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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과에만 없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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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해오던 대로 하는 것, 쉽고 편하다. 관성의 안일함은 사과 꼭지에도 있다. 한국에서 파는 사과, 참 별나다. 꼭지가 없다. 1960년대에만 해도 꼭지 달린 사과는 흔했다. 꼭지가 사라진 건 골판지 박스가 등장한 70년대다. 당시는 사과를 세 개 층으로 쌓고, 그 사이에 종이를 깔았다. 꼭지가 종이를 뚫고 다른 사과에 흠집을 냈다. 그러자 과수원에선 수확 때 꼭지를 완전히 제거했다.

 시대가 바뀌자 포장 방식이 변했다. 한 단짜리 소형 박스가 대세가 되면서 흠집 걱정은 줄었다. 꼭지 따는 노동을 줄이면 전국 사과 농가의 생산비는 연간 190억원이나 줄어든다. 꼭지를 보고 신선도를 판단할 수 있으니 소비자의 사과 고르기도 편해진다. 꼭지는 수분 증발을 억제해 저장성도 높인다. 답은 분명하다. 사과 꼭지를 없애지 않는 게 두루 이익이다. 이 답은 이미 2000년대 초반 제시됐다. 그러나 극히 일부를 빼곤 한국 사과에는 여전히 꼭지가 없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간 이 간단한 변화조차 해내지 못한 것이다. 사과 산업의 리더는 둔감했고, 생산자는 안주했다.

 비단 사과뿐이겠는가. ‘내수가 미래다’ 기획 시리즈가 최근 본지에 연재됐다. 새로 찾아낸 답이 아니다. 답이 나온 건 족히 10년은 됐다. 그런데 다시 내수가 살아야 일자리가 생기고, 미래가 열린다는 걸 강조할 수밖에 없다.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관성이 있다. 하나는 기득권이다. 내수의 근간인 서비스업에는 이미 터잡고 있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자영업자는 600만 명이다. 표로 하면 600만 표다. 자영업자는 서민, 번듯한 서비스업은 반(反)서민이란 프레임까지 얹혀졌다. 변호사·의사·약사마저 경쟁력 얘기만 나오면 생존권을 내건다. 27일 출범한 서비스산업총연합회의 박병원 회장은 묻는다. “내 아들딸의 일자리가 중요한가, 아니면 계속 국민 정서만 탓할 것인가.” 대선 후보에게 묻고, 분명한 답을 들어야 할 물음이다.

 둘째 관성은 규제다. 규제는 탄생과 동시에 강력한 관성이 생긴다. 공무원의 일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규제를 바꾸려면 관가의 일하는 방식부터 바꿔야 하는 이유다. 최근 만난 한 관료의 말이 인상 깊었다. 그는 “대안 찾는 게 내 직업”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식이 퍼지길 바란다. 시리즈에 소개됐듯 여수산업단지에서 규제 하나를 해결하면 일자리 5000개가 늘어난다.

 며칠 전 한 대형마트에 꼭지 사과 기획세트가 나왔다. 꼭지 없는 것보다 10% 싸다. 10여 년 만의 변화라 반갑다. 하지만 씁쓸하다. 끝에 몰려서 나온 변화여서 그렇다. 1인당 연간 사과 소비량은 85년 13㎏에서 2011년 7.6㎏으로 급감했다. 그사이 전체 과일 소비는 36㎏에서 62.4㎏으로 늘었다. 뒷걸음질도 이런 뒷걸음질이 없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사과 꼭지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