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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에 원자론 창시한 '근대적 과학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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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호 25면

데모크리토스는 항상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별명은 ‘웃는 철학자(laughing philosopher)’다. 헨드리크 테르브뤼헨(1588~1629)의 작품 ‘데모크리토스’(1628).

‘근대 철학의 아버지’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 등 ‘근대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근대에 태어났다. 예외가 있다. 일군의 과학사가들이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평가하기도 하는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년께~371년)는 기원전 5세기에 태어났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께~399)와 동시대 인물인 데모크리토스는 과학 분야에서 가장 근대적인, 가장 근대에 근접한 고대인이었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23> 데모크리토스

서구 과학사에서 데모크리토스는 스승 레오키포스(기원전 5세기 초에 활동)와 더불어 원자설(原子說·atomism)의 창시자로 기록된다. 원자설은 ‘세계의 모든 사상(事象)을 원자와 그 운동으로 설명하려는 학설’이다. 원자설은 현대 물리학의 주류 학설이다. 데모크리토스가 레오키포스의 원자설을 완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레오키포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레오키포스는 데모크리토스의 가명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스승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기에 가공의 스승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물질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아마도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동서양의 고대인들은 우선 만물을 물·불·바람·흙 등의 혼합물로 이해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지지자가 있는 사주명리학만 해도 우주 만물을 목화토금수와 대응시킨다.

데모크리토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질을 계속 쪼개다 보면 더 이상 나뉘어질 수 없는 아토모스(atomos), 즉 원자(atom)가 남는다고 생각했다. 아토모스는 ‘자를 수 없는’ ‘나눌 수 없는’을 뜻한다(더 이상 자를 수 없다는 게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인지 개념적으로 그렇다는 것인지, 어느 쪽이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원자는 불변이며 그 수는 무한하다. 원자 사이에는 빈 공간(void)이 있다. 삼라만상은 원자와 빈 공간으로 이뤄졌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대결, 19세기에 역전
데모크리토스는 우주가 원자들의 소용돌이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우주에는 수많은 세계가 있다. 세계는 무한하다. 태양이나 달이 없는 세계가 있는가 하면 태양·달이 여러 개인 세계도 있다. 그는 또한 모든 세계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한 세계는 다른 세계와 충돌해 소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데모크리토스가 원자설에 도달한 것은 실험이 아니라 직관(直觀·intuition)을 통해서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사과나 나무토막 같은 것들을 계속 잘라 나가다 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부엌에서 만든 빵을 볼 수는 없지만, 냄새로 빵을 새로 구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빵의 원자가 부엌에서 코까지 이동했다고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오늘날의 원자보다는 분자에 더 가깝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생각과 달리 원자도 입자가속기로 ‘자를’ 수 있다. 사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원자론이 수용되자마자 과학자들은 원자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현대의 원자론에 비추어 보면 틀린 주장도 했지만 데모크리토스의 연구 방향은 옳았다. 데모크리토스는 최초로 ‘기계론적 우주관(mechanistic view of the universe)’을 완성했다고 평가된다.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신(神)을 배제했다. 그의 주장은 유물론의 길을 열었다. 사회주의의 교조인 유물론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박사 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에 대하여』(1841)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데모크리토스가 시도한 신을 배제한 과학은 근대나 현대 과학을 기준으로 봐도 지극히 혁신적이다. 뉴턴·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데카르트와 같은 ‘근대 과학의 아버지들’은 모두 과학과 종교, 신을 조화시키기 위해 씨름했다. 데모크리토스가 무신론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사람들이 천둥·번개를 보고 공포에 휩싸여 신들이 천둥·번개를 만든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영혼도 원자로 구성됐다. 따라서 영혼은 물질이며 사후 세계는 없다. 하지만 유대교처럼 사후 세계가 없는 유신론도 있기 때문에 데모크리토스가 무신론자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에도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은 파격적이었다. 데모크리토스는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의 저작에 등장하지 않는다. 의도적이었다. 한 고대 저자의 전언에 따르면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에 분노했다. 플라톤은 조물주가 이데아에 맞춰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의 저작은 모두 불태워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불태워 버리기에는 데모크리토스의 저작이 당시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돼 있었다. 인기 작가였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의 평가는 스승 플라톤보다 긍정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에 대해 “명료하고 방법론적으로 모든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고 평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를 라이벌로 간주한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운동자(prime mover)’ ‘목적인(目的因·final cause)’과 같은 자신의 주장이 옳고 데모크리토스는 틀린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을 빈번히 인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 후세에 전해지게 됐다. 승자가 역사를 쓰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누구와 싸워 이겼는지 밝히기 위해 패자에 대해 기록한다. 시대가 바뀌면 기록을 바탕으로 패자가 부활하는 경우도 많다. 데모크리토스가 그런 경우다.

데모크리토스는 73권의 저서를 저술했으나 남아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등 다른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발견되는 파편적인 인용문들이다. 원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은 사람들의 체험과 너무 달랐다. 중세 기간에는 교회의 신학과 충돌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승리했다. 데모크리토스는 2000여 년간 거의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슬람 세계는 원자론을 계속 연구했다. 이슬람권에서는 고대 그리스 원자론과 인도의 원자론을 융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7세기에 데모크리토스를 부활시킨 것은 르네 데카르트, 프랜시스 베이컨, 갈릴레오 갈릴레이 같은 인물들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자신을 5종 경기 선수에 비유했다. 특정 종목의 최고는 아니지만 합계는 1등이라는 것이다. 겸손함이 묻어 있는 자평(自評)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수학, 철학, 윤리학, 사학, 음악, 물리학, 법학, 기하학, 시학(詩學) 등 모든 학문 분야를 섭렵했다. 그는 시원적 인류학자·사회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삶이 원래는 동물과 같았고 말도 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인류는 언어, 농업, 상호 부조가 생기면서 사회 공동체를 이루게 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인류 역사의 여명기는 황금기였다고 믿은 기원전 8세기 시인 헤시오도스의 시각과 대조적이었다.

여행과 유학 하느라 막대한 유산 탕진
데모크리토스는 기인(奇人)이었다. 그는 아브데라 출신이었는데 아테네에는 “세상의 모든 멍청이는 아브데라 출신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는 과학을 위해 멍청한 사람이 됐다.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페르시아 왕국을 얻기보다는 하나의 원인을 발견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데모크리토스는 스스로 실명했다고 전한다. 실명하기 위해 맨눈으로 해를 쳐다봤다. 세상을 눈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영혼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데모크리토스의 아버지는 거부였다. 셋째 아들인 데모크리토스는 유산으로 오늘날의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100탤런트를 물려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온 지구가 그의 집이다”라는 말을 남긴 데모크리토스는 그 많던 유산을 여행에 탕진했다. 당시 세계의 남쪽 끝인 이집트·에티오피아, 동쪽 끝인 페르시아·인도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잔치 없는 인생은 여관 없는 긴 여정과 같다”는 그의 말도 실제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일 것이다. 돈이 다 떨어지자 대중 앞에서 자신이 저술한 『세계의 위대한 질서』를 낭독했다. 감동한 시민들이 그를 위해 500 탤런트를 모금했다고 전한다. 실명 이야기나 시민 모금 이야기는 후세에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의 과학·과학자에 대한 관점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전설이다.

당시 동방은 문명이라는 빛의 근원이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또한 인도 여행 혹은 ‘유학’ 기간에 한 수 배워 온 것인지도 모른다. 인도의 힌두교·불교·자이나교는 각기 원자론을 전개했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도 원자 이야기가 나온다. 과학사학자의 다수설은 고대 그리스와 인도의 원자론이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지만,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의 뿌리는 인도일 수도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과학과 윤리학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윤리학 저서는 몇몇 인용문밖에 남아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인간은 소우주(小宇宙)다”라며 인간의 도덕적 의무는 각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행복의 핵심은 쾌활함이었다. 데모크리토스는 쾌활함을 “영혼이 고요함과 평화로움 속에서, 다른 감정이나 공포·미신으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결혼 여부나 자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사위를 잘 얻으면 아들이 생기고, 잘못 얻으면 딸도 빼앗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을 보면 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형이 둘,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임종을 지켜본 것은 여동생이다. “오래 사는 것은 죽음을 연장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지만 데모크리토스는 90세, 104세 혹은 109세까지 산 것으로 전한다. 여동생도 100세 가까운 나이까지 살았다. 여동생은 오빠가 종교 제전 기간에 사망하면 장례 때문에 종교 의식에 제대로 참석할 수 없다는 게 근심거리였다. 데모크리토스는 자신의 얼굴에 뜨거운 빵을 올려 달라고 했다. 빵 냄새만 맡으며 3일을 버텼다. 여동생이 제전이 끝났다고 하자 그는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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