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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잔 사람을 기억 못하는 남녀관계, 알고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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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남자의 종말
해나 로진 지음
배현·김수안 옮김
민음인, 400쪽, 1만5000원

제목(원제 『The End of Men』)부터 도발적이다. 남자들이 끝났다니…. 사실 많은 남자가 가정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건 뉴스가 아니다. 밖에서도 강한 여자들에게 눌려 사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영 확인하고 싶은 사안이 아니다. (내가 남자이기 때문?)

 세상 흐름을 귀신처럼 읽어낸다는 미국 시사잡지 ‘애틀랜틱’의 수석에디터인 지은이는 이 책에서 기어이 확인사살을 하고야 만다. 구체적 통계와 인터뷰를 통해 지난 수십 년간 현대사회가 가부장제에서 가모장제(家母長制)로 젠더(gender·성) 권력교체가 이뤄졌음을 실증한다.

 실상을 보자. 2009년 미국에선 여성 취업자 수가 처음 남성을 앞질렀다. 1980년 26.1%였던 의사·변호사·약사 등 전문직·관리직의 여성 비율은 2011년 51.4%에 이르렀다. 앞날이 창창할 것으로 예상되는 15개 업종 중 12개가 여인시대를 맞고 있다.

 중국에선 민간기업의 40% 이상을 여성이 소유하고 잇다. 한국에선 남아선호 사상이 힘을 잃고 있다. 2009년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으론 최초로 총리에 오른 아이슬란드의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는 “남성 호르몬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지은이에 따르면 이런 변화는 세계가 서비스·정보 중심의 후기산업사회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젠 남자의 장점인 덩치와 힘이 별 쓸모가 없다. 기계가 대신하면 된다. 골수마초형 산업이라는 건설업·제조업이 흔들거리는 이유다. 대신 사회 지능, 열린 의사소통, 침착한 품성 등 여성이 남성보다 앞선 능력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그러자 여성들은 홍보대행·와인비평·컨설팅·시나리오 작가 등 새롭고 창조적인 직업으로 대거 이동하고 있다. 무급으로 하던 육아·요리·노인수발 등은 신종산업으로 커가고 있다. 여성이 가정·사회의 의사결정권을 좌우하는 것을 넘어 세상의 변화까지 주도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유연한 여자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하고, 뻣뻣했던 남자는 한없이 추락한다.

 이런 변화는 결혼·사랑·섹스에 대한 남녀간 질서마저 뒤흔들어놓고 있다. 결혼 연령과 이혼율이 높아진 것도 알고 보면 이 때문이다. 여성들이 진보적이 되자 보수적인 남자들이 자신과 가치관이 비슷한 외국여자를 찾는 바람에 국제결혼시장은 성황을 맞고 있다. 결혼에선 ‘시소 모델’이라는 형태마저 등장했다. 지금은 여성들의 소득이 상승하면서 부양 책임자가 서로 왔다 갔다 하는 모델이다. 남성주부가 늘어나는 이유다.

 지은이는 ‘훅업(hook-up·1회적 성관계)문화’라는 미국 대학 내 트렌드에 주목한다. 함께 잔 사람을 아침이면 기억조차 못하는 1회용 반창고 같은 남녀관계 말이다. 일부에선 ‘여자는 감정이 오가는 관계를 원하고 남자는 쿨한 관계를 원하는 성별의 전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영리한 여성의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괜히 남자와 사귀느라 시간을 뺏길 필요 없이 원할 때만 주도적으로 성생활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자가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남성성 위주의 사회가 여성성 중심으로 성격만 변했을 뿐 어차피 남녀는 같은 별에서 공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인류 역사 4만 년 만에 맞은 대변화가 불과 지난 40년 동안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세상 달라진 것 눈치채지 못하고 아직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남자들이라면 제법 큰 충격을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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