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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스프·함박스테이크·사라다 … 다시 펼쳐진 추억의 메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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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당신만 아세요. 열일곱 살이에요.” 간드러진 여가수의 목소리.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일하면서 켜둔 라디오에서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는 노래다. 메뉴로는 반숙 계란 프라이가 올려진 ‘함박 스테이크’, 크고 넓게 펴진 고기 위에 갈색의 소스가 넓게 뿌려진 ‘비후까스’. 메인 메뉴 하나만 고르면 크림 스프와 ‘사라다’·깍두기·밥이 함께 나온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추가 주문 없이 안 해도 후식이 제공된다. 이름 하여 ‘경양식집’이다.

글=하현정 기자 , 사진=김진원 기자

신사동 가로수길에 위치한 경양식집 ‘모단걸 응접실’은 옛맛 그대로의 함박스테이크와 비후까스로 사람들을 아련한 추억 속에 빠져들게 한다.

80년대 중반까지 고급 외식 공간으로 인기를 끌다가 90년대 패스트푸드점과 패밀리 레스토랑에 자리를 내주면서 하나 둘씩 자취를 감췄던 경양식집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공간은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모단걸 응접실’. 이 곳 유지영 대표는 “영화 ‘건축학 개론’과 드라마 ‘응답하라 1997’등이 흥행에 성공하고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며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식공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픈 하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 6월 문을 연 이곳은 30년대 비밀 아지트를 떠올리게 한다. 청록색과 레드, 블랙의 조화가 멋스러운 복고풍 인테리어로 고급 살롱에 와 있는 듯하다. 음악 역시 1930~50년대 샹송과 재즈를 중심으로 ‘오빠는 풍각쟁이’ ‘왕서방연서’ 같은 만요(1930년대 유행했던 시대를 풍자한 해학적인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모단걸’은 조선후기에 신문물을 받아들인 모던(mordern)한 여성을 지칭하는 말로, 신여성을 뜻한다. 신여성들이 서양 문물을 즐기던 곳이 바로 모단걸 응접실인 것이다. 유대표는 “이야기가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나 수다가 아니라 이곳에서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 때 그 시절’의 이야기다. “20대 후반은 함박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 일 년에 한두 번 가족 나들이 때 맛본 특별한 외식을 기억할 것이고, 30대 후반, 40대 중반의 사람들은 비후까스를 먹으며 포크와 나이프가 어색했던 수줍은 첫 데이트가 생각나겠죠. 그때 그 음식을 먹으면서 옛 추억을 회상하는, 그런 시간을 즐기러 오는 곳이에요.” 일주일에 한두 번 이 곳에 와서 식사를 한다는 김세희(36)씨는 “처음 왔을 땐 후추가 뿌려진 크림 스프가 무척 재미 있어서 친구와 한참을 웃었다”며 “함박 스테이크와 함께 사라다, 깍두기를 먹으며 마치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듯 옛날 생각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다.

촌스러운 옛맛 즐기는 사이 입가엔 미소 떠올라

분위기만 예스럽다고 해서 경양식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옛 맛을 얼마나 잘 재현해 내느냐가 관건이다.

일반 레스토랑에선 크림과 버섯, 올리브 오일 등을 넣은 다양한 스프를 맛볼 수 있지만 경양식집에서는 선택의 여지 없이 크림 스프가 나온다. 밀가루를 볶아 물을 첨가한 은은한 옥수수 빛깔의 옛날 스타일 스프다. 후추를 솔솔 뿌려 후후 불면서 커다란 스푼으로 떠 먹는 맛이 일품이다.

양배추와 오이·당근·양파 등을 채 썬 다음 마요네즈와 케첩을 섞은 연주황 드레싱에 버무려 내놓는 ‘사라다’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모단걸 응접실에서는 게살과 오이·양파·당근을 채 썰어 마요네즈 케첩 드레싱을 섞어 모닝빵 사이에 넣은 ‘사라다빵’이 메인 디시와 함께 나온다. 박효성(46)씨는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시던 그 맛”이라며 “가끔 옛날 생각날 때 들러서 먹게 된다”고 말했다.

경양식은 서양 음식이 일본을 거처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일본식으로 재해석된 메뉴가 굳어진 것이다. 지난 4월에 오픈한 ‘후후양식당’ 박영후 대표는 “수많은 맛집이 모여 있는 가로수길에 일본 스타일의 함박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없다는 데 착안해 문을 열었다”며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는 레시피 개발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이 곳의 데미그라스 소스는 소뼈를 고아서 만든 육수를 베이스로, 토마토 페이스트와 밀가루 버터 등을 넣어 오랫동안 끓여 만든다. 쇠고기 설도 부위만을 이용한 함박 스테이크는 살짝 구워 부드러운 식감이 특징. 여기에 특제소스를 뿌리면 이 집만의 대표 메뉴가 완성된다. 계란의 풍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오므라이스도 인기다.

‘촌스러운 옛맛’을 고수한다는 원칙은 고급 레스토랑과 비스트로에 익숙한 20대 초반의 젊은층에겐 "말도 안 되는 메뉴로 장사하는 집”이라는 불평을 듣게 만들기도 한다. 고급 메뉴를 기대했던 이들은 “어머, 웬 옥수수 스프야” “마요네즈랑 케찹을 섞은 드레싱 인가봐” 하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고급스러운 맛을 내지 못해서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모단걸 응접실의 유대표는 가로수길의 유명 한식 레스토랑 ‘달식탁’ 대표이기도 하다. 샌드위치 전문 브랜드 ‘제이스 맘 샌드위치’ 역시 그가 운영하는 곳이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맛을 즐길 수 있는 곳은 많잖아요. 모단걸 응접실은 음식을 먹으며 어린 시절, 연애시절을 떠올리면서 기분 좋은 미소 한번 지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예요.”

저렴한 가격에 후식도 주는 후한 인심

7000원부터 1만원대 사이의 가격에 메인 디시와 사이드 디시, 후식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후한 인심 역시 경양식만이 갖는 장점이다. 경기 불황으로 저렴한 먹거리를 찾는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유다.

반포에 위치한 스테이크 전문점 ‘제이스 다이너’는 옛날 함박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는 숨은 맛집이다. 메뉴 판에 있는 클래식 햄버그 스테이크가 바로 그것. 원래 가격도 1만원으로 저렴한 편이지만 2000원만 추가하면 점보 사이즈로 주문이 가능해 한창 식성이 좋은 성장기 아이들이나 스테이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인기다.

방배동과 대치동, 논현동 등 3곳에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고슴도치’에서는 옛날 스타일 돈까스를 맛볼 수 있다. A4용지만한 크기의 커다랗고 두툼한 왕돈까스에 스프, 양배추 사라다, 단무지가 함께 나온다.

오픈 한 지 20년이 넘은 잠실의 유명 맛집 ‘돈까스의 집’은 최근 경양식집이 이슈가 된 덕분에 다시 한번 주목 받고 있다. 커다랗고 바삭한 돈까스와 부드러우면서도 쫀득한 함박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주문 시에는 빵과 밥을 선택할 수 있으며 밥은 리필도 가능하다.

우리 동네 경양식집 정보

모단걸 응접실
강남구 신사동 539-1번지 지하 1층 02-3448-0815

후후양식당
강남구 신사동 544-26번지 02-511-9220

고슴도치
방배카페골목점: 서초구 방배동 751-5번지 2층 02-535-1066, 선릉역점: 강남구 대치동 897-8 대호빌딩 2층 02-556-5564, 강남구청역점 강남구 논현동 242-17번지 02-542-3989

제이스 다이너
서초구 반포동 809번지 상가 1블럭 4호 02-533-1163

돈까스의 집
송파구 삼전동 17번지 02-413-5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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