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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수의 세상탐사] 대선판 ‘전라도 아리랑’과 탕평 인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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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호 31면

호남과 전라도. 같은 뜻이지만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 두 단어 뒤에 붙을 말들을 연상해 보면 금방 차이가 드러난다. 길거리나 TV 드라마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들리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게 호남 사람이다. 지역 차별의 한(恨)과 앙금이 남아선지 모른다. 50대 이상의 호남 출신들에겐 아직도 ‘전라도 고개’라는 은어가 흘러 다닌다. 직장에 취직할 때나 결혼·사업을 할 때 ‘전라도 딱지’ 때문에 겪었던 고생담을 저마다 가슴에 품고 있어서다. 이를 악물고 자식 교육에 매달리는 이유일 게다.

역대 대선에서 호남은 늘 주시 대상이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 호남은 선거 때마다 ‘인민투표’에 가까운 몰표를 던졌다. DJ의 3전4기 신화는 호남이라는 견고한 성(城)이 있어서 가능했다. 전국에 흩어진 호남 출신 인구는 전체 유권자의 25% 안팎이다. 2002년 ‘노무현 바람’이 불었을 때 호남은 똘똘 뭉쳤다. 반면 호남 후보가 나선 2007년 대선 때 호남 출신 상당수는 기권을 하거나 이명박(MB) 후보를 찍는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그 책임은 노무현 전 대통령 아니면 정동영 후보에게 있을 것이다. 호남과 DJ, 노무현. 참, 얄궂은 운명이었다.

다시 대선의 계절이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는 호남 민심을 겨냥해 ‘전라도 아리랑’을 부르기에 여념이 없다. ‘대권 불임 증세’에 빠진 호남이야말로 승패를 가를 ‘임자 없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박 후보는 ‘대통합과 대탕평’을 기치로 대선 후보 확정 후 세 번이나 호남을 방문했다. ‘외박을 안 한다’는 불문율까지 깼다. 문 후보는 ‘호남의 아들’을 자처하며 선대위 캠프에 호남 출신들을 전진 배치했다. 캠프 인사들에게 “다시는 호남 홀대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했다고 한다. 안 후보 역시 대선 출마선언 이후 ‘호남의 사위’라며 고비 때마다 호남행을 택한다.

그러나 호남 출신 인사들을 만나면 한숨부터 내쉰다. 출렁거리는 대선 민심을 드러낸다. “표를 찍을 사람이 없다”는 게 중론이다. 세상을 바꾸고 ‘차별’을 일소하는 데 앞장설 후보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박 후보에게선 ‘박정희 시대 차별’의 그림자가, 문 후보에게선 청와대 근무 시절 호남인사 차별의 전력이 떠오른다고 한다.

이번 대선은 특이하다. 세 후보 중 누가 되든 ‘영남 대통령’이다. 자칫 선거 후에 지역감정의 벽이 다시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소외감을 느낄 지역이 어디 호남뿐이겠는가. 비(非)영남, 충청·강원·제주도 역시 그렇고 수도권 출신들도 ‘영남 득세’를 보면서 속이 아플 게 뻔하다. 지금 20∼30대는 대부분 ‘내 고향은 서울·인천·경기도’라고 말하는 세대다. MB 정부의 공과야 훗날 평가해야겠지만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인사로 축약되는 편파 인사가 가장 큰 잘못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생각으로 인재를 고루 중용했다면 MB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12·19 대선에서 지역 대결구도가 화려하게 부활할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다. 통합과 탕평을 말로만 외치지 말고 확실하게 약속어음을 끊어 공증하라는 것이다. 약속어음이 효력을 지니려면 여러 요건을 갖춰야 하지만 ‘지급 날짜’와 ‘금액’을 반드시 써 넣어야 하는 것처럼.

방법은 간단하지만 무겁다.
대한민국의 주요 공직 가운데 핵심 권력 자리에 능력·균형 인사를 하겠다는 공약을 하는 것이다. 예컨대 역대 정권이 가장 중시해 온 4대 요직은 여당 대표, 국무총리, 청와대 비서실장, 국정원장이었다. 돈과 정보와 사람이 모이고 그걸 다시 배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지역·학교·종교 연줄에 따라 사람을 쓰지 않겠다는 걸 약속해 달라는 것이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이른바 4대 권력기관으로 불리는 검찰, 경찰청, 국세청, 금융감독원에 대해서도 균형 인사를 약속해야 한다. 핵심 측근을 편애하는 회전문 인사 금지도 넣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중국 조선족 사회의 영웅인 조남기 장군은 1970년대 말 덩샤오핑(鄧小平)이 1가구 1자녀 정책을 실시하려 할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족이나 소수민족에게 똑같이 식량을 나눠 줘도 소수민족은 배고픔을 느끼고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덩샤오핑이 소수민족에게 1가구 2자녀를 허용한 배경이다. 이번엔 지역균형 인사를 통해 지역패권정치의 낡은 틀을 한번 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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