격해 점령했을 경우 미국이 확장억제 차원에서 응징에 나서줄지는 여전히 미지수인 것이다. 따라서 적잖은 부작용에도 불구, 많은 전문가는 전술핵 재배치를 효과적인 대북 억제력 강화 방안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울러 거물 정치인이었던 고(故) 존 매케인, 코리 가드너 전 공화당 상원의원 등도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바 있다. 따라서 지금은 현실 가능성이 작더라도 앞으로의 상황 변화를 대비해 전술핵 재배치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일 것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11.10 00:34

  • [남정호의 시시각각] 미국 안보 공약이 못 미더운 까닭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달 18일 관훈토론회에서는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필립 골드버그 미국대사가 여권과 대통령실 일각에서 나오는 전술핵 재배치론을 겨냥, "무책임하고 위험한 일로 긴장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축한 것이다.  최근 북한이 불꽃놀이처럼 미사일을 쏴대자 많은 여권 중진이 전술핵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홍준표 대구시장과 유승민·조경태 등 전·현직 의원이 그들이다. 대통령실 안보라인에서도 전술핵 재배치와 핵공유 카드가 검토되는 분위기다. 윤석열 대통령마저 전술핵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 "한국과 미국 조야의 여러 의견을 경청하고 따져보고 있다"며 재배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렇듯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의 권부와 중진 정치인들이 진지하게 거론하는 방안을 동맹국 대사가 '무책임' '위험' 운운하며 깔아뭉갰다. 여간한 결례가 아니다. 미 국무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고위 당국자가 나서 "맥락과 다르게 전달됐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렇다면 전술핵 재배치는 미국 주장처럼 무책임한 일인가. 이 논란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믿을 수 있느냐는 물음과 직결돼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핵무기 선제 사용과 핵확산을 극도로 기피한다. 지난해 11월에는 '적이 먼저 쓰지 않는 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원칙을 채택하려다 동맹국 반발로 포기한 적이 있다. 또 지난달 말 나온 '핵태세검토보고서(NPR)'는 핵확산 위협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선 한반도 내 전술핵 재배치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누구든 공격해 오면 필요시 핵무기까지 동원해 미국이 응징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무기고에 보관 중인 전술핵 B61-12 중력탄의 모습. 현재 유럽의 5개 나토 회원국에 100여발이 분산배치돼 있다. 이밖에 미국 내에도 500여발이 존재하며 현재 개량 사업이 진행 중이다. 중앙일보 사진 자료 그럼에도 많은 한국 전문가가 불안해한다. 확장억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확장억제를 할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 하고 관련국들이 이를 '신뢰'해야 한다.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인 미국의 확장억제 능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의지는 왠지 미덥지 않다. 그간 미국 측이 무성의한 것처럼 처신해 온 탓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한·미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가 만들어진 건 2016년. 하지만 지난 6년간 이 회의가 열린 건 지난달 모임을 포함해 딱 세 번뿐이다. 2년에 한 번꼴로 열린 셈이다. 그나마 한 참석자는 이렇게 토로했다. "어떻게 한국을 지킬 것인가 물으면 '군사기밀이니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걱정 말고 믿으라'고만 한다"고. 그러니 확장억제의 실체도 모르는데 어떻게 신뢰하라는 얘기인가. 더 큰 걱정은 그나마 바이든 행정부는 확장억제에 진정성이 느껴지나 2년 후 정권이 바뀌면 제대로 작동할지 불안하다는 거다. 현재 미국에선 민주당 인기가 공화당에 뒤지는 형국이다. 8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난 3일 발표된 CNN 조사에서 '어느 당 후보를 찍겠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7%가 민주당, 51%는 공화당이라 답했다. 게다가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심각한 경기 침체가 예상되는 터라 2024년 대선에선 공화당 후보가 유리할 듯하다.  한데 현재 가장 앞선 공화당 주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 5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한다. 한반도에 폭격기와 같은 전략자산을 전개할 경우 그 비용을 한국 측에서 내라고 요구했던 인물이다. 2위는 30% 안팎의 지지율을 얻는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그의 한반도 정책이 알려진 건 없지만 '트럼프 2.0'이란 별명에 걸맞게 미국 우선주의를 펼 공산이 크다. 확장억제에 소극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니 윤석열 정부와 여권에서 전술핵 재배치, 핵공유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닌가. 한국에서 핵 얘기가 안 나오게 하려면 확장억제의 실체와 유용성을 주지시켜야 함을 바이든 행정부는 깨달아야 한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11.08 01:00

  • [남정호의 시시각각] 중국 봉쇄 장기화…한국 살길은?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는 19일 중국 20차 공산당 당 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3연임이 확정되길 바라는 이가 국내에도 꽤 있다. 느슨해진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중국 봉쇄가 풀리면서 한·중 교류가 정상화될 거라는 기대에서다. 주로 중국과 무역을 하거나 관광업계 종사자 등 이해관계가 얽힌 이들이다.  제로 코로나 정책은 그간 중국 사회와 경제를 옥죄어 왔다. 확진자 한 명만 나와도 도시 전체를 봉쇄하는 무관용 대응으로 경제가 마비되다시피 했다. 결국 올 상반기에만 기업 46만 개가 쓰러졌으며, 자영업소 310만 개가 문을 닫았다. 여기에 최악의 부동산 침체까지 겹쳐 중국의 성장률은 0.4%로 떨어졌다.   이런 부작용에도 시진핑 정권이 제로 코로나를 밀어붙여 온 것은 당 대회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이를 수정하면 그간의 정책이 잘못됐음을 자인하는 꼴이 돼 시진핑 3연임에 걸림돌이 되는 탓이다. 이 때문에 당 대회만 끝나면 중국이 제로 코로나를 포기할 거라는 기대 섞인 시각이 많았다.  지난 7월 코로나19로 봉쇄된 중국 상하이 루자쭈이 금융지구의 텅 빈 거리를 한 남성이 걸어가고 있다. EPA  과연 그럴까? 불행히도 이는 희망사항에 그칠 공산이 크다.  첫째, 중국인 대부분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된 적이 없다. 코로나의 원산지임에도 공식적인 확진자 수는 99만6000여 명. 14억200만 명 인구의 0.0007%에 불과하다. 한국(48.1%), 프랑스(55.6%) 등 대부분 국가의 확진자 비율이 30~60%인 것과는 비할 수 없이 적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맞은 중국산 백신은 6개월만 지나면 면역력이 거의 없어진다. 무관용 정책이 해제될 경우 코로나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확산돼 의료 시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크다는 얘기다.     둘째, 경제적 어려움에도 봉쇄를 지지하는 중국인이 많다는 것도 정책 변화를 막는 장애물이다. 외국에선 수십만 명씩 희생자가 나오지만, 철저한 봉쇄 덕에 중국에선 불과 1만5000명만 숨졌다고 시진핑 정권은 대대적으로 선전해 왔다. 그러니  여기에 혹한 많은 중국인이 봉쇄정책을 지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셋째, 봉쇄정책으로 경제 전반이 손해를 보지만 일부 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정권 고위층과 연결돼 있는 점도 문제다. 실제로 올 상반기 중국의 10대 코로나 검사기기 회사들은 485억 위안(약 9조7000억원)의 매출에 163억 위안(3조2600억원)의 이익을 기록했다. 이런 천문학적 이익을 누리는 회사들이 엄격한 검사를 실시하는 봉쇄정책 포기를 달가워할 리가 없다.  끝으로 코로나의 치사율이 갈수록 낮아져 전 세계가 공존 전략으로 도는데도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지도층만 유독 이 대역병을 여전히 두려워한다고 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코로나 감염 소식을 듣고 위로 전문을 보낸 것도 시진핑이 유일했다. 요컨대 이 같은 여러 이유로 막대한 경제적 부담에도 중국의 코로나 봉쇄는 장기화할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유난히 높은 한국이 택해야 할 전략은 무엇인가. 시간이 갈수록 한·중 간 무역은 최종 소비재보다 중간재의 거래 비중이 높아졌다. 지난해 한국의 대중국 수출에서 중간재의 비중은 79.6%나 됐다. 이런 구조 속에선 중국의 봉쇄에 따른 생산 부진과 이에 따른 경기 침체는 한국 경제를 침몰시킬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태를 피하려면 중국에 진출했던 한국 기업의 귀환을 유도하는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또 중국 의존도가 높은 품목은 국내에서 생산토록 하고 비용 문제로 어렵다면 동남아 국가에서 대신 만들도록 해야 한다. 중국이 태국·캄보디아 등지에 해외 공단을 건설해 온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어쨌든 시진핑 3연임으로 중국 봉쇄가 풀릴지 모른다는 기대는 접는 게 옳다. 이참에 국가적으로 중국 의존을 확 줄일 궁리를 하는 게  현명한 정책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10.11 00:46

  •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미, 대만 위기 시 주한미군 일방적 차출 가능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만해협 충돌과 한국 개입 논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대만해협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8월 이뤄진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뒤 중국의 무력시위가 계속되는 탓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소극적 대응을 목격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도 별 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공산도 커졌다.  주한 주일 미군 비교  어떤 원인이든 대만해협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경우 한국으로서는 강 건너 불이 될 수 없다. 당장 한국에 닥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은 두 가지다. 첫째, 어떤 식으로든 대만 사태에 한국이 개입해 달라는 미국의 압력이 가해지고 둘째, 주한미군이 동원될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한국은 대만 사태에 끌려 들어가고 주한미군이 대만으로 파병되는 걸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가. 한·미 동맹과 관련된 각종 조약 등을 바탕으로 한국의 선택지를 살펴본다.     유엔 총회 참석 차 뉴욕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CNN과 인터뷰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인터뷰에서 ″한국은 강력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북한 도발에 대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밝혀 대만 분쟁 개입에 부정적 입장을 나타냈다. CNN 촬영 뚜렷한 한·미 간 입장 차이  지난달 29일 윤석열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간 만남 이후 발표된 대통령실과 백악관의 보도자료에는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었다. 백악관 측은 "두 사람이 중국과 대만, 그리고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대해 논의했으며 이는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지역의 핵심 요소라고 해리스 부통령이 강조했다"고 밝혔다. 반면 대통령실 측 자료에선 이 대만 관련 부분이 완전히 빠져있다. 대만 사태에 대한 양국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요컨대 한국 측은 대만 사태에 말려들 것을 기피하지만, 미국은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것을 바라는 상황이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한국의 개입을 공식적으로 희망한 적은 없지만, 전직 고위 관리나 한반도 전문가들은 불가피한 일이라며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실제로 지난 7월 마크 에스퍼 전 국방장관은 미국의 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대만해협에서 충돌이 발생해 미국이 개입하는 경우, 일본과 한국이 어떤 방식으로든 관여하지 않는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다"며 "전쟁 수행 지원이 됐든, 경제 교역 중단이 됐든 대만 유사시 역내 국가들은 분쟁에 말려들고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 측은 대만 사태 개입을 꺼리는 빛이 역력하다. 이유는 자명하다. 최대 무역 파트너인 데다 동북아 최강국인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작지만 한국군이 파병돼 피를 흘리게 된다면 여론도 극도로 악화할 게 뻔하다. 지난달 25일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 방문 중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만약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북한 역시도 도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대한민국에서는 강력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북한 도발에 대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부정적 입장을 밝힌 것도 이런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지난 8월 말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을지 자유의 방패'(UFS) 연습에 참가한 주한미군 장병들이 한국군과 함께 대테러 훈련을 하고 있다. 뉴스1 대만 충돌시 미 지원, 의무 아니야   일각에서는 "굳건한 한미동맹 유지 차원에서 역내 분쟁 발생 시 미국을 지원하는 게 동맹국 한국의 의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과연 그럴까.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한미동맹의 기본 골자를 규정한 '한미상호안보조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약 3조는 "타 당사국 영토에 대한 태평양 지역에서의 무력 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 인정하고 공통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의 헌법상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고 돼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내용은 "타 당사국 영토에 대한 공격"이란 대목이다. 즉 중국의 대만 침공이 발생할 경우 여기가 태평양 지역인 것은 맞지만, 미국 영토로 볼 수 없기에 동맹국인 한국이라도 행동에 나서야 할 의무는 없는 셈이다. 게다가 나중에 추가된 3조 관련 양해사항은 "타방국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을 제외하고는 그를 원조할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돼 있다. 원조 의무도 없음을 확실히 한 것이다.    지난달 8월 중국군은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대한 불만 표시로 대만해협에서 포사격 훈련을 실시하는 등 대규모 무력 시위를 벌였다. 연합뉴스 일방적 차출, 일본 "노", 한국 "예스"   그렇다면 미국이 대만 방어를 위해 일방적으로 주한미군을 차출하는 것은 가능할까. 지난달 27일 패트릭 라이더 미 국방성 대변인은 주한미군의 대만 투입 가능성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주한미군은 여전히 한미동맹과 한국의 주권을 수호하고 역내 미국의 국익을 지원하기 위해 전념하고 있다"고. 차출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모호하다.   하지만 현직과는 달리 전 고위직 인사들은 분명하게 의견을 나타낸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난달 27일 “중국의 대만 침공 시 주한미군 투입이 가능한가”라는 자유아시아방송(RFA)의 질문에 "그렇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병력을 활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미국"이라며 "주한미군 일부가 투입되더라도 한미동맹은 대북 억지력을 유지할 옵션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는 지난 2014년 7월 참의원에 출석해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 기지에서 미국 해병대가 출동하려면 일본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대만 해협에서 충돌이 일어나 주일미군이 출동하려 해도 일본 정부가 승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내용이 맞는다면 미국이 주한미군을 동원할 때는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주일미군은 일본 정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과연 그런가.  먼저 대만 유사시 미국의 결정으로 주한미군 투입이 가능하다는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의 이야기는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한·미 양국 간에 주한미군 차출을 통제할 어떤 협정 등을 맺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라크 분쟁 때에도 주한미군 차출 문제를 둘러싸고 국내에서도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그러나 미국은 2004년 5월 주한미군 4000명을 이라크에 보내겠다고 사실상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이를 실행했다. 이를 막을 수단이 없는 한국 정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주일미군은 다르다. 미국과 일본 간에는 "주일미군의 배치 및 주요 장비와 관련된 주요 변화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합의가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일안전보장조약 재협상이 한창이던 1960년 당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와 크리스천 하터 국무장관 간 서한을 통해 성사됐다. 결국 주일미군을 대만으로 차출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의 사전승인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일본 내 주일미군 요코스카(橫須賀)기지에 배치돼 활동 중인 미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 연합뉴스   실제론 주일미군 동원 가능성 커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미국이 주일미군은 빼내지 못해 주한미군을 대만으로 보낼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전통적인 대만과의 각별한 우호 관계로 중국 침공시 도와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본에 강한 까닭이다. 아베 전 총리가 테러로 숨지기 석 달 전인 지난 4월,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 르 몽드에 "미국은 전략적 모호성을 끝내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군사적으로 개입할 거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글을 잇달아 기고한 것도 이런 기류를 반영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대만인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 시 일본이 파병해 도와줄 것으로 예상한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58%에 달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니 일본 측은 미국이 주일미군을 대만에 파견하겠다고 하면 이를 승인할 게 거의 확실하다.  이에 비해 한국 정부는 윤 대통령의 발언에서 보듯, 주한미군의 대만 차출에 거부감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우선 주한미군의 일부를 대만으로 보내면 대북 억제력에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국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평택에 미군 기지를 지어주고 매년 3조원에 가까운 한미 방위비 분담금을 내는 것도 북한의 위협에서 지켜 달라는 게 목적이다. 게다가 주한미군이 대만해협 분쟁에 투입될 경우 이들의 주둔지인 한국도 중국의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과는 달리 대만과의 관계가 극도로 우호적이진 않다는 점도 주한미군 추출의 걸림돌이 될 공산이 크다. 요컨대 주한미군의 대만 차출로 한국이 끌려 들어가는 데 대해 윤석열 정부 측은 달가워하지 않을 거란 얘기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바이든 행정부 측도 지금까진 이를 기정사실로 하진 않고 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지, 이로 인해 미·중 간 충돌이 일어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지금 분위기로는 주일미군이 동원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기존의 한·미, 미·일 간에 맺어진 협정 및 합의로는 미국이 주한미군은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지만 주일미군은 일본 정부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도 일본처럼 주둔 미군의 차출을 막을 수 있는 재량권 확보가 바람직할 것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10.06 01:00

  • 다자 외교 이해에 더 없는 길라잡이[BOOK]

    다자외교의 재발견 다자외교의 재발견 윤여철 지음 박영스토리     4대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우리로서는 늘 이들의 침략과 압력에 시달려왔던 터라 한·미, 한·일 관계와 같은 양자외교가 중요했다. 어떻게든 이들 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국익을 도모하는 것이 외교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임은 물론, K팝, K드라마 등을 앞세워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문화 최선진국이라는 게 한국의 현재 모습이다.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한국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해졌다는 얘기다.   2012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 당시 양자회담장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기념 촬영을 돕고 있는 윤여철 사무총장 특별보좌관. 윤여철 제공   이런 변화 속에서 지구촌이 갈수록 글로벌화가 되면서 기후변화, 환경오염 등 양자 외교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폭증하고 있다. 다자 외교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다.    특히 대표적 국제기구인 유엔의 도움으로 한국이 탄생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다자 외교는 더더욱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다자외교가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참으로 짧다.    누구보다 양자와 다자외교 모두 경험이 풍부한 필자가 쓴 『다자외교의 재발견』은 이런 부족함을 채우는 데 유용한 책이다. 이 책은 국제질서의 근원과 양자외교에서 다자외교가 탄생하는 과정, 그리고 유엔의 역할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구체적이고 알기 쉽게 설명한다. 국제기구 진출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물론 세계정세를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게 틀림없다.    남정호 기자 nam.jeongho@joongang.co.kr    

    2022.09.16 14:10

  • 분단의 아픔으로 굴곡진 삶을 산 지식인의 초상[BOOK]

    고독과 자유 고독과 자유 지창보 지음 책봄   일본강점기에 이어 곧바로 터진 한국전쟁이란 쓰라린 역사는 많은 이들의 삶을 굴곡지게 만들었다. 개중에는 갈가리 찢긴 이념적 대립으로 전쟁이 끝난 뒤에 반세기 이상이 지나고도 해외에서 떠돌거나 고향을 찾지 못했다.    남들보다 일찍 깨우친 지식인들은 더 심한 경우가 많았다. 한없이 열린 가슴과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는 명석한 머리를 지닌 터라 부당하다고 느끼면 목소리를 높이기 일쑤였던 탓이다.    필자 지창보 박사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평양 근교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했으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해방을 맞았다. 어렵게 귀국해 연세대로 진학했지만, 서북청년단의 테러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다 결국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열심히 공부한 끝에 명문 듀크대에서 6년 만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데 성공한다.    1984년 지창보 박사가 파리에서 이응노 화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창보 제공   그러나 분단된 조국의 상황은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 북한에 남은 가족을 만나기 위해 1971년 재미교포로서는 최초로 방북, 친북 인사로 몰리게 된다. 이런 낙인이 찍히게 되자 그는 도미 후 41년이 지난 1994년에야 남쪽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렇듯 시대의 아픔 탓에 그는 뜻하지 않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다.    지 박사는 53년 도미한 이후 지식인으로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한인 예술가,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화가 김환기 내외와 이응노·김창열 화백, 작곡가 윤이상 등이 그들이다.    이 책을 보면 이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이 생생하게 나온다. 지 박사는 “한 사람의 인생이란 그 시대의 주변 사건과 연관되어 계속되는 역사의 거울”이라고 주장한다. 평범한 무명 인사의 삶도 들여다보면 역사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치열하게 살았던 재미 지식인의 삶을 통해 현대사의 이면과 유명 예술가들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정호 기자 namjh@joongang.co.kr  

    2022.09.16 14:10

  •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우크라이나전 후유증, '회색 코뿔소' 가스 대란 덮친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유럽발 가스 파동 공포  "겨울이 오고 있다. (Winter is coming)" 최고의 미국 드라마로 꼽히는 '왕좌의 게임'. 이 드라마의 등장 인물들이 쉴 새 없이 외쳤던 게 바로 이 구호다. 살을 에는 겨울이 오면 북녘땅의 괴물들이 몰려오니 어서 대비하라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 속 구호가 요즘 수많은 유럽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비롯된 때아닌 가스 대란 때문이다. 서방측 제재를 받게 된 러시아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지난 6월 이후 유럽행 액화천연가스(LNG) 공급을 확 줄이면서 가스 파동이 난 것이다.  유럽에선 대기 오염을 줄이기 위해 난방·취사를 주로 천연가스로 해결한다. 가스 발전의 비중도 20%를 넘는다. 이 때문에 지금 유럽인들은 불필요한 가로등 끄기는 물론 찬물로 샤워하기 등 월동용 가스를 비축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유럽의 가스 파동이 강 건너 불이 아니라는 거다. 지금까진 도시가스 요금이 크게 오르지 않아 국내 소비자들이 실감하지 못하지만 폭등한 천연가스 가격을 고려하면 큰 폭의 인상이 불가피하다. 전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가스 대란이란 '회색 코뿔소'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사태가 심각해졌고 향후 전망은 어떤지 짚어본다.  우크라이나 서쪽에 위치한 볼리베츠 가스관 시설 모습. 유럽에 천연가스를 공급해온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전 발발 이후 지난 6월부터 갑자기 공급량을 큰 폭으로 줄였다. AP   유럽의 목 죄는 러시아 가스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스 파동은 서방의 경제 제재에 대응하기 위한 러시아의 공급 축소에서 비롯됐다. 천연가스 가격은 우크라이나전 발발 전까지만 해도 80유로를 넘지 않았다. 그랬던 게 전쟁이 터지면서 한때 300유로까지 치솟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서방측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응징하겠다며 금융·무역 및 석유 부문에 관련된 경제 제재를 단행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러시아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잠그기 시작한 까닭이다. 실제로 러시아의 국영기업 가스프롬은 지난 6월 독일로 연결된 가스관 노르트스트림-1의  공급량을 최대 1억 6700만㎡에서 40% 수준인 6700만㎡로 줄였다. 이뿐 아니라 러시아는 지난달 27일 이를 다시 평소의 20% 수준인 3300만㎡로 다시 축소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노르트스트림-1의 유지·보수를 이유로 31일(현지시간)부터 2일까지 3일간 가스 공급을 완전히 차단 중이다. 말로는 이상이 없으면 공급을 재개한다고 하지만 무슨 핑계를 대고 가스를 끊을지 모를 일이다. 러시아의 이 같은 가스 무기화에 맞서 서방측도 에너지 절약 운동 등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당분간은 고전할 수밖에 없다.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워낙 높은 데다 단시간 내에 마땅한 대체재를 찾기 어려운 까닭이다. 독일·프랑스 등은 러시아로부터 가스관을 통해 기체 상태의 천연가스를 공급받아 이를 각 가정과 공장 등에 나눠줘 왔다. 하지만 이를 대체하려면 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가스를 액체 상태로 들여와 저장한 뒤 다시 기체로 환원하는 시설이 필요하다. 러시아산 가스 공급 중단으로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된 독일에는 이런 시설이 없는 데다 새로 지으려면 수년이 걸려 뾰족한 해법이 없는 형편이다.     러시아-유럽간 가스관 및 유럽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 공포에 질린 유럽 이 때문에 현재 유럽인들은 가스 없는 겨울을 지내야 한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 최악의 경우 에너지 배급제가 실시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각국 정부는 물론 시민 단체까지 나서 필사적인 전기·가스 절약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 가스를 저장해 놔야 추위가 몰아닥칠 겨울을 무사히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유럽 전체적으로 전기의 22%가 가스로 만들어진다. 절전이 바로 가스 절약인 셈이다. 절약 방식은 나라별로 다양하다. 가스 파동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거로 예상되는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은 러시아에 대한 천연가스 의존도가 55%에 달하는 데다 탈원전 정책까지 추진해 왔다. 또 러시아 대신 다른 나라에서 가스를 들여오려 해도 액체 상태의 액화천연가스(LNG)나 액화석유가스(LPG)를 보관할 저장시설도, 이를 기체로 되돌릴 기화 설비도 마련돼 있지 않다. 때문에 러시아 가스가 끊기면 공장 가동이 멈춰 수만 명의 실업자가 생기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큰 피해가 예상된다. 독일의 중앙은 물론 지방 정부까지 나서 에너지 절약에 혈안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수도 베를린에서는 관광 명소 200여 곳의 조명등을 껐으며 다른 대도시에서는 가로등의 밝기를 줄이고사용량이 적은 신호등의 작동도 중단했다. 아울러 공공시설 내에서 사람의 왕래가 적은 복도와 대형 강당 등은 상시 난방을 금지됐다.   프랑스는 전기 낭비를 차단하기 위한 에너지 절약 정책을 발표하고 시행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냉난방 중인 상가가 문을 연 채 영업하지 못하게 했다. 또 새벽 1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일체의 광고용 전등을 꺼야 한다. 올해 40도가 넘는 무더위로 2000명 이상이 숨진 스페인도 예외가 아니다. 스페인 당국은 여름엔 27도 밑으로, 겨울엔 19도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조절하는 걸 금지했다. 또 난방 장치가 작동되면 저절로 상점문이 잠기는 자동 잠금장치 설치를 의무화했다.  이와 함께 오후 10시 이후엔 모든 상점이 불을 꺼야 한다.  다른 유럽 국가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에서는 샤워 5분 내 하기 운동이 벌어졌고, 이탈리아에서도 스페인과 같은 냉난방 규제가 시행되고 있다.  지난달 31일 불 꺼진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시는 최근 우크라이나전으로 에너지 대란이 일어나자 전기 절약을 위해 관광지의 전등을 모두 끄기로 결정했다. 로이터   화석 연료의 부활  러시아의 가스 무기화로 유례없는 고통을 겪게 된 유럽인들은 에너지 확보를 위해 모든 수단을 쓰고 있다. 폐쇄하기로 했던 석탄·석유 등 화석 연료 발전으로의 귀환이 대표적이다. 영국·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네덜란드 등 환경 문제로 석탄 발전소를 닫기로 했던 유럽 국가들은 방침을 바꿔 폐쇄 시기를 늦추거나 문 닫았던 시설을 재가동하고 있다. 또 프랑스는 앞으로 14기의 원전을 추가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 올해 말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려던 독일도 가동 중인 3기의 수명 연장을 검토하고 있다.     반면 이번 가스 파동이 장기적으로는 재생 에너지 활성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거라는 분석도 많다.  실제로 독일은 지난 23일 캐나다와 친환경 '그린 수소(Green Hydrogen)'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수소 동맹'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린 수소란 신재생 및 원자력 에너지를 이용, 물을 전기 분해해 얻는 수소를 뜻한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우려되는 가스 요금 인상  유럽발 가스 파동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달 초 가스 문제와 관련된 언론의 질문에 "올겨울에 전혀 문제가 없도록 안정적으로 비축해 와 시간이 지나면 충분할 것"이라며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장담했었다. 이런 자신감 뒤에는 한국이 전체 LNG 수요의 80%가량을 카타르 등과의 장기계약에 의해 들여온다는 사실이 작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나머지 20%를 국제 현물시장에서 비싸게 들여와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현물시장에서의 천연가스 가격은 1년 전보다 10배가 뛰었다. 이런 높은 가격에도 러시아로부터의 공급선을 잃은 유럽 국가들은 어떻게 든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아시아로 돌려졌던 천연가스 물량을 놓고 유럽과 아시아 국가 간의 피나는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한국은 겨울철 전기 수요가 에어컨을 집중적으로 켜는 여름보다 더 크다. 저렴한 전기료로 인해 각 가정에서 전기 히터 등을 큰 부담 없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 1월의 평균전력량은 7만3600여 MW로 지난 여름철 전기 수요가 가장 많았던 2021년 7월 (7만2700여 MW)보다 많았다. 올겨울 발전용 가스 수요가 크게 늘 거라는 얘기다.   우크라이나전 발발 이후 국제 시장에서 천연가스값이 천정부지로 뛰는데도 당국은 도시가스 가격을 억눌러왔다. 그러나 국제시장 가격이 급등한 상황에서 도시가스를 원가보다 훨씬 싼 값으로 장기간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도시가스공사는 이미 5조원의 미수금에 허덕이고 있다. 여기에 환율 급등까지 겹쳐 당국은 10월 중 상당 폭의 도시가스 요금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전 세계에 불어닥친 가스 파동이 갈수록 심화하는 형국이다. 천연가스 등 에너지 확보를 위해 온 나라가 발 벗고 나서야 할 비상 상황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09.01 00:58

  • [남정호의 시시각각] '실리콘 방패' 반도체의 미국행 비상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2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을 찾자 순식간에 이 지역은 살벌해졌다. 중국군은 펠로시 출국 직후부터 미사일을 쏴대는 등 여차하면 쳐들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중국이 도발을 못 할 거로 예상했다. 미국도 미국이지만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지켜줄 거로 본 까닭이다. 이렇듯 대만의 가장 굳센 방어벽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 TSMC란 논리가 세계에 퍼져 있다. 2000년 후반에 등장한 '실리콘 방패 이론 (Silicon Shield Theory)'이다(실리콘은 반도체의 핵심 소재다).  논리의 핵심은 TSMC에 대한 중국 의존도가 너무 높아 대만을 공격 못 한다는 거다. 또 중국이 도발해도 미국 역시 대만 반도체 없이는 견딜 수 없어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실제로 전 세계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장에서 TSMC(54%) 등 대만 업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64%. 미·중 모두 고성능 파운드리 칩은 90% 이상 TSMC에서 들여온다. 실리콘 방패가 두 겹인 셈이다.  어떤 강대국도 다른 나라의 특정 산업이 자국의 이익과 직결되면 이를 공격하거나 파괴되는 걸 방관하지 않는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즉시 뛰어들었다. 당시 최고의 전략물자로 여겨졌던 석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개입하지 않았던 바이든 행정부도 중국의 대만 공격은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TSMC는 중국의 공격에서 대만을 지켜주는 성스러운 산맥"이라는 게 이 회사 설립자 모리스 창의 주장이다. 그는 펠로시 방문으로 대만이 위험해지자 "중국이 공격해 오면 TSMC 가동을 멈추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대만 신추시 TSMC 본사 앞에 걸린 대만 국기가 이 회사 사기와 함께 펄럭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렇듯 대만은 반도체 산업을 안보 차원에서 중시하는데 우린 어떤가. 대만이 파운드리에서 1위지만, 메모리 쪽에선 한국이 단연 선두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 업체는 전체 시장의 56.9%를 차지해 2위인 미국(28.6%)의 2배를 기록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20년간 미 텍사스에 1921억 달러(257조원)를 들여 반도체 공장 11개를 짓겠다고 한다. SK하이닉스도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 등에 150억 달러(20조원)를 미국에 투자할 계획이다. 경제는 물론 안보의 대들보가 미국으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국내에선 반대는커녕 환영하는 분위기다. "양질의 일자리 수만 개를 뺏긴다"는 우려도 있지만 "'칩4'로 불리는 미국·일본·대만과의 반도체 동맹을 위해 어쩔 수 없다" "미국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이 막대하다"는 찬성론이 더 크게 들린다. 한편에선 한국의 온갖 규제를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끄덕인다.  하지만 이런 논리엔 빈틈이 있다. 무엇보다 중국 견제 차원의 칩4 동참과 반도체 공장 이전은 완전히 다른 사안 아닌가. 이 땅에서 반도체를 만들어도 얼마든지 다른 멤버들과 협력할 수 있다. 둘째, 지원은 좋지만 높은 인건비와 건설비는 큰 단점이다. 지난 4월 모리스 창은 "높은 인건비 등으로 미국 공장에서 생산한 반도체가 대만에서 제조한 것보다 50% 더 비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TSMC가 애리조나주에 120억 달러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 건 미 정부의 독촉 때문"이라고 폭로했다.  게다가 미국이 내놓은 '반도체 지원법'을 보면 기가 막힌다. 이 법은 외국 반도체 기업을 지원하는 대신 대상 업체에 대해 10년간 중국 내 신규 투자를 막는다. 이미 막대한 투자를 한 삼성·SK엔 중국에선 첨단 반도체를 만들어 팔지 말라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 때 형편없이 망가진 한·미 관계 복원 차원에서 바이든 행정부를 돕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동맹 사이라도 안보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한쪽이 단연 유리한 일들이 계속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이런 동맹이 무슨 소용이냐"는 볼멘소리가 커질 게 틀림없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08.30 01:25

  • [남정호의 시시각각] '펠로시 패싱'을 보는 다른 시선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방한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 의장을 안 만난 것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펠로시는 방한 전 중국의 반대 속에 대만으로 날아가 시진핑 정권의 인권 탄압 등을 강하게 성토했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의 '펠로시 패싱'은 '중국 눈치 보기'의 결과로, 미국에 대한 결례이자 한·미 동맹을 훼손하는 실책이라는 게 비판론의 요지다. 일견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피했어야 할 큰 함정에 빠진 느낌이다. 펠로시와 미국을 동일시한 잘못이 바로 그것이다. 펠로시의 대만 방문에 대해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 자신과 그의 외교·안보 참모, 미 군부, 그리고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등 주류 언론의 많은 논객이 일제히 반대했었다. 우크라이나전을 통해 러시아와 간접 전쟁 중인 미국으로서는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해선 안 된다는 게 핵심 논리였다. 중국은 러시아의 최대 우방이면서도 군사 물자는 주지 않았다. 예상보다 우크라이나전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의 무기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이런 판에 중국이 공격용 무기, 특히 러시아가 간청하는 드론을 넘겨주면 전쟁 양상이 바뀐다. 나아가 펠로시 방문으로 대만해협 내 긴장이 고조돼 우발적 충돌이 일어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 3연임을 확정하는 11월 당 대회를 앞둔 시진핑 주석으로서는 미국에 대한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할 처지다. 사소한 충돌에도 중국이 강력히 대응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만약 대만해협에서 미·중이 충돌할 경우 미국은 유럽에선 러시아와, 아시아에선 중국과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러야 한다. 미 군부가 겁내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올 82세로 은퇴를 앞둔 펠로시가 대만을 찾는 건 '인권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남기려는 욕심 탓이란 시각이 많다. 그의 방문을 두고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완전히 무모하고, 위험하며, 무책임한 일"이라고 비판한 것도 그래서다. 오죽하면 중국을 혐오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마저 "펠로시의 대만 방문은 잘못된 일"이라고 꼬집었겠는가.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지난 3일 오후 경기도 오산 미 공군기지에 도착해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국 대사, 폴 라카메라 주한미군사령관의 영접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이유로 바이든 행정부는 물론 아시아 주변국들도 펠로시의 대만 방문에 부정적 입장을 나타냈었다. 실제로 페니 웡 호주 외무장관은 "모든 관련국이 긴장 완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심해야 하며 우리 모두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원한다"고 펠로시의 방문 자제를 촉구했었다.  그러니 보라. 펠로시 방문으로 나아진 게 있는지. 우려대로 펠로시가 대만을 떠난 3일 직후부터 중국은 26년 만에 대만 주변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이고 있다. 중국 전투기와 드론이 양국 경계선을 연일 넘나들어 어느 때보다 일촉즉발의 분위기다. 아울러 중국은 대만산 감귤류와 냉동 생선 등에 대해 금수 조처를 내렸고 외국 기업들은 대만을 떠날 궁리만 하고 있다.  지난 4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대한 항의로 대만해협 동부를 향해 포사격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욱이 한국에 대만해협의 분쟁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한·미 동맹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지만 때론 버거운 짐이 될 수 있다. 대만해협에서 미·중 간 충돌이 일어나면 미군 2만여 명이 주둔 중인 한국도 휘말릴 위험이 크다. 자기 정치를 위한 펠로시의 대만 방문에 한국이 반대해야 할 결정적 이유다. 게다가 대만해협이 위험해지면 한국을 오가는 화물선들은 필리핀해로 우회해야 한다. 물류비와 시간이 더 들 수밖에 없다.  펠로시 입국 시 한국 측 주요 인사가 안 나간 건 실수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면담 회피'라는 소극적 방법으로나마 '아무 실익 없이 지역 안정만 해치는 중국 자극은 삼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비난은커녕 칭찬받을 일이 아닌가. 결과적으로 중국과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됐다고 무조건 친중 사대주의라고 싸잡아 공격해선 곤란하다. 친미나 친중, 한·미 동맹이나 한·중 우호 자체가 외교 원칙이 될 수는 없다. 오로지 국익의 기반 위에서 평화와 인권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를 외교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08.16 01:00

  • 한·러 관계 진화의 다각적 조명

    경제안보란 무엇인가 경제안보란 무엇인가 안세현 지음 청미디어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고, 이에 따른 에너지 파동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러시아 및 한·러 관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경제안보란 무엇인가』는 한·러 수교 이후 양국 관계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다각도로 조명한 책이다. 냉전 시대 당시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구소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반도 정세와 관련된 러시아의 영향력도 확 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의 한·러 관계는 여전히 중요하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수교 30년째에 접어든 한·러 관계를 경제안보와 종합안보라는 이론적 틀 안에서 분석한다. 이와 관련, 석유·천연가스 등 에너지 협력, 철도 연결사업, 나홋카 경제자유구역(FEZ), 어업 협력, 무기 교역, 북한 요인 등 6가지 분야를 다뤘다.   한·러 관계는 안보에 대한 인식, 국가 간 안보화 작업과 협력 프로세스, 안보 협력강화에 대한 위협 요소가 핵심적인 세 축이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한·러 관계는 대중·대일 정책 차원에서도 중요한 지렛대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책은 한·러 경제안보 관계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겐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게 틀림없다. 남정호 기자 namjh@joongang.co.kr

    2022.08.13 00:21

  • 한국과 러시아 경제안보 협력이 여전히 중요한 까닭[BOOK]

    '경제안보란 무엇인가' 책 표지 경제안보란 무엇인가 안세현 지음 청미디어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고, 이에 따른 에너지 파동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러시아 및 한·러 관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경제안보란 무엇인가』는 한·러 수교 이후 양국 관계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다각도로 조명한 책이다.   냉전 시대 당시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구소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반도 정세와 관련된 러시아의 영향력도 확 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의 한·러 관계는 여전히 중요하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수교 30년째에 접어든 한·러 관계를 경제안보와 종합안보라는 이론적 틀 안에서 분석한다. 이와 관련, 석유·천연가스 등 에너지 협력, 철도 연결사업, 나홋카 경제자유구역(FEZ), 어업 협력, 무기 교역, 북한 요인 등 6가지 분야를 다뤘다.   한·러 관계는 안보에 대한 인식, 국가 간 안보화 작업과 협력 프로세스, 안보 협력강화에 대한 위협 요소가 핵심적인 세 축이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한·러 관계는 대중·대일 정책 차원에서도 중요한 지렛대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책은 한·러 경제안보 관계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겐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게 틀림없다.

    2022.08.12 14:00

  •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은둔형 영부인'은 시대착오...건강한 활동이 바람직

    퍼스트 레이디는 왜 중요한가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 1962년 초 당시 미국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주(駐)인도 대사는 신생 독립국 파키스탄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고민했다. 남아시아 내 미국의 위상을 굳건히 하려면 파키스탄과의 우호가 절실한 탓이었다. 그는 마침내 한 가지 묘안을 짜냈다. 당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를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반년 전 백악관에 온 모함마드 아유브 칸 파키스탄 대통령과 재클린 모두 승마 애호가여서 영부인을 데려오면 큰 도움이 될 거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갤브레이스 대사는 재클린과 여동생 리 라지윌을 자신의 손님으로 초청, 인도와 파키스탄을 차례로 방문하게 한다. 한미 역대 최고의 영부인들 1962년 3월 당시 미국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와 여동생이 파키스탄을 방문해 낙타를 타보고 있다. 두 자매는 미국과 신생독립국 파키스탄 간 우호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이 나라를 찾았다. [미국 정부 자료사진]   재클린 케네디의 빼어난 외교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재클린은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미리 양국 역사를 공부하고 항공편도 에어 인디아를 탔다. 인도에 도착한 자매는 이 나라의 자랑인 타지마할에 가고 파키스탄에서는 낙타를 타면서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현지인들은 자매를 보러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임기 말까지 재클린과 찍은 사진을 집무실에 걸어뒀다. 아유브 칸 대통령은 재클린의 방문에 감격해 값비싼 말을 선물했다. 미 언론은 재클린의 인도·파키스탄 방문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 2009년 12월 차기 중국 정상으로 내정된 시진핑 부주석은 부인 펑리위안(彭麗媛)과 일본을 찾았다. 펑리위안은 빼어난 미모와 고운 목소리를 자랑하는 중국의 국민가수였다. 시진핑 부부가 방문한 당시 현지에선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즉위 20주년 축하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이에 펑리위안은 무대에 올라 일본인의 국민가요인 '사계(四季)의 노래'를 열창한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는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2주 후 시진핑 부부는 일왕을 접견한다. 통상 한 달 전에 신청해야 한다는 전통을 깬 파격 대우였다. 펑리위안의 노래가 큰 역할을 한 게 틀림없다. 한 나라의 퍼스트레이디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실례다.   김건희 여사가 대선 후보 부인 시절이던 지난해 12월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자신의 허위 이력 의혹 등과 관련,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당시 김 여사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시야에서 사라진 김건희 여사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보름이 되도록 두문불출하며 공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물론 언론의 안테나에도 안 잡힌다. 자신의 행보를 둘러싼 논란이 윤 대통령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됐다는 판단 때문일 수 있다.   "너무 나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에 대한 비판적 여론에다 본인과 관련된 의혹을 의식한 탓인지 김 여사는 대선 기간 중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기자회견에서 약속했다.   하지만 온종일 집안일에만 몰두하는 영부인이 바람직한가.  미국 뉴욕주 올버니에 위치한 시에나대연구소(SCRI)는 1982년부터 역사학자 등 전문가를 대상으로 미국의 역대 영부인 평가를 5차례 실시했다. 평가는 10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각 영부인에게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0가지 기준은 ^배경 ^국가적 기여 ^백악관 안주인 역할 ^용기 ^업적 ^진실성 ^지도력 ^여성성 ^공적 이미지 ^대통령에 대한 기여 등이다. 바꿔 말하면 이 10가지 기준이 영부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셈이다.  미국의 가장 존경받는 영부인로 꼽히는 엘리나 루스벨트가 1940년 7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 연설하고 있다. [루스벨트대통령 기념도서관]   미 최고의 영부인 엘리나 루스벨트  가장 최근 조사는 2014년 실시됐다. 가장 존경 받는 영부인으로는 엘리나 루스벨트가 꼽혔다. 이어 애비게일 애덤스, 재클린 케네디, 돌리 매디슨, 그리고 미셸 오바마 순이었다.   압도적인 1위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나는 누구보다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휠체어 신세였던 남편 대신 온 나라를 누비며 루스벨트의 메시지를 전했고 때로는 협상까지 했다. 타고난 문장가여서 각종 잡지와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여러 권의 책을 썼다. 194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연설까지 했다.   존 애덤스의 부인 애비게일은 여성 인권신장에 앞장선 선각자였다. 지독한 남녀 차별로 여성은 교육조차 못 받던 18세기 말,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미 헌법에 남녀평등을 명시하라고 남편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애비게일은 또 대통령인 남편에게 1100여 통의 편지를 써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타일리스트인 재클린은 다른 방면으로 나라에 기여했다. 프랑스계인 데다 파리 유학까지 해 그의 불어 실력은 원어민 수준이었다. 그 덕에 재클린이 남편 케네디와 함께 파리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인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불어뿐 아니었다. 타고난 언어 감각으로 그는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까지 능통했다. 그리하여 남편의 선거운동 때면 재클린은 스페인어 연설까지 했다.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젊고 세련된 미국이란 이미지를 전 세계에 퍼트린 것도 그의 업적 중 하나다.   2013년 2월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시카고의 공립학교 학생들과 함께 운동을 하고 있다. 미셸은 '움직이자! (Llet's move!)' 캠페인을 펼치며 아동비만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AP] 미셸 오바마의 비만 퇴치 운동  미국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아내 돌리는 최초로 '퍼스트레이디'로 불렸다. 그는 정당 간 알력이 극심했던 당시 여야 정치인들을 한꺼번에 백악관에 불러 처음으로 초당적 모임을 성사시킨 주인공이다. 아울러 돌리는 1814년 백악관이 영국군에 의해 불타자 건물 내 문화재를 구해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버락 오바마의 부인 미셸이 칭송받는 이유는 여럿이다. 남편 못지않게 유능한 변호사였지만 백악관 입성 후에는 전업주부로 변신했다. 미국인이 보기 원하는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미셸은 그러나 평범한 가정주부로 남는 것은 거부했다. 그는 '움직이자! (Let's move!)' 라는 비만 퇴치 캠페인을 벌이며 운동 권장과 함께 학교 급식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이렇듯 미국의 존경 받는 영부인 다섯 명을 살펴보면 이들 모두 집안에 틀어박힌 현모양처형이 아닌, 대외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활발히 수행했었음을 알 게 된다. 특히 최근의 영부인들은 각기 특별한 목적의 캠페인을 벌이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 영부인들의 주요 캠페인   육영수·이희호 여사의 공통점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간 존경하는 영부인을 묻는 여론조사에선 육영수·이희호 여사가 늘 1~2위를 다퉈왔다. 중요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영부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육 여사는 고아 등 사회적 약자, 특히 나환자 지원에 앞장섰다. 청와대로 이들을 불러 다과회를 열고 전국 각지의 나환자 병원을 찾았다. 이와 함께 아동을 위해 육영재단을 설립하고 어린이회관도 지었다. 그뿐 아니라 정권에 비판적 목소리로 유명했던 동아방송을 늘 듣는 등 남편인 박정희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도록 노력해 '청와대 내 야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1971년 12월 육영수 여사가 전남 나주에 위치한 음성 나환자촌 현애원을 방문, 옷과 책, 종돈 등 위문품을 전달하며 환자와 가족들을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 자료사진]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부터 이름난 재야인사였다. 이 여사는 단순한 아내를 넘어 정치적 동지이자 조언자로 활약했다. 김 대통령 재임 중인 2002년에는 유엔 아동 특별총회에 참석, 남편 대신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요컨대 한국과 미국 모두 의미 있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영부인일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얘기다.  최근 역사학자 등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최악의 미국 영부인 중 하나로 꼽힌 팻 닉슨.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부인인 그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 영부인으로 1960~80년대에는 존경받는 여성으로 뽑히기도 했다. [닉슨기념도서관]   현모양처형 영부인 평가 낮아  반면 집에서 살림만 하는 현모양처형 영부인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1960년 이후의 영부인 12명에 대한 데일리메일의 여론조사 결과 팻 닉슨이 최악의 영부인으로 꼽혔다. 리처드 닉슨의 부인인 팻은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으로 늘 집안일을 하면서 웃는 모습을 보여 '종이 인형'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1950년대 말부터 20년 동안 펫 여사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으로 14번이나 뽑혔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칭송받던 현모양처형 영부인이 이제는 외면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니 김건희 여사에게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 말고 있으라"고 요구하는 건 중요한 국가적 자원을 낭비하는 처사다. 현재 대졸 여성 취업률은 63.1%로 남성(67.1%)과 그리 큰 차이가 없으며 미성년 자녀를 둔 기혼 여성도 56.2%가 일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집안일만 하는 영부인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칼은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되지만 생명을 살리는 메스로도 쓰인다. 영부인이란 자리 역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한다고 항상 좋다는 뜻은 아니다. 최악의 영부인 중 하나로 꼽히는 낸시 레이건은 '그냥 싫다고 해 (Just say No)'라는 마약 퇴치 운동을 벌였지만 좋은 평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마약 중독자는 악"이고 "당장 끊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등 지나치게 단순한 메시지를 고집한 탓이다. 낸시는 또 점성술사에 집착해 중요한 의사 결정 때마다 점을 봤던 것으로 알려져 반감을 샀다. 요컨대 적절히 대외활동을 하되 현명하게 처신하는 게 영부인에게 필요한 덕목이라는 얘기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07.28 00:36

  • [남정호의 시시각각] '트럼프의 부활'이 두려운 까닭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윤석열 정부 앞에 펼쳐진 최악의 안보 위협은 무엇일까. 흔히는 북핵 소형화, 일본의 군국주의화 등이 꼽힌다. 그러나 아직은 대중의 관심 밖이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몰락과 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부활 가능성이 최대 안보 리스크로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현 정부의 안보 정책은 튼튼한 한·미동맹에 뿌리를 둔다. 첫 안보 공약이 “한·미 연합 방위 태세 재건 및 북핵에 대한 확장억제 강화”일 정도다.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의 초점이 여기에 맞춰진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하여 요즘 양국 전문가들은 한·미 동맹, 특히 확장억제 전략 강화를 위한 아이디어 짜내기에 바쁘다. 미 핵운용 계획 수립 시 한국 측 참여, 확장억제 강화를 위한 협의체 활성화, 전술핵 배치를 위한 인프라 사전구축 등 다양한 의견이 쏟아진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다수로의 길'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대권 재도전을 노리는 트럼프는 지난 14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24년 미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AP 물론 확장억제에 대한 불신도 존재한다. 특히 임박했다는 북한의 7차 핵실험이 핵 소형화를 위한 거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불안감이 커졌다. 북한이 여차하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미 본토를 때리겠다고 위협하며 남쪽에 전술핵을 터트릴 위험도 없지 않다. 그래도 체제 붕괴는 피할 수 있다고 김정은이 오판한다면 말이다.   이에 대해 국제정치학계의 석학 조셉 나이는 이렇게 반박한다. “주한미군 2만8500명의 존재가 확장억제에 신뢰성을 준다”고. 즉 북한이 전술핵을 쓰면 수많은 미국인이 희생되며 이럴 경우 미국은 북한을 궤멸시킬 게 뻔해 북한이 함부로 못 나온다는 주장이다. 명쾌한 논리다. 하지만 여기엔 치명적 결함이 존재한다. 주한미군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인데, 그럼 이들이 없어지면 어쩌나.  “방위분담금을 더 안 내면 주한미군을 빼겠다”, “한반도에 전략 폭격기 띄우는 비용을 대라” 등등, 툭하면 돈 달라던 트럼프 대신 바이든이 지난해 초 집권하자 한국인 대다수는 환호했다. 부드러운 신사의 풍모에 동맹국 입장을 존중하는 그였기에 한·미관계가 나아질 거로 기대한 까닭이다. 예상대로였다. 바이든은 윽박지르지 않는 것은 물론 튼튼한 한·미관계를 외치며 한국 측을 기쁘게 했다. 이에 윤석열 정부는 바이든의 중국 봉쇄 참여로 화답했다. 재계도 대규모 대미 투자로 거들고 나섰다. 요즘처럼 양국 관계가 좋은 적도 드물다.   . 하지만 문제는 바이든의 인기가 사상 최악으로 2년 뒤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전과 관련, 섣부른 러시아 제재로 전 세계 유가를 뛰게 했다. 그 결과 미국 물가는 9% 이상 치솟으며 최악의 인플레가 발생했다.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며 바이든의 지지도는 30%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최근에는 낙태권을 인정하는 역사적인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이 뒤집혀 진보층의 불만이 쏟아진다. 지금 같아선 바이든 재선은 물건너갔다.   반면 지난 14일 대선 재도전을 선언한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은 적지 않다. 최근 뉴욕타임스의 공화당 대선 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그는 49%를 얻어 2위인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25%)의 두 배를 기록했다. 게다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인플레를 잡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추진 중이다. 2024년 대선까지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 현 집권 민주당이 질 공산이 크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어떻게 될까. 그간의 발언 등을 볼 때 주한미군 철수가 추진되고 확장억제 전략은 약화할 게 틀림없다. 설사 트럼프 아닌 제3의 인물이 집권하더라도 바이든처럼 확장억제 전략을 전폭 지지할 거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21일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 도착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뉴스1 그러니 현 정부도 2년 뒤 사라질 바이든 정권에 올인할 일이 아니다. 트럼프의 재집권까지 염두에 두고 판을 짜는 게 현명하다. 누가 미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흔들리는 안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독자적 핵 개발까지 포함, 진정한 자주국방을 다각도로 강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07.19 00:36

  •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바이든의 자승자박... 대러 제재, 최악의 인플레 자초해

    우크라이나전이 바꿔놓은 국제 질서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예상과는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가 점쳐지면서 지구촌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 푸틴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꺼내 든 경제 제재 카드가 부메랑이 돼 최악의 인플레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바이든 행정부의 인기는 사상 최악으로 떨어지며 전쟁 양상마저 바뀌는 형국이다. 이 같은 상황 변화의 배경과 한미관계 등 국제질서에 미칠 영향을 짚어본다.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경제 제재로 러 약화 시도 우크라이나가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자 미국은 이번 전쟁을 러시아 국력 약화의 호기로 보고 젤린스키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왔다. 처음에는 확전 우려로 공격용 무기 공급에 소극적이었으나 의외로 우크라이나가 잘 싸우는 데다 러시아군의 잔혹 행위가 속속 드러나면서 헬기와 장갑차까지 지원하게 됐다. 결국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무기 등 각종 지원 규모는 56억 달러(약 7조2000억 원)에 달했다. 미국은 또 식수·의료품·생필품 등 9억1400만 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도 해왔다.  러시아의 공세에도 우크라이나가 두 달 넘게 버티자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5월 초강수를 둔다. 러시아의 원유 및 천연가스에 대한 경제 제재를 단행한 것이다. 이 같은 조치는 러시아의 사기를 꺾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큰 타격을 줄 것으로 기대됐다. 원유 및 천연가스 등 에너지 분야에 대한 러시아의 의존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러시아 전체 수출 중 원유·석유제품·천연가스 등 에너지 관련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42.8%에 달했다. 이 때문에 공화당의 중진이자 대선후보였던 고(故)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국가를 가장한 거대한 주유소"라고 러시아를 평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러 원유 및 천연가스 제재는 러시아의 재정 수입 급락을 불러 푸틴 정권이 전비를 마련할 길을 차단할 것으로 기대됐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전 희생자가 급속하게 늘면서 러시아인들의 불만도 팽배해 반전 여론도 커질 것으로 바이든 정권은 봤다.  지난 14일 미국 워싱턴 D.C. 주유소에 걸린 휘발유 가격표. 올해 초 갤런 당 1 달러 선에 머물렀던 휘발유 가격이 6달러를 돌파했다. AFP=연합뉴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에너지 업계의 이익도 고려 대상이 됐을 게 분명하다. 신기술을 이용한 셰일 오일 및 가스 추출이 대중화되면서 미국은 에너지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신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명분으로 러시아산 원유 및 천연가스의 수출을 막으면 그만큼 미국의 에너지 기업들이 이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은 푸틴 정권이 백기를 들 것으로 기대하며 유럽의 나토 동맹국과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및 한국·일본 등 전통적 우방국들도 제재 대열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바이든의 오판 그러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유럽 및 여타 지역 시장을 잃었지만, 전체 수입은 줄기는커녕 도리어 늘어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러시아산 공급이 막히면서 원유 품귀 현상이 빚어졌던 것이다. 러시아는 자국산 원유에 대한 제재가 내려지자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덤핑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러시아산 원유를 브렌트·서부 텍사스·두바이산보다 배럴 당 30달러 이상 싼값으로 내다 팔았다. 그러자 친러 성향의 나라들이 다투어 러시아산 원유를 매입, 에너지 관련 전체 수입이 도리어 증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올 초 배럴당 76달러 하던 서부 텍사스유는 3월 초 123달러까지 치솟았다가 지금은 100달러 안팎에 거래된다. 국제시장 가격보다 30달러 더 싸게 팔아도 큰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에 위치한 러시아 정유시설 전경으로 지난해 촬영한 사진. AP 미국의 제재 동참 요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산 원유를 사 가는 큰 손은 러시아와 함께 브릭스(BRICS)로 불리는 브라질·인도·중국·남아공 등 신흥경제 국가들이다. 이중 특히 인도는 대놓고 러시아산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 실제로 요즘 인도는 하루 평균 74만 배럴씩을 구입하고 있는 데, 이는 지난해 3만8000배럴의 20배 가까운 규모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인도가 값싼 러시아산 원유를 사들인 뒤 이를 되파는 수법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브라질 역시 러시아 제재를 무시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자이르 보우소나라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2월 미국의 공식적인 반대에도 불구,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과 정상회담을 강행했을 정도다. 중국과 남아공도 물론 러시아산 원유를 구입하는 큰 손이다. 이런 분위기로 모스 호크스테인 미 에너지 안보 특사도 지난 9일 미 상원에 출석, "러시아가 전쟁 이전보다 원유·가스 판매로 더 많은 돈을 버느냐"는 질문에 "부정할 수 없다"고 답한 바 있다. 지난 2월 자이르 보우소나라 브라질 대통령은 미국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AP   잘못된 학습효과 그렇다면 바이든 행정부는 왜 오판했을까? 이는 바이든 외교팀의 잘못된 학습 효과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바이든을 비롯해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이 과거 오바마 행정부 시설, 대이란 경제 제재를 설계하고 성공시킨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잘 될 거로 낙관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 서방의 경제 제재에 시달려온 이란과의 협상을 타결시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중단시킨 바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제재는 이란 때와는 크게 다르다. 핵심적인 차이는 이란 제재 때는 이 나라 석유를 사 가는 기업도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secondary boycott)'이 적용된 반면 이번에는 그런 처벌 규정이 없다. 누구든 제재 걱정 없이 러시아산 원유·가스를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듯 구멍 뚫린 제재 탓에 러시아와 참여 거부 국가들은 손해를 입지 않거나 도리어 큰 이익을 보고 있다. 반면 미국과 제재 동참 국가들은 유가 폭등과 이에 따른 최악의 인플레 등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우크라이나 전쟁 전 갤런 당 1달러대였던 휘발윳값이 5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 이에 따라 지난 5월 물가도 전년도보다 8.6%나 뛰었다. 1981년 이래 41년 만에 나타난 최악의 인플레인 셈이다. 기록적인 인플레는 바이든의 인기에 결정타를 안겼다. 취임 500일을 기준으로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히던 트럼프의 지지율 41.5%보다도 낮은 40.2%를 기록할 정도다. 이대로면 11월 예정된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대패하는 것은 물론 2년 뒤 재선 출마는 꿈도 못 꿀 지경이다.   지난해 6월 촬영한 인도 구자라트주의 정유시설 모습. 인도는 요즘 전년도 보다 20배 가까운 하루 평균 74만 배럴의 원유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하고 있다. AP 중국 제재 풀기 나서   이처럼 코너에 몰린 바이든은 인기 만회를 위해 인플레 잡기에 필사적이다. 심지어 중국 견제를 위해 트럼프 때 채택됐던 고관세 장벽도 낮추려 한다.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높은 관세는 시진핑 정권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도 못하면서 인플레만 유발한다는 회의론을 받아들인 결과다.  아울러 바이든은 다음 달 중순 인권 탄압 문제로 사이가 불편해진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방문해 원유 증산을 요청할 계획이다. 바이든은 사우디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며 "국제사회의 왕따로 만들겠다"고 비난한 바 있다.  바이든은 국내적으로도 인플레 잡기에 필사적이다. 그는 푸틴을 유가 상승의 주범으로 몰아세우다 최근에는 엑손 등 미국의 대형 석유회사를 겨냥, "하느님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면서도 높은 유가를 유지하기 위해 생산을 늘리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바이든의 노력이 쉽게 성공할 거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무엇보다 섣부른 러시아 제재로 유가는 뛰었지만 정작 푸틴 정권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푸틴이 앞으로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속 수행할 자금 능력이 있다는 얘기다. 반면 바이든은 갈수록 전쟁을 빨리 끝내라는 압력에 시달릴 공산이 크다.  이렇게 되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에 유리하게 마무리될 가능성이 커진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 중인 170억 달러(약 21조원)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공사 현장 사진으로 지난 5월 공개됐다. 연합뉴스   한미관계 영향 바이든 정권의 오판으로 전 세계, 특히 미국의 인플레가 심각해지면 한국엔 어떤 영향을 줄까? 먼저 바이든 정권은 중간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 만회를 위한 각종 정책을 시행하려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동맹국인 한국의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에 삼성·현대가 그랬듯이 한국 대기업의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부탁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실업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미국은 대중 관세는 낮추려 할지라도 국내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중국과의 갈등을 더 부추길 공산도 있다.  무릇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너그러울 수 있는 법이다. 인플레에 시달리는 바이든 정권으로서는 당장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한국을 위시한 동맹국들에 쉽지 않은 요구를 들어달라고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06.23 00:34

  • [남정호의 시시각각] 윤석열 외교팀의 아킬레스건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5월 말 미국 뉴욕타임스에 묘한 기사가 실렸다. 대중국 관세를 놓고 바이든 외교팀에서 불협화음이 나온다는 거였다. 일부 참모는 “제재 효과가 없는 고관세를 고집하다 물가만 오른다”고 주장한 반면, “내렸다간 중국에 얕보인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는 내용이다.   결론은 봐야겠지만 특정 정책을 두고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도 이게 뉴스인 건 그만큼 바이든 외교팀에 잡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  「 핵심 참모 죄다 한·미 동맹 중시파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질 위험 커 중대 결정 시 다양한 의견 들어야 」    왜 그런가. 면면을 보면 안다. 외교 총사령탑인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 참모로서 20년 넘게 일했다. ‘워싱턴의 기린아’라는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바이든의 부통령 시절 참모였다. 블링컨과 설리번도 서로 막역한 사이다. 워싱턴 정가에서 이 셋을 대통령과 참모 관계가 아닌, 세계관을 공유하는 오랜 친구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역시 바이든의 오랜 지인이다. 그러니 바이든 외교팀에서 이견이 안 나오는 게 당연하다.   도리어 이들이 너무 일사불란하다는 게 미 언론의 걱정이다.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큰 탓이다. 집단사고란 비슷한 이념과 생각에다 응집력까지 높은 그룹의 경우 만장일치를 추진하면서 반대 의견을 듣지 않으려는 경향을 뜻한다. 1961년 케네디 행정부 때 감행됐다 실패한 ‘피그만 침공’이 대표적 케이스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측근들은 ‘매사추세츠 마피아’로 불리던 하버드대 동창이거나 고향 친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들은 별 군사지식이 없는데도 쿠바 난민으로 구성된 게릴라를 침투시키면 카스트로 정권은 쉽게 무너질 것으로 오판했다.   그간 계속된 바이든 행정부의 실책도 집단사고 탓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바이든 외교팀은 아프간 철군이 별문제 없을 걸로 낙관했으며 대러시아 경제 제재로 푸틴 정권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믿었다. 큰 착각이었다.   이렇듯 미국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윤석열 외교팀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 김성한 대통령 국가안보실장, 조태용 주미 대사 등 한국 외교를 짊어진 핵심 인사들은 하나같이 실력파들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국제정치학 박사인 박 장관은 4선 의원으로 미 워싱턴 조야는 물론 중국·일본에도 인맥이 두텁다. 고려대 교수 출신의 김 실장은 외교부 차관을 역임해 학문적 깊이에다 실무 경험까지 갖춘 보기 드문 실력파다. 정통 외교 관료인 조 대사는 진작부터 장관감으로 꼽히던 에이스로 블링컨 국무장관과 막역하다. 누가 봐도 최상의 드림팀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모두가 한·미 관계를 우선시하는 ‘지미(知美)파’라는 점이다. 여기에 정재호 주중 대사도 미국에서 석·박사를 땄으며, 장호진 주러 대사 역시 북미국 심의관과 북미국장을 지낸 알아주는 미국통이다. 그나마 게이오대에서 박사를 딴 윤덕민 주일 대사조차 석사는 미국에서 했다. 윤석열 외교팀 전체가 한·미 동맹 중시파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런 라인업은 문재인 정권 시절, 한·미 관계는 소홀히 한 채 대북 관계에 올인했던 잘못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하지만 만사 과유불급이다. 이래선 바이든의 대외정책과 한국 외교 간 싱크로율이 100%에 달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때이긴 하나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미국 주도의 광범위한 러시아 제재에 나토 회원국 및 캐나다·호주·뉴질랜드 외에 한국·일본만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곱씹어봐야 한다. 대만·싱가포르도 가담했지만 일부에 그쳤다. 반면에 친미 국가로 여겨졌던 인도·사우디아라비아·UAE에다 특수 관계인 이스라엘까지 불참했다. 이런데도 윤석열 정부에선 심각한 논쟁은 없었다고 한다.   어떤 조직이든 중대 결정 앞에선 여러 의견이 쏟아지는 게 마땅하다. 중국 제재를 조율할 때면 한·미 동맹의 중요성만큼이나 수출업자들의 피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와야 한다. 무릇 다양한 유전형질을 가진 생명체일수록 건강한 법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06.21 00:36

  • [남정호의 시시각각] 바이든 미소와 한국의 국익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 회장님, 미국을 선택해줘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차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그는 지난 22일 서울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105억 달러(13조여원) 규모의 대미 투자 방침을 밝히자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이번 바이든 방한의 하이라이트로 꼽힐 만한 장면이다. 앞서 삼성 역시 170억 달러(21조여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렇듯 외국 업체의 미국 투자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그이지만 자국 기업의 해외 진출은 세금으로 때려잡는다. 바이든 행정부는 해외 진출 기업의 법인소득세를 21%에서 28%로 올렸다. 반면 국내로 돌아오면 10%의 세금 감면 혜택을 준다. 이 덕에  지난해 1300여 개 미국 기업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럼 한국은? 고작 26개에 불과하다. 아무리 양국 경제 규모가 다르고, 국내의 격렬한 노동운동이 기업의 등을 떠민다 해도 너무하다. 요컨대 미국은 삼성·현대까지 유치하면서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으로 큰 재미를 본다. 반면 청년 실업이 큰 문제인 한국에선 질 좋은 대기업의 일자리가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2일 오전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현대차의 105억 달러 대미 투자 계획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뉴스1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첫 한·미 정상회담이 굳건한 안보 동맹 확인과 온갖 덕담 속에 끝났다. 하지만 바이든의 이번 아시아 순방과 관련, 간과해선 안 될 대목이 있다. 그가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물자의 공급망에서 중국을 쫓아내기 위한 새 기구를 설립한다는 사실이다. 23일 일본에서 출범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가 바로 그것이다. 윤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IPEF에 참여해 우리의 역내 기여와 역할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도 만들어 나갈 것"이라며 가입을 공식화했다. 문재인 정권 때 흐트러진 한·미 동맹을 추슬러야 할 현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정일 것이다. 하지만 유념해야 할 건 중국이 대놓고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6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박진 외교부 장관과의 첫 화상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디커플링과 공급망 차단의 부정적인 경향에 반대하고 글로벌 산업·공급망의 안정성과 원활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덕담을 주고받는 첫 상견례에서 남의 나라를 대놓고 몰아세우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 보복으로 관광 업계만 21조원의 피해를 봤다고 한다. 그러니 행여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단도리를 해야 한다. 이뿐 아니다. IPEF에 참여하더라도 맹목적인 미국 추종은 현명하지도, 온당하지도 않다. IPEF가 민주주의 국가 간 협력이란 달콤한 구호로 포장돼 있지만 실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는 교역 체제로 보이는 까닭이다. 호혜적 무역 질서의 기본은 관세의 적절한 인하다. 그래야 국가 간 교역이 활성화돼 서로 이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IPEF에선 관세 인하는 빠진다. 관세 인하는커녕 노동과 환경 문제 등과 관련된 규제 조치들이 들어간다고 한다.  아무리 동맹 관계라도 따질 건 따져야 한다. 미국과 전통적 우방이라는 유럽연합(EU)은 숱한 무역 문제를 두고 피 터지게 싸워왔다. 유전자변형 식품, 미국산 바나나, 성장호르몬 주입 소고기 등을 둘러싼 양측 간 분쟁은 끊일 줄 몰랐다.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산 철강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해 EU 측의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렇다고 관계가 나빠지지 않았다.  바이든은 거칠고 무례한 전임 도널드 트럼프와는 다르다. 신사의 풍모를 지녔다. 그렇다고 부드럽고 달콤한 그의 미소와 립서비스에 취해 마땅히 챙겨야 할 대가를 잊어선 안 된다. IPEF의 구체적 내용은 협상을 통해 만들어진다 하니 국익에 도움이 되도록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 요컨대 한·미 동맹의 큰 틀은 유지하되 대중정책까지 포함, 사안별로 시시비비를 따져 실리에 맞게 대응하는 게 가야 할 길이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05.24 0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