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우리안의 ‘그렌펠 타워’ 서울, 그곳이 불안하다

Series3 15층 아파트의 비밀

Intro

영국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현지시간 6월 14일) 이후 소방청(옛 국민안전처)은 우리나라 고층 건축물 2315동에 대해 정밀안전 점검을 긴급 실시했다. 그 결과 135동이 가연성 외장재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서 말하는 고층건축물은 몇 층일까?

건축법상 고층건축물은 층수가 30층 이상이거나 높이가 120m 이상인 건축물을 가리킨다. 초고층 건축물은 50층 이상 높이 200m 이상이다.

정말 30층 이상 건물만 점검하면 괜찮은 걸까.

123층(555m)짜리 롯데월드 타워가 들어선 요즘이지만, 30층 이상 건물에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Chapter 1

15층 건물은 왜 이렇게 많을까?

요즘 짓는 아파트 중에는 20층 이상도 많다. 하지만 건축한 지 10년 이상된 아파트 중에는 유난히 15층 짜리가 많다.

서울시 아파트 연면적의 1/4은 15층

서울시내 아파트 층수별 연면적의 총합. 1970년 이후 매년 신축된 아파트의 연면적을 표시한 것이다. 붉은 선은 15층 아파트가 지어진 시기와 연면적을 나타낸다. 건물이 많이 지어진 곳은 원이 중첩되어 진하게 보인다.

실제로 중앙일보가 데이터오픈 운동을 펼치는 코드나무와 함께 서울시내 아파트 2만3021개동을 분석해 본 결과, 15층 아파트가 다른 층의 아파트 보다 확연히 많았다.

층수가 높아질 수록 아파트 동의 개수보다는 실제 사람이 얼마나 거주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연면적이 중요하기 때문에(5층 1개동 거주인구 < 20층 1개동 거주인구) 층별 아파트 동수 대신 연면적의 총합을 기준으로 살펴봤다.

그 결과 15층 아파트는 연면적 총합이 4283만1384㎡으로 서울시내 모든 아파트 총 합(1억 8217만 1245㎡)의 1/4에 육박하는 23.5%를 차지했다. 2번째로 총합이 큰 12층 아파트(1457만9844㎡)의 2.94배나 됐다. 연면적 총합 3번째 아파트는 20층(1167만3720㎡) 아파트였다.

압도적으로 많은 15층 건물 동수

건물 동으로 봐도 15층 아파트는 다른 층수의 아파트보다 훨씬 많았다.

2017년 6월까지 완공된 서울시내 15층 아파트가 총 4414동으로, 14층 아파트(1005동)의 4.4배, 16층 아파트(460동)의 9.6배나 됐다. 동수 기준으로 15층 아파트는 전체 아파트(2만3021동)의 19.2%를 차지했다.

서울에는 15층 아파트가 왜 이렇게 많을까?

‘돈’과 ‘규제’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16층부터 각종 건축 규제가 강해져 건축 단가가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6층을 기준으로 달라지는 건축비(1989년)

스프링클러 등의 설치를 위해 16층 이상 아파트 건축비 단가를 높이도록 한 건설부 발표를 전한 1989년의 신문

1989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규제와 건설단가의 관계가 좀더 명확히 드러난다. 당시 건설부는 “16층 이상 아파트(초고층아파트)의 경우 콘크리트 강도를 높이고, 진화용 스프링클러 및 고속 엘레베이터를 설치하도록 해야 하기에 건축비가 상승한다”고 밝혔다.

Chapter 2

15층 아파트의 비밀

과거(주로 2005년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는 16층 이상부터 강화되는 규제를 피하고, 건축 단가를 낮추기 위해 15층으로 지은 경우가 많았다.

기업 생리상 투입금액 대비 수익이 최적화되거나, 상품 시장성이 최대가 되는 지점에서 건물 규모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16층 이상부터 강화되는 화재 관련 규정은 아래와 같다.

화재 설비 규정 비교 15층 vs 16층

15층 이하 16층 이상
스프링클러 설치 X
(1992.7 ~ 2005.1)
O
방재계획서 구비 X O
특별피난계단 설치 X O
(공동주택의 경우)
방화문 설치 X O
제연설비 설치 X O
화재보험 가입 X
(~ 2017.1)
O
15층 아파트 관련 소방 규정은 계속 달라졌다. 자세한 내용은 건축법시행령 참조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규제를 피하기 위해, 규제 적용 층보다 한층 낮게 건물을 짓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면 100㎡당 공사비 500~1000만원이 추가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정말 규제를 피하기 위해 15층 아파트를 많이 지었을까. 스프링클러 관련 규정이 ‘16층 이상 층 설치’에서, ‘10층 이상 전층 설치’로 바뀌었던 2005년을 기준으로 15층 아파트 연면적에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봤다.

2005년 전후로 달라진 신축 아파트 연면적

그 결과 2005년을 기점으로 15층 아파트 신축 연 면적이 급감함을 확인할 수 있다. 2004년 1140만 5420㎡였던 15층 아파트 신축 연 면적은 2005년 810만 9168㎡으로 줄어들었다. 2007년에는 515만㎡까지 줄었다.

데이터를 분석한 코드나무 김승범 박사(건축학)는 “스프링클러 규제가 15층 건물의 신축면적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정황적 증거가 된다”고 밝혔다.

규제가 강화 되기 전 지어진 수많은 15층 아파트는 규제의 ‘사각’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불이 났을 때 15층과 16층이 안전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 보자. 한 층 차이로 스프링클러·피난계단·화재보험 등이 없다면, 생존 확률이나 화재 피해규모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결과를 그저 ‘규제 사각지대의 그늘’로 치부하고 넘겨야 할까?

Chapter 3

10층 건물과 규제피하기

서울에는 15층 뿐 아니라 10층 건물도 많다. 역시 11층 이상부터 강화되는 규제 때문이다.

2005년 1월부터 11층 이상 건물은 전층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규제가 강화됐다. 10층 이하는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11층 건물을 짓는 순간 1층부터 11층까지 모든 층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한다(2018년 1월 6층 이상으로 개정 예정).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건물 모든 층의 층고를 20~30㎝ 이상 높여야 한다. 소방설비업체들은 층고문제로 건축비가 수천만원에서 수억까지 상승한다고 말한다. 가령 10억~12억 원 정도 공사비가 드는 10층짜리 도시형 생활주택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면 단가가 1억 원 가량 올라간다. 전체 공사비가 10% 가량 뛰는 셈이다.

스프링클러 외에 방화구획 설치(11층 이상은 200㎡, 10층 이하는 1000㎡ 마다), 화재시 비상방송 의무화, 유사시 소방차 진입 통로 확보(2012년 이후) 등도 11층부터 적용되는 규제들이다.

규제가 있는 층과 해당 규제를 피한 한층 낮은 건물의 개수를 확인해 보자.

새 규제 피하기 위해 층 수 낮춘 아파트들

서울 시내 아파트들의 연면적을 비교하면 규제가 있는 11층, 16층, 21층, 30층을 피해 그 보다 한 층 낮은 아파트가 많이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초고층 특별법으로 50층 이상 건물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49층 건물이 유행했다. 30층 이상 건축물에 피난용승강기, 피난안전구역 설치 규정이 강화되며 29층 건물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Chapter 4

문제는 돈 뿐일까?

건설업계는 “건축주 입장에서는 규제를 피하는 게 경제적이고 합법적인 선택이다. 일방적으로 탓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규제를 피해 얻는 눈앞의 이익보다 화재 사고 발생시 피해가 훨씬 크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국 그렌펠 타워 화재의 경우도 외장재 비용 29만파운드(약 4억 2000만원)를 아끼려다 80여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낳았다.

한국의 경우 건축사업비에서 소방분야 비용이 차지하는 부분은 약 5% 내외에 불과하다. 건물 외관이나 조경에는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도 소방안전에는 자린고비가 되는 거다.

경제성을 따지는 건 민간 뿐이 아니다. 조달청 자료를 보면 서울 OO 경찰서 신축공사의 경우 전체 건축비 378억 중 소방안전 비용으로 8억 원(3.9%)밖에 쓰지 않았다. 다른 공공 건물들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관(官)부터 소방안전에 큰 관심이 없는 거다.

서울 OO 경찰서 신축 공사비 내역

건축 182.3억
전기 15.9억
통신 11.3억
소방 8.6억
연면적 21,236㎡, 총공사비 378억 7935만 8000원
(자료 : 공공건축물 유형별 공사비 분석, 조달청)

소방안전 비용은 어떻게 이렇게 낮게 책정되는걸까.

여기에는 한국의 고질적인 하청-재하청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현행법(건설산업기본법 제2조)상 소방공사는 일반적인 건설공사에 해당되지 않는 ‘특수 공종(工種)’에 해당한다. 소방공사를 따로 발주해야 한다. 그럼에도 실제로는 일괄발주돼 공사를 따낸 종합건설업체가 영세한 규모의 소방공사업체에 하도급을 준다. 소위 ‘갑을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건설사나 시공사는 하청-재하청의 과정을 거치며 가격 입찰 경쟁을 통해 더 낮은 가격을 써낸 입찰 업체에 소방공사를 맡긴다. 영세한 소방공사업체는 더 좋은 설비를 갖추기 보다 최저단가 제품을 사용해 공사 단가를 낮추는데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다. 대개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의 검정 기준만 겨우 통과한 제품들을 사용한다.

소방산업통계조사집(2016)에 따르면 소방산업 업체의 90%가 연구개발(R&D)을 안 한다고 답했다. 10%의 연구개발을 하는 업체도 평균 연구개발 투자액은 6600만원 수준이었다.

소방공사업체 절반이 영세

1-9명 4,286개
10-19명 1,654개
20-49명 1,216개
50-99명 1,216개
100-299명 366개
300명 이상 155개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선진국은 성능이 좋은 스프링클러나 화재경보기를 설치하면 화재보험료가 할인되는 등 혜택이 있다. 하지만 한국은 좋은 제품보다 싼 제품만 찾는다”고 꼬집었다.

그렌펠 타워 화재 발생 후 정부는 “소방시설공사 위법시 하도급 업자(실제 공사업자) 뿐 아니라 원도급업자가 공동책임을 지도록 소방시설공사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불법의 문제는 잡아낼 수 있지만, 적법의 테두리 내에서 저가형 제품을 쓰는 관행은 막기 힘들다.

지난 3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 오피스텔 화재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건물은 난연성 시험을 통과한 외장재를 썼지만, 화재가 발생하자 불이 외장재를 타고 급속도로 번졌다. 기준을 통과한 외장재를 썼다고 100% 안전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일껏 고급장비를 설치해놓고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가령 수천만원을 들여 스프링클러를 갖춰 놓고, 화재감지기는 몇천원짜리를 설치했다고 치자. ‘싸구려’ 화재감지기가 몇 번 오작동을 하면 건물 시설관리자들은 보통 스프링클러를 꺼버린다. 언제 날지 모르는 화재보다 눈 앞에서 스프링클러가 잘못 터졌을 때 발생하는 손해가 훨씬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Outro

중앙일보는 영국 런던의 그렌펠 타워 화재를 계기로 대한민국 서울의 대형화재 위험을 3회에 걸쳐 점검했다.

Ⅰ편에서는 대형화재에 취약한 건물을, Ⅱ편에서는 소방차가 골든타임 내에 도달하기 힘든 지역을 살펴봤다. Ⅲ편에서는 소방 안전 규제의 사각지대를 찾고, 건축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

하지만 단순히 잠재적 화재 위험을 이유로 서울의 모든 건물과 도로를 뜯어 고칠 수는 없다. 무조건 값비싼 소방안전 장비를 쓴다고 안전이 담보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안전 민감도’다. 2010년 부산 초고층 오피스텔 화재, 2015년 의정부 아파트 화재, 그리고 올해 런던 그렌펠 화재 같은 때만 ‘반짝’ 타오르다, 이내 사그러드는 우리의 안전의식 말이다.

건물이 낡았다고 싹 부수고 새로 지을 수는 없듯, 도시의 안전도 한번에 확보할 수 없다. 우리 안의 ‘그렌펠’을 인정하고, 그 해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모으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좀 더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서울 화재위험 지도 인터렉티브 링크 우리 안의 ‘그렌펠 타워’ 서울, 그곳이 불안하다

발행일 : 2017.08.24

  • 기획 정원엽, 코드나무 김승범
  • 데이터 분석 및 지도 시각화 코드나무 김승범
  • 개발 김승섭, 원나연, 전기환
  • 디자인 임해든, 김현서
  • 영상편집 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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