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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현실 외면한 응당법, 어디로 가나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0년 11월 대구에서 네 살배기 A양이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다. A양 부모는 오후 5시경 급히 인근 ㄱ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하지만 응급실 당직의는 “소아전문의가 없어 진료가 어렵다”며 다른 병원에 가볼 것을 권유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근 외과전문병원에서 장중첩증 진단을 받은 A양은 시술을 위해 다시 대학병원을 찾아야만 했다. A양의 부모는 서둘러 대구시내 ㄴ·ㄷ대학병원 응급실에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두 곳 모두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그렇게 대구 시내 5개 병원 응급실을 전전하던 A양은 결국 경북 구미의 ㄹ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미 치료시기를 놓친 A양은 끝내 숨지고 말았다.

요즘 의료계의 화두가 되고 있는 일명 ‘응당법(응급실 전문의 당직법)’ 즉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하 응급의료법)' 개정안을 시행하게 된 배경이다. 장충첩증은 꼬인 장에 바람을 불어넣는 간단한 시술로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대구 지역 병원의 ‘환자 떠넘기기’로 A양은 허망하게 숨지고 말았다. 정부는 이러한 국내 응급의료시스템을 바로잡기 위해 2009년 발의된 응급의료법 개정안의 시행을 적극 추진했다. 그리고 지난 8월 5일자로, 응급의료법 개정안 및 하위법령이 본격 시행됐다.

취지는 좋았다. 국민의 안전과 의료보장권을 위한 제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제도 시행 전부터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다. 의료 현실을 외면한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결과’라는 이유에서다. 의료현장에 혼란만 더해질 것이라며 의료계의 반발은 더욱 거세져만 갔다. 하지만 제도 시행은 강행됐다. 그리고 40여일이 지난 지금, 응급의료법은 여전히 의료계의 뭇매를 맞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를 둘러싼 논란을 짚어봤다.

▲ 지난 13일 대한의사협회 회원들이 응당법, 포괄수가제 등 '의료악법'에 반발하며 결집대회에 참가했다.

모든 진료과목마다 당직전문의 1명 이상? 실현 가능할까

“이 법안을 만들 때 사전 실태조사는 한 것이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법안을 만들어놓고 지키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것은 국가 권력의 횡포다.”

“현재 상황에서는 답이 없다. 계도 기간 이후의 상황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응급의료법은 응급의료체계의 개선이 아닌 ‘개악’이다.”

지난 1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응급의료기관 현황과 발전방향’ 토론회에서 8월 5일부터 시행된 응급의료법에 대해 각계의 의견이 쏟아졌다. 이미 시행된 법안인 만큼, 그에 따른 실제 대안을 모색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자리였다. 하지만 해결책보다는 실현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지적이 이어졌다.

무엇이 이렇게 응급의료법에 대한 불신을 한없이 높인 것일까.

일단 8월 5일부터 시행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법률안에 따르면 응급의료기관에 설치된 진료과목마다 1명 이상의 당직전문의를 두어야 한다. 또 응급 근무의사가 요청하는 경우, 당직전문의나 당직전문의와 동등한 자격을 갖춘 자(전문의)가 응급환자를 직접 진료해야 한다. 이를 위반하면 응급의료기관장에게 2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의료계가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병원 응급실이 진료 과마다 1명 이상의 당직전문의를 두는 것이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라는 문제다. 현실적으로 전문의 1명이 24시간 내내 응급실을 지킬 수 없으므로, 결국 각 과마다 2~3명 이상의 전문의를 필요로 하는 셈이다.

현재 전국의 응급의료기관은 450여 개소. 응급환자 진료구역이 최소 30병상 이상인 권역응급의료센터(21개소), 최소 20병상 이상인 지역응급의료센터(114개소), 최소 10병상 이상인 지역응급기관(312개소)으로 구분된다.

서울대의대 허대석 교수는 “심평원 자료에 의하면 응급의료기관 중 60%는 소아청소년과·산부인과 전문의가 2명 이하”라고 말했다.

허 교수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응급의료기관 가운데 전문의 수가 2명 이하인 진료과목으로는 마취통증과가 가장 높았다. 마취통증과를 개설한 응급의료기관의 64.2%가 이에 해당했다. 그 다음으로는 신경외과가 62.1%, 소아청소년과 60.2%, 산부인과 60.1%, 외과 54.5% 순이었다.

허 교수는 “이런 응급의료기관에 근무하는 해당과 전문의는 낮 시간에는 기본적으로 정규근무를 하고, 매일 혹은 이틀에 한번 야간에 응급실로 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봉급을 더 올려준다 한들 누가 근무하겠느냐는 것.

특히 지역병원의 경우, 전문의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와 마찬가지다. 대한중소병원협회 백성길 회장은 “다수의 전문의가 수도권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지방병원은 온갖 광고를 내고 여러 수단을 동원해도 전문의를 구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낮에만 근무하는 조건으로 겨우 모셔온 전문의가 야간에도 당직근무까지 하겠느냐”고 호소했다.

특히 우리나라 인구의 50% 가까이가 서울·경기·인천권에 분포해있다. 따라서 지역 벽지의 응급의료기관에 응급환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곳에도 ‘진료 과마다 1명 이상의 당직전문의를 두어야 한다’는 규정을 적용한다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처사이며, 지역응급의료기관의 운영 포기를 일으킬 것이라는 게 백성길 회장의 주장이다.

실제 지난 11일 경상북도 경주에 위치한 K병원은 응당법 시행 후 규정된 인력을 충원하기 어렵다며 응급의료기관 지정을 반납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강원도 춘천 G병원, 원주시 S병원도 지역응급의료기관 지정을 반납한 바 있다. 의료계에서는 아직 시작일 뿐, 앞으로 이 같은 응급의료기관 반납사태가 줄지을 것으로 예상한다. 복지부에 따르면, 응당법 시행 후 지역응급의료기관 13곳이 응급의료기관으로서의 지정이 취소됐다. 당직전문의 기준 미충족, 부도위기 등의 이유에서다.

당직전문의는 ‘24시간 대기조’, 대기시간도 근무시간으로 쳐주나?

응급의료법의 또 다른 논란은 온콜(ON-CALL)제도다. 응급실에서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타과 진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응급실 근무의사는 당직전문의에게 비상호출(on-call)을 요청한다. 환자가 전문의의 진료를 원할 때도 마찬가지다. 호출 받은 당직전문의는 바로 응급실에 내원해 응급환자를 ‘직접 진료’해야 한다. 이 때문에 당직전문의는 야간은 물론 공휴일에도 늘 대기상태로 있어야 한다. 불응하는 당직전문의는 면허정지, 해당 응급기관은 과태료 처분을 받는다.

기존에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나 전공의들 선에서 대부분의 응급환자를 담당해왔지만, 응당법 시행으로 당직전문의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 환자를 ‘직접 진료’해야만 하는 셈이다.

이에 대한 전문의들의 불만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언제 콜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병원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갈 수도, 개인적인 용무도 볼 수도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은 전무하다. 일각에서는 온콜 대기시간도 근무시간으로 인정하고 당직비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송형곤 공보이사는 “온콜제도는 의사에게 자유를 뺏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직전문의는 병원에서 호출시 바로 달려와야 하기 때문에, 병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곳에 거주할 자유조차 없다”며 “단지 전문의라는 이유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받는 것이 과연 타당한거냐”고 반문했다.

오히려 온콜제도 때문에 응급환자의 진료가 지체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기존에는 레지던트 등 일반 의사들이 충분히 응급상황에 대처해왔지만, 해당과 전문의를 기다리다 시간이 지체돼 환자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강세상네트워크 조경애 고문은 “온콜제도는 당직자가 병원 내 상주하는 것을 의무화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후퇴한 비상진료체계”라면서 “어느 때 전문의를 호출할 것이며, 언제까지 전문의가 도착해야 한다는 기준이나 지침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응급실 근무의사가 위급하고 중한 응급환자에 대한 진료를 기피하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응당법 계도기간 끝나는 11월, 판도라의 상자 열릴 것

몇몇 응급의료기관이 지정취소·반납된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응당법 시행으로 인한 부작용은 크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대부분 큰 변화 없이 기존의 응급실 운영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복지부가 의료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응당법이 시행된 8월 5일부터 11월 4일까지 3개월 동안을 홍보·계도 기간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응당법 불이행으로 인한 행정처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계도 기간이 끝나는 순간부터 본격적인 혼란이 시작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한병원협회 정영호 정책위원장은 “제도 시행 후 지난 40일 동안 응급의료기관들을 모니터링해 온 결과, 대다수의 기관들이 인력충족 등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면서 “특히 지방과 같은 의료취약지의 경우, 답이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여러 응급의료기관이 ‘만성 적자’를 내면서도 응급실을 운영하는 상황에서, 제도 시행에 따른 인력수급과 재정 문제를 3개월 내에 해결한다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

대한의사협회 송형곤 공보이사는 “응당법 시행으로 지금 당장은 큰 변화가 없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의료체계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응급실은 입원환자를 창출하는 창구나 마찬가지여서 그동안 여러 병원이 적자를 내면서도 응급실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응당법 시행에 따라, 응급실 운영비가 더욱 증가하면 응급실 문을 닫는 병원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응급의료체계에는 더 큰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송형곤 공보이사는 “당직전문의가 야간에는 온콜로 응급환자를 보고, 낮에는 외래·입원 환자를 보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며 “응급환자 때문에 뜬 눈으로 지샌 당직전문의가 과연 낮에 온 환자에게 최적의 진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의사의 과로는 결국 환자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의료계 "응당법의 재개정 불가피“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법이 시행된 마당에, 마냥 손놓고 제도를 탓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법을 죄다 뜯어 고칠 수 없다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서울대의대 허대석 교수는 ‘호스피탈리스트(hospitalist)의 도입’을 해결방안으로 제시했다. 호스피탈리스트란 내과계 질환에 진료 경험이 많은 전문의를 뜻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이러한 호스피탈리스트가 응급실 당직 의료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세부 진료과별 전문의를 둘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응급환자를 볼 수 있는 호스피탈리스트를 길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개원가에 있는 전문의가 부업으로 응급의료기관에 당직을 설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제시됐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 양현덕 부회장은 “자기 전공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개원가로 향한 전문의가 상당히 많다”면서 “그들을 응급실에 배치하면 인력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전공의 교육에도 긍정적이고, 개원의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의료인은 응급의료법 세부 시행규칙의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모든 진료과 전문의에 대한 온콜 당직’을 강제한다는 것은 현재 의료 인력으로는 도저히 시행 불가능하다는 것.

또 모든 의료기관에 응당법을 획일적으로 적용하기보다 차등적용하자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응급의료기관을 제외하고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를 중심으로 제도를 시행하는 것이 그나마 합리적인 현실적 접근이라는 의견이다.

응당법 시행을 강행한 복지부의 입장은 어떨까.

복지부 정은경 응급의료과장은 “법과 시행규칙이 잘못됐다면 당연히 수정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며 응당법 재개정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는 “남은 계도 기간에 실태조사나 의견수렴을 통해 문제가 되는 부분을 보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복지부는 의료계·학계·시민단체·언론계 등으로 구성된 ‘응급의료제도개선협의회’를 결성해 전문적·효율적인 응급의료전달체계 구축 방안을 모색한다. 그에 따른 결론은 올해 하반기에 확정할 예정이다.

의료계의 강력한 반발 속에서도 ‘선시행 후보완’이라는 기조로 제도 시행을 강행한 복지부가 응당법의 후폭풍을 막아낼 해답을 도출해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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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기자 okafm@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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