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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천장’보다 먼저 ‘마미 트랩’부터 뛰어넘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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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호 10면

여성 임원 모임 WIN의 간판 멘토들이 서울 서소문로 중앙SUNDAY 사무실에서 만나 여성 후배와 본인들의 직장을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왼쪽부터 최신애 한국리서치 부사장, 박경미 에이온휴잇 대표, 한정아 한국IBM 상무, 박찬주 듀폰코리아 이사. 최정동 기자

멘토(Mentor)와 멘티(Mentee)-.
학교나 사회생활에서 이끌고 기대는 선후배 사이를 일컫는다. 낯설었던 이 외래어가 어느새 우리 일상 깊숙이 자리잡았다. 박경미 에이온휴잇 대표는 각기 다른 회사의 여성 임직원 네 명의 멘토다. 모토로라코리아 인사부의 장원화 이사부터 SK㈜ 기업문화팀의 김태은 과장에 이르기까지 멘티들의 연령과 직무는 다양하다. WIN에서 만난 이들은 이제 “언니, 동생” 하며 사회생활은 물론 인생 전반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초신성(超新星)이라는 뜻의 모임명 ‘수퍼노바(Super Nova)’처럼 직장·사회를 반짝반짝 비추겠다는 포부를 공유한다.

멘토와 멘티…그녀가 묻고 그녀가 답하다

승진과 경력관리
▶박경미=지난해 국내 기업에 관한 에이온휴잇 리서치 보고서를 보니까 직급별 분포에서 사원급의 42%가 여성이었다. 대리·과장급으로 올라가면 30%로 줄고 차장·부장급에선 8%로 확 줄었다. 출산·육아가 본격화하는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승진 대열에서 대거 탈락하는 것이다. 핵심 인재에 대한 인센티브 경력관리제도를 ‘패스트 트랙(Fast track·빠른 길)’이라 하는데 이 용어에 빗대 여성의 승진 탈락 현상을 ‘마미 트랙(Mommy track·엄마의 길)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한 여성운동가가 직장 내 출산 여성을 배려하자는 뜻에서 재택근무 등 다른 유형의 근무제도를 주창한 것이 마미트랙이다. 하지만 이는 여성의 승진을 가로막는 ‘마미 트랩(Mommy trap·엄마의 덫)’으로 작용하고 있다. 차장·부장이라는 차단기에 걸려 결국 퇴사에까지 이른다. 내가 관장하는 ‘수퍼노바’라는 멘토-멘티 팀은 직급은 물론 자녀도 갓난아기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해 어떻게 하면 마미 트랩에 빠지지 않을까 나름대로 경험과 노하우를 나눈다.

▶박찬주=많은 기업이 대졸 신입사원의 여초(女超) 현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과장·차장 올라가면서 여자 씨가 마른다. 나는 영업을 하는데 웬만한 거래처를 방문해도 나를 맞이하는 상대로 여성을 만나기가 힘들다. 부장급 이상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직급에 여성이 거의 없다. 그 많던 여성 신입사원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최신애=마미 트랩 탓만 할 건 아닌 것 같다. 과장 때까지는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만 차장부터는 조직을 추슬러야 한다. 여성의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회사에 몸을 던지겠다는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5, 10년 뒤 비전을 갖고 일하느냐에 따라 근무 자세도 달라진다. 승진 차별은 여전하다. 하지만 억울하게 승진 누락됐다고 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해선 곤란하다.

▶한정아=자기계발 투자를 위한 경력 단절이라면 과감히 감수하라고 조언하는 편이다. 일본계 광고회사 다니다 미국 유학을 가 있는 40대 중반 멘티가 있다. 내년 초 귀국 예정이다. 임원에 도전하려는데 영어가 약해 고민했다. 직장을 1년 쉬면서 초등학교 자녀들 데리고 유학을 떠날지 망설였는데 가라고 조언했다. 얼마 전에는 우리 여직원이 MBA(경영학 석사) 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 스위스에 가야 하는데 회사 그만두기 싫다고 하더라. 눈 딱 감고 가라고 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뭐든 새로운 걸 배워 오라고 했다.

소통·네트워킹과 리더십
▶박경미=사내 커뮤니케이션과 업무 네트워킹 애로를 많이 호소한다. 남성 중심의 업무 문화와 경력 설계, 보상 체계에서 벗어나 남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두루 배려하는 제도·관행은 아무래도 외국계 기업이 잘돼 있다. 말하자면 여성까지 보듬는 ‘양성 언어(Gender bilingual)’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인맥 쌓기는 업무·전문성을 바탕으로 사내외 관계자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조언한다. 회식이나 술자리 같은 작위적인 네트워킹은 생각보다 효과가 작다. 국내 굴지의 전자업체에 근무하는 여직원이 월차휴가를 내겠다는 소리조차 꺼내기 힘들 정도로 남자 상사가 어렵다고 했다. 시시콜콜한 집안 일이나 개인사라도 상사와 평소에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이런 사적인 소통은 남성들이 여성보다 잘한다. 커뮤니케이션에도 교육이 필요하다.

▶한정아=우리 회사 남자 직원 중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부류가 있는데 오히려 반갑다. 가령 어머니가 갑자기 편찮은데도 아내는 장모만 챙겨 속상하다, 어머니 돌보기 위해 내일 휴가 내겠다, 이런 식이다. 그럼 흔쾌히 휴가 가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여직원은 그냥 내일 가겠다고 불쑥 휴가계를 제출한다. 누구에게 더 친근감이 들겠는가. 여자든 남자든 상사와의 의사소통은 자연스러운 게 좋다. 개인적으로 멘토를 봉사로 시작했지만 이제 많이 배우는 멘티이기도 하다. 멘티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면 우리 회사 내부에서 직원 또는 상사와 이야기할 때 소통이 훨씬 수월해진다.

▶박찬주=우리 회사는 가족친화 외부 인증을 받은 기업이다. 조사한 분이 그러더라. 개인과 가정의 대소사와 고민을 시시콜콜 상사하고 의논한다는 점이 놀라웠다고. 사실 여성들은 주변과의 소통에 좀 소극적이고 남을 이끌어볼 기회도 남성보다 적다. 기업이든 어디서든 그런 것을 배우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최신애=대졸 여성이 번듯한 기업에 취직되기 시작한 지 30년도 안 됐다. 여성 직장인은 남성보다 잘해야 한다, 적어도 남성만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직 강하다. 하지만 차장급부터는 자기 일만 열심히 해서는 곤란하고 자기 양보나 희생을 알아야 한다. 리더십도 깨우쳐 가야 한다. 요즘 젊은 여성 후배들은 우리 때보다 훨씬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하지만 사회성이나 넓게 보는 시야는 부족하다. 직장마다 롤모델도 별로 없다. 임원이 거의 없으니까. 특히 토종 기업들은 여성 임원의 인재 풀이 없고 그런 능력을 계발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WIN과 같은 모임이 필요한 이유다.

일과 가정의 균형
▶박경미=뭐니 뭐니 해도 으뜸 화제는 육아다. 여성은 남성보다 가정 내 역할이 다중적이다. 아내, 엄마, 딸, 며느리…, 어느 것 하나 만만찮다. 멘토-멘티로 대화하다 보면 처음엔 전문성 함양 같은 거창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말꼬리가 가정 일로 흐른다. 직장 여건은 많이 개선됐다. 롤모델도 하나 둘 늘어나고 육아휴직이나 유연근무제 같은 제도의 확산도 고무적이다. 하지만 토종 기업과 외국계 기업의 격차가 여전히 크다. 제도는 다 있는데 외국계가 훨씬 더 잘 작동된다.

▶한정아=여전히 부모·시부모나 가족들의 희생 없이 여성으로 임원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사회적으로 풀 숙제가 적잖다. 남자 직원의 육아휴직이 늘고 있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전문직 부인 대신 남자 직원이 육아휴직을 내는 걸 봤다.

▶박찬주=남녀 차별을 떠나 직장 내 가족친화적 프로그램이 작동하면 된다. 남편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사내 멘티가 있다. 외국계 회사가 아니었다면 남편 내조를 못했을 거고 자신도 계속 다니기 힘들었을 것 같다고 하더라. 외국계 기업은 재택근무나 연월차 휴가, 유연근무가 잘되는 편이라 가족에게 좀 더 신경을 쓸 수 있다.



윈(WIN) ‘Women in Innovation(혁신 여성)’의 약자. 국내 기업의 여성 임원들이 차세대 여성리더를 육성한다는 취지로 2007년 결성했다. 80여 개 기업에 120여 명의 회원이 있으며 봄·가을 두 차례 세미나 겸 멘토-멘티 모임을 한다. 올 하반기 모임은 12∼13일 서울 반포 JW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다. 수시로 온·오프라인 소모임도 한다. 창립 후 1800명에 이르는 여성 직장인의 길잡이로 역할을 했다.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사장이 회장을 맡고 있다(홈페이지는 www.wi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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