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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아들 대 이어 40년 넘게 한자리서 어린이 건강 지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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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면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가운을 입은 임돈우 원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김경록 기자

성형외과들로 가득한 신사동 거리에 유독 눈에 띄는 병원이 있다. 작은 간판을 단 이 병원은 소아과다.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도 나름대로 유명하다. 아이들 한명 한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컴퓨터 대신 책상 가득 쌓인 차트로 진료를 하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대 의대에서 진료를 보던 실력파 원장이어선지 가끔 몇 주씩 병원 문을 닫아도 환자들의 불평은 적다.

“아이가 미열이 있어요. 이온음료나 결명자차를 먹이시고, 기침 때문에 수분을 뺏길 수 있으니 우유도 먹이시고요. 밤에 재울 때는 따뜻하게 하시고 온도 변화에 주의하도록 하세요.”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는 한 어린이를 진료한 임돈우(55) 원장이 부모에게 주의 사항을 얘기한다. 말의 템포가 대단히 빠르지만 말과 함께 메모장 한 가득 주의할 점을 적어주는 속도는 더욱 빠르다. 기다리는 환자들이 많아 진료를 서두를 법도 하지만, 결코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간단한 감기인데도 종합건강검진 상담을 하듯 상세하다.

그의 소아과는 주민들의 건강 상담소다. 임 원장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운영되던 병원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병원을 찾은 부모들은 임 원장의 아버지에게 진료를 받았고, 이제는 그들의 아이를 임 원장에게 맡긴다. 덕분에 가족력 파악도 쉽다.

아이를 데려온 부모도, 그 부모의 부모도 같은 소아과에서 진료를 받고 자란 셈이다. 6살짜리 아이를 데려온 박주연(44) 주부는 “내가 딱 이만할 때 어머니 손을 붙잡고 이 병원에 찾아온 기억이 나는데 원장님의 성함과 얼굴이 낯설지 않아 여쭤보니 아들이라고 해서 놀랐다”며 “가끔 아이가 이렇게 아플 동안 뭘 했냐며 혼나기도 하는데 오히려 아이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전해져서 존경스럽다”고 말한다.

임 원장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아과 의사를 하게 된 경위는 동경과 헌신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세브란스 병원장을 지냈던 고(故) 임의선 박사다. 박근혜 후보의 어린 시절 진료를 담당하기도 했던 그는 당시 국내 최고의 명의 중 하나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그런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임 원장이 의사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의사 가운을 입은 임의선 박사의 모습을 본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같은 과목인 소아과를 택했다.

훗날 장성한 임 원장은 뉴욕대 소아과에서 근무하던 1993년,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임의선 박사가 1972년부터 신사동에서 운영하던 소아과의 일을 대신 돌보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몸이 괜찮아지는 날이면 부자가 함께 진료에 나서기도 했다.

세림소아과의 방식은 아날로그 그 자체다. 30~40대라면 공감할 수 있는, 벽장 가득한 종이 차트들로 환자의 모든 것을 파악한다. 컴퓨터 한 대조차 없다. 하지만 정감이 든다. 전산이 다운되면 모든 것이 멈추는 세상이지만 이 곳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냥 이 방식이 편하고 보기 쉬워서 그렇다. 아이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고 컴퓨터가 있으면 괜히 딱딱한 분위기만 들지 않겠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임 원장이 종이 차트를 고집하는 이유다.

오래된 풍경은 또 있다. 철저하게 시스템화가 이뤄져 빠른 진료가 이뤄지는 요즘 병원과는 달리 세림소아과의 로비는 시장통을 연상케 한다. 여기저기 우는 아이들 천지인데다 대기 시간은 1~2시간을 훌쩍 넘기기 마련이다. 진료를 그만큼 오래, 상세히 하는 것이 그 이유다. 진료를 마칠 때마다 부모 손에 쥐어주는 빼곡한 메모를 적느라 시간이 할애되는 탓도 있다.

“아이가 아픈 것을 당장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프지 않도록 생활 습관을 부모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우선이다. 진료를 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종이 차트를 뒤적이며 임 원장은 ‘다음 어린이 들어오세요’를 외친다. 

김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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