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티넘 주빌리 맞은 최초의 英 국왕

엘리자베스 2세 즉위 70년 동안 일어난 일

여왕만 70년…그동안 한국은 이승만~윤석열 시대

  •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서거 소식을 알리는 런던 시내 전광판. [EPA=연합뉴스] 


    "런던 브릿지가 무너졌다" (영국 왕실 내부에서 여왕의 서거를 이르는 말)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영국 국왕 중 처음으로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티넘 주빌리'를 치르고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영국 왕실에 따르면 엘리자베스2세 여왕은 이날 오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밸모럴성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생에 대부분의 여름을 보냈던 스코틀랜드의 영국 왕실 사유지입니다. 여왕의 서거 직후 찰스 왕세자는 국왕에 즉위했습니다.


    서거 이튿날부터 영국 왕실은 '유니콘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여왕이 런던이 아닌 장소에서 서거할 경우를 염두에 두고 짜여진 작전입니다. 이에 따라 여왕의 시신은 꽃에 둘러 쌓인 채 밸모럴성에 머물다 11일 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에 있는 여왕의 거주지 홀리루드로 옮겨진 뒤, 12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성 자일스 대성당까지 장례행렬과 함께 이동합니다. 12일 밤 여왕은 왕실 기차로 옮겨져 런던으로 밤새 천천히 이동, 13일 버킹엄궁에 도착해 14일 버킹엄궁 웨스트민스터홀에서 짧은 예배를 마친 뒤 나흘 간 일반인 조문을 받습니다. 장례식 마지막 날인 19일 여왕은 윈저성에 안치됩니다. 열흘이 소요되는 이 과정에는 수많은 총포 소리와 애국가 연주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 1953년 6월 2일, 영국 버킹엄궁에선 스물 다섯살 영국 군주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엘리자베스 2세의 본명)의 여왕 대관식이 열렸습니다. 그 전해 부친 조지 6세가 서거한 날 즉위했지만, 선왕의 서거에 애도 기한을 두는 왕실 전통에 따라 대관식은 16개월 뒤에 이뤄졌습니다. 70년이 지난 지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여전히 영국의 최장수 재위 군주로 왕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 2일(현지시간) 여왕의 즉위 70주년(플래티넘 주빌리)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영국 전역에서 시작됐습니다.  



    플래티넘 주빌리 행사는 영국 왕실 역사상 처음입니다. '70년 재위'는 1000년 가량 이어진 영국 선대 왕 중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죠. 엘리자베스 2세 이전까지 최장수 재위 기록은 그의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었습니다. 63년 7개월 간 재임해,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까지 치렀습니다.세계 군주정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리히텐슈타인의 요한 2세 대공 등만이 재위 70년을 넘겼습니다. 조선시대 최장수 재위 군주인 영조의 재위 기간은 52년이었습니다.


    '영국인 가장 사랑하는 왕족'인 여왕의 경사에 온 나라와 영연방도 축제 분위기로 들썩입니다.국민들은 마치 여왕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이번 행사를 각별하게 여기며 화려한 축제를 준비했습니다. 런던 시내뿐 아니라 동네 구석구석까지 유니언잭(영국 국기)이 펄럭이고, 여왕 사진도 곳곳에 걸렸습니다.
     

    '플래티넘 주빌리' 세대라는 용어도 등장했습니다. 여왕이 즉위한 1952년에 태어나 올해 70세가 된 영국인을 통칭하는 용어(영국 싱크탱크 재정연구소)입니다. 이들이 영국 전후 역사상 가장 부유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삶은 '살아있는 현대사' 그 자체입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여왕이 열세살이던 1939년, 유럽 전역을 전쟁터로 만든 2차 대전이 발발합니다. 아버지 조지 6세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비는 "캐나다로 대피하라"는 총리의 제안을 거절하고 영국을 지킵니다. 이듬해 1940년 전쟁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위해 14살 릴리벳 공주(엘리자베스 2세 여왕 공주 시절 애칭)는 라디오 연설을 합니다. "우리는 용감한 군인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험과 슬픔을 스스로 감당해내고 있고요. 결국 모든 것은 잘 될 것입니다"라고요.



    1945년 18살이 된 공주는 아버지로부터 입대 허락을 받아, 영국 육군 여군 조직(Auxillary Territorial Service· ATS)에 입대했습니다. ATS는 후방 병참 지원을 하며 335명의 전사자가 나온 곳입니다. 릴리벳 공주는 이곳에서 운전병·정비공으로 복무했습니다. 현역 입대한 최초의 왕실 여성이란 타이틀도 갖게 됩니다. 이런 경험으로 그는 운전을 즐기고 엔진을 직접 수리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여왕 즉위 이후, 1965년 그의 첫 서독 방문은 2차 대전 후 영국과 독일의 화해를 상징합니다. 1997년 대영제국의 종말로 평가된 홍콩의 중국 반환을 지켜보며 제국의 끝을 지킨 군주이기도 합니다.

    2014년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투표 사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영국의 미래가 달린 최근의 굵직한 사안들도 모두 겪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역사적 순간마다 구심점이 되어준 그를 '마음의 여왕(Queen of Heart)'로 여기고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의 정치학 교수인 버넌 보그대너는 "여왕은 영국인의 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신을 본능적으로 이해한다"라고 말했죠.

  •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윈스턴 처칠(1874~1965)부터 현재의 보리스 존슨까지 총 14명의 총리와 함께 했습니다. 여왕은 매주 화요일 총리를 만나 현안에 대해 보고 받으면서도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가렛 대처(1925~2013) 총리 당시에는 때로 정책적 이견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죠. 전기 작가 키티 켈리의 책 『로열스』에 따르면, 여왕과의 독대 전후 대처 총리는 항상 두통약을 찾았다고 합니다. 여왕은 미국 대통령과도 해리 트루먼(1884~1972)부터 조 바이든까지 14명 중 린든 B.존슨(1908~73)을 제외한 모든 이와 만남을 가졌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이승만(1875~1965)부터 윤석열(62)까지 모두 여왕의 시대에 집권했습니다. 영국을 방문해 여왕을 직접 만난 한국 대통령은 5명(전두환·노태우·김영삼·노무현·박근혜), 김대중(1924~2009) 대통령은 1999년 여왕의 방한 당시 그를 맞았습니다. 당시 경북 안동에서 73세 생일상을 받았는 데 이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주영 한국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생일상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지요. 안동시는 지금도 매해 여왕의 생일에 맞춰 안동 사과를 영국 왕실로 보내고 있습니다. 

'킹스 스피치'부터 '오프라 윈프리 쇼'까지…여왕의 가족사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애초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선대 왕의 둘째 아들이었고, 후계 서열 1위 왕세자는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였습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8세가 즉위 직후, 미국의 평민 출신 이혼녀 월러스 심프슨 부인과 사랑에 빠지는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위를 버렸습니다. 조지 6세는 심한 말더듬증을 갖고 있었지만, 형의 빈자리를 채워 왕위에 올랐고 나치 독일과의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를 주제로 한 영화가 '킹스 스피치'입니다. 그는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남편 필립공과 영연방국인 아프리카 케냐를 방문 중이던 25세의 공주는 예상보다 일찍 왕관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죠. 그의 대관식은 BBC 최초로 야외에서 TV 생중계 됐으며, 전세계 2500만명이 지켜봤습니다.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 지난해 4월, 여왕은 남편 필립공(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 윈저·1921~2021)과 작별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둘의 첫 만남은 1934년 엘리자베스 2세가 '릴리벳 공주'로 불리던 8살일 때 왕가의 한 결혼식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리스의 몰락한 왕족이었던 필립도 하객으로 결혼식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2차 대전 중인 1939년 두 번째 만남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공주는 다트머스의 왕립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다가 안내를 맡은 1등 생도 필립를 만나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했고, 필립이 2차 대전에 참전해 태평양 전선에 있을 때도 서신 교환이 이어졌습니다. 전기 작가에 따르면 13세의 릴리벳 공주는 18세의 필립을 만난 이후 다른 남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편지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난 뒤 1947년 결혼에 골인합니다. 이와 함께 필립은 영국으로 귀화해 마운트배튼이라는 영국식 성을 취득했습니다. 결혼 한 해 전 필립이 공주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은 이렇습니다. "승리를 맛보며 전쟁에서 벗어나고, 쉬면서 나와의 시간을 보내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사랑에 빠지니 모든 개인적, 심지어 세상의 어려움까지 작고 사소하게 느껴진다."

  • 영국인들이 여왕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순간은 1997년 '다이애나비의 죽음'이었을 겁니다. 가뜩이나 여왕의 장남인 찰스 왕세자의 외도, 결혼 생활의 파경 소식에 왕실의 권위를 땅바닥에 떨어진 때였죠. 이혼한 다이애나비는 이듬해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 기간 동안, 여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다 비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여왕은 장례식 마지막 날 다이애나비의 관에 고개를 숙였고, TV 연설을 통해 "(소식을 들었을 때) 상실감을 표현하기 쉽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왕이자 할머니로서, 탁월하고 재능 있으며 타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두 아들에게 헌신적이었던 다이애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해 비판 여론을 잠재웠습니다.
     

    다이애나비의 아들이자, 여왕의 손자인 해리는 부인 메건 마클의 왕실 부적응을 이유로 왕실과 절연하기까지 했습니다. 마클은 미국 CBS의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왕실에서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한 바 있죠. 


    여왕이 가장 아끼는 왕자로 알려진 차남 앤드루가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으로 고소당하자, 왕실 입지가 흔들렸습니다. 여왕은 지난 1월 앤드루 왕자의 군 직함과 왕실 후원 자격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찰스 왕세자만 53년'… 여왕 이후 왕실의 미래는


  • 대영제국의 끝자락에서 영연방을 물려받은 엘리자베스 2세의 임무는 영국 왕실을 현대 사회에 연착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왕실의 전통을 고수하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총리 임명권자이지만 의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의회 시정 연설에서도 총리실에서 작성한 원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고 '식물 왕실'을 만들진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 외교 선봉에 나서서 세계 여러 나라와 영국의 우호 관계를 다지면서 왕실의 권위와 역할을 알렸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을 통틀어 6개 대륙 110개국 이상을 방문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여행한 군주로 등극했습니다.



     
    몰락한 그리스 왕가 출신인 필립공의 도움도 컸습니다. 그리스 왕가의 전복을 목격한 그는 영국 왕실의 현대화에 적극 나섰고, 왕실 다큐멘터리 제작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8월, 95세의 나이로 공적인 삶에서 은퇴할 때까지 수많은 행사에 참석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현판 제막 기계'(plaque-unveiler)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 지난해 코로나19를 앓은 뒤 고령인 여왕의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진 뒤 '여왕 이후의 왕실'에 대한 전망이 영국 언론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를 살펴보면 왕실의 미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장남 찰스 왕세자(74)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지도는 여왕과 견줄 바가 못됩니다. 심지어 자식인 윌리엄 왕세손보다 인기가 없습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여왕의 승하 이후 그를 계승할 인물로 찰스 왕세자를 꼽은 응답자는 전체의 32%에 그쳤지만, 윌리엄 왕세손의 즉위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는 78%였습니다.



     

    이혼과 재혼 경력도 그의 비호감도를 높이는 데 한몫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는 정치적 성향을 숨기는 데 서툴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1948년생인 찰스 왕세자는 1969년(당시 21세) 공식 왕세자로 책봉된 뒤, 왕위 대기 기간만 53년째입니다.  

     

    아직 '대세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국인들 사이에서 '왕실 폐지론'도 점점 힘을 얻는 분위기입니다. 영국 여론조사 업체 유고브에 따르면, 군주제를 지지하는 비율은 75%(2012년 조사)에서 62%로 감소했습니다. 특히 젊은 층에서 군주제에 대한 지지도는 빠르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2011년 유고브 조사에서 18~24세 응답자의 59%는 군주제가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최근에는 그 비율이 33%로 떨어졌습니다.


     

    군주제 폐지 운동 단체 리퍼블릭은 최근 "여왕이 승하하고 나면 영국 왕실은 껍데기만 남을 것"이라며 "찰스 왕세자가 최선이 아니며, 우리가 국가원수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죠. 영국 언론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여왕의 건강에 달렸다"면서 "왕실이 영국인의 신뢰와 존경을 되찾을 기회 없이 여왕이 갑작스레 승하하면, 영국 왕실은 스스로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96세 여왕의 '플래티넘 주빌리'를 축하하는 영국인들에게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