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2-27 18:13:34
수정 2018-02-28 18:34:31
'식모' 없는 서울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1960~1970년대 서울의 두 집 중 한 집에선 식모를 뒀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은 물론 단칸 셋방살이, 판잣집 살림에서도 너도나도 식모를 두고 있다”거나, “밥만 굶지 않고 사는 서울의 가정이라면 모두 식모를 두어야 하는 것"이라며 세태를 묘사하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소녀들은 남의 집 부엌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하곤 했습니다. 이른 새벽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식구들이 다 들어온 후 문단속까지 마친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던 그들은 도시의 가정 살림을 움직이는 동력이었고, 농촌의 경제를 일부 지탱하는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공이 산업 일꾼으로 인정받았던 것과는 달리 '사적인 영역'으로 분류된 이들의 존재는 언제나 그늘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한 달 담뱃값에 식모를 두다
영자는 가난한 시골 농삿집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농삿집이라야 밭 두 뙈기뿐이어서 굶기를 밥 먹듯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로 식모살이 온 것은 오로지 배불리 먹어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식모살이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영자의 전성시대』
1960년대 경제개발이 궤도에 오르면서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도 심화합니다. '한 입'이라도 줄여야 했던 시대, '딸'들은 떠밀리다시피 서울로 향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매년 50~70만명의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됐는데, 이중 상당수가 15~19세 사이의 어린 여성들이었습니다. 서울역에 나타난 이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조그마한 봇짐을 들었고, 반드시 ‘서울시 OO구 OO동 OO번지’라고 적힌 쪽지를 지녔다” (무서운 서울역전: 무작정 상경 그 뒤를 따라가 보면,『여성동아』 1월호)고 묘사되곤 했습니다.
학력이 낮고, 특별한 기술이 없는 데다 사회진출에 각종 제약이 뒤따랐던 여성들이 택할 수 있었던 만만한 직업이 바로 식모였습니다.
이런 상황엔 경제 성장에 비해 낮은 인건비 등이 한몫을 했습니다. 아래는 1968년 서울 4인 가정의 월 가계부 내역 관련 기사를 재구성한 그래픽입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식모의 월급은 한 달 담뱃값과 동일한 수준이었습니다.
서울 아파트 평면에 반영된 식모 방
대도시의 가정에서는 식모를 두고 있었는데, 서울은 52.9%, 부산은 33%, 대구는 30%, 진주는 12%로 조사되었다. - 경향신문 1969년 10월 13일자
도시에 얼마나 식모들이 많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식모 방’입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30평대 이상 아파트 설계도면에는 식모 방을 끼워 넣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겨우 2평(6.6㎡) 남짓, 반드시 부엌을 통해서만 외부로 이동할 수 있는 고립된 공간이었습니다.
식구인 듯 식구 아닌 존재
자기네는 전부 방에서 먹는데 나만 부엌에 혼자 앉아 덜덜 떨면서 먹어야 했다. … 밤에는 열두시나 되어야 겨우 바닥에 등을 붙이게 될까 한데 새벽 다섯 시가 되기가 무섭게 깨워댔다. - 윤정용, 『식모살이 가기 싫어서 시집갔는데: 신을 받은 여자』
아줌마들이 나 같은 애들을 이름 대신 ‘우리 계집애’, ‘그년’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픈지 모른다 - 이혜현, 『가난도 죄인가』중 '식모살이는 고달파'
낮은 학력과 나이, 그리고 종속적 고용 관계 등은 식모들에 대한 인격 무시로 이어졌고 이와 관련된 각종 사건 사고가 신문 지상을 뒤덮기도 했습니다. 어린 식모 혼자 집을 지키다 강도를 당해 목숨을 잃는 사건도 있었고요.
식모들의 수난도 끔찍하다. 주인아주머니의 물품을 훔쳤다고 사형해 죽인 일, 5~6년이나 열심히 일했건만 한 푼도 못 받고 그 집에서 내쫓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중앙일보, 1966년 1월 13일자 ‘가정교사와 식모수난’
그런데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 이들은 식모살이를 쉬이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부모 형제는 식모살이해 번 돈으로 생활을 꾸려가면서도 미안해하기보다는 딸의 희생을 당연시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 1960~1970년대 문학과 영화에는 식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쏟아져나오기도 했습니다.
너한테만 하는 얘기다마는 가능한 한 빨리 식모살이를 집어치워라. 그게 어디 인간으로서 할 짓이냐… 그건 그렇고 지금 내가 꼭 필요한 데가 있어서 그러니 돈 3천원만 부쳐다오. - 최일남,『가을 나들이』
하지만 주부가 살림할 줄 모르고 식모에게 모든 걸 맡긴다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서울 YWCA에서 『식모 없이 사는 법』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열기도 했죠. 반면 대가족은 집안일이 많아서, 핵가족은 집 지킬 사람이 필요해서 식모는 꼭 있어야 한다는 항변도 만만찮았습니다.
그 많던 식모는 어디로 갔을까
이랬던 분위기는 7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바뀝니다. 식모도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됩니다. 여기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①기술의 발전
과거 식모들이 했던 업무 중 많은 것들이 세탁기, 가스레인지 등 가전제품들로 대체되기 시작했습니다.
②임금 상승
여기에 급격한 산업화로 일자리가 많아지면서 임금도 높아져 일반 가정이 감당하기엔 어려워졌습니다. 농촌 여성들 또한 교육 수준이 올라가면서 더는 ‘하녀’ 같은 대우를 받는 식모를 찾지 않게 됐습니다.
③식모 대신 가정부
정부와 YWCA를 중심으로 ‘시간제 가정부’ 전환 운동이 고양된 것도 한 요인이 됐습니다. YWCA는 1966년부터 가정부 교육을 자체적으로 시행해 소속 회원 가정에 파견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YWCA가 만든 자료에는 '8시간 노동', '일요일 휴무', '연 1주일 휴가', '연 200% 상여금 및 퇴직금 지급' 등을 명시해놓기도 했습니다. 또한 해당 가정에도 "첫째로 나는 가정부가 나의 예속물도 아니고 하인도 아니며 한 '근로인'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대우하려고 노력해 본다"는 다짐을 하도록 권유하는 등 권리 향상에 많은 애를 썼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따라 1980년대부터는 봉순이 언니나 영자처럼 함께 거주하는 미혼 여성들이 아니라 출퇴근하는 파출부 아주머니의 시대로 바뀝니다.
식모는 10대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1987년 조사 결과에 의하면 가정부의 평균 나이는 45세로 올라갑니다.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가사는 사적 영역이라는 인식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수요도, 종사자 수도 많지 않아 이를 전문직업화하는 데는 유보적인 분위기였죠.
IMF 이후 가사노동 시장으로 대거 유입
하지만 IMF 경제위기 이후 분위기가 바뀝니다. 해고와 대량실업,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비정규직 양산, 그로 인한 빈곤층의 발생. 그리고 이혼율 증가로 여성 가장이 늘면서 식모, 파출부, 가사노동자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집니다. 주부들의 경제적 독립에 대한 분위기도 고조됩니다. 아이들 학원비를 보태거나 해외여행 경비 모으기, 각종 모임 비용 충당 등을 위한 부업으로도 활용됩니다.
수요층도 확대됩니다. 기존엔 영세 중개업체에 상당 액수의 가입비를 내야 소개를 받을 수 있어 일회성 서비스를 받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가사도우미와 수요자를 모바일 앱으로 연결해주는 O2O(온라인 투 오프라인)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비정기적으로 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1인 가구 등 젊은 층이 대거 유입된 것이죠. 언제까지나 가사서비스를 비공식으로 내버려 두기 보다는 공식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산업으로 양성해 세금을 거두는 게 합리적이라는 계산도 나옵니다.
이런 배경에서 정부는 1월 27일 ‘가사근로자 고용개선 법률 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고용보험을 비롯한 4대 보험을 적용받게 되고, 근로기준법과 같은 노동관계법의 권익도 누릴 수 있습니다. 현재 국회 계류된 이 법안은 통과되는 대로 1년 유예 기간을 거쳐 시행됩니다. 이에 대한 당사자들의 생각은 어떨까요.
기획·취재=이경희·유성운·조혜경 기자
디자인=김은교·임해든, 유채영·장희정 인턴
영상=왕준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