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럴 해저드ㆍ투기 조장" 시끌

‘빚투’ 주식·코인 회생신청땐 빚 덜 갚는다?

  • 보도자료 캡쳐

    서울회생법원이 그런 취지의 지침을 발표한 게 맞습니다. 최근 주식과 암호화폐 폭락 사태로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앉은 많은 사람들에겐 희소식이죠. 


    서울회생법원은 "7월 1일부터 개인회생을 신청할 때 가상화폐(암호화폐)나 주식 투자로 발생한 손실금은 채무자가 향후 갚아나가야 할 변제금에 포함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실무 준칙을 시행한다고 밝혔습니다. 


    간단히 말해 개인회생을 하면 빚투('빚내서 투자') 실패로 본 주식·코인 투자 손실을 사실상 탕감해준다고 발표한 겁니다. 은행 빚을 내서 주식이나 코인을 샀다가 폭락해 엄청난 손실을 본 이들의 경우 '빚투'한 대출금 전체가 아닌 폭락 이후 현재 시세만큼만 갚으면 되기 때문에 재기의 활로(活路)가 생긴 겁니다.

     

    서울회생법원이 이런 방침을 내놓자 지방 투자자들은 "지역 차별"이라며 망연자실하기도 하고, 다른 쪽에선 "법원이 '빚투'를 조장하는 것 아니냐"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죠. 이 대책, 정확히 어떻게 봐야 하는 건지 개인회생 제도부터 뜯어보겠습니다.

  • '개인회생'이란 당장 빚 부담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앞으로 일정한 소득이 계속 들어올 사람을 구제하는 제도입니다. 빚이 재산보다 많고,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수입이 있다는 조건입니다. 이럴 경우 개인 회생을 신청해서 3~5년간 약속한 금액만큼 수입의 일부를 꾸준히 법원에 갚아나가는 건데, 기간을 다 채웠다면 나머지 빚은 탕감됩니다.

     

    예를 들어 월 소득이 200만원인 사람에게 빚이 1억원이 있다고 가정해볼까요. 이 사람은 소득 200만원에서 법정 최저생계비 약 120만원을 제외한 80만원을 3년간 법원에 변제하기로 합니다. 80만원을 3년간 내면 약 3000만원 정도가 되겠죠. 그럼 1억원에서 3000만원을 뺀 7000만원은 탕감받는 겁니다.

     

    근로 능력이 없거나 최저생계비도 못 버는 경우에 최후 수단으로 신청할 수 있는 '개인파산'과는 좀 다르죠. 개인파산의 경우 남은 재산을 다 처분해 전체 채무 중 갚을 수 있는 만큼 갚고, 남은 빚을 한꺼번에 탕감받는 일종의 '빚잔치' 방식입니다.

  • 개인회생을 신청하려면 재산보다 빚이 더 많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요. 회생을 신청한 사람이 법원에 갚기로 약속한 돈은, 지금 가진 재산을 모두 현금화한 가치보다 많거나 같아야 합니다. 이를 '청산가치 보장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아파트나 땅, 예금 등 자산이 많은 사람이 채무 변제 부담을 회피하려고 개인회생 제도를 악용하는 걸 막기 위해서입니다. 스스로 최대한 빚을 갚기 위한 노력을 다 한 사람만 개인회생을 이용할 수 있게 한 거죠.

     

    그럼 개인회생 신청한 사람 입장에선 지금 가진 재산을 어떻게 환산하느냐, 즉 청산가치를 어떻게 계산하느냐가 중요해지겠죠. 청산가치가 늘어날수록 법원에 갚아야 할 돈도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청산가치 보장의 원칙'에 따라서 청산가치가 갚아야 할 빚의 하한선이 되는 셈이니까요.

     

    예를 들어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아파트가 있다면 청산가치를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요? 법원은 현재 부동산 시세 금액에서 대출금을 뺀 나머지 금액을 청산가치로 봅니다. 만약 개인회생을 신청한 사람의 배우자 명의로 아파트가 있다면 청산가치를 반으로 자르기도 하죠.

  • 다시 서울회생법원이 내놓은 대책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전에는 주식이나 암호화폐로 잃은 돈을 포함한 대출금 전체를 청산가치(보유 재산)에 반영해 갚도록 했는데, 앞으로는 손실은 거기서 빼주겠다는 게 골자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5000만원의 빚을 내서 주식과 암호화폐에 몽땅 넣은 투자자가 있습니다. 주식과 암호화폐의 가치가 폭락해 4900만원을 손실 보고 현재 가치는 100만원 정도가 됐다고 해 보죠. 이 사람이 개인회생을 신청할 경우, 법원은 대출금 5000만원 전체를 재산으로 봐 왔습니다. 청산가치 보장 원칙에 따라 현재 재산 5000만원 이상의 빚을 법원에 갚아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서울회생법원에서 실무준칙을 개정하면서, 코인의 현재 가치인 100만원만 재산으로 보겠다고 한 겁니다. 자연스레 매달 법원에 갚을 돈은 훨씬 적어지겠죠.

  • 커뮤니티 캡쳐


    최근 암호화폐·주식 폭락 사태로 빚더미에 앉은 투자자들이 쾌재를 부른 것과 달리, 일확천금을 노려 '투기'한 걸 탕감해주냐는 비판도 거세게 나왔습니다. "월급 아껴 저축하며 착실하게 사는 사람이 제일 바보다", "법원이 코인 투기를 조장한다", "이제 생계형 채무가 아닌 '빚투'까지 탕감하나"란 비판인데요. 법과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 이익은 챙기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도덕적 해이'라고 하는데, 이번 지침이 이런 현상을 집단적으로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크긴 합니다. "개인회생을 신청하면 된다"며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투자를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거죠.

     

    형평성 논란도 있습니다. 우선 서울회생법원만 이런 지침을 내놨다 보니, 지방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지역 차별'이라는 섭섭한 목소리도 나옵니다. "서울에 원룸이라도 구해 주소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나오네요. 물론 법원에서는 이같은 '법원 쇼핑'을 가려내고 있습니다.

  • 사진 연합뉴스


    서울회생법원도 할 말이 많습니다. 앞서 부동산 재산의 경우에도 청산가치를 계산할 때 대출금은 뺀다고 말씀드렸죠. 다른 보유 자산과 같은 기준을 적용한 거지, 주식이나 암호화폐 투자자들에게만 특혜를 제공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지나치게 무리하게 투자를 한 건 아닌지 여부도 개별 재판부가 판단할 것이고, 투자에 실패한 것처럼 속이고 재산을 은닉하는 경우도 가려내겠다고 했습니다.  

     

    "사실상 도박하다 날린 돈에 개인회생을 받아주는 게 말이 되느냐" 하는 비판에는 이렇게 답합니다. 개인파산과 달리, 개인회생은 낭비나 도박으로 빚이 늘어난 사람도 신청할 수 있거든요

     

    이런 대책까지 나온 데에는 일선 판사들이 현장에서 느낀 위기감도 작용했다고 합니다. 2030 청년층이 빚을 내 무리하게 투자하다 회생법원을 찾은 사례가 급증하다 보니 실무 TF까지 꾸려졌다고 하는데요. TF에서 이들의 케이스들을 살펴보니 대출원금 이상의 빚을 갚으라고 하는 건 거의 파산과 다름없다는 거죠. 차라리 빨리 빚을 털고 사회에 나가서 일하는 게 결과적으로 낫다는 겁니다.

  • 사진 대법원


    사실 도산법 전문가들도 회생법원과 비슷한 입장입니다. 이들은 개인회생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합니다. 회생으로도 손을 쓸 수 없어 완전히 파산하게 되면, 돈을 빌려준 은행은 물론 돈을 빌린 개인도 모두 나락으로 간다는 건데요. 차라리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줘서 회생으로 가는 게 은행이나 개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현재 법원을 찾는 투자자들의 대출금까지 모두 재산으로 계산해 무리하게 부담을 지우면 파산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고, 결국 이들에게 또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는 취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