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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포크송·모던락 등 LP 1만2000여 장 … “아스라한 추억을 들려 드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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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지난 8일 뮤직바 ‘트래픽’의 오영길 대표가 압구정 점에서 70·80년대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턴테이블과 신청곡이 적힌 메모지.

많은 사람이 오가는 로데오 거리.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계단을 내려와 지하 1층의 문을 열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대낮임에도 낮게 깔린 조명 탓에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바깥과는 달리 사람들은 한가롭게 음악을 듣고 있다. 시간이 멈춘 곳, 뮤직 바 ‘트래픽’이다. 이곳 오영길(57) 대표가 신청곡이 적힌 메모를 보고 부지런히 LP를 찾아 턴테이블 위에 놓는다. 트윈 폴리오의 ‘축제의 밤’이 흐른다. 한쪽 테이블에 앉은 50대 여성의 표정이 밝아진다. 곧 이어 나온 곡은 짐 크로스의 ‘타임 인 어 보틀’. 70년대 포크 음악들이다. LP판의 지직거리는 소리가 타임머신의 기계음인 듯 착각을 일으킨다.

70년대부터 앨범 모아 2만4000여 장

10년째 가로수길의 명소로 자리잡은 ‘트래픽’이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도 문을 열었다. 압구정점은 가로수길점의 두 배인 264㎡ 규모다. 양쪽 벽을 빼곡이 채우고 있는 LP는 모두 1만2000여 장. 가로수길점에 있던 그 많은 앨범들이 이 곳으로 옮겨왔나 싶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모두 오 대표의 집에 있던 것들이다. 가로수길점에도 1만2000여 장이 넘는 LP가 있다. 양쪽 뮤직 바에 있는 것을 모두 합하면 2만4000여 장이다.

 동네 펍처럼 편안한 느낌의 가로수길점에 비해 세련되고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압구정점은 내부 분위기 때문인지, 위치 상의 이유인지 20대 중후반의 젊은 층도 즐겨 찾는다. 40대가 주고객층인 가로수길점과는 사뭇 다르다. 오 대표는 “오후 2시부터 문을 여는 압구정점은 점심 식사 후 잠깐 휴식을 취하러 오는 직장인도 종종 있다”며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했는데, 다행히도 젊은 층들이 자주 찾고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70·80년대 팝이 위주인 가로수길점에 비해 압구정점은 콜드 플레이나 마룬 파이브 등 최신 팝도 자주 흘러나온다.

 오 대표가 음악에 빠져든 것은 고3 겨울. “대학 시험을 보러 갔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몸도 녹일 겸 학교 앞에 있던 음악 다방에 들어갔어요. 난생 처음 음악다방이라는 곳에 가서 커피를 한잔 시켜 놓고 있는데, 도어스의 ‘헬로우 아이 러브 유’라는 곡이 흘러나왔죠.” 한쪽 벽에 있던 스피커에서 다른 쪽 스피커로 소리가 연결돼 지나가는 ‘서라운드 음향’은 그의 몸과 귀를 강하게 자극했다. 얼마 후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도어스의 곡을 한번 더 듣게 됐고 그때부터 음악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청계천을 돌며 음반을 찾아 헤매는 오 대표의 LP 컬렉터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 때 모았던 도어스·CCR·롤링스톤스 등 70·80년대 앨범들은 그의 인생의 큰 축이다.

 트래픽이 처음 가로수길에 둥지를 튼 것은 2002년 9월. “20대 초에 음악 다방 DJ를 했었고 이후 종로와 경희대 앞에서 두 차례 음악 다방을 운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악으로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음악 다방을 접고 노무사 시험에 합격해 노무사 일을 하게 됐죠. 안정된 일이었고 돈도 꽤 벌었지만 내 길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늘 머릿 속에 가득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나 오래 사는 거 보고 싶어, 아니면 빨리 죽는 거 보고 싶어?” 아내는 피식 웃으며 “바 하려구?”라고 말하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것이 ‘트래픽’이다. 그가 좋아하던 60년 영국 포크 그룹의 이름을 따 상호를 정했다.

단골들 “없어지면 안 된다”며 후원 약속

트래픽은 오 대표만의 가게가 아니다.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단골들은 “우리 집에 괜찮은 기계가 있는데 새 가게에 들어 놓으라”며 스피커와 커피 머신을 내놓았다. 혹여 가게가 어려움에 처할까 “내가 살려낼게”라며 사람들을 몰고 와 친구들을 단골 손님으로 접수시키는 사람도 많다.

 30년 전 경희대 앞에서 운영하던 음악 다방에 자주 오던 열 아홉·스물의 대학생들이 40대 후반의 중년 신사가 돼 트래픽을 찾기도 한다. 조금 한가로운 저녁에는 혼자 와서 음악만 듣고 가는 이들도 많다. 일주일에 5일을 들르는 사람도 있다.

 가수들도 발매가 중단된 자신의 예전 LP를 보고 “이걸 가지고 있냐”며 놀라고 반가와한다. 가수 김장훈·김현철·정원영·장기하·김C·김경호·박미경 등은 잊을만하면 이 곳을 찾는 단골들이다. 건축가이자 가수로 활동 중인 양진석씨는 일주일에 두 번 빼 놓지 않고 이 곳을 찾는다.

 외국인들에게도 반응이 좋다. 한 사업가가 외국인 바이어를 데려와서 음악을 듣고 얘기를 나누고 갔는데, 이 후 외국인이 이 곳에서 보낸 시간을 너무 즐거워했던 덕분에 계약이 잘 성사됐다는 후일담을 전해오기도 했다.

음악 속 추억으로 빠져드는 공간

오 대표에게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 중 하나는 “가게가 잘 유지 되냐”는 것이다. 물론 큰 돈은 못 벌어도 가게를 유지하고 생활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게 오 대표의 얘기다. 그래도 혹여 트래픽이 없어질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가게가 없어지면 안 된다”며 “힘들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후원을 약속하는 이들도 꽤 많다.

 사람들이 이렇게 트래픽을 아끼는 이유는 ‘음악’과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오 대표 또한 트래픽이 생활이고 인생이다. 음악을 전공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고3 막내 아들에게 트래픽을 맡길 수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누구든 그저 편안하게 와서 쉬고 음악을 듣는 곳으로 느끼길 바랍니다.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을 들었던 그 시절로 감정이 되돌아가죠. 그런 추억 속으로 빠져들 수 있도록 트래픽을 이끌어 갈 생각입니다. 아무 준비 없이 오세요.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에 추억을 담아 주세요. 제가 추억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글=하현정 기자
사진=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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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픽 압구정점 서울 강남구 신사동 662-8 지하1층/영업시간오후2시~다음날오전3 시 / 일요일 휴무 / 문의 02-3446-7359 가로수길점 서울 강남구 신사동 548-5 지하 1 층/영업시간오후7시~다음날오전3시/일 요일 휴무 / 문의 02-3444-7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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