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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B 국채매입 ‘산넘어 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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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8일(현지시간) 독일 남부도시 카를스루에에 있는 헌법재판소 앞에서 독일 시민들이 국채 매입을 주도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악마로 표현한 피켓을 들고 “유럽재정안정화기구(ESM)가 출범할 기회를 주지 말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카를스루에(독일) AFP=연합뉴스]

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 재정 위기국들이 새로운 응급처방을 받았다. 유럽중앙은행(ECB) 국채매입이다. 그렇다고 당장 ECB가 국채를 사들이는 것은 아니다. ECB 총재 마리오 드라기의 6일 발표는 국채를 사주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그날 드라기는 유럽재정안정화기구(ESM) 등 구제금융펀드들의 국채매입 참여와 회원국들의 성실한 재정긴축·경제개혁 등을 내걸었다. 이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ECB 국채매입은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첫 번째 시험이 바로 코앞이다. 12일로 예정된 독일 헌법재판소의 ESM 비준정지 가처분 결정 문제가 그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독일의 ESM 비준을 중단시킬지에 대한 결정이다. 헌재가 일단 중지를 결정하면 ECB의 국채매입은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다. 헌재가 독일의 ESM 출자가 합헌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까지 ESM 설립이 미뤄질 수밖에 없어서다.

 애초 ESM은 7월 말에 설립됐어야 했다. 하지만 독일 헌재가 가처분 결정을 12일로 미루는 바람에 두 달 가까이 늦어졌다. 구제금융펀드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한 소화전이다. 로이터 통신은 “ESM 설립이 더 지연되면 소화전으로서 구실하지 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라고 전했다.

 12일엔 네덜란드 총선까지 실시된다. 중도 좌우파의 지지율 차이가 거의 없다. 극우파 지지율이 과거 총선보다 높아졌다. 그들은 남유럽 돕기에 반대하고 있다. 극우파가 집권하지 않더라도 의석 수를 늘려 영향력을 키우면 ECB 국채매입에 딴죽을 걸 수도 있다.

 좌파가 집권해도 ECB 국채매입에 부정적일 수 있다. 좌파는 긴축 반대를 주장하며 최근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이들이 집권하면 독일-네덜란드-핀란드 등의 긴축동맹이 깨질 수 있다. 이 북유럽 3국은 연합전선을 형성해 남유럽의 긴축을 압박하는 세력이다. 이 동맹이 약화하거나 깨지면 드라기가 내건 ‘재정위기국의 성실한 긴축’이란 조건이 충족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국채매입은 ECB의 새로운 실험이다. 애초 ECB는 물가안정만을 목표로 설립됐다. 이는 독일인이 애지중지한 마르크화를 포기하고 유로화를 채택하면서 내건 조건이었다. 드라기가 “국채매입이 법규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독일인의 눈에 국채매입은 원칙 이탈이다. 그 바람에 유로화 가치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독일인은 평생 모아둔 저축과 연금의 실질 가치 하락을 감수해야 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ECB 최대 주주인 독일 분데스방크가 조금 꼬투리만 잡아도 국채매입에 제동을 걸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블룸버그통신 등은 내다봤다. 국채매입 실시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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