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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연극배우 장민호, 천상의 무대에 오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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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원로배우 장민호(사진)씨가 평생 지켜온 무대를 떠났다. 2일 오전 1시쯤 별세했다. 88세.

 1924년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한 고인은 47년 조선배우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극단 원예술좌의 창단 공연 ‘모세’로 데뷔했다. 50년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에 입단했고, 이후 ‘태’ ‘금삼의 피’ ‘성웅 이순신’ 등 230여 편의 연극에 출연해 한국 연극의 대표 배우로 60여 년을 걸어왔다. 영화 ‘천년학’ ‘태극기 휘날리며’ 등에도 나왔다.

 고인은 ‘암기 민호’였다. 대사를 빨리 외워 출연진 중 가장 먼저 대본을 놓았다. 팔순을 넘긴 후에도 이런 모습은 변하지 않아 후배 연기자들을 당황케 할 정도였다. 놀라운 기억력은 고인의 초창기 방송국 경험에서 비롯됐다는 후문이다. 50년대 녹음 시스템이 없던 시기, 50분짜리 방송 단막극은 이틀가량 연습하고 바로 라이브로 방송해야 했다. 배우 장민호의 집중력은 이때부터 빛났다.

 국립극장·남산드라마센터·세종문화회관·명동예술극장 등 주요 공연장의 개관 혹은 재개관 때마다 주역은 고인 몫이었다. 57년 명동 국립극장 개관작 ‘대수양’ 공연 당시 “연극을 부흥시키자”는 취지 속에 전국에서 62명의 배우가 총동원됐는데, 그때도 고인은 수양대군 역을 맡아 인간적 번민과 냉정한 야욕이라는 이중적 면모를 표출했다. 77년부턴 네 번이나 ‘파우스트’에 출연해 ‘파우스트 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자연스러운 연기는 그의 등록상표였다. 지난해 ‘3월의 눈’ 출연 당시 “배우가 아니라 진짜 지나가는 노인네가 벽에 창호지를 붙이는 줄 알았다”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고인은 “무대 위로 걸어 나오는 순간, 승부는 결정된다. 연기는 꾸미는 게 아니다. 그냥 삶이 묻어 나오는 거다. 배우는 불편해도 관객이 편해야 진짜 연기”라고 했다. 65년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제작해 수익을 냈음에도 “이러다 연기 멀어지겠다”며 바로 손을 뗐다고 한다.

 고인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배우 백성희(87)다. 둘은 50년대 극단 신협 시절부터 단짝을 이뤄 지금껏 100여 편이 넘는 연극에서 호흡을 맞춰왔다. 2010년 둘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 극장’이 건립됐다. 고인은 백씨에 대해 “진짜 마누라보다 내 속을 더 잘 아는 사람”이라 말하곤 했다. 별세 소식에 백씨는 “반쪽이 떨어져 나간 듯 먹먹하다”며 울먹였다.

 고인은 15년간 국립극단 단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예술상·국민훈장 목련장·동랑 연극상·호암 예술상·은관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지난해 5월 ‘3월의 눈’ 재공연이 그의 마지막 무대였다. 같은 해 6월부터 폐기흉으로 투병 생활을 해왔다. 유족은 부인 이영애 여사와 1남 1녀.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 영결식은 5일 오전 10시 서계동 백성희·장민호 극장에서 연극인장으로 진행된다. 02-3010-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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