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민
필진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논설실장
편집국장
정치부장,정치에디터
통일문화연구소장
중앙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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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컷칼럼] 수도권 집중 해소부터 풀어야 메가시티도 성공
. . . ━ ‘서울시 김포구’ 편입 논란, 어떻게 볼 것인가 경기도 김포시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겠다는 국민의힘의 구상이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수도권 편중 심화 우려와 지방소멸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며 자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비판과 반대가 잇따르고 있다. ‘서울시 김포구’ 입법을 위한 당 특별위원회는 ‘메가시티 서울’ 간판 대신 ‘뉴시티 프로젝트 특위’란 어정쩡한 이름을 달고 출범했다. “서울·부산·광주 3대 메가시티를 키워 국가 균형 발전을 하자는 것”(조경태 특위 위원장)이라지만, 역풍을 의식한 성격이 짙다. ‘김포 편입’은 공론화 없이 공약화해 단번에 폭발성 강한 정치 이슈가 돼버렸다. 김포만의 문제가 아닌게 됐다. 판이 커진 것이다. 깊이 있는 논의는 실종됐다. 총선 득실 계산과 찬반 대결만 남았다. 이대로 흘러가게 놔둬선 위험하다. 국가 백년대계를 설계한다는 각오로 전략적 토론을 시작할 때다. ■ 「 “수도권 표심 노린 총선용” 의심 지방소멸, 수도권 편중 부채질 런던광역시 둘러싸고 대혼돈 일본은 전국에 82개 중추도시 지방도시 특성화 전략 만들어 수도권 인구 지방으로 분산을 」 대한민국은 저출산, 고령화, 수도권 집중이라는 트라이앵글의 늪에 빠져 있다. 수렁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생존조차 위협받을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 김포의 서울 편입 여부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미래 전략 수립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메가시티 이슈가 다뤄져야 하는 이유다. ━ “서울 공화국만 남게 될 것”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메가시티 서울’에 대한 비(非)서울, 비수도권의 반발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울시와 같은 생활권인 (김포) 주민 편의를 위해 당론으로 추진할 것”이란 발언이 여당 대표에 의해, 그것도 전문가 토론이나 공청회 한 번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김기현 대표는 지방(울산) 출신이다. 울산시장을 지냈고 울산에 지역구를 갖고 있는 4선 의원이다. 균형 발전에 대한 현실 인식과 지방소멸에 대한 위기감이나 클 수밖에 없을 텐데 ‘닥치고 메가 서울’을 밀어붙이고 있다. 아이러니다. 당장 같은 당 소속 광역단체장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국민적 공감대도 없는 정치공학적 포퓰리즘이며 실현 가능성 없는 정치 쇼”(유정복 인천시장)라거나 “서울을 더 비대화시키는 시대에 역행하는 정책”(홍준표 대구시장)이란 비판이 나왔다. 김태흠 충남지사도 “지방 분권과 균형 발전의 청사진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수도권 인구는 2605만3000명이다. 서울·인천·경기를 합친 국토 면적은 12%에 불과한데 전체 인구의 절반(50.5%)이 몰려있다. 문제는 전체 인구가 감소세로 전환된 2021년 이후 수도권 집중이 더욱 심화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추세라면 2050년엔 국민의 53%가 수도권에 몰릴 것으로 통계청은 전망했다. 일자리·돈·기회를 빨아들이는 ‘수도권 블랙홀’은 지방소멸을 재촉한다. “결국 서울 공화국만 남게 될 것”(무소속 기초단체장)이란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 “메가시티, 수도권 표심 흔들 수도” ‘김포 편입’ 불씨는 주변 도시로 퍼지고 있다. “서울과 출퇴근이 공유되는 곳의 서울시 편입”이란 발언이 불을 댕겼다. 광명·과천·부천·고양·구리·하남·성남 등 인근 ‘베드타운’이 들썩이고 있다. 한 중진 정치인은 “최근 몇 년 사이 부동산값 상승 등으로 직장은 서울에 두고 경기도에서 출퇴근하는 인구가 불어났는데, 메가 서울 공약이 수도권 표심을 흔들 매력적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해당 지역의 야당 의원들이 침묵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총선을 앞둔 여당이 경제 문제 같은 불리한 이슈를 덮고 정치적으로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셈이다. 10년 넘게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의 정치 지형은 ‘기울어진 운동장’ 상태다. 현재도 국회의원 의석의 85%(121석 중 103석)를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다. “수도권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여당 당세를 반전시키려는 노림수”라거나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 이후 불안정해진 김 대표가 당내 입지를 의식한 것”이라고 비난이 야당에서 나오는 건 이런 민감한 표심을 의식한 것이다. 향후 전망을 장밋빛 일색으로 보긴 어렵다. 여당은 ‘메가시티 구상’이라고 둘러대지만 주변 도시를 흡수해 몸집과 크기를 불리는 것과 인근 도시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핵심도시의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 개념인 메가시티는 180도 다른 얘기다. 한 자치단체장은 “메가시티란 말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부동산 개발업자들”이라며 “서울 주변 도시들의 부동산 가격만 올려놓을 공산이 크다”고 부작용을 우려했다. 국가적 존망이 걸린 문제를 심모원려(深謀遠慮) 없이 밀어붙이는 아마추어리즘과 무책임이 자칫 더 큰 재앙의 불씨를 잉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난 정권의 국민 갈라치기와 포퓰리즘을 앞장서 비판했던 이들이 선거를 앞두고 포퓰리즘 공약을 남발하는 데 대한 비난 여론도 거세다. ━ 통합→해체→부활, 런던광역시 행정구역이나 국토 개편은 사실 그 자체가 정치적 행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한 사례가 있다.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의 민주정을 연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치개혁은 행정개혁으로 시작됐다. 아테네 전역을 행정구로 분할한 행정개혁으로 귀족들의 소유지가 쪼개져 결과적으로 귀족계급의 권력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영국 런던광역시(Great London Council, GLC)의 사례도 시사하는 바 크다. 지방자치 권위자인 김병준 전 국민대 교수의 저서 『지방자치론』엔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겼다 없어졌다 한 런던광역시의 사례가 자세히 나와 있다. 내용을 소개한다. 런던광역시는 1963년 구(舊) 런던 지역에 있는 12개 자치구와 외곽의 20개 버러(borough), 특별자치체 성격을 지닌 런던시(City of London)를 합쳐서 발족됐다.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한 구 런던 지역을 보수 중산층이 많은 외곽 지역과 통합해 사회주의자들의 도시 정부 장악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통합 런던광역시 내에 점차 사회주의 세력이 늘어나더니 1981년 선거에선 노동당이 92개 의석 중 48석을 차지하며 의회를 장악했다. 신좌파 리빙스턴의 지도 아래 지하철·버스 운임 인하, 부유세 징수 등 사회주의 정책을 강행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대처 총리는 행정의 효율화란 이름 아래 1986년 런던광역시를 해체한다. 엄청난 정치적 소요와 갈등이 일어났으나 1986년 런던광역시는 폐지되고, 런던은 중앙 정부와 기초지방정부(City of London)가 바로 연결되는 단층제가 됐다. 하지만 1997년 집권한 노동당은 다시 런던광역시 부활을 추진, 2000년 5월 런던광역정부(Greater London Authority, GLA)를 재출범시켰다. 행정구역 개편이 원하는 정치 지형의 변화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실증적 사례다. ━ 지방소멸 간과하면 나라 패망 수도권 집중은 청년의 이동이 견인한다. 지방의 질 낮은 일자리, 저임금, 문화 소외, 기회 박탈 때문이다. 수도권 편중이 OECD 26개국 중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심각한 수준이란 건 그만큼 지방의 생존기반이 취약하다는 걸 입증한다. 청년의 수도권 이동은 출생률 저하와 인구 감소를 가속하고, 이는 다시 지역 경제의 축소로 이어져 지방소멸에 이르게 한다. 일본 정부의 지방창생(地方創生), 즉 지역균형 발전 정책의 모체가 된 마쓰다 히로야(増田寛也) 일본 우정 홀딩스 사장의 저서 『지방소멸』은 정독해야 할 ‘교과서’다. 이와테 현 지사와 총무 대신을 지낸 마쓰다 사장은 일본 청년들의 도쿄권(도쿄도,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현)으로의 과도한 집중으로 지방 도시들이 사라져가고 있으며, 이로 인한 출산율 감소가 나라의 패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방의 인구 감소가 지속할 경우 2040년엔 90개 지역이 소멸할 것이란 주장이 경종을 울리면서 일본 정부는 저출산·고령화 대책 마련에 본격 착수했다. 도쿄권을 제외한 전국 82개 도시를 중추 중핵 도시로 지정하고, 도쿄에서 지방으로 이주하는 가구에 지원금을 줬다. 도쿄도나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현에 살면서 도쿄로 출퇴근하는 경우도 지원금 혜택을 받게 했다. 김포식 ‘당근’ 정책과는 정반대다. 손쉬운 서울 편입 방식이 아니라, 각 지방을 특성화 생활권 거점 도시로 재편하고 김포에서 각 지방으로의 이전을 유인하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 수도권 집중을 막고 국토 균형발전과 지방시대를 여는 데 부합하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글 =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 임근홍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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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수도권 집중 해소부터 풀어야 메가시티도 성공
━ ‘서울시 김포구’ 편입 논란, 어떻게 볼 것인가 이정민 칼럼니스트 경기도 김포시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겠다는 국민의힘의 구상이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수도권 편중 심화 우려와 지방소멸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며 자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비판과 반대가 잇따르고 있다. ‘서울시 김포구’ 입법을 위한 당 특별위원회는 ‘메가시티 서울’ 간판 대신 ‘뉴시티 프로젝트 특위’란 어정쩡한 이름을 달고 출범했다. “서울·부산·광주 3대 메가시티를 키워 국가 균형 발전을 하자는 것”(조경태 특위 위원장)이라지만, 역풍을 의식한 성격이 짙다. ‘김포 편입’은 공론화 없이 공약화해 단번에 폭발성 강한 정치 이슈가 돼버렸다. 김포만의 문제가 아닌게 됐다. 판이 커진 것이다. 깊이 있는 논의는 실종됐다. 총선 득실 계산과 찬반 대결만 남았다. 이대로 흘러가게 놔둬선 위험하다. 국가 백년대계를 설계한다는 각오로 전략적 토론을 시작할 때다. ■ 「 “수도권 표심 노린 총선용” 의심 지방소멸, 수도권 편중 부채질 런던광역시 둘러싸고 대혼돈 일본은 전국에 82개 중추도시 지방도시 특성화 전략 만들어 수도권 인구 지방으로 분산을 」 대한민국은 저출산, 고령화, 수도권 집중이라는 트라이앵글의 늪에 빠져 있다. 수렁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생존조차 위협받을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 김포의 서울 편입 여부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미래 전략 수립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메가시티 이슈가 다뤄져야 하는 이유다. “서울 공화국만 남게 될 것”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오른쪽 셋째)가 지난달 30일 수도권 신도시 교통대책 마련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시와 같은 생활권인 주민 편의를 위해 김포시의 서울시 편입을 당론으로 추진할 것”이란 발언이 나왔다. [연합뉴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메가시티 서울’에 대한 비(非)서울, 비수도권의 반발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울시와 같은 생활권인 (김포) 주민 편의를 위해 당론으로 추진할 것”이란 발언이 여당 대표에 의해, 그것도 전문가 토론이나 공청회 한 번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김기현 대표는 지방(울산) 출신이다. 울산시장을 지냈고 울산에 지역구를 갖고 있는 4선 의원이다. 균형 발전에 대한 현실 인식과 지방소멸에 대한 위기감이나 클 수밖에 없을 텐데 ‘닥치고 메가 서울’을 밀어붙이고 있다. 아이러니다. 당장 같은 당 소속 광역단체장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국민적 공감대도 없는 정치공학적 포퓰리즘이며 실현 가능성 없는 정치 쇼”(유정복 인천시장)라거나 “서울을 더 비대화시키는 시대에 역행하는 정책”(홍준표 대구시장)이란 비판이 나왔다. 김태흠 충남지사도 “지방 분권과 균형 발전의 청사진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수도권 인구는 2605만3000명이다. 서울·인천·경기를 합친 국토 면적은 12%에 불과한데 전체 인구의 절반(50.5%)이 몰려있다. 문제는 전체 인구가 감소세로 전환된 2021년 이후 수도권 집중이 더욱 심화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추세라면 2050년엔 국민의 53%가 수도권에 몰릴 것으로 통계청은 전망했다. 일자리·돈·기회를 빨아들이는 ‘수도권 블랙홀’은 지방소멸을 재촉한다. “결국 서울 공화국만 남게 될 것”(무소속 기초단체장)이란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메가시티, 수도권 표심 흔들 수도” ‘김포 편입’ 불씨는 주변 도시로 퍼지고 있다. “서울과 출퇴근이 공유되는 곳의 서울시 편입”이란 발언이 불을 댕겼다. 광명·과천·부천·고양·구리·하남·성남 등 인근 ‘베드타운’이 들썩이고 있다. 한 중진 정치인은 “최근 몇 년 사이 부동산값 상승 등으로 직장은 서울에 두고 경기도에서 출퇴근하는 인구가 불어났는데, 메가 서울 공약이 수도권 표심을 흔들 매력적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해당 지역의 야당 의원들이 침묵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신재민 기자 총선을 앞둔 여당이 경제 문제 같은 불리한 이슈를 덮고 정치적으로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셈이다. 10년 넘게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의 정치 지형은 ‘기울어진 운동장’ 상태다. 현재도 국회의원 의석의 85%(121석 중 103석)를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다. “수도권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여당 당세를 반전시키려는 노림수”라거나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 이후 불안정해진 김 대표가 당내 입지를 의식한 것”이라고 비난이 야당에서 나오는 건 이런 민감한 표심을 의식한 것이다. 향후 전망을 장밋빛 일색으로 보긴 어렵다. 여당은 ‘메가시티 구상’이라고 둘러대지만 주변 도시를 흡수해 몸집과 크기를 불리는 것과 인근 도시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핵심도시의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 개념인 메가시티는 180도 다른 얘기다. 한 자치단체장은 “메가시티란 말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부동산 개발업자들”이라며 “서울 주변 도시들의 부동산 가격만 올려놓을 공산이 크다”고 부작용을 우려했다. 국가적 존망이 걸린 문제를 심모원려(深謀遠慮) 없이 밀어붙이는 아마추어리즘과 무책임이 자칫 더 큰 재앙의 불씨를 잉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난 정권의 국민 갈라치기와 포퓰리즘을 앞장서 비판했던 이들이 선거를 앞두고 포퓰리즘 공약을 남발하는 데 대한 비난 여론도 거세다. 통합→해체→부활, 런던광역시 행정구역이나 국토 개편은 사실 그 자체가 정치적 행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한 사례가 있다.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의 민주정을 연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치개혁은 행정개혁으로 시작됐다. 아테네 전역을 행정구로 분할한 행정개혁으로 귀족들의 소유지가 쪼개져 결과적으로 귀족계급의 권력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영국 런던광역시(Great London Council, GLC)의 사례도 시사하는 바 크다. 지방자치 권위자인 김병준 전 국민대 교수의 저서 『지방자치론』엔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겼다 없어졌다 한 런던광역시의 사례가 자세히 나와 있다. 내용을 소개한다. 런던광역시는 1963년 구(舊) 런던 지역에 있는 12개 자치구와 외곽의 20개 버러(borough), 특별자치체 성격을 지닌 런던시(City of London)를 합쳐서 발족됐다.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한 구 런던 지역을 보수 중산층이 많은 외곽 지역과 통합해 사회주의자들의 도시 정부 장악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통합 런던광역시 내에 점차 사회주의 세력이 늘어나더니 1981년 선거에선 노동당이 92개 의석 중 48석을 차지하며 의회를 장악했다. 신좌파 리빙스턴의 지도 아래 지하철·버스 운임 인하, 부유세 징수 등 사회주의 정책을 강행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대처 총리는 행정의 효율화란 이름 아래 1986년 런던광역시를 해체한다. 엄청난 정치적 소요와 갈등이 일어났으나 1986년 런던광역시는 폐지되고, 런던은 중앙 정부와 기초지방정부(City of London)가 바로 연결되는 단층제가 됐다. 하지만 1997년 집권한 노동당은 다시 런던광역시 부활을 추진, 2000년 5월 런던광역정부(Greater London Authority, GLA)를 재출범시켰다. 행정구역 개편이 원하는 정치 지형의 변화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실증적 사례다. 지방소멸 간과하면 나라 패망 수도권 집중은 청년의 이동이 견인한다. 지방의 질 낮은 일자리, 저임금, 문화 소외, 기회 박탈 때문이다. 수도권 편중이 OECD 26개국 중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심각한 수준이란 건 그만큼 지방의 생존기반이 취약하다는 걸 입증한다. 청년의 수도권 이동은 출생률 저하와 인구 감소를 가속하고, 이는 다시 지역 경제의 축소로 이어져 지방소멸에 이르게 한다. 일본 정부의 지방창생(地方創生), 즉 지역균형 발전 정책의 모체가 된 마쓰다 히로야(増田寛也) 일본 우정 홀딩스 사장의 저서 『지방소멸』은 정독해야 할 ‘교과서’다. 이와테 현 지사와 총무 대신을 지낸 마쓰다 사장은 일본 청년들의 도쿄권(도쿄도,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현)으로의 과도한 집중으로 지방 도시들이 사라져가고 있으며, 이로 인한 출산율 감소가 나라의 패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방의 인구 감소가 지속할 경우 2040년엔 90개 지역이 소멸할 것이란 주장이 경종을 울리면서 일본 정부는 저출산·고령화 대책 마련에 본격 착수했다. 도쿄권을 제외한 전국 82개 도시를 중추 중핵 도시로 지정하고, 도쿄에서 지방으로 이주하는 가구에 지원금을 줬다. 도쿄도나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현에 살면서 도쿄로 출퇴근하는 경우도 지원금 혜택을 받게 했다. 김포식 ‘당근’ 정책과는 정반대다. 손쉬운 서울 편입 방식이 아니라, 각 지방을 특성화 생활권 거점 도시로 재편하고 김포에서 각 지방으로의 이전을 유인하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 수도권 집중을 막고 국토 균형발전과 지방시대를 여는 데 부합하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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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보선 참패가 국민의힘 총선 승리 ‘백신’ 될까
이정민 칼럼니스트 강서구청장 보궐 선거 참패로 시끌시끌하던 국민의힘이 ‘빠르게’ 안정세를 찾아가는 모양새다. 권력 순응적인 여당 체질 때문인지 겉보기엔 큰 동요가 없어 보인다. 패배 사흘 만에 윤석열 대통령의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 추진” 발언이 나오면서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긴 하다. 하지만 총선을 불과 6개월 남겨놓고 17%p라는 큰 격차로 패배한 뒤끝이라 당 안팎에선 “이번엔 다를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여의도(국힘)와 용산(대통령실)의 관계 설정, 총선 전략 등을 둘러싼 치열한 갑론을박이 일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높았다. 강서 패배는 여당이 민심 전달과 대통령실 독주를 견제하지 못한 데 대한 민심의 심판이란 게 대체적 분석이다. 과거 16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집권당이 대통령실만 추종하고 하부조직처럼 기능하니 국민이 분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 「 ‘2기 김기현 체제’로 결론 난 여당 백신효과 보려면 치열한 혁신 노력 독선·오만 견제,책임있는 여당 돼야 중도층 경시한 문 정권이 반면교사 」 선데이 칼럼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김기현 체제론 총선 못 치른다”는 아우성이 쏙 들어갔고, “총선 지면 은퇴”로 배수진을 친 김 대표는 사무총장 등 임명직 당직자 8명의 사표를 받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능란한’ 솜씨를 발휘했다. 당의 최고 지도부인 대표와 최고위원들은 남고, 실무 당직자들이 보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떠나는 어정쩡한 봉합이 됐다. “정치는 신념을 실천하고 결과를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 막스 베버의 ‘책임 윤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결말이다. 또 ‘영남당’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라며 친윤 핵심 이철규 사무총장(강원 동해-태백-삼척-정선) 자리에 TK 출신 이만희 의원을 앉혔다. 윤 대통령 후보 시절 수행단장을 지낸 인사다. 이로써 총선을 이끌 대표(울산)-원내대표(대구 달서을)-사무총장(경북 영천시·청도군) 등 핵심 간판이 영남 일색이 됐다. 수도권 의석이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걸 감안하면, 아리송한 인선이다. 김기현 대표가 물러나야 한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2기 김기현 체제’가 대안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과정이 혁신의 에너지와 역량을 모으는 반전의 계기로 작용했는지가 중요하다. 이번 참패를 혁신의 계기로 삼아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면 된다는 ‘예방주사론’이 먹혀들려면 보선 패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에 대한 불꽃 튀는 토론과 처절한 고민이 선행돼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강서 패배는 정치 지형의 변화를 시사한다. 지난 대선의 승패를 갈랐던 중산층·중도·청년층이 모두 이탈해 대선 이전의 지형으로 회귀해버렸다. 보수당이 참패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김기현 대표는 “민심과 괴리되지 않도록 당이 민심 전달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했는데, 레토릭만으로 등 돌린 중도층의 환심을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불과 1년 5개월 전 문재인 정권의 몰락이 반면교사다. 문 전 대통령은 40%의 콘크리트 지지와 180석에 육박하는 압도적 국회 의석을 갖고도 정권 연장에 실패했다. 강성 팬덤에 편승한 편 가르기 정치에 대한 중도층의 혐오와 경고를 외면한 결과다. 내로남불, 편 가르기, 진영·이념전쟁에 신물 난 국민은 공정과 정의, 상식과 합리, 통합과 민생 정치로의 변화와 혁신을 기대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통합과는 거리가 먼, 엘리트 일색의 측근 인사와 부적격 인사를 강행하는 독선을 보였다. 편중 인사, 부실 검증이란 지적에 “과거엔 민변 출신이 도배를 하지 않았나”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항변, 불통 이미지를 더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34명의 장관급 인사가 야당 동의 없이 임명됐는데 윤석열 정부 1년 5개월 만에 18명이 여야 합의없이 임명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토록 비난했던 청문회 패싱,국회 경시가 문 정부와 닮은꼴이다. 이러니 내로남불이란 비판을 받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죽창가, 토착 왜구 같은 선동적 구호로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빈자와 부자, 노동자와 기업주, 의사와 간호사의 틈새를 벌려 정권 유지의 불쏘시개로 썼다. 적폐청산이란 모호한 구호를 내걸고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만들어 나라를 두 동강 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윤 정부 들어 이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제일 중요한 게 이념” “좌파 이념에 찌든 운동권 패거리 집단” 운운하며 자유민주주의 세력 대 공산 전체주의 세력의 대립 구도로 이념전쟁에 불을 붙이더니 느닷없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놓고는 내전이라도 불사할 기세다. 이준석 전 대표 등 윤심을 거스르는 인사들은 가차없이 쳐냈다. 유승민 전 의원의 대표 출마를 막으려 하루아침에 ‘게임의 룰’도 바꿨다. 완장 찬 친윤 실세들의 목소리만 요란할 뿐 여당은 무기력하고 무능했다. 강서 패배는 독선과 오만을 견제하지 못하고 민생·국민통합과 거꾸로 간 권력 운영에 대한 경고다. ‘낙타의 등골을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the last straw)’인 셈이다. 국힘 국회의원은 111명이나 된다. 민주당의 거대 의석 때문에 초라해 보일 뿐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과 성찰, 진정성과 용기없이 공천과 배지에만 연연한다면 백신을 수십번 맞아도 물백신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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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퍼스펙티브] 당내 통합과 사법 리스크 방어…두 마리 토끼 잡아야
━ 기사회생한 이재명 체제와 4·10 총선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으로 이재명 체제는 내년 4·10 총선의 상수가 됐다. 이 대표의 리더십과 명예에 큰 상처를 입긴 했지만, 이변이 없는 한 친명계 주도로 총선을 치르게 됐다. 추석 연휴를 전후해 쏟아지고 있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대혼전 양상이다. 0.73%의 초박빙 승부를 벌였던 대선 연장전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 「 이 대표, 난제 넘어야 총선 승리 반대파 숙청 강행땐 분당 가능성 여당, 이념전쟁·야당심판 탈피 민생과 정책, 비전으로 승부를 」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따른 반사이익에 의존하는 여권의 권력 운영으로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다. 2년 넘게 계속되는 강대강의 극한 대결과 양극단 정치에 대한 혐오가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중도 지지층의 이탈이 가속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40%를 넘지 못하는 박스권 지지율에 갇혀 있는 이유다. 이대로라면 총선은 거대 양당의 정권심판론과 야당심판론이 격돌하는 격투장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제3세력 등장 가능성도 상존한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국민의힘과 민주당 세력으론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고 나라의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국민의 실망이 커지고 있다”며 “이대론 안 된다는 여론이 폭발하면 새로운 정치 세력이 힘을 받게 될 것”이라고 봤다. 추석 전 ‘새로운 선택’ 창당을 공식 선언한 금태섭 전 민주당 의원과 ‘한국의 희망’ 창당을 주도하고 있는 무소속 양향자 의원은 최근 연대를 논의하며 본격적으로 세 불리기에 나섰다. 내년 총선판을 흔들 변수를 짚어봤다. 통합과 ‘개딸’ 사이의 딜레마 더불어민주당 조정식 사무총장등 당직자들이 이재명 대표를 찾아 대화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대표 앞에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우선 내분을 수습해 통합과 협력의 리더십으로 당을 재건해야 한다. 단일대오를 유지, 정권심판론이 먹혀들면 총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한편으론 줄줄이 이어질 재판과 검찰 수사 등 사법 리스크를 방어해야 한다. 둘 다 녹록지 않다. 온건파 박광온 전 원내대표의 사퇴로 친명계 홍익표 원내대표가 당선되는 등 당은 오히려 친명 색채가 강화됐다. 당장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정청래 최고위원)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야무야 넘어가는 데 반대한다”(서은숙 최고위원)는 강경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체포동의안 가결파를 색출해야 한다는 압박도 높아지고 있다. 강성파의 요구는 이 대표의 통합 행보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이다. 이와 관련, 서영교 최고위원은 “이 대표가 당내 분열을 막고 민주당이 한 팀이 될 수 있도록 통합과 결속 행보를 본격화할 거로 본다”며 “분당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수도권 출신의 민주당 중진 의원은 “겉으론 대동단결하는 통합 이미지로 가면서 물밑으론 강성 당원을 동원해 친문재인·친이낙연계와 (체포동의안) 가결파 등 이 대표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을 솎아내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 선출직평가위원회가 현역의원 평가 기준을 확정한 데 이어 원외 친명계를 중심으로 ‘중진 의원 험지 출마’ 요구가 나오는 것이 징후라고 봤다. 3선 이상 중진 의원은 비명계가 다수다. 개혁 명분을 내세워 반대파를 숙청, 친명계로 물갈이하기 위한 포석이란 주장이다. 당 안팎에선 일부의 이탈이냐, 아니면 상당수가 떨어져 나가는 분당 수준으로 갈 것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분열은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 퍼지고 있다. 민주당의 핵심 기둥인 호남 여론이 예전과 달리 미지근한 관망세라는 점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싣고 있다. 전북 출신의 한 전직 의원은 “법원의 영장 기각엔 환호하는 분위기지만 아직 재판이 남아있으니 좀 더 두고 봐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여론”이라고 호남의 추석 민심을 전했다. 지난 대선에서 이 대표에게 압도적 몰표(광주 84.8%)를 줬던 호남은 작년 8월 당 대표 경선에선 35%의 저조한 투표율(전남·북,광주)을 보였다. 이 대표가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6·1 지방선거의 광주 투표율은 전국 최저(37.7%)였다. 전폭적으로 밀었던 대선에서 패배한 데 대한 실망감도 있지만 ‘개딸’ 등 강성 팬덤에 대한 반감이 복잡하게 작용했다는 해석이다. “물밑 분당설…연말 가시화할 것” 추석 연휴 중 경기도 연천의 전방부대 장병들을 격려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 [사진 대통령실] 구속을 면했다곤 하나 이 대표의 리더십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구속 기각 결정을 한 유창훈 판사조차 ▶이 대표의 혐의 일부는 소명됐고 ▶상당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명시한 건, 이 대표가 사법 리스크를 헤쳐나가기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영장 기각 이후 민주당이 윤 대통령 사과, 한동훈 법무장관 사퇴(혹은 탄핵), 영수회담 제의 등 정치적 공세에 집중하고 있는 데는 이 대표의 희생양 이미지를 부각함으로써 사법 리스크를 무력화하고 정치적 부활을 꾀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그런 만큼 이재명 친정체제 강화와 열성 지지파의 지원 사격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신당설’이 확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호남의 한 중진은 “이 대표로선 친정체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고 차기 대선 후보가 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에 반대 세력을 잘라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수가 40여 명에 이른다. 반대파로 낙인찍힌 의원들 입장에선 싸워나 보고 죽자는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물밑에서 벌써 움직임이 시작됐는데 연말께면 수면 위로 가시화할 것”이라고 봤다. 역대 선거에서 보듯 간판스타 없는 신당의 성공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구축했던 3김이나 대중적 돌풍을 일으켰던 안철수 신당 정도가 그나마 성공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사법 리스크와 통합이라는 두 개의 전선을 마주해야 할 이 대표엔 정치적 부담이다. 상처 입은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이 대표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지지층 결집이냐 vs 중도 확장이냐 이재명 대표의 기사회생을 보는 국민의힘의 관측은 엇갈린다. “이 대표가 구속됐다면 오히려 야당이 똘똘 뭉치게 하는 빌미가 됐을 것”이라는 쪽과 “이재명이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총선이 정권심판론으로 갈 가능성이 커져 여당에 더 불리해졌다”는 정반대의 전망이 나온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총선은 정권 심판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여당이 고전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야당 심판론으로 대응한다면 여당 필패”라며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민생과 정책,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비전 제시로 선거의 과녁을 바꿔야 한다”(서울의 원외 위원장)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장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주시하고 있다. 김태우 전 구청장을 재공천하며 적격성 논란이 일고 있는 데다 판이 커지면서 수도권, 특히 서울 민심을 측정할 바로미터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김태우 후보가 낙선할 경우 총선을 6개월 앞둔 여당은 후폭풍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책임 공방이 거세질 경우 지도체제가 흔들릴 수도 있다. 당 일각에선 “집권 1년 5개월이 넘도록 이재명 대표 사법 리스크에 의존, 이념·역사전쟁에 몰두하면서 국민 눈에 무능한 반공 보수주의 정권으로 비치고 있다”며 “국정운영 기조의 대 전환이 시급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추석 연휴 전인 지난달 22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 평가는 32%, 부정 평가는 59%였다.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보수·중도파의 이탈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같은 조사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33%였다. 윤 대통령이 신당을 만들까 여권 일각에선 중도 확장을 위해, 승부사 기질이 있는 윤 대통령이 모종의 결단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국민의힘 간판을 내리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대거 영입해 중도층을 공략하는 신당 창당 시나리오다. 역대 대통령들도 신당 카드로 난국을 돌파하곤 했다. 3당 합당으로 집권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5대 총선을 4개월여 앞둔 1995년 12월 민주자유당 간판을 내리고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명망가들을 영입하고 대선 후보 경선제를 도입하는 등 개혁 이미지로 임기 말 치러진 총선인데도 승리로 이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6대 총선을 앞둔 2000년 1월 운동권 출신 ‘젊은 피’ 수혈과 전문가 영입으로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해 선전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권 초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승부수로 총선 압승을 거뒀다. 민주당의 중진 의원은 “국민의힘이 강성 보수세력 공략에서 중도 확장으로 기조를 바꿔 신당 창당 같은 승부수를 띄운다면 민주당은 수세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며 “현역 의원들이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민주당이 내홍에 휩싸일 것”이라고 했다. 탄핵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권은 지난 총선 때 180석을 차지하고도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적폐 청산’을 앞세워 시스템 개혁이 아닌 인적 청산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정권심판론’이나 ‘야당심판론’ 구호 역시 양날의 칼이다.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주지 못하는 선동적 구호는 언제 부메랑이 돼 돌아올지 모른다. 역대 선거의 교훈이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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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컷칼럼] “기업 진출 막고 세금 드는 사업만 하니 발전 없어”
━ 새만금 잼버리 파행이 호남에 던진 과제 새만금 잼버리 파행 사태 한 달-. 지난 28일 문제의 잼버리 야영장터를 돌아봤다. 미궁에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현장에서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전북 부안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5분여를 달리니 새만금 간척지다. 884만㎡의 광활한 간척지, 미처 치우지 못해 나뒹구는 쓰레기 더미와 불볕더위를 피하기 위해 세웠던 그늘막만이 잼버리의 흔적으로 남았을 뿐 제멋대로 자란 잡풀과 진흙으로 뒤덮여 황량했다. 섭씨 25도, 비바람까지 흩뿌려 제법 서늘한 날씨였지만, 이곳은 달랐다. 자동차 문을 열자 후끈한 찜통 열기가 기습했다. 택시기사는 “바닷물의 염분 때문에 덥고 습도도 훨씬 높다. 36~37도 한여름 땡볕에 끈적한 습기까지 차올랐으니 어땠겠냐”며 “이런 곳에선 나무도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의문의 첫 단추가 풀렸다. 야영장으로 쓸 수 없는 땅이었다. 그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안을 찾지도, 제동을 걸지도 못했다. 견제 시스템의 부재, 뿌리 깊은 무비판의 관성이 재앙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 「 “전북을 희생양 만들어선 안 돼” “새만금 지키자”는 목소리 부상 스마트팜, 민주당 반대로 무산 “권력교체 없는 일당 독식 탓 커” 」 ━ “전북도민 총궐기 상황 올지도 …” 새만금 잼버리에 참가한 세계 스카우트 대원들이 태풍 ‘카눈’ 상륙으로 야영장에서 철수하고 있다. 준비 부족 등이 드러나면서 잼버리 파행 책임을 놓고 정치권의 공방이 거세지고 있다. [뉴스1]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참가한 각국 대원들이 8일 오전 전북 부안군 잼버리 대회장에서 조기 철수를 하고 있다. 기록적인 폭염에 이어 태풍 '카눈'이 한반도에 상륙할 것으로 전망되자 세계스카우트연맹은 이날 버스 1000여대를 동원해 156개국 3만6000여명을 수도권으로 철수시킨다. 2023.8.8. [뉴스1] 전북도청에 이어 부안군청에도 감사원 감사반이 들이닥치면서 지역 정가는 긴장에 휩싸였다. 이날 전북 14개 시·군의회 의장 연명으로 “전북도에 책임을 지우는 감사나 감찰이 돼선 안 된다”는 성명이 나왔다. 호남 정치의 거물 정동영 전 의원은 며칠 전 기자 간담회를 열고 “여당이 잼버리를 두고 예산 잿밥이란 표현을 쓴 걸 보고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다. 잼버리 실패로 전북도를 희생양 만들려는 흐름이 감지된다”며 “전북도민이 총궐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북책임론 막아내고 새만금 지키기’가 전북과 호남 정치권의 새로운 어젠다로 급부상 중이다. 거리에서 만난 군민들 대다수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60대 이모씨는 “전북이 뭔 잘못이여? 1000원 내려올 걸 500~600원 내려보내고 잘 치르라고 하니 그런 것이제. 물론 여기도 잘못된 게 있겄지만 현 정권이 문제지, 꺼떡하면 구 정권만 갖고 물어징께 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라고 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장모씨도 “현 정부가 잘했어야지 왜 자꾸 문재인 대통령한테 잘못했다고 핑계를 대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이어 “외국인들이야 왔다 가면 그만이고, 천막도 거둬가 버리면 끝이제. 식당이나 좀 됐을까, 원래부터 잼버리는 군민들과 무관해요”라면서 “그라나도(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데 이번 일로 부안에 대한 이미지만 더 버려부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 “경자유전 농지법이 외려 농민에 고통” 식당과 찻집 등 상가가 몰려있는 읍내. 한 식당에서 지역 유지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지방 공무원 출신인 A씨와 도내에서 중소업체를 운영하는 B씨등 일행은 점심 중이었다. 60대 후반~7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들은 내게 명함을 주긴 했지만 기사에 실명 인용되길 원치 않았다. A=“행사 전부터 저런 뻘밭에서 어떻게 국제행사를 하느냐고 걱정이 많았어요. 군민들이 봐도 이해가 안 되니까요. 이성도 없고, 판단력도 없고…. 어떻게 하면 대회를 성공시킬 것인가 지역민한테 여론도 들어보고 연구도 하고 공감을 끌어내야 했는데 매사에 소홀했어요. 돈만 갖다 쓸 줄 알았지.” B=“아침 조기축구회도 50명이 뛰면 화장실이 5, 6개가 필요해요. 4만명이 오는데 350개를 지었대요. 4000개는 지었어야죠. 물도 맑은 물 놔두고 썩은 물을 끌어다 쓰고. 몇 년 전부터 건의가 많았지만 소용없어요. (스카우트 대원들) 철수는 잘한 거예요. 철수 안 했으면 난리 났을 거예요.” 대화가 감사원 감사로 흘렀다. 잼버리 예산뿐 아니라 부안군의 일반회계까지 들여다보겠다고 하자 군청이 반발한다는 얘기였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잼버리 망친 게 윤석열 대통령의 탁상행정 때문이란 얘기가 많다”고 시중 여론을 전했다. 그러자 “여기는 민주당, 이재명 욕하면 큰일 나. 비판이 없고 매사 정치적 색깔로 따지니…. 비리도 정의로 둔갑시키잖아”라고 했다. 기초의원부터 국회의원까지 민주당 일색인 일당독식 정치가 호남을 견제와 감시의 사각지대로 퇴보시켰다, 기업 투자가 없어 지역 발전도 희망도 없다, 그러니 인재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고 있다는 탄식이 이어졌다. 2016년의 일이다. LG CNC가 새만금에 스마트팜을 조성하려다 농민단체(전국농민회총연맹)와 민주당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했다. LG CNC는 3800억원을 투자해 ICT(정보통신기술)를 바탕으로 스마트팜 설비와 솔루션 개발을 통해 해외 시장을 개척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수확 농산물은 전량 수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파산 직전에 처한 농민들의 상황을 외면한 채 굴지의 대기업이 토마토·파프리카까지 손대면 안 된다”는 민주당 의원들과 전농의 반발로 결국 계획을 접었다. B씨는 열변을 토했다. “농촌엔 거대 자본이 없기 때문에 이런 대기업이 주도하면 농민이 따라가게 되는 거예요. 덴마크를 봐요. 농민 몇만 명이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잖아요. 농민들 보호한다며 기업을 못 들어오게 하는 게 말이 돼요? 노인들 다 돌아가시면 그땐 누가 농사지어요? 민주당이 경자유전(耕者有田) 앞세워 만들어놓은 농지법 때문에 오히려 농민들이 고통받고 있어요. 땅 거래가 안 되고 투자도 안 되니 농민들이 땅을 팔고 싶어도 팔지도 못하고…. 서울 사람들이 땅 사면 여기 땅이 서울로 가버린답니까?” ━ “대기업 있었다면 막장 되진 않았을 것” 권력교체 없는 호남의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은 ‘영원한 여당’이다. 비(非)민주당 세력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전무하다시피 하다〈표 참조〉. 정의당 전북도당이 “파행의 원인은 잼버리를 명분 삼아 새만금신공항등 SOC 사업 추진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라며 “10조원 정도의 개발 자금의 실질적인 이익과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짚어야 한다”는 입장을 낸 정도다. ‘야당’의 빈자리를 대신해 최근 청년·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작지만 새로운 변화다. 이양승 군산대 교수는 권력 교체 없는 호남 정치가 호남을 역선택의 공간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전북 남원 출신인 이 교수는 통화에서 “부패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다. 그러나 부패 시스템이 자리 잡은 곳에선 정상적인 사람도 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혼자만 청정하면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다”라며 “잼버리 사태는 민주당 독점 체제의 전라도 시스템이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권력의 분립, 견제와 감시 같은 민주주의 시스템의 부재 탓이란 주장이다. 호남 시민사회의 건전한 비판과 토론을 회복하자며 2020년 발족한 ‘호남대안포럼’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광주 출신 의사인 박은식 공동 대표는 “대기업의 농업 진출에 반대한다며 스마트팜 무산시키고 소상공인 보호한다며 복합쇼핑몰 입점을 거부했다. 자생적 성장 역량을 갖추게 해주는 기업은 몰아내고 대신 광주형·군산형 일자리, 광주 아시아문화전당같이 세금 들어가는 사업만 벌인다. 정치가 반기업 정서를 부추겨 세금으로 먹고사는 구조를 만드니 지역에 발전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견제 세력이 있었다면 잼버리 부지 선정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대기업이 들어와 있었다면 기업이 기반 시설을 해놨을 것이기 때문에 잼버리가 막장으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지난 27일 창립총회를 마친 호남대안포럼 전북지회의 신승욱 회장도 30대 청년이다. 그는 “새만금 사업 자금 유치에 억지로 꿰맞추다 보니 장소 선정부터 패착이 됐고 전북이 발전은커녕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됐다”며 “분명히 자기 반성할 부분이 있는데도 지역감정으로 대응하고 현 정부 책임으로 떠넘긴다. 이러니 호남 혐오를 키우고 양극단의 대립만 커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화의 성지’ 호남이 ‘성역’이 돼버렸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희생을 정치가 도구로 징발한 탓이 크다. 보수 세력의 호남 고립 전략에 대한 피해의식이 권력에 대한 무서운 집념과 호남 정치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로 똘똘 뭉쳐 폭발적 힘을 발휘하는 운명 공동체가 됐다. 이걸 탓할 순 없다. 문제는 정치가 이런 집단의식을 특정 정당에 대한 숭배를 조장하는 데 악용해온 점이다. 공동체에 대한 열망과 에너지를 지역발전과 자치 역량을 키우는 데 쓰지 않고, 일당 독식 정치를 공고화하는 데 허비했다. 그 결과 정치 엘리트와 관료들은 출세와 입신양명의 기회를 누렸다. 하지만 지역 발전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2023년 전국 17개 시·도별 재정자립도를 보면 전남(28.7%)과 전북(27.9%)이 최하위다. 6개 광역시 중에선 광주광역시(46.2%)가 꼴찌다. 민주화를 위한 호남의 희생과 헌신에 견주면 너무 초라한 성적표 아닌가. 글=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윤지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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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퍼스펙티브] “기업 진출 막고 세금 드는 사업만 하니 발전 없어”
━ 새만금 잼버리 파행이 호남에 던진 과제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새만금 잼버리 파행 사태 한 달-. 지난 28일 문제의 잼버리 야영장터를 돌아봤다. 미궁에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현장에서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전북 부안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5분여를 달리니 새만금 간척지다. 884만㎡의 광활한 간척지, 미처 치우지 못해 나뒹구는 쓰레기 더미와 불볕더위를 피하기 위해 세웠던 그늘막만이 잼버리의 흔적으로 남았을 뿐 제멋대로 자란 잡풀과 진흙으로 뒤덮여 황량했다. 섭씨 25도, 비바람까지 흩뿌려 제법 서늘한 날씨였지만, 이곳은 달랐다. 자동차 문을 열자 후끈한 찜통 열기가 기습했다. 택시기사는 “바닷물의 염분 때문에 덥고 습도도 훨씬 높다. 36~37도 한여름 땡볕에 끈적한 습기까지 차올랐으니 어땠겠냐”며 “이런 곳에선 나무도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의문의 첫 단추가 풀렸다. 야영장으로 쓸 수 없는 땅이었다. 그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안을 찾지도, 제동을 걸지도 못했다. 견제 시스템의 부재, 뿌리 깊은 무비판의 관성이 재앙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 「 “전북을 희생양 만들어선 안 돼” “새만금 지키자”는 목소리 부상 스마트팜, 민주당 반대로 무산 “권력교체 없는 일당 독식 탓 커” 」 “전북도민 총궐기 상황 올지도 …” 새만금 잼버리에 참가한 세계 스카우트 대원들이 태풍 ‘카눈’ 상륙으로 야영장에서 철수하고 있다. 준비 부족 등이 드러나면서 잼버리 파행 책임을 놓고 정치권의 공방이 거세지고 있다. [뉴스1] 전북도청에 이어 부안군청에도 감사원 감사반이 들이닥치면서 지역 정가는 긴장에 휩싸였다. 이날 전북 14개 시·군의회 의장 연명으로 “전북도에 책임을 지우는 감사나 감찰이 돼선 안 된다”는 성명이 나왔다. 호남 정치의 거물 정동영 전 의원은 며칠 전 기자 간담회를 열고 “여당이 잼버리를 두고 예산 잿밥이란 표현을 쓴 걸 보고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다. 잼버리 실패로 전북도를 희생양 만들려는 흐름이 감지된다”며 “전북도민이 총궐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북책임론 막아내고 새만금 지키기’가 전북과 호남 정치권의 새로운 어젠다로 급부상 중이다. 거리에서 만난 군민들 대다수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60대 이모씨는 “전북이 뭔 잘못이여? 1000원 내려올 걸 500~600원 내려보내고 잘 치르라고 하니 그런 것이제. 물론 여기도 잘못된 게 있겄지만 현 정권이 문제지, 꺼떡하면 구 정권만 갖고 물어징께 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라고 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장모씨도 “현 정부가 잘했어야지 왜 자꾸 문재인 대통령한테 잘못했다고 핑계를 대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이어 “외국인들이야 왔다 가면 그만이고, 천막도 거둬가 버리면 끝이제. 식당이나 좀 됐을까, 원래부터 잼버리는 군민들과 무관해요”라면서 “그라나도(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데 이번 일로 부안에 대한 이미지만 더 버려부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자유전 농지법이 외려 농민에 고통” 식당과 찻집 등 상가가 몰려있는 읍내. 한 식당에서 지역 유지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지방 공무원 출신인 A씨와 도내에서 중소업체를 운영하는 B씨등 일행은 점심 중이었다. 60대 후반~7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들은 내게 명함을 주긴 했지만 기사에 실명 인용되길 원치 않았다. A=“행사 전부터 저런 뻘밭에서 어떻게 국제행사를 하느냐고 걱정이 많았어요. 군민들이 봐도 이해가 안 되니까요. 이성도 없고, 판단력도 없고…. 어떻게 하면 대회를 성공시킬 것인가 지역민한테 여론도 들어보고 연구도 하고 공감을 끌어내야 했는데 매사에 소홀했어요. 돈만 갖다 쓸 줄 알았지.” B=“아침 조기축구회도 50명이 뛰면 화장실이 5, 6개가 필요해요. 4만명이 오는데 350개를 지었대요. 4000개는 지었어야죠. 물도 맑은 물 놔두고 썩은 물을 끌어다 쓰고. 몇 년 전부터 건의가 많았지만 소용없어요. (스카우트 대원들) 철수는 잘한 거예요. 철수 안 했으면 난리 났을 거예요.” 박경민 기자 대화가 감사원 감사로 흘렀다. 잼버리 예산뿐 아니라 부안군의 일반회계까지 들여다보겠다고 하자 군청이 반발한다는 얘기였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잼버리 망친 게 윤석열 대통령의 탁상행정 때문이란 얘기가 많다”고 시중 여론을 전했다. 그러자 “여기는 민주당, 이재명 욕하면 큰일 나. 비판이 없고 매사 정치적 색깔로 따지니…. 비리도 정의로 둔갑시키잖아”라고 했다. 기초의원부터 국회의원까지 민주당 일색인 일당독식 정치가 호남을 견제와 감시의 사각지대로 퇴보시켰다, 기업 투자가 없어 지역 발전도 희망도 없다, 그러니 인재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고 있다는 탄식이 이어졌다. 2016년의 일이다. LG CNC가 새만금에 스마트팜을 조성하려다 농민단체(전국농민회총연맹)와 민주당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했다. LG CNC는 3800억원을 투자해 ICT(정보통신기술)를 바탕으로 스마트팜 설비와 솔루션 개발을 통해 해외 시장을 개척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수확 농산물은 전량 수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파산 직전에 처한 농민들의 상황을 외면한 채 굴지의 대기업이 토마토·파프리카까지 손대면 안 된다”는 민주당 의원들과 전농의 반발로 결국 계획을 접었다. B씨는 열변을 토했다. “농촌엔 거대 자본이 없기 때문에 이런 대기업이 주도하면 농민이 따라가게 되는 거예요. 덴마크를 봐요. 농민 몇만 명이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잖아요. 농민들 보호한다며 기업을 못 들어오게 하는 게 말이 돼요? 노인들 다 돌아가시면 그땐 누가 농사지어요? 민주당이 경자유전(耕者有田) 앞세워 만들어놓은 농지법 때문에 오히려 농민들이 고통받고 있어요. 땅 거래가 안 되고 투자도 안 되니 농민들이 땅을 팔고 싶어도 팔지도 못하고…. 서울 사람들이 땅 사면 여기 땅이 서울로 가버린답니까?” “대기업 있었다면 막장 되진 않았을 것” 권력교체 없는 호남의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은 ‘영원한 여당’이다. 비(非)민주당 세력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전무하다시피 하다〈표 참조〉. 정의당 전북도당이 “파행의 원인은 잼버리를 명분 삼아 새만금신공항등 SOC 사업 추진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라며 “10조원 정도의 개발 자금의 실질적인 이익과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짚어야 한다”는 입장을 낸 정도다. ‘야당’의 빈자리를 대신해 최근 청년·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작지만 새로운 변화다. 이양승 군산대 교수는 권력 교체 없는 호남 정치가 호남을 역선택의 공간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전북 남원 출신인 이 교수는 통화에서 “부패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다. 그러나 부패 시스템이 자리 잡은 곳에선 정상적인 사람도 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혼자만 청정하면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다”라며 “잼버리 사태는 민주당 독점 체제의 전라도 시스템이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권력의 분립, 견제와 감시 같은 민주주의 시스템의 부재 탓이란 주장이다. 호남 시민사회의 건전한 비판과 토론을 회복하자며 2020년 발족한 ‘호남대안포럼’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광주 출신 의사인 박은식 공동 대표는 “대기업의 농업 진출에 반대한다며 스마트팜 무산시키고 소상공인 보호한다며 복합쇼핑몰 입점을 거부했다. 자생적 성장 역량을 갖추게 해주는 기업은 몰아내고 대신 광주형·군산형 일자리, 광주 아시아문화전당같이 세금 들어가는 사업만 벌인다. 정치가 반기업 정서를 부추겨 세금으로 먹고사는 구조를 만드니 지역에 발전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견제 세력이 있었다면 잼버리 부지 선정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대기업이 들어와 있었다면 기업이 기반 시설을 해놨을 것이기 때문에 잼버리가 막장으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지난 27일 창립총회를 마친 호남대안포럼 전북지회의 신승욱 회장도 30대 청년이다. 그는 “새만금 사업 자금 유치에 억지로 꿰맞추다 보니 장소 선정부터 패착이 됐고 전북이 발전은커녕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됐다”며 “분명히 자기 반성할 부분이 있는데도 지역감정으로 대응하고 현 정부 책임으로 떠넘긴다. 이러니 호남 혐오를 키우고 양극단의 대립만 커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화의 성지’ 호남이 ‘성역’이 돼버렸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희생을 정치가 도구로 징발한 탓이 크다. 보수 세력의 호남 고립 전략에 대한 피해의식이 권력에 대한 무서운 집념과 호남 정치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로 똘똘 뭉쳐 폭발적 힘을 발휘하는 운명 공동체가 됐다. 이걸 탓할 순 없다. 문제는 정치가 이런 집단의식을 특정 정당에 대한 숭배를 조장하는 데 악용해온 점이다. 공동체에 대한 열망과 에너지를 지역발전과 자치 역량을 키우는 데 쓰지 않고, 일당 독식 정치를 공고화하는 데 허비했다. 그 결과 정치 엘리트와 관료들은 출세와 입신양명의 기회를 누렸다. 하지만 지역 발전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2023년 전국 17개 시·도별 재정자립도를 보면 전남(28.7%)과 전북(27.9%)이 최하위다. 6개 광역시 중에선 광주광역시(46.2%)가 꼴찌다. 민주화를 위한 호남의 희생과 헌신에 견주면 너무 초라한 성적표 아닌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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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국가 대개조, 더는 미룰 수 없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국민들 가슴을 졸이게 했던 새만금 세계 잼버리 대회가 K팝 공연과 함께 막을 내렸다. 초반 파행을 겪었지만 한국 문화 체험의 ‘코리아 잼버리’로 방향을 틀어 그나마 최악은 면했다. 일제하 국채보상운동,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의 금 모으기처럼 이번에도 시민들이 제 일인 것처럼 나섰다. 사비를 털어 얼린 생수를 사 나르고 빵집 사장님은 케이크를 무료로 제공했다. 한 외국 청년은 언론 인터뷰에서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줘서 감사하다. 미안하다고 해 놀랐다. 다시 한국에 오고 싶다”고 했는데, 한국인의 정(情)을 느낄 수 있어서 가슴 뭉클하면서도 한편으론 부아가 났다. 왜 늘 속상하고 미안해해야 하는 건 힘없는 시민들의 몫이어야 하는지. ■ 「 잼버리 파행 책임 두고 네 탓 공방 무책임 정치, 미래 비전 없는 정부 복지부동 공무원 등 총체적 난맥 희생양 찾기보다 근원적 처방을 」 선데이 칼럼 잔치는 끝났고, 요란한 굿판이 펼쳐질 참이다. 민심 수습을 위한 번제(燔祭) 의식 말이다. 야당은 벌써 대통령 사과와 국정조사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기선 제압에 나섰고, 여당은 문재인 정부 책임을 부각하며 샅바 끈을 동여매고 있다. 중앙 정부는 지방 정부의 무능을 탓하고, 지방 정부는 중앙 정부의 컨트롤 타워 부재를 비판한다. “왜 우리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우나”라는 불만과 항의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막대한 예산을 퍼붓고도 국제적 망신을 시키고 국격을 추락케 한 책임은 반드시 가려내야 한다. 그러나 흥분과 분노의 뜨거운 감정에만 휩쓸려선 안 된다. 냉철한 이성으로 무엇이 문제의 본질인지 복기해봐야 할 때다. 새만금 사태는 우리에게 국가 대개조의 과감한 수술을 더는 늦출 수 없다는 걸 일깨우고 있다. 수십년간 쌓이고 쌓인 총체적 난맥상이 얽혀 이번 사태를 불렀다. 일단 내질러놓고 책임은 지지 않는 정치, 네 탓 타령으로 날 새는 여야, 국가 백년대계 같은 미래 비전의 설계 능력과 의욕을 상실한 단명 정권, 내면화된 관료 사회의 복지부동, 정치 리더십의 부재…난맥상을 이대로 두고 희생양을 찾아내 호통치고, 그중 몇몇을 감방에 보낸들 달라질 건 없다. 하나씩 복기해보자. ①정치적 한탕주의가 낳은 비극 첫 번째 패착은 잼버리 대회가 성공 개최보다 새만금 개발 사업 촉진에 방점을 두고 추진된 점이다. 전북도 관계자의 말처럼 “인프라를 좀 더 빨리하기 위해 예산을 빼 오기 위한 명분으로 새만금에 잼버리 대회를 유치한 것”(2017년 전북도 의회)이다. 새만금 개발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으려는 지방 권력과 개발 이익을 노린 개발업자의 이해가 맞았다(※대회 유치의 일등 공신이라고 자화자찬했던 이들은 침묵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매립된 땅을 놔두고 잼버리 대회를 위해 새로 부지를 매립했다. 기초 시설 공사가 끝난 게 지난해 5월이다. 대회 1년 전 사전 점검을 위해 열던 프레잼버리는 취소됐다. 코로나 때문이라지만, 기반시설 부족과 배수 불량으로 행사를 치를 수 없었던 게 더 크다. 야영지의 배수와 그늘막 조성, 부실한 샤워장·화장실 문제는 예견된 재앙이었던 셈이다. 전북도는 새만금 국제공항 건설(2028년 개항 예정) 예산을 따내고, 새만금을 동서와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완공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명예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정치적 한탕주의가 부른 비극이다. ②60년 걸리는 국책사업 새만금 사업이 애물단지가 된 데는 정치의 책임이 크다. 노태우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시작돼 1991년 간척 사업의 첫 삽을 떴지만 이후 7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토지이용 계획이 바뀌었다. ‘식량 증산’이 목표였다가 복합산업단지로 변경됐고, 환경단체의 반대로 수년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해양개발 및 글로벌 허브(이명박)-동북아 경제 허브(박근혜)-재생에너지 단지(문재인)-금융·관광·IT 특화 기지(윤석열)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발 구호는 요란했지만, 32년이 되도록 기반시설 구축(1단계)도 하지 못한 상태다. 비슷한 시기에 간척사업을 시작한 중국 상하이 푸둥 지구는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 자리 잡았다. 새만금은 차질없이 계획대로 진행된다 해도 2050년이 돼야 완료된다. 60년 걸린 국책사업인데, “새만금이 국가 발전과 미래 비전에 어떤 전략적 가치가 있는 건지 알 수 없다”(호남 출신 정치인)는 탄식이 나온다. 먼 미래를 내다본 전략적 고민과 청사진 없이 불쑥 던져놓고 보는 무책임한 정치가 재앙의 불씨를 잉태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③임계점 넘어선 관료 사회의 무사안일 여성가족부의 수준 미달의 집행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폭염·태풍·식재료·식중독 문제 등 모든 게 차질없이 준비됐다”고 큰소리치던 김현숙 장관의 발언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현장에 가지 않고 서류와 보고서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잼버리 대회를 위해 99번의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는 공무원들의 출장 보고서는 코미디 수준이다. 이 와중에 공무원 노조는 잼버리 대원들이 전국으로 흩어지는 과정에서 하달된 공무원의 강제 동원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냈다. 갑작스러운 상명하달식 동원령이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국가적 위급 상황에 시민들까지 나서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대응이다. 관료사회의 나태와 무사안일 풍조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음을 새만금 사태가 일깨워주고 있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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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컷칼럼] “파격적 특권 포기한 정당이 총선서 지지받을 것”
. . . ━ 지금 왜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인가 #국회부의장실에 들어서니 울프 흘름 부의장이 손수 맞이하고 직접 커피를 뽑아 탁자 위에 놓았다. 인터뷰가 끝나자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3선 의원인데도 따로 보좌진이 없었다. #총리 지명 1순위이던 모나 살린 당시 부총리는 법인카드로 초콜릿을 산 게 드러나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사법 처리를 받진 않았지만, 자녀 탁아소 비용 연체, 유모 영수증 미처리 등 윤리적 책임은 피할 수 없었다. ■ 「 ‘심부름꾼’ 임무 잊은 특권국회 “위임한 권한 회수하자”가 민심 비리·범죄엔 불체포특권 없애고 대선·지선 때 3억 모금 폐지해야 」 ━ 주차위반에 장관 낙마하는 스웨덴 스웨덴 린네대 최연혁 교수가 저서 『스웨덴 패러독스』에서 소개한 스웨덴 정치인의 일상이다. 이외에도 의원거주 지원금을 실제와 다르게 신고해 정계를 떠난 당 대표, 주차 위반이나 TV 시청료 미납이 드러나 중도 낙마한 장관 사례 등이 줄줄이 나온다. 특권은커녕 일반 시민보다 혹독한 잣대로 감시받는 공복(公僕, 국가의 심부름꾼)의 모습이다. “특권이 무려 186개”라는 한국 국회의원과 대비된다. 항공기 비즈니스석을 이용하고, KTX를 공짜로 타는 건 빙산의 일각이다. 1년에 수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고도, 후원회·출판기념회를 통해 정치자금을 모금한다. 비리를 저질러도 체포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고도 면책특권 뒤에 숨으면 그만이다. ‘대통령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김의겸 의원이 단적인 예다. “합리적 의심”이라던 그의 주장은 모두 허위로 밝혀졌지만 어떤 징계나 처벌도 받지 않았다. 특별한 대접을 받으면 특권을 누리는 걸 당연시하게 되고, 결국엔 군림하려 든다. 지금 정치가 그렇다. 자유로운 의정활동의 버팀목으로 주어진 공적 권한을 사유화하고 특혜를 누리면서 사회 통합과 국가 발전은 오히려 멀어져가는 퇴행을 보이고 있다. 한 전직 의원은 “정치인의 관심사가 국가 발전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재선과 자기 당의 집권에만 쏠려 있는데 놀랐다”고 고백했다. 지지자로부터 욕먹고 낙선을 각오하면서 바른 소리를 하는 ‘쓴소리파’ ‘소신파’도 멸종해가고 있다. 최 교수는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공적 권한을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하는 걸 감시하고 특권의식을 갖지 못하게 투명성을 높인 스웨덴 모델이 국가경쟁력을 끌어올린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한다. 내년 22대 총선(4월 10일)을 앞두고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국회의원 특권 폐기 운동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국회의원 보수, 세계 최고 수준” 지난 4월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가 발족, 공직자의 특권 포기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나섰다. 운동을 주도하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한국 국회의원 월급이 액면가로는 미국·일본에 이어 세 번째지만 국민소득 대비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며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입신양명을 위해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니 정치가 부패·타락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의원 보수를 근로자 평균 임금(400여만원) 정도로 낮춰 국가를 위해 봉사할 사람이 정치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재민 기자 ‘국회의원 수당 등 지급 기준’에 따르면 2023년 의원 연봉은 1억5426여만원이다. 일반 수당과 급식비, 정근수당, 명절 휴가비, 입법활동비 등을 합친 금액이다. 월급으로 환산하면 1285만원꼴이다.〈표1 참조〉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3만2661달러, 420만원) 대비 3.7배다. 미국·영국·일본의 의원 보수가 국민소득 대비 약 2.5배 안팎인 것과 비교하면 “한국 의원들의 보수가 높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신재민 기자 이와 별도로 의원실 지원 경비로 평균 1억여원가량 추가로 받는다. 사무실 운영비, 업무추진비, 의원 차량 유류비, 출장비, 입법자료 발송비, 정책 개발비 등이 포함된다. 〈표2 참조〉 의원들은 또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8·9급 비서 각 1명, 유급 인턴(1명) 등 모두 9명의 보좌진을 둘 수 있다. 보좌진 총급여는 5억2000여만원. 의원 1명에게 연간 7억원이 넘는 경비가 들어가는 셈이다. 문제는 ‘고(高)비용’이 정치의 ‘생산성’에 역행한다는 점이다. 정세균 국회의장 시절이던 2016년 국회의원특권내려놓기추진위원회에 참여했던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국회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업무수행에 필요한 권한조차 특권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국민 불신이 높아졌고 국회의원을 특권집단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3권분립 강화와 행정부에 대한 견제 역할을 기대하며 국회의 권한과 위상을 높여줬지만, 정작 국회는 국민의 ‘대리인’임을 망각하고, ‘정치 엘리트’라는 특권의식에 포획돼 민의를 수용하지 못하자 국민이 위임했던 권한을 회수하려 나섰다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 선거공영제의 모순, 꿩 먹고 알 먹기 운동본부는 선거공영제란 이름으로 정당과 의원에게 과다한 나랏돈이 쓰이는 걸 바로잡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의원들은 1년에 1억5000만원, 선거가 있는 해는 3억원까지 정치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다. 그러나 15% 이상 득표하면 선거비용 전액을 국고에서 환급받는다. 3억원을 모금해 선거자금에 다 썼어도 국고에서 3억원을 환급받으니 3억원이 고스란히 남는 구조다. ‘꿩 먹고 알 먹기’ ‘도랑 치고 가재 잡기’다. 특권폐지 운동에 참여한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은 “도무지 말이 안 된다”며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 차별적 특혜 대접을 받으니 우쭐해지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최 전 총장은 또 “국회의원이 자기 선거(총선)가 아닌, 지방선거나 대선 때도 3억원까지 모금할 수 있다”며 “그런데 이 돈을 대선이나 지방선거에 사용하면 공직선거법 위반이 된다. 쓰지도 못하는데 왜 3억원까지 모금해야 하나”고 의문을 제기했다. 지방선거가 있던 ‘2022년 국회의원 후원금 모금 현황’을 보면, 국민의힘 장제원(3억2103만원), 민주당 김남국(3억3014만원), 이원욱(3억2269만원), 정청래(3억516만원), 박주민(3억407만원) 의원 등 여야 실세들이 모금 상한액을 넘는 정치자금을 모았다. 선거를 명분으로 모금한 건데 선거 지원에 쓰지 못하는 모순일 뿐만 아니라 같은 선출직인 지방자치단체·의원과의 형평에도 맞지 않는 특혜다. 지난해 여야 의원의 평균 모금액은 1억8900여만원이었다. ━ 선거비용 이중 보전에 헌법소원 중앙당에 대한 선거비용 이중 보전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장 이사장은 “평소엔 정당에 경상보조금을 주고, 선거가 있는 해엔 선거에 쓰라고 미리 선거보조금을 주고, 선거 후엔 선거에 쓴 비용을 또 보전해줘 막대한 돈을 이중으로 안기고 있다”며 “지난달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 심판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선관위도 심각성을 느껴 개정 의견을 냈지만 국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덕분에 776억원(2021년)이던 국민의힘 재산은 지방선거가 있던 2022년엔 1255억원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민주당도 464억원에서 929억원으로 재산을 불렸다. 기막힌 ‘선거 테크’가 아닐 수 없다. 여야는 선거 때 득표전략으로 ‘특권 폐기’를 써먹곤 번번이 폐기했다. 지난 대선에서 불체포특권 포기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자신과 소속 의원들의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넘어오자 모두 부결시켰다. 비난 여론이 고조되자 이번엔 ‘정당한 영장 청구’라는 단서를 단 불체포특권 포기 서약을 혁신안인 것처럼 둔갑시켰다. 꼼수다. ━ 시대착오적인 불체포·면책특권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 입법부가 왕에 대한 비판 발언을 보장하기 위해 명문화된 이래 미국·영국·일본·독일 등 선진국들도 불체포·면책특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런 입법 취지와 배경 때문에 국내 학자들 간에도 찬반양론이 팽팽하다. 문제는 운용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도입 배경이나 정신은 없어지고 인신구속과 범죄행위에 대한 회피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문제”라며 “불체포특권을 규정한 나라에서도 형사 사건이나 개인 범죄엔 적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면책특권의 경우 ▶영국은 명예훼손시 의회 내부에서 징계하고 ▶독일은 ‘중상적 명예훼손’에 대해선 면책특권을 적용하지 않도록 명시하고 있다. ━ ‘방탄국회’‘막말국회’ 사라져야 이준한 교수는 “국민에게 봉사하지 않으면서 과도한 혜택을 누리는 넌센스를 바로잡으려면 내년 총선 때 정당이 이를 총선 공약화하고 개혁 경쟁이 불붙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호기 교수도 “선거 판도를 결정짓는 두 축은 인물·정책 대결과 혁신 경쟁인데, 국민의힘과 민주당간 인물·정책 대결이 변별력이 있겠는가”라며 “1990년대 이탈리아 오성운동이 관용차 금지, 3선 제한 등의 파격적인 특권 포기로 각광받았듯이 내년 총선 판도는 특권 포기를 선도하는 정당이 여론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복의 본분을 망각한 채 변질된 ‘특권국회’ ‘방탄국회’ ‘막말국회’. 이쯤에서 제동을 걸어야 한다. 다시 국민이 나설 때다. 글=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임근홍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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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퍼스펙티브] “파격적 특권 포기한 정당이 총선서 지지받을 것”
━ 지금 왜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인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국회부의장실에 들어서니 울프 흘름 부의장이 손수 맞이하고 직접 커피를 뽑아 탁자 위에 놓았다. 인터뷰가 끝나자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3선 의원인데도 따로 보좌진이 없었다. #총리 지명 1순위이던 모나 살린 당시 부총리는 법인카드로 초콜릿을 산 게 드러나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사법 처리를 받진 않았지만, 자녀 탁아소 비용 연체, 유모 영수증 미처리 등 윤리적 책임은 피할 수 없었다. ■ 「 ‘심부름꾼’ 임무 잊은 특권국회 “위임한 권한 회수하자”가 민심 비리·범죄엔 불체포특권 없애고 대선·지선 때 3억 모금 폐지해야 」 주차위반에 장관 낙마하는 스웨덴 스웨덴 린네대 최연혁 교수가 저서 『스웨덴 패러독스』에서 소개한 스웨덴 정치인의 일상이다. 이외에도 의원거주 지원금을 실제와 다르게 신고해 정계를 떠난 당 대표, 주차 위반이나 TV 시청료 미납이 드러나 중도 낙마한 장관 사례 등이 줄줄이 나온다. 특권은커녕 일반 시민보다 혹독한 잣대로 감시받는 공복(公僕, 국가의 심부름꾼)의 모습이다. “특권이 무려 186개”라는 한국 국회의원과 대비된다. 항공기 비즈니스석을 이용하고, KTX를 공짜로 타는 건 빙산의 일각이다. 1년에 수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고도, 후원회·출판기념회를 통해 정치자금을 모금한다. 비리를 저질러도 체포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고도 면책특권 뒤에 숨으면 그만이다. ‘대통령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김의겸 의원이 단적인 예다. “합리적 의심”이라던 그의 주장은 모두 허위로 밝혀졌지만 어떤 징계나 처벌도 받지 않았다. 특별한 대접을 받으면 특권을 누리는 걸 당연시하게 되고, 결국엔 군림하려 든다. 지금 정치가 그렇다. 자유로운 의정활동의 버팀목으로 주어진 공적 권한을 사유화하고 특혜를 누리면서 사회 통합과 국가 발전은 오히려 멀어져가는 퇴행을 보이고 있다. 한 전직 의원은 “정치인의 관심사가 국가 발전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재선과 자기 당의 집권에만 쏠려 있는데 놀랐다”고 고백했다. 지지자로부터 욕먹고 낙선을 각오하면서 바른 소리를 하는 ‘쓴소리파’ ‘소신파’도 멸종해가고 있다. 최 교수는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공적 권한을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하는 걸 감시하고 특권의식을 갖지 못하게 투명성을 높인 스웨덴 모델이 국가경쟁력을 끌어올린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한다. 내년 22대 총선(4월 10일)을 앞두고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국회의원 특권 폐기 운동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회의원 보수, 세계 최고 수준” 지난 4월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가 발족, 공직자의 특권 포기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나섰다. 운동을 주도하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한국 국회의원 월급이 액면가로는 미국·일본에 이어 세 번째지만 국민소득 대비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며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입신양명을 위해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니 정치가 부패·타락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의원 보수를 근로자 평균 임금(400여만원) 정도로 낮춰 국가를 위해 봉사할 사람이 정치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재민 기자 ‘국회의원 수당 등 지급 기준’에 따르면 2023년 의원 연봉은 1억5426여만원이다. 일반 수당과 급식비, 정근수당, 명절 휴가비, 입법활동비 등을 합친 금액이다. 월급으로 환산하면 1285만원꼴이다.〈표1 참조〉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3만2661달러, 420만원) 대비 3.7배다. 미국·영국·일본의 의원 보수가 국민소득 대비 약 2.5배 안팎인 것과 비교하면 “한국 의원들의 보수가 높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신재민 기자 이와 별도로 의원실 지원 경비로 평균 1억여원가량 추가로 받는다. 사무실 운영비, 업무추진비, 의원 차량 유류비, 출장비, 입법자료 발송비, 정책 개발비 등이 포함된다. 〈표2 참조〉 의원들은 또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8·9급 비서 각 1명, 유급 인턴(1명) 등 모두 9명의 보좌진을 둘 수 있다. 보좌진 총급여는 5억2000여만원. 의원 1명에게 연간 7억원이 넘는 경비가 들어가는 셈이다. 문제는 ‘고(高)비용’이 정치의 ‘생산성’에 역행한다는 점이다. 정세균 국회의장 시절이던 2016년 국회의원특권내려놓기추진위원회에 참여했던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국회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업무수행에 필요한 권한조차 특권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국민 불신이 높아졌고 국회의원을 특권집단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3권분립 강화와 행정부에 대한 견제 역할을 기대하며 국회의 권한과 위상을 높여줬지만, 정작 국회는 국민의 ‘대리인’임을 망각하고, ‘정치 엘리트’라는 특권의식에 포획돼 민의를 수용하지 못하자 국민이 위임했던 권한을 회수하려 나섰다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선거공영제의 모순, 꿩 먹고 알 먹기 운동본부는 선거공영제란 이름으로 정당과 의원에게 과다한 나랏돈이 쓰이는 걸 바로잡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의원들은 1년에 1억5000만원, 선거가 있는 해는 3억원까지 정치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다. 그러나 15% 이상 득표하면 선거비용 전액을 국고에서 환급받는다. 3억원을 모금해 선거자금에 다 썼어도 국고에서 3억원을 환급받으니 3억원이 고스란히 남는 구조다. ‘꿩 먹고 알 먹기’ ‘도랑 치고 가재 잡기’다. 특권폐지 운동에 참여한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은 “도무지 말이 안 된다”며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 차별적 특혜 대접을 받으니 우쭐해지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최 전 총장은 또 “국회의원이 자기 선거(총선)가 아닌, 지방선거나 대선 때도 3억원까지 모금할 수 있다”며 “그런데 이 돈을 대선이나 지방선거에 사용하면 공직선거법 위반이 된다. 쓰지도 못하는데 왜 3억원까지 모금해야 하나”고 의문을 제기했다. 지방선거가 있던 ‘2022년 국회의원 후원금 모금 현황’을 보면, 국민의힘 장제원(3억2103만원), 민주당 김남국(3억3014만원), 이원욱(3억2269만원), 정청래(3억516만원), 박주민(3억407만원) 의원 등 여야 실세들이 모금 상한액을 넘는 정치자금을 모았다. 선거를 명분으로 모금한 건데 선거 지원에 쓰지 못하는 모순일 뿐만 아니라 같은 선출직인 지방자치단체·의원과의 형평에도 맞지 않는 특혜다. 지난해 여야 의원의 평균 모금액은 1억8900여만원이었다. 선거비용 이중 보전에 헌법소원 중앙당에 대한 선거비용 이중 보전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장 이사장은 “평소엔 정당에 경상보조금을 주고, 선거가 있는 해엔 선거에 쓰라고 미리 선거보조금을 주고, 선거 후엔 선거에 쓴 비용을 또 보전해줘 막대한 돈을 이중으로 안기고 있다”며 “지난달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 심판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선관위도 심각성을 느껴 개정 의견을 냈지만 국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덕분에 776억원(2021년)이던 국민의힘 재산은 지방선거가 있던 2022년엔 1255억원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민주당도 464억원에서 929억원으로 재산을 불렸다. 기막힌 ‘선거 테크’가 아닐 수 없다. 여야는 선거 때 득표전략으로 ‘특권 폐기’를 써먹곤 번번이 폐기했다. 지난 대선에서 불체포특권 포기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자신과 소속 의원들의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넘어오자 모두 부결시켰다. 비난 여론이 고조되자 이번엔 ‘정당한 영장 청구’라는 단서를 단 불체포특권 포기 서약을 혁신안인 것처럼 둔갑시켰다. 꼼수다. 시대착오적인 불체포·면책특권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 입법부가 왕에 대한 비판 발언을 보장하기 위해 명문화된 이래 미국·영국·일본·독일 등 선진국들도 불체포·면책특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런 입법 취지와 배경 때문에 국내 학자들 간에도 찬반양론이 팽팽하다. 문제는 운용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도입 배경이나 정신은 없어지고 인신구속과 범죄행위에 대한 회피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문제”라며 “불체포특권을 규정한 나라에서도 형사 사건이나 개인 범죄엔 적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면책특권의 경우 ▶영국은 명예훼손시 의회 내부에서 징계하고 ▶독일은 ‘중상적 명예훼손’에 대해선 면책특권을 적용하지 않도록 명시하고 있다. ‘방탄국회’‘막말국회’ 사라져야 이준한 교수는 “국민에게 봉사하지 않으면서 과도한 혜택을 누리는 넌센스를 바로잡으려면 내년 총선 때 정당이 이를 총선 공약화하고 개혁 경쟁이 불붙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호기 교수도 “선거 판도를 결정짓는 두 축은 인물·정책 대결과 혁신 경쟁인데, 국민의힘과 민주당간 인물·정책 대결이 변별력이 있겠는가”라며 “1990년대 이탈리아 오성운동이 관용차 금지, 3선 제한 등의 파격적인 특권 포기로 각광받았듯이 내년 총선 판도는 특권 포기를 선도하는 정당이 여론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복의 본분을 망각한 채 변질된 ‘특권국회’ ‘방탄국회’ ‘막말국회’. 이쯤에서 제동을 걸어야 한다. 다시 국민이 나설 때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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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첫 변론’ 개봉, 득보다 실이 크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영화 ‘그녀가 말했다(원제 She Said)’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사건을 파헤친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계의 절대 권력 와인스타인이 30여년간 여배우와 어린 여직원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르고 돈과 권력으로 입막음해 온 추악한 범죄의 실체가 드러나며 세계적인 미투(Me Too)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이를 파헤친 건 뉴욕타임스의 두 탐사전문 여기자, 메건과 조디다. 영화는 두려움에 떨며 진술을 꺼리는 피해 여성을 찾아내 설득하는 끈질긴 노력과 기사화를 막으려는 와인스타인 측의 집요한 협박·방해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나는 돈을 벌고 경력도 쌓고 싶은 28세 여성이었고 하비는 세계적 유명 인사다. 힘의 균형을 따지자면 나는 0, 하비는 10이다.” 피해 여성의 이 말은 직장 내 성추문 사건의 본질이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폭력임을 고발한다. ■ 「 여성단체 반대 속 개봉강행 예고 “권력관계서 발생, 직장 내 성희롱” 인권위·법원 판단 무시한 오만 결백 주장한다고 명예회복 될까 」 선데이 칼럼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 ‘첫 변론’의 개봉(8월 예정)을 둘러싼 잡음 때문이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며 개봉 철회를 요구한 여성·인권단체에 대해 “우리 사회에 페미·미투 계엄령이 발동됐다”고 반격하면서 마찰음이 커지고 있다. 다큐는, 오마이뉴스 기자가 박 전 시장의 주변 인물 50여명을 인터뷰해 쓴 책 『비극의 탄생』이 원작이다. 제작진은 ▶피해자의 호소 내용만 있을 뿐 ▶성추행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박 전 시장의 결백을 주장한다. 이런 대목들이 있다. “(피해자가) 시장에게 넥타이를 매어주는데 그 모습이 아내가 남편 넥타이 매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장 몸에 마이크를 장착할 때가 많은데,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걸 보면 달려와서 본인이 시장 몸에 마이크를 채워주곤 했다.” 내밀한 사적 관계, 피해자가 원해서 한 일이란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인용 문구는 영화 속 와인스타인 측 대응을 연상케한다. “그 여자들이 피해자인 게 확실한가?” “뜨고 싶은 욕심에 제작자를 꼬신 것 아닌가?” 피해자의 행실이 문제라는 식의 부정적 평판을 퍼뜨리고 피해자 깎아내리기로 논점을 흐린뒤 교묘히 그물망을 빠져나가려는 전형적 수법 말이다. ‘박 전 시장은 결백하다’는 궤변적 변론은 성범죄 가해자의 고전적 대응 방식의 차용에서 나아가 ‘대안적 사실’이라는, 확증편향 시대에 편리한 기제를 장착하고 있다. 증거인멸 시도를 ‘증거 보전’이라고 하고, 비리와 범죄가 드러나면 음모론으로 받아치며 허구와 거짓을 ‘실제’인 것처럼 선전하는 기술 말이다. 지난 정권 때 우리는 조국 사태로 나라가 두 동강 나는 분열과 아픔을 경험했다. ‘첫 변론’ 상영이 강행된다면 진영과 광기의 정치가 몰고 올 광풍에 온 나라가 또 한번 휘청거릴지도 모른다. 불행한 일이다. 제작진은 박 전 시장의 죽음으로 충분한 반론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다큐 개봉의 당위성을 강조하지만, 이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인권위는 문재인 정권 시절이던 2020년 이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를 벌여 이듬해 1월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직장 내 성희롱’이라고 결정했다. 인권위는 ▶성희롱 행위가 있었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내용이 중대하다고 인정해 직권조사를 결정했고 ▶박 전 시장의 사망으로 인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특성을 감안, 사실 인정 여부를 좀 더 엄격하게 판단했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박 전 시장의 부인 강난희씨가 인권위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제기한 행정소송도 패소했다. 법원도 인권위 결정을 존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기관과 사법부가 같은 판단을 내렸는데도 이를 부정하면서까지 박 전 시장의 결백을 주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하면 박 전 시장의 명예가 회복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오만이고 착각이다. ‘첫 변론’의 개봉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게 분명하다. 제작진에 인권위 결정문 정독을 권한다. 거기에 ‘해답’이 나와 있어서다. 일부를 인용한다. “박 시장은 9년간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반면…서울시장과 비서라는 권력관계 및 사회적 지위 격차로 인해 피해자가 싫은 기색이나 반응을 보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심기와 컨디션을 보살펴야 하는 비서 업무의 특성상 상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여성 비서로서는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이러한 성 역할 고정관념의 조직 문화 속에서 성희롱은 언제든 발생할 개연성이 있으며 이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시 ‘그녀가 말했다’로 돌아가보자. 기자 취재에 불응했던 피해 여성들이 입을 열게 된 건 “내 딸들마저 그런 폭력에 순응하며 살게 할 순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입 열기가 겁났지만 참는 건 더 큰 고통”이었다. 영화는 이제 막 사회에 나와 희망에 부풀어있던 여성들이 입은 치명적인 좌절에 주목했다. “이 일로 내 삶의 방향이 바뀐 느낌이었다. 커다란 판단 착오가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딴 여성들은 나와 달리 거절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 짓을 허락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날 그는 내 자존감을 뺏어갔다. 막 자존감을 확립해가기 시작할 나이에…” 피해 여성의 독백이 오랜 여운을 드리운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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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퍼스펙티브] 노관규의 ‘생태도시’ 실험, 대한민국을 흔들다
━ 순천만 국제 정원박람회 성공 스토리는 어떻게 가능했나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인구 28만명의 소도시 전남 순천이 전국을 뒤흔들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해 전국의 관광객을 빨아들이는가 하면, 경쟁도시 고흥·창원을 물리치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국형 우주발사체 단(段) 조립장을 유치했다. 며칠 전엔 순천대학교가 교육부 지원 ‘글로컬대학 예비지정 대학’에 뽑혀 활력을 더하고 있다. 성공 스토리의 주역은 ‘생태도시’를 밀어붙여온 노관규 순천시장(무소속)이다. 10년만에 두번째로 열린 순천만 국제 정원 박람회(4월1일~10월31일)는 그의 ‘특허품’이다. 개장 80일(6월19일 기준)만에 목표 대비 61%의 관람객(490만명) 유치와 목표 수익의 93%(235억원)를 달성했다. 고용 창출 2만5000명, 생산유발 효과는 1조5926억원에 이를 것이란 분석(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다. ■ 「 공장·아파트 회색 개발 포기 삶의 질 바꿀 ‘생태도시’로 전환 50여 지자체, 순천 배우기 열풍 “수도권 접고 올 만한 가치 입증” 」 순천만 정원박람회의 명물로 떠오른 ‘그린 아일랜드’. 차가 달리던 아스팔트 도로 위에 잔딧길을 조성, 시민들이 맨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했다. [사진 순천시청] 이보다 놀라운 건 전국에 불고 있는 ‘순천 배우기’ 열풍이다. 50여곳의 지방자치단체를 포함, 230개의 연구소·기관이 순천을 벤치마킹중이다. 개막식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것을 비롯해 수도 서울의 오세훈 시장, 박완수 경남지사, 최민호 세종시장등 숱한 정치인이 순천을 찾았다. 공무원 시찰단 방문도 끊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지난 18일 순천을 찾았다. KTX 순천역에서 도보로 5분거리의 동천 선착장에서 요트를 타고 정원으로 향했다. 60만평의 대지에 영국·미국·네덜란드·멕시코등 세계 정원과 다채로운 테마정원이 이어져 있다. 교통체증·잡상인·쓰레기가 없어 쾌적한 순천만 정원, 느림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외국 같다”는 관람객들의 탄성을 뒤로하고 박람회조직위 사무실에서 노관규 시장과 만났다. 인구소멸 위기 속 순천 인구는 늘어 노관규 처음엔 시 의회와 시민·환경단체의 반대가 거셌다던데. “공장 짓고 아파트 지어야지 무슨 생태냐, 천지가 산이고 들인데 무슨 정원이냐는 조롱이 쏟아졌다. 그러나 중소도시가 대도시 흉내 내 경쟁력이 있겠나.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아파트·공장 짓는 회색 개발은 한계에 왔다.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는 자연을 기초로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업단지가 없는데도 순천 인구는 늘었다. “호남 22개 시·군중 13개가 소멸 위기인데 오히려 순천은 광주·전주에 이은 세 번째 도시가 됐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순천에 온 건 여기서 일할 고급인력들이 이 정도 정주여건이라면 순천에서 살고 싶다는 여론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생태도시로 방향을 정하고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경쟁요건을 갖춘 게 굉장한 효과를 낸 것이다.” 우리에게 정원 문화는 낯설다. 역사적으로도 정원 가꾸기(gardening)와는 거리가 멀었거니와 산업화와 함께 아파트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정원과 단절됐다. ‘정원’ 하면 ‘텃밭’을 떠올리기 쉽지만, 텃밭은 생산과 노동의 공간이고 정원은 여가와 휴식의 공간이란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원박람회는 역발상의 산물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시는 발상을 전환해 시민에게 감동을 주는 창의시정을 강조해왔는데, 그 사례를 순천에서 봤다”고 극찬했다. 순천의 목표는 관광도시인가. “관광도시 이상의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의 과제가 수도권 일극체제 해소 아닌가. 공기업 강제 분산시키고 공장부지 만들어놓고 가라고 하지만 안 된다. 수도권을 포기하고 올 만한 다른 가치가 있어야 한다. 아이 키우고 자신들이 재충전하고 노후까지 보낼 수 있는 도시라는 걸 보여준 게 순천이다. 수도권 일극체제를 나눠 지고 국가균형 발전의 해법을 제시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4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잔디광장으로 노 시장의 정원박람회 구상은 2009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흑두루미의 97%가 월동한다는 일본 이즈미(出水)시를 견학, 몸집이 큰 흑두루미가 의외로 전깃줄에 걸려 많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천만 일대 283개의 전봇대를 뽑고 전선을 없앴다. 전세계 흑두루미 1만8000마리의 60%가 넘는 1만여마리가 찾아오는 세계적 흑두루미 월동지로 자리잡으며 순천만이 되살아났다. 올해는 업그레이드된 실험을 했다. 초고층 아파트 단지 밀집지역인 오천동 앞 4차선 아스팔트 도로 1.2㎞ 구간을 잔디로 덮어 맨발 산책이 가능한 잔디 광장(그린 아일랜드)으로 바꿨다. 정원이 도심의 일상 속까지 스며들어온 것이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0년 전부터 순천시청에서 정원박람회 실무를 이끌어온 최덕림 총감독의 말이다. “전봇대 뽑기로 직접 피해를 보는 농민이 5000명, 가족까지 따지면 1만~2만표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정치인으로선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손해 보더라도 미래를 위해 가자’는 시장의 결심으로 순천만 생태계 보전지구로 지정할 수 있었다.” 최 총감독은 “반대하던 시민들도 요즘은 이 정도로 살기좋은 도시가 된다면 불편은 감내할 수 있다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며 “‘노 시장이 고생하고 수고하셨다’는 얘기를 들으면 보람을 느낀다”며 달라진 민심을 전했다. 고졸 출신 검사, 순천시장만 세 번 노 시장은 특이한 이력의 정치인이다. 고졸(순천매산고) 출신으로 구로공단 노동자→세무공무원을 거쳐 4수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 검사가 됐다. 2000년 수원지검 검사를 끝으로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2006년(민주당)과 2010년(무소속) 연거푸 순천시장에 당선됐으나 총선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신 그는 지난해 세 번째로 순천시장(무소속)에 취임하며 10년만에 부활했다. 시련이 그를 더욱 단련시킨 것일까. 노 시장은 “닥치는대로 잡다하게 책을 읽었다. 비로소 고민하던 것들이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성공하는 리더십의 요체는. “도시는 지자체장이 공부한만큼 발전한다는 걸 깨달았다. 공부를 해야 생각의 눈높이가 높아져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 아무리 시장의 역량이 있어도 철학과 비전을 현실로 실현시켜주는 건 공무원이다. 공무원을 설득하고 그들이 긍지와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게 시장의 리더십이다. 또 시민들 눈높이가 그 수준이 돼야 한다. 시장-공무원-시민의 3합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공무원 설득의 비결은 뭔가. “시장의 무기는 인사권이다. 칸막이를 허물어 행정·토목·해양등 필요한 직능을 한군데로 합쳐 일할 수 있게 하고, 과장에게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을 고르라고 했다. 1명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인사를 냈다. 시장이 인사권을 포기하고 권한을 준만큼 책임도 지게 한 것이다.” 시민 설득이 쉽지 않았을텐데.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주지 않고 전액 정원박람회에 썼다. 도시의 근본적 동력을 만드는 데 사용한 거다. 직접 24개 읍·면·동을 돌며 시민들을 설득했다. ‘여러분이 다섯아이 부모다. 넷째 대학등록금이 고민인데 다섯째가 명품 운동화 사고 싶어한다. 부모라면 밤새 고민 끝에 명품 운동화를 포기하고 대학 등록금에 쓰자고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더니 고맙게도 시민들이 따라와주더라.” 오세훈-노관규의 특별한 인연 정치권에선 오세훈 서울시장(국민의힘)과 노 시장의 특별한 인연과 협력에도 주목한다. 각각 무상급식 파동과 총선 낙선으로 정치적 공백기를 맞았다 10년만에 나란히 부활했다. ‘정원과 같은 도시 서울’과 ‘생태도시 순천’을 표방, 협력 중이다. 오 시장이 간부들을 데리고 박람회를 관람했고, 지난달엔 노 시장이 서울시 팀장급 이상 간부를 대상으로 특별강연을 하기도 했다. 노 시장은 “프랑스·영국·독일 등 정원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제국을 이뤘거나 꿈꿨던 나라들”이라며 “오 시장의 인문적·철학적 눈높이가 굉장한 수준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기초단체장인 내게 강연을 하게 한 건 오 시장이 가슴과 통이 크고, 사람을 널리 구하고 쓰려 한다는 의미”라고도 했다. 오 시장은 “정원박람회 같은 큰 규모의 행사를 하려면 보통 대학교수나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하는데, 10년 전에 일한 사람을 다시 발탁해 권한을 주고 일하게 한 용인술이 놀랍다”며 “세계사에 유례없는 일을 해낸 순천이 지방행정 업그레이드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호평했다. “순천에 월트 디즈니 만드는 게 꿈” 인터뷰 말미에 노 시장은 “꼭 하고싶은 말이 있다”며 애니메이션 클러스터 사업을 설명했다. “순천 3개 대학에 애니메이션 학과가 있다. 졸업하면 수도권에 올라가 고시텔·원룸 전전하다 우울증 생기고 가족도 힘들게 한다. 지방도시도 고급문화산업을 할 수 있게 정부가 지원해줘야 한다. 월트 디즈니같은 회사를 왜 순천에 못 만드나?” ‘정원 쓰나미’를 몰고온 ‘노 작가’(시청 직원들은 노 시장을 이렇게 부른다)의 꿈이 이뤄질 것인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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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제3신당이 성공하려면
이정민 칼럼니스트 제3신당 창당을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 1985년의 신한민주당(신민당) 돌풍이 성공사례의 교본처럼 거론된다. 12대 총선을 불과 25일 남기고 창당해 제1야당(67석)으로 우뚝 섰으니 전율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양김(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 규제에 묶여 있었고 후보를 내지 못한 지역이 많았지만, 서울에선 신민당 후보 전원(14명)이 당선될 정도로 파란을 일으켰다. 그것도 서슬 퍼런 신군부 치하에서 말이다. 예상 밖 ‘기적’은 독재 정치-관제 야당의 정치판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대안이란 희망과 믿음을 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정확히 제시했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 언론기본법 폐지 등 목숨을 건 치열한 노력에 국민들도 전폭적 지지를 보낸 것이다. ■ 「 25일 만에 제1야당 된 신민당 돌풍 ‘대안세력’ 믿음 줘 국민 지지 받아 지금의 위선·무능 정치 대체하려면 도덕성과 실력 갖춘 새인물 발굴을 」 선데이 칼럼 요즘 정치는 속된 말로 국회의원에게 ‘일자리’ 만들어주는 걸로 전락했다는 빈축을 산다.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 정쟁과 편가르기의 관성에 빠져있다. 비호감 정치판을 바꾸자는 신당 논의가 오가고 있다고 한다. 금태섭 전 민주당 의원이 ‘수도권 30석’을 내건 신당 창당을 공식화하면서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세 결집 양상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한 야당 의원은 “정치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표출돼 외부의 압박에 의해 에너지가 모이면 용기를 얻은 정치인들의 신당 규합 움직임이 표면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필요성엔 공감하면서도 ‘수박’ ‘내부 총질’로 낙인 찍힐까 주저하는 관망파가 많다는 얘기다. 거대 양당 기득권 체제의 안온함을 누리면서 새판짜기를 한다는 건, 사실 어불성설이다. 신민당 돌풍은 ‘정치 공학’이란 이름으로 둔갑한 탁상공론식 머리 굴리기로 나온 게 아니지 않는가. 정치를 바꾸고 독재를 끝내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신념과 용기의 결과물이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쫓기며 쪽방에 모여 토론을 벌이고, 인재를 찾아 정책과 공약을 고심한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며칠 전 태국 총선에선 40대 지도자 피타 림짜른랏이 이끄는 전진당이 압승을 거둬 20년 넘게 군부와 탁신 일가가 분점해 온 양강 구도를 무너뜨렸다. 태국은 입헌군주국이지만 군부가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신성한 존재인 왕이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는 이유로 영화 ‘애나 앤드 킹’의 상영이 금지되고 왕실을 비판하는 파일을 공유한 여성에게 45년 징역형을 때리는 나라다. 전진당은 여기에 정면으로 맞섰다. 성역시돼 온 왕실모독죄 폐지와 징병제 개혁을 당당하게 들고나와 변화를 갈망하는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54석의 군소 야당에서 일약 151석의 제1당에 올랐다. 연정 구성등 난제가 남아있지만 가위 선거혁명이라 할 만하다.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 이후에도 우리 정치는 길을 잃고 표류 중이다. 성장의 엔진 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청년실업, 살인적인 고물가와 부동산 가격, 자산 양극화와 부(富)의 편중, 성·계층·세대 갈등, 패자부활전 없는 숨막히는 정글사회가 내뿜는 독소로 나라가 중병을 앓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산율이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지만,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자신의 재선과 자당의 집권에만 관심이 쏠려있을 뿐이다. 총선이 가까워오면서 더욱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미 국민적·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정치적 인물들이 무슨 책방이다, 다큐멘터리다, 토크쇼다 하며 정치적 부활을 노린다. 두 걸음, 세 걸음 앞으로 내달려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신파극인가. 그들이 부활하면 국민들 삶이 지금보다 나아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국민들 염장 지르는 뻔뻔한 일들이 벌어지니 아직 무르익지 않은 신당 논의가 벌써 주목을 받는다. 신당 운동의 성공 여부는 인재 영입에 달렸다.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는 위선, 권력자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무소신과 무능을 대체할 도덕성과 실력을 갖춘 세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다. 다행히도 한국은 ‘인재 부국(富國)’이다. 세계적 수준의 지식과 네트워크,도덕성과 전문성을 갖춘 고수들이 곳곳에 정말 많다. 삼고초려, 아니 십고초려를 해서라도 역량 있는 인재들을 앞세우고 이들의 경륜과 지혜를 빌리길 제언한다. 겉만 번지르르한 반짝 스타나 유명인을 영입인사로 포장하는 깜짝쇼는 수명을 다했다. 그런 방법으론 문제해결을 할 수 없다는 걸 이젠 모두 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당의 목표와 가치를 명확히 제시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비전과 정책을 하나씩 제시할 때 국민들의 신뢰가 쌓일 것이다. 학자금 무이자 대출 같은 포퓰리즘 선동이 아니라 청년들의 앞길을 열어줄 수 있는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해법 마련부터 고민하라는 것이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합리적 방안을 제시해 실력을 보이라는 것이다. 쉬운 길이 아니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민심에 조응하려는 열정과 진정성을 국민들이 인정하고 대안세력으로 여긴다면 정치판을 바꿀 수 있다. 이런 노력 없이 공천에 밀려난 낙천자들이나 자리 욕심으로 정치권을 기웃대는 낭인들끼리 헤쳐모여 하는 신당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모험을 감행할 강단과 용기 없이 얄팍한 정치공학만을 앞세운 신당 운동이라면 접는 게 낫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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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퍼스펙티브] 비호감 정치에 혐오는 최고조, 제3세력은 안 보여
━ 2024년 총선, 신당 바람 불까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한국 정치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을 두 축으로 한 양당 체제로 고착화했다. 양당 구도를 깨려는 제3신당 실험도 여러 번 있었다. 그간 숱한 신당이 명멸했다. 제3신당 실험에 대한 정치사적 평가는 잠시 접어두자. 주목할 점은 선거 때면 제3지대 신당론이 출현하는 현실이다. 견고해 보이지만 틈새가 갈라져 있거나 지층이 불안정하다는 반증이다. 지난 경험에서 보듯, 작은 균열이라도 분출한 선거 민심과 결합하면 예측 불허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금태섭 1년이 채 남지 않은 22대 총선(2024년 4월 10일). 이번엔 ‘금태섭(전 민주당 의원) 신당론’이 대두했다. “수도권 30석”이 목표라지만 현재로선 미풍도 느껴지지 않는다. 신당의 필요조건이랄 수 있는 ▶걸출한 리더 ▶정책과 비전 ▶새 인물 수혈이 보이지 않는다. 공염불로 끝날지 모른다. ■ 「 ‘적대적 공생’ 양당 체제에 불신 “제3세력 나오면 지지받을 것” 여야 현역들, 온실 안주하려 해 “강성팬덤 있는 게 선거엔 유리” 편가르기 정치에 새 바람 일까 총선 끝난 뒤 신당 출현 전망도 」 그러나 “비호감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불신이 임계점에 달하고 있어 믿을만한 제3세력이 나오면 민심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윤여준 전 의원)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국민의 삶과 유리된 채 정치 생명 연장만을 노린 포퓰리즘, 위선과 비리, 증오와 혐오를 퍼 날라 재생산하는 편가르기 정치에 자정 능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높다. 지성과 합리를 밀어내고 정치를 양극단으로 내모는 광풍 정치, 강성 팬덤 현상도 제3의 정치세력 출현을 재촉하는 요인이다. 2024년 총선, 과연 제3당 실험은 성공할까. TK 석권한 자민련, 호남 휩쓴 국민의당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역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제3신당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통일국민당(14대 총선 31석), 고 김종필(JP) 총리의 자유민주연합(15대 총선 50석),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20대 총선 38석)이다. 대선주자급의 정치 리더가 깃발을 들고 지역 맹주나 명망가들이 가세해 성공한 경우다. ‘반값 아파트’를 대표 공약으로 내세운 통일국민당은 민생을 파고드는 실용주의로 기성 정치권과 차별화했고,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계와 갈등하던 JP는 이른바 ‘원조 보수론’을 앞세워 충청과 TK(대구·경북)를 공략했다. 안철수 의원은 ‘새 정치’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어 바람을 일으켰다. 자민련과 국민의당은 위력적이었다. 거대 양당의 핵심 지지기반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자민련은 충청은 물론 수도권과 강원에서도 당선자를 냈고, 특히 비(非) YS 정서가 팽배했던 TK를 집중 공략해 대구 지역구 13석 중 8석을 석권했다. ‘원조 보수’라는 프레임에 걸맞은 박준규·박철언 전 의원 같은 TK 거물들을 결합한 전략이 먹혀들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새정치+호남’ 연합군의 승리였다. 김한길·박지원·정동영 전 의원 등 문재인 세력과 갈등하던 동교동계와 호남 중진들이 분당(分黨)해 호남 지역구 28석 중 23석을 거머쥐는 이변을 낳았다. 정당 비례대표 투표에선 제1당 민주당(25.5%)보다 높은 26.7%를 득표했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씨는 “국민의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호남의 지지뿐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의원 간 갈등과 진박감별사 사태, 공천 파동으로 새누리당을 이탈한 중도와 보수까지 견인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양당 모두에서 동시 균열이 일어나고 ▶유명세가 있는 인물군이 가세했을 때 신당은 탄력을 받는다. 신당 성공의 방정식이다. 반면 2000년 민국당 사태는 이와 대비된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물갈이 공천’에 반발, 김윤환·조순·이기택 전 의원 등 공천 탈락한 중진들이 영남 기반의 신당을 창당했지만 영남에서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한 대참패로 끝났다. 한나라당이 ‘새 정치’ 명분을 선점한 데다 “민국당 찍으면 DJ 돕는 것”이란 정서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20대의 50%가 무당층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지난 대선 이후 무당층이 계속 늘어 30%(5월 둘째 주 조사 28%)에 육박하고 있다. 무당층은 평소엔 늘었다가 선거가 가까워져 오면 줄어들지만, 이번엔 2030, 특히 20대의 이탈이 급증한 게 특이점이다. 2022년 1월 평균 34%이던 20대 무당층은 꾸준히 늘어 지난달엔 53%에 달했다. 같은 기간 30대는 26%→36%로 증가했다. 허진재 한국갤럽 이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부터 지난 대선까지 높은 투표율을 보였던 20, 30대가 진보·보수 양당으로부터 지지를 철회한 상태”라며 “내 삶은 개선된 게 없고 정치는 오히려 더 후퇴해 양극단의 혐오를 만들어내는 데 실망해 불신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20대의 이탈이 신당의 동력으로 연결될지는 미지수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소장은 “지난 대선 땐 개딸(개혁의 딸)이나 이준석 키즈 등 20대가 조직화됐지만 지금은 오히려 파편화돼 있다. 이들이 집단화하려면 서로 공유할 정치적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선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며 부정적 전망을 내놨다. 또 “20대를 견인할 아이돌 같은 인기를 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라며 인물 부재를 지적했다. 과거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영남·호남 민심도 예전만 못하다. 국힘의 대구·경북(51%), 부산·울산·경남(40%) 지지율은 저조하다. 과거엔 대통령의 높은 인기가 집권당의 지지율을 견인했지만, 막 집권 1년을 넘긴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27~37%(지난 20주 통계)의 박스권에 갇혀 있다. 한국갤럽의 5월 둘째 주 조사에서 윤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는 응답은 대구·경북에서 52%, 부·울·경에선 당 지지율보다 낮은 37%였다. ▶안철수·이준석·나경원 사태에서 드러난 당내 민주주의 실종 ▶일방통행식 리더십과 줄세우기 ▶지지부진한 부패 수사와 무능으로 보수·중도 지지층이 이탈, 관망으로 돌아섰다는 게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민주당도 비슷하다. 70% 이상 높은 지지를 보이던 광주·전라의 민주당 지지율은 53%로 떨어졌다. 대장동, 돈봉투, 김남국 의혹 등 사법 리스크와 입법 폭주, 팬덤에만 의존한 이재명 체제에 실망한 탓이다. “이재명 체제와 타협 정서가 더 커” 구심력보다 밖으로 튕겨 나가려는 원심력이 더 클 때 분당 사태가 벌어진다. 정치권에선 우선 이재명 체제를 주목한다. 이 대표가 사퇴하거나, 거꾸로 비 이재명계에 대한 공천 배제 등 잡음이 커질 경우 이탈 세력이 생길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유지하는 틀이 무너질 수 있다고 본다. “이재명 후보가 될까 봐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던 중도층의 선택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 내 기류는 다르다. 이재명 사퇴론이 고개를 들고 있지만 이탈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공천이 보장된다면 이 대표와 타협하는 쪽을 택할 의원들이 많다. 강성 팬덤이 선거에는 나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한 중진 의원은 설명했다. 이상민 의원도 “5% 중도를 얻으려다 5% 열성파를 잃을 수 있다는 게 대체적인 정서”라고 당내 기류를 전했다. 현재 수도권 121석 중 100석(83%)이 민주당 의원이다. “수도권 민심을 볼 때, 지금 구도가 나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민주당 현역 의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금 전 의원)는 분석이다. 현 구도를 깨려면 국민의힘이 개혁 공천을 해야 하지만, 좋은 인물군 발탁이 쉽지 않고 기성 정치인이 반발할 것이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신당 깃발을 앞세울 지역 맹주 혹은 중간 보스를 찾기 힘들어졌다는 것도 신당 창당엔 부정적 요인이다. 그간의 학습효과로 양당 모두 ‘모험’보다 ‘온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높아져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당 기대” 그래서 신당의 출현이 총선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재명 체제의 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비명계는 같이 못 갈 것이고, 패배하면 희망 없다고 본 세력들이 총선 후에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배종찬 소장)는 예측이다. 국민의힘이 패배할 경우 분당 수순을 밟게 될 수 있다. 신당론자들은 양당 체제에 대한 반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궤적을 살아온 민주적·합리적인 세력이 등장하면 기대를 모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금태섭 전 의원은 “과반수 득표한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으로 끝났고 통합정치의 기대를 걸었던 문재인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도 편가르기 정치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정치인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판타지가 식상해졌고 유권자도 이제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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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인권보호는 철저히, 임금·고용 체계는 다양화할 필요”
━ 외국인 가사 도우미 제도가 성공하려면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여성의 가사·육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지 않는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조정훈 의원(시대전환)은 여성의 경력단절 해소, 저출산 극복 해법으로 ‘가사근로자법 개정안’을 내놨다. 외국인 도우미에겐 5년간 최저임금의 예외 적용 대상으로 두자는 것이다. 여성·노동계는 이주여성에 대한 성 차별, 인종 차별이자 외국인 근로자를 2등시민 취급하는 ‘현대판 노예제’라며 법안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통계청 집계에 의하면 작년 한해동안 직장을 포기한 경력단절 여성은 139만7000명이다. 전체 맞벌이 가구수 582만3000가구(2021년)에 견주면 상당히 높은 비중이다. 단절 사유의 65.5%가 육아 및 임신·출산 때문이다. 월 230만~250만원(입주시 표준요금)의 비용은 어지간한 고소득 연봉자가 아니면 부담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 「 “월 200만~300만원 감당할 맞벌이 부부 얼마나 될까” “최저임금 보장하고 맞벌이 가정엔 정부가 비용 지원” “한국 시장의 임금 경쟁력 없으면 다른 나라로 갈 것” 독일, 최저임금 보장하나 임금 편차, 자유 계약도 허용 」 한국노총 전국연대 노조 가사·돌봄유니온은 지난달 27일 외국인 가사 근로자의 최저임금 예외 적용에 반대 하는 집회를 갖고 가사근로자법 개정안 철회를 촉구했다. [뉴스1] 전문가들은 육아·가사에 가족 돌봄까지 고스란히 여성에게 떠넘기는 전근대적인 인식·문화와 고비용 구조를 바꾸지 않고선 저출산(0.78명)의 국가적 위기에서 탈출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마이클 크레이머 미 시카고대 교수도 “한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외국인 체류자 비율도 낮고 일하지 않는 여성도 많다”며 외국인 가사 도우미 도입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정부는 식당·공장·농촌 등에 제한적으로 허용해온 외국인 인력을 청소·가사·육아의 직역으로 확대하는 시범사업을 올해 중 시행한다. 현재는 중국 동포와 결혼이민자, 거주·영주권을 가진 외국인에게만 가사 도우미 취업을 허용하고 있다. 코로나 겪으며 불법 고용 늘어 외국인 가사 도우미 도입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건 아니다. 기획재정부는 2016년 고용허가제 대상 국가에 대해 가사·돌봄 업종까지 허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일자리 침해 가능성과 임금이 높은 타업종으로의 불법 이동, 인권 침해 등에 대한 우려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 2021년 ‘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면서는 그마저 논의가 중단됐다. 가사 근로자도 최저임금·사회보험·퇴직금 등을 보장받게 되면 ▶내국인 도우미 인력이 늘어나 외국인력 도입이 불필요해지고 ▶외국인에게도 최저임금을 똑같이 적용하면 비용절감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현실을 도외시한 탁상공론이었다. 특히 코로나로 중국 동포의 입국이 어려워져 공급이 달리자 도우미 월급이 치솟고 외국인 불법 고용이 음성적으로 이뤄지는등 부작용과 어려움이 가중됐다. “가사노동 시장도 노동집약적인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내국인만으론 수요를 채울 수 없는 만성적인 공급 부족시장인데도 ‘가사=여성의 일’이라는 인식 때문에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탓”(청소 서비스 소개업체 대표)이란 지적이 나왔다. 지난해 오세훈 서울시장은 국무회의에 참석해 “아이 때문에 일과 경력을 포기하는 경우를 최소화해야 한다”며 외국인 육아 도우미 정책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저가 항공 생겨 기존 항공사 망했나” 조정훈 숙제는 한둘이 아니다. 언어·인종·문화의 차이로 인한 마찰과 갈등, 인권침해 논란, 불법 체류에 대비한 정교한 매뉴얼과 시스템이 전무한 상태다. 최저임금 논란은 첨예한 이슈다. 조정훈 의원은 “월 100만원이란 건 상징적 금액”이라며 “청년세대가 여건에 맞는 가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가사 도우미 시장을 다양화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ILO협약 위배 아닌가. “중국 동포나 입주 도우미를 쓰려면 월 200만~300만원을 줘야하는데 이걸 감당할 수 있는 청년 맞벌이 부부가 얼마나 될까. 이건 고액 연봉자들에게만 유용한 시장이다. 최저임금 제외는 현실적 선택이다. 근로관련법 적용을 받는 ‘사용자’ 대신 ‘가사사용인’이란 개념을 사용하면 논란을 피할 수 있다.” 여성 이주 노동자에 대한 반인권적 노동 착취란 지적이 있다. “외국인 도우미와 한국 가정이 1대 1로 서로 합의한 조건으로 노동 계약을 맺는 것을 착취라고 할 수 없다. 우리 부모님 세대도 간호사·광부·건설 노동자로 일했지만 이걸 착취당했다고 하나.” 가사노동을 형편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했다는 비판에 대한 입장은. “가사노동을 폄하하는게 아니다. 모든 노동은 다 소중하지만 가사와 육아 비용 부담 때문에 경력단절을 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 한해 139만명이나 되는 건 문제 아닌가.” 한국인 가사 도우미의 일자리를 잠식하고 값을 떨어뜨릴 것이란 우려도 있다. “저가 항공이 생겼다고 기존 항공사들이 망했나. 오히려 저가 시장이란 새로운 시장이 생겼다. 외국인력이 들어오면 가사노동 시장이 다양해질 것이다. 언어·문화 장벽이 없는 내국인에 대한 선호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근로조건 따라 시니어들 관심 기대” 노동계와 여성단체들이 10여년간 공들인 끝에 가사 도우미를 ‘노동자’로 인정한 ‘가사근로자법’이 지난해 시행에 들어갔다. 법 제정에 앞장서온 최영미 가사·돌봄 유니온 위원장은 “외국 근로자 유입에 반대하지 않지만, 정책의 마지노선은 최저임금과 근로자의 권익 보호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외국인 가사 도우미 허용 사업이 실시된다. “그게 필요한 사각지대가 어딘지, 외국인 도우미가 왜 필요한지, 실태 조사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일손이 달리는 건 근로조건이 너무 안 좋기 때문이다. 가사도우미로 아무리 일해봤자 승진도 못하고 월급이 올라가지 않으니 누가 하겠나. 건강한 시니어들이 일하고 싶은데 대우 못받고 돈도 제대로 못받으니 못 들어오는 것이다. 근로조건만 개선하면 시니어들이 (도우미로) 일할 수 있다.” 중산층이 비싼 임금을 감당할 수 있나. “정부가 일하는 여성, 맞벌이 가족을 위해 (도우미 사용) 비용을 지원한다든가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100만원 주고 들여온다 해도 중하층들이 쓸 수 있을까. 자영업자·비정규직들은 이마저 혜택도 못 받을 것이다. 사실 야근 많고 수입 적은 계층에 가사 도우미가 우선 혜택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노동자 입장에서도 최저임금은 기본적 생계를 보장하는 기준이다.” 가사노동은 특성상 표준화가 어려워 고용 형태 등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가정마다 특성이 다르므로 서비스가 동일할 수 없다. 다양성이 인정돼야 한다. 정부가 전 국민에게 가사 바우처를 주고 필요한 형태로 쓰게 하는 벨기에·프랑스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실제 외국의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를 운영한다. 서울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의 경우 출신 국가별로 임금에 차등을 둔다. 필리핀 도우미는 월 570 싱가포르달러(56만원)인데, 미얀마 출신은 450 싱가포르달러(48만원)다. 홍콩은 정부가 별도 최저임금을 지정한다. 2022년 10월 기준 월 4730 홍콩달러(80만원)다. 그러나 집이 좁은 홍콩은 비용보다 도우미에게 별도 공간을 제공하는 문제로 분쟁이 많아, 실제로는 고소득층(연 5만달러) 위주로 고용이 이뤄지는 편이다. 일본은 2017년부터 도쿄 등 일부 지역에서 시범 실시 중인데, 내국인과 동일한 노동권을 보장하고 정부가 인증한 특정 기관이 인력을 고용해 가정에 파견하고 있다. 독일은 ▶고용주가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해 파견하는 직접 고용 방식 ▶송출국 파견업체가 도우미를 고용해 독일 가정에 파견하는 파견 방식 ▶프리랜서 외국인 도우미가 독일 가정과 1대 1로 계약하는 서비스 의뢰 방식 등 다양하다. 원칙적으로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내국인과 동일한 노동권을 보장한다. 그러나 ▶송출국가·능력 차이를 감안해 중개업체가 임금 편차를 둘 수 있거나(파견 방식) ▶최저임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임금 계약(서비스 의뢰 방식)을 하는 게 허용된다. 익명을 요구한 청소 서비스업 스타트업 대표 A씨는 “세계 가사인력 시장의 경쟁 구도가 이미 형성돼 있어서, 한국시장의 가격이 경쟁력 있으면 외국 인력이 선호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갈 것”이라며 “최저임금 문제에만 너무 매달리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가사도우미를 고용·파견하는 인증기관은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지만, 사용자와 도우미 간 1대 1 계약이 이뤄지는 플랫폼 서비스에선 최저임금과 무관하게 비용이 책정되고 있다. A씨는 “외국인 도우미들이 인권 사각지대에 몰리지 않고 한국어와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관리 시스템을 정교하게 만드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 가사 도우미 제도의 성공적 정착을 위한 공론화가 시급하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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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김재원 파문이 남긴 과제
이정민 칼럼니스트 국민의힘과 전광훈 목사의 ‘밀월’은 황교안 대표(자유한국당) 시절 절정이었다. 황 전 대표는 2019년 대표에 취임하자마자 전 목사가 회장으로 있던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을 방문했다. 이단 시비가 일던 때여서 가까운 의원들조차 만류했지만 강행했다. ‘문재인 하야’ 광화문 집회에도 참석해 연설했다. 패스트트랙 법안과 지소미아 종료에 반대하며 청와대 앞에서 벌인 단식 농성장에서 전 목사와 나란히 담요를 덮어쓰고 앉아있던 황 전 대표의 모습은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무산되긴 했지만, 황 전 대표는 보수 유튜버들에게 ‘입법보조원’ 자격을 줘 국회에 출입할 수 있게 하자는 엉뚱한 제안을 한 적도 있다. 태극기 부대 같은 장외 세력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던 심산이었겠지만 결과는 정치적 몰락을 가져왔다. 민심은 극우세력과 연대, 중도로의 외연 확장을 외면한 ‘황교안의 미래통합당’을 심판하고 현 야당에 180석이란 상상을 초월한 거대의석을 몰아줬다. ■ 「 김재원 “전광훈, 우파 천하 통일” 한 달 새 7%p 떨어진 국힘 지지율 극우에 매달릴수록 중도 달아나 “황교안 체제로 돌아가버렸다” 」 선데이칼럼 둘의 관계도 파국을 맞았다. 50억원 수수설 등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황 전 대표가 전 목사를 경찰에 고소하면서 법정 다툼으로 번지고 있다. 밀월 관계의 한때를 떠올리게 하는 전 목사의 발언들이 지금도 유튜브에 떠돌아다니는데, 가관이다. “황교안, 착하고 신앙이 깊은데 정치는 답답하다. 공관위원장 발표 하루나 이틀 전에 꼭 저와 상의해달라고 했는데 웃기만 하더라. 통합하려면 광화문(전광훈 목사 세력)과 해야지 우리를 두고 누구랑 한다는 건가.”(2020년 자유통일당 창당대회) 황 전 대표를 손절(損切)한 이들이 다시 국민의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당 안팎에선 잇단 설화로 파문을 일으킨 김재원 최고위원의 경우를 이와 연결짓는 시각도 있다. 알려진 대로 최고위원 경선에서 최다 득표를 한 김 최고위원은 지난달, 전 목사 주도 예배에 참석해 “5·18 정신 헌법 수록 반대” 발언을 했고, 앞서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보수단체 주최 강연회에선 “전 목사가 우파 진영을 천하 통일했다”고 열변을 토했다. 영상은 충격적이다. “우리가 김 의원 밀었잖아~” “김기현 장로도 밀었잖아” “우리가 200석 만들어주면 뭐해 줄래”라는 전 목사에게 김 최고위원은 “영웅 칭호를 하고 최고위에 가서 목사님이 원하시는 걸 관철시키도록 하겠다”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집권여당의 지도부,그것도 3선 의원을 지낸 중진 정치인의 발언인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4·3 폄훼 논란까지 겹치며 집중포화를 맞자 김 최고위원은 ‘활동 중단’을 선언한 상태다. 그러나 다른 최고위원들의 막말과 실언, 주 69시간 근무제 논란등 악재가 쏟아지면서 불씨는 국민의힘 전역으로 옮겨붙었다. 7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율은 최근 한 달 새 7%p 떨어진 32%였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빠진 민주당(33%)보다도 낮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한 중진 의원은 “3·8 전당대회 때 전 목사를 지지하는 세력이 대거 당원 가입을 해 제한적이긴 하지만 경선 판도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당이 아스팔트 우파의 입김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내년 총선도 장담할 수 없다”고 탄식했는데, 바로 현실이 됐다. 지난 5일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은 텃밭에서도 대패했다. 특히 김기현 대표 지역구에 인접한 ‘울산의 강남’이라는 남구 구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울산교육감 선거에서도 진보 후보가 당선돼 체면을 구겼다. 야당 우세지역이라곤 하나 전주을 국회의원 선거 결과도 충격적이다. 지난해 대선 득표율(15%)의 반토막(8%)에 그치면서 출마 후보 6명 중 5등을 기록한 것이다. 이게 집권 1년(5월 10일)이 채 안 된 여당,새 지도부 선출 한 달째인 집권당의 참담한 성적표다. 뭐가 고장 나도 단단히 고장 난 것이다. 여의도 정가에 “정치는 산수(算數)”란 말이 회자된다. 보수 30% 진보 30% 중도 40%의 유권자 지형 구도에서 누가 중원을 잘 공략하느냐 하는 수(數)싸움에서 선거의 승부가 난다는 얘기다. ‘평시엔 지지층에, 선거가 가까워 오면 중도층에 충성하라’는 건 상식으로 통한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거꾸로다. 0.73%p 차이의 신승으로 집권한 이후 과거로, 극우로 회귀하는 모양새다. 당이 보수에, 극우에 매달릴수록 중도표는 달아난다. “민주당이 무공천한 전주을에서 집권여당 후보가 얻은 8%라는 처참한 결과는 호남 국민의힘이 2020년 황교안 체제 수준으로 돌아가버렸다는 점을 보여준다”(천하람 순천광양곡성구례갑 당협위원장)는 지적 그대로다. 아스팔트 우파에 기대는 정치는 위험하다. 장외 특정 세력의 원심력에 끌려가 우파 팬덤에 포획되는 순간 중도성향 유권자들은 떠나게 될 것이다. 기우일 수 있지만, 중도가 떠난 둥지가 극우파들로 채워진다면 선거엔 치명적 구도가 될 테다. 국민의힘 일각에선 “이번 대표 경선 때 100% 당원 선거로 룰을 바꾸면서 특정 세력이 경선에 영향력을 미칠 여지가 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귀담아들어야 할 얘기다. ‘김재원 파문’이 국민의힘에 새로운 과제를 남겼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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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퍼스펙티브] “대통령 의지 있다면 총선 앞둔 지금이 개헌 논의 적기”
━ 역대 국회의장이 말하는 개헌의 성공 방정식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윤석열 대통령이 올 초 ‘중대선거구제 개편’을 언급하면서 정치 개혁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국회의원 전원위원회를 통한 선거제도 개편 ▶21대 국회 임기 내(2024년 5월) 개헌이란 시간표를 제시하며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의장 직속으로 동시 출범한 정치개혁특위와 개헌 자문위(헌법 및 정치제도 개선 자문위)에서 국회의원 정수, 선거구제, 비례대표 선출 방식 등에 대한 세부안이 마련되면 국회의원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위원회의 난상토론과 기명투표를 통해 최종안을 도출한다는 복안이다. ■ 「 정치불신 증폭, 총선승부 불투명 ‘제왕적 대통령’ 권한 분산 호기 30년 만의 기회 방기한 문 정부 적폐 수사 집중하며 궤도 이탈 차기 주자 부상 땐 개헌 불가능 “승자독식 정치구조 언제까지…” 」 ‘선거제 개혁→헌법 개정’ 지지부진 승자 독식 정치는 승복하지 않는 풍토를 낳는다. 친 민주당 성향 단체가 대통령 퇴진 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전원위’는 새로운 발상이다.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 사항이 각 당으로 돌아가선 의원들의 반대에 부닥쳐 무산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선거제도 개혁에 성공하면 그 동력으로 헌법 개정이 가능할 것으로 김 의장은 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개혁의 돌풍은커녕 미풍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전당대회 후유증,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둘러싼 내분 등 여야 모두 집안 사정이 복잡해서다. 대의정치가 수축하면 장외세력의 원심력이 커진다. 나라는 저출산 고령화, 경제, 외교, 국방 등 복합 위기의 쓰나미에 무방비로 놓여 있는데, 정치는 순기능은 거의 상실한 채 정권 탈환을 노린 진영 전쟁에 혈안이 돼 있다. “승자독식의 정치 구조를 깨는 개헌을 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정세균 전 국회의장)는 경고음이 높아지는 이유다. 개헌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국민 여론, 신구 권력, 정치인들 간의 이해가 층층이 얽힌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2000년대 들어 역대 국회의장들이 추진했던 개헌이 실패한 건, 씨줄 날줄이 얽히고설킨 이 고리를 끊지 못해서다. 그렇다면 개헌은 불가능한 것인가, 성공 방정식은 무엇일까. 전임 의장들에게 물었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실패 승자 독식 정치는 승복하지 않는 풍토를 낳는다. 보수단체 회원들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 구속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대통령 4년 중임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그러나 유력한 야당 주자이던 박근혜(“참 나쁜 대통령”), 이명박(“개헌보다 민생 전념”) 전 대통령의 반발로 동력을 잃었다. 그랬던 이명박(MB) 전 대통령도 재임 중이던 2010년 측근인 이재오 전 의원을 특임장관에 임명, 선거제도와 개헌의 국회 논의를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미래 권력으로 부상한 박 전 대통령이 반발해 무산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개헌은 국정의 블랙홀”이라며 논의를 봉쇄했지만 임기 말엔 개헌 카드를 꺼냈다. 총선 패배 후 2016년 국회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 헌법 개정”을 밝혔으나 두 달 후 탄핵당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집권 초엔 막강한 위세의 대통령 권력이 개헌을 가로막고, 임기 말엔 차기 주자를 둘러싼 미래 권력이 걸림돌이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2008~2010년)은 “압도적 표차로 압승해 대통령이 됐는데 개헌하자니까 ‘MB 흔들기’라고 오해를 했고, 나중엔 아예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87년 헌법은 대통령 직선에만 치우쳐 정작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된 유신 잔재와 독소조항을 없애지 못했는데 이걸 바꾸지 않고선 선진 민주화로 가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2014~2016년)도 “개헌은 여야 합의와 공감대가 있어야 하므로 대통령이 힘 있을 때 나서지 않으면 어렵고, 임기 말 개헌은 동력을 얻을 수 없어 물 건너가게 된다”고 돌이켰다. 개헌 골든 타임 날려버린 문재인 역대 국회의장 박근혜 탄핵으로 빚어진 권력의 진공 상태는 거꾸로 개헌의 절호 기회였다. ①대통령제의 맹점이 극명하게 드러났고 ②대선 정국은 안갯속이었다. ③국민 여론(개헌 찬성 75%)도 고조됐다. ④여야 대선 후보들 모두 개헌을 공개 약속했고, 문재인 후보는 ‘통합정부’ 공약을 들고 나왔다. 당시 정세균 국회의장(2016~2018년)은 2017년 개헌 특위를 꾸리고, 개헌안 초안까지 마련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하자 통합정부 약속을 저버리고 전 정권 적폐 수사로 방향을 틀었고, 야당(자유한국당)은 개헌 궤도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건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청와대가 느닷없이 토지공개념, 지방분권 강화 등을 담은 ‘문재인 개헌안’을 발의한 사건이었다. 정세균 전 의장은 “87년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여야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개헌특위를 만들어 분위기가 고조됐는데,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는 바람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아쉬워했다. 당시 개헌특위에 참가했던 한 위원도 “문 대통령은 야당의 탄핵 동조로 집권하고도 약속과 달리 야당을 단 한 명도 등용하지 않았다”며 “개헌 약속마저 파기하는 바람에 여야 상호 불신이 더 깊어지고 국민 신뢰도 깨졌다”고 지적했다. 이 개헌안은 정의당까지 반대하면서 의결정족수 미달로 휴짓조각이 됐다. ‘문재인 개헌안’ 발의가 개헌 압박을 회피하려는 꼼수였다는 비판이 민주당 안에서도 나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2018~2020년)은 “4·19 직후 내각제 개헌도, 87년 대통령제 개헌도 국회에 맡겼기 때문에 서너 달 만에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면서 “문 대통령이 개헌안을 낼 게 아니라 국회에서 논의하라고 했으면 100% 이뤄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친문파의 독점욕이 30년 만의 개헌 기회를 날려버린 건 한국 정치의 오점으로 남았다. 정세균 전 의장은 “50%가 못 되는 득표로 당선된 승자가 모든 권한을 독식하고 패자는 빈손이 되는 상실감 때문에 서로 승복 못 하는 죽기살기식 정치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윤 대통령 “임기 손해 보더라도 개헌” 전직 의장들은 개헌 성공의 제1조건으로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최소한 방해는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윤 대통령은 개헌 의지가 강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국회의장단과 만나서도 “개헌과 선거법·정당법은 3개가 하나다. 함께 처리돼야 한다”며 자신이 임기 단축의 손해를 보더라도 개헌을 이뤄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복수의 관계자가 전했다. 또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독식하는 구조는 사라져야 한다”며 중선거구제와 다당제를 강조했다. 이런 인식은 국회의 개헌 논의를 재점화했다. 그간 개헌 논의는 ▶내각제 개편은 장기 과제로 돌리고 ▶대통령의 권한 분산을 우선 추진하는 쪽으로 모였다. ▶국무총리의 국회 선출 또는 복수 추천 ▶국무위원(장관급)과 법관의 인사동의제 ▶감사원의 국회 이관 등에 여야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문희상 전 의장은 “총리의 국회 선출만 이뤄져도 총리의 장관 제청권, 해임건의권이 다 살아나 힘을 갖는 총리가 되고, 자연스럽게 권력 분산이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국민 신뢰가 바닥인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 여론이 지지할 것인가, 야당이 의석 3분의 2에 육박하는 압도적 구도에서 가능할 것인가다. ‘국회의원 선거제 개편(4~5월)→내년 4월 총선·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 시나리오와 관련, 국민의힘 일각에선 “개헌 논의는 하되 개헌 발의는 내년 총선 이후로 넘겨야 한다”(김형오 전 의장)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반면 국회 개헌자문위를 이끌었던 김종인 전 국민의힘 대표는 “대통령제를 그대로 놔두고 다당제 개편만 논의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반박한다. 내년 총선 이후에는 동력 떨어져 총선 이후 새롭게 정치판이 짜이면 개헌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병석 전 국회의장(2020~2022년)은 “대통령제, 소선거구제, 양당제 등 갈등을 극대화하는 ‘땅 뺏기 정치’에선 대선에 진 야당은 그날부터 정부 여당 흠집 내는 데만 골몰하게 된다”며 “이런 상황에선 국정도, 대외관계도 힘을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의지가 있다면 큰 대의로 보나 정치 상황으로 보나 지금 개헌을 주저할 때가 아니다”고 제언했다. 박 전 의장은 “총선 후 국민의힘이 다수당이 되고 대통령 지지도가 높으면 개헌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둘 중 하나만 안 돼도 개헌 추진 동력은 약해질 것”이라고 관측했다. 문희상 전 의장도 “윤 대통령의 의지가 있다면 국회에 개헌 논의를 맡겨 문재인 대통령이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헌정 사상 아홉 차례 개헌 중 국회 발(發) 개헌은 1960, 1987년 개헌, 두 번이다. 정치에 대한 불만이 민의의 폭발로 이어져 제도를 바꾼 경우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크다. 여야 내부 분열상으로 총선에서의 승부가 불투명하다. 민의의 폭발이 개헌을 분출시킬 마그마로 작용할지 주목된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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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공화주의 위협하는 엘리트의 부모 찬스
이정민 칼럼니스트 “아빠는 아는 사람이 많다. 판사랑 친하면 재판에서 무조건 승소한다.”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발언이 처음 보도됐을 때, 말실수려니 여겼다. 내 상식으론 적어도 대한민국 검사, 고위 공직자를 아버지로 둔 고교생 아들이라면 이렇게 드러내 놓고 아버지의 신분과 특권을 자랑하도록 교육받진 않았으리라 믿었다. 사회 지도층일수록 특권적 지위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게 불문율이요, 공직자의 덕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건 순진한 착각이었다. 이들 부자는 특권을 과시하고 행사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돈도 실력이야. 네 부모를 원망해”라고 해 공분을 샀던 최순실씨 딸 정유라의 다른 버전이다. ■ 「 정순신,아빠 찬스로 학폭 아들 구제 엘리트 일탈은 대중에 박탈감 안겨 공정 무너지며 공동체 해체 가속화 공동선에 부합한 시민적 덕성 필요 」 선데이 칼럼 1심 판결문에 따르면, 아들 학교의 교사는 “정군에게 피해 학생의 아픔을 공감하게 해주려 노력했지만 책임을 인정하는 걸 두려워하는 부모님이 선도를 막고 있다”고 진술했다. 부모가 책임 회피를 코치하고 있다는 교사의 의심은, 정 변호사의 학교폭력대책심의위 발언에서도 읽힌다. 정 변호사는 “때린 것이 있으면 변명의 여지가 없겠지만 언어적 폭력은 맥락이 중요한 것 같다”거나 “경력이 많지 않은 학교폭력 담당 교사가 불과 10일 만에 사건을 조사했다”고 이의제기를 했다. 전문적인 법 지식과 빵빵한 법조 인맥을 둔 아빠는 보통사람들은 알기 어려운 재심청구, 행정소송, 집행정지 같은 소송을 이어갔고 아들은 명문대에 입학했다. 반면 피해자는 후유증에 시달리다 학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지식·정보·인맥으로 이어지는 특권 카르텔의 작용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다. 이렇게 검사 아빠는 민감한 학교폭력 문제도 ‘힘’으로 누르며 위력을 입증했다. 아빠찬스의 실증적 위력을 목격하고 압도된 아들이 “아빠는 아는 사람이 많다”고 자랑하고 다닌 건 단순한 말실수가 아닌 것이다. 아빠가 가진 권력에 대한 숭배이자, 아빠 찬스에 대한 찬사일 터다. 그러니 “자신보다 급이 높다고 판단하면 잘하고, 낮다고 생각하면 모멸감을 주는” 행동을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것 아닐까.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의 계급 질서를 너무 일찌감치 체득한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자식 앞에서 부모는 한없이 약해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자식이 위기에 빠졌을 때 부모의 이기심이 발동하는 걸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남의 자식을 수렁에 빠뜨리고 얻은 행운이라면 다른 문제다. 옷깃 여미며 성찰부터 하는 게 상식이다. 더구나 5년 전 언론에 보도됐을 때부터 주목을 받았던 사건 아닌가. 그런데도 정 변호사는 세상이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세평 따위는 상관없이 믿는 구석이 있었든지 권력의 꽃가마에 냉큼 올라타는 만용을 부렸다. 특권 엘리트층의 일탈과 탐욕이 이처럼 무도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슬픈 현실이다. 엘리트 기득권층의 탈선은 공동체 해체를 가속화한다. 공정과 정의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려 다수의 사회 구성원에게 열패감과 박탈감을 안긴다. 조국 사태가 여실히 증명하지 않았나. 자녀 입시에 연줄을 동원하고 서류를 위조하고 부모 찬스로 스펙을 뻥튀기한 게 법원 판결로까지 드러났지만 여지껏 사과 한마디 않고 있다. 윤석열 정부도 별로 다르지 않다. 풀브라이트 동문회장을 지내며 본인과 부인·두 자녀 등 온 가족이 풀브라이트 장학금 혜택을 받은 전 대학총장을 교육부장관 후보자에, 경북대병원장등을 지낼 때 두 자녀가 경북대 의대에 편입학하는 등 특혜 의혹이 제기된 의사를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에 지명했다. 둘 다 중도 하차했지만 이들이 남긴 상흔은 지워지지 않는 화석으로 남았다. 국가 소멸까지 우려되는 결혼·출산 포기 현상은, 자식을 위해 인맥과 정보를 총동원하는 부모찬스 사회, 시작점부터 불공정과 불평등 위에 출발해야 하는 미래세대의 억눌린 비명과 분노의 표출일지 모른다. 엘리트가 어떻게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는지를 연구한 미하엘 하르트만은 『엘리트 제국의 몰락』에서 능력과 전문성으로 무장한 정치 엘리트들은 점점 대중과 괴리되면서 대중의 정치 혐오를 불러 우익 대중영합주의라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공정하다는 착각』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진단도 비슷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을, 금융위기를 맞아 같은 엘리트들이 포진한 월가의 편을 들어준 오바마 대통령의 ‘아이비리그 내각’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격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엘리트가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사회가 위험한 건 공화주의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2400여년 전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이걸 걱정했다. 그래서 공화정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공동체적 삶의 원리와 가치를 다투는 공적 영역에서 사적 이해를 놓고 다툼이 있어선 안 되므로 시민들이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서 공동선에 복무하는 시민적 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공동체적 삶에 무엇이 이로운지 심사숙고할 줄 아는 실천적 지혜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다면 공화정은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다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사회 엘리트 부모들의 자식 사랑과 부모 찬스 남발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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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퍼스펙티브] 너무 많아진 공영방송, 나무보다 숲을 봐야할 때
━ 출구 안보이는 공영방송 독립 논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여야 입법전쟁이 불붙었다. 민주당이 지난 연말,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에서 방송 관련법 개정안을 단독 통과시킨 게 도화선이 됐다. 방송법(KBS)·방송문화진흥회법(MBC)· 한국교육방송공사법(EBS) 개정안이다. 정권이 ‘공영방송’ 사장 선임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특별다수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현재 9~11명인 이사회의 이사 수를 21명으로 늘리고 ▶연령·지역·성별을 안배한 100인 국민추천위원회에서 사장을 추천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KBS는 11명의 이사를 여야가 7대 4 비율로, MBC·EBS는 9명의 이사를 6대 3 비율로 추천해왔다. 야당은 권력의 입김을 막아 ‘정권의 방송’이 아니라 ‘국민의 방송’으로 가는 개혁안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노총 언론노조의 공영방송 영구장악 법안’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현재 법사위에 발이 묶인 상태지만 본회의 상정은 시간문제다. 여당은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단 입장이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방송·언론을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했다. 강압적 기구만으론 정권 운영이 어렵기 때문에 방송같은 외곽 기구를 동원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낙하산 인사와 노조 파업, 편파 시비와 적폐청산 논란으로 누더기가 된 한국 공영방송의 흑역사와 맞아떨어진다. 공영방송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내부는 갈갈이 찢기고 신뢰는 추락했다. 편가르기 진영정치가 낳은 비극이자 후진국형 정치의 폐습이다. 그러나 이를 해결할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야당 땐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제도개혁을 부르짖다가 집권당이 되면 ‘전리품’ 챙기기로 돌변하는 ‘내로남불 정치’가 청산되지 않는 한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란 탄식이 곳곳에서 나온다. ■ 「 야당 단독 처리 방송법 갈등 고조 국회가 추천하던 이사 몫 줄이고 방송·직능단체 참여 ‘특별다수제’ “시민참여로 정권의 방송 막아야” “특정 노조의 공영방송 장악 의도” 전문가 “시장서 공익성 경쟁해야” 」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민주당이 지난해 12월 2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정이 담긴 방송 관련법을 단독 처리하자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피켓 시위를 하며 항의하고 있다. [뉴시스] 정치권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에 특별다수제 도입이 처음 논의된 건 2016년 9월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다. 민주당 박홍근 의원(현 원내대표)등 야3당 국회의원 162명이 공동 발의해 개정안을 냈다. ▶KBS 이사회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MBC) 이사 수를 모두 13명으로 하고 ▶국회(여야 7대 6)가 이사를 추천하되 ▶야당의 동의없이 사장 선임을 할 수 없게 사장 선임시 이사 3분의 2이상 동의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여당의 소극적 태도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다가 대통령 탄핵 사태로 정권이 교체됐다. 여야가 뒤바뀌면서 방송법 개정 논의가 다시 급물살을 탔고, 국회 통과를 눈앞에 두게 됐다. 그런데 이번엔 문재인 정권이 변심했다. 후보 시절 토론회에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공영방송을 장악해서 국민의 방송이 아니라 정권의 방송으로 만들었다”며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문 대통령은 집권하자 표변했다.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소신없는 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뽑는 것이 도움이 되겠느냐”며 황당한 언론관을 드러내더니, 언론적폐 청산을 앞세워 임기가 끝나지 않은 KBS와 MBC 경영진을 갈아치웠다. 제도 개혁이 물건너간 건 말할 것도 없다. 친 민주당 성향의 언론노조(민노총 산하)조차 “말로는 공영방송을 국민의 품으로 되돌려준다고 약속해놓고, 5년 내내 어떤 노력도 제대로 한 것이 없다”(윤창현 위원장)고 비난했을 정도다. 진보학자로 꼽히는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최근 경향신문 칼럼에서 “문재인의 변심에 맞장구를 친 민주당은 정권이 교체당하자 화들짝 놀라 윤석열 정권 출범 10여일 전에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고안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들고 나왔으니, 선의를 인정받으려면 우선 사과부터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국민의 방송 vs 노영(勞營)방송 지난해 4월 지배구조 이슈가 재점화됐다. 민주당이 자당 소속 정필모(100인 국민추천위)·전혜숙(추천위에 시민단체·학계등 포함) 의원안과 국민의힘 박성중(특별다수제) 의원안 등을 짜깁기해 부랴부랴 개정안을 내놨다. 공영방송 이사(21명)에 대한 추천권을 ▶국회 5명 ▶시청자위원회 4명 ▶방송·미디어 관련 학회 6명 ▶직능단체(방송기자연합회·한국PD연합회·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각 2명) 6명이 갖는 최종안이 만들어졌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국민의힘은 ‘민노총 후견주의’라고 반발했다. 방송·미디어·직능단체 대부분이 친 민주당, 친 민노총(언론노조) 성향인 점을 들어 특정 세력이 주도하는 ‘노영(勞營) 방송’이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실제로 언론노조는 개정안 처리를 끈질기게 요구하며 민주당을 압박했고, 개정안이 과방위를 통과하자 지지 성명을 냈다. 민노총 산하 언론노조 MBC본부 최성혁 본부장은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서 “내년(2023년) 8월 이후 방통위 구도(위원 구성)가 바뀌는 상황에서 그 전에 시민참여 방식의 사장 선임 절차를 마련해두지 않으면 또다시 이명박·박근혜 권위주의 정권 환경으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에 공영방송 사장 선임 관련 법안에 모든 걸 걸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 MBC 제3노조의 시각은 180도 다르다. 제3노조는 “국회에서 민주당이 다수이고 언론학회와 직능단체들은 민주당 및 언론노조와 같은 목소리를 내온 진보세력 일색”이라며 “문재인 정부 때 기존 이사진과 사장들을 몰아내고 장악한 공영방송을 앞으로도 영구히 지배하겠다는 사악한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대통령 권력과 의회 권력의 불일치라는 정치 환경에서 빚어진 힘의 공백을 언론노조가 파고들며 지배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노영방송 논란이 불붙은 이유다. 이게 가능해진 배경에 대해 이인철 변호사(전 방문진 이사)는 “2018년 지상파 방송사가 노사 동수의 편성위원회를 만들면서 방송 사주의 권한이던 편성권을 노조가 나눠갖게 돼 노영방송의 제도적 기초가 마련됐다”고 분석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공영방송 난립 노영방송 논란은 공적 지분이 들어간 공영 채널이 과도하게 난립하고 있는 한국적인 특수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황근 선문대 교수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이뤄진 언론 통폐합이 민주화 이후에도 정상화되지 못하고 그 틀이 유지돼온 데 근본 원인이 있다”며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공영방송 과대성장 국가가 됐다”고 주장했다. 상당수 전문가들이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는 “민간 상업방송과 달리 지나치게 많은 공영방송은 궁극적으로 전체 국민의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영국의 BBC, 일본의 NHK 처럼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세계시장에 통하는 국가대표 K방송을 육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 관련법 어디에도 ‘공영방송’의 개념과 규범이 명확히 정의돼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공공지분이 들어간 채널을 편의상 공영방송으로 통칭할 뿐이다. 이런 잣대로 볼 때, 공적 지분이 들어간 주요 방송은 KBS1·2, MBC, EBS, YTN, 연합뉴스TV, 교통방송등 10개를 훌쩍 넘는다. 지상파만 놓고 보면 ‘1민영(SBS) 다(多)공영’ 구조다. 문제는 ‘공영=공익’으로 인식되면서 대주주 지분 제한 예외 인정, 의무 송출, 국고 지원등 상업방송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혜를 누리면서 방송시장을 왜곡하는 데 있다. 여당의 방송시장 재구조화, MBC·YTN 민영화 주장은 ‘무늬만 공영’ 방송이 너무 많다는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정부는 YTN에 대해선 공공지분 매각을 결정한 상태다. 노조는 언론탄압이라고 맞서고 있다. 공영방송 논쟁은 ▶정권 ▶자본 ▶노조로부터의 독립 문제에 매몰돼 여야와 진영이 극한 대립하는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남인용 부경대 교수는 “상업화된다고 공공성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지만 공영방송 숫자를 줄여 민영화한다고 공공성이 더 커지는 것도 아니다”며 “이분법에서 벗어나 공적 재원이 들어간 방송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방향 정립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나무(독립성 논란)에 가려 숲(공익성 제고)을 보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대기업 임원의 고언은 새겨들을만 하다. 기업에서 오랫동안 대언론 업무를 해온 그는 “공영방송이란 타이틀을 갖고 너무 쉽게 강한 기득권을 누리며 무임승차해온 측면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며 “공영방송끼리도 시장주의 속에서 공공성과 공익성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립성 논란에서 벗어나 어떻게 공익성·경쟁력을 갖춘 공영방송을 만들어갈 것인지 공론화를 시작할 때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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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창조적 소수 vs 지배적 소수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불현듯 십 수년 전 기억이 떠오른 건 아마도 집권여당에서 빚어진 대표 경선 촌극 때문이겠다. 오래전 취재 과정에서 만났던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 출신 간부가 털어놓은 무용담 한 토막이 돌연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일이니 아주 오랜 과거다. 당시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정권이 미는 인사가 있었는데 당선이 불투명했다. 위협적인 야당 후보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라는 오더를 받은 안기부 입장에선 피가 마를 일이었다. 미행과 뒷조사로 약점을 캐내 불출마 협박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러다 후보 등록일을 맞았다. 속이 타들어간 요원들, 결국 ‘일’을 내고야 만다. 입후보 등록을 하러 가는 후보의 차량을 들이받아 교통사고를 낸 것이다. 경미한 사고여서 커다란 인명 피해는 없었다지만 어쨌든 별안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야당 후보는 입후보 등록 마감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 「 친윤계 배타적 지배욕이 빚은 내홍 지난 정권 실패 보고 교훈 못 얻어 ‘창조적 소수’가 오만, 폭압 빠지면 국가는 응전능력 잃고 쇠락의 길로 」 선데이 칼럼 지나친 감상일 수도 있겠으나,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둘러싼 내홍을 보며 암울했던 시기의 흑역사를 떠올리게 되는 건 슬픈 일이다. 물론 수십년 전 사건과 국민의힘 사태는 결이 다르다. 우선, 사태를 촉발한 나경원 전 의원의 처신이 논란을 불렀다. 불과 3개월 전, 그것도 간청하다시피해 감투를 2개(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기후환경 대사)나 꿰차더니 ‘여론조사 1위’가 나오자 “장관급 자리와 장관은 다르다”며 갑자기 부위원장직을 내놓겠다는 건 양손에 떡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철부지 어린애를 연상시킨다. 저출산고령위는 위원회 구성조차 온전히 마치지 못한 상태다. 또 당연직 위원장인 대통령에겐 일언반구 없이 저출산 해법을 설명하는 언론 플레이를 한 것도 엉뚱하고 경솔했다. 그러나 출마를 막는 건 다른 문제다. 친윤계가 똘똘 뭉쳐 융단폭격을 하며, 공개적으로 출마를 저지하는 모양은 ‘완장’ 두른 점령군의 폭력성을 빼닮았다. 위장 교통사고를 내는 것과 뭐가 다른가. 야당의 비난이 아니더라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풍경들이다. 얼마 전까지 친문(친문재인) 패권을 그토록 비난했던 이들 아닌가. 그런데 집권하자 철옹성을 쌓아올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가깝다는 친윤계, 그중 핵심들이 벌이는 배제와 뺄셈의 정치는 진절머리 나는 지난 정권 패권정치의 복사판이다. 이준석 전 대표는 쫓 아내다시피하며 사퇴시켰다. 전당대회 게임의 룰도 바꿔버렸다. 2004년 이후 계속돼온 7대 3 룰(당원 투표 70%+국민 여론조사 30%)을 깨고 별안간 ‘100% 당원 투표’로 바꿨다. 나경원 사태가 촉발된 것도 따지고보면, 갑작스런 룰 개정이 빚은 나비효과다. 룰 변경으로 국민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려온 유승민 전 의원이 자연스레 당선권에서 배제되자 ‘당심’의 지지를 받던 나 전 의원이 선두로 올라서며 사단이 났다. 룰 개정 반대 목소리엔 눈깜짝 않더니 이젠 급조해 넣은 결선투표제 때문에 되레 한숨이다. 의외의 후보가 당선되는 어부지리를 얻을까 전전긍긍한다. 친윤계의 배타적 지배욕이 빚어낸 혼탁한 파열음이다. 친노무현, 친이명박, 친박근혜, 친문재인… 패권정치의 추락과 실패를 목격하고도 똑같은 전철을 밟으려 한다. 어리석은 일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권력의 속성은 지배감이고 기본 성향은 파괴적’이라고 갈파했다. 권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 경구를 무겁게 새겼으면 한다. 분란의 중심에 윤 대통령이 있다. 아니 국민들은 그렇게 의심한다.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 윤 대통령의 문자 메시지는 또렷하게 국민들 뇌리에 남아 있다. 대통령의 신뢰를 흔들고 말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그러니 “대통령으로서 당무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해명이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당 대표를 정하는 일에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대통령이 총재를 겸하던 과거엔 직접 대표를 지명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당내 기류를 파악하고 주류,비주류 할 것 없이 계파 중진들과의 물밑 대화로 잡음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대화가 최고의 정치술이다. 사회도,기업도,나라도 앞길을 열어가는 건 소수 엘리트다. 엘리트의 함량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도전 과제에 얼마나 잘 응전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데, 그 열쇠가 ‘창조적 소수’의 엘리트에 달렸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창조적 소수의 엘리트 리더들이 자기 과시나 오만에 빠질 때, 대중의 자발적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대중을 폭압으로 억누르는 ‘지배적 소수’로 타락하게 된다. 지배적 소수가 되면 도전에 제대로 응전할 능력을 상실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미노스 문명 등 한때 엄청난 수준의 문명을 꽃피웠다가 사라진 지구상의 14개 문명의 소멸 원인을 연구해 이런 결론을 증명했다. 문명이든, 국가든 마찬가지다. ‘지배적 소수’ 가 파멸을 부른다는 토인비의 통찰은 집권여당에 던지는 함의가 적잖다.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창조적 소수가 될 것인가, 대중을 강압적으로 누르는 지배적 소수가 될 것인가. 여당이 그 기로에 서 있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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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팬덤과 헤어질 결심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당 대표는 있지만, 리더십은 실종상태다.” 민주당 원로의 개탄이다. 당 지도부가 박진 외교부 장관(9월 29일)에 이어 이상민 행안부 장관(12월 11일) 해임건의안까지 일사천리로 밀어붙인 데 놀랐다며 한 말이다. 169명 의원 전원이 징발돼 통과시켰지만 무슨 실익이 있냐는 거다. 제헌의회부터 지난해까지 장관해임안이 국회를 통과한 건 모두 여섯번이다. 박근혜 정부 때 김재수 농림부장관을 제외하곤 해당 장관 5명은 모두 사퇴했다.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입법부의 강력한 권한이지만, 야당도 권리 행사에 신중했다는 얘기다. 의석수 확보라는 현실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자칫 칼 쥔 손이 베일 수 있는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김대중(DJ)·노무현 전 대통령은 각각 임동원(통일)·김두관(행자) 전 장관의 해임안을 받아들였지만, 법적으론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만용으로 비칠 땐 야당이 되레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명분과 실리, 변덕스러운 여론까지 세밀하게 살필 줄 아는 공력과 혜안이 필요한 고도의 정치행위다. 그런데 취임 갓 100일을 넘긴 이재명 대표(8월 출범) 들어 두 번이나 그 칼을 휘둘렀다. ■ 「 민주당, 석달새 두 번 장관 해임안 민생법안 처리 막고 입법권 남용 만장일치, 무조건 복종 풍토 심해져 ‘팬덤의 강’ 건너야 영토 확장 돼 」 이 장관에게 책임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태원 참사 책임자 문책과 진상규명을 질질 끌다 사태를 키운 여권의 정국 관리 능력은 정말 한심한 수준이다. 그러나 조자룡 헌칼 쓰듯 입법권을 마구 휘두르는 건 다른 문제다. 결과적으로 실리도 못 얻고 오히려 진상규명 스텝만 꼬이지 않았나. 이재명 대표의 리더십 문제가 입방아에 오르는 이유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대만의 추월을 따돌리기 위해선 한시가 급한 반도체특별법이나 법인세 최고 세율 인하, 전기요금의 급격한 인상을 막기 위한 한전법 개정안 같은 민생 법안은 죄다 막으면서, 지지층이 요구하는 ‘노란봉투법’(불법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제한), 방송법 개정안(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 양곡관리법 개정안(쌀값 하락시 정부 의무 매입 법제화)은 완력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오늘(15일) 본회의에선 ‘역대 최초’ 기록이 또 추가될지 모른다. 정부·여당이 짠 2023년 예산안 대신 자신들의 수정안인 ‘민주당 예산안’을 처리하겠단다. ‘윤석열 정부’가 ‘이재명 예산’을 집행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정부 견제가 야당의 임무인 건 맞지만, 만능키 누르듯 하는 입법권 남용은 대의제 역행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소위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묻지마 지지의 팬덤 그룹 말이다. 지난 정권에서 민주당은 팬덤 정치로 시쳇말로 재미 좀 봤다. 하지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처럼,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혹독한 실패를 맛봤다. 이재명 체제는 이 어두운 유산을 청산하기는커녕 무조건 복종 풍토를 더 확장했다. “만장일치로 대부분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걸 보면서 민주적임을 자부하는 정당이 괴물이 돼가는구나 공포를 느낀다”(김경율 회계사)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재명 대표 개인의 사법 리스크까지 겹쳤다. 이 대표는 “1원의 사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 “탈탈 털어보라”며 결백을 주장하나, 검찰은 대장동 일당에게서 받은 ‘검은돈’이 ‘정치 공동체’ 관계인 최측근(정진상 대표실 정무조정실장과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 구속 수감중)을 통해 선거 자금으로 흘러갔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입증할 증언도 속속 이어지고 있다. 이 대표는 진정어린 해명 없이 ‘야당 탄압’ 프레임으로 맞서고 있다. 성남시장 시절,이 대표는 민원인들이 돈 봉투를 갖고오지 못하도록 시장실에 CCTV를 설치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에선 “감옥 간 수하들이 ‘대통령이 다 시켜서 했다’고 하지 않았나. 범죄를 저질렀는데 대통령이라고 예우를 계속 받아야 하느냐”는 연설로 전국적 스타로 부상했다. 이런 ‘이재명다움’을 기억하는 국민들에게 그의 길어지는 침묵은 납득하기 어렵다. 야당 총재시절, DJ는 측근의 수뢰설이 보도된 조간신문을 보곤 그 자리에서 전화기를 들어 “검찰이 부르기 전에 자진 출두해서 사실대로 밝히라”고 지시했다. 지도자 주변의 작은 잡음이나 도덕성 문제가 불씨가 돼 리더십의 정당성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정권교체에 실패한 건 강성 팬덤에 의존해 작은 일탈에 대한 조기 경보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위선 정당으로 낙인 찍혀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입었다. 그런 면에서 박지현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위원장 시절) 조국 전 장관이 사과하고 이 강을 건너자, 이 강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나는 할 일을 어느 정도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재명의 강’이 생길까 두렵다”고 말했다. 또 “이 강을 건너야 우리의 영토를 더 확장할 수 있다. 내 살을 도려내는 결단이 민주당에 필요하다”고 했다. 팬덤과 ‘헤어질 결심’을 요구한 용기 있는 발언이다. 이 소망이 실현될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민주당을 지켜보는 국민이 적지 않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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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세월호 이은 이태원, 또 희생을 낭비할 텐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부모 주검은 산에 묻고 자식 주검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치유와 망각 없는, 세상사에서 가장 비통한 슬픔이 생때같은 자식들을 앞세우는 일일 테다. 아들 잃은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던 시인 김동리는 ‘진이 한 조각 구름 되어 날아간 날/ 하늘엔 벙어리 같은 해만 걸렸더라…’고 했고, 작가 박완서는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신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한 말씀 해보시라’고 절대자를 향해 절규했다. 대한민국이 그 무게와 깊이를 측량조차 할 수 없는 참혹한 슬픔과 고통의 늪에 빠졌다. 선미 끝자락만 물 위로 삐죽 솟아 있던 세월호의 참담한 기억이 생생한데 이번엔 서울 한복판에서 158명의 곱디고운 젊음이 산화했다. 형언할 수 없는 참척(慘慽)의 굴레가 남은 자들의 가슴을 짓누른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회한으로 돌아온다. 이 어이없는 죽음의 원죄로부터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는 묵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태원 골목길을 지날 때면 그날 밤처럼 숨 막히고, 천막 광장에 놓인 희생자들 넋에 국화 한 송이 헌화조차 가슴 아리다. ■ 「 유족 동의없는 희생자 명단 공개 비극마저 정권 겁박의 수단 삼나 정치, 세월호 참사 낭비한 책임 커 여권, 책임론 차단 급급해 화 키워 」 그런데 위정자들 세상은 딴판으로 굴러간다. 슬픔과 공감하지 못하는 희한한 일들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책임 떠넘기기, 희생양 찾기에서 이젠 비통한 희생조차 제물로 삼으려 한다. 야당 정치인과 친야 성향의 전직 기자가 ‘언론’이랍시며 급조한 인터넷 매체가 유가족 동의 없이 희생자 155명의 명단을 공개하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희생자들을 호명하며 ‘추모 미사’를 열었다. 유가족 2차 가해 논란과 재난의 정치화 공방이 정치권을 달군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어떻게 이름도, 얼굴도 없는 곳에 온 국민이 분향하고 애도하는가”라고 했는데, 문상객이 상주 나무라는 격이다. 어불성설이다. 명단 공개를 원치 않는 상당수의 유가족 가슴에 비수 꽂기다. 희생자 한 사람 알지 못해도 가슴속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납덩이 같은 가위눌림을 경험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니 추모도, 애도도 그들에겐 고작 정치 놀음과 정권 겁박의 수단일 뿐인가 탄식하게 된다. 벌써 광장에선 ‘촛불’ ‘퇴진이 추모’ 구호가 들려온다. “희생자들을 익명의 그늘 속에 묻히게 함으로써 파장을 축소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재난의 정치화이자 정치공학”이란 야당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희생자 실명 공개가 그들의 정치공학적 이해득실에서 나온 것임을 일깨운다. 추모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참사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가 여기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뜻이다. 애도에 몰두하고 증오를 키운다고 저절로 안전한 사회가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태원 참사는 8년 전의 세월호 참사를 낭비한 데도 그 원인이 있다는 걸 정치는 직시해야 한다. 비극을 정치 놀음에 허비한 참혹한 대가에 숙연해져야 한다. 세월호 조사는 아홉 차례, 572억원을 쓰고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과학의 영역이어야 할 침몰 원인에 대해서조차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해 ‘내인설’과 ‘외압설’의 2개 보고서로 마감했다. 조사위 조사관으로 참여했던 박상은씨는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에서 “책임자 처벌에 매달리지 않고 사회구조적 원인 규명을 임무로 생각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누가 잘못했는지가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질문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특조위와 사참위에서 활동한 김민후 변호사 역시 “특정인과 특정 세력을 타기팅해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정치적 이득을 채우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며 “‘박근혜 7시간’을 놓고 싸우는 바람에 정쟁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이태원 참사가 ‘제2의 세월호’가 돼가는 데는 정부 여당의 무능과 책임이 크다. 그들 주장대로 설사 ‘예견하지 못한 사고’였다고 쳐도 사고 발생 3주일이 다 되도록 그들이 보인 실망스러운 모습이 분노를 촉발한다. 정부 컨트롤타워와 위기 대응 매뉴얼의 부재, 경찰 지휘부의 태만과 실무자에게 책임 떠넘기기, 잇따른 설화에도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장관, 그리고 ‘여당이 장관 하나 못 지키나’는 윤핵관의 때아닌 결사옹위…. 내 눈엔 책임론 불 끄기에 급급한 모습이 오히려 집권세력 스스로를 ‘박근혜 7시간’의 프레임에 옭아매는 자충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또 한 번의 희생이 낭비된다면 ‘안전한 사회’는 언감생심일 뿐이다. 그러니 정말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부터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 칸트의 비유를 빌리자면 진상 규명-책임자 처벌 없는 재발 방지는 공허하고, 재발 방지를 견인하지 못하는 진상 규명-책임자 처벌은 맹목적인 것이다. 참사에서 교훈을 얻어 안전사회를 만든 선진 사례가 여럿 보도됐다. 미국 시카고의 초등학교(our lady of the angels) 화재 사건,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 불꽃놀이 관람객 압사 사건 이후 각각 화재 대피 훈련, 다중 밀집 대응 매뉴얼이 정착됐다. 완전하진 않지만 ‘좀 더 안전한 사회’가 된 건 틀림없다. 문명국가는 이렇듯 희생을 낭비하지 않는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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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이기는 민주당, 볼 수 있을까
이정민 논설실장 두 개의 책이 있다. 『이기는 민주당 어떻게 가능한가』와 『좋은 불평등』. 민주당의 실패를 다룬 책이다. 『이기는 민주당』은 ‘우상호 비대위’가 3000명의 유권자를 표본으로 선거 패배 원인의 ‘엑기스’를 추려낸 보고서다. 『좋은 불평등』의 저자는 민주당 싱크탱크 민주연구원의 전직 부원장 최병천이다. ‘한국경제 불평등에 관한 통념 뒤집기’를 목표했다는데,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좋은 의도’를 갖고 출발한 경제 정책이 왜 결과적 재앙으로 귀결됐는지 실증 자료와 통계를 토대로 과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둘 다 ‘내부자’의 저술인데다 미래 비전과 향후 민주당이 취해야 할 노선을 제시하고 있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적지 않다. 민주당이 재집권을 염원한다면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일부를 소개한다. 『이기는 민주당』이 지적한 근본적 패인은 ‘민주당=무능’ 이미지다. 연금개혁, 타다 문제와 같이 가치와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당사자를 설득하는 대신 ‘사회적 합의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여론 뒤로 숨어버렸다. 그러면서 기득권과 이익 챙기기에는 철저했는데, 유권자들은 특히 시대성·도덕성·개방성에서 보수정당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도 민주화를 자신들의 전유물로 내세워 도덕적 집단으로 포장한 위선에 넌덜머리를 냈다. 그러니 불평등 개선, 복지 강화, 검찰개혁을 외쳐대는 ‘묻지마 팬덤’ 지지층에 끌려다닌다. 민주당이 콘크리트 40%의 지지선을 뚫고 나오지 못하는 이유다. ■ 「 민주당 연패 원인은 ‘무능’ 이미지 ‘대기업이 불평등 초래’ 통념 틀려 ‘나쁜 결과’ 유발 ‘좋은 정책’ 그만 결과에 책임지는 책임윤리 갖춰야 」 『좋은 불평등』은 경제 정책의 디테일에 현미경을 들이댄 미시적 분석이다. 저자는 ‘좋은 정책’이 빚은 ‘나쁜 결과’가 진보 진영 내부에 자리잡은 거대한 통념의 오류, 다시 말해 대기업과 신자유주의, 비규정직 양산이 불평등을 초래했다는 통념 자체가 틀렸다고 돌직구를 던졌다. 곳곳에 정신 번쩍들게 하는 구절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이 작동하지 않고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불평등 확대로 귀결된 이유는 ▶임금 불평등과 소득 불평등의 상충 가능성을 알지 못했고 ▶진짜 하층이 누구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저임금 노동자의 실체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층 소득을 끌어올려 불평등을 줄이려는 기획이 작동하지 않은 건 하층이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노인이기 때문이다. 소주성이 실패한 것은 좌파적 정책이어서가 아니라 진짜 하층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짜 하층은 노조 조합원에 있지 않고 대한노인회 회원 중에 압도적으로 많이 몰려있다. 그런데 진보세력은 노동운동 요구엔 관심이 많지만 노인 빈곤문제에 대해선 관심이 적다.” 문재인 정부의 소주성은 ‘이재명 민주당’도 폐기했을 정도로 대실패로 끝났다. 문 정부가 2018년 최저임금을 단번에 16.4%(6470원→7530원) 인상하자 일자리 증가 규모는 예년 평균(40만명)의 4분의 1 수준(9.7만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선한 의도’가 불평등 확대라는 ‘나쁜 결과’로 귀결됐다. 이에 대한 문 전 대통령의 답변이 걸작이다. “최저임금 1만원은 (대선) 후보들의 공통 공약이었고 적극적으로 주장한 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급격한 인상에) 감안됐을 것이다.” ‘행위 결과의 무시, 불공정성에 대한 저항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데만 책임감을 느끼는’ 전형적인 신념윤리가의 변명이다.(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베버는 선한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도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책임윤리의 부재를 경계했다. 정치가(statesman)가 갖춰야 할 자질로 신념윤리와 함께 결과에 책임지려는 자세를 갖는 책임윤리를 강조했다. 베버의 지적은 100년이 흐른 21세기 한국 정치에도 들어맞는다. 민주당의 대선 패배는 책임윤리의 실종에 대한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집 걱정없이 살게 하겠다는 ‘좋은 정책’이 부동산 시장을 이중삼중으로 왜곡해 영끌·빚투족을 양산했고, “민주당 부동산 정책의 최대 피해자인 30대 유권자의 이탈이 대선 승패를 갈랐다”(허진재 한국갤럽 이사)는 분석이다. 문제는 이들의 고통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금리 시대로 전환하며 집값 하락과 깡통전세 대란으로 양상이 바뀌면서 고통이 배가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전 행태 그대로다. 노란봉투법, 기본소득, 기초연금 인상, 양곡관리법, 표준임대료법…시장 왜곡과 부작용이 뻔한 ‘좋은 의도’를 앞세운 신념윤리형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북핵 도발 위협 등에 대비한 한·미·일 연합 훈련을 ‘친일 국방’으로 몰며 친일-반일 프레임을 작동중이다. 결국 팬덤에 기대는 관성의 정치로 되돌아간 것 아닌가. 어려운 때일수록 정도(正道)로 가야 한다. 앞에 언급한 표본조사에 답이 있다. 조사에서 응답자(복수 응답)의 42%는 ‘정치행태에서의 신뢰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이어 미래지향적 정책, 민생정책의 전면화, 팬덤정치와의 결별 등이다. 윤석열 정부 견제(10%)는 뒤에서 두번째였다. 이기는 민주당, 보고싶다. 이정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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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한국의 진짜 문제는 정치 분열”
이정민 논설실장 김훈 소설 『하얼빈』의 ‘후기’엔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안중근의 가족과 문중이 겪은 박해와 굴욕, 이산의 이야기가 별도 기술돼 있다. 일부를 옮긴다. 부인 김아려는 안중근이 처형된 다음 해 장남이 죽자 상해로 갔다.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상해에서 죽었는데 관련 기록은 없다. 북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동생 안정근도 망명지 상해에서 사망했다. 둘째 동생 안공근은 1939년 중경에서 실종됐다. 사촌동생안명근은 무장 독립투쟁을 하다 검거돼 옥고를 치렀고, 1927년 지린성에서 죽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어머니 조마리아는 상해에서 사망했다. 안중근의 차남 준생과 장녀 현생은 일제가 꾸민 ‘박문사화해극’에 동원된다. 총독부 관리들과 박문사(이토를 기리는 사찰)를 참배·분향하고 이토 차남 이토 분키치를 만나 “사죄하러 왔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안중근 가문의 굴욕과 절멸은 대한제국 황족의 불운한 최후와 닿아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황족이 되고 육군 중장 계급장을 단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도, 해방을 맞았으나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숨을 거둔 마지막 황세손 이구도 불운한 시대의 희생양이란 점에선 다를 바 없다. ■ 「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의 성공 세계 부러움 사는 대한민국 만들어 위기 대응과 갈등 조정 상실한 정치 정쟁·분열의 구한말 정치 연상케 」 100여년 전, 한국과 일본은 똑같이 밀려오는 서구 열강의 먹잇감이 될 비슷한 처지였다. 그러나 일본은 발빠르게 근대화에 올라탔고 그렇지 못한 한국은 식민지가 됐다. 운명을 가른 건, 정치의 수준과 질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연구한 재러드 다이아몬드 UCLA교수는 『대변동』에서 하급 사무라이가 주도한 메이지 유신을 ‘외적 위협에 의해 발생한 국가적 위기에서 다른 국가들을 본보기로 활용한 성공사례’로 평가했다. 흔히 메이지 유신을 천황을 정점으로 위로부터 일사불란하게 수직 집행된 관변 개혁쯤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다르다. 쇄국 대 개항, 친 막부 대 반 막부세력간의 내전과 특권을 박탈당한 사무라이들의 폭동, 농민 반란 등 3중, 4중의 갈등과 대결이 얽히고설켜 수년간 아수라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교수의 지적대로 메이지 유신을 이끈 지도자들은 “현재의 반대자만 아니라 잠재적 반대자까지 매수하거나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노련한 솜씨를 발휘”하며 내전을 수습하고 강국을 세웠다. 통합을 이끌어낸 정치력에 열쇠가 있었다. 대의를 위해 작은 차이를 유보할 줄 아는 절제력은 위기를 우회하지 않는 담대함과 강고한 애국심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2022년 대한민국은 세계의 부러움을 사는 나라다. 요즘 일본 언론엔 ‘한국이 일본 추월’ ‘GDP·임금·구매력 모두 한국에 역전’ 같은 기사가 심심찮게 보도된다. 영화 ‘기생충’ ‘미나리’의 아카데미 수상에 이어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에미상 6관왕을 거머쥐었다. 빌보드의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정상에 오르며 한류 바람을 일으킨 방탄소년단(BTS) 신화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은 또 10대 방산수출국이다. K2 전차, K9 자주포, FA-50 전투기 등 한국산 무기는 폴란드·호주·인도네시아·노르웨이·영국 등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가고 있는데, 조만간 중국을 추월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정부 수립이후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의 열정과 헌신이 만들어낸 자랑스런 결실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는 어떤가. 한때 3류, 4류정치 논란이 일었지만, 지금은 아예 구한말 수준으로 퇴행한 것 아닌가 싶다. 집권당이라는 국민의힘은 자기 과시와 기행을 일삼는 30대 젊은 대표 하나를 포용하지 못하고, 비대위를 만들었다 허물고 법원과 신경전을 벌이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 민주당은 국회 169석을 갖고도 뭣이 무서운지 2중, 3중의 철갑과 방탄 치기에 급급하다. 대선 전부터 비리 의혹으로 수사 대상이 된 인사를 당 대표로 뽑아놓고는 ‘정치 보복’ ‘야당 탄압’이라며 툭하면 검찰청·경찰청 찾아다니기 바쁘다. 탐욕과 권력 쟁탈의 촉수는 점점 발달하는데 미래 위기에 맞서는 담대함과 절제력은 잃어가고 있다. 갈등 이슈와 문제가 없는 나라는 없다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꼴찌 출산율과 1위 자살률이란 통계만큼 나라의 생존과 흥망을 암울하게 하는 게 있을까. “지구상 가장 먼저 소멸할 국가 1위”(옥스퍼드대 데이비드 콜먼 교수)라든가 “집단자살사회”(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라는 외부의 경고음이 울린 지도 오래다. 나라 밖으로는 제국주의 망령의 그림자가, 안으로는 저출산·양극화의 부메랑이 몰려오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고 정면으로 맞서는 용기와 애국심 넘치는 정치 리더십을 보기 힘들다. 그러니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도, 정쟁과 집권 욕망에 불타 외국 군대까지 불러들였던 구한말 정치판이 자꾸 연상되는 것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 대런애스모글루 MIT 교수는 며칠 전 “한국의 진짜 문제는 정치 분열”이라고 지적했다. 앗! 한국 정치의 무능과 타락을 세계가 다 간파해버린 것인가.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이정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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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적대적 공생
이정민 논설실장 수도권 택시 대란은 예견됐던 일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라고 하나, 본질은 ‘정치의 실패’에 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두 거대 정치 세력의 무능과 담합이 빚은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1960년대 생긴 택시 면허제를 기반으로 형성된 택시산업은 차량 공유·승차 공유 같은 모빌리티 혁신이 일어나면서 이미 지각변동이 예고된 셈이었다. 인공지능·빅데이터의 진화가 가져온 자동결제 시스템, 목적지 우선 배정 같은 혁신 모빌리티 서비스는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치권은 낡은 울타리 지키기라는 쉬운 길을 택했다. 혁신 대신 빗장 걸어 잠그기다. 선거와 표 때문이었다. ■ 「 택시대란은 빗장 걸기 담합 때문 득표전략과 교환한 국가의 미래 거대 양당의 독과점 체제 바꾸고 정치에도 경쟁 원리 도입해야 」 2년 전 총선을 한 달 앞두고 렌터카 이용 차량 호출 서비스인 ‘타다’를 퇴출시킨 과정을 지금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서로 으르렁대던 양대 세력의 적대적 공생 관계로 볼 수 있어서다. 당시 문재인 정권이 택시업계의 반발과 택시기사들의 표를 의식해 타다 퇴출을 주도하자 야당이던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은 ‘찬성’ 당론을 못 박아 타다 금지법의 본회의 통과를 밀어붙였다. 모빌리티 혁신과 택시산업의 미래가 달린 중대 문제를 두 정당의 손익에 맞춘 득표 전략과 교환한 것이다. 그러니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언젠 터져도 터질 뇌관이었던 거다. 비슷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문재인 정권 출범 한 달 후인 2017년 6월, 여야가 본회의를 통과시킨 첫 번째 안건이 중앙당 후원회를 통한 정치자금 모금을 합법화하는 법안이었다. ‘차떼기’ 등 불법 정치자금이 문제되자 정치개혁 차원에서 중앙당 슬림화와 정치자금 모금을 폐지했던 건데, 두 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11년 만에 부활시켰다. 돈 걷어서 당권 다툼하는 고비용 중앙당 정치가 적대 세력 간의 찰떡 공조로 다시 가능해졌다. 장황한 얘기를 늘어놓은 건 정치의 실패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으며, 더는 정치가 민생과 국가의 발목을 잡게 놔둬선 안 된다는 우려가 최근 높아지고 있어서다. 새삼 거론할 것도 없이 요즘 정치권은 ‘비정상의 상시화’다. 우선 원내 1, 2, 3당 모두 비상대책위 체제라는 희한한 상황이 이를 상징한다. 민주당이 28일 새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를 열지만, 친 이재명계와 친 문재인계는 내전 상태다. 민주당 지지자들조차 등 돌리게 할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다. 지난 주말 있었던 호남 권리당원 투표율(35.49%)은 전국 평균(36.44%)보다 낮았다. 민주당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심각한 경고음은 대표 당선이 유력해보이는 ‘이재명 체제’와 민주당의 앞날에 근원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민주당은 누구를,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민의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준석 전 대표와 윤핵관들의 비열한 권력다툼은 이들에게 나라를 맡겨도 괜찮은가 하는 근본적 회의를 갖게 한다. 선거에 이기고도 집권 석 달 만에 비대위를 꾸리게 된 정치력 부재는 말할 것도 없고 ‘내부총질’ ‘양두구육’ ‘나치 탄생’ ‘신군부’ 같은 막말과 오만불손은 그들을 찍었던 지지자들을 둥지 밖으로 내몰고 있다. 당권 장악과 총선 공천권을 노린 활극과 자신들 이익을 위한 헌신 외에는 존재의 의미를 설명할 길 없는 먹먹함이 국민들을 절망과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진중권 전 동양대교수는 중앙일보 기고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세력은 정당성 위기에 빠져 있다. 집권 여당과 제1야당은 물론이고 대안 정당인 정의당마저도 지지자들에게 자기들을 왜 지지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듯하다”고 지적했다. 날카로운 진단이다. 정당성 위기에 빠진 정당들이 퇴출되지 않는 건, 독과점 체제 때문이다. 이들은 혐오와 증오의 무한 증폭으로 강성 팬덤을 광신도로 유인한다. 군중의 트라우마에 증오와 복수 감정을 윤활유 삼는 흑백 정치다. 노무현의 죽음과 박근혜 탄핵의 상처가 고작 진영 정치의 성을 더 높이 쌓는 소재로 소비되는 현실은 소선거구제에 기반한 양당 체제가 수명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시그널이다.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어온 ‘독과점 정치’를 마감해야 할 필요가 더 커졌다. 그간 몇번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독과점 체제를 지탱하는 선거·정당법과 정치문화가 철옹성처럼 둘러쳐져 있어서다. 이런 가운데 정치에도 경쟁원리를 작동시켜 정치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자는 운동이 일부에서 일고 있다. 주도하는 이는 민주당 5선 이상민 의원(대전 유성을)이다. 그는 “양당의 독과점 구조 때문에 경쟁원리가 작동안 돼 정치 서비스의 품질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며 “정치 소비자인 유권자들이 (정치인을) 부려먹을 수 있다 싶으면 택하고, 아니다 싶으면 교체할 수 있도록 소비자의 선택권을 다양하게 넓혀줘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 정당이 나와 정당끼리 경쟁하는 체제가 목표점이다. 다양한 정당이 출현할 수 있도록 소선거구제→중대선거구제로 바꾸고,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20석→10석으로 낮추고, 군소정당에 대한 자금 지원을 파격적으로 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이 의원의 분투에 지지를 보낸다. 이정민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