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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정체는 멜로 ‘용의자X’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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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X의 헌신’은 추리소설 팬들에겐 ‘유명해도 너~무 유명한’ 작품이다. 2006년 발간 직후 큰 화제를 모으며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등 추리물에 주는 상이란 상은 죄다 휩쓸었다. 2009년엔 일본의 인기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수학 하나에만 매달려 살아온 중년의 수학선생 이시가미는 옆집에 이사 온 야스코와 딸을 만나면서 설렘이란 감정을 처음 알게 된다. 어느 날 옆집 여인이 전 남편을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최고급 두뇌를 바쳐 그녀를 위한 완벽한 알리바이를 설계한다.

 지난주 개봉해 1000만 영화 ‘광해’를 누르고 예매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용의자X’는 이 작품의 한국판 리메이크작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새롭게 푸는 것은 쉽지 않았을 터. 한국판에서는 원작의 사실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탐정 갈릴레오’, 유가와 마나부라는 캐릭터를 과감히 덜어냈다. 탐정 갈릴레오는 코난 도일의 작품 속 셜록 홈스처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천재 물리학자다. 원작은 용의자X가 만들어낸 사건의 진상을 그의 친구 탐정이 밝혀낸다는, 두 천재의 치열한 두뇌싸움에 중점을 뒀다. 하지만 한국판에선 두 남자의 추리 대결 대신, 수학천재 석고(류승범)의 지극한 순애보에 집중한다.

18일 개봉한 방은진 감독의 영화 ‘용의자X’.

 덕분에 영화는 충격적인 반전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지루하지 않은 멜로물로 탄생했다. 옆집 여인 화선(이요원)이 석고에게 목도리를 선물하는 장면 등 원작엔 없던 에피소드도 꽤 보강됐다. “나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나의 모든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마니까요”라는 석고의 편지가 등장할 무렵, 극장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영리한 리메이크였다고 생각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원작에서 용의자X는 살이 찌고 머리가 벗어진 중년 남자였다. 외모 같은 데 관심 없던 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며, 탐정은 그가 사랑에 빠졌음을 눈치챈다. 초라한 주인공이었기에,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그의 사랑이 더 안타깝게 다가왔다. 류승범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지만, 파카 위에 재킷을 입어도 멋들어진 그의 패션감각에 익숙해진 탓일까. 더벅머리에 막 걸친 점퍼조차 왠지 스타일리시해 보인다. 게다가 원작에서 중학생을 키우는 아줌마였던 여주인공은 조카와 함께 사는 젊은 여성으로 바뀌어, 소외된 존재들의 처절한 사랑이 던져주는 진한 울림은 한층 약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