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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 속 반기업정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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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천지그룹의 장도현 회장.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룹 오너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사업수완은 출중하지만 이윤을 위해서라면 악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조선소 부지로 눈독을 들이던 배밭에 독극물을 몰래 부어서는 헐값에 땅을 매입하고, 눈에 거슬리던 경쟁업체 해풍조선을 수사해 달라며 고위층에 돈상자를 건넨다. 미모의 한재희 태산그룹 회장. 그녀는 창업회장의 소실로 들어가 회장을 죽음으로 내몰고 본인이 총수 자리를 차지했다. 경영권 승계 다툼 과정에서 거액의 비자금 조성에 열을 올리고 창업주의 딸을 납치하라고 지시하기도 한다.

 신문 1면 톱 감이지만 실제 이야기는 아니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드라마 줄거리다. 이처럼 우리 드라마에서 만나는 회장님은 ‘인자한 얼굴 뒤에 추악한 내면을 숨긴 인물’, 사모님은 ‘고상한 외모지만 속물인 여성’, 아들과 딸은 ‘고급 컨버터블을 몰며 방탕하게 사는 천방지축 족속’으로 그려지는 것이 공식화될 정도다. 범죄수사물이나 가족물이 대부분인 미국이나 영국 드라마와 달리 우리 드라마에서는 기업인 일가가 자주 등장하며 그 역할도 주인공을 괴롭히고 비도덕적 행위를 자행하는 등 악의 축을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드라마 속 풍경은 우리 사회가 기업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반기업정서가 그것인데 그 뿌리는 고려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교가 전래되면서부터 우리나라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이 은연중에 자리잡았고, 기업에 해당하는 ‘工商’은 지난 500년간 하위 직업군으로 인식돼 왔다. ‘군자는 도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君子憂道不憂貧)’는 공자의 가르침도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는 계층을 업신여기는 풍조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우리나라의 반기업정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가 22개국의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가 그렇다. 미국·영국·일본 등의 선진국은 물론 아르헨티나나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나라들보다 높다. 반기업정서가 이렇게까지 만연한 데는 물론 기업이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분식회계로 비자금을 조성하고 경영권을 편법상속하는 사례가 아직도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일부 기업인의 잘못을 두고 전체 기업을 질타하면서 ‘기업인은 돈벌이밖에 모르는 파렴치범’으로 모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피부암으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부도난 회사를 살리겠다며 죽기살기로 매달려 살려낸 대기업 회장, 돈벌이는 되지 않지만 개발도상국에 필요한 ‘착한 기술’을 개발해 지구촌에 나눔을 실천하는 등 한국 기업열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다큐멘터리로 봐도 흥미롭다.

 이제는 대기업 비난 일색에서 벗어나 그들의 공로도 함께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한다. 한때 가발과 신발을 만들던 나라가 스마트폰과 자동차 강국이 된 것은 바로 대기업이 도전적 기업가정신을 발휘한 덕분이다. 총수의 지배력은 새로운 사업에 대한 모험적인 연구개발(R&D)과 시설투자를 지속시킨 원동력이었다. 대기업이 경쟁력을 키우고 해외주문을 많이 받아온 덕에 중소기업의 일감과 일자리도 늘었고, 이러한 ‘낙수효과’를 통해 경제가 발전해 왔다는 점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진보성향의 경제학자인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조차 “한국의 대기업은 기술혁신, 세계화에서 가장 선도적이고 성공적인 조직”이라 평가하지 않았던가.

 우리 경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다. 기업은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투자확대와 고용창출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사회는 이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때다. 기업의 기를 꺾을 규제를 만들고 이를 지키는 일에 국력을 허비하기보다 기업과 사회가 한 발씩 양보해 경제를 살리고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더 현명하다.

 영국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은 “어떤 이는 기업을 총으로 쏴 죽여야 하는 야수라 하고, 어떤 이는 우유를 짜내는 젖소로 여긴다. 기업을 마차를 끄는 튼튼한 말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 불황과 양극화로 반기업정서가 고조된 지금, 우리 모두가 곱씹어봐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