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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2층 누각에서 뿌연 연기가 솟아올랐다.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은 채 모(당시 69세) 씨의 방화였다.
연기에 휩싸인 숭례문을 본 버스 승객과 택시기사가 119에 신고했다. 3분 뒤 소방차가 도착했고, 4분 만에 내부 불을 껐다. 하지만 천장에선 계속 연기가 났다.
소방관들은 숭례문 천장을 부숴 불을 끄려 했지만, 붕괴가 우려됐다. 대신 고가소방차가 숭례문을 에워쌌다. 연기와 불꽃을 향해 연신 '물대포'를 쐈다.
'물대포'는 기와 밑에 12~15cm 두께로 덮여있는 강회층(생석회와 마사토 혼합물)을 뚫지 못했다. 밖에서 아무리 물을 쏴도 안으로 물 한 방을 안 들어가는 구조였던 것을 몰랐다.
불길이 잡히지 않자 소방관이 숭례문 현판을 걷어낸다. 무거운 현판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테두리 목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숭례문 2층 지붕이 무너졌다. 330명의 소방관과 95대의 소방차가 동원됐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석축을 제외한 숭례문 대부분이 무너졌다. 1396년 축조를 시작해 3년만인 태조 7년(1398년) 완공된 ‘서울의 관문’. 숭례문은 600년 만에 잿더미가 됐다.
숯덩이가 된 숭례문 앞에 국화꽃이 놓였다. 엄마·아빠 손을 잡고 숭례문을 찾은 아이들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편지를 남겼다. “숭례문 할아버지, 못 지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숭례문아, 아프겠다.” 모두 다 같은 마음이었다.
경찰은 숭례문 방화 혐의로 채 씨를 체포했다. 그는 2006년 창경궁 문정전 출입문에도 불을 지른 전력이 있었다. 채 씨는 “원래 방화 장소로 종묘를 점찍었지만, 경비가 허술한 숭례문을 택했다”고 했다. 10년 형을 받은 그는 2월 만기 출소를 앞두고 있다.
숭례문은 대공사 끝에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왔다. 현판은 원형을 살렸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숭례문 현판은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 썼다. 문화재청은 양녕대군 사당인 상도동 지덕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탁본을 참고해 현판을 복원했다고 밝혔다.
숭례문 단청은 들뜨고, 기둥은 깊게 갈라졌다. 수사가 시작됐다. 복원을 맡았던 단청장 홍 모(58) 씨 등 34명이 기소됐다. 천연안료 대신 화학 안료를 사용해 돈을 빼돌린 단청장 홍씨는 2016년 징역 2년 6개월의 형을 확정받았다. 단청장 자격은 취소됐다.
경찰은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쓰여야 할 국민기증목인 금강송 일부가 사라졌다고 발표했다. 금강송을 빼돌린 신응수 대목장의 제자 부편수 문모 씨, 뇌물을 받은 문화재청 공무원 17명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문씨는 2017년 8월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경찰은 숭례문과 경복궁에 불량 불꽃감지기를 납품한 혐의로 납품회사 대표 등 5명을 입건했다.
불타고 남은 숭례문의 부재 3532점이 경복궁 창고를 떠났다. 전통기법 연구를 위해 경기도 파주에 만들어진 전통건축부 재보존센터로 옮겨졌다. 문화재청은 "재사용이 가능한 부재는 많아야 5% 남짓"이라고 밝혔다.
숭례문이 불에 탄 지 10년. 이 땅에 숭례문이 모습을 드러낸 지 620년이 된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취재 김현예
개발 김승섭
디자인 임해든
사진 국가기록원 · 중앙포토 · 연합 · 뉴시스 · 뉴스1
※ 숭례문 화재와 관련된 시점과 내용은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의 숭례문 화재 조사보고서와 언론 보도, 문화재청의 정보를 토대로 구성했습니다.
숭례문의 역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