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매독 치료제 ‘마법의 탄환’ 개발로 노벨상 수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2호 28면

인류는 십 수 세기 동안 온갖 치명적 전염병에 시달렸다. 페스트는 1340년대부터 이탈리아, 프랑스, 북유럽을 시작으로 중앙아시아, 중국 등지로 옮겨갔다. 최악의 사망률을 기록한 흑사병은 유럽인 1억5000만 명과 아시아인 25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았다. 언제 페스트로 죽을지 모르는 유럽인들이 염세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콜레라와 폐결핵도 창궐해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황열병, 말라리아 등도 유럽 제국의 아프리카 개척과 함께 알려진 치명적 질병이다. 말라리아는 세균이 아닌 병원충이 매개체이므로 예방제만 있을 뿐 효과적인 치료제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또 지난 1980년대 초 에이즈가 출현했지만 완치를 위한 치료제 개발은 더디기만 하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독일 세균학자 파울 에를리히

링컨·히틀러·톨스토이도 매독으로 고생
16세기 이후 인류는 매독이란 병마와 싸워야 했다. 매독은 콜럼버스의 탐험대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병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 이전 이탈리아에 유사한 병이 있었다고 한다. 매독으로 평생 고생하거나 목숨을 잃은 인물이 적지 않다. 철학자 니체, 작곡가 베토벤, 파가니니, 슈베르트, 슈만, 문인 톨스토이, 보들레르, 모파상, 화가 고갱, 고흐 등 문화·예술인이 있다. 프랑스 샤를 6세, 러시아 이반 뇌제(雷帝), 링컨 대통령, 히틀러, 무솔리니, 알 카포네 등도 매독에 시달렸다. 19세기 말 파리 인구의 15%가 매독 환자일 정도로 이 병은 17~19세기 무서운 속도로 유럽과 전 세계로 퍼졌다. 400년간 유럽에서만 1000만 명 이상이 매독으로 숨졌다.

그러다 19세기 초 수은 치료법이 나왔다. 그런데 수은의 독성이 면역체계를 약화시키는 커다란 부작용이 있었다. 이후 독일 유대인 피부과 의사 에리히 호프만(1868∼1959)이 매독의 병원균인 스피로헤타를 발견했다. 독일 유대인 세균학자 아우구스트 폰 바세르만(1866∼1925)은 혈청 반응에 의한 매독검사, 일명 ‘바세르만 반응’을 고안했다. 독일 유대인 세균학자이자 화학자인 파울 에를리히(사진)는 획기적인 매독 치료제를 개발해 인류를 이 몹쓸 병에서 구해냈다.
에를리히는 1854년 당시 프러시아령인 슐레지엔 슈트렐런(현 폴란드 지역)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유대교 정통파 가정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유대식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장성하면서 유대교 예식과 율법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에를리히는 스트라스부르, 프라이부르크,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의학보다 화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색소에 의한 세포조직 염색연구에 열중했다. 학업 후 그의 평생 멘토인 면역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소장으로 있는 연구소에 초빙 연구원으로 있던 중 폐결핵을 앓게 돼 요양을 겸해 이집트 등 여러 곳을 2년간 여행했다.

여행서 돌아온 에를리히는 1889년 베를린 스테글리츠 혈청검사 연구소장으로 근무하다 프랑크푸르트 혈청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동물에 염료를 주사하는 실험을 하면서 염료투입 부위 세포만 변색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인체의 다른 조직은 손상하지 않고 특정 세균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연구에 몰두했다. 비소 화합물로 세균을 죽이는 실험을 계속했다. 비소는 과거 사약이나 쥐약으로 쓰이던 독약의 원료다. 일본인 조수 하타 사하치로와 함께 실험을 거듭하다 1909년 마침내 606호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일명 ‘마법의 탄환’이다. 606이란 숫자는 606번째 실험 만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606은 독일 제약사 획스트에 의해 ‘살바르산’이란 약명으로 상용화된다. 약효는 입증됐지만 부작용이 있어 1911년 독성을 줄인 개량품 ‘네오살바르산’이 나왔다. 606은 약 40년간 매독 퇴치에 크게 기여하다 1940년대 페니실린의 출현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에를리히는 이 공로로 1908년 우크라이나 태생 유대인 생물학자 엘리 메치니코프와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메치니코프는 유산균 효용성 연구의 대가다. 말년에 암 치료제 연구에 매달렸던 에를리히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뇌일혈로 타계했다. 훗날 서독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뜻으로 200마르크 지폐에 그의 초상을 넣었다.

인류를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한 에를리히에게도 한 가지 멍에는 있었다. 그는 1914년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해 민간인 학살 등 만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93인 지식인 선언’에 서명해 세인의 비난을 샀다. 에를리히가 이 선언에 서명한 것은 당시 프러시아 왕실과 군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는 동정론도 있었지만 끝내 오명을 벗지는 못했다.

과학기술 업적이 유대인 영향력 높여
“유대인은 금융과 언론으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속설이 있다. 과장이 있겠지만 금융과 언론이 유대 권력의 핵심을 이루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유대인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창의적 발견과 발명을 이어가면서 인류의 공동이익 실현에 기여해 왔다. 오로지 유대인만이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이들의 공헌은 실상 괄목할 수준이다. 에를리히의 경우와 같은 의학 분야만 살펴봐도 몇 가지 실례가 있다. 우크라이나 태생 프랑스 미생물학자 발데마르 하프킨은 1896년 콜레라 백신을 완성했다. 러시아계 미국 유대인 의학자 요나스 살크는 1950년대 초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었다. 폴란드계 미국 유대인 생물학자 그레고리 핑커스는 56년 세계 최초의 경구피임약을 개발했다.

결국 유대인들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데는 경제력, 미디어, 문화, 예술의 선도와 함께 인류를 위한 과학, 기술 분야의 획기적 기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