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사람들

한동훈과 선두 다툰다…‘尹의 브레인’ 이원석

  • 윤석열 정부 초대 검찰총장이다. 1969년 5월 광주에서 출생했다. 뿌리는 광주이씨 집성촌인 전남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다. 명절 때 성묘하기 위해 봉천리를 자주 찾는 것으로 전해진다. 어려서 부친을 따라 광주와 경남 창원 등을 이사 다녔다. 고등학교는 서울의 유서 깊은 중동고를 나왔다. 1학년 때 전학 온 그는 서남 방언을 쓰는 쾌활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1987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1995년 제37회 사법시험에 합격, 1998년 사법연수원 27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 뒤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검사로 임관한다. 성실하면서도 근태관리에 철저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와 근무했던 전직 검사는 “굉장히 모범적인 바른생활맨이다. 어떤 일에서건 책잡히는 것을 싫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특수수사로 정평이 나 평검사 시절부터 굵직한 기업 수사에 참여, 명성을 떨치면서 윤석열 대통령 눈에 든다. 연수원 동기인 한동훈 장관과는 선두를 다투던 관계. 전 검찰 간부는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선의의 경쟁을 펼쳤던 거지, 라이벌로서 서로를 견제하거나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연합뉴스

     

    간부로 성장한 뒤에는 검찰 내 '윤석열 사단'의 참모로서, 윤 대통령의 굴곡진 궤적을 따라간다. 윤 대통령이 조국 전 법무장관 수사로 정권과 대립관계에 놓이면서 그 역시 좌천을 거듭, 제주지검장으로 발령됐을 때는 유배지의 선비처럼 제주 올레길을 산책하며 나라를 걱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윤 대통령 당선 후 검찰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여야를 겨냥한 사정 수사는 물론, 검수완박법으로 혼란한 검찰 내부를 수습해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국회에 제출했던 인사청문 요청안에 따르면 이원석은 본인과 배우자, 부모, 장남과 차남 등의 명의로 총 22억394만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부동산은 가족(본인·배우자·장남·차남) 명의로 서울 동작구에 아파트(10억699만원)를 신고했다. 부친 명의의 서울 서초구 아파트(6억200만원), 전남 보성군 토지(1446만원·228만원·186만원)를 신고했다. 자동차는 본인 명의로 2012년식 K5를 보유했다.

  • 이원석은 2000년 대전지검 서산지청, 2001년 부산지검 형사1부를 거쳐 7년 차인 2003년 서울지방검찰청에 발령 받는다. 임관 후 8년 안에 수도권에 진입하는 전형적인 출세 코스를 밟은 것. 실제로 이원석은 2002년 서산지청 검사일 때 일찍이 특수수사 능력을 인정받아 대검 중수부로 파견, 이른바 ‘한나라당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사건’ 수사팀에 참여한다. 2002년 대선 직전 5대 재벌이 한나라당에 수백억 원을 제공한 내용의 대형 사건이다. 검찰이 드림팀을 꾸리겠다며 수사에 일가견 있다는 전국의 특수부 검사들을 죄다 불러들여 사정 정국에 관심을 모았다. 다만 이때는 연수원 동기로 이원석과 선두를 다퉜던 한동훈 법무장관이 먼저 각광을 받았다. 공군 법무관으로 병역을 마친 탓에 이원석보다 임관 시기가 3년 늦었던 한 장관은 서울지방검찰청 초임 검사임에도 SK 측에게 대선 자금을 차에 실어 전달했다는 결정적인 진술을 받아냈기 때문. 이때 대검 중수부 검사였던 윤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중앙포토

     

    이원석이 윤 대통령의 눈에 든 것은 2005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로 발령되면서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 삼성 X파일 사건 등을 수사하던 이원석은 대검 중수부 검찰연구관이던 윤 대통령과 호흡을 맞췄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은 수사 초기부터 참여해 2007년 초까지 항소심 공소 유지를 맡았고, 1심보다 무거운 형을 끌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삼성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와 관련해 서울중앙지검 수뇌부와 갈등을 겪었지만 뚝심 있게 밀어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수원지검 특수부로 전보된 후에도 삼성 비자금 의혹 특별수사팀에 합류, 윤 대통령과 함께 사정의 칼날을 휘둘렀다.


    이원석은 특수통 검사로 명성을 떨쳤지만 기획과 정책 업무 능력도 겸비해 기획통 선배들에게서도 신임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혼맥이나 상류사회와의 연결로 출세 코스를 밟으려 하거나, 정치권에 대한 특수수사로 명성을 떨쳐보려는 일부 검사들과 달리, 피해자와 인권 보호에 관심을 갖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검사로서 어떻게 일조해야 할지 고심이 깊었다는 후문. 일례로 이원석이 2008년 법무부 법무심의관실로 자리를 옮기며 수사 일선을 떠났을 때다. 이원석은 한우 농가의 개방형 축사도 등기가 가능하도록 해 이를 담보로 영세 농민들이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축산특례법 마련에 주도적으로 움직였다. “농가 목소리를 들어야겠다”며 혹한의 날씨에도 현장을 다 챙겼던 노력에 이 법은 농업계에서 ‘이원석법’으로도 회자된다. 법무부 파견 당시 이원석을 지켜봤던 전 검사는 “본인만의 성실함과 능력으로 출세한 케이스다. 혼맥이나 상류사회와의 연결로 후광효과를 입은 여타 스타검사들과는 결이 다르다. 골프채 한 자루조차 없다지 않은가. 나무랄 데 없는 인격으로 선후배를 막론하고 주변 평판도 좋았다”고 말한다.

  • 이원석은 2011년 대검 중수부 검찰연구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간 기업 수사를 처리하면서 신속하게 환부만 도려내는 외과수술식 수사로 호평을 받았던 그는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 수사팀에 차출된다. 이때 대검 중수부 1과장이 윤 대통령이었다. 이들과 함께 이 사건을 기소한 전 특수부장은 이원석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때는 기자들이 부장검사실도 아무렇지 않게 출입해 사건 취재가 가능한 시기였다. 특히 중수부라고 하면 기자들이 단서 하나라도 얻고자 검사들을 상대로 술 약속을 잡으려고 난리였다. 하지만 이원석이 어떤 기자와 만났다거나 어디서 소주 한잔했다더라 하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잘 보이려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등의 과한 액션도 한 적이 없다. 조용한 말투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도 그 술 좋아하는 윤석열 선배가 아꼈다.”


    2014년 부장검사급 정기 인사에서 이원석과 윤 대통령의 명암이 엇갈린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둘러싼 논란으로 법무부 징계를 받았던 윤 대통령은 대구고검 검사로 좌천된 반면, 이원석은 대검 수사지원과장이 되며 전국의 특수수사를 관할하는 대검 반부패부장을 보좌한다. 


    @연합뉴스

     

    2015년 이원석은 대검 수사지휘과장에 발탁되는데 김후곤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과 친밀하게 지냈다. 비윤(非尹)으로 불리는 김후곤 부장은 이원석의 2년 선배다. 수사의 정도와 원칙을 지키고 직원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해 모범적인 검사라는 평판으로 이원석과 비슷한 면모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 사람은 지방 근무를 돌던 평검사 때부터 일 잘하기로 유명한 서로에 대해 익히 들었다고 한다. 이원석에게 이 시기는 현직 대통령을 수사하는 초유의 대형 사건이 터지기 직전 해로 폭풍전야와 같은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