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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21세기엔 사과가 리더의 언어…쿨한 사과로 전화위복을

     ━  총선 D-6일, 여당서 쏟아지는 대통령 사과 요구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은 ‘사과를 많이 한 대통령’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변명하지 않겠다” “나한테 책임이 있다” 같은 진솔한 화법으로 야당의 반발을 잠재우고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는 유형의 리더십으로 기억된다.   2013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오바마 케어(건강보험 개혁)가 웹사이트 장애를 일으켜 혼란과 비난이 빗발쳤을 때다. 오바마는 TV로 중계된 백악관 로즈가든 연설을 통해 “내 책임이다. 문제 개선을 위해 24시간 노력하고 있다”며 공식 사과했다. 그의 재빠른 사과로 정치 쟁점화를 노리던 공화당은 그만 공격의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같은 해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참사 때도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바로 사과했다. 장관이나 실무자들을 비난하지도,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았다.     ■  「 윤 대통령, 이태원·엑스포 사과 변화된 행동 이어지지 않아 실망 “성난 국민 감정 다독여줬어야” 사과 요구 높을 때가 사과의 적기 」    굳이 대통령이 나설 일일까 싶은 것까지도 공개 사과의 정공법으로 난관을 돌파하는 모습은 책임 인정에 인색했던 역대 대통령들과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피해 당사자와 직접 소통해 문제를 해결한 사례는 경영학 서적에 등장할 정도다.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공습으로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의 의료진·환자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때 발 빠른 대처로 분쟁이 확산하는 걸 막은 게 대표적이다. 당시 오바마는 직접 의사회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한다”며 투명하고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다.   여기자에 말실수한 뒤 사과 메시지 남겨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 사진)과 김대중 전 대통령(가운데)이 각각 재임중 아들이 구속 기소된 데 대해 “국민에 걱정 끼쳐 죄송하다”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에 대해 사과하며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중앙포토] 김호·정재승 교수의 공저 『쿨하게 사과하라』는 흥미로운 케이스를 다뤘다. 발단은 2008년 대선 후보 시절, 오바마가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 방문을 동행 취재한 여기자에게 “스위티(sweety)”라고 부르는 실수를 하면서 벌어졌다. 연인이나 친한 친구에게 쓰는 ‘스위티’는 부적절한 언어 선택이었고, 자칫 성희롱 논란으로 불거질 수도 있는 중대 사건이었다. 오바마는 곧바로 잘못을 깨닫고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하려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자 이런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스위티라는 표현을 쓴 것에 사과합니다. 비하하거나 상처를 줄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번 실수를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에게 전화 한번 주세요. 다음에 디트로이트에 올 때 제 홍보팀이 당신에게 보답할 기회를 드릴 것입니다.”   어떤가. 이런 메시지를 듣는다면 불쾌한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오르지 않을까. ‘무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인간미 있는 사람’으로 인식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극적 반전을 이끌어내는 데 사과의 힘이 있다.   저자들은 21세기엔 사과가 ‘리더의 언어’가 됐다고 소개했다. 과거 권력자는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하면 권위와 지도력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사과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마지못해 하던 ‘루저의 언어’였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 사과는 리더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됐다. 자신의 잘못이나 책임을 축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믿음이 생기고, 신뢰가 쌓이면서 갈등과 분쟁 조정이 수월해진다. 공감을 이끌어내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정치력이야말로 리더가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일 것이다. 그러니 사과를 하는 게 패자가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사과를 하지 못하는 리더가 21세기엔 패자가 된다.   YS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   사과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선 되지 않는다. 사과의 진정성을 입증할 ‘충분조건’이 필요하다. 충분조건이란 ①잘못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②피해를 준 데 대해 책임을 지며 ③변화된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사과에 대하여』의 저자 아론 라자르는 강조한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임기 말, 차남 김현철씨의 한보 특혜 연루 의혹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그는 1997년 2월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라며 국민 앞에 사과했고, 얼마 후 현철씨는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저서 『김영삼 재평가』에서 “검찰에 진상조사를 주문했지만 이렇다 할 혐의를 밝혀내지 못하자 YS가 불같이 화를 냈다. 현직 대통령 아들을 봐준 수사 결과를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별건 수사를 통해 차명 보관 중인 정치자금을 발견했다. 한보 특혜와는 무관했지만 민심을 돌리기 위해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YS는 아들의 구속을 지시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두 아들이 사법처리되는 비운을 겪은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2002년 기자회견을 열어 “제 자식들 문제로 국민에게 걱정을 끼친 데 대해, 죄송하고 슬픈 심정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제 자식들이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벌받는 데 조금도 이의가 없다”며 고개 숙였다. “친·인척 감시에 소홀했던 점을 반성한다”며 제도 개혁도 지시했다.   YS·DJ의 경우는 성공한 사과라 할 만하다. 사과의 ‘표현’뿐 아니라 재임 중 아들을 구속하는 구체적 ‘행동’이 뒤따르면서 국민이 진정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변화된 행동을 통해 사과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조언한 라자르 교수의 지적대로다. 정치인, 특히 지도자에게 있어 사과는 고도의 정치 행위인 것이다.   “오만과 독선 보인 데 대해 사과해야”   2013년 오바마 케어 가입 웹사이트의 접속 장애로 혼란이 일자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AP=연합뉴스] 22대 총선(4월 10일) D-6일. 각종 악재로 열세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국민의힘 곳곳에서 대통령 사과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조해진(김해을) 후보는 “국민을 실망시키고 분노케 한 것, 당을 분열시킨 것, 오만과 독선으로 불통의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대통령이 무릎 꿇고 사과하고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특히 윤석열 정권 심판을 캐치프레이즈로 걸고 나온 조국혁신당이 기세를 올리면서 수도권 출마 여당 후보들의 위기감이 급상승하고 있다. 관심을 모았던 윤 대통령의 의료 파업 담화(1일)마저 기대치에 못 미치면서 여권 내 갈등이 심화하는 양상이다. “민심의 방향과 동떨어졌다”거나 “국민들의 성난 감정을 좀 다독여줬어야 한다”는 거친 비판이 나온다. 심지어 “거추장스러운 국민의힘 당원직을 이탈해주길 요청한다”(함운경 마포을 후보)며 윤 대통령을 직격하기도 한다.   돌아보면, 윤 대통령이 사과를 안 한 건 아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 집중 호우 등 고비마다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지난해 부산 엑스포 유치에 실패하자 대국민 담화를 내고 “모든 것은 저의 부족 탓”이라고 사과했다. 그런데 왜 국민은 윤 대통령이 사과에 인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윤 대통령으로선 혹평에 서운할 수 있겠으나, 사과의 수용 주체인 국민의 입장에선 변화된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말뿐인 사과’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태원 참사, 엑스포 실패로 사과하긴 했지만 실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책임져야 할 관료들을 되레 영전시키는 일이 벌어지니 납득할 수도, 사과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 아닐까.   아리송한 디올백 논란 사과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논란에 대한 해명과 사과는 여권 내에서도 논란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월 “(백을 선물한 목사가) 자꾸 오겠다고 해서 그거를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책임을 인정한다는 건지 아닌지 아리송한 화법이다. “일관된 원칙과 잣대는 제 가족, 제 주변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던 후보 시절 발언과도 180도 다르다. 설치를 검토한다던 제2부속실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 게다가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던 김 여사의 약속도 식언이 돼버리면서 국민은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여권이 사과에 인색한 데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트라우마 때문이란 얘기도 나온다. 최순실과의 연관 고리를 쉽게 인정하는 바람에 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줘 결국 탄핵에 이르렀다는 후회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비극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과의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공멸을 막을 정치적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채 표류하며 시간을 허비한 정치력 부재 탓이 크다. 엊그제 로이터통신은 김 여사가 지난해 12월 15일 이후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게 “김 여사가 부정적 논평으로부터 여당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란 해설 기사를 게재했다. 뼈아픈 지적이다.   100% 완벽한 정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공(功)과 과(過)가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고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드는 사과의 기술, 즉 정치력에 달렸다. 쇠도 달궜을 때 치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게 타이밍이다. 상대가 들을 자세가 돼 있을 때 진정성 담긴 사과를 해야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사과 요구 높은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4.04 00:54

  • [선데이 칼럼] 보통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했을까

    이정민 칼럼니스트 온갖 해괴한 일이 난무하는 정치판이지만 22대 총선을 앞둔 지금의 여의도만큼 몰상식과 꼼수가 활개 치는 막장극은 여태껏 보지 못했다. 형사사건 범죄 혐의자들이 끼리끼리 모여 신당을 만들고, 멀쩡한 자당 소속 의원들을 무더기로 징계, 출당해 위성정당에 보냈다. 불공정과 반칙·위선의 대명사가 된 자신의 이름을 당명이랍시고 버젓이 내걸기도 한다. 이름하여 조국혁신당이란다. 특정인의 이름을 당명에 사용하면 홍보에 유리하다며 ‘안철수 신당’을 불허했던 선관위는 ‘조국(祖國)’의 동음이의어란 이유로 조국혁신당 사용은 승인했다. 조국(曺國)을 조국(祖國)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기상천외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  「 형사 피의자 대거 공천한 조국당 이재명은 대장동 변호사 방탄공천   법 좀 안다는 법조인들,양심 저버려 정치의 사법화가 부른 불행한 결말 」    선데이 칼럼 전 국민이 목도한 바와 같이, 조국 대표는 자녀 입시 비리, 직권남용 등으로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징역 2년을 선고받아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국회의원에 당선돼도 대법에서 형이 확정되면 그날로 의원직이 박탈된다. 이런 처지라면 달았던 배지도 스스로 내려놓는 게 순리다. 보통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그런데 상식을 뒤집고 자신을 비례 후보 2번에 셀프 공천했다. 이뿐 아니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 등으로 1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불출마를 선언한 황운하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 조국당에 합류해 비례 8번에 낙점됐다. 다큐멘터리 ‘그대가 조국’의 배급에 관여한 정상진 후보는 박스오피스 순위 조작 가담 혐의로 검찰 수사를, 차규근 후보는 김학의 불법 출국 금지 사건으로 2심 재판 중이다.   유권자 중엔 검찰 개혁에 공감하는 이가 적지 않고, 피선거권이 있으면 누구든 신당을 만들 수 있으니 창당을 탓할 순 없다. 하지만 진짜 사법 정의를 위한 것이라면 그 목적과 철학에 부합하는 흠결 없는 인사들을 앞세워야 마땅하다. 사법 리스크 부담이 있는 조 대표 자신은 불출마의 용단을 내리는 게 취지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보통사람들이라면 그리했을 것이다. 범죄 도피의 목적이 아니라면 왜 굳이 실형을 선고받고 재판 중인 형사 피의자를 당선 예상권에 대거 공천했을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가위 꼼수의 끝판왕이라고 할만하다.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당직자에 대한 직무 정지를 규정한 당헌에 예외조항을 급조해 대표 자리를 꿰차더니, 똑같은 금품수수 의혹에 노웅래·기동민 의원은 컷오프, 이 대표는 면죄부다. ‘검찰 정치 탄압의 희생양’이라서란다. 이 괴상한 이중잣대의 정점은 총선 후보 등록마감을 반나절 남겨놓고 빚어진 서울 강북을 후보 교체 소동이다. 민주당은 정봉주(막말)·조수진(성범죄 변호) 후보의 잇따른 낙마로 세 번째로 한민수 후보를 전략 공천했는데, 경선 차점자이자 유력한 당권 경쟁자인 박용진 의원은 이번에도 배제됐다. 반면 이 대표와 부인 김혜경씨, 대장동 사건과 성남FC 불법 후원금 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던 변호사들(양부남·박균택·김기표·이건태·김동아·이영선)은 민주당 우세 지역에 줄줄이 공천됐다. 당내에서도 “개인 리스크 방어에 대한 보상과 부담을 덜기 위한 수단으로 의심되는 대장동 변호사 공천은 희대의 기괴한 사천으로 기록될 것”(전혜숙 의원)이란 반발이 높지만, 그래봤자 마이동풍이다. ‘비명횡사 공천’ ‘대장동 방탄 공천’이란 비아냥은 민주당 역사는 물론 70여 년 한국 정당사에 없던 해괴한 일이다.   고장 난 한국 정치의 살풍경이다. 상식을 가진 보통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전직 법대 교수·변호사·검사·판사등 소위 법 좀 안다는 사람들이 버젓이 하고 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란 말이 있듯이, 형사 피의자를 공천하지 않는 건 법·규범 이전에 양심과 도덕의 문제다. “실정법 위반은 아니다”는 항변은 양심을 부정하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정치가 무너진 자리를 사법이 대신해온 ‘정치의 사법화’의 불행한 결말이다. 정치가 당면한 과제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결정을 사법의 판단에 떠넘기면서 정치가 길을 잃은 지 오래다. 협상과 타협을 요체로 하는 정치는 때로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 4.5 대 5.5의 선택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법은 10대 0, 정글의 세계다. 상대를 타협을 통해 공존하는 대상이 아니라 무너뜨려야 하는 적대자로 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권 탄생, 윤석열 정부로의 정권교체 과정에서 정치 윤리의 실종을 목격했다. 대화는 실종되고 툭하면 사법부 앞으로 달려가는 정치의 사법화가 만연했다. 적폐를 청산한다며 법을 자기 입맛대로 끌어다대고 상대를 악마화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은 사라지고 가치는 전도(顚到)됐다. 흰색을 검정이라고 해도, 진영의 보스를 따른다. 그러니 조국당이 기세를 올리고 민주당이 ‘150석+알파’ 운운하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수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이런 갈등의 확대 재생산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탓이 크다. 정치를 복원하기는커녕 검사 등 법조인을 요직에 두루 포진시키며 법 만능 사고로 국정을 이끌었다. 정치의 사법화가 더 공고화된 것이다. 이런 사고에 갇혀 있으니 디올백 논란과 이종섭 호주대사의 편법 출국 파문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4·10 총선을 향한 선거운동이 오늘(23일) 시작됐다.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이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2024.03.23 00:12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이민정책 장기 플랜 세울 컨트롤타워, 더 늦출 수 없어

     ━  전북도와 제천시의 이민 실험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20일 의림지·청풍호·한방축제로 유명한 충북 제천시를 찾았다. 나타·마리아·홈 베이커리…. 한글과 키릴문자가 병기된 간판을 내건 식당·제과점·식료품점이 눈길을 끈다.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즐기는 소시지·치즈·만두 같은 식재료를 팔거나 양꼬치·보르쉬(러시아 스프)·고기 파이 등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이다.   이국적 풍경이 생겨난 건 지난해 10월. 고려인 동포 이주·정착의 첫 사업으로 24가구 57명이 둥지를 틀며 고려인 커뮤니티가 생겨나면서다. 구한말~일제 강점기 고국을 떠나 옛소련 일대로 이주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     ■  「 고려인 이주 물꼬 튼 제천시 전북지사, 외국인 비자 연장 권한 이민정책 수립 가늠자 될 수도 산업·분야별 정밀 계획 세워야 」    제천에 새 보금자리 튼 고려인 57명   제천시 이주 고려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을 김창규 시장(왼쪽)이 돌아보고 있다. [사진 제천시] 제천의 고려인들은 ▶일시 거주가 아닌 정착을 목적으로 ▶가족 단위로 이주했다는 게 특징이다. 4년 동안 살며 ▶한국어 등 소양 요건과 ▶소득 요건(연봉 2900만원 이상)을 갖추면 영주권(F5)을 취득할 수 있다. 영주권은 선거권을 포함, 내국인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보장한다. 사실상 이민이다. 고려인 이주 사업은 제천시가 지난해 ‘지역특화형 비자 사업자’가 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지역특화형 비자는 일정 요건을 갖춘 외국인에게 취업을 조건으로 특례비자를 발급해 주는 제도다.   제천시는 정부 발표 89곳에 해당하는 인구 감소 지역이다. 청년들은 떠나고 산업단지·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인구 절벽의 위기를 고려인 동포 이주로 극복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건 아제르바이잔·키르기스스탄 대사를 지낸 김창규(국민의힘) 시장이다. 1993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관 근무 경험에 착안했다. 김 시장은 “당시 옛소련 붕괴로 고려인 보호를 위한 당국의 지원이 모두 끊겨 고려인 동포사회가 해체 위기에 놓였다. 문 닫을 위기에 처한 동포 신문·방송 등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 정부의 예산 지원을 끌어내고 민간 기업의 후원금을 모금하는 일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인이 굉장히 우수하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다. 또 “고려인은 같은 언어를 쓰고 동질한 문화를 갖고 있어 이질감이 크지 않기 때문에 유럽 국가와 같은 이민 실패의 부작용을 겪지 않고 이민이 잘 정착될 수 있다”고 했다.   57명의 고려인은 취업(산업단지 근무가 대부분)과 주거지 마련, 자녀 양육, 의료 복지 시스템 구축이 모두 끝난 상태다. 제천시와 시 부설 재외동포지원센터 직원들의 헌신적 노력 때문에 빠른 정착이 가능했다. 임정호 미래전략팀장은 “은행 계좌, 핸드폰 개설부터 주택 임대계약이나 자녀 입학, 장보기까지 직원들이 1대1로 도우미 역할을 했다”며 “현재 임시로 대원대 기숙사에 머무는 9세대 19명도 취업과 자녀 입학 절차가 마무리되면 곧 정착이 완료될 것”이라고 전했다.   “손주 낳으면 4대가 한국에 살게 돼”   고려인들은 이주 생활에 만족하고 있을까. 시내 청전동 주택가에 문을 연 ‘홈 베이커리’를 찾았다. 여주인 김 옥사나(36)는 어머니와 남동생, 두 자녀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그는 “유치원생인 딸이 체조에 소질이 있다”며 “국가대표급의 훌륭한 체조선수로 키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남편과 함께 식료품점 ‘나타’를 운영하는 남 발렌티나(45)는 “딸이 임신 중인데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와 사위, 손주까지 모두 4대가 한국에 살게 된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들은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했는데, 제천살이에 대해 대체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재외동포지원센터에서 통역 주임으로 일하는 김 야나(48)는 “사할린 동포신문에 실린 제천시의 이주 모집 광고를 보고 딸(초등학생)과 함께 오게 됐다”며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너희는 러시아 사람 아니고 한국 사람이다’는 얘기를 듣고 자라서인지 친근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제천시는 올해 추가로 300명, 향후 3년간 1000명까지 고려인 이주를 추진할 계획이다. 사업의 성패 여부가 대한민국의 이민정책 수립에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이 실험이 주목받는 이유다.   “박사 따고도 취업 안 돼 해외로”   전북특별자치도가 운영하는 ‘결혼이민자 365 언니 멘토단’. 한국 정착과 국적 획득 과정을 멘토들이 돕고 있다. [사진 전북특별자치도] 올 1월 특별자치도가 된 전라북도도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작년 10월, 김관영(민주당) 전북지사와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이 외국인 산업인력의 비자 연장 권한을 사실상 도지사가 가질 수 있게 업무 협약을 맺으면서 탄력이 붙었다. 외국인 이주 근로자는 비자 기한(5년)이 지나면 연장이 불가능해 본국으로 돌아간다. 산업현장에서 안정적 노동력 공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구 감소를 부채질하고 있다. 도내에선 고창군·김제시·남원시 등 10개 시·군이 인구 감소지역이다. 김 지사는 “비자 규정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가 일할 만 하면 돌아가니까 기업들 애로가 많다”며 “성실하게 일하는 우수 인력은 비자를 연장해서 일할 수 있게 도지사가 명단을 건의하면 법무부 출입국관리소가 연장을 허가해 주도록 협력을 맺어 전북도의 기업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시적(3년)이지만 도지사에게 비자 연장 권한을 준 건 전북을 미래 인구정책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하려는 심모원려다. 국가적으로 그간 300조원을 쏟아부었지만, 출산율은 2015년 1.24명에서 2022년 0.78명으로 오히려 떨어지는 악순환에 직면해 있다. 인구절벽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그러려면 ▶산업 부문별 과학적인 수요 예측으로 인력 수급 계획을 세우고 ▶내국인이 외국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역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정밀한 시스템 구축이 필수적이다. 김 지사는 “지방대 공대의 경우 석·박사 과정 절반이 외국인 학생들인데, 졸업 후 국내에서 취직이 되지 않거나 취업이 돼도 짧은 기간만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우수 인력이 미국이나 일본 등지로 빠져나간다”며 “IT나 제조업 분야의 고급 인력이 지역에 정착해 자녀 낳고 살면 영주권과 국적 획득까지 가능하도록 돕는 이민 프로세스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후발 이민자 국적 획득 돕는 멘토단   외국인 이민 정착이 가능하려면 자녀 양육과 경제적 자립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부모 양쪽 혹은 한쪽의 한국어 능력이 필수적이다. 전북도는 지난해 결혼 이민의 국적 취득을 위한 조례를 제정한데 이어 국적 취득에 필요한 한국어 교육과 모의 면접, 행정 절차 안내를 1대 1로 돕는 국적취득반을 운영하고 있다. 이미 국적을 취득한 결혼 이민자(선주민)가 멘토가 돼 새로 온 이민자들의 국적 취득을 도와주는 ‘결혼이민자 365 언니 멘토단’도 지난해 발족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대1 만남(1시간30분)을 통해 국적 취득과 정착에 필요한 세부 사항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80명의 멘토단이 240명의 멘티를 돕는 활동을 벌였다. 김문강 가족다문화팀장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핸드폰 앱을 통해 수준별 한국어 음성 교재를 개발했고, 국적 취득 면접시험을 위한 기출문제도 녹음 교재로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저출산 스페인, 이민 받아 인구 늘어   저출생과 가파른 인구 감소는 발등의 불이다. 어린이집부터 대학원까지 각급 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폐교나 축소 운영이 불가피한 형편이다. 기업은 필요한 노동력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생산 차질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제품을 소비할 수요 시장의 축소로 산업 생태계 기반이 위협받고 있다.   미국은 물론 영국·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은 출산율 높이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외국인 이민 유입을 통해 적정 인구 수를 유지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다. 우리와 인구 규모가 비슷한 스페인을 보자. 외신 보도에 따르면, EU 내에서 몰타(1.13) 다음으로 출산율이 낮은 스페인(1.19)은 2023년 출생아 수가 32만2075명을 기록, 10년 만에 25%가 감소했다. 그러나 600만 명가량의 외국 이민자를 받아들여 총인구는 1.26%(4860명) 증가했다.   윤석열 정부와 민주당은 이민청 신설을 한목소리로 주장해 왔다. 다문화 인구는 불어나는데 이를 다루는 부처는 법무부·외교부·행정안전부·여성가족부 등으로 분산돼 있어 컨트롤 타워가 절실하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은 2020년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고, 법무부도 지난해 이민청 설립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21대 국회에선 논의에도 착수하지 못한 채 표류했다.   무책임한 국회와 달리 광역 시·도와 기초단체들은 절실하다. “이민정책에 대한 장기적 계획을 세울 컨트롤타워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김관영 전북지사)는 목소리가 높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일선 담당자들은 “주거와 정착 목적으로 입국하려는 외국인에 대해 외교부와 법무부가 협력해 행정 절차만 간소화해 줘도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2.23 00:32

  • [세컷칼럼] 4·10 총선 이후가 더 걱정이다

     4·10 총선을 앞둔 정치판이 상식을 뒤엎는 꼼수와 탐욕으로 뒤죽박죽 난장판이 돼가고 있다. 무엇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위성정당이 되살아난 게 치명적이다. 오염된 토양에서 자라난 농작물의 독소가 인체에 치명적인 질병을 퍼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형적인 선거제도는 민의를 왜곡시키고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을 막는다. 벌써부터 총선 후가 걱정되는 건 출발선부터 궤도를 이탈한 ‘총선 열차’가 불러올 막장 국회가 연상되어서다.   지난 4년 우리는 위성정당이란 괴물이 낳은 후과로 고초를 겪었다. 거대 양당으로의 표 쏠림으로 군소정당의 존재감이 사라지자 타협점 없는 격렬한 정쟁 속 거대 정당의 ‘적대적 공생’이 정치의 순기능을 마비시켰다. 양곡관리법·간호법 등 민주당의 입법 폭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시계추처럼 반복되면서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무능 국회, 막장 정치가 일상화됐다.     ■  「 ‘위성정당 금지’ 말 바꾼 이재명 조국 신당·송영길 신당 길 터줘 22대도 막장·무능국회 될까 걱정 막지 못한 한동훈, 과오로 남을 것 」  선데이 칼럼   21대 총선(2020년)에서 각각 위성정당 더불어시민당·미래한국당을 만들어 비례대표 의석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민주당(180석)과 미래통합당(103석)은 전체 의석의 94.3%를 독차지하며 양당 독주 체제를 열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건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 뿐이다. 후보들에 대한 자질 검증 없이 급조된 위성정당으로 운좋게 배지를 단 의원들은 위법과 부정행위로 공분을 샀다. 위안부 할머니 후원금을 유용한 윤미향 의원, 거짓으로 드러난 윤석열 대통령의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퍼뜨린 김의겸 의원은 위법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수치심을 느끼기는커녕 사과 한마디 없이 지금껏 의원석을 지키고 있다. 조국 전 법무장관 자녀에게 허위로 인턴증명서를 발급해 유죄 판결을 받은 최강욱 전 의원은 입에 올리기 민망한 막말과 기이한 행동으로 정치를 조롱거리로 만든 장본인이다.   이쯤되면 위성정당은 폐지하는 게 마땅하다. 그게 정치 개혁이고 진보다. 더욱이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2022년 대선 유세때 위성정당 금지를 공약했고, 대표로 나선 전당대회에선 당원 90%이상의 동의를 얻어 결의문까지 채택하지 않았나. 위성정당 출현을 막는 의원 입법도 쏟아졌다. 그러나 이 대표와 민주당은 이번에도 정공법 대신 꼼수를 택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멋지게 이기는 길”을 이끌어 달라며 박수로 이 대표에게 권한을 위임했고, 이 대표는 “멋지게 지면 뭐하냐”며 “통합형 비례정당을 추진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그의 습관성 말바꾸기야 새삼 놀랄 일은 아니지만,  ‘게임의 룰’을 결정하는 것조차 제 입맛대로 손바닥 뒤집듯 하고, 그걸 당 대표 한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있게 일임한 민주당의 정신세계가 놀랍다.   또 민주당이 위성정당 창당을 위해 만든 논의체인 ‘민주개혁진보 선거연합’엔 한미자유무역협정(FTA)반대, 제주 해군기지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시위를 이끌었던 인물이나 한미 연합군사 훈련 중단, 한미 동맹 반대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는 운동권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정체성이 불분명한 극단주의 세력을 무슨 민주진보세력인양 둔갑시켜 우군화하겠다는 것인데, 자질 검증이 안 된 인사들이 국회에 들어온다면 22대 국회에서 무슨 해괴한 일이 벌어질지 아찔하다.   막장 정치의 정점은 ‘조국 신당’ ‘송영길 신당’이 아닐까 싶다. 조국 전 장관은 자녀 입시 비리 혐의 등으로 2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직후 신당 창당을 공식화했고,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으로 구속된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도 최근 옥중 창당(민주혁신당)을 선언했다. 민주당은 이들과의 연대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지만, 두뇌 회전이 빠른 이재명 대표가 과연 이들의 방탄 창당을 예상하지 못하고 위성정당 창당의 빗장을 열어놓았을까. 물론 형(刑)의 최종 확정 전까지는 누구든 창당도, 출마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위선과 거짓으로 나라를 두쪽 내고 사회를 뒤흔들어 국민에게 충격과 좌절을 안겨준 장본인들이다. 법의 심판 이전에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자중하는 게 마땅하다. 부끄러움을 알고 지난 일을 성찰하는 게 한때나마 주권자의 권한을 위임받아 국록을 받았던 공복(公僕)다운 처신이다. 그런데도 위성정당이란 틈새를 이용해 선거에 나오겠다니 위선과 막장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설사 이들이 배지를 달더라도 대법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선거를 다시 치러야 된다. 국민에게 2중, 3중의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의 의도를 간파하는 건 어렵지 않다. “윤석열 정권 창출에 책임있는 인사 공천 배제”와 위성정당이라는 두 축으로 당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범야권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려는 것이다. 국회를 반 윤석열 정부 총공세의 기지로 삼으면 안전판이 마련될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 대가는 무법 천지의 난장판 국회, 막장 정치가 될 공산이 크다. 22대 국회가 ‘역대 최악’ 기록을 갈아치우게 될까 벌써 두렵다.   국민의힘도 책임을 면키 어렵다. 아무리 “우리가 내는 비례정당은 민주당의 꼼수와 협잡에 대응하기 위한 도구”(한동훈 비대위원장)라고 합리화를 해도 위성정당 유혹을 벗어던지지 못한 건 두고두고 국민의힘과 한 위원장의 발목을 잡을 정치적 과오로 남을  것이다.     글=이정민 칼럼니스트 그림=이유정 인턴기자 

    2024.02.20 23:00

  • [선데이 칼럼] 4·10 총선 이후가 더 걱정이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4·10 총선을 앞둔 정치판이 상식을 뒤엎는 꼼수와 탐욕으로 뒤죽박죽 난장판이 돼가고 있다. 무엇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위성정당이 되살아난 게 치명적이다. 오염된 토양에서 자라난 농작물의 독소가 인체에 치명적인 질병을 퍼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형적인 선거제도는 민의를 왜곡시키고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작동을 막는다. 벌써부터 총선 후가 걱정되는 건 출발선부터 궤도를 이탈한 ‘총선 열차’가 불러올 막장 국회가 연상되어서다.   지난 4년 우리는 위성정당이란 괴물이 낳은 후과로 고초를 겪었다. 거대 양당으로의 표 쏠림으로 군소정당의 존재감이 사라지자 타협점 없는 격렬한 정쟁 속 거대 정당의 ‘적대적 공생’이 정치의 순기능을 마비시켰다. 양곡관리법·간호법 등 민주당의 입법 폭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시계추처럼 반복되면서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무능 국회, 막장 정치가 일상화됐다.     ■  「 ‘위성정당 금지’ 말 바꾼 이재명 조국 신당·송영길 신당 길 터줘 22대도 막장·무능국회 될까 걱정 막지 못한 한동훈, 과오로 남을 것 」    선데이 칼럼 21대 총선(2020년)에서 각각 위성정당 더불어시민당·미래한국당을 만들어 비례대표 의석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민주당(180석)과 미래통합당(103석)은 전체 의석의 94.3%를 독차지하며 양당 독주 체제를 열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건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 뿐이다. 후보들에 대한 자질 검증 없이 급조된 위성정당으로 운좋게 배지를 단 의원들은 위법과 부정행위로 공분을 샀다. 위안부 할머니 후원금을 유용한 윤미향 의원, 거짓으로 드러난 윤석열 대통령의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퍼뜨린 김의겸 의원은 위법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수치심을 느끼기는커녕 사과 한마디 없이 지금껏 의원석을 지키고 있다. 조국 전 법무장관 자녀에게 허위로 인턴증명서를 발급해 유죄 판결을 받은 최강욱 전 의원은 입에 올리기 민망한 막말과 기이한 행동으로 정치를 조롱거리로 만든 장본인이다.   이쯤되면 위성정당은 폐지하는 게 마땅하다. 그게 정치 개혁이고 진보다. 더욱이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2022년 대선 유세때 위성정당 금지를 공약했고, 대표로 나선 전당대회에선 당원 90%이상의 동의를 얻어 결의문까지 채택하지 않았나. 위성정당 출현을 막는 의원 입법도 쏟아졌다. 그러나 이 대표와 민주당은 이번에도 정공법 대신 꼼수를 택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멋지게 이기는 길”을 이끌어 달라며 박수로 이 대표에게 권한을 위임했고, 이 대표는 “멋지게 지면 뭐하냐”며 “통합형 비례정당을 추진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그의 습관성 말바꾸기야 새삼 놀랄 일은 아니지만,  ‘게임의 룰’을 결정하는 것조차 제 입맛대로 손바닥 뒤집듯 하고, 그걸 당 대표 한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있게 일임한 민주당의 정신세계가 놀랍다.   또 민주당이 위성정당 창당을 위해 만든 논의체인 ‘민주개혁진보 선거연합’엔 한미자유무역협정(FTA)반대, 제주 해군기지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시위를 이끌었던 인물이나 한미 연합군사 훈련 중단, 한미 동맹 반대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는 운동권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정체성이 불분명한 극단주의 세력을 무슨 민주진보세력인양 둔갑시켜 우군화하겠다는 것인데, 자질 검증이 안 된 인사들이 국회에 들어온다면 22대 국회에서 무슨 해괴한 일이 벌어질지 아찔하다.   막장 정치의 정점은 ‘조국 신당’ ‘송영길 신당’이 아닐까 싶다. 조국 전 장관은 자녀 입시 비리 혐의 등으로 2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직후 신당 창당을 공식화했고,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으로 구속된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도 최근 옥중 창당(민주혁신당)을 선언했다. 민주당은 이들과의 연대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지만, 두뇌 회전이 빠른 이재명 대표가 과연 이들의 방탄 창당을 예상하지 못하고 위성정당 창당의 빗장을 열어놓았을까. 물론 형(刑)의 최종 확정 전까지는 누구든 창당도, 출마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위선과 거짓으로 나라를 두쪽 내고 사회를 뒤흔들어 국민에게 충격과 좌절을 안겨준 장본인들이다. 법의 심판 이전에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자중하는 게 마땅하다. 부끄러움을 알고 지난 일을 성찰하는 게 한때나마 주권자의 권한을 위임받아 국록을 받았던 공복(公僕)다운 처신이다. 그런데도 위성정당이란 틈새를 이용해 선거에 나오겠다니 위선과 막장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설사 이들이 배지를 달더라도 대법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선거를 다시 치러야 된다. 국민에게 2중, 3중의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의 의도를 간파하는 건 어렵지 않다. “윤석열 정권 창출에 책임있는 인사 공천 배제”와 위성정당이라는 두 축으로 당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범야권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려는 것이다. 국회를 반 윤석열 정부 총공세의 기지로 삼으면 안전판이 마련될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 대가는 무법 천지의 난장판 국회, 막장 정치가 될 공산이 크다. 22대 국회가 ‘역대 최악’ 기록을 갈아치우게 될까 벌써 두렵다.   국민의힘도 책임을 면키 어렵다. 아무리 “우리가 내는 비례정당은 민주당의 꼼수와 협잡에 대응하기 위한 도구”(한동훈 비대위원장)라고 합리화를 해도 위성정당 유혹을 벗어던지지 못한 건 두고두고 국민의힘과 한 위원장의 발목을 잡을 정치적 과오로 남을  것이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2024.02.17 00:10

  • [세컷칼럼] 앞으론 ‘제2의 이석기 사건’ 수사 어려워져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안보 문제 없을까 #2018년 4월 28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왓 바텀 공원. 한 남성이 계단에 앉아 생수병 마개를 따 물을 마시고 있다. 7~8m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다른 남성은 선글라스를 벗어 손수건으로 안경 렌즈를 닦는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치더니 북적대는 인파 속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간격을 유지한 채 이동하던 두 사람은 각각 오토바이와 택시를 타고 공원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둘은 어느 한적한 호텔의 객실로 들어섰다.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이 해외 거점으로 쓰던 곳이다. 감시의 눈을 피했다고 판단한 L씨 등 북한 공작원 2명과 한국에서 온 Y씨는 숙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매의 눈’으로 이들을 주시해 온 국가정보원 요원들에 의해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Y씨 등 일당 3명은 이로부터 3년 뒤인 2021년,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전직 국정원 직원 A씨가 전한 간첩단 사건의 전말은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A씨는 “몇 년 전부터 이들 핵심 피의자들을 추적해 왔지만 뚜렷한 증거를 잡지 못하다가 중국·캄보디아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는 현장을 포착했다. 사진·동영상을 촬영하고 접선 경로를 추적하는 등 핵심 증거를 채집, 본격 수사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통상 간첩 사건은 최초의 첩보와 혐의 포착→내사를 통한 증거 수집→본격 수사→검거 및 기소→재판까지 수년에서, 길게는 십수 년이 걸린다.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가 단서가 되지만 압수수색·감청 등 수사를 통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위의 간첩단 사건에서도 이들이 북한으로부터 F-35 스텔스 전투기 도입을 반대하라는 등의 지령문을 받은 사실이나 2만 달러의 공작금을 받은 정황 등은 수사 착수 후 압수수색에서 드러난 것이다.   간첩 확실하지 않으면 정보 수집 못 해 하지만 이런 패턴의 간첩 수사가 이젠 어려워졌다. 국정원법 개정으로 올 1월 1일부터 국정원이 직접 간첩 사건을 수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또 국정원의 직무 범위에서 ▶국내 보안정보 ▶대공 ▶대정부 전복 관련 업무가 삭제되고, ▶국외 및 북한 ▶사이버 안보 ▶위성 자산 정보의 수집·작성·배포만 할 수 있게 했다. 다시 말해 ‘북한과의 연계가 확실하거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수사는 물론 정보 수집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국정원 대공 수사파트에서 근무했던 정구영 한국통합전략연구원 부원장은 “간첩 의심자의 행적을 추적하고도 북한 공작원과 접선 현장을 포착하지 못하거나 증거 인멸로 북한 연계를 입증하지 못하면 그간의 정보 수집 활동은 불법이 된다. 그런데도 이를 각오하면서 간첩을 추적하고 채증 활동을 할 직원이 있겠느냐”며 “국정원(정보 수집)-경찰(수사)-검찰(공소 유지)의 3축 중 한 축이 무너지면서 나머지 두 축도 자동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해외에서 간첩 잡는 활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어느 나라든 정보 요원은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데, 채증 자료를 법정에 제시할 수 없고 되레 불법 활동 혐의로 불이익을 받는다면 정보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영상 촬영이나 사진 증거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수사관’ 신분으로 채증된 것이 아니면 법정에서 유의미한 증거로 채택되지 못하는 것도 장애 요인이다.   친북 세력 해외로 불러 사상교육 국내에 자생적 친북세력, 이른바 주체사상파(주사파)가 생겨나면서 북한은 간첩 직파보다 친북 세력을 해외로 불러내 사상교육을 하고 지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게 당국의 분석이다. 정 부원장은 “경찰이 국정원이 넘겨준 첩보를 받아서 과거 국정원이 하던 방식대로 해외에서 현장 채증을 해야 하는데, 한국 경찰 신분으로 외국에서 수사하는 건 주권 침해에 해당해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해외에서 대공 수사를 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국정원 대공수사단장을 지낸 황윤덕 양지회(전직 국정원 직원들 모임) 부회장은 “버젓이 친북 반국가 활동을 한 게 드러나도 북한과의 연결고리를 밝혀내지 못하면 국정원이 관여할 여지가 없게 됐다”며 “제2의 이석기 RO(Revolutionary Organization) 수사 같은 건 이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은 지하혁명 조직을 결성, KT 혜화지사 등 국가 기간시설 파괴 등을 모의한 혐의로 고발됐으나 대법원은 “RO의 실체는 인정되지 않는다”며 내란음모에 대해 무죄 판결했다(내란선동,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   “국민 설득 없이 안보부서 없애는 나라” 국정원법 개정은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0년 12월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국회 정보위·법사위와 본회의 모두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이 단독으로 처리했다. 국정원 출신의 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개정안을 발의했고, 전해철 정보위원장은 “국정원이 불법 행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개혁 법안이라며 법안 통과를 강행했다. 하지만 공청회 한 번 없이 다급하게 졸속 처리를 밀어붙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당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소속 정보위원이던 조태용 국정원장은 “어떤 나라가 국가안보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를 없애는데 국민 설득 없이 일단 없애자고 하나? 국가 핵심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를 없앤 다음 이게 어떻게 될지는 나중에 보자는 식의 국가안보는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여론조사기관 ‘공정’이 지난해 5월 11~12일 전국의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3%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에 대해 ‘모른다’고 답변했다.   경찰청 정보국장 출신의 이철규(국민의힘) 의원은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관이라는 건 사실을 왜곡하고 국민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레토릭에 불과하다”며 “이관이라면 국정원의 장비와 예산·인력 등 권한과 역량을 넘겨줘야 하는데, 하나도 넘어간 게 없지 않느냐. 국정원이 대공수사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해체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공수사를 전담하게 된 경찰청은 국가수사본부 산하에 안보수사국과 안보수사단을 신설하고 경무관급을 단장에 임명하는 등 조직 정비에 한창이다. 안보수사 인력은 지난해보다 56% 증가한 1127명, 이 중 대공수사 인력은 700명이다. 수사관 역량 강화를 위해 안보수사 경력자를 전임안보수사관(5년 이상)과 책임안보수사관(7년 이상)에 발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일각에선 경찰이 그동안도 유관 수사를 해왔다는 점을 들어 수사 역량에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찰의 안보 수사는 국가보안법상의 찬양 고무, 집시법 위반, 탈북민 관리 등 치안 질서 침해 사범 위주였다. 국정원과 달리 해외 정보망이 없는 데다 다단계 보고 체계의 공개 조직이라 수사기밀 보안유지가 허술해질 수 있다. 입사부터 퇴사 때까지 대공수사만 전담하는 국정원 수사국과 달리 경찰은 순환인사제여서 전문성과 업무 연속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북한이라는 특수 집단을 상대하는 장기적인 간첩 수사를 해 본 적도, 전문성도 없다”(이철규 의원)는 게 결정적 취약점이다. 인력을 늘린다 해도 수사 역량을 하루아침에 끌어올릴 순 없다.   안보범죄 정보 협의체 효율 가동해야 정부와 여당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복원이 필요하다”(조태용 원장)는 입장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협조 없이 법 개정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안보 공백 최소화를 위해 국정원·경찰·군·검찰 등 유관기관이 참여하는 ‘안보범죄 정보 협의체’의 효율적인 운영 모델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황윤덕 부회장은 “수사의 착수와 종결권이 경찰에 있는 만큼 첩보 이첩 후 수사 진척 상황 등을 경찰이 성실히 브리핑해 주는 등 기관 간 신뢰 유지가 관건”이라며 “보안 누설이나 조직 간 갈등이 생겨 정보의 질이 낮아지지 않도록 지휘부가 브레이크와 가속 페달을 조절하는 자제력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올해 들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국가’로 규정,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대남 기구를 폐지하고 서해상 도발에 나서는 등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의 안보 역량이 취약해진 틈을 타 간첩 공작 등을 본격 강화하겠다는 의미”라고 우려했다. 게다가 4월 총선을 앞두고 진영 간 갈등과 대립도 고조되고 있다. 간첩망을 통한 요인 암살이나 폭력적 파괴 행동 같은 후방교란 도발을 벌일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9·11테러 사건에서 보듯 안보의 최전선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국민 희생이 따르는 대형 안보사건으로 비화할 수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글=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윤지수 인턴기자

    2024.01.21 23:00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앞으론 ‘제2의 이석기 사건’ 수사 어려워져

     ━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안보 문제 없을까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18년 4월 28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왓 바텀 공원. 한 남성이 계단에 앉아 생수병 마개를 따 물을 마시고 있다. 7~8m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다른 남성은 선글라스를 벗어 손수건으로 안경 렌즈를 닦는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치더니 북적대는 인파 속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간격을 유지한 채 이동하던 두 사람은 각각 오토바이와 택시를 타고 공원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둘은 어느 한적한 호텔의 객실로 들어섰다.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이 해외 거점으로 쓰던 곳이다. 감시의 눈을 피했다고 판단한 L씨 등 북한 공작원 2명과 한국에서 온 Y씨는 숙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매의 눈’으로 이들을 주시해 온 국가정보원 요원들에 의해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Y씨 등 일당 3명은 이로부터 3년 뒤인 2021년,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  「 ‘보안·대공·대정부 전복’ 직무 삭제 공청회 없이 민주당, 법 단독 처리   경찰, 해외 정보망 없고 수사 한계 국정원-경찰 신뢰 강화해 나가야 」    전직 국정원 직원 A씨가 전한 간첩단 사건의 전말은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A씨는 “몇 년 전부터 이들 핵심 피의자들을 추적해 왔지만 뚜렷한 증거를 잡지 못하다가 중국·캄보디아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는 현장을 포착했다. 사진·동영상을 촬영하고 접선 경로를 추적하는 등 핵심 증거를 채집, 본격 수사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통상 간첩 사건은 최초의 첩보와 혐의 포착→내사를 통한 증거 수집→본격 수사→검거 및 기소→재판까지 수년에서, 길게는 십수 년이 걸린다.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가 단서가 되지만 압수수색·감청 등 수사를 통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위의 간첩단 사건에서도 이들이 북한으로부터 F-35 스텔스 전투기 도입을 반대하라는 등의 지령문을 받은 사실이나 2만 달러의 공작금을 받은 정황 등은 수사 착수 후 압수수색에서 드러난 것이다.   간첩 확실하지 않으면 정보 수집 못 해   퍼스펙티브 하지만 이런 패턴의 간첩 수사가 이젠 어려워졌다. 국정원법 개정으로 올 1월 1일부터 국정원이 직접 간첩 사건을 수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또 국정원의 직무 범위에서 ▶국내 보안정보 ▶대공 ▶대정부 전복 관련 업무가 삭제되고, ▶국외 및 북한 ▶사이버 안보 ▶위성 자산 정보의 수집·작성·배포만 할 수 있게 했다. 다시 말해 ‘북한과의 연계가 확실하거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수사는 물론 정보 수집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국정원 대공 수사파트에서 근무했던 정구영 한국통합전략연구원 부원장은 “간첩 의심자의 행적을 추적하고도 북한 공작원과 접선 현장을 포착하지 못하거나 증거 인멸로 북한 연계를 입증하지 못하면 그간의 정보 수집 활동은 불법이 된다. 그런데도 이를 각오하면서 간첩을 추적하고 채증 활동을 할 직원이 있겠느냐”며 “국정원(정보 수집)-경찰(수사)-검찰(공소 유지)의 3축 중 한 축이 무너지면서 나머지 두 축도 자동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해외에서 간첩 잡는 활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어느 나라든 정보 요원은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데, 채증 자료를 법정에 제시할 수 없고 되레 불법 활동 혐의로 불이익을 받는다면 정보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영상 촬영이나 사진 증거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수사관’ 신분으로 채증된 것이 아니면 법정에서 유의미한 증거로 채택되지 못하는 것도 장애 요인이다.   친북 세력 해외로 불러 사상교육   국내에 자생적 친북세력, 이른바 주체사상파(주사파)가 생겨나면서 북한은 간첩 직파보다 친북 세력을 해외로 불러내 사상교육을 하고 지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게 당국의 분석이다. 정 부원장은 “경찰이 국정원이 넘겨준 첩보를 받아서 과거 국정원이 하던 방식대로 해외에서 현장 채증을 해야 하는데, 한국 경찰 신분으로 외국에서 수사하는 건 주권 침해에 해당해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해외에서 대공 수사를 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국정원 대공수사단장을 지낸 황윤덕 양지회(전직 국정원 직원들 모임) 부회장은 “버젓이 친북 반국가 활동을 한 게 드러나도 북한과의 연결고리를 밝혀내지 못하면 국정원이 관여할 여지가 없게 됐다”며 “제2의 이석기 RO(Revolutionary Organization) 수사 같은 건 이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은 지하혁명 조직을 결성, KT 혜화지사 등 국가 기간시설 파괴 등을 모의한 혐의로 고발됐으나 대법원은 “RO의 실체는 인정되지 않는다”며 내란음모에 대해 무죄 판결했다(내란선동,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   “국민 설득 없이 안보부서 없애는 나라”   신재민 기자 국정원법 개정은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0년 12월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국회 정보위·법사위와 본회의 모두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이 단독으로 처리했다. 국정원 출신의 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개정안을 발의했고, 전해철 정보위원장은 “국정원이 불법 행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개혁 법안이라며 법안 통과를 강행했다. 하지만 공청회 한 번 없이 다급하게 졸속 처리를 밀어붙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당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소속 정보위원이던 조태용 국정원장은 “어떤 나라가 국가안보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를 없애는데 국민 설득 없이 일단 없애자고 하나? 국가 핵심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를 없앤 다음 이게 어떻게 될지는 나중에 보자는 식의 국가안보는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여론조사기관 ‘공정’이 지난해 5월 11~12일 전국의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3%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에 대해 ‘모른다’고 답변했다.   경찰청 정보국장 출신의 이철규(국민의힘) 의원은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관이라는 건 사실을 왜곡하고 국민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레토릭에 불과하다”며 “이관이라면 국정원의 장비와 예산·인력 등 권한과 역량을 넘겨줘야 하는데, 하나도 넘어간 게 없지 않느냐. 국정원이 대공수사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해체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공수사를 전담하게 된 경찰청은 국가수사본부 산하에 안보수사국과 안보수사단을 신설하고 경무관급을 단장에 임명하는 등 조직 정비에 한창이다. 안보수사 인력은 지난해보다 56% 증가한 1127명, 이 중 대공수사 인력은 700명이다. 수사관 역량 강화를 위해 안보수사 경력자를 전임안보수사관(5년 이상)과 책임안보수사관(7년 이상)에 발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일각에선 경찰이 그동안도 유관 수사를 해왔다는 점을 들어 수사 역량에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찰의 안보 수사는 국가보안법상의 찬양 고무, 집시법 위반, 탈북민 관리 등 치안 질서 침해 사범 위주였다. 국정원과 달리 해외 정보망이 없는 데다 다단계 보고 체계의 공개 조직이라 수사기밀 보안유지가 허술해질 수 있다. 입사부터 퇴사 때까지 대공수사만 전담하는 국정원 수사국과 달리 경찰은 순환인사제여서 전문성과 업무 연속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북한이라는 특수 집단을 상대하는 장기적인 간첩 수사를 해 본 적도, 전문성도 없다”(이철규 의원)는 게 결정적 취약점이다. 인력을 늘린다 해도 수사 역량을 하루아침에 끌어올릴 순 없다.   안보범죄 정보 협의체 효율 가동해야   정부와 여당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복원이 필요하다”(조태용 원장)는 입장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협조 없이 법 개정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안보 공백 최소화를 위해 국정원·경찰·군·검찰 등 유관기관이 참여하는 ‘안보범죄 정보 협의체’의 효율적인 운영 모델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황윤덕 부회장은 “수사의 착수와 종결권이 경찰에 있는 만큼 첩보 이첩 후 수사 진척 상황 등을 경찰이 성실히 브리핑해 주는 등 기관 간 신뢰 유지가 관건”이라며 “보안 누설이나 조직 간 갈등이 생겨 정보의 질이 낮아지지 않도록 지휘부가 브레이크와 가속 페달을 조절하는 자제력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올해 들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국가’로 규정,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대남 기구를 폐지하고 서해상 도발에 나서는 등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의 안보 역량이 취약해진 틈을 타 간첩 공작 등을 본격 강화하겠다는 의미”라고 우려했다. 게다가 4월 총선을 앞두고 진영 간 갈등과 대립도 고조되고 있다. 간첩망을 통한 요인 암살이나 폭력적 파괴 행동 같은 후방교란 도발을 벌일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9·11테러 사건에서 보듯 안보의 최전선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국민 희생이 따르는 대형 안보사건으로 비화할 수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1.19 00:25

  • [선데이 칼럼] ‘한동훈 비대위’가 총선 특효약 되려면

    이정민 칼럼니스트 4월 총선의 향배를 가름할 가장 큰 변수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다. 민주당 의원은 “한동훈 비대위가 혁신하면 민심의 흐름이 바뀔 것”이라고 봤다. 여야를 통틀어 한 위원장만큼 존재감을 드러낸 정치인을 찾기 힘들다. 불과 6개월여만에 차기 대선 후보 선호도 여론조사(중앙일보-한국갤럽)에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22%)를 누르고 1위(24%)에 올라설 만큼 상승세가 뚜렷하다. 깔끔한 외모와 패션 감각, 스마트하고 정의로운 검사 이미지, 야당 의원들을 KO패로 몰아붙이는 속사포 설전을 통해 노쇠하고 나약한 보수도, 낡고 부패한 운동권 진보도 모두 밀어내며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눈앞의 총선이 급한 여당이 “아껴 쓸 때가 아니다. 보석이라면 빨리 써야 한다”며 그를 조기 등판시킨 건 이런 스타성 때문일테다.     ■  「 대선 후보 지지 1위 오른 한동훈 “운동권 특권 정치 청산” 앞세워 정부 견제론, 특검 찬성 여론 부담 이준석 “윤석열 키즈 벗어나야” 」  선데이 칼럼 그렇다면 ‘한동훈 비대위’가 총선 특효약이 될수 있을까. 현재로선 의문이다. 뛰어난 개인기에도 불구하고 ‘한동훈=세련된 윤석열’이라는 이미지를 털어내지 못하고 있어서다. 우선 한 위원장이 들고나온 “운동권 특권 정치 청산” 구호는 윤 대통령이 입에 달고 사는 “이권 카르텔과 약탈 정치 청산”과 한 묶음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곳곳에 둥지를 튼 권력의 새로운 적폐, 부패의 카르텔을 혁파하겠다”(2021년 대선 후보 수락 연설)며 야당을 범죄 집단시하고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독불장군식 국정 운영을 해왔다. 비리 수사와 국정 운영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마추어리즘이 초래한 정치의 실패, 국정의 실패는 정부 견제론(53%)이 정부 지원론(39%)을 압도하는 참담한 성적표를 남겼다(중앙일보-한국갤럽 조사).   한 위원장은 윤석열 대 이재명 대결이 아닌, 한동훈 대 이재명 구도를 원할 것이다. 정권심판론을 희석하고 30%대 지지율에 갇혀있는 ‘윤석열 리스크’를 걷어내야 한 위원장에게도, 국민의힘에도 승산이 있다. 그런데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운동권 특권세력과 개딸전체주의와 결탁해 자기가 살기 위해 나라를 망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부각한 게 패착이다. 아젠다 세팅에서 윤 대통령과 차별화하지 못하면서 되레 야당의 ‘아바타’ 공세만 더 부각시켜준 셈이 됐기 때문이다. 586 정치 청산에 대한 시중 여론이 높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특정 세력을 청산하기 위해 정치한다는 발상은, 검사의 직업윤리로썬 훌륭할지 모르나 사회 통합을 통해 국민적 역량과 에너지를 극대화해야 할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아닐 것이다. 야당 비난에 앞서 새정치에 대한 비전과 꿈을 제시하는 게 그토록 혐오해온 ‘여의도 정치’와 차별화되는 ‘X세대 정치’ 아닐까.   한동훈 비대위는 국민에게 실망과 피로감을 끼친 데 대한 반성도, 사과도, 이렇다 할 청사진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다. 2011년의 ‘박근혜 비대위’가 당명과 색깔을 바꾸고, 김종인의 경제 민주화를 수용하고 20대 이준석을 영입하는 등 “뼛속까지 바꾸겠다”는 말을 실천해 총선 승리를 이끌었던 것과 비교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사실 집권 2년도 안된 여당이 비대위 체제로 총선을 치르게 된 것부터 정상은 아니다. 윤핵관의 오만, 이준석-김기현-인요한 지도부의 볼썽사나운 다툼, 최근의 부산 엑스포 사태에 이르기까지 독선과 독주의 리더십과 수직적 당정 관계가 낳은 재앙이다. 그런데도 성찰도 반성도 찾아볼 수 없다. 기껏 “상대가 초현실적인 민주당인데 왜 국민의힘이 압도하지 못하는지 반성하자”거나 “국민들에게 정말 달라지겠다고 약속드리자”는 정도가 반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겠으나 이조차도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쌍특검’(대장동 50억 클럽+김건희 여사 특검) 논란은 총선 판도는 물론 한 위원장의 정치 생명과도 직결되는 뇌관이다. 예상대로 윤 대통령은 어제 거부권을 행사했다. 여야 대치는 더 격렬해질 참이다. 정부 여당이 특검법을 반대하는 건, 논리적으론 맞다. ▶총선을 노린 여론조작 ▶여야 합의 관례를 무시한 야당 단독 처리 ▶관련자들의 인권 유린 소지 등 문제가 수두룩하다. 문제는 거부권 행사 반대 여론이 60~70%에 육박할 만큼 민심이 싸늘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는 그때 그때 국민들 앞에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불거진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만 해도 여태 “답변하지 않겠다”며 뭉개고 있지 않은가.   한 위원장의 책임이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그가 윤 대통령 내외와 친분이 각별한데다 주무부처 장관을 지냈기 때문이다. 특별감찰관이든 뭐든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일을 막을 수도 있었다. 한 위원장은 비대위원장 수락 직후 ‘총선후 특검’을 내비친 적이 있지만 웬일인지 그 후론 말을 아끼고 있다. 그가 내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여당의 선거 총사령탑으로서 60~70%의 반대 여론엔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 위원장의 고심이 깊어지는 이유일 테다. 신당 창당을 선언한 이준석 전 대표의 훈수에 해답이 있을지 모르겠다. “한동훈은 윤석열 키즈고, 나는 박근혜 키즈지만 이를 넘어섰다. 한 장관도 윤석열 키즈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2024.01.06 03:17

  • [세컷칼럼] 집단사고의 오류가 부른 참사, 발상의 전환 필요해

     ━   부산 엑스포 참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는 국민에겐 실망과 충격을, 나라밖엔 국격의 실추라는 망신살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더 참담한 건 투표 당일까지도 판세를 오판하고 역전 드라마를 믿은 ‘정보의 실패’와, 할 수 있다는 희망 고문으로 국민과 여론을 호도하며 국정운영의 미숙과 무능을 드러낸 점이다. “윤석열 정부가 집단 편견과 확증편향에 빠졌고, 이 때문에 국민도 속았다”(The Diplomat)는 외신 보도가 과장이 아니다.    정부는 엑스포 유치를 위해 대통령과 총리·장관·기업 총수 등이 지구를 495바퀴(1989만1579㎞) 돌았고, 182개 국가의 대표급 인사 3472명을 만났다고 밝혔다. 국가 예산만 5744억원이 들었다. 국가적 역량과 에너지를 모두 갈아 넣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받아든 성적표가 29표(총 165개국 투표)다. 열세로 판단, 사실상 중도 포기하다시피 한 이탈리아(로마 17표)보다 12표 더 얻었을 뿐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  「 집념·의욕 앞서 정세 잘못 판단 대통령 사과…물러난 참모 없어 냉철한 판단과 전략적 선택 절실 전시 행사보다 퍼스트 무버 돼야 」     윤 대통령은 “모든 것은 저의 부족 탓”이라고 사과했다. 기업 총수들을 이끌고 “Busan is beginning(부산은 다시 시작한다)”을 외쳤다. 부산시도 2035 엑스포 재도전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자”고 해서 모든 문제가 눈 녹듯 사라지고 뒤죽박죽 난맥상을 보인 국정 시스템이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을까.    ━  “대통령 유엔 방문이 판도 바꿔” 주장     한국이 엑스포 유치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난해 7월, 사우디아라비아는 대세론을 굳힌 상태였다. 사우디 실권자 MBS(무함마드 빈살만)는 한 손엔 두둑한 오일 머니를, 다른 한 손엔 ‘비전 2030’이란 청사진을 들고 유치전을 진두지휘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 이어 중국·이스라엘·튀르키예 등이 줄줄이 공개 지지 선언을 했다. 특히 프랑스가 유럽연합(EU)의 일원인 이탈리아를 외면하고 사우디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세가 기울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후발 주자인 한국 정부는 올해 들어 “엑스포 판도가 바뀌고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지난 9월 윤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이 분수령이었다. 장성민 특사 겸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윤 대통령이 47개국 정상을 만났고 상당수 중립 성향 국가들이 부산 지지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냈다”며 “엑스포 유치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 대통령이 육개장에 밥 한 숟갈 말아먹고 저녁 늦게까지 정상들과 만났다. 부산을 글로벌 자유무역항으로 성장시키려는 대통령의 열망과 신념이 엑스포 유치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낙관론을 폈다. 이후 “사우디와 박빙 승부”(박형준 부산시장)라거나 “어느 정도 따라왔다”(한덕수 총리), “2차에서는 이길 수 있다”(박진 외교부장관) 같은 장밋빛 전망이 이어졌다. 구두 지지나 외교 서한을 보내온 국가가 50개국 이상이라는 분석이 대통령실에 보고됐고, 결선투표에서 로마를 찍었던 표와 리야드 이탈표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사우디가 3분의 2가 넘는 119표를 얻어 1차에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  정보 전달의 왜곡이 판세 오판 불러      “정보를 객관적이고 신중하게 판단했다”(박진 장관)는 설명과 달리 현장 실무자들과 지휘부 사이엔 상당한 온도 차가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유치전에 관여한 정부·기업 실무자들 사이엔 “열세라고 판단한 현장 보고서가 위로 올라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라거나 “제대로 뛰어보지도 않고 비관적 보고를 한다는 질책이 떨어지니, 좀 더 노력하면 상대국이 부산을 지지할 의향이 있는 것처럼 여지를 두고 보고서를 쓰게 된다”는 볼멘 얘기가 나왔다. 정보 전달의 왜곡이 판세 오판을 불렀다는 지적이다.    엑스포 유치위와 산자부·외교부·국정원 등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특히 해외 정보망을 통한 냉철한 정세 분석을 해야 했을 국정원이 유치전이 한창일 때 지휘부 간 알력 다툼으로 분란에 휩싸였다는 건 뼈아픈 대목이다. 일각에선 대통령실에 설치된 부산 엑스포 유치 특임기구의 운영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부산 엑스포 유치를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대통령실에 미래전략기획관실을 신설, 장성민 전 의원을 기획관에 임명했다. (현재는 대기발령 상태다.) 장 전 기획관은 대통령 특사를 겸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남미 카리브 연안국 등 “100개 이상의 국가”를 방문했다. 전략을 짜고 정보를 수집·평가하고 대통령 보고까지 하게 되면서 사실상의 컨트롤타워처럼 인식됐다. 오히려 실질적 컨트롤타워가 돼야 할 유치위 사무총장(윤상직 전 산자부장관)이 로펌 근무를 이유로 비상근으로 일해 온 것과 대비된다.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우디 지지 국가의 지도부를 비밀리에 만나보면 공개 지지한 적 없다고 한다. 한국 지지 국가가 늘고 있다”(장 전 기획관)는 아프리카 출장 보고를 듣고 “엑스포 유치 현황과 전략을 국무위원들에게 설명하는 게 어떠냐”고 했을 만큼 힘을 실어줬다.    국제 행사 유치 실무에 밝은 외교가에선 “대통령실이 직접 실행 업무에 관여하면서 상황 평가와 보고의 균형추가 무너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유치전 사정에 밝은 전직 대사는 “대통령 어젠다의 실행 동력을 만들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며 프로세스를 관리해야 할 수석급 비서실이 직접 교섭·출장·지휘·보고를 떠맡게 되면 정보를 왜곡하거나 잘못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고 동시에 지휘도 하는 통로로 자리 잡으면 전권을 갖고 지휘해야 할 유치위나 다른 조직은 보조적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시스템 문제를 제기했다. 유럽 지역 공관장을 지낸 다른 전직 외교관도 “국제사회는 실리로 움직인다. 이번에 우리를 밀어주면 다음에 도와준다는 약속하에 철저히 기브 앤드 테이크(주고받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냉철한 상황 파악을 못 하면 쉽게 오판할 수 있다”며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과 실제 표가 오가는 건 전혀 다른 얘기”라고 말했다. 엑스포 유치에 대한 집념과 의욕이 앞서 객관적 정세 판단을 흐리게 하는 집단 사고의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  사우디와 빅딜 설로 혼선 빚어      엑스포 유치전 와중에 사우디와의 이면 합의 빅딜 설이 흘러나오면서 혼선을 빚은 것도 미스터리다. 윤 대통령은 투표 한 달을 앞둔 지난 10월 사우디를 국빈 방문, MBS와 정상회담을 갖고 건설·인프라 분야 협력 강화 등을 담은 한·사우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세일즈 외교의 일환이었다고는 하나, 표를 놓고 대결을 벌이다 별안간 국제사회에 잘못된 사인을 줄 수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내 재계에도 이면 합의설이 파다했다. 의도치 않은 오발탄이었다면 외교 전략의 부재이거나 컨트롤타워의 무능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외교적 자산으로 생각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이룰 수 있었다”(한 총리)며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외칠 게 아니라 구멍 난 국정 시스템부터 손봐야 한다.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했는데도 물러나는 참모 하나 없고, 책임 있는 인사들이 오히려 진급하거나 총선에 차출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서울올림픽 유치 당시 국회 문공위원장을 지낸 이영일 전 의원은 “과거엔 장관·수석이 자신이 대통령인 것처럼 뛰었다”며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서 대통령이 제대로 된 보좌를 받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  2035 부산 엑스포는 가능할까      이번 실패의 이면엔 ‘중국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 못 한 측면도 크다. 2035년 엑스포 유치를 노리는 중국은 ‘2025 오사카-2030 부산’ 구도는 부담이다. 그래서 비동북아 국가인 사우디를 지지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슬람 같은 강력한 종교 연대나 지역협력 연대 같은 ‘뒷배’가 없는 한국은 한표 한표 쌓아가는 외교를 해야 하는데, 아프리카·중동·남미에 상당한 교두보를 확보한 중국과의 표 대결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부산의 재도전을 전략적인 틀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근래 외교무대에선 “한국이 출마하지 않는 데가 어딘지 알려달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들 간 국제대회 유치 경쟁, 유엔 등 국제기구의 선출직 출마가 남발되면서 피로감을 주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ILO(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에 출마해 참패했고,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연임에 실패한 것도 이런 정서와 무관치 않다.    높아진 국격만큼 냉철하게 정세를 따져보고 전략적 선택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엑스포 유치전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외국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K팝·K드라마 등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높아졌는데 왜 엑스포 같은 전시성 행사에 집착하느냐”며 “라스베이거스의 CES(소비자가전쇼)나 바르셀로나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같이 한국의 발전한 IT기술과 독창성으로 미래지향적인 퍼스트 무버로 가는 게 낫지 않은가”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면 된다는 정신승리법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글 =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2023.12.16 23:00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집단사고의 오류가 부른 참사, 발상의 전환 필요해

     ━  부산 엑스포 참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는 국민에겐 실망과 충격을, 나라밖엔 국격의 실추라는 망신살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더 참담한 건 투표 당일까지도 판세를 오판하고 역전 드라마를 믿은 ‘정보의 실패’와, 할 수 있다는 희망 고문으로 국민과 여론을 호도하며 국정운영의 미숙과 무능을 드러낸 점이다. “윤석열 정부가 집단 편견과 확증편향에 빠졌고, 이 때문에 국민도 속았다”(The Diplomat)는 외신 보도가 과장이 아니다.   정부는 엑스포 유치를 위해 대통령과 총리·장관·기업 총수 등이 지구를 495바퀴(1989만1579㎞) 돌았고, 182개 국가의 대표급 인사 3472명을 만났다고 밝혔다. 국가 예산만 5744억원이 들었다. 국가적 역량과 에너지를 모두 갈아 넣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받아든 성적표가 29표(총 165개국 투표)다. 열세로 판단, 사실상 중도 포기하다시피 한 이탈리아(로마 17표)보다 12표 더 얻었을 뿐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  「 집념·의욕 앞서 정세 잘못 판단 대통령 사과…물러난 참모 없어 냉철한 판단과 전략적 선택 절실 전시 행사보다 퍼스트 무버 돼야 」    윤 대통령은 “모든 것은 저의 부족 탓”이라고 사과했다. 기업 총수들을 이끌고 “Busan is beginning(부산은 다시 시작한다)”을 외쳤다. 부산시도 2035 엑스포 재도전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자”고 해서 모든 문제가 눈 녹듯 사라지고 뒤죽박죽 난맥상을 보인 국정 시스템이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을까.   “대통령 유엔 방문이 판도 바꿔” 주장   2030년 엑스포 개최를 위해 뛰었던 한국 대표팀이 지난달 28일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 1차 투표에서 부산이 탈락한 것으로 드러나자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사진 국무총리실] 한국이 엑스포 유치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난해 7월, 사우디아라비아는 대세론을 굳힌 상태였다. 사우디 실권자 MBS(무함마드 빈살만)는 한 손엔 두둑한 오일 머니를, 다른 한 손엔 ‘비전 2030’이란 청사진을 들고 유치전을 진두지휘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 이어 중국·이스라엘·튀르키예 등이 줄줄이 공개 지지 선언을 했다. 특히 프랑스가 유럽연합(EU)의 일원인 이탈리아를 외면하고 사우디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세가 기울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후발 주자인 한국 정부는 올해 들어 “엑스포 판도가 바뀌고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지난 9월 윤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이 분수령이었다. 장성민 특사 겸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윤 대통령이 47개국 정상을 만났고 상당수 중립 성향 국가들이 부산 지지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냈다”며 “엑스포 유치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 대통령이 육개장에 밥 한 숟갈 말아먹고 저녁 늦게까지 정상들과 만났다. 부산을 글로벌 자유무역항으로 성장시키려는 대통령의 열망과 신념이 엑스포 유치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낙관론을 폈다. 이후 “사우디와 박빙 승부”(박형준 부산시장)라거나 “어느 정도 따라왔다”(한덕수 총리), “2차에서는 이길 수 있다”(박진 외교부장관) 같은 장밋빛 전망이 이어졌다. 구두 지지나 외교 서한을 보내온 국가가 50개국 이상이라는 분석이 대통령실에 보고됐고, 결선투표에서 로마를 찍었던 표와 리야드 이탈표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사우디가 3분의 2가 넘는 119표를 얻어 1차에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정보 전달의 왜곡이 판세 오판 불러   “정보를 객관적이고 신중하게 판단했다”(박진 장관)는 설명과 달리 현장 실무자들과 지휘부 사이엔 상당한 온도 차가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유치전에 관여한 정부·기업 실무자들 사이엔 “열세라고 판단한 현장 보고서가 위로 올라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라거나 “제대로 뛰어보지도 않고 비관적 보고를 한다는 질책이 떨어지니, 좀 더 노력하면 상대국이 부산을 지지할 의향이 있는 것처럼 여지를 두고 보고서를 쓰게 된다”는 볼멘 얘기가 나왔다. 정보 전달의 왜곡이 판세 오판을 불렀다는 지적이다.   엑스포 유치위와 산자부·외교부·국정원 등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특히 해외 정보망을 통한 냉철한 정세 분석을 해야 했을 국정원이 유치전이 한창일 때 지휘부 간 알력 다툼으로 분란에 휩싸였다는 건 뼈아픈 대목이다. 일각에선 대통령실에 설치된 부산 엑스포 유치 특임기구의 운영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부산 엑스포 유치를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대통령실에 미래전략기획관실을 신설, 장성민 전 의원을 기획관에 임명했다. (현재는 대기발령 상태다.) 장 전 기획관은 대통령 특사를 겸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남미 카리브 연안국 등 “100개 이상의 국가”를 방문했다. 전략을 짜고 정보를 수집·평가하고 대통령 보고까지 하게 되면서 사실상의 컨트롤타워처럼 인식됐다. 오히려 실질적 컨트롤타워가 돼야 할 유치위 사무총장(윤상직 전 산자부장관)이 로펌 근무를 이유로 비상근으로 일해 온 것과 대비된다.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우디 지지 국가의 지도부를 비밀리에 만나보면 공개 지지한 적 없다고 한다. 한국 지지 국가가 늘고 있다”(장 전 기획관)는 아프리카 출장 보고를 듣고 “엑스포 유치 현황과 전략을 국무위원들에게 설명하는 게 어떠냐”고 했을 만큼 힘을 실어줬다.   국제 행사 유치 실무에 밝은 외교가에선 “대통령실이 직접 실행 업무에 관여하면서 상황 평가와 보고의 균형추가 무너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유치전 사정에 밝은 전직 대사는 “대통령 어젠다의 실행 동력을 만들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며 프로세스를 관리해야 할 수석급 비서실이 직접 교섭·출장·지휘·보고를 떠맡게 되면 정보를 왜곡하거나 잘못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고 동시에 지휘도 하는 통로로 자리 잡으면 전권을 갖고 지휘해야 할 유치위나 다른 조직은 보조적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시스템 문제를 제기했다. 유럽 지역 공관장을 지낸 다른 전직 외교관도 “국제사회는 실리로 움직인다. 이번에 우리를 밀어주면 다음에 도와준다는 약속하에 철저히 기브 앤드 테이크(주고받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냉철한 상황 파악을 못 하면 쉽게 오판할 수 있다”며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과 실제 표가 오가는 건 전혀 다른 얘기”라고 말했다. 엑스포 유치에 대한 집념과 의욕이 앞서 객관적 정세 판단을 흐리게 하는 집단 사고의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우디와 빅딜 설로 혼선 빚어   엑스포 유치전 와중에 사우디와의 이면 합의 빅딜 설이 흘러나오면서 혼선을 빚은 것도 미스터리다. 윤 대통령은 투표 한 달을 앞둔 지난 10월 사우디를 국빈 방문, MBS와 정상회담을 갖고 건설·인프라 분야 협력 강화 등을 담은 한·사우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세일즈 외교의 일환이었다고는 하나, 표를 놓고 대결을 벌이다 별안간 국제사회에 잘못된 사인을 줄 수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내 재계에도 이면 합의설이 파다했다. 의도치 않은 오발탄이었다면 외교 전략의 부재이거나 컨트롤타워의 무능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외교적 자산으로 생각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이룰 수 있었다”(한 총리)며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외칠 게 아니라 구멍 난 국정 시스템부터 손봐야 한다.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했는데도 물러나는 참모 하나 없고, 책임 있는 인사들이 오히려 진급하거나 총선에 차출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서울올림픽 유치 당시 국회 문공위원장을 지낸 이영일 전 의원은 “과거엔 장관·수석이 자신이 대통령인 것처럼 뛰었다”며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서 대통령이 제대로 된 보좌를 받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2035 부산 엑스포는 가능할까   이번 실패의 이면엔 ‘중국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 못 한 측면도 크다. 2035년 엑스포 유치를 노리는 중국은 ‘2025 오사카-2030 부산’ 구도는 부담이다. 그래서 비동북아 국가인 사우디를 지지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슬람 같은 강력한 종교 연대나 지역협력 연대 같은 ‘뒷배’가 없는 한국은 한표 한표 쌓아가는 외교를 해야 하는데, 아프리카·중동·남미에 상당한 교두보를 확보한 중국과의 표 대결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부산의 재도전을 전략적인 틀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근래 외교무대에선 “한국이 출마하지 않는 데가 어딘지 알려달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들 간 국제대회 유치 경쟁, 유엔 등 국제기구의 선출직 출마가 남발되면서 피로감을 주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ILO(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에 출마해 참패했고,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연임에 실패한 것도 이런 정서와 무관치 않다.   높아진 국격만큼 냉철하게 정세를 따져보고 전략적 선택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엑스포 유치전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외국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K팝·K드라마 등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높아졌는데 왜 엑스포 같은 전시성 행사에 집착하느냐”며 “라스베이거스의 CES(소비자가전쇼)나 바르셀로나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같이 한국의 발전한 IT기술과 독창성으로 미래지향적인 퍼스트 무버로 가는 게 낫지 않은가”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면 된다는 정신승리법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2.14 00:33

  • [선데이 칼럼] 결국 김기현 체제 유지 위한 시간끌기였나

    이정민 칼럼니스트 “대통령과 하루에 3~4번씩 통화한다”는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 발언에 눈살을 찌푸린 게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윤심(尹心) 팔이’란 공격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긴밀히 소통하는 거야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과의 대화는 비밀에 부치는 게 불문율이다. 국정 최고 책임자와 집권당 수뇌부의 접촉 사실이 드러나면 대화의 내용을 떠나 쓸데없는 억측을 부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선 일을 그르치는 화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대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공식 일정이 아니면, 당사자는 물론 측근이나 실세들조차 ‘모르쇠’로 함구하는 게 오랜 관행이었다.     ■  「 험지 출마 권고에 ‘윤심 팔이’로 대응 ‘관광버스 92대’ 장제원과 도긴개긴 친윤·영남 기득권, 중원 확장 걸림돌 DJ, 일등공신 불출마로 신당 물꼬 터 」    선데이 칼럼 김영삼 정부부터 역대 정권의 집권당 출입기자로 취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대통령이 누굴 만나, 무슨 대화를 했는지 취재하는 거였다. 뻔히 알고 묻는데도 속 시원히 “그렇다”고 확인해 주는 참모나 당직자가 없어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4선의 중진인 김 대표가 이런 이치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밤 9시, 10시에도 만나 이야기 나눈다” “주제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프리토킹한다” “어떤 때는 만나면 3시간씩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것도 기자들과 수백 명의 지역구민 앞에서 말이다. 상식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다.   속이 타들어 가는 그의 심경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자신이 임명한 ‘인요한 혁신위’로부터 느닷없이 ‘험지 출마 권고’의 일격을 당했다. 혁신위가 ‘조기 해산’이란 배수진을 치고 압박해 오는 바람에 운신의 폭도 좁아졌다. 정치 생명을 건 결단을 강요받으며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충격과 당혹감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다급해도 대통령을 방패막이 삼는 모습은 구차하고 좀스럽다. 남에겐 “윤심 팔지 말라”고 경고해 놓고 자신은 대통령 운운하고 있으니 집권당 대표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됐다. 장제원 의원의 ‘관광버스 92대 시위’와 도긴개긴이다. 더 치명적인 건 ‘김장(김기현-장제원) 연대’로 당권을 잡은 ‘김기현 체제’가 결국 영남 기득권의 산물이자 친윤의 아성이라는 이미지만 더 각인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정치 초보인 인 위원장의 성급하고 거친 일방통행식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적지 않은 국민이 혁신위 권고안에 기대를 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혁신위 안이 물거품이 됨으로써 “혁신위는 김기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시간끌기용”(김경진 혁신위원)이었다는 의심만 확인시켜 준 셈이 됐다.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된 혁신위 해프닝은 국민의힘의 내년 총선 가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영남당 이미지를 털어 내고 중원으로 세를 확장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친윤(親尹) 기득권임이 확연해졌다. 진열된 상품은 그대로 둔 채 가게의 외관만 바꾼다고 손님이 들지 않는 것처럼 내적 혁신 없는 외연 확대는 불가능하다.   김기현 체제를 만든 건 윤 대통령 자신이다. 낮은 인지도로 고전하던 김 대표를 ‘원조 윤핵관’ 장제원 의원이 올려세웠고, 윤 대통령도 김 대표와 두 차례나 만찬을 하며 ‘후원자’를 자처했다. 여론조사 없는 당원 100% 투표로 경선 룰을 바꿔 무리수를 뒀고, 유승민· 나경원 전 의원 등 경쟁자들에 대한 조직적 거세 작전을 폈다. 의지할 곳 없이 혈혈단신 정치에 들어온 윤 대통령으로선 자파 세력 구축의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안심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와는 거리가 있다는 게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한국갤럽 조사(11월 21~23일)에 따르면 김기현 대표가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답변은 26%, ‘그렇지 않다’는 부정적 응답은 61%였다.  ‘역대 최약체’란 평을 듣는 김기현 체제를 친윤들이 떠받치며 기득권 유지를 위한 진지전(陣地戰)에 돌입하는 모양새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당 지도부가 혁신위의 요구를 거부하고, 인 위원장의 공천관리위원장 인선 제의마저 거절하면서 ‘인요한 혁신위’는 사실상 도중하차로 막을 내리게 됐다. 지도체제를 둘러싼 분란이 다시 불거질 참이다. 그러나 혁신위든, 비대위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선당후사(先黨後私) 정신 없이는 백약이 무효가 될 터다. 노른자위 알맹이는 자신들이 독차지하고 험지 출마자를 찾는 외연 확장이라면 누가 응하겠는가. 경쟁력 갖춘 신인의 수혈 대신 정치 낭인과 브로커만 설치는 야바위판이 될 게 뻔하다.   김대중(DJ) 대통령의 결단은 현 여권이 되짚어 볼 사례가 될 만하다. 집권 3년 차에 총선(2000년)을 맞은 DJ는 전문가, 청년, 여성 등 정치 신인을 대거 영입하고 신당(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에 앞서 DJ는 먼저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인 동교동계와 호남 의원들의 불출마를 유도하는 것으로 외연확장의 물꼬를 텄다. 동교동계 좌장이자 평생 DJ를 따랐던 권노갑 고문 등 중진과 호남 의원들이 기득권 포기를 선언하고 불출마했다. 호남당 이미지를 벗고 ‘젊은 피’ 수혈을 위한 선당후사 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 결과 제1당은 놓쳤지만 과반 정당 없는 제2당(한나라당 133, 민주당 115, 자민련 17석)으로 정권 말 안정적으로 권력 관리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2023.12.02 00:08

  • [세컷칼럼] 수도권 집중 해소부터 풀어야 메가시티도 성공

    . . .  ━   ‘서울시 김포구’ 편입 논란, 어떻게 볼 것인가     경기도 김포시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겠다는 국민의힘의 구상이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수도권 편중 심화 우려와 지방소멸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며 자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비판과 반대가 잇따르고 있다. ‘서울시 김포구’ 입법을 위한 당 특별위원회는 ‘메가시티 서울’ 간판 대신 ‘뉴시티 프로젝트 특위’란 어정쩡한 이름을 달고 출범했다. “서울·부산·광주 3대 메가시티를 키워 국가 균형 발전을 하자는 것”(조경태 특위 위원장)이라지만, 역풍을 의식한 성격이 짙다.    ‘김포 편입’은 공론화 없이 공약화해 단번에 폭발성 강한 정치 이슈가 돼버렸다. 김포만의 문제가 아닌게 됐다. 판이 커진 것이다. 깊이 있는 논의는 실종됐다. 총선 득실 계산과 찬반 대결만 남았다. 이대로 흘러가게 놔둬선 위험하다. 국가 백년대계를 설계한다는 각오로 전략적 토론을 시작할 때다.   ■  「 “수도권 표심 노린 총선용” 의심 지방소멸, 수도권 편중 부채질   런던광역시 둘러싸고 대혼돈 일본은 전국에 82개 중추도시   지방도시 특성화 전략 만들어 수도권 인구 지방으로 분산을 」     대한민국은 저출산, 고령화, 수도권 집중이라는 트라이앵글의 늪에 빠져 있다. 수렁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생존조차 위협받을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 김포의 서울 편입 여부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미래 전략 수립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메가시티 이슈가 다뤄져야 하는 이유다.    ━  “서울 공화국만 남게 될 것”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메가시티 서울’에 대한 비(非)서울, 비수도권의 반발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울시와 같은 생활권인 (김포) 주민 편의를 위해 당론으로 추진할 것”이란 발언이 여당 대표에 의해, 그것도 전문가 토론이나 공청회 한 번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김기현 대표는 지방(울산) 출신이다. 울산시장을 지냈고 울산에 지역구를 갖고 있는 4선 의원이다. 균형 발전에 대한 현실 인식과 지방소멸에 대한 위기감이나 클 수밖에 없을 텐데 ‘닥치고 메가 서울’을 밀어붙이고 있다. 아이러니다.    당장 같은 당 소속 광역단체장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국민적 공감대도 없는 정치공학적 포퓰리즘이며 실현 가능성 없는 정치 쇼”(유정복 인천시장)라거나 “서울을 더 비대화시키는 시대에 역행하는 정책”(홍준표 대구시장)이란 비판이 나왔다. 김태흠 충남지사도 “지방 분권과 균형 발전의 청사진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수도권 인구는 2605만3000명이다. 서울·인천·경기를 합친 국토 면적은 12%에 불과한데 전체 인구의 절반(50.5%)이 몰려있다. 문제는 전체 인구가 감소세로 전환된 2021년 이후 수도권 집중이 더욱 심화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추세라면 2050년엔 국민의 53%가 수도권에 몰릴 것으로 통계청은 전망했다. 일자리·돈·기회를 빨아들이는 ‘수도권 블랙홀’은 지방소멸을 재촉한다. “결국 서울 공화국만 남게 될 것”(무소속 기초단체장)이란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  “메가시티, 수도권 표심 흔들 수도”      ‘김포 편입’ 불씨는 주변 도시로 퍼지고 있다. “서울과 출퇴근이 공유되는 곳의 서울시 편입”이란 발언이 불을 댕겼다. 광명·과천·부천·고양·구리·하남·성남 등 인근 ‘베드타운’이 들썩이고 있다.  한 중진 정치인은 “최근 몇 년 사이 부동산값 상승 등으로 직장은 서울에 두고 경기도에서 출퇴근하는 인구가 불어났는데, 메가 서울 공약이 수도권 표심을 흔들 매력적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해당 지역의 야당 의원들이 침묵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총선을 앞둔 여당이 경제 문제 같은 불리한 이슈를 덮고 정치적으로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셈이다. 10년 넘게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의 정치 지형은 ‘기울어진 운동장’ 상태다. 현재도 국회의원 의석의 85%(121석 중 103석)를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다. “수도권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여당 당세를 반전시키려는 노림수”라거나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 이후 불안정해진 김 대표가 당내 입지를 의식한 것”이라고 비난이 야당에서 나오는 건 이런 민감한 표심을 의식한 것이다.    향후 전망을 장밋빛 일색으로 보긴 어렵다. 여당은 ‘메가시티 구상’이라고 둘러대지만 주변 도시를 흡수해 몸집과 크기를 불리는 것과 인근 도시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핵심도시의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 개념인 메가시티는 180도 다른 얘기다. 한 자치단체장은 “메가시티란 말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부동산 개발업자들”이라며 “서울 주변 도시들의 부동산 가격만 올려놓을 공산이 크다”고 부작용을 우려했다.    국가적 존망이 걸린 문제를 심모원려(深謀遠慮) 없이 밀어붙이는 아마추어리즘과 무책임이 자칫 더 큰 재앙의 불씨를 잉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난 정권의 국민 갈라치기와 포퓰리즘을 앞장서 비판했던 이들이 선거를 앞두고 포퓰리즘 공약을 남발하는 데 대한 비난 여론도 거세다.    ━  통합→해체→부활, 런던광역시      행정구역이나 국토 개편은 사실 그 자체가 정치적 행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한 사례가 있다.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의 민주정을 연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치개혁은 행정개혁으로 시작됐다. 아테네 전역을 행정구로 분할한 행정개혁으로 귀족들의 소유지가 쪼개져 결과적으로 귀족계급의 권력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영국 런던광역시(Great London Council, GLC)의 사례도 시사하는 바 크다. 지방자치 권위자인 김병준 전 국민대 교수의 저서 『지방자치론』엔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겼다 없어졌다 한 런던광역시의 사례가 자세히 나와 있다. 내용을 소개한다.    런던광역시는 1963년 구(舊) 런던 지역에 있는 12개 자치구와 외곽의 20개 버러(borough), 특별자치체 성격을 지닌 런던시(City of London)를 합쳐서 발족됐다.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한 구 런던 지역을 보수 중산층이 많은 외곽 지역과 통합해 사회주의자들의 도시 정부 장악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통합 런던광역시 내에 점차 사회주의 세력이 늘어나더니 1981년 선거에선 노동당이 92개 의석 중 48석을 차지하며 의회를 장악했다. 신좌파 리빙스턴의 지도 아래 지하철·버스 운임 인하, 부유세 징수 등 사회주의 정책을 강행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대처 총리는 행정의 효율화란 이름 아래 1986년 런던광역시를 해체한다. 엄청난 정치적 소요와 갈등이 일어났으나 1986년 런던광역시는 폐지되고, 런던은 중앙 정부와 기초지방정부(City of London)가 바로 연결되는 단층제가 됐다. 하지만 1997년 집권한 노동당은 다시 런던광역시 부활을 추진, 2000년 5월 런던광역정부(Greater London Authority, GLA)를 재출범시켰다. 행정구역 개편이 원하는 정치 지형의 변화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실증적 사례다.    ━  지방소멸 간과하면 나라 패망      수도권 집중은 청년의 이동이 견인한다. 지방의 질 낮은 일자리, 저임금, 문화 소외, 기회 박탈 때문이다. 수도권 편중이 OECD 26개국 중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심각한 수준이란 건 그만큼 지방의 생존기반이 취약하다는 걸 입증한다. 청년의 수도권 이동은 출생률 저하와 인구 감소를 가속하고, 이는 다시 지역 경제의 축소로 이어져 지방소멸에 이르게 한다.    일본 정부의 지방창생(地方創生), 즉 지역균형 발전 정책의 모체가 된 마쓰다 히로야(増田寛也) 일본 우정 홀딩스 사장의 저서 『지방소멸』은 정독해야 할 ‘교과서’다. 이와테 현 지사와 총무 대신을 지낸 마쓰다 사장은 일본 청년들의 도쿄권(도쿄도,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현)으로의 과도한 집중으로 지방 도시들이 사라져가고 있으며, 이로 인한 출산율 감소가 나라의 패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방의 인구 감소가 지속할 경우 2040년엔 90개 지역이 소멸할 것이란 주장이 경종을 울리면서 일본 정부는 저출산·고령화 대책 마련에 본격 착수했다. 도쿄권을 제외한 전국 82개 도시를 중추 중핵 도시로 지정하고, 도쿄에서 지방으로 이주하는 가구에 지원금을 줬다. 도쿄도나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현에 살면서 도쿄로 출퇴근하는 경우도 지원금 혜택을 받게 했다.    김포식 ‘당근’ 정책과는 정반대다. 손쉬운 서울 편입 방식이 아니라, 각 지방을 특성화 생활권 거점 도시로 재편하고 김포에서 각 지방으로의 이전을 유인하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 수도권 집중을 막고 국토 균형발전과 지방시대를 여는 데 부합하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글 =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 임근홍 인턴기자

    2023.11.11 23:00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수도권 집중 해소부터 풀어야 메가시티도 성공

     ━  ‘서울시 김포구’ 편입 논란, 어떻게 볼 것인가   이정민 칼럼니스트 경기도 김포시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겠다는 국민의힘의 구상이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수도권 편중 심화 우려와 지방소멸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며 자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비판과 반대가 잇따르고 있다. ‘서울시 김포구’ 입법을 위한 당 특별위원회는 ‘메가시티 서울’ 간판 대신 ‘뉴시티 프로젝트 특위’란 어정쩡한 이름을 달고 출범했다. “서울·부산·광주 3대 메가시티를 키워 국가 균형 발전을 하자는 것”(조경태 특위 위원장)이라지만, 역풍을 의식한 성격이 짙다.   ‘김포 편입’은 공론화 없이 공약화해 단번에 폭발성 강한 정치 이슈가 돼버렸다. 김포만의 문제가 아닌게 됐다. 판이 커진 것이다. 깊이 있는 논의는 실종됐다. 총선 득실 계산과 찬반 대결만 남았다. 이대로 흘러가게 놔둬선 위험하다. 국가 백년대계를 설계한다는 각오로 전략적 토론을 시작할 때다.     ■  「 “수도권 표심 노린 총선용” 의심 지방소멸, 수도권 편중 부채질   런던광역시 둘러싸고 대혼돈 일본은 전국에 82개 중추도시   지방도시 특성화 전략 만들어 수도권 인구 지방으로 분산을 」    대한민국은 저출산, 고령화, 수도권 집중이라는 트라이앵글의 늪에 빠져 있다. 수렁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생존조차 위협받을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 김포의 서울 편입 여부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미래 전략 수립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메가시티 이슈가 다뤄져야 하는 이유다.   “서울 공화국만 남게 될 것”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오른쪽 셋째)가 지난달 30일 수도권 신도시 교통대책 마련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시와 같은 생활권인 주민 편의를 위해 김포시의 서울시 편입을 당론으로 추진할 것”이란 발언이 나왔다. [연합뉴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메가시티 서울’에 대한 비(非)서울, 비수도권의 반발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울시와 같은 생활권인 (김포) 주민 편의를 위해 당론으로 추진할 것”이란 발언이 여당 대표에 의해, 그것도 전문가 토론이나 공청회 한 번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김기현 대표는 지방(울산) 출신이다. 울산시장을 지냈고 울산에 지역구를 갖고 있는 4선 의원이다. 균형 발전에 대한 현실 인식과 지방소멸에 대한 위기감이나 클 수밖에 없을 텐데 ‘닥치고 메가 서울’을 밀어붙이고 있다. 아이러니다.   당장 같은 당 소속 광역단체장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국민적 공감대도 없는 정치공학적 포퓰리즘이며 실현 가능성 없는 정치 쇼”(유정복 인천시장)라거나 “서울을 더 비대화시키는 시대에 역행하는 정책”(홍준표 대구시장)이란 비판이 나왔다. 김태흠 충남지사도 “지방 분권과 균형 발전의 청사진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수도권 인구는 2605만3000명이다. 서울·인천·경기를 합친 국토 면적은 12%에 불과한데 전체 인구의 절반(50.5%)이 몰려있다. 문제는 전체 인구가 감소세로 전환된 2021년 이후 수도권 집중이 더욱 심화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추세라면 2050년엔 국민의 53%가 수도권에 몰릴 것으로 통계청은 전망했다. 일자리·돈·기회를 빨아들이는 ‘수도권 블랙홀’은 지방소멸을 재촉한다. “결국 서울 공화국만 남게 될 것”(무소속 기초단체장)이란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메가시티, 수도권 표심 흔들 수도”   ‘김포 편입’ 불씨는 주변 도시로 퍼지고 있다. “서울과 출퇴근이 공유되는 곳의 서울시 편입”이란 발언이 불을 댕겼다. 광명·과천·부천·고양·구리·하남·성남 등 인근 ‘베드타운’이 들썩이고 있다.  한 중진 정치인은 “최근 몇 년 사이 부동산값 상승 등으로 직장은 서울에 두고 경기도에서 출퇴근하는 인구가 불어났는데, 메가 서울 공약이 수도권 표심을 흔들 매력적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해당 지역의 야당 의원들이 침묵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신재민 기자 총선을 앞둔 여당이 경제 문제 같은 불리한 이슈를 덮고 정치적으로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셈이다. 10년 넘게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의 정치 지형은 ‘기울어진 운동장’ 상태다. 현재도 국회의원 의석의 85%(121석 중 103석)를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다. “수도권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여당 당세를 반전시키려는 노림수”라거나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 이후 불안정해진 김 대표가 당내 입지를 의식한 것”이라고 비난이 야당에서 나오는 건 이런 민감한 표심을 의식한 것이다.   향후 전망을 장밋빛 일색으로 보긴 어렵다. 여당은 ‘메가시티 구상’이라고 둘러대지만 주변 도시를 흡수해 몸집과 크기를 불리는 것과 인근 도시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핵심도시의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 개념인 메가시티는 180도 다른 얘기다. 한 자치단체장은 “메가시티란 말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부동산 개발업자들”이라며 “서울 주변 도시들의 부동산 가격만 올려놓을 공산이 크다”고 부작용을 우려했다.   국가적 존망이 걸린 문제를 심모원려(深謀遠慮) 없이 밀어붙이는 아마추어리즘과 무책임이 자칫 더 큰 재앙의 불씨를 잉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난 정권의 국민 갈라치기와 포퓰리즘을 앞장서 비판했던 이들이 선거를 앞두고 포퓰리즘 공약을 남발하는 데 대한 비난 여론도 거세다.   통합→해체→부활, 런던광역시   행정구역이나 국토 개편은 사실 그 자체가 정치적 행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한 사례가 있다.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의 민주정을 연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치개혁은 행정개혁으로 시작됐다. 아테네 전역을 행정구로 분할한 행정개혁으로 귀족들의 소유지가 쪼개져 결과적으로 귀족계급의 권력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영국 런던광역시(Great London Council, GLC)의 사례도 시사하는 바 크다. 지방자치 권위자인 김병준 전 국민대 교수의 저서 『지방자치론』엔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겼다 없어졌다 한 런던광역시의 사례가 자세히 나와 있다. 내용을 소개한다.   런던광역시는 1963년 구(舊) 런던 지역에 있는 12개 자치구와 외곽의 20개 버러(borough), 특별자치체 성격을 지닌 런던시(City of London)를 합쳐서 발족됐다.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한 구 런던 지역을 보수 중산층이 많은 외곽 지역과 통합해 사회주의자들의 도시 정부 장악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통합 런던광역시 내에 점차 사회주의 세력이 늘어나더니 1981년 선거에선 노동당이 92개 의석 중 48석을 차지하며 의회를 장악했다. 신좌파 리빙스턴의 지도 아래 지하철·버스 운임 인하, 부유세 징수 등 사회주의 정책을 강행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대처 총리는 행정의 효율화란 이름 아래 1986년 런던광역시를 해체한다. 엄청난 정치적 소요와 갈등이 일어났으나 1986년 런던광역시는 폐지되고, 런던은 중앙 정부와 기초지방정부(City of London)가 바로 연결되는 단층제가 됐다. 하지만 1997년 집권한 노동당은 다시 런던광역시 부활을 추진, 2000년 5월 런던광역정부(Greater London Authority, GLA)를 재출범시켰다. 행정구역 개편이 원하는 정치 지형의 변화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실증적 사례다.   지방소멸 간과하면 나라 패망   수도권 집중은 청년의 이동이 견인한다. 지방의 질 낮은 일자리, 저임금, 문화 소외, 기회 박탈 때문이다. 수도권 편중이 OECD 26개국 중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심각한 수준이란 건 그만큼 지방의 생존기반이 취약하다는 걸 입증한다. 청년의 수도권 이동은 출생률 저하와 인구 감소를 가속하고, 이는 다시 지역 경제의 축소로 이어져 지방소멸에 이르게 한다.   일본 정부의 지방창생(地方創生), 즉 지역균형 발전 정책의 모체가 된 마쓰다 히로야(増田寛也) 일본 우정 홀딩스 사장의 저서 『지방소멸』은 정독해야 할 ‘교과서’다. 이와테 현 지사와 총무 대신을 지낸 마쓰다 사장은 일본 청년들의 도쿄권(도쿄도,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현)으로의 과도한 집중으로 지방 도시들이 사라져가고 있으며, 이로 인한 출산율 감소가 나라의 패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방의 인구 감소가 지속할 경우 2040년엔 90개 지역이 소멸할 것이란 주장이 경종을 울리면서 일본 정부는 저출산·고령화 대책 마련에 본격 착수했다. 도쿄권을 제외한 전국 82개 도시를 중추 중핵 도시로 지정하고, 도쿄에서 지방으로 이주하는 가구에 지원금을 줬다. 도쿄도나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현에 살면서 도쿄로 출퇴근하는 경우도 지원금 혜택을 받게 했다.   김포식 ‘당근’ 정책과는 정반대다. 손쉬운 서울 편입 방식이 아니라, 각 지방을 특성화 생활권 거점 도시로 재편하고 김포에서 각 지방으로의 이전을 유인하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 수도권 집중을 막고 국토 균형발전과 지방시대를 여는 데 부합하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1.09 00:40

  • [선데이 칼럼] 보선 참패가 국민의힘 총선 승리 ‘백신’ 될까

    이정민 칼럼니스트 강서구청장 보궐 선거 참패로 시끌시끌하던 국민의힘이 ‘빠르게’ 안정세를 찾아가는 모양새다. 권력 순응적인 여당 체질 때문인지 겉보기엔 큰 동요가 없어 보인다. 패배 사흘 만에 윤석열 대통령의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 추진” 발언이 나오면서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긴 하다. 하지만 총선을 불과 6개월 남겨놓고 17%p라는 큰 격차로 패배한 뒤끝이라 당 안팎에선 “이번엔 다를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여의도(국힘)와 용산(대통령실)의 관계 설정, 총선 전략 등을 둘러싼 치열한 갑론을박이 일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높았다. 강서 패배는 여당이 민심 전달과 대통령실 독주를 견제하지 못한 데 대한 민심의 심판이란 게 대체적 분석이다. 과거 16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집권당이 대통령실만 추종하고 하부조직처럼 기능하니 국민이 분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  「 ‘2기 김기현 체제’로 결론 난 여당 백신효과 보려면 치열한 혁신 노력 독선·오만 견제,책임있는 여당 돼야 중도층 경시한 문 정권이 반면교사 」    선데이 칼럼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김기현 체제론 총선 못 치른다”는 아우성이 쏙 들어갔고, “총선 지면 은퇴”로 배수진을 친 김 대표는 사무총장 등 임명직 당직자 8명의 사표를 받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능란한’ 솜씨를 발휘했다. 당의 최고 지도부인 대표와 최고위원들은 남고, 실무 당직자들이 보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떠나는 어정쩡한 봉합이 됐다. “정치는 신념을 실천하고 결과를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 막스 베버의 ‘책임 윤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결말이다. 또 ‘영남당’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라며 친윤 핵심 이철규 사무총장(강원 동해-태백-삼척-정선) 자리에 TK 출신 이만희 의원을 앉혔다. 윤 대통령 후보 시절 수행단장을 지낸 인사다. 이로써 총선을 이끌 대표(울산)-원내대표(대구 달서을)-사무총장(경북 영천시·청도군) 등 핵심 간판이 영남 일색이 됐다. 수도권 의석이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걸 감안하면, 아리송한 인선이다.   김기현 대표가 물러나야 한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2기 김기현 체제’가 대안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과정이 혁신의 에너지와 역량을 모으는 반전의 계기로 작용했는지가 중요하다. 이번 참패를 혁신의 계기로 삼아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면 된다는 ‘예방주사론’이 먹혀들려면 보선 패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에 대한 불꽃 튀는 토론과 처절한 고민이 선행돼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강서 패배는 정치 지형의 변화를 시사한다. 지난 대선의 승패를 갈랐던 중산층·중도·청년층이 모두 이탈해 대선 이전의 지형으로 회귀해버렸다. 보수당이 참패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김기현 대표는 “민심과 괴리되지 않도록 당이 민심 전달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했는데, 레토릭만으로 등 돌린 중도층의 환심을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불과 1년 5개월 전 문재인 정권의 몰락이 반면교사다.   문 전 대통령은 40%의 콘크리트 지지와 180석에 육박하는 압도적 국회 의석을 갖고도 정권 연장에 실패했다. 강성 팬덤에 편승한 편 가르기 정치에 대한 중도층의 혐오와 경고를 외면한 결과다. 내로남불, 편 가르기, 진영·이념전쟁에 신물 난 국민은 공정과 정의, 상식과 합리, 통합과 민생 정치로의 변화와 혁신을 기대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통합과는 거리가 먼, 엘리트 일색의 측근 인사와 부적격 인사를 강행하는 독선을 보였다. 편중 인사, 부실 검증이란 지적에 “과거엔 민변 출신이 도배를 하지 않았나”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항변, 불통 이미지를 더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34명의 장관급 인사가 야당 동의 없이 임명됐는데 윤석열 정부 1년 5개월 만에 18명이 여야 합의없이 임명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토록 비난했던 청문회 패싱,국회 경시가 문 정부와 닮은꼴이다. 이러니 내로남불이란 비판을 받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죽창가, 토착 왜구 같은 선동적 구호로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빈자와 부자, 노동자와 기업주, 의사와 간호사의 틈새를 벌려 정권 유지의 불쏘시개로 썼다. 적폐청산이란 모호한 구호를 내걸고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만들어 나라를 두 동강 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윤 정부 들어 이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제일 중요한 게 이념” “좌파 이념에 찌든 운동권 패거리 집단” 운운하며 자유민주주의 세력 대 공산 전체주의 세력의 대립 구도로 이념전쟁에 불을 붙이더니 느닷없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놓고는 내전이라도 불사할 기세다. 이준석 전 대표 등 윤심을 거스르는 인사들은 가차없이 쳐냈다. 유승민 전 의원의 대표 출마를 막으려 하루아침에 ‘게임의 룰’도 바꿨다. 완장 찬 친윤 실세들의 목소리만 요란할 뿐 여당은 무기력하고 무능했다. 강서 패배는 독선과 오만을 견제하지 못하고 민생·국민통합과 거꾸로 간 권력 운영에 대한 경고다. ‘낙타의 등골을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the last straw)’인 셈이다.   국힘 국회의원은 111명이나 된다. 민주당의 거대 의석 때문에 초라해 보일 뿐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과 성찰, 진정성과 용기없이 공천과 배지에만 연연한다면 백신을 수십번 맞아도 물백신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2023.10.21 00:08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당내 통합과 사법 리스크 방어…두 마리 토끼 잡아야

     ━  기사회생한 이재명 체제와 4·10 총선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으로 이재명 체제는 내년 4·10 총선의 상수가 됐다. 이 대표의 리더십과 명예에 큰 상처를 입긴 했지만, 이변이 없는 한 친명계 주도로 총선을 치르게 됐다.   추석 연휴를 전후해 쏟아지고 있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대혼전 양상이다. 0.73%의 초박빙 승부를 벌였던 대선 연장전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  「 이 대표, 난제 넘어야 총선 승리 반대파 숙청 강행땐 분당 가능성 여당, 이념전쟁·야당심판 탈피 민생과 정책, 비전으로 승부를 」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따른 반사이익에 의존하는 여권의 권력 운영으로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다. 2년 넘게 계속되는 강대강의 극한 대결과 양극단 정치에 대한 혐오가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중도 지지층의 이탈이 가속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40%를 넘지 못하는 박스권 지지율에 갇혀 있는 이유다. 이대로라면 총선은 거대 양당의 정권심판론과 야당심판론이 격돌하는 격투장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제3세력 등장 가능성도 상존한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국민의힘과 민주당 세력으론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고 나라의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국민의 실망이 커지고 있다”며 “이대론 안 된다는 여론이 폭발하면 새로운 정치 세력이 힘을 받게 될 것”이라고 봤다. 추석 전 ‘새로운 선택’ 창당을 공식 선언한 금태섭 전 민주당 의원과 ‘한국의 희망’ 창당을 주도하고 있는 무소속 양향자 의원은 최근 연대를 논의하며 본격적으로 세 불리기에 나섰다. 내년 총선판을 흔들 변수를 짚어봤다.   통합과 ‘개딸’ 사이의 딜레마   더불어민주당 조정식 사무총장등 당직자들이 이재명 대표를 찾아 대화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대표 앞에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우선 내분을 수습해 통합과 협력의 리더십으로 당을 재건해야 한다. 단일대오를 유지, 정권심판론이 먹혀들면 총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한편으론 줄줄이 이어질 재판과 검찰 수사 등 사법 리스크를 방어해야 한다.   둘 다 녹록지 않다. 온건파 박광온 전 원내대표의 사퇴로 친명계 홍익표 원내대표가 당선되는 등 당은 오히려 친명 색채가 강화됐다. 당장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정청래 최고위원)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야무야 넘어가는 데 반대한다”(서은숙 최고위원)는 강경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체포동의안 가결파를 색출해야 한다는 압박도 높아지고 있다. 강성파의 요구는 이 대표의 통합 행보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이다.   이와 관련, 서영교 최고위원은 “이 대표가 당내 분열을 막고 민주당이 한 팀이 될 수 있도록 통합과 결속 행보를 본격화할 거로 본다”며 “분당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수도권 출신의 민주당 중진 의원은 “겉으론 대동단결하는 통합 이미지로 가면서 물밑으론 강성 당원을 동원해 친문재인·친이낙연계와 (체포동의안) 가결파 등 이 대표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을 솎아내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 선출직평가위원회가 현역의원 평가 기준을 확정한 데 이어 원외 친명계를 중심으로 ‘중진 의원 험지 출마’ 요구가 나오는 것이 징후라고 봤다.   3선 이상 중진 의원은 비명계가 다수다. 개혁 명분을 내세워 반대파를 숙청, 친명계로 물갈이하기 위한 포석이란 주장이다. 당 안팎에선 일부의 이탈이냐, 아니면 상당수가 떨어져 나가는 분당 수준으로 갈 것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분열은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이 퍼지고 있다.   민주당의 핵심 기둥인 호남 여론이 예전과 달리 미지근한 관망세라는 점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싣고 있다. 전북 출신의 한 전직 의원은 “법원의 영장 기각엔 환호하는 분위기지만 아직 재판이 남아있으니 좀 더 두고 봐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여론”이라고 호남의 추석 민심을 전했다.   지난 대선에서 이 대표에게 압도적 몰표(광주 84.8%)를 줬던 호남은 작년 8월 당 대표 경선에선 35%의 저조한 투표율(전남·북,광주)을 보였다. 이 대표가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6·1 지방선거의 광주 투표율은 전국 최저(37.7%)였다. 전폭적으로 밀었던 대선에서 패배한 데 대한 실망감도 있지만 ‘개딸’ 등 강성 팬덤에 대한 반감이 복잡하게 작용했다는 해석이다.   “물밑 분당설…연말 가시화할 것”   추석 연휴 중 경기도 연천의 전방부대 장병들을 격려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 [사진 대통령실] 구속을 면했다곤 하나 이 대표의 리더십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구속 기각 결정을 한 유창훈 판사조차 ▶이 대표의 혐의 일부는 소명됐고 ▶상당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명시한 건, 이 대표가 사법 리스크를 헤쳐나가기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영장 기각 이후 민주당이 윤 대통령 사과, 한동훈 법무장관 사퇴(혹은 탄핵), 영수회담 제의 등 정치적 공세에 집중하고 있는 데는 이 대표의 희생양 이미지를 부각함으로써 사법 리스크를 무력화하고 정치적 부활을 꾀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그런 만큼 이재명 친정체제 강화와 열성 지지파의 지원 사격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신당설’이 확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호남의 한 중진은 “이 대표로선 친정체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고 차기 대선 후보가 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에 반대 세력을 잘라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수가 40여 명에 이른다. 반대파로 낙인찍힌 의원들 입장에선 싸워나 보고 죽자는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물밑에서 벌써 움직임이 시작됐는데 연말께면 수면 위로 가시화할 것”이라고 봤다.   역대 선거에서 보듯 간판스타 없는 신당의 성공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구축했던 3김이나 대중적 돌풍을 일으켰던 안철수 신당 정도가 그나마 성공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사법 리스크와 통합이라는 두 개의 전선을 마주해야 할 이 대표엔 정치적 부담이다. 상처 입은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이 대표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지지층 결집이냐 vs 중도 확장이냐   이재명 대표의 기사회생을 보는 국민의힘의 관측은 엇갈린다. “이 대표가 구속됐다면 오히려 야당이 똘똘 뭉치게 하는 빌미가 됐을 것”이라는 쪽과 “이재명이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총선이 정권심판론으로 갈 가능성이 커져 여당에 더 불리해졌다”는 정반대의 전망이 나온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총선은 정권 심판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여당이 고전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야당 심판론으로 대응한다면 여당 필패”라며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민생과 정책,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비전 제시로 선거의 과녁을 바꿔야 한다”(서울의 원외 위원장)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장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주시하고 있다. 김태우 전 구청장을 재공천하며 적격성 논란이 일고 있는 데다 판이 커지면서 수도권, 특히 서울 민심을 측정할 바로미터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김태우 후보가 낙선할 경우 총선을 6개월 앞둔 여당은 후폭풍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책임 공방이 거세질 경우 지도체제가 흔들릴 수도 있다.   당 일각에선 “집권 1년 5개월이 넘도록 이재명 대표 사법 리스크에 의존, 이념·역사전쟁에 몰두하면서 국민 눈에 무능한 반공 보수주의 정권으로 비치고 있다”며 “국정운영 기조의 대 전환이 시급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추석 연휴 전인 지난달 22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 평가는 32%, 부정 평가는 59%였다.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보수·중도파의 이탈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같은 조사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33%였다.   윤 대통령이 신당을 만들까   여권 일각에선 중도 확장을 위해, 승부사 기질이 있는 윤 대통령이 모종의 결단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국민의힘 간판을 내리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대거 영입해 중도층을 공략하는 신당 창당 시나리오다.   역대 대통령들도 신당 카드로 난국을 돌파하곤 했다. 3당 합당으로 집권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5대 총선을 4개월여 앞둔 1995년 12월 민주자유당 간판을 내리고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명망가들을 영입하고 대선 후보 경선제를 도입하는 등 개혁 이미지로 임기 말 치러진 총선인데도 승리로 이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6대 총선을 앞둔 2000년 1월 운동권 출신 ‘젊은 피’ 수혈과 전문가 영입으로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해 선전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권 초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승부수로 총선 압승을 거뒀다. 민주당의 중진 의원은 “국민의힘이 강성 보수세력 공략에서 중도 확장으로 기조를 바꿔 신당 창당 같은 승부수를 띄운다면 민주당은 수세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며 “현역 의원들이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민주당이 내홍에 휩싸일 것”이라고 했다.   탄핵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권은 지난 총선 때 180석을 차지하고도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적폐 청산’을 앞세워 시스템 개혁이 아닌 인적 청산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정권심판론’이나 ‘야당심판론’ 구호 역시 양날의 칼이다.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주지 못하는 선동적 구호는 언제 부메랑이 돼 돌아올지 모른다. 역대 선거의 교훈이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0.05 00:26

  • [세컷칼럼] “기업 진출 막고 세금 드는 사업만 하니 발전 없어”

     ━  새만금 잼버리 파행이 호남에 던진 과제     새만금 잼버리 파행 사태 한 달-. 지난 28일 문제의 잼버리 야영장터를 돌아봤다. 미궁에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현장에서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전북 부안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5분여를 달리니 새만금 간척지다. 884만㎡의 광활한 간척지, 미처 치우지 못해 나뒹구는 쓰레기 더미와 불볕더위를 피하기 위해 세웠던 그늘막만이 잼버리의 흔적으로 남았을 뿐 제멋대로 자란 잡풀과 진흙으로 뒤덮여 황량했다. 섭씨 25도, 비바람까지 흩뿌려 제법 서늘한 날씨였지만, 이곳은 달랐다. 자동차 문을 열자 후끈한 찜통 열기가 기습했다. 택시기사는 “바닷물의 염분 때문에 덥고 습도도 훨씬 높다. 36~37도 한여름 땡볕에 끈적한 습기까지 차올랐으니 어땠겠냐”며 “이런 곳에선 나무도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의문의 첫 단추가 풀렸다. 야영장으로 쓸 수 없는 땅이었다. 그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안을 찾지도, 제동을 걸지도 못했다. 견제 시스템의 부재, 뿌리 깊은 무비판의 관성이 재앙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  「 “전북을 희생양 만들어선 안 돼” “새만금 지키자”는 목소리 부상 스마트팜, 민주당 반대로 무산 “권력교체 없는 일당 독식 탓 커” 」   ━  “전북도민 총궐기 상황 올지도 …”   새만금 잼버리에 참가한 세계 스카우트 대원들이 태풍 ‘카눈’ 상륙으로 야영장에서 철수하고 있다. 준비 부족 등이 드러나면서 잼버리 파행 책임을 놓고 정치권의 공방이 거세지고 있다. [뉴스1]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참가한 각국 대원들이 8일 오전 전북 부안군 잼버리 대회장에서 조기 철수를 하고 있다. 기록적인 폭염에 이어 태풍 '카눈'이 한반도에 상륙할 것으로 전망되자 세계스카우트연맹은 이날 버스 1000여대를 동원해 156개국 3만6000여명을 수도권으로 철수시킨다. 2023.8.8. [뉴스1]   전북도청에 이어 부안군청에도 감사원 감사반이 들이닥치면서 지역 정가는 긴장에 휩싸였다. 이날 전북 14개 시·군의회 의장 연명으로 “전북도에 책임을 지우는 감사나 감찰이 돼선 안 된다”는 성명이 나왔다. 호남 정치의 거물 정동영 전 의원은 며칠 전 기자 간담회를 열고 “여당이 잼버리를 두고 예산 잿밥이란 표현을 쓴 걸 보고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다. 잼버리 실패로 전북도를 희생양 만들려는 흐름이 감지된다”며 “전북도민이 총궐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북책임론 막아내고 새만금 지키기’가 전북과 호남 정치권의 새로운 어젠다로 급부상 중이다.    거리에서 만난 군민들 대다수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60대 이모씨는 “전북이 뭔 잘못이여? 1000원 내려올 걸 500~600원 내려보내고 잘 치르라고 하니 그런 것이제. 물론 여기도 잘못된 게 있겄지만 현 정권이 문제지, 꺼떡하면 구 정권만 갖고 물어징께 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라고 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장모씨도 “현 정부가 잘했어야지 왜 자꾸 문재인 대통령한테 잘못했다고 핑계를 대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이어 “외국인들이야 왔다 가면 그만이고, 천막도 거둬가 버리면 끝이제. 식당이나 좀 됐을까, 원래부터 잼버리는 군민들과 무관해요”라면서 “그라나도(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데 이번 일로 부안에 대한 이미지만 더 버려부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  “경자유전 농지법이 외려 농민에 고통”     식당과 찻집 등 상가가 몰려있는 읍내. 한 식당에서 지역 유지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지방 공무원 출신인 A씨와 도내에서 중소업체를 운영하는 B씨등 일행은 점심 중이었다. 60대 후반~7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들은 내게 명함을 주긴 했지만 기사에 실명 인용되길 원치 않았다.   A=“행사 전부터 저런 뻘밭에서 어떻게 국제행사를 하느냐고 걱정이 많았어요. 군민들이 봐도 이해가 안 되니까요. 이성도 없고, 판단력도 없고…. 어떻게 하면 대회를 성공시킬 것인가 지역민한테 여론도 들어보고 연구도 하고 공감을 끌어내야 했는데 매사에 소홀했어요. 돈만 갖다 쓸 줄 알았지.”   B=“아침 조기축구회도 50명이 뛰면 화장실이 5, 6개가 필요해요. 4만명이 오는데 350개를 지었대요. 4000개는 지었어야죠. 물도 맑은 물 놔두고 썩은 물을 끌어다 쓰고. 몇 년 전부터 건의가 많았지만 소용없어요. (스카우트 대원들) 철수는 잘한 거예요. 철수 안 했으면 난리 났을 거예요.”   대화가 감사원 감사로 흘렀다. 잼버리 예산뿐 아니라 부안군의 일반회계까지 들여다보겠다고 하자 군청이 반발한다는 얘기였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잼버리 망친 게 윤석열 대통령의 탁상행정 때문이란 얘기가 많다”고 시중 여론을 전했다. 그러자 “여기는 민주당, 이재명 욕하면 큰일 나. 비판이 없고 매사 정치적 색깔로 따지니…. 비리도 정의로 둔갑시키잖아”라고 했다. 기초의원부터 국회의원까지 민주당 일색인 일당독식 정치가 호남을 견제와 감시의 사각지대로 퇴보시켰다, 기업 투자가 없어 지역 발전도 희망도 없다, 그러니 인재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고 있다는 탄식이 이어졌다.   2016년의 일이다. LG CNC가 새만금에 스마트팜을 조성하려다 농민단체(전국농민회총연맹)와 민주당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했다. LG CNC는 3800억원을 투자해 ICT(정보통신기술)를 바탕으로 스마트팜 설비와 솔루션 개발을 통해 해외 시장을 개척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수확 농산물은 전량 수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파산 직전에 처한 농민들의 상황을 외면한 채 굴지의 대기업이 토마토·파프리카까지 손대면 안 된다”는 민주당 의원들과 전농의 반발로 결국 계획을 접었다. B씨는 열변을 토했다.   “농촌엔 거대 자본이 없기 때문에 이런 대기업이 주도하면 농민이 따라가게 되는 거예요. 덴마크를 봐요. 농민 몇만 명이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잖아요. 농민들 보호한다며 기업을 못 들어오게 하는 게 말이 돼요? 노인들 다 돌아가시면 그땐 누가 농사지어요? 민주당이 경자유전(耕者有田) 앞세워 만들어놓은 농지법 때문에 오히려 농민들이 고통받고 있어요. 땅 거래가 안 되고 투자도 안 되니 농민들이 땅을 팔고 싶어도 팔지도 못하고…. 서울 사람들이 땅 사면 여기 땅이 서울로 가버린답니까?”    ━  “대기업 있었다면 막장 되진 않았을 것”     권력교체 없는 호남의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은 ‘영원한 여당’이다. 비(非)민주당 세력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전무하다시피 하다〈표 참조〉. 정의당 전북도당이 “파행의 원인은 잼버리를 명분 삼아 새만금신공항등 SOC 사업 추진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라며 “10조원 정도의 개발 자금의 실질적인 이익과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짚어야 한다”는 입장을 낸 정도다.   ‘야당’의 빈자리를 대신해 최근 청년·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작지만 새로운 변화다. 이양승 군산대 교수는 권력 교체 없는 호남 정치가 호남을 역선택의 공간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전북 남원 출신인 이 교수는 통화에서 “부패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다. 그러나 부패 시스템이 자리 잡은 곳에선 정상적인 사람도 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혼자만 청정하면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다”라며 “잼버리 사태는 민주당 독점 체제의 전라도 시스템이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권력의 분립, 견제와 감시 같은 민주주의 시스템의 부재 탓이란 주장이다.   호남 시민사회의 건전한 비판과 토론을 회복하자며 2020년 발족한 ‘호남대안포럼’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광주 출신 의사인 박은식 공동 대표는 “대기업의 농업 진출에 반대한다며 스마트팜 무산시키고 소상공인 보호한다며 복합쇼핑몰 입점을 거부했다. 자생적 성장 역량을 갖추게 해주는 기업은 몰아내고 대신 광주형·군산형 일자리, 광주 아시아문화전당같이 세금 들어가는 사업만 벌인다. 정치가 반기업 정서를 부추겨 세금으로 먹고사는 구조를 만드니 지역에 발전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견제 세력이 있었다면 잼버리 부지 선정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대기업이 들어와 있었다면 기업이 기반 시설을 해놨을 것이기 때문에 잼버리가 막장으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지난 27일 창립총회를 마친 호남대안포럼 전북지회의 신승욱 회장도 30대 청년이다. 그는 “새만금 사업 자금 유치에 억지로 꿰맞추다 보니 장소 선정부터 패착이 됐고 전북이 발전은커녕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됐다”며 “분명히 자기 반성할 부분이 있는데도 지역감정으로 대응하고 현 정부 책임으로 떠넘긴다. 이러니 호남 혐오를 키우고 양극단의 대립만 커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화의 성지’ 호남이 ‘성역’이 돼버렸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희생을 정치가 도구로 징발한 탓이 크다. 보수 세력의 호남 고립 전략에 대한 피해의식이 권력에 대한 무서운 집념과 호남 정치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로 똘똘 뭉쳐 폭발적 힘을 발휘하는 운명 공동체가 됐다. 이걸 탓할 순 없다. 문제는 정치가 이런 집단의식을 특정 정당에 대한 숭배를 조장하는 데 악용해온 점이다. 공동체에 대한 열망과 에너지를 지역발전과 자치 역량을 키우는 데 쓰지 않고, 일당 독식 정치를 공고화하는 데 허비했다. 그 결과 정치 엘리트와 관료들은 출세와 입신양명의 기회를 누렸다. 하지만 지역 발전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2023년 전국 17개 시·도별 재정자립도를 보면 전남(28.7%)과 전북(27.9%)이 최하위다. 6개 광역시 중에선 광주광역시(46.2%)가 꼴찌다. 민주화를 위한 호남의 희생과 헌신에 견주면 너무 초라한 성적표 아닌가.   글=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윤지수 인턴기자   

    2023.09.03 23:00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기업 진출 막고 세금 드는 사업만 하니 발전 없어”

     ━  새만금 잼버리 파행이 호남에 던진 과제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새만금 잼버리 파행 사태 한 달-. 지난 28일 문제의 잼버리 야영장터를 돌아봤다. 미궁에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현장에서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전북 부안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5분여를 달리니 새만금 간척지다. 884만㎡의 광활한 간척지, 미처 치우지 못해 나뒹구는 쓰레기 더미와 불볕더위를 피하기 위해 세웠던 그늘막만이 잼버리의 흔적으로 남았을 뿐 제멋대로 자란 잡풀과 진흙으로 뒤덮여 황량했다. 섭씨 25도, 비바람까지 흩뿌려 제법 서늘한 날씨였지만, 이곳은 달랐다. 자동차 문을 열자 후끈한 찜통 열기가 기습했다. 택시기사는 “바닷물의 염분 때문에 덥고 습도도 훨씬 높다. 36~37도 한여름 땡볕에 끈적한 습기까지 차올랐으니 어땠겠냐”며 “이런 곳에선 나무도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의문의 첫 단추가 풀렸다. 야영장으로 쓸 수 없는 땅이었다. 그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안을 찾지도, 제동을 걸지도 못했다. 견제 시스템의 부재, 뿌리 깊은 무비판의 관성이 재앙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  「 “전북을 희생양 만들어선 안 돼” “새만금 지키자”는 목소리 부상 스마트팜, 민주당 반대로 무산   “권력교체 없는 일당 독식 탓 커” 」    “전북도민 총궐기 상황 올지도 …”   새만금 잼버리에 참가한 세계 스카우트 대원들이 태풍 ‘카눈’ 상륙으로 야영장에서 철수하고 있다. 준비 부족 등이 드러나면서 잼버리 파행 책임을 놓고 정치권의 공방이 거세지고 있다. [뉴스1] 전북도청에 이어 부안군청에도 감사원 감사반이 들이닥치면서 지역 정가는 긴장에 휩싸였다. 이날 전북 14개 시·군의회 의장 연명으로 “전북도에 책임을 지우는 감사나 감찰이 돼선 안 된다”는 성명이 나왔다. 호남 정치의 거물 정동영 전 의원은 며칠 전 기자 간담회를 열고 “여당이 잼버리를 두고 예산 잿밥이란 표현을 쓴 걸 보고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다. 잼버리 실패로 전북도를 희생양 만들려는 흐름이 감지된다”며 “전북도민이 총궐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북책임론 막아내고 새만금 지키기’가 전북과 호남 정치권의 새로운 어젠다로 급부상 중이다.   거리에서 만난 군민들 대다수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60대 이모씨는 “전북이 뭔 잘못이여? 1000원 내려올 걸 500~600원 내려보내고 잘 치르라고 하니 그런 것이제. 물론 여기도 잘못된 게 있겄지만 현 정권이 문제지, 꺼떡하면 구 정권만 갖고 물어징께 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라고 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장모씨도 “현 정부가 잘했어야지 왜 자꾸 문재인 대통령한테 잘못했다고 핑계를 대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이어 “외국인들이야 왔다 가면 그만이고, 천막도 거둬가 버리면 끝이제. 식당이나 좀 됐을까, 원래부터 잼버리는 군민들과 무관해요”라면서 “그라나도(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데 이번 일로 부안에 대한 이미지만 더 버려부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자유전 농지법이 외려 농민에 고통”   식당과 찻집 등 상가가 몰려있는 읍내. 한 식당에서 지역 유지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지방 공무원 출신인 A씨와 도내에서 중소업체를 운영하는 B씨등 일행은 점심 중이었다. 60대 후반~7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들은 내게 명함을 주긴 했지만 기사에 실명 인용되길 원치 않았다.   A=“행사 전부터 저런 뻘밭에서 어떻게 국제행사를 하느냐고 걱정이 많았어요. 군민들이 봐도 이해가 안 되니까요. 이성도 없고, 판단력도 없고…. 어떻게 하면 대회를 성공시킬 것인가 지역민한테 여론도 들어보고 연구도 하고 공감을 끌어내야 했는데 매사에 소홀했어요. 돈만 갖다 쓸 줄 알았지.”   B=“아침 조기축구회도 50명이 뛰면 화장실이 5, 6개가 필요해요. 4만명이 오는데 350개를 지었대요. 4000개는 지었어야죠. 물도 맑은 물 놔두고 썩은 물을 끌어다 쓰고. 몇 년 전부터 건의가 많았지만 소용없어요. (스카우트 대원들) 철수는 잘한 거예요. 철수 안 했으면 난리 났을 거예요.”   박경민 기자 대화가 감사원 감사로 흘렀다. 잼버리 예산뿐 아니라 부안군의 일반회계까지 들여다보겠다고 하자 군청이 반발한다는 얘기였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잼버리 망친 게 윤석열 대통령의 탁상행정 때문이란 얘기가 많다”고 시중 여론을 전했다. 그러자 “여기는 민주당, 이재명 욕하면 큰일 나. 비판이 없고 매사 정치적 색깔로 따지니…. 비리도 정의로 둔갑시키잖아”라고 했다. 기초의원부터 국회의원까지 민주당 일색인 일당독식 정치가 호남을 견제와 감시의 사각지대로 퇴보시켰다, 기업 투자가 없어 지역 발전도 희망도 없다, 그러니 인재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고 있다는 탄식이 이어졌다.   2016년의 일이다. LG CNC가 새만금에 스마트팜을 조성하려다 농민단체(전국농민회총연맹)와 민주당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했다. LG CNC는 3800억원을 투자해 ICT(정보통신기술)를 바탕으로 스마트팜 설비와 솔루션 개발을 통해 해외 시장을 개척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수확 농산물은 전량 수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파산 직전에 처한 농민들의 상황을 외면한 채 굴지의 대기업이 토마토·파프리카까지 손대면 안 된다”는 민주당 의원들과 전농의 반발로 결국 계획을 접었다. B씨는 열변을 토했다.   “농촌엔 거대 자본이 없기 때문에 이런 대기업이 주도하면 농민이 따라가게 되는 거예요. 덴마크를 봐요. 농민 몇만 명이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잖아요. 농민들 보호한다며 기업을 못 들어오게 하는 게 말이 돼요? 노인들 다 돌아가시면 그땐 누가 농사지어요? 민주당이 경자유전(耕者有田) 앞세워 만들어놓은 농지법 때문에 오히려 농민들이 고통받고 있어요. 땅 거래가 안 되고 투자도 안 되니 농민들이 땅을 팔고 싶어도 팔지도 못하고…. 서울 사람들이 땅 사면 여기 땅이 서울로 가버린답니까?”   “대기업 있었다면 막장 되진 않았을 것”   권력교체 없는 호남의 정치 지형에서 민주당은 ‘영원한 여당’이다. 비(非)민주당 세력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전무하다시피 하다〈표 참조〉. 정의당 전북도당이 “파행의 원인은 잼버리를 명분 삼아 새만금신공항등 SOC 사업 추진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라며 “10조원 정도의 개발 자금의 실질적인 이익과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짚어야 한다”는 입장을 낸 정도다.   ‘야당’의 빈자리를 대신해 최근 청년·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작지만 새로운 변화다. 이양승 군산대 교수는 권력 교체 없는 호남 정치가 호남을 역선택의 공간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전북 남원 출신인 이 교수는 통화에서 “부패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다. 그러나 부패 시스템이 자리 잡은 곳에선 정상적인 사람도 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혼자만 청정하면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이다”라며 “잼버리 사태는 민주당 독점 체제의 전라도 시스템이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권력의 분립, 견제와 감시 같은 민주주의 시스템의 부재 탓이란 주장이다.   호남 시민사회의 건전한 비판과 토론을 회복하자며 2020년 발족한 ‘호남대안포럼’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광주 출신 의사인 박은식 공동 대표는 “대기업의 농업 진출에 반대한다며 스마트팜 무산시키고 소상공인 보호한다며 복합쇼핑몰 입점을 거부했다. 자생적 성장 역량을 갖추게 해주는 기업은 몰아내고 대신 광주형·군산형 일자리, 광주 아시아문화전당같이 세금 들어가는 사업만 벌인다. 정치가 반기업 정서를 부추겨 세금으로 먹고사는 구조를 만드니 지역에 발전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견제 세력이 있었다면 잼버리 부지 선정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대기업이 들어와 있었다면 기업이 기반 시설을 해놨을 것이기 때문에 잼버리가 막장으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지난 27일 창립총회를 마친 호남대안포럼 전북지회의 신승욱 회장도 30대 청년이다. 그는 “새만금 사업 자금 유치에 억지로 꿰맞추다 보니 장소 선정부터 패착이 됐고 전북이 발전은커녕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됐다”며 “분명히 자기 반성할 부분이 있는데도 지역감정으로 대응하고 현 정부 책임으로 떠넘긴다. 이러니 호남 혐오를 키우고 양극단의 대립만 커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화의 성지’ 호남이 ‘성역’이 돼버렸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희생을 정치가 도구로 징발한 탓이 크다. 보수 세력의 호남 고립 전략에 대한 피해의식이 권력에 대한 무서운 집념과 호남 정치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로 똘똘 뭉쳐 폭발적 힘을 발휘하는 운명 공동체가 됐다. 이걸 탓할 순 없다. 문제는 정치가 이런 집단의식을 특정 정당에 대한 숭배를 조장하는 데 악용해온 점이다. 공동체에 대한 열망과 에너지를 지역발전과 자치 역량을 키우는 데 쓰지 않고, 일당 독식 정치를 공고화하는 데 허비했다. 그 결과 정치 엘리트와 관료들은 출세와 입신양명의 기회를 누렸다. 하지만 지역 발전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2023년 전국 17개 시·도별 재정자립도를 보면 전남(28.7%)과 전북(27.9%)이 최하위다. 6개 광역시 중에선 광주광역시(46.2%)가 꼴찌다. 민주화를 위한 호남의 희생과 헌신에 견주면 너무 초라한 성적표 아닌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08.31 00:38

  • [선데이 칼럼] 국가 대개조, 더는 미룰 수 없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국민들 가슴을 졸이게 했던 새만금 세계 잼버리 대회가 K팝 공연과 함께 막을 내렸다. 초반 파행을 겪었지만 한국 문화 체험의 ‘코리아 잼버리’로 방향을 틀어 그나마 최악은 면했다. 일제하 국채보상운동,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의 금 모으기처럼 이번에도 시민들이 제 일인 것처럼 나섰다. 사비를 털어 얼린 생수를 사 나르고 빵집 사장님은 케이크를 무료로 제공했다. 한 외국 청년은 언론 인터뷰에서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줘서 감사하다. 미안하다고 해 놀랐다. 다시 한국에 오고 싶다”고 했는데, 한국인의 정(情)을 느낄 수 있어서 가슴 뭉클하면서도 한편으론 부아가 났다. 왜 늘 속상하고 미안해해야 하는 건 힘없는 시민들의 몫이어야 하는지.     ■  「 잼버리 파행 책임 두고 네 탓 공방 무책임 정치, 미래 비전 없는 정부 복지부동 공무원 등 총체적 난맥 희생양 찾기보다 근원적 처방을 」    선데이 칼럼 잔치는 끝났고, 요란한 굿판이 펼쳐질 참이다. 민심 수습을 위한 번제(燔祭) 의식 말이다. 야당은 벌써 대통령 사과와 국정조사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기선 제압에 나섰고, 여당은 문재인 정부 책임을 부각하며 샅바 끈을 동여매고 있다. 중앙 정부는 지방 정부의 무능을 탓하고, 지방 정부는 중앙 정부의 컨트롤 타워 부재를 비판한다. “왜 우리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우나”라는 불만과 항의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막대한 예산을 퍼붓고도 국제적 망신을 시키고 국격을 추락케 한 책임은 반드시 가려내야 한다. 그러나 흥분과 분노의 뜨거운 감정에만 휩쓸려선 안 된다. 냉철한 이성으로 무엇이 문제의 본질인지 복기해봐야 할 때다. 새만금 사태는 우리에게 국가 대개조의 과감한 수술을 더는 늦출 수 없다는 걸 일깨우고 있다. 수십년간 쌓이고 쌓인 총체적 난맥상이 얽혀 이번 사태를 불렀다. 일단 내질러놓고 책임은 지지 않는 정치, 네 탓 타령으로 날 새는 여야, 국가 백년대계 같은 미래 비전의 설계 능력과 의욕을 상실한 단명 정권, 내면화된 관료 사회의 복지부동, 정치 리더십의 부재…난맥상을 이대로 두고 희생양을 찾아내 호통치고, 그중 몇몇을 감방에 보낸들 달라질 건 없다. 하나씩 복기해보자.   ①정치적 한탕주의가 낳은 비극   첫 번째 패착은 잼버리 대회가 성공 개최보다 새만금 개발 사업 촉진에 방점을 두고 추진된 점이다. 전북도 관계자의 말처럼 “인프라를 좀 더 빨리하기 위해 예산을 빼 오기 위한 명분으로 새만금에 잼버리 대회를 유치한 것”(2017년 전북도 의회)이다. 새만금 개발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으려는 지방 권력과 개발 이익을 노린 개발업자의 이해가 맞았다(※대회 유치의 일등 공신이라고 자화자찬했던 이들은 침묵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매립된 땅을 놔두고 잼버리 대회를 위해 새로 부지를 매립했다. 기초 시설 공사가 끝난 게 지난해 5월이다. 대회 1년 전 사전 점검을 위해 열던 프레잼버리는 취소됐다. 코로나 때문이라지만, 기반시설 부족과 배수 불량으로 행사를 치를 수 없었던 게 더 크다. 야영지의 배수와 그늘막 조성, 부실한 샤워장·화장실 문제는 예견된 재앙이었던 셈이다. 전북도는 새만금 국제공항 건설(2028년 개항 예정) 예산을 따내고, 새만금을 동서와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완공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명예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정치적 한탕주의가 부른 비극이다.   ②60년 걸리는 국책사업   새만금 사업이 애물단지가 된 데는 정치의 책임이 크다. 노태우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시작돼 1991년 간척 사업의 첫 삽을 떴지만 이후 7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토지이용 계획이 바뀌었다. ‘식량 증산’이 목표였다가 복합산업단지로 변경됐고, 환경단체의 반대로 수년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해양개발 및 글로벌 허브(이명박)-동북아 경제 허브(박근혜)-재생에너지 단지(문재인)-금융·관광·IT  특화 기지(윤석열)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발 구호는 요란했지만, 32년이 되도록 기반시설 구축(1단계)도 하지 못한 상태다.   비슷한 시기에 간척사업을 시작한 중국 상하이 푸둥 지구는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 자리 잡았다. 새만금은 차질없이 계획대로 진행된다 해도 2050년이 돼야 완료된다. 60년 걸린 국책사업인데, “새만금이 국가 발전과 미래 비전에 어떤 전략적 가치가 있는 건지 알 수 없다”(호남 출신 정치인)는 탄식이 나온다. 먼 미래를 내다본 전략적 고민과 청사진 없이 불쑥 던져놓고 보는 무책임한 정치가 재앙의 불씨를 잉태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③임계점 넘어선 관료 사회의 무사안일   여성가족부의 수준 미달의 집행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폭염·태풍·식재료·식중독 문제 등 모든 게 차질없이 준비됐다”고 큰소리치던 김현숙 장관의 발언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현장에 가지 않고 서류와 보고서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잼버리 대회를 위해 99번의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는 공무원들의 출장 보고서는 코미디 수준이다. 이 와중에 공무원 노조는 잼버리 대원들이 전국으로 흩어지는 과정에서 하달된 공무원의 강제 동원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냈다. 갑작스러운 상명하달식 동원령이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국가적 위급 상황에 시민들까지 나서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대응이다. 관료사회의 나태와 무사안일 풍조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음을 새만금 사태가 일깨워주고 있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2023.08.12 00:28

  • [세컷칼럼] “파격적 특권 포기한 정당이 총선서 지지받을 것”

    . . .  ━  지금 왜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인가     #국회부의장실에 들어서니 울프 흘름 부의장이 손수 맞이하고 직접 커피를 뽑아 탁자 위에 놓았다. 인터뷰가 끝나자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3선 의원인데도 따로 보좌진이 없었다.    #총리 지명 1순위이던 모나 살린 당시 부총리는 법인카드로 초콜릿을 산 게 드러나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사법 처리를 받진 않았지만, 자녀 탁아소 비용 연체, 유모 영수증 미처리 등 윤리적 책임은 피할 수 없었다.     ■  「 ‘심부름꾼’ 임무 잊은 특권국회   “위임한 권한 회수하자”가 민심   비리·범죄엔 불체포특권 없애고   대선·지선 때 3억 모금 폐지해야 」     ━  주차위반에 장관 낙마하는 스웨덴      스웨덴 린네대 최연혁 교수가 저서 『스웨덴 패러독스』에서 소개한 스웨덴 정치인의 일상이다. 이외에도 의원거주 지원금을 실제와 다르게 신고해 정계를 떠난 당 대표, 주차 위반이나 TV 시청료 미납이 드러나 중도 낙마한 장관 사례 등이 줄줄이 나온다. 특권은커녕 일반 시민보다 혹독한 잣대로 감시받는 공복(公僕, 국가의 심부름꾼)의 모습이다.    “특권이 무려 186개”라는 한국 국회의원과 대비된다. 항공기 비즈니스석을 이용하고, KTX를 공짜로 타는 건 빙산의 일각이다. 1년에 수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고도, 후원회·출판기념회를 통해 정치자금을 모금한다. 비리를 저질러도 체포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고도 면책특권 뒤에 숨으면 그만이다. ‘대통령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김의겸 의원이 단적인 예다. “합리적 의심”이라던 그의 주장은 모두 허위로 밝혀졌지만 어떤 징계나 처벌도 받지 않았다.    특별한 대접을 받으면 특권을 누리는 걸 당연시하게 되고, 결국엔 군림하려 든다. 지금 정치가 그렇다. 자유로운 의정활동의 버팀목으로 주어진 공적 권한을 사유화하고 특혜를 누리면서 사회 통합과 국가 발전은 오히려 멀어져가는 퇴행을 보이고 있다. 한 전직 의원은 “정치인의 관심사가 국가 발전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재선과 자기 당의 집권에만 쏠려 있는데 놀랐다”고 고백했다.    지지자로부터 욕먹고 낙선을 각오하면서 바른 소리를 하는 ‘쓴소리파’ ‘소신파’도 멸종해가고 있다. 최 교수는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공적 권한을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하는 걸 감시하고 특권의식을 갖지 못하게 투명성을 높인 스웨덴 모델이 국가경쟁력을 끌어올린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한다. 내년 22대 총선(4월 10일)을 앞두고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국회의원 특권 폐기 운동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국회의원 보수, 세계 최고 수준”      지난 4월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가 발족, 공직자의 특권 포기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나섰다. 운동을 주도하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한국 국회의원 월급이 액면가로는 미국·일본에 이어 세 번째지만 국민소득 대비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며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입신양명을 위해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니 정치가 부패·타락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의원 보수를 근로자 평균 임금(400여만원) 정도로 낮춰 국가를 위해 봉사할 사람이 정치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재민 기자    ‘국회의원 수당 등 지급 기준’에 따르면 2023년 의원 연봉은 1억5426여만원이다. 일반 수당과 급식비, 정근수당, 명절 휴가비, 입법활동비 등을 합친 금액이다. 월급으로 환산하면 1285만원꼴이다.〈표1 참조〉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3만2661달러, 420만원) 대비 3.7배다. 미국·영국·일본의 의원 보수가 국민소득 대비 약 2.5배 안팎인 것과 비교하면 “한국 의원들의 보수가 높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신재민 기자    이와 별도로 의원실 지원 경비로 평균 1억여원가량 추가로 받는다. 사무실 운영비, 업무추진비, 의원 차량 유류비, 출장비, 입법자료 발송비, 정책 개발비 등이 포함된다. 〈표2 참조〉 의원들은 또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8·9급 비서 각 1명, 유급 인턴(1명) 등 모두 9명의 보좌진을 둘 수 있다. 보좌진 총급여는 5억2000여만원. 의원 1명에게 연간 7억원이 넘는 경비가 들어가는 셈이다.    문제는 ‘고(高)비용’이 정치의 ‘생산성’에 역행한다는 점이다. 정세균 국회의장 시절이던 2016년 국회의원특권내려놓기추진위원회에 참여했던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국회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업무수행에 필요한 권한조차 특권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국민 불신이 높아졌고 국회의원을 특권집단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3권분립 강화와 행정부에 대한 견제 역할을 기대하며 국회의 권한과 위상을 높여줬지만, 정작 국회는 국민의 ‘대리인’임을 망각하고, ‘정치 엘리트’라는 특권의식에 포획돼 민의를 수용하지 못하자 국민이 위임했던 권한을 회수하려 나섰다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  선거공영제의 모순, 꿩 먹고 알 먹기      운동본부는 선거공영제란 이름으로 정당과 의원에게 과다한 나랏돈이 쓰이는 걸 바로잡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의원들은 1년에 1억5000만원, 선거가 있는 해는 3억원까지 정치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다. 그러나 15% 이상 득표하면 선거비용 전액을 국고에서 환급받는다. 3억원을 모금해 선거자금에 다 썼어도 국고에서 3억원을 환급받으니 3억원이 고스란히 남는 구조다. ‘꿩 먹고 알 먹기’ ‘도랑 치고 가재 잡기’다.    특권폐지 운동에 참여한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은 “도무지 말이 안 된다”며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 차별적 특혜 대접을 받으니 우쭐해지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최 전 총장은 또 “국회의원이 자기 선거(총선)가 아닌, 지방선거나 대선 때도 3억원까지 모금할 수 있다”며 “그런데 이 돈을 대선이나 지방선거에 사용하면 공직선거법 위반이 된다. 쓰지도 못하는데 왜 3억원까지 모금해야 하나”고 의문을 제기했다.    지방선거가 있던 ‘2022년 국회의원 후원금 모금 현황’을 보면, 국민의힘 장제원(3억2103만원), 민주당 김남국(3억3014만원), 이원욱(3억2269만원), 정청래(3억516만원), 박주민(3억407만원) 의원 등 여야 실세들이 모금 상한액을 넘는 정치자금을 모았다. 선거를 명분으로 모금한 건데 선거 지원에 쓰지 못하는 모순일 뿐만 아니라 같은 선출직인 지방자치단체·의원과의 형평에도 맞지 않는 특혜다. 지난해 여야 의원의 평균 모금액은 1억8900여만원이었다.    ━  선거비용 이중 보전에 헌법소원      중앙당에 대한 선거비용 이중 보전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장 이사장은 “평소엔 정당에 경상보조금을 주고, 선거가 있는 해엔 선거에 쓰라고 미리 선거보조금을 주고, 선거 후엔 선거에 쓴 비용을 또 보전해줘 막대한 돈을 이중으로 안기고 있다”며 “지난달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 심판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선관위도 심각성을 느껴 개정 의견을 냈지만 국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덕분에 776억원(2021년)이던 국민의힘 재산은 지방선거가 있던 2022년엔 1255억원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민주당도 464억원에서 929억원으로 재산을 불렸다. 기막힌 ‘선거 테크’가 아닐 수 없다.    여야는 선거 때 득표전략으로 ‘특권 폐기’를 써먹곤 번번이 폐기했다. 지난 대선에서 불체포특권 포기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자신과 소속 의원들의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넘어오자 모두 부결시켰다. 비난 여론이 고조되자 이번엔 ‘정당한 영장 청구’라는 단서를 단 불체포특권 포기 서약을 혁신안인 것처럼 둔갑시켰다. 꼼수다.    ━  시대착오적인 불체포·면책특권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 입법부가 왕에 대한 비판 발언을 보장하기 위해 명문화된 이래 미국·영국·일본·독일 등 선진국들도 불체포·면책특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런 입법 취지와 배경 때문에 국내 학자들 간에도 찬반양론이 팽팽하다.    문제는 운용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도입 배경이나 정신은 없어지고 인신구속과 범죄행위에 대한 회피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문제”라며 “불체포특권을 규정한 나라에서도 형사 사건이나 개인 범죄엔 적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면책특권의 경우 ▶영국은 명예훼손시 의회 내부에서 징계하고 ▶독일은 ‘중상적 명예훼손’에 대해선 면책특권을 적용하지 않도록 명시하고 있다.    ━   ‘방탄국회’‘막말국회’ 사라져야      이준한 교수는 “국민에게 봉사하지 않으면서 과도한 혜택을 누리는 넌센스를  바로잡으려면 내년 총선 때 정당이 이를 총선 공약화하고 개혁 경쟁이 불붙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호기 교수도 “선거 판도를 결정짓는 두 축은 인물·정책 대결과 혁신 경쟁인데, 국민의힘과 민주당간 인물·정책 대결이 변별력이 있겠는가”라며 “1990년대 이탈리아 오성운동이 관용차 금지, 3선 제한 등의 파격적인 특권 포기로 각광받았듯이 내년 총선 판도는 특권 포기를 선도하는 정당이 여론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복의 본분을 망각한 채 변질된 ‘특권국회’ ‘방탄국회’ ‘막말국회’. 이쯤에서 제동을 걸어야 한다. 다시 국민이 나설 때다.   글=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그림=임근홍 인턴기자

    2023.08.06 23:00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파격적 특권 포기한 정당이 총선서 지지받을 것”

     ━  지금 왜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인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국회부의장실에 들어서니 울프 흘름 부의장이 손수 맞이하고 직접 커피를 뽑아 탁자 위에 놓았다. 인터뷰가 끝나자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3선 의원인데도 따로 보좌진이 없었다.   #총리 지명 1순위이던 모나 살린 당시 부총리는 법인카드로 초콜릿을 산 게 드러나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사법 처리를 받진 않았지만, 자녀 탁아소 비용 연체, 유모 영수증 미처리 등 윤리적 책임은 피할 수 없었다.     ■  「 ‘심부름꾼’ 임무 잊은 특권국회 “위임한 권한 회수하자”가 민심   비리·범죄엔 불체포특권 없애고 대선·지선 때 3억 모금 폐지해야 」    주차위반에 장관 낙마하는 스웨덴   스웨덴 린네대 최연혁 교수가 저서 『스웨덴 패러독스』에서 소개한 스웨덴 정치인의 일상이다. 이외에도 의원거주 지원금을 실제와 다르게 신고해 정계를 떠난 당 대표, 주차 위반이나 TV 시청료 미납이 드러나 중도 낙마한 장관 사례 등이 줄줄이 나온다. 특권은커녕 일반 시민보다 혹독한 잣대로 감시받는 공복(公僕, 국가의 심부름꾼)의 모습이다.   “특권이 무려 186개”라는 한국 국회의원과 대비된다. 항공기 비즈니스석을 이용하고, KTX를 공짜로 타는 건 빙산의 일각이다. 1년에 수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고도, 후원회·출판기념회를 통해 정치자금을 모금한다. 비리를 저질러도 체포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고도 면책특권 뒤에 숨으면 그만이다. ‘대통령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김의겸 의원이 단적인 예다. “합리적 의심”이라던 그의 주장은 모두 허위로 밝혀졌지만 어떤 징계나 처벌도 받지 않았다.   특별한 대접을 받으면 특권을 누리는 걸 당연시하게 되고, 결국엔 군림하려 든다. 지금 정치가 그렇다. 자유로운 의정활동의 버팀목으로 주어진 공적 권한을 사유화하고 특혜를 누리면서 사회 통합과 국가 발전은 오히려 멀어져가는 퇴행을 보이고 있다. 한 전직 의원은 “정치인의 관심사가 국가 발전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재선과 자기 당의 집권에만 쏠려 있는데 놀랐다”고 고백했다.   지지자로부터 욕먹고 낙선을 각오하면서 바른 소리를 하는 ‘쓴소리파’ ‘소신파’도 멸종해가고 있다. 최 교수는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공적 권한을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하는 걸 감시하고 특권의식을 갖지 못하게 투명성을 높인 스웨덴 모델이 국가경쟁력을 끌어올린 밑거름이 됐다”고 설명한다. 내년 22대 총선(4월 10일)을 앞두고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국회의원 특권 폐기 운동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회의원 보수, 세계 최고 수준”   지난 4월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가 발족, 공직자의 특권 포기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나섰다. 운동을 주도하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한국 국회의원 월급이 액면가로는 미국·일본에 이어 세 번째지만 국민소득 대비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며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입신양명을 위해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니 정치가 부패·타락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의원 보수를 근로자 평균 임금(400여만원) 정도로 낮춰 국가를 위해 봉사할 사람이 정치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재민 기자 ‘국회의원 수당 등 지급 기준’에 따르면 2023년 의원 연봉은 1억5426여만원이다. 일반 수당과 급식비, 정근수당, 명절 휴가비, 입법활동비 등을 합친 금액이다. 월급으로 환산하면 1285만원꼴이다.〈표1 참조〉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3만2661달러, 420만원) 대비 3.7배다. 미국·영국·일본의 의원 보수가 국민소득 대비 약 2.5배 안팎인 것과 비교하면 “한국 의원들의 보수가 높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신재민 기자 이와 별도로 의원실 지원 경비로 평균 1억여원가량 추가로 받는다. 사무실 운영비, 업무추진비, 의원 차량 유류비, 출장비, 입법자료 발송비, 정책 개발비 등이 포함된다. 〈표2 참조〉 의원들은 또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8·9급 비서 각 1명, 유급 인턴(1명) 등 모두 9명의 보좌진을 둘 수 있다. 보좌진 총급여는 5억2000여만원. 의원 1명에게 연간 7억원이 넘는 경비가 들어가는 셈이다.   문제는 ‘고(高)비용’이 정치의 ‘생산성’에 역행한다는 점이다. 정세균 국회의장 시절이던 2016년 국회의원특권내려놓기추진위원회에 참여했던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국회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업무수행에 필요한 권한조차 특권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국민 불신이 높아졌고 국회의원을 특권집단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3권분립 강화와 행정부에 대한 견제 역할을 기대하며 국회의 권한과 위상을 높여줬지만, 정작 국회는 국민의 ‘대리인’임을 망각하고, ‘정치 엘리트’라는 특권의식에 포획돼 민의를 수용하지 못하자 국민이 위임했던 권한을 회수하려 나섰다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선거공영제의 모순, 꿩 먹고 알 먹기   운동본부는 선거공영제란 이름으로 정당과 의원에게 과다한 나랏돈이 쓰이는 걸 바로잡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의원들은 1년에 1억5000만원, 선거가 있는 해는 3억원까지 정치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다. 그러나 15% 이상 득표하면 선거비용 전액을 국고에서 환급받는다. 3억원을 모금해 선거자금에 다 썼어도 국고에서 3억원을 환급받으니 3억원이 고스란히 남는 구조다. ‘꿩 먹고 알 먹기’ ‘도랑 치고 가재 잡기’다.   특권폐지 운동에 참여한 최성해 전 동양대 총장은 “도무지 말이 안 된다”며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 차별적 특혜 대접을 받으니 우쭐해지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최 전 총장은 또 “국회의원이 자기 선거(총선)가 아닌, 지방선거나 대선 때도 3억원까지 모금할 수 있다”며 “그런데 이 돈을 대선이나 지방선거에 사용하면 공직선거법 위반이 된다. 쓰지도 못하는데 왜 3억원까지 모금해야 하나”고 의문을 제기했다.   지방선거가 있던 ‘2022년 국회의원 후원금 모금 현황’을 보면, 국민의힘 장제원(3억2103만원), 민주당 김남국(3억3014만원), 이원욱(3억2269만원), 정청래(3억516만원), 박주민(3억407만원) 의원 등 여야 실세들이 모금 상한액을 넘는 정치자금을 모았다. 선거를 명분으로 모금한 건데 선거 지원에 쓰지 못하는 모순일 뿐만 아니라 같은 선출직인 지방자치단체·의원과의 형평에도 맞지 않는 특혜다. 지난해 여야 의원의 평균 모금액은 1억8900여만원이었다.   선거비용 이중 보전에 헌법소원   중앙당에 대한 선거비용 이중 보전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장 이사장은 “평소엔 정당에 경상보조금을 주고, 선거가 있는 해엔 선거에 쓰라고 미리 선거보조금을 주고, 선거 후엔 선거에 쓴 비용을 또 보전해줘 막대한 돈을 이중으로 안기고 있다”며 “지난달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 심판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선관위도 심각성을 느껴 개정 의견을 냈지만 국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덕분에 776억원(2021년)이던 국민의힘 재산은 지방선거가 있던 2022년엔 1255억원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민주당도 464억원에서 929억원으로 재산을 불렸다. 기막힌 ‘선거 테크’가 아닐 수 없다.   여야는 선거 때 득표전략으로 ‘특권 폐기’를 써먹곤 번번이 폐기했다. 지난 대선에서 불체포특권 포기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자신과 소속 의원들의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넘어오자 모두 부결시켰다. 비난 여론이 고조되자 이번엔 ‘정당한 영장 청구’라는 단서를 단 불체포특권 포기 서약을 혁신안인 것처럼 둔갑시켰다. 꼼수다.   시대착오적인 불체포·면책특권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 입법부가 왕에 대한 비판 발언을 보장하기 위해 명문화된 이래 미국·영국·일본·독일 등 선진국들도 불체포·면책특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런 입법 취지와 배경 때문에 국내 학자들 간에도 찬반양론이 팽팽하다.   문제는 운용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도입 배경이나 정신은 없어지고 인신구속과 범죄행위에 대한 회피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문제”라며 “불체포특권을 규정한 나라에서도 형사 사건이나 개인 범죄엔 적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면책특권의 경우 ▶영국은 명예훼손시 의회 내부에서 징계하고 ▶독일은 ‘중상적 명예훼손’에 대해선 면책특권을 적용하지 않도록 명시하고 있다.   ‘방탄국회’‘막말국회’ 사라져야   이준한 교수는 “국민에게 봉사하지 않으면서 과도한 혜택을 누리는 넌센스를  바로잡으려면 내년 총선 때 정당이 이를 총선 공약화하고 개혁 경쟁이 불붙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호기 교수도 “선거 판도를 결정짓는 두 축은 인물·정책 대결과 혁신 경쟁인데, 국민의힘과 민주당간 인물·정책 대결이 변별력이 있겠는가”라며 “1990년대 이탈리아 오성운동이 관용차 금지, 3선 제한 등의 파격적인 특권 포기로 각광받았듯이 내년 총선 판도는 특권 포기를 선도하는 정당이 여론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복의 본분을 망각한 채 변질된 ‘특권국회’ ‘방탄국회’ ‘막말국회’. 이쯤에서 제동을 걸어야 한다. 다시 국민이 나설 때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08.03 00:52

  • [선데이 칼럼] ‘첫 변론’ 개봉, 득보다 실이 크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영화 ‘그녀가 말했다(원제 She Said)’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사건을 파헤친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계의 절대 권력 와인스타인이 30여년간 여배우와 어린 여직원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르고 돈과 권력으로 입막음해 온 추악한 범죄의 실체가 드러나며 세계적인 미투(Me Too)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이를 파헤친 건 뉴욕타임스의 두 탐사전문 여기자, 메건과 조디다.   영화는 두려움에 떨며 진술을 꺼리는 피해 여성을 찾아내 설득하는 끈질긴 노력과 기사화를 막으려는 와인스타인 측의 집요한 협박·방해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나는 돈을 벌고 경력도 쌓고 싶은 28세 여성이었고 하비는 세계적 유명 인사다. 힘의 균형을 따지자면 나는 0, 하비는 10이다.” 피해 여성의 이 말은 직장 내 성추문 사건의 본질이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폭력임을 고발한다.     ■  「 여성단체 반대 속 개봉강행 예고   “권력관계서 발생, 직장 내 성희롱” 인권위·법원 판단 무시한 오만 결백 주장한다고 명예회복 될까 」    선데이 칼럼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 ‘첫 변론’의 개봉(8월 예정)을 둘러싼 잡음 때문이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며 개봉 철회를 요구한 여성·인권단체에 대해 “우리 사회에 페미·미투 계엄령이 발동됐다”고 반격하면서 마찰음이 커지고 있다.   다큐는, 오마이뉴스 기자가 박 전 시장의 주변 인물 50여명을 인터뷰해 쓴 책 『비극의 탄생』이 원작이다. 제작진은 ▶피해자의 호소 내용만 있을 뿐 ▶성추행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박 전 시장의 결백을 주장한다. 이런 대목들이 있다. “(피해자가) 시장에게 넥타이를 매어주는데 그 모습이 아내가 남편 넥타이 매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장 몸에 마이크를 장착할 때가 많은데,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걸 보면 달려와서 본인이 시장 몸에 마이크를 채워주곤 했다.” 내밀한 사적 관계, 피해자가 원해서 한 일이란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인용 문구는 영화 속 와인스타인 측 대응을 연상케한다. “그 여자들이 피해자인 게 확실한가?” “뜨고 싶은 욕심에 제작자를 꼬신 것 아닌가?” 피해자의 행실이 문제라는 식의 부정적 평판을 퍼뜨리고 피해자 깎아내리기로 논점을 흐린뒤 교묘히 그물망을 빠져나가려는 전형적 수법 말이다. ‘박 전 시장은 결백하다’는 궤변적 변론은 성범죄 가해자의 고전적 대응 방식의 차용에서 나아가 ‘대안적 사실’이라는, 확증편향 시대에 편리한 기제를 장착하고 있다. 증거인멸 시도를 ‘증거 보전’이라고 하고, 비리와 범죄가 드러나면 음모론으로 받아치며 허구와 거짓을 ‘실제’인 것처럼 선전하는 기술 말이다. 지난 정권 때 우리는 조국 사태로 나라가 두 동강 나는 분열과 아픔을 경험했다. ‘첫 변론’ 상영이 강행된다면 진영과 광기의 정치가 몰고 올 광풍에 온 나라가 또 한번 휘청거릴지도 모른다. 불행한 일이다.   제작진은 박 전 시장의 죽음으로 충분한 반론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다큐 개봉의 당위성을 강조하지만, 이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인권위는 문재인 정권 시절이던 2020년 이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를 벌여 이듬해 1월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직장 내 성희롱’이라고 결정했다. 인권위는 ▶성희롱 행위가 있었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내용이 중대하다고 인정해 직권조사를 결정했고 ▶박 전 시장의 사망으로 인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특성을 감안, 사실 인정 여부를 좀 더 엄격하게 판단했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박 전 시장의 부인 강난희씨가 인권위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제기한 행정소송도 패소했다. 법원도 인권위 결정을 존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기관과 사법부가 같은 판단을 내렸는데도 이를 부정하면서까지 박 전 시장의 결백을 주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하면 박 전 시장의 명예가 회복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오만이고 착각이다. ‘첫 변론’의 개봉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게 분명하다.   제작진에 인권위 결정문 정독을 권한다. 거기에 ‘해답’이 나와 있어서다. 일부를 인용한다. “박 시장은 9년간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반면…서울시장과 비서라는 권력관계 및 사회적 지위 격차로 인해 피해자가 싫은 기색이나 반응을 보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심기와 컨디션을 보살펴야 하는 비서 업무의 특성상 상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여성 비서로서는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이러한 성 역할 고정관념의 조직 문화 속에서 성희롱은 언제든 발생할 개연성이 있으며 이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시 ‘그녀가 말했다’로 돌아가보자. 기자 취재에 불응했던 피해 여성들이 입을 열게 된 건 “내 딸들마저 그런 폭력에 순응하며 살게 할 순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입 열기가 겁났지만 참는 건 더 큰 고통”이었다.   영화는 이제 막 사회에 나와 희망에 부풀어있던 여성들이 입은 치명적인 좌절에 주목했다. “이 일로 내 삶의 방향이 바뀐 느낌이었다. 커다란 판단 착오가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딴 여성들은 나와 달리 거절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 짓을 허락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날 그는 내 자존감을 뺏어갔다. 막 자존감을 확립해가기 시작할 나이에…” 피해 여성의 독백이 오랜 여운을 드리운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2023.07.01 00:28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노관규의 ‘생태도시’ 실험, 대한민국을 흔들다

     ━  순천만 국제 정원박람회 성공 스토리는 어떻게 가능했나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인구 28만명의 소도시 전남 순천이 전국을 뒤흔들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해 전국의 관광객을 빨아들이는가 하면, 경쟁도시 고흥·창원을 물리치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국형 우주발사체 단(段) 조립장을 유치했다. 며칠 전엔 순천대학교가 교육부 지원 ‘글로컬대학 예비지정 대학’에 뽑혀 활력을 더하고 있다.   성공 스토리의 주역은 ‘생태도시’를 밀어붙여온 노관규 순천시장(무소속)이다. 10년만에 두번째로 열린 순천만 국제 정원 박람회(4월1일~10월31일)는 그의 ‘특허품’이다. 개장 80일(6월19일 기준)만에 목표 대비 61%의 관람객(490만명) 유치와 목표 수익의 93%(235억원)를 달성했다. 고용 창출 2만5000명, 생산유발 효과는 1조5926억원에 이를 것이란 분석(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다.     ■  「 공장·아파트 회색 개발 포기 삶의 질 바꿀 ‘생태도시’로 전환 50여 지자체, 순천 배우기 열풍 “수도권 접고 올 만한 가치 입증” 」    순천만 정원박람회의 명물로 떠오른 ‘그린 아일랜드’. 차가 달리던 아스팔트 도로 위에 잔딧길을 조성, 시민들이 맨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했다. [사진 순천시청] 이보다 놀라운 건 전국에 불고 있는 ‘순천 배우기’ 열풍이다. 50여곳의 지방자치단체를 포함, 230개의 연구소·기관이 순천을 벤치마킹중이다. 개막식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것을 비롯해 수도 서울의 오세훈 시장, 박완수 경남지사, 최민호 세종시장등 숱한 정치인이 순천을 찾았다. 공무원 시찰단 방문도 끊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지난 18일 순천을 찾았다. KTX 순천역에서 도보로 5분거리의 동천 선착장에서 요트를 타고 정원으로 향했다. 60만평의 대지에 영국·미국·네덜란드·멕시코등 세계 정원과 다채로운 테마정원이 이어져 있다. 교통체증·잡상인·쓰레기가 없어 쾌적한 순천만 정원, 느림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외국 같다”는 관람객들의 탄성을 뒤로하고 박람회조직위 사무실에서 노관규 시장과 만났다.   인구소멸 위기 속 순천 인구는 늘어   노관규 처음엔 시 의회와 시민·환경단체의 반대가 거셌다던데. “공장 짓고 아파트 지어야지 무슨 생태냐, 천지가 산이고 들인데 무슨 정원이냐는 조롱이 쏟아졌다. 그러나 중소도시가 대도시 흉내 내 경쟁력이 있겠나.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아파트·공장 짓는 회색 개발은 한계에 왔다.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는 자연을 기초로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업단지가 없는데도 순천 인구는 늘었다. “호남 22개 시·군중 13개가 소멸 위기인데 오히려 순천은 광주·전주에 이은 세 번째 도시가 됐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순천에 온 건 여기서 일할 고급인력들이 이 정도 정주여건이라면 순천에서 살고 싶다는 여론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생태도시로 방향을 정하고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경쟁요건을 갖춘 게 굉장한 효과를 낸 것이다.”   우리에게 정원 문화는 낯설다. 역사적으로도 정원 가꾸기(gardening)와는 거리가 멀었거니와 산업화와 함께 아파트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정원과 단절됐다. ‘정원’ 하면 ‘텃밭’을 떠올리기 쉽지만, 텃밭은 생산과 노동의 공간이고 정원은 여가와 휴식의 공간이란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원박람회는 역발상의 산물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시는 발상을 전환해 시민에게 감동을 주는 창의시정을 강조해왔는데, 그 사례를 순천에서 봤다”고 극찬했다.   순천의 목표는 관광도시인가. “관광도시 이상의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의 과제가 수도권 일극체제 해소 아닌가. 공기업 강제 분산시키고 공장부지 만들어놓고 가라고 하지만 안 된다. 수도권을 포기하고 올 만한 다른 가치가 있어야 한다. 아이 키우고 자신들이 재충전하고 노후까지 보낼 수 있는 도시라는 걸 보여준 게 순천이다. 수도권 일극체제를 나눠 지고 국가균형 발전의 해법을 제시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4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잔디광장으로   노 시장의 정원박람회 구상은 2009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흑두루미의 97%가 월동한다는 일본 이즈미(出水)시를 견학, 몸집이 큰 흑두루미가 의외로 전깃줄에 걸려 많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천만 일대 283개의 전봇대를 뽑고 전선을 없앴다. 전세계 흑두루미 1만8000마리의 60%가 넘는 1만여마리가 찾아오는 세계적 흑두루미 월동지로 자리잡으며 순천만이 되살아났다.   올해는 업그레이드된 실험을 했다. 초고층 아파트 단지 밀집지역인 오천동 앞 4차선 아스팔트 도로 1.2㎞ 구간을 잔디로 덮어 맨발 산책이 가능한 잔디 광장(그린 아일랜드)으로 바꿨다. 정원이 도심의 일상 속까지 스며들어온 것이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0년 전부터 순천시청에서 정원박람회 실무를 이끌어온 최덕림 총감독의 말이다. “전봇대 뽑기로 직접 피해를 보는 농민이 5000명, 가족까지 따지면 1만~2만표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정치인으로선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손해 보더라도 미래를 위해 가자’는 시장의 결심으로 순천만 생태계 보전지구로 지정할 수 있었다.” 최 총감독은 “반대하던 시민들도 요즘은 이 정도로 살기좋은 도시가 된다면 불편은 감내할 수 있다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며 “‘노 시장이 고생하고 수고하셨다’는 얘기를 들으면 보람을 느낀다”며 달라진 민심을 전했다.   고졸 출신 검사, 순천시장만 세 번   노 시장은 특이한 이력의 정치인이다. 고졸(순천매산고) 출신으로 구로공단 노동자→세무공무원을 거쳐 4수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 검사가 됐다. 2000년 수원지검 검사를 끝으로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2006년(민주당)과 2010년(무소속) 연거푸 순천시장에 당선됐으나 총선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신 그는 지난해 세 번째로 순천시장(무소속)에 취임하며 10년만에 부활했다. 시련이 그를 더욱 단련시킨 것일까. 노 시장은 “닥치는대로 잡다하게 책을 읽었다. 비로소 고민하던 것들이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성공하는 리더십의 요체는. “도시는 지자체장이 공부한만큼 발전한다는 걸 깨달았다. 공부를 해야 생각의 눈높이가 높아져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 아무리 시장의 역량이 있어도 철학과 비전을 현실로 실현시켜주는 건 공무원이다. 공무원을 설득하고 그들이 긍지와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게 시장의 리더십이다. 또 시민들 눈높이가 그 수준이 돼야 한다. 시장-공무원-시민의 3합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공무원 설득의 비결은 뭔가. “시장의 무기는 인사권이다. 칸막이를 허물어 행정·토목·해양등 필요한 직능을 한군데로 합쳐 일할 수 있게 하고, 과장에게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을 고르라고 했다. 1명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인사를 냈다. 시장이 인사권을 포기하고 권한을 준만큼 책임도 지게 한 것이다.”   시민 설득이 쉽지 않았을텐데.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주지 않고 전액 정원박람회에 썼다. 도시의 근본적 동력을 만드는 데 사용한 거다. 직접 24개 읍·면·동을 돌며 시민들을 설득했다. ‘여러분이 다섯아이 부모다. 넷째 대학등록금이 고민인데 다섯째가 명품 운동화 사고 싶어한다. 부모라면 밤새 고민 끝에 명품 운동화를 포기하고 대학 등록금에 쓰자고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더니 고맙게도 시민들이 따라와주더라.”   오세훈-노관규의 특별한 인연   정치권에선 오세훈 서울시장(국민의힘)과 노 시장의 특별한 인연과 협력에도 주목한다. 각각 무상급식 파동과 총선 낙선으로 정치적 공백기를 맞았다 10년만에 나란히 부활했다. ‘정원과 같은 도시 서울’과 ‘생태도시 순천’을 표방, 협력 중이다. 오 시장이 간부들을 데리고 박람회를 관람했고, 지난달엔 노 시장이 서울시 팀장급 이상 간부를 대상으로 특별강연을 하기도 했다. 노 시장은 “프랑스·영국·독일 등 정원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제국을 이뤘거나 꿈꿨던 나라들”이라며 “오 시장의 인문적·철학적 눈높이가 굉장한 수준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기초단체장인 내게 강연을 하게 한 건 오 시장이 가슴과 통이 크고, 사람을 널리 구하고 쓰려 한다는 의미”라고도 했다.   오 시장은 “정원박람회 같은 큰 규모의 행사를 하려면 보통 대학교수나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하는데, 10년 전에 일한 사람을 다시 발탁해 권한을 주고 일하게 한 용인술이 놀랍다”며 “세계사에 유례없는 일을 해낸 순천이 지방행정 업그레이드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호평했다.   “순천에 월트 디즈니 만드는 게 꿈”   인터뷰 말미에 노 시장은 “꼭 하고싶은 말이 있다”며 애니메이션 클러스터 사업을 설명했다. “순천 3개 대학에 애니메이션 학과가 있다. 졸업하면 수도권에 올라가 고시텔·원룸 전전하다 우울증 생기고 가족도 힘들게 한다. 지방도시도 고급문화산업을 할 수 있게 정부가 지원해줘야 한다. 월트 디즈니같은 회사를 왜 순천에 못 만드나?”   ‘정원 쓰나미’를 몰고온 ‘노 작가’(시청 직원들은 노 시장을 이렇게 부른다)의 꿈이 이뤄질 것인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06.22 00:50

  • [선데이 칼럼] 제3신당이 성공하려면

    이정민 칼럼니스트 제3신당 창당을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 1985년의 신한민주당(신민당) 돌풍이 성공사례의 교본처럼 거론된다. 12대 총선을 불과 25일 남기고 창당해 제1야당(67석)으로 우뚝 섰으니 전율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양김(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 규제에 묶여 있었고 후보를 내지 못한 지역이 많았지만, 서울에선 신민당 후보 전원(14명)이 당선될 정도로 파란을 일으켰다. 그것도 서슬 퍼런 신군부 치하에서 말이다. 예상 밖 ‘기적’은 독재 정치-관제 야당의 정치판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대안이란 희망과 믿음을 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정확히 제시했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 언론기본법 폐지 등 목숨을 건 치열한 노력에 국민들도 전폭적 지지를 보낸 것이다.     ■  「 25일 만에 제1야당 된 신민당 돌풍 ‘대안세력’ 믿음 줘 국민 지지 받아 지금의 위선·무능 정치 대체하려면 도덕성과 실력 갖춘 새인물 발굴을 」    선데이 칼럼 요즘 정치는 속된 말로 국회의원에게 ‘일자리’ 만들어주는 걸로 전락했다는 빈축을 산다.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 정쟁과 편가르기의 관성에 빠져있다. 비호감 정치판을 바꾸자는 신당 논의가 오가고 있다고 한다. 금태섭 전 민주당 의원이 ‘수도권 30석’을 내건 신당 창당을 공식화하면서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세 결집 양상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한 야당 의원은 “정치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표출돼 외부의 압박에 의해 에너지가 모이면 용기를 얻은 정치인들의 신당 규합 움직임이 표면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필요성엔 공감하면서도 ‘수박’ ‘내부 총질’로 낙인 찍힐까 주저하는 관망파가 많다는 얘기다.   거대 양당 기득권 체제의 안온함을 누리면서 새판짜기를 한다는 건, 사실 어불성설이다. 신민당 돌풍은 ‘정치 공학’이란 이름으로 둔갑한 탁상공론식 머리 굴리기로 나온 게 아니지 않는가. 정치를 바꾸고 독재를 끝내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신념과 용기의 결과물이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쫓기며 쪽방에 모여 토론을 벌이고, 인재를 찾아 정책과 공약을 고심한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며칠 전 태국 총선에선 40대 지도자 피타 림짜른랏이 이끄는 전진당이 압승을 거둬 20년 넘게 군부와 탁신 일가가 분점해 온 양강 구도를 무너뜨렸다. 태국은 입헌군주국이지만 군부가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신성한 존재인 왕이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는 이유로 영화 ‘애나 앤드 킹’의 상영이 금지되고 왕실을 비판하는 파일을 공유한 여성에게 45년 징역형을 때리는 나라다. 전진당은 여기에 정면으로 맞섰다. 성역시돼 온 왕실모독죄 폐지와 징병제 개혁을 당당하게 들고나와 변화를 갈망하는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54석의 군소 야당에서 일약 151석의 제1당에 올랐다. 연정 구성등 난제가 남아있지만 가위 선거혁명이라 할 만하다.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 이후에도 우리 정치는 길을 잃고 표류 중이다. 성장의 엔진 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청년실업, 살인적인 고물가와 부동산 가격, 자산 양극화와 부(富)의 편중, 성·계층·세대 갈등, 패자부활전 없는 숨막히는 정글사회가 내뿜는 독소로 나라가 중병을 앓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산율이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지만,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자신의 재선과 자당의 집권에만 관심이 쏠려있을 뿐이다. 총선이 가까워오면서 더욱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미 국민적·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정치적 인물들이 무슨 책방이다, 다큐멘터리다, 토크쇼다 하며 정치적 부활을 노린다. 두 걸음, 세 걸음 앞으로 내달려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신파극인가. 그들이 부활하면 국민들 삶이 지금보다 나아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국민들 염장 지르는 뻔뻔한 일들이 벌어지니 아직 무르익지 않은 신당 논의가 벌써 주목을 받는다.   신당 운동의 성공 여부는 인재 영입에 달렸다.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는 위선, 권력자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무소신과 무능을 대체할 도덕성과 실력을 갖춘 세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다. 다행히도 한국은 ‘인재 부국(富國)’이다. 세계적 수준의 지식과 네트워크,도덕성과 전문성을 갖춘 고수들이 곳곳에 정말 많다. 삼고초려, 아니 십고초려를 해서라도 역량 있는 인재들을 앞세우고 이들의 경륜과 지혜를 빌리길 제언한다. 겉만 번지르르한 반짝 스타나 유명인을 영입인사로 포장하는 깜짝쇼는 수명을 다했다. 그런 방법으론 문제해결을 할 수 없다는 걸 이젠 모두 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당의 목표와 가치를 명확히 제시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비전과 정책을 하나씩 제시할 때 국민들의 신뢰가 쌓일 것이다. 학자금 무이자 대출 같은 포퓰리즘 선동이 아니라 청년들의 앞길을 열어줄 수 있는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해법 마련부터 고민하라는 것이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합리적 방안을 제시해 실력을 보이라는 것이다. 쉬운 길이 아니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민심에 조응하려는 열정과 진정성을 국민들이 인정하고 대안세력으로 여긴다면 정치판을 바꿀 수 있다.   이런 노력 없이 공천에 밀려난 낙천자들이나 자리 욕심으로 정치권을 기웃대는 낭인들끼리 헤쳐모여 하는 신당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모험을 감행할 강단과 용기 없이 얄팍한 정치공학만을 앞세운 신당 운동이라면 접는 게 낫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2023.05.20 00:28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비호감 정치에 혐오는 최고조, 제3세력은 안 보여

     ━  2024년 총선, 신당 바람 불까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한국 정치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을 두 축으로 한 양당 체제로 고착화했다. 양당 구도를 깨려는 제3신당 실험도 여러 번 있었다. 그간 숱한 신당이 명멸했다.   제3신당 실험에 대한 정치사적 평가는 잠시 접어두자. 주목할 점은 선거 때면 제3지대 신당론이 출현하는 현실이다. 견고해 보이지만 틈새가 갈라져 있거나 지층이 불안정하다는 반증이다. 지난 경험에서 보듯, 작은 균열이라도 분출한 선거 민심과 결합하면 예측 불허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금태섭 1년이 채 남지 않은 22대 총선(2024년 4월 10일). 이번엔 ‘금태섭(전 민주당 의원) 신당론’이 대두했다. “수도권 30석”이 목표라지만 현재로선 미풍도 느껴지지 않는다. 신당의 필요조건이랄 수 있는 ▶걸출한 리더 ▶정책과 비전 ▶새 인물 수혈이 보이지 않는다. 공염불로 끝날지 모른다.     ■  「  ‘적대적 공생’ 양당 체제에 불신 “제3세력 나오면 지지받을 것”   여야 현역들, 온실 안주하려 해 “강성팬덤 있는 게 선거엔 유리”   편가르기 정치에 새 바람 일까 총선 끝난 뒤 신당 출현 전망도 」    그러나 “비호감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불신이 임계점에 달하고 있어 믿을만한 제3세력이 나오면 민심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윤여준 전 의원)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국민의 삶과 유리된 채 정치 생명 연장만을 노린 포퓰리즘, 위선과 비리, 증오와 혐오를 퍼 날라 재생산하는 편가르기 정치에 자정 능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높다. 지성과 합리를 밀어내고 정치를 양극단으로 내모는 광풍 정치, 강성 팬덤 현상도 제3의 정치세력 출현을 재촉하는 요인이다. 2024년 총선, 과연 제3당 실험은 성공할까.   TK 석권한 자민련, 호남 휩쓴 국민의당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역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제3신당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통일국민당(14대 총선 31석), 고 김종필(JP) 총리의 자유민주연합(15대 총선 50석),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20대 총선 38석)이다. 대선주자급의 정치 리더가 깃발을 들고 지역 맹주나 명망가들이 가세해 성공한 경우다.   ‘반값 아파트’를 대표 공약으로 내세운 통일국민당은 민생을 파고드는 실용주의로 기성 정치권과 차별화했고,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계와 갈등하던 JP는 이른바 ‘원조 보수론’을 앞세워 충청과 TK(대구·경북)를 공략했다. 안철수 의원은 ‘새 정치’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어 바람을 일으켰다.   자민련과 국민의당은 위력적이었다. 거대 양당의 핵심 지지기반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자민련은 충청은 물론 수도권과 강원에서도 당선자를 냈고, 특히 비(非) YS 정서가 팽배했던 TK를 집중 공략해 대구 지역구 13석 중 8석을 석권했다. ‘원조 보수’라는 프레임에 걸맞은 박준규·박철언 전 의원 같은 TK 거물들을 결합한 전략이 먹혀들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새정치+호남’ 연합군의 승리였다. 김한길·박지원·정동영 전 의원 등 문재인 세력과 갈등하던 동교동계와 호남 중진들이 분당(分黨)해 호남 지역구 28석 중 23석을 거머쥐는 이변을 낳았다. 정당 비례대표 투표에선 제1당 민주당(25.5%)보다 높은 26.7%를 득표했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씨는 “국민의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호남의 지지뿐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의원 간 갈등과 진박감별사 사태, 공천 파동으로 새누리당을 이탈한 중도와 보수까지 견인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양당 모두에서 동시 균열이 일어나고 ▶유명세가 있는 인물군이 가세했을 때 신당은 탄력을 받는다. 신당 성공의 방정식이다.   반면 2000년 민국당 사태는 이와 대비된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물갈이 공천’에 반발, 김윤환·조순·이기택 전 의원 등 공천 탈락한 중진들이 영남 기반의 신당을 창당했지만 영남에서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한 대참패로 끝났다. 한나라당이 ‘새 정치’ 명분을 선점한 데다 “민국당 찍으면 DJ 돕는 것”이란 정서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20대의 50%가 무당층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지난 대선 이후 무당층이 계속 늘어 30%(5월 둘째 주 조사 28%)에 육박하고 있다. 무당층은 평소엔 늘었다가 선거가 가까워져 오면 줄어들지만, 이번엔 2030, 특히 20대의 이탈이 급증한 게 특이점이다. 2022년 1월 평균 34%이던 20대 무당층은 꾸준히 늘어 지난달엔 53%에 달했다. 같은 기간 30대는 26%→36%로 증가했다. 허진재 한국갤럽 이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부터 지난 대선까지 높은 투표율을 보였던 20, 30대가 진보·보수 양당으로부터 지지를 철회한 상태”라며 “내 삶은 개선된 게 없고 정치는 오히려 더 후퇴해 양극단의 혐오를 만들어내는 데 실망해 불신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20대의 이탈이 신당의 동력으로 연결될지는 미지수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소장은 “지난 대선 땐 개딸(개혁의 딸)이나 이준석 키즈 등 20대가 조직화됐지만 지금은 오히려 파편화돼 있다. 이들이 집단화하려면 서로 공유할 정치적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선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며 부정적 전망을 내놨다. 또 “20대를 견인할 아이돌 같은 인기를 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라며 인물 부재를 지적했다.   과거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영남·호남 민심도 예전만 못하다. 국힘의 대구·경북(51%), 부산·울산·경남(40%) 지지율은 저조하다. 과거엔 대통령의 높은 인기가 집권당의 지지율을 견인했지만, 막 집권 1년을 넘긴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27~37%(지난 20주 통계)의 박스권에 갇혀 있다. 한국갤럽의 5월 둘째 주 조사에서 윤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는 응답은 대구·경북에서 52%, 부·울·경에선 당 지지율보다 낮은 37%였다. ▶안철수·이준석·나경원 사태에서 드러난 당내 민주주의 실종 ▶일방통행식 리더십과 줄세우기 ▶지지부진한 부패 수사와 무능으로 보수·중도 지지층이 이탈, 관망으로 돌아섰다는 게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민주당도 비슷하다. 70% 이상 높은 지지를 보이던 광주·전라의 민주당 지지율은 53%로 떨어졌다. 대장동, 돈봉투, 김남국 의혹 등 사법 리스크와 입법 폭주, 팬덤에만 의존한 이재명 체제에 실망한 탓이다.   “이재명 체제와 타협 정서가 더 커”   구심력보다 밖으로 튕겨 나가려는 원심력이 더 클 때 분당 사태가 벌어진다. 정치권에선 우선 이재명 체제를 주목한다. 이 대표가 사퇴하거나, 거꾸로 비 이재명계에 대한 공천 배제 등 잡음이 커질 경우 이탈 세력이 생길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유지하는 틀이 무너질 수 있다고 본다. “이재명 후보가 될까 봐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던 중도층의 선택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 내 기류는 다르다. 이재명 사퇴론이 고개를 들고 있지만 이탈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공천이 보장된다면 이 대표와 타협하는 쪽을 택할 의원들이 많다. 강성 팬덤이 선거에는 나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한 중진 의원은 설명했다. 이상민 의원도 “5% 중도를 얻으려다 5% 열성파를 잃을 수 있다는 게 대체적인 정서”라고 당내 기류를 전했다.   현재 수도권 121석 중 100석(83%)이 민주당 의원이다. “수도권 민심을 볼 때, 지금 구도가 나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민주당 현역 의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금 전 의원)는 분석이다. 현 구도를 깨려면 국민의힘이 개혁 공천을 해야 하지만, 좋은 인물군 발탁이 쉽지 않고 기성 정치인이 반발할 것이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신당 깃발을 앞세울 지역 맹주 혹은 중간 보스를 찾기 힘들어졌다는 것도 신당 창당엔 부정적 요인이다. 그간의 학습효과로 양당 모두 ‘모험’보다 ‘온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높아져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당 기대”   그래서 신당의 출현이 총선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재명 체제의 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비명계는 같이 못 갈 것이고, 패배하면 희망 없다고 본 세력들이 총선 후에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배종찬 소장)는 예측이다. 국민의힘이 패배할 경우 분당 수순을 밟게 될 수 있다.   신당론자들은 양당 체제에 대한 반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궤적을 살아온 민주적·합리적인 세력이 등장하면 기대를 모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금태섭 전 의원은 “과반수 득표한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으로 끝났고 통합정치의 기대를 걸었던 문재인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도 편가르기 정치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정치인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판타지가 식상해졌고 유권자도 이제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05.18 0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