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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억 들여 국내 첫 ‘발효 연구소’ 연말 완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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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박진선 대표가 콩 발효액과 천일염 같은 자연물로 만든 조미료 ‘연두’를 들어 보이고 있다. [김성룡 기자]

애초엔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간장 장사보다 더 근사한 걸 하고 싶어서였다. 식품과는 거리가 먼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간장’의 길로 돌아왔다. 샘표식품 박진선(62) 대표 얘기다.

 샘표식품은 박 대표가 태어나기 4년 전인 1946년 설립됐다. 할아버지인 고(故) 박규회 창업자가 서울 충무로 ‘삼지장유 양조장’을 인수한 게 시초였다. 당시만 해도 누구나 집에서 만들어 먹던 간장을 대량 생산해 판매한 것이었다.

 사업은 아파트가 보급되면서 번창했다. 회사는 통조림까지 만드는 종합식품기업으로 탈바꿈했고, 80년대 들어서는 경기도 이천에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식품 공장을 지었다. 박 대표가 샘표에 들어온 건 90년 40세 때다. 서울대 전자공학 학사, 미국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석사, 오하이오 주립대 철학 박사를 딴 뒤 펜실베이니아주 빌라노바대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보니 샘표식품이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았습니다. 미국 기업들은 마케팅에 주력하는데, 샘표는 가만히 있더군요. 기업과 브랜드가 쪼그라들 수 있단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샘표에 들어온 지 올해로 22년. “처음 예상보다 상당히 즐겁다”고 했다. “돈 버는 일만 하리라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 문화 사업”이란 거다. 샘표식품 매출 중 절반은 간장이 낸다. 간장 회사의 문화 사업은 낯설다. 하지만 박 대표는 “간장 잘 만들어야 문화가 바뀐다”고 한다. 간장 시장점유율 50%가 넘는 만큼 샘표가 만드는 간장이 곧 한국의 음식문화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생각 때문에 연구시설을 짓고 있다. 충북 청원 오송생명과학단지 안에 1만100㎡(3030평) 규모로 올해 말 완공하는 발효 연구센터다. “판매할 신제품뿐 아니라 장류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식을 연구하는 곳”이라고 한다. 땅·건물에만 200억원이 들었고, 연구원·연구자재까지 갖추려면 100억원 이상이 더 든다. 박 대표는 “연매출 2000억원 회사가 짓기엔 좀 버거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돈이면 공장 두 개는 더 지어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당장 돈 버는 것보다 제품의 수준을 높이려 했다”고 설명했다. 완공되면 국내 최초의 발효 연구소가 된다.

 연구소를 통해 전통 장류의 수준을 끌어올린 후엔 외국으로 가지고 나간다는 계획이다. 올 1월엔 세계적 음식박람회인 스페인 ‘마드리드 퓨전’에 샘표 부스를 차려 전통 장의 맛·향, 이용방법을 전 세계 500여 명 요리사에게 소개했다. 박 대표는 “내년쯤 유럽의 음식 문화에 맞게 장류를 변형시켜 판매하기 시작할 것”이라며 스페인을 첫 진출국으로 지목했다.

 그는 “식품 기업의 해외 진출에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놨다. 샘표는 지식경제부가 해외진출 중견기업을 후원하는 ‘월드클래스 300’에 지난 7월 지원했다 탈락했다.

 “간장 회사에 ‘목표 세계시장점유율’을 써내라더군요. 간장을 쓰지 않는 서구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건데 어떻게 시장점유율을 쓰란 얘기인지…. 처음부터 정보기술(IT) 같은 분야만 머릿속에 두고 있는 듯했습니다.

 박 대표는 “수작업으로 전통 장류를 잘 만드는데도 연구실·유통망이 없는 작은 회사들을 지원하고 싶다”고 했다.

 “배불리 먹는 것에서 즐기는 것으로 음식 문화를 바꾸기 위해선 특유의 제조 노하우를 가진 작은 기업과 마케팅 능력이 있는 큰 식품 회사가 함께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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