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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언론, 통수권 간범들을 영웅으로 묘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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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호 26면

하얼빈에 입성하는 일본군. 관동군은 와카쓰키 내각의 확전불가 방침을 비웃듯 하얼빈에 입성했다. [사진가 권태균]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만주군벌 장학량(張學良)은 북경 협화의원(協和醫院)에서 신병 치료 중이었다. 중국 국민정부의 장개석(蔣介石)은 관동군이 곧 도발하리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사변 일주일 전쯤인 9월 12일 장개석은 석가장(石家庄)에서 장학량을 만나 ‘일본이 도발할 경우 응전하지 말고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외교적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장학량이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관동군이 유조호 주변의 철로를 끊는 자작극을 일으키고 북대영을 공격했을 때 즉각 응전하는 대신 휘하 군대에 무저항 철퇴를 명했던 것이다(張學良的東北歲月, 光明日報出版社).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만주국 ④ 언론, 돌아서다

이때 장학량의 동북군이 격렬하게 저항했다면 관동군은 그리 손쉽게 만주를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동군은 1만~2만 명에 불과한 반면 동북군은 수십만 명이었다. 장개석의 무저항 철퇴 권고는 ‘안내양외(安內攘外)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먼저 국내의 홍군(紅軍:공산당군)을 소멸시킨 후 일본을 몰아낸다’는 정책이었다. 중국사의 전개 과정에는 외부의 침략보다 내부의 분열 때문에 무너진 적이 더 많다는 점에서 장개석의 ‘안내양외 정책’이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시대가 달랐다. 원세개의 북양정부가 몰락한 계기도 1915년 일본이 산동반도에 대한 독일의 권익을 차지하고, 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이 차지하겠다는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1919년 5·4운동의 과녁은 바로 일본이었다. 그런데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보다 홍군 섬멸을 더 앞세우면서 중국 민중이 원세개를 버린 것처럼 장개석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다.

관동군, 내각의 ‘사태 불확대 방침’ 묵살
일제와 전투는 홍군보다 국민당군이 실제로 훨씬 많이 치렀음에도 ‘국민당=비애국적 군대, 공산당=애국적 군대’라는 개념이 퍼지면서 국민당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민심의 이반이 생겼고 ‘백만대군’을 보유했던 장개석은 모택동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가게 된 것이다.

1 심양으로 들어가는 일본군. 2 조선(점령군)사령관 하야시 센주로. ‘월경장군’으로 불렸다. 3 10월 쿠데타를 기획했던 조 이사무.

비단 민족적 자각이 아니더라도 이 무렵 일본군의 도발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자작극을 전개한 다음 중국 측의 소행으로 돌려서 공격하는 방식은 이미 하나의 공식으로 소문났다. 그만큼 육군유년학교와 육사 출신들이 주축이었던 관동군의 영·위관급 장교들은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의 문제는 이들이 군부 내에 ‘사쿠라회(櫻會)’ 같은 비밀 사조직을 만들어 여러 차례 쿠데타를 기도하고 불법 침략을 일삼았음에도 처벌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行) 내각이 대공황의 유탄을 맞아 물러나고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이 들어선 것은 만주사변 4개월 전인 1931년 4월이었다. 와카쓰키 총리와 시데하라(幣原) 외상은 19일 아침 신문을 보고서야 만주사변 발발 소식을 알았을 정도였다. 시데하라 외상은 긴급 각료회의를 열어서 ‘사태 불확대 방침과 국지적 해결 방침’을 결정하고 미나미 지로(南次郞:조선총독 역임) 육군대신을 통해 관동군에게 정부 방침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관동군은 와카쓰키 내각의 지시를 비웃으면서 하얼빈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9월 19일 밤 와카쓰키 총리는 원로 사이온지(西園寺公望)의 비서 하라다(原田熊雄)에게 “나의 힘으로는 군부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폐하의 군대가 폐하의 재가 없이 출동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지만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무력감을 토로해야 했다. 미나미 육군대신은 “사태가 여기에 이른 이상 일본인 보호뿐만 아니라 만주와 몽고의 특수권익을 위해서 정부는 큰 결심을 할 때가 왔다”고 만주사변 추인을 압박했다.

정부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 조선(점령)군사령관이 21일 오후 1만여 명에 달하는 혼성 제39여단 병사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보냈다. 동북군이 저항한다면 1만~2만 명의 관동군으로 상대하기 버거우리라는 생각에 부랴부랴 조선주둔군의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조선주둔군의 불법월경은 자작극을 벌이고 이를 구실로 침략한 관동군의 행위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자작극은 누구의 소행인지를 놓고 다툴 여지라도 있었지만 불법월경은 그마저도 없었다. 이는 일본 군부에서 내각을 무시하는 근거로 즐겨 애용했던 일왕의 통수권(統帥權)까지 무시한 ‘통수권 간범(干犯)’에 해당했다.

통수권은 이토 히로부미가 프러시아(독일) 헌법을 모방해 만들었던 일본제국 헌법(메이지헌법)에 기반을 둔 개념이었다. 제국헌법 제11조는 ‘천황은 육해군(陸海軍)을 통수(統帥)한다’였고, 제12조는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編制) 및 상비군의 숫자를 결정한다’였다. 원래는 ‘육해군의 편제는 칙령(勅令)으로 정한다’였지만 이 경우 칙령을 심의하는 추밀원에 군부 통제권이 있게 되므로 이토 히로부미가 육해군의 편제 및 군사 숫자까지도 일왕에게 소속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본군이 내각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은 통수권이었다. 비록 제55조에 “국무(國務) 각(各) 대신(大臣)은 천황을 보필해서 그 책임을 진다”는 조항도 있었지만 군부는 자신들은 일왕에게 직속된 군대지 내각에 소속된 군대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일본 군부가 전개했던 모든 군사침략에는 일왕이 최종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리가 성립한다.

이런 조항에 비추어 봐도 조선(점령)군 사령관 하야시가 마음대로 만주로 들어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통수권 간범’이었다.

그러나 와카쓰키는 하야시의 불법월경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이를 처벌하는 대신 ‘이미 만주로 들어갔다면 어쩔 수 없다’고 추인했고 내각에서는 ‘만주로 들어간 조선군에게 특별 군사비를 지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일왕 히로히토는 불법 월경한 조선(점령)군에게 특별군사비를 지출하자는 안건을 추인했다. 그러자 22일 오전부터 ‘천황이 (불벌월경을) 재가했다’는 전보가 만주로 쏟아졌다. 이 조치로 일왕 히로히토는 만주사변의 최종 책임자가 된 것이다. 하야시는 이후 ‘월경장군(越境將軍)’이란 별명을 얻게 된다.

쿠데타 세력, 요정서 기녀 끼고 구국 외쳐
만주사변이 기존 사건과 달랐던 것은 일본 언론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 있다. 그전까지 만몽 문제에 대한 일본 군부의 방침을 비판하던 아사히(朝日)신문·히비신문(日日新聞)·지지신보(時事新報) 등은 20일 조간부터 손바닥 뒤집듯 과거의 논조를 바꾸면서 관동군 발표 내용을 앵무새처럼 보도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에 대한 일본 언론의 태도는 대국민 선동에 불과해 침략자들은 영웅으로 변모했다. 일본이 본격적인 군국주의로 치닫게 된 주요한 계기가 언론이 비평이란 본연의 기능을 망각하고 군부의 나팔수 노릇을 자처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의 이런 태도에 발맞춰 사회 각 분야가 일제히 만주사변을 지지하고 나섰다. 군부의 망동을 막아야 할 추밀원 부의장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驥一郞:전후 A급 전범으로 종신형, 사후 야스쿠니 신사 합사)는 니노미야(二宮治重) 참모차장에게 “만주에서 일본군이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해도 미국이나 소련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없는데 왜 육군은 좀 더 공격적인 자세로 중국을 공격하지 않는가”라고 점령지 확대를 주장했다. 9월 25일에는 일화실업협회(日華實業協會), 28일에는 일본상공회의소 등이 만주사변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을 비롯해서 일본 전체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처럼 전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른바 만주특수에 눈이 먼 것이다.

와카쓰키 내각을 더욱 위축시킨 것은 10월 군부 쿠데타 소문이었다. 실제로 삼월사건, 즉 3월 쿠데타를 계획했던 사쿠라회의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 등은 초우 이사무(長勇) 소령, 다나카(田中<5F25>) 대위 등 영·위관급 장교들과 불확대 방침을 결정했던 와카쓰키 내각을 무너뜨리려 했다. 1931년 10월 21일 군부가 봉기해 와카쓰키 총리를 비롯한 모든 각료를 살해하고 군부내각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0월사건으로 불렸던 10월 쿠데타 계획도 삼월사건처럼 무위에 그쳤다. 교육총감부(敎育總監部) 본부장 아사키 지사로(荒木貞夫)의 보고를 받은 미나미 육군대신이 도야마(外山) 헌병사령관에게 주모자 구속을 명령했고 10월 17일 14명이 금룡정(金龍亭)에서 구속되면서 불발로 끝났다. 헌병대의 고사카(小坂慶助)가 ‘두 미희를 좌우에 거느리고 놀고 있었던 조 이사무(長勇)를 검거했다’고 회고한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쿠데타 세력들은 매일 밤 도쿄 시내 아카사카(赤坂)·신주쿠(信宿) 등의 고급 요정에서 미희를 끼고 술 마시면서 구국을 외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총리와 정부 각료 다수를 살해하려던 10월 쿠데타 주모자들에 대한 처벌은 며칠 근신이 전부였다. 반면 그들에 의해 살해당할 뻔했던 와카쓰키 내각은 그해 12월 무너지고 말았다. 1931년 12월 13일 뒤이어 취임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는 이듬해 5월 청년장교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5·15사건). 일본 사회는 통제불능의 집단정신병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