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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어른 여성은 강간당해도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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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남성이 여성을 강제로 끌어안고 입맞춤을 한다. 여성은 남성을 밀쳐내고 뺨을 때린다. 얼마 후 여성은 그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TV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연애 방정식이다. 터프한 로맨스는 짝사랑하는 여성을 납치해 함께 밤을 보낸 뒤 결혼에 골인했다는 무용담의 연장선에 있다. 강제 키스나 포옹, 납치가 남성적 매력, ‘짐승남’의 판타지를 배가시키는 기능을 하는 걸까. 얼굴이 잘생기면, 마음만 순수하면 용서가 되는 걸까. 드라마와 현실 사이를 연결하는 집단무의식은 남성들의 왜곡된 성 관념을 키우는 자양강장제다.

 한국 사회 곳곳에 크고 작은 인식의 함정들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을 가볍게 여긴다. 지금까지 사회에 충격을 던졌던 사건은 모두 아동 대상 성폭행이었다. 2008년 안산 조두순, 2010년 서울 김수철, 지난주 나주 고종석…. 이들 사건을 계기로 아동 성폭행 등에 대한 법정형 상향, 화학적 거세 등 대책이 잇따랐다.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치를 떨며 흥분한다. 어린이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건 분명 분노할 일이다.

 반면 성인 여성이 성폭행이나 추행을 당했을 때는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치마 길이가 짧잖아.” “여자가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다니니까….” “스킨십은 돼도 잠자리까지 허락한 건 아니라고?” 법원·검찰에선 데이트를 하던 커플 사이에 일어난 강간을 ‘갈간(喝姦)’으로 부르기도 한다. 폭력(강간)과 합의(화간) 사이에 있는 공갈 정도로 경미하게 보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아우라 속에 강간 신고를 하면 가해자 가족이 여성을 찾아가 합의를 종용한다.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우리 아들 신세 망치고 싶으냐”고. 지난달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으로 유죄가 확정된 피고인의 어머니에게 징역 1년형이 선고됐다. “피해자의 인격장애적 성향 때문에 사건이 부풀려졌다”는 허위 내용이 담긴 사실 확인서를 만들어 같은 학교 학생 21명의 서명날인을 받은 혐의(명예훼손)였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회복할 수 없는 2차 피해를 줬다”고 판단했다. 학생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 친구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서명한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청년의 정의감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이 같은 행태들은 성인과 아동이 동일한 폭력의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아동·장애인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만 친고죄(피해자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다는 규정)와 공소시효를 없앤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동 포르노에 대한 처벌만 강화할 것이 아니라 폭력성 포르노도 뿌리 뽑아야 한다. 성폭력은 별것 아니라는 도그마가 아이들까지 삼키고 있다. 아동 대상 성범죄자 중 48%에 대해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배경이다.

 한 발 더 나아가면 몸에 대한 기본 관념부터 문제다. 지난 7월이었다. 한 지방법원이 여성 직원의 쇄골에 가까운 가슴 부위를 손가락으로 찌르는 등 강제 추행을 한 혐의로 기소된 30대 남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공개된 장소에서 성적으로 민감한 곳이 아닌 신체 부위를 매우 짧은 시간 접촉한 것은 강제 추행으로 볼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미국에선 남의 몸을 털끝 하나 건드려선 안 된다는 점을 어려서부터 교육시킨다. 만원 버스에, 만원 전철에 짐짝처럼 실려 출퇴근하기 때문일까. 가정에서, 학교에서 체벌 받은 경험 때문일까. 한국은 몸에 대한 존중감이 제로에 가까운 사회다. 포털과 언론사 사이트엔 여성의 벗은 몸 사진이 넘치고, TV에선 걸그룹들이 골반을 흔든다.

 1991년 김부남 사건으로 아동 성폭행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아홉 살 때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를 21년 만에 찾아가 살해한 김씨는 최후진술에서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고 했다. 또다시 21년이 흐른 지금도 여성들의 울먹임은 계속되고 있다. 사회적 반성이 필요하다. 성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희생자는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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