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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선배 죽인 사형수, 소설 쓰고…충격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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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곡동 주부 살해범 서진환(42)에 대한 첫 공판이 지난 4일 열렸다. 이날 서진환과 그의 변호인은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고 했다. 서진환은 범행을 후회하고 있을까. “그가 꼭 사형당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피해자 남편의 소망을 원시적 보복 감정으로 일축할 수 있을까.

한 달 전 읽었던 단신 기사가 스쳤다. ‘사형수 J(57)가 자신이 저지른 두 건의 살인을 모티브로 쓴 소설을 출판사로 발송하려 했다. J는 구치소 측이 불허하자 소송을 내 1심에서 승소했으나 2심에선 패소했다’는 내용이었다. 관련 기사들을 검색했지만 소설의 구체적인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았다.

판결문을 찾아봤다. 1974년 여자친구 살해→무기징역 선고→19년 복역 후 가석방→2004년 초등학교 선배 살해→사형 확정. 판결문에서 부분 발췌된 ‘어느 사형수의 독백’엔 피해자가 살던 곳, 피해자·가족의 직업과 출신 학교, 범행 장소까지 적혀 있었다. 더 충격적인 건 피해자들에 대한 섬뜩한 언급들이었다.
“사랑이라는 허울 아래 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변심’이라는 단어는 어떤 이유로서도 지금의 나의 마지막 자존을 짓밟는 것과 같다…우산도 쓰지 않고 그녀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사랑했기 때문에 죽였다? 내 전도를 망쳐서?”

“난 다시 일어서려면 얼마의 종자돈이 필요하다고 했고…(선배는) 맘몬신의 노예가 되어 신의를 배신하고 기망하고 자존을 부끄럽게 하여 짓뭉겼으므로 동네 생맥주집에서 가슴을 안고 쓰러졌다.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결국 스스로의 무덤을 판 거지.”

J는 두 명의 죽음을 각각 한 줄로 정리했다. “1974년 ○월○일 그녀가 나에 의해 이 지구를 떠났다.” “2004년 ○월○일 그가 나에 의해 이 지구를 떠났다.”

J에게 죽임을 당한 선배는 그의 가석방을 위해 구명운동을 해 줬던 이다. 판결문에 제시된 글에선 사형수의 불안함도,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른바 ‘자전 소설’을 구치소 밖으로 내보내 ‘이유 있는 범행’이었음을 세상에 주장하고자 했다. J는 “사건 자체를 잊고 싶어 할 피해자 유족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2심 판결을 받아들였을까. 알아보니 그는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였다.

우리는 대개 사형수라고 하면 선한 눈망울의 죄수를 떠올린다. 과거 있었던 조봉암 사건, 인혁당 사건의 어두운 그림자와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 사형수 입장에 치우친 소설·영화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러나 흉악범이 참회하지 않고 피해자와 사회를 향한 원망을 품은 채 구치소에서 여생을 보낸다면 피해자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국가와 법이 대신 실현시켜주겠다던 정의는 어디서 구할 것인가.

강력 성범죄와 ‘묻지마 흉기난동’이 잇따르는 지금, 한국 사회는 범죄의 변곡점을 넘어선 느낌이다. 이미 2010년 한 해에만 1251건의 살인사건(경찰청 통계)이 일어났다. 하루에 서너 건꼴이다. 그런데도 법원의 대응은 물렁하다. 광주지법 문유석 부장판사는 내부 게시판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20대, 30대 살인범이 징역 13년, 15년을 선고받아도 창창한 30대, 40대에 형기를 마치게 된다. 피해자 유족이 수긍할 수 있을까.”

최근 2~3일치 기사만 검색해 봐도 돈 빌려 달라는 말에 욕설을 했다고 지인을 살해한 사람에게 징역 10년, 한국인 여자친구를 살해한 캐나다인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됐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대가치고는 너무 싸다. 살인범이 다시 거리에 나와 재범을 저지르는 비율(2006~2009년)이 10.6%에 이르는 현실도 법원의 판결 경향과 무관치 않다.

강력범죄만큼은 보수·진보의 진영 논리와 분리해야 한다. 권위주의 시대 인권 탄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범죄자 인권이 과잉 보호돼 온 게 사실이다. 이젠 피해자 인권과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등교하던 여자아이가 시신으로 돌아오고, 주부가 집 안에서 무참하게 살해되는 상황을 계속 방치할 수 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들 한다. 어디까지나 죄는 죄로 미워해야 한다. 그러려면 소외된 이들을 뒷받침하는 노력 못지않게 범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이 병행돼야 한다. 이 사회의 악인들에게 죗값은 반드시 치르게 하겠다는 신호를 보낼 때다. 사형수가 자전 소설을 출간하겠다고 하는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누가 그런 나라에 살고 싶겠는가.

권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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