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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와이어 액션신… 세운상가의 재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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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도둑들’에는 기막힌 와이어 액션 신이 나온다. 대도 ‘마카오 박’(김윤석)과 홍콩 마피아가 부산 아파트 외벽에서 추격전을 펼친다. 다닥다닥 붙은 차양과 화단, 각양각색의 지붕들…. 그 아스라한 풍경 속을 마카오 박이 붕붕 날아다닌다. 오직 외줄에 의지해,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영화 속 설정은 부산이지만 주요 액션신은 대부분 서울 세운상가에서 찍었다. 종로3가 세운상가에서 퇴계로3가 진양상가까지 남북으로 늘어선 길이 1㎞ 폭 500m의 상가 단지를 흔히 세운상가라 부른다. 외벽 액션의 주요 무대가 된 건 16층 높이의 진양상가였다.

영화 ‘도둑들’의 긴박한 추격전이 촬영된 종로 세운상가 일대(오른쪽 사진)는 1960~70년대를 풍미한, 서울의 산 역사다.

왜 하필 세운상가였을까. “세운상가에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어요. 오래된 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홍콩 영화에 나오는 맨션 같은 느낌요.” 촬영지 섭외를 담당한 프로듀서가 귀띔했다.

하기야 세운상가는 입지부터 기묘하다. 동서로 길게 뻗은 종로·을지로·퇴계로 길에 저 혼자 세로로 못 박혔다. 애초 이곳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 일제가 연합군의 공습이 화재로 번지는 걸 막겠다고 조선인 밀집지를 밀어서 만든 공터였다. 잘못 놀린 바리캉 자국마냥 휑하던 터에는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 판자촌이, 60년대 중반엔 거대한 유곽이 밀려들었다. 그 상흔을 메워보겠다며 66년 건축가 김수근(1931~86)이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상가를 설계했다. 그게 세운상가다. 건물 사이를 잇는 공중보도와 엘리베이터를 갖춘 세운상가는 이내 명물이 됐다. 연예인·고위공직자가 앞다퉈 입주했다.

그러나 전성기는 10년을 채 못 갔다. 70년대 강남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87년 용산전자상가가 생기면서 세운상가는 기울어갔다. 80~90년대 세운상가는 불법 음란물 거래장으로 전락했다. 그 시절 세운상가 공중보도는 ‘좋은 것’을 찾던 혈기왕성한 ‘세운상가 키드’로 온종일 북적였다.

90년대 들어 세운상가 녹지화 여론이 제기됐다. 한참 만인 2006년 상가 북측 끝에 있는 현대상가가 철거되고 벼·보리 따위를 심은 공원이 조성됐다. 2015년까지 모조리 철거 예정이던 세운상가는 지난해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살아남았다. 녹지화는 잠정 유보 상태다. 옳고 그른 걸 떠나 억세도 너무 억센 팔자다. 그저 잊기는 많이 미안할 만큼.

영화 ‘도둑들’이 되새겨준 세운상가, 날것 그대로의 지난날의 흔적. 역사책에 활자로 박히지 않았어도 역사다. 그게 세운상가다.

나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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