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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통해 전쟁이 아시아에 남긴 상처 알리고 싶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커피 당(coffee party)’을 만든 애너벨 박이 9일 중앙일보사 구내 카페의 메뉴판 앞에 서 있다. 그는 “커피는 하루 한 잔만 마시려고 노력하는데 지키기 힘들다”며 “한국식 커피믹스도 좋아하는데 중독성이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조용철 기자 커피 당은 2010년 1월 26일 페이스북에 단어 116개로 이루어진 짧은 포스팅에서 시작됐다. 애너벨 박은 커피 당을 “카페에서 대화하듯 자유롭게 의견을 내는 개인의 목소리가 정치에 적극 반영되는 걸 목표로 하는 초당적 유권자 운동”이라고 소개했다. 아래 작은 사진은 ‘커피 당’의 로고.

1977년.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아홉 살 소녀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휴스턴의 한 트럭 다이너(truck diner·운전자 휴게소 겸 식당)에서 진짜 미국을 만났다. 저렴한 한 끼 식사를 위해 모인 이들을 통해 소녀는 세상은 누구에게나 삶이 고단하다는 걸 깨달았다. 소녀는 잘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소질이 있었다. 35년 후 소녀는 여전히 세상과 대화를 이어간다. 때로는 카메라 앞에서, 때로는 노트북을 통해, 때로는 동네 커피숍에서 자신과 다르지만 같은 걸 꿈꾸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있다.

“좋은 이야기는 세상을 바꾸고, 솔직한 대화는 우리가 같은 인간임을 깨닫게 해준다.” 촉망받는 사회 활동가 겸 다큐멘터리 감독이 돼 한국을 찾은 재미교포 1.5세 애너벨 박(44)의 믿음이다. 그는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미국 유권자 조직 ‘커피 당(coffee party)’을 만들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다큐멘터리 ‘9500 리버티’의 한 장면. 버지니아주 프린스 윌리엄스 카운티의 불법이민 단속 정책이 촉발한 일련의 사태를 그려냈다.

‘커피 당’ 참여 50만, 포스팅 누적 조회 수 4억
9일, 10일 두 차례에 걸쳐 중앙SUNDAY 편집국에서 만난 애너벨 박은 작은 체구에 간결한 화법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작가 겸 다큐멘터리 감독 겸 사회 활동가”라고 소개했다. 대학 시절부터 그는 학생회 활동, 연극 연출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벌여왔다. 2007년 미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는 데 힘을 보탰다.

2010년 1월 페이스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커피 당은 우연히 창당됐다. 그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고 말한다. 당규는 ‘당을 초월해 어떤 정치를 바라는가에 대한 건설적이고 이성적인 대화 나누기’. 단순한 원칙을 고수하는 커피 당의 참여자는 50만 명을 넘어섰으며 포스팅 조회 수는 누적건수 4억 건을 넘겼다. 보통사람들이 기성 정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새로운 정치 플랫폼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는 커피 당 열풍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분열돼 싸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정치권은 종종 표를 위해 분열을 조장한다. 깨어 있는 시민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대화의 수단(SNS)이 생겼고, 어느 때보다 가능성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직업을 갖고 있지만 애너벨 박의 다양한 활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대화’다. 다큐멘터리 연출과 사회 운동은 대화로 시작해 대화로 마무리된다. “아버지 식당을 찾던 백인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었다. 멕시코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 흑인 커뮤니티에서 보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서로 잘 지내지 못한다.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마주 앉아서 서로 원하는 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애너벨 박이 사회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가족사와 이민의 경험,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현재 내가 하는 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아홉 살 때까지 서울 광화문에서 살다 텍사스 휴스턴으로 이주했다. “한국에선 전쟁에 대한 공포가 너무 강렬했다. 가족들은 항상 누군가를 애도하고 있었고 슬퍼하고 있었다”고 기억을 되새겼다. 애너벨 박의 외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 손진태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다. 전쟁은 많은 가족을 힘들게 할 수 있고 그 상처가 아주 오래 간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한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생사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대학(보스턴대·철학), 영국에서 대학원(옥스퍼드대·정치학)을 다닐 때 모두 장학금을 받을 만큼 성적이 좋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길을 택했다는 게 흥미롭다. 여기엔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부모님은 내가 정확히 뭘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보통의 한국 어머니들과 달리 ‘변호사가 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면서 믿어주었다. 어머니가 반대했다면 독립적으로 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애너벨 박의 원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미국에선 취약한 공동체 의식이 다양한 사회 문제로 이어진다. 공동체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꾸는 데는 정치와 예술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영화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직접 쓴 시나리오를 토대로 독립영화를 찍을 준비를 마쳤지만 2004년 이라크 아부그레이브 수용소의 포로 학대 사건을 접한 뒤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언론에 공개된 수용소의 사진들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우리나라가 남의 나라에 가서 사람들을 고문하고 있었고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때 머릿속 비상벨이 울린 것 같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그가 ‘당장 할 일’로 택한 건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인의 당선을 돕는 것이었다. 그래서 반전(反戰) 공약을 내걸고 상원의원 후보로 출마한 민주당 짐 웹 의원 캠프에 합류했다. 버지니아주 한인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선거 캠페인을 펼쳤다. 당시 선거 도구로 각광받기 시작한 유튜브에 한국어 동영상을 올렸고 한인 신문에 선거 광고를 냈다. 버지니아주에서 한인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조직적인 선거 캠페인을 펼친 보기 드문 사례였다. 웹은 8000여 표 차이로 이겼고 애너벨 박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았다.

“새 정치 실험장 같은 한국 대선에 관심”
애너벨 박은 “이런 경험을 한 뒤에 극 영화 연출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치와 영화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찾았다는 얘기다. 이후 2007년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관철하기 위한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현역 의원들을 대상으로 결의안이 왜 중요한지 설득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2010년엔 버지니아주의 이민정책을 다룬 영화 ‘9500 리버티’를 당시의 남자 친구였던 에릭 블레어와 공동 연출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불법 이민 의심자들을 불시 검문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을 의결한 버지니아주 어느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둘이 직접 취재하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홍보까지 한 저예산 프로젝트였지만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 등은 “시의적절한 수작”이라고 호평했다.

애너벨 박은 현재 ‘미국의 이야기(Story of America)’와 ‘아시아의 유령들(Ghosts of Asia)’이라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미국의 이야기’는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평범한 미국인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추적하는 프로젝트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집계되는 수치 변화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진지하게 이야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의 유령들’은 치유되지 않은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작품이다. “한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등 아시아 전 지역엔 여전히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위안부 할머니들, 주일 미군기지 인근 사람들의 상처를 돌아보고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되짚어야 할 시점이다.”

그는 위안부 문제와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두 나라가 번번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주요 선거 때마다 쟁점화되는 지금까지의 패턴에서 빨리 벗어나야 미래로 전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진실을 정확히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윤리적 책임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기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을 ‘피해자’로 보는 시각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엔 그들은 영웅이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일들을 겪었지만 할머니들은 평화를 기원하고, 다른 이에게 베풀면서 살고 있다. 이보다 더 큰 희망의 증거가 어디에 있나.”

그는 일본에서도 이미 변화가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일본은 전근대적이고 철 지난 정치 시스템에 갇혀 있는데, 젊은이들이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이 변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워싱턴에 거주하는 애너벨 박은 자신의 생활에 대해 “주로 길에서 지내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굉장히 짧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연출을 하기 위한 출장과 초청 강연, 회의 참석 등으로 1년 일정이 빡빡하다. 아직 미혼이어서 부모님과 살고 있지만 생활비는 강연료와 다큐멘터리 DVD 판매 수익 등으로 충당한다. “지금까지는 돈을 많이 쓰지 않아도 돼 많이 벌지 않아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야기’는 제작 펀드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지만 이전까지의 작업엔 예산이 거의 들지 않았다.

아산정책연구원 행사 참석을 위해 지난 6일 방한한 애너벨 박은 14일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는 11월 중 다시 한국을 찾아 12월 대선 때까지 서울에 머무를 예정이다. “무소속을 표방한 안철수 후보의 등장을 비롯해 한국에서 진행되는 정치실험이 흥미진진하다. 새로운 정치의 실험장인 것 같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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