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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 “만주사변은 자위전쟁” 강변… 미·영 강력 반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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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호 26면

제국 일본에는 교육칙어(敎育勅語)와 군인칙어(軍人勅語)의 두 칙어가 있었다. 1890년 일왕 메이지(明治)가 반포한 교육칙어는 “짐은 우리가 황조(皇朝)들의 도의(道義)국가 실현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기초로 생겨난 나라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충효라는 양대 기본을 주축으로……”라고 시작하는데 군국주의 시절 모든 교사와 학생들이 받들어 봉독(奉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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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조금 이른 1882년 1월 일왕 메이지(明治)는 ‘군인칙유(軍人勅諭)’를 내린다. “우리나라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이 통솔하고 있다”로 시작한다. 군인들의 정치 참여를 엄금시킨 것이 특징이었다. “세론(世論)에 현혹되지 말고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다만 오직 군인으로서 자신의 의무인 충절(忠節)을 지키면서 의(義)가 험하기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큰 새의 깃털보다도 가볍다고 각오하기 바란다. 이 절조(節操)를 깨면 생각할 수도 없는 실패를 부르니 오명을 받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陸海軍軍人に賜はりたる<6555>諭)”

상해로 진격하는 일본군 탱크,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중국 19로군의 모습. [사진가 권태균]

이 칙유에서는 분명히 ‘세론에 현혹되지 말고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또한 이를 깨면 ‘생각할 수도 없는 실패를 부른다’라는 말은 군국 일본의 비극적 종말로 현실화되었다.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전쟁기계들은 어릴 때부터 교육칙어군인칙유를 봉독하며 자랐지만 이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지당한 칙유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청나라 숙친왕 딸이 ‘동양의 마타하리’로
해군 장교 후지이 히토시(藤井齊: 1904~1932)가 우국개언(憂國槪言)에서 군인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천황의 대권을 탈취하고 민중의 생명을 도둑질하는 귀족, 재벌, 정당 정치인, 군벌 등 내부의 적의 망국적 행동을 좌시하지 않고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전후에 일왕 히로히토는 소화천황독백록(昭和天皇獨白錄)에서 자신은 전쟁에 책임이 없다고 누누이 변명했다.

1 만주국 군대인 안국군 대장 복장의 가와시마 요시코(김벽휘). 청나라 황족 출신이다. 2 상해사변 때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일본항공대.

그러나 히로히토는 1932년 1월 8일 관동군의 만주침략을 자위전쟁이라면서 옹호하는 이른바 칙어(勅語)를 내렸다. 관동군이 북만주 치치하얼을 차지하고 남쪽으로는 1932년 1월 3일 발해 연안의 금주(錦州)까지 빼앗자 자위전쟁이란 말장난으로 이를 옹호한 것이었다. 만주 침략을 자위전쟁이라고 강변하는 이유는 1928년 8월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15개국이 체결한 부전조약(不戰條約)에 일본도 가입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외무장관 브리앙, 미국 국무장관 켈로그가 주도했기에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d Pact)’이라고도 불린다.

이 조약의 제1조는 국가의 정책수단으로 전쟁 포기를 선언했고, 제2조는 일체의 분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켈로그는 이 조약 덕분에 192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데, 자위를 위한 전쟁은 제재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만주 침략을 자위라고 강변한 것이었다. 국제사회가 즉각 제재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도 일본이 자위전쟁이라고 우겼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이때 심양이나 하얼빈 정도만을 점령하고 멈췄으면 만주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은 나라들은 일본의 국지적 점령을 용인해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관동군은 금주까지 점령했고 일본 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기뻐 날뛰었다. 미국의 스팀슨 육군장관은 금주를 점령하고 기뻐 날뛰는 일본 신문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미국은 급기야 만주사변을 자위전쟁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대일 공세로 돌아섰다. 1905년 7월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차지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지 25년 만에 두 나라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만주사변을 일으킨 전쟁기계들은 만주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관동군은 드디어 중국 본토와 만주를 가르는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하고 욱일승천기를 꽂았다. 그리고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이용해 위성괴뢰국 만주국을 수립하려 했다. 일본이 만주를 직접 차지하면 부전조약 위반이므로 중국인들 스스로 만주에 독립국가를 세운 것이라고 강변하려는 책계였다.

미국과 영국의 자세가 점차 강경해지자 관동군은 또다시 모략을 꾸몄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동양의 마타하리’라고 불렸던 김벽휘(金璧輝: 1907~1948), 즉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였다. 본명이 애신각라 현우(愛新覺羅顯玗)인 가와시마 요시코는 청나라 숙친왕(<7C9B>親王)의 14번째 공주로 태어났다. 숙친왕의 고문이었던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의 양녀가 되어 가와시마 성을 쓰게 되는데, 청나라가 멸망한 직후인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관동군 참모장 사이토 히사시(<658E>藤恒)의 중매로 몽골족 장군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이혼했다. 그 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영사관의 무관 다나카 유키치(田中隆吉: 1893~1972)의 애인이 되면서 첩보원이 되었다.

일왕, 상해 점령에 “전쟁 막았다” 칭찬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 관동군의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와 이시하라 간지가 가와시마의 애인인 다나카 유키치 중좌에게 만주에 쏠린 세계의 이목을 상해로 돌릴 수 있는 사건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사건이 상해사변이었다. 다나카 유키치 역시 히로시마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전쟁기계였다.

그는 패망 후인 1946년 1월 육군의 속사정을 밝힌 패인을 찌르다(敗因を衝く)를 간행했고 다른 전쟁광들과는 달리 도쿄 전범재판에서 일본 육군의 음모 공작에 대해서 사실대로 진술했다. 이 때문에 일본 극우파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1949년 9월에는 단도로 자살까지 기도했다. 관동군이 상해사변을 조작했다는 사실은 다나카 유키치가 도쿄 전범재판에서 고백하는 바람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유조호 사건을 일으킨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와 다니쇼(谷正少) 등은 세계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상해의 일본인 승려 습격사건을 만들었다. 상해는 만주와 달리 각국 열강들의 조계지가 있는 지역이므로 상해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서구 열강의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한 것이었다.

1932년 1월 10일 이타가키 등은 약 2만 엔의 자금을 상해로 보내 빨리 거사하라고 재촉했다. 다나카는 헌병대위 시게토우(重藤憲史)에게 실행을 맡기고 가와시마에게는 중국인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게 했다. 1932년 1월 18일 밤 일련종(日蓮宗) 승려 두 명이 신도 셋과 함께 ‘남무묘법연화경’을 외우면서 상해의 마옥산로(馬玉山路) 부근을 걷고 있을 때 반일(反日) 중국인들이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다나카와 가와시마가 돈으로 매수해 벌인 자작극이었다.

이 사건으로 상해 북사천로(北四川路) 및 홍강(虹江) 방면에 살고 있던 약 2만7000여 명의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때 다나카와 유키치의 공작으로 발포사건이 발생해 1월 28일 중·일 두 나라 군대가 충돌했다는 것이 다나카의 증언이었다.

와카스키 내각의 뒤를 이은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수상은 즉각 대규모 파병을 결정했다. 항공모함 2척과 구축함 4척을 포함한 대규모 해군 병력과 전 육군대신이었던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이끄는 상해파견군이 상해로 달려갔다. 채정해(蔡廷<9347>) 장군이 이끄는 상해 근방의 중국 19로군이 맞서 싸웠지만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꺾을 수는 없었다. 중국 민간인 사망자만 6000여 명에 달했다.

관동군의 예상대로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강하게 정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본은 상해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한편 1932년 3월 1일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삼는 만주국을 전격적으로 건국했다.

그리고 이틀 후 전투를 중지하고 3월 24일부터 정전협상에 나섰다. 4월 29일에는 홍구(虹口)공원에서 상해 점령 및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 행사를 개최했다. 상해를 점령해 기세가 드높던 이 행사장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폭탄을 던졌다.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상해 일본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河端貞次)가 폭살되고 노무라(野村吉三<90CE>)·우에다(植田謙吉) 두 중장과 무라이(村井倉松) 총영사, 시게미쓰(重光葵) 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1933년 시라카와의 기일에 일왕 히로히토는 시종장 스즈키를 통해 “소녀들의 히나마쓰리(3월 3일의 전통 축제)날에 전쟁을 막아준 것을 기억하며”라는 단책[丹冊: 일본의 전통 하이쿠(俳句: 일본의 전통 시구)]을 하사했다. 시라카와가 남경까지 침략할 수 있었지만 상해만 점령하고 3월 3일 전투를 중지한 것을 ‘전쟁을 막아주었다’고 극찬한 것이다. 일왕 히로히토의 비정상적 의식 상태를 엿볼 수 있다. 이틀 전에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기에 전투를 중지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