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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딜레마와 선택’(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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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하경 칼럼] 윤석열 대통령이 진정으로 강해지는 길

    이하경 대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드디어 제1 야당인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만난다. 잘된 일이지만 황금 같은 지난 2년의 국정동력 손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총선 참패 엿새 만에 국무회의 모두발언 형식으로 나온 대국민 메시지도 실망스러웠다. 번역기로 돌린다면 본심은 “나의 국정 방향은 옳았고, 최선을 다했지만 국민들이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하다”였다. 네 시간 뒤 참모들이 전해 준 “죄송하다”는 표현에는 진정성이 없었다.   대통령은 총선 참패로 드러난 민심 이반에도 불구하고 정신 승리의 초현실적 세계에 머물고 있었다. “경제적 포퓰리즘은 마약과 같은 것”이라며 야당을 거칠게 공격했다. ‘포퓰리즘 파이터’였던 윤희숙 의원조차 대통령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총선에서 낙선해 수도권 민심을 체험한 그는 “재정건전성을 어느정도 허물어서라도 한계에 몰린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지혜로운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누가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가.     ■  「 비선 정리하고 쓴소리 경청을 김건희 여사 문제 무겁게 다뤄야 이재명 대표 국정 운영 동반자로 불완전함 인정하고 달라져야 」    항간에는 윤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탓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윤 정부의 국정 성과를 알리지 않고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자기 장사만 한 것이 총선 패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실상과는 차이가 있다. 김건희 여사 논란,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도피 출국, 대파 875원 논란은 모두 용산발 대형 악재였다. 용산의 내부 혼선도 끝이 없다. 대국민 메시지 작성 과정에서 비서실장·정무수석·홍보수석 등 공식 라인이 배제됐다. 박영선 총리, 양정철 비서실장 카드를 흘린 것도 비선 실세들이었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회의해 결정한 뒤 관저에만 다녀오면 전혀 다른 말씀을 한다. 관저 정치를 없애는 것이 급선무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러니 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순실 국정 농단이 드러난 직후 지지율 25%보다도 낮은 23%로 추락한 것이다.   용산에서는 “직언하려면 직을 걸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사심없이 쓴소리를 한 원로나 친구는 연락이 끊어진다. 예스맨이 득세하고 용산 3적(賊), 6적, 8적 리스트가 떠돈다. 세종대왕 재위기에도 직언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오죽하면 세종이 “아직 과감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하는 자나 중론을 반대해 논란하는 자가 없다”고 탄식했을까. 윤 대통령은 비선을 정리하고 참모들의 쓴소리를 권장하고 경청해야 한다. 야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야당(opposition party)은 정당정치에서 반대의견을 제도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필수 장치다. 야당을 무시하면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는 얘기다.   김건희 여사와 관련한 사안은 무겁게 다뤄야 한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명품백 수수 사건을 둘러싸고 용산과 검찰 수뇌부는 갈등하고 있다. 국민 다수도 야권이 추진하는 김건희 특검법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반대한다. 대통령 부인이라고 적당히 덮고 넘어간다면 입시비리로 ‘멸문지화’를 당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일가 수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헌법 11조 1항에 명시된 ‘법 앞의 평등’이라는 근대 문명국가의 대전제가 무너지게 된다.   윤 대통령은 마음을 비우고 몸을 낮춰야 한다. 정상회담의 화려한 의전과 환호에 가려졌던 서민의 고단한 일상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의 중생을 구제하기 전까지는 지옥을 떠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연민이 발심(發心)할 것이다. 남루한 범부(凡夫)의 아픔을 당장 치유하지는 못하겠지만, 군중의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몸을 맡기는 예수의 심정으로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건축가들은 거대 신전(神殿)을 축조하면서 기둥을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만들었다. 안구의 망막이 곡면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태생적 시각의 왜곡까지 감안해 결과적으로 직선을 구현해 냈다. 데카르트는 세상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이런 지독한 분별의 힘으로 이성이 지배하는 근대의 새벽을 알린 철학자·수학자·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 권력은 타인을 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일이다. 그래서 본질은 폭력이다. 대통령은 그 정점에 선 정치인이다. 막스 웨버가 말한 책임윤리를 다해 성공해야만 용서받는다. 그러기에 나의 불완전함을 메우기 위해 야당의 협조를 구하는 일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미국과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제2차 세계대전을 끝장낸 양대 강국이었다.  두 동맹국이 불과 5년 만에 중국까지 끌어들여 ‘미니 3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만든 사나운 지정학의 공간인 한반도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핵을 가진 호전적인 북한과 중국·러시아는 그때처럼 밀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서로를 향한 내부 총질을 중단하고 통합을 이뤄야 한다. 여소야대지만 야당을 파트너로 활용하면 수많은 문제가 풀릴 것이다. 비슷한 조건의 노태우 정부는 내치와 외교에 모두 성공했다. 정성을 다한 협치는 국민을 편안하게 만들고, 윤 대통령이 진정으로 강해지는 길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4.04.22 00:36

  • [이하경 칼럼] 옳은 개혁도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이하경 대기자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사법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서울대 법대 교수 출신인 박세일 청와대 정책수석이 주도했다. 세계 최저 수준인 국민 1인당 변호사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로스쿨을 도입한다는 소문이 났다. 대법원이 협상을 제안했고, 사법개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법원·검찰·변호사 대표와 청와대 인사들이 참여했다. 개혁의 주체와 대상이 머리를 맡대고 숙의했다. 연간 300명인 변호사 배출 숫자를 96년 500명, 97년 600명 등 단계적으로 늘려 2000년 이후에는 1000~2000명으로 확대하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합의는 지켜졌고,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로스쿨이 문을 열었다. 매년 1700여 명의 변호사가 배출되고 있다.     ■  「 의대 증원 맞지만 2000명은 무리 세종·영조도 경청…현실 반영해 이승만·박정희 통합 토대로 추진 김영삼 사법개혁도 단계적 접근 」    의대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윤석열 정부 의료개혁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압도적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집단 파업 중이고,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면서 청와대와 소통했던 원로 법조인의 의견을 들었다. “이렇게 선전포고식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의료계와 충분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 2035년에 1만 명의 의사가 부족하지만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대통령이 5년간 매년 2000명 증원 카드를 던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전문가도 2000명 카드를 제시한 적이 없다. 정부안의 근거가 됐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3개 기관의 당사자들은 연간 750명에서 1000명 정도를 늘리면서 연착륙시키자고 한다. 의료개혁이 처음에는 지지율을 확 끌어올렸지만 지금은 총선 감점 요인이 돼버렸다.   의사 정원을 늘리는 의료개혁은 백번·천번 옳은 정책이다. 의사가 환자를 떠나고, 정원을 줄이자는 건 상식이하다. 그러나 개혁은 나의 방향이 옳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한국의 의사집단은 전투력이 강하지 않은가.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의약분업 과정에서 의대 정원을 351명 줄였고, 2020년 문재인 정부 때는 의사국가고시를 거부하면서 400명 증원 카드를 무산시켰다. 법률가들이 포진한 윤 정부는 “법대로 하자”고 나온다. 그러나 미국의 법 사상가 홈스 전 연방 대법관은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라고 했다. 세심한 소통과 공감의 과정이 필요했다. 윤 정부는 경직됐고, 서둘렀다.   조선의 성공한 전제군주들도 이렇게 거칠지는 않았다. 1428년 세제개혁에 착수한 세종은 전답 1결당 10말을 정액 징수하는 균등부과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백성 17만 명의 의견을 물었다. 땅이 기름지고 소출이 많은 경상·전라도 농민은 압도적으로 찬성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반대가 더 많았다. 세종은 시행을 유보했다. 격렬한 찬반 토론과 시범 실시를 거쳐 전면 실시된 것은 성종 때인 1489년이었다. 개혁 착수 61년 만이었다.   17세기에 소빙하기가 전 세계를 강타해 유럽에서는 대역병과 마녀사냥이 극성을 부렸다. 중국 대기근은 농민 반란을 촉발해 명청 교체가 이뤄졌다. 조선에서는 경신(庚辛)대기근이 닥쳐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시체가 거리를 메웠다. 민생이 초토화된 뒤 등장한 군주가 영조다. 천한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나 사가(私家)에서 청년기를 보낸 영조는 서민의 참상을 알았다. 죽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젖먹이에게 물리는 황구첨정(黃口簽丁)에 시달리던 백성을 위해 군역을 절반으로 줄여 주는 균역법을 시행했다. 창경궁 홍화문에서 백성들의 애소(哀訴)를 들었기에 가능했다. 현실에 바탕을 둔 세제 개혁으로 조선은 임란(壬亂), 호란(胡亂)과 대기근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도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과감하게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하고, 대지주인 한민당 지도자 김성수의 자기희생적 협조를 얻었기에 성공했다. 내부 통합에서 출발해 전 국민을 지주로 만든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민주화 조치였다. 한국전쟁 때 적화되지 않고 훗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훗날 비판자가 되는 장준하가 발행한 『사상계』 지식인 그룹의 경제개혁 제안에 주목했다. 계획경제, 공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론, 기간산업 집중 육성, 미국 이외 국가로의 원조 다각화, 저축 강행과 소비절약, 수출 확대는 군정의 정책에 모두 반영됐다. 사상계는 교착된 한·일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새 정부가 직면할 현실을 측면에서 도와줬다. 함석헌은 5·16을 “신속히 이뤄져야 할 복부 수술”이라고 했다(『만주 모던』 한석정).   윤 대통령이 달라져야 한다. 국민의힘 수도권 후보들의 제안대로 의대 정원까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협의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 결과와 무관하게 예스맨들을 모두 내보내고 “노”라고 직언할 수 있는 인물로 새 진용을 짜야 한다. 아무리 미워도 야당과 대화하고 통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남은 임기 3년 동안 옳으면서도 성공한 개혁을 이뤄낼 수 있다.     이하경 대기자

    2024.04.01 01:03

  • [이하경 칼럼] ‘대만 재앙’의 한반도 충격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이하경 대기자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지난달 ‘대만 재앙’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대중국 정책을 설계한 매슈 포틴저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도 3인의 공동 기고자 중 한 사람이었다.   기고문은 중국이 대만을 합병하고 미국을 아시아에서 몰아낸다면 “미국의 동맹국들은 자체 핵무기 개발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미 역량을 갖춘 것으로 분석했다. 이어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경제적으로 활성화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양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힘을 갖게 된다”고 했다. 헤지펀드 매니저인 켄 그리핀의 “대만 반도체에 대한 접근권을 잃으면 미국 GDP가 5~10% 감소할 것이며, 이는 ‘즉각적인 대공황’을 의미한다”고 한 발언을 인용했다. 고(故)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포틴저에게 “미국이 ‘세계 해안에서 떨어진 섬’과 유사해지기 시작할 수 있다”고 경고했던 사실도 공개했다.     ■  「 미 CIA ‘중, 2027 대만 공격’ 공개 왕이 ‘한반도 전쟁 불가’ 말했지만 미국 힘 분산 위해 북 사주 가능성 한·미·일 안보태세, 대화 모두 필요 」    중국은 대만을 침공할 것인가. 윌리엄 번스 미 CIA 국장은 지난해 10월 “시진핑이 2027년까지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끝내라는 지시를 군에 내렸다”고 했다. 우자오셰 대만 외교부장도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더 커졌으며 시기는 2027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027년은 시진핑 집권 4기가 시작되고 인민해방군 건군 100주년이 되는 해다.   대만에서 전쟁이 터지면 한반도는 바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양회(兩會) 기간 중인 지난 7일 “세계는 이미 충분히 혼란스럽다. 한반도까지 전쟁이나 동란을 보태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진심이기 바란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을 지키려는 미국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북한의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9월 CNN 인터뷰에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북한 역시 도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강력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올해 1월 “미국은 유럽과 중동에서 억지력을 잃었고, 아시아에서도 억지력을 잃기 직전이거나 이미 잃었다”고 했다.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온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만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트럼프는 지난해 9월 NBC 인터뷰에서 “대만을 방어하기 위해 미군을 보내겠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주한미군 철수도 거론했던 사람이다. 대만과 한국 방위는 장사꾼 출신의 흥정 대상이 될 운명인가. 이 와중에 김정은은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을 주저 없이 초토화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로버트 칼린과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한반도 정세가 1950년 6월 초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하고 철저한 안보태세를 갖춰야 한다. 유사시 주한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킨 것은 윤 대통령의 탁월한 업적이다. 동시에 대화도 해야 한다. 평화의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대화는 필수다. 미국 NSC 대변인은 지난주 “한반도에서 우발적인 충돌의 위험을 줄이는 것을 포함한 여러 대화를 모색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기시다 총리도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 중이고, 북한도 호응하고 있다. 정작 당사자인 한국만 다른 분위기다. 통일부 조직에선 ‘교류’가, 외교부에서는 ‘평화’와 ‘교섭’이 사라졌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북한이 호전성을 드러내는 것은 경제난으로 인한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강대강으로만 맞서지 말고 지혜롭게 다양한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안정된 민주주의와 세계 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한국은 지킬 것이 너무도 많은 나라다. 북의 온건파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강력한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   한반도는 지구상 최악의 지정학적 화약고다. 소련은 미국과 힘을 합쳐 제2차 세계대전을 끝장냈다. 그러나 불과 5년 만에 김일성에게 설득당한 소련이 중국까지 끌어들여 한·미와 대결한 “3차 세계대전의 대체물”(윌리엄 스툭 조지아대 석좌교수)이 한국전쟁이다. 북한·중국·러시아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다. 이럴수록 안보태세를 단단히 하되 대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대만해협에서도 중국과 대만은 2010년 체결한 양안 경제협력기본협정(EFA)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대만의 대중국 수출액은 1522억 달러였다.   남과 북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고, 강대국들은 쉴 새 없이 으르렁거린다. 이렇게 험악한 한반도에서 평화가 이뤄질 수 있을까. 우리의 간절함이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만일 한반도에 비핵 평화가 찾아온다면 1795년 칸트가 “전쟁은 악인을 제거하기보다 많이 만드는 점에서 나쁘다”면서 주창한 전 세계의 영구평화가 실현되지 않을까. 이하경 대기자

    2024.03.11 00:36

  • [이하경 칼럼] 되살려야 할 이승만과 제헌국회의 협력

    이하경 대기자 우남(雩南)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공산 세력으로부터 지켜낸 거인(巨人)이다. 강대국 미국은 오판을 거듭했지만 우남은 오차 없는 국제정세 판단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김덕영 감독의 다큐영화 ‘건국전쟁’을 관람했다. 많은 분이 “저평가된 우남의 실체를 알게 됐다”고 했는데 실제 그랬다. 우남의 전모를 보다 균형 있게 파악하려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제헌국회와의 갈등과 협력을 편견 없이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가면서 우남에게는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5·10 총선, 헌법 제정, 대통령 선출, 내각 구성을 통해 정부를 출범시키고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넘겨받아 8월15일 신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해야 했다. 9월21일 시작되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는 것도 중대사였다.     ■  「 미국 오판으로 초래된 북의 남침 우남, 초인적 노력으로 나라 구해 제헌국회, 당략 초월 ‘민주’ 지켜 한반도 위기 대비 견제·협력 필요 」    그래서 5월31일 구성된 제헌국회에 “1분이라도 빨리 우리 헌법을 통과시키자” “비율빈(필리핀)은 이틀 만에 만들었다”고 채근했다. 일본은 착수 9년 만인 1889년에 메이지 헌법을 제정했는데 한국은 한 달여 만에 해치웠다. 우남은 나라를 잃은 뒤 외교를 통한 독립을 성취하는 데 한평생 매달렸지만 좌절했다. 그래서 새 정부 수립의 성공 가능성을 100% 낙관하지 못했다. 남로당의 준동도 불안감을 키웠다. 그가 실권을 가진 초당적 지도자가 되려 한 배경이다.   반면에 최초의 국가기관인 제헌국회는 민주적 절차를 중시했다. 우남의 거부로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 급선회했지만 헌법에서 내각제적 요소를 최대한 살렸다. 대통령의 결정은 국무회의 과반수 의결을 거쳐야 집행될 수 있게 했다. 국회는 총리를 인준하고, 총리와 장관을 부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통령의 설명을 요구했고, 정부의 책임성(accountability)을 제도화했다.   제헌국회는 재석 196명 중 180명의 압도적 찬성으로 우남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확고한 국부(國父)의 위상이 확인됐다. 문제는 초대 국무총리 인선이었다. 우남은 김성수·신익희·조소앙 등 국회가 원하는 지도자 대신 북에서 내려온 목사 이윤영 의원을 선택했다. 국회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시켰다.   우남이 담화를 통해 “인준 부결은 파벌주의 때문이며 참된 민의가 아니다”고 하자 “이런 어법은 천황제와 비슷하다”(노일환 의원)는 반발이 나왔다. 파국 일보 직전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우남은 국회에 나와 “국회가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총리를 인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전제국가가 아니라 민주국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환영한다”고 물러섰다.(『오늘이 온다』 권기돈)   임기 2년의 제헌의원 200명은 “1인1당”의 자유를 누렸다.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당당하게 발언했다. 대부분 짐칸에 덮개를 씌운 트럭이나 전차를 타고 출퇴근했지만 주말에도 국회에 나와 치열하게 토론했다.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당리당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의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1950년 1월19일 미국 하원이 6000만 달러 규모의 한국경제원조안을 부결시켰다. 국회는 원조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조헌영 의원은 찬성하면서도 “왜 부결시켰는지는 알아야 한다. 미국은 한국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고 대통령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정파를 초월해 존경받았던 ‘토론 종결자’ 조 의원은 고려대 교수였던 조지훈 시인의 부친이고,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조부다.   일주일 뒤인 1월 26일 민국당 서상일 의원 외 78인은 “대통령제로는 민주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며 내각제 개헌안을 발의했다. 야당 출신 신익희 국회의장은 개헌에 찬성하면서도 우남을 “나라의 지보(至寶)이고 국부”라며 “그분이 종신대통령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국정 운영의 일방통행은 거부하지만 우남이 존경받는 인물임은 인정했다.   우남은 1949년 상반기 미군 철수가 기정사실화되자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다. 미국은 거꾸로 북침을 우려해 외면했다. 2차 세계대전을 막 끝낸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남북 충돌로 3차대전이 터지기를 원하지 않았고, 소련도 같은 입장일 것으로 오판했다. 우남의 판단이 맞았다. 피란길에 허정을 만난 우남은 “미국놈에게 속았다”고 했다.(『허정 회고록』) 하지만  초인적 노력으로 미국의 지원을 끌어냈고, 반공포로 2만5000명을 석방하는 광인(狂人)전략까지 동원해 소원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거머쥐었다.   제헌국회는 1949년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들었고, 6·25전쟁 중의 민심이반을 막았다. 우남과 제헌국회가 합력했기에 가능했다. 한반도 정세는 6·25 전과 흡사하다. 중국·러시아·북한은 밀착 중이고, 트럼프는 동맹을 헌신짝으로 여기고 있다. 우남처럼 국제정세를 꿰뚫고 강대국에 맞서는 용기 있는 지도자, 당리당략을 초월해 견제와 협력에 나선 제헌의원들의 2인3각 애국심을 되살려야 한다. 이하경 대기자

    2024.02.19 00:45

  • [이하경 칼럼] 제왕적 대통령제 유감

    이하경 대기자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이 세계의 뉴스가 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주 ‘2200달러짜리 디올 손가방이 한국의 여당을 뒤흔들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영국 BBC방송과 더 타임스, 텔레그래프도 이 사안을 보도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국민이 걱정을 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한 뒤 여당과 대통령실 간에 불협화음이 있었다. 사과를 요구하는 민심에 윤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주목된다. 윤 대통령을 아끼는 지기(知己)가 대신 반성문을 써서 전해주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제왕적 대통령의 시련에는 예외가 없는 것일까.     ■  「 일본은 신 같은 천황 권력도 제한 한국, 심부름꾼을 전제군주로 모셔 윤 대통령 ‘명품백 수수’ 대응 주목 지기는 대신 반성문 써준다는데… 」    한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된 것은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의 고집 때문이었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열여섯 차례의 헌법 기초위원회 회의를 갖고 6월 21일 내각제 헌법 초안을 확정했다. 당대 최고의 헌법학자인 유진오가 주도했기에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 임기 동안 정부가 안정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며 대통령제로 바꾸자고 했다. 한민당 당수인 김성수가 동의했고,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인 김준연이 연필로 관련 조항 몇 대목을 고쳤다. 유진오는 “기형적 정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해서 다음 날 대통령제 헌법안이 본회의에 넘겨졌고, 7월 12일 통과됐다.   유진오 헌법안은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참고했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토대로 자유·평등·복지가 구현되는 국민주권적인 민주국가를 지향했다.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까지 보장하는 진보성도 갖췄다. 하지만 핵심인 권력구조가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급변침한 것은 민주주의 역사를 퇴행시키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아홉 차례의 개헌을 거친 한국 특유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됐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줘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책 결정과 집행을 가능하게 했고,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원적 가치와 민의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전제군주를 복제하는 위험한 구조를 만들고 말았다.   일본의 제헌 과정은 오랜 시간 숙성 과정을 거쳤다. 1880년이 되자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열자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났다. 눈이 밝은 메이지 정부 최고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1871년부터 서양 헌법 서적을 입수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1880년 12월 원로원이 작성한 헌법안에 대해 “서양 각국의 헌법을 모아서 베낀 것이며 일본의 국체와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원로원 안은 폐기됐다. 이토는 1882년 3월 입헌군주제의 원산지인 유럽으로 떠났다. 독일 헌법 전문가 모세의 강의를 들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 슈타인 교수로부터는 헌법으로 군주권을 제한하는  군주기관설을 배웠다. 19세기 전반 유럽 시민혁명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최첨단 헌법이론이었다. 영국 런던에서도 입헌군주제 운용의 구체적 현실을 점검했다. 1년5개월 만에 귀국했다.   1885년 45세에 초대 총리가 된 이토는 열한 살 어린 메이지 천황이 “실권 없는 로보트 취급을 당한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실제로 천황은 각료들이 국사를 상주(上奏)하려 해도 만나지 않고 사보타주했다. 이토는 천황을 소년시절부터 모신 동갑내기 시종 후지나미를 슈타인 교수에게 보내 2년3개월간 강의를 듣게 했다. 헌법을 몰랐던 말(馬) 전문가 후지나미는 귀국해 천황과 황후에게 33시간 동안 헌법과 입헌군주의 역할을 강의했다. 일본에 군주기관설을 적용하기 위한 치밀한 작업이었다.   이토는 1888년 총리에서 물러나 초대 추밀원 의장으로 제헌 작업에만 몰두했다. 이노우에 고와시가 만든 초안을 놓고 식사도 걸러가면서 밤늦게까지 토론했다. 젊은 관료들은 전직 수상의 의견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이토가 “자기 의견을 마음껏 말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89년 2월 11일 메이지 헌법이 공포됐다(『이토 히로부미』 이토 유키오).   두 나라가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이렇게 달랐다. 일본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한국은 거꾸로 심부름꾼인 공복(公僕)에게 전제군주의 지위를 부여하는 단초를 만들었다. 일본은 정교하게 설계된 입헌군주제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이토는 조선 병탄(倂呑)의 원흉이었고,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됐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이었다. 반면에 한국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제로 고통받고 있다.   이 나라는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면 정부와 민간 기업, 범부(凡夫)의 일상까지 집단 몸살을 앓는다. 일류 기업과 한류의 파워로 국가 위상은 올라갔는데 언제까지 이런 전근대적인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악순환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정치권도, 국민도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건강한 권력구조를 만드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4.01.29 00:28

  • [세컷칼럼]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힘센 사람이 권력에 취하면 판단이 흐려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인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60%가 넘는 반대 여론과 충돌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총선용 여론 조작 법안”이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민의 불쾌한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가족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는 없었다. “위헌적 권한 행사”라는 야당의 서늘한 주장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차남 김현철 때문에 몰락했다. 대선 일등공신 김현철은 안기부와 청와대에 심복을 두고 막강한 정보력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소통령’의 전횡을 YS에게 직보(直報)한 박관용 비서실장은 반격을 당해 바로 힘을 잃었다. 김현철의 특급 참모는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이었다.   ■  「 윤 대통령, 배우자 문제로 시험대 정치 9단 양김도 아들 관리 실패 특별감찰관이 모든 의혹 조사를 대통령·배우자 일정도 공개해야 」  1997년 김기섭 파문으로 시끄러울 때 노신영 전 총리를 만나 소회를 들었다. “안기부에서는 매일 수천 건의 정보와 첩보가 생산된다. 그중 5건만 부장에게 올라온다. 2년8개월 동안 부장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보고했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내용이다. 김기섭은 권한 없는 대통령 아들에게 매일 보고했다. 명백한 국정농단이다.”    김현철은 한보게이트의 몸통으로 지목돼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여권과 검찰 수뇌부는 서울대 교수들이 4·19 혁명 때처럼 시위에 나설 거라는 보고를 받고 당황했다. 검찰은 서둘러 별건수사에 나섰고, 조세포탈이라는 금시초문의 죄명을 적용했다.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편법이었다.    김현철은 검찰 재소환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이틀 조사받고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YS는 “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다”고 했다. 김현철은 이틀 뒤인 1997년 5월17일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는 최초로 구속됐다. YS를 만나고 나온 신상우 전 해수부 장관은 “대통령이 넋이 나갔다”고 했다.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없었고, 결국은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장남 김홍일은 정치적 동지였다. 김홍일은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얻었고,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DJ 집권 이후 단숨에 권력 실세가 됐다. 박주선 법무비서관은 초대 내각 각료 명단을 발표하기 위해 걸어가는 도중 DJ의 전화를 받았다. “나 때문에 고문당해 불구가 된 아들의 부탁이오….” 장관 한 사람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조승형 헌법재판관의 국정원장 기용이 은밀히 검토됐을 때 밤늦게 김홍일의 동교동 자택 문을 두드린 적이 있다. 자다가 일어난 그는 “없던 일이 됐다”고 화끈하게 확인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견제를 많이 받아서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지만 돌아가는 건 다 안다.” 다른 취재로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인사 청탁을 하는 방문객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인기 트로트 가수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 아들의 영향력은 전방위적이었다.    당시 대통령 친인척과 가족을 관리하는 민원비서관은 김홍일의 30년 친구였다. 허술한 감시는 비극을 불렀다. 김홍일은 권력형 뇌물비리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DJ의 다른 두 아들은 재임 중 구속됐다. 분노한 민심 앞에서는 검찰도 이들에게 총구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민심을 잘 읽었던 ‘정치 9단’ YS·DJ도 이렇게 자식 관리에 실패했고, 임기 말에 눈물 흘렸다. 윤 대통령은 임기를 2년도 채우기 전에 고난의 시험대에 올랐다. 가혹한 운명이지만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조기에 민심을 수용하면 남은 기간의 국정 운영은 순항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당당하게 특검을 받겠다고 나왔어야 했다.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당선된 승부사 대통령의 모범답안이었다. 이제라도 민심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제2부속실을 설치해 배우자를 관리하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선 공약대로 특별감찰관을 임명하고 해외순방 중 김건희 여사 명품 쇼핑, 명품백 수수, 인사청탁,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등 배우자 관련 의혹을 빠짐없이,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문제가 드러나면 일벌백계하고 대국민 사과와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내친김에 대통령과 배우자가 언제 누구를 만났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무성했던 루머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대통령이 민심에 맞서거나 마지못해 따라가는 시늉만 하면 안 된다. 하늘의 그물은 커서 성긴 듯하지만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노자 도덕경). 선행도, 악행도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마음을 내려놓고 하늘 같은 국민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YS·DJ조차 피할 수 없었던 비극적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끝까지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글 = 이하경 대기자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2024.01.09 23:00

  • [이하경 칼럼]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이하경 대기자 힘센 사람이 권력에 취하면 판단이 흐려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인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60%가 넘는 반대 여론과 충돌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총선용 여론 조작 법안”이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민의 불쾌한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가족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는 없었다. “위헌적 권한 행사”라는 야당의 서늘한 주장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차남 김현철 때문에 몰락했다. 대선 일등공신 김현철은 안기부와 청와대에 심복을 두고 막강한 정보력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소통령’의 전횡을 YS에게 직보(直報)한 박관용 비서실장은 반격을 당해 바로 힘을 잃었다. 김현철의 특급 참모는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이었다.     ■  「 윤 대통령, 배우자 문제로 시험대 정치 9단 양김도 아들 관리 실패 특별감찰관이 모든 의혹 조사를 대통령·배우자 일정도 공개해야 」    1997년 김기섭 파문으로 시끄러울 때 노신영 전 총리를 만나 소회를 들었다. “안기부에서는 매일 수천 건의 정보와 첩보가 생산된다. 그중 5건만 부장에게 올라온다. 2년8개월 동안 부장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보고했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내용이다. 김기섭은 권한 없는 대통령 아들에게 매일 보고했다. 명백한 국정농단이다.”   김현철은 한보게이트의 몸통으로 지목돼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여권과 검찰 수뇌부는 서울대 교수들이 4·19 혁명 때처럼 시위에 나설 거라는 보고를 받고 당황했다. 검찰은 서둘러 별건수사에 나섰고, 조세포탈이라는 금시초문의 죄명을 적용했다.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편법이었다.   김현철은 검찰 재소환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이틀 조사받고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YS는 “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다”고 했다. 김현철은 이틀 뒤인 1997년 5월17일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는 최초로 구속됐다. YS를 만나고 나온 신상우 전 해수부 장관은 “대통령이 넋이 나갔다”고 했다.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없었고, 결국은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장남 김홍일은 정치적 동지였다. 김홍일은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얻었고,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DJ 집권 이후 단숨에 권력 실세가 됐다. 박주선 법무비서관은 초대 내각 각료 명단을 발표하기 위해 걸어가는 도중 DJ의 전화를 받았다. “나 때문에 고문당해 불구가 된 아들의 부탁이오….” 장관 한 사람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조승형 헌법재판관의 국정원장 기용이 은밀히 검토됐을 때 밤늦게 김홍일의 동교동 자택 문을 두드린 적이 있다. 자다가 일어난 그는 “없던 일이 됐다”고 화끈하게 확인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견제를 많이 받아서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지만 돌아가는 건 다 안다.” 다른 취재로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인사 청탁을 하는 방문객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인기 트로트 가수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 아들의 영향력은 전방위적이었다.   당시 대통령 친인척과 가족을 관리하는 민원비서관은 김홍일의 30년 친구였다. 허술한 감시는 비극을 불렀다. 김홍일은 권력형 뇌물비리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DJ의 다른 두 아들은 재임 중 구속됐다. 분노한 민심 앞에서는 검찰도 이들에게 총구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민심을 잘 읽었던 ‘정치 9단’ YS·DJ도 이렇게 자식 관리에 실패했고, 임기 말에 눈물 흘렸다. 윤 대통령은 임기를 2년도 채우기 전에 고난의 시험대에 올랐다. 가혹한 운명이지만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조기에 민심을 수용하면 남은 기간의 국정 운영은 순항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당당하게 특검을 받겠다고 나왔어야 했다.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당선된 승부사 대통령의 모범답안이었다. 이제라도 민심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제2부속실을 설치해 배우자를 관리하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선 공약대로 특별감찰관을 임명하고 해외순방 중 김건희 여사 명품 쇼핑, 명품백 수수, 인사청탁,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등 배우자 관련 의혹을 빠짐없이,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문제가 드러나면 일벌백계하고 대국민 사과와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내친김에 대통령과 배우자가 언제 누구를 만났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무성했던 루머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대통령이 민심에 맞서거나 마지못해 따라가는 시늉만 하면 안 된다. 하늘의 그물은 커서 성긴 듯하지만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노자 도덕경). 선행도, 악행도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마음을 내려놓고 하늘 같은 국민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YS·DJ조차 피할 수 없었던 비극적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끝까지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이하경 대기자

    2024.01.08 00:42

  • [이하경 칼럼] ‘아는 형님’ 인사 유감

    이하경 대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내 방식이 맞다”는 확신이 강하다. 검사 시절 살아 있는 권력과 맞섰고, 검찰을 떠난 뒤 딱 1년 만에 대통령이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강서구청장 선거와 부산엑스포 유치 참패로 거침없는 불패의 신화(神話)는 깨졌다. 모든 관계자가 예견한 결과를 대통령만 몰랐다. 불통의 벌거숭이 임금님이 됐다.   이쯤 되면 바뀔 법도 하지만 특유의 국정운영 스타일은 여전하다. 검찰 선배 김홍일 국민권익위원장을 방송통신위원장에 지명했다. 전문성보다 학연과 근무연을 중시하는 ‘아는 형님’ 인사가 되풀이된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하는 헌법 1조의 민주공화국 정신과 충돌한다. 인재풀이 좁아져 국가 경쟁력이 약화돼 국민이 피해를 입으면 누가 보상할것인가.     ■  「 윤 대통령 사심 없고 정책 바로 서 스스로 미숙·결핍을 인정한 뒤 혹독한 감시도 자청해서 받고 과거·친소 불문 인재 써야 성공해 」    김건희 여사 리스크도 문제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동향(同鄕) 목사로부터 명품백을 선물받았다고 한다. 목사는 다섯 번 선물을 제의했는데 명품을 주겠다고 했던 두 번만 면담이 성사됐다고 했다. 목사는 김 여사가 인사청탁을 받는 전화통화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던 맹세는 어디로 갔는가.   여권이 정권을 되찾는 데 성공하고도 불과 1년 반 만에 세 번째 비대위를 꾸릴 정도로 혼란을 겪는 것은 윤 대통령의 경험 부족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대선에 출마하기 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뭔가 허술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해 주저하는 불면의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 성찰의 힘으로 자세를 낮춰 경청하고, 혹독한 감시를 자청했다면 지금의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 개국 8년 만에 왕위에 오른 태종은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권신(權臣)과 친형제까지 죽인 무서운 인물이었다. 어느 날 왕의 휴식 공간인 편전(便殿)에 몰래 들어와 있던 사관(史官) 민인생을 발견하고 “들어오지 않는 것이 맞다”고 했다. 그러나 민인생은 “신(臣)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신여불직(臣如不直) 상유황천(上有皇天)”라고 맞섰다. 태종은 그를 처단하지 않고 존중했다. 이런 관용의 힘으로 조선 500년 동안 군주의 절대 권력은 끊임없이 감시받고 절제될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이 배우자를 감시할 수 있는 특별감찰관과 공식적으로 보좌할 제2부속실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요즘 시대의 하늘은 민심이다. 그런데 윤 정권은 민심과 불화하고 있다.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사건 특검법이 28일 민주당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다고 한다. 이 와중에 명품백 사건이 터졌고 국민 70%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반대하고 있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대통령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민심과 싸우는 형국이 된다. 방치하면 내년 총선은 ‘김건희 총선’이 될 것이다.   이런 지경인데도 여권 전체가 그저 윤심(尹心)만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을 대통령이 결정하는 특이한 구조 때문이다. 윤재옥 국민의힘 대표권한대행은 윤 대통령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90도 인사를 했다. 여권의 시곗바늘은 전제군주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 이 기이한 장면을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예수와 함께 죽겠다고 맹세했던 베드로도 재판정에 선 예수를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했다. 지금 아부꾼들은 대통령이 뿌려주는 권력이라는 마약을 한 방울이라도 더 핥기 위해 충성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의 황혼이 찾아오면 첫닭이 울기도 전에 싸늘하게 배신할 것이다. 염량세태(炎凉世態)는 박근혜 탄핵으로 이미 증명된 권력의 법칙이다.   한 사람의 진면목을 알려면 그에게 권력을 쥐여주면 된다. 더 가질수록 도파민이 많이 분비돼 뇌의 중독 중추가 활성화되고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경계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유령인 줄 알고 떨었는데 내가 유령으로 판명된 공포영화 ‘디 아더스’의 반전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아직 기회는 충분히 있다. 윤 대통령은 사심이 없고, 정책 방향이 대체로 바로 서 있다. 게다가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방탄당, 입법폭주당의 오명을 떨쳐내지 못하고 민생에서 멀어져 있다. 윤 대통령은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미숙함과 결핍을 인정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유·무죄로 판단하는 검사의 이분법적 가치관만으로는 품을 수 없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세계가 있다. 흑과 백이 아니라 경계가 모호한 회색지대에 더 많은 진실이 숨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엄중함을 알면 ‘아는 형님’ 카드를 남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반대하고 비판하더라도 내게 없는 지혜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하늘로 여겨야 한다. 그러면 모두가 협력자가 될 것이다. 뛰어난 인재는 과거 불문, 친소 불문하고 요직에 기용해야 한다. 성공한 정권,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3.12.18 00:53

  • [세컷칼럼] 나시레마족 주술을 거부하는 서울대발 교육개혁

    나시레마(Nacirema)라는 부족이 있다. 남자들은 매일 날카로운 도구로 얼굴을 괴롭히고, 여자들은 작은 오븐에 머리를 굽는다. 입 안에 마법의 분말을 넣는 의식을 수행한다. 기이한 주술에 사로잡힌 원시종족이 연상될 것이다. 사실은 1950년대의 미국인들이 면도하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양치질하는 일상의 장면일 뿐이다.    나시레마는 허구의 소수 부족이다. 아메리칸(American)의 철자를 역순으로 쓴 언어 유희다. 미국 문화인류학자 호레이스 마이너가 다른 문화권 사람의 오해와 편견을 풍자하기 위해 쓴 글 『나시레마 부족의 몸의례(Body Ritual among the Nacirema)』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다.     ■  「 한국, 오리엔탈리즘 극복엔 성공 모방 아닌 창조형 인재 넘쳐나야 성장률 5년 1% 하락 법칙 깨져 개별성 존중, 이타성 확보가 관건 」    서구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비판한 대로 오랫동안 동양을 타자화했다. “너와 나는 다르고 그 차이는 내가 규정하겠다”는 제국주의의 오만이었다. 서구는 문명의 주역이고, 동양은 열등하고 비논리적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냈다. 동양인들은 서구의 비틀린 시선을 통해 자신을 응시하고 정체성을 갖게 됐다. 서구를 모방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한국은 이 모욕의 과정을 뼈저리게 겪은 뒤 실력으로 절정의 국가 파워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열등생에서 우등생으로 변신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한국 경제의 진짜 성장 능력을 나타내는 장기성장률이 지속적으로 추락하고 있다.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5년 1% 하락의 법칙’이 마법이 되고 있다. 좋은 일자리도 덩달아 줄어들고 있다.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시카고대 경제학과 루커스 교수는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 비결이 인적자원의 성공적인 축적에 있다고 분석했다. 먹고살기도 어려운 신생국 대통령 이승만은 초등학교 무상교육을 실시했다. 전쟁 중 피란가서도 천막학교를 열고 대학 강의까지 계속했다. 선진 기술과 지식을 모방하는 주입식 교육을 통해 한국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돼 부자나라가 됐다. 그러나 이제는 선진국이 만든 ‘20년 특허의 벽’에 부닥쳐 모방이 쉽지 않게 됐다. 그래서 창의적 아이디어로 무장한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돼야 한다고 김세직 교수는 역설한다.    김 교수는 물리학자인 오세정 전 총장이 주도하는 국가미래전략원(원장 김병연 경제학부 교수) 교육개혁 태스크포스의 일원이다. 경제학자인 정운찬 전 총장과 함께 창조형 강의를 고안했고, 18년째  적용하고 있다. 그가 학생들에게 던진 ‘정답 없는 과제’ 중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화폐를 상상해 제시하시오”도 있었다. 그는 “2008년 비트코인이 나오기 전에 누군가가 답을 제시했다면 세계 제1의 부자가 되고, 한국의 경제성장률도 크게 도약했을 것”이라고 했다. 종강 후 스스로 창의성이 좋아졌다고 평가하는 학생의 비율은 90%가 넘었다. 더 고무적인 것은 정답이 없는 열린 문제를 토론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자세를 체화했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아예 입시제도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쓸모없는 기존 지식을 반복해서 암기하는 모방형 시험 대신 정답이 없는 열린 문제를 통해 창의력을 평가하자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같은 창조적 CEO를 배출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주입식 사교육이 무의미해져 GDP 대비 세계 1위인 사교육비도 확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학 분야에서도 창조형 강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서울대 교육개혁 태스크포스의 또 다른 일원인 김윤영 기계공학과 석좌교수는 배우는 것을 줄이고 많이 질문하고 생각하는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공학은 기술로 문명을 발전시키는 학문”이라고 강조한다.    한국은 서구 선진국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 여기서 정체되지 않으려면 모방이 아닌 창조를 통해 우리 문명의 표준을 우리의 언어로 세울 필요가 있다. 경제를 넘어 문화까지 강한,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인(萬人)의 개별성과 고유성이 존중돼야 한다.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 시조(始祖) 의상(義湘)은 “작은 티끌 하나에 우주가 들어 있다(一微塵中 含十方)”고 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나만의 느낌으로 살아갈 때 인간은 행복해진다. 비로소 타인을 존엄한 존재로 기꺼이 수용하는 이타성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자유로움 속에 창조의 에너지가 솟구치게 된다. 각기 다른 너와 내가 평화롭게 공존한다면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살아남는 데 반드시 필요한 내부 통합이 가능하고, 진영논리로 병들어 있는 민주주의도 건강해진다.    독자적 문명을 건설할 창의적 인재를 키워내는 ‘서울대발(發) 교육혁신’은 관학(官學)의 타성을 거역하는 일대 사건이다. 타인의 시선, 나시레마의 최면에서 깨어나 저 눈부신 광장으로 걸어가는 과정이다. 성공해서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난제를 직면하고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 이하경 대기자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2023.11.30 23:00

  • [이하경 칼럼] 나시레마족 주술을 거부하는 서울대발 교육개혁

    이하경 대기자 나시레마(Nacirema)라는 부족이 있다. 남자들은 매일 날카로운 도구로 얼굴을 괴롭히고, 여자들은 작은 오븐에 머리를 굽는다. 입 안에 마법의 분말을 넣는 의식을 수행한다. 기이한 주술에 사로잡힌 원시종족이 연상될 것이다. 사실은 1950년대의 미국인들이 면도하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양치질하는 일상의 장면일 뿐이다.   나시레마는 허구의 소수 부족이다. 아메리칸(American)의 철자를 역순으로 쓴 언어 유희다. 미국 문화인류학자 호레이스 마이너가 다른 문화권 사람의 오해와 편견을 풍자하기 위해 쓴 글 『나시레마 부족의 몸의례(Body Ritual among the Nacirema)』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다.     ■  「 한국, 오리엔탈리즘 극복엔 성공 모방 아닌 창조형 인재 넘쳐나야 성장률 5년 1% 하락 법칙 깨져 개별성 존중, 이타성 확보가 관건 」    서구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비판한 대로 오랫동안 동양을 타자화했다. “너와 나는 다르고 그 차이는 내가 규정하겠다”는 제국주의의 오만이었다. 서구는 문명의 주역이고, 동양은 열등하고 비논리적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냈다. 동양인들은 서구의 비틀린 시선을 통해 자신을 응시하고 정체성을 갖게 됐다. 서구를 모방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한국은 이 모욕의 과정을 뼈저리게 겪은 뒤 실력으로 절정의 국가 파워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열등생에서 우등생으로 변신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한국 경제의 진짜 성장 능력을 나타내는 장기성장률이 지속적으로 추락하고 있다.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5년 1% 하락의 법칙’이 마법이 되고 있다. 좋은 일자리도 덩달아 줄어들고 있다.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시카고대 경제학과 루커스 교수는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 비결이 인적자원의 성공적인 축적에 있다고 분석했다. 먹고살기도 어려운 신생국 대통령 이승만은 초등학교 무상교육을 실시했다. 전쟁 중 피란가서도 천막학교를 열고 대학 강의까지 계속했다. 선진 기술과 지식을 모방하는 주입식 교육을 통해 한국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돼 부자나라가 됐다. 그러나 이제는 선진국이 만든 ‘20년 특허의 벽’에 부닥쳐 모방이 쉽지 않게 됐다. 그래서 창의적 아이디어로 무장한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돼야 한다고 김세직 교수는 역설한다.   김 교수는 물리학자인 오세정 전 총장이 주도하는 국가미래전략원(원장 김병연 경제학부 교수) 교육개혁 태스크포스의 일원이다. 경제학자인 정운찬 전 총장과 함께 창조형 강의를 고안했고, 18년째  적용하고 있다. 그가 학생들에게 던진 ‘정답 없는 과제’ 중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화폐를 상상해 제시하시오”도 있었다. 그는 “2008년 비트코인이 나오기 전에 누군가가 답을 제시했다면 세계 제1의 부자가 되고, 한국의 경제성장률도 크게 도약했을 것”이라고 했다. 종강 후 스스로 창의성이 좋아졌다고 평가하는 학생의 비율은 90%가 넘었다. 더 고무적인 것은 정답이 없는 열린 문제를 토론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자세를 체화했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아예 입시제도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쓸모없는 기존 지식을 반복해서 암기하는 모방형 시험 대신 정답이 없는 열린 문제를 통해 창의력을 평가하자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같은 창조적 CEO를 배출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주입식 사교육이 무의미해져 GDP 대비 세계 1위인 사교육비도 확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학 분야에서도 창조형 강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서울대 교육개혁 태스크포스의 또 다른 일원인 김윤영 기계공학과 석좌교수는 배우는 것을 줄이고 많이 질문하고 생각하는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공학은 기술로 문명을 발전시키는 학문”이라고 강조한다.   한국은 서구 선진국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 여기서 정체되지 않으려면 모방이 아닌 창조를 통해 우리 문명의 표준을 우리의 언어로 세울 필요가 있다. 경제를 넘어 문화까지 강한,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인(萬人)의 개별성과 고유성이 존중돼야 한다.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 시조(始祖) 의상(義湘)은 “작은 티끌 하나에 우주가 들어 있다(一微塵中 含十方)”고 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나만의 느낌으로 살아갈 때 인간은 행복해진다. 비로소 타인을 존엄한 존재로 기꺼이 수용하는 이타성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자유로움 속에 창조의 에너지가 솟구치게 된다. 각기 다른 너와 내가 평화롭게 공존한다면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살아남는 데 반드시 필요한 내부 통합이 가능하고, 진영논리로 병들어 있는 민주주의도 건강해진다.   독자적 문명을 건설할 창의적 인재를 키워내는 ‘서울대발(發) 교육혁신’은 관학(官學)의 타성을 거역하는 일대 사건이다. 타인의 시선, 나시레마의 최면에서 깨어나 저 눈부신 광장으로 걸어가는 과정이다. 성공해서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난제를 직면하고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하경 대기자

    2023.11.27 00:30

  • [세컷칼럼] “그런데 홍범도가 누구예요?”

    근래 들어 한국 대통령은 세계 어디에서도 인기다. 튼튼한 경제력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경쟁력 있는 한국 기업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원동력이 된 1960~70년대 고도성장은 부인할 수 없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이다. 출발점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그 경제개발 계획을 탄생시킨 것은 우남(雩南) 이승만 정부였다. 1957년 부흥부 장관이 된 송인상은 이 대통령에게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우남은 “그건 공산당, 사회주의자가 하는 짓”이라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송인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에 출장가서 전후 경제개발 이론의 선구자인 아서 루이스의 저서를 구했고, 우남에게 전달했다. 루이스는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세인트루시아 출신의 흑인 경제학자로 런던정경대와 프린스턴대 교수를 지냈고, 197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우남은 밤을 새워 통독한 뒤 “자네가 하려는 거 해 봐”라고 지시했다.  한국 경제의 운명을 바꾼 비사(祕史)는 한 원로가 생전의 송인상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다.   ■  「 대통령, 전투 모드서 협치 모드로 경제·안보 위기에 필요한 리더십 이견 봉쇄 위한 이념 전쟁은 금물 스타일 넘어 철학·기조 바뀌어야 」   송인상은 “5년은 너무 길다”는 우남의 뜻에 따라 3개년 계획안을 마련해 60년 4월 국무회의에 제출했다. 원래 미국은 농업에 집중하라고 권고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공업화 성장 모델을 채택했다. 자원이 없는 최빈국(最貧國)이 살길은 수출 강국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경제개발 모델의 원형은 이때 축조된 것이다.    3개년 계획은 60년 4·19혁명으로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출범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수정돼 계승됐고, 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실행했다. 정권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됐다. 지금의 정권들처럼 전 정부의 흠결을 들쑤시면서 적폐청산에 나섰다면 ‘한강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의 스타일이 확 달라졌다. 전투 모드에서 협치 모드로 전환했다. 국회 시정연설에서 전 정부에 대한 비판이 사라졌다. 야당에 협력과 협조를 부탁한다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했다. 외면했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악수했고, 야당 국회상임위원장들의 쓴소리도 묵묵히 경청했다. 이런 통합적 자세는 경제와 안보의 복합위기에 꼭 필요한 리더십이다.    이젠 스타일을 넘어 국정 운영의 철학과 기조도 달라져야 한다. 백해무익한 이념전쟁과 결별해야 한다. 먹고사는 실용을 중시하는 중도는 물론 합리적 보수층도 넌더리를 내지 않았던가. 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 했다. 국민의힘 연찬회에서는 “1 더하기 1을 100이라고 하는 세력과는 싸울 수밖에 없지 않나. 제일 중요한 건 이념”이라며 전투를 독려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적대세력을 향해 위협적 언사를 쏟아내는 것은 아무런 적의(敵意)가 없는 무생물인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무모한 용맹을 떠오르게 한다. 강성 지지층은 환호하겠지만 공동체는 경직과 분열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규정해 공격하는 이념전쟁은 이견(異見)을 봉쇄한다. 갈등의 현재화(顯在化)라는 민주주의의 대전제를 위태롭게 한다. 민주주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시장을 존중할 때에만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다.    최악의 이념전쟁 장면은 홍범도 장군을 사회주의자로 낙인찍은 사건이다. 반공보수인 박정희 정부가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박근혜 정부가 해군함정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하지 않았는가. 이름 없는 어느 자영업자는 “그런데 홍범도가 누구예요?”라고 일갈했다. 서민들은 먹고살기도 바쁜데 목숨 걸고 싸운 독립운동의 영웅을 욕보일 정도로 이 정권이 한가하냐는 항변이었다. 민심(民心)은 언제나 천심(天心)이다.    우남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할 정도로 침략세력인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를 미워했다. “제3차 세계대전의 대체 전쟁”(윌리엄 스툭 조지아대 석좌교수)에서 나라를 지켜낸 거인(巨人)이었다. 그러나 80대 노(老)대통령은 국가의 명운이 달린 두 갈래길 앞에서 목숨이나 다름없는 소신을 바꿨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강한 영향을 받은 수정자본주의의 산물인 경제개발 계획 수립을 승인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토록 미워한 적의 방식을 용인했다. 이런 유연한 사고야말로 역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는 최고 지도자의 덕목이다. 윤 대통령의 결핍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윤 대통령의 혁신 드라이브와 협치 모드로의 전환을 환영한다. 작은 승리에 도취해 있는 민주당보다는 한 수 위다. 그러나 우남과 같은 유연함과 균형을 갖추지 않는다면 스타일 변화의 약발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글 = 이하경 대기자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2023.11.07 23:00

  • [이하경 칼럼] “그런데 홍범도가 누구예요?”

    이하경 대기자 근래 들어 한국 대통령은 세계 어디에서도 인기다. 튼튼한 경제력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경쟁력 있는 한국 기업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원동력이 된 1960~70년대 고도성장은 부인할 수 없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이다. 출발점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그 경제개발 계획을 탄생시킨 것은 우남(雩南) 이승만 정부였다. 1957년 부흥부 장관이 된 송인상은 이 대통령에게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우남은 “그건 공산당, 사회주의자가 하는 짓”이라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송인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에 출장가서 전후 경제개발 이론의 선구자인 아서 루이스의 저서를 구했고, 우남에게 전달했다. 루이스는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세인트루시아 출신의 흑인 경제학자로 런던정경대와 프린스턴대 교수를 지냈고, 197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우남은 밤을 새워 통독한 뒤 “자네가 하려는 거 해 봐”라고 지시했다.  한국 경제의 운명을 바꾼 비사(祕史)는 한 원로가 생전의 송인상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다.     ■  「 대통령, 전투 모드서 협치 모드로 경제·안보 위기에 필요한 리더십 이견 봉쇄 위한 이념 전쟁은 금물 스타일 넘어 철학·기조 바뀌어야 」    송인상은 “5년은 너무 길다”는 우남의 뜻에 따라 3개년 계획안을 마련해 60년 4월 국무회의에 제출했다. 원래 미국은 농업에 집중하라고 권고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공업화 성장 모델을 채택했다. 자원이 없는 최빈국(最貧國)이 살길은 수출 강국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경제개발 모델의 원형은 이때 축조된 것이다.   3개년 계획은 60년 4·19혁명으로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출범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수정돼 계승됐고, 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실행했다. 정권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됐다. 지금의 정권들처럼 전 정부의 흠결을 들쑤시면서 적폐청산에 나섰다면 ‘한강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의 스타일이 확 달라졌다. 전투 모드에서 협치 모드로 전환했다. 국회 시정연설에서 전 정부에 대한 비판이 사라졌다. 야당에 협력과 협조를 부탁한다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했다. 외면했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악수했고, 야당 국회상임위원장들의 쓴소리도 묵묵히 경청했다. 이런 통합적 자세는 경제와 안보의 복합위기에 꼭 필요한 리더십이다.   이젠 스타일을 넘어 국정 운영의 철학과 기조도 달라져야 한다. 백해무익한 이념전쟁과 결별해야 한다. 먹고사는 실용을 중시하는 중도는 물론 합리적 보수층도 넌더리를 내지 않았던가. 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 했다. 국민의힘 연찬회에서는 “1 더하기 1을 100이라고 하는 세력과는 싸울 수밖에 없지 않나. 제일 중요한 건 이념”이라며 전투를 독려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적대세력을 향해 위협적 언사를 쏟아내는 것은 아무런 적의(敵意)가 없는 무생물인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무모한 용맹을 떠오르게 한다. 강성 지지층은 환호하겠지만 공동체는 경직과 분열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규정해 공격하는 이념전쟁은 이견(異見)을 봉쇄한다. 갈등의 현재화(顯在化)라는 민주주의의 대전제를 위태롭게 한다. 민주주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시장을 존중할 때에만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다.   최악의 이념전쟁 장면은 홍범도 장군을 사회주의자로 낙인찍은 사건이다. 반공보수인 박정희 정부가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박근혜 정부가 해군함정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하지 않았는가. 이름 없는 어느 자영업자는 “그런데 홍범도가 누구예요?”라고 일갈했다. 서민들은 먹고살기도 바쁜데 목숨 걸고 싸운 독립운동의 영웅을 욕보일 정도로 이 정권이 한가하냐는 항변이었다. 민심(民心)은 언제나 천심(天心)이다.   우남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할 정도로 침략세력인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를 미워했다. “제3차 세계대전의 대체 전쟁”(윌리엄 스툭 조지아대 석좌교수)에서 나라를 지켜낸 거인(巨人)이었다. 그러나 80대 노(老)대통령은 국가의 명운이 달린 두 갈래길 앞에서 목숨이나 다름없는 소신을 바꿨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강한 영향을 받은 수정자본주의의 산물인 경제개발 계획 수립을 승인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토록 미워한 적의 방식을 용인했다. 이런 유연한 사고야말로 역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는 최고 지도자의 덕목이다. 윤 대통령의 결핍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윤 대통령의 혁신 드라이브와 협치 모드로의 전환을 환영한다. 작은 승리에 도취해 있는 민주당보다는 한 수 위다. 그러나 우남과 같은 유연함과 균형을 갖추지 않는다면 스타일 변화의 약발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3.11.06 00:49

  • [세컷칼럼] 윤 대통령이 달라져야 하는 이유

    은희경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에는 K읍의 ‘사형제 이야기’가 등장한다. 투숙객들의 재물을 탐낸 여관 주인은 네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인다. 원귀(冤鬼)들은 자식이 없는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준다. 그리고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차례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다. 지극했던 사랑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처절한 복수를 완성하는 전복적 서사(敍事)다. 중도·청년·중산층이 여권에 등을 돌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는 1년7개월 전 지지했던 윤석열 정권에 대한 경고였다. ‘사형제 이야기’ 속 아버지의 상실감을 여권은 제대로 느끼고 있을까.   ■  「 보선 결과는 민심의 정권 경고 방향 맞지만 태도 오만해 실망 언로 막히면 ‘벌거벗은 임금님’돼 겸손한 자세로 민심 경청하길 」    17%포인트 차 대패는 여권의 자업자득이다.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김태우 전 구청장을 사면하고, 보궐선거에 원인제공자를 출마시키는 ‘용산’의 결정에 그 누구도 “아니되옵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구청장 한 사람을 뽑는 선거가 ‘윤석열 대 이재명’의 대선 2라운드가 돼버렸다. 집권당은 출석 점검까지 하는 총력전을 벌였다. 어느 당협위원장은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선거 현장에 하루만 가고도 수일간 간 것처럼 옷을 갈아입고 인증샷을 올렸다. 유권자를 바보로 아는 소극(笑劇)이었다. 직장인들은 퇴근길에 ‘분노투표’까지 했다.   유권자들이 마음을 닫은 것은 집권 이후 1년5개월 동안 보여준 정권의 오만한 태도 때문이었다. 사실 노동·교육·연금 개혁, 한·미 동맹 강화, 한·일 관계 개선 등 정책 목표와 방향은 잘 잡았다. 그러나 국민 설득이 부족했고, 야당과의 소통은 아예 없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기자회견도 안 하고 있다. 일방통행의 독주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만 5세 입학, 주 69시간제, 수능 킬러문항 소동이 벌어졌다. 내로남불이 아닌 공정과 상식을 기대했는데 자질과 도덕성이 함량 미달인 인사들을 줄줄이 기용했다. 국회 인사청문회 도중 장관 후보자가 걸어 나가는 최악의 장면까지 나왔다. 이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국민이 주인이다. 그런데 머슴이 주인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살아 있는 권력에 굽히지 않는 강골 검사였다. 그래서 대통령이 됐으면 참모들에게도 그런 결기를 허용하고 언로(言路)를 열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가 충정에서 쓴소리를 했더니 “왜 너까지 나를 힘들게 하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반대였다. 참모들과 ‘계급장 떼고’ 격의 없이 토론했다. ‘검사와의 대화’ 때 평검사들이 무례하게 대들었지만 누구에게도 인사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생명줄인 언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촌로(村老)를 상대할 때도 정성을 다했다. 시시한 얘기에도 박장대소하고 맞장구쳤다. 생전의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단 둘이 국정을 의논할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치밀한 계산으로 나를 다그쳤는데 국민을 대할 때는 무장해제하고 푸근한 동네 아저씨가 되어 경청했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똑똑한 사람인 걸 알게 해준 분”이라며 호감을 표시했다. 윤 대통령도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면 순수한 성정과 결단력에 더해 날개를 달 것이다.   여권은 지금 각자도생의 분위기다. 비관적인 수도권 총선 예측 여론조사 결과를 보여주자 지도부는 “나는 안 본 걸로 해 달라”고 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내 지역구 영남은 아무 문제가 없으니 그저 ‘윤심’을 거스르지 않고 공천만 받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렇게 영남과 보수만 바라보면 내년 총선에서도 수도권과 중도를 몽땅 내주고 참패하게 된다. 정권은 절뚝거리는 레임덕(lame duck)이 아니라 아예 죽어 있는 데드덕(dead duck)이 될 것이다. ‘사형제 이야기’ 비극의 진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서 교훈을 찾아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를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변화와 쇄신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처럼 내부 비판과 언로가 계속 막힌다면 아부꾼의 심기경호에 길들여진 ‘벌거숭이 임금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정 운영 방식을 바꾸면 보선 참패는 전화위복이 된다. 이념 대통령이 아니라 민생과 경제를 챙기는 실용 대통령이 돼야 한다. 범부(凡夫)의 고달픈 현실을 어루만지기 위해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표정으로 경청해야 한다. 저절로 내부 통합이 될 것이다. 첨단 방공망과 막강한 정보기관을 갖고도 게릴라 집단 하마스에 일격을 당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다. 사사건건 발목만 잡고 내분 상태인 거대 야당과 맞서 총선에서도 이길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대통령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만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탄식했다. 행여 권력에 취할까 봐 자신을 경계하고 민심을 향해 직진하기 바란다.   글=이하경 대기자 그림=윤지수 인턴기자 

    2023.10.19 23:00

  • [이하경 칼럼] 윤 대통령이 달라져야 하는 이유

    이하경 대기자 은희경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에는 K읍의 ‘사형제 이야기’가 등장한다. 투숙객들의 재물을 탐낸 여관 주인은 네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인다. 원귀(冤鬼)들은 자식이 없는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준다. 그리고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차례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다. 지극했던 사랑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처절한 복수를 완성하는 전복적 서사(敍事)다. 중도·청년·중산층이 여권에 등을 돌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는 1년7개월 전 지지했던 윤석열 정권에 대한 경고였다. ‘사형제 이야기’ 속 아버지의 상실감을 여권은 제대로 느끼고 있을까.     ■  「 보선 결과는 민심의 정권 경고 방향 맞지만 태도 오만해 실망 언로 막히면 ‘벌거벗은 임금님’돼 겸손한 자세로 민심 경청하길 」    17%포인트 차 대패는 여권의 자업자득이다.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김태우 전 구청장을 사면하고, 보궐선거에 원인제공자를 출마시키는 ‘용산’의 결정에 그 누구도 “아니되옵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구청장 한 사람을 뽑는 선거가 ‘윤석열 대 이재명’의 대선 2라운드가 돼버렸다. 집권당은 출석 점검까지 하는 총력전을 벌였다. 어느 당협위원장은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선거 현장에 하루만 가고도 수일간 간 것처럼 옷을 갈아입고 인증샷을 올렸다. 유권자를 바보로 아는 소극(笑劇)이었다. 직장인들은 퇴근길에 ‘분노투표’까지 했다.    유권자들이 마음을 닫은 것은 집권 이후 1년5개월 동안 보여준 정권의 오만한 태도 때문이었다. 사실 노동·교육·연금 개혁, 한·미 동맹 강화, 한·일 관계 개선 등 정책 목표와 방향은 잘 잡았다. 그러나 국민 설득이 부족했고, 야당과의 소통은 아예 없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기자회견도 안 하고 있다. 일방통행의 독주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만 5세 입학, 주 69시간제, 수능 킬러문항 소동이 벌어졌다. 내로남불이 아닌 공정과 상식을 기대했는데 자질과 도덕성이 함량 미달인 인사들을 줄줄이 기용했다. 국회 인사청문회 도중 장관 후보자가 걸어 나가는 최악의 장면까지 나왔다. 이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국민이 주인이다. 그런데 머슴이 주인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살아 있는 권력에 굽히지 않는 강골 검사였다. 그래서 대통령이 됐으면 참모들에게도 그런 결기를 허용하고 언로(言路)를 열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가 충정에서 쓴소리를 했더니 “왜 너까지 나를 힘들게 하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반대였다. 참모들과 ‘계급장 떼고’ 격의 없이 토론했다. ‘검사와의 대화’ 때 평검사들이 무례하게 대들었지만 누구에게도 인사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생명줄인 언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촌로(村老)를 상대할 때도 정성을 다했다. 시시한 얘기에도 박장대소하고 맞장구쳤다. 생전의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단 둘이 국정을 의논할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치밀한 계산으로 나를 다그쳤는데 국민을 대할 때는 무장해제하고 푸근한 동네 아저씨가 되어 경청했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똑똑한 사람인 걸 알게 해준 분”이라며 호감을 표시했다. 윤 대통령도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면 순수한 성정과 결단력에 더해 날개를 달 것이다.   여권은 지금 각자도생의 분위기다. 비관적인 수도권 총선 예측 여론조사 결과를 보여주자 지도부는 “나는 안 본 걸로 해 달라”고 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내 지역구 영남은 아무 문제가 없으니 그저 ‘윤심’을 거스르지 않고 공천만 받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렇게 영남과 보수만 바라보면 내년 총선에서도 수도권과 중도를 몽땅 내주고 참패하게 된다. 정권은 절뚝거리는 레임덕(lame duck)이 아니라 아예 죽어 있는 데드덕(dead duck)이 될 것이다. ‘사형제 이야기’ 비극의 진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서 교훈을 찾아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를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변화와 쇄신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처럼 내부 비판과 언로가 계속 막힌다면 아부꾼의 심기경호에 길들여진 ‘벌거숭이 임금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정 운영 방식을 바꾸면 보선 참패는 전화위복이 된다. 이념 대통령이 아니라 민생과 경제를 챙기는 실용 대통령이 돼야 한다. 범부(凡夫)의 고달픈 현실을 어루만지기 위해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표정으로 경청해야 한다. 저절로 내부 통합이 될 것이다. 첨단 방공망과 막강한 정보기관을 갖고도 게릴라 집단 하마스에 일격을 당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다. 사사건건 발목만 잡고 내분 상태인 거대 야당과 맞서 총선에서도 이길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대통령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만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탄식했다. 행여 권력에 취할까 봐 자신을 경계하고 민심을 향해 직진하기 바란다. 이하경 대기자

    2023.10.16 00:38

  • [이하경 칼럼] 여기서 대선 연장전을 끝내자

    이하경 대기자 신군부에 의해 정계 은퇴를 당한 야인(野人) 김영삼은 1983년 독재에 항거하는 23일간의 단식을 했다. 전두환 정권은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을 통해 “단식을 멈추고 해외로 나가라”고 회유했다. 김영삼은 “나를 시체로 만들어 부치면 된다”며 거부했다.   사형(死刑) 집행을 기다리다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구명돼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은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항의했다. 정권이 틀어막은 김영삼 단식 사실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해 전 세계에 알렸다. 숨죽이고 있던 국내외 민주화 세력이 하나로 뭉쳤다.     ■  「 이재명 특권적 ‘방탄’ 공감 못 얻어 거취 결단해 정치 혼돈 끝내야 국힘·민주 모두 중도보수 정당 강경파 다스리면 통합 정치 가능 」    김대중은 평민당 총재 때인 1990년 지방자치제 실시를 촉구하는 13일간의 단식을 통해 지자제를 36년 만에 부활시켰다. 두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은 사리(私利)를 초월한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국민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양김(兩金)의 단식에는 정치적 약자의 저항이라는 공통의 정당성이 있었다. 역사를 바꿨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24일간 단식의 명분은 ‘윤석열 정권 폭주 저지’였다. 그러나 국민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 입법권력을 가진 원내 1당 대표였고, 목적도 자신을 위한 동정 여론 조성이어서 공익(公益)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석 달 전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체포동의안 국회 표결 하루 전날 부결을 호소했다. 구차했고, ‘방탄’의 불명예만 남았다.   이 대표는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뒤 “굽힘 없이 정진하겠다”며 사퇴 요구를 거부하고 지지층 결집을 호소했다. 구속돼도 옥중에서 공천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한다. 강성 지지자들은 “배신자를 색출해 정치생명을 끊어놓겠다”고 했다. 이건 민주주의와 무관한 야만의 괴성(怪聲)이다.   이 대표가 연루된 10여 개 사안은 성남시장 시절의 뇌물·횡령 혐의 사건이다. 민주당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대선 패배 이후 성찰의 시간을 갖는 대신 서둘러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당 대표직을 움켜쥐었다. 그를 정점으로 한 거대 야당은 새 정부 출범 이후 1년4개월 동안 ‘방탄’을 위해 숱한 무리수를 두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안은 헌법재판소에서 전원 일치 의견으로 기각됐다. 한덕수 총리에 대한 뜬금없는 해임건의안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민주당은 일인자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정치적 공격성을 자랑하는 팬덤정치에 휘둘리고 있다. 팬덤정치는 충동과 분노의 소용돌이일 뿐,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성적인 다수를 침묵의 세계로 밀어넣는다. 이 대표는 팬덤정치에 편승해 민심과 충돌하는 폭주를 멈춰야 한다.   막스 베버의 언술을 빌리면 권력은 “나의 의지로 남을 움직이는 일”이다. 일종의 폭력이다. 잘못 사용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하필이면 그 위험천만한 권력을 다루는 직업이 정치다. 그렇기에 경전과 율법에 적혀 있지 않아도 정치인에게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양심과 윤리가 있다. 이걸 무시하면 정치가 불신받고,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민주주의가 탄생 이후 2500년 동안 줄곧 위태롭게 항해했던 이유다.   그렇기에 이 대표가 나 하나 살자고 민주당을 사유화해 분열의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흔들면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당을 분리시켜야 한다. 스스로 결백하다고 장담하지 않았는가. 특권을 내려놓고 개인 자격으로 당당하게 맞서 무죄를 받아낸다면 정치적으로 부활할 것이다. 한국 정치의 혼돈을 정리하기 위해 거취를 결단해야 한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길이다.   민주당은 우여곡절 끝에 방탄 정당이라는 오명(汚名)을 벗었다. 대통령을 세 사람이나 배출한 내공으로 복원력을 발휘해 민심을 수용한 결과다. 한동안 혼란의 시간이 있겠지만 위기를 넘기면 혁신의 기회가 올 것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윤심(尹心)’ 쫓기에만 분주하고, 수도권과 중도의 민심에는 둔감하다. 내년 4월 총선 출마 희망자들은 텃밭인 영남과 서울 강남만 기웃거린다. 민주당이 전열을 재정비해 정권심판론을 들고나오면 힘들어질 수 있다.   인간은 사물의 실체를 영원히 볼 수 없다. 그저 시각중추가 반응하는 대로 보이는 것만 볼 뿐이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귀에 거슬려도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다투되 싸우지 않는’ 화쟁(和諍)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면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보수, 진보 정당이 아니다. 중도 우파의 범주에 사이좋게 들어가 있다. 대북정책을 제외하고는 결정적인 차이도 없다. 맹목적 강경파, 충성파의 주장을 다스리면 얼마든지 타협하고 협치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가 옳다는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이 타협해 끌고 나가는 연대의 과정이다. 이제는 대선 연장전을 끝내고 통합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이하경 대기자

    2023.09.25 00:44

  • [세컷칼럼]합의가 사라진 정치, 모욕받는 역사

    . . . 한국 정치는 상대를 부정하는 협량(狹量)에 갇혀 있다. 범부(凡夫)의 상식에 부합하는 최소합의에도 번번이 실패하고, 배는 산으로 가고 있다. 육사에 있던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1868~1943) 장군의 흉상이 외부로 이전한다. 이번에도 여야 합의는 없었다.     ■  「 홍범도 공산당 입당 시비 건다면 루스벨트·처칠, 소련 협력도 문제 문재인 정부 일방 결정이 출발점 경직의 저주에서 풀려나야 산다 」  국방부는 홍 장군의 소련 공산당 입당, 자유시 참변 때의 독립군 탄압 역할을 이전 이유로 들었다. 북한 김일성이 등장하지 않았던 한 세기 전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1922년부터는 소련)는 식민지 약소국의 독립을 지원했다. 한인 항일무장운동 그룹은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는 러시아와 자연스럽게 협력했다. 퇴역 후 고령이 되어 연금을 받기 위해 1927년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이유로 홍범도 장군을 시비 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과 손잡고 나치 독일과 싸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도 “조국을 배신한 공산주의자”로 매도해야 할 판이다.    홍범도 장군은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희생당하자 솔밭에서 땅을 치고 울었다는 기록이 제시됐다. 독립군 탄압은 사실이 아니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홍 장군에게 훈장을 추서했고, 노태우 정부는 유해 송환을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는 최신 잠수함을 홍범도함이라고 명명했다. 모두 보수정부가 한 일이다.    이번 소동에는 문재인 정부의 책임도 있다. 홍 장군 유해는 강제 이주됐던 카자흐스탄에서 2017년에 돌아왔다. 문 정부는 그를 포함한 다섯 분의 독립군 운동가 흉상을 만들어 육사 충무관으로 모셨다. 이들은 ‘군(軍)의 기원’이 됐다. “독립군 전통도 사관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라”는 대통령 지시에 따른 일이었다. 육사 필수과목인 한국전쟁사는 선택과목으로 격하됐다. 민족, 항일투쟁을 강조하면서 국가와 안보의 측면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당시 야당 의견은 전혀 듣지 않았다.    우리는 정치에서 대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벌어진 희비극(喜悲劇)을 목도하고 있다. 숙고하고 상의했다면 이런 양 극단의 결정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여야 갈등은 내전(內戰) 수준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신(新)삼각공조를 이끌어냈다. 최악의 한·일 관계를 과감하게 복원시켜 거둔 윤석열식 외교의 성과다. 중국과 러시아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초당적인 외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닥치고 반대’ 모드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배출을 “핵 오염수 배출”로 규정했고, “윤석열 심판”을 외치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힘 의원과 장관들에게 “싸워라”고 독려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국민항쟁’이라고 했지만 실은 방탄용이다. 200여 건의 민생 법안과 예산안을 처리해야 할 정기국회는 암초에 걸려 있다. 여야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내편하고만 손 잡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나치와 싸웠던 독일 사민당의 브란트는 나치 선전부 간부 출신인 기민당 키징어와 손잡고 최초로 대연정에 참여했다. 브란트는 키징어 총리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됐다. 공산주의자였던 베너는 전독일부 장관, 나치 장교였던 슈트라우스는 재무장관이었다. 브란트는 나치 출신을 인사과 책임자로 기용해 큰 도움을 받았다. 작가 귄터 그라스는 브란트에게 편지를 보내 “나쁜 결혼”이라고 비난했지만 ‘화해의 연방정부’는 성공적이었다. “서독만이 독일을 대표하며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동독을 포용하는 브란트의 파격적 동방정책은 키징어가 수용했기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 김황식)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전범(戰犯) 국가 독일은 분단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통일됐다. 지도자들의 타협과 성숙한 합의로 만들어낸 현대사의 기적이다. 키징어·브란트·슈미트·콜 총리를 거치는 동안 보수·진보 정권 모두 일관되게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한국은 피식민지 국가였지만 78년째 분단돼 준전시 상태로 남아 있다. 억울해 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합의 능력을 잃은 정치 때문에 항일무장운동의 역사가 모욕당하는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려면 우리도 여야와 보수·진보가 타협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유기체는 부드럽다. 뻣뻣한 것은 죽은 것이다. 자유·민주·번영, 그 무엇도 잉태하고 출산할 수 없다. 정치는 전쟁터의 총검(銃劍)이 아니다. 상대의 모순까지도 포용해 차선의 합의를 이뤄내는 전환의 상호 고백이고 고해성사다. 반공의 상징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해 농지개혁을 성공시키지 않았는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이 지독한 경직(硬直)의 저주에서 풀려날 때 우리는 모두 살 수 있다.     글=이하경 대기자 그림=임근홍 인턴기자    

    2023.09.05 23:00

  • [이하경 칼럼] 합의가 사라진 정치, 모욕받는 역사

    이하경 대기자 한국 정치는 상대를 부정하는 협량(狹量)에 갇혀 있다. 범부(凡夫)의 상식에 부합하는 최소합의에도 번번이 실패하고, 배는 산으로 가고 있다. 육사에 있던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1868~1943) 장군의 흉상이 외부로 이전한다. 이번에도 여야 합의는 없었다.     ■  「 홍범도 공산당 입당 시비 건다면 루스벨트·처칠, 소련 협력도 문제 문재인 정부 일방 결정이 출발점 경직의 저주에서 풀려나야 산다 」    국방부는 홍 장군의 소련 공산당 입당, 자유시 참변 때의 독립군 탄압 역할을 이전 이유로 들었다. 북한 김일성이 등장하지 않았던 한 세기 전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1922년부터는 소련)는 식민지 약소국의 독립을 지원했다. 한인 항일무장운동 그룹은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는 러시아와 자연스럽게 협력했다. 퇴역 후 고령이 되어 연금을 받기 위해 1927년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이유로 홍범도 장군을 시비 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과 손잡고 나치 독일과 싸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도 “조국을 배신한 공산주의자”로 매도해야 할 판이다.   홍범도 장군은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희생당하자 솔밭에서 땅을 치고 울었다는 기록이 제시됐다. 독립군 탄압은 사실이 아니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홍 장군에게 훈장을 추서했고, 노태우 정부는 유해 송환을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는 최신 잠수함을 홍범도함이라고 명명했다. 모두 보수정부가 한 일이다.   이번 소동에는 문재인 정부의 책임도 있다. 홍 장군 유해는 강제 이주됐던 카자흐스탄에서 2017년에 돌아왔다. 문 정부는 그를 포함한 다섯 분의 독립군 운동가 흉상을 만들어 육사 충무관으로 모셨다. 이들은 ‘군(軍)의 기원’이 됐다. “독립군 전통도 사관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라”는 대통령 지시에 따른 일이었다. 육사 필수과목인 한국전쟁사는 선택과목으로 격하됐다. 민족, 항일투쟁을 강조하면서 국가와 안보의 측면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당시 야당 의견은 전혀 듣지 않았다.   우리는 정치에서 대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벌어진 희비극(喜悲劇)을 목도하고 있다. 숙고하고 상의했다면 이런 양 극단의 결정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여야 갈등은 내전(內戰) 수준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신(新)삼각공조를 이끌어냈다. 최악의 한·일 관계를 과감하게 복원시켜 거둔 윤석열식 외교의 성과다. 중국과 러시아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초당적인 외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닥치고 반대’ 모드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배출을 “핵 오염수 배출”로 규정했고, “윤석열 심판”을 외치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힘 의원과 장관들에게 “싸워라”고 독려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국민항쟁’이라고 했지만 실은 방탄용이다. 200여 건의 민생 법안과 예산안을 처리해야 할 정기국회는 암초에 걸려 있다. 여야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내편하고만 손 잡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나치와 싸웠던 독일 사민당의 브란트는 나치 선전부 간부 출신인 기민당 키징어와 손잡고 최초로 대연정에 참여했다. 브란트는 키징어 총리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됐다. 공산주의자였던 베너는 전독일부 장관, 나치 장교였던 슈트라우스는 재무장관이었다. 브란트는 나치 출신을 인사과 책임자로 기용해 큰 도움을 받았다. 작가 귄터 그라스는 브란트에게 편지를 보내 “나쁜 결혼”이라고 비난했지만 ‘화해의 연방정부’는 성공적이었다. “서독만이 독일을 대표하며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동독을 포용하는 브란트의 파격적 동방정책은 키징어가 수용했기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 김황식)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전범(戰犯) 국가 독일은 분단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통일됐다. 지도자들의 타협과 성숙한 합의로 만들어낸 현대사의 기적이다. 키징어·브란트·슈미트·콜 총리를 거치는 동안 보수·진보 정권 모두 일관되게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한국은 피식민지 국가였지만 78년째 분단돼 준전시 상태로 남아 있다. 억울해 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합의 능력을 잃은 정치 때문에 항일무장운동의 역사가 모욕당하는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려면 우리도 여야와 보수·진보가 타협하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유기체는 부드럽다. 뻣뻣한 것은 죽은 것이다. 자유·민주·번영, 그 무엇도 잉태하고 출산할 수 없다. 정치는 전쟁터의 총검(銃劍)이 아니다. 상대의 모순까지도 포용해 차선의 합의를 이뤄내는 전환의 상호 고백이고 고해성사다. 반공의 상징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해 농지개혁을 성공시키지 않았는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이 지독한 경직(硬直)의 저주에서 풀려날 때 우리는 모두 살 수 있다. 이하경 대기자

    2023.09.04 00:46

  • [이하경 칼럼] 타락한 지방자치, 최악의 잼버리

    이하경 대기자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가 최악의 평가를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부실한 화장실 관리다. 1979년 여름의 논산훈련소 시절이 떠오른다. 부대는 훈련병들의 대변기 사용을 금지했다. 관리하기 귀찮아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변비로 고생했다. 검열을 의식해서 편지에는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적었다. 야만의 시대였다.     ■  「 지방권력 몰염치, 중앙정부 무능 일류국가 코리아 이미지 추락 감사·수사·국정조사 뭐든 다 해야 ‘내 탓이오’ 윤리적 결단이 먼저 」    40여 년이 흘렀다. 한국은 민주화됐고, 선진국 반열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 세계인의 축제에서 화장실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158개국에서 온 4만3000명이 지내는데 화장실은 354개뿐이었다. 121.5명당 한 개꼴이었다. 변기가 막혀 악취가 코를 찔렀다. 한 사람이 2곳을 관리해야 정상인데 10곳을 담당하다 보니 벌어진 소동이다. 샤워장과 급수장도 턱없이 모자랐다. 한덕수 총리가 솔선해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사태는 겨우 진정됐다. 1171억원의 혈세를 도대체 어디에 뿌린 것일까.   잼버리 참가자들은 돈 없고 ‘빽’ 없는 훈련병이 아니다.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청소년들이다. 불결한 화장실과 샤워실, 배수가 안 되고 벌레가 들끓는 진흙탕, 1000명이 넘는 온열환자, 바가지 물가에 분노했다. 그래서 ‘난민 캠프’의 실상을 실시간으로 스마트폰에 담아 전 세계에 알렸다.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 그리고 한류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일류국가 코리아의 이미지는 추락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K팝 공연이 위로가 됐을 뿐이다.   이 마당에 전·현 정권이 패를 갈라 남 탓만 할 일이 아니다. 감사든, 수사든, 국정조사든 모조리 해야 한다. 6년의 준비기간 동안 있었던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성역 없는 징비(懲毖)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정치인이 잼버리 대회를 유치해 지지부진한 새만금의 인프라 개발 속도를 높이려는 한 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행사를 성공시키겠다는 생각도 없이 2조원이 넘는 예산만 노렸다면 토건세력과 결탁한 고의범으로 정죄(定罪)해야 한다.   2015년 일본 잼버리도 간척지에서 열렸다. 하지만 50년 전 간척이 끝난 장소를 선정했다. 새만금의 3분의 1에 불과한 예산으로 대회를 성공시켰다. 반면에 새만금 잼버리는 해수가 유통되는 267만 평의 해창 갯벌을 대회 장소로 정했다. 관광레저사업임에도 농지관리기금 1845억원을 받아내려고 농업용지로 매립했다. 그러니 물이 안 빠지고 염분이 남아 나무가 자랄 수 없었다. 지방정부가 “잼버리 영지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겠다”고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필요한 면적의 두 배가 넘는 갯벌을 매립하느라 정작 대회 준비에 투입할 시간을 허비했다. 경험 많은 농어촌공사가 아니라 지역 토건업자에게 기반공사를 맡긴 것도 부실한 준비의 원인이 됐다.   지방권력은 “잼버리 행사를 위해 국제공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용(8000억원) 대비 예상 편익은 형편없었지만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받았다. 그런데 이 비행장은 아직 착공도 하지 않았다. 개항 목표연도는 6년 뒤인 2029년이다. 애초에 잼버리와는 무관했다는 뜻이다. 수상한 흔적은 끝도 없다.   중앙정부의 책임도 무겁다. 5인 공동조직위원장 중 세 사람이 현직 장관이지만 컨트롤 타워는 없었다. 주무 부처인 여성가족부 김현숙 장관은 지난해 10월 국감에서 “태풍, 폭염에 대한 대책도 다 세워놓았다”고 큰소리쳤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무능하고 무책임했다.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역사학자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직후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만나 “우선이 지자제 실시입니다. 민주화는 지자제에서부터 시작합니다”라고 했다(『김대중 자서전』). 이 나라의 지방자치제는 이승만이 탄생시켰고, 박정희가 살해했다. 김대중은 의정활동을 시작한 1963년부터 지자제 실시를 줄기차게 촉구했다. 1990년에는 13일간 단식 투쟁까지 했다. 그 결과 1991년 부활됐다. 그러나 김대중은 1998년 대통령이 된 뒤에는 타락한 지방자치에 실망했다. 청와대 참모를 통해 “토호와 결탁한 지방자치를 비판해 달라”는 뜻을 필자에게 전달했다. 지금의 지방권력은 그때보다 세고 몰염치하다.   “스핑크스가 묻는다. 아침에는 전(前)근대이고 오후에는 근대이며 저녁에는 탈(脫)근대인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한국이다. (중략) 이렇게 세 겹의 시간대가 착종(錯綜)돼 있는 곳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괴물이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바로 우리의 실존적 상황이다. 아주 멀리 벗어난 줄 알았는데, 어느새 물샐틈없는 전근대의 구조에 포획된 무력한 존재다. 하나가 해결되면 두 개, 세 개의 문제가 앞을 가로막는다. “장벽이 무너지자 모든 것이 장벽이었다”는 이문재 시인의 은유가 가슴을 친다.   타락한 지방자치에는 수술이 필요하다. 먼저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공동체의 윤리적 결단과 고해성사가 있어야 한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아포리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3.08.14 00:58

  • [이하경 칼럼] ‘체호프의 총’은 불발로 끝나야 한다

    이하경 대기자 중국의 초고속 부상(浮上)으로 거인(巨人) 미국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전체주의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디커플링’(탈동조화) 전략은 같은 자유주의 진영인 유럽연합(EU)의 거부 때문에 ‘디리스킹’(위험제거)으로 완화됐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는 서로 뗄 수 없는 샴쌍둥이처럼 얽혀 있다”며 “테슬라는 디커플링에 반대한다”고 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도 대중국 수출통제에 반기를 들었다. 미국 공화당 원로인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은 “미국과 서구의 문명이 중국 공산주의 체제에 의해 압도되고 지배될 수 있는 심각한 위험이 있다”고 했다(『전체주의 중국의 도전과 미국』).     ■  「 중국 초고속 비상에 미국도 고심 북한 미사일 시위 속 미묘한 상황 국방부 전쟁, 통일부 대화 대비를 여야, 보수·진보 ‘최소 합의’ 절실 」    북한 문제도 복잡하다. 핵을 손에 쥐었지만 오랜 제재로 경제난과 식량난이 동시에 깊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올 들어 16번이나 미사일을 발사했다. 남북 간에 일체의 대화 채널이 사라진지 오래고, 위험한 상태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그제 “한반도는 수일 내 전쟁 상태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동시에 미묘한 변화도 감지된다. 김여정은 “확장억제 체제를 강화할수록 우리를 회담 탁(테이블)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뿐”이라고 했다. 이 시점에 ‘회담’이라는 단어를 꺼낸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월북한 주한 미군병사 송환을 위한 교섭이 북미 대화의 단초가 될 가능성도 있다. 기시다 일본 총리가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조속히 정상회담을 갖겠다”고 밝히자 북은 외무성 부상 담화를 통해 호응했다.   우리는 갈등하는 북한의 의도와 수순을 정확히 읽고 대비하고 있는가. 신임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김정은 정권 타도”를 주장해 온 학자다. 대화보다는 대북 압박에 힘을 싣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의도가 읽힌다. 문제가 없을까.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보고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국방부의 일이다. 외교부는 북한을 외국의 일원으로 상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통일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엄혹한 대결 상황 속에서도 실낱같은 대화의 가능성, 그 미세한 신호를 제때 포착하는 것이다. 북한이 실존적 위협이지만 숙명적으로 대화해야 하는 모순적 현실이 남북기본합의서의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표현에 반영돼 있다. 이걸 외면하면 대화 국면에서 한국만 소외된다. ‘적과 동지’라는 카를 슈미트의 단선적 프레임은 낡았다. 미국과 중국이 대결하면서도 어느새 ‘샴쌍둥이’가 돼버린 이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 것이다.   체제가 다른 중국과 북한을 다룰 때는 열 배 더 고심해야 한다. 싱가포르는 대표적인 친미 국가지만 중국과도 잘 지낸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막후에서 중재했다. 고(故) 리콴유 전 총리는 심지어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자인 덩샤오핑의 멘토 역할까지 했다. 싱가포르는 체제가 다른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했기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는 “연극의 1막에 등장한 총은 3막에서 반드시 발사된다”고 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지난 70년 동안 ‘체호프의 법칙’을 깼다고 생각한다. “왕과 황제들은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면 곧바로 그것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1945년 이래 인류는 그런 유혹에 저항하는 법을 배웠다. 냉전의 1막에 등장한 총은 결코 발사되지 않았다.”(『호모데우스』)   문제는 한반도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막 끝낸 미국과 중국이 다시 총을 들고 싸우게 만든 사나운 지정학의 공간이다. 그러고도 전쟁을 끝내지 못했고, 70년째 휴전 상태다. 만일 두 강대국이 다시 전쟁을 한다면 한반도는 대만과 함께 가장 유력한 전장(戰場)이 될 것이다. 1950년의 한국전쟁이 ‘미니 제3차 세계대전’이었다면 이번에는 핵무기가 날아다니는 진짜 3차대전이 될 수 있다.   트럼프의 귀환 가능성도 변수다. “잘사는 한국을 왜 미국이 지켜줘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는 그가 백악관을 다시 차지하면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꺼낼 것이다. 핵도, 미군도 없는 한국이 핵으로 무장한 북한을 대적할 수 있을까. 미국은 북한과 협상하면서 과연 한국의 이익을 지켜줄 것인가. 전쟁에서 이겨 나라를 지켜야 하지만 전쟁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다. 평화의 가능성을 한 뼘이라도 확장하려면 대화하는 통일부, 협상하는 외교부가 필요하다.   2500년 전 그리스 철학자가 꿰뚫어본 대로 만물(萬物)은 유전(流轉)하고,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미국도, 중국도, 북한도, 한국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지금처럼 내전(內戰) 수준의 의견대립이 계속된다면 시대의 격랑과 외환(外患)을 감당하기 어렵다. 생존을 위해 여와 야, 보수와 진보의 ‘최소 합의’가 절실하다. ‘체호프의 총’은 불발로 끝나야 한다. 이하경 대기자

    2023.07.24 01:00

  • [이하경 칼럼] 수능 ‘킬러 문항’ 소동에서 이승만을 생각한다

    이하경 대기자 대학입시 얘기가 나오면 죄인의 심정이 된다. 10여 년 전 둘째가 수능에서 8과목  8색(色) ‘킬러 문항’과 씨름해 원하는 대학의 2배수 합격자로 선발됐다. 논술고사 날 동행했다. 대학 캠퍼스를 한바퀴 도는 시내버스에 올라탔는데, 아뿔싸! 엉뚱한 곳에 내리는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아들은 30분 지각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입실허가는 받았지만 최악의 조건에서 황당한 ‘킬러 문제’들을 만나 악전고투했다. 부자(父子)는 아주 오랫동안 악몽을 꾸었다.   요즘도 ‘킬러(초고난도) 문항’이 화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괴물”(이주호 교육부총리의 표현)에 선전포고하면서 용감하게 수능 개혁에 나섰다. ‘사교육 카르텔’과 ‘일타강사’를 겨냥했다. “제발 틀려다오”라고 주문을 외우면서 최대한 꼬아 만든 ‘킬러 문항’은 어떻게든 서열을 정하기 위한 꼼수 억지 문제다. 해당 분야 교수들도 고개를 설레설레하니 수험생들의 고통은 어떨까.     ■  「 ‘킬러’ 전멸해도 사교육 여전할 것 수능 수술…대학에 입시 자율권을 챗GPT 시대 세상 바꿀 창의 절실 이승만 ‘교육 선견지명’ 숙고하길 」    윤 대통령은 킬러 문항 출제가 “약자인 아이들 데리고 장난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대통령발 ‘공정 입시’의 명분은 연간 26조원으로 치솟은 사교육비 경감이다. 국세청은 대형 입시학원의 장부를 뒤지고 있다. 11월 수능에서는 ‘킬러 문항’이 전멸할 것이다. 수험생들은 환호작약(歡呼雀躍)할 것인가.   그러나 악명 높은 이 나라의 입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차하면 역풍으로 정권이 흔들릴 수 있다. 정유라 이화여대 입시비리가 박근혜 몰락의 결정타였다. 문재인 정권이 추락한 것도 조국 자녀의 입시비리 때문이었다. 두렵다면 수험생 엄마들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강력한 모성(母性)으로 무장한 엄마는 어설픈 아버지와는 차원이 다른 입시 도사(道士)다. 사소한 변화도 예민하게 포착해 기민하게 반응한다.   엄마들은 수능에 메스를 들이댄 윤 대통령의 의도에는 백퍼센트 공감한다. 그러나 시기에는 불만이다. 수능을 몇 년간 뼈빠지게 준비해 왔는데 불과 5개월 앞두고 출제기준이 급변침하면서 입시전략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고등교육법 34조5항도 수능 전형의 기본방향과 출제형식은 4년 전에 예고하도록 하고 있다. ‘킬러 문항’ 시비로 사망선고를 받은 6월 모의평가 결과는 이제 완전히 무의미해졌다. 이걸 기준으로 수시를 지원하는 수험생들은 멘붕 상태다.   대통령은 6월 모평 국어에 ‘킬러 문항’이 있다고 분노했다. 그런데 교육부가 공개한 국어 ‘킬러 문항’ 2개의 정답률은 36%를 넘었다. 만점자도 1492명으로 전년 수능 371명의 4배나 됐다. 수능 커뮤니티에는 “읽으면 다 풀 수 있는 문제던데, 왜 대통령이 난이도를 운운하지”라는 글이 올라왔다. ‘킬러 문항’의 기준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불안한 학부모들은 ‘공정 수능’의 가이드라인을 명확히 해달라고 아우성이다. 성기선 전 교육과정평가원장은 “정밀하고 전문적인 수능 출제 시스템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정치적 입김을 타면 붕괴될 수 있다. 올해 수능이 위험하다”고 우려했다.   ‘킬러 문항’이 사라지면 교육당국이 큰소리친 대로 사교육비가 줄어들까. 그렇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어떻게든 40만 수험생을 한 줄로 세워야 하기 때문에 다수의 ‘준 킬러 문항’ 출현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불안해진 수험생은 사교육에 더 의존하게 된다. 실제로 ‘물수능’ 때에도 사교육비는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렇다면 ‘킬러 문항’과의 전쟁은 명분도, 실익도 없고 불확실성과 혼란만 초래한 것이 아닌가.   지금은 대통령이 ‘킬러 문항’과 씨름할 때가 아니다. 대입 차원을 넘어 교육제도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할 시기다. 어떤 난제에도 척척 대답하는 챗GPT가 널려 있는 인공지능(AI) 시대가 아닌가.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숙련공은 필요 없다. 세상을 바꾸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넘치는 인재가 환영받는다. 수능 5지선다형으로 ‘한 줄 세우기’는 시대의 메가트렌드와 불화한지 오래됐다. 퇴행적 수능을 폐지하거나 자격고사로 활용하고, 입시는 대학 자율에 맡기는 방안을 공론화해야 한다.   사교육 기세에 눌린 공교육을 정상화시켜야 한다. 실력보다 간판을 중시하는 학벌사회, 불평등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혁파하는 사회개혁이 나와야 한다. 경쟁·성공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관용·연대·평등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킬러 문항’ 소동이 이런 필요성을 환기시켰다면 윤 대통령은 성공한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원조로 입에 풀칠하던 시절 초등학교 무상교육을 시작했다. 임기 내에는 성과를 누릴 수 없는 정책이었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 중에도 ‘특별요강’을 발표해 피난지에서 학교를 열었다. 남녀와 계층을 차별하지 않는 평등한 교육으로 민주주의와 고도성장이라는 문명국가의 초석을 깔았다. 백년 뒤를 내다본 거인(巨人)의 탁월한 안목이었다. 윤 대통령도 ‘킬러 문항’을 넘어서 교육을 통한 국가 백년대계를 선도하기 바란다. 이하경 대기자

    2023.07.03 00:53

  • [이하경 칼럼] 뿌리치는 미국을 최고의 동맹으로 만든 이승만

    이하경 대기자 6·25전쟁 하루 전 군 수뇌부는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했고, 만취했다. 육군참모총장은 숙취 상태에서 전쟁 발발을 보고받았다. 육사 8기 단체 회고록은 “각 분야별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던 전투력 약화 작업은 북한의 남침 직전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예비역 대장 이형근은 “육군 지휘부에 적과 내통한 인사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침(새벽 4시) 사실을 보고받은 것은 6시간30분이나 지난 오전 10시30분쯤이었다. 일요일이었는데 국방장관이 주말휴가 중이었기 때문이다.   주한 미국대사는 “서울을 떠나면 한국인의 사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면서 ‘사수(死守)’를 주장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서울에서 시가전을 펴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서울 사수’를 결의했던 한국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를 결정했다. 주객이 전도됐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승만의 삶과 국가』 오인환)     ■  「 6·25 때 군 수뇌부 총체적 무책임 이승만 홀로 위기대처 능력 발휘 대책 없는 휴전 반대 월남화 막아 강대국에 할 말 해야 생존한다 」    망국으로 향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이승만이 완벽한 위기대처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는 26일 새벽 3시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해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고 호통쳤다. 장면 주미 한국대사에게 “적이 문앞에 와 있다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하시오”라고 했다. 남침을 워싱턴과 유엔의 긴급 현안으로 부각시켰고, 미 의회 의결도 없이 조기 참전을 이끌어냈다. 군 수뇌부의 강권으로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서울을 탈출했고,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과오를 제외하면 초인적 전시(戰時) 대통령이었다.   이승만은 전선을 누비면서 “우리가 계속 밀고 쳐 올라가야 우방의 원조도 꾸준히 들어올 것이고, 적군을 물리치고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호소했다. “맨손으로 싸우는 한국 장병에게 무기를 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다. 외신기자와 인터뷰했고, 외교 문서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직접 작성하는 1인 외교를 펼쳤다. 독립운동가로 쌓아 온 40여 년의 대미 외교 경험과 고급영어 구사 능력, 애국심과 두둑한 배짱이 무기였다. 유사시 부부가 자결(自決)하기 위해 권총을 침실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 쉴 새 없이 항전 의지를 알렸다(『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우크라이나의 영웅 젤렌스키 부부의 역사적 롤 모델이다.   ‘미국의 시저’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이 ‘크리스마스 공세’(11월 24일~12월 3일)에 나섰지만 잠복해 있던 중공군에게 대패했다. “한국에서 중공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철수를 논의했다. 군 수뇌부는 “중국의 의도가 유엔군을 한국에서 몰아내는 것이 명백하다면 빠른 시일 안에 철수시키자”고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인들이 살육당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트루먼 대통령도 애치슨의 의견에 찬성했다. 서울에선 “미국이 한국을 팔아넘기려고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때 이승만은 “경무대에서 죽기로 결심했다”고 정치고문인 올리버 박사에게 밝혔다.   트루먼 행정부는 1951년 초 휴전 방침을 정했다. 전쟁을 계속하려면 정규군을 20만 명 늘리고 연간 9억 달러의 비용을 추가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통일 한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휴전은 수용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사흘치 공격용 탄약밖에 없으면서도 소련·중공과의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하려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승만은 1953년 6월 17일 유엔군과 공산군이 휴전에 잠정 합의하자 다음 날 2만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한국전을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친구가 적으로 변했다”며 격분했다. 이승만 제거 작전을 검토했으나 의회가 ‘반공투사 이승만’ 축출에 반대하자 물러섰다. 결국 로버트슨을 특사로 보냈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 원조, 한국군 20개 사단으로 강화 등 이승만의 요구를 수용했다. 대신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은 네 차례나 이승만 제거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없었다면 한국은 어떻게 됐을까. 미국의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가 1973년 휴전협정을 맺고 2년 뒤 패망한 월남의 운명이 되지 않았을까.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미워했지만 역량은 높이 평가했다. 프랑스인에게 “월남에 필요한 인물은 또 한 사람의 이승만”이라고 극찬했다.   이승만은 ‘전략적 가치가 없는 한국’을 손절하려던 ‘배신자’ 미국과 싸워 최고의 동맹관계를 맺었다. 21세기 한국에서 ‘제2의 이승만’이 나올 수 있을까. 70년 전의 거인은 “강대국에도 할 말을 하는 용기, 동맹과 우방의 신뢰를 받는 외교 원칙으로 무장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은 서로 “내게 베팅하라”고 우리를 압박한다. 이 위험천만한 혼돈의 계절에 여전히 지구상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을 안고 있는 한국의 생존에 필요한 지혜일 것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3.06.12 00:58

  • [세컷칼럼] 문명국 일본이 벗어나야 할 ‘피해자 의식’

    윤석열 대통령이 강제징용 문제에 통 크게 양보한 뒤 기시다 일본 총리도 전향적 자세로 나오고 있다. G7 개최지 히로시마에서 한·일 정상은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처음으로 함께 참배했다. 큰 위로가 됐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원폭 가해국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사과하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동원의 가해자인 2차 세계대전 전범국 일본이 피해자로 전환되는 장면이다. 전후 일본의 ‘피해자 의식’은 사죄와 반성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런 기묘한 심리 구조를 만든 것은 전승국 미국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을 퇴위시키면 일본 사회가 붕괴할 것으로 판단했고, 면죄부를 발급했다.   ■  「 미국이 도조 회유해 천황 면죄부 일, 자기 연민·과거사 외면 출발점 일본도 윤석열식 결단 내놓을 때 평화·경제공동체 함께 선도하길 」   도쿄 전범재판은 나치를 단죄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딴판이었다. 『패배를 껴안고(Embracing Defeat)』의 저자인 존 다우어 MIT 명예교수는 “‘승자의 증거’를 조작해서 패전국의 수장을 구제해 주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A급 전범’들은 똘똘 뭉쳐 천황을 보호했지만 딱 한 번의 실수가 있었다. 총리로서 전시내각을 이끌었던 도조 히데키가 “천황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수석검사 조셉 키넌은 천황 보좌전담 기관을 통해 증언을 철회하라고 회유했고, 도조는 수용했다. 맥아더 연합국최고사령부의 역사왜곡이었다. 책임자인 천황이 책임지지 않으니 국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인류 최초의 핵폭탄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겹쳐졌다.    아시아 전체를 전쟁터로 만든 일본은 자기 연민의 알리바이를 발견했다. 끔찍한 피해를 입혀놓고 성찰도 없었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직 점령국 미국의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질주했다. 무라야마, 오부치, 간 총리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사죄가 있었지만 정치인들의 망언으로 빛이 바랬다.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자 문명국인 일본이 아시아 통합의 걸림돌이 된 이유다.    ‘피해자 의식’을 이겨낸 거인(巨人)들도 있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보수였지만 1984년 공산 중국을 방문해 수백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그 돈으로 베이징과 상하이에 공항과 지하철이 들어섰다. 그는 “전쟁 때 고난을 일으킨 것에 유감을 표시하기 위해 원조 액수를 늘리자”고 깐깐한 관료들을 설득했다. 자오쯔양에게 “중국은 북한에게, 일본은 남한에게 밀서를 받아 남북 대화를 중재하자”고 했다.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1983년 한국을 방문할 때는 외무성 관료의 자문도 받지 않았다.    아키히토 전 천황도 “체포돼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우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1992년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인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한 것”을 시인하고 “이로 인한 슬픔을 통감한다”고 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02년 평양을 방문해 식민통치에 사과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인 납치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방북을 마쳤을 때 외무성 심의관 집에 ‘반역자’라는 메모와 함께 폭발물이 설치됐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결단했지만 “일본의 식민 침략에 대한 면죄부”라는 한국 내 비판은 여전하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10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던 중국의 대처 방식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중국은 자기들이 참전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도 무역을 재개하자고 ‘미국의 병참기지’인 일본을 졸랐다. 이듬해 무역협정이 체결됐다.    중국 전문가 사이먼 리스는 총리로서 중국 외교를 지휘한 저우언라이에 대해 “실용주의자 앞에서는 실용주의자, 철학자 앞에서는 철학자, 키신저를 만나면 키신저가 되었다”며 “카멜레온”이라고 했다. 1961년 일본 사회당 대표를 마주한 마오쩌둥은 “중국을 침략해 고맙다”고 했다. 일본군이 촉발한 혼란 덕분에 공산당이 집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추상적 이념과 감정보다는 현실적 국익과 전략을 중시해야 한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균·쇠』에서 “(한·일은) 같은 피를 나누었고, 성장기를 함께 보낸 일란성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고 했다. 웃으면서 뒤통수를 치는 ‘상호의존성의 무기화(Weaponization of interdependence)’를 깨야 한다. “과거에 머무른 자는 한 눈을 잃고, 과거를 잊은 자는 두 눈을 잃게 될 것”이라는 러시아 격언이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2025년을 목표로 양국은 역사 화해 프로세스에 돌입해야 한다.    두 나라가 앞장서고 중국과 손잡으면 아시아 특유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문명의 힘이 발휘될 것이다. 유럽이 부러워할 아시아 평화·경제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미국과의 건강한 동맹관계 구축에도 도움이 된다. 일본도 윤석열식 결단을 내놓을 때다. 과거를 직시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윤석열-기시다 선언을 기대한다.       글=이하경 대기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2023.05.23 23:00

  • [이하경 칼럼] 문명국 일본이 벗어나야 할 ‘피해자 의식’

    이하경 대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강제징용 문제에 통 크게 양보한 뒤 기시다 일본 총리도 전향적 자세로 나오고 있다. G7 개최지 히로시마에서 한·일 정상은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처음으로 함께 참배했다. 큰 위로가 됐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원폭 가해국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사과하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동원의 가해자인 2차 세계대전 전범국 일본이 피해자로 전환되는 장면이다. 전후 일본의 ‘피해자 의식’은 사죄와 반성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런 기묘한 심리 구조를 만든 것은 전승국 미국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을 퇴위시키면 일본 사회가 붕괴할 것으로 판단했고, 면죄부를 발급했다.     ■  「 미국이 도조 회유해 천황 면죄부 일, 자기 연민·과거사 외면 출발점 일본도 윤석열식 결단 내놓을 때 평화·경제공동체 함께 선도하길 」    도쿄 전범재판은 나치를 단죄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딴판이었다. 『패배를 껴안고(Embracing Defeat)』의 저자인 존 다우어 MIT 명예교수는 “‘승자의 증거’를 조작해서 패전국의 수장을 구제해 주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A급 전범’들은 똘똘 뭉쳐 천황을 보호했지만 딱 한 번의 실수가 있었다. 총리로서 전시내각을 이끌었던 도조 히데키가 “천황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수석검사 조셉 키넌은 천황 보좌전담 기관을 통해 증언을 철회하라고 회유했고, 도조는 수용했다. 맥아더 연합국최고사령부의 역사왜곡이었다. 책임자인 천황이 책임지지 않으니 국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인류 최초의 핵폭탄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겹쳐졌다.   아시아 전체를 전쟁터로 만든 일본은 자기 연민의 알리바이를 발견했다. 끔찍한 피해를 입혀놓고 성찰도 없었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직 점령국 미국의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질주했다. 무라야마, 오부치, 간 총리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사죄가 있었지만 정치인들의 망언으로 빛이 바랬다.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자 문명국인 일본이 아시아 통합의 걸림돌이 된 이유다.   ‘피해자 의식’을 이겨낸 거인(巨人)들도 있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보수였지만 1984년 공산 중국을 방문해 수백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그 돈으로 베이징과 상하이에 공항과 지하철이 들어섰다. 그는 “전쟁 때 고난을 일으킨 것에 유감을 표시하기 위해 원조 액수를 늘리자”고 깐깐한 관료들을 설득했다. 자오쯔양에게 “중국은 북한에게, 일본은 남한에게 밀서를 받아 남북 대화를 중재하자”고 했다.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1983년 한국을 방문할 때는 외무성 관료의 자문도 받지 않았다.   아키히토 전 천황도 “체포돼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우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1992년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인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한 것”을 시인하고 “이로 인한 슬픔을 통감한다”고 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02년 평양을 방문해 식민통치에 사과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인 납치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방북을 마쳤을 때 외무성 심의관 집에 ‘반역자’라는 메모와 함께 폭발물이 설치됐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결단했지만 “일본의 식민 침략에 대한 면죄부”라는 한국 내 비판은 여전하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10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던 중국의 대처 방식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중국은 자기들이 참전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도 무역을 재개하자고 ‘미국의 병참기지’인 일본을 졸랐다. 이듬해 무역협정이 체결됐다.   중국 전문가 사이먼 리스는 총리로서 중국 외교를 지휘한 저우언라이에 대해 “실용주의자 앞에서는 실용주의자, 철학자 앞에서는 철학자, 키신저를 만나면 키신저가 되었다”며 “카멜레온”이라고 했다. 1961년 일본 사회당 대표를 마주한 마오쩌둥은 “중국을 침략해 고맙다”고 했다. 일본군이 촉발한 혼란 덕분에 공산당이 집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추상적 이념과 감정보다는 현실적 국익과 전략을 중시해야 한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균·쇠』에서 “(한·일은) 같은 피를 나누었고, 성장기를 함께 보낸 일란성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고 했다. 웃으면서 뒤통수를 치는 ‘상호의존성의 무기화(Weaponization of interdependence)’를 깨야 한다. “과거에 머무른 자는 한 눈을 잃고, 과거를 잊은 자는 두 눈을 잃게 될 것”이라는 러시아 격언이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2025년을 목표로 양국은 역사 화해 프로세스에 돌입해야 한다.   두 나라가 앞장서고 중국과 손잡으면 아시아 특유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문명의 힘이 발휘될 것이다. 유럽이 부러워할 아시아 평화·경제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미국과의 건강한 동맹관계 구축에도 도움이 된다. 일본도 윤석열식 결단을 내놓을 때다. 과거를 직시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윤석열-기시다 선언을 기대한다. 이하경 대기자

    2023.05.22 00:58

  • [이하경 칼럼] 윤석열 외교, 내부 설득 실패하면 물거품 된다

    이하경 대기자 윤석열 대통령 미국 의회 연설은 성공작이었다. 500여 명의 상·하원 의원은 글로벌 경제의 강자인 삼성전자·현대차·SK 총수와 함께 미국 땅을 밟은 한국의 지도자를 향해 43분 동안 23번 기립박수를 쳤다. 윤 대통령은 “내 이름은 몰라도 BTS와 블랙핑크는 알고 있을 것”이라는 ‘아이스브레이킹’ 농담으로 분위기를 장악했다. 최빈국 대한민국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최강국 미국을 압박해서 쟁취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의 백미(白眉)였다. 매카시 하원의장은 “한·미 동맹을 더 강화하는 역사적 한 걸음”이라고 평가했다.     ■  「 미국의 마음을 얻은 미 의회 연설 미국, IRA·반도체 후속조치 필요 일본, 진정성 있는 사과 표명해야 통합적 국정운영, 외교 성공 열쇠 」    미국은 한국 대통령이 정성을 쏟을 만한 특별한 나라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터지자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즉시로 참전을 결정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6월29일 도쿄 극동군사령부에서 전용기로 수원에 도착했다. 한국군 일등중사를 만났다. 참호에 서서 적을 노려보는 그는 무기가 없었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키겠다”고 했다. 맥아더는 감동했다. 선발대로 1개 연대를 급파했고, 합참에 요청해 지상군 2개 사단을 즉각 파병했다.(『6·25전쟁과 미국』 남시욱)   1950년 12월 중공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영국의 애틀리 총리가 “한국에서 손 떼고 유럽 방위에 힘써 달라”고 했지만 트루먼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장진호 전투는 30만 중공군의 기습 인해전술, 영하 40도의 강추위에 맞선 지옥의 전장(戰場)이었다. 이때 부상당해 후송된 미군 병사들은 “다시 싸우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미국은 눈물겨운 혈맹(血盟)이었다.   윤 대통령의 5박 7일 국빈방문은 전 정권 때 흔들렸던 양국의 신뢰를 복원했다. 미국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 최초로 한국과 확장억제를 논의하기 위한  상설협의체인 ‘핵협의그룹(NCG)’을 창설했다. 자체 핵무장이나 전술핵 배치를 요구해온 그룹은 불만이겠지만 북핵 위협에 빈틈없이 대비하려는 2인3각의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이젠 국내에서도 적극적인 설득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 대미 외교의 성과를 국민이 체감하고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당과 긴밀해져야 한다. 야당은 애초에 ‘반대하는 당(opposition party)’으로 설계된 존재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의 불완전함을 메꿔줄 것이다. 야당을 기피하면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압도적 과반수 의석으로 입법권을 쥔 야당의 협조가 없으면 외교 성과는 물거품이 된다.   윤 대통령은 일본·미국 정상과 만난 뒤 “굴욕외교” “최악의 빈손 회담”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통 크게 내준 것에 비해 받아낸 것이 빈약했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은 미국에 화끈하게 투자하고 일자리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 기업에 타격을 줄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과학법은 고치지 않았다. 오죽하면 미국 기자가 바이든 대통령에게 “핵심 동맹국에 피해를 주려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을까. 성의 있는 후속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기시다 일본 총리가 7일 답방한다. 윤 대통령은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을 일본 전범기업에 물리지 않는 제3자 대위변제를 결단했다. 기시다 총리도 “통절한 사과와 반성” 정도의 표현으로 호응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백 년 전 일로 무조건 무릎 꿇어라 할 수 없다”고 해서 호된 비판을 받았다. 이럴 때 기시다 총리가 “백 번, 천 번이라도 무릎 끓을 용의가 있다”고 하면 어떨까.   지금은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위해 몸을 던지고 있는 윤 대통령을 각별히 배려해야 할 때다. 나치와 싸웠던 브란트 독일 총리는 나치 만행에 사죄하는 의미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 끓었다. 독일은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이지만 끝없는 사과로 세계의 신뢰를 얻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통일을 성취했고, 유럽의 리더가 됐다. 일본이 가야 할 길이다.   외교의 출발점도, 종착지도 내정(內政)이다. 국민 지지 없는 외교는 모래성이다. 내부 설득을 위한 통합적 국정운영은 필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진보였지만 집권 후 첫 통일부 장관에 강경보수인 강인덕을 임명해 보수를 안심시켰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멤버는 수석만 임동원으로 교체했을 뿐 전 정권 때 임명된 비서관·행정관 전원을 유임시켰다. 서독의 겐셔 외교부 장관은 제3당인 자민당 소속이었다. 그런데도 정파를 초월해 사민당·기민당 정권에서 18년간 재임했고, 독일 통일의 산파역이 됐다. 파격(破格)의 지도자인 윤 대통령이 숙고하기 바란다.   윤 대통령의 귓전에는 미 의회의 뜨거운 환호성이 맴돌 것이다. 아쉽겠지만 당분간 잊어야 한다. 싸늘한 반대자의 마음을 돌리는 데 전력투구해야 한다. 자기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 외교는 뿌리 없는 나무다. 내부 설득에 실패한 외교는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3.05.01 0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