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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학의 기원이자 넘보기 힘든 ‘아이디어 뱅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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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호 25면

호메로스의 초상은 기원전 460년께부터 나타난다. 보통 얼굴이 길고 볼에 살이 없는 모습으로 형상화됐다.

‘웨스턴 캐넌(Western Canon)’은 서구 최고 명작들의 목록을 일컫는 말이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작품들이다. 수백 권에 달할 수 있는 작품 중에서도 3대 작품은 유대교·그리스도교의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다. 불과 100년 전 호메로스를 읽지 않고서는 지성인 축에 끼지도 못했다. 지금은 문학 전공자도 호메로스를 안 읽어도 되지만 말이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26> 호메로스

흔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서구 문명의 두 원천이라고 이야기한다. 호메로스는 헬레니즘의 원천이다. 호메로스는 원천의 원천인 것이다. 합쳐서 2만8000줄에 달하는 일리아스오디세이아킹제임스 영역 성서(1611)가 영국에 수행한 것과 같은 구실을 고대 그리스에서 했다. 언어의 스탠더드였다. 표준이 성립되자 문화와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호메로스는 서구 문학, 특히 전쟁 문학, 귀향(歸鄕) 문학의 기원이다. 오즈의 마법사율리시즈의 원전이다. 기원일뿐만 아니라 좀처럼 넘보기 힘든 아이디어 뱅크다. 학자들은 말한다. 여신 아테나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다 자란 모습, 중무장한 모습으로 튀어 나온 것처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도 완벽한 문학 작품으로 탄생했다고….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기원전 525~456)는 이렇게 말했다. “내 희곡은 호메로스라는 향연의 음식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호메로스 작품에는 모든 게 있다. 폭력, 복수, 우정, 불륜…. 노골적인 성애 장면은 없지만 팽팽한 성적인 긴장감이 있고 섬세한 인물 묘사가 있다. 남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도 현대의 주말 연속극 못지않게 포착했다. 영원한 젊음과 생명을 약속하는 미인을 뿌리치고 조강지처와 아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향하는 영웅도 있다.

고대·중세·현대 아우른 애독서 남겨
인도를 제외하고 당시 고대 세계의 서양과 동양 전체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에게 일리아스는 병법서였다. 잘 때 항상 일리아스를 베개 밑에 두고 잤다. 알렉산더 대왕은 일리아스에 나오는 아킬레스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고대 그리스도 교회의 교부들인 성 히에로니무스(?347~?419)와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내용상으로 너무나 훌륭한 호메로스의 작품들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혹시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많이 어긋나기도 하는 호메로스의 작품이 살아남은 이유는 오로지 그 작품성을 사랑한 민(民)과 지식인들의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도 호메로스는 대히트였다. 중세 바그다드의 학자들은 일리아스오디세이아를 암송할 수 있었다. 고전기뿐만 아니라 비잔틴 제국의 학생들도 일리아스오디세이아로 그리스어 문법을 배웠다. 그들은 호메로스를 통해 말과 글로 남을 설득하는 법을 배웠다.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현대 세계에서 호메로스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트로이’(2004년)는 2억 달러 제작비를 들여 5억 달러를 벌었다. 일리아스가 원전이다. 명감독 스탠리 큐브릭(1928~99)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는 호머의 오디세이아에 바치는 오마주(hommage)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7, 8세기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 시인이다. 그러나 그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회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호메로스에 대한 전기 10편은 모두 위작일 가능성이 크다. 고대 문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맹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원래 안과 질환이 있었는데 여행 중 실명한 것으로 그려진다. 한 가지 더, 비교적 확실한 것은 호메로스가 사용한 말이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어였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나 신약성경의 그리스어와도 다른 말이다.

호메로스는 ‘인질(hostage)’이라는 뜻이다. 태어난 곳은 알 수 없다. 많은 도시가 자기네가 호메로스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그가 바빌로니아 사람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호메로스는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출신도 알 수 없다. 미천한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로마 오현제(五賢帝)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는 호메로스가 오디세우스의 손자라고 믿었다.
젊었을 때 호메로스는 지중해 지방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는 에게해에 있는 이오스 섬에서 사망했다. 자신이 지었다는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여기 거룩한 호메로스의 머리를 흙이 덮고 있다. 그는 영웅들을 찬양한 사람이었다.”

모든 떠돌이 시인의 아버지
그의 직업은 음유시인(吟遊詩人)이었다. 이곳저곳 유력자들이나 잔치를 찾아 떠돌아 다니며 수금(竪琴·lyre)에 맞춰 시를 낭독했다. 호메로스는 중세 유럽에 나타난 남프랑스의 트루바두르, 북프랑스의 트루베르, 독일의 미네젱거의 대선배다. 서양 문학사에서 음유시인이라는 직종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셰익스피어(1564~1616)는 ‘에이번의 음유시인(The Bard of Avon)’이라 불렸다.

음유시인은 고달픈 직업이었다. 사실상 걸인에 가까웠다. 후세 사람들은 호메로스를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그의 삶도 ‘풍족’하게 만들어줬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호메로스가 시인학교 교장이 됐으며 수많은 도시들이 앞다퉈 그에게 명예시민권을 줬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기원전 65~8)는 그의 시론(Ars Poetica)에서 “그 훌륭한 호메로스도 꾸벅꾸벅 졸 때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우리 속담을 연상시키지만 심각한 학술적인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죽었던 인물이 버젓이 살아 맹활약하는 경우가 발견된다는 말이다. 호라티우스가 발견한 것처럼 호메로스의 작품에는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근대 세계에서 호메로스 작품에 나타난 이런 모순은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호메로스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근거를 제공했다.(서구 학자들이 호메로스를 보는 시각은 모세를 보는 시각과 기본적인 구조가 같다. 일리아스오디세이아의 저자는 호메로스가 아니며 모세5경의 저자는 모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호메로스나 모세나 실존 인물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이냐, 셰익스피어가 셰익스피어 작품들의 작가가 맞느냐 하는 논란과 닮은꼴의 논란이다. 지루한 싸움에 지친 영국 작가 모리스 베어링(1874~1945)은 이렇게 말했다. “일리아스오디세이아를 지은 사람은 호메로스가 아니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의 다른 사람이다.”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편집과 창작의 천재였다는 것이다. 그는 수백 년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내려온 음유시인들의 ‘작품’을 집대성해 통일성을 부여하고 자신의 창작을 덧붙였다.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페니키아 문자의 영향하에 그리스에 알파벳이 도입되자마자 문자화됐다. 아마도 파피루스에 기록됐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오디세이아의 문자화를 위해 그리스 알파벳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는 문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문자를 갖게 된 그리스인들이 받은 최초의 선물은 일리아스오디세이아였다. 호메로스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말의 세계에서 글자의 세계로 넘어가는 시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유물들이 알려주는 8세기 그리스 문화와 일리아스오디세이아에 나타난 생활상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왕이라기보다는 아직은 ‘추장’이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 지도자들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여성이 부족한 사회였다. 그리스 남성들이 여러 명의 처를 둔 것은 아니었지만 ‘성노예’들을 여럿 뒀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만 해도 50명의 여성 노예들을 거느렸다. 거의 모든 전쟁은 여성을 약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힘없으면 장가를 못 가고 총각으로 늙어 죽는 세상이었다.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호메로스는 패권 경쟁과 밀접하다. 로마가 일리아스오디세이아를 나름대로 소화한 결과로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의 작품 아이네이스(Aeneid)가 나왔다(베르길리우스는 전쟁에서 진 트로이 사람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해 로마인들의 조상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슬람·비잔틴 세계에 밀리던 서부 유럽은 호메로스를 다시 중시하면서 전 세계를 향한 정복의 기틀을 닦았다. 서부 유럽에서 잊혀졌던 호메로스가 다시 부활한 것은 15세기 이탈리아에서다. 1488년 최초로 인쇄본이 나왔다.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는 호메로스를 번역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평생 돈 걱정을 하지 않게 됐다. 그만큼 호메로스는 당시 서유럽에서 뜨거운 화두였다.

국제어로서 프랑스어가 영어에 밀리게 된 것도 호메로스를 둘러싼 치열한 ‘번역 전쟁’에서 밀린 결과다. 프랑스어로 된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수십 종, 영어로 된 것은 수백 종다. 대략 5년에 한 번씩 참신하거나 원전에 충실한 일리아스오디세이아가 발간되는 같은 영미권 내에서도 영국보다는 미국의 호메로스 번역 작업이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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