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 지지율
- 최저 지지율
13대 노태우(1988~1993년)
‘보통 사람’을 자처했지만 국정 지지율은 보통 이하
87년 민주화 항쟁 후 직선으로 뽑힌 첫 대통령이었다. 집권 초부터 “5공 청산”을 외쳤다. 하지만 국민은 6공화국을 “5.5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전 정권과 별다를 바 없는 또 다른 군사 정권이란 의미였다.
국정 지지율에 이런 민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노 전(前) 대통령 지지율은 집권 1년 차 2분기(1분기 미실시) 때 57%를 기록한 뒤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서울올림픽 개막(1988년 9월 17일) 등 호재에도 3분기 지지율은 53%로 빠졌다. 4분기부터 퇴임 때까진 내내 50%를 밑돌았다.
특히 부산 동의대 사태(89년 5월),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90년 10월 4일), 명지대생 강경대 사망(91년 4월 26일) 등 대형 시국사건이 이어지며 지지율은 30% 밑으로 곤두박질 쳤다. 3당 합당(90년 1월22일), 분단 후 첫 남·북 고위급회담(90년 9월 4~7일), 범죄와의 전쟁 선포(90년 10월13일),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91년 9월17일) 등의 이슈도 이런 분위기를 뒤집지 못했다. 임기 말인 5년차 2분기 지지율은 12%까지 떨어졌다.
14대 김영삼(1993~1998년)
분기 지지율 역대 최고·최저 동시 2관왕
집권 초반(재임 1년 차 2·3분기) 지지율은 83%에 달했다. 문재인 대통령 이전 최고 기록이다. 반면 임기말(재임 5년차 4분기) 지지율은 6%로 추락했다. 탄핵 직전의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역대 최저 기록이다.
집권 초에는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 해체(93년 3월), 금융실명제 도입(93년 8월12일) 등으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한 때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지기도 했지만, ‘역사 바로세우기’를 통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하며(각각 95년 11월 16일, 12월3일) 다시 지지율 40%대를 회복했다.
하지만 5년차에 들며 대형 악재가 잇달아 터졌다. 97년 1월 한보철강이 도산하는 과정에서 차남 현철씨가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됐다. 연말에는 환율이 급등하며 나라 전체가 부도 위기에 몰렸다. 외환보유고에 5배가 넘는 막대한 외채가 발목을 잡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간신히 국가 부도는 면했지만 나라 경제가 엉망이 됐다. 한달 새 3000여 개 기업이 줄 도산 했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임기 말 지지율이 역대 최악으로 떨어진 것은 그 때문이다.
15대 김대중(1998~2003년)
5년 평균 지지율, 6명 가운데 가장 높아
취임 직후(재임 1년 차 1분기) 지지율은 전임 김영삼 전(前) 대통령과 같은 71%였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과 달리 지지율이 20%대 이하로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재임기간 5년 평균 국정 지지율이 42.8%로, 비교 대상 역대 대통령 6명 가운데 가장 높았다.
김 전 대통령은 집권 초 다양한 개혁을 통해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란’이라던 IMF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98년 6월16일), 금강산 유람선 취항(98년 11월18일), 분단 후 첫 남·북 정상회담(2000년 6월 13~15일) 등 햇볕 정책도 훗날 논란이 됐지만 시행 당시 여론의 평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도 ‘임기말 징크스’를 극복하진 못했다. 재임 5년차인 2002년 소위 ‘이용호·최기선 게이트’가 터지며 지지율이 급락했다. 특히 차남 홍업, 삼남 홍걸씨가 이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며(각각 2002년 5월18일, 6월 21일)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다. 퇴임 직전(5년차 4분기) 지지율은 재임기간 중 가장 낮은 24%였다.
16대 노무현(2003~2008년)
재임 1년차 후반기부터 지지율 추락
재임기간 5년이 “파란과 곡절의 연속”(2008년 2월 마지막 국무위원 간담회 발언)이었다. 그만큼 여론의 호불호도 극단적으로 갈렸다. 최초의 정치인 팬 카페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 핵심 지지층의 사랑은 뜨거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집권 초부터 ‘비(非)노’ 혹은 ‘반(反)노’ 목소리도 거셌다.
‘평검사와의 대화’(2003년 3월9일)가 있었던 1년 차 1분기 지지율은 60%였다. 하지만 1년 차 3분기부터 지지율이 20%대로 내려 앉았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으로 호남과 갈등을 빚고, 최측근 최도술·안희정씨가 불법자금 수수로 구속된 탓이 컸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2004년 3월 12일 노 전 대통령을 탄핵까지 했다. 하지만 ‘민심의 역풍’으로 두 당이 총선에 참패하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하며(2004년 5월 12일)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국정 지지율(재임 2년차 2분기)도 34%로 회복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경제가 발목을 잡았다. ‘카드 대란’으로 신용불량자가 급증하는 가운데, ‘버블 세븐’이란 신조어가 생길 만큼 부동산 값이 폭등해 큰 사회적 갈등이 빚어졌다.
17대 이명박(2008~2013년)
취임 반년 만에 지지율 역대 최대폭 하락
1년차 1분기 52%이었던 지지율이 2분기에 반 토막도 안 되게 떨어졌다(21%). 취임 반년 뒤 지지율로는 역대 대통령 6명 가운데 가장 낮다. 1분기와 비교한 지지율 하락 폭도 가장 컸다.
지지율 급락의 이유는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논란이었다. 5~8월 대규모 반(反)정부 촛불 시위가 계속 이어졌고, 경찰이 시위대를 막기 위해 쌓아 올린 컨테이너 박스는 ‘명박 산성’이라 조롱당하며 불통(不通)의 상징이 됐다.
재임 2년차 상반기에도 악재가 이어졌다.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 철거현장에서 불이나 시위대와 진압 경찰 여럿이 숨지는 ‘용산 참사’가 발생했다. 5월에는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 ”검찰의 무리한 압박 수사 탓“이란 비난 여론이 일었고, 서울광장 추모행사 개최를 둘러싼 갈등으로 국정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졌다.
재임 3~4년차 때 40%를 회복했던 지지율은 임기 말인 5년차 때 다시 20%대로 급락했다. 측근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2012년 4월30일)과 친형 이상득 전 의원(2012년 7월10일)이 각각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구속된 탓이 컸다.
18대 박근혜(2013~2017년)
탄핵 직전 지지율 역대 최저 4~5% 오가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돼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2017년 3월10일. 하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는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한 2016년 12월 9일 이미 정지됐다. 당시(12월 둘째 주) 국정 지지율은 5% 였고, 마지막 월간(11월) 평균도 5%에 불과했다. 비교대상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낮은 수치다.
박 전 대통령은 TK지방을 중심으로 콘크리트 지지율을 자랑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불통인사’로 취임 첫해 1분기 지지율은 42%에 불과했지만, 다음 분기부터는 내내 50%를 상회했다. 세월호 참사(2014년 4월16일)에도 2년차 2분기 지지율이 50%를 기록했을 정도다.
하지만 ‘친박’ 공천 파동으로 총선(2016년 4월13일)에 대패하며 콘크리트 지지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4년차 2분기 지지율은 33%였고, 경북 성주에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를 강행(2016년 7월 8일)한 다음 분기 지지율은 32%로 더 떨어졌다.
결정타는 최순실 게이트였다.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보도(2016년 10월 24일) 직후 지지율은 12%로 급락했다. 이후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 주간 지지율은 4~5%를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