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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총액 1조3000억원 나흘 새 허공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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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호 22면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판다’는 주식시장의 속설 그대로다. 대선 구도가 박근혜·문재인·안철수 3강 구도로 압축되자 이른바 정치테마주의 하락세가 완연하다. 정치테마주는 대선 주자의 인맥·정책을 연결고리 삼아 주가가 오르는 주식이다. 본지가 증권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의뢰해 증권가에서 정치테마주로 분류된 141개 종목의 주가 흐름을 분석해 봤다. 그랬더니 안철수 후보가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한 19일 이후 21일까지 84%에 달하는 118개 주가가 내렸다. 증시 관련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는 손실을 본 ‘개미’들의 낙담과 한탄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일부 개인투자자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주가가 여전히 강세인 나머지 20여 개에 기대를 걸고 몰려들고 있다. 하지만 “이 종목들 역시 향후 손실을 볼 위험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대선 판이 짜여진 이후 정치테마주 실태를 긴급 점검했다.

대선 구도 윤곽, 정치테마주 거품 긴급점검

건설업자인 황건우(49·가명)씨는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지난달 초 박근혜 테마주인 하츠에 투자했다. 거래하는 증권사 지점 직원이 ‘하츠의 최대주주가 박 후보와 먼 친척 관계라는 소문이 있다’고 귀띔하며 투자를 권했다. 하츠 주가는 최근까지 급등세를 보였고 주식을 판 그는 500만원가량의 수익을 실현했다.
그는 내친김에 이달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후보에 베팅했다. 우리들병원은 노 전 대통령의 디스크를 치료했던 곳이다. 그런데 우리들제약은 기대와 달리 문 후보가 16일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기 며칠 전부터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황씨는 2000만원 넘는 손해를 봤다. 그는 “정치테마주는 종잡을 수가 없다. 도박과 별 다름이 없는 것 같아 앞으로는 손을 끊겠다”고 말했다.

요행 보고 뛰어든 개미, 손실 확산
황씨 사례처럼 정치테마주 투자는 위험천만이다. 투자자들이 주식을 언제 사고팔아야 할지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 최현재 동양증권 애널리스트는 “원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기업 주가는 실적보다 저평가됐으면 사고, 고평가되면 팔면 된다. 그런데 정치테마주는 대통령 당선 기대감으로 오른 주가라 매수·매도 시점을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순이익 기준으로 우리들제약은 지난해까지 수년째 적자를 기록했다. 앞서 하츠는 올해 상반기 적자로 전환했다. 정상적이라면 이런 실적으로 주가 흐름이 좋을 리 없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정치테마주 중 절반가량이 지난해 적자지속·적자전환·이익감소 등 실적악화를 겪었다.

주가가 하락한 정치테마주에는 안철수 후보가 설립한 안랩도 있다. 안랩은 안 후보의 출마 선언을 전후해 주가가 25% 떨어졌다. 특히 안 후보가 19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안랩 지분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힌 것이 결정적인 주가 하락 요인으로 작용했다. 박근혜 후보의 복지 정책 수혜주로 급부상했던 아가방컴퍼니 주가도 19일 이후 11% 급락했다.이런 현상은 정치테마주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박근혜 등 3강 후보 테마주를 포함해 141개 전체 정치테마주의 기업가치는 16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다음 날인 17일 시가총액 17조3358억원으로 연중 최고치였다. 하지만 이후 내리막길을 걸어 21일 15조9962억원으로 나흘 새 1조3000억원가량 증발했다.
후보별로는 안철수 테마주의 하락세가 가장 크다. 증권가에서는 안 후보가 벤처기업가 출신이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대선 후보 중 가장 많은 66개 종목이 안 후보 테마주로 분류됐다. 이들 종목의 기업가치는 17일 6조4090억원에서 21일 5조5934억원으로 약 8000억원 줄었다. 문재인 테마주(20개)와 박근혜 테마주(28개)의 총 기업가치도 각각 2800억원가량 줄었다.

대표이사·대주주 수백억원 차익도
그렇다면 올해 내내 들썩이던 정치테마주가 왜 꺾이는 걸까. 우선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 선출, 안철수 후보 출마 선언이라는 대형 이벤트가 끝난 때문으로 분석된다. 테마주는 불확실성과 막연한 기대감이 클 때 오르게 마련이다. 최현재 애널리스트는 “대선 국면에서 예상대로 3자 구도가 형성되자 불확실성이 크게 줄고 더 기대할 만한 재료가 없다고 본 투자자들이 보유 주식을 내다 판 것”이라고 풀이했다. 특히 주가를 앞장서 끌어올린 작전세력이 차익 실현에 적극 나선 것으로 보기도 한다.
주목할 점은 주가 하락을 가속화한 장본인이 기업의 대주주나 최고경영자(CEO)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최근 안철수 테마주로 떠올라 주가가 급등하자 대주주가 주식을 전량 매도해 약 400억원의 차익을 낸 미래산업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 주가는 대주주인 정문술 전 대표가 안 후보와 친분이 두텁다는 소문이 돌면서 지난달 중순부터 한 달 동안 4배 이상으로 뛰었다. 500원가량이던 주가가 2000원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정 전 대표가 14일부터 주식을 대량 매도한 영향으로 주가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해 반 토막이 났다.

투자자들은 이미 큰 손실을 본 것도 모자라 앞으로 주가가 더 떨어질까 봐 우려한다. 이 회사에 투자했다가 1000만원가량을 잃었다는 김영호(37·가명)씨는 “대주주가 정치 바람 덕분에 거액의 시세차익을 챙긴 기업의 주식을 누가 사려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앞서 상반기에는 박근혜 테마주인 EG의 대표이사와 문재인 테마주 우리들생명과학의 대주주도 주가가 올랐을 때 주식을 일부 매도해 각각 100억원 안팎의 수익을 냈다. 이들 기업 역시 대주주 주식 매도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상당수 정치테마주가 하락세지만 열기가 완전히 식었다고 보긴 이르다. 인맥 테마주 100여 개가 흐지부지해진 대신 정책 테마주 20여 개의 명맥은 지속된다. 특히 대선 후보들이 일제히 고용과 소통을 강조하면서 취업포털사이트 업체인 사람인에이치알과 디지털 네트워크 서비스업체인 오늘과내일 등의 주가가 크게 올랐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감에 편승해 투자하는 것은 인맥 테마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설령 구체적 정책이 나오더라도 수혜주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핵심 정책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 수혜주가 좋은 예다. 당시 20여 중소 건설업체 주가가 들썩이다 정부 출범 후 대운하 사업이 무산되자 주가가 급락해 많은 투자자가 손실을 입었다. 김병주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기업의 실적이나 기술적 배경을 도외시하고 정책 테마만 믿고 투자하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다. 하은수 금융감독원 테마주특별조사반장은 “정책 테마주에 대해 시세조종 등의 불공정행위가 있는지 모니터링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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