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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컷칼럼] 금융·통화정책의 뼈아픈 실책

    “원화 환율이 떨어지고, 주가가 다시 오릅니다. 물가는 2%대에서 안정을 찾아가고요.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더 좋아질 겁니다. 경제 체력이 예전과 다릅니다. 별일도 아닌데, 위기라고 호들갑 떨던 사람들 요새 쑥 들어갔네요.”    올봄에 만난 한 고위 관료는 호기롭게 말했다. 내심 그는 ‘내년 4월 총선까지 이대로’를 그렸을 것이다. 섣부른 낙관이었다. 3분기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6%. 마이너스 성장을 겨우 모면했다. 중동 사태까지 겹쳐 10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3.8%까지 치솟았다. 거의 모든 게 비싸졌다. 금융시장은 살얼음판이다. 언제 요동쳐도 이상하지 않다. 물가 불안과 저성장이 누적되면서 체감 경기는 하반기에 더 나빠졌다.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물가 상승) 우려도 커진다.   ■  「 집값·가계대출 겨우 잡히던 차에 정부 주도로 대출 완화…투기 불러 금리 동결도 시장에 잘못된 신호 물가안정 우선, 돈 풀면 위기 올 것 」   정부의 지나친 자신감은 뼈아픈 실책을 불렀다. 올 초 집값 급락을 막겠다며 정책자금인 특례보금자리론 40조원을 풀었다. 이 조치는 ‘부동산은 지금이 바닥’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시장에 보냈다. 내 집 마련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젊은이들이 빚을 내 집을 샀다. 소득 제한을 두지 않는 바람에 부유층도 이 대출을 받았다. 고금리 경기침체 시기에 부동산 투기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정부 주도로.    대출 규제를 푸니 쾌재를 부른 건 은행이다. ‘이자 장사’ 말고는 별다른 재주가 없는 은행들이 기다렸다는 듯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내놓았다. 가계대출은 4월 이후 매달 2조~7조원씩 늘었다. 9월 말 가계대출은 1877조원, 기업 대출 1238조 원, 정부부채 1100조원을 넘었다.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 4000조원 넘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셈이다.    정부는 정책 실패를 인정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은행이 느슨해진 대출을 걱정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한은은 서민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리한 대출이 서민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을 간과한 발언이다. 아니면 책임을 피하는 데 급급하거나.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과거 정부에서 유행한 영끌 대출·투자는 정말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정부가 앞장서 대출을 풀어 놓고 이제 와서 위험하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 현재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굳이 과거 정부의 잘못을 끌고 들어갈 필요가 있었나 싶다.    한은 통화정책도 ‘돈을 더 조이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준다. 한은은 지난 1월 기준금리를 3.5%로 올린 뒤 10개월째 동결했다. 그사이 미국은 기준금리를 4.5%에서 5.5%로 올렸다. 미국 기준금리는 한국보다 2%포인트나 높다. 정상은 아니다. 과거에는 한·미 금리 차가 1%포인트만 나도 걱정이 컸다.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원화 환율이 오르고 물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최근 위기감이 무뎌졌다. 다른 경제 관료의 말. “한국 경제가 커져서 미국과 2%포인트 금리 차에도 별 영향 없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한·미 금리 차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강조해 왔다. 안심해도 될까. 금리를 제때 올리지 않는 바람에 한·미 금리 차가 역전된 기간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세 번 있었다. 그때마다 큰일이 터졌다. 김대중 정부 1999~2001년(1.5%포인트 차)의 과잉 유동성 후유증으로 닷컴 버블과 카드 대란을 겪었다. 노무현 정부 2005~2007년(1%포인트 차)과 문재인 정부 2018~2020년(0.75%포인트 차)에는 부동산이 치솟았다. 그 여파로 노·문 두 정부는 대선에서 지고 정권을 잃었다.    “7%대 금리 시대에 대비하라”(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는 경고가 나올 정도로 미국은 고금리 기조에 변함이 없다. 미국이 긴축을 이어가면 우리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 애써 외면하면 시장금리는 따로 움직인다. 이미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중 최고 수준인 4%대에 진입했다. 기준금리와 시장금리의 괴리가 커질수록 통화정책에 불신이 쌓인다. 세수 부족과 적자 누적으로 재정정책이 마비된 상태에서 통화정책마저 고장 나면 정부가 쓸 카드가 없다. 총선을 앞두고 ‘공매도 금지’ 같은 무리한 단발성 대책에 매달리는 처지가 된다.    이 총재가 좀 더 강단 있게 처신했으면 한다. 예전 한은 총재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아 ‘양치기 소년’이라는 조롱을 들었다. 이 총재도 언제부턴가 발언의 무게감이 떨어진다. 지난달 “가계 부채가 안 잡히면 금리 인상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름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지만, 시장은 시큰둥하다. 그가 뭐라 말하든 결국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최우선 과제는 물가 안정이다. 집값도 더 떨어져야 한다는 확실한 신호를 줘야 한다. 미국 연준(Fed)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움직인다. 올해 정부와 한은이 정상적인 금융·통화정책을 폈으면 집값이 뛰고,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돈줄 조이는 게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돈을 풀면 더 큰 고통이 따른다. 김대기 실장 말처럼 외환위기의 몇십 배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글 = 고현곤 편집인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2023.11.09 23:00

  • [고현곤 칼럼] 금융·통화정책의 뼈아픈 실책

    고현곤 편집인 “원화 환율이 떨어지고, 주가가 다시 오릅니다. 물가는 2%대에서 안정을 찾아가고요.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더 좋아질 겁니다. 경제 체력이 예전과 다릅니다. 별일도 아닌데, 위기라고 호들갑 떨던 사람들 요새 쑥 들어갔네요.”   올봄에 만난 한 고위 관료는 호기롭게 말했다. 내심 그는 ‘내년 4월 총선까지 이대로’를 그렸을 것이다. 섣부른 낙관이었다. 3분기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6%. 마이너스 성장을 겨우 모면했다. 중동 사태까지 겹쳐 10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3.8%까지 치솟았다. 거의 모든 게 비싸졌다. 금융시장은 살얼음판이다. 언제 요동쳐도 이상하지 않다. 물가 불안과 저성장이 누적되면서 체감 경기는 하반기에 더 나빠졌다.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물가 상승) 우려도 커진다.     ■  「 집값·가계대출 겨우 잡히던 차에 정부 주도로 대출 완화…투기 불러 금리 동결도 시장에 잘못된 신호 물가안정 우선, 돈 풀면 위기 올 것 」    정부의 지나친 자신감은 뼈아픈 실책을 불렀다. 올 초 집값 급락을 막겠다며 정책자금인 특례보금자리론 40조원을 풀었다. 이 조치는 ‘부동산은 지금이 바닥’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시장에 보냈다. 내 집 마련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젊은이들이 빚을 내 집을 샀다. 소득 제한을 두지 않는 바람에 부유층도 이 대출을 받았다. 고금리 경기침체 시기에 부동산 투기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정부 주도로.   대출 규제를 푸니 쾌재를 부른 건 은행이다. ‘이자 장사’ 말고는 별다른 재주가 없는 은행들이 기다렸다는 듯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내놓았다. 가계대출은 4월 이후 매달 2조~7조원씩 늘었다. 9월 말 가계대출은 1877조원, 기업 대출 1238조 원, 정부부채 1100조원을 넘었다.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 4000조원 넘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셈이다.   정부는 정책 실패를 인정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은행이 느슨해진 대출을 걱정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한은은 서민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리한 대출이 서민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을 간과한 발언이다. 아니면 책임을 피하는 데 급급하거나.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과거 정부에서 유행한 영끌 대출·투자는 정말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정부가 앞장서 대출을 풀어 놓고 이제 와서 위험하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 현재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굳이 과거 정부의 잘못을 끌고 들어갈 필요가 있었나 싶다.   한은 통화정책도 ‘돈을 더 조이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준다. 한은은 지난 1월 기준금리를 3.5%로 올린 뒤 10개월째 동결했다. 그사이 미국은 기준금리를 4.5%에서 5.5%로 올렸다. 미국 기준금리는 한국보다 2%포인트나 높다. 정상은 아니다. 과거에는 한·미 금리 차가 1%포인트만 나도 걱정이 컸다.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원화 환율이 오르고 물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최근 위기감이 무뎌졌다. 다른 경제 관료의 말. “한국 경제가 커져서 미국과 2%포인트 금리 차에도 별 영향 없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한·미 금리 차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강조해 왔다. 안심해도 될까. 금리를 제때 올리지 않는 바람에 한·미 금리 차가 역전된 기간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세 번 있었다. 그때마다 큰일이 터졌다. 김대중 정부 1999~2001년(1.5%포인트 차)의 과잉 유동성 후유증으로 닷컴 버블과 카드 대란을 겪었다. 노무현 정부 2005~2007년(1%포인트 차)과 문재인 정부 2018~2020년(0.75%포인트 차)에는 부동산이 치솟았다. 그 여파로 노·문 두 정부는 대선에서 지고 정권을 잃었다.   “7%대 금리 시대에 대비하라”(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는 경고가 나올 정도로 미국은 고금리 기조에 변함이 없다. 미국이 긴축을 이어가면 우리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 애써 외면하면 시장금리는 따로 움직인다. 이미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중 최고 수준인 4%대에 진입했다. 기준금리와 시장금리의 괴리가 커질수록 통화정책에 불신이 쌓인다. 세수 부족과 적자 누적으로 재정정책이 마비된 상태에서 통화정책마저 고장 나면 정부가 쓸 카드가 없다. 총선을 앞두고 ‘공매도 금지’ 같은 무리한 단발성 대책에 매달리는 처지가 된다.   이 총재가 좀 더 강단 있게 처신했으면 한다. 예전 한은 총재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아 ‘양치기 소년’이라는 조롱을 들었다. 이 총재도 언제부턴가 발언의 무게감이 떨어진다. 지난달 “가계 부채가 안 잡히면 금리 인상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름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지만, 시장은 시큰둥하다. 그가 뭐라 말하든 결국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최우선 과제는 물가 안정이다. 집값도 더 떨어져야 한다는 확실한 신호를 줘야 한다. 미국 연준(Fed)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움직인다. 올해 정부와 한은이 정상적인 금융·통화정책을 폈으면 집값이 뛰고,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돈줄 조이는 게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돈을 풀면 더 큰 고통이 따른다. 김대기 실장 말처럼 외환위기의 몇십 배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고현곤 편집인

    2023.11.07 00:46

  • [고현곤 칼럼] 문재인 정부 통계 조작이 특히 나쁜 이유

    고현곤 편집인 숫자는 무서운 힘을 갖는다. 10은 10이다. 100이 될 수 없다. 평가와 판단의 객관적 근거가 된다. 아무리 유능한 경영자도 매출·이익이 저조하면 버티기 힘들다. 성장률이 둔화되거나 실업자가 늘면 정부가 궁지에 몰린다. 그렇다고 숫자가 늘 명료한 건 아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낳는다.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하면 진실을 가릴 수 있다. 그래서 더 무섭다.     ■  「 2016년부터 통계 사전 요구는 불법 실무자 일탈 아닌 조직적 개입 의혹 통계 중요성 잘 아는 경제학자 가담 조작 사실이라면 국민을 속인 범죄 」    올해 30대 그룹의 여성 임원 비중은 6.9%다. 5년 전엔 3.2%였다. 여성 임원 비중이 5년 새 두 배로 늘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여성 임원이 6.9%에 불과해 갈 길이 멀다. 삼성이 여성 임원 157명으로 가장 많지만, 비중은 7.5%로 30대 그룹 중간이다. 전체 임원이 많으니 여성 임원도 많았을 뿐이다. 보이는 숫자만 보거나 입맛대로 해석하면 오류에 빠진다.    명료한 듯 명료하지 않은 숫자의 맹점을 이용해 눈속임을 하는 ‘숫자놀음’이 여전하다. 실적을 내야 하는 정부와 민간 공히 유혹에 빠진다. 기업설명회(IR) 때 속지 않으려면 비교 시점을 잘 봐야 한다.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줄었는데, 전 분기보다는 늘었으면 기업은 전 분기 대비 증가율을 앞세운다. 지난해보다 이익이 감소한 건 덮어두고, 올해 목표치를 넘어선 점만 강조하기도 한다. ‘최대 50% 할인’. 수많은 품목 중 한두 개만 50% 할인해도 이렇게 선전한다.   정부는 불리한 숫자를 쏙 빼는 방식을 즐겨 쓴다. 1997년 11월 외환보유액이 100억 달러 남짓으로 바닥이었다. 정부는 이를 감추고 ‘펀더멘털에 문제 없다’는 말만 반복하다 외환위기를 맞았다. 2019년 초 기획재정부는 유리한 지표만 골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자료를 발표했다. 자료에 17년 만의 최고치인 실업률과 9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선 설비투자는 넣지 않았다. 나쁜 경제지표의 발표 시기를 선거 후로 늦추거나 불리한 숫자가 나온 보고서를 발표하지 않는다.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조사 방식이나 산출 기준을 유리하게 바꾸기도 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는 게 숫자에 손대는 통계 조작이다. 예전에도 있었다. 90년 일부 시·도가 예산을 더 타려고 인구를 허위로 늘렸다. 시·도가 신고한 인구를 모두 합치니 실제 인구보다 50만명이나 많았다. 2001년 노동부 산하 고용센터는 취업자 수를 부풀렸다. 취업한 근로자를 다시 실적에 포함하거나 아르바이트생을 취업자로 변조하는 수법을 썼다. 2006년 정부는 서울 강남 3구 아파트 실거래가가 3~6월 14.4%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집값이 치솟던 시기여서 뜻밖의 결과였다. 알고 보니 3월에 A, B, C 아파트의 실거래가를 평균하고, 6월엔 C, D 아파트를 평균한 뒤 등락률을 구했다. 다른 아파트의 값을 비교해 마이너스 숫자를 끌어낸 황당한 조작이었다.   감사원이 최근 문재인 정부의 통계 조작 의혹을 제기하자 일각에서 “예전에도 있던 일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과거에 있었으니 지금 해도 된다는 사고는 위험하다. 그보다 더 나쁜 이유가 있다. 첫째, 2016년 이후 통계를 공표 전에 누설하거나 외압을 행사하면 법 위반이다. 당시 신설된 통계법 27조 2항은 누구든 공표 전 통계를 받아보는 것을 불법으로 못박고 있다.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사람이 김현미 의원이었다. 감사원에 따르면 바로 그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한국부동산원에 ‘주중치’와 ‘속보치’를 사전에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둘째, 문재인 정부 수뇌부가 집권 내내 부동산·소득·고용 통계 조작에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예전처럼 한두 기관이나 일선 실무자의 일탈이 아니라고 한다. “협조하지 않으면 조직과 예산을 다 날린다.” “서울 상승률 0.05%, 안 되면 전주(0.06%)에 맞춰라.” 협박에 가까운 노골적 지시는 군사정권을 떠올리게 한다. 민주화에 헌신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거꾸로 돌린 것이다.   셋째, 감사원이 통계 조작 혐의로 수사 의뢰한 22명 가운데 장하성·김상조·홍장표·황덕순·강신욱 등 경제학자들이 대거 포함됐다. 경제학은 통계적 방법으로 이론을 검증하는 학문이다. 숫자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경제학자는 통계의 정확성·중립성·일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그들이 조작을 주도했다면 경제학의 신뢰를 허무는 심각한 일이다.   문 전 대통령은 감사원 발표 다음 날 “문재인 정부 고용률이 사상 최고였다”고 주장했다. 통계 조작이 문제가 됐는데, 동문서답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2018~2021년 고용률은 60% 선에 그쳤다. 사상 최고라고 자랑한 2022년(62.1%)은 5월에 정권이 바뀌었으니 오롯이 문재인 정부 성과로 볼 수 없다. 그리스는 재정 통계를 속였다가 부도 위기에 몰려 9년간 구제금융을 받았다. 중국 통계는 지금도 믿을 수 없다. 경제가 나빠져도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되니 처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정부 통계는 정책 결정의 근간이 된다. 유리한 통계만 골라 써도 오판을 부르는데, 통계 자체를 조작했을 때의 부작용은 말해 무엇하랴. 국민을 속이고, 수렁에 빠뜨리는 범죄다. 고현곤 편집인

    2023.10.10 00:54

  • [세컷칼럼]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지금?

    필자가 고3이던 1980년 7월 말이었다. 한 친구가 여름 보충수업 중인 교실 문을 열고 외쳤다. “본고사 없어졌다.” 선생님은 “날이 더우니 헛소리를 다 하네”라며 혀를 찼다. 사실이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했다. 당시 본고사가 너무 까다로워 원성이 자자했다. 고액 과외가 성행했다. 문제는 일방적으로 결정해 급하게 밀어붙인 데 있었다. 입시 3개월 앞두고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 모두 우왕좌왕했다. 그해 11월, 예비고사(지금의 수학능력시험)만으로 81년도 입시를 치렀다. 진학지도 정보가 없어 선생님들이 손을 놓았다. 이 성적으로 어느 대학에 응시할지 알 길이 없었다. 요행을 노린 배짱 지원과 미달 사태로 뒤죽박죽이 됐다. ‘점쟁이만 특수를 누렸다’는 웃지 못할 보도가 나왔다. 혼란은 이듬해 입시에서도 이어졌다.   ■  「 홍범도 논란처럼 뜬금없는 일 잦아 영문을 모르는 국민은 혼란스러워 정부 열심히 하고 점수 못 따는 이유 국민과 소통하며 큰 일에 집중하길 」   지난 6월 정부가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기로 한 취지에 공감한다. 교과 밖 킬러 문항으로 수험생을 골탕 먹여선 안 된다. 교육계에 이권 카르텔이 있다면 당연히 손봐야 한다. 그런데 흔쾌하지는 않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다들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수능이 코앞에 닥쳤지만, 어떤 게 킬러 문항인지 여전히 헷갈린다. 지난주 킬러 문항을 뺀 처음이자 마지막 모의평가를 치렀다. 과목별로 변별력 논란이 이어진다. 수학 만점자가 3000여 명인 의대 정원보다 많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물수능 기대감으로 N수생이 역대 최대로 늘었다. 입시는 더 치열해진 셈이다. N수생이 몰려들며 입시 학원은 장사가 더 잘된다. 재학생이 빠져나가면서 대학은 비상이 걸렸다. 입시제도를 갑자기 바꿔서 생긴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홍 장군의 공산당 이력을 문제 삼았다. 그가 활동한 1920년대는 레닌의 공산당 시절이다. 김일성을 앞세워 6·25 남침을 한 스탈린의 공산당과는 다르다. 홍 장군은 해방 전인 1943년 작고했다. 독립군을 몰살한 1921년 자유시 참변에 참여했다는 증거도 없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당시 중립을 지켰다”(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정부가 사실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 이전을 강행하는 느낌이다. 국방부 대변인은 “(자유시 참변에 참여했다는) 문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가 기자들이 따지자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라고 번복했다. 오락가락하며 신뢰를 못 준다. 문재인 정부에서 의도를 갖고 일방적으로 추진했다고 똑같은 방법으로 응수하면 똑같은 수준이 된다. 역사 논쟁과 이념 싸움으로 흐르는 바람에 광주시 정율성 공원의 부당함을 공격할 기회도 놓쳤다.    5년여 육군사관학교에 있던 흉상을 치우려면 국민이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국방부는 “군의 정체성을 바로잡기 위한 정상화 조치”라고 했다. 그럴수록 정부 단독으로 결정해선 안 된다. 전문가와 관련 단체 의견을 듣고, 공론화 과정도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외부 학계와 협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국방부 입장은 위험한 생각이다. 절차를 건너뛰면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논란이 꼬리를 물게 된다. 육사 흉상을 옮기면서 국방부 흉상은 놔둬도 되나? 정부가 잠수함 ‘홍범도함’ 함명 변경도 검토하자 해군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졸속으로 처리했다가 자칫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흉상을 이리저리 옮기는 소동이 벌어질 수 있다. 독립운동 최고의 전과를 올린 청산리 전투의 홍 장군을 욕보이는 일이다.    정부가 불쑥 일을 진행해 혼선과 갈등을 빚은 게 처음이 아니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이 그랬고, 주 52시간제 개편, 만 5세 입학, 서울~양평고속도로 백지화,  최근 의경 신설까지 충분한 공감대 없이 추진했다가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켰다. ‘중요한 현안도 많은데, 굳이 지금 이 일로 분란을?’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정부 내엔 ‘옳은 일 하는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하다. 옳더라도 서두르면 탈이 난다. 국민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예전에는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언론에 흘려 반응을 보고, 여론이 좋지 않으면 슬그머니 접기도 했다. 공청회라도 열어 군불을 때기도 했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 때 금융실명제나 하나회 척결처럼 전격 단행한 개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국민 의견을 다지고 다져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킬러 문항 폐지나 흉상 이전이 금융실명제처럼 밀어붙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여론조사를 보면 국정 수행이 ‘일방적·독단적’이라는 응답이 5% 이상 나온다. 지난달 말 한국리서치 등의 조사에선 21%에 달했다. 충분한 소통 없이 추진하는 게 많은 탓이다. 정부가 열심히 하고도 점수를 못 따는 이유다. 정부가 느닷없이 발표하고, 국민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작은 싸움으로 힘 빼지 말고 큰일에 집중했으면 한다. 대내외 경제 여건이 갈수록 심상치 않다. 규제 개혁과 3대 개혁(노동·교육·연금) 같은 진짜 큰 현안은 제대로 손도 안 댔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윤지수 인턴기자

    2023.09.14 23:00

  • [고현곤 칼럼]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지금?

    고현곤 편집인 필자가 고3이던 1980년 7월 말이었다. 한 친구가 여름 보충수업 중인 교실 문을 열고 외쳤다. “본고사 없어졌다.” 선생님은 “날이 더우니 헛소리를 다 하네”라며 혀를 찼다. 사실이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했다. 당시 본고사가 너무 까다로워 원성이 자자했다. 고액 과외가 성행했다. 문제는 일방적으로 결정해 급하게 밀어붙인 데 있었다. 입시 3개월 앞두고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 모두 우왕좌왕했다. 그해 11월, 예비고사(지금의 수학능력시험)만으로 81년도 입시를 치렀다. 진학지도 정보가 없어 선생님들이 손을 놓았다. 이 성적으로 어느 대학에 응시할지 알 길이 없었다. 요행을 노린 배짱 지원과 미달 사태로 뒤죽박죽이 됐다. ‘점쟁이만 특수를 누렸다’는 웃지 못할 보도가 나왔다. 혼란은 이듬해 입시에서도 이어졌다.     ■  「 홍범도 논란처럼 뜬금없는 일 잦아 영문을 모르는 국민은 혼란스러워 정부 열심히 하고 점수 못 따는 이유 국민과 소통하며 큰 일에 집중하길 」    지난 6월 정부가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기로 한 취지에 공감한다. 교과 밖 킬러 문항으로 수험생을 골탕 먹여선 안 된다. 교육계에 이권 카르텔이 있다면 당연히 손봐야 한다. 그런데 흔쾌하지는 않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다들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수능이 코앞에 닥쳤지만, 어떤 게 킬러 문항인지 여전히 헷갈린다. 지난주 킬러 문항을 뺀 처음이자 마지막 모의평가를 치렀다. 과목별로 변별력 논란이 이어진다. 수학 만점자가 3000여 명인 의대 정원보다 많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물수능 기대감으로 N수생이 역대 최대로 늘었다. 입시는 더 치열해진 셈이다. N수생이 몰려들며 입시 학원은 장사가 더 잘된다. 재학생이 빠져나가면서 대학은 비상이 걸렸다. 입시제도를 갑자기 바꿔서 생긴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홍 장군의 공산당 이력을 문제 삼았다. 그가 활동한 1920년대는 레닌의 공산당 시절이다. 김일성을 앞세워 6·25 남침을 한 스탈린의 공산당과는 다르다. 홍 장군은 해방 전인 1943년 작고했다. 독립군을 몰살한 1921년 자유시 참변에 참여했다는 증거도 없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당시 중립을 지켰다”(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정부가 사실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 이전을 강행하는 느낌이다. 국방부 대변인은 “(자유시 참변에 참여했다는) 문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가 기자들이 따지자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라고 번복했다. 오락가락하며 신뢰를 못 준다. 문재인 정부에서 의도를 갖고 일방적으로 추진했다고 똑같은 방법으로 응수하면 똑같은 수준이 된다. 역사 논쟁과 이념 싸움으로 흐르는 바람에 광주시 정율성 공원의 부당함을 공격할 기회도 놓쳤다.   5년여 육군사관학교에 있던 흉상을 치우려면 국민이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국방부는 “군의 정체성을 바로잡기 위한 정상화 조치”라고 했다. 그럴수록 정부 단독으로 결정해선 안 된다. 전문가와 관련 단체 의견을 듣고, 공론화 과정도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외부 학계와 협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국방부 입장은 위험한 생각이다. 절차를 건너뛰면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논란이 꼬리를 물게 된다. 육사 흉상을 옮기면서 국방부 흉상은 놔둬도 되나? 정부가 잠수함 ‘홍범도함’ 함명 변경도 검토하자 해군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졸속으로 처리했다가 자칫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흉상을 이리저리 옮기는 소동이 벌어질 수 있다. 독립운동 최고의 전과를 올린 청산리 전투의 홍 장군을 욕보이는 일이다.   정부가 불쑥 일을 진행해 혼선과 갈등을 빚은 게 처음이 아니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이 그랬고, 주 52시간제 개편, 만 5세 입학, 서울~양평고속도로 백지화,  최근 의경 신설까지 충분한 공감대 없이 추진했다가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켰다. ‘중요한 현안도 많은데, 굳이 지금 이 일로 분란을?’이라는 의문이 생긴다. 정부 내엔 ‘옳은 일 하는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하다. 옳더라도 서두르면 탈이 난다. 국민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 예전에는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언론에 흘려 반응을 보고, 여론이 좋지 않으면 슬그머니 접기도 했다. 공청회라도 열어 군불을 때기도 했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 때 금융실명제나 하나회 척결처럼 전격 단행한 개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국민 의견을 다지고 다져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킬러 문항 폐지나 흉상 이전이 금융실명제처럼 밀어붙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여론조사를 보면 국정 수행이 ‘일방적·독단적’이라는 응답이 5% 이상 나온다. 지난달 말 한국리서치 등의 조사에선 21%에 달했다. 충분한 소통 없이 추진하는 게 많은 탓이다. 정부가 열심히 하고도 점수를 못 따는 이유다. 정부가 느닷없이 발표하고, 국민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작은 싸움으로 힘 빼지 말고 큰일에 집중했으면 한다. 대내외 경제 여건이 갈수록 심상치 않다. 규제 개혁과 3대 개혁(노동·교육·연금) 같은 진짜 큰 현안은 제대로 손도 안 댔다. 고현곤 편집인

    2023.09.12 01:09

  • [세컷칼럼]원희룡 장관의 불편한 처신

    지난 주말 오전, 서울 잠실에서 양평군청까지 40㎞ 가는 데 1시간40분 걸렸다. 6번 국도는 주말 교통체증으로 악명이 높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추진한 게 서울~양평 고속도로다. 12만 양평 군민은 물론 여기를 지나다니는 누구나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고속도로가 생기면 잠실에서 양평군청까지 30분 남짓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사업이 전격 중단된 지 40일 흘렀다. 언제 재개할지 기약이 없다. 다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꼬인 실타래를 풀지 못한다. 정쟁에 볼모로 잡힌 국민이 피해를 본다. 여야 정치권이야 늘 그렇다 치고, 이번엔 정부가 일을 키웠다. 당초 의혹이 제기됐을 때 노선이 언제 어떻게 변경됐는지 점검해 보면 될 일이었다. 절차에 문제가 없으면 예정대로 진행하고,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된다. 터무니없는 의혹이었다면 유포자를 색출해 고발해야 한다. 이건 정부의 권한이자 책무이기도 하다.   ■  「 양평고속도 표류 40일, 재개 불투명 피해는 국민 몫, 서둘러 정상화해야 장관, 싸움닭 아닌 나라의 심부름꾼 정치 내려놓고 국민만 보고 일하길 」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백지화 발표는 엉뚱했다. 정부가 해야 할 검증 절차를 무시하고, 건너뛰었다. 대통령 부인이 거론된 만큼 오해 없도록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는데,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임기 끝까지 의혹에 시달리기보다 책임지고 손절하겠다.” “정말 필요하다면 다음 정부에서 하라.” 논리가 약하고, 비약이 심했다. 구설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일념뿐인 듯했다. 백지화로 인한 피해를 두루 고심한 흔적은 없었다.    그는 “장관직을 걸겠다”고 했다. 지난해 1기 신도시 재건축이 논란이 됐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지체되지 않도록 장관직을 걸고 약속드리겠다.” 장관직이 전가의 보도처럼 쓸 수 있는 대단한 감투라고 여기는 듯하다.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 장관은 늘공(늘 공무원, 직업 공무원)이 정무감각이 떨어져 괜한 의혹을 샀다는 취지로도 얘기했다. 자신의 조직을 늘공과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갈라치기한 건 잘못이다.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공무원들이 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나. 게다가 책임을 늘공 탓으로 돌렸다. ‘남 탓’은 위아래, 좌·우파 가릴 것 없이 대한민국의 고질병이 됐다. 잼버리 파행을 놓고도 낯 뜨거운 남 탓 공방이 한창이다.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지역 숙원사업이다. 종점으로 원안(양서면)과 변경안(강상면), 나들목 추가안(강하IC) 중 어느 게 나은지는 전문가가 판단할 영역이다. 분명한 건 어떤 형태로든 서둘러 재개하는 게 맞다. 원 장관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쏟아놓은 말을 주워담을 묘안이 없다. 스스로 퇴로를 막았다. 좋게 보면 배수진이요, 엄밀히 말하면 자충수다. 지금 가장 고민스러운 사람은 원 장관이다. 사람들이 꽉 막힌 6번 국도를 지날 때마다 그를 떠올릴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는 퇴로를 뚫느라 말을 계속 바꾼다. ‘민주당이 사과하면 공사를 재개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민주당은 사과할 생각이 없다. 조국 사태 때 보았듯 눈앞에 증거를 들이밀어도 꿈쩍 안 한다. 원 장관의 발언 수위는 점점 누그러지고, 부연 설명은 길어진다. “실제로는 (백지화가 아니라) 중단이다. 무기한 끌다 보면 무산될 수도 있다.” “민주당이 사과하면 제일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문가와 양평 주민의 의견을 반영해 고속도로를 최대한 빨리 놓겠다.” 사업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헷갈린다. 이럴 거면 처음에 왜 백지화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국토부는 ‘충격요법’이었다고 설명했는데, 부적절하다. 국민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떠봤다는 건가.    국민이 피해를 보는 마당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다. 우선 1조8000억원 국책사업을 장관 한 사람이 뒤집을 수 있는 건지 따져봐야 한다. 장관의 힘이 셌던 박정희 정부에서도 본 적이 없다. 원 장관은 “대통령과 논의 없이 독자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아니라면 적어도 총리나 예산권을 가진 경제부총리와는 상의했어야 했다. 혼자 결정해 발표했다면 국정 시스템이 너무 허술한 것이다. 혼자 한 게 아니라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문제다. 대통령과 총리, 각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키는 것도 이상하다. 전 국민의 관심사로 불거진 만큼 원 장관에게만 맡겨둘 일은 아니다. 힘을 실어주든, 책임을 묻든 뭐라도 분명한 정부 입장이 있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원 장관은 최전방 돌격대를 자처했다. 지난 대선 때 인기를 끈 ‘대장동 1타 강사’에서 자신감을 얻었는지 거침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존재감이 높아지는 듯하지만, 지나치면 자신을 갉아먹는다. 그는 정치판의 싸움닭이 아니라 나라의 심부름꾼, 공복(公僕)이다. “제발 이렇게 하지 마시고 국민을 위해 일해 주십시오”라는 양평군 주민의 하소연을 가슴에 담기 바란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온 공복의 자세를 깊이 새겼으면 한다. 대권을 꿈꾼다면 더더욱 그렇다.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남이 끌어내리고, 스스로 낮추는 사람은 남이 올려준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인턴기자 윤지수 

    2023.08.17 23:00

  • [고현곤 칼럼] 원희룡 장관의 불편한 처신

    고현곤 편집인 지난 주말 오전, 서울 잠실에서 양평군청까지 40㎞ 가는 데 1시간40분 걸렸다. 6번 국도는 주말 교통체증으로 악명이 높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추진한 게 서울~양평 고속도로다. 12만 양평 군민은 물론 여기를 지나다니는 누구나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고속도로가 생기면 잠실에서 양평군청까지 30분 남짓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사업이 전격 중단된 지 40일 흘렀다. 언제 재개할지 기약이 없다. 다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꼬인 실타래를 풀지 못한다. 정쟁에 볼모로 잡힌 국민이 피해를 본다. 여야 정치권이야 늘 그렇다 치고, 이번엔 정부가 일을 키웠다. 당초 의혹이 제기됐을 때 노선이 언제 어떻게 변경됐는지 점검해 보면 될 일이었다. 절차에 문제가 없으면 예정대로 진행하고,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된다. 터무니없는 의혹이었다면 유포자를 색출해 고발해야 한다. 이건 정부의 권한이자 책무이기도 하다.     ■  「 양평고속도 표류 40일, 재개 불투명 피해는 국민 몫, 서둘러 정상화해야 장관, 싸움닭 아닌 나라의 심부름꾼 정치 내려놓고 국민만 보고 일하길 」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백지화 발표는 엉뚱했다. 정부가 해야 할 검증 절차를 무시하고, 건너뛰었다. 대통령 부인이 거론된 만큼 오해 없도록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는데,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임기 끝까지 의혹에 시달리기보다 책임지고 손절하겠다.” “정말 필요하다면 다음 정부에서 하라.” 논리가 약하고, 비약이 심했다. 구설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일념뿐인 듯했다. 백지화로 인한 피해를 두루 고심한 흔적은 없었다.   그는 “장관직을 걸겠다”고 했다. 지난해 1기 신도시 재건축이 논란이 됐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지체되지 않도록 장관직을 걸고 약속드리겠다.” 장관직이 전가의 보도처럼 쓸 수 있는 대단한 감투라고 여기는 듯하다.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 장관은 늘공(늘 공무원, 직업 공무원)이 정무감각이 떨어져 괜한 의혹을 샀다는 취지로도 얘기했다. 자신의 조직을 늘공과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갈라치기한 건 잘못이다.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공무원들이 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나. 게다가 책임을 늘공 탓으로 돌렸다. ‘남 탓’은 위아래, 좌·우파 가릴 것 없이 대한민국의 고질병이 됐다. 잼버리 파행을 놓고도 낯 뜨거운 남 탓 공방이 한창이다.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지역 숙원사업이다. 종점으로 원안(양서면)과 변경안(강상면), 나들목 추가안(강하IC) 중 어느 게 나은지는 전문가가 판단할 영역이다. 분명한 건 어떤 형태로든 서둘러 재개하는 게 맞다. 원 장관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쏟아놓은 말을 주워담을 묘안이 없다. 스스로 퇴로를 막았다. 좋게 보면 배수진이요, 엄밀히 말하면 자충수다. 지금 가장 고민스러운 사람은 원 장관이다. 사람들이 꽉 막힌 6번 국도를 지날 때마다 그를 떠올릴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는 퇴로를 뚫느라 말을 계속 바꾼다. ‘민주당이 사과하면 공사를 재개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민주당은 사과할 생각이 없다. 조국 사태 때 보았듯 눈앞에 증거를 들이밀어도 꿈쩍 안 한다. 원 장관의 발언 수위는 점점 누그러지고, 부연 설명은 길어진다. “실제로는 (백지화가 아니라) 중단이다. 무기한 끌다 보면 무산될 수도 있다.” “민주당이 사과하면 제일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문가와 양평 주민의 의견을 반영해 고속도로를 최대한 빨리 놓겠다.” 사업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헷갈린다. 이럴 거면 처음에 왜 백지화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국토부는 ‘충격요법’이었다고 설명했는데, 부적절하다. 국민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떠봤다는 건가.   국민이 피해를 보는 마당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다. 우선 1조8000억원 국책사업을 장관 한 사람이 뒤집을 수 있는 건지 따져봐야 한다. 장관의 힘이 셌던 박정희 정부에서도 본 적이 없다. 원 장관은 “대통령과 논의 없이 독자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아니라면 적어도 총리나 예산권을 가진 경제부총리와는 상의했어야 했다. 혼자 결정해 발표했다면 국정 시스템이 너무 허술한 것이다. 혼자 한 게 아니라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문제다. 대통령과 총리, 각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키는 것도 이상하다. 전 국민의 관심사로 불거진 만큼 원 장관에게만 맡겨둘 일은 아니다. 힘을 실어주든, 책임을 묻든 뭐라도 분명한 정부 입장이 있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원 장관은 최전방 돌격대를 자처했다. 지난 대선 때 인기를 끈 ‘대장동 1타 강사’에서 자신감을 얻었는지 거침없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존재감이 높아지는 듯하지만, 지나치면 자신을 갉아먹는다. 그는 정치판의 싸움닭이 아니라 나라의 심부름꾼, 공복(公僕)이다. “제발 이렇게 하지 마시고 국민을 위해 일해 주십시오”라는 양평군 주민의 하소연을 가슴에 담기 바란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온 공복의 자세를 깊이 새겼으면 한다. 대권을 꿈꾼다면 더더욱 그렇다.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남이 끌어내리고, 스스로 낮추는 사람은 남이 올려준다.’ 고현곤 편집인

    2023.08.15 00:58

  • [고현곤 칼럼] 후쿠시마 오염수가 광우병처럼 안되려면

    고현곤 편집인 2008년 4월 말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는 최악이었다. 한미 쇠고기 협상과 시중 괴담을 교묘히 엮었다. 당시 광우병 담당 부장이었던 필자는 편집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기억이 있다. “미국인들은 피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먹고도 문제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무시해도 된다.” 경솔한 판단이었다. 말이 안 되는 건 맞는데, 무시할 건 아니었다.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두 달여 전국 곳곳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  「 오염수와 한일관계 복원, 별개 문제 국민건강 이슈 쉽게 생각해선 안돼 횟집 먹방으로 야당 괴담 못 이겨 ‘정부는 국민 편’ 신뢰 쌓는게 급선무 」    광우병 사태가 남긴 교훈이 있다.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국민 건강 이슈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다. 이명박 대통령의 첫 반응은 “광우병 우려해서 쇠고기를 못 먹는 국민이 어디 있느냐”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광풍이 몰아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여고생들이 ‘동방신기가 광우병에 걸린다’며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어처구니없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두 달 후 이 대통령은 “시급한 현안이라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챙겨야 했다”고 통렬한 반성문을 읽어야 했다.   한미 쇠고기 협상의 얼개를 짠 건 이명박 정부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다. 최종 타결을 차일피일 미루다 차기 정부에 떠넘겼다. 그걸 이 대통령이 덜컥 서명했다가 뒤집어썼다. 협상의 전후 사정을 잘 아는 노무현 정부 사람들은 촛불 집회가 들불처럼 번질 때 침묵했다. 수습은 이명박 정부의 몫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 뜻을 수렴하고, 신뢰를 쌓았으면 그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에서 광우병 사태가 오버랩된다. 일본 정부가 해양 방류를 확정한 건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4월이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국회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기준에 맞는 적합한 절차를 따른다면 굳이 반대할 건 없다”고 말했다. 다시 그런 말을 해줄 리 없다. 오롯이 윤석열 정부가 감당할 짐이 됐다. 어촌, 횟집 등 관계자가 많고, 피해도 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이다. 거북하고 민감한 상대다. 서투르게 대처하면 후폭풍이 불가피한 구도다.   정부는 이미 몇 차례 실수를 했다. 한덕수 총리는 지난달 “안전 기준에 맞는다면 오염수를 마실 수 있다”고 말했다. 광우병 사태 때는 총리를 비롯해 각료들이 뒤에 숨는 바람에 일을 키웠다. 이번에 한 총리가 용감하게 총대를 멘 것까진 좋은데, 너무 나갔다. 일본 총리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박구연 국무조정실 1차장은 “해양 방류 방식이 안정성을 고려했을 때 가장 현실적 대안”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듯한 발언이다. IAEA 보고서도 안 나왔을 때였다.   오염수는 한일 관계 복원과 별개의 문제다. 전적으로 일본의 문제이고, 일본의 책임이다. 우리는 손톱만큼의 불안감도 없는지 꼼꼼하게 따져야 할 입장이다. 우리가 공격이고, 일본이 수비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가 수비를 하는 듯하다. 한술 더 떠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을 요구했다. 이웃 국가를 난처하게 하는 처사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방류 정보를 공유하고, 한국 전문가가 점검에 참여토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아직 이렇다 할 답변이 없다. 일본이 머뭇거리면 더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진보 진영이 이 틈을 놓칠 리 없다. 괴담을 쏟아낸다. 예전에 해온 대로다. 2002년 효순·미선양 사고를 계기로 반미를 부추겼다. 여세를 몰아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광우병·천안함 괴담으로 이명박 정부를 흔들었다. 사드 전자파 논란은 박근혜 정부에 흠집을 냈다. 이번에는 반일로 세력 결집을 꿈꾼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우물에 독극물 풀어넣기”라고 말했다. 정확한 실체를 모를 텐데, 사실인 듯 얘기했다.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의 자세는 아니다.   괴담은 전파력과 파괴력이 엄청나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 걸린다’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강렬하다.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복잡한 과학적 설명이 필요하다. 바로잡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광우병 사태는 온 국민이 쇠고기 전문가가 되고 나서야 일단락됐다. 법원이 PD수첩의 다섯 쟁점 중 세 개가 허위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3년 넘게 흐른 뒤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여당은 횟집 먹방으로 맞섰다. 썩 좋은 방법이 아니다. 미덥지 않은 정치인 쇼를 보고 국민이 안심할 수 있을까. 반감을 키울 뿐이다. 일본 원정 시위를 간 야당이나 오십보백보다. 광우병 사태 때처럼 괴담으로 치부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오염수 방류가 ‘걱정된다’는 응답(한국갤럽)이 78%나 되는 건 엄연한 현실이다. ‘다른 나라는 조용한데 한국만 호들갑’ ‘괴담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식의 대응은 위험하다. 자칫 국민을 우매하게 여기거나 걱정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보여주기 이벤트나 여론몰이로는 괴담을 넘어설 수 없다. 괴담을 이기는 건 기본적으로 과학이다. 더 중요한 건 ‘정부는 국민 편’이라는 신뢰다. 이건 과학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다. 정권의 진짜 실력을 보여줘야 하는 까다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고현곤 편집인

    2023.07.18 01:00

  • [세컷칼럼] 일본 경제 낙관할 수 없는 이유

    경기회복 조짐이 나타나자 일본 열도가 들떴다. 1991년 버블 붕괴 이후 30여년 못 보던 풍경이기 때문. 올 1분기 성장률이 0.7%(전분기 대비), 연 환산하면 2.7%에 달했다. 제로 성장에 익숙한 터라 흥분할만하다. 아베노믹스가 드디어 결실을 보고 있다는 낙관론이 나온다. 일본 경제는 내수 중심이다. 국내총생산(GDP) 중 가계소비가 54%를 차지한다. 돈을 풀어도 꿈쩍 않던 소비가 1분기 0.5% 증가했다. 설비투자도 1.4% 늘었다. 엔저와 코로나 엔데믹 덕분에 관광도 호황이다. 3월 외국 관광객은 182만 명으로 집계됐다. 1년 전의 100배다.    소비가 늘면서 기업에 온기가 퍼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올해 상장사 순이익이 2% 넘게 증가할 전망이다. 제자리를 맴돌던 임금도 오른다. 올해 임금 상승률은 93년(3.9%) 이후 최고치가 예상된다. 닛케이지수는 3만3000을 넘어섰다. 33년 만에 최고치. 미국·중국 갈등 속에 일본이 대만의 대안 투자처로 떠오른다. 워런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가 대만 반도체업체 TSMC 주식을 매각했다. 그 돈으로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5대 종합상사 주식에 60억 달러(약 8조원)를 투자한 게 화제가 됐다.   ■  「 성장·소비·투자·주가 지표 호전 펀더멘털 개선보다 유동성 덕분 엔저에도 수출 감소…디지털 낙후 혁신·변화 없이 진짜 회복 어려워 」   일본 경제가 온통 호재로 둘러싸인 듯하다. ‘소득·이익 증가→소비·투자 회복→디플레이션 탈출’의 선순환에 올라탄 것일까. 이번에도 버핏이 기가 막히게 맞힌 걸까. 낙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으로 지난해 이후 전 세계가 금리를 올려도 일본은 저금리를 고수했다. 최근 회복은 넘치는 유동성에 힘입은 바 크다. 경제 펀더멘털이 갑자기 좋아진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3~4%대에 달한다. 90년대 이후 줄곧 1%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올랐다. 젊은이들은 한 번도 경험 못한 인플레이션이다. 디플레이션을 깰 불쏘시개를 바라던 일본이다. 하지만 물가가 과도하게 오르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나쁜 인플레이션’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고물가 대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문제는 물가가 올라도 금리를 올려 돈줄을 조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렸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6%로 선진국 중 가장 높다. 그 돈을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했고, 일본은행이 국채의 50%(530조엔)를 떠안았다. 아베노믹스를 시작한 10년 전보다 다섯 배나 늘었다. 금리를 올리면 국채가격이 하락해 대규모 평가손이 불가피하다. 이자도 많이 늘어난다. 금리를 쉽게 올리기 어려운 이유다.    엔저도 뜨거운 감자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로 엔화는 달러당 140엔을 웃돌고 있다. 통화가치는 한 나라의 펀더멘털을 반영한다. 통화 약세는 그만큼 국력이 약화됐다는 의미다. 기업은 부자여도 국민은 가난해진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에서 일본은 대만에 밀렸다. 근로자 평균 임금은 G7 중 최하위다. GDP는 2010년 중국에 세계 2위를 내주더니 독일의 추격으로 3위도 위태롭다. 88년 세계 시가총액 100대 기업 중 5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지난해는 도요타 한 곳만 포함됐다.    엔저에도 1분기 수출은 4.2% 감소했다. 글로벌 교역량이 줄어든 영향이 크지만, 기업 경쟁력도 시원치 않다.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이 부진하다. 독일이 고부가가치 공산품을 생산하며 수출을 꾸준히 늘린 것과 대비된다. 도요타 등 대표 기업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긴 것도 원인이다. 제조업 해외생산 비중이 98년 10%에서 2020년 24%로 늘었다. 해외에서 생산해 해외에 파니 엔저로 인한 가격 효과를 못 보는 것이다.    더 치명적인 건 세계 IT 혁명에 올라타지 못한 점이다. 지금도 사무실에서 팩스와 도장을 쓰고, 관공서·은행에서 플로피디스크로 자료를 저장한다. 신용카드를 안 받는 점포가 흔하다. 정부가 최근 마이넘버카드(한국 주민등록증) 보급에 공을 들이지만, 입력 오류와 발급 지연이 속출한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일본 디지털 기술력은 63개국 중 62위다. 빅데이터 활용과 기업 민첩성은 꼴찌다. 세계는 정신없이 바뀌는데, 벌어들인 돈을 쌓아두는 ‘축소 균형’에 주력한 결과다. 기업 지배구조에도 약점에 있다. 오너 아닌 이사회 중심 의사결정 구조로는 신속 과감한 투자를 하기 어렵다.    지난해 유엔 글로벌 혁신지수에서 일본은 13위에 그쳤다. 한국은 6위. 도전과 변화보다는 체제에 순응하는 데 익숙하다. 우월감은 여전하지만 위기감이 적다. 정부가 잘못해도 정권을 뺏길 위험이 거의 없다. ‘경제 관료의 입김이 여전히 세다.’(노구치 유키오 『1940년 체제』) 세계 1위 고령화(2021년 65세 이상 29%)로 내수 전망도 밝지 않다. 경제가 본격 반등을 시작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요인이 너무 많은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일본 성장률이 내년에 1.0%로 둔화할 것으로 봤다. 정부·기업·국민 등 사회 곳곳에 혁신이 불타오르지 않는 한 진짜 회복은 쉽지 않아 보인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6.24 23:00

  • [고현곤 칼럼] 일본 경제 낙관할 수 없는 이유

    고현곤 편집인 경기회복 조짐이 나타나자 일본 열도가 들떴다. 1991년 버블 붕괴 이후 30여년 못 보던 풍경이기 때문. 올 1분기 성장률이 0.7%(전분기 대비), 연 환산하면 2.7%에 달했다. 제로 성장에 익숙한 터라 흥분할만하다. 아베노믹스가 드디어 결실을 보고 있다는 낙관론이 나온다. 일본 경제는 내수 중심이다. 국내총생산(GDP) 중 가계소비가 54%를 차지한다. 돈을 풀어도 꿈쩍 않던 소비가 1분기 0.5% 증가했다. 설비투자도 1.4% 늘었다. 엔저와 코로나 엔데믹 덕분에 관광도 호황이다. 3월 외국 관광객은 182만 명으로 집계됐다. 1년 전의 100배다.   소비가 늘면서 기업에 온기가 퍼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올해 상장사 순이익이 2% 넘게 증가할 전망이다. 제자리를 맴돌던 임금도 오른다. 올해 임금 상승률은 93년(3.9%) 이후 최고치가 예상된다. 닛케이지수는 3만3000을 넘어섰다. 33년 만에 최고치. 미국·중국 갈등 속에 일본이 대만의 대안 투자처로 떠오른다. 워런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가 대만 반도체업체 TSMC 주식을 매각했다. 그 돈으로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5대 종합상사 주식에 60억 달러(약 8조원)를 투자한 게 화제가 됐다.     ■  「 성장·소비·투자·주가 지표 호전 펀더멘털 개선보다 유동성 덕분 엔저에도 수출 감소…디지털 낙후 혁신·변화 없이 진짜 회복 어려워 」    일본 경제가 온통 호재로 둘러싸인 듯하다. ‘소득·이익 증가→소비·투자 회복→디플레이션 탈출’의 선순환에 올라탄 것일까. 이번에도 버핏이 기가 막히게 맞힌 걸까. 낙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으로 지난해 이후 전 세계가 금리를 올려도 일본은 저금리를 고수했다. 최근 회복은 넘치는 유동성에 힘입은 바 크다. 경제 펀더멘털이 갑자기 좋아진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3~4%대에 달한다. 90년대 이후 줄곧 1%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올랐다. 젊은이들은 한 번도 경험 못한 인플레이션이다. 디플레이션을 깰 불쏘시개를 바라던 일본이다. 하지만 물가가 과도하게 오르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나쁜 인플레이션’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고물가 대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문제는 물가가 올라도 금리를 올려 돈줄을 조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렸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6%로 선진국 중 가장 높다. 그 돈을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했고, 일본은행이 국채의 50%(530조엔)를 떠안았다. 아베노믹스를 시작한 10년 전보다 다섯 배나 늘었다. 금리를 올리면 국채가격이 하락해 대규모 평가손이 불가피하다. 이자도 많이 늘어난다. 금리를 쉽게 올리기 어려운 이유다.   엔저도 뜨거운 감자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로 엔화는 달러당 140엔을 웃돌고 있다. 통화가치는 한 나라의 펀더멘털을 반영한다. 통화 약세는 그만큼 국력이 약화됐다는 의미다. 기업은 부자여도 국민은 가난해진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에서 일본은 대만에 밀렸다. 근로자 평균 임금은 G7 중 최하위다. GDP는 2010년 중국에 세계 2위를 내주더니 독일의 추격으로 3위도 위태롭다. 88년 세계 시가총액 100대 기업 중 5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지난해는 도요타 한 곳만 포함됐다.   엔저에도 1분기 수출은 4.2% 감소했다. 글로벌 교역량이 줄어든 영향이 크지만, 기업 경쟁력도 시원치 않다.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이 부진하다. 독일이 고부가가치 공산품을 생산하며 수출을 꾸준히 늘린 것과 대비된다. 도요타 등 대표 기업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긴 것도 원인이다. 제조업 해외생산 비중이 98년 10%에서 2020년 24%로 늘었다. 해외에서 생산해 해외에 파니 엔저로 인한 가격 효과를 못 보는 것이다.   더 치명적인 건 세계 IT 혁명에 올라타지 못한 점이다. 지금도 사무실에서 팩스와 도장을 쓰고, 관공서·은행에서 플로피디스크로 자료를 저장한다. 신용카드를 안 받는 점포가 흔하다. 정부가 최근 마이넘버카드(한국 주민등록증) 보급에 공을 들이지만, 입력 오류와 발급 지연이 속출한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일본 디지털 기술력은 63개국 중 62위다. 빅데이터 활용과 기업 민첩성은 꼴찌다. 세계는 정신없이 바뀌는데, 벌어들인 돈을 쌓아두는 ‘축소 균형’에 주력한 결과다. 기업 지배구조에도 약점에 있다. 오너 아닌 이사회 중심 의사결정 구조로는 신속 과감한 투자를 하기 어렵다.   지난해 유엔 글로벌 혁신지수에서 일본은 13위에 그쳤다. 한국은 6위. 도전과 변화보다는 체제에 순응하는 데 익숙하다. 우월감은 여전하지만 위기감이 적다. 정부가 잘못해도 정권을 뺏길 위험이 거의 없다. ‘경제 관료의 입김이 여전히 세다.’(노구치 유키오 『1940년 체제』) 세계 1위 고령화(2021년 65세 이상 29%)로 내수 전망도 밝지 않다. 경제가 본격 반등을 시작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요인이 너무 많은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일본 성장률이 내년에 1.0%로 둔화할 것으로 봤다. 정부·기업·국민 등 사회 곳곳에 혁신이 불타오르지 않는 한 진짜 회복은 쉽지 않아 보인다. 고현곤 편집인

    2023.06.20 01:09

  • [고현곤 칼럼] 문 전 대통령의 불편한 처신

    고현곤 편집인 문재인 전 대통령이 수상하다. 퇴임 후 수염 기르고, 자유를 만끽하나 싶더니 올 들어 행보가 부쩍 복잡해졌다. 제주 4·3평화공원, 광주 5·18민주묘지를 찾아다녔다. 추모만 하는 게 아니라 어김없이 정치색 짙은 말을 남겼다. “4·3을 모독하는 행위가 이뤄지고 있어 개탄스럽다.”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게 정치인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 “잊혀지고 싶다”는 당초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외려 잊혀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고비마다 정치적 메시지를 내는 퇴임 대통령은 낯설다. 미국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외에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  「 참배·책방·영화·SNS…자기 정치 “잊혀지겠다”면서 고비마다 메시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 여기는 듯 퇴임 후 정치 행보, 나쁜 전례 될 것 」    지난달 양산 사저 근처에 ‘평산책방’을 냈다. 이달엔 다큐멘터리 영화 ‘문재인입니다’를 개봉했다. 마치 정치를 다시 준비하는 사람 같다. 주민을 위해 책방을 열었다지만, 오롯이 그를 위한 정치 공간이다. 팬 미팅장이고, 친문의 성지가 됐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다녀갔다. 그 자리에서 문 전 대통령은 “대화는 정치인의 의무”라며 윤석열 대통령을 에둘러 비판했다. ‘불통 대통령’이었던 그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나라의 어른답게 정파를 떠나 덕담을 했어야 했다.   책방은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무급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가 사달이 났다. ‘돈도 안 주고 일 시키느냐’는 반발을 불렀다. 책방 측은 “과욕이었다”며 철회했지만, 문 전 대통령은 일언반구도 없다. 재임 당시 불리하면 침묵하던 모습 그대로다. 공익사업이라면서 사업자 명의를 처음에 재단이 아닌 문 전 대통령 개인으로 한 것도 논란이 됐다. 책방 곳곳에 ‘장삿속’이 묻어난다는 지적은 옆에서 듣기에도 불편하다. 이런 걸 자꾸 얘기하면 한마디 할지 모른다. “그 정도 하시지요, 좀스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영화 ‘문재인입니다’는 또 다른 논란거리다. 잊혀지겠다고 해놓고, 한편에선 홍보 영화를 준비한 게 놀랍다. 애초에 잊혀질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닌가. 편집 과정에서 삭제했다는 그의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5년간 이룬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져 허망한 생각이 든다.” 김의겸 민주당 의원은 영화를 본 뒤 “문 전 대통령을 꼭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결의를 다졌다. 퇴임 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영화는 실패했다. 관객 수는 개봉 2주 동안 10만 명 남짓. 185만 명이 본 ‘노무현입니다’와 비교된다. 관람평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싸움판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지켜보는 국민은 착잡하다.   지난 2월에는 문 전 대통령이 SNS를 통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책을 거론했다. “저자의 역량을 새삼 확인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다.” 조국이 자녀 입시 비리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은 지 1주일 지난 때였다. 부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언급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전임 대통령의 말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조국에게 애틋함이 있다면 따로 연락하면 될 일이다. 굳이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은 조국을 택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행동이다.   퇴임 대통령이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은 없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숨을 이유는 없다. 자신의 경륜을 활용할 일이 있으면 좋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도 괜찮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해외를 순방하고, 헨리 키신저·매들린 올브라이트 같은 명사들과 교류하며 말년을 보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환경 쌀, 숲 가꾸기, 생태하천 복원에 열정을 쏟았다. 미국에선 지미 카터가 모범 사례다. 퇴임 후 전 세계 빈민촌에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했고, 분쟁지역에서 중재를 끌어냈다. 무능 대통령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거듭났다.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조지 W 부시는 화가로 변신해 대통령 때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퇴임 후 그림에 전념했다. 분명한 건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길을 걸어야 아름답다. 구설에 휘말리지 않는다.   유감스럽게 문 전 대통령은 현실 정치에 끼어든다. 정상까지 오르고 하산했지만 내려놓지 않는다. 참배·책방·영화·SNS…. 뭔가 끝없이 도모하면서도 이런 상황을 남 탓으로 돌린다. “(여권이) 끊임없이 나를 현실 정치로 소환하고 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여기는 듯하다. 지난해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다음 정부는 우리 정부 성과와 비교받을 것”이라며 덕담 대신 적개심을 보였다. 증오의 정치 프레임이다. 상대방을 악마화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낯 뜨거운 자화자찬도 이런 심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지난해 5월 물러나면서 지지자들에게 “(제가) 성공한 대통령이었습니까”라고 물어 “네”라는 답변을 끌어냈다. 통상 그런 자리에선 ‘그동안 부족한 저를 응원해 줘서 감사하다’며 자신을 낮추는 게 품격 있는 태도다. 성과를 부풀리며 세력을 규합하는 협량을 드러낸 것이다. 나라를 쪼개는 비극은 집권 5년으로 충분하다. 퇴임 대통령의 정치 개입이라는 불행한 전례를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고현곤 편집인

    2023.05.23 01:00

  • [세컷칼럼] 3대 개혁, 하나라도 해낼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연금·노동·교육을 새 정부 3대 개혁 과제로 꼽은 게 지난해 5월 16일이다. 취임 첫 국회 연설에서다. “지금 추진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게 된다”고 했다. 방향을 잘 잡았다. 기대를 모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뭉개거나 망친 것을 바로잡는 의미도 있었다. 1년이 쏜살같이 흘렀다. 유감스럽게 3대 개혁은 별 진전이 없다. 윤 대통령이 “역사적 소명”이라고 칭한 게 무색할 정도다.    연금개혁은 여야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국회는 지난해 7월 말에야 마지못해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발족했다. 개점 휴업하다가 10월 말 첫 회의를 열었다. 하나 마나 한 덕담만 주고받다 끝났다. 특위 산하 민간자문위가 지난달 말 두루뭉술한 보고서를 냈을 뿐이다. 사회적 합의는커녕 자체 안도 만들지 못했다. 국민·공무원·군인·사학 4대 공적연금을 들여본다고 했으나 국민연금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특위는 시간만 축내다 이달 말 종료한다.   ■  「 새 정부, 별 진전 없이 첫해 보내 선거 없는 골든타임 얼마 안 남아 이해당사자 설득할 정치력 의문 낮은 지지율도 국정동력 약화 불러 」   노동개혁 상황도 좋지 않다. 윤 대통령이 노조 불법행위에 강경 대응한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주 52시간제를 둘러싼 혼선이 뼈아프다. 정부 안은 일이 많을 때 주 69시간까지 몰아서 일하고, 적을 땐 쉬도록 노사의 선택권을 넓히자는 것이다. 이게 매주 69시간씩 일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야당의 주 69시간 프레임에 속수무책 당했다. 윤 대통령이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고 하면서 더 꼬였다. 이때부터 정부 안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굳어졌다. 지난해 6월에도 대통령이 노동부 안을 뒤집었다.    여소야대 국회라는 험난한 링에 오르기도 전에 자중지란에 빠졌다. 사회적 공감대를 만드는 노력 없이 덜컥 정부 안을 내놓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론이 나빠지자 정부가 뒤늦게 의견 수렴에 나섰다. 일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주 52시간제 개정은 추진동력을 잃은 것 같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진짜 민감한 노동 현안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 과보호를 깨고,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 연공서열 중심의 임금 체계도 개편해야 한다. 고령화에 대비해 정년을 연장해야 하고…. 할 일이 널려 있는데 안타깝다.    교육개혁은 출발부터 늦었다. 교육부총리 후보가 연거푸 낙마해 지난해 11월까지 컨트롤타워가 공석이었다. 뒤늦게 교육부가 교육감-시·도지사 러닝메이트제, 맞춤형 돌봄 서비스, 디지털 교육 등 10대 과제를 마련했다. 법 개정 사항이 많다. 교육 문제의 핵심은 사교육이다. 이걸 비껴가면 어떤 개혁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교육이 사회 격차를 키운다’는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3대 개혁은 앞으로 더 문제다. 우선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올해, 특히 상반기가 골든타임이다. 두 달밖에 안 남았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 초부터 국민연금 개혁에 착수했는데도 마지막 해 간신히 고칠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2년 차인 2014년 초 시작한 공무원연금 개혁에 1년5개월 걸렸다. 그나마 둘 다 당초 안보다 크게 후퇴해 50점짜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는 비겁하게 손도 안 댔다.    올 하반기부터 총선의 계절이다. 정부 연금개혁안과 주 52시간제 개정안이 가을에 나온다. 애매한 시기다. 총선을 목전에 두고 여야 모두 셈법이 복잡하다.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표가 날아간다. 정치권이 선뜻 나설 리 없다. “정파보다 국가를 우선해야 개혁에 성공한다”(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말은 우리 정치 풍토에선 요원한 얘기다.    둘째, 정부가 개혁을 헤쳐나갈 고도의 정치력을 가졌는지 걱정스럽다. 개혁의 당위성만 강조할 뿐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이나 로드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야당과의 협치는 고사하고, 그 흔한 당정 협의도 눈에 안 띈다. 민관이 머리를 맞대는 공청회도 별로 없다. 3대 개혁은 이해당사자의 대타협이 중요하다. 각자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순간 실패한다. 정부가 국민과 이해집단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행위를 끝없이 반복해도 될까 말까다. 일방통행식 행정과 구호·엄포만으로는 성과를 낼 수 없다. “3대 개혁은 정부 혼자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민·관·정 모두 머리를 맞대고 수용 가능한 개혁안을 도출해야 한다.”(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    셋째,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은 현실적인 걸림돌이다. 지지율은 민심의 바로미터다. 이명박 정부 초인 2008년 봄, 광우병 사태를 겪으면서 지지율이 21%까지 추락했다. 5년 내내 국정 동력 약화로 고전했다. 이번엔 광우병 같은 큰일이 없는데도 30%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중도층은 물론 보수층에서 이탈 조짐이 있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여론조사 방법에 의구심이 있다” “별로 참고하지 않는다”고 애써 의미를 깎아내린다. 그런 태도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총선 치른다고 1년을 또 보내면 어느덧 집권 후반기다. 3대 개혁 중 하나만이라도 성공하길 바라는 쪽으로 눈높이를 낮춰야 할지도 모르겠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4.29 23:00

  • [고현곤 칼럼] 3대 개혁, 하나라도 해낼 수 있을까

    고현곤 편집인 윤석열 대통령이 연금·노동·교육을 새 정부 3대 개혁 과제로 꼽은 게 지난해 5월 16일이다. 취임 첫 국회 연설에서다. “지금 추진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게 된다”고 했다. 방향을 잘 잡았다. 기대를 모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뭉개거나 망친 것을 바로잡는 의미도 있었다. 1년이 쏜살같이 흘렀다. 유감스럽게 3대 개혁은 별 진전이 없다. 윤 대통령이 “역사적 소명”이라고 칭한 게 무색할 정도다.   연금개혁은 여야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국회는 지난해 7월 말에야 마지못해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발족했다. 개점 휴업하다가 10월 말 첫 회의를 열었다. 하나 마나 한 덕담만 주고받다 끝났다. 특위 산하 민간자문위가 지난달 말 두루뭉술한 보고서를 냈을 뿐이다. 사회적 합의는커녕 자체 안도 만들지 못했다. 국민·공무원·군인·사학 4대 공적연금을 들여본다고 했으나 국민연금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특위는 시간만 축내다 이달 말 종료한다.     ■  「 새 정부, 별 진전 없이 첫해 보내 선거 없는 골든타임 얼마 안 남아 이해당사자 설득할 정치력 의문 낮은 지지율도 국정동력 약화 불러 」    노동개혁 상황도 좋지 않다. 윤 대통령이 노조 불법행위에 강경 대응한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 주 52시간제를 둘러싼 혼선이 뼈아프다. 정부 안은 일이 많을 때 주 69시간까지 몰아서 일하고, 적을 땐 쉬도록 노사의 선택권을 넓히자는 것이다. 이게 매주 69시간씩 일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야당의 주 69시간 프레임에 속수무책 당했다. 윤 대통령이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고 하면서 더 꼬였다. 이때부터 정부 안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굳어졌다. 지난해 6월에도 대통령이 노동부 안을 뒤집었다.   여소야대 국회라는 험난한 링에 오르기도 전에 자중지란에 빠졌다. 사회적 공감대를 만드는 노력 없이 덜컥 정부 안을 내놓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론이 나빠지자 정부가 뒤늦게 의견 수렴에 나섰다. 일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주 52시간제 개정은 추진동력을 잃은 것 같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진짜 민감한 노동 현안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 과보호를 깨고,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 연공서열 중심의 임금 체계도 개편해야 한다. 고령화에 대비해 정년을 연장해야 하고…. 할 일이 널려 있는데 안타깝다.   교육개혁은 출발부터 늦었다. 교육부총리 후보가 연거푸 낙마해 지난해 11월까지 컨트롤타워가 공석이었다. 뒤늦게 교육부가 교육감-시·도지사 러닝메이트제, 맞춤형 돌봄 서비스, 디지털 교육 등 10대 과제를 마련했다. 법 개정 사항이 많다. 교육 문제의 핵심은 사교육이다. 이걸 비껴가면 어떤 개혁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교육이 사회 격차를 키운다’는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3대 개혁은 앞으로 더 문제다. 우선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올해, 특히 상반기가 골든타임이다. 두 달밖에 안 남았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 초부터 국민연금 개혁에 착수했는데도 마지막 해 간신히 고칠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2년 차인 2014년 초 시작한 공무원연금 개혁에 1년5개월 걸렸다. 그나마 둘 다 당초 안보다 크게 후퇴해 50점짜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는 비겁하게 손도 안 댔다.   올 하반기부터 총선의 계절이다. 정부 연금개혁안과 주 52시간제 개정안이 가을에 나온다. 애매한 시기다. 총선을 목전에 두고 여야 모두 셈법이 복잡하다.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표가 날아간다. 정치권이 선뜻 나설 리 없다. “정파보다 국가를 우선해야 개혁에 성공한다”(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말은 우리 정치 풍토에선 요원한 얘기다.   둘째, 정부가 개혁을 헤쳐나갈 고도의 정치력을 가졌는지 걱정스럽다. 개혁의 당위성만 강조할 뿐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이나 로드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야당과의 협치는 고사하고, 그 흔한 당정 협의도 눈에 안 띈다. 민관이 머리를 맞대는 공청회도 별로 없다. 3대 개혁은 이해당사자의 대타협이 중요하다. 각자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순간 실패한다. 정부가 국민과 이해집단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행위를 끝없이 반복해도 될까 말까다. 일방통행식 행정과 구호·엄포만으로는 성과를 낼 수 없다. “3대 개혁은 정부 혼자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민·관·정 모두 머리를 맞대고 수용 가능한 개혁안을 도출해야 한다.”(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   셋째,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은 현실적인 걸림돌이다. 지지율은 민심의 바로미터다. 이명박 정부 초인 2008년 봄, 광우병 사태를 겪으면서 지지율이 21%까지 추락했다. 5년 내내 국정 동력 약화로 고전했다. 이번엔 광우병 같은 큰일이 없는데도 30%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중도층은 물론 보수층에서 이탈 조짐이 있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여론조사 방법에 의구심이 있다” “별로 참고하지 않는다”고 애써 의미를 깎아내린다. 그런 태도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총선 치른다고 1년을 또 보내면 어느덧 집권 후반기다. 3대 개혁 중 하나만이라도 성공하길 바라는 쪽으로 눈높이를 낮춰야 할지도 모르겠다. 고현곤 편집인

    2023.04.25 00:47

  • [세컷칼럼] 보면 볼수록 어색한 김병준의 전경련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한일 관계 개선의 전면에 등장한 건 반가운 일이다. 누가 뭐래도 전경련은 재계의 맏형이다. 2016년 K스포츠·미르재단 후원금 모금이 드러나고, 4대 그룹(삼성·SK·현대차·LG)이 탈퇴하면서 암흑기를 가졌다. 일본 경제단체 게이단렌(經團連)과 함께 ‘미래 파트너십 기금’ 조성을 계기로 양지로 나온 셈이다. 그런데 컴백 무대가 어색했다. 게이단렌 회장은 도쿠라 마사카즈 스미토모화학 회장. 1974년 사원으로 출발해 회장에 오른 전문경영인이다. 일본 재계의 어른으로 손색이 없다. 나란히 한 한국 재계 대표는 김병준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 일본 기업인과 한국 정부 인사가 손잡은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  「 정경유착으로 풍비박산 난 조직에 대통령 측근이 개혁 맡은 건 코미디 정부, 기업 동원한다는 오해 불러 정치 거리 둬야 하는 재계도 난감 」   회장 맡을 사람이 없어 궁여지책이라지만, 김병준의 전경련은 이상하다. 그는 기업인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노무현 정부 5년 내내 대통령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그 뒤 보수로 돌아서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윤석열 후보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았다. 2020년 총선 때 세종시에서 낙선했다. 그는 “전형적인 정치인이 아니라 34년을 대학에서 일한 학자”라고 했다.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기업인은 아니다. 전공 분야도 기업과 상관없는 지방자치·지방분권이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 공약에 ‘충청권 수도 이전’을 넣은 장본인이다. 2002년 대선의 1등 공신이다. 덕분에(?) 수많은 공무원·민원인이 정부 세종청사를 오가며 길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다. 세종시에 틀어박혀 세상 물정 모른 채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도 부지기수다.    김 회장은 자유시장경제 신봉자를 자처한다. 지난달 전경련에 들어가면서 “(노무현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경제·산업정책을 다뤘다.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이 왔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정책실장 때 시장 흐름을 무시한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시장이 왜곡되고, 집값은 치솟았다. 당시 “종합부동산세가 8배 오르자 세금 폭탄이라 하는데, 아직 멀었다”며 특정 지역·계층을 적대하는 정책으로 갈등을 키웠다. 지난 대선 때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그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경제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시장경제를 내세워 자유주의자처럼 행세한다.”    전경련은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조직이다. 김 회장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왔다”고 했다. 정치 때문에 망한 곳에 정권과 가까운 정치인이 들어앉아 개혁한다는 게 코미디다. 당장은 정부와 소통이 되고, 대통령 측근이 들어오니 힘도 붙는 것 같다. 한일 경제 사절단에 4대 그룹 총수가 참석하자 전경련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4대 그룹은 전경련이 아니라 대통령실이 요청해 참석한 것이다. 견강부회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어렵다고 남의 힘, 그것도 정치인의 힘을 빌리면 근본 해결이 안 된다. 훗날 독이 돼 돌아온다.    김 회장 개인으로도 위기를 자초한 셈이다. 자칫 ‘자리 사냥꾼’으로 비칠 수 있다. 2006년 교육정책 문외한이라는 비난에도 교육부총리를 맡았다가 중도 하차했다. 이번엔 고사했다고 한다. 3개월만 한다고 했다가 6개월로 늘렸다. 벌써 한 달 넘게 흘렀지만, 정상회담 같은 정부 일정 쫓아다니기 바쁘다.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이 있다. 윤석열 정부에도 좋을 게 없다. 정부 이벤트에 전경련을 들러리 세운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김 회장 앞세워 기업을 압박하는 모양새로 비칠 우려도 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전경련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용산은 개입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정말 뜻이 그렇다면 그를 말렸어야 했다.    가장 난감한 건 재계다. 정치와 거리를 두며 조심해 왔는데, 일이 꼬였다. 김 회장과 엮이는 순간 보수 정부에 줄 섰다는 구설에 휘말린다. 그렇다고 협조를 안 하자니 찜찜하다. 서슬 퍼런 정권 초인데… 후임 회장 찾기는 더 어려워졌다. 4대 그룹 전경련 복귀에 대해 김 회장은 “그렇게 먼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4대 그룹은 내키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정치색 짙은 김 회장이 들어가는 바람에 부담이 커졌다. 사업하기도 힘든데, 우리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 한다.”    게이단렌도 대기업 로비 창구라는 아픈 역사가 있다. 위기 속에서도 정치인·관료·학자 등 외부 인사를 회장으로 영입한 적이 없다. 기업 일은 기업 스스로 결정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지금은 정치 헌금을 끊고,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경제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상장사 1500여 곳이 회원으로 참여한다.    전경련은 기득권 유지와 재벌 옹호에 급급하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돼 있다. 회장을 못 찾아 이 사람 저 사람 등 떠민 게 20년이 넘었다. 정부 입김에서 벗어나 국민 신뢰를 받는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게이단렌이나 미국 상공회의소처럼 정부에 할 말은 할 수 있다. 그래야 회장을 하겠다는 인물이 나오고, 4대 그룹도 복귀할 것이다. 정파 냄새 물씬 풍기는 6개월 시한부 회장이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아닌 것 같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3.30 23:00

  • [고현곤 칼럼] 보면 볼수록 어색한 김병준의 전경련

    고현곤 편집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한일 관계 개선의 전면에 등장한 건 반가운 일이다. 누가 뭐래도 전경련은 재계의 맏형이다. 2016년 K스포츠·미르재단 후원금 모금이 드러나고, 4대 그룹(삼성·SK·현대차·LG)이 탈퇴하면서 암흑기를 가졌다. 일본 경제단체 게이단렌(經團連)과 함께 ‘미래 파트너십 기금’ 조성을 계기로 양지로 나온 셈이다. 그런데 컴백 무대가 어색했다. 게이단렌 회장은 도쿠라 마사카즈 스미토모화학 회장. 1974년 사원으로 출발해 회장에 오른 전문경영인이다. 일본 재계의 어른으로 손색이 없다. 나란히 한 한국 재계 대표는 김병준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 일본 기업인과 한국 정부 인사가 손잡은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  「 정경유착으로 풍비박산 난 조직에 대통령 측근이 개혁 맡은 건 코미디 정부, 기업 동원한다는 오해 불러 정치 거리 둬야 하는 재계도 난감 」    회장 맡을 사람이 없어 궁여지책이라지만, 김병준의 전경련은 이상하다. 그는 기업인이 아니라 정치인이다. 노무현 정부 5년 내내 대통령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그 뒤 보수로 돌아서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윤석열 후보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았다. 2020년 총선 때 세종시에서 낙선했다. 그는 “전형적인 정치인이 아니라 34년을 대학에서 일한 학자”라고 했다.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기업인은 아니다. 전공 분야도 기업과 상관없는 지방자치·지방분권이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 공약에 ‘충청권 수도 이전’을 넣은 장본인이다. 2002년 대선의 1등 공신이다. 덕분에(?) 수많은 공무원·민원인이 정부 세종청사를 오가며 길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다. 세종시에 틀어박혀 세상 물정 모른 채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도 부지기수다.   김 회장은 자유시장경제 신봉자를 자처한다. 지난달 전경련에 들어가면서 “(노무현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경제·산업정책을 다뤘다.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이 왔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정책실장 때 시장 흐름을 무시한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시장이 왜곡되고, 집값은 치솟았다. 당시 “종합부동산세가 8배 오르자 세금 폭탄이라 하는데, 아직 멀었다”며 특정 지역·계층을 적대하는 정책으로 갈등을 키웠다. 지난 대선 때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그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경제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시장경제를 내세워 자유주의자처럼 행세한다.”   전경련은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조직이다. 김 회장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왔다”고 했다. 정치 때문에 망한 곳에 정권과 가까운 정치인이 들어앉아 개혁한다는 게 코미디다. 당장은 정부와 소통이 되고, 대통령 측근이 들어오니 힘도 붙는 것 같다. 한일 경제 사절단에 4대 그룹 총수가 참석하자 전경련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4대 그룹은 전경련이 아니라 대통령실이 요청해 참석한 것이다. 견강부회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어렵다고 남의 힘, 그것도 정치인의 힘을 빌리면 근본 해결이 안 된다. 훗날 독이 돼 돌아온다.   김 회장 개인으로도 위기를 자초한 셈이다. 자칫 ‘자리 사냥꾼’으로 비칠 수 있다. 2006년 교육정책 문외한이라는 비난에도 교육부총리를 맡았다가 중도 하차했다. 이번엔 고사했다고 한다. 3개월만 한다고 했다가 6개월로 늘렸다. 벌써 한 달 넘게 흘렀지만, 정상회담 같은 정부 일정 쫓아다니기 바쁘다.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이 있다. 윤석열 정부에도 좋을 게 없다. 정부 이벤트에 전경련을 들러리 세운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김 회장 앞세워 기업을 압박하는 모양새로 비칠 우려도 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전경련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용산은 개입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정말 뜻이 그렇다면 그를 말렸어야 했다.   가장 난감한 건 재계다. 정치와 거리를 두며 조심해 왔는데, 일이 꼬였다. 김 회장과 엮이는 순간 보수 정부에 줄 섰다는 구설에 휘말린다. 그렇다고 협조를 안 하자니 찜찜하다. 서슬 퍼런 정권 초인데… 후임 회장 찾기는 더 어려워졌다. 4대 그룹 전경련 복귀에 대해 김 회장은 “그렇게 먼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4대 그룹은 내키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정치색 짙은 김 회장이 들어가는 바람에 부담이 커졌다. 사업하기도 힘든데, 우리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 한다.”   게이단렌도 대기업 로비 창구라는 아픈 역사가 있다. 위기 속에서도 정치인·관료·학자 등 외부 인사를 회장으로 영입한 적이 없다. 기업 일은 기업 스스로 결정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지금은 정치 헌금을 끊고,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경제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상장사 1500여 곳이 회원으로 참여한다.   전경련은 기득권 유지와 재벌 옹호에 급급하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돼 있다. 회장을 못 찾아 이 사람 저 사람 등 떠민 게 20년이 넘었다. 정부 입김에서 벗어나 국민 신뢰를 받는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게이단렌이나 미국 상공회의소처럼 정부에 할 말은 할 수 있다. 그래야 회장을 하겠다는 인물이 나오고, 4대 그룹도 복귀할 것이다. 정파 냄새 물씬 풍기는 6개월 시한부 회장이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아닌 것 같다. 고현곤 편집인

    2023.03.28 01:01

  • [세컷칼럼] 위기 때마다 은행이 문제였다

    1997년 외환위기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업이 빚을 내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다. 은행과 종합금융회사가 국제금융시장에서 외화(주로 일본자금)를 빌려 그 돈을 댔다. 금융의 기본을 잊은 채 단기로 차입해 장기로 빌려줬다. 그러다 아시아 신흥국 대외신인도에 문제가 생겼다. 만기 미스매치가 사태를 키웠다. 외화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다. 당시 국내 금융회사가 차입한 외화가 718억 달러. 외채 파티였다. 외화 물꼬를 터주고, 감독에 소홀했던 정부에 1차 책임이 있다. 빚으로 과잉 투자한 기업, 달러가 넘치자 과소비에 나선 국민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근원을 꼽으라면 외채로 이자 장사에 몰두한 은행이었다. 흔히 종금사를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여기지만 은행이 빌린 외화가 훨씬 많았다.   외환위기 여파로 은행은 인수·합병을 거쳐 재편됐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체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금으로 조성한 공적자금 160조원을 긴급 수혈받았다. 고비를 넘기자 도덕적 해이가 고개를 들었다. 임직원에게 무이자 대출을 해주고, 3년간 임원 보수를 두 배로 올렸다가 감사원에 적발됐다. ‘공적자금은 먼저 보는 게 임자’라는 말이 나왔다. 외채 파티에 이은 공적자금 파티였다. 급할 때 정부에 손 벌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흥청망청 쓰고, 대출금리는 다락같이 올리고…. 정부는 당황했다. 국민은 배신감을 느꼈다.   ■  「 외채로 이자 장사…외환위기 초래금융위기 때 지원받고 돈 안 풀어좋을 때 쉽게 벌고, 급하면 손 벌려정부 개입 반발 전에 자신 돌아봐야 」  2008년 금융위기 때 은행은 다시 국민을 배신했다. 어설픈 실력이 바로 드러났다. 입만 열면 초일류 은행, 메가뱅크를 외쳤지만 허울 좋은 신기루였다. 덩치만 커졌을 뿐 이자 장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정작 필요할 때 달러 한 푼을 구하지 못했다. 급기야 외화차입금을 갚아야 한다며 한국은행에 손을 벌렸다. 정부에는 해외차입 지급보증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위기 때마다 하던 대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급보증을 승인하면서 “은행이 고임금을 유지하면서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질책했다. 대통령 한마디에 놀란 은행들은 부랴부랴 보수를 삭감했다. ‘위기 극복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는 등 한바탕 쇼를 했다.   그때뿐이었다. 위기를 모면하자 은행 태도가 달라졌다. 혼자 살겠다며 돈을 움켜쥐고 시중에 풀지 않았다. 정부가 압박해도 소용없었다. 2009년 내내 기업은 돈이 마르고, 가계대출 금리는 치솟는 자금 경색이 이어졌다. “은행은 위기 상황에서도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었다.”(이명박 『대통령의 시간』) 얼마 뒤 KB국민과 신한은행 경영자들은 볼썽사나운 경영권 내분까지 벌였다.   지난해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에 이은 고금리가 닥치자 은행이 또 국민을 배신했다. 만만한 취약계층·소상공인을 상대로 이자 장사에 나섰다. 지난해 4대 은행(KB·신한·하나·우리) 이자 이익만 39조원을 넘었다. 경영을 갑자기 잘한 게 아니다. 순전히 고금리 때문에 떼돈을 벌었다. ‘횡재세’라도 거둬야 할 판이다. 영업이익 중 95% 안팎을 이자 장사로 채웠다. 선진국 은행은 60%대에 그친다. 지난해 예대금리 차가 2.21%포인트에서 2.55%포인트로 확대됐다. 금리 상승기에 예대금리 차가 커진다는 말은 핑계다. 대출받을 때 대번에 느끼는 것이지만, 은행은 갑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출 가산금리를 낮춰서 예대금리 차를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이를 외면하고 더 받아낸 이자로 1조원 넘는 성과급 파티를 벌였다. 배짱이 좋은 건지, 타성에 젖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은 공공재 성격이 강하다”고 경고하자 사회공헌을 3년간 10조원으로 늘리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알고 보니 실제 지원은 2800억원만 늘린 ‘뻥튀기’ 발표였다. 대출금리를 내리는 시늉을 하면서 예금금리는 더 많이 떨어뜨렸다. 눈가림으로 소나기만 피하자는 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은행 안팎에선 대통령 발언에 불만을 쏟아낸다. ‘민간 기업의 자율성을 해친다.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난다. 공공재 개념도 모르고 한 소리다.’ 관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은행이 자율과 시장경제를 내세우기에는 정부에 손을 너무 자주 벌렸다. 민망할 정도로. 공공재냐, 아니냐 논쟁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한 은행 관계자는 “사기업인 은행에 공익 지출을 강요해 체력이 떨어지면 위기 때 제 역할을 못 한다”고 말했다. 언제 은행이 그런 역할을 한 적이 있었나. 은행은 위기 때마다 버팀목이 아니었다. 시장 지배력에 안주하는 기득권이었다.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실물경제 침체가 깊어지면 은행도 부실이 쌓인다. 어려워지면 정부에 또 손을 벌릴 것이다. 고비를 넘기면 다시 이자 장사와 그들만의 성과급 파티를 할 것이다. 좋을 때는 민간 기업이라며 자기 호주머니 챙기다가, 나빠지면 공익성을 앞세워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후진적 경영 행태다. 기업은 세계 1위가 나오는데 은행은 세계 바닥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행들 주장처럼 정부 개입과 규제가 없었으면 지금보다 나은 모습을 보였을까. 의문 또 하나. 은행이 곤경에 처하면 정부가 지원해야 하나. 은행은 국민을 돕지 않는데, 국민은 은행을 도와야 하나.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3.02 23:00

  • [고현곤 칼럼] 위기 때마다 은행이 문제였다

    고현곤 편집인 1997년 외환위기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업이 빚을 내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다. 은행과 종합금융회사가 국제금융시장에서 외화(주로 일본자금)를 빌려 그 돈을 댔다. 금융의 기본을 잊은 채 단기로 차입해 장기로 빌려줬다. 그러다 아시아 신흥국 대외신인도에 문제가 생겼다. 만기 미스매치가 사태를 키웠다. 외화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다. 당시 국내 금융회사가 차입한 외화가 718억 달러. 외채 파티였다. 외화 물꼬를 터주고, 감독에 소홀했던 정부에 1차 책임이 있다. 빚으로 과잉 투자한 기업, 달러가 넘치자 과소비에 나선 국민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근원을 꼽으라면 외채로 이자 장사에 몰두한 은행이었다. 흔히 종금사를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여기지만 은행이 빌린 외화가 훨씬 많았다.   외환위기 여파로 은행은 인수·합병을 거쳐 재편됐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체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금으로 조성한 공적자금 160조원을 긴급 수혈받았다. 고비를 넘기자 도덕적 해이가 고개를 들었다. 임직원에게 무이자 대출을 해주고, 3년간 임원 보수를 두 배로 올렸다가 감사원에 적발됐다. ‘공적자금은 먼저 보는 게 임자’라는 말이 나왔다. 외채 파티에 이은 공적자금 파티였다. 급할 때 정부에 손 벌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흥청망청 쓰고, 대출금리는 다락같이 올리고…. 정부는 당황했다. 국민은 배신감을 느꼈다.     ■  「 외채로 이자 장사…외환위기 초래 금융위기 때 지원받고 돈 안 풀어 좋을 때 쉽게 벌고, 급하면 손 벌려 정부 개입 반발 전에 자신 돌아봐야 」    2008년 금융위기 때 은행은 다시 국민을 배신했다. 어설픈 실력이 바로 드러났다. 입만 열면 초일류 은행, 메가뱅크를 외쳤지만 허울 좋은 신기루였다. 덩치만 커졌을 뿐 이자 장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정작 필요할 때 달러 한 푼을 구하지 못했다. 급기야 외화차입금을 갚아야 한다며 한국은행에 손을 벌렸다. 정부에는 해외차입 지급보증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위기 때마다 하던 대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급보증을 승인하면서 “은행이 고임금을 유지하면서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질책했다. 대통령 한마디에 놀란 은행들은 부랴부랴 보수를 삭감했다. ‘위기 극복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는 등 한바탕 쇼를 했다.   그때뿐이었다. 위기를 모면하자 은행 태도가 달라졌다. 혼자 살겠다며 돈을 움켜쥐고 시중에 풀지 않았다. 정부가 압박해도 소용없었다. 2009년 내내 기업은 돈이 마르고, 가계대출 금리는 치솟는 자금 경색이 이어졌다. “은행은 위기 상황에서도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었다.”(이명박 『대통령의 시간』) 얼마 뒤 KB국민과 신한은행 경영자들은 볼썽사나운 경영권 내분까지 벌였다.   지난해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에 이은 고금리가 닥치자 은행이 또 국민을 배신했다. 만만한 취약계층·소상공인을 상대로 이자 장사에 나섰다. 지난해 4대 은행(KB·신한·하나·우리) 이자 이익만 39조원을 넘었다. 경영을 갑자기 잘한 게 아니다. 순전히 고금리 때문에 떼돈을 벌었다. ‘횡재세’라도 거둬야 할 판이다. 영업이익 중 95% 안팎을 이자 장사로 채웠다. 선진국 은행은 60%대에 그친다. 지난해 예대금리 차가 2.21%포인트에서 2.55%포인트로 확대됐다. 금리 상승기에 예대금리 차가 커진다는 말은 핑계다. 대출받을 때 대번에 느끼는 것이지만, 은행은 갑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출 가산금리를 낮춰서 예대금리 차를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이를 외면하고 더 받아낸 이자로 1조원 넘는 성과급 파티를 벌였다. 배짱이 좋은 건지, 타성에 젖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은 공공재 성격이 강하다”고 경고하자 사회공헌을 3년간 10조원으로 늘리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알고 보니 실제 지원은 2800억원만 늘린 ‘뻥튀기’ 발표였다. 대출금리를 내리는 시늉을 하면서 예금금리는 더 많이 떨어뜨렸다. 눈가림으로 소나기만 피하자는 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은행 안팎에선 대통령 발언에 불만을 쏟아낸다. ‘민간 기업의 자율성을 해친다.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난다. 공공재 개념도 모르고 한 소리다.’ 관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은행이 자율과 시장경제를 내세우기에는 정부에 손을 너무 자주 벌렸다. 민망할 정도로. 공공재냐, 아니냐 논쟁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한 은행 관계자는 “사기업인 은행에 공익 지출을 강요해 체력이 떨어지면 위기 때 제 역할을 못 한다”고 말했다. 언제 은행이 그런 역할을 한 적이 있었나. 은행은 위기 때마다 버팀목이 아니었다. 시장 지배력에 안주하는 기득권이었다.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실물경제 침체가 깊어지면 은행도 부실이 쌓인다. 어려워지면 정부에 또 손을 벌릴 것이다. 고비를 넘기면 다시 이자 장사와 그들만의 성과급 파티를 할 것이다. 좋을 때는 민간 기업이라며 자기 호주머니 챙기다가, 나빠지면 공익성을 앞세워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후진적 경영 행태다. 기업은 세계 1위가 나오는데 은행은 세계 바닥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행들 주장처럼 정부 개입과 규제가 없었으면 지금보다 나은 모습을 보였을까. 의문 또 하나. 은행이 곤경에 처하면 정부가 지원해야 하나. 은행은 국민을 돕지 않는데, 국민은 은행을 도와야 하나. 고현곤 편집인

    2023.02.28 01:01

  • [세컷칼럼] 지금 재정 긴축할 땐가

       금융시장 불안이 실물경제로 옮겨붙었다. 지난해 4분기에 이어 올해도 역성장이 우려된다. 역성장은 딱 세 차례 있었다. 1980년(-1.7%, 2차 오일쇼크)과 98년(-5.5%, 외환위기), 2020년(-0.7%, 코로나). 2009년(0.7%) 금융위기 때도 역성장은 아니었다. 올해 그만큼 심각하다는 얘기다. 최근 금융시장이 안정을 찾자 ‘별거 아니네’라는 분석이 나온다. 주가를 띄우려고 부추기는 전문가가 많다.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다. 실물경제가 어려워지면 금융시장으로 다시 번지는 건 시간문제다. 외환위기 때 기업과 금융회사가 동반 추락한 기억이 생생하다. 30대 그룹 중 11개가 문을 닫았다. 5대 시중은행(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이 사라졌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의 경기부양 카드는 두 가지다. 금리를 내리는 통화정책과 재정을 푸는 재정정책. 둘 다 여의치 않은 게 문제다. 금리를 내리기 어렵다. 물가 상승세가 둔화됐지만, 여전히 5%대로 높다. 2~3%로 안정될 때까지 현 기준금리(3.5%)를 이어가거나 좀 더 올려야 한다. 금융당국이 창구지도를 통해 시장금리를 누르고 있으나 임시방편이다. 정부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   미국도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추는 것이지 인하하는 건 아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상승률은 6.5%. 연준(Fed) 목표인 2%는 한참 멀었다.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79~81년 연준이 기준금리를 11.5%에서 21.5%로 급격하게 올리고도 물가가 2%대 안정을 찾기까지 2년이 더 걸렸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인플레이션이 1~2년 후 진정되더라도 금리가 예전 수준으로 돌아갈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 금리 못 내리면 남는 부양책은 재정‘보수=작은 정부’에 얽매여선 안 돼문재인 정부처럼 마구 쓰지 말고선별적, 한시적, 적기에 쓰면 효과 」    재정정책도 쉽지 않다. 문재인 정부 때 재정을 축내는 바람에 여력이 없다. 재정을 풀다가 물가를 자극할 우려도 있다. 미묘한 걸림돌이 하나 더 있다. ‘보수=작은 정부, 진보=큰 정부’ 프레임이다. 보수는 재정정책을 쓰지 말고, 긴축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으로 읽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보다 좌파이지만, 북유럽과 비교하면 우파다. ‘나는 보수이니 긴축에 찬성’ ‘나는 진보이니 재정확대’ 식의 논리는 단순할 뿐만 아니라 위험천만하다.   과거 사례를 봐도 이 프레임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 민주당 지미 카터 정부(77~80년) 때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는 2.3%였다.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81~88년)의 재정적자는 4.1%로 오히려 증가했다. 민주당 빌 클린턴(93~2000년) 때 줄었다가 공화당 조지 W 부시(2001~2008년) 때 다시 늘었다. 통념과는 반대다. 국내에서도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부 10년간 GDP 대비 정부 규모는 더 커졌다. 정부 크기를 좌우하는 광의의 조세부담률은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23.7%에서 2017년 25.4%로 증가했다(전주성 『재정전쟁』).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이념 프레임에 빠진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중도좌파다. 재정 확대를 주창하는 케인스 학파다. 정치색이 짙다. 민주당을 지지한다. 바이든 정부가 2021년 초 코로나 펜데믹 극복을 위해 1조9000억 달러의 부양책을 내놓았다. 크루그먼은 “인플레이션을 촉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바이든 편을 들었다.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지난해 인플레이션이 닥치자 크루그먼은 “매우 잘못된 예측이었다”고 반성했다. ‘진보=큰 정부’에 갇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실수였다.   그런 면에서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한 수 위다. 그도 민주당 경제통이지만, 재정을 무조건 늘리는 데 반대했다. 서머스는 “1조9000억 달러는 너무 많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것”이라고 우려했다. 금융위기 당시 정부가 쏟아부은 8000억 달러의 두 배를 넘는 돈이었다. 서머스는 이념과 정파에서 벗어나 경제를 냉정하게 진단한 것이다. 서머스의 완승으로 끝났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와 대척점에 있다. 문 정부 때 손상된 재정 건전성을 복원해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 ‘작은 정부, 긴축’ 프레임이 강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경기가 악화하고, 금리를 내릴 수 없다면 마지막 기댈 곳은 재정이다. 문 정부와 무조건 반대로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 상황에 따라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정상적이라면 문 정부 때 아껴 쓰고, 지금 풀어야 하는데…. 거꾸로 가는 듯하다. 문 정부가 잘못한 건 전 국민 재난지원금, 일회성 공공근로처럼 효과는 없고 생색만 내는 현금 살포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 버릇을 못 고쳤다. 최근에도 민주당은 포퓰리즘 성격이 짙은 30조원 추경을 들고 나왔다.   경기를 부양하려면 재정을 효과적으로 써야 한다. 경제학 교과서는 ‘3T 지출’을 권하고 있다. 선별적으로(Targeted) 한시적이며(Temporary) 적기에(Timely). 최악의 상황은 올 하반기에도 물가 불안으로 고금리가 계속되고, 정부가 부양과 내년 총선을 의식해 재정지출을 급작스럽게 확대하는 경우다. 두 정책이 충돌하며 불황이 깊어질 수 있다. 더 나빠지기 전에 재정의 역할을 따져봤으면 한다. 경제는 타이밍이다.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1.31 23:28

  • [고현곤 칼럼] 지금 재정 긴축할 땐가

    고현곤 편집인 금융시장 불안이 실물경제로 옮겨붙었다. 지난해 4분기에 이어 올해도 역성장이 우려된다. 역성장은 딱 세 차례 있었다. 1980년(-1.7%, 2차 오일쇼크)과 98년(-5.5%, 외환위기), 2020년(-0.7%, 코로나). 2009년(0.7%) 금융위기 때도 역성장은 아니었다. 올해 그만큼 심각하다는 얘기다. 최근 금융시장이 안정을 찾자 ‘별거 아니네’라는 분석이 나온다. 주가를 띄우려고 부추기는 전문가가 많다.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다. 실물경제가 어려워지면 금융시장으로 다시 번지는 건 시간문제다. 외환위기 때 기업과 금융회사가 동반 추락한 기억이 생생하다. 30대 그룹 중 11개가 문을 닫았다. 5대 시중은행(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이 사라졌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의 경기부양 카드는 두 가지다. 금리를 내리는 통화정책과 재정을 푸는 재정정책. 둘 다 여의치 않은 게 문제다. 금리를 내리기 어렵다. 물가 상승세가 둔화됐지만, 여전히 5%대로 높다. 2~3%로 안정될 때까지 현 기준금리(3.5%)를 이어가거나 좀 더 올려야 한다. 금융당국이 창구지도를 통해 시장금리를 누르고 있으나 임시방편이다. 정부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   미국도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추는 것이지 인하하는 건 아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상승률은 6.5%. 연준(Fed) 목표인 2%는 한참 멀었다.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79~81년 연준이 기준금리를 11.5%에서 21.5%로 급격하게 올리고도 물가가 2%대 안정을 찾기까지 2년이 더 걸렸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인플레이션이 1~2년 후 진정되더라도 금리가 예전 수준으로 돌아갈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 금리 못 내리면 남는 부양책은 재정 ‘보수=작은 정부’에 얽매여선 안 돼 문재인 정부처럼 마구 쓰지 말고   선별적, 한시적, 적기에 쓰면 효과 」    재정정책도 쉽지 않다. 문재인 정부 때 재정을 축내는 바람에 여력이 없다. 재정을 풀다가 물가를 자극할 우려도 있다. 미묘한 걸림돌이 하나 더 있다. ‘보수=작은 정부, 진보=큰 정부’ 프레임이다. 보수는 재정정책을 쓰지 말고, 긴축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으로 읽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보다 좌파이지만, 북유럽과 비교하면 우파다. ‘나는 보수이니 긴축에 찬성’ ‘나는 진보이니 재정확대’ 식의 논리는 단순할 뿐만 아니라 위험천만하다.   과거 사례를 봐도 이 프레임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 민주당 지미 카터 정부(77~80년) 때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는 2.3%였다.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81~88년)의 재정적자는 4.1%로 오히려 증가했다. 민주당 빌 클린턴(93~2000년) 때 줄었다가 공화당 조지 W 부시(2001~2008년) 때 다시 늘었다. 통념과는 반대다. 국내에서도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부 10년간 GDP 대비 정부 규모는 더 커졌다. 정부 크기를 좌우하는 광의의 조세부담률은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23.7%에서 2017년 25.4%로 증가했다(전주성 『재정전쟁』).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이념 프레임에 빠진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중도좌파다. 재정 확대를 주창하는 케인스 학파다. 정치색이 짙다. 민주당을 지지한다. 바이든 정부가 2021년 초 코로나 펜데믹 극복을 위해 1조9000억 달러의 부양책을 내놓았다. 크루그먼은 “인플레이션을 촉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바이든 편을 들었다.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지난해 인플레이션이 닥치자 크루그먼은 “매우 잘못된 예측이었다”고 반성했다. ‘진보=큰 정부’에 갇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실수였다.   그런 면에서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한 수 위다. 그도 민주당 경제통이지만, 재정을 무조건 늘리는 데 반대했다. 서머스는 “1조9000억 달러는 너무 많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것”이라고 우려했다. 금융위기 당시 정부가 쏟아부은 8000억 달러의 두 배를 넘는 돈이었다. 서머스는 이념과 정파에서 벗어나 경제를 냉정하게 진단한 것이다. 서머스의 완승으로 끝났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와 대척점에 있다. 문 정부 때 손상된 재정 건전성을 복원해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 ‘작은 정부, 긴축’ 프레임이 강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경기가 악화하고, 금리를 내릴 수 없다면 마지막 기댈 곳은 재정이다. 문 정부와 무조건 반대로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 상황에 따라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정상적이라면 문 정부 때 아껴 쓰고, 지금 풀어야 하는데…. 거꾸로 가는 듯하다. 문 정부가 잘못한 건 전 국민 재난지원금, 일회성 공공근로처럼 효과는 없고 생색만 내는 현금 살포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 버릇을 못 고쳤다. 최근에도 민주당은 포퓰리즘 성격이 짙은 30조원 추경을 들고 나왔다.   경기를 부양하려면 재정을 효과적으로 써야 한다. 경제학 교과서는 ‘3T 지출’을 권하고 있다. 선별적으로(Targeted) 한시적이며(Temporary) 적기에(Timely). 최악의 상황은 올 하반기에도 물가 불안으로 고금리가 계속되고, 정부가 부양과 내년 총선을 의식해 재정지출을 급작스럽게 확대하는 경우다. 두 정책이 충돌하며 불황이 깊어질 수 있다. 더 나빠지기 전에 재정의 역할을 따져봤으면 한다. 경제는 타이밍이다. 고현곤 편집인

    2023.01.31 01:13

  • [세컷칼럼] 공기업 낙하산, 그 끝없는 기득권 파티

    고현곤 편집인 공기업에 입사하려면 한국사·국어·IT 등 각종 자격증을 따야 한다. 가산점을 얻기 위해서다. 학원비, 교재비, 응시료,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겨우 스펙을 갖춰도 수백 대 1 경쟁을 뚫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면접은 고사하고, 1차 관문인 서류 전형에서 대부분 탈락한다. 운 좋게(?) 붙어도 금세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다. 열심히 일해도 '사원에서 사장까지' 이런 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공기업 사장이 되려면 정부부처를 거쳐야 한다. 더 쉬운 방법은 정치권이나 권력의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자리를 꿰차는 것이다. 이들은 전문성이 없고,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다. 기회만 닿으면 공기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정치판으로 달려간다. 어차피 오래 있을 회사도 아니고, 내 돈도 아닌데 직원들과 마찰을 빚을 이유가 없다. 노조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적당히 타협한다. '공공기관 운영 법률'을 적용받는 350개 공기업의 한 해 예산은 761조원이다. 위험천만한 낙하산 기관장이 국가 예산(올해 638조원)보다 많은 돈을 굴린다. 경영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공기업 순이익은 2016년부터 2021년까지 5조원 줄었다. 부채는 같은 기간 493조원에서 583조원으로 늘었다.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지난해 정부가 공기업에 지원한 세금만 109조원이다.   정부가 매년 경영실적을 평가해 등급을 매기지만, 공기업 기관장은 꿈쩍도 안 한다. 솜방망이 처벌에다 '블랙리스트' 방탄까지 둘렀다. 지난해 경영실적이 나빠 해임을 권고받은 기관장은 해양교통안전공단 딱 한 곳이었다. 실적 부진으로 경고를 받은 기관장도 토지주택공사 등 3곳에 불과했다. 적자를 내도 자리를 지킨다. 심지어 성과급도 받는다. 민간에선 어림없는 일이다. 이삼걸 강원랜드 사장, 김경욱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원경환 대한석탄공사 사장은 2020년 총선에서 떨어진 후 이듬해 사장 자리를 꿰찼다. 꿩 대신 닭. 이들 3사는 2021년 적자를 냈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역대 정부는 공기업을 전리품으로 여겼다. 챙겨줄 사람 넣어주고, 적당히 빼먹고. '욕하면서 배운다'고 보수·진보 정부 모두 똑같았다. 국민을 우습게 여긴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공기업 낙하산과 보은 인사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취임사에서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낙하산 인사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많았다. 지난해 임기 막판까지 정기환 마사회장(문 정부 정책기획위원), 윤형중 한국공항공사 사장(국가정보원 1차장), 김제남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시민사회수석)을 내리꽂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때 "공공기관 낙하산을 원천 차단하겠다"고 공약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공기업 파티는 끝났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정권 초에 독한 마음 먹고 낙하산 악순환을 끊지 않는 한 공염불이다. 정치권과 정부, 노조가 나눠 먹는 오랜 이권 카르텔을 깨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약탈 정치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반세기 넘게 누적돼온 경제발전과 삶의 방식에 녹아있다.'(강준만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지금까진 새 정부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빈자리가 나오자 낙하산 인사로 채웠다. 윤 대통령이 정치한 지 얼마 안 돼 챙겨줄 사람이 많지 않다고 떠들었던 평론가들만 머쓱해졌다.   지난해 말 취임한 최연혜 가스공사 사장은 윤석열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다. 1차 공모에서 에너지를 잘 몰라 탈락했으나 결국 사장에 올랐다. 세계는 에너지 위기다. 중차대한 시기에 에너지 문외한이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가스공사 사장을 맡았다. 그는 2012년 총선 때도 대전에서 낙선한 뒤 이듬해 코레일 사장을 꿰찼다. 당시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임기 3년간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나 중도 하차하고,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갔다. 정용기 지역난방공사 사장은 국회의원·구청장을 지냈다. 에너지와 관련이 없다. 윤석열 대선 캠프 정무특보로 합류했다가 지난해 대전시장 당내 경선에서 떨어졌다. 다시 반년 만에 지역난방공사 사장이 됐다. 길에서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량진 학원을 전전하는 청년들은 이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식으로 '공기업 파티'를 끝낼 수 있을까.   올해와 내년, 문재인 정부 기관장의 임기가 속속 만료된다. 당장 새해 초 주택도시보증공사와 예탁결제원 사장 자리가 빈다. 선거 캠프 출신, 전직 관료 등 낙하산 하마평이 무성하다. 공기업 외에도 정부 영향력 아래 '짭짤한' 자리가 부지기수다. 건설·금융과 무관한 이은재 전 의원이 취임해 논란을 빚은 전문건설공제조합 이사장 같은 자리다. 내년 4월 총선을 노리고 그만두는 사람, 낙선 뒤 자리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얽히고설킨다. 한바탕 난장판이 될 게 틀림없다. 공기업이 망가지든 말든 이들의 관심은 출세와 주머니를 채우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기득권이다. 국민은 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상식'을 지켜보고 있다. '내로남불의 끝판왕' 문재인 정부와 얼마나 다른지도 따져볼 것이다. "기득권에 매몰된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는 윤 대통령 2023년 신년사가 빈말이 아니었으면 한다.   글=고현곤 중앙일보 편집인 그림=김은송 인턴기자 

    2023.01.10 23:56

  • [고현곤 칼럼] 공기업 낙하산, 그 끝없는 기득권 파티

    고현곤 편집인 공기업에 입사하려면 한국사·국어·IT 등 각종 자격증을 따야 한다. 가산점을 얻기 위해서다. 학원비, 교재비, 응시료, 그리고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겨우 스펙을 갖춰도 수백 대 1 경쟁을 뚫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면접은 고사하고, 1차 관문인 서류 전형에서 대부분 탈락한다. 운 좋게(?) 붙어도 금세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다. 열심히 일해도 ‘사원에서 사장까지’ 이런 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공기업 사장이 되려면 정부부처를 거쳐야 한다. 더 쉬운 방법은 정치권이나 권력의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자리를 꿰차는 것이다. 이들은 전문성이 없고,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다. 기회만 닿으면 공기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정치판으로 달려간다. 어차피 오래 있을 회사도 아니고, 내 돈도 아닌데 직원들과 마찰을 빚을 이유가 없다. 노조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적당히 타협한다.     ■  「 사장은 정치인·관료, 적자 내도 멀쩡 청년들,‘사원에서 사장’꿈도 못 꿔 역대 정부 이어 윤 정부도 낙하산 새해 ‘공정과 상식’ 지켜질지 볼 것 」    ‘공공기관 운영 법률’을 적용받는 350개 공기업의 한 해 예산은 761조원이다. 위험천만한 낙하산 기관장이 국가 예산(올해 638조원)보다 많은 돈을 굴린다. 경영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공기업 순이익은 2016년부터 2021년까지 5조원 줄었다. 부채는 같은 기간 493조원에서 583조원으로 늘었다.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지난해 정부가 공기업에 지원한 세금만 109조원이다.   정부가 매년 경영실적을 평가해 등급을 매기지만, 공기업 기관장은 꿈쩍도 안 한다. 솜방망이 처벌에다 ‘블랙리스트’ 방탄까지 둘렀다. 지난해 경영실적이 나빠 해임을 권고받은 기관장은 해양교통안전공단 딱 한 곳이었다. 실적 부진으로 경고를 받은 기관장도 토지주택공사 등 3곳에 불과했다. 적자를 내도 자리를 지킨다. 심지어 성과급도 받는다. 민간에선 어림없는 일이다. 이삼걸 강원랜드 사장, 김경욱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원경환 대한석탄공사 사장은 2020년 총선에서 떨어진 후 이듬해 사장 자리를 꿰찼다. 꿩 대신 닭. 이들 3사는 2021년 적자를 냈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역대 정부는 공기업을 전리품으로 여겼다. 챙겨줄 사람 넣어주고, 적당히 빼먹고. ‘욕하면서 배운다’고 보수·진보 정부 모두 똑같았다. 국민을 우습게 여긴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공기업 낙하산과 보은 인사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취임사에서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낙하산 인사가 역대 어떤 정부보다 많았다. 지난해 임기 막판까지 정기환 마사회장(문 정부 정책기획위원), 윤형중 한국공항공사 사장(국가정보원 1차장), 김제남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시민사회수석)을 내리꽂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때 “공공기관 낙하산을 원천 차단하겠다”고 공약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공기업 파티는 끝났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정권 초에 독한 마음 먹고 낙하산 악순환을 끊지 않는 한 공염불이다. 정치권과 정부, 노조가 나눠 먹는 오랜 이권 카르텔을 깨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약탈 정치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반세기 넘게 누적돼온 경제발전과 삶의 방식에 녹아있다.’(강준만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지금까진 새 정부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빈자리가 나오자 낙하산 인사로 채웠다. 윤 대통령이 정치한 지 얼마 안 돼 챙겨줄 사람이 많지 않다고 떠들었던 평론가들만 머쓱해졌다.   지난해 말 취임한 최연혜 가스공사 사장은 윤석열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다. 1차 공모에서 에너지를 잘 몰라 탈락했으나 결국 사장에 올랐다. 세계는 에너지 위기다. 중차대한 시기에 에너지 문외한이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가스공사 사장을 맡았다. 그는 2012년 총선 때도 대전에서 낙선한 뒤 이듬해 코레일 사장을 꿰찼다. 당시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임기 3년간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나 중도 하차하고,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갔다.   정용기 지역난방공사 사장은 국회의원·구청장을 지냈다. 에너지와 관련이 없다. 윤석열 대선 캠프 정무특보로 합류했다가 지난해 대전시장 당내 경선에서 떨어졌다. 다시 반년 만에 지역난방공사 사장이 됐다.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량진 학원을 전전하는 청년들은 이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식으로 ‘공기업 파티’를 끝낼 수 있을까.   올해와 내년, 문재인 정부 기관장의 임기가 속속 만료된다. 당장 새해 초 주택도시보증공사와 예탁결제원 사장 자리가 빈다. 선거 캠프 출신, 전직 관료 등 낙하산 하마평이 무성하다. 공기업 외에도 정부 영향력 아래 ‘짭짤한’ 자리가 부지기수다. 건설·금융과 무관한 이은재 전 의원이 취임해 논란을 빚은 전문건설공제조합 이사장 같은 자리다.   내년 4월 총선때 그만두는 사람, 낙선 뒤 자리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얽히고설킨다. 한바탕 난장판이 될 게 틀림없다. 공기업이 망가지든 말든 이들 관심은 출세와 주머니를 채우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기득권이다. 국민은 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상식’을 지켜보고 있다. ‘내로남불의 끝판왕’ 문재인 정부와 얼마나 다른지도 따져볼 것이다. “기득권에 매몰된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는 윤 대통령 신년사가 빈말이 아니었으면 한다. 고현곤 편집인

    2023.01.03 00:48

  • [고현곤 칼럼] 대통령, 작은 싸움에서 벗어날 때

    고현곤 편집인 윤석열 대통령이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을 중단한 지 보름이 지났다. 논란이 있지만, 대통령 발언을 둘러싼 소모적 정쟁이 줄어든 건 분명하다. 중단 후 2주 동안 대통령 지지율이 33.4%에서 38.9%로 올라간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도어스테핑은 국민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순기능보다 논란을 증폭시키는 역기능이 컸다. 대통령이 실언하고, 반대 진영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흠집을 내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방송사 패널과 유튜버들은 ‘아니면 말고’ 식의 분석을 늘어놓으며 대통령 발언을 확대 재생산했다.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걸 지켜보는 국민은 피곤했다.   대통령이 아침마다 오만 가지 질문을 받는 것부터 아슬아슬했다. 대변인이 해도 될 만한 문답까지 직접 해야 했다. 대통령이 수많은 현안을 모두 꿰뚫고 있을 수는 없다. “언론에 장관들만 보이고 대통령은 안 보인다는 얘기가 나와도 좋다”는 대통령 뜻과도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소통이 아니다. MBC와의 돌발 설전은 대통령 입장에선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다. 언론은 유감을 표했다. ‘도어스테핑도 안 할 거면 용산으로 왜 옮겼느냐’고. 원론적으로는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어설픈 도어스테핑, 곁가지로 흐르는 도어스테핑이 국정 운영과 소통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는 의문이다.     ■  「 준비 안 된 어설픈 도어스테핑 중단 후 논쟁 줄고 지지율 올라 재개하면 소모적 정쟁 또 늘 것 노동·연금·교육 큰 싸움 집중하길 」    무엇보다 대통령실은 도어스테핑을 제대로 할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미국은 기자들이 백악관 탑승장에서 헬기를 타러 오는 대통령에게 짧은 질문을 한다. 대통령이 답변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선택이 대통령의 전략이다. 스치듯 지나가며 답하는 것 같지만, 대변인이나 각 부처와 정교하게 조율한 메시지를 내놓는다. 그 짧은 문답을 위해 참모들이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한다. 대통령의 한마디는 정부의 최종 입장이란 무거운 무게를 갖기 때문이다. 충분한 준비 없이 도어스테핑을 하면 크고 작은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 자신도 도어스테핑 준비가 안 돼 있는 것 같다. 검사 시절 법조 기자들을 허물없이 대하는 식으론 한계가 있다. 대통령의 표정, 제스처, 어법, 이 모든 게 국가의 메시지다. 그런 면에서 매끄럽지 않았다. 진솔하게 얘기하면 상대방이 선의로 받아들일 것 같지만 세상은 그리 간단치 않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방이 무슨 말을 들었느냐가 중요하다.”(피터 드러커)   아쉬운 건 감정을 쉽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인사 실패 비판에 대해 “전 정권 장관 중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손가락을 흔들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검찰 중용에 대해 “과거엔 민변 출신으로 도배했다”고 응수했다. “선거 때도 지지율은 별로 유념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처음 해보는 것이어서”…. 대통령의 언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직설적, 감정적이었다. “본인에게 맞지 않는 상황에 대해 참지 못하는 성격이 아닌가 싶다”(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는 얘기가 터무니없는 게 아니다. 도어스테핑을 재개하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게다가 눈에 불을 켜고 실수하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내심 도어스테핑 중단이 아쉬울 것이다. 탁현민 문재인 정부 의전비서관은 도어스테핑 중단에 대해 “허무한 종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2019년 문 대통령 기자회견 당시 경기방송 기자의 돌발 질문을 갖다 붙였다. “청와대는 그것을 이유로 기자회견을 하지 말자거나 그 기자가 예의가 없으니 제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은 1년에 고작 두세 차례 기자들을 만났다. 불통 대통령이다. 그를 통 크게 소통한 대통령으로 묘사하는 것은 낯 뜨겁다.   그보다는 대통령의 언어를 쓰지 않다가 실패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미묘한 현안에 쉽게 흥분했다. 정제되지 않은 표현을 구사해 소모적인 논쟁거리를 만들고, 싸우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곤 언론 탓을 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선 “대통령의 거칠고 역설적인 화법이 국가 운영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기자들의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형식, 격식, 언어 파괴를 통해 변화를 시도했으나 결과는 민심 이반이었다.   윤 대통령은 작은 싸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그는 싸우면서 컸다. 법과 원칙을 앞세운다. 물러서지 않는다. 사과에도 익숙하지 않다. 이런 스타일이 조국·추미애와 싸울 때는 먹혔다. 대통령인 지금은 좀 다르다. 누구와 다투면 같은 급이 된다. MBC와 싸우는 순간 MBC의 맞상대가 된다. 자칫 작은 싸움에 힘을 빼다 큰 것을 놓칠 수 있다.   민주노총 파업에서 드러났듯 굵직한 현안이 널려 있다. 국민은 노동·교육개혁을 누가 어디서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연금개혁은 개편안 마련 시기를 내년 하반기로 잡았다. 그때는 총선 정국이다. 정상적인 논의가 어렵다. 손에 잡히는 규제 개혁과 공공부문 개혁도 보이지 않는다. 저출산과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자유’를 외쳤지만, 국민을 어떻게 자유롭게 할 건지 분명치 않다. 집권 7개월 지나도록 진짜 큰 싸움은 시작도 안 했다. 고현곤 편집인

    2022.12.06 01:12

  • [고현곤 칼럼] 은행만 신났다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금리·고물가에도 사상 최대 실적을 내는 곳이 있다. 바로 은행이다. 신한·KB·하나·우리 등 4대 금융그룹은 올 1~9월 14조원 가까운 순이익을 냈다. 주목할 것은 이 기간 이자이익이 29조원을 넘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 늘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는 틈을 타 은행이 대출이자를 많이 걷고, 예금이자는 적게 줬다는 얘기다. 은행 입장에선 금리 상승기에 이자 장사를 잘한 셈이다. 그 대가로 국민은 허리가 더 휘었다.   예대금리차(잔액기준)는 2020년 말 2.05%포인트, 2021년 말 2.21%포인트, 올 9월 2.46%포인트로 계속 커졌다. 8월부터 은행별 예대금리차를 공시했지만, 오히려 더 벌어졌다. 기준금리 인상 때 예금금리는 조정하기 쉽지 않고, 대출금리는 바로 오르는 탓이 크다. 예를 들어 2%대 정기예금을 갖고 있다고 치자. 최근 나온 4~5%대 예금으로 갈아타려면 이자를 손해 보고 중도해약을 하든지 만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반면 대출금리(변동)는 얼마 안 가 인상된다. 이 시차에서 생기는 이자이익이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빅스텝) 때마다 은행당 5000억원에 달한다. 땅 짚고 헤엄치기다. 한은에 따르면 빅스텝을 하면 대출자의 이자 부담이 6조5000억원 늘어난다. 이 돈이 은행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 4대 은행, 올 1~9월 이자이익 29조 금리 상승기에 이자장사 몰두한 탓 은행은 돈 잔치, 경영진은 연임 노려 은행 힘들때 세금으로 돕는 게 맞나 」    여기에다 은행이 변동금리대출(신규기준)을 2020년 68%에서 올 2분기 83%로 확 늘렸다. 금리 상승에 맞춰 이자를 더 받아내기 위해서다. 은행 경영은 지난해나 올해나 거기서 거기다. 특별히 잘한 게 없는데, 기준금리 인상에 편승해 큰돈을 번다.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는 ‘공정과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대출금리는 주택담보·전세·신용대출 모두 7%대에 진입했다. 13년 만에 최고치다. 이달 24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또 한차례 기준금리 빅스텝이 예고돼 있다. 8%대 대출금리는 시간문제다. 내년엔 9%대 가능성도 있다. 은행은 “금리 상승기에 예대마진 확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예대마진이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주장도 편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돈이 부족하니 대출금리가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이자이익이 엄청나게 발생하면 시장원리를 잠시 접어두고, 대출금리를 덜 올릴 수도 있다. 은행은 그러지 않는다.   고통 분담 대신에 돈 잔치를 벌였다. 이자 장사로 이익을 많이 낸 게 훈장이라는 듯. 4대 은행의 평균 연봉은 지난해 1억원을 넘었다. 명예 퇴직자에게 3~4년 치 연봉을 얹어줬다. 특별퇴직금 포함해 1인당 5억~10억원의 퇴직금을 준 곳도 있었다. 금융노조는 정년 65세 연장, 주 4.5일 근무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 으름장을 놓고 있다. 경영진은 이자 장사로 거둔 실적을 내세워 2연임, 3연임을 노린다. ‘고객은 왕’이라면서 불편은 외면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린 지 오래지만, 1시간 단축영업은 그대로다. 노사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시간을 끈다.   은행 산업은 대형 은행 중심의 과점 체제다. 시장 지배자이자 갑(甲)이다. 돈이 부족한 경기 침체기에는 더 그렇다. 은행 돈을 쓰는 가계·기업은 협상력이 약하다. 을(乙)이다. 은행이 이자 장사에 재미를 붙여 시장원리만 내세우면? 은행은 승리하고, 가계·기업은 패배한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은행이 영원히 승리할 수는 없다. 가계·기업이 과도한 이자 부담으로 쓰러지면 부메랑이 돼 은행에도 부실이 쌓인다. 잘 나갈 때 외형을 늘리다가 어려워지면 대출 조이고, 부실은 늘고…. 결국 정부에 손을 벌리는 후진적 행태가 반복돼왔다.   외환·금융위기의 혹독한 시련을 겪었으면서도 은행은 바뀐 게 없다. 그동안 종합기업금융플랫폼, 메가뱅크, 디지털, 국제화 등 논의가 무성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물 안 개구리’ 이자 장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64개국 경쟁력 평가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은행 및 금융서비스’는 47위로 최하위권이다. 지난해(42위)보다 더 떨어졌다.   정부도 바뀐 게 없다. 문재인 정부 때인 지난해 말 금융위원회는 보도참고자료를 냈다. 빙빙 돌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대출금리 오른 게 은행 잘못은 아니다’는 게 요지다. 은행을 감싸는 데 급급했다. 윤석열 정부의 금융위는 달라졌나? 오십보백보인 것 같다. 정부는 은행 편이 아니라 국민 편에 서야 한다. 관치금융은 나쁘다. 하지만 은행의 탐욕에 제동을 거는 관치금융이라면 박수 쳐주고 싶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금융위기 때 받은 구제금융을 임직원 보너스로 뿌렸다. 위기를 벗어나자 이내 ‘탐욕스런 금융’으로 돌아갔다. 2011년 뉴욕에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가 벌어진 배경이다. 국내 은행도 국민에 큰 빚을 졌다. 외환위기 때 세금으로 조성한 공적자금 168조원으로 은행 회생을 도왔다. 금융위기 때는 정부가 20조원의 은행 자본확충펀드를 만들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은행이 이자 장사에 몰두하며 오만한 경영으로 복귀한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앞으로 은행이 어려워지면 도와주는 게 맞나? 그것도 세금으로.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2022.11.08 01:02

  • [고현곤 칼럼] 추경호·이창용 경제팀이 해야 할 일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악몽의 3년,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는가 싶더니 경제 위기가 닥쳤다. 참 불우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번 위기는 전 세계를 휩쓰는 데다 해결책이 마땅치 않다. 미국의 리더십이 흔들리면서 구심점도 사라졌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물가 걱정이 없었다. 돈을 풀어 해결했다. 이번엔 돈을 조여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는 신흥국 위기였다. 지금은 전 세계가 ‘제 코가 석 자’다.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밀어붙이고, OPEC플러스가 원유 감산을 결정하는 것을 보면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과거 위기 때의 국제 공조가 작동하지 않는다.”(최종구 전 금융위원장)   위기가 한두 해 만에 끝나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인플레이션+경기침체) 암흑기는 10년 이어졌다.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한 73년부터 물가가 2%대로 떨어진 83년까지. 인플레이션은 한번 불붙으면 잘 잡히지 않는 고약한 특성이 있다. 볼커 미 연준(Fed) 당시 의장이 79~81년 기준금리를 10%에서 무려 20%로 끌어올렸으나 83년에야 물가가 안정을 찾았다.     ■  「 이번 위기, 대책없고 국제공조 안돼 대공황 16년, 70년대 10년 이어져   금리 연내 1%p , 내년 더 인상할 듯 솔직하게 설명하고, 엇박자 줄여야 」    29년 대공황은 16년이나 지속됐다. 미국은 재정 확대(뉴딜정책)와 두 차례의 긴축(31, 37년)을 반복했으나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2차대전을 겪고 나서야 긴 터널을 벗어났다. 대공황 직전은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인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다. 돈이 넘쳤다. 2010년대가 비슷했다. IT 호황과 양적완화로 풀린 돈이 주식·부동산 버블을 만들었다. 정치 상황도 흡사하다. 포퓰리즘과 민족주의를 앞세운 극우·극좌 세력이 득세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핵을 손에 들고 통제 불능으로 치닫고 있다. 이탈리아에선 100년 만에 무솔리니 후계자를 자처하는 극우 총리(멜로니)가 등장했다. 프랑스·스웨덴·헝가리·체코·폴란드에서도 극우가 맹위를 떨친다.   우리 스스로 위기를 타개할 수밖에 없다. 추경호(경제부총리)·이창용(한국은행 총재) 경제팀은 있는 그대로 얘기했으면 한다. 외환위기 때 “펀더멘털은 문제없다”는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이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됐다. 불안심리를 증폭시킬까 봐 그렇게 말했겠지만, 사태 진정에 별 도움이 안 됐다. 요새는 정보가 다양한 경로로 빠르게 유통된다. 근거 없는 낙관론을 내세우거나 ‘쉬쉬’ 하며 넘어가기 어렵다. “물가는 10월에 정점”(추경호), “한·미 금리 격차 수치에 얽매일 필요 없다”(이창용) 같은 말은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달러 사재기하지 마라”고 호통치는 게 낫다. 파월 Fed 의장처럼 “높은 금리가 가계와 기업에 고통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든지.   금리는 계속 오를 것이다. 원유 감산으로 국제 유가가 들썩이면서 금리 인상이 더 시급해졌다. 미국 기준금리(상단)는 3.25%. Fed는 올해 말 4.5%를 예상한다. 올해 남은 두 차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0.75%포인트, 0.5%포인트 인상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게 끝이 아니다. 파월 의장은 “물가상승률 2%까지 금리 인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내년 미국 물가상승률을 3.4%로 전망했다. 내년에도 2%는 어렵다. 물가가 잡히지 않으면 내년에 기준금리를 더 올려야 한다.   한국 기준금리도 경로가 분명해졌다. 이 총재가 애써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미국 기준금리가 한국보다 높은 건 외환위기 이후 이번까지 네 차례 있었다. 역전 폭은 1999~2001년(1.5%포인트), 2005~2007년(1.0%포인트), 2018~2020년(0.75%포인트)였다. 우려할만한 자금 유출은 없었다. 이번은 좀 다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각국 리스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원화가치가 급락하며 취약하다. 북한 핵 도발로 컨트리 리스크도 커졌다. 역전 폭이 1.0%포인트를 넘어선 안 될 듯하다.   한국 기준금리는 2.5%다. 미국이 연내 4.5%까지 올리면 우리도 3.5%는 돼야 한다. 올해 남은 두 차례 금융통화위원회(10, 11월)에서 잇따라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밟아야 3.5%가 가능하다. OECD는 내년 한국 물가상승률을 3.9%로 계속 불안하게 봤다. 내년에도 기준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크다. 경제팀은 이런 현실을 미리 알려 개인·기업이 경각심을 갖고 대비하게 해야 한다.   중차대한 시기에 경제팀의 엇박자는 안 된다. 이 총재가 지난달 빅스텝을 시사했는데, 추 부총리는 “미국 금리인상을 쫓아가자니 경기와 가계부채가 심각하다”고 했다. 정부는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협의하겠다고 했으나 이 총재는 “이론적으로는 필요없고, 부작용만 키운다”고 말했다. 양측이 일관된 메시지를 줘야 시장이 덜 혼란스럽다.   외환위기 때 한은에서 금융감독권을 떼내는 것을 놓고 정부와 한은이 원수처럼 싸웠다. 금융위기 때는 300억 달러 한·미 통화스와프를 체결하자 기획재정부와 한은이 ‘서로 자기가 했다’고 공 다툼을 했다. 이번엔 한 몸처럼 움직여도 될까 말까다. 경제가 어려우면 경제팀은 어차피 욕먹게 돼 있다. 맷집이 좋아야 한다. 안이하거나 무르다는 인상을 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금융 쪽 위기가 실물로 옮겨가면서 기업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늘 것이다. 위기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2022.10.11 0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