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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남은 정치자금은 ‘눈먼 돈’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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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허 진
정치부 기자

‘눈먼 돈’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대로 써도 누가 뭐라고 안 할 돈이다. 본지가 지난달 30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18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42명(19대 당선자 등 제외)의 올해 1~5월 정치자금 사용내역을 확인한 결과 ‘눈먼 돈’이 줄줄 드러났다.

 먼저 민주통합당 박은수 전 의원의 사례를 보자.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봉천동 아파트의 전세금 대출이자(434만원)와 관리비(158만원), 도시가스비(68만원)를 정치자금으로 충당했다. 정치자금으로 받은 돈을 주거비로 사용했으나 법에 어긋나는 건 아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지방에 살던 의원이 원활한 정치활동을 위해 국회와 가까운 곳에 주택을 임차할 경우 정치자금을 그 비용으로 써도 된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국회로 들어오기 전 경기도 용인의 수지에 거주했다. 하지만 전직 의원이 된 그는 용인으로 다시 가지 않고 봉천동 아파트에 계속 살고 있다. 그는 또 일본어 회화 학원비로도 27만원을 정치자금에서 지출했다.

 한국노총 출신의 새누리당 강성천 전 의원은 미국 자동차업체 현지조사 명목으로 항공료(1월 26일, 613만원)와 숙박비(2월 23일, 102만원)를 썼다. 이때는 그가 이미 4·11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였다.

 쓰다 남은 정치자금을 임기 직전 다 써버리는 ‘막판 털기’도 반복됐다. 어차피 남은 돈은 모두 소속 정당에 넘겨야 하기 때문에 굳이 아껴 쓸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조사 대상 42명 중 17명이 보좌진에게 퇴직 격려금을 지급했다. 새누리당 이애주 전 의원은 4400만원을, 민주당 최영희 전 의원은 4300만원을 줬다. 최 전 의원의 보좌진들은 이 돈을 모두 복지단체에 기부했다고 한다. 동료 의원들에게 ‘품앗이’ 후원금을 낸 경우도 많았다.

 반면에 탈북자 강제북송을 반대하며 단식투쟁까지 벌였던 자유선진당 박선영 전 의원은 정치자금 대부분을 탈북자 실태조사, 중국의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 활동 등에 썼다. 총 2472만원의 정치자금 중 통신비와 홈페이지 유지비 등 169만원을 뺀 2303만원을 탈북자 지원 하나에 투입했다.

 정치자금법 2조는 정치자금을 ‘사적 경비’로 쓰는 걸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뭐가 사적이고, 뭐가 공적인지 선을 긋기가 모호하다. 무엇이든 넓은 의미에서 정치활동이라고 주장하면 ‘공적 경비’가 되는 셈이다. 영수증만 제대로 첨부하면 중앙선관위도 문제삼기 어렵다고 한다.

 1905년에 정치자금법을 도입한 미국은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정치인이 정치자금 내역을 신고하면 48시간 내에 인터넷에서 공개하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한다면 남은 정치자금을 ‘눈먼 돈’처럼 펑펑 써버리는 의원들이 줄어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