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부활한 중남미 핑크타이드

극단적인 좌·우 정권교체, 반복되는 이유는

‘룰라가 돌아왔다.’ 10월 30일(현지시간) 치러진 브라질 대통령 결선투표 결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77·룰라) 전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했습니다. 그의 승리는 최근 중남미를 휩쓸고 있는 제2 ‘핑크 타이드(PINK TIDE)’의 완성을 뜻합니다. 핑크 타이드란 중남미에 온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현상을 의미하는 용어죠. 미국은 중남미에 좌파 정권이 속속 들어서자, 이들이 중국·러시아와 연합할 가능성이 크다며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중남미 핑크 타이드의 의미와 출현 배경, 전망 등을 살펴봤습니다.

중남미는 어떤 곳

  • 유엔 정의에 따르면, 중남미는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국가를 포함하는 아메리카 대륙’을 일컫습니다. 총면적 2055㎢, 한반도의 93.5배에 달합니다. 전세계 면적의 15%를 차지하며 33개 독립국(중미 8개국, 남미 12개국, 카리브 13개국)과 남아메리카 동북부 및 카리브해의 미국‧프랑스령 식민지로 이뤄졌습니다. 

    (※중남미 국가=가이아나‧과테말라‧그레나다‧니카라과‧도미니카공화국‧도미니카연방‧멕시코‧버진아일랜드(미국령)‧바베이도스‧베네수엘라‧벨리즈‧볼리비아‧브라질‧세인트루시아‧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세인트키츠네비스‧수리남‧아르헨티나‧아이티‧아루바‧앤티카바부다‧에콰도르‧엘살바도르‧온두라스‧우루과이‧자메이카‧칠레‧케이맨제도‧코스타리카‧콜롬비아‧쿠바‧퀴라소‧트리니다드토바고‧파나마‧파라과이‧페루‧포클랜드제도‧푸에르토리코(미국령)‧기아나(프랑스령) 등 총 39개국)

  • 중남미는 1492년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에스파냐(스페인) 여왕의 후원을 받아 인도를 찾아 떠난 항해 도중 발견한 신대륙입니다. 이곳을 정복한 유럽인들은 왕의 허락 하에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기업형 대농장(플랜테이션)을 건설합니다. 원주민 인디오를 노예로 동원해 사탕수수‧커피‧담배 등을 강제 경작시킨 뒤 수익은 유럽인이 독점했죠. 


    16~17세기엔 엄청난 매장량의 금‧은 광산을 개발해 유럽으로 이를 실어 나릅니다. 현재 중남미의 ‘카우디요(caudillo) 경제’는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군부 기득권층이 플랜테이션과 광산을 중심으로 이권 거래를 하면서 굳어진 중남미판 정경 유착 구조를 말합니다.


    또 유럽인들은 농장과 광산 노동에 동원할 노예 숫자를 늘리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들을 대거 중남미로 데려옵니다. 이로 인해 중남미 사회는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한 모습을 갖게 됐죠. 물론 백인이 가장 위에서 군림했습니다.

    ▲브라질 오지나 상조세 사탕수수농장의 농업노동자촌에 얹혀 사는 세베라노씨가 말을 타고 마을로 들어가고 있다. 중앙포토


    착취와 수탈로 점철된 식민지 기간(15세기 중반~19세기 초‧중반)은 무려 300년. 중남미에는 아직도 이때 만들어진 인종‧계급에 따른 구조적 불평등이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백인인 크리올(Criole‧중남미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인의 후손)들은 피부색과 계급을 무기로 엘리트층을 형성해 정복자의 역할을 물려받았고, 원주민 인디오들은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삶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였죠. 중남미에서 아직도 ‘어두운 피부색’은 가난‧빈곤을 상징하고, 상류층은 하나같이 백인입니다.

  • 룰라의 승리로, 중남미 주요 6개국(브라질·멕시코·아르헨티나·콜롬비아·칠레·페루)에 모두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역대급 좌파 벨트가 완성됐습니다. 이는 최근 중남미를 휩쓸고 있는 제2 ‘핑크 타이드(PINK TIDE)’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핑크 타이드란 중남미에 온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현상을 의미하는 용어로, 미국 뉴욕타임스(NYT)의 래리 로터가 2005년 처음 사용했습니다. 공산주의 유행을 뜻하는 ‘붉은 물결(RED TIDE)’과 구별하기 위해, 온건한 좌파를 ‘핑크’라는 단어로 표한 거죠.

우파 '신자유주의' VS 좌파 '포퓰리즘'

  • 원유 매장량 세계 1위 베네수엘라, 금‧은‧동 매장량 세계 3위 페루, 리튬 매장량과 구리 생산량 세계 1위 칠레, 철광석‧주석 매장량 2위이자 아마존을 보유한 브라질…. 

    ▲지난 7월 베네수엘라의 한 석유단지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다. AP=연합뉴스 


    중남미 국가는 넓은 영토, 풍부한 지하자원, 광활한 산림 등을 보유한 자원 부국입니다. 하지만 소수 특권층이 성과를 독식하고, 고통은 서민에게 떠넘기는 부조리한 상황이 중남미의 전체 국가에서 반복되면서 국민들은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죠.

     

    우파 기득권층이 택한 경제 모델인 ‘신자유주의’는 이 지역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대표적인 정책 실패 사례로 꼽힙니다. 산업 기반이 취약한 중남미 시장을 전면 개방해 글로벌 경쟁 체제 안으로 밀어넣자, 중남미 국가는 저부가가치 산업으로 내몰렸고 그 결과 일자리가 없어지고 양극화가 심화되는 결과가 초래됐죠.

     

    좌파는 우파의 이 같은 부패와 무능을 파고들며 가난한 저소득층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원유 등 지하자원 팔아 번 돈과 부자에게 거둔 세금을 가난한 국민을 위해 쓰겠다”는 좌파 정치인들의 외침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 지수가 높은 중남미 국민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지난 1999년 베네수엘라에서 각종 무상 복지와 반미(反美) 포퓰리즘을 내세운 좌파 정치인 우고 차베스(1954~2013)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15년 동안 남미 12개국 중 10개 나라에 좌파 정권이 속속 들어섰습니다. 이게 1차 핑크 타이드의 시작입니다. 

    당시 외신들은 “중남미에선 일부 특권층은 전용 제트기로 호화 여행을 즐기는 데 반해, 가난한 농민들은 수도와 전기조차 공급되지 않는 곳에서 생활한다”며 “세계 최대의 빈부 격차가 존재하는 중남미에서 좌파는 대단히 매력적인 존재”라고 전했습니다.

  • 1차 핑크 타이드 때, 중남미 좌파 정권은 국민들에게 마음껏 돈을 뿌리는 ‘복지 포퓰리즘’으로 인기몰이에 성공합니다. 당시 중국의 성장, 미국의 저금리 기조 등 세계적인 경기 호황으로 원유 수출이 대폭 늘어난 데다 고유가까지 맞물려 중남미에 이상적인 거시경제 환경이 조성됐죠.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2년 유럽발 경제위기, 2015년 석유‧구리 등 원자재값 하락 등 악재가 겹치며 돈줄이 마르자 좌파 정권들은 직격탄을 맞습니다. 정부 수입은 줄었는데 국민에게 퍼주던 복지 혜택을 제때 줄이지 못하면서 재정 상태는 더욱 악화됐죠.

     

    퍼주기 포퓰리즘과 경제 실정이 좌파에 대한 실망을 안겼다면, 부패 스캔들은 환멸을 키웠습니다. 2014년 ‘오데브레시 스캔들’이 결정타였습니다. 브라질에 본사를 둔 건설회사 오데브리시가 지난 2001년부터 공공건설 사업을 수주하는 대가로 남미 9개국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4억6000만 달러(약 6500억 원) 이상의 막대한 뇌물을 건넨 사실이 드러난 겁니다.

    ▲룰라 전 대통령이 부패 비리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알려지자 브라질 시위대가 '룰라를 감옥에'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로 인해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은 뇌물 수수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됐고, 룰라의 후임인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2011~2016년 재임)은 탄핵됐습니다. 페루의 알란 가르시아(1949~2019) 전 대통령은 체포되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후 우파들은 “과거와의 결별” “부패 척결”을 내세워 유권자들을 공략했고, 결국 남미 국가 중 베네수엘라‧볼리비아 정도를 제외하고 우파 정권으로 교체하는 데 성공합니다. 당시 가디언은 “(중남미에) 핑크 타이드 대신 ‘반체제 물결’이 강타했다”면서 “(좌파의) 부패에 대한 민중의 반발”이라고 전했습니다.

  • 2014년을 기점으로 우파에게 넘어갔던 중남미 정권을 최근 좌파가 재탈환했습니다. 1차 핑크 타이드 때 콜롬비아‧멕시코엔 우파가 집권하며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지만, 이번엔 룰라(브라질)의 승리로 중남미 주요 6개국을 모두 좌파가 장악했습니다.


    규모는 사상 최대지만, 1차 핑크 타이드에 비해 좌파의 지지기반은 취약하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우파 정권을 무너뜨린 건 좌파에 대한 기대감이나 신뢰가 아니라, 글로벌 위기입니다. 우파 정권은 중남미를 강타한 코로나19, 미국의 금리 인상, 중국의 경기 침체, 지정학적 불안 등 위험 요소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신뢰를 잃었죠. 하지만 좌파 정권 역시 이에 대한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는 데다, 과거의 ‘달콤한 복지’가 그리워 자신을 찍어준 유권자에게 그때처럼 돈을 뿌릴 여유도 없는 상황입니다.  

    ▲10월 30일(현지시간) 브라질 대선 결선투표에서 룰라의 당선이 확정되자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유권자들의 기대도 크지 않습니다. 유라시아그룹의 미주지역 전문가인 크리스 가먼은 “현재의 핑크 타이드는 ‘유권자의 좌향좌’가 아니다”면서 “단순히 현재 집권 세력에 분노한 유권자가 야당을 지지하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고, 이번엔 야당이 좌파였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전문가들은 “좌파 지도자들이 민생과 경제 위기를 제대로 타개할 실력을 빠른 시일 내에 입증하지 못하면 곧바로 권력에서 배제될 수 있다”고도 강조하죠.

     

    실제로 “칠레를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만들겠다”며 취임한 가브리엘 보릭 칠레 대통령은 현재 지지율이 곤두박질쳤고, 시골 교사 출신으로 ‘서민 대통령’을 표방한 페드로 카스티요 페루 대통령은 탄핵 위기에 몰려 권력에서 밀려난 상태입니다. 가먼은 “현재 경제 위기는 쉽게 타개하기 어려운만큼, 새로운 핑크 타이드는 빠르게 밀려왔다 빠르게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습니다.

‘미국 뒷마당’서 美·中 패권다툼 커질까

  • 중국은 중남미의 1차 핑크 타이드 시기에 좌파 정권과의 이념적 동질성 내세우며 이 지역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당시 좌파 정권은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고유가에 힘입어 막대한 오일 머니를 무상 복지에 쏟아부었는데, 2013년 저유가의 역습으로 중남미 경제가 속절없이 무너지던 중이었습니다.

     

    이때 중국은 중남미 원자재 최대 수입국으로 떠오르며,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사업 등으로 투자를 본격화하면서 좌파 정권의 재정을 떠받쳐줬습니다. 에콰도르 등 일부 좌파 정권은 부족한 국가 재정 확충을 위해 중국 기업에 석유‧광산 채굴권을 남발하며 빚을 끌어다 쓰면서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했죠.

     

    월드뱅크에 따르면 1999년 남미 모든 국가의 역외 최대 교역국은 미국이었고 역내 무역은 20% 이상을 차지했는데, 1차 핑크 타이드를 지나면서 중국이 1위 교역국으로 급부상합니다. 역내 무역량도 3분의 1로 줄었죠. 현재 중남미 지도자들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이웃 국가가 아니라 미국, 그리고 중국입니다.

    중국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중남미에서 영향력을 키운 뒤, 이 지역의 오랜 대만 수교국을 집중 공략해 잇따라 단교시키고 있습니다. 파나마(2017년 6월)‧도미니카공화국(2018년 5월)‧엘살바도르(2018년 5월)‧니카라과(2021년 12월)를 포함해 중남미 7개국은 대만과 단교, 중국과 수교를 맺었죠.

     

    지난해 12월 온두라스 대선에선 ‘민주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시오마라 카스트로(63)가 “대만 단교, 중국 수교”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죠. 미국의 압력으로 대만과 단교는 무산됐지만 파장은 컸습니다.

  • 이 시기, 미국은 중남미에 손을 뗀 채 불법 이민자를 막는 데만 급급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중남미 상황에 관여하지 않았고, 조 바이든 행정부 역시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응하느라 중남미 문제 해결을 위한 제대로 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지난해 미국 텍사스와 멕시코의 국경지대에서 미국의 국경 순찰대가 중남미를 탈출하는 이민자들을 채찍으로 위협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정치전문 매체 더힐은 “중남미 여러 나라가 중국과 손을 잡은 것은 대미(對美) 관계 악화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미국과 관계 개선이 어렵다고 판단해 중국을 택했다는 겁니다. 악시오스는 “미국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중남미의 친구들을 중국에 뺏기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2차 핑크타이드 성공하려면

  • 중남미 유권자들은 극단적인 좌‧우 정권을 번갈아 선택하며 종잡기 어려운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사실 이들의 요구는 하나, 빈곤과 불평등의 해결입니다.

     

    문제는 어떤 집권세력도 경제 위기와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결과 유권자들은 선거 때마다 지난 정권을 심판하고 반대파에게 표를 주는 ‘반복된 심판’을 거듭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2012년 우고 차베스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오픈카를 타고 수도 카라카스 거리를 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현지 언론 네이션은 “군사 독재 정권에 지배받고 방치돼온 중남미에 좌파가 집권하면서 민주주의를 수용하고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매체는 “두번째 핑크 타이드가 성공하려면 첫 번째 개혁에서 실수하고 배운 것을 개선해야 한다”고도 조언했습니다.


    또다른 매체 LSE 역시 “과거로부터 배워야 한다”며 “새로운 좌파 정권은 참여 민주주의 강화와 동시에 차이를 용납하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해법 마련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돌아온 룰라가 중남미 최대 경제 대국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