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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수와 염문 등 자유분방한 생활 …성직자서 쫓겨난 칠삭둥이 비발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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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악은 무엇일까? 클래식을 즐기는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안토니오 비발디(Vivaldi, Antonio)의 ‘사계 중 봄’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사계절을 각기 3개의 곡으로 구성한 사계는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이다.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라 불리는 바흐나 헨델보다 7살 연상인 비발디는 따지고 보면 음악의 ‘큰아버지’ 또는 ‘큰어머니’ 뻘인 셈이다. 무려 500개나 넘는 협주곡을 남긴 그에 대해서 러시아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100회나 같은 협주곡을 썼다’고 혹평했다. 그것은 비발디의 협주곡이 모두 빠름·느림·빠름이라는 3악장으로 구성된 것을 두고 말한 평이다. 그의 협주곡들은 비슷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다채로운 변화를 담고 있어 듣는 사람에게 편안하고 순수한 음악적 기쁨을 주고 있다. 하이든이 교향곡의 아버지라면 비발디는 ‘협주곡의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붙여도 좋을 듯하다.

1678년 베네치아 상 마르코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지오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의 장남으로 태어난 비발디는 어머니가 큰 지진에 놀라는 바람에 칠삭둥이로 태어났다.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에도 정상적인 발육이 어려운 조산아였던 그는 어릴 때부터 시름시름 앓으면서 간신히 성장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의 3대 음악 명문 중 한 집안 출신답게 비발디는 소년시절부터 바이올린 지도를 아버지에게 충분히 받았고 이것은 나중에 그가 바이올린의 대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15세 때 수도자가 된 비발디는 25세 때 서품을 받아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베네치아의 피에타 여자 양육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했다. 비발디는 이곳에서 실기지도는 물론 원생들로 구성된 피에타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아 했으며 그들을 위해 여러 곡을 작곡했다. 비발디의 음악이 대체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다소 나약하다는 평을 듣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당시 여자아이들을 위해 쓴 곡이 많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45세 때는 성직자의 신분으로 오페라 여가수와 염문을 뿌렸을 뿐 아니라 오페라 흥행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다. 자유분방한 행동과 자만심이 강하고 낭비벽이 심했던 그의 성격은 그를 성직자 직에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 그 뒤 사람들의 빈축을 사 고향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그는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객사해 그곳의 빈민묘지에 묻혔다.

고아원에서 소녀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다 빈민묘지에 묻힌 비발디.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빨간 머리카락 때문에 ‘미사를 올리지 않는 빨간 털의 사제’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의 생애는 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고 정열적인 것이었다. 누가 감히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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