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곤 프로필 사진

편집인

중앙일보 편집인
중앙일보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논설실장
브랜드기획실장
편집국장 대리
경제에디터
산업부장
경제정책부장
논설위원

응원
847

기자에게 보내는 응원은 하루 1번 가능합니다.

(0시 기준)

구독
84
  • [고현곤 칼럼] 그들만의 참호에 갇힌 윤석열 정부

    고현곤 편집인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경제부처 관료를 지낸 사람의 회고다. ‘우리 부처는 경기고-서울 법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었어요. 서울 법대 출신이 서울 상대를 우습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출근 첫날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더니 과장이 부르더군요. 출신 대학이 서울 상대일 텐데, ‘이응’ 받침을 빠뜨려 사대로 잘못 썼다는 겁니다. 사대가 맞다고 했더니 순간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왔느냐는 표정이었습니다. 평생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학벌을 유난히 따진 드림팀(?) 경제부처는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다.     ■  「 ‘학교공부 1등=세상 1등’은 큰 착각 지역 남녀 학교 다양해야 강한 조직 윤 대통령, 학벌·출신·인연 매달려 그걸 깨야 국정 운영도 바뀔 수 있어 」    학교 공부 1등이 모인다고 뭐든 잘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있으면 사고의 틀이 닮아간다. ‘우리가 최고’라는 집단 최면으로 현실에 안주한다. 학교 선후배로 얽혀 있어 ‘노’라고 하기도 어렵다. 어느 조직이나 학교, 지역, 남녀, 세대를 골고루 품어야 강해진다. 다양한 의견이 나오면서 최적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 특정 학교 출신이 몰려 있거나 지역색이 짙은 조직은 위기에 약하다. 기업 중에는 대우와 금호가 그랬다. 야구팀 1~9번을 홈런 타자로만 채우면 강팀이 될 수 없다. 대학도 타교 출신 교수를 많이 채용해야 학문의 폭이 깊어진다. 순종보다 잡종이 강한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가지 재주를 타고난다. 공부는 시원찮아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겸손, 배려, 책임감, 추진력, 감성…. 이런 덕목이 시험 문제 몇 개 더 푸는 ‘공부 머리’보다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숨은 재능을 만개하는 사람도 많다. 대학 간판 하나로 섣부르게 재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정부처럼 여러 분야를 다루는 조직에선 말할 것도 없다.   윤석열 정부는 처음부터 서울 법대와 검사 출신 일색이었다. 다들 걱정했지만, 대통령은 눈치 안 보고 이들을 중용했다. 권력이 영원할 것 같은 기세였다. 공부 1등이면 세상에서도 1등이라고 여겼는지 잘 모르는 분야까지 이들로 채웠다. 눈치 빠른 기업도 검사 출신을 늘렸다. 정부에 고시 붙은 사람, 갑의 지위를 누린 사람, 상명하복에 익숙한 사람이 모였다. 여기에 대통령이나 김건희 여사와 개인적 인연이 있는 사람이 더해졌다. 사시 공부를 같이했거나 일하다 만났거나 동창, 고향 친구까지. 철저하게 대통령 부부 중심의 아주 좁은 인재풀이었다. 대통령은 “인사 기준은 전문성이고, 학벌은 안 따진다”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설령 그렇더라도 국민이 불편하게 여기면 조심해야 했다.   정부가 대놓고 학벌과 출신, 인연을 따지자 국민은 새삼 절감했다. 우리 아이는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고. 사교육 열풍이 더 세졌다. 대통령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라고 지시했지만, 병 주고 약 준 셈이다. 학벌 우선 사회에서 뭐를 한들 사교육이 잡히겠나. 경쟁에 내몰릴 걸 생각하면 아이를 낳고 싶겠나.   똑똑한 사람이 모였다는 정부가 눈치 못 챈 게 있다. ‘그들만의 리그’를 지켜보면서 민심이 떠나고 있었다. 대통령 주변이 거대한 기득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기득권 타파를 꺼내 들면 ‘누가 누구를 탓하나’라는 반감이 들었다. 집권 초기부터 대통령 지지율이 30%대에 그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총선에서도 여당은 한동훈 비대위원장부터 출마자까지 검사 출신이 많았다. 그 와중에 대통령과 한 전 위원장의 사이가 틀어졌다. 온통 검사 출신만 보이는 게 못마땅하던 차에 다투기까지 하니 어처구니없었다. 총선은 처음부터 지고 들어간 싸움이었다.   민심 이반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통령은 연초부터 민생토론회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대통령은 “국민만 바라본다”고 했다. 잘 짜인 연출만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대파 875원 발언은 전후 맥락을 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일이 커진 건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자신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김 여사 명품백은 사과 시기를 놓쳤다. 이태원 참사도 행정안전부 장관 같은 고위층 누군가가 책임져야 했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면 앙금이 남는다. 국민은 벼르고 있다가 총선에서 표로 갚아줬다. 회초리 맞을 걸 피하다 몽둥이로 맞은 셈이다.   대통령은 2년 전 취임사에서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했다. 지금 대통령 주변의 모습 아닌가. 학벌, 출신, 인연으로 쌓은 참호에서 끼리끼리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은 건 아닌가. 총선 참패 후에도 대통령은 별로 바뀐 게 없다. 다음 날 56자짜리 성의 없는 대독에 이어 1주일 후 ‘비공개 사과’로 실망을 키웠다.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였다. 지지율이 23%까지 추락한 지난 주말,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낙선자를 만나 쓴소리를 듣겠다고도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 흔쾌하게 하는 건지 아직은 긴가민가하다. 왠지 궁여지책 같다.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참호를 확실하게 깨고 나와야 한다.     고현곤 편집인

    2024.04.23 00:45

  • [고현곤 칼럼] 의정 충돌에서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

    고현곤 편집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대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나흘 만인 6월 28일, 병원 앞까지 닥쳤다. 의료진은 부상자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치료를 계속했다. 얼마 안 가 북한군이 국군 저지선을 뚫고 병원에 난입했다. 부상자와 의료진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 9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의료진은 끌려갔다. 공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6·25 서울대 의대 학살사건이다. 추모비가 서울대병원에 있다.     ■  「 응급실 비운 의사 비난받아 마땅 디테일 없이 우격다짐, 정부도 문제 이념보다 뿌리 깊은 계층갈등 노출     애꿎은 국민만 각자도생 내몰려 」    이유야 어떻든 이번 의정 충돌에서 전공의가 응급실·중환자실·수술실을 떠난 건 유감이다.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곳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 환자를 등지는 모진 행태에 국민은 놀라고 실망했다. 환자를 내 가족이라고 여겼으면 그랬겠나. 중증·응급환자만이라도 번갈아 지켰으면 더 많은 응원을 받았을 텐데 아쉽다. 환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난주 방재승 전국 의대교수 비대위원장이 “국민 없이는 의사도 없다는 걸 잊었다”고 말했다. 사과가 너무 늦었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국민과 의사 사이에 쌓인 상처와 불신은 오래 남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의 발언은 도를 넘었다. 환자 곁에 남은 전공의를 조롱했다. “평생 박제해야 한다”는 식의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의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말했다. 우월감과 특권의식이 묻어나는 부적절한 발언이다. ‘겸손한 자가 강한 자’라는 진리를 모르는 모양이다. “이런 나라에 살기 싫어 용접을 배우고 있다” “포도 농사를 짓겠다” 같은 말이 쏟아졌다. 의사가 용접이나 포도 농사를 못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은 아니다. 당장 대한용접협회는 “의사들이 용접을 우습게 생각하는 듯하다”고 유감을 표했다.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의 치부인 계층·빈부 갈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념·지역·세대 갈등보다 뿌리 깊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더 심해졌다. 요새 사석에서 균형감을 잃고 과하게 의사 편을 드는 사람이 눈에 띈다. 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전공의가 혹사당한다. 차라리 잘됐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1년쯤 놀면 어떻냐”고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흥분해 의아했다. 환자 걱정은 관심 밖이었다. 다 이유가 있었다. 딸이 레지던트 2년 차였다.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온 나라가 이기심의 수렁에 빠졌다.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부의 일 처리는 서툴고 거칠다. 전략도, 홍보도 부족하다. 의대 증원은 오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안이다. 어떻게 풀지 정부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2000명 증원의 근거가 무엇인지, 실제로 현장에서 몇 명이나 더 가르칠 여력이 있는지, 뒤죽박죽 의료 수가는 어떻게 개선할지, 격무인 전공의의 노동인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정부가 디테일을 건너뛰고 덜컥 2000명 증원을 강행하는 바람에 반발이 커졌다. 너무 만만하게 봤거나, 무리하게 밀어붙였거나. 4대 필수의료 패키지는 증원 발표 불과 닷새 전에 나왔다. 좀 더 일찍 마련해 시간을 갖고 의료계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다급해진 정부가 이달에 전공의 처우개선 토론회를 잇따라 열었다. 그동안 뭐하다 이제 와서? 일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증원 규모도 복수 안을 놓고 그 흔한 공청회라도 열었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쉬쉬하다 군사 작전하듯 전격 발표했다. 단숨에 대학별 배정까지 마친 건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나라를 뒤집어 놓을 일인가. 처음에 정부는 지지율 상승에 내심 고무됐던 것 같다. 생각이 짧다. 환자가 불편해지면 정부가 욕을 먹게 돼 있다. 지지율이 꺾이고 사태가 심상치 않자 부랴부랴 유화 제스처를 보냈다. 정부의 실력이 딱 이 정도 아닌가 싶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노동·교육·연금 3대 구조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신년사 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2022년 대선 공약이었다. 정권 전반부, 개혁의 골든타임이 다 가도록 손도 못 댔다. 지난해 뜬금없이 “이념이 제일 중요하다”며 전선을 넓혔고, 국운이 걸린 듯 엑스포에 매달렸다. 잇따른 구설을 수습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의사 증원 하나 매끄럽게 못 풀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3대 개혁은 언감생심이다. 총선이 끝나면 새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이합집산이 벌어질 게 틀림없다. 정권의 힘은 갈수록 떨어진다. 국정관리 능력이 부족하고, 힘마저 빠진다면 무슨 수로 3대 개혁을 할 수 있겠나.   이번 사태는 의사도 잘못했고, 정부도 잘못했다. 양비론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국민을 불안하게 한 것만으로도 양측 모두 할 말이 없게 됐다. 사과부터 해야 한다. 의정 충돌을 중재할 만한존경받는 어른도, 정치인도 안 보인다. 섣불리 나섰다가 망신만 당할 분위기다. 그러는 사이 국민은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며 각자도생의 정글로 내몰렸다. 의지할 곳이 없다. 나라가 어수선하다. 고현곤 편집인

    2024.03.26 00:41

  • [세컷칼럼]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사외이사 유감

    관련기사 [고현곤 칼럼]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사외이사 유감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이유정 인턴기자  

    2024.02.29 23:00

  • [고현곤 칼럼]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사외이사 유감

    고현곤 편집인 사외이사를 본격 도입한 건 1998년 2월이다. 외환위기 직후였다. 기업의 민낯이 드러나자 대주주와 경영진의 전횡을 감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사회에 외부 전문가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했다. 이들에게 기업 내 야당 역할을 기대했다. 나라의 명줄을 쥐고 있던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사항이기도 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들 진지했다. 그해 9월 중앙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A사가 자금난을 겪는 계열사를 지원하려고 했다. 사외이사들이 주주에게 피해를 준다며 반대해 결국 지원은 무산됐다. 곳곳에서 경영진과 사외이사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요새는 드문 풍경이다. 지난해 100대 기업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반대표를 던진 것은 0.4%에 불과했다. ‘거수기’라는 오명이 따라 다닌다.     ■  「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 기업 감시 초심 잃고 경영진과 유착 지배구조 엉망, 정부 낙하산 악순환 3월 주총 줄대기 전 각자 돌아보길 」    처음에는 사외이사 보수가 많지 않았다. 급여를 주지 않는 기업도 있었다. 삼성·LG·현대차처럼 큰 기업이 활동비·자문비 명목으로 월 200만원 남짓 지급했다. 포스코는 매달 한 차례 이사회 때마다 50만원의 거마비를 지급했다. 연봉으로 치면 600만원. 지금은 평균 연봉 1억500만원. 화폐가치가 떨어진 점을 감안해도 격세지감이다. 사외이사 연봉 1억원 넘는 기업이 삼성전자·SK·SK텔레콤 등 13곳에 달한다. 이쯤 되면 부업인지, 본업인지 헷갈릴 정도다.   방만한 경영을 막기 위해 사외이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던 교수들이 그 자리를 꿰찼다. 98년 3월 서울대가 사외이사 겸직을 허용했다. 처음엔 무보수에 한해서였다. 절제된 맛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대 전임 교원 중 9.4%(215명)가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물론 보수를 받는다. 교수들은 사외이사 소득 일부를 학교발전기금으로 낸다. 서울대가 거둔 돈만 지난 4년간 35억원. 대학과 교수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구조다. 관료들도 현직에서 물러나면 사외이사 자리부터 알아본다. 노후 대책으로 이만 한 게 없다.   인맥을 총동원해 기업에 줄을 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기업이 갑이 돼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고른다. 적당한 간판에 까다롭지 않은 사람을 환영한다. 바람막이나 대외 로비에 활용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교수와 관료·법조인이 기형적으로 많은 이유다. 지난해 100대 기업 사외이사 457명 중에 42%가 교수다. 기업인은 19%, 관료 15%, 법조인 13%다. 4대 금융지주·은행(KB·하나·우리·신한)은 교수가 특히 많다. 사외이사 50명 중 36명이 교수다.   56년 사외이사를 가장 먼저 도입한 미국은 정반대다. 사외이사의 80~90%는 풍부한 사업 경험을 가진 전문경영인이다. 경쟁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을 영입한다. 미국 기업 절반은 사외이사에 교수가 한 명도 없다. 이사회는 긴장감이 흐른다. 지난해 오픈AI 이사회가 ‘챗GPT의 아버지’ 샘 올트먼 CEO를 전격 해임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세상을 놀라게 한 쿠데타였다.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도 자기가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이사회 결정의 잘잘못을 떠나 우리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국내에서 끝판왕은 포스코, KT, KT&G, 금융지주 등 ‘주인 없는 기업’의 사외이사다. 회사별로 차이는 있으나 업계의 정설은 이렇다. 회장은 가까운 사람을 사외이사로 앉히고, 최고의 대우를 해 준다. 사외이사는 회장의 연임을 돕는다. ‘셀프 연임’에 성공한 회장은 다시 사외이사를 연임시킨다. 회장이 물러날 때는 배신하지 않을 측근을 후임 회장에 앉히기도 한다. 견제도 받지 않는다. 명실공히 ‘그들만의 기득권 카르텔’이다. 기업 지배구조가 떳떳하지 못하니까 정부가 만만히 보고 ‘낙하산 인사’를 내리꽂는 것 아닌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기도 하다.   포스코는 지난해 8월 캐나다 호화 이사회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1주일 동안 이사회는 딱 한 번 열었다. 나머지는 전세 헬기를 타고 시찰, 관광, 골프로 6억8000만원을 썼다. 강심장이다. 최정우 회장이 3연임을 노리던 중이었다. 후임 회장을 뽑는 사외이사 7명이 참여했다. 물의를 빚자 사외이사 측은 “새 회장을 뽑는 중요한 시기에 후보추천위원회의 신뢰를 떨어뜨려 이득을 보려는 게 아닌가”라고 맞받아쳤다. 사과도, 사퇴도 없다. 회사 내에선 “병당 120만원짜리 와인을 곁들인 게 화근”이라는 말이 나온다. 최고급 와인을 먹는 바람에 재수없게 걸렸다는 건가. ‘사심 없이 헌신하라’는 박태준 초대 회장의 창업 정신은 온데간데없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세운 기업에서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회사에 손실을 끼쳤는지 철저히 수사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후임 회장은 뒤틀린 이사회부터 바로잡기 바란다.   3월은 12월 결산법인의 주총 시즌이다. 사외이사 시장도 큰 장이 섰다. 사외이사의 세 가지 자격 요건은 전문성·독립성·도덕성이다. 올봄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막판 줄대기에 바쁜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격을 갖췄는지 돌아봤으면 한다. 초심을 잃고 변질된 사외이사야말로 개혁 대상이다. 고현곤 편집인

    2024.02.27 00:38

  • [세컷칼럼] 닥치고 가덕도

    동남권 신공항을 처음 꺼낸 건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이듬해 이명박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받았다가 2011년 백지화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시 후보지 세 곳을 평가했다. 가덕도는 꼴찌였다. 파리공항공단 측은 김해신공항 818점, 밀양 665점, 가덕도 635점을 줬다. 장마리 슈발리에 수석연구원은 “가덕도는 국토 남쪽 끝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고 건설비가 많이 든다. 공항 입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시 군불을 땠다. 김해신공항을 흠집 내더니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둔 2021년 느닷없이 가덕도로 바꿨다. 1등(김해)이 문제 있다며 2등(밀양)을 건너뛰고, 3등(가덕도)으로 직행했다. 기이한 결정이었다.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는 특별법을 만들어 대못을 박았다. 부산 표를 구걸하는 야당(국민의힘)이 합세했다. 일사천리의 진풍경이었다. 예타 면제는 두고두고 나쁜 선례로 남았다. 지난주 통과한 ‘달빛철도특별법’도 가덕도의 아류다.   ■  「 부산 표 구걸…여야 합작 ‘정치공항’ 활주로 1개 13조, 김해공항의 세 배 무리한 공기 단축, 부등침하 우려 엑스포 없는데 조기 개항해야 하나 」     지난해 3월 윤석열 정부는 2030 부산엑스포전에 개항하겠다며 공사 기간을 5년6개월이나 앞당겼다. 마음만 먹으면 뚝딱 줄일 수 있는 건지 의아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당초 안은 바다에 짓는 것이었는데, 바다와 육지에 걸쳐 짓는 공법으로 바꿨다. 매립 규모가 줄면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 꼴찌인 가덕도에, 공법도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누더기가 됐다. 활주로 달랑 1개의 여야 합작 ‘정치공항’이 탄생하는 것이다.    가장 큰 논란은 안전 문제다. 특별법 처리 당시 국토부는 “진해 비행장과 공역이 중첩되고, 김해공항 관제 업무가 복잡해져 안전사고 위험이 증가한다. 수심이 30m에 이르고 태풍이 지나는 길목”이라고 지적했다. 활주로 1개로는 화재 등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 부등침하(땅이 불균등하게 가라앉는 현상) 우려도 있다. 2022년 사전타당성조사 연구진은 “바다~육지 공항은 지반의 지지력 차이가 커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바다 쪽 활주로가 육지 쪽 활주로보다 많이 가라앉을 수 있다는 의미다.    난공사로 비용도 많이 든다. 김해공항 확장에 4조7000억원이 필요하다. 가덕도는 세 배인 13조5000억원. 활주로를 1개 추가하면 7조원이 더 든다. 도로와 공항철도, 해상여객터미널 건설비는 별도다. 외항에 짓는 만큼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실제 사업비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가덕도의 비용 대비 편익 비율은 0.58이다. 공항을 지어서 얻는 편익이 비용의 절반에 그친다. 경제성으로 따지면 지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원안대로 김해공항을 확장하고, 남는 세금은 어려운 이웃 돕는 데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이용객은 불편하다. 부산에서 가덕도는 김해공항보다 멀다. 활주로 1개로는 국내선이 들어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국제선은 가덕도, 국내선은 김해공항으로 이원화된다. 항공사는 비용이 증가한다. 공항이 불편하고 비싸면 흥행이 안 된다. 텅 빈 활주로에 고추를 말리는 전남 무안공항처럼. 이미 웬만한 수요는 인천공항 2여객터미널과 서울~부산 KTX가 흡수했다. 자칫 부산 시민은 들러리 서고, 가덕도 인근 땅 주인과 관련 업자만 배 불리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사정을 잘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러는 사이 가덕도 시계는 돌아간다. 지난해 말 기본계획을 고시했고, 올해 5000억원 넘는 예산을 편성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담당 공무원이 직무유기로 검찰에 불려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보수·진보가 모처럼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인들은 표만 생각한다. 문제점에 눈 감고, 지역에 장밋빛 환상을 심었다. 문 전 대통령은 특히 노골적이었다. 2021년 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가덕도 앞바다에서 “신공항 예정지를 눈으로 보니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별반 차이가 없다. 지난해 12월 엑스포 불발 1주일 만에 부산을 찾았다. “지역 현안 사업은 그대로 더 완벽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개항을 무리해 가며 5년 이상 앞당긴 건 엑스포 때문이었다. 유치에 실패하니 이번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기 개항을 밀어붙인다. 어처구니없는 악순환이다. 촉박한 엑스포 시간표가 없어진 만큼 안전과 비용을 따져 다시 검토하는 게 맞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한술 더 떴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정부가 가덕도를 국내 공항 정도로 대폭 축소해서 땜질한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스타일의 저열한 비방이다.    젊은 정치인도 오십보백보다. 2021년 7월 당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가덕도 특별법은 우리 당이 앞장서 입법했다”고 자랑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최근 부산을 찾아 “조기 개항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기존 정치와 선을 긋고,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면서 똑같은 구태 정치를 한다. 다들 자기 장사와 표 계산에 바쁘다. 세금을 자기 돈처럼 아껴 쓰고, 자신보다 나라의 앞날을 더 걱정하는 지도자가 안 보인다. 좌우, 신구를 막론하고.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심혜주 인턴기자 

    2024.02.01 23:00

  • [고현곤 칼럼] 닥치고 가덕도

    고현곤 편집인 동남권 신공항을 처음 꺼낸 건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이듬해 이명박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받았다가 2011년 백지화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시 후보지 세 곳을 평가했다. 가덕도는 꼴찌였다. 파리공항공단 측은 김해신공항 818점, 밀양 665점, 가덕도 635점을 줬다. 장마리 슈발리에 수석연구원은 “가덕도는 국토 남쪽 끝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고 건설비가 많이 든다. 공항 입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시 군불을 땠다. 김해신공항을 흠집 내더니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둔 2021년 느닷없이 가덕도로 바꿨다. 1등(김해)이 문제 있다며 2등(밀양)을 건너뛰고, 3등(가덕도)으로 직행했다. 기이한 결정이었다.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는 특별법을 만들어 대못을 박았다. 부산 표를 구걸하는 야당(국민의힘)이 합세했다. 일사천리의 진풍경이었다. 예타 면제는 두고두고 나쁜 선례로 남았다. 지난주 통과한 ‘달빛철도특별법’도 가덕도의 아류다.     ■  「 부산 표 구걸…여야 합작 ‘정치공항’ 활주로 1개 13조, 김해공항의 세 배 무리한 공기 단축, 부등침하 우려 엑스포 없는데 조기 개항해야 하나 」    지난해 3월 윤석열 정부는 2030 부산엑스포전에 개항하겠다며 공사 기간을 5년6개월이나 앞당겼다. 마음만 먹으면 뚝딱 줄일 수 있는 건지 의아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당초 안은 바다에 짓는 것이었는데, 바다와 육지에 걸쳐 짓는 공법으로 바꿨다. 매립 규모가 줄면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 꼴찌인 가덕도에, 공법도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누더기가 됐다. 활주로 달랑 1개의 여야 합작 ‘정치공항’이 탄생하는 것이다.   가장 큰 논란은 안전 문제다. 특별법 처리 당시 국토부는 “진해 비행장과 공역이 중첩되고, 김해공항 관제 업무가 복잡해져 안전사고 위험이 증가한다. 수심이 30m에 이르고 태풍이 지나는 길목”이라고 지적했다. 활주로 1개로는 화재 등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 부등침하(땅이 불균등하게 가라앉는 현상) 우려도 있다. 2022년 사전타당성조사 연구진은 “바다~육지 공항은 지반의 지지력 차이가 커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바다 쪽 활주로가 육지 쪽 활주로보다 많이 가라앉을 수 있다는 의미다.   난공사로 비용도 많이 든다. 김해공항 확장에 4조7000억원이 필요하다. 가덕도는 세 배인 13조5000억원. 활주로를 1개 추가하면 7조원이 더 든다. 도로와 공항철도, 해상여객터미널 건설비는 별도다. 외항에 짓는 만큼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실제 사업비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가덕도의 비용 대비 편익 비율은 0.58이다. 공항을 지어서 얻는 편익이 비용의 절반에 그친다. 경제성으로 따지면 지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원안대로 김해공항을 확장하고, 남는 세금은 어려운 이웃 돕는 데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이용객은 불편하다. 부산에서 가덕도는 김해공항보다 멀다. 활주로 1개로는 국내선이 들어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국제선은 가덕도, 국내선은 김해공항으로 이원화된다. 항공사는 비용이 증가한다. 공항이 불편하고 비싸면 흥행이 안 된다. 텅 빈 활주로에 고추를 말리는 전남 무안공항처럼. 이미 웬만한 수요는 인천공항 2여객터미널과 서울~부산 KTX가 흡수했다. 자칫 부산 시민은 들러리 서고, 가덕도 인근 땅 주인과 관련 업자만 배 불리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사정을 잘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러는 사이 가덕도 시계는 돌아간다. 지난해 말 기본계획을 고시했고, 올해 5000억원 넘는 예산을 편성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담당 공무원이 직무유기로 검찰에 불려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보수·진보가 모처럼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인들은 표만 생각한다. 문제점에 눈 감고, 지역에 장밋빛 환상을 심었다. 문 전 대통령은 특히 노골적이었다. 2021년 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가덕도 앞바다에서 “신공항 예정지를 눈으로 보니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별반 차이가 없다. 지난해 12월 엑스포 불발 1주일 만에 부산을 찾았다. “지역 현안 사업은 그대로 더 완벽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개항을 무리해 가며 5년 이상 앞당긴 건 엑스포 때문이었다. 유치에 실패하니 이번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기 개항을 밀어붙인다. 어처구니없는 악순환이다. 촉박한 엑스포 시간표가 없어진 만큼 안전과 비용을 따져 다시 검토하는 게 맞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한술 더 떴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정부가 가덕도를 국내 공항 정도로 대폭 축소해서 땜질한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스타일의 저열한 비방이다.   젊은 정치인도 오십보백보다. 2021년 7월 당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가덕도 특별법은 우리 당이 앞장서 입법했다”고 자랑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최근 부산을 찾아 “조기 개항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기존 정치와 선을 긋고,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면서 똑같은 구태 정치를 한다. 다들 자기 장사와 표 계산에 바쁘다. 세금을 자기 돈처럼 아껴 쓰고, 자신보다 나라의 앞날을 더 걱정하는 지도자가 안 보인다. 좌우, 신구를 막론하고. 고현곤 편집인

    2024.01.30 00:52

  • [고현곤 칼럼] 육영수 여사가 생각나는 새해 아침

    고현곤 편집인 1968년 7월 3일 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물난리가 났다. 잠원동 주민 300여 명이 신동초등학교에 긴급 대피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폭우 속에 황토물 교정을 철벅철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 밤중에 누굴까?” 그는 교사 안으로 들어오며 머리를 감쌌던 흠뻑 젖은 수건을 벗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사님 아냐?”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육영수 여사는 “여러분 얼마나 고생 많으세요”라고 인사한 뒤 가져온 구호 물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나룻배를 타고, 발목까지 빠지는 흙탕길을 고무신 차림으로 걸어서 그곳까지 온 것이다.   그해 호남은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 현장을 찾은 육 여사는 논두렁길로 걸어갔다. 말라 타버린 논 구석에 양수기가 있었다. 올라서서 양수기를 밟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뒤덮인 빈 양수기가 쩍쩍 소리를 냈다. 그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다가갔다. 육 여사는 울먹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사람들을 어떡하지….”   육 여사는 소리소문 없이 봉사와 선행에 힘썼다. 보육원, 양로원 등 사회의 그늘진 곳을 보살폈다. 67년 말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정부·여당 송년회에 육 여사가 불참했다. 의아해하는 참석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집사람은 보육원에 가느라 못 왔다”고 실토하는 바람에 모두 아무 말을 못 했다. 육 여사가 만든 사회봉사단체 양지회는 전국 87개 나환자촌 지원의 대명사였다. 그는 한센인들을 찾아가 손을 덥석 잡고, 고구마를 나눠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육 여사는 검소했다. 이애주 전 의원의 증언. 육 여사가 흉탄에 스러진 74년 8월 15일 서울대병원 간호사였다. “서거하신 후 유품을 정리하는데, 글쎄 한복 속옷을 기워 입으셨더라고요. 알뜰하고 소박한 성품을 생각하며 유품 앞에서 다시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남들이 화려한 자리라고 부러워하는 대통령 부인이지만, “청와대는 항상 중류 살림을 하자”며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비싼 옷을 입는 일이 없었다. 청와대에는 그 흔한 꽃꽂이도 못 하게 했다. 박 대통령은 육 여사 서거 후 이렇게 회고했다. “살아생전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다들 가난하게 산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비슷한 시기,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는 사치 행각을 벌였다. 명품 구두만 3000켤레가 넘었다. 육 여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의 부인이었지만.     ■  「 한복 속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 권력 누린다는 원성 살까 봐 늘 조심 조용히 봉사 선행, 온 국민 존경받아 육 여사 같은 영부인 또 볼 수 있을까 」  그는 사려 깊고 겸손했다. 가수 이미자씨 레코드판 한 장을 산 것이 알려진 후 가게에 들른 적이 있었다. 한 직원이 “영부인님, 이것도 사주세요”하고 물건을 내놓았다. 육 여사가 “근혜 엄마라고 하면 몰라도 영부인이라고 하니까 깎지도 못하겠네요”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웃긴 적이 있다. 김두영 전 청와대 2부속실 비서관의 증언. “육 여사는 권력을 즐기는 행세로 국민의 원성을 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늘 조심했다. 오만하게 보일까 봐 행사장에서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을 정도였다.”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았다. 국가의 대소사와 인사는 대통령의 영역이라 판단해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소소한 민원 처리는 자기 일이라고 여겼다. 매일 50여 통의 민원 편지를 뜯어보고 답장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내 앞으로 온 편지는 절대 손대지 마라”고 하고, 민원을 직접 챙겼다. 도봉동 토굴 속에 산다는 어느 소년의 편지를 읽고는 주소도 모르는 그곳 일대를 직접 뒤졌다. 기어이 소년을 만나고는 아이스크림 장사에 필요한 장사 밑천을 대준 일도 있었다.   잡음이 나지 않도록 주변을 늘 단속했다. 청와대 내 야당을 자처해 대통령이 알아야 할 일은 직접 전달했다. 한 번은 박 대통령 친척이 운전하다 사망사고를 냈다. 다들 쉬쉬하고 덮으려고 했는데, 육 여사가 그 소식을 대통령에게 전하는 바람에 그 친척은 구속됐다. 김종필 전 총리는 회고록에 “국민에게 퍼스트레이디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처음으로 알린 분”이라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에게 저항하던 사람들도 육 여사의 인품에는 고개를 숙였다.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은 육 여사 영결식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심은 평화와 사랑의 씨가 자라 그 꽃을 피우게 해 달라.” 김 추기경은 훗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국모(國母)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분”이라고 썼다. 서슬 퍼런 독재 시절, 박 대통령의 철권(鐵拳) 이미지를 육 여사가 절묘하게 보완한 셈이다. 서거한 74년을 기점으로 박정희 정권이 서서히 무너진 건 우연이 아니다.   그 뒤 대통령 부인이 여럿 나왔다. 이희호 여사처럼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훌륭한 분도 있었다. 하지만 육 여사만큼 온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품격 있게 대통령 부인 역할을 잘 해낸 인물은 없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육 여사가 생각나는 2024년 새해 아침이다. 고현곤 편집인

    2024.01.02 03:09

  • [고현곤 칼럼] 엑스포 실패에서 생각해볼 것

    고현곤 편집인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전이 참패로 끝났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몇 가지 짚어볼 게 있다. 무엇보다 엑스포 유치에 국가의 에너지를 너무 썼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것처럼 집착한 건 이해할 수 없다. 애초에 승산이 적은 싸움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32년 건국 100주년이다. 왕실 권력 다툼 끝에 집권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왕위 계승을 전후해 국민에게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 그 일환으로 1조 달러 이상 들여 세계 최대 스마트시티(네옴시티)를 계획했다. 100주년 즈음해 2027 동계아시안게임, 2030 엑스포, 2034 월드컵·하계아시안게임 같은 국제대회를 쓸어담는 것도 같은 이유다. 돈이 남아돌아 오일머니를 뿌리는 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다.     ■  「 승산 적은 싸움에 정부·기업 총동원 디지털시대, 엑스포 경제 효과 의문 2025년 오사카도 흥행 부진 먹구름 유치 못한 게 어쩌면 다행일 수도 」    손자병법에 나와 있듯 상대가 강하면 피해 가는 게 현명하다(强而避之, 강이피지).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성과를 내려고 조급했거나 잘못된 정보로 오판했던 것 같다. 대통령에게 보고가 제대로 됐는지도 의문이다. 도중이라도 버겁다고 판단했으면 세련되게 발을 뺐어야 했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정부가 끝까지 이길 것처럼 밀어붙여 의아했다. 실패했을 때의 출구전략도 딱히 없어 보였다. 우리가 모르는 비장의 카드가 있는 줄 알았다. 뚜껑을 열어 보니 별게 없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이 과도하게 동원됐다. 과거에도 몇몇 기업이 국제대회 유치에 앞장섰지만 이번처럼 4대 그룹, 10대 그룹 하는 식으로 죄다 나선 건 이례적이다. 분초를 아껴 써야 하는 대기업 회장들이 사업을 뒤로한 채 대통령을 따라다녔다. “회장이 올해 회사 일보다 엑스포 때문에 해외 출장 다닌 게 더 많다”(모 대기업 관계자). 단순히 한국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애국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회장들은 대부분 고민과 약점이 있다. 사업 부진, 인수합병, 승계 같은 현안이 있다. 이런저런 재판도 진행 중이다. 문재인 정부와 가깝게 지낸 죄(?)로 잔뜩 얼어 있는 기업도 있다. 정부에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 대통령이 ‘나를 따르라’고 하면 만사를 제쳐둘 수밖에 없다. 재계에선 “회장들끼리 함께 해외를 다니면서 친해진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라는 말이 나온다.   더 근본적인 의문은 엑스포가 온 나라가 매달릴 정도로 경제 효과가 크냐는 점이다. 과거 엑스포는 각국이 한데 모여 산업·과학기술 성과를 알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지금은 디지털의 발달로 굳이 모이지 않고도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필요한 것을 얻는다.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국경의 개념도 사라지고 있다. 정부가 판을 깔아주지 않아도 기업·개인이 할 수 있는 게 많다. 엑스포 같은 국가 대항전 성격의 오프라인 행사는 매력이 줄었다.   2025 일본 오사카 엑스포도 위기다. 2018년 러시아를 제치고 유치했을 때만 해도 경제 효과가 2조 엔(약 18조원)이 넘는다며 축제 분위기였다. 개막 1년여를 앞둔 지금은 사뭇 다르다. 50여 개국이 자국 부담으로 전시관을 짓겠다고 했으나 실제 건설에 착수한 곳은 한국과 프랑스·룩셈부르크 등 손에 꼽힌다. 멕시코·러시아·에스토니아처럼 자국 정치 상황, 비용 문제로 불참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행사장 건설비는 2018년 1250억 엔에서 최근 2350억 엔으로 두 배로 뛰었다. 그사이 자재비와 인건비가 많이 올랐다. 건설비를 3분의 1씩 내야 하는 중앙정부와 오사카 지방정부, 재계 모두 근심이 깊다. 재계는 “기부금을 더 모으기 어렵다”며 난색이다. 기업들은 엑스포 입장권을 수만~수십만 장씩 떠안는다.   일본 여론은 싸늘해졌다. 경제 효과가 불투명한 데다 늘어난 비용을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결국 국민 부담이다. 고령층 의료 등 돈 쓸 곳이 많은데 일회성 행사에 재정을 쏟아붓는 게 맞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달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오사카 엑스포가 ‘필요 없다’는 응답이 68%에 달했다. 사회학자인 요시미 신야 도쿄대 교수는 “이제 일본에서 올림픽도, 엑스포도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런데 국내 연구기관들은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면 일자리 50만 개를 창출하고, 61조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전망했다. 근거가 약하다. 5050만 명이 엑스포를 찾을 것이란 예측도 수긍하기 어렵다. 밀라노(2015년)·두바이(2021년) 엑스포는 방문객이 2000만 명대 초반이었다. 오사카 엑스포는 2820만 명(외국인 350만 명 포함)을 기대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다. 일본 인구의 절반이 안 되는 한국에서 오사카의 두 배 가까운 방문객은 무리다. 게다가 2030년이면 65세 이상 고령층이 130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한다. 엑스포 구경 다닐 사람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얘기다. 행사 후 관련 시설을 어떻게 활용할지의 고민도 고스란히 남는다.   정부가 엑스포 유치에 공들일 시간에 연금·노동·교육 3대 개혁이나 저출산 문제에 매진했으면 지금쯤 뭐라도 진전이 있지 않았을까. 엑스포를 유치하지 않고, 여기서 멈춘 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고현곤 편집인

    2023.12.01 00:47

  • [세컷칼럼] 금융·통화정책의 뼈아픈 실책

    “원화 환율이 떨어지고, 주가가 다시 오릅니다. 물가는 2%대에서 안정을 찾아가고요.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더 좋아질 겁니다. 경제 체력이 예전과 다릅니다. 별일도 아닌데, 위기라고 호들갑 떨던 사람들 요새 쑥 들어갔네요.”    올봄에 만난 한 고위 관료는 호기롭게 말했다. 내심 그는 ‘내년 4월 총선까지 이대로’를 그렸을 것이다. 섣부른 낙관이었다. 3분기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6%. 마이너스 성장을 겨우 모면했다. 중동 사태까지 겹쳐 10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3.8%까지 치솟았다. 거의 모든 게 비싸졌다. 금융시장은 살얼음판이다. 언제 요동쳐도 이상하지 않다. 물가 불안과 저성장이 누적되면서 체감 경기는 하반기에 더 나빠졌다.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물가 상승) 우려도 커진다.   ■  「 집값·가계대출 겨우 잡히던 차에 정부 주도로 대출 완화…투기 불러 금리 동결도 시장에 잘못된 신호 물가안정 우선, 돈 풀면 위기 올 것 」   정부의 지나친 자신감은 뼈아픈 실책을 불렀다. 올 초 집값 급락을 막겠다며 정책자금인 특례보금자리론 40조원을 풀었다. 이 조치는 ‘부동산은 지금이 바닥’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시장에 보냈다. 내 집 마련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젊은이들이 빚을 내 집을 샀다. 소득 제한을 두지 않는 바람에 부유층도 이 대출을 받았다. 고금리 경기침체 시기에 부동산 투기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정부 주도로.    대출 규제를 푸니 쾌재를 부른 건 은행이다. ‘이자 장사’ 말고는 별다른 재주가 없는 은행들이 기다렸다는 듯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내놓았다. 가계대출은 4월 이후 매달 2조~7조원씩 늘었다. 9월 말 가계대출은 1877조원, 기업 대출 1238조 원, 정부부채 1100조원을 넘었다.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 4000조원 넘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셈이다.    정부는 정책 실패를 인정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은행이 느슨해진 대출을 걱정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한은은 서민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리한 대출이 서민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을 간과한 발언이다. 아니면 책임을 피하는 데 급급하거나.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과거 정부에서 유행한 영끌 대출·투자는 정말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정부가 앞장서 대출을 풀어 놓고 이제 와서 위험하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 현재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굳이 과거 정부의 잘못을 끌고 들어갈 필요가 있었나 싶다.    한은 통화정책도 ‘돈을 더 조이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준다. 한은은 지난 1월 기준금리를 3.5%로 올린 뒤 10개월째 동결했다. 그사이 미국은 기준금리를 4.5%에서 5.5%로 올렸다. 미국 기준금리는 한국보다 2%포인트나 높다. 정상은 아니다. 과거에는 한·미 금리 차가 1%포인트만 나도 걱정이 컸다.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원화 환율이 오르고 물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최근 위기감이 무뎌졌다. 다른 경제 관료의 말. “한국 경제가 커져서 미국과 2%포인트 금리 차에도 별 영향 없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한·미 금리 차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강조해 왔다. 안심해도 될까. 금리를 제때 올리지 않는 바람에 한·미 금리 차가 역전된 기간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세 번 있었다. 그때마다 큰일이 터졌다. 김대중 정부 1999~2001년(1.5%포인트 차)의 과잉 유동성 후유증으로 닷컴 버블과 카드 대란을 겪었다. 노무현 정부 2005~2007년(1%포인트 차)과 문재인 정부 2018~2020년(0.75%포인트 차)에는 부동산이 치솟았다. 그 여파로 노·문 두 정부는 대선에서 지고 정권을 잃었다.    “7%대 금리 시대에 대비하라”(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는 경고가 나올 정도로 미국은 고금리 기조에 변함이 없다. 미국이 긴축을 이어가면 우리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 애써 외면하면 시장금리는 따로 움직인다. 이미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중 최고 수준인 4%대에 진입했다. 기준금리와 시장금리의 괴리가 커질수록 통화정책에 불신이 쌓인다. 세수 부족과 적자 누적으로 재정정책이 마비된 상태에서 통화정책마저 고장 나면 정부가 쓸 카드가 없다. 총선을 앞두고 ‘공매도 금지’ 같은 무리한 단발성 대책에 매달리는 처지가 된다.    이 총재가 좀 더 강단 있게 처신했으면 한다. 예전 한은 총재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아 ‘양치기 소년’이라는 조롱을 들었다. 이 총재도 언제부턴가 발언의 무게감이 떨어진다. 지난달 “가계 부채가 안 잡히면 금리 인상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름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지만, 시장은 시큰둥하다. 그가 뭐라 말하든 결국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최우선 과제는 물가 안정이다. 집값도 더 떨어져야 한다는 확실한 신호를 줘야 한다. 미국 연준(Fed)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움직인다. 올해 정부와 한은이 정상적인 금융·통화정책을 폈으면 집값이 뛰고,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돈줄 조이는 게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돈을 풀면 더 큰 고통이 따른다. 김대기 실장 말처럼 외환위기의 몇십 배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글 = 고현곤 편집인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2023.11.09 23:00

  • [고현곤 칼럼] 금융·통화정책의 뼈아픈 실책

    고현곤 편집인 “원화 환율이 떨어지고, 주가가 다시 오릅니다. 물가는 2%대에서 안정을 찾아가고요.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더 좋아질 겁니다. 경제 체력이 예전과 다릅니다. 별일도 아닌데, 위기라고 호들갑 떨던 사람들 요새 쑥 들어갔네요.”   올봄에 만난 한 고위 관료는 호기롭게 말했다. 내심 그는 ‘내년 4월 총선까지 이대로’를 그렸을 것이다. 섣부른 낙관이었다. 3분기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6%. 마이너스 성장을 겨우 모면했다. 중동 사태까지 겹쳐 10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3.8%까지 치솟았다. 거의 모든 게 비싸졌다. 금융시장은 살얼음판이다. 언제 요동쳐도 이상하지 않다. 물가 불안과 저성장이 누적되면서 체감 경기는 하반기에 더 나빠졌다.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물가 상승) 우려도 커진다.     ■  「 집값·가계대출 겨우 잡히던 차에 정부 주도로 대출 완화…투기 불러 금리 동결도 시장에 잘못된 신호 물가안정 우선, 돈 풀면 위기 올 것 」    정부의 지나친 자신감은 뼈아픈 실책을 불렀다. 올 초 집값 급락을 막겠다며 정책자금인 특례보금자리론 40조원을 풀었다. 이 조치는 ‘부동산은 지금이 바닥’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시장에 보냈다. 내 집 마련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젊은이들이 빚을 내 집을 샀다. 소득 제한을 두지 않는 바람에 부유층도 이 대출을 받았다. 고금리 경기침체 시기에 부동산 투기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정부 주도로.   대출 규제를 푸니 쾌재를 부른 건 은행이다. ‘이자 장사’ 말고는 별다른 재주가 없는 은행들이 기다렸다는 듯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내놓았다. 가계대출은 4월 이후 매달 2조~7조원씩 늘었다. 9월 말 가계대출은 1877조원, 기업 대출 1238조 원, 정부부채 1100조원을 넘었다.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 4000조원 넘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셈이다.   정부는 정책 실패를 인정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은행이 느슨해진 대출을 걱정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한은은 서민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리한 대출이 서민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을 간과한 발언이다. 아니면 책임을 피하는 데 급급하거나.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과거 정부에서 유행한 영끌 대출·투자는 정말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정부가 앞장서 대출을 풀어 놓고 이제 와서 위험하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 현재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굳이 과거 정부의 잘못을 끌고 들어갈 필요가 있었나 싶다.   한은 통화정책도 ‘돈을 더 조이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준다. 한은은 지난 1월 기준금리를 3.5%로 올린 뒤 10개월째 동결했다. 그사이 미국은 기준금리를 4.5%에서 5.5%로 올렸다. 미국 기준금리는 한국보다 2%포인트나 높다. 정상은 아니다. 과거에는 한·미 금리 차가 1%포인트만 나도 걱정이 컸다.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원화 환율이 오르고 물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최근 위기감이 무뎌졌다. 다른 경제 관료의 말. “한국 경제가 커져서 미국과 2%포인트 금리 차에도 별 영향 없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한·미 금리 차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강조해 왔다. 안심해도 될까. 금리를 제때 올리지 않는 바람에 한·미 금리 차가 역전된 기간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세 번 있었다. 그때마다 큰일이 터졌다. 김대중 정부 1999~2001년(1.5%포인트 차)의 과잉 유동성 후유증으로 닷컴 버블과 카드 대란을 겪었다. 노무현 정부 2005~2007년(1%포인트 차)과 문재인 정부 2018~2020년(0.75%포인트 차)에는 부동산이 치솟았다. 그 여파로 노·문 두 정부는 대선에서 지고 정권을 잃었다.   “7%대 금리 시대에 대비하라”(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는 경고가 나올 정도로 미국은 고금리 기조에 변함이 없다. 미국이 긴축을 이어가면 우리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 애써 외면하면 시장금리는 따로 움직인다. 이미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중 최고 수준인 4%대에 진입했다. 기준금리와 시장금리의 괴리가 커질수록 통화정책에 불신이 쌓인다. 세수 부족과 적자 누적으로 재정정책이 마비된 상태에서 통화정책마저 고장 나면 정부가 쓸 카드가 없다. 총선을 앞두고 ‘공매도 금지’ 같은 무리한 단발성 대책에 매달리는 처지가 된다.   이 총재가 좀 더 강단 있게 처신했으면 한다. 예전 한은 총재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아 ‘양치기 소년’이라는 조롱을 들었다. 이 총재도 언제부턴가 발언의 무게감이 떨어진다. 지난달 “가계 부채가 안 잡히면 금리 인상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름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지만, 시장은 시큰둥하다. 그가 뭐라 말하든 결국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최우선 과제는 물가 안정이다. 집값도 더 떨어져야 한다는 확실한 신호를 줘야 한다. 미국 연준(Fed)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움직인다. 올해 정부와 한은이 정상적인 금융·통화정책을 폈으면 집값이 뛰고,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돈줄 조이는 게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돈을 풀면 더 큰 고통이 따른다. 김대기 실장 말처럼 외환위기의 몇십 배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고현곤 편집인

    2023.11.07 00:46

  • [고현곤 칼럼] 문재인 정부 통계 조작이 특히 나쁜 이유

    고현곤 편집인 숫자는 무서운 힘을 갖는다. 10은 10이다. 100이 될 수 없다. 평가와 판단의 객관적 근거가 된다. 아무리 유능한 경영자도 매출·이익이 저조하면 버티기 힘들다. 성장률이 둔화되거나 실업자가 늘면 정부가 궁지에 몰린다. 그렇다고 숫자가 늘 명료한 건 아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낳는다.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하면 진실을 가릴 수 있다. 그래서 더 무섭다.     ■  「 2016년부터 통계 사전 요구는 불법 실무자 일탈 아닌 조직적 개입 의혹 통계 중요성 잘 아는 경제학자 가담 조작 사실이라면 국민을 속인 범죄 」    올해 30대 그룹의 여성 임원 비중은 6.9%다. 5년 전엔 3.2%였다. 여성 임원 비중이 5년 새 두 배로 늘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여성 임원이 6.9%에 불과해 갈 길이 멀다. 삼성이 여성 임원 157명으로 가장 많지만, 비중은 7.5%로 30대 그룹 중간이다. 전체 임원이 많으니 여성 임원도 많았을 뿐이다. 보이는 숫자만 보거나 입맛대로 해석하면 오류에 빠진다.    명료한 듯 명료하지 않은 숫자의 맹점을 이용해 눈속임을 하는 ‘숫자놀음’이 여전하다. 실적을 내야 하는 정부와 민간 공히 유혹에 빠진다. 기업설명회(IR) 때 속지 않으려면 비교 시점을 잘 봐야 한다.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줄었는데, 전 분기보다는 늘었으면 기업은 전 분기 대비 증가율을 앞세운다. 지난해보다 이익이 감소한 건 덮어두고, 올해 목표치를 넘어선 점만 강조하기도 한다. ‘최대 50% 할인’. 수많은 품목 중 한두 개만 50% 할인해도 이렇게 선전한다.   정부는 불리한 숫자를 쏙 빼는 방식을 즐겨 쓴다. 1997년 11월 외환보유액이 100억 달러 남짓으로 바닥이었다. 정부는 이를 감추고 ‘펀더멘털에 문제 없다’는 말만 반복하다 외환위기를 맞았다. 2019년 초 기획재정부는 유리한 지표만 골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자료를 발표했다. 자료에 17년 만의 최고치인 실업률과 9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선 설비투자는 넣지 않았다. 나쁜 경제지표의 발표 시기를 선거 후로 늦추거나 불리한 숫자가 나온 보고서를 발표하지 않는다.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조사 방식이나 산출 기준을 유리하게 바꾸기도 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는 게 숫자에 손대는 통계 조작이다. 예전에도 있었다. 90년 일부 시·도가 예산을 더 타려고 인구를 허위로 늘렸다. 시·도가 신고한 인구를 모두 합치니 실제 인구보다 50만명이나 많았다. 2001년 노동부 산하 고용센터는 취업자 수를 부풀렸다. 취업한 근로자를 다시 실적에 포함하거나 아르바이트생을 취업자로 변조하는 수법을 썼다. 2006년 정부는 서울 강남 3구 아파트 실거래가가 3~6월 14.4%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집값이 치솟던 시기여서 뜻밖의 결과였다. 알고 보니 3월에 A, B, C 아파트의 실거래가를 평균하고, 6월엔 C, D 아파트를 평균한 뒤 등락률을 구했다. 다른 아파트의 값을 비교해 마이너스 숫자를 끌어낸 황당한 조작이었다.   감사원이 최근 문재인 정부의 통계 조작 의혹을 제기하자 일각에서 “예전에도 있던 일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과거에 있었으니 지금 해도 된다는 사고는 위험하다. 그보다 더 나쁜 이유가 있다. 첫째, 2016년 이후 통계를 공표 전에 누설하거나 외압을 행사하면 법 위반이다. 당시 신설된 통계법 27조 2항은 누구든 공표 전 통계를 받아보는 것을 불법으로 못박고 있다.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사람이 김현미 의원이었다. 감사원에 따르면 바로 그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한국부동산원에 ‘주중치’와 ‘속보치’를 사전에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둘째, 문재인 정부 수뇌부가 집권 내내 부동산·소득·고용 통계 조작에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예전처럼 한두 기관이나 일선 실무자의 일탈이 아니라고 한다. “협조하지 않으면 조직과 예산을 다 날린다.” “서울 상승률 0.05%, 안 되면 전주(0.06%)에 맞춰라.” 협박에 가까운 노골적 지시는 군사정권을 떠올리게 한다. 민주화에 헌신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거꾸로 돌린 것이다.   셋째, 감사원이 통계 조작 혐의로 수사 의뢰한 22명 가운데 장하성·김상조·홍장표·황덕순·강신욱 등 경제학자들이 대거 포함됐다. 경제학은 통계적 방법으로 이론을 검증하는 학문이다. 숫자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경제학자는 통계의 정확성·중립성·일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그들이 조작을 주도했다면 경제학의 신뢰를 허무는 심각한 일이다.   문 전 대통령은 감사원 발표 다음 날 “문재인 정부 고용률이 사상 최고였다”고 주장했다. 통계 조작이 문제가 됐는데, 동문서답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2018~2021년 고용률은 60% 선에 그쳤다. 사상 최고라고 자랑한 2022년(62.1%)은 5월에 정권이 바뀌었으니 오롯이 문재인 정부 성과로 볼 수 없다. 그리스는 재정 통계를 속였다가 부도 위기에 몰려 9년간 구제금융을 받았다. 중국 통계는 지금도 믿을 수 없다. 경제가 나빠져도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되니 처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정부 통계는 정책 결정의 근간이 된다. 유리한 통계만 골라 써도 오판을 부르는데, 통계 자체를 조작했을 때의 부작용은 말해 무엇하랴. 국민을 속이고, 수렁에 빠뜨리는 범죄다. 고현곤 편집인

    2023.10.10 00:54

  • [세컷칼럼]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지금?

    필자가 고3이던 1980년 7월 말이었다. 한 친구가 여름 보충수업 중인 교실 문을 열고 외쳤다. “본고사 없어졌다.” 선생님은 “날이 더우니 헛소리를 다 하네”라며 혀를 찼다. 사실이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했다. 당시 본고사가 너무 까다로워 원성이 자자했다. 고액 과외가 성행했다. 문제는 일방적으로 결정해 급하게 밀어붙인 데 있었다. 입시 3개월 앞두고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 모두 우왕좌왕했다. 그해 11월, 예비고사(지금의 수학능력시험)만으로 81년도 입시를 치렀다. 진학지도 정보가 없어 선생님들이 손을 놓았다. 이 성적으로 어느 대학에 응시할지 알 길이 없었다. 요행을 노린 배짱 지원과 미달 사태로 뒤죽박죽이 됐다. ‘점쟁이만 특수를 누렸다’는 웃지 못할 보도가 나왔다. 혼란은 이듬해 입시에서도 이어졌다.   ■  「 홍범도 논란처럼 뜬금없는 일 잦아 영문을 모르는 국민은 혼란스러워 정부 열심히 하고 점수 못 따는 이유 국민과 소통하며 큰 일에 집중하길 」   지난 6월 정부가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기로 한 취지에 공감한다. 교과 밖 킬러 문항으로 수험생을 골탕 먹여선 안 된다. 교육계에 이권 카르텔이 있다면 당연히 손봐야 한다. 그런데 흔쾌하지는 않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다들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수능이 코앞에 닥쳤지만, 어떤 게 킬러 문항인지 여전히 헷갈린다. 지난주 킬러 문항을 뺀 처음이자 마지막 모의평가를 치렀다. 과목별로 변별력 논란이 이어진다. 수학 만점자가 3000여 명인 의대 정원보다 많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물수능 기대감으로 N수생이 역대 최대로 늘었다. 입시는 더 치열해진 셈이다. N수생이 몰려들며 입시 학원은 장사가 더 잘된다. 재학생이 빠져나가면서 대학은 비상이 걸렸다. 입시제도를 갑자기 바꿔서 생긴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홍 장군의 공산당 이력을 문제 삼았다. 그가 활동한 1920년대는 레닌의 공산당 시절이다. 김일성을 앞세워 6·25 남침을 한 스탈린의 공산당과는 다르다. 홍 장군은 해방 전인 1943년 작고했다. 독립군을 몰살한 1921년 자유시 참변에 참여했다는 증거도 없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당시 중립을 지켰다”(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정부가 사실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 이전을 강행하는 느낌이다. 국방부 대변인은 “(자유시 참변에 참여했다는) 문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가 기자들이 따지자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라고 번복했다. 오락가락하며 신뢰를 못 준다. 문재인 정부에서 의도를 갖고 일방적으로 추진했다고 똑같은 방법으로 응수하면 똑같은 수준이 된다. 역사 논쟁과 이념 싸움으로 흐르는 바람에 광주시 정율성 공원의 부당함을 공격할 기회도 놓쳤다.    5년여 육군사관학교에 있던 흉상을 치우려면 국민이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국방부는 “군의 정체성을 바로잡기 위한 정상화 조치”라고 했다. 그럴수록 정부 단독으로 결정해선 안 된다. 전문가와 관련 단체 의견을 듣고, 공론화 과정도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외부 학계와 협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국방부 입장은 위험한 생각이다. 절차를 건너뛰면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논란이 꼬리를 물게 된다. 육사 흉상을 옮기면서 국방부 흉상은 놔둬도 되나? 정부가 잠수함 ‘홍범도함’ 함명 변경도 검토하자 해군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졸속으로 처리했다가 자칫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흉상을 이리저리 옮기는 소동이 벌어질 수 있다. 독립운동 최고의 전과를 올린 청산리 전투의 홍 장군을 욕보이는 일이다.    정부가 불쑥 일을 진행해 혼선과 갈등을 빚은 게 처음이 아니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이 그랬고, 주 52시간제 개편, 만 5세 입학, 서울~양평고속도로 백지화,  최근 의경 신설까지 충분한 공감대 없이 추진했다가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켰다. ‘중요한 현안도 많은데, 굳이 지금 이 일로 분란을?’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정부 내엔 ‘옳은 일 하는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하다. 옳더라도 서두르면 탈이 난다. 국민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예전에는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언론에 흘려 반응을 보고, 여론이 좋지 않으면 슬그머니 접기도 했다. 공청회라도 열어 군불을 때기도 했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 때 금융실명제나 하나회 척결처럼 전격 단행한 개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국민 의견을 다지고 다져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킬러 문항 폐지나 흉상 이전이 금융실명제처럼 밀어붙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여론조사를 보면 국정 수행이 ‘일방적·독단적’이라는 응답이 5% 이상 나온다. 지난달 말 한국리서치 등의 조사에선 21%에 달했다. 충분한 소통 없이 추진하는 게 많은 탓이다. 정부가 열심히 하고도 점수를 못 따는 이유다. 정부가 느닷없이 발표하고, 국민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작은 싸움으로 힘 빼지 말고 큰일에 집중했으면 한다. 대내외 경제 여건이 갈수록 심상치 않다. 규제 개혁과 3대 개혁(노동·교육·연금) 같은 진짜 큰 현안은 제대로 손도 안 댔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윤지수 인턴기자

    2023.09.14 23:00

  • [고현곤 칼럼]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지금?

    고현곤 편집인 필자가 고3이던 1980년 7월 말이었다. 한 친구가 여름 보충수업 중인 교실 문을 열고 외쳤다. “본고사 없어졌다.” 선생님은 “날이 더우니 헛소리를 다 하네”라며 혀를 찼다. 사실이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했다. 당시 본고사가 너무 까다로워 원성이 자자했다. 고액 과외가 성행했다. 문제는 일방적으로 결정해 급하게 밀어붙인 데 있었다. 입시 3개월 앞두고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 모두 우왕좌왕했다. 그해 11월, 예비고사(지금의 수학능력시험)만으로 81년도 입시를 치렀다. 진학지도 정보가 없어 선생님들이 손을 놓았다. 이 성적으로 어느 대학에 응시할지 알 길이 없었다. 요행을 노린 배짱 지원과 미달 사태로 뒤죽박죽이 됐다. ‘점쟁이만 특수를 누렸다’는 웃지 못할 보도가 나왔다. 혼란은 이듬해 입시에서도 이어졌다.     ■  「 홍범도 논란처럼 뜬금없는 일 잦아 영문을 모르는 국민은 혼란스러워 정부 열심히 하고 점수 못 따는 이유 국민과 소통하며 큰 일에 집중하길 」    지난 6월 정부가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기로 한 취지에 공감한다. 교과 밖 킬러 문항으로 수험생을 골탕 먹여선 안 된다. 교육계에 이권 카르텔이 있다면 당연히 손봐야 한다. 그런데 흔쾌하지는 않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다들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수능이 코앞에 닥쳤지만, 어떤 게 킬러 문항인지 여전히 헷갈린다. 지난주 킬러 문항을 뺀 처음이자 마지막 모의평가를 치렀다. 과목별로 변별력 논란이 이어진다. 수학 만점자가 3000여 명인 의대 정원보다 많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물수능 기대감으로 N수생이 역대 최대로 늘었다. 입시는 더 치열해진 셈이다. N수생이 몰려들며 입시 학원은 장사가 더 잘된다. 재학생이 빠져나가면서 대학은 비상이 걸렸다. 입시제도를 갑자기 바꿔서 생긴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홍 장군의 공산당 이력을 문제 삼았다. 그가 활동한 1920년대는 레닌의 공산당 시절이다. 김일성을 앞세워 6·25 남침을 한 스탈린의 공산당과는 다르다. 홍 장군은 해방 전인 1943년 작고했다. 독립군을 몰살한 1921년 자유시 참변에 참여했다는 증거도 없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당시 중립을 지켰다”(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정부가 사실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 이전을 강행하는 느낌이다. 국방부 대변인은 “(자유시 참변에 참여했다는) 문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가 기자들이 따지자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라고 번복했다. 오락가락하며 신뢰를 못 준다. 문재인 정부에서 의도를 갖고 일방적으로 추진했다고 똑같은 방법으로 응수하면 똑같은 수준이 된다. 역사 논쟁과 이념 싸움으로 흐르는 바람에 광주시 정율성 공원의 부당함을 공격할 기회도 놓쳤다.   5년여 육군사관학교에 있던 흉상을 치우려면 국민이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국방부는 “군의 정체성을 바로잡기 위한 정상화 조치”라고 했다. 그럴수록 정부 단독으로 결정해선 안 된다. 전문가와 관련 단체 의견을 듣고, 공론화 과정도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외부 학계와 협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국방부 입장은 위험한 생각이다. 절차를 건너뛰면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논란이 꼬리를 물게 된다. 육사 흉상을 옮기면서 국방부 흉상은 놔둬도 되나? 정부가 잠수함 ‘홍범도함’ 함명 변경도 검토하자 해군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졸속으로 처리했다가 자칫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흉상을 이리저리 옮기는 소동이 벌어질 수 있다. 독립운동 최고의 전과를 올린 청산리 전투의 홍 장군을 욕보이는 일이다.   정부가 불쑥 일을 진행해 혼선과 갈등을 빚은 게 처음이 아니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이 그랬고, 주 52시간제 개편, 만 5세 입학, 서울~양평고속도로 백지화,  최근 의경 신설까지 충분한 공감대 없이 추진했다가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켰다. ‘중요한 현안도 많은데, 굳이 지금 이 일로 분란을?’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정부 내엔 ‘옳은 일 하는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하다. 옳더라도 서두르면 탈이 난다. 국민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예전에는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언론에 흘려 반응을 보고, 여론이 좋지 않으면 슬그머니 접기도 했다. 공청회라도 열어 군불을 때기도 했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 때 금융실명제나 하나회 척결처럼 전격 단행한 개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국민 의견을 다지고 다져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킬러 문항 폐지나 흉상 이전이 금융실명제처럼 밀어붙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여론조사를 보면 국정 수행이 ‘일방적·독단적’이라는 응답이 5% 이상 나온다. 지난달 말 한국리서치 등의 조사에선 21%에 달했다. 충분한 소통 없이 추진하는 게 많은 탓이다. 정부가 열심히 하고도 점수를 못 따는 이유다. 정부가 느닷없이 발표하고, 국민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작은 싸움으로 힘 빼지 말고 큰일에 집중했으면 한다. 대내외 경제 여건이 갈수록 심상치 않다. 규제 개혁과 3대 개혁(노동·교육·연금) 같은 진짜 큰 현안은 제대로 손도 안 댔다. 고현곤 편집인

    2023.09.12 01:09

  • [세컷칼럼]원희룡 장관의 불편한 처신

    지난 주말 오전, 서울 잠실에서 양평군청까지 40㎞ 가는 데 1시간40분 걸렸다. 6번 국도는 주말 교통체증으로 악명이 높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추진한 게 서울~양평 고속도로다. 12만 양평 군민은 물론 여기를 지나다니는 누구나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고속도로가 생기면 잠실에서 양평군청까지 30분 남짓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사업이 전격 중단된 지 40일 흘렀다. 언제 재개할지 기약이 없다. 다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꼬인 실타래를 풀지 못한다. 정쟁에 볼모로 잡힌 국민이 피해를 본다. 여야 정치권이야 늘 그렇다 치고, 이번엔 정부가 일을 키웠다. 당초 의혹이 제기됐을 때 노선이 언제 어떻게 변경됐는지 점검해 보면 될 일이었다. 절차에 문제가 없으면 예정대로 진행하고,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된다. 터무니없는 의혹이었다면 유포자를 색출해 고발해야 한다. 이건 정부의 권한이자 책무이기도 하다.   ■  「 양평고속도 표류 40일, 재개 불투명 피해는 국민 몫, 서둘러 정상화해야 장관, 싸움닭 아닌 나라의 심부름꾼 정치 내려놓고 국민만 보고 일하길 」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백지화 발표는 엉뚱했다. 정부가 해야 할 검증 절차를 무시하고, 건너뛰었다. 대통령 부인이 거론된 만큼 오해 없도록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는데,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임기 끝까지 의혹에 시달리기보다 책임지고 손절하겠다.” “정말 필요하다면 다음 정부에서 하라.” 논리가 약하고, 비약이 심했다. 구설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일념뿐인 듯했다. 백지화로 인한 피해를 두루 고심한 흔적은 없었다.    그는 “장관직을 걸겠다”고 했다. 지난해 1기 신도시 재건축이 논란이 됐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지체되지 않도록 장관직을 걸고 약속드리겠다.” 장관직이 전가의 보도처럼 쓸 수 있는 대단한 감투라고 여기는 듯하다.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 장관은 늘공(늘 공무원, 직업 공무원)이 정무감각이 떨어져 괜한 의혹을 샀다는 취지로도 얘기했다. 자신의 조직을 늘공과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갈라치기한 건 잘못이다.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공무원들이 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나. 게다가 책임을 늘공 탓으로 돌렸다. ‘남 탓’은 위아래, 좌·우파 가릴 것 없이 대한민국의 고질병이 됐다. 잼버리 파행을 놓고도 낯 뜨거운 남 탓 공방이 한창이다.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지역 숙원사업이다. 종점으로 원안(양서면)과 변경안(강상면), 나들목 추가안(강하IC) 중 어느 게 나은지는 전문가가 판단할 영역이다. 분명한 건 어떤 형태로든 서둘러 재개하는 게 맞다. 원 장관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쏟아놓은 말을 주워담을 묘안이 없다. 스스로 퇴로를 막았다. 좋게 보면 배수진이요, 엄밀히 말하면 자충수다. 지금 가장 고민스러운 사람은 원 장관이다. 사람들이 꽉 막힌 6번 국도를 지날 때마다 그를 떠올릴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는 퇴로를 뚫느라 말을 계속 바꾼다. ‘민주당이 사과하면 공사를 재개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민주당은 사과할 생각이 없다. 조국 사태 때 보았듯 눈앞에 증거를 들이밀어도 꿈쩍 안 한다. 원 장관의 발언 수위는 점점 누그러지고, 부연 설명은 길어진다. “실제로는 (백지화가 아니라) 중단이다. 무기한 끌다 보면 무산될 수도 있다.” “민주당이 사과하면 제일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문가와 양평 주민의 의견을 반영해 고속도로를 최대한 빨리 놓겠다.” 사업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헷갈린다. 이럴 거면 처음에 왜 백지화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국토부는 ‘충격요법’이었다고 설명했는데, 부적절하다. 국민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떠봤다는 건가.    국민이 피해를 보는 마당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다. 우선 1조8000억원 국책사업을 장관 한 사람이 뒤집을 수 있는 건지 따져봐야 한다. 장관의 힘이 셌던 박정희 정부에서도 본 적이 없다. 원 장관은 “대통령과 논의 없이 독자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아니라면 적어도 총리나 예산권을 가진 경제부총리와는 상의했어야 했다. 혼자 결정해 발표했다면 국정 시스템이 너무 허술한 것이다. 혼자 한 게 아니라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문제다. 대통령과 총리, 각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키는 것도 이상하다. 전 국민의 관심사로 불거진 만큼 원 장관에게만 맡겨둘 일은 아니다. 힘을 실어주든, 책임을 묻든 뭐라도 분명한 정부 입장이 있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원 장관은 최전방 돌격대를 자처했다. 지난 대선 때 인기를 끈 ‘대장동 1타 강사’에서 자신감을 얻었는지 거침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존재감이 높아지는 듯하지만, 지나치면 자신을 갉아먹는다. 그는 정치판의 싸움닭이 아니라 나라의 심부름꾼, 공복(公僕)이다. “제발 이렇게 하지 마시고 국민을 위해 일해 주십시오”라는 양평군 주민의 하소연을 가슴에 담기 바란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온 공복의 자세를 깊이 새겼으면 한다. 대권을 꿈꾼다면 더더욱 그렇다.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남이 끌어내리고, 스스로 낮추는 사람은 남이 올려준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인턴기자 윤지수 

    2023.08.17 23:00

  • [고현곤 칼럼] 원희룡 장관의 불편한 처신

    고현곤 편집인 지난 주말 오전, 서울 잠실에서 양평군청까지 40㎞ 가는 데 1시간40분 걸렸다. 6번 국도는 주말 교통체증으로 악명이 높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추진한 게 서울~양평 고속도로다. 12만 양평 군민은 물론 여기를 지나다니는 누구나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고속도로가 생기면 잠실에서 양평군청까지 30분 남짓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사업이 전격 중단된 지 40일 흘렀다. 언제 재개할지 기약이 없다. 다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꼬인 실타래를 풀지 못한다. 정쟁에 볼모로 잡힌 국민이 피해를 본다. 여야 정치권이야 늘 그렇다 치고, 이번엔 정부가 일을 키웠다. 당초 의혹이 제기됐을 때 노선이 언제 어떻게 변경됐는지 점검해 보면 될 일이었다. 절차에 문제가 없으면 예정대로 진행하고,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된다. 터무니없는 의혹이었다면 유포자를 색출해 고발해야 한다. 이건 정부의 권한이자 책무이기도 하다.     ■  「 양평고속도 표류 40일, 재개 불투명 피해는 국민 몫, 서둘러 정상화해야 장관, 싸움닭 아닌 나라의 심부름꾼 정치 내려놓고 국민만 보고 일하길 」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백지화 발표는 엉뚱했다. 정부가 해야 할 검증 절차를 무시하고, 건너뛰었다. 대통령 부인이 거론된 만큼 오해 없도록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는데,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임기 끝까지 의혹에 시달리기보다 책임지고 손절하겠다.” “정말 필요하다면 다음 정부에서 하라.” 논리가 약하고, 비약이 심했다. 구설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일념뿐인 듯했다. 백지화로 인한 피해를 두루 고심한 흔적은 없었다.   그는 “장관직을 걸겠다”고 했다. 지난해 1기 신도시 재건축이 논란이 됐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지체되지 않도록 장관직을 걸고 약속드리겠다.” 장관직이 전가의 보도처럼 쓸 수 있는 대단한 감투라고 여기는 듯하다.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 장관은 늘공(늘 공무원, 직업 공무원)이 정무감각이 떨어져 괜한 의혹을 샀다는 취지로도 얘기했다. 자신의 조직을 늘공과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갈라치기한 건 잘못이다.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공무원들이 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나. 게다가 책임을 늘공 탓으로 돌렸다. ‘남 탓’은 위아래, 좌·우파 가릴 것 없이 대한민국의 고질병이 됐다. 잼버리 파행을 놓고도 낯 뜨거운 남 탓 공방이 한창이다.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지역 숙원사업이다. 종점으로 원안(양서면)과 변경안(강상면), 나들목 추가안(강하IC) 중 어느 게 나은지는 전문가가 판단할 영역이다. 분명한 건 어떤 형태로든 서둘러 재개하는 게 맞다. 원 장관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쏟아놓은 말을 주워담을 묘안이 없다. 스스로 퇴로를 막았다. 좋게 보면 배수진이요, 엄밀히 말하면 자충수다. 지금 가장 고민스러운 사람은 원 장관이다. 사람들이 꽉 막힌 6번 국도를 지날 때마다 그를 떠올릴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는 퇴로를 뚫느라 말을 계속 바꾼다. ‘민주당이 사과하면 공사를 재개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민주당은 사과할 생각이 없다. 조국 사태 때 보았듯 눈앞에 증거를 들이밀어도 꿈쩍 안 한다. 원 장관의 발언 수위는 점점 누그러지고, 부연 설명은 길어진다. “실제로는 (백지화가 아니라) 중단이다. 무기한 끌다 보면 무산될 수도 있다.” “민주당이 사과하면 제일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문가와 양평 주민의 의견을 반영해 고속도로를 최대한 빨리 놓겠다.” 사업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헷갈린다. 이럴 거면 처음에 왜 백지화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국토부는 ‘충격요법’이었다고 설명했는데, 부적절하다. 국민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떠봤다는 건가.   국민이 피해를 보는 마당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다. 우선 1조8000억원 국책사업을 장관 한 사람이 뒤집을 수 있는 건지 따져봐야 한다. 장관의 힘이 셌던 박정희 정부에서도 본 적이 없다. 원 장관은 “대통령과 논의 없이 독자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아니라면 적어도 총리나 예산권을 가진 경제부총리와는 상의했어야 했다. 혼자 결정해 발표했다면 국정 시스템이 너무 허술한 것이다. 혼자 한 게 아니라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문제다. 대통령과 총리, 각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키는 것도 이상하다. 전 국민의 관심사로 불거진 만큼 원 장관에게만 맡겨둘 일은 아니다. 힘을 실어주든, 책임을 묻든 뭐라도 분명한 정부 입장이 있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원 장관은 최전방 돌격대를 자처했다. 지난 대선 때 인기를 끈 ‘대장동 1타 강사’에서 자신감을 얻었는지 거침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존재감이 높아지는 듯하지만, 지나치면 자신을 갉아먹는다. 그는 정치판의 싸움닭이 아니라 나라의 심부름꾼, 공복(公僕)이다. “제발 이렇게 하지 마시고 국민을 위해 일해 주십시오”라는 양평군 주민의 하소연을 가슴에 담기 바란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온 공복의 자세를 깊이 새겼으면 한다. 대권을 꿈꾼다면 더더욱 그렇다.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남이 끌어내리고, 스스로 낮추는 사람은 남이 올려준다.’ 고현곤 편집인

    2023.08.15 00:58

  • [고현곤 칼럼] 후쿠시마 오염수가 광우병처럼 안되려면

    고현곤 편집인 2008년 4월 말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는 최악이었다. 한미 쇠고기 협상과 시중 괴담을 교묘히 엮었다. 당시 광우병 담당 부장이었던 필자는 편집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기억이 있다. “미국인들은 피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먹고도 문제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무시해도 된다.” 경솔한 판단이었다. 말이 안 되는 건 맞는데, 무시할 건 아니었다.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두 달여 전국 곳곳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  「 오염수와 한일관계 복원, 별개 문제 국민건강 이슈 쉽게 생각해선 안돼 횟집 먹방으로 야당 괴담 못 이겨 ‘정부는 국민 편’ 신뢰 쌓는게 급선무 」    광우병 사태가 남긴 교훈이 있다.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국민 건강 이슈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다. 이명박 대통령의 첫 반응은 “광우병 우려해서 쇠고기를 못 먹는 국민이 어디 있느냐”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광풍이 몰아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여고생들이 ‘동방신기가 광우병에 걸린다’며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어처구니없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두 달 후 이 대통령은 “시급한 현안이라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챙겨야 했다”고 통렬한 반성문을 읽어야 했다.   한미 쇠고기 협상의 얼개를 짠 건 이명박 정부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다. 최종 타결을 차일피일 미루다 차기 정부에 떠넘겼다. 그걸 이 대통령이 덜컥 서명했다가 뒤집어썼다. 협상의 전후 사정을 잘 아는 노무현 정부 사람들은 촛불 집회가 들불처럼 번질 때 침묵했다. 수습은 이명박 정부의 몫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 뜻을 수렴하고, 신뢰를 쌓았으면 그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에서 광우병 사태가 오버랩된다. 일본 정부가 해양 방류를 확정한 건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4월이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국회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기준에 맞는 적합한 절차를 따른다면 굳이 반대할 건 없다”고 말했다. 다시 그런 말을 해줄 리 없다. 오롯이 윤석열 정부가 감당할 짐이 됐다. 어촌, 횟집 등 관계자가 많고, 피해도 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이다. 거북하고 민감한 상대다. 서투르게 대처하면 후폭풍이 불가피한 구도다.   정부는 이미 몇 차례 실수를 했다. 한덕수 총리는 지난달 “안전 기준에 맞는다면 오염수를 마실 수 있다”고 말했다. 광우병 사태 때는 총리를 비롯해 각료들이 뒤에 숨는 바람에 일을 키웠다. 이번에 한 총리가 용감하게 총대를 멘 것까진 좋은데, 너무 나갔다. 일본 총리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박구연 국무조정실 1차장은 “해양 방류 방식이 안정성을 고려했을 때 가장 현실적 대안”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듯한 발언이다. IAEA 보고서도 안 나왔을 때였다.   오염수는 한일 관계 복원과 별개의 문제다. 전적으로 일본의 문제이고, 일본의 책임이다. 우리는 손톱만큼의 불안감도 없는지 꼼꼼하게 따져야 할 입장이다. 우리가 공격이고, 일본이 수비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가 수비를 하는 듯하다. 한술 더 떠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을 요구했다. 이웃 국가를 난처하게 하는 처사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방류 정보를 공유하고, 한국 전문가가 점검에 참여토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아직 이렇다 할 답변이 없다. 일본이 머뭇거리면 더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진보 진영이 이 틈을 놓칠 리 없다. 괴담을 쏟아낸다. 예전에 해온 대로다. 2002년 효순·미선양 사고를 계기로 반미를 부추겼다. 여세를 몰아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광우병·천안함 괴담으로 이명박 정부를 흔들었다. 사드 전자파 논란은 박근혜 정부에 흠집을 냈다. 이번에는 반일로 세력 결집을 꿈꾼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우물에 독극물 풀어넣기”라고 말했다. 정확한 실체를 모를 텐데, 사실인 듯 얘기했다.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의 자세는 아니다.   괴담은 전파력과 파괴력이 엄청나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 걸린다’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강렬하다.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복잡한 과학적 설명이 필요하다. 바로잡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광우병 사태는 온 국민이 쇠고기 전문가가 되고 나서야 일단락됐다. 법원이 PD수첩의 다섯 쟁점 중 세 개가 허위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3년 넘게 흐른 뒤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여당은 횟집 먹방으로 맞섰다. 썩 좋은 방법이 아니다. 미덥지 않은 정치인 쇼를 보고 국민이 안심할 수 있을까. 반감을 키울 뿐이다. 일본 원정 시위를 간 야당이나 오십보백보다. 광우병 사태 때처럼 괴담으로 치부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오염수 방류가 ‘걱정된다’는 응답(한국갤럽)이 78%나 되는 건 엄연한 현실이다. ‘다른 나라는 조용한데 한국만 호들갑’ ‘괴담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식의 대응은 위험하다. 자칫 국민을 우매하게 여기거나 걱정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보여주기 이벤트나 여론몰이로는 괴담을 넘어설 수 없다. 괴담을 이기는 건 기본적으로 과학이다. 더 중요한 건 ‘정부는 국민 편’이라는 신뢰다. 이건 과학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다. 정권의 진짜 실력을 보여줘야 하는 까다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고현곤 편집인

    2023.07.18 01:00

  • [세컷칼럼] 일본 경제 낙관할 수 없는 이유

    경기회복 조짐이 나타나자 일본 열도가 들떴다. 1991년 버블 붕괴 이후 30여년 못 보던 풍경이기 때문. 올 1분기 성장률이 0.7%(전분기 대비), 연 환산하면 2.7%에 달했다. 제로 성장에 익숙한 터라 흥분할만하다. 아베노믹스가 드디어 결실을 보고 있다는 낙관론이 나온다. 일본 경제는 내수 중심이다. 국내총생산(GDP) 중 가계소비가 54%를 차지한다. 돈을 풀어도 꿈쩍 않던 소비가 1분기 0.5% 증가했다. 설비투자도 1.4% 늘었다. 엔저와 코로나 엔데믹 덕분에 관광도 호황이다. 3월 외국 관광객은 182만 명으로 집계됐다. 1년 전의 100배다.    소비가 늘면서 기업에 온기가 퍼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올해 상장사 순이익이 2% 넘게 증가할 전망이다. 제자리를 맴돌던 임금도 오른다. 올해 임금 상승률은 93년(3.9%) 이후 최고치가 예상된다. 닛케이지수는 3만3000을 넘어섰다. 33년 만에 최고치. 미국·중국 갈등 속에 일본이 대만의 대안 투자처로 떠오른다. 워런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가 대만 반도체업체 TSMC 주식을 매각했다. 그 돈으로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5대 종합상사 주식에 60억 달러(약 8조원)를 투자한 게 화제가 됐다.   ■  「 성장·소비·투자·주가 지표 호전 펀더멘털 개선보다 유동성 덕분 엔저에도 수출 감소…디지털 낙후 혁신·변화 없이 진짜 회복 어려워 」   일본 경제가 온통 호재로 둘러싸인 듯하다. ‘소득·이익 증가→소비·투자 회복→디플레이션 탈출’의 선순환에 올라탄 것일까. 이번에도 버핏이 기가 막히게 맞힌 걸까. 낙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으로 지난해 이후 전 세계가 금리를 올려도 일본은 저금리를 고수했다. 최근 회복은 넘치는 유동성에 힘입은 바 크다. 경제 펀더멘털이 갑자기 좋아진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3~4%대에 달한다. 90년대 이후 줄곧 1%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올랐다. 젊은이들은 한 번도 경험 못한 인플레이션이다. 디플레이션을 깰 불쏘시개를 바라던 일본이다. 하지만 물가가 과도하게 오르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나쁜 인플레이션’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고물가 대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문제는 물가가 올라도 금리를 올려 돈줄을 조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렸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6%로 선진국 중 가장 높다. 그 돈을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했고, 일본은행이 국채의 50%(530조엔)를 떠안았다. 아베노믹스를 시작한 10년 전보다 다섯 배나 늘었다. 금리를 올리면 국채가격이 하락해 대규모 평가손이 불가피하다. 이자도 많이 늘어난다. 금리를 쉽게 올리기 어려운 이유다.    엔저도 뜨거운 감자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로 엔화는 달러당 140엔을 웃돌고 있다. 통화가치는 한 나라의 펀더멘털을 반영한다. 통화 약세는 그만큼 국력이 약화됐다는 의미다. 기업은 부자여도 국민은 가난해진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에서 일본은 대만에 밀렸다. 근로자 평균 임금은 G7 중 최하위다. GDP는 2010년 중국에 세계 2위를 내주더니 독일의 추격으로 3위도 위태롭다. 88년 세계 시가총액 100대 기업 중 5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지난해는 도요타 한 곳만 포함됐다.    엔저에도 1분기 수출은 4.2% 감소했다. 글로벌 교역량이 줄어든 영향이 크지만, 기업 경쟁력도 시원치 않다.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이 부진하다. 독일이 고부가가치 공산품을 생산하며 수출을 꾸준히 늘린 것과 대비된다. 도요타 등 대표 기업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긴 것도 원인이다. 제조업 해외생산 비중이 98년 10%에서 2020년 24%로 늘었다. 해외에서 생산해 해외에 파니 엔저로 인한 가격 효과를 못 보는 것이다.    더 치명적인 건 세계 IT 혁명에 올라타지 못한 점이다. 지금도 사무실에서 팩스와 도장을 쓰고, 관공서·은행에서 플로피디스크로 자료를 저장한다. 신용카드를 안 받는 점포가 흔하다. 정부가 최근 마이넘버카드(한국 주민등록증) 보급에 공을 들이지만, 입력 오류와 발급 지연이 속출한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일본 디지털 기술력은 63개국 중 62위다. 빅데이터 활용과 기업 민첩성은 꼴찌다. 세계는 정신없이 바뀌는데, 벌어들인 돈을 쌓아두는 ‘축소 균형’에 주력한 결과다. 기업 지배구조에도 약점에 있다. 오너 아닌 이사회 중심 의사결정 구조로는 신속 과감한 투자를 하기 어렵다.    지난해 유엔 글로벌 혁신지수에서 일본은 13위에 그쳤다. 한국은 6위. 도전과 변화보다는 체제에 순응하는 데 익숙하다. 우월감은 여전하지만 위기감이 적다. 정부가 잘못해도 정권을 뺏길 위험이 거의 없다. ‘경제 관료의 입김이 여전히 세다.’(노구치 유키오 『1940년 체제』) 세계 1위 고령화(2021년 65세 이상 29%)로 내수 전망도 밝지 않다. 경제가 본격 반등을 시작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요인이 너무 많은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일본 성장률이 내년에 1.0%로 둔화할 것으로 봤다. 정부·기업·국민 등 사회 곳곳에 혁신이 불타오르지 않는 한 진짜 회복은 쉽지 않아 보인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6.24 23:00

  • [고현곤 칼럼] 일본 경제 낙관할 수 없는 이유

    고현곤 편집인 경기회복 조짐이 나타나자 일본 열도가 들떴다. 1991년 버블 붕괴 이후 30여년 못 보던 풍경이기 때문. 올 1분기 성장률이 0.7%(전분기 대비), 연 환산하면 2.7%에 달했다. 제로 성장에 익숙한 터라 흥분할만하다. 아베노믹스가 드디어 결실을 보고 있다는 낙관론이 나온다. 일본 경제는 내수 중심이다. 국내총생산(GDP) 중 가계소비가 54%를 차지한다. 돈을 풀어도 꿈쩍 않던 소비가 1분기 0.5% 증가했다. 설비투자도 1.4% 늘었다. 엔저와 코로나 엔데믹 덕분에 관광도 호황이다. 3월 외국 관광객은 182만 명으로 집계됐다. 1년 전의 100배다.   소비가 늘면서 기업에 온기가 퍼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올해 상장사 순이익이 2% 넘게 증가할 전망이다. 제자리를 맴돌던 임금도 오른다. 올해 임금 상승률은 93년(3.9%) 이후 최고치가 예상된다. 닛케이지수는 3만3000을 넘어섰다. 33년 만에 최고치. 미국·중국 갈등 속에 일본이 대만의 대안 투자처로 떠오른다. 워런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가 대만 반도체업체 TSMC 주식을 매각했다. 그 돈으로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5대 종합상사 주식에 60억 달러(약 8조원)를 투자한 게 화제가 됐다.     ■  「 성장·소비·투자·주가 지표 호전 펀더멘털 개선보다 유동성 덕분 엔저에도 수출 감소…디지털 낙후 혁신·변화 없이 진짜 회복 어려워 」    일본 경제가 온통 호재로 둘러싸인 듯하다. ‘소득·이익 증가→소비·투자 회복→디플레이션 탈출’의 선순환에 올라탄 것일까. 이번에도 버핏이 기가 막히게 맞힌 걸까. 낙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으로 지난해 이후 전 세계가 금리를 올려도 일본은 저금리를 고수했다. 최근 회복은 넘치는 유동성에 힘입은 바 크다. 경제 펀더멘털이 갑자기 좋아진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3~4%대에 달한다. 90년대 이후 줄곧 1%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올랐다. 젊은이들은 한 번도 경험 못한 인플레이션이다. 디플레이션을 깰 불쏘시개를 바라던 일본이다. 하지만 물가가 과도하게 오르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나쁜 인플레이션’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고물가 대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문제는 물가가 올라도 금리를 올려 돈줄을 조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렸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6%로 선진국 중 가장 높다. 그 돈을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했고, 일본은행이 국채의 50%(530조엔)를 떠안았다. 아베노믹스를 시작한 10년 전보다 다섯 배나 늘었다. 금리를 올리면 국채가격이 하락해 대규모 평가손이 불가피하다. 이자도 많이 늘어난다. 금리를 쉽게 올리기 어려운 이유다.   엔저도 뜨거운 감자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로 엔화는 달러당 140엔을 웃돌고 있다. 통화가치는 한 나라의 펀더멘털을 반영한다. 통화 약세는 그만큼 국력이 약화됐다는 의미다. 기업은 부자여도 국민은 가난해진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에서 일본은 대만에 밀렸다. 근로자 평균 임금은 G7 중 최하위다. GDP는 2010년 중국에 세계 2위를 내주더니 독일의 추격으로 3위도 위태롭다. 88년 세계 시가총액 100대 기업 중 5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지난해는 도요타 한 곳만 포함됐다.   엔저에도 1분기 수출은 4.2% 감소했다. 글로벌 교역량이 줄어든 영향이 크지만, 기업 경쟁력도 시원치 않다.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이 부진하다. 독일이 고부가가치 공산품을 생산하며 수출을 꾸준히 늘린 것과 대비된다. 도요타 등 대표 기업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긴 것도 원인이다. 제조업 해외생산 비중이 98년 10%에서 2020년 24%로 늘었다. 해외에서 생산해 해외에 파니 엔저로 인한 가격 효과를 못 보는 것이다.   더 치명적인 건 세계 IT 혁명에 올라타지 못한 점이다. 지금도 사무실에서 팩스와 도장을 쓰고, 관공서·은행에서 플로피디스크로 자료를 저장한다. 신용카드를 안 받는 점포가 흔하다. 정부가 최근 마이넘버카드(한국 주민등록증) 보급에 공을 들이지만, 입력 오류와 발급 지연이 속출한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일본 디지털 기술력은 63개국 중 62위다. 빅데이터 활용과 기업 민첩성은 꼴찌다. 세계는 정신없이 바뀌는데, 벌어들인 돈을 쌓아두는 ‘축소 균형’에 주력한 결과다. 기업 지배구조에도 약점에 있다. 오너 아닌 이사회 중심 의사결정 구조로는 신속 과감한 투자를 하기 어렵다.   지난해 유엔 글로벌 혁신지수에서 일본은 13위에 그쳤다. 한국은 6위. 도전과 변화보다는 체제에 순응하는 데 익숙하다. 우월감은 여전하지만 위기감이 적다. 정부가 잘못해도 정권을 뺏길 위험이 거의 없다. ‘경제 관료의 입김이 여전히 세다.’(노구치 유키오 『1940년 체제』) 세계 1위 고령화(2021년 65세 이상 29%)로 내수 전망도 밝지 않다. 경제가 본격 반등을 시작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요인이 너무 많은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일본 성장률이 내년에 1.0%로 둔화할 것으로 봤다. 정부·기업·국민 등 사회 곳곳에 혁신이 불타오르지 않는 한 진짜 회복은 쉽지 않아 보인다. 고현곤 편집인

    2023.06.20 01:09

  • [고현곤 칼럼] 문 전 대통령의 불편한 처신

    고현곤 편집인 문재인 전 대통령이 수상하다. 퇴임 후 수염 기르고, 자유를 만끽하나 싶더니 올 들어 행보가 부쩍 복잡해졌다. 제주 4·3평화공원, 광주 5·18민주묘지를 찾아다녔다. 추모만 하는 게 아니라 어김없이 정치색 짙은 말을 남겼다. “4·3을 모독하는 행위가 이뤄지고 있어 개탄스럽다.”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게 정치인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 “잊혀지고 싶다”는 당초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외려 잊혀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고비마다 정치적 메시지를 내는 퇴임 대통령은 낯설다. 미국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외에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  「 참배·책방·영화·SNS…자기 정치 “잊혀지겠다”면서 고비마다 메시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 여기는 듯 퇴임 후 정치 행보, 나쁜 전례 될 것 」    지난달 양산 사저 근처에 ‘평산책방’을 냈다. 이달엔 다큐멘터리 영화 ‘문재인입니다’를 개봉했다. 마치 정치를 다시 준비하는 사람 같다. 주민을 위해 책방을 열었다지만, 오롯이 그를 위한 정치 공간이다. 팬 미팅장이고, 친문의 성지가 됐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다녀갔다. 그 자리에서 문 전 대통령은 “대화는 정치인의 의무”라며 윤석열 대통령을 에둘러 비판했다. ‘불통 대통령’이었던 그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나라의 어른답게 정파를 떠나 덕담을 했어야 했다.   책방은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무급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가 사달이 났다. ‘돈도 안 주고 일 시키느냐’는 반발을 불렀다. 책방 측은 “과욕이었다”며 철회했지만, 문 전 대통령은 일언반구도 없다. 재임 당시 불리하면 침묵하던 모습 그대로다. 공익사업이라면서 사업자 명의를 처음에 재단이 아닌 문 전 대통령 개인으로 한 것도 논란이 됐다. 책방 곳곳에 ‘장삿속’이 묻어난다는 지적은 옆에서 듣기에도 불편하다. 이런 걸 자꾸 얘기하면 한마디 할지 모른다. “그 정도 하시지요, 좀스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영화 ‘문재인입니다’는 또 다른 논란거리다. 잊혀지겠다고 해놓고, 한편에선 홍보 영화를 준비한 게 놀랍다. 애초에 잊혀질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닌가. 편집 과정에서 삭제했다는 그의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5년간 이룬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져 허망한 생각이 든다.” 김의겸 민주당 의원은 영화를 본 뒤 “문 전 대통령을 꼭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결의를 다졌다. 퇴임 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영화는 실패했다. 관객 수는 개봉 2주 동안 10만 명 남짓. 185만 명이 본 ‘노무현입니다’와 비교된다. 관람평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싸움판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지켜보는 국민은 착잡하다.   지난 2월에는 문 전 대통령이 SNS를 통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책을 거론했다. “저자의 역량을 새삼 확인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다.” 조국이 자녀 입시 비리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은 지 1주일 지난 때였다. 부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언급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전임 대통령의 말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조국에게 애틋함이 있다면 따로 연락하면 될 일이다. 굳이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은 조국을 택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행동이다.   퇴임 대통령이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은 없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숨을 이유는 없다. 자신의 경륜을 활용할 일이 있으면 좋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도 괜찮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해외를 순방하고, 헨리 키신저·매들린 올브라이트 같은 명사들과 교류하며 말년을 보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환경 쌀, 숲 가꾸기, 생태하천 복원에 열정을 쏟았다. 미국에선 지미 카터가 모범 사례다. 퇴임 후 전 세계 빈민촌에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했고, 분쟁지역에서 중재를 끌어냈다. 무능 대통령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거듭났다.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조지 W 부시는 화가로 변신해 대통령 때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퇴임 후 그림에 전념했다. 분명한 건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길을 걸어야 아름답다. 구설에 휘말리지 않는다.   유감스럽게 문 전 대통령은 현실 정치에 끼어든다. 정상까지 오르고 하산했지만 내려놓지 않는다. 참배·책방·영화·SNS…. 뭔가 끝없이 도모하면서도 이런 상황을 남 탓으로 돌린다. “(여권이) 끊임없이 나를 현실 정치로 소환하고 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여기는 듯하다. 지난해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다음 정부는 우리 정부 성과와 비교받을 것”이라며 덕담 대신 적개심을 보였다. 증오의 정치 프레임이다. 상대방을 악마화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낯 뜨거운 자화자찬도 이런 심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지난해 5월 물러나면서 지지자들에게 “(제가) 성공한 대통령이었습니까”라고 물어 “네”라는 답변을 끌어냈다. 통상 그런 자리에선 ‘그동안 부족한 저를 응원해 줘서 감사하다’며 자신을 낮추는 게 품격 있는 태도다. 성과를 부풀리며 세력을 규합하는 협량을 드러낸 것이다. 나라를 쪼개는 비극은 집권 5년으로 충분하다. 퇴임 대통령의 정치 개입이라는 불행한 전례를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고현곤 편집인

    2023.05.23 01:00

  • [세컷칼럼] 3대 개혁, 하나라도 해낼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연금·노동·교육을 새 정부 3대 개혁 과제로 꼽은 게 지난해 5월 16일이다. 취임 첫 국회 연설에서다. “지금 추진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게 된다”고 했다. 방향을 잘 잡았다. 기대를 모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뭉개거나 망친 것을 바로잡는 의미도 있었다. 1년이 쏜살같이 흘렀다. 유감스럽게 3대 개혁은 별 진전이 없다. 윤 대통령이 “역사적 소명”이라고 칭한 게 무색할 정도다.    연금개혁은 여야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국회는 지난해 7월 말에야 마지못해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발족했다. 개점 휴업하다가 10월 말 첫 회의를 열었다. 하나 마나 한 덕담만 주고받다 끝났다. 특위 산하 민간자문위가 지난달 말 두루뭉술한 보고서를 냈을 뿐이다. 사회적 합의는커녕 자체 안도 만들지 못했다. 국민·공무원·군인·사학 4대 공적연금을 들여본다고 했으나 국민연금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특위는 시간만 축내다 이달 말 종료한다.   ■  「 새 정부, 별 진전 없이 첫해 보내 선거 없는 골든타임 얼마 안 남아 이해당사자 설득할 정치력 의문 낮은 지지율도 국정동력 약화 불러 」   노동개혁 상황도 좋지 않다. 윤 대통령이 노조 불법행위에 강경 대응한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주 52시간제를 둘러싼 혼선이 뼈아프다. 정부 안은 일이 많을 때 주 69시간까지 몰아서 일하고, 적을 땐 쉬도록 노사의 선택권을 넓히자는 것이다. 이게 매주 69시간씩 일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야당의 주 69시간 프레임에 속수무책 당했다. 윤 대통령이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고 하면서 더 꼬였다. 이때부터 정부 안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굳어졌다. 지난해 6월에도 대통령이 노동부 안을 뒤집었다.    여소야대 국회라는 험난한 링에 오르기도 전에 자중지란에 빠졌다. 사회적 공감대를 만드는 노력 없이 덜컥 정부 안을 내놓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론이 나빠지자 정부가 뒤늦게 의견 수렴에 나섰다. 일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주 52시간제 개정은 추진동력을 잃은 것 같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진짜 민감한 노동 현안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 과보호를 깨고,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 연공서열 중심의 임금 체계도 개편해야 한다. 고령화에 대비해 정년을 연장해야 하고…. 할 일이 널려 있는데 안타깝다.    교육개혁은 출발부터 늦었다. 교육부총리 후보가 연거푸 낙마해 지난해 11월까지 컨트롤타워가 공석이었다. 뒤늦게 교육부가 교육감-시·도지사 러닝메이트제, 맞춤형 돌봄 서비스, 디지털 교육 등 10대 과제를 마련했다. 법 개정 사항이 많다. 교육 문제의 핵심은 사교육이다. 이걸 비껴가면 어떤 개혁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교육이 사회 격차를 키운다’는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3대 개혁은 앞으로 더 문제다. 우선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올해, 특히 상반기가 골든타임이다. 두 달밖에 안 남았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 초부터 국민연금 개혁에 착수했는데도 마지막 해 간신히 고칠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2년 차인 2014년 초 시작한 공무원연금 개혁에 1년5개월 걸렸다. 그나마 둘 다 당초 안보다 크게 후퇴해 50점짜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는 비겁하게 손도 안 댔다.    올 하반기부터 총선의 계절이다. 정부 연금개혁안과 주 52시간제 개정안이 가을에 나온다. 애매한 시기다. 총선을 목전에 두고 여야 모두 셈법이 복잡하다.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표가 날아간다. 정치권이 선뜻 나설 리 없다. “정파보다 국가를 우선해야 개혁에 성공한다”(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말은 우리 정치 풍토에선 요원한 얘기다.    둘째, 정부가 개혁을 헤쳐나갈 고도의 정치력을 가졌는지 걱정스럽다. 개혁의 당위성만 강조할 뿐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이나 로드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야당과의 협치는 고사하고, 그 흔한 당정 협의도 눈에 안 띈다. 민관이 머리를 맞대는 공청회도 별로 없다. 3대 개혁은 이해당사자의 대타협이 중요하다. 각자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순간 실패한다. 정부가 국민과 이해집단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행위를 끝없이 반복해도 될까 말까다. 일방통행식 행정과 구호·엄포만으로는 성과를 낼 수 없다. “3대 개혁은 정부 혼자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민·관·정 모두 머리를 맞대고 수용 가능한 개혁안을 도출해야 한다.”(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    셋째,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은 현실적인 걸림돌이다. 지지율은 민심의 바로미터다. 이명박 정부 초인 2008년 봄, 광우병 사태를 겪으면서 지지율이 21%까지 추락했다. 5년 내내 국정 동력 약화로 고전했다. 이번엔 광우병 같은 큰일이 없는데도 30%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중도층은 물론 보수층에서 이탈 조짐이 있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여론조사 방법에 의구심이 있다” “별로 참고하지 않는다”고 애써 의미를 깎아내린다. 그런 태도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총선 치른다고 1년을 또 보내면 어느덧 집권 후반기다. 3대 개혁 중 하나만이라도 성공하길 바라는 쪽으로 눈높이를 낮춰야 할지도 모르겠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4.29 23:00

  • [고현곤 칼럼] 3대 개혁, 하나라도 해낼 수 있을까

    고현곤 편집인 윤석열 대통령이 연금·노동·교육을 새 정부 3대 개혁 과제로 꼽은 게 지난해 5월 16일이다. 취임 첫 국회 연설에서다. “지금 추진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게 된다”고 했다. 방향을 잘 잡았다. 기대를 모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뭉개거나 망친 것을 바로잡는 의미도 있었다. 1년이 쏜살같이 흘렀다. 유감스럽게 3대 개혁은 별 진전이 없다. 윤 대통령이 “역사적 소명”이라고 칭한 게 무색할 정도다.   연금개혁은 여야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국회는 지난해 7월 말에야 마지못해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발족했다. 개점 휴업하다가 10월 말 첫 회의를 열었다. 하나 마나 한 덕담만 주고받다 끝났다. 특위 산하 민간자문위가 지난달 말 두루뭉술한 보고서를 냈을 뿐이다. 사회적 합의는커녕 자체 안도 만들지 못했다. 국민·공무원·군인·사학 4대 공적연금을 들여본다고 했으나 국민연금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특위는 시간만 축내다 이달 말 종료한다.     ■  「 새 정부, 별 진전 없이 첫해 보내 선거 없는 골든타임 얼마 안 남아 이해당사자 설득할 정치력 의문 낮은 지지율도 국정동력 약화 불러 」    노동개혁 상황도 좋지 않다. 윤 대통령이 노조 불법행위에 강경 대응한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주 52시간제를 둘러싼 혼선이 뼈아프다. 정부 안은 일이 많을 때 주 69시간까지 몰아서 일하고, 적을 땐 쉬도록 노사의 선택권을 넓히자는 것이다. 이게 매주 69시간씩 일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야당의 주 69시간 프레임에 속수무책 당했다. 윤 대통령이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고 하면서 더 꼬였다. 이때부터 정부 안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굳어졌다. 지난해 6월에도 대통령이 노동부 안을 뒤집었다.   여소야대 국회라는 험난한 링에 오르기도 전에 자중지란에 빠졌다. 사회적 공감대를 만드는 노력 없이 덜컥 정부 안을 내놓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론이 나빠지자 정부가 뒤늦게 의견 수렴에 나섰다. 일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주 52시간제 개정은 추진동력을 잃은 것 같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진짜 민감한 노동 현안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 과보호를 깨고,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 연공서열 중심의 임금 체계도 개편해야 한다. 고령화에 대비해 정년을 연장해야 하고…. 할 일이 널려 있는데 안타깝다.   교육개혁은 출발부터 늦었다. 교육부총리 후보가 연거푸 낙마해 지난해 11월까지 컨트롤타워가 공석이었다. 뒤늦게 교육부가 교육감-시·도지사 러닝메이트제, 맞춤형 돌봄 서비스, 디지털 교육 등 10대 과제를 마련했다. 법 개정 사항이 많다. 교육 문제의 핵심은 사교육이다. 이걸 비껴가면 어떤 개혁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교육이 사회 격차를 키운다’는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3대 개혁은 앞으로 더 문제다. 우선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올해, 특히 상반기가 골든타임이다. 두 달밖에 안 남았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 초부터 국민연금 개혁에 착수했는데도 마지막 해 간신히 고칠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2년 차인 2014년 초 시작한 공무원연금 개혁에 1년5개월 걸렸다. 그나마 둘 다 당초 안보다 크게 후퇴해 50점짜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는 비겁하게 손도 안 댔다.   올 하반기부터 총선의 계절이다. 정부 연금개혁안과 주 52시간제 개정안이 가을에 나온다. 애매한 시기다. 총선을 목전에 두고 여야 모두 셈법이 복잡하다.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표가 날아간다. 정치권이 선뜻 나설 리 없다. “정파보다 국가를 우선해야 개혁에 성공한다”(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말은 우리 정치 풍토에선 요원한 얘기다.   둘째, 정부가 개혁을 헤쳐나갈 고도의 정치력을 가졌는지 걱정스럽다. 개혁의 당위성만 강조할 뿐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이나 로드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야당과의 협치는 고사하고, 그 흔한 당정 협의도 눈에 안 띈다. 민관이 머리를 맞대는 공청회도 별로 없다. 3대 개혁은 이해당사자의 대타협이 중요하다. 각자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순간 실패한다. 정부가 국민과 이해집단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행위를 끝없이 반복해도 될까 말까다. 일방통행식 행정과 구호·엄포만으로는 성과를 낼 수 없다. “3대 개혁은 정부 혼자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민·관·정 모두 머리를 맞대고 수용 가능한 개혁안을 도출해야 한다.”(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   셋째,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은 현실적인 걸림돌이다. 지지율은 민심의 바로미터다. 이명박 정부 초인 2008년 봄, 광우병 사태를 겪으면서 지지율이 21%까지 추락했다. 5년 내내 국정 동력 약화로 고전했다. 이번엔 광우병 같은 큰일이 없는데도 30%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중도층은 물론 보수층에서 이탈 조짐이 있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여론조사 방법에 의구심이 있다” “별로 참고하지 않는다”고 애써 의미를 깎아내린다. 그런 태도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총선 치른다고 1년을 또 보내면 어느덧 집권 후반기다. 3대 개혁 중 하나만이라도 성공하길 바라는 쪽으로 눈높이를 낮춰야 할지도 모르겠다. 고현곤 편집인

    2023.04.25 00:47

  • [세컷칼럼] 보면 볼수록 어색한 김병준의 전경련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한일 관계 개선의 전면에 등장한 건 반가운 일이다. 누가 뭐래도 전경련은 재계의 맏형이다. 2016년 K스포츠·미르재단 후원금 모금이 드러나고, 4대 그룹(삼성·SK·현대차·LG)이 탈퇴하면서 암흑기를 가졌다. 일본 경제단체 게이단렌(經團連)과 함께 ‘미래 파트너십 기금’ 조성을 계기로 양지로 나온 셈이다. 그런데 컴백 무대가 어색했다. 게이단렌 회장은 도쿠라 마사카즈 스미토모화학 회장. 1974년 사원으로 출발해 회장에 오른 전문경영인이다. 일본 재계의 어른으로 손색이 없다. 나란히 한 한국 재계 대표는 김병준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 일본 기업인과 한국 정부 인사가 손잡은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  「 정경유착으로 풍비박산 난 조직에 대통령 측근이 개혁 맡은 건 코미디 정부, 기업 동원한다는 오해 불러 정치 거리 둬야 하는 재계도 난감 」   회장 맡을 사람이 없어 궁여지책이라지만, 김병준의 전경련은 이상하다. 그는 기업인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노무현 정부 5년 내내 대통령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그 뒤 보수로 돌아서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윤석열 후보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았다. 2020년 총선 때 세종시에서 낙선했다. 그는 “전형적인 정치인이 아니라 34년을 대학에서 일한 학자”라고 했다.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기업인은 아니다. 전공 분야도 기업과 상관없는 지방자치·지방분권이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 공약에 ‘충청권 수도 이전’을 넣은 장본인이다. 2002년 대선의 1등 공신이다. 덕분에(?) 수많은 공무원·민원인이 정부 세종청사를 오가며 길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다. 세종시에 틀어박혀 세상 물정 모른 채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도 부지기수다.    김 회장은 자유시장경제 신봉자를 자처한다. 지난달 전경련에 들어가면서 “(노무현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경제·산업정책을 다뤘다.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이 왔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정책실장 때 시장 흐름을 무시한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시장이 왜곡되고, 집값은 치솟았다. 당시 “종합부동산세가 8배 오르자 세금 폭탄이라 하는데, 아직 멀었다”며 특정 지역·계층을 적대하는 정책으로 갈등을 키웠다. 지난 대선 때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그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경제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시장경제를 내세워 자유주의자처럼 행세한다.”    전경련은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조직이다. 김 회장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왔다”고 했다. 정치 때문에 망한 곳에 정권과 가까운 정치인이 들어앉아 개혁한다는 게 코미디다. 당장은 정부와 소통이 되고, 대통령 측근이 들어오니 힘도 붙는 것 같다. 한일 경제 사절단에 4대 그룹 총수가 참석하자 전경련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4대 그룹은 전경련이 아니라 대통령실이 요청해 참석한 것이다. 견강부회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어렵다고 남의 힘, 그것도 정치인의 힘을 빌리면 근본 해결이 안 된다. 훗날 독이 돼 돌아온다.    김 회장 개인으로도 위기를 자초한 셈이다. 자칫 ‘자리 사냥꾼’으로 비칠 수 있다. 2006년 교육정책 문외한이라는 비난에도 교육부총리를 맡았다가 중도 하차했다. 이번엔 고사했다고 한다. 3개월만 한다고 했다가 6개월로 늘렸다. 벌써 한 달 넘게 흘렀지만, 정상회담 같은 정부 일정 쫓아다니기 바쁘다.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이 있다. 윤석열 정부에도 좋을 게 없다. 정부 이벤트에 전경련을 들러리 세운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김 회장 앞세워 기업을 압박하는 모양새로 비칠 우려도 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전경련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용산은 개입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정말 뜻이 그렇다면 그를 말렸어야 했다.    가장 난감한 건 재계다. 정치와 거리를 두며 조심해 왔는데, 일이 꼬였다. 김 회장과 엮이는 순간 보수 정부에 줄 섰다는 구설에 휘말린다. 그렇다고 협조를 안 하자니 찜찜하다. 서슬 퍼런 정권 초인데… 후임 회장 찾기는 더 어려워졌다. 4대 그룹 전경련 복귀에 대해 김 회장은 “그렇게 먼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4대 그룹은 내키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정치색 짙은 김 회장이 들어가는 바람에 부담이 커졌다. 사업하기도 힘든데, 우리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 한다.”    게이단렌도 대기업 로비 창구라는 아픈 역사가 있다. 위기 속에서도 정치인·관료·학자 등 외부 인사를 회장으로 영입한 적이 없다. 기업 일은 기업 스스로 결정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지금은 정치 헌금을 끊고,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경제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상장사 1500여 곳이 회원으로 참여한다.    전경련은 기득권 유지와 재벌 옹호에 급급하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돼 있다. 회장을 못 찾아 이 사람 저 사람 등 떠민 게 20년이 넘었다. 정부 입김에서 벗어나 국민 신뢰를 받는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게이단렌이나 미국 상공회의소처럼 정부에 할 말은 할 수 있다. 그래야 회장을 하겠다는 인물이 나오고, 4대 그룹도 복귀할 것이다. 정파 냄새 물씬 풍기는 6개월 시한부 회장이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아닌 것 같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3.30 23:00

  • [고현곤 칼럼] 보면 볼수록 어색한 김병준의 전경련

    고현곤 편집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한일 관계 개선의 전면에 등장한 건 반가운 일이다. 누가 뭐래도 전경련은 재계의 맏형이다. 2016년 K스포츠·미르재단 후원금 모금이 드러나고, 4대 그룹(삼성·SK·현대차·LG)이 탈퇴하면서 암흑기를 가졌다. 일본 경제단체 게이단렌(經團連)과 함께 ‘미래 파트너십 기금’ 조성을 계기로 양지로 나온 셈이다. 그런데 컴백 무대가 어색했다. 게이단렌 회장은 도쿠라 마사카즈 스미토모화학 회장. 1974년 사원으로 출발해 회장에 오른 전문경영인이다. 일본 재계의 어른으로 손색이 없다. 나란히 한 한국 재계 대표는 김병준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 일본 기업인과 한국 정부 인사가 손잡은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  「 정경유착으로 풍비박산 난 조직에 대통령 측근이 개혁 맡은 건 코미디 정부, 기업 동원한다는 오해 불러 정치 거리 둬야 하는 재계도 난감 」    회장 맡을 사람이 없어 궁여지책이라지만, 김병준의 전경련은 이상하다. 그는 기업인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노무현 정부 5년 내내 대통령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그 뒤 보수로 돌아서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윤석열 후보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았다. 2020년 총선 때 세종시에서 낙선했다. 그는 “전형적인 정치인이 아니라 34년을 대학에서 일한 학자”라고 했다.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기업인은 아니다. 전공 분야도 기업과 상관없는 지방자치·지방분권이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 공약에 ‘충청권 수도 이전’을 넣은 장본인이다. 2002년 대선의 1등 공신이다. 덕분에(?) 수많은 공무원·민원인이 정부 세종청사를 오가며 길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다. 세종시에 틀어박혀 세상 물정 모른 채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도 부지기수다.   김 회장은 자유시장경제 신봉자를 자처한다. 지난달 전경련에 들어가면서 “(노무현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경제·산업정책을 다뤘다.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이 왔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정책실장 때 시장 흐름을 무시한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시장이 왜곡되고, 집값은 치솟았다. 당시 “종합부동산세가 8배 오르자 세금 폭탄이라 하는데, 아직 멀었다”며 특정 지역·계층을 적대하는 정책으로 갈등을 키웠다. 지난 대선 때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그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경제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시장경제를 내세워 자유주의자처럼 행세한다.”   전경련은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조직이다. 김 회장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왔다”고 했다. 정치 때문에 망한 곳에 정권과 가까운 정치인이 들어앉아 개혁한다는 게 코미디다. 당장은 정부와 소통이 되고, 대통령 측근이 들어오니 힘도 붙는 것 같다. 한일 경제 사절단에 4대 그룹 총수가 참석하자 전경련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4대 그룹은 전경련이 아니라 대통령실이 요청해 참석한 것이다. 견강부회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어렵다고 남의 힘, 그것도 정치인의 힘을 빌리면 근본 해결이 안 된다. 훗날 독이 돼 돌아온다.   김 회장 개인으로도 위기를 자초한 셈이다. 자칫 ‘자리 사냥꾼’으로 비칠 수 있다. 2006년 교육정책 문외한이라는 비난에도 교육부총리를 맡았다가 중도 하차했다. 이번엔 고사했다고 한다. 3개월만 한다고 했다가 6개월로 늘렸다. 벌써 한 달 넘게 흘렀지만, 정상회담 같은 정부 일정 쫓아다니기 바쁘다.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이 있다. 윤석열 정부에도 좋을 게 없다. 정부 이벤트에 전경련을 들러리 세운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김 회장 앞세워 기업을 압박하는 모양새로 비칠 우려도 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전경련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용산은 개입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정말 뜻이 그렇다면 그를 말렸어야 했다.   가장 난감한 건 재계다. 정치와 거리를 두며 조심해 왔는데, 일이 꼬였다. 김 회장과 엮이는 순간 보수 정부에 줄 섰다는 구설에 휘말린다. 그렇다고 협조를 안 하자니 찜찜하다. 서슬 퍼런 정권 초인데… 후임 회장 찾기는 더 어려워졌다. 4대 그룹 전경련 복귀에 대해 김 회장은 “그렇게 먼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4대 그룹은 내키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정치색 짙은 김 회장이 들어가는 바람에 부담이 커졌다. 사업하기도 힘든데, 우리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 한다.”   게이단렌도 대기업 로비 창구라는 아픈 역사가 있다. 위기 속에서도 정치인·관료·학자 등 외부 인사를 회장으로 영입한 적이 없다. 기업 일은 기업 스스로 결정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지금은 정치 헌금을 끊고,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경제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상장사 1500여 곳이 회원으로 참여한다.   전경련은 기득권 유지와 재벌 옹호에 급급하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돼 있다. 회장을 못 찾아 이 사람 저 사람 등 떠민 게 20년이 넘었다. 정부 입김에서 벗어나 국민 신뢰를 받는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게이단렌이나 미국 상공회의소처럼 정부에 할 말은 할 수 있다. 그래야 회장을 하겠다는 인물이 나오고, 4대 그룹도 복귀할 것이다. 정파 냄새 물씬 풍기는 6개월 시한부 회장이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아닌 것 같다. 고현곤 편집인

    2023.03.28 01:01

  • [세컷칼럼] 위기 때마다 은행이 문제였다

    1997년 외환위기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업이 빚을 내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다. 은행과 종합금융회사가 국제금융시장에서 외화(주로 일본자금)를 빌려 그 돈을 댔다. 금융의 기본을 잊은 채 단기로 차입해 장기로 빌려줬다. 그러다 아시아 신흥국 대외신인도에 문제가 생겼다. 만기 미스매치가 사태를 키웠다. 외화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다. 당시 국내 금융회사가 차입한 외화가 718억 달러. 외채 파티였다. 외화 물꼬를 터주고, 감독에 소홀했던 정부에 1차 책임이 있다. 빚으로 과잉 투자한 기업, 달러가 넘치자 과소비에 나선 국민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근원을 꼽으라면 외채로 이자 장사에 몰두한 은행이었다. 흔히 종금사를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여기지만 은행이 빌린 외화가 훨씬 많았다.   외환위기 여파로 은행은 인수·합병을 거쳐 재편됐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체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금으로 조성한 공적자금 160조원을 긴급 수혈받았다. 고비를 넘기자 도덕적 해이가 고개를 들었다. 임직원에게 무이자 대출을 해주고, 3년간 임원 보수를 두 배로 올렸다가 감사원에 적발됐다. ‘공적자금은 먼저 보는 게 임자’라는 말이 나왔다. 외채 파티에 이은 공적자금 파티였다. 급할 때 정부에 손 벌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흥청망청 쓰고, 대출금리는 다락같이 올리고…. 정부는 당황했다. 국민은 배신감을 느꼈다.   ■  「 외채로 이자 장사…외환위기 초래금융위기 때 지원받고 돈 안 풀어좋을 때 쉽게 벌고, 급하면 손 벌려정부 개입 반발 전에 자신 돌아봐야 」  2008년 금융위기 때 은행은 다시 국민을 배신했다. 어설픈 실력이 바로 드러났다. 입만 열면 초일류 은행, 메가뱅크를 외쳤지만 허울 좋은 신기루였다. 덩치만 커졌을 뿐 이자 장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정작 필요할 때 달러 한 푼을 구하지 못했다. 급기야 외화차입금을 갚아야 한다며 한국은행에 손을 벌렸다. 정부에는 해외차입 지급보증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위기 때마다 하던 대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급보증을 승인하면서 “은행이 고임금을 유지하면서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질책했다. 대통령 한마디에 놀란 은행들은 부랴부랴 보수를 삭감했다. ‘위기 극복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는 등 한바탕 쇼를 했다.   그때뿐이었다. 위기를 모면하자 은행 태도가 달라졌다. 혼자 살겠다며 돈을 움켜쥐고 시중에 풀지 않았다. 정부가 압박해도 소용없었다. 2009년 내내 기업은 돈이 마르고, 가계대출 금리는 치솟는 자금 경색이 이어졌다. “은행은 위기 상황에서도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었다.”(이명박 『대통령의 시간』) 얼마 뒤 KB국민과 신한은행 경영자들은 볼썽사나운 경영권 내분까지 벌였다.   지난해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에 이은 고금리가 닥치자 은행이 또 국민을 배신했다. 만만한 취약계층·소상공인을 상대로 이자 장사에 나섰다. 지난해 4대 은행(KB·신한·하나·우리) 이자 이익만 39조원을 넘었다. 경영을 갑자기 잘한 게 아니다. 순전히 고금리 때문에 떼돈을 벌었다. ‘횡재세’라도 거둬야 할 판이다. 영업이익 중 95% 안팎을 이자 장사로 채웠다. 선진국 은행은 60%대에 그친다. 지난해 예대금리 차가 2.21%포인트에서 2.55%포인트로 확대됐다. 금리 상승기에 예대금리 차가 커진다는 말은 핑계다. 대출받을 때 대번에 느끼는 것이지만, 은행은 갑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출 가산금리를 낮춰서 예대금리 차를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이를 외면하고 더 받아낸 이자로 1조원 넘는 성과급 파티를 벌였다. 배짱이 좋은 건지, 타성에 젖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은 공공재 성격이 강하다”고 경고하자 사회공헌을 3년간 10조원으로 늘리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알고 보니 실제 지원은 2800억원만 늘린 ‘뻥튀기’ 발표였다. 대출금리를 내리는 시늉을 하면서 예금금리는 더 많이 떨어뜨렸다. 눈가림으로 소나기만 피하자는 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은행 안팎에선 대통령 발언에 불만을 쏟아낸다. ‘민간 기업의 자율성을 해친다.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난다. 공공재 개념도 모르고 한 소리다.’ 관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은행이 자율과 시장경제를 내세우기에는 정부에 손을 너무 자주 벌렸다. 민망할 정도로. 공공재냐, 아니냐 논쟁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한 은행 관계자는 “사기업인 은행에 공익 지출을 강요해 체력이 떨어지면 위기 때 제 역할을 못 한다”고 말했다. 언제 은행이 그런 역할을 한 적이 있었나. 은행은 위기 때마다 버팀목이 아니었다. 시장 지배력에 안주하는 기득권이었다.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실물경제 침체가 깊어지면 은행도 부실이 쌓인다. 어려워지면 정부에 또 손을 벌릴 것이다. 고비를 넘기면 다시 이자 장사와 그들만의 성과급 파티를 할 것이다. 좋을 때는 민간 기업이라며 자기 호주머니 챙기다가, 나빠지면 공익성을 앞세워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후진적 경영 행태다. 기업은 세계 1위가 나오는데 은행은 세계 바닥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행들 주장처럼 정부 개입과 규제가 없었으면 지금보다 나은 모습을 보였을까. 의문 또 하나. 은행이 곤경에 처하면 정부가 지원해야 하나. 은행은 국민을 돕지 않는데, 국민은 은행을 도와야 하나.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3.02 2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