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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이주 75년, 수교 20년 … 우즈베크·카자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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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올해는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75주년인 동시에 한국과 중앙아시아 5개국 수교 20주년이다. 사진은 지난 5월 고려인 최초 정착지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열린 고려인 정주 75주년 기념 감사비 제막행사 모습. [우슈토베=연합뉴스]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실권을 쥐고 있던 7세기 중엽(641∼659년 추정). 고구려는 중앙아시아 돌궐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사신을 파견했다. 고구려를 위협하는 당나라에 맞서 당나라 배후에 있던 돌궐 세력과 손잡기 위해 원교근공(遠交近攻)식 국제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그 당시 사신들이 남긴 흔적은 지금도 사마르칸트의 아프로시압(Afrosiab) 박물관에 남아 있다. 새 깃털이 꽂힌 조우관(鳥羽冠)을 쓴 고구려 사신들을 묘사한 아프로시압 벽화다. 그러나 제대로 보존이 되지 못해 지금은 벽화의 형체를 구분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훼손돼 있는 상태다.

 아프로시압 벽화 속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1300년 세월에 마모돼 흐릿해질 무렵이던 1937년 9월. 이곳에 다시 고구려의 후예가 찾아들었다. 이른바 고려인들이었다. 이들은 살 땅을 찾아 한반도에서 연해주로 이주했던 한민족의 후예였다. 이들은 스탈린식 강제이주 정책의 희생양이 됐다. 일본이 고려인을 일본 첩자로 활용하지 못하게 막으라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고려인들은 하루아침에 생존의 터전을 빼앗긴 채 낯설고 물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화물 열차에 실린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크즐오르다 등지에 9만6256명, 우즈베키스탄 치르칙강 유역과 칼라카파스탄 등지에 7만6525명이 실려 갔다. 이들은 허허벌판에서 땅굴을 파고 살아야 했고 모진 추위와 굶주림에 맞서 싸워야 했다. 먹을 것조차 구하기 어려워 많은 사람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죽어갔지만 이들은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질경이 같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비탈리 편(65)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은 고려인을 (중앙아시아 땅에) 버렸지만 현지에 살던 우즈베크인들이 우리 고려인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따뜻하게 대해줘 결국 살아남았다”며 “고려인이든 한국인이든 우리 한민족은 그런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1999년 서울에 부임한 그는 최장수 주한 대사이자 고려인 3세다.

 고려인의 강제이주로부터 다시 55년이 흐른 1992년. 한국과 중앙아시아 5개국(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이 3개월간 잇따라 수교하면서 이곳에는 또 다른 고구려 후예들이 찾아들었다. 소련 붕괴 이후 이 일대에 독립 공화국들이 들어서면서 한국 기업인들이 시장을 찾아 달려간 것이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진출에 커다란 의욕을 보이면서 현지 진출은 활기를 띠었다. 그 선봉에는 대우자동차가 우뚝 서 있었다. 대우차는 지금도 현지에서 연간 30만 대를 생산한다.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75주년을 맞은 올해는 한국과 중앙아시아 5개국이 수교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고구려 사신들이 첫발을 들여놓은 7세기부터 계산할 경우 1400년의 시차. 지금 중앙아시아는 또다시 한반도 사람들의 활동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양측의 교류는 유사 이래 최고조로 활기가 넘친다. 협력 분야도 다채로워졌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인야즈(카자흐 외국어대학)에는 한글날을 맞아 한국학센터가 문을 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대학에는 한국어과가 12개나 된다.

 농업 협력 행사를 위해 최근 우즈베키스탄에 다녀온 정기홍 외교통상부 유라시아 과장은 “현지인들에게 피부에 와 닿는 농업 경험을 전수해주니 ‘한국인은 믿을 수 있다’는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런 일련의 한-중앙아 협력 사업 추진 과정에서 30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의 후손이 한반도와 중앙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왼쪽 사진). 이 대통령(왼쪽)과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오른쪽 사진).

 최근 3~4년간 한국과 중앙아시아는 이웃집 마실 드나드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양측 정상들끼리 주고받은 ‘막역지교(莫逆之交)’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대표적 사례가 이명박 대통령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관계다. 인연은 이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이던 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라트 바키셰프(42) 주한 카자흐스탄 대사는 “두 분은 20년 지기”라고 표현했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이던 2003년 11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깊은 신뢰 관계를 쌓았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2009년 5월 이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수도 이스타나를 방문했을 때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파격적인 ‘사우나(바냐) 외교’로 화답했다. 전통적 우방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버금가는 환대였다.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우정도 뒤지지 않는다. 그는 2008년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2008년 2월 이 대통령의 취임식에 직접 참석했고, 2009년 5월 이 대통령의 우즈베키스탄 방문 때는 모든 일정을 동행하며 우정을 과시했다. 편 대사는 “두 분은 성격이 비슷해 의기투합이 가능했다”고 풀이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중앙아시아 패권을 놓고 경쟁 관계인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모두 한국과의 협력을 절실히 원한다”며 “우리 대통령이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만 순방하면 다른 쪽이 서운해할 정도여서 최근엔 두 나라를 항상 동시에 순방하도록 각별히 일정에 신경을 쓴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9월 카자흐스탄을 먼저 국빈 방문했다가 이듬해 5월 우즈베키스탄을 서둘러 찾아가야 했다. 그만큼 경쟁 관계인 양국을 동시에 배려할 필요가 있었다는 의미다.

 정상끼리 두터운 신뢰가 쌓이면서 비즈니스 협상도 기대 이상으로 술술 풀렸다. 한국이 중국을 제치고 수주한 카자흐스탄 발하시 석탄화력발전소 프로젝트가 대표적 사례다. 40억 달러짜리 사업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지지에 힘입어 삼성물산과 한전이 따냈다. 9월 13일 이 대통령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초대로 착공식에 직접 참석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발하시 발전소 건설은 양국 간 우호적 협력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LG화학이 참여한 40억 달러짜리 아티라우 석유화학 플랜트 프로젝트도 비슷한 경우다.

 우즈베키스탄과의 협력 성과도 잇따르고 있다. 수교 20주년을 맞아 9월 방한했던 카리모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과 만나 대규모 협력사업에 서명했다. 우즈베키스탄 앙그렌(Angren) 경제자유구역에 100여 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하기로 한 것이 좋은 사례다. 대한항공은 우즈베키스탄 나보이(Navoi) 공항 운영권을 따내 물류 허브 구축이 가능해졌다. KT는 통신 분야에 4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지난달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합의했다. 편 대사는 “카리모프 대통령은 신설 예정인 장관급 정보통신기술위원회(ICT) 차관에 한국인을, 새로 설립할 타슈켄트 정보기술대학(TUIT) 부총장에 한국인을 각각 추천해 달라고 이 대통령에게 요청했다”고 소개했다.

 국내에선 그동안 중앙아시아를 단순히 에너지·자원 공급원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엔 외교안보 차원에서의 전략적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전략적 요충에 자리한 지정학적 특성 때문이다. 남북 분단 때문에 사실상 섬으로 전락한 한국으로선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 중앙아시아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글로벌 강국들은 중앙아시아를 놓고 ‘총성 없는 쟁탈전’에 한창이다. 미국은 신(新) 실크로드(silkroad) 방안, 러시아는 집단안보회의(CSTO), 중국은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적극 활용한다. 유럽연합(EU)과 일본은 다자대화를 매년 해왔다. 터키는 같은 민족이란 혈연을 무기 삼아 투르크 공동체 복원을 노린다. 정기홍 과장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진정으로 지지해줄 우군(友軍)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도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편 대사는 “한국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만큼 발전했다”며 “우즈베키스탄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100% 지지한다”고 화답했다. 바키셰프 대사도 “한국만큼 좋은 발전 모델이 없다. 카자흐스탄엔 한국과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는 2007년 이후 매년 한·중앙아 협력포럼을 열고 있다. 이욱헌 외교부 유럽국장은 “지난 7월 서울에서 제6회 포럼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이젠 논의 수준을 넘어 실질 협력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단계까지 갈 때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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